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3)

- 외전 -

12.

세베로의 질문에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은 수줍음이 배어있어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나이와 상관없는 아름다움. 세베로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댄 채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바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을 부딪친 채로 얇은 입술이 비벼지도록 움직이며 낮은 음성으로 다가간다.

“사라,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입술을 겹친 채 몸을 일으켜 그녀를 일으키자 그녀가 일어나 그대로 세베로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세베로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손을 내려 반짝 들어 안았다.

침대에 천천히 그녀를 눕히면서도 눈길을 떼지 않고 그대로 다시 깊은 키스를 하자 사라의 두 팔이 세베로의 목을 휘감는다.

“세베로. 난 서툴러요.”

“아니요. 당신은 서툴지 않아요. 그날 단 하룻밤으로도 날 사로잡았으니까요. 긴장하지 말아요.”

몸이 겹치면서 더 긴장하게 된다. 그러나 세베로의 다정한 눈길을 마주하니 긴장보다는 열기가 올라온다. 세베로의 단단한 몸이 부드러운 사라의 몸에 닿았다.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를 누르며 단단한 몸이 겹쳐지자 사라의 다리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하아…… 세베로.”

“사랑해요. 사라.”

세베로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느긋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길은 물 흐르듯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작은 입술을 물고 빨았다. 교차하는 숨결도 맞물리는 혀의 관능적인 얽힘도 서로의 몸을 느끼는 예민한 신경도 모두 하나가 되어 울리고 있었다.

“너무나 절실히 사라를 원해요.”

“나도. 나도 그래요. 세베로.”

수줍은 듯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바로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통통하게 솟은 엉덩이에서 팬티가 미끄러져 내려오자 윤이 나는 까만 음모와 날씬한 허벅지가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세베로가 빠르게 옷을 벗고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은밀한 곳을 더듬고 문지르자 이미 젖어 든 그곳이 미끌미끌 느껴진다.

그가 팽팽하게 발기된 그의 것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아아…… 흑. 세베로…….”

방안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둘 사이에 오가는 농밀한 교감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그녀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은 세베로가 힘들어하는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작게 숨을 할딱이는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깊게 혀를 밀어 넣는다.

조심스럽지만 힘 있게 몸을 밀어 넣으며 그녀를 살피려 했지만 정작 그녀의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가 하얗게 타버리는 것 같다. 좁고 따뜻한 내부가 오밀조밀 그의 것을 감싸며 감겨들어 빨아대기 시작한다. 온통 조여들며 빨아대는 통에 정신이 아득하다.

“정말 잊을 수 없었어요. 이런 느낌이 있을 수 있다니, 사라 사랑해요.”

“하아하아…… 세베로…….”

떨리는 음성으로 세베로를 부르는 사라의 눈을 뚫어질 듯이 보며 세베로가 눈을 감고 입술을 겹쳤다. 사라도 눈을 감았다.

마치 눈을 감으면 조금 더 느낄 수 있을 것처럼. 아니면 넘치는 신경의 자극을 가두어두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감당할 수 없는 희열이 삽입만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벼지는 음모의 감촉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며 머리카락 끝까지 올올이 서는 전율에 둘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진다.

“세베로…….”

“사라…….”

세베로가 입술을 겹치며 힘껏 허리를 밀어 넣었다.

“아악…… 헉…… 하하…….”

깊은 안쪽 끝까지 닿는 지독한 희열에 사라의 허리가 한껏 휘었다. 여자여서 기쁘다는 생각. 세베로를 이렇게 품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한 희열. 깊이 세베로를 품고 죽을 듯이 조이며 녹여 없앨 듯이 빨아댄다. 부드러운 속살이 무서운 힘으로 수축하며 그를 잡아당긴다.

꽉 아물린 살결이 길을 내며 주는 지독한 쾌감에 세베로는 전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세베로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희열에 들떠 빛을 반사한다. 그의 눈동자가 사라를 향하자 사라의 맑은 눈도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그를 보았다.

작게 고개를 흔들며 허벅지를 움찔거리자 아래로부터 진한 자극이 세베로의 아래를 통해 척추를 타고 흐른다. 발가락 끝까지 흐르는 진한 전율에 세베로가 숨을 들이켰다. 흉곽이 부풀며 둘의 가슴이 뻐근하게 맞닿는다.

아까부터 긴장으로 부푼 젖꼭지가 그의 단단한 가슴을 자극한다. 맞닿은 살결도 뜨겁게만 느껴지고 몸을 출렁일 때마다 결합된 부위가 무섭게 수축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있었다.

“아아아…… 응…… 흑…….”

사라는 흔들리는 꽃처럼 흐트러지며 그에게 매달렸다. 죽을 것 같은 쾌감이 온몸을 쥐어짜듯 왈칵왈칵 자극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가 조금 더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밀며 깊이 들어오는 동작도 점점 매끄러워진다. 그만큼 힘을 실은 남성이 깊은 안쪽 끝에 닿는 빈도도 늘어간다.

활짝 벌어진 다리는 단단하게 세베로의 허리를 감고 있었는데 세베로가 무릎을 세워 그녀의 두 다리를 자신의 양팔에 걸었다.

민망하게 활짝 벌어져 그의 팔에 걸린 다리가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더 긴장하고 긴장해서 더 조여든다.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허벅지에 그의 골반이 느껴진다. 맞닿은 치골이 비벼질 때마다 흠칫흠칫 전율이 일었다.

“세베로…… 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사라의 입술은 다물 틈이 없이 신음을 쏟으면서도 그에게 매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이제 자꾸 신호가 오는 아득한 전율을 놓칠까 두려워 점점 더 그에게 밀착한다.

세베로는 죽을 것 같은 쾌감을 참으며 송골송골 땀이 맺힌 등 근육을 점점 더 세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를 밀어 넣을 때마다 아래를 관통하는 쾌감은 참기가 힘들다.

게다가 몸을 뒤로 뺄 때마다 딸려 나오는 속살은 마지막까지 그의 남성을 놓지 않고 잡아당기며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진짜 당신은 대단한 여자예요. 사라.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평생. 사랑할 거예요.”

세베로가 말과 함께 정신없이 몸을 쳐대기 시작했다. 입술은 그녀의 얇은 입술을 물고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완벽했다.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이 그의 강하고 단단한 것을 감싸고 물고 조이는 동안 그는 완벽한 쾌감에 몸을 떨며 점점 절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어떠한 기교도 없이 그저 하나로 맞물린 성기가 밀고 밀리는 것만으로 둘이 느끼는 희열은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몸을 쓱 뺐다. 갑자기 찾아드는 허전함에 사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남성 굵기만큼 한껏 벌어졌던 아래가 힘없이 제자리를 찾으며 상실감이 몰려온다.

그러나 바로 다음 그녀의 입에서는 조금 전과는 다른 신음이 터졌다.

그가 몸을 내려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의 체액으로 반들거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속살을 혀로 길게 핥아 올리고 도드라진 돌기를 세차게 물었다.

“아아. 세베로!”

지금까지의 마찰로 부풀고 충혈 된 민감한 속살이 그의 말캉한 혀 놀림에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며 전율하기 시작했다.

“으응…… 흥흥…… 아아아!”

순식간에 눈앞에서 하얗게 터지는 빛들이 잘게 부서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빛들이 온몸으로 퍼지며 발가락이 움츠러든다.

그의 입술이 그런 그녀의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그녀의 속살을 핥고 빨며 도드라진 살점을 자극한다. 왈칵왈칵 쏟아지는 애액이 침대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발작적으로 아랫배가 수축하며 경련을 일으킨다.

뜨거운 절정이 연거푸 홅고 지나간 몸이 헤실헤실 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베로는 여전히 탱탱하게 발기한 것을 그녀의 속살에 대고 비빈다.

아래 느껴지는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마찰에 그녀가 마음으로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세베로가 힘을 주어 허리를 단번에 밀었다.

“아아아…….”

속수무책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의 굵고 커다란 것은 그녀의 속살 주름을 있는 대로 펴며 그녀의 안을 가득 메운다. 오밀조밀 수없이 연결된 주름과 신경이 그의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우성을 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덕끄덕. 사라가 그를 보며 자게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터지는 단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를 품고 있는 게 좋다. 죽을 듯한 절정도 좋지만 이렇게 그저 그를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아래를 가득 메우는 안정감 있는 희열에 가슴이 다 벅차다.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를 조여댔다. 세베로는 절대 제지할 수 없는 경주마처럼 탄탄한 허벅지로 그녀를 잡고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갈 수 없는 몸이 색색 숨을 몰아쉬며 발작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으나 그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몸을 꿰뚫기라도 할 듯이 달려들었다.

쿵쿵 몸을 짓찧는 거센 삽입에 사라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래로부터 무섭게 뜨거운 불길이 솟구쳐 당장에라도 저를 태울 것만 같다.

“학학…… 세베로…… 힘들어요.”

“조금만. 난 지금 자제할 수가 없어요. 사라. 너무 오래 참았어요. 사랑해요.”

세베로는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가 몸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무섭게 흔들리며 다시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속살과 깊은 안쪽은 물론 애널까지 수축하고 들썩이며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두렵고도 기대되는 거대한 오르가슴을 맞으며 사라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크게 밀어 넣으며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열점을 짓이겨버렸다.

“아아아악…….”

“큭…… 읔!”

동시에 신음이 터졌다. 신음이라고 하기에는 비명에 가까운 격렬한 소리였다. 아래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미세한 신경의 떨림이 격하게 파동을 키우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멀티오르가슴에 사라는 고개를 흔들며 세베로의 품에서 몸을 떨었다.

세베로는 완벽한 절정에 모든 것이 해체되는 경험을 했다. 몸 안의 모든 욕망이 한순간에 해소되며 완벽한 절정을 맛본다.

그가 뿌린 뿌연 액체가 시트 위로 흩어진다. 그가 사라를 안고 돌아누웠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떨고 있었다.

그러다 세베로의 단단한 품에 얼굴을 묻는다. 그의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는 게 느껴진다. 단단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사라가 세베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이 선사하는 황홀한 밤이었다.

다음날은 사라가 루벤과 이네스를 데리고 세비야 대성당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계획하고 아이들과 약속한 일이어서 루벤과 이네스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사라 준비 다 됐어요?”

세베로가 차를 현관 앞으로 가져오며 물었다.

“네. 세베로. 다 됐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라는 날씬한 몸에 어울리는 프린트 원피스를 입고 챙이 큰 모자를 쓰고 있어서 정말 여성스러웠다. 지난 밤 이후로 사라는 세베로와 눈만 마주치면 웃어준다. 그 웃음이 좋아서 세베로도 활짝 웃으면 말했다.

“어서 타요.”

세베로의 말에 루벤과 이네스가 먼저 차에 올랐다. 사라는 아이들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세베로의 옆에 탔다.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이 피어난다.

루벤이 세베로를 보며 말했다.

“세베로, 사라 선생님을 그렇게 보면서 운전 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도련님.”

세베로는 웃으며 차를 출발했다. 차에 탄 모두가 설레고 기대되는 나들이였다.

* * *

진짜 남자들은 왜 틈만 나면 승마를 하겠다는 건지.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생리 둘째 날이라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남겠다고 했더니 엠마 콘차도 따라 남겠다고 한다.

차라리 남자들을 따라가지. 둘이 있는 시간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엠마 콘차의 눈길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나는 그녀와 단 둘이 있는 게 싫었지만 아이들도 다 나가고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림처럼 보이네요. 정말 행복해 보여요. 디아나.”

엠마 콘차가 내게 하는 말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네, 정말이지 저한테는 과분한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늘 감사하고 있죠.”

“그러게. 뭐 과분하다고까지는 표현하긴 그렇지만, 정말 어떻게 라울하고 결혼하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능력이 굉장히 좋으신가 봐요.”

굉장히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그 눈길이 건네는 불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시비를 걸고 싶진 않았다. 라울의 손님이고 또 후작부인이니 말이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겠어요. 라울이 저한테 반했을 뿐이죠. 인연이 되다 보니까 그러네요.”

나는 있는 그대로 한 말이었지만 엠마는 그게 무척이나 거슬리는지 인상 쓰며 물었다.

“라울이, 반했다고요? 설마 라울이 먼저 프러포즈하고 그랬을까?”

그럼 내가 먼저 했겠니?

결혼 전 라울이 얼마나 싸가지 없고 말이 통하지 않았는지 안다면 저렇게 말하지는 않겠지?

“아유, 당연하죠. 라울이 프러포즈했어요. 처음에 했다가 퇴짜 맞았는데 나중에 제대로 했죠. 그때 라울을 안다면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누가 라울 같은 남자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하겠어요.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 말을 하자 엠마 콘차는 얼굴이 완전히 붉으락푸르락하다.

왜 그런 거지? 설만 저 여자가 프러포즈를 먼저 한 거야? 설마.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그녀를 보았다. 엠마 콘차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물었다.

“한번 프러포즈해서 퇴짜를 놨다고요? 라울을? 당신이요?”

“네. 새벽 3시에요. 하여튼 복장도 불량하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프러포즈를 했길래 퇴짜를 놨죠. 그런 성의 없는 청혼이라니!”

나는 웃으며 그날을 떠올렸다. 그러자 엠마 콘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화가 난 듯이 보이기도 했다.

“새벽 세시에 프러포즈라니, 라울이 그런 로맨틱한 면이 있나요?”

“로맨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랬어요.”

그 엉터리 같았던 프러포즈가 로맨틱하다고 까지는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중에 한 프러포즈는 확실히 로맨틱했다. 물론 세베로의 코치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자는 라울의 청혼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정말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엠마 콘차의 목에는 마드리드 궁에서 보았던 황색 시트린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때도 봤지만, 목걸이가 정말 아름답네요.”

“아, 이거요? 라울이 선물한 거예요.”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꽉 쥐었다. 라울이?

“라울이 선물을 했다구요?”

“중동에 있는 뭐, 어떤 부호가 보석상에게 맡겨서 세공한 거라고 했던가?”

그 순간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엠마 콘차가 바로 라울과 알바로 남작의 연인이었다는걸.

연적이라고 말했다는 건 틀림없이 엠마였을 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뭔가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여기에서 정신 못 차리거나 한다는 건 더 우스꽝스러우니 말이다.

“혹시, 알바로 남작과 라울이 연적이었다고 했던 그 여자가 후작부인이셨나요?”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엠마 콘차는 잠시 흠칫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주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적이랄 것까진 없지만 두 남자 다 나를 사랑했던 건 맞아요.”

나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방긋 웃었다.

“그러실만하게 아름다우세요. 여자인 제가 봐도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남자들이 다 사랑할만했겠어요.”

내가 여유 있게 말하자 그녀는 내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물론이에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반응했다. 지나간 일이고 결혼 전 라울의 상태를 생각하면 날 만나기 전까지 뭘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설마 이런 얘기 듣는다고 기분 나빠하거나 하진 않겠죠? 이미 다 지나간 얘기에요. 하지만 이 라울의 성에 오니까 기억나서 나도 이 목걸이를 한번 해본 거예요. 기분이 많이 나쁜가요?”

엠마 콘차가 나를 보며 묻는다. 기막히게 그런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 여자도 있을까? 설마, 자기 남편이 옛 애인에게 목걸이를 주었다고, 그것을 알게 돼서 기분 나쁜 것도 안 나쁜 척 하는 게 귀족 사회의 빌어먹을 예의라는 그런 건 아니겠지.

“기분 좋지는 않네요.”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엠마 콘차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다 지나간 얘기니까. 그리고 지금 현재 라울 까스틸로의 부인은 바로 디아나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슬쩍하며 나에게 한마디 던진다.

“라울, 아주 매력적인 남자죠?”

도대체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매력적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내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저가 라울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더 아는 듯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자상한 남자예요.”

그러자 엠마 콘차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글쎄, 라울은 자상한 남자는 아니잖아요? 저돌적이지.”

알면서 왜 물어? 그래서 저돌적이어서 너한테 그렇게 저돌적으로 덤볐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속에서는 별 말이 다 튀어나왔지만,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니가 알고 있는 건 라울의 모든 것이 아니야.

“말은 그렇지만 행동이나 그런 건 그렇지 않아요. 애들한테 책을 읽어주기 위해서 구연동화를 배울 정도니까요.”

이런 건 몰랐을 거다. 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구연동화까지 하는 라울은 상상도 못했을 걸?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참 많군요. 재미있어요.”

그녀는 차 옆에 있는 치즈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말했다. 나는 아주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라울이 남편으로 아빠로 얼마나 다정한지 말했다.

“라울은 이네스를 정말 사랑해요. 집착에 가깝지요. 한동안 회사에도 데리고 나갔으니까요.”

그러자 엠마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곳 요리사는 진짜 케이크를 맛있게 굽는군요.”

그러게 왜 라울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척을 하고 그래. 그것도 아내 앞에서 말이야. 나는 그녀가 먹는 케이크 접시를 앞으로 밀며 웃었다.

“많이 드세요.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

그래 많이 먹어라. 먹고 좀 말 좀 걸러서 해라. 사람 이상하게 찌르지 말고 말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눈길을 쏘아 보냈다. 웃음과 함께.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있는 그대로 말하면 좀 좋아?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두른 얼굴을 하고 가식을 떤다.

“라울의 성에서 그녀의 부인과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거 같은 느낌이랄까?”

“즐기다 가세요. 며칠 후면 저희 친정 식구들도 올 텐데 괜찮으시죠?”

그러자 의외라는 듯이 엠마 콘차가 눈썹을 올리며 나를 본다.

“한국 사람들 말인가요?”

“네. 맞아요.”

“아, 그러시구나. 네, 저야 뭐 이곳에 있는 동안 즐기다 가면 되니까요. 며칠 일정이 겹치겠네요.”

“예. 하지만 불편함은 없으실 거예요. 멀지 않은 곳에 골프 코스도 있고 또 승마장은 늘 이용하실 수 있으니까요.”

“라울은 말을 참 잘 탔는데, 윈디가 아직도 있나요?”

그녀가 윈디까지 알고 있는 걸 보자 그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왜 이렇게 구석구석 아는 게 많은 건지.

“윈디는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어요. 지니라고 우리 아들이 이름을 붙였죠.”

“아, 윈디가 새끼를 낳았다니.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성은 더 아름다워졌고 말이지요. 라울이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방황이 길었나 보죠?”

“라울이 방황을 했었나요?”

“설마, 라울이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했던 걸 모르는 건 아니겠죠?”

“상관없어요. 지나간 일이니까.”

“그러게, 그게 지나간 일이 아니라 라울의 기질은 아닐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 말은 라울이 원래 바람둥이기 때문에 어차피 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만날 거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라울은 참 정열적인 남잔데 말이죠.”

마치 은근히 내 기분을 나쁘게 하고 라울에 대해서 불쾌감을 조장하려는 듯이 느껴져서 나는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라울에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정말 엠마 콘차가 라울과 관계가 있었던 여자라면 이렇게 나한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초청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내색을 이 여자 앞에서 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 여자의 말보다는 라울을 더 믿어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가 내 남편이니까 말이다.

* * *

세베로 대성당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단체로 오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양인들이 많았는데 오늘도 한국에서 단체 관광을 온 것 같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이동하는 걸 보며 사라는 루벤에게 말했다.

“오늘 관광객이 많으니 절대 함부로 사람들 사이에 숨거나 하는 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걱정 마세요. 선생님. 나는 오늘 선생님 곁에 꼭 있을 거예요. 오늘 착하게 일정을 마치며 세베로가 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했어요.”

루벤의 말에 사라가 세베로을 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세베로.”

그러나 세베로를 향하던 사라의 눈이 세베로 너머의 어떤 사람을 보고는 놀라서 커지며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왜 그래요? 사라?”

세베로의 물음에도 사라는 대답 대신 급하게 몸을 돌려 피하더니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베로의 뒤에 있던 한 중년의 남자가 사라의 뒤를 쫓아 뛴다. 그걸 본 세베로가 루벤과 이네스를 한 팔에 한 명씩 끼고 사라를 따라 뛰었다.

사라는 성당 모퉁이를 돌아 구석에서 숨을 헐떡였다. 전 남편이었다. 분명. 그가 왜 여길?

“사라!”

그가 사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사라가 소리쳤다.

“놔요. 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습관이라고 했던가? 어째서 깨끗이 이혼한 전 남편을 보고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는지 자각할 틈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손찌검했던 남자였다. 눈앞에 보이는 자체가 공포였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 사라!”

사라를 따라 세베로도 모퉁이를 돌았다. 세베로의 눈에는 사라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세베로는 루벤과 이네스를 내려놓고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 잠깐 뒤를 돌아서 눈을 감고 백을 세십시오.”

아주 진지하게 말하는 세베로의 말에 이네스와 루벤이 뒤를 돌았다. 루벤이 뒤를 돌며 말했다.

“한대 갈겨요. 세베로. 사라 손목 잡은 저 남자.”

“난 무서워.”

이네스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하자 루벤이 이네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걱정 마. 이네스. 세베로가 이길 거니까.”

세베로는 아이들이 뒤를 돌기 무섭게 다가가 사라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서운 악력에 팔목이 잡힌 남자가 세베로를 보며 소리쳤다.

“뭐야?”

“나? 사라의 남자. 그래서 일단 한 대 때리는 겁니다.”

말과 동시에 세베로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갈렸다.

“컥!”

큰 덩치에서 나오는 세베로의 주먹에 남자가 구대로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지자 세베로가 바로 사라를 당겨 얼굴을 보며 물었다.

“누구?”

“전 남편이요.”

그 한마디에 세베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사라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안기고도 모자라 지금도 함부로 구는 전 남편이었다. 세베로가 사라를 뒤로 물리고 바닥에서 일어나는 남자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

“이런, 상처가 나겠군요. 고소하십시오. 그래도 한 대 더 때려야 속이 풀릴 거 같아서 말이지요.”

스페인 어로 빠르게 말하는 세베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전남편이 인상을 쓰며 일어섰으나 그대로 다시 세베로의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세베로는 넘어진 남자의 가슴을 발로 누르며 영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억울하거나 부당하다고 느껴지면 고소하십시오. 얼마든지 응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스페인에서 여자 때리는 남자는 절대 승소하지 못할 겁니다.”

남자는 너무 놀랐는지 말도 하지 못하다가 세베로가 사라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그제야 일어났다. 일행들이 다가왔으나 그저 아무 말 없이 사라가 사라져간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벤과 이네스가 차에 타며 세베로에게 말했다.

“멋져요. 세베로.”

“오늘 일은 비밀입니다. 우리 넷이 비밀 결사대에요. 알았지요?”

세베로의 말에 루벤과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아직도 놀라서 아무 말이 없었지만 세베로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자 천천히 숨을 내쉬며 세베로를 보고 웃었다. 그 남자도 맞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세베로의 주먹에 그렇게 픽 쓰러지는 걸 보자 속이 후련하다.

“사라, 당신 옆에는 늘 내가 있어요.”

세베로의 말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 볼게요. 키스해요. 세베로.”

루벤과 이네스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하자 세베로가 웃으며 말했다.

“봐도 됩니다.”

그리고 사라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 * *

늘어선 올리브 나무 옆으로 말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며 말 두 마리는 필사적으로 경주를 하고 있었다. 그건 두 마리의 말 위에 탄 두 남자들 때문이었다.

뭐야, 어째서 저렇게 져줄 생각이 없는 거야? 내가 이곳에서 설마 저한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더 빠르게 말에 박차를 가했다. 처음에는 승마장까지 올리브나무가 늘어서 있는 길을 그냥 가자고 했지만, 승마장이 가까이 오는 동안에도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승마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바로와 나는 죽기 살기로 경주하듯 말을 달렸다.

말이 지칠 정도로 달리면서 시간이 지나자 역시 알바로가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분풀이하고 싶은 마음에는 훨씬 더 빠르게 달려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힘 뺄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으니 말이다.

나도 천천히 말을 몰며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한참 뒤쳐져 있는 알바로에게 가자 알바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여전히 잘 달리는군.”

“물론이지. 새끼를 낳았지만, 아직도 끄떡없다고. 잘했어, 윈디.”

내가 윈디의 콧잔등을 손으로 쓰다듬자 윈디가 푸르르 거리며 소리를 냈다. 나는 천천히 승마장을 돌며 알바로가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세베로가 공들여서 가꿔놓은 덕이 승마장은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멋진 성이야. 정말 멋지군, 라울. 승마장까지도 돌아봤고 승마 실력도 확인했고, 뭐 이제 천천히 돌아가도 되겠지?”

알바로는 좀 심하다 싶게 숨을 몰아쉬면서 느리게 말을 몰았다. 그가 지나는 곳의 불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멋지다. 저러니 여자들이 모두 반했던 거겠지?

“부인이 참 아름답고 착하더군. 뭐, 우리가 흔히 보던 아가씨들과는 다른 분위기라고 할까?”

“물론이야, 알바로. 그러니까 내가 결혼했지? 그러니 결혼한 내 아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말지.”

“왜, 긴장하는 건가? 설마 내가 아직도 그렇게까지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무슨 소리야 알바로. 매력 있다니! 나보다 네 살이나 위인 거 기억 안 나? 네 살 위지만 원래 노안이기 때문에 나하고 열 살은 차이나 보인다고.”

“무슨 소리야 라울?”

나는 일부러 알바로를 쿡쿡 찔렀다. 나이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이미 40대에 접어든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생전 오고 싶어 하지 않던 이 까스틸로 성에 오고 싶어서 안달하고 초청을 해달라고 하고. 온 것도 좋고 다 좋지만, 디아나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마. 진지하게 경고하는 거야.”

“왜 이래 라울. 자네 부인이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그는 전혀 뜬금없는 소리라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지만 나는 한 번 더 꼭꼭 짚었다.

“뭘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한 번 더 짚어주는 거야. 그러니 엠마와 곱게 여행만 하고 돌아가도록 해. 내 경고 무시하면 곤란할 거야.”

“이봐 라울, 손님에게 너무 무섭게 말하는 거 아니야? 정말 순수하게 여행만 하고 돌아갈 거라고. 뭐 디아나가 나에게 마음을 준다고 그러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지금 그럴까 봐 걱정하는 거지?”

“그럴 일은 없어!”

나는 다가서며 당장 찔러 죽이기라도 할 듯이 알바로를 째려보았다.

“그 눈길 좀 거두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야. 하여튼 나는 순수하게 여행을 하러 왔다고.”

“그러면 잘 즐기다 가야겠지. 돌아가지.”

나는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엠마가 디아나에게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했어도 상관없다. 만일 디아나도 나도 다른 사람 말에 그렇게 휩쓸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어둠 속 불이 밝혀진 성문을 향해 나는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고 알바로도 내 뒤를 따랐다.

* * *

엠마는 금박이 수놓아진 레이스 가운을 걸치고 앉아 까스틸로 성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에 오고 난 뒤로 계속 날씨가 흐려서인지 우울한 빛깔이 성안의 정원들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짝이는 오렌지 나무와 곳곳에 피워있는 꽃들이 아름답다. 지나간 애인의 성에서 이러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무료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날들 중에 그나마 뭔가 새로운 흥미 거리가 있을까 싶어서 이곳까지 찾아왔다.

어쩌면 지난날 자기를 버리고 간 라울이 결혼했다는 여자도, 그의 결혼 생활도 궁금하고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말할 수 없는 질투가 활활 타오른다. 어제 디아나와 함께 차를 마셨던 시간 내내 엠마는 질투에 몸을 떨었다.

자기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디아나 까스틸로. 그래서 라울이 그녀를 선택한 걸까?

어떤 남자도 완전히 갖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를 그렇게 갖고 싶다고 원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라울 까스틸로 외에는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먼저 청혼도 했었던 거다.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두 살 연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비상한 머리와 기발한 생각, 자유분방함. 그리고 거칠 것 없는 그의 행보가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았었으니까.

그리고 함께했던 밤들은 더할 수 없이 짜릿했다. 그 남자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결혼이라는 걸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 남자를 갖기 위해서라면 결혼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라울 까스틸로! 그런 그녀의 청혼을 거절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가 오랫동안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디아나가 그런 남자에게 청혼을 먼저 하는 여자가 있겠냐며 웃었던 거다.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때 라울이 저의 청혼을 거절하고 미국으로 간 후에 한동안 알바로를 만났다.

알바로와의 연애 기간은 라울을 잊는 시간이었다. 남자는 남자로 잊는 거라고 믿고 있었고 그건 꽤 효과가 있었다. 알바로는 그대로의 매력이 있고 라울 까스틸로를 빼놓고는 마드리드 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노련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와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을 안 한다면 몰라도 기왕 한다면 최고의 부와 권력이 수반된 남자여야 했으니까. 그래서 택한 게 콘차 후작이었다.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알바로 남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산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뒤로 지금까지 늘 허전했다. 지루하고 권태롭고. 돈이라면 부족한 것도 없었고, 원하는 것이라면 갖지 못하는 것도 없었는데 딱히 그렇게 열정을 태울 만큼 좋아한 것이 없었다.

여행을 하고 특별하다 할 만한 것들을 수집해보고, 요트를 타고, 밀회를 즐겨 봐도 허무한 건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마드리드 궁에서 라울 까스틸로 부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활활 타는 호기심에 생기를 얻어서 이 까스틸로 성까지 왔지만 지금 엠마는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저 자신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똑똑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나. 카를로스”

그가 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들어와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가시 돋친 듯 예민한 엠마의 말에 알바로 남작이 씩 웃었다.

“전망이 정말 좋군. 내방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방 바꿀 생각 없어요.”

“바꿔달라고도 하지 않아.”

“뭐 때문에 온 거에요?”

“궁금해서 왔지. 겨뤄야 될 여자를 마주한 느낌이 어떤지? 차 마시면서 많은 말을 했겠지? 그 눈썰미로 다 알아 봤을 거 아니야. 물론 나도 정보를 좀 얻고 싶기도 하고, 여자가 볼 때 디아나 까스틸로가 어떤지 말이야.”

“왜 그러는 거죠? 당신이야말로 디아나하고 함께 차도 마셔봤고, 나보다 반나절 먼저 왔잖아요.”

“그러니까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는 여자더군. 순진하면서도 당돌한 데도 있고 말이야. 솔직하고.”

“맞아요. 나도 딱 그렇게 느꼈어. 너무 솔직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지.”

“그런 여자를 이길 수 있겠어, 엠마?”

“지금 날 뭐로 보는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라울을 이길 수 있겠어요? 디아나가 당신한테 과연 넘어갈까?”

“순진하고 당돌하고 또 솔직해서 의외인 면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건 순진하다는 거지. 남자라곤 라울밖에 모르는 그런 여자야.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알바로가 여유 있게 웃자 엠마는 콧방귀를 꼈다.

“글쎄, 그렇게 쉬울지 안 쉬울지는 봐야 아는 거구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라울한테 자신 있으니까. 오늘도 라울이 몇 번이나 나를 의식하는 걸 느꼈거든.”

“당연히 의식하겠지. 부인한테 혹시 헛소리하진 않을까 해서 말이야. 당연히 하겠지만.”

그가 놀리듯 말하자 엠마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런 것과 다른 눈길이라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라고요. 그리고 어쨌든 재미있잖아요.”

“사는 게 지루한가?”

알바로는 약간의 경멸이 담긴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물론 자신에게도 있는 그런 지루함이기에 더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어서 더 경멸한다. 자신도 엠마도 말이다.

“지루하냐고요? 물론이에요. 인생이 너무 무료하지 않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잘사는 부부라도 갈라놓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그렇게까지 생각했나? 갈라놓을 작정이야? 난 그렇게까지 생각 안 했는데. 난 그래도 디아나가 정말 마음에 들거든. 나하고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서 가정까지 깨지게 되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야.”

“뭐야? 디아나에게 정말 반하기라도 한 거야?”

엠마는 그조차도 마땅치 않은지 노려보았다. 그러자 알바로가 엠마의 볼을 쥐고 천천히 그 손을 내려 그녀의 가슴까지 내려왔다. 풍만한 가슴이 그의 커다란 손안에 잡힌다. 엠마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더 부풀자 그가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물론 엠마 당신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아는 여자인 건 확실해. 그것도 진짜로 말이지.”

“진짜?”

“솔직함, 꾸미지 않는 솔직함. 그건 너무 무서운 거지. 힘이 있는 진실.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진짜를 얻게 되겠지.”

알바로는 디아나에게 느끼는 진심을 말하는 거였지만 일부러 엠마를 찌르는 것이기도 했다. 묘한 여자의 질투를 부추기는 그런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효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당신이 진심 같은 거라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 진심을 디아나 까스틸로에게 주기라도 하겠다고?”

발끈해서 말하는 엠마의 말에 알바로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감싼 두 손에 천천히 힘을 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나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이 라울을 유혹하지 못한다면 나와 밤을 보내야 될 걸? 나는 내기로 그걸 걸 생각이거든. 좋았잖아, 우리의 옛날도.”

그렇게 말하며 알바로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에 짓눌린 가슴이 일그러지며 엠마가 그의 머리를 천천히 밀었다.

“지나간 얘기야.”

“물론 그렇지. 좋아, 각자 파이팅하기로 할까?”

“알았으니 인제 그만 가 봐요. 잘 자요, 알바로.”

“잘 자.”

알바로와 엠마가 그렇게 속삭이고 헤어지는 동안 디아나와 라울의 방은 더할 수 없이 뜨거운 공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라울, 오늘따라 왜 이래요?”

“내가 왜? 다른 때하고 다른 게 뭐가 있다고?”

격정적으로 안하는 라울의 말에 나는 나른한 눈을 들어 라울의 목을 감쌌다. 그러나 엠마가 끼고 있던 목걸이가 생각나서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엠마에게 목걸이를 선물했어요?”

“뭐?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선물했다는 거야?”

“엠마가 그러던데요. 당신이 중동에서 사다준 목걸이라고요.”

내 말에 라울은 뭔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마. 내가 그랬을 리가 있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대체 무슨 목걸이…….”

라울이 말하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웃기 시작한다.

“뭐에요? 왜 웃어? 진짜 선물한 거예요?”

“참. 그게 결국 내가 준 건 맞네. 세베로에게 적당한 걸로 선물하라고 했더니 아마 그때 중동에 있던 사람이 엄마 이사벨에게 선물로 보냈던 목걸이를 보냈다고 했어. 엄마는 그런 목걸이는 좋아하지 않았거든. 설마 그 목걸이를 하고 왔다고?”

참, 이러다 시시콜콜 지난 이야기 다 나오는 거 아니야?

“지금 그런 쓸데없는 목걸이 이야기 할 때야?”

라울이 한마디 하고는 내 입술을 깨물 듯 물어버렸다. 그의 손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허벅지로 내려와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다급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격정에 내 숨도 가빠진다.

“하아…… 라울,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 온 두 손님은 둘 다 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엠마 콘차를 의식하며 말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한 남자는 너무 느끼하고, 여자는 너무 요염해서 당신을 꼭 채갈 거 같아. 목걸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만 하고.”

라울이 손이 요동칠 때마다 흔들리던 몸을 억지로 잠깐 떨어뜨리며 말했다. 라울이 엠마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울은 그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거 같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나? 더군다나 지금 말이야.”

라울이 깊게 파고들며 세게 안자 저절로 소리치게 된다.

“아우, 쫌.”

“그러니까 이렇게 함께 사랑할 때는 다른 얘기는 하는 게 아니지.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고 제대로 사랑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그런 남자, 여자일 뿐이야.”

라울이 귓불을 물며 숨을 불어넣자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라울의 입술이 귓불을 물고 핥자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깊은 곳에서 관능적인 열기가 피어오른다.

“라울…….”

“침대에서는 서로에게만 집중하자고. 나처럼 말이야.”

라울은 그렇게 말하며 목선을 따라 입술을 내리고는 가슴 사이에 코를 박았다. 가슴골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라울은 가슴 사이에 얼굴을 비비며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예민한 곳이 자극받으며 나도 모르게 허리를 틀었다.

단단한 라울의 허벅지가 뒤로 빠지려는 다리를 꽉 누르고 몸을 겹쳐온다. 남성이 깊은 속살을 뚫고 들어올 때의 아찔한 느낌이란 절대로 익숙해지지 못 할 거 같다.

“하아…… 라울…….”

처음에는 그저 거칠게 뿜어내던 숨결이 점점 비명 같은 진한 신음으로 바뀐다. 끝까지 빼냈다가 다시 치고 들어올 때의 무서운 속도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더 매달리게 된다.

뜨거운 눈길과 부드러운 자극이 함께 이어지면서 나는 라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잘 들어, 디아나. 난 말이지 진짜 사랑이라는 걸 딱 한 사람에게만 느꼈어. 지금 내 아내, 그리고 내 아이들의 엄마한테 말이지. 그러니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마. 누구의 말에도 말이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라울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건 잘 안다. 진지하게 빛나는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어떨 때 저런 빛을 띠는지 아니까 말이다.

“라울 더는 못 견뎌요…….”

“할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날 잡아먹을 듯이 조여 대면서. 하아. 디아나.”

그가 깊게 몸을 겹치자 나는 라울을 부르며 몸을 떨었다. 라울은 나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더 크게 허리를 밀었다. 깊은 자극에서 퍼지는 감당하지 못할 전율이 그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다음날 나와 라울은 아침 식사 시간에 나가지 못했다. 늦게까지 사랑을 나누고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라울이 회사에 가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침대에서 늦게까지 나른한 몸을 움직이며 날이 훤하게 밝고도 한참을 더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아침 식사에 나가지도 않아서 흉보겠어요.”

“흉보려면 보라지. 뭘. 휴일이잖아?”

라울이 부드럽게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내 이마에 이마를 비볐다.

“일주일 내내 많이 고단했는데…… 당신 더 쉬던가요. 라울.”

“아니, 디아나가 일어날 때 일어나야지. 오랜만에 성안에 산책도 하고 같이 있자고.”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 부인도 같이 산책해요. 내일 지나면 식구들도 있어서 더 챙기지 못할 거 같아요.”

“내일은 아버님이랑 임규빈이 오는 날인가?”

“형님이라고 안 해요?”

“그러니까. 형님. 맞지. 형님.”

라울은 지금도 규빈이 오빠와는 어색한지 한 번씩 말을 할 때면 어정쩡하게 호칭을 한다. 그게 라울답기도 하니까. 우리가 늦게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책 중이라고 했다. 세베로는 우리를 보고 웃으며 간단한 브런치를 챙겨주었다.

“그런데 세베로, 요즘 기분이 썩 좋아 보여요.”

“썩 좋습니다. 이유는 잘 알고 계시지요?”

세베로의 말에 나는 세베로를 보고 빙긋 웃었다. 사라와 잘 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말이다. 사라의 얼굴에도 요즘 발그레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 특유의 아름다움.

“사라는 어디 갔어요?”

“도련님과 아가씨와 함께 호수로 갔습니다. 오늘은 야외 학습이라고요.”

“세베로도 따라가고 싶었겠어요,”

“물론입니다.”

웃는 세베로의 얼굴을 보다가 라울이 말을 꺼냈다.

“세베로, 만일 사라에게 청혼할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조언해주지.”

“감사합니다 주인님.”

세베로는 가볍게 인사했지만 라울은 아주 진지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사라와 잘된 것도 내 덕이 큰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블랑카와 산책을 한 게 사라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씩 웃는 세베로의 얼굴. 그게 무슨 의미 인지 나는 다 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둘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라울도 알까? 라울은 헛다리 짚으면서 세베로가 잘 된 게 다 그 질투작전 때문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 * *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 부인은 함께 산책하며 서로 비난하고 있었다.

“도무지 둘이 딱 붙어서 떨어질 틈이 없으니 기회도 없을 것 같아. 이러다가는 이 까스틸로 성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꼴이 되겠군요.”

엠마의 말에 알바로는 웃음 띤 얼굴로 여유 있게 말했다.

“그럼 우리 둘 다 지는 건가? 그럼 원하는 걸 얻기 힘들겠군.”

그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고 그게 엠마의 기분을 더 나쁘게 하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라도 생각해봐요. 여기까지 와서 산책만 하다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이런, 엠마가 정말 조바심이 났군. 정말 라울을 가지고 싶은 거야?”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내기를 했잖아요? 그건 자존심의 문제죠.”

날카롭게 인상 쓰며 말하는 엠마를 보며 알바로가 놀리듯 말했다.

“그런 것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나? 그럴 수도 있나? 아니면 내기에 져서 나 하고 하룻밤 보내게 되는 게 그렇게 싫어서?”

“딴소리 하지 마요. 당신이야말로 디아나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거 아니었나요?”

“뭐…… 어디까지가 진심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내가 원하는 여자 앞에서 진실 됐지.”

알바로의 솔직한 말이었다. 늘 그 순간에는 진실 됐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니 말이다.

“그랬죠. 순간순간 진심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나하고도 말이죠.”

“물론이야 엠마.”

“나한테 라울이 시간을 내줄 수 있게만 된다면 잘 될 텐데.”

“단둘이만 있을 수 있으면 자신 있다는 건가?”

“나는 자신 있어요. 알바로 당신은?”

“새삼스러워질게 뭐야. 내가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있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디아나와 라울의 성에 와서 알바로는 내기 같은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느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 말이다.

알바로는 앞에서 파르르 해서 자존심 운운하는 엠마가 재미있었다. 그저 그녀의 말에 장단이나 맞춰주는 말을 하는 거였지만 엠마는 바짝 달려들며 말했다.

“당신은 자신 있다고 하지만 디아나는 그렇게 만만해 보이지 않던걸요? 당신보단 라울한테 푹 빠져있는 것 같던데. 디아나가 당신에게 넘어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요. 결국 내기에 이기는 건 날 걸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고? 나 같은 남자를 놔두고?”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일이 아니에요. 차라리 우리가 둘이 같이 있으면 라울 부부가 더 붙어 있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좀 틈이라도 만들어 봐요.”

“그럼 나는 들어가서 낮잠이라도 잔다고 시간을 벌어볼 테니까 할 수 있으면 라울을 꿰차고 나가보던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을 때 저쪽에서 라울과 디아나가 간단한 브런치를 마치고 산책을 하러 나오고 있었다. 걷다가 마주친 두 커플은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도대체가 엠마와 알바로는 어떤 관곈지 모르겠군. 아직 연인인 거야? 아니면 무슨 사업적으로 할 얘기가 있는 사이인 거야?”

라울의 말에 엠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천만에요. 라울 우리는 늘 그렇듯 우정을 가징 친분 있는 사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어디 갔나요? 그 천사 같은 이네스는 어떻게 놀고 있을지 모르겠네.”

엠마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 하자 옆에 있던 알바로가 코웃음을 쳤다. 아이들이라고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엠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웃음 띤 얼굴로 디아나를 보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이들은 오늘 야외학습으로 저 옆쪽 호수로 갔어요.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오늘은 날씨까지 좋으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디아나가 말하는 동안에도 라울은 디아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엠마의 눈길이 사나와지는 걸 보고 알바로가 말했다.

“나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아요.”

“반대 아닌가요? 날씨가 흐려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디아나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알바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뽀송뽀송하고 좋은 날은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것도 좋지. 나는 쉴까 생각 중인데. 엠마는?”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날이 좋은데. 나는 나갈 생각이에요. 이렇게 좋은 날은 밖에 다녀야죠. 라울, 우리 같이 말을 타고 예전에 있던 그 오두막까지 가는 건 어때요?”

“아, 그 작은 오두막 말이에요?”

엠마가 말을 꺼내자 디아나가 반갑게 말했다. 디아나는 그 오두막을 정말 좋아하니까 엠마의 말에 대답한 거다. 디아나가 나서며 함께 엠마와 얘기한다. 어째서 엠마는 자꾸 예전 일을 꺼내는 걸까? 일부러 디아나를 자극하면서 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 잠깐 성으로 들어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죠 라울?”

디아나가 나를 보며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이란 옷에 민감하니까. 하긴 나 역시 승마는 제대로 갖춰 입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엠마와 알바로를 보며 말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처가집 식구들도 올 테니 오늘은 조용히 산책하는 것이 좋겠지요. 모레 가신다고 했던가?”

“왜, 라울? 더 빨리 갔으면 좋겠나?”

알베로가 묻는다. 당연하지 지금이라도 썩 꺼지면 좋겠어.

“아니 우리 처가식구들하고 함께 있는 것도 좋을 겁니다.”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동안 알바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쉬겠다고 했다. 각자 방으로 가서 준비하고 만나기로 했다.

* * *

나는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옆에서 라울은 먼저 준비를 마치고도 소파에 길게 누워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알바로 남작이 있는 방의 문을 노크했다. 혼자 쉬고 있다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려서 인사라도 하려고 말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알바로가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네, 하아…….”

신음 소리 같이 들려서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안을 들여다보니 알바로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남작님!”

“어어 디아나. 그게 말이지.”

그가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나를 보며 흐려진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내게 손을 뻗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와 함께 쿵 하고 넘어졌다. 육중한 몸이 넘어지면서 제법 큰 소리를 냈다.

“왜 이러세요! 남작님!”

나는 그를 밀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돌아눕자 그가 옆으로 벌렁 눕혀졌다. 그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넘어졌을 때 소리 때문인지 옆방에 있던 라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남작님이 아픈 것 같아요.”

“이봐 알바로 남작. 왜 이래?”

“그러게, 내가 왜 이러지?”

하며 그는 가슴을 쥐고 눈을 스르륵 감았다.

“어서 주치의를 불러요!”

가까운 곳에 있던 주치의는 빠르게 왔다. 콘차 후작부인도 알바로 방에 와서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치 의사는 알바로의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간단한 진찰을 하고는 알바로 남작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러고 그를 남자들이 힘을 합쳐 침대에 뉘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바로 남작은 평소에 약을 드시고 있던 것 같던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어, 침대 주변에 혹시 약이 있나 한 번 보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방안을 훑으며 혹시 약이 있나 찾았다. 그러자 머리맡에 작은 약통이 있었다. 심장병에 처방하는 그런 약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보다가 말했다.

“음 내 생각이 맞네요. 평소에도 약을 먹고 있었군. 약 먹는 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심장에 약간의 무리가 간 게 틀림없습니다. 병원에 가야할 정도는 아니고,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 푹 자게 두지요.

내가 볼 때 이 정도 약이면 충분히 쉬고 다음 검사 때 가도 될 것 같군요. 깨어난 후에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응급차를 부르거나 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 말에 모두 안심을 했다. 하지만 그날 예정이었던 승마나 피크닉은 모두 취소되었다.

* * *

“죽는 건 아니겠지?”

“아픈 거라고. 누가 죽는데?”

“하지만 꼭 죽은 거처럼 가만히 있잖아.”

“자는 거야.”

루벤과 이네스가 알바로의 머리맡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소곤소곤하는 말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아이들 특유의 밝은 달달한 느낌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웃게 된다.

“내가 죽는다고 누가 그러던?”

알바로가 눈을 뜨고 말하자 루벤과 이네스가 바로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

“일어났어요 아저씨? 많이 아파요?”

하얀 얼굴에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를 한 두 아이들의 얼굴이 천사처럼 보인다. 둘 다 눈동자는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다.

“아니. 너희가 하도 시끄럽게 해서 눈을 떴지. 혹시 나 죽는다고 그러니?”

빙긋 웃으며 묻자 아이들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젓는다.

“엄마 아빠가 괜찮으실 거라고 했어요. 주무시는 동안 잠깐만 봐도 되느냐고 그랬더니 괜찮다고 해서 들어온 거예요. 이네스가 자기 쿠키도 가져다 놓았어요. 어서 일어나서 드시라고.”

루벤이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냅킨 위에 얌전하게 놓인 초콜릿 쿠키를 보자 행복감이 밀려온다. 저 어린 아이들이 빨리 나으라고 쿠키를 가져다 놓았다.

“우리는 바로 나갈 거예요. 시끄러우면 아저씨가 쉬지 못하니까요.”

이네스가 말하자 알바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있어도 좋아. 너희들이 있으니 좋구나.”

알바로 남작이 몸을 일으키며 앉자 이네스가 묻는다.

“아저씨, 물 줄까요?”

“응 고마워.”

옆에 있던 물 잔을 주자 알바로가 마시며 아이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른들은 다 뭐하시니?”

“다 집에 있어요. 아저씨가 일어났다고 말하면 모두 올걸요? 나가서 말할까요?”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조금 있다가 내가 내려갈 테니까. 지금은 너희들이랑 놀고 싶구나.”

“그러면 안 된댔어요.”

이네스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뭐가?”

“안정을 취해야 한데요.”

아이 입에서 나오는 안정이라는 말이 웃겨서 알바로가 코웃음을 쳤다.

“예쁜 이네스,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나는 괜찮다.”

쓰러졌다 깨어나서 그런지 아이들이 이렇게 천진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었으면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때 문이 열리고 디아나가 들어왔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아이들의 볼에 키스하고는 아이들을 양손에 잡고 알바로 남작의 곁으로 갔다. 디아나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나 아이들의 미소, 모든 게 따뜻하고 행복해 보인다.

빛처럼 밝은 가족의 모습은 이런 거였다. 알바로는 가만히 디아나와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으세요?”

“폐를 끼쳤네요. 괜찮습니다.”

“며칠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어요. 병원에 다니고 계셨더라고요.”

“약이 있었는데 먹는 걸 잊었었나?”

알바로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지만 디아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주치의 선생님도 그 말씀 하셨어요. 며칠 안정 취하고 약을 복용하면 다음 검진 때 가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시던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보시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몸이 낫는 데로 바로 돌아가겠어요.”

“뭘 그렇게 빼는 거야 그냥 있으라면 있어.”

나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도대체 그 몸을 해서 어딜 빨리 돌아가겠다는 거야. 돌아가 봐야 아무도 없는 거 뻔히 다 알거든?”

알바로의 눈이 나를 향했다. 확실히 아파지면 약해지는 게 맞다. 알바로의 눈은 확실히 약해져 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손님이 온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건 알바로 남작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쉴 만큼 쉬다 가라고. 자 그럼 우리는 나가자.”

나는 디아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알바로 남작의 방에서 나왔다. 엠마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여자는 아픈 거라던가 구차한 것, 약한 것들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함께 하기로 한 승마도 무산되고 아이들과 함께 정원에서 놀다가 알바로 남작이 어떤가 싶어서 이 층으로 올라갈 때였다. 엠마의 소리가 그의 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디가 안 좋아서 약을 먹고 있었다고? 그 몸을 해서 무슨 내기를 한다는 거였어.”

걱정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엠마의 목소리였다. 앙칼진 목소리에도 알바로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한데 내기라도 하면 좋잖아? 덕분에 여기도 오고 말이야. 재미있었잖아.”

“무슨 소리야? 이제 늙은이가 다 됐네. 저렇게 예쁜 여자를 앞에 놓고 한 번 꼬셔보지도 못하고 쓰러지니 말이야.”

엠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내기, 예쁜 여자? 그건 디아나를 두고 하는 말일 거다. 남의 아내를 두고 내기를 하다니! 그러나 조금 더 들어보았다. 알바로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제 나는 그런 거 안 하기로 했어.”

“뭐?”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그렇게 순수한 여자라면 행복하게 지내도록 둬야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 그런데 그런 마음을 굳히게 만든 게 뭔지 알아? 아이들이었다고. 저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이 부모가 괴로워하고 싸우고 한다면 상처를 받을 거 같지 않아? 그런 건 전혀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이들은 웃는 게 좋지.”

그러자 기가 막힌다는 엠마의 소리가 들려왔다.

“성인군자 났군. 어찌 됐든 이 내기는 내가 이긴 거야. 그러니 당신은 내가 말한 대로 경매에서 낙찰 받았던 그 조각상을 나한테 줘야겠네.”

“좋아. 한 번 쓰러졌다가 깨니 아까운 게 없네. 줄게 엠마. 그 조각상. 그런데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아이도 없고 가족하나 없이 그렇게 조각상 들고 뭘 할 건데? 그게 재미있나?”

알바로의 말소리에는 아직 힘이 없었다. 평소의 목소리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엠마는 왕성한 목소리를 내며 알바로에게 말했다.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난 바로 돌아갈 생각이야. 당신 같이 이렇게 허약한 사람하고 같이 이 성에 있고 싶은 생각 없어.”

“하하하, 안됐군, 라울을 꼬셔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더는 그 얘기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둘이 무슨 내기를 하고 이 까스틸로 성에 들어왔는지 안 봐도 훤하다. 물론 그랬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듣고 있자니 기도차지 않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엠마가 허연 얼굴로 나를 본다.

“왜, 둘이 이야기하는 걸 들켜서 당황했나?”

그러나 이 둘이 얼마나 뻔뻔한지는 나도 잘 안다.

“무슨 소리야? 라울?”

전혀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 떼는 엠마를 보니 구역질이 다 난다. 그러고 보니 예쁜 얼굴이 마녀처럼 느껴진다.

“다 들었거든? 둘이 어떤 내기를 했는지 말이야.”

“그럼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긴 것도 들었겠네.”

엠마가 말하자 옆에서 알바로가 씩 웃었다.

“나는 기권이야. 기권 패.”

미안한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둘 다 느긋하다.

“좋아. 알바로 남작은 봐주지. 아프기도 하니까 말이야. 거기다 조각상까지 뺏기게 생겼으니. 어찌 됐든 여기서 빨리 회복하고 가도록 해.”

기권해서 봐주는 거야. 게다가 우리 아이들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기권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배려해주다니 고맙군.”

알바로는 빙긋 웃으며 옆에 있는 쿠키를 들어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알바로를 보다가 엠마를 향해 돌아섰다.

“엠마는 이 길로 바로 가지. 가겠다고 그러니 예의상으로도 잡을 생각 없고.”

“나도 여기 더 있을 생각 없어. 아이들이나 보면서 늙어가는 라울 보는 게 뭐가 좋다고.”

하여간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마음은 돌처럼 굳은 게 분명하다. 뭐 그렇다면 염장을 제대로 찔러 주지.

“우리 집이 부럽겠지. 안 그래?”

“천만 해. 라울. 하나도 안 부러워. 내가 부러울 게 뭐야?”

“그래.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으니 부러워하지 마. 그래도 부러울 걸? 부럽지 뭐. 돈이야 날 때부터 있던 거고 평생 쓰면서 살았잖아? 같이 함께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게 뭐가 좋다고. 그냥 콘차 후작한테 마음 붙이고 늙은이 애라도 하나 낳고 사는 게 어때?”

내 말에 엠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된다. 이제 60가까이 된 콘차 후작이 늙은이 인건 사실인데 갑자기 남편에게 늙은이라고 해서 뭐 잘 못됐나?

“그건 라울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물론 상관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옛 인연에 대한 예의로 하는 충고라고 해주면 좋겠군.”

“당신이 알 바 아니야.”

찬바람이 나게 소리치고는 엠마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짐을 싸서 성을 아주 나가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도 할 틈 없이 가버린 엠마의 소식을 몇 시간 뒤에 인터넷에서 접했다.

- 유럽 귀족의 망신살. 엠마 콘차 후작부인이 스페인에서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질을 하는 동영상이 올라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

기분이 안 좋았던지 엠마는 비행기 안에서 옆에 있는 아이들이 시끄럽다며 승무원에게 막말을 하며 항의하다가 도가 지나쳐서 승무원의 뺨을 쳤다고 한다. 한마디로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딱 내가 뺨을 쳐주고 싶을 걸 참았더니 나가서 더한 걸 맞고 있다. 아, 시원해.

알바로는 그날 저녁까지 누워있었고 주치의는 한 번 더 들러 알바로에게 주의하라고 하며 시간 맞춰 약을 복용하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아픈 사람을 처음 봐서인지 동정 어린 눈으로 지극하게 알바로를 간호해주었다.

이네스와 루벤이 남작의 방으로 들어가 말을 시키고 물도 따라주고 하자 알바로 남작은 정말 우리 아이들의 팬이 돼버렸다.

하긴 지가 어디서 저런 천사 같은 아이들의 수발을 받아보겠어? 다, 이 라울의 아이들이지. 정말 예쁘잖아. 하하하!

그리고 그날 저녁 어스름에 나는 세베로가 사라에게 청혼하는 것을 보았다. 다정하고 운치 있는 세베로. 청혼도 어쩌면 그런 곳에서 할 수가 있을까. 저런 면은 내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이 맞다.

까스틸로 성의 뒤쪽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수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곳에 배를 띄우고 세베로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석양을 등지고 선 사라의 눈에 붉은 석양을 그대로 받으며 노 젓는 세베로의 모습이 중세 기사처럼 멋지게 보이고 있었다.

배 안에는 커다란 꽃다발도 자리하고 있다. 세베로는 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물결에 흔들리자 꽃다발을 사라에게 주었다.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꽃다발이 사라의 손안에서 흔들리며 라벤더 향이 진하게 풍긴다.

라벤더와 백합과 장미가 풍성한 꽃다발은 몽환적인 향기를 품어내며 사라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세베로. 너무 예쁜 꽃다발이에요. 정말 너무 예뻐요.”

“좋아하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꽃다발보다 사라가 더 예뻐요.”

사라가 웃으며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자 세베로가 사라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세베로의 손에는 까만 벨벳 케이스에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세베로!”

사라가 이름을 부르자 세베로가 고개를 갸웃 하며 미소 짓는다. 그 미소가 가져다주는 익숙한 정다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라도 잘 알고 있다.

“사라, 함께 서울에서 만날 그 밤부터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데도 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 성에 당신이 제 발로 찾아왔지요. 다시 성에서 만났을 때 확신했어요. 당신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세베로는 낮은 음성으로 신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세베로의 말을 사라는 홀린 듯 듣고 있었다.

“세베로…….”

“내 아내가 되어 줘요. 평생 아끼고 사랑할 거예요. 당신을 지켜주고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요. 날 사랑해 줘요. 사라. 내 청혼을 받아줘요.”

반짝이는 눈동자가 노을을 머금고 알 수 없는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라는 고개를 Rm떡이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럴게요. 직접 끼워줘요. 세베로.”

사라의 대답에 세베로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앉은 채 몸을 앞으로 내밀어 사라의 입술에 키스했다. 사라가 세베로의 목에 팔을 두르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돌려주었다.

호수 위에 띄운 배가 격정적인 키스에 흔들렸지만 둘의 키스는 한참을 이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건 한 폭의 그림 같이 보인다. 동화 속의 그림.

“어! 어!”

창으로 세베로가 사라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고 키스하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소리로 디아나를 불렀다. 그러나 디아나는 저쪽에서 뭘 하는지 바로 다가오지 않는다.

“디아나! 어서 와. 진짜 평생 한 번밖에 못 볼 구경거리라고.”

“뭔데요?”

그제야 디아나가 창가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디아나의 머리를 세베로의 배가 떠 있는 호숫가로 돌렸다.

“디아나 저걸 봐.”

디아나가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온 디아나가 세베로의 배와 둘의 키스를 보고 소리친다.

“와우. 저거 지금 청혼하는 거 맞지요. 둘 사이에 꽃다발도 있고!”

디아나는 세베로를 보겠다고 더 목을 길게 빼며 창에 달라붙었다. 덕분에 디아나의 머리가 흔들리며 그녀의 향기가 내 코를 자극한다. 그녀의 향기에 나는 기분 좋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지만 디아나는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우와, 너무 로맨틱해요. 저런 나룻배에서 꽃다발을 주면서 청혼을 했군요?”

“그러니까 말이야. 하여튼 진정한 선수는 세베로란 말이지.”

“맞아요. 사라는 정말 좋겠어요. 행복할 거 같아요.”

디아나의 말에 나는 풀이 죽었다. 진짜 세베로의 감성은 내가 따라갈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우겨도 이것만은 안 된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디아나도 세베로가 좋아?”

“무슨 소리에요 라울, 나한테는 가장 멋진 남자가 당신이거든요?”

디아나가 내 볼에 키스해주었다. 나는 그 답례로 그녀의 입술에 깊게 키스했다. 사랑스러운 디아나.

“하긴 내 청혼도 나쁘지 않았어. 그렇지?”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디아나는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왜? 좋았다고 했잖아.”

“당신 청혼은 전에도 말했듯이 다 외웠다고요. 다시 한 번 들려줘요? 정말 좋은지?”

헉! 대체 남의 청혼을 왜 외우느냐고? 응? 여자가 그때 분위기만 기억하면 되는 거지 왜 그런 걸 외우나?

“아니. 절대 다시 들려주지 마. 알았어? 난 최선을 대해서 청혼한 거야. 그때 분위기 좋았잖아. 아니야? 그리고 그날 밤에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지 기억 안 나?”

“왜 기억 안 나겠어요? 당신이 결혼기념일 마다 스트립 쇼하는 데. 아주 머릿속에 들어와 박혀서 잊을 수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내 스트립쇼가 그렇게 좋다고?

나는 디아나를 보며 손으로 내 가슴을 탕탕 쳤다.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디아나가 좋아한다면 말이다.

양쪽 가슴을 울퉁불퉁 움직이자 디아나가 자지러진다.

“설마. 지금 또 하겠다고?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해가 지고 안지고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셔츠를 벗어던지고 양 가슴을 펄떡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해가지지 않았다는 건 아이들이 언제 우리 방으로 들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다.

“아빠!”

루벤과 이네스가 내 가슴 움직이는 걸 보더니 바로 달려와서 다리에 매달린다. 물론 이네스는 매달렸지만 루벤은 멀찍이 떨어져 말한다.

“그게 아빠 특기에요?”

“그렇다. 왜?”

그러자 루벤이 씩 웃으며 다시 묻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할 수 있어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내가 이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왜 해?

“아니, 엄마 앞에서만 할 거야.”

“그럼 특기는 다시 준비해야겠네요.”

얼굴에 표정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저놈은 저런 말을 잘도 한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눈을 크게 둥글렸다. 디아나는 루벤의 말이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고 웃었다. 참. 딱 이럴 때 아이들이 들어와서 말이야.

이네스와 루벤이 디아나가 앉아있는 침대에 기어 올라가 매달린다.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디아나와 아이들을 한꺼번에 품에 안았다. 가슴 가득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찬다.

결국, 엠마가 그렇게 돌아가서 디아나는 엠마와 나 알바로 남작의 지저분한 과거에 대해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 진실하고 성실한 아름다움. 알바로나 엠마가 틈타지 못한 건 디아나의 순수함과 사랑이었다.

틈이 없는 사랑. 나는 디아나에게 그런 사랑을 느끼며 더없는 행복과 고마움을 느낀다.

다음날 까스틸로 성은 손님들로 북적북적했다. 임규빈과 그 아내 지한영 그리고 루벤보다 한 살 어린 임창희까지 와서 북적였다. 그 틈에 루벤과 창희는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다.

사내놈들이란 일단 서열이 정해지기 전에는 싸울 수밖에 없는 족속이니 말이다.

아버님은 디아나를 몇 번이고 안고 손을 쓰다듬으며 반가워하셨다. 딸을 이렇게 좋아하시다니. 하긴 내가 이네스를 사랑하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서울에 돌아가면 모시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날 까스틸로 성에는 가장 밝은 불이 켜졌다. 세베로와 사라가 결혼을 발표하고 우리는 즉석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 루벤과 이네스의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

나의 영원한 사랑. 나의 아내. 아무래도 내 콩깍지는 영원히 벗겨질 거 같지가 않다. 영원히 말이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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