소설리스트

43화 (43/43)

<특별 외전>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세비야의 까스틸로 성, 이맘때는 사계절 중 이곳이 가장 아늑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시기이다.

정오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일광욕실은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물론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라울의 모습도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라울은 무슨 책인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하고 표지를 보니 요트 회사에서 라울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안내책자다.

매끈하고 날렵한 요트들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걸 보고 있는 라울의 눈은 유독 진한 보랏빛을 띠고 있다.

보나마나 라울은 진지하게 요트를 바꿔 볼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지난주부터 내내 요트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디아나, 지중해에 띄워놓을 요트라면 이런 게 어떨까?”

안내책자를 보여주며 내게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라울, 서울에서 연락이 왔는데 규빈 오빠 처제가 결혼한다고 하던데요?”

“임규빈의 처제? 아 그 천둥벌거숭이에 천하에 말괄량이 아가씨 말이군.”

라울의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어떻게 사돈처녀를 천둥벌거숭이에 말괄량이라고 표현하는 걸까.

“라울,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러다 사람 있는 데서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사실이 그런데 뭐 어때서? 그나저나 완전 망아지 같은 아가씨였는데. 못 본 지 몇 년은 된 거 같은데, 내가 봤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지. 막 대학을 들어가려고 할 때였던가? 하여간 똘똘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대단했지.”

“하지만 새언니가 엄청 예뻐하는 동생이거든요? 규빈 오빠도 처제 이야기는 가끔 했었는데.”

“허, 그런데 망아지 같은 사돈처녀가 결혼한다고? 그러면 서울에 가야겠네.”

“그럴 수 있겠어요? 다음 달 초라고 하던데.”

라울이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돈처녀의 결혼 때문에 서울에 가겠다는 건, 대단한 관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더 일찍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야 돼. 내가 꼭 가겠다고 했거든. 사실 모델학과에 간다고 한 걸 아이스크림 집이나 하면서 남자나 잘 고르라고 말한 건 나였거든. 아이스크림 집 한다더니 진짜 남자를 잘 골랐나? 꼭 가서 봐야겠어. 진짜 궁금하군. 그런 망아지 같은 아가씨하고 누가 결혼하는지 말이야.”

라울의 저 말투를 누가 고칠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씩 기가 막힐 때가 많다. 나는 있는 대로 라울을 째려보았다.

내 눈길을 느꼈는지 라울이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옆에 있는 올리브 하나를 입에 넣고 씹는다.

라울이 올리브를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는 습관이기도 하다. 아마 평생 올리브가 라울을 따라다닐 거다. 아니면 반대라고 할까?

어찌 되었든 라울의 옆에는 늘 잘 염장된 올리브와 크래커, 치즈와 포도 등이 있었다. 질 좋은 포도나 치즈, 올리브는 이 세비야의 특산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라울은 다시 요트 안내책자를 보다가 묻는다.

“참, 이 요트 어때?”

“좋아 보이는데요?”

“그렇지? 그럼 이걸로 바꿀까?”

“안돼요, 라울. 요트 구입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돈을 많이 쓰면 사람들이 뭐라 그럴 거예요.”

“무슨 소리야, 우리 같은 사람이 적절하게 요트를 사주지 않는다면 이런 요트 회사는 다 문 닫을 걸? 요트가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라울, 우리가 사지 않아도 돈 많은 사람은 많고, 요트 살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건 어때요?”

내가 라울에게 내민 것은 경마 바자회의 초대장이었다.

“경마 바자회?”

“네, 말에 돈을 걸고 그 말이 이겨서 나오는 돈을 기부하는 거예요. 난 여기 가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라울이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여기 가본 적이 없었군.”

“없어요. 결혼하고 서울에서 아이들 낳고 키우다 보니 이런 데는 갈 틈이 없었잖아요. 정말 가보고 싶어요. 분위기도 알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화려하게 입고 와서 경마도 구경하고 바자회도 할 텐데 어떤 곳인지 정말 궁금해요. 파티 코디네이터를 꿈꿀 때부터 여기 가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내 말에 라울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뭔가 기분 좋거나 호기심이 발동할 때 나타나는 눈빛이었다.

“그래? 못 갈 것도 없지. 그럼 애들까지 전부 데리고 가자. 아이들도 좋아할 테니까 말이야.”

“어머, 정말요?”

그런 얘기를 할 때 이네스와 루벤이 들어왔다. 이네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와서 말했다.

“히잉! 루벤이 나는 게임을 안 시켜줘. 나도 하고 싶은데.”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루벤, 그 게임기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하지 않았니? 오늘은 하는 날이 아닌데 도대체 왜 꺼낸 거야?”

“이건 내가 꺼낸 게 아니야. 밖에 나와 있어서 한 번 한 거라고.”

“그렇다고 동생을 울리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엄마가 그랬잖아. 너무 어릴 때부터 게임을 하면 안 된다고. 나는 이네스를 위해서 주지 않은 거야.”

기가 막혔다. 2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8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으면서 이네스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게임기를 줄 수 없다고 그런 말이 말이다. 그러자 옆에서 라울이 말했다.

“그건 루벤 말이 맞아. 너무 어릴 때부터 하면 안 되지. 그런데 루벤, 너도 너무 어리다. 게임을 하기엔. 이리 내놔.”

루벤이 볼이 부어서 게임기를 가져왔다. 라울은 슬쩍 게임기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이게 지금 니가 했던 게임이야?”

“네.”

“그래? 어디.”

뿅뿅 소리를 내가며 게임 버튼을 누르더니 라울이 한마디 한다.

“오, 생각보다 재밌군.”

“라울, 제발 애들 앞에서 그러지 말아요. 지금 루벤에게 게임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물론이지. 하지만 나는 루벤처럼 어리지 않잖아.”

참 이렇게 기막힌 조합을 내가 혼자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건지. 어찌 됐든 나는 울고 있는 이네스를 안아주며 말했다.

“이네스, 울지 마. 아빠가 우리 모두 데리고 경마 바자회에 간다는데 울어서는 안 되지? 우리 이네스는 예쁜 드레스 입고 엄마하고 경마 바자회에 가고 싶지 않아?”

“응? 정말?”

커다란 눈동자를 끔뻑끔뻑 하며 바라보는 이네스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을 맞추게 된다.

“그럼! 우리 예쁜 이네스. 예쁜 드레스 입고 엄마하고 경마 바자회에 가자!”

“정말? 나도 가?”

옆에서 루벤이 말하자 라울이 말했다.

“당연하지, 넌 아빠처럼 근사한 슈트를 빼입고 가야 되겠지?”

“와아, 좋아요!”

아이들은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까스틸로 성의 큰 창으로 이렇게 햇살이 들 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퍼지면 나는 가슴이 설렌다. 어쩌면 이런 햇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아이들의 웃음소린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세베로는 어떡하지? 세베로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루벤이 갑자기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세베로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세베로는 안 되겠다. 치질 수술 때문에 며칠은 꼼짝도 못할 걸요.”

세베로는 며칠 전 치질 수술을 했다. 이틀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라가 방 안으로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곤 했다. 라울과 아이들이 세베로를 보고 자꾸 놀렸기 때문이다.

“세베로가 치질이라니. 맙소사. 나라도 문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아파도 하필이면 치질이 뭐야.”

라울이 그렇게 말하자 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원래도 안 좋았겠지만, 과로 때문에 그렇게 된 걸 저렇게 말하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라울. 세베로가 동쪽 끝에 있는 응접실을 고치느라고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거잖아요.”

“내가 세베로한테 미리 경고했었어. 설계도를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앉아서 보다 보면 스트레스로 치질이 도질 거라고. 결국 내 말대로 수술까지 하게 됐잖아.”

“그래도 자꾸 세베로 앞에서 치질, 치질 하지 말아요. 세베로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줄 알아요?”

그래도 라울은 얼굴에 웃음을 잔뜩 띠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치질이 뭐 어때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건데.”

“하지만 라울. 만약 당신이 치질 수술을 했는데 누가 자꾸 그렇게 놀리듯이 말하면 당신도 싫어할걸요?”

“나는 치질 같은 건 절대로 걸리지 않을 사람이야. 날 몰라? 얼마나 몸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지.”

그건 맞는 말이다. 라울의 저 외모가 그저 타고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운동을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늦은 시간이어도 빼먹는 일이 없다. 또 식단도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하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올리브와 크래커만 빼놓고 말이다.

“알아요. 어찌 됐든 다음 주에는 경마 바자회에 갈 거고, 그다음 달에는 서울로 가야겠네요?”

“물론이야. 그나저나 경마 바자회에서도 디아나가 사람들 눈길을 끌겠군. 라울의 아름다운 부인 디아나 까스틸로 임.”

라울이 턱을 치켜들며 아주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웃을 때면 그의 오만한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스러울 정도로 빛이 난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라울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벤과 이네스가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

“우리 서울에 간다고?”

“나도!”

이네스가 저도 가겠다고 두 주먹을 똑 쥐고 고집스럽게 나를 본다. 나는 그런 이네스가 귀여워서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야지. 우리는 가족인데. 사돈댁 결혼식이 있어서. 겸사겸사 가는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루벤이 벌떡 일어서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창희도 보겠네?”

“그럼.”

루벤은 창희와 만나기만 하면 한 번씩 싸우지만 그래도 제 또래 중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보니 창희를 좋아한다.

규빈 오빠의 아들 창희는 루벤을 따르면서도 한 번씩은 형아에게 덤벼드니까 싸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라울도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가족 모두 쇼핑을 가야 되겠군. 경마 바자회와 다음 달 결혼식에서 입을 옷을 쇼핑하자.”

아이들은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두 다 취향도 제각각인데다 선택하는 데 시간이 어찌나 오래 걸리는지……. 온가족이 함께 쇼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이번에 서울에 가면 얼마나 있을 건가요? 서울에서는 게임 많이 해도 되지요?”

“아빠 나는 옐로 드레스, 핑크 드레스 두개 다 사고 싶어요.”

아이들이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 그래 그러자 이네스. 원한다면 다른 색도 사도 된다.”

못말리는 라울. 저렇게 이네스가 말하는 건 다 들어주다가 아이가 정말 버릇이 나빠질까 걱정이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흥분한 아이들은 잠들 생각을 하지 않고 라울은 일이 있다면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두 아이를 단 시 달래가며 잠자리에 집어넣고는 한참 시간이 걸려서 아이들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여간 그렇지 않아도 들떠 있는 아이들한테 기름을 두르고 불을 지른 격이지 쇼핑이라니!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내 침실로 들어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누웠다. 너무나 고단해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 라울은 일이 많은가 보다. 이렇게 늦게까지 일 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나는 라울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음음. 잠결에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어느 틈에 옷을 다 벗겨지고 그의 손가락이 가슴을 만지며 귓가에 대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자는 거야? 디아나?”

“...”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그냥 잔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알아?”

그가 쪽쪽 소리를 내며 내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키스가 짙어지면서 그의 살결이 내 몸에 닿는 게 느껴지는데 눈은 잘 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나는 눈이 번쩍 떠질 수밖에 없었다. 두 가슴을 양손으로 쥐고 그가 얼마나 세차게 빨았는지 눈이 번쩍 뜨였다.

“아우! 라울. 흐응. 응.”

나는 라울을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계속 신음을 냈다. 그의 혀가 젖꼭지를 꾹꾹 누르고 핥고 빠는 통에 아랫배까지 움찔움찔하다.

“왜? 디아나? 말해봐.”

말하라고 하고서는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비비며 젖어들기 시작한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어이 없게도 나는 끙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람을 이렇게 음탕하게 만들어 놓는다.

“라울. 늦었는데, 으응... 몇시 인데요?”

“얼마 되지 않았어 1시 밖에 안 됐다고 . 오, 디아나. 그냥 잔다면 나는 밤 새 미칠지도 몰라.”

사람 고문하는 것도 방법이 가지가지라더니 라울이 여전히 가슴을 할짝거리며 내 신경을 쥐어 짜고 있었다. 더 이상은 자라고 해도 잘 수 없다. 짜릿한 감각이 졸음보다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나도 모르게 달뜬 숨을 밖으로 토해냈다.

“아응. 그냥 자면 안돼요?”

이런 중에서 한 번 더 튕기게 되는 걸 보면 나는 아주 여우가 된 거 같다. 라울은 애가 타는 목소리로 내 입술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하며 말했다.

“말도 안 돼!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자자고?”

라울이 내 손을 가져다 그의 페니스를 쥐어주었다 .

맙소사! 못말리는 라울이다. 또 이렇게 발기하다니! 라울의 발기 왕성함은 언제쯤 잦아들까? 이 상태로 절대로 그냥 자지 못할 거다. 라울이 입술을 내렸다.

“디아나, 정말 우리 아기들을 이 배로 난 거 맞아? 이 예쁜 배로 루벤과 이네스를 낳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니까.”

라울은 가끔씩 저런 소리를 한다. 하긴, 열심히 올리브 오일을 바른데다가 아이를 난 후에 워낙 관리를 열심히 해서 내가 봐도 출산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라울이 배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난 디아나가 너무 좋아.”

그의 입술이 더 아래로 향하고 그렇지 않아도 온 신경이 쏠려서 예민해진 작은 돌기를 빨아들이자 나는 허리를 뒤틀며 라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라울! 자..잠깐만!”

그러나 그 거짓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집요한 혀가 질구 안으로 쑥 들어왔다. 온 신경이 그의 입술과 혀에 농락당하며 숨이 턱에 차 오른다. 나는 미칠 것 같은 쾌락의 발발 떨었다 .

“하아.. 하! 라울. 좀 제발 적당히 하면 안 돼요?”

더 닿고 싶은 깊은 쾌락에 떨면서도 나는 라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뒤죽박죽 생각과 감각이 뒤엉키며 난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라울은 그런 나를 보며 어림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적당히가 어디 있어? 뭐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되는 거 몰라 ? 천국이 눈앞에 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면 내 두 다리를 자기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고 집요하게 아까보다 좀 더 세게 그렇게 아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늘 반복되는 자극인데도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자극은 말이다.

점점더 야해지는 라울과의 잠자리. 라울은 애 음부를 입에 문 채로 몸을 돌리더니 라울의 하체를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 내 입술에 그의 잔뜩 발기한 페니스가 닿는다. 살짝 입을 벌리기가 무섭게 파고드는 그의 성기를 나는 부드럽게 빨았다.

“헉! 디아나!”

그렇게 행복할까? 라울의 입에서 터지는 신음에서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가 그대로 느껴진다. 단순하면서도 열정적인 라울!

라울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몸을 휙 잡아돌렸다. 침대 끝으로 날 끌어내리더니 두 다리를 라울의 허리에 감고는 그대로 성기를 삽입했다.

“하악! 라울!”

평생 적응할 수 없을 거다. 라울의 이 우람한 몸은 말이다. 깊게 파고든 그의 페니스가 그대로 자궁 끝을 뚫기라도 할 듯이 찔러왔다. 진땀이 오싹 나면서 그 뒤로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탁탁탁.. 탁탁탁”

“흣흣. 라울!”

세차가 몰아치는 그의 행동에 살이 부딪치는 소리며 신음이며 내가 라울을 부르는 소리까지 모든 게 하나로 회오리치며 그렇게 아득해지고 있었다.

라울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쥔채 깊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허리를 둥글게 돌리며 마치 내 안을 다 도려내기라도 할 듯이 크게 돌렸다.

“아아악!”

어디가 어떻게 자극되는 지도 모르게 나는 모든 세포가 수축하는 짜릿함 감각아래 떨며 비명을 질렀다. 바로 라울의 입술이 내 입을 덮으며 내 비명은 그의 입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아. 디아나, 점점 더 잘하는 거 알아? 사랑해!”

아! 이런 죽일놈의 사랑 같으니라고! 진짜 나는 매일밤 죽는다. 아주 꼴깍 말이다.

나는 웃으며 라울을 두 팔로 감쌌다. 라울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한 번 더?”

나는 죽은 척 하고는 라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이런 내 행동에 라울도 웃으며 그저 내 등을 감싼다. 역시 라울도 이제 날 많이 생각하는 거 맞아. 봐주기도 하는 구나!

라울이 부드럽게 내 귓불을 물면서 말했다,

“그렇게 피곤해? 그럼 내일은 세 번 하자!”

미친 라울. 아무래도 정력 감퇴를 위해서 라울의 밥에 도토리라도 섞어야할 거 같다. 나는 여전히 죽은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 쇼핑도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은 온종일 세비야 시내에서 쇼핑하다 지치고 말았다. 라울은 라울대로, 루벤은 루벤대로, 하다못해 꼬맹이 이네스까지 자기 취향대로 주문하는 통에 시간은 한도 없이 길어졌으니까.

결국, 온종일 쇼핑을 해서 각각 두 벌씩 옷을 샀다. 아니, 각자 맞췄다고 하는 게 옳다. 샘플을 보고 색상을 주문하고 사이즈도 다 조금씩 수선했다. 그렇게 주문한 옷들이 모두 도착한 건 경마 바자회 이틀 전이었다.

내가 경마 바자회에 입고 갈 옷은 하얀색 바탕에 짙은 감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원피스였다. 나와 이네스가 같은 걸로 맞추고 라울과 루벤은 하늘색 슈트를 맞췄다.

그리고 결혼식에 입고 갈 것은 다홍색과 살구색의 중간쯤 되는 핑크색 원피스였다. 라울이 적극 주장해서 그걸로 정하게 됐는데 화사한 빛깔이 너무 고왔다.

“라울, 그런데 이 원피스가 예쁘긴 하지만 신부 앞에서 너무 화사한 색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신부는 화이트로 입으니까 이런 색은 절대로 민폐가 되지 않아.”

사실 라울은 나를 데리고 모임에 가는 걸 좋아한다. 밝고 화사하게 치장하고 함께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우쭐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냥 모르는 척 라울의 기분을 맞춰줄 때가 많았다.

조금 화려한 컬러이긴 하지만 이네스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깜찍하다. 이네스를 위해서라도 좀 튀기는 하지만 이 원피스를 입고 사돈처녀 결혼식에 가야겠다.

그런데 라울이 꼼꼼히 보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음, 그런데 디아나. 옷이 예쁘긴 한데 가지고 있는 보석과 썩 어울릴 것 같진 않군. 결혼식에 입고갈 옷인데 보석이 어울리면 더 좋을 거 같아.”

“그냥 진주 목걸이 하면 돼요.”

물론 라울의 말대로 썩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난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틀 후에 우리 가족은 모두 경마 바자회에 갔다. 하늘은 더할 수 없이 파랗고 초가을 햇살도 좋았고, 말들의 푸르릉거리는 소리나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까지 어느 것 하나 기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랑하는 라울과 루벤, 이네스와 함께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는 게 한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 기분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인 아니카 테일러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 여배우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도 없고, 그녀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빠질 일은 분명히 없다.

문제는 라울이었다. 라울은 이 세비야에선 워낙 거물이기 때문에, 까스틸로 성의 성주인 라울이 움직일 때마다 기사가 되었다. 누구에게 눈길을 주고 누구와 말을 나누는 것까지도 가십거리가 되니 말이다.

그런 라울이 도대체 정신이 나간 건지 아니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라울!”

가슴이 철렁했다. 라울이 다른 여자에게 저렇게 눈길을 주는 걸 처음 본다. 날 만난 이후로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저렇게 쳐다보는 라울은 낯설고 무섭다.

처음에는 못 본 척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말이다. 라울이 눈길만 줬다는 걸로 질투하는 건 더 자존심 상하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기 위해 루벤과 이네스를 데리고 갔다.

“난 바닐라 아이스크림!”

“난 초코!”

아이마다 원하는 게 있어서 앞에 있는 직원에게 이야기해서 소프트아이스크림과 컵에 담긴 초코아이스크림을 주었을 때였다. 수군수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맙소사! 내가 잠시 옆자리를 비운 사이에 라울이 기어이 그 아니카 곁으로 다가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라울의 눈은 그녀에게 박혀서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있다.

라울!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이 사람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거야?

멀리서 라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아니카의 가슴 언저리에 시선이 닿는다.

아니카의 큰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D컵은 족히 될 거 같은 아니카의 가슴.

육감적인 젖가슴의 모양이 반은 드러나 보이는 가슴을 강조라도 하듯이 깊게 팬 드레스 위로 젖통이 넘쳐나고 있었다.

기가 막힌다. 저런 큰 가슴에 눈이 가는 라울이었어?

매일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사랑스럽다 예쁘다 찬탄해마지 않더니 지금 저 젖소같은 가슴이 좋다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기가 막힌 데, 라울이 아니카의 귀에 아주 가까이 대고 얘기하는 게 보인다. 그 순간 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에서 김이 난다는 말은 딱 이런 말이었다.

아무리 아니카가 아름답다고 해도 저건 아니지.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엄마, 저 아줌마 정말 예쁘지! 나 TV에서 봤는데.”

루벤이 말하자 옆에서 이네스가 루벤의 발을 꾹 밟는다.

“아야, 왜 밟아?”

“루벤. 눈치가 너무 없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루벤은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거야.”

“무슨 소리야?”

루벤은 동생의 말에 발끈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이네스는 그런 오빠를 째려보며 말했다.

“아빠가 저 여자만 보고 있어서 엄마가 기분 안 좋은 거 몰라?”

세상에. 이네스의 말을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애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라니! 아이들이 싸우려고 하는 걸 겨우 떼어놓고 말했다.

“저쪽에 가서 말을 보지 않을래?”

“정말? 망아지를 볼 수 있어요? 만져볼 수도 있어요?”

“그래, 가보자.”

하고 그 자리를 슬쩍 비켜 가려는데 옆에서 한 나이 든 귀족이 하는 말이 들렸다.

“역시 라울은 금발에 약해.”

“그럼. 엠마도 금발이었잖아?”

“그럼. 라울이 금발을 좋아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수군수군하는 말이 들린다. 그러자 말할 수 없이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엠마도 금발이었다. 그래서 금발의 아니카가 눈에 들어왔던 걸까?

여자인 내 눈으로 봐도 세계적인 배우인 아니카는 아름답게 보인다. 그 옆에 서 있는 라울. 내 남편인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울컥 울음이 올라온다.

말도 안 돼!

그렇게 혼자 꾹꾹 감정을 누르며 아이들과 망아지를 보고 있을 때 라울이 다가왔다.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환한지 웃음이 가득하다.

아니카와 얘기 나눈 게 그렇게 즐거웠니?

“너희 망아지를 보고 있었구나? 루벤, 집에 있는 망아지보다 더 좋은 게 있다면 한 마리 사줄 수도 있어.”

“정말요?”

하지만 루벤이 아무리 좋아해도 내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라울이 저렇게 환한 얼굴을 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나는 라울을 보며 쿡 찌르듯 한마디를 던졌다.

“아니카 정말 예쁘네요, 머리도 금발이고.”

“그렇지? 누가 봐도 예쁜 여자지. 저렇게 밝고 아름다운 금발머리는 쉽지 않지.”

기가 막혔다. 나는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가 않아서 말했다.

“난 먼저 성으로 돌아갈래요. 당신은 아이들이랑 있다가 올래요?”

그러자 라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는 더 있다 갈게. 먼저 가고 싶으면 차를 타고 가도록 해.”

미친 거 아니야, 라울? 지금 날 보고 먼저 가라고? 설마 지금 아니카와 있고 싶어서 더 있다가 오겠다고 하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내가 간다고 하면 라울은 당연히 날 따라나섰는데.

“너희도 더 있다가 올 거니?”

“응! 우리는 더 있다 갈게요!”

기가 막힌다.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고.

아이들과 라울을 두고 혼자 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오는데 말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이런 거였다. 남자의 마음 같은 건.

아니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라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라울에게는 늘 유혹도 많고 라울의 눈길을 바라는 여자도 많다. 과연 저런 남자 옆에서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나중엔 형식적인 부부, 그저 아이들의 엄마로 그렇게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역시 우리 디아나가 이 바자회에 온 여자들 중에서 제일 예쁘고 세련되고 기품 있지. 이 라울이 선택한 아내니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돌렸을 때였다. 내 눈에 진주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낀 것 같은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광택의 핑크색 진주!

물론 내가 여자들 보석에 대해 그렇게 지식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저건 틀림없이 아주 귀하고 비싼 거다. 디아나가 사돈처녀 결혼식에 입고 가려고 맞춰놓은 원피스에 하면 딱 어울릴 색이었다.

나는 목걸이를 한 여자가 누군가는 관심도 없었다. 저 목걸이를 어디서 샀는지 알아내서 나도 어서 사서 디아나 목에 걸어줘야겠다.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보나 마나 내 사랑에 감동할 거다.

원래 나는 뭐 하나에 집중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목걸이를 한 여자에게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목걸이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라울, 라울!”

“응?”

돌아보니 디아나가 아주 기분 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왜 그러지?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저 목걸이를 선물한다면 내 사랑에 감동해서 한동안 얼굴에 웃음이 가득할 거다. 물론 밤마다 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안기겠지?

바로 알몸에 목걸이 하나만 걸친 디아나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콩크펄 보다 더 진한 핑크빛 젖꼭지를 발딱 세우고 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내게 비비며 다가올 그녀를 떠올리자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사랑스런 디아나. 내가 저 목걸이 꼭 구해다 줄게!

생각만으로도 페니스가 딱딱하게 선다. 디아나가 마녀라는 생각은 처음 만난 이후로 변함이 없다. 마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발기할 수가 있느냐고.

지금이라도 집으로 끌고 갈까?

아니지 지금은 저 콩크펖을 어느 보석상에서 샀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그것도 디아나가 눈치채지 않게 말이야.

그런데 디아나를 어떻게 따돌리고 아니카에게 물어보나? 진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데 말이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디아나 모르게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디아나가 먼저 돌아가겠단다.

“그럼 먼저 돌아가. 디아나! 내가 아이들을 책임지고 데리고 갈 테니까 말이야!”

정말 좋은 기회다. 나는 디아나가 돌아간 뒤에 아이들 손을 잡고 아니카 앞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미스…….”

사실 처음 보는 아가씨였다. 젖소처럼 가슴이 크고 목걸이 말고는 볼 거 없는 그런 여자였다. 이 여자 세비야에 친척이라도 있나?

그러자 옆에서 루벤이 말했다.

“아빠. 아니카잖아요. 아니카 테일러. 미국 배우예요.”

이런 6살짜리 루벤이 미국 여배우를 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나는 몰랐는데 말이다.

“아, 미스 테일러.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자 그 여배우가 아주 오만하게 웃는다. ‘그런 말 많이 들어봤어요.’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흥, 그래 봤자 디아나가 훨씬 예쁘거든!

“아, 감사합니다.”

“그 목걸이 말입니다. 참 아름다운데 그게 뭐죠?”

내 말에 아니카라는 여배우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 관심사는 목걸이니 말이다.

* * *

라울이 그럴 수가 없다. 다른 여자에게 넋이 나가서 날 혼자 들여보내다니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무겁다.

슬픈 얼굴로 성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있는 세베로를 보았다.

“세베로.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어요? 방에서 꼼짝도 안 한다더니.”

“세뇨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이런 꼴로 말이지요.”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서 있는 세베로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 많이 달랐다. 걸음걸이도 보기 흉한 건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금 세베로의 모습보다는 라울에 대한 배신감이 훨씬 더 컸다.

“괜찮아요. 세베로 그런 건.”

“어서 와요. 디아나.”

나에게 인사를 하는 사라를 바라보는 세베로의 눈빛이나, 세베로를 옆에서 바라보는 사라의 모습은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나이가 들어도, 사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감동할 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나도 라울도 그렇게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우리 사랑이 식은 걸까?

그런 생각이 너무 커서인지 얼굴에 나타났나 보다. 세베로가 물었다.

“세뇨라, 무슨 언짢은 일이 있었나요? 왜 먼저 돌아온 거죠?”

“그냥 좀 우울해서요.”

그러자 세베로의 눈빛이 아주 짙어졌다.

“이런, 언제나 밝으신 세뇨라가 어쩌다가 우울해지셨는지 모르겠군요. 저한테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겠어요?”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세베로나 사라에게는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아, 자존심 상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오늘 경마 바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다 했다. 그러자 세베로의 눈빛도 슬퍼졌다.

“이런, 세뇨라.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우울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주인님께서 금발 머리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금발 때문에 아니카에게 그렇게 눈길을 주진 않았을 겁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차라리 터놓고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싫어요. 라울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줬다는 걸 인정하는 것조차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요. 나는 그냥 아이들 엄마로 뒤처지고 말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디아나. 당신은 우리 주인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부인입니다. 나는 그걸 의심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주인님은 옛날과 달라요. 세뇨라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오늘 아니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라울을 본다면 세베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걸요? 게다가 라울이 그 아니카의 어디를 봤는지 알아요?”

“설마, 가슴 같은 곳을 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요. 세뇨라.”

“맞아요. 딱 그렇다고요. 외설적이고 발정난 망아지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 말에 세베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닐 겁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세뇨라!”

지금 가제는 게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거야? 내 눈으로 봤는데 뭘 아니라는 거지?

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세베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주인님을 잘 아는데 주인님은 여자의 가슴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엉덩이라면 몰라도!”

“세베로!”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세베로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양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저것도 뒤로로가 한 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세베로의 위로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라울은 아니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사람이란 마음에 따라서 어쩜 이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건지. 하얀 린넨에 감색 스트라이프가 있는 원피스도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아침에 외출할 때와는 전혀 다른 우울한 기분으로 나는 간단한 팬츠와 티셔츠를 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잘 가꿔진 정원을 한창 걷고 있었다. 여전히 예쁘게 피어있는 아마릴리스도 오늘따라 축 처지게만 느껴진다. 아니 활짝 피어있는 꽃 옆에 시들어있는 아마릴리스가 마치 나인 것 같다. 손으로 누런 잎을 뜯고 있을 때였다.

“엄마!”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차가 저쪽에서 멈춰 서고, 내리기가 무섭게 나를 향해 뛰어오는 이네스를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벌렸다.

이네스를 품에 꼭 안고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나에겐 우리 아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더 서글퍼진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그냥 시들어버린 꽃처럼 아이 엄마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그래서 루벤과 라울이 가까이 왔지만 나는 루벤에게만 인사를 하고 이네스를 안고 혼자 들어가 버렸다.

* * *

‘아니, 디아나가 왜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지?’

난 기가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뭐야? 멋지게 차려입고 온 가족이 함께 갔는데 갑자기 먼저 돌아가고, 아이들까지 챙겨서 돌아왔으면 나를 반갑게 맞아 줘야지. 왜 눈길도 주지 않는 거야?

아무리 내가 디아나에게 빠져 있다고는 하지만, 저런 디아나의 모습은 전혀 적응되질 않는다.

“디아나.”

불렀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네스만 안고 성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내! 기가 막혀서,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바로 디아나를 따라잡았다.

“디아나.”

가까이에서 불렀으나 역시 돌아보지 않는다. 팔을 뻗어 휙 몸을 돌리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한다.

“이 손 놔요, 라울.”

너무 기가 막혀 진짜 손을 놓아버렸다. 말 잘 듣는 종처럼 말이다.

그러자 디아나가 다시 몸을 돌려서 이네스만 안고 현관 안으로 들어간다. 디아나를 잡았던 내 손이 정말 부끄러울 지경이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주인님…….”

옆에서 세베로가 나를 부른다.

“세베로, 여기까지 나왔군.”

“물론입니다. 걷지 못해서 안에 있었던 게 아니에요. 뭐 꼴이 별로 좋지 않다 보니. 그랬던 거지요.”

“음. 그럴만하네. 완전 똥 싼 바지 같은 바지를 입고 있군. 그래도 나쁘지 않아. 며칠일 테니까 봐 줄 수 있어.”

엉거주춤 걷는 세베로를 보며 나는 위로의 말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세베로의 얼굴은 잔뜩 찌그러든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세베로. 뭐 당연히 치질 수술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걸을 때마다 거기가 아플 거 아니야.”

“세베로는 똥꼬가 아픈 거예요.”

옆에서 루벤이 말하자 세베로의 얼굴은 더 어두워진다.

“도련님,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에요. 항문을 수술했기 때문이죠.”

“알았어, 세베로.”

루벤은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세베로가 귀여운 루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묻는다.

“주인님, 뭔가 저에게 하실 말씀이 없나요?”

“내가? 세베로의 치질에 대해서?”

“아니, 세뇨라에 대해서요.”

“디아나? 디아나가 뭐?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군. 가족이 다 같이 즐겁게 외출했는데 왜 혼자 기분이 나빠서 돌아온 거지? 난 먼저 가겠다고 해서 당연히 몸이 피곤한가 했는데.”

“그렇다면 왜 주인님은 같이 오시지 않았나요?”

“나? 나야 이유가 있었지.”

디아나에게 절대 비밀로 하고 싶은 그런 이유 말이다.

“혹시 그 이유를 세뇨라도 알고 계신가요?”

“왜 그런 이유까지 말해야 하는 거지? 먼저 가겠다고 해서 가라고 하고, 난 아이들과 조금 더 있다 왔을 뿐이야.”

그러자 세베로가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가 어두워진 걸 보니 또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할 것만 같다.

“평소의 주인님이라면 세뇨라를 혼자 보내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

“혹시 그게 금발머리의 아니카 때문인가요?”

“어? 그걸 세베로가 어떻게 알았지? 오늘 그 아니카가 자선 바자회에 왔거든.”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디아나가 기분 나쁜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

내가 묻자 세베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맙소사! 뭐, 뭐가 문제인 거야?

콩크펄. 양식이 되지 않는 유일한 진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라고 했다.

저 핑크색 진주 목걸이를 디아나가 한다면 얼마나 예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다음 달에 있을 결혼식에 갈 때 입으려고 맞춘 핑크색 원피스에 한다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울 거다.

난 그 목걸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틈이 났을 때 아니카에게 가서 물었다.

이런 최고급 진주 목걸이를 살 수 있는 보석상이 어디냐고 말이다. 미국에 있다고 해도 달려가서 주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세베로를 바라보았으나, 세베로 역시 나하고 비슷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아니카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배우라고 하더군.”

그러자 세베로의 얼굴이 더 엉망이 되어 나를 본다.

“이봐, 세베로! 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아니카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봤나요?”

“눈길을 끄는 건 사실이거든. 더군다나 내가 눈길을 준 건 정확히 말하면 아니카가 아니야.”

“그럼 누구였지요?”

“생명체라고 할 수는 없지. 아니카가 했던 목걸이였으니까.”

“네?”

세베로의 눈이 커졌다.

뭐야, 설마 내가 그 노랑머리 여자에게 반하기라도 할 거 같아? 젖소처럼 가슴만 커다란 그녀를? 디아나가 있는데?

내 말에 세베로는 처음에는 눈을 꿈뻑했다. 다음에는 씩 웃으며 마음이 풀어진 얼굴을 하고 되묻는다.

“아니카의 목걸이였다구요?”

“그래, 디아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콩크펄을 이은 비드 목걸이를 하고 왔더라고. 그 목걸이를 꼭 디아나에게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물었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느냐고 말이지.”

그러자 세베로가 아주 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주인님, 그런 거라면 저한테 묻는 게 더 빨랐을 겁니다.”

“정말?”

“물론입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콩크펄 목걸이를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구해줘, 세베로. 그 여자는 자기도 알아봐야 한다나? 그까짓거 하나 알려주는데도 시간이 걸려서 아직도 몰라. 나는 그 콩크펄을 꼭 디아나에게 사주고 싶어.”

세베로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러면 그렇지, 주인님이 그럴 리가 없지요. 세뇨라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다니요.”

“뭐야, 내가 아니카의 목걸이를 쳐다봤다고 해서 디아나의 표정이 지금 저런 거였어?”

“정확히 말하면 아니카의 목걸이를 쳐다봤다고 말하지 않아서였죠.”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세베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세베로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베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주인님. 여자들은 말이죠, 아주 예민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까이 두려면 아주 섬세한 마음이 필요하거든요.”

“물론 알고 있어, 세베로. 세베로의 그 섬세한 마음만큼 내 마음이 따라갈 수 없다는 건.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디아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건 진실이었다. 나는 내 능력보다 더한 괴력을 사용하면서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디아나를 사랑한다. 매 순간마다.

“물론 주인님의 마음은 제가 알고 있죠. 하지만 아까 말했어야 했어요. 아니카를 쳐다본 게 아니라 아니카의 목걸이를 쳐다봤다고 말이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걸.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니카의 목걸이를 본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니카를 전혀 쳐다보지 않은 건 아니라구.”

“맙소사! 주인님 그렇게 말하면 세뇨라의 기분은 전혀 풀어지지 않을 겁니다. 어찌 됐든 주인님께서 봤던 건 세뇨라에게 선물할 목걸이였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난 지금 당장 디아나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지는 않군. 저렇게 토라져 있다가 내가 짠하고 콩크펄 목걸이를 선물해준다면 훨씬 더 기뻐하지 않을까?”

내 말에 세베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윙크했다. 나에게 협조해 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목걸이를 구할 때까지 디아나가 계속 삐쳐있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내내 디아나는 우울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디아나의 그런 기분을 모르는 척하고 평소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자 이제 디아나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디아나, 이 넥타이 어때?”

“괜찮아 보이네요.”

쳐다보지도 않고 괜찮다고 하는 디아나를 보니 화가 나지만 나는 꾹 참았다.

‘디아나, 아무리 디아나가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내도 나는 디아나를 사랑해. 그리고 디아나도 곧 화가 풀릴 거야. 이제 당신의 그 예쁜 목에 콩크펄 목걸이를 걸어 줄 테니까 말이야.’

나는 그런 생각만 해도 신이 나서 넥타이를 매고는 출근을 했다. 그런데 우연히, 맹세코 이건 우연이었다. 까스틸로 소유의 쇼핑몰에서 아니카를 다시 만났다.

아니카는 내가 자선 바자회에서 몇 가지 물어보느라 말을 시켜서인지 나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어머, 라울! 반가워요.”

아니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까지 가까웠던 사이였나? 어쨌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한테 굳이 인상을 쓸 필요는 없어서 나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 아니카.”

그런데 왜 그때 디아나가 거기 있었던 거야! 언제 쇼핑센터에 나왔는지 내가 아니카하고 인사하고 있는 걸 디아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디아나에게도 인사했다.

“안녕, 디아나.”

하지만 디아나는 내 인사를 받지 않고 가버렸다, 이런!

디아나가 내 인사도 받지 않고 저렇게 가버린 게 뭘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난 다급하게 세베로를 찾았다.

“세배로, 치질은 다 나은 거야?”

“훨씬 좋아지긴 했지만 완전히 나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분간 과로하면 절대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으니까요.”

세베로가 엉거주춤 걸으며 나를 보았다.

“세베로, 디아나가 화가 나서 먼저 가버렸다고.”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무슨 일이겠어? 그런데 이건 결단코 이건 우연이었다고. 우연히 쇼핑몰에서 아니카를 만나서 인사를 하는데……. 맙소사! 거기 왜 디아나가 있느냐고?”

내 말을 듣던 세베로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오늘 세뇨라가 쇼핑몰에 나가셨으니까요.”

“그러니까, 디아나가 왜 거길 나왔지?”

나는 그런 우연이 너무 기가 막혀서 말했지만 세베로는 오히려 날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세뇨라가 거기 있었던 것보다는 주인님께서 그 쇼핑몰에 아니카와 함께 있었던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연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저도 우연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세베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안 되겠어. 시간을 더 끌다가는 정말 큰일 날 거 같아. 콩크펄 목걸이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초조함이 세베로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건지, 세베로는 늘 그렇듯이 아주 느긋하게 말했다.

“알아봤습니다. 콩크펄은 귀하기도 할 뿐더러 취급하는 매장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구하기 쉽지 않은 건 당연하죠.”

“뭐야? 그럼 구할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인상을 쓰자 세베로가 턱을 바짝 당기며 싱긋 웃는다. 역시 세베로. 구했다는 거다.

“프랑스에 있는 보석상에 있다고 해서 그걸 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세베로가 직접?”

세베로는 치질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프랑스까지 비행기를 타는 게 걱정돼서 쳐다보았으나 세베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렇게 비싼데다가 귀한 목걸이라면 직접 가지러 가야겠죠. 그 사이 누가 사갈까 걱정돼서 대금은 벌써 일부 지불을 했습니다.”

“그거 잘됐군. 하지만 세베로 몸도 좋지 않은데 정말 다녀오겠다는 거야?”

“그렇다고 주인님이 직접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세비야 시의 시장과도 약속이 돼 있는 걸로 압니다.”

그건 그렇다. 빡빡한 약속 때문에 갑자기 일정을 변경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베로. 그러다 치질이 더 심해지면 어떡하지? 비행기를 타고 갔다 와야 할 텐데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베로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인상을 썼다.

“설마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태우고 간다는 그런 진부한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사라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시간이 없고, 그렇다고 목걸이 이야기를 해서 김을 새게 할 순 없는 일이잖아요”

절대 안 될 말이다. 디아나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세베로는 나의 그런 마음을 다 알았는지 고개를 잠시 갸웃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주인님, 여자들은 보석보다는 남자의 마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이니까, 너무 시간을 끌다가 마음을 다치면 목걸이를 드려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못 할 거 같아?”

“…….”

대답이 없다니!

나는 세베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세베로가 못 본 척 시선을 돌린다. 나는 큰소리를 쳤다.

“걱정하지 마, 세베로! 내가 그런 걸 모를 거 같아? 목걸이를 주면서 정말 감동시킬 수 있다고.”

“세뇨라는 지혜로운 분이니까요.”

뭐? 디아나는 지혜롭고 난 아니라는 거야?

그날 저녁 비행기로 세베로는 프랑스로 떠났다. 세베로가 걱정이 돼서 사라도 함께 가는 걸 보고 역시 둘이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일이 벌어졌다. 벌써 나흘째 디아나를 안지 못한 덕분에 나는 하루 종일 발정기 종마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인터넷을 켜도 슬금슬금 야동을 클릭하고 있고 핸드폰을 켜도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야동사이트를 보고 있다.

이런! 천하의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이 이러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어느 사진을 봐도 디아나의 몸이 떠오른다. 비교자체를 불허하는 디아나의 매끄러운 피부와 나에게 딱 맞는 아름다운 가슴과 풍만한 골반.

날씬한 다리와 특히 그 사이의 꿀 떨어지는 나의 안식처. 참을 수 없다. 아무리 콩크펄이 오고 난 뒤에 한다고 다짐해도 이런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디아나!”

나는 화사한 핑크색 잠옷을 걸치고 침대에 앉아 잡지를 넘기고 있는 디아나를 불렀다.

이름만 불러도 잠옷 바지가 불끈 솟는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디아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다시 눈길을 잡지로 옮긴다.

날 보라고! 나! 여기를 봐! 지금 내 상태를 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침대를 돌아 디아나의 곁으로 가 섰다. 이정도 서면 딱 보이겠지. 이 발기력이 말이다.

디아나가 나를 한번 훑어 보더니 그대로 잡지에 눈을 두고 말했다.

“라울. 오늘은 서재에서 자요. 당분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뭐? 이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맙소사 난 지금 쫓겨나고 있는 거다. 같이 자고 싶지 않다고 나가라는 거다.

“안 돼. 난 디아나 옆이 아니면 못 잔다고. 난 여기서 잘 거야.”

“그럼, 내가 다른 방으로 가면 되겠네요.”

아, 참. 목걸이 하나 깜짝 선물하려다가 침실에서 쫓겨나다니!

하지만 나는 디아나를 보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서재로 갔다.

디아나,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나?

나는 결국 침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세베로가 빨리 목걸이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나는 이 서재에서 디아를 그리워하며 그렇게 밤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어서 와. 세베로!

야속하게도 가라앉지 않는 나의 페니스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나는 서재 책상 서랍을 뒤졌다.

“흐흐흐. 정말 오랜 만이지?”

거기에는 디아나의 레이스팬티가 들어 있다. 딱 내가 좋아는 것들이 말이다.

그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흰색 레이스팬티. 솔기가 찢어진 거다. 여전히 부드러운 팬티.

이 팬티를 보니 디아나와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잘 써먹었는데 이게 또 오랜만에 보니 또 새롭게 좋다.

나는 한 손에 팬티를 들고 부드럽게 몸에 문질렀다.

아흐... 디아나!

몸이 다 간질간질하다. 슬그머니 부푼 페니스를 레이스팬티로 감싸 쥐고 다른 손으로 빠르게 위 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디아나의 향수를 뿌려서 익숙한 향기까지. 진짜 이러면 안 되지만 디아나가 날 받아주지 않으니 콩크펄 목걸이가 올 때까지만 써먹으면 된다.

점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디아나의 향수냄새 때문에 빠르게 반응이 온다. 흥분으로 얼구을 찌푸리며 더 빠르게 문지르기 시작했을 때다.

벌컥!

서재문이 열렸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라울. 아무래도 내가... 라울!”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눈앞에 디아나가 뽕 나타났다. 내가 막 절정을 느끼는 순간에 말이다. 놀라서인지 아니면 막을 수 없는 절정때문인지 그 순간에 사정해버렸다.

레이스팬티가 흥건하게 젖도록 정액이 흘렀다. 디아나가 석상같이 굳어서 나를 보더니 입을 딱 벌리고 나가버린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그러니까 왜 날 쫓아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쫓아가서 설명을 할까? 이 팬티는 니가 생각하는 아무 팬티가 아니야. 이 팬티는 처음 만난 날 디가 떨어뜨리고 간 팬티야. 니 팬티!

그러면 좋아하려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콩크펄 목걸이가 오기를 바라는 게 나을 거 같다. 이게 곧 올 테니 말이다.

그런데 다음 날 바로 바로 목걸이를 가지고 돌아올 줄 알았던 세베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 주인님. 축하해 주십시오.

“무슨 일인데? 무조건 축하해. 세베로. 그러니 어서 목걸이를 가지고 돌아와.”

“그런데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왜? 설마 그 목걸이를 가지고 어디로 튀겠다는 거야? 가서 보니 너무 훌륭해서?”

나는 초조한 마음에 대뜸 그렇게 물었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난 한시라도 그 목걸이가 급했다.

- 주인님. 농담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사라가 임신을 했습니다!

“맙소사! 정말 축하해, 세베로. 사라가 임신했다니. 세베로 아직 살아있네~!”

물론 세베로는 건장한 중년의 신사지만 결혼하고 금방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다. 석 달 만에 생겼으니 말이다. 나는 신혼여행 가서 디아나가 임신한 걸 알았는데 말이다.

“세베로, 임신한 건 너무나 축하할 일인데 그것 때문에 내 목걸이를 가지고 바로 돌아올 수 없겠다고? 난 그 목걸이가 너무 급하다고. 설마 거기서 임신 축하 여행이라도 하고 오겠다는 거야?”

- 아니요. 사라가 입덧을 시작해서 말이죠. 비행기 멀미를 해서 하루 이틀 정도라도 쉬었다가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오, 세베로! 그럼 내가 프랑스로 갈까?”

- 주인님, 이틀만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이틀을 못 기다리겠다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급하다. 디아나의 침대로 가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늘 바쁜 세베로. 그런 세베로가 아내 임신 때문에 이틀만 쉬겠다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치질 수술을 한 몸으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갔는데 말이다.

세베로가 사라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서재에 있는 이틀 동안 나는 정말 우울했다. 디아나의 곁으로 갈 수 없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도록 느끼면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경마 바자회에서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다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다. 하지만 써도 너무 썼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디아나의 토라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가지 마음이 불뚝불뚝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취급을 받아야 할 일이 뭐야? 아내에게 아름다운 목걸이를 선물하려고 한 게 그렇게 죄인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토라진 디아나가 나중에 목걸이를 받고 얼마나 좋아할까? 또 나에게 얼마나 미안해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참을 만도 하다.

단지 디아나 옆에서 잘 수 없는 게 슬플 뿐이지.

그런데 지금 디아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 * *

라울은 이제 정말 날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는데 달래줄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서재로 가라고 한다고 정말 서재로 가버리니 말이다.

이전 같았으면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버텼을 텐데…….

뿐만 아니다. 어디서 못된 버릇을 배운건지 자위까지 한다. 그것도 여자 팬티 같은 걸 가지고 말이다.

저렇게 이상해지는 라울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제 짐승같이 보인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어떻게 그렇게 괴상한 행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우울한 생각에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은 세베로가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사라와 함께 여행을 간다고 가더니 며칠 만에 돌아왔다.

“주인님, 세뇨라. 제가 돌아왔습니다. 물론 좋은 소식과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지요.”

사라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세베로와 사라에게 축하했다.

“정말 축하해요! 세베로, 사라. 이제 이 까스틸로 성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세베로가 커다란 보석함 같은 것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주인님. 주인님이 그렇게 원하시던 겁니다. 어서 세뇨라에게 드리시죠. 이것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말입니다.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았다는 누명까지 쓰고 말이지요.”

세베로의 말에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신경을 자극한 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는 ‘누명’이라는 말이다.

누명이라니! 난 라울이 한눈을 파는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거든?

내가 싸늘한 눈초리로 라울을 쳐다보자 라울이 보석함의 문을 열었다. 진짜 카리브 해의 해적이나 싣고 다닐 것 같은 화려하고 빈티지한 보석함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또 조금 더 작은 보석함이 보인다.

라울이 그걸 꺼내더니 세베로를 보며 말했다.

“세베로.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억울함을 견디며 있었는지 내 입으로는 말 못 하겠어. 디아나에게 말 좀 해줘.”

과장되게 한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말하는 라울의 행동에 세베로를 보자 세베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네, 물론 주인님의 독특함이 만들어낸 해프닝이지만, 그동안 무척이나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베로의 말을 듣자 점점 더 궁금하다. 나는 라울과 세베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는 두 분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단둘이 말입니다.”

“음. 역시 그렇겠지?”

라울은 그렇게 말하더니 내 손목을 잡고 침실로 걸어갔다. 점점 빠르게 걷더니 침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나를 포옹하더니 거칠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였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한꺼번에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무너져 내렸다.

“라울!”

“디아나. 내가 이걸 참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알아? 아니 아내에게 선물 하나 하는 게 이렇게 힘드나? 날 그렇게 몰라?”

“뭐예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내 질문에 라울은 대답 대신 들고 온 보석함을 열었다.

세상에! 신비한 구름이 낀 듯한 진한 핑크빛 진주.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 짓게 되는 사랑스러운 진주목걸이였다. 영롱한 빛과 색상이 볼수록 신비함을 더한다.

“이게 대체 뭐예요?”

“콩크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진주지.”

라울의 눈이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걸 주기 위해 오해를 샀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경마 바자회에서 쳐다본 건 아니카가 아니라 아니카의 목걸이였어. 디아나가 결혼식에 입고 가겠다고 맞춘 핑크 드레스에 딱 어울릴만한 거지.”

“……!”

맙소사. 지금 이 사람이 뭐라는 거야? 그렇게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볼 정도로 이 진주목걸이에 꽂혔다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런데도 라울은 신이 나서 말한다.

“이틀간 서재에서 지내는 동안 진짜 고민 많이 했어. 미리 말할까 말까하고. 하지만 이런 증거라도 있어야 내 말을 믿어줄 거 아니야?”

“라울…!”

그의 이름 말고는 생각나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 말보다는 한숨 섞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가 막히지? 내가 디아나를 두고 그런 금발머리 여자에게 넋이 나갔을 거 같아?”

“하지만, 사람들이 다 당신이 금발을 좋아한다고, 예전에 엠마도 금발이었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라울의 양미간이 아주 심술 사납게 모여들었다. 눈동자는 아주 검은 색으로 변했다. 화가 났다는 거다.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할머니들은 누군데?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나는 디아나 머리색만 좋아한다고. 짙은 갈색. 물론 디아나가 빨갛게 염색을 한다면 그 색을 좋아하겠지만 말이야.”

“나한테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요. 저기 저 진주 목걸이 어떠냐고 말이에요. 그럼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쇼핑몰에서도 같이 있었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그 쇼핑몰은 진짜 억울해. 그날은 아니카가 콩크펄 목걸이도 하지 않았거든. 난 진짜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딱 얼굴을 마주쳤을 뿐인데 그걸 디아나가 본 거야.”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을 정도로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라울이라면 가능하다.

라울은 한 번 관심 가지면 뭐든 뿌리를 뽑는다. 그날 콩크펄에 꽂혔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보나 마나 그 여배우에게 가서도 기막힌 말만 했을 거다.

“라울. 궁금한 게 있는데 그날 아니카에게 뭐라고 말했어요?”

“아름답다고 했지. 목걸이가.”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딱 그랬을 거다.

“아니카가 뭐래요?”

“목걸이만 아름답냐고 묻더군.”

“그래서요?”

“그렇다고 했지. 목걸이만 눈에 들어온다고.”

내가 키득키득 웃자 라울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그런 라울의 품에 안겼다. 딱 라울 같은 말과 행동이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마음을 졸인 내가 다 한심스러울 정도다.

“자. 어디 찬찬히 보고 이 목걸이 한 번 해보지?”

라울이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울이 내 앞으로 콩크펄 목걸이를 가져왔다. 신비하리만치 진한 핑크빛을 내는 진주목걸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본다.

“그런데 디아나. 내가 목걸이에 대해 말할 틈을 주지도 않고 먼저 삐치고 화내고 날 침실에서 쫓아낸 거 너무한 거 아니야? 물론 해명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깜짝 놀래주고 싶어서 기다렸다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더 화를 내려나?”

라울이 부드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그의 손길이 목덜미를 스치자 나는 꼴깍 침을 삼켰다. 목 뒤의 잔머리들이 모두 곤두서게 아주 천천히 쓸어 넘기며 목걸이를 걸어준다.

그리고 내 목덜미에 키스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아니카보다 디아나가 한 게 훨씬 더 예뻐. 훨씬. 그리고 콩크펄도 이게 더 고급이지. 더 비싼 걸로 사오라고 세베로에게 말했거든.”

“라울, 정말 엉뚱한 거 알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데 그냥 둘 수가 있어요?”

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라울의 사랑이 식은 거 같아서 서러웠던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고였다.

그러자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내 볼을 어루만지며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해할 사람을 오해해야지.”

그의 입술이 눈두덩에 닿았다. 그리고 콧등에. 그다음은 입술. 뜨겁고도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무렴! 내가 디아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거 같아? 다른 여자가 한 목걸이라면 몰라도!”

라울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며칠 만이었다. 라울이 날 이렇게 안아준 건 말이다.

“디아나. 내가 말하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알아?”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말하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을까?

“디아나, 나는 당신이 이 목걸이 하나만 하고 있는 걸 보고 싶어.”

라울이 그렇게 말하며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런 게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바르셀로나 호텔에서 말이다. 그때도 루비가 박힌 목걸이를 선물로 줬을 때 목걸이만 한 걸 보고 싶다며, 정말 목걸이 하나만 달랑 하게 만들었다.

“너무해요. 라울!”

“한결같이 너무한 게 좋은 거야. 변하지 않잖아. 안 그래?”

라울이 목걸이 하나만 한 나를 한참 투시라도 할 듯이 쳐다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몸 구석구석을 바라보자 가만히 앉아 있는 데도 몸이 달아오르고 한숨이 나온다.

“역시. 콩크펄이 아무리 예뻐도 디아나가 더 예뻐.”

라울이 다가오더니 두 팔고 감싸 안았다. 끝도 없이 긴 키스를 여기저기 하면서 라울이 빠르게 옷을 벗었다.

“급해. 급해. 나는 진짜 너무 굶었다고.”

“아유, 라울!”

라울은 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다리 한쪽을 어깨에 걸었다. 휘청하는 내 몸을 높은 매트리스에 기대게 하고는 바로 음부에 코를 박고 속살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응. 응. 하하. 라울!”

그러나 내 소리를 하나도 들리지 않는지 점점 더 깊게 혀를 밀어 넣더니 질 내벽을 꾺꾹 눌러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음핵을 짓누르고 비비는 통에 나는 선채로 그대로 절정을 느끼고 말았다.

“디아나!”

디아나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는 건 더할 수 없이 흥분된다. 귀엽게도 이렇게 선 채로 절정을 느끼다니!

나는 바로 디아나를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왈칵 쏟아져 내린 꿀물을 혀로 핥아 올렸다.

깊게 손가락을 밀어 넣고 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절정의 여운으로 내 손가락을 조여 대는 그녀의 속살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대로 페니스를 밀어넣었다. 완벽하게 나를 잡아주는 부드러운 속살. 역시 디아나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콩크펄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하얀 살결에 어울리는 핑크빛 진주. 그리고 그 아래 꼿꼿하게 선 진한 핑크빛 젖꼭지.

이건 꿈이다! 진짜 이렇게 행보갈 수가 없다. 나는 온몸을 다해 사랑했다. 그러다 보니 주체할 수가 없어서 네 번인가?

“라울 너무해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오해하고 굶기래?”

우리는 그 밤 내내 사랑에 빠졌다. 물론 목걸이는 끝까지 풀지 않았다.

“어떻게 구한 목걸인데. 계속하고 있어야 해!”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내 말대로 그 후로 내내 그 목걸이를 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오해를 넘어서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됐다.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규빈 오빠와 한영 언니, 그리고 사돈댁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정․재계 내놓으란 사람들이 다 축하하러 왔다. 라울은 내 옆에 서서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라울이 선물한 콩크펄 목걸이를 하고, 라울이 골라준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나와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작은 이네스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인형처럼 예쁜 이네스. 꼬마 신사가 된 루벤. 우리 가족을 보고 모든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라울은 신부대기실에 함께 들어가 사돈처녀를 보고 말했다.

“훗! 망아지 같은 사돈처녀가 결혼을 하네.”

“어머, 안녕하세요?”

지경아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예전에 규빈 오빠 결혼식에서 봤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숙녀로 변할 줄 몰랐군. 전에 봤을 때는 모델이 되겠다고 하더니……. 역시 사업을 하다 보니 사람이 안목이 생기나 보지? 신랑도 아주 훌륭하게 잘 골랐고 말이야.”

라울이 놀리듯 말하자 지경아의 볼이 발갛게 되었다. 신랑은 네덜란드 반 더 비엘 카지노에서 만난 사람으로 이름은 차지우라고 했다. 한국가구의 후계자라는데 해병대를 제대하고 가구 디자인을 하는 멋진 남자였다.

훤칠한 키에 다부지고 성실해 보이는 신랑에게 라울이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런데 신부가 이렇게 조신해진 건 다 내 덕분인 줄 알아요. 내가 헛바람 들지 않게 진로 상담을 잘 해줬거든.”

라울의 말에 새신랑 차지우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부인 외에는 아무도 여자로 보이지 않는 경처가시라고요.”

새신랑의 말에 라울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졌다. 옆을 보니 지경아가 웃고 있다.

“맞는 말이지요?”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말을 하다말고 라울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그 보랏빛 눈동자를 반달 같이 접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내 눈에는 디아나밖에 안 보이거든. 그러니 오늘 신부가 아무리 예뻐도 디아나 다음이지. 미안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도 내 눈에는 두 번째로 예쁜 신부야. 그럼 됐나? 이건 내가 하는 최고의 찬사라고.”

라울의 말에 신부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물론 그날 라울이 선물한 콩크펄 목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씩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내 목에 걸린 목걸이의 가치보다 내 목을 감고 있는 라울의 마음이 나를 더 행복하게 했다.

라울의 양손을 잡고 있는 루벤과 이네스까지 셋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사랑은 더 커지고 그만큼 아픔도 기쁨도 더 커질 거다. 라울을 닮은 아이들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울도 나도 우리에게는 같은 것이 있다.

사랑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용기 말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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