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3)

- 외전 -

9.

알바로 남작은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드레스 속으로 깊게 손을 집어넣었다. 크게 부풀지 않은 드레스는 그녀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는데, 드레스 한쪽에 트임마저 있어서 그녀의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알바로 남작의 큰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다. 엠마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헐떡이며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을 허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옆에 있는 유리창을 똑똑 하고 두 번 두드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란 듯이 떨어졌고 엠마는 바로 드레스를 올렸다. 나는 일 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계셨네요, 두 분. 엠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꽃이 있어서 찾았는데 없어서 말이죠.”

그러자 엠마는 요염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알바로 남작의 손길에 신음하던 모습이 겹쳐지며 당장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넘쳐났다. 그녀는 나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지 그저 풀어진 눈을 하고 말했다.

“그래요? 나는 라울 앞에 하도 많은 여자들이 줄줄이 춤을 추자고 줄 서 있기에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자, 같이 가죠.”

내가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알바로 남작은 무척이나 기분이 나쁜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어린 소년도 아니고, 꽃에 관심이 있었나?”

“네. 어린 소년이 아니어도 여자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는 늘 관심이 있으니까요. 나는 내 관심보다는 여자가 어떤 곳에 관심 있는지 더 관심 있습니다.”

“그 말은 엠마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겠죠. 특히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관심이 있는 지도요.”

도발적인 말이었으나 알바로 남작은 엠마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엠마는 그대로 일어나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요, 라울 까스틸로. 보여주세요, 그 꽃이 얼마나 예쁜지.”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오자 알바로 남작은 완전히 벌레 씹은 얼굴을 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8년 전이었지만 얼마나 알바로 남작이 이를 갈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엠마와 잤다.

나는 꽃을 보여주겠다며 마드리드 궁 건너편에 있는 호텔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모르는 척 내 손을 잡고 호텔 방까지 들어왔다.

“여기는 꽃은 없는 것 같은데요?”

“꽃은 내 마음속에 피어있다고 말하면 뺨이라도 후려칠 건가요?”

“글쎄,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물을 줘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할까?”

그녀가 싫지는 않았지만, 디아나를 사랑했던 거와 같은 애틋함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남자경험이 많은 그런 여자였고, 나는 여자라면 마다하지 않는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왕을 내 품 안에 쥐고 싶어 하는 그런 허세에 쩐 애송이였다. 진정한 사랑 같은 건 모르는 애송이 말이다.

하지만 그날 엠마의 몸은 정확하게 기억난다. 커다란 가슴과 진한 분홍빛 젖꼭지 우윳빛 피부에 도드라진 파란 핏줄까지. 왜 그녀가 사교계의 여왕인지 깨달았다.

혈기왕성하다 못해 발기 왕성한 나는 그녀를 게걸스럽게 가졌다.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다리를 벌리고 들어갔으나 엠마는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둘 다 연애에 닳고 닳아서 앞뒤 없이 질펀한 정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더한 자극을 위해서였는지 음모까지 짧게 다듬고 나왔다. 섹스를 위해 온몸이 준비됐다고나 할까? 부딪힐 때마다 자극이 강해서 남자들이 더 사족을 못 썼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엠마와 나는 간간이 만나서 밀회를 나눴다. 그녀는 스릴 있는 섹스를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라던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건 엠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보다 20살이나 많은 후작과 결혼을 했으니까.

결국 연적 관계라고 했던 나와 남작 사이에도 승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와 그렇게 만나다 내가 다시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고 난 뒤에 엠마는 알바로 남작과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만났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알바로 남작을 만나다가 엠마는 결국 콘차 후작과 결혼을 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있었던 뒤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한 번씩 만난다고 해도 뭐 그렇게 대단한 좋은 기억도 아니었기에 서로 그저 웃으며 지났을 뿐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디아나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겠다는 듯이 까 스틸로 성까지 쳐들어오겠다는 건 선전포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그런 선전포고라면 말이다.

디아나는 남자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는 여자는 아니니까. 그리고 난 더 이상 엠마에게 어떤 관심도 없다. 적어도 우리 둘은 절대 유혹이나 오해 같은 걸로 흔들리는 부부가 아니다.

단지 기분 나쁘고 신경 쓰일 뿐이다.

* * *

까스틸로 성에서는 루벤과 이네스가 사라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루벤, 정말 잘했어. 이제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정리하고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지? 내일은 엄마아빠가 돌아오실 테니까 말이야.”

“사라 선생님. 선생님은 왜 결혼하지 않으세요?”

루벤이 묻자 옆에 있던 쪼끄만 이네스가 오빠를 보며 말한다.

“그건 예의가 아니랬어. 막 물어보면 안 돼.”

“뭐라고?”

“엄마가 그런 걸 묻는 건 예의가 아니랬어!”

이네스의 말에 루벤이 인상을 썼다.

“난 선생님을 사랑하니까. 선생님이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그게 왜 예의가 아니야?”

이네스와 루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사라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지. 게다가 네 살밖에 안 됐으면서 말을 너무나 잘하는 이네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루벤도 워낙에 머리가 좋고 또래 남자애들보다 발육이 빨랐지만 이네스는 언어능력에 있어서 정말 탁월한 면이 있었다. 이미 20개월을 좀 넘어서부터는 가족들 이름이며 관계를 매일매일 확인하며 물었으니까.

“외할아버지 이름은 임정환, 아빠의 이름은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 엄마의 이름은 디아나…….”

하며 하나하나 이름을 열거하고 가까이 지내는 임규빈 부부의 이름과 그 아들 이름까지 모르는 게 없이 하나하나 꿰뚫는다. 게다가 나이까지 외우고 있어서 지금은 어른스럽게 말할 때는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모르겠다.

“자, 장난감 정리하면 말해줄게.”

사라의 말에 아이들이 바로 장난감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앞에 와서 사라가 왜 결혼하지 않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바라본다.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

“선생님이 왜 혼자냐 하면 선생님은 한번 결혼했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래. 그래서 지금은 혼자야. 하지만 선생님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언젠가는.”

“그러다 늙으면요? 늙은 사람도 결혼해요?”

루벤이 묻는 말에 사라는 빵 터지고 말았다. 가끔 루벤은 완전히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실례야!”

이네스가 인상 쓰며 말하자 루벤이 더 인상 쓰며 오빠라고 무게를 잡는다.

“조용히 안 해? 이네스? 너는 말끝마다 실례라고 말해. 너는 얼마나 예의를 잘 지켜서 그러는 거야? 지금도 오빠한테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오빠 바보.”

그러자 루벤이 그대로 이네스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으앙!”

울음을 터트리자 바로 세베로가 왔다.

“도련님, 아가씨. 부모님이 안 계신 동안에 형제간에 이렇게 싸우게 되면 곤란하실 텐데요. 오늘 밤 간식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저녁 식사 후에 밤참으로 꼭 우유와 쿠키를 먹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적어도 루벤과 이네스에게는 말이다. 그러자 둘이 바로 손을 잡는다.

“우리 싸운 거 아니에요, 세베로.”

“하지만 아가씨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있는데요?”

“이건 그냥 그런 거예요. 간식은 꼭 먹고 싶어요.”

“싸운 게 아니라면 간식은 꼭 줘야죠.”

세베로가 웃으며 말하자 루벤과 이네스는 사라를 보고 활짝 웃었다. 사라는 아이들을 능숙하고도 다정하게 다루는 세베로를 보고 역시 미소 지었다. 다정하고 침착한 세베로가 사라의 경계심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우유 한 잔씩과 저녁에 요리사가 구워놓은 쿠키를 하나씩 받았다.

“간식 먹고 이도 닦고 책 읽어야 해요. 그래야 하는 거 알죠?”

“알아요. 그런데 세베로하고 사라 선생님하고 결혼하면 안 돼요?”

옆에서 따듯한 우유 한 잔을 마시던 사라가 바로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놀래서 마시던 우유가 입가에 하얗게 묻어있었다. 그걸 보고 세베로가 냅킨을 사라 앞으로 밀어주면서 말했다.

“왜 안 되겠어요? 우리도 함께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만일 도련님과 아가씨가 잘 도와준다면 말이죠.”

“도와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동시에 큰소리로 대답하자 세베로가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사라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세베로, 애들한테 그런 농담을 하면 안 돼요.”

“난 농담이 아닌걸요? 하지만 사라가 너무 조심하고 경계하니까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없다면 힘들 거 같아서 그럽니다.”

세베로가 말하자 루벤이 바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세베로는 요즘 그 가슴 큰 아줌마가 매일 찾아오잖아요.”

옆에서 말하는 루벤의 말에 이네스가 바로 한마디를 했다.

“여자의 가슴에 대해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또 예의 타령이구나?”

이미 쿠키도 다 먹었기 때문에 둘은 당장 전쟁이라도 할 듯이 노려본다. 사라가 루벤의 말을 듣고는 둘에게 말했다.

“이제는 진짜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해야 돼. 이도 닦고 말이지.”

세베로도 옆에서 사라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좋은 아이들이죠. 아가씨, 도련님 자 이제 각자 방으로 들어갈까요?”

세베로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 사라는 아이들이 먹은 쿠키 접시를 주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루벤의 말대로 요즘은 매일 블랑카가 한 번씩 까스틸로 성으로 방문한다. 세베로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산책을 하거나 하고는 돌아가는 걸 보면 사라의 마음이 무거웠다.

세베로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를 남자로 받아들이기엔 지난 상처가 너무 크다. 사실 전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다시는 남자를 좋게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술만 먹으면 폭행을 하는 전남편 때문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처음 세베로를 만났을 때 그렇게 멍이 든 것도 폭행 때문이었다. 그날은 이혼을 한 날이었는데도 그는 그 밤에 사라를 찾아와서 그렇게 때렸다. 사업을 크게 하는 준재벌 정도는 되는 집안이었는데 부유함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술만 마시면 그렇게 사람을 때리고 싸우는 주사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예의 있고 멀쩡한 남자가 그렇게 변할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연애 기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말이다.

결혼 기간은 길지 않았다. 사라는 35살에 처음 하는 결혼이었고 남편은 재혼이었다. 아이도 없는 돌싱남. 남자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혼했고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이상한 버릇이 나왔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그 날 밤 그는 사라를 보며 웃었다.

“우리 예쁜 새 마누라. 어디 보자.”

거칠게 턱을 움켜쥐어서 놀라서 눈을 치떴더니 바로 뺨이 얼얼하게 손바닥이 날아왔다. 너무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니까 더 예쁘네. 어디 딱 한 대만 더 맞아줘라. 응? 우리 예쁜 마누라. 한 대만 더 맞자.”

도망갈 틈도 없이 다른 쪽 뺨이 돌아갔다. 휘청하고 몸이 휘자 그대로 침대로 밀어 던지고는 올라탔다.

“왜 이래요? 싫어.”

하지만 소용없었다. 더 끔찍한 건 그게 시작이었다는 거다. 결혼생활 3년 동안 매일 이혼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해주지 않았다.

“난 널 너무 사랑해. 사랑한다고. 다시는 안 그럴게.”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무기력해졌다. 얼굴에 멍은 가실 날이 없었고 보이지 않는 곳은 더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사람들도 피하며 그렇게 지내게 된다. 며칠 괜찮으려나 하면 어느 날 또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 한 대만 맞자. 응?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받아 힘든데 니가 한 대정도 맞아서 내 마음이 풀어지면 그걸 못 해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때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 선물을 보내고 다시 사과한다. 남들이 보면 꽃을 배달하고 선물을 사주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무서운 남자였다.

자녀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소송을 했고 소송만 일 년 넘게 걸려 겨우 이혼할 수 있었던 거다. 그의 폭행을 입증하기 어려워서 결국 빈손으로 쫓겨난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게 어딘가?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고개를 흔들게 된다. 떠올리기도 싫어서 잊으려 애썼다. 세베로는 그런 기억의 끝에 만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세베로가 다정하고 잘해준다고 해도 선뜻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는 게 남자니까.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세베로에게 마음이 가긴 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블랑카가 한 번씩 와서 세베로를 만나고 가고 나면 세베로가 정말 블랑카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쩔까 걱정이 된다. 세베로가 얄밉기도 하고 신경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세베로를 잡지도 못하겠다.

그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적어도 사라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이 까스틸로 성의 주인인 식구들은 모두 사라가 세베로와 결혼하길 바란다는 말을 숨김없이 그대로 여러 번 꺼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좋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사라가 아이들을 재우고 자신의 침실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까스틸로 성 곳곳에 밝혀진 등 아래로 세베로가 서성이고 있다. 성 안팎을 마지막까지 둘러보는 게 세베로의 일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서성이던 세베로가 몸을 돌리더니 3층에 있는 사라의 방 쪽을 보고 크게 손을 흔든다. 사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불이 켜진 사라의 창을 보고 세베로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연인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연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사라는 그렇게 세베로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이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바로 커튼을 쳤다. 그러나 바로 뒤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슴이 쿵쿵 울린다. 문을 열어도 될까?

“사라, 나예요. 세베로.”

사라는 무섭게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누르며 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자 바로 세베로가 사라를 당겨 안았다. 커다란 세베로의 가슴에 안긴 사라가 놀라 고개를 들자 바로 세베로의 입술이 겹쳐온다.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키스는 결코 거칠지 않았다. 오히려 애태울 만큼 천천히 느긋하게 파고드는 로맨틱한 키스였다.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다가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깊게 혀를 밀어 넣으며 구석구석 건드리고 자극한다.

얽히고 부딪히며 열기를 끌어올리는 키스에 세베로의 아래가 뻐근하게 부풀고 있었다. 이대로 사라가 받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베로는 점점 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은근한 손길로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마른 몸이었지만 생각보다 엉덩이는 풍만하다. 처음 만난 그 밤의 뜨거움이 그대로 되살아나서 더 깊게 입 맞추며 한 걸음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서자 숨을 몰아쉬던 사라가 얼굴을 들고 물었다.

“블랑카하고도 키스했나요?”

맙소사! 주인님 말이 맞았어. 역시 질투하는 거야. 야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주인님이라면 아마 절대로 대답하지 않고 몸을 먼저 겹쳤을 거다. 어쩌면 그런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적정한 정도라면 말이다.

세베로가 말 대신 사라의 눈을 보다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진한 눈동자에 얽힌 눈길이 사라의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번 키스는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뜨겁고 길었다.

허리와 골반을 더 바짝 당겨 그녀의 허리가 뒤로 휘도록 밀착해서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혀가 얽히면서 마치 섹스처럼 느껴졌다. 밀착된 몸 때문에 세베로의 딱딱한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사라는 달아오른 숨을 헐떡였다. 그런 사라에게서 살짝 몸을 떼며 세베로가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키스하고 싶지 않아요.”

가슴이 쿵 떨어진다. 이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사라는 세베로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잠시 아무 말 없이 세베로를 보다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세베로.”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더 있다가는 세베로의 품에 그대로 안길 것만 같았다. 아직 제 마음을 잘 모르는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세베로는 사라의 말을 듣고 실망한 듯 말했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군요. 사라. 혹시 자다가도 내 생각이 난다거나, 내 꿈을 꾼다면 언제든지 내 방으로 와줘요. 방문은 늘 잠그지 않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세베로.”

방문이 닫혔다. 세베로는 닫힌 방문 앞에서 잠시 생각하고 서 있다가 돌아섰다.

“좋은 반응일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세베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호텔에서 신혼 같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일찍 라울과 나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디아나, 마드리드에 있는 MK 사무실에 한 번 들려봐야 할 거 같으니까 오전 시간은 혼자 보낼 수 있겠지?”

“물론이에요, 라울. 마드리드가 내 주 무대인 거 몰라요?”

“잘 알지.”

라울이 웃으며 내 볼을 한번 딱 줬다. 나는 라울이 출근하는 걸 도와주고는 여유 있게 마드리드 시내를 둘러보러 나왔다. 오랜만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두꺼운 후드티를 걸치고 나오자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커피 한잔을 마실까 해서 일찍 문을 연 노천카페에 카푸치노를 들고 막 앉았을 때였다.

“이게 누구십니까?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 아니세요?”

바로 내 눈앞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알바로 남작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그도 지난밤의 그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턱시도를 벗어 던지고 청년처럼 앞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와 청바지와 하얀색 후드티를 입고 서 있었다. 40대 초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상큼한 모습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알바로 남작님?”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인데요? 나는 이곳이 집이지만 디아나는 바로 까스틸로 성으로 가는 게 아니셨나 봅니다.”

그가 아주 반갑다는 듯이 바라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하도 천진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네, 저도 원래 이 마드리드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이곳이 익숙해요, 그래서 남편하고 며칠 이곳에서 묵기로 했어요. 지금 남편은 일 때문에 회사를 가고 커피 한잔하려는 중이었죠.”

“이런, 내가 정말 행운이군요. 같이 동석해도 되겠죠? 잠시만요, 내가 주문한 게 있어서요.”

알바로 남작은 진한 에스프레소와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내게 보여주며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초콜릿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저도 여기 초콜릿 케이크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은 사양할게요.”

“진짜 맛있는데.”

알바로 남작이 나를 보며 포크를 건넸다. 나는 웃으며 그의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덜어 입에 넣었다. 진한 다크 초콜릿이 가득한 초콜릿 크림과 입안에서 살살 녹는 초콜릿 케이크에 저절로 웃음 짓게 한다.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자 알바로 남작이 내게 냅킨을 건넨다. 입가를 닦으라는 듯이 손으로 제스쳐를 취하며 웃자, 내가 닦아낸 냅킨에 거품이 가득하다.

“제가 좀 칠칠치 못한 데가 있어요.”

아, 마주 보고 있다 생각하니 라울의 말이 떠오른다.

“알바로 남작하곤 눈도 마주치지 마.”

나는 라울의 말이 생각나서 갑자기 눈을 내리깔았다. 왠지 이 알바로 남작과 눈을 마주쳤다간 나중에 라울이 엄청 화를 낼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그런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알바로 남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크게 한입 떠놓고는 말했다.

“갑자기 왜 눈을 내리까는 거죠? 혹시 라울 까스틸로가 알바로 남작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하던가요?”

그러고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입에 문다. 알바로 남작의 말에 나는 눈을 들었다.

라울이 한 말을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지?

“라울이 그 정도 말을 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어요. 어쩌면 알고 지낸 시간으로 치면 내가 디아나보다 라울을 더 오래 안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는 느긋하게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듯이 말했다. 바람이 살짝 불자 그의 갈색 머리가 흐트러지며 조금 더 젊게 느껴진다. 아침 에스프레소하고 딱 어울리는 그런 분위기라고 할까?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라울하고 잘 아나요?”

나는 진지하게 그를 보며 물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라울의 시간을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라울과는 연적이었죠. 하지만 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고 사실 귀족사회라는 게 좁다 보니까 젊은 시절을 잘 알고 있죠. 적어도 상대방의 성향 정도는 말이죠.”

연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것도 아내인 내 앞에서. 그리고 연적이 뭐 그렇게 자랑할 만한 말이야? 무슨 감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상했다.

“연적이었다고요? 그럼 라울이 나하고 결혼했으니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되셨나요?”

그러자 알바로 남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가 그렇게 웃기는 말이지?

“하하하! 연애하면 꼭 결혼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하자면 라울도 나도 여자를 다 놓친 셈인가? 하하하, 딴 사람하고 결혼을 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둘 다 여자한테 차인 거네.

“아, 그랬군요.”

나는 괜히 물었나 하는 생각에 눈을 돌렸다.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너무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버린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앞에서 스스럼없이 웃으며 말하는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유심히 보는 눈길이 느껴져 다시 커피잔을 들자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불편한가요? 어찌 됐든 그렇다고 그렇게 눈까지 내리깔건 없어요. 디아나를 뭐 어떻게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자 나도 눈을 들고 싱긋 웃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초콜릿 케이크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초콜릿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한 번 더 안 먹을 거예요? 돌아가면 생각날 텐데…….”

그건 맞는 말이다. 단 한 입만으로도 그 여운이 길어서 돌아가면 생각날 그런 맛이었다. 알바로 남작이 그렇게 말하며 접시를 밀어주길래 한 번 더 포크로 크게 찍어서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라울하고 나도 이름 부르는 사인데 그냥 카를로스라고 불러요.”

“까를로스요?”

“네, 내 이름이에요 까를로스. 딱딱하게 알바로 남작이 뭡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하지만 알바로 남작의 이름을 그렇게 쉽게 불러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마드리드 궁에서 먼저 봐서 그럴까?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자 그가 진한 파란 눈동자로 나를 보며 말한다.

“불러봐요. 까를로스라고. 요즘 같은 세상에 이름도 못 부르나요? 계급시대도 아니고.”

“알았어요, 까를로스.”

싱긋 웃자 그가 나를 보며 에스프레소 한잔을 더 마셨다. 알바로 남작의 눈이 묘하게 빛나며 뭔가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이 여자를 보고 있으니 옛날 라울과 엠마를 두고 경쟁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라울은 엠마를 가지려고 몸이 달아있었다. 물론 그는 엠마를 어렵지 않게 손에 넣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엠마가 더 라울에게 열을 올린다는 게 맞을까?

사실 지난 무도회에서 엠마 콘차와 까를로스 알바로 두 사람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어째서 이제 와서 라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동양의 예쁜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인가?”

카를로스가 엠마를 보며 물었다. 그의 말에 엠마는 고개를 젓는다.

“이제 와서 특별히 그런 게 아니에요. 난 늘 그가 좋았어요.”

그녀의 말에 알바로는 인상을 썼다. 지난날 이야기지만 그녀가 저보다 라울을 더 좋아한 걸 잘 안다. 지금도 마땅치 않다. 물론 엠마와도 지나간 연인사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그 옛날에 어째서 라울을 택하지 않은 거지? 더 큰 야망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었나?”

분명 엠마는 라울을 택하지 않았다. 라울이 미국으로 가고 난 뒤에 알바로의 품에서 한동안 뜨거운 관계를 갖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는 알바로의 청혼 역시 거절하고 콘차 후작에게 갔지만 말이다.

“라울을 택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라울이 날 택하지 않은 거지.”

“무슨 소리지 그게?”

“내가 청혼했었어요, 라울에게.”

“정말이야 엠마?”

뜻밖의 말이었다. 거의 십 년 전 이야기인데도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때 알바로는 정말 엠마를 사랑했으니 말이다.

“그랬어요. 그렇게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라울이 날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했죠. 사실 라울이 그만큼 좋았으니까.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비즈니스 상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비즈니스?”

“맞아요, 그때 라울은 분명히 나한테 그렇게 말했거든. 결혼은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라고.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카든데 그걸 나하고 쓰고 싶지 않다고.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그리고 바로 결혼한 게 지금의 콘차 후작이니까.”

거짓말이었다. 바로 콘차 후작에게 가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알바로의 품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녀의 마음을 잡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함께하는 밤에는 밤새도록 몸을 섞으며 함께 타올랐다.

“그렇게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소리는 하지 말지. 엠마가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울렸는지 생각한다면 단 한 번의 시련으로 그렇게 마음 상해하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콘차 후작은 가지고 있는 영지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당시 모든 사교계에서 결혼할 여자들이라면 탐내는 사람이었거든?”

알바로는 언짢은 마음을 드러내며 말했다. 사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녀 때문에 상심했는지 잘 안다. 알바로 저 자신도 그랬으니 말이다.

“당연하죠. 난 엠마니까. 내가 그 정도 되는 남자를 잡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도 그런 말 할 자격은 없지요.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울었는지는 당신도 잘 알 테니 말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상한 건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어째서 엠마가 라울에게 눈독을 들이는가 하는 거였다. 라울의 아내 디아나의 목걸이까지 구실 삼아서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라울을 다시 건드리려는 거지?”

“두 가지 이유에요. 일단 당신하고 내기했잖아. 나는 라울을, 당신은 라울의 그 예쁜 동양 여자를. 서로 누가 먼저 꼬시는지.”

“하기 싫은 내기는 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도대체 뭐 때문이지? 나는 옛날에 한번 라울에게 당신을 뺏겼던 오기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물론 라울의 부인은 깜찍하게 예쁘긴 하더군. 더군다나 신비스럽잖아. 동양여자라니.”

알바로가 디아나를 칭찬하는 말을 하자 엠마는 인상을 쓰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순간 알바로는 그녀의 눈에 서린 분명한 질투를 보았다. 질투를 느낀다는 건 아직도 라울에게 어떤 감정이 남아있다는 거다.

뭔가 조금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 같다. 치정이 만들어내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

알바로가 빙긋 웃으며 가만히 엠마를 보았다. 아직은 젊음이 남아있는 틀림없는 미인이다. 엠마가 그대로 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어요. 아니, 아직도 내가 그만큼 매력 있는 여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걸까? 라울에게 말이지요. 그 결혼을 다 뒤흔들지는 못하더라도 아직도 다시 내게 눈길을 줄 수 있다는 걸 느껴보고 싶다구요.”

“어찌 됐든 우리 둘은 의기투합한 셈이군. 그럼 나는 천천히 그 순진한 동양 여자에게 다가가 볼 테니 당신은 그 현란하고 화려한 몸짓으로 라울을 다시 한 번 꼬셔보든가.”

“라울은 보기보다 복잡해요.”

“아니, 라울은 아주 단순해.”

알바로 남작의 말에 엠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이 라울을 잘 몰라서 그래. 말은 정말 단순하게 하는 거 같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구요.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엠마가 술잔을 입술에 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 때문에 붉은 입술 색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인 엠마를 보자 다시 그녀를 안고 싶다. 그래서 그녀의 심술을 건드리고 싶었다.

“그럼 지금 결혼한 그 여자는 대단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나 보지? 그러니까 일생에 단 한 번 쓰겠다는 그 비즈니스 카드를 그 여자에게 썼겠지? 아니면 진정 사랑이라도 알게 됐던가 말이다.”

알바로의 말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엠마가 인상을 쓰며 발끈해서 말했다.

“그래서 그게 궁금하다고. 얼마나 대단한 여잔가 하고 조사해보니까 말도 안 되더라고. 마드리드에서 민박집이나 하고 아르바이트로 여행가이드를 했던 그런 여자라고. 그런데 한국에 있는 대단한 집안의 딸이었다고도 하고. 정확하게 모르지만 말이야.”

“한국에 본사가 있으니까 한국 기업의 딸하고 결혼하는 거야. 뭐 좋은 비즈니스 카드를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

“어찌 됐든 난 용납할 수가 없어.”

엠마의 말을 들으며 알바로는 헛웃음이 난다. 정말 말릴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놓고 단 한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남자에게 이렇게 오래 자존심 상해한다는 게 말이다.

그가 엠마를 보며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이봐 엠마. 이미 콘차 후작과 결혼해서 가질 거 다 가지고 있는 당신이야. 그렇게까지 열 내는 건 우습지 않아? 바로 앞에 있는 나도 당신이 이미 가지고 놀다 버렸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설마 상처받았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내가 버리기도 전에 이미 여자들이 있었잖아요.”

물론 그랬다. 버림받을 걸 이미 알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콘차 후작과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앞에서 버젓이 여자들과 다녔다. 그래도 상처받았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라울은 아이도 있다고. 그래도 그를 흔들고 싶어?”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다. 아이마저도 질투하는 듯이 말이다.

“비즈니스로 결혼했다고 하면서 벌써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것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정말 라울 까스틸로는 종잡을 수 없는 남자야.”

“하긴, 엠마는 아직 아이가 없지? 어째서 후작의 아이를 낳지 않는 거지? 대를 잇고 싶지 않은 건가? 작위가 아깝잖아, 후사가 없어지면 말이야. 그렇게 질투가 나면 이 기회에 한 번 가져보지?

후작이 나이는 많아도 아기를 만들 능력이야 있겠지. 남자는 막대기 하나 들 힘만 있어도 가능한 이야기니까 말이지.”

후작의 아기를 만들어 보라는 말에 엠마의 눈에 불꽃이라도 일듯이 파르르 곤두서서 알바로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아이는 낳지 않아. 살아있는 동안에만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돈을 쓰다가 그냥 죽으면 그뿐이야. 후작 가문의 후계 같은 건 나하고 상관없다고.”

“차가운 여자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비즈니스 카드를 당신에게 쓰지 않았겠지. 당신의 그 성정 때문에 말이지.”

그 말을 했을 때 엠마 콘차는 다시 눈동자가 돌아가도록 하얗게 알바로 남작을 째려보았다. 그가 애욕이 짙게 밴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그럼 이번 내기에서 엠마가 진다면 나와 하룻밤은 어때?”

은근한 웃음과 함께 그의 손이 엠마의 허벅지 위를 비빈다. 그 은근함이 익숙한 듯이 그녀가 그를 보며 말했다.

“그건 생각해 볼게요. 물론 내가 졌을 경우에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진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난 경매에서 얻은 그리스 석상을 줘요.”

“아하! 원하는 게 그거였어? 지난 경매에서 내게 낙찰된 거. 바로 쫒아왔는데 안 됐군. 좋아. 그렇게 하지.”

지난밤의 엠마의 탐욕을 생각하자 앞에서 밝게 웃으며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디아나가 알바로 남작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청순하고 귀엽게만 보인다.

이렇게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여자를 꺾는 건 정말 쉬운 일인데 말이야. 너무 쉬운 상대를 택했나. 하는 마음이 들며 디아나를 보고 말했다.

“산책하지 않겠어요? 디아나?”

“까스틸로 부인이에요.”

자꾸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에게 거리를 두려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젓는다.

“디아나? 그냥 디아나라고 부를게요. 이렇게 한창 젊은 아가씨에게 ‘부인’자를 붙이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라울과 결혼한 후로는 그게 익숙하다. 라울이 너무 높고 유명하다 보니 따로 떼어서 불린 적도 없다.

“전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니까 부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정 그러길 원하신다면 이름 불러도 괜찮아요.”

“그래요, 디아나. 함께 걷죠. 어디 특별히 가야 할 데 있나요?”

“그렇지 않지만……”

“그럼 저기 있는 공원까지 같이 한번 가볼까요?”

생각보다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는 알바로 남작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이 사람과 같이 산책해도 될까? 그런데 이 사람은 정말 라울에 대해서 잘 아는 거 같다. 눈동자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말까지 다 알아맞히는 걸 보면 말이다.

혼자 산책하는 것보다는 낫기도 하겠고. 그래서 말없이 걷기 시작하자 알바로 남작이 따라서 걷는다.

카페에서 조금만 가면 있는 공원은 올리브 나무가 가로수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까스틸로 성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올리브나무 자체가 나는 너무 좋다.

라울의 향기가 있는 나무니까 말이다. 라울은 어째서 그렇게 짙은 올리브 향기를 풍기는 걸까? 올리브를 너무 많이 먹어서 피부에서 온통 올리브 냄새가 나는 걸지도 몰라.

그렇게 라울을 생각하며 혼자 피식피식 웃고 있을 때 옆에서 알바로 남작이 말을 건넨다.

“뭘 생각하면서 그렇게 혼자 웃죠? 그렇게 혼자 웃는 모습을 보니 마치 사춘기 소녀 같네요.”

“아,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다른 생각이 나서…….”

휙 하고 바람이 한번 불면서 오리 떼가 푸드득 거리고 물 위에서 날아올랐다 내려앉는다. 잔잔한 호수가 물오리 떼의 날갯짓으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머리에 잠시 덤불 같은 게 내려앉았나 보다. 갑자기 옆에 있던 알바로 남작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머리를 손으로 만지려 한다.

“어?”

순간 긴장하고 몸을 뒤로 한 발짝 무르자 알바로 남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 놀랬나요? 미안해요. 머리 위에 지푸라기 같은 게 묻어서. 잠깐만요 내가 좀 떼어줄게요.”

그리고 머리에 묻은 지푸라기를 떼더니 내 눈앞에 보여준다. 커다란 손바닥에 있는 지푸라기는 아주 가늘고 작은 거였다. 세심하게 보지 않는다면 놓칠 수도 있는 그런 거였다.

“아, 고맙습니다.”

“원래 그렇게 경계심이 많아요?”

“네?”

“디아나 말이에요. 그렇게 경계심이 많아요? 라울 말고는 남자가 가까이 오는 것도 싫고 그런가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라울 말고 다른 남자가 가까이 올 일도 없었고, 그렇게 온다면 내 기분이 어떨까, 이런 생각 같은 건 말이다.

라울도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기 전에 멋모르고 만났다. 그리고 그냥 그 사람이 나의 전부 다였다. 다른 남자는 가깝게 만나본 적도 없고 또 다른 남자가 내가 가까이 올 거라는 생각 같은 건 미리 해 본 적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남자는 가까이 오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 그런 사람인 건 아니다.

“아, 그럴 리가요. 그렇진 않지만 생각지 못한 거리여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알바로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모든 사람들에게는 적정 거리라는 게 있으니까.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익숙한 거리, 또 가까운 사람들이 익숙한 거리.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부부라고 하죠. 같이 자고 가장 가깝게 있으니까. 연인들은 원래 그런 거리죠. 그런데 내가 처음 만난 사람치고 그 적정 거리를 침범했나요?”

“아유, 무슨 말을 또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규정지어서 말하는 건 익숙지 않다. 하지만 알바로 남작의 말은 맞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적정 거리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알바로 남작이 적정 거리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긴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울이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나는 조금 걷다가 알바로 남작을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야겠어요.”

“왜요? 이제 날이 더 따듯해지고 있는데. 햇빛 쐬면서 조금 더 걸어요. 동양여자라고 하지 못할 만큼 얼굴이 하얀 거 알아요? 어디 아프거나 그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관심 가져주는 건 좋지만 그렇게 사적이고 너무 가까운 배려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전 라울 말고 다른 남자가 가까이 오는 거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경계하는 사람인 거 같아요.”

“아쉽군요. 이런 미인이 나를 경계하다니 말이지요. 설마 남편이 다른 남자하고 말도 못 하게 할 정도로 보수적이라거나 집착이 강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당근이지. 라울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연한 일 아니겠어? 뭐 맞는 말인 걸 아니라고 할 일도 아니다.

“왜 아니겠어요? 라울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서요. 우리 남편 그래요. 다른 남자하고 말하는 거 싫어하고 집착도 강하고. 그런데 난 좋아요, 그런 집착. 날 사랑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도 그 사람 불편하게 하면서 다른 남자하고 시간 보내고 싶진 않구요.”

“지금 잠깐의 산책도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하는 건가요?”

알바로 남작이 마음이 상한 듯이 인상을 썼다. 조금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울의 기분을 해쳐가면서 알바로 남작을 배려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다면. 나중에 까스틸로 성에 놀러 오시면, 아, 저희 남편 있을 때요. 그럼 그때 이번에 기분 상한 거 만회할 수 있게 대접하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려 하자 알바로 남작이 불렀다.

“디아나? 여기 있는 아이스크림 보기보다 굉장히 맛있는데 이대로 가는 대신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래요?”

“네?”

뜬금없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가라는 말에 나는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상인이 보인다.

“이 공원에서만 10년 넘게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이에요. 맛집으로 소문난 곳인데. 봐요 저기 줄 서 있는 거. 내가 가서 사줄 테니까 하나만 먹고 가요. 그럼 용서해줄게요.”

집요하게 친절한 알바로 남작이었다. 저 집의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이 있다. 잊고 있었는데 여전히 같은 아저씨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다. 굳이 사주겠다는 아이스크림을 거절할 것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내가 잠깐 서 있는 동안 알바로 남작이 빠른 걸음으로 가 두세 사람 줄 서 있는 뒤에 줄을 서더니 소프트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온다. 그리고 다가와 아이스크림을 하나를 내게 건넨다.

“요거트 맛이에요. 이게 제일 맛있어요.”

“감사해요. 좋아해요, 요거트 아이스크림. 잘 먹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걸었다. 자꾸 말을 걸고 거절할 수 없는 작은 제안들을 하는 그에게 다른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라울이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듯한 착각 때문에 더 그랬다.

“잘 가요! 나중에 또 봐요.”

뒤에서 한 번 더 인사하는 알바로 남작을 향해 나는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는 호텔 쪽으로 걸었다.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이 좋았다. 물론 나도 아는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그랬기 때문에 받은 거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먹어보는 소프트아이스크림.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소녀시절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참, 알바로 남작이라는 사람, 여자들한테 다가서는 기술이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니까 필요 이상 내가 그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할 것도, 경계할 것도 없다고 본다.

단지 난 라울이 하지 말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호텔로 돌아와 거울을 보자 생기 있는 얼굴이 보인다.

“전혀 창백하지 않은데 창백하다고 그래, 괜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볼을 쓰다듬고 가벼운 스프레이를 뿌렸다. 창백하다며 접근하는 것도 수법인가?

* * *

사무실에 있는 동안 내내 일을 보고 잠시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와 말을 전한다.

“엠마 콘차라는 분이 찾아왔는데요.”

“엠마 콘차?”

여기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찾아왔다는 게 왠지 마음이 무겁긴 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년 전에 헤어진 뒤로 말이다.

“들어오시라고 해. 차도 좀 준비해주고.”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며 동시에 엠마가 들어섰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도 10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나보다 2살 위니까 서른일곱. 그러나 이제 갓 30살이 되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녀가 나를 찾아온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콧대 높고 모든 남자들을 발아래 무릎 꿇게 만드는 사교계의 여왕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웬일이야, 엠마. 오랜만이군.”

“역시 라울. 단둘이 있으니까 옛날 부르던 대로 불러주네. 불편하게 콘차 후작부인이니 뭐니 이렇게 호칭을 늘어놨으면 정말 실망했을 텐데.”

그녀가 화사한 웃음을 걸고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타이트한 실크 스커트가 항아리 같은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나간 시간과 함께 감정도 사라져 버렸다. 내 눈에 아름다운 건 디아나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편안하게 응대해 주었다.

“뭐,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 그렇게 못 불러 줄 것도 없지. 하지만 우리 사이에 굳이 그럴 거 없잖아 엠마?”

“맞아 라울. 우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아. 아니야?”

그녀는 친근감을 드러내며 말했지만 그녀의 그런 친근감은 사실 근거 없는 거였다. 난 이미 많이 달라졌고 우리는 10년 전에도 서로를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디아나를 만나고 나는 어머 어마하게 달라졌으니 말이다.

“글쎄. 달라진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나는 이미 결혼했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둘이나 생겼고 말이야. 하나같이 아내를 닮아서 어찌나 깜찍한지. 이 아버지를 아예 통으로 찜 쪄 먹으려 든다고.”

“무슨 말이야, 라울. 정말 라울답지 않은 말을 하네.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늙은이 같잖아?”

“글쎄. 나이가 든다는 게 말이야. 너무 웃기게도 자식들이 내 나이를 먹여주고 밀어 올리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말이야.”

“결혼하는 거 후회하는 거 아니야? 자유로운 영혼인 라울이 어쩌다가 그런 동양여자하고 결혼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천만에. 후회라니!”

엠마가 어떤 의미에서 저런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엠마가 나에게 청혼했을 때 나는 분명히 결혼은 일생에 단 한 번 쓸 수 있는 비즈니스 카드라고 말했다. 그래서 엠마에게 그런 카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엠마는 내가 왜 결혼을 했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사랑이라는 건 몰랐을 때다. 사랑이라는 변수가 엠마와 나 사이에는 작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와 나 사이에 작용했던 건 그건 무엇이었을까.

애욕과 과시욕. 그리고 청춘의 방종한 자만심. 물론 서로의 외모나 배경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빙긋 웃자 엠마가 다시 한 번 나를 보더니 요염한 눈빛으로 빙긋 웃는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드러내 주는 육감적인 원피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엠마는 늘 저런 타입의 원피스를 좋아했었다.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꽉 달라붙고 가슴은 깊게 패인 그런 원피스였다.

몸의 굴곡을 잘 보여주면서 여성스러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물론 지금도 보기에는 좋다. 하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디아나에게 알바로 남작과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해놓고 이렇게 버젓이 엠마의 몸매를 보고 있다는 건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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