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43)

- 외전 -

10.

아! 정말 나 많이 변한 거 맞네. 언제 이런 생각을 했다고. 침착해 라울, 디아나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만진 것도 아니고 보는 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쫄고 그래.

하지만 엠마와 오랜 시간을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슨 얘긴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지?”

그때 비서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보통 때와 다르게 조금 더 신경을 쓴 찻잔이었다.

“오, 역시 라울이네. 사무실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찻잔을 만날 수 있다니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홍차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신은 이런 차를 좋아하나 보지? 역시 난 커피보다 나은 거 같아.”

“그런가? 내가 알기로 엠마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났잖아, 라울.”

그녀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찻잔을 가져다 그윽하다는 듯 향기를 맡고는 한 모금 마셨다. 몸에 밴 과장되고 격식에 맞는 우아함이 딱 귀족사회의 사교계에서만 자란 그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차향이 정말 좋아요.”

그녀는 왜 이곳에 왔는지 좀처럼 말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바로 내가 짐작하는 바를 찌르듯이 물었다.

“음, 우리 서로 돌려 말할 거 없겠지. 그때 왕궁 무도회에서 디아나가 잃어버린 그 목걸이 알바로 남작이 슬쩍한 걸 엠마가 가지고 온 건가?”

그러자 엠마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눈동자를 위로 뜨며 나를 보았다.

“무슨 그런 말을. 그래도 왕궁의 무도회였는데 우리가 좀도둑처럼 그런 일을 하겠어?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야말로 양아치나 하는 수법이고.”

당연히 시치미 뗄 줄 알았다. 알면서도 이렇게 한 방 찌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도 그 일을 더 이상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다가오는 거지?”

“라울. 10년 만에 만난 친구치곤 좀 서운한 말인 거 알아요?”

약간의 비음을 섞으며 말하는 그녀는 여린 여자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외모처럼 그렇게 여리기만 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니 남자보다 더 독하다는 걸 말이다.

“10년 만에 만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불장난을 함께 했던 사이라면 모를까?”

“그럼 뭐라고 말할까? 연인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한때 꽤나 깊은 연애를 했던 그런 관계라고 해야 될까?”

엠마의 말에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해하는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하긴 그때 내가 그녀의 청혼을 거절했었지. 설마 아직도 그게 남아있는 거야?

나는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물었다.

“나를 많이 원망했었나?”

엠마에 대해 따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마드리드 궁에서 만난 이후로 이렇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아직도 그 옛날의 서운한 앙금 같은 게 남아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나를 원망했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마치 자존심이라도 상하는 듯 발끈 소리치며 말했다.

“천만에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감정이 있겠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도 알다시피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와 결혼했잖아요?”

맞다. 그녀는 콘차 후작과 결혼했다. 유럽에 엄청난 건물을 소유하고 독일 은행도 가지고 있는, 스무 살이나 많은 콘차 후작과 말이다.

“축하해. 지났지만 말이야.”

“아니에요. 당신 축하를 받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라울, 내 옆으로 와서 앉지 않겠어요?”

또 시작이다. 저렇게 나른한 눈을 하고 옆에 와서 앉으라니. 딱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십 년 전의 그 라울이 아니거든.

“아니, 엠마. 그 옆에 앉지 않을 거야. 엠마 당신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는 말이야, 어젯밤 디아나를 흠뻑 사랑하고 나서 아주 만족감에 젖어있거든. 욕구 불만도 아닌데 그 정도의 유혹으로 헬렐레 쫓아가는 그런 남자는 아니지.”

“라울!”

내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엠마는 한 번 더 나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쳐다본다. 마치 저렇게 쳐다보면 남자들이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홀려서 다가갈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한마디로 자기도취!

“됐어. 모든 사람에게는 적정거리라는 게 있지 않나? 우리 사이는 이 정도가 딱 맞는다고 생각해.”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 여자는 골수까지 자기도취가 밴 여자다. 물론 주변의 모든 남자가 그렇게 만든 거지만 말이다.

“설마 날 겁내는 거예요? 아내가 무서워서?”

“무슨 그런 말을!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내가 아내를 무서워하는 그런 남자로 보이나? 나 원래 그런 남자 아니잖아.”

“하긴, 그런 남잔 아니었지. 그러니까 이 엠마를 밀어냈겠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비즈니스 상대를 골랐기에 결혼을 한 거지요? 라울?”

이게 엠마의 본심일 거다. 가장 궁금한 거였겠지.

“그게 궁금했던 건가? 엠마가 아니고 다른 여자를 택한 이유? 어떤 비즈니스 상대였는지?”

내 물음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예민한 무엇이 거슬렸다. 그녀는 여유 있는 척 천천히 말을 했다.

“맞아요. 그게 궁금해, 라울. 나 말고 그렇게 대단한 비즈니스 상대, 대체 뭐였는지 말이야.”

“미안하군. 그때의 나는 사랑이라는 걸 몰랐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지. 디아나가 나를 바꾸어 놓았거든.”

내 말이 충격이었는지 엠마는 들고 있던 찻잔을 쨍 소리가 나도록 찻잔 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활활 타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말했다. 마치 눈에 붉은빛이라도 도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진다.

“설마 천하의 라울이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결혼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나한테조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는 그 사랑을 그 동양여자에게 했다고?”

나는 말 대신 조용히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 진심이었으니까.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 바보 만드는 건지 알았다면 그때 쉽게 빠지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바보가 돼도 사랑에 빠지는 건 행복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다시 돌아가도 디아나에게 빠져버릴 수밖에 없을 거다.

물론 그때는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엠마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이 보였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매력적이어서 결혼했다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라울?”

“응, 믿어. 현실은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야. 요즘 서울에서는 팩트 폭력이라는 게 있지. 현실이 얼마나 아프면 그런 말이 나왔겠어.”

“팩트 폭력?”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엠마를 보고 나는 씩 웃어주었다.

“현실은 원래 잔인한 거지. 어쩔 수 없어. 엠마가 디아나보다 더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고는 주관적인 거야. 그런 면에서 나한테는 엠마보다 디아나가 훨씬,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고. 백배 천배나!”

그러자 엠마가 벌떡 일어났다.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지금 그렇게 말한 거 후회하지도 모르는데 라울?”

“후회하지 않아. 사실이니까 말이야.”

“글쎄 그 사실이 언제까지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까? 그러면 그 어린 부인은 평생 다른 남자한테 눈 한번 돌리지 않을 거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내가 라울이 디아나만 보고 있는데 디아나가 다른 남자를 볼 리가 있나?

“절대로 안 돌릴 거야.”

“뭐로 장담하지? 사랑은 주관적인 거라며. 그리고 당신의 그 어린 부인은 라울이 저에게 푹 빠진 걸 이미 알 거 아니야?”

“물론 알지.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디아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리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특히 알바로 남작 같은 경우엔.”

“뭐라고?”

엠마는 정곡을 찔린 듯 되물었다. 내가 모를 리 없는 뻔한 일인데 말이다.

“둘이 뭐 짜고 내기를 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왜 그런 거 잘하잖아. 누가 누구의 마음을 먼저 가져가나 이런 거.”

“만일 그런 내기라도 했다면 어떡할 건데?”

“뭐 내가 어떡하겠어. 내기에서 둘 다 같이 지겠지.”

“라울, 정말 이렇게까지 날 무시하고 화나게 해도 돼?”

“아니. 꼭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다시 앉지. 이대로 나가버린다고 해도 잡지 않을 테니까 혹시 잡을까 해서 나가보거나 그러지는 말아줬음 좋겠군.”

그러자 엠마가 나를 노려보다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런 일은 안 해. 라울 까스틸로가 어떤 남자인지 아니까.”

“그냥 반갑게 차 한 잔하고 가는 정도가 나한텐 딱 좋을 거 같군. 그게 엠마에게도 좋을 거야. 콘차 후작이 요즘 건강도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콘차 후작이 건강이 안 좋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엠마 콘차가 남편에게 별 관심 없이 유럽을 여행하며 즐기고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말이다.

“내 남편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아이도 없고 남편이 죽으면 그 많은 재산을 혼자 물려받게 될 텐데 뭐에다 쓸 건가? 적절한 남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는 건 어때.”

“…….”

“아, 아직 콘차 후작이 살아있지?”

내 딴에는 엠마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 엠마는 그것도 기분이 나쁜가 보다.

“그럼 지금이라도 콘차 후작의 아이를 낳는 건 어때?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까 말이야, 그게 참. 사람 환장하게 예쁘더라고.”

깜찍한 이네스와 엉뚱한 루벤을 떠올리며 말하자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라고? 라울 정말이야? 믿을 수 없군. 세상에, 아이를 좋아했었어?”

“아니지. 이전에는 아이를 본 적도 없는데 아이들을 좋아했겠어? 내 주변을 둘러봐도 아이들이라곤 없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으니까 그 애들이 정말 너무 예쁘더라고. 날 찜 쪄 먹으려고 들어도 기꺼이 찜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그러자 엠마가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는 말을 여기 와서 다 듣네. 정말 라울이 아이들을 예뻐한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 라울이래.”

“그것도 믿을 수 없군. 천하의 라울 까스틸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건 무슨 소리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이봐 라울. 팩트폭력이라고 했나?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지. 라울 로카솔리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무슨 소리야? 난 사랑받는 남자라고.”

어쩌면 엠마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 주위에는 늘 사람이 있지만, 이 라울이라는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없는지도 모른다. 디아나와 아이들밖엔. 아, 물론 세베로는 아니겠지.

대부분 이해관계가 얽힌 사업상으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여자들은 나의 배경과 지위, 돈 때문에 모여들었었다. 물론, 그렇게라도 인기 있는 게 나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엠마가 저렇게 말을 하자 더 깊게 디아나와 아이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세상에 누구 하나 좋아하는 사람 없었던 나를 사랑해주고, 사랑받게 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그런 가족.

“아, 내가 괜히 온 거야? 라울,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아저씨가 됐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좋아, 난 아저씨니까 아저씨라고 말해도 아무 말 안 하겠어.”

“왜 이래, 라울. 옛날을 생각해봐. 환락을 좋아했잖아. 여자들이라면 아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나를 안을 때도 얼마나 뜨거웠는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난다. 엠마를 품에 안고 얼마나 달렸는지. 그때는 20대였고, 한창때였고, 디아나를 만나기도 훨씬 전이었다. 힘이 남아돌았고 나는 늘 발기 왕성한 그런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때 엠마는 또 얼마나 열정적이고 뜨거웠던 여자였나.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그때보다 더 뜨겁게 디아나를 안고 있지.”

노골적인 나의 말에 엠마는 질렸다는 듯이 나를 노려본다.

어차피 돌려서 말하고 대충 알아듣게 말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게다가 체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엠마가 더 전문가이니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말했는데 당연히 듣는 그녀는 더 바짝 열 받는 거 같다.

“알았어. 라울. 그렇게 뜨겁게 부인을 사랑한단 말이지? 그래서 더 가보고 싶어. 까스틸로 성에 말이야.”

“진짜 내 집에 오겠다는 거야? 불편하지 않겠어?”

“아니. 그 여자, 라울이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여자, 얼마나 대단한지 겪어보고 싶고. 정말로 그렇게 자식들이 예쁘고 좋은지 그것도 알아보고 싶어. 믿을 수가 없어. 라울 까스틸로 진이 결혼을 했다고? 그것도 아이들과 아내를 사랑한다고? 도대체 내가 알고 있던 라울이 맞는 거야?”

대체 왜 사람 말을 못 믿는 거야? 내가 엠마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디아나에게 느껴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내가 생각해도 믿지 못 할 만큼 말이야. 이걸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으려는지…….

“이봐. 엠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어. 그런데 어째서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야. 나는 전혀 콘차 후작의 성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엠마는 어째서 우리 집에 그렇게 오고 싶은 거지?”

“라울, 난 가고 싶어.”

이건 완전히 떼쓰는 거나 다름없다. 고이 왔다 가지는 않을 텐데. 뭐 그래도 난 끄떡없다. 우리 디아나도.

“그럼 와. 얼마든지 보여줄 테니까.”

“알았어. 그럼 시간을 정해서 알바로 남작과 같이 갈 거야.”

“모양이 보기 좋지 않을 텐데. 그 알바로야 아직까지 독신이라 쳐도 콘차 후작이 알바로 남작과 같이 까스틸로 성에 간다고 하면 좋아할까?”

“자세히 다 말 할 거 없어. 그냥, 까스틸로 성에 여행 간다고 하면 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어. 연락을 주면 디아나에게 말해놓지.”

나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와의 기억은 남아있지만, 감정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엠마 그녀는 아직 감정의 기억까지 남아있는 걸까? 이렇게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 * *

늦은 오후쯤 라울이 호텔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늦어서 이제 빨리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내 집이 성이라니! 또 그게 그렇게 자연스럽다니 말이다.

예전에 까스틸로 성은 나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그저 관광지 같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내 아이들이 사는 나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라울이 내 인생에 가져온 마법이었다.

“이제 빨리 가도 저녁에 도착하겠어요. 어서 빨리 갈 준비해요. 라울.”

“응…….”

그런데 라울은 평소보다 조금 어두운 느낌?

“혹시 뭐 밖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왜?”

“뭐라 그럴까? 평소라는 조금 다른 느낌? 마치…… 마음에 뭔가 걸리는 일을 한 것 같은 그런 느낌?”

헉. 이 여자 정말 대단하다. 내가 마음에 찔리는 일을 한 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결혼하면 여자들이 꼬리 하나가 더 늘어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남자 속마음이나 느낌까지 다 확 귀신처럼 알아버리는 그런? 헉! 그럼 나는 완전히 꼼작도 못 하는 남자가 되는 거야?

“뭘 그렇게 봐요?”

“아니 그럴 일이 있나. 내가 뭐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뭐 있겠어?”

“속으로는 많겠지 뭐.”

그 속에 뭐가 다 들어있는지 내가 알게 뭐야?

나는 라울이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의 속마음까지 자신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사람은 다 그러니까. 단지 저렇게 자신하는 걸 그냥 두고 싶지 않은 심술일까?

“당신 진짜 나한테 마음에 걸리는 거 하나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내가 야무지게 째려보며 말하자 라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속은 어쩔지 몰라도 절대 내색하지 않으려는 사람인 건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엉뚱한 짓을 해도 자기가 하는 건 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라울이니까 말이다.

“그러는 디아나는 어때? 디아나는 뭐 마음에 걸리는 일 없었나 그 잠깐 동안에?”

어쩌다 화살이 내게로 돌아오는 건지. 라울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다.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알바로 남작과 산책도 하고 아이스크림까지 받아먹었으니까. 뭐 내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이거 나중에 알면 부부 사이에 금가는 거 아니야?

“실은 알바로 남작을 만났어요.”

“뭐야?”

갑자기 라울의 눈썹이 확 오므라든다.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떳떳하다고.

“당신 가고 난 다음에 커피 한잔하러 갔더니 마침 딱 그 카페에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뭘 했지 둘이? 얼마나 같이 있던 거야? 뭐라고 그랬지 나에 대해서?”

참, 나는 한마디 했는데 질문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이럴 때는 일일이 대답하는 거 보다 되묻는 게 상책이다.

“왜요? 알바로 남작이 당신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할 거 있어요?”

“아니, 절대 나는 남한테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을 만한 일을 하고 산적이 없는 사람이지. 단지 알바로 그놈은 말이지…….”

“연적이었다면서요.”

뭔가 뒷말을 흐리는 라울의 뒷말을 내가 싹둑 자르며 말했다.

“뭐야? 그런 말까지 했어?!”

라울이 펄쩍 뛰며 말한다. 이 남자 기억력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연적이라는 말은 마드리드 궁의 무도회에서 이미 나온 말인데 왜 새삼스럽게 펄쩍 뛰는 거야? 둘 다 그 여자에게 채였다면서 말이야. 도대체 얼마나 큰 연적이었기에 저러는 거야?

“둘 다 놓쳤다면서요, 그 여자. 그런데도 그렇게 대단해요?”

뭐야 알바로. 이렇게까지 다 말한 거야? 뭐 하긴 다 지난 이야기긴 하지만…….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지만 다 알아도 별 거 아니야. 아니, 여자들에게는 별 거 일까?

“별거 아니니까 알바로 남작도 그렇게 말했겠지.”

“그래요. 나도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몇 마디 하다가 당신이 그 사람하고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말 생각나서 그냥 혼자 돌아오겠다고 했더니 나더러 라울 말고 다른 남자는 가까이 다가오면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나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나는 라울 말고 다른 남자만 봐도 그렇다고 그러지?”

“그렇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혹시 남편이 집착도 너무 많고 여자 꼼짝도 못하게 하는 그런 남자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그것도 그렇다고 했지요.”

“뭐야? 그렇다고? 내가? 이 라울 까스틸로가 집착한다고?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군. 나는 집착이나 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하여튼 이 남자는 자기가 어떤지 너무 몰라. 그럼 그게 집착이지 뭐가 집착인데?

“당신이 집착하지 않는다고? 정말 아니에요? 맞잖아요, 당신. 나한테 집착하는 거.”

“아니지, 나는 그렇게 여자한테 집착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래, 곧 죽어도 절대 아니지. 다른 때 같으면 그래 아니다 하고 넘어갈 텐데 이상하게 항복을 받아내고 싶다.

“그냥 인정하시지요. 그 정도면 집착이거든요? 당신 내가 다른 남자하고 말하는 것도 싫고 내가 어디서 뭐하는지 다 알고 싶고 당신만 바라봤으면 좋겠지요. 그렇지요?”

내 말에 라울은 나를 한 번 째려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렇게 항복할 것이지. 그런데 라울은 집요하게 자기 관심사를 묻는다.

“그래서? 알바로 하고 그 다음은?”

“그다음이 어딨겠어요? 자꾸 말 섞어도 당신이 싫어할 게 뻔하니까, 그래서 그냥 왔죠.”

“잘했어. 그런 자세 아주 좋아.”

라울이 아주 흡족한 얼굴로 말하자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틈만 나면 손에 들어오게 길을 들여야 하니까 말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혹시라도 나중에 틈이 생길까 봐 다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남을 통해서 나하고 알바로 남작이 커피 마셨다더라. 이런 소리 들으면 안 좋을 거 아니에요.”

“물론이지.”

“그러니까 말 잘했죠? 그러니까 말해 봐요 당신도.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그러자 라울이 긴 속눈썹을 들어올렸다. 속눈썹 아래로 보랏빛 도는 까만 눈동자가 나를 본다. 이럴 때 저 사람의 생각을 알면 좋을 텐데…….

가슴이 뜨끔했지만 절대로 말 못한다. 엠마와 나 사이는 디아나와 알바로 처럼 차나 한 잔 마신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이는 아니잖아? 혹시라도 과거에 함께 애인 관계에 있었던, 그것도 찐한 관계기도 했던 그런 여잔걸 알면 펄펄 뛸 거 아니야.

아! 빨리 알바로고 엠마고, 까스틸로 성에 빨리 다녀가고 잊고 살았으면 좋겠군. 둘이 무슨 작당을 하고 이렇게 까스틸로 성에 온다고 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가 절대 그 사람들에게 흔들릴만한 사람들은 아니지.

기왕이면 처가 집사람들이 올 때 같이 왔으면 좋겠군. 그러면 정신없어서 빨리 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디아나를 바짝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버님이랑 임규빈 네 식구들은 언제 오는 거지?”

“그러게, 그때 말씀하시길 한 달쯤 있다고 온다고 한지가 이주 정도 지났으니까 이제 한 보름 안에는 오시겠네요. 지금 물어봐야겠다. 비행기 예약했으면 언제 올 것인지 알 테니까.”

디아나가 생기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친정식구들이 온다고 하니까 갑자기 기분 좋은가 보다. 임규빈의 아내 지한영도 올 테니까 말이다. 디아나가 또래 한국여자와 이야기하며 좋아할 걸 생각하니 내 기분도 좋다.

물론 처가 식구들이 와서 정신없을 때 엠마와 알바로가 온다면 더없이 좋다. 그 사람 많은 데서 뭘 꾸미겠어?

딱 그때 손님을 초청하면 되겠군. 처가 식구들도 잔뜩 와서 정신 하나도 없을 때 그럴 때 와서 며칠 있다가 가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디아나는 벌써 어느 틈에 친정에 전화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아빠, 날짜 잡혔어요? 한 달 정도 있다 온다고 했으면 이주 뒤면 오나요? 네? 아…… 일정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요? 그래서요? 비행기 표는 끊으셨어요?”

- 그래 끊었다. 규빈이 처 말로는 다음 달 7일에 떠난다고 하더라.

“아 알겠어요. 매일매일 손꼽아 기다려야겠네. 이제 겨우 열여섯 밤만 자면 되니까요.”

- 그래 디아나, 나도 너무 보고 싶구나. 태성이는 잘 있니?

“너무 잘 있지요. 킨더스쿨에도 적응을 잘했고요. 올 가을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게 생겼어요.”

- 그렇구나. 가연이는? 많이 컸지?

“이네스요? 가연이도 잘 있죠. 아버지 오시면 너무 좋아할 것 같아요.”

- 그래 그럼, 스페인에서 보자.

“네 아빠.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고 라울을 보는데 웃음이 가득 나온다. 친정 식구들이 온다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웃게 된다. 너무 좋다.

“라울! 아빠는 16일만 지나면 오신대요.”

“그렇게 좋아? 아빠가 보고 싶었나?”

그렇게 의식하고 아빠를 그리워하지는 않은 거 같았는데, 난 아빠가 보고 싶었나 보다. 라울을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알겠다.

어릴 적부터 함께 살아서 잔정이 든 건 아니었지만 아빠가 얼마나 엄마를 오래 그리워하고 깊이 사랑했는지 알았기에 그런 아빠가 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날 만난 이후로 해마다 건강 검진 때만 되면 먼저 전화하는 아빠였다. 병원에서 내 심장은 튼튼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외할머니도 엄마도 심장병으로 단명한 것 때문에 늘 걱정하셨다.

아빠에게 나는 잃어버린 여인이고 딸이고 아빠의 인생에 모든 감정을 쏟아 부은 사랑의 결정체였으니 말이다.

그런 아빠가 오신다고 하는 데 왜 안 좋을까?

“잘 됐네. 복잡하기는 하지만 친정식구들 왔을 때 아예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 부인을 초대하면 어떨까?”

“네? 그런데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게 돼서요.”

나는 걱정이 돼서 그렇게 말한 건데 라울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무슨, 이렇게 큰 성에 그 정도 손님이 온다고 무슨 문제야? 한 때는 정말 많은 손님들이 한 달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한 번에 올 때 오는 게 좋아. 그래야 얼렁뚱땅 잘 지나가지.”

라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까스틸로 성의 살림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집사인 세베로가 다 알아서 하니 말이다.

“그건 라울이 알아서 해요. 하지만 콘차 후작부인과 알바로 남작에게 제대로 신경을 잘 못써줄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다 잘할 수 있어. 세베로가 있는데 뭘.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좋아. 알았지?”

“알았어요. 얼른 가요 우리. 애들 보고 싶단 말이에요.”

디아나와 함께 바로 세비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선물이 없느냐고 졸랐고 세베로는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물론 우리가 와서 안도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역시 세베로가 아무리 유능한 집사라도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대신할 수는 없는 거였다.

이네스에게는 마드리드 궁의 모형과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사다주었고, 루벤에게는 날렵한 스포츠카 모형을 사다 주었다. 둘 다 장난감을 받아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긴 아이들 때는 저런 게 제일 좋지.

디아나가 아이들을 보고 흡족해하며 짐을 풀고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나는 알바로와 엠마에게 연락했다. 다음 달 초에 방문해 주었으면 하고 말이다. 둘 다 내가 초청하는 전화를 먼저 하자 의외였는지 기꺼이 그때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알바로 남작에게 연락이 왔다.

“다음 달 초에는 일정이 있어서 조금 당겨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성에서 며칠 지내고 가려면 말이지요. 이달 말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하여간 이놈은 만만하지가 않단 말이야. 당연히 괜찮다고 해야지 며칠은 먼저 오겠지만 바로 처가 식구들하고 지내게 될 테니 괜찮겠지.

“예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성에서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예의상의 연락을 보내고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디아나는 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느라 정신없이 내 방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정말 엠마와 알바로가 이 까스틸로 성에 있는 동안에 별문제는 없겠지? 단 며칠인데.

* * *

“이제 너무 늦었으니까 들어가 자야 한다. 이네스! 사라, 이네스 좀 재워줘요. 태성이는 내가…… 태성아 장난감 내려두고.”

그리고 태성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흥분해서 볼이 빨갛게 상기된 태성이가 나를 보며 묻는다.

“엄마 마드리드 궁은 정말 그렇게 큰가요?”

마드리드 궁에 다녀온 뒤로 태성이가 가끔씩 묻는 말이었다. 아이들 상상 속에 궁전은 또 다를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디즈니 성을 생각하려나?

“응, 크지! 다음에 같이 가보자.”

같이 가자는 말에 태성이 눈을 반짝이며 신나서 말했다.

“정말이요? 와. 그럼 나도 아가씨와 춤을 추는 건가요? 이네스도 드레스를 입나요? 그렇게 좋아요? 크고?”

“그럼,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기도 했어.”

“엄마, 세베로는 언제 사라하고 결혼해요? 우리는 세베로에게 사라와 결혼하라고 했어요.”

“뭐? 정말?”

깜짝 놀라서 내가 말하자 태성이는 천진한 눈을 하고는 나를 본다. 애들 눈에도 세베로와 사라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데 매일같이 세베로를 만나러 오는 아줌마가 있어서 사라가 세베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음…… 그렇구나.”

질투작전이 역효과라도 난 걸까? 라울이 질투 작전이라며 블랑카를 소개해준 게 오히려 더 안 좋은 건가? 혼자 그렇게 갸웃거리며 태성이를 재우고 침실로 돌아갔다.

잠깐 잠을 잔 거 같은데 왠지 목이 마른 것 같아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바로 잠이 오지 않아서 가만히 깨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 뒤척이게 된다. 옆에서 라울이 곤하게 자는 걸 보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가서 아이들이 있는 3층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분명 사라의 방이었는데? 사라의 방 가까이 가자 사라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안 돼, 안 돼!”

무슨 일이지? 놀라서 방문을 열자 사라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라? 나에요, 디아나. 불 좀 켤게요.”

작은 조명등을 올리고 사라에게 다가갔다. 땀에 흠뻑 젖어있는 사라의 눈은 공포로 젖어있었다. 물을 한 잔 따라서 건네자 그제야 사라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괜찮은데…… 제가 소리를 너무 크게 질렀나 봐요.”

“아니에요, 나는 괜찮은데. 악몽을 꿨나 봐요 사라.”

“별거 아니에요.”

“사라. 어떤 일은, 그 이야기를 하면 나을 수도 있어요. 얘기할 거 있으면 해봐요.”

나는 사라의 손을 잡았다. 나보다 열 살 많은 사라지만 이럴 때 보면 내가 더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의 엄마여서 그럴까?

“사실 전남편 꿈을 꿨어요. 맞는 꿈…….”

“맞아요?”

“네.”

“전 남편이 때렸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그 말을 듣기만 해도 내 손이 꽉 주먹이 쥐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제일 나쁜 것들이 여자 때리는 남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물론 그런지 모르고 결혼했겠지만…… 대체 결혼생활을 얼마나 한 거예요?”

“결혼생활을 3년 정도 했어요.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하고, 나도 늦게 한 결혼이라 남편이 달라질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됐어요.”

그녀는 술술 이야기를 했다. 악몽을 꾸다가 깨서 그런지 평소의 긴장해서 조심만 하던 말이 쉽게 나오고 있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막연하게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결혼생활이었던 거 같다.

“세상에. 지금은 괜찮아요. 다 꿈이에요.”

내가 사라의 몸을 꽉 안아주고는 다시 손을 잡고 말하자 사라는 그제야 제대로 정신이 드는지 다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 내가 무슨 말을…… 아니에요, 사모님. 다 지난 일이고 그냥 꿈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쓰럽게도 계속 괜찮다는 그녀를 보고 내가 말했다.

“나도 괜찮아요. 사라가 무슨 말을 해도 말이지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가져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모님.”

그러나 나는 그렇게 떨고 있는 사라를 그대로 두고 올 수는 없었다. 페퍼민트 차를 한 잔 타서 들어가는데 세베로가 나왔다.

“무슨 일이지요 사모님? 이 늦은 시간에.”

“사라가 악몽을 꾼 것 같아서요.”

그러자 세베로의 눈이 걱정으로 덮였다. 그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걱정으로 진하게 물드는 걸 보자 세베로가 정말 사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베로. 내가 차도 한잔 주고, 얘기도 들어주고 그럴게요. 지금 세베로가 들어간다면 너무 이상할 것 같아요. 늦은 시간이고 자다 말았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베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울지 안 봐도 훤하다. 그러나 아직 안정되지 않은 사라에게 덩치 큰 세베로가 들어간다는 건 오히려 역효과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베로에게 고갯짓을 한 번 하고 사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라는 어느새 일어나 두툼한 카디건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흐트러졌던 머리도 다듬어 하나로 묶고 있었다.

“이것 좀 마셔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직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으면 저럴까. 나는 그 앞에 앉아서 나도 차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얘기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하고 나면 속이 풀리는 경우가 많이 있더라고요. 얘기하면 들어줄게요.”

“아니에요. 그냥 빨리 잊어야지요.”

그녀는 애써 웃으려 했지만 파리한 얼굴은 약간의 웃음도 어울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툴툴 털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면 쉽게 잊히지는 않아요. 사라, 필요하면 상담하시는 분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는데…….”

“저, 상담 치료 한동안 받았어요.”

“아. 그렇군요.”

“이혼하고 나서요. 이혼 전에도 상담 치료를 받았지요. 세베로를 만난 것도 이혼한 날이었어요.”

“아, 그럼 여기 오기 전에 세베로를 만났나요?”

역시 둘이 알고 있었을 거라는 내 생각이 맞았다. 사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분명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사귀었어요? 둘이?”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안면만 있는…….”

“아 그렇군요. 지난 악몽은 다 잊어요. 더는 그런 것 때문에 아프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있잖아요. 벌써 몇 년째 가족으로 있잖아요. 루벤도 이네스도 얼마나 사라를 잘 따르는지 알지요? 세베로도 사라를 걱정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사모님.”

나는 그녀가 빙긋 웃는 것을 보고야 방에서 나왔다. 마음이 진정됐으니 웃을 수 있는 거다. 사람은 불편한 생각을 하면 웃을 수가 없다. 반대로 웃게 되면 그런 생각이나 미운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안 좋은 생각이 들거나 미운 마음이 들 때는 혼자 거울을 보면서 웃고는 했다. 그렇게 웃는 동안에는 저절로 나쁜 생각은 사라지니까. 사라도 그렇게 웃음을 띠었던 건 마음이 진정됐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돌아가자 라울이 침대에 들어선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도대체 나가서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거야.”

라울의 다리가 내 허벅지를 잡아채서 꽉꽉 조여든다. 꼼짝 못하게 다리로 가두고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턱을 쥐고 눈을 맞춘다. 나는 라울을 보며 말했다.

“아, 사라가 악몽을 꾼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악몽? 나도 악몽을 꿨다고. 나하고 사라 중에 택해. 둘이 같이 악몽을 꾸면 누구한테 갈 거야?”

기가 막혀서 내가 이런 말을 아직도 들어야하나? 대체 지가 무슨 악몽을 꿨다는 거야?

“라울, 무슨 악몽을 꿨는데요?”

그러자 라울이 내 허리를 바짝 끌어 앉더니 골반을 더 밀착시키며 두 다리로 꽁꽁 감싼다. 그런데 진짜 이 남자가 시도 때도 없이 왜 이런 거야? 몸이 밀착되자 딱딱하게 곤두선 방망이가 나를 마구 찌른다. 나는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를 보았다. 무슨 꿈을 꿨다고 또 이러는지 말이다.

“디아나가 도망가는 꿈. 너무 무서운 악몽이었어. 몸이 이렇게 부풀었는데 나를 거부하고 도망가다니. 그럼 난 어쩌라고. 이것 봐. 이렇게 성이 났는데 옆에 디아나가 없잖아.”

라울이 몸을 더 비비자 점점 더 그의 것이 느껴진다. 이 짐승.

“아우 그만 좀 해요 라울!”

그러나 라울은 피식 웃으며 내 잠옷을 위로 밀어 올렸다. 라울의 손에 쉽게 말려 올라간 잠옷은 가슴 위에서 돌돌 말리고 라울의 손이 단단하게 가슴을 쥔다. 그가 쥔 손에 힘을 주자 가슴이 찌르르 울리며 속절없이 몸이 젖어 든다.

“뭘, 그런 게 무슨 악몽이라고. 그만 좀 해요.”

“무슨 소리야? 디아나가 없어서 얼마나 허전한 줄 알아? 내 악몽을 달래줘. 나는 지금 너무나 위로가 필요하다고. 아! 무서워.”

라울의 손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어느 틈에 그의 잠옷 바지가 주르르 내려가고 없다. 맨살에 닿는 그의 몸이 뜨겁다.

“어우 못 말려. 라울!”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 있었다. 라울의 손이 어깨를 감싸고 라울의 입김이 귓가에 닿았다. 간지럽게 귓가를 맴도는 라울의 숨소리를 들으며 내가 몸을 빼려고 하자 라울이 잉잉거리는 소리를 낸다.

“내가 얼마나 악몽에 시달렸는지 알아? 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어보란 말이야.”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가져가 느끼게 해준다. 심장이 벌떡벌떡 거리는 이유가 악몽 때문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안다.

“지금 그건 나도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둘은 서로 달래줘야 해.”

라울이 바로 몸을 돌리더니 바로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짙은 눈동자에 어린 그의 웃음. 이제 익숙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설렌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저 눈동자가 얼마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지 평생 살아도 적응될 수 없을 거 같다.

“이렇게 손만 뻗은 거리에 디아나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 자다가도 한 번씩 눈떠서 본다고. 그런데 그렇게 나가서 안 들어오니까 일어나서 나갈까 말까 한 참 고민한 거 알아? 사라가 무슨 악몽을 꿨는지는 몰라도 내 악몽이 더 무서운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라가 무슨 꿈을 꿨는지 라울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라울의 말을 들어줬다. 그리고 라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내가 없는 꿈이 그렇게 악몽이에요?”

“그걸 말이라고?”

라울의 손이 바로 잠옷 속으로 파고든다. 손가락이 쉽게 팬티를 끌어내리고 음모를 간지럽힌다. 그러다 꾹 속살을 누르니 나도 모르게 비음이 터진다.

“으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부지간에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악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라가 떠올라서 그런 말을 했다. 사라는 이혼하기 전에 폭행하는 남편을 바라보기만 해도 얼마나 악몽처럼 무서웠을까? 저렇게 이혼한 후에도 악몽을 꾸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라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헤어져 줘야지.”

“라울, 남 얘기라고 그렇게 쉽게 하지 말아요. 누구하고 함께 살다가 헤어진다는 건 영원히 깊은 상처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어쩔 수 없어서 헤어졌어도 사랑해서 결혼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내 말에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한 팔로 내 머리를 당겨 팔에 끼우고는 자세를 잡고 다른 한손은 조금 더 깊게 속살을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자 다리 사이에 단단한 허벅지를 끼우고 다리 사이를 압박하며 말했다.

“누구나 다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아. 여러 가지 필요로, 아니면 머리로 생각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배우자라고 생각해서 결혼하는 사람이 더 많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라울이 얼굴을 내려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강하게 흡입하는 덕분에 허리가 그대로 뒤틀린다.

“하아. 라울…… 응응…… 그런데 당신은 그 정도가 아니었죠. 결혼은 비즈니스라고 생각했다면서요. 그것도 인생에 몇 번 쓸 수 없는 비즈니스 카드라고. 도대체 그 비즈니스 카드를 몇 번이나 쓸 생각이었어요?”

가슴에 달라붙어 빨아대는 얼굴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을 더 집요하게 빨아대는 덕에 더 짙은 신음이 터졌다.

“그건 다 옛날 얘기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거든?”

라울이 나를 꼭 끌어안으며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배꼽에 닿는 따뜻한 느낌. 그리고 더 아래. 활짝 벌린 허벅지 사이로 그의 뜨거운 입김이 그대로 느껴진다. 허벅지가 긴장으로 달달 떨린다.

“이런 디아나하고 무슨 비즈니스를 하겠어.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여자하고 말이야.”

“하아…… 아…….”

발가락 끝까지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간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예민한 속살을 찌르듯 자극한다. 넓게 속살을 물고 지근거리자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자극이 강해질수록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왜요. 하아, 나도 비즈니스 잘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래, 결혼도 비즈니스라고 하면 가장 큰 비즈니스를 성공한 사람은 디아나니까. 하지만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나는 디아나가 루벤과 이네스를 낳고 내 옆에서 평생 산다는 것만 해도 생각할 때 마다 너무 좋아.”

라울의 단단한 남성이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활짝 벌어진 다리가 그의 양팔에 단단하게 끼워져 있다. 라울이 깊게 허리를 밀자 깊은 안쪽 끝에 닿는 아찔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나는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한 보랏빛이 돌고 있는 눈동자는 말할 수 없이 에로틱하다.

“나도요. 나도 당신 옆에 있는 게 좋아요.”

이렇게 편안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또 말하고 눈을 마주하고 서로 쓰다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사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라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라울이 몸짓이 거세질수록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가 밀고 들어오면 그대로 더 힘을 주어 아래를 조인다. 뜨거운 밤이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 * *

똑똑 소리와 함께 세베로가 낮은 소리를 냈다.

“문 열어주겠어요, 사라?”

세베로의 목소리는 낮고도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걱정과 격정이 함께 소용돌이치는 그런 마음으로 내는 목소리라 평소의 세베로의 목소리보다는 훨씬 격양된 목소리기도 했다.

사라는 침대에 앉아서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세베로가 문을 두드렸다.

“자고 있지 않은 거 알아요. 제발 문 열어줘요 사라. 지금 얼굴 보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사라.”

사라는 일어나서 긴 아이보리 가운을 걸치고는 문 앞으로 가서 아주 약간 문을 열었다. 한 뼘 정도 열린 문으로 세베로의 얼굴이 보인다.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세베로를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세베로가 초조해서 찾아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세베로.”

“아까 소리 듣고 저도 이곳으로 왔는데 세뇨라께서 그냥 들어가라고 해서 방으로 들어갔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얼굴을 보지 않으면 걱정이 되서 미칠 것 같아서요.”

세베로가 손을 뻗어 사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열린 문틈으로 내민 세베로의 손이 볼에 닿자 그 커다랗고 안정감 있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은 손을 내렸다. 문이 힘없이 스르르 열린다.

세베로는 그대로 사라의 얼굴을 잡은 채 물었다.

“땀 흘렸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사라. 제발 나에게 곁을 조금 내줘요. 나는 사라가 너무나 걱정이 돼요. 들어가도 돼요?”

사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사실 조금 전 뼛속까지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세베로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검은 눈동자를 들어 세베로를 쳐다보자 세베로가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사라가 자연스럽게 뒤로 한 걸은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그다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함께 침대로 가 앉았다.

세베로는 사라를 품에 당겨 안고는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 맞추며 등을 쓰다듬었다.

“사라, 무슨 일이에요? 내 마음을 진정으로 받아줄 수 있다면 내게 말해줘요. 나도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할 테니. 사라의 이야기해주세요.”

“…… 세베로.”

그녀가 세베로를 부르며 눈을 들자 세베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잠시만요.”

세베로가 일어나 옆에 있던 물 잔에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사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정감 있는 세베로의 눈동자가 닿자 사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엇인가라도 아니,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먼저 말할게요. 사라, 나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20대 후반에 만났고 만나서 바로 사랑에 빠졌지요. 스물아홉에 결혼했는데 결혼생활이 2년 정도밖에 되지 못했어요.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세상에…… 어쩌면 그런 일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사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근심이 가득해졌다.

“처음에는 죽을 것 같았는데 살아지더라고요. 그 기간에 꽤 방황도 했는데 그래도 역시 나를 사랑해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나를 하루하루 지탱해줬어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데이트도 하고 만나기는 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지요. 내 아내는 그 사람뿐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얼마든지 지나간 아내에 대한 추억을 두고 사라를 사랑하고 또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라, 나는 사라의 어떤 과거도 어떤 상처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내게 말해줘요.”

세베로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진지했다. 평소의 그보다 훨씬 더 신뢰감을 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세베로.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신뢰 같은 건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감정일 수도 있어요.”

“얘기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세베로가 과거의 이야기를 다 했기 때문에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결혼한 적 있어요.”

“나도 있었어요.”

세베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가는 손은 긴장해서 그런지 차갑고 땀에 베여있었다. 세베로는 그녀의 손을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시 말했다.

“천천히 말해도 돼요.”

“남편은 술만 마시면 날 때렸어요.”

세베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여린 여자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당장 사라의 전남편을 휘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 우리가 처음 만날 그날 그때 들었던 멍…….”

“그날은 이혼한 날이었어요. 그런데 술을 마시고 내가 있는 집으로 찾아왔지요. 그래서 그렇게 멍이 들었던 거예요. 그날은 정말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거든요. 그날 만났어요, 세베로를. 내가 이혼한 날…….”

“더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라.”

세베로가 사라를 천천히 당겨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렇게 조심스러웠구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려움이 느껴져 안쓰럽기만 하다. 세베로가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잠 들 때 까지 옆에 있어도 될까요?”

“아니요?”

사라가 그렇게 말하자 세베로의 얼굴이 실망으로 그늘졌다. 그러나 바로 사라는 빙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잠들 때까지 말고 아침까지 있어줘요.”

“사라.”

감격에 겨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사라가 세베로의 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다시 묻는다.

“그런데 나 그냥 안고만 재워줄 수 있어요? 오늘은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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