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
11.
그 뒷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섹스에 빠져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보고만 있어도 참기 힘들었다. 이 나이에 밤마다 얼마나 자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떨고 있는 여자를 무턱대로 안는 그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걱정 말아요. 사라.”
당연하다. 난 신사니까. 이렇게 악몽을 꾸고 떨고, 지난 과거를 말하느라 긴장한 여자를 힘들게 안고 싶지는 않다. 시간은 세베로의 것이었다.
“얼마든지요. 사라가 나를 정말 원할 때 까지 얼마든지 안고만 있을 수 있어요.”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를 안고 침대에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 눕히고는 불을 껐다. 달빛이 드는 창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 않다. 까맣게 반짝이는 사라의 눈동자를 보며 세베로가 그녀 그녀의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절대로 무서운 꿈, 꾸지 않게 그렇게 안아줄 수 있어요. 사라.”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베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베로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좁은 등을 쓰다듬자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남자 여자가 함께 있으면 피어오르는 묘한 열기에도 둘은 그렇게 안고 눈을 감았다.
세베로의 것이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아무리 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해도 지금 품 안에 있는 사라가 얼마나 뜨거운 몸짓을 했던 여자인지 알고 있어서 더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라는 그의 품이 너무도 포근하다. 조금 전의 악몽 같은 것은 그의 품에 있으니 전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세베로. 그가 저를 품어주고 있었다. 폭행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기억에 따뜻한 햇살을 비쳐주듯이 세베로의 마음이 사라를 달래주고 있었다.
“후우…….”
세베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으나 사라는 그대로 잠이 든 거 같다. 야속한 사라.
세베로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말랑한 가슴의 감촉. 얇은 천 하나 사이로 느껴지는 젖꼭지의 느낌. 참을 수 없는 향기에 세베로가 손을 내렸다. 그녀는 세베로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의 옷자락까지 잡고 있다.
세베로의 손이 사라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동그란 엉덩이가 느껴지자 몸 끝이 더 불끈 솟아오른다. 그래도 이렇게 잠든 사라를 깨워서 섹스 할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를 느껴보고 싶다.
세베로의 손이 그녀의 잠옷을 걷어 올리고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슬가슬한 음모가 느껴지며 여인의 향기가 올라온다. 참기 힘들게 퍼지는 진한 페로몬에 세베로가 눈을 감았다. 손으로 가지런히 음모를 쓰다듬다가 다시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나는 곰 인형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곰 인형은 발기하지 않는다.
세베로가 작게 입술을 움직이며 다짐했다.
죽어도 참을 거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 점점 눈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자 조금 전과는 다른 마음이 든다.
애틋하고 감싸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여자. 평생 옆에 두고 이렇게 안고 잘 수만 있다면 하룻밤 정도 못 참을 것도 없다.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길게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 세베로는 눈을 떴다. 언제나 눈을 뜨면 같은 시각. 그건 이제 생체 리듬과 같이 되어버렸다. 품 안에서 잠들어있는 사라에게 이불을 한 번 더 덮어주고 살그머니 팔을 뺐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스치는 걸 보면 어쩌면 잠이 깼는지도 모른다. 세베로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 말했다.
“내 하루가 시작되고 있어요. 하지만 사라는 좀 더 자도 돼요.”
그러자 사라가 대답 없이 이불을 뒤집어쓴다. 부끄러움이 많은 그녀의 반응에 세베로는 이불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시 한 번 볼에 입 맞추고 방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딱 나갔을 때 그 앞에는 라울이 있었다.
라울과 세베로의 눈이 어색하게 마주치자 라울의 입꼬리가 씩 하고 위로 올라가더니 라울이 물었다.
“아는 척하지 말아 줄까?”
라울의 입가에 있는 웃음의 실체를 세베로는 잘 안다. 지금 이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아마도 주인님 이라면 밤새 힘을 많이 썼을 거다. 하지만 세베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아닙니다, 주인님. 꼭 아는척 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무척 행복하거든요.”
“그래? 아는 척해 달라고 해서 하는 말인데 얼마나 뜨거웠는데? 눈에 핏발이 서도록 힘 쓴 거 같은 데 다리가 후들거리지는 않아? 아무리 허벅지가 탄탄해도 밤새 무리하면 후들거릴 텐데.”
“천만에요, 주인님. 제 다리는 아주 튼튼합니다. 그리고 저는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고 아주 따뜻한 밤을 보냈습니다.”
세베로의 말에 라울이 인상을 썼다.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세베로. 그동안 그렇게 체력 단련해놓고 활활 불태워야지 따듯한 밤은 도대체 어떤 건데?”
“주인님은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밤입니다.”
이번에는 라울의 눈이 커다래졌다.
밤이라면 세베로보다 내가 무조건 더 많이 아는데 어떻게 내가 모르는 밤이 있을 수 있나? 대체 무슨 체위를 한 거야? 물구나무라도 선거야? 내가 모르는 체위?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밤이라는 한마디에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보지만 말이 안 된다. 허! 내가 모르는 밤이라니.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게 어딨어?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설마 나한테 말하기 뭐해서 그래? 막, 마음같이 몸이 움직이질 않은 거야? 드디어 우리 세베로도 한물간 거야?”
내 말에 세베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니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할 수 있겠죠. 뜨거움을 지난 따듯함. 진정한 남자가 포용할 수 있는 여자의 마음 같은 거지요.”
“그건 뜨거운 게 다 식었다는 말이잖아. 몸이 안 따라 주니까 마음 어쩌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제가 주인님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있어서 그만.”
인사를 하고 세베로가 지나간다. 뒤에서 보니 세베로가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겠다. 대체 내가 모르는 밤, 뭐? 궁금해서 세베로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뜨거운 걸 지난 따듯함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뜨거운 게 다 식으면 따듯해지겠지.”
다 들렸을 텐데도 세베로가 그저 앞으로 간다. 그런데 뭐야 저 분위기는. 밤새 활활 태운 사람은 절대 아니야. 그럼 저 방에서 대체 뭘 했을까.
어찌 됐든 세베로가 사라의 방에서 나왔다는 건 더 이상 블랑카가 세베로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는 얘기겠지? 역시 내 질투작전이 성공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세베로가 사라의 방에서 나오겠어.
“디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결혼정보회사 같은걸 하나 더 차리는 게 나을 거 같아.”
방에 들어오며 신나서 말하는 라울의 얼굴이 아침 해처럼 밝다. 저런 표정을 지은 거 보면 뭔가 자기가 하려던 일이 잘 된 거다. 하지만 결혼정보회사라니. 정말 뜬금없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울?”
“오늘 아침 세베로가 어느 방에서 나온 줄 알아?”
“설마 사라의 방에서 나왔어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라울의 앞으로 갔다. 생각지 못한 소식이다. 어제 밤에 그럼 세베로가 사라에게 찾아간 걸까?
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자 라울이 따듯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내게 내밀었다.
“물론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어. 역시 나는 커플 메이커로서 소질이 있는 거야.”
라울이 커플 메이커의 소질이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라울의 말보다는 세베로의 소식이 더 궁금하다.
“정말이요? 그럼 둘이 정말 잘 된 거예요?”
“당연히 잘됐지. 내가 말했잖아. 내가 나서서 안 되는 건 절대로 없다고. 이제 블랑카에게 그만 오라고 해야 되겠어. 매일매일 수당을 지불했는데 말이야.”
맙소사. 결국 블랑카가 그렇게 매일 온 게 수당 때문이라니!
“라울. 정말로 그게 효과를 봤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사라하고 세베로가 잘 된 건 블랑카에 대한 질투 때문은 아니라고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라울. 요즘 블랑카가 매일 집에 와서 뭘 하고 가는 줄 알아요?”
“뭘 하는데?”
“들어와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세베로하고 이 넓은 정원을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다고요. 하이힐을 신고 온 여자를 그렇게 걷게 하다니 세베로도 정말 짓궂은 데가 있어요.”
나는 블랑카에게 수당까지 주면서 데리고 온 게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울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뭐가 짓궂어? 그거야말로 딱 내가 원하던 반대. 역시 세베로는 자기가 가진 카드를 어떻게 써먹어야 좋을지 잘 안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해줬지.”
“뭐요?”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세베로가 얼마나 블랑카와 할 일이 없었으면 매일 정원을 걸었겠냐고, 그런데 그게 잘 한일이라니?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라울이 내 볼에 쪽 하고 키스하면서 설명한다.
“그렇게 정원을 걷는다면 이 성안 어디서라도 보일 거 아니야. 그러면 그 긴 시간 동안 사라가 내내 창문에 붙어서 세베로가 블랑카하고 무슨 얘기를 할지, 둘이 손은 잡는지, 키스는 하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봤을 거 아니야.
그러다 보니 블랑카에게 세베로를 뺏길까 봐 마음의 문을 벌컥 열고, 마음의 문만 연 게 아니라 방문까지 열어서 세베로를 받아들인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당연히 몸도 열었겠지.”
“그만 해요, 라울.”
도저히 못 말리는 추론인데 또 듣고 있다가 보면 라울의 체계 속에서는 말이 된다는 거다. 참 이 궤변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활활 타는 뜨거운 것보다 한 단계 위인 따듯함이라는 게 대체 뭘까?”
“네?”
“아니, 남자 여자가 한방에서 있다 나오면서 활활 태웠냐고 물었는데 따듯한 밤을 보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라울은 정말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세베로가 사라를 위로해주며 따뜻한 기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는 어제 많이 떨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 사라가 굉장히 악몽을 꾸고 힘들어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세베로가 위로해주고 그냥 안아서 재우지 않았을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 게 가능해? 악몽 꾼 여자는 꿈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게 활활 태워줘야지.”
진짜 못 말린다. 이럴 때는 저런 라울과 살고 있는 내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라울! 당신만 가능하지 않지, 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여자가 품 안에 있는데 안고만 잔다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세베로는 어디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났을 거라고.”
라울의 저런 생각이 10년쯤 지나면 바뀌려나? 진지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저걸 뭐라고 말해? 말해도 모를 테니 모르는 척 하자.
그러고 보니 이제 며칠 후면 서울에서 친정식구들이 올 거다. 아,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서울에서 식구들이 오기 전에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도 오겠구나.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세베로가 있으니까 잘 알아서 하겠지?
하루하루 시간은 잘도 간다. 내일이면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이 오는 날이다. 집에 손님이 온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자꾸 집안을 돌아보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향기 좋은 차를 한 모금 하고는 방안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아침부터 찌뿌둥한 게 뒷목이 뻣뻣하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흐리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그때 라울의 전화벨이 울렸다. 라울이 느긋하게 전화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라울의 목소리가 탈의실까지 낭랑하게 들려온다.
“오늘 오겠단 말입니까?”
- 네, 일정 때문에 말입니다. 폐가 된다면 다음 기회로 미룰까요?”
“아니요, 말 나온 김에 오시죠. 성을 두루 구경하려면 며칠은 머물러야 될 걸요? 뭐라고요? 일주일은 머물고 싶다고? 뭐 그러시든가. 방이야 얼마든지 있고, 요리사도 있고. 주변에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야채들도 그득그득하니까 얼마든지 먹여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누구한테 전화를 저렇게 받고 있는 거야?
라울이 전화를 끊더니 내게 오면서 말했다.
“디아나, 오늘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이 우리 집으로 올 거야.”
“네? 내일 오기로 한 거 아니에요?”
“뭐 일정이 그렇게 됐다고 하네. 내가 시간 될 때 언제든지 오라고 했으니 그러라고 하지 뭐. 오늘 오겠대.”
“오늘이요?”
하필 이렇게 비가 쏟아질 거 같은 날 손님이 온다니. 나는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걸 느꼈다. 하지만 투정을 부릴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미 손님을 맞을 준비는 다 됐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세베로에게 말할게요.”
“비어있는 방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스트 룸에 묵도록 하면 되고. 그래 봐야 3일 후면 서울에서 식구들도 올 테니 정신없어서 갈 걸? 이게 내가 생각한 거거든. 하하하!”
“알겠어요.”
“적절한 음식도 세베로가 알아서 요리사에게 지시할 거야.”
“네.”
그렇게 분주하게 오전이 지나가고 오후부터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 세차게 퍼붓는지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싶을 정도로 컴컴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까스틸로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베로, 정말 손님이 오나 봐요. 어우 하필이면 이렇게 비가 많이 올 때.”
“우산을 준비하겠습니다.”
라울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고 아이들은 낮잠시간이었다. 사라가 있기는 하지만 위층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으니 나는 혼자 손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세베로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차 앞으로 나아가 문을 열자 거기선 알바로 남작이 내렸다. 트렁크 하나는 세베로가 들고 들어오고 알바로 남작은 잠깐 사이지만 바바리코트에 굵은 빗방울이 어깨에 얼룩진 채 문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까스틸로 부인. 그때 뵀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졌군요. 이렇게 밖에서 보니 결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말이죠.”
인사를 하는 알바로 남작을 세베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깐 바라보았다.
“남작님,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가방을 두고 차를 드시지요.”
“예. 고마워요, 세베로.”
알바로 남작이 세베로를 따라 올라가자 나는 어쩐지 어색함을 느꼈다. 저 사람의 인사는 어쩌면 이렇게 부담스러운 걸까?
* * *
“뭐야, 세베로? 알바로 남작이 혼자 왔다고? 그럼 지금 디아나하고 둘이 있단 말이야?”
당연히 엠마와 함께 올 줄 알았다. 알바로와 디아나가 단둘이 차를 마시거나 하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다급하게 물었으나 세베로는 언제나 그렇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네, 주인님. 분명히 주인님께서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 부인께서 같이 오실 거라고 하셨는데 알바로 남작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방을 안내해 드리고 지금은 두 분이 차를 마시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소리야, 세베로? 세베로도 알잖아. 알바로 남작이 얼마나 난봉꾼인지 말이야. 잠깐도 틈을 줘선 안 된다고. 둘이 같이 있게 해선 안 돼 세베로. 순진한 디아나가 능구렁이 같은 알바로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주인님께서 뭘 걱정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세뇨라는 그렇게 어린 분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유혹에 주인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넘어갈 그런 분은 절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물론 디아나가 그런 쉬운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알바로는 워낙 귀족사회에서 염문을 뿌리는 거로 유명하다.
“그래도 주의해줘. 세베로. 알바로가 디아나에게 어떤 수작도 걸지 못하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최대한 두 분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지요? 그리고 있다 보면 콘차 후작 부인께서 곧 오시겠죠?”
“같이 온다고 해놓고 연락도 없이 혼자 오다니. 혹시 둘이서 짜고서 무슨 일이라도 벌리는 게 아닌지.”
불길한 마음에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세베로는 내 말에 동의했다. 세베로의 예민한 촉으로 볼 때도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제 생각에는 주인님의 예상이 맞을 거 같습니다. 그 두 분은 내기로도 유명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순진한 귀족 부인을 꼬시는 걸 두고 내기를 한다든가 아니면 콘차 후작부인의 매력에 남자가 넘어가는지 안 넘어가는지 뭐 이런 걸 두고 말입니다. 게다가 두 분은 주인님께 앙금이 남아있을 수 있겠지요.”
기억력 좋은 세베로. 이미 예전의 일인데도 대충 우리들의 관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눈치로 때려서 말이다. 하긴 귀신을 속이지 세베로를 속일까?
“허, 참. 그 말은 무슨 말이지? 내가 다시 엠마에게 넘어갈까 봐 그러는 거야? 디아나를 두고 내가 엠마에게 넘어갈 거 같아?”
“주인님, 주인님이 이전에 한번 콘차 후작부인과 사귀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한 번 넘어간 전적이 있다는 거지요.”
“다 지나간 얘기라고. 정확히 말하면 사귄 것도 아니야.”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싹 지우고 싶다. 물론 세베로의 기억도 말이다. 그러나 세베로는 내 말에 반대 의사를 정확하게 밝힌다.
“아니요. 그건 정확히 사귄 겁니다. 주인님. 그때는 어떻게든 콘차 후작부인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그만해. 됐어. 나도 기억하고 있다고. 잊어버리고 싶은 걸 왜 자꾸 꺼내는 거야.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엠마의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어. 그것도 다 지나간 이야기고. 어찌 됐든 디아나하고 알바로가 둘이만 있게 해선 안 돼. 바로 돌아가고 싶지만, 오늘 오후엔 회의 일정도 있고 오히려 늦어질 것 같단 말이지.”
조바심이 든다. 어째서 타이밍이 이렇게 맞아주지 않는 거지?
내 이런 마음을 아는지 세베로가 듬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바람둥이 귀족에게서 세뇨라를 잘 지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그 바람둥이 남작이 디아나와 단둘이 차 마시고 식사하는 걸 못하게 할 수 있는 거지?”
“제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았어. 세베로. 그런데 세베로.”
“네, 주인님.”
“내가 이런 말을 했던가?”
“무슨 말이요?”
“내가 세베로를 믿는다고 말이야.”
“네. 여러 번 하셨습니다. 뭔가 정말 중요한 일을 시키실 때 그런 말을 하셨죠. 알겠습니다, 주인님. 믿음에 보답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럴 때 세베로는 정말 마음에 든다. 내 마음을 얼마나 속속들이 아는지 딱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디아나. 설마 알바로에게 넘어가지는 않겠지?
그때 그렇게 알바로의 눈앞에서 엠마를 채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자존심이 상하긴 꽤나 상했나 보군. 10년도 가까이 지난 일을 그것 때문에 내 마누라를 찔러보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알바로 그놈이 여자들에게 환심을 사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야. 그것도 재주는 재주지.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는 마음이 영 불편하다. 디아나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 * *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이 유리창에 닿으며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 계속 반복되면서 마치 유리창에 대고 물을 뿌리는 것처럼 물이 물결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유리창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을 알바로 남작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먼저 입을 열자 알바로가 진지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말했다.
“밖에 경치가 아름다운데 빗물에 가려지는군요.”
“그렇지만 저렇게 물결 지며 흘러내리는 빗물 너머로 보이는 경치도 좋지 않나요?”
“물론입니다. 이 까스틸로 성은 전망 좋은 걸로 유명하니까요. 맑은 날에만 좋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도 정말 운치 있군요.”
그는 빙긋 웃으며 인상 좋은 얼굴을 하고 나를 본다. 이상하게 열기를 일으키는 눈길이었다.
“참 위치를 잘 잡았죠?”
아주 살짝 언덕이 진 덕분에 멀리까지 보이는 전망은 탁월한 위치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알바로는 내 말에 동의하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네. 유서 깊은 가문답게 성이 참 아름답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상적이고 예의 있는 평범한 말이었다. 덕분에 나도 긴장을 늦추었다. 지금 앞에 있는 알바로는 어려운 손님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친척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성의 전망보다 디아나가 더 아름다워요. 그래서 지금 황홀하게 보고 있는 중이에요, 디아나를.”
우엑! 느끼해라. 이런 멘트를 쏟아 부으며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남자였어?
그런데 그 느끼한 멘트에도 불구하고 뚫어질 듯 바라보는 저 다정한 눈길 때문에 그런 느끼함 보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마음을 자꾸 파고들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 어째서 그러는 걸까? 내가 유부녀라는 걸 뻔히 알면서 조금도 조심하려고 하지 않고 거침없이 눈길을 보내고 있다.
“감사합니다.”
예의상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길을 자꾸 피하게 된다. 마주하기엔 너무나 강렬하다고나 할까?
“차가 참 좋군요. 향기가 아주 독특해요.”
“네. 저희 남편도, 저도 차를 즐기는 편이어서요. 이건 프랑스산이에요.”
티 테이블은 딱 적당했다. 머핀과 마말레이드, 그리고 약간의 과일, 쿠키 정도. 그런데 세베로가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온다.
“세베로.”
갑작스러운 이 엉뚱한 행동에 나는 세베로를 바라보았으나 세베로는 그것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자허토르테입니다. 라울 주인님께서 좋아하시는 건데 남작님께서 오시면 꼭 맛보게 해드리라고 해서. 케이크 사이에 살구 잼을 바르고 초콜릿을 듬뿍 바른 것이지요.”
갑자기 테이블을 다 차지하게 큰 케이크를 보고 알바로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게…… 참 훌륭한 케이크긴 하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군.”
자허토르테. 라울이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크게 만들지는 않는다. 크게 만든 걸 왜 통째로 갖고 온 거지? 잘라서 서빙해오지 않고?
나는 뭔가 이상해서 어깨를 으쓱하며 세베로를 보았다. 그러나 세베로는 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것 같다. 세베로가 그 큰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꼭 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잘라 드리라고 말씀을 하셔서 말입니다. 이것에 들어간 초콜릿의 양은 3파운드 이고…….”
아니, 세베로는 지금 하나하나 초콜릿이 몇 파운드가 들어갔는지, 사용한 버터는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레시피까지 다 말하고 있었다. 알바로는 살짝 인상을 쓰며 세베로에게 물었다.
“설마 까스틸로 백작이 이것까지 다 나에게 말해주라고 했나?”
“물론입니다. 알바로 남작님께서 초콜릿 케이크에는 일가견이 있을 거라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슨 재료를 썼는지, 어떤 맛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다 말해드리고 서빙하라고 했습니다.”
세베로의 말에 나는 신기해서 알바로를 보며 물었다.
“정말 초콜릿 케이크에 일가견이 있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저번 마드리드에서 만났을 때도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다 큰 어른이 초콜릿 케이크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는 게 재미있었다.
“네. 물론 제가 초콜릿 케이크에 일가견이 있는 건 맞습니다. 커다란 초콜릿 공장을 하나 하고 있거든요.”
초콜릿공장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신기하다. 내가 아는 초콜릿 회사일까?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초콜릿 박물관이 떠올랐다. 거기서 보니 예전에 초콜릿을 만들던 기구들도 전시해 놓았던데 그런 것들로 초콜릿을 만들 때부터 알바로 남작의 집안에서는 초콜릿을 만들었던 걸까?
“어머, 그러세요? 언제부터요? 저도 아는 회사인가요?”
“선조 때부터 운영해오던 초콜릿 공장입니다. 17세기 카카오가 유럽에 오기 시작한 이래로 대대로 초콜릿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맞을까요? 뭐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다가 제대로 큰 공장을 만든 건 1950년대부터지요.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보면 됩니다.”
“어, 너무 재미있어요. 초콜릿 공장이라니.”
내가 즐거워하자 알바로 남작은 가슴을 쭉 펴며 세베로를 보고 말했다.
“좋아, 세베로. 그럼 어디 한번 맛을 볼까?”
세베로는 초콜릿을 크게 잘라 알바로 남작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알바로 남작은 포크로 생크림과 초콜릿이 있는 부분을 작게 떠서 입에 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까스틸로 성의 요리사가 이 정도로 솜씨가 좋은지 정말 몰랐단 말이지?”
그렇게 한 입을 더 먹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세베로가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를 기우뚱하게 들다가 알바로 남작의 어깨 쪽에 그대로 쏟아 버린다.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실수가 없는 세베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니 저건 실수가 아니었다. 분명히 쏟아버린 거였는데 교묘하게 실수였나 싶게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세베로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차! 아 죄송합니다. 남작님. 아니 어쩌다가 이런 일이…… 용서하십시오.”
세베로의 말에도 남작은 초콜릿 케이크에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느라 대꾸도 하지 못했다. 세베로가 케이크 덩어리를 옮겨 놓고 냅킨으로 닦자 그 꼴이 더 우습게 되어버렸다. 알바로 남작은 작게 인상 쓰며 한숨처럼 토해냈다.
“이런 일이.”
옷을 완전히 버렸다. 어깨부터 앞부분이 온통 초콜릿 칠을 한 거 같아서 나는 나서지도 못하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세베로가 냅킨으로 알바로 남작의 앞섶을 더 닦으려 하자 남작이 손을 내밀어 말렸다.
“아니야, 됐어 세베로. 아, 디아나, 난 옷을 갈아입어야 할 거 같은데요?”
나를 보고 말하는 알바로 남작의 말을 세베로가 나서며 가로채서 대답했다.
“그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좀 쉬시다가 저녁 식사 때 내려오시면 될 거 같군요.”
어색하고 경계심이 있던 티타임이 끝났다. 세베로는 엉뚱한 짓을 했지만 티타임은 빨리 끝나 버렸다. 덕분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다고나 할까.
세베로가 남작과 함께 방을 안내해주겠다고 돌아서다 나를 보더니 씩 웃는다.
뭐지, 저 웃음은? 저렇게 실수를 하고 어째서 웃는 거야?
나는 세베로가 알바로 남작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 * *
회의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세비야에서 생산되는 양모를 한국의 MK 물산에서 사들여서 가공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양모를 생산해서 방적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한국에서 방적 과정을 거치는 것은 경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세비야 자체에서 생산을 하거나 제3국에서 방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을 놓고 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빨리 디아나가 있는 집으로 가고 싶지만, 어차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회의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회의 중간마다 그 알바로가 디아나에게 추근거리지는 않을지,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알바로 남작의 눈앞에서 엠마를 채가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되는 건데. 그때는 그게 뭔가 대단한 승리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귀족 사회에서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알바로를 향하고 있는 때였으니까.
그때 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막 자라나기 시작하는 난봉꾼 새싹이라고나 할까. 그런 상황에서 최고의 여자였던 엠마를 남작의 눈앞에서 채갈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전긍긍 알바로 남작이 디아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이고 있는 상황이라니 참 우스울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드는 것을 겨우 물리치고 회의에 집중하여 결국 제3국에서 방적 과정을 거치는 걸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식사시간이 거의 다 돼서 집에 가서 먹기에는 늦을 듯도 하고 또 중역들에게 모두 샌드위치가 나왔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샌드위치를 먹을까 그냥 집으로 갈까 고민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회의는 참, 사람을 진 빠지게 한다. 똑같은 것도 혼자 생각하고 그렇게 지시해버리면 끝날 거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다 보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다 보면 별 쓸데없는 말도 꼭 나오게 된다. 이상하게 회의를 하다 보면 핵심이 아닌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이 꼭 있다.
그러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회장님, 엠마 콘차 후작 부인께서 오셨는데요.”
엠마? 어째서 까스틸로 성으로 가지 않고 사무실로 온 거지?
“들어오시라고 해.”
뭐하느라고 알바로 남작과 함께 까스틸로 성으로 가지 않고 알바로 혼자 성으로 가고 엠마가 나한테 왔을까. 보나 마나 나에게 성에 같이 가자고 왔겠지. 잠시라도 단 둘이 있고 싶다는 그런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 쓰고 있을 때 바로 엠마가 들어왔다. 엠마는 우아한 자줏빛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광택 있는 볼레로를 덧입고 있어서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인다. 정말 방부제라도 먹었는지 나이를 알 수 없는 엠마였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지만, 정말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소파에 앉기 무섭게 단추를 풀었다. 하나의 커다란 장미 모양의 금빛 단추가 그녀의 하얀 손끝에서 풀어진다.
“실내가 좀 덥네요. 이럴 때는 시원한 게 마시기가 낫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옷을 벗는다. 볼레로를 벗자 내 눈이 커다래졌다. 우아하다고 생각하던 그 자줏빛 원피스는 윗부분은 거의 살이 비치는 천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엠마가 입고 있는 검은색의 속옷을 그대로 볼 수가 있었다.
“큼큼.”
한번 헛기침을 하고, 앞에 있는 물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와 결혼한 이후에 이렇게 가까이서 저렇게 속옷을 환히 비치며 내 앞에 앉은 여자는 엠마가 처음인가 보다.
“왜요, 라울?”
“아니야. 어서 집으로 갈까? 같이 가자고 온 거 맞지?”
“아니. 가긴 가야 되겠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이 샌드위치 내가 먹어도 될까요?”
“음, 그건 내 건데 말이야.”
일단 내 거로 나온 거니까 디아나 말고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건 싫다. 물론 디아나가 먹겠다고 했으면 주었겠지만 말이다.
“뭐야? 설마 내거니까 먹지 말라는 거예요?”
엠마가 눈썹을 올리며 묻는다. 줄까?
“잠깐만 기다려.”
나는 비서실에 연락해서 샌드위치 하나를 더 가져오라고 했다. 내 건 내가 먹고 하나 더 가져다주면 된다. 정말 배가 고프다. 긴 시간 회의를 한 탓에 너무나 허기가 졌다.
지금쯤 성에서도 식사를 하고 있을 텐데 세베로가 알아서 잘했겠지? 애들도 있고 말이야. 쪼그만 놈들이긴 하지만 남자가 엄마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방해하는 데는 충분히 든든하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 웃으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자 엠마가 나를 본다.
“왜 그렇게 웃어요?”
“뭐, 애들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네. 라울이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물론이지. 얼마나 귀여운지 이따 가서 보면 깜짝 놀랄걸? 아마 우리 애들을 보면 엠마도 아기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설마.”
그렇게 말하며 엠마는 샌드위치 소스를 입 가장자리에 묻혀가며 혀로 핥아 먹고 있었다. 선정적이고 눈길을 끄는 모습인 건 사실이다. 하긴, 엠마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녀는 남자의 눈길을 끄는 행동이 몸에 배어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들이 냅킨으로 들고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는 걸 마드리드 궁에서도 여러 번 보았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안 통하지. 이미 난 엠마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에 넋 놓았던 이전과 다르거든. 단정하고 우아하면서도 밤이면 섹시한 디아나의 매력에 푹 빠져서 말이다.
“그러지 마, 엠마.”
“뭘 말이에요?”
“그렇게 소스를 혀로 핥아 먹으면서 날 유혹하려고 하지 말라고.”
“라울. 지금 나에게 흔들렸어? 난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하지만 당신이 흔들린다면 한 번 더 해볼까요?”
그녀는 더 길게 혀를 빼서 입 가장자리를 혀로 핥고 있었다. 나는 그걸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자세히 보니까 하나도 선정적이지 않군. 하고 싶으면 계속해.”
나는 그녀의 흉내를 내며 혀를 길게 빼고 내 입술을 핥으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조금 지저분해 보이겠지만 그렇게 놀리고 싶었다. 그러자 그녀가 하얗게 나를 째려본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바로 성으로 가지 않고 여기 들린 건 의도한 건가?”
“물론이에요, 라울. 한 번이라도 더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
나는 콧방귀를 꼈다.
“물론 그래서였겠지. 그리고 그 몸도 보여주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훤히 비치는 걸 입었겠지?”
그러자 그녀가 씩 웃는다. 딱 맞는 말이라는 듯한 그 표정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마치 이런 모습을 보고도 넘어가지 않을 건가요? 하는 그런 표정.
엠마는 팽팽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는다.
“물론 의도한 거긴 하지만 예쁘지 않나요? 요즘 유행하는 시스루 룩인데.”
“뭐 나쁘진 않군. 속옷색깔에 신경을 써야 입을 수 있는 옷이겠어.”
“물론이죠.”
나는 그녀의 가슴과 드러나는 몸을 빤히 보면서 우적우적 샌드위치를 먹었다. 디아나라고 상상하고 보았으나 디아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일 거 같다. 역시 디아나는 치마 없는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가 딱 인데 말이야.
디아나를 생각하자 엠마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내 눈은 뭔가 다른 것을 응시하게 된다. 거 참 신기하지?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게 딱 맞는 말이야.
“라울 지금 무슨 생각해요?”
“음, 디아나가 그런 옷을 입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
“너무하군요. 라울.”
그녀는 정말 서운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내가 엠마 앞에서 디아나 생각을 하는 게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뭐가 너무 한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콘차 후작부인 앞에서 내 아내 생각을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정색을 하며 말하자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잘못된 거 맞지요. 난 아직 당신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나를 보는 동안은 다른 여자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싶다고요.”
“안됐군요. 그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아서 말이지. 그러니 어서 먹고 가자고.”
내가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고 일어나자 엠마도 일어섰다. 그녀는 겨우 한입만 먹고 일어서며 나를 보고 물었다.
“옷 입는 것 좀 도와주겠어요?”
“설마, 옷도 입지 못해서 입혀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그 옷은 어떻게 입고 나왔지? 못 입겠으면 그냥 나가지.”
디아나의 옷도 벗긴 적은 있어도 제대로 입혀줘 본 적이 없는데 엠마의 옷을 입혀주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다음 기회가 되면 내가 입혀주도록 하지. 디아나에게 먼저 옷을 입혀주고 난 다음 말이야.”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엠마의 인상은 콱콱 찌그러든다.
“아, 알았다. 지금 보니까 나이가 든 거 같네. 이렇게 인상을 쓰니까 주름이 좀 더 심해지잖아? 예전보다. 아, 아닌가? 보톡스를 너무 맞아서 주름 자체가 없어졌나?”
엠마가 어이없어서 나를 보았지만 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기막힌가? 그러니 내게서 관심 끄라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다가오지 말고 말이지.
“루벤, 이네스.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이쪽은 알바로 남작님이셔. 아빠 친구시고 우리 집에 오셨어.”
저녁 식사 전에 루벤과 이네스를 불러다 소개를 하자 양쪽의 반응이 모두 상대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있다. 일단 알바로 남작은 두 아이에게 놀란 듯이 말했다.
“이런, 정말 라울 까스틸로의 아이들이란 말인가요? 놀랍군. 너무 귀여워서.”
“안녕하세요? 알바로 남작님.”
루벤이 무게를 잡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네스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두 아이의 인사에 알바로는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정말 귀엽구나. 특히 이네스. 어떻게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가 있을까.”
하며 작은 손을 잡자고 손을 내밀자 이네스가 손등에 키스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4살짜리의 앙증맞은 손을 잡고 알바로는 무릎을 굽히고 이네스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는 걸 알았으면 선물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우리 이네스는 뭘 좋아하지?”
그러자 이네스가 낯선 손님에게 조금 수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 옆에서 루벤이 뭔가 못마땅한 듯이 묻는다.
“나한테는 왜 안 물어보세요?”
“뭘?”
루벤의 말에 알바로 남작이 루벤에게 고개를 돌리자 루벤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뭘 좋아하는지 묻지 않으셨잖아요. 이네스만 천사 같다고 하고. 차별적인 말이에요. 남작님 여자 좋아하세요?”
루벤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남작은 당황해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바로 루벤을 보며 말했다.
“이네스는 아직 어리니까. 루벤이 정말 멋진 오빠라면 동생을 칭찬하는 걸 샘내지는 않겠지?”
슬쩍 넘어가려는 남작에게 루벤이 다시 말했다.
“난 샘내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남작님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 말이에요. 아까부터 우리 엄마를 자꾸 쳐다보잖아요. 느끼한 눈으로 말이에요.”
루벤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작이 나를 계속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때 보면 루벤은 정말 라울을 닮았다. 꼭 찔러서 난감한 진실을 말하니 말이다. 남작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내가…… 그랬니?”
아! 완전 꼬마 라울이로군. 저 눈빛까지 말이야.
“네, 우리 엄마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들은 다 아빠한테 죽어요.”
입가에 힘을 주고 손날로 목을 자르는 시늉까지 하면서 말하는 태성을 보며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벤! 그런 말은 하다니.”
놀라서 말리자 엄마를 빤히 쳐다보고 씩 웃는다. 이런 개구쟁이를 어째야 할까?
어색한 분위기에 마침 사라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는 양쪽을 소개했다.
“이쪽은 알바로 남작이세요. 이쪽은 우리 아이들 가정교사이신 사라예요.”
함께 식탁에 앉고 세베로가 와인을 가지고 왔다. 알바로 남작은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아이들이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꼼꼼하게 아이들을 챙기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별로 없지 않나?
“남편이 곧 온다고 했어요. 콘차 후작부인은 남편과 같이 오고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남작은 라울이나 콘차 후작부인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편안하게 말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천사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다니 정말 좋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정말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이렇게 꼬마 손님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군요.”
그런데 식사 중간마다 간간이 주는 그의 눈길은 여전히 강렬하고 부담스러웠다. 그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루벤이 한마디 더 했다.
“우리 엄마가 예쁘기는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는 건 싫어요. 눈을 깔아주세요. 남작님.”
“뭐?”
“루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딱 벌어졌으나 앞에 있던 알바로 남작은 웃으며 말했다.
“딱 너희 아버지처럼 말하는구나.”
“아니요. 나는 아버지를 닮지는 않았어요. 엄마를 닮았지요.”
“그건 루벤의 바람인 것 같은데?”
루벤은 라울을 딱 빼닮았지만 늘 자신은 엄마를 닮았다고 주장을 한다. 아직 6살짜리의 바람은 엄마를 닮고 싶고 엄마랑 더 가까워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식사가 마칠 때쯤 라울이 왔다. 콘차 후작부인과 함께였는데 둘이 현관을 들어서는데 나는 기분이 묘한 걸 느꼈다. 함께 오는 건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왜 둘이 함께 들어서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나는 걸까?
특히 콘차 후작부인이 라울을 보는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어서 아이들은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후에 네 사람이 함께 둘러앉았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것 같네요. 특히 입구에 오렌지 나무가 더 풍성해진 것 같고.”
콘차 후작부인의 말에 알바로 남작이 옆에서 물었다.
“라울의 성에 온 적이 있다는 말이지, 엠마?”
“물론이에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라울의 안색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성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고?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하긴, 그때는 내가 어려서 더 좋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니 말이죠.”
콘차 후작부인은 말을 하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라울을 보며 말했다.
“하긴 그때 라울은 정말 숭어 같았는데.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숭어? 그만큼 신선했다는 얘기지.”
내가 모르는 라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콘차 후작부인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거기다 옆에 있던 알바로 남작은 또 다른 얘기를 한다.
“하긴 그때 엠마는 누가 뭐라 해도 사교계 최고의 여왕이고 누구나 탐내는 아름다움이었지. 그렇지 않나 라울?”
알바로 남작의 말에 라울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지나간 얘기들이야 더 할 게 있나요. 그리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닌데. 뭐 오렌지 나무가 더 길어졌다든가 성이 어떻다든가 보다는 내가 내 아내와 내 아이들과 함께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그걸 보여주고 싶었단 말입니다. 어떠십니까, 본 소감이?”
화제가 아이들로 넘어가자 알바로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여태 본 아이 중에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만은 사실이야. 디아나를 닮은 이네스는 정말 천사가 따로 없고.”
그러자 후작부인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언제부터 둘 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했는지 모르겠군요. 예전에는 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후작부인의 말에 알바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이들을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사람이 아니라 천사처럼 느껴지는군요. 여기도 말이 있는 거 같던데, 영지를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나가지 않겠어? 라울?”
“지금 승마를 할 때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겠지. 같이 나갑시다.”
남자 둘이 성안을 둘러보겠다고 나간 뒤 나와 콘차 후작부인은 어색하게 마주 앉아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성이네요. 게다가 아이들도 예쁘고 부인 참 행복해 보여요.”
엠마 콘차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참 듣기 좋은 말이기도 하고 감사한 말이기도 한데 왠지 그 말끝에 느껴지는 묘한 가시가 거슬렸다. 하지만 역시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그래, 너는 날 때부터 잘난 귀족이니 잘 놀다 가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계시는 동안 천천히 구경해 보세요. 같이 세비야 시내도 돌아보시고 피크닉도 가고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아래로 내려다 보는듯한 엠마 콘차의 눈초리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저 인사를 하고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니 이제 한숨 돌리게 된다.
이것저것 다 신경 쓰고 불편해하면 어떻게 사나? 아마 내가 그러면 라울과도 못 살걸? 있는 동안 잘 있다가 조용히들 가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세베로가 사라의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딱 눈에 들어왔다.
“헉! 뭐야? 둘이 진짜 잘 되는 거야?”
* * *
사라의 방으로 들어선 세베로는 바로 사라를 품에 안았다. 아직 어색해하는 면이 있지만 분명 세베로가 안자 가만히 머리를 기댄다. 이것만으로도 세베로는 날아갈 거처럼 행복했다.
“사라. 잘 지냈어요?”
“물론이에요. 우리 두 시간 전에도 봤잖아요.”
사라가 웃으며 말하자 세베로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는다.
“두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지요. 새로운 뉴스가 쏟아져 나올 만큼의 시간이거든요. 그리고 내게는 더 길었어요. 당신이 10시 반에 오라고 해서 두 시간 내내 시계만 보다 왔거든요.”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향이 진한 장미 한 송이를 꺼내서 사라에게 주었다. 생각지 못한 꽃에 사라의 눈이 커다래지자 세베로는 그녀의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교차하며 점점 더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키스가 이어지면서 혀 안에 감도는 그녀로 인해 세베로는 아래가 묵직해지는 걸 느끼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급하게 다가가서는 바로 도망칠 거 같은 사라여서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야한다. 둘은 마주 보고 웃고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사라, 일과가 끝나고 이렇게 보고 있으니 참, 행복하군요. 요즘도 악몽을 꾸나요?”
“가끔이요. 매일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난, 사라가 편안한 얼굴로 잠드는 걸 보고 싶어요. 당신이 악몽을 꾼다는 게 내 악몽이니 말이에요.”
세베로의 말에 사라가 웃었다. 다정하고 부드럽다. 다른 남자들처럼 자기 기분만 생각하고 무작정 달려들지 않는다. 원나잇으로 처음 만났는데도 바로 침대로 파고들지 않고 정중하게 기다리며 존중해준다. 그러서인지 먼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저기, 세베로, 우리 처음 만났던 그 날 밤 말이에요…….”
그날 세베로는 아름다운 밤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찔하게 뜨거운 밤이었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절정을 연거푸 느끼며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매달려 신음하고 그 품안에서 잠들었다.
“말해요, 사라. 그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에 대해서. 난 더없이 황홀하고 행복했습니다. 아침에 사라가 그렇게 떠나지만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사실, 나도 황홀했어요. 늦었지만 그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너무 좋았지만 그때 내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무거워서, 아무도 마주할 수 없어서 그렇게 도망간 거였어요.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말이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세베로였기에 그는 사라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진한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지금은 어때요? 만일 오늘 우리가 같이 보낸다면 또 도망갈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