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43)

로얄 스캔들 8

<특별외전>

- 외전 -

8.

왈츠가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치며 잠깐 쉴 때였다. 턱시도를 입은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라울에게 인사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까스틸로 백작님, 저는 SPN 방송국 대표 후안입니다. 부인이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의 인사에 라울은 살짝 고개만 까딱했다. 그는 라울의 그런 반응에도 아주 친절하게 내게도 인사하며 다시 말했다.

“꼭 한번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연락드리게 된다면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방송국에서 모시고 싶어 하는 젊은 귀족 영순위니 말입니다.”

라울은 아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인사만 했을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후안이 가고 나자 다른 사람들도 찾아와 인사했다. 그렇게 몇 사람들과 인사하자 바로 목이 마르다.

“디아나, 내가 샴페인을 가지고 올게.”

“고마워요, 라울.”

빠른 왈츠를 추고 연거푸 사람들과 인사를 하자 입술이 마르다. 작게 숨을 내쉬며 그렇게 있을 때였다. 라울이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한 그 알바로 남작이 바로 내 앞에 다가왔다.

“정말 아름다운 세뇨라, 저도 한 곡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니, 저는…….”

어떻게 춤을 거절해야 되는 건지.

“저는 남편과 함께 추기로 했어요.”

“모든 곡을 전부 다 말입니까? 허허,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울고 가야 될 거 같군요. 당연히 다른 사람과도 춤을 추셔야죠.”

그렇게 그가 손을 내밀자 나는 라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라울은 조금 전 인사했던 콘차 후작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콘차 후작부인은 풍만한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낼 정도로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젖꼭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드레스 위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불룩 솟아있다. 마치 과거 유럽의 부인들을 그린 그림에서나 나온 듯이 말이다. 그런 라울이 그녀하고 이야기를 하며 그 시선이 그녀의 가슴 사이로 가는 것을 보는 순간 꼭지가 돌았다.

“좋아요. 추겠어요.”

나는 순간 화가 나서 알바로 남작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음악과 함께 알바로 남작이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빙글 돌리며 다시 무도회장 가운데로 나아간다.

내가 춤을 추기 시작하고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라울은 콘차 후작부인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내가 알바로 남작과 춤을 추고 있는지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점점 더 신경이 쓰였다.

“혹시 라울이 엠마를 바라보는 게 신경 쓰이나요?”

“네?”

춤을 추며 눈을 들어 그를 보자 알바로 남작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죠. 어떤 남자가 저렇게 육감적인 콘차의 몸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게 여자의 미덕이기도 하죠.”

이건 무슨 개또라이같은 소리야. 여자의 미덕이 젖가슴을 보여주는 거라고 누가 그러는데?

나는 순간 그 말에 반기라도 들듯이 그의 발을 슬쩍 밟았다. 뾰족한 힐로 찍어주어야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그의 구두코를 눌러주었다.

“어머, 죄송해서 어떡해요?”

“아닙니다. 이런 미인과 춤추는데 이 정도 아픔은 감수해야겠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예전에 라울의 발을 밟았을 때 그가 한 말인데. 뭐야, 이거 바람둥이 멘트야?

그렇긴 하지만 이 한심스러운 알바로 남작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니 라울이 지금쯤이면, 하고 눈을 들어 라울 쪽을 보았다. 아니나 달라? 샴페인을 양손에 든 라울이 나를 당장 태워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다.

니가 먼저 엠마인가 뭔가 하는 그 후작부인의 가슴을 봤잖아.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꼭지 돌아서 한심한 바람둥이하고 춤을 추고 있진 않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쪽이 뜨끔했다. 분명 라울이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는데.

아, 이 춤만 추고 난 다음엔 라울에게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곡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웬일인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이 곡은 쉽게 끝나질 않는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파트너를 바꾸어 다른 사람에게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며 춤을 추게 된다. 겨우 음악이 끝날 때쯤 라울 가까이로 오자 라울은 콘차 후작부인의 손을 잡고는 무대로 나간다. 너무 기가 막혀 그 자리에 서 있자 알바로 남작이 샴페인을 들고 와서 한잔 건넸다.

“드시지요, 세뇨라.”

“감사합니다.”

봉숭아 향기가 나는 샴페인은 톡 쏘는 것이 가슴이 다 시원하게 내려간다. 쭉 들이키는데 알바로 남작이 내게 인사를 했다.

“저기, 아는 분이 오셔서요. 잠시 혼자 계셔도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남편이 저 곡이 끝나면 올 텐데요.”

“알겠습니다.”

알바로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에 나는 샴페인 잔을 옆에 놓고 예쁜 카나페 하나를 손에 들었다. 치즈와 올리브와 햄이 예쁘게 장식돼있어서 끝에 꽂혀있는 체리마저 예쁘다. 입에 넣고 씹다가 눈을 내렸는데 목걸이가 없다.

이럴 수가! 라울이 신혼여행 때 선물해준 건데.

너무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아도 목걸이가 보이질 않는다. 가슴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친다. 곡이 끝나고 라울이 내 쪽으로 걸어왔는데 나는 너무나 가슴이 떨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알바로 남작과 춤을 춘 것보다 목걸이가 없어진 게 더 겁이 났다.

“라울!”

“내 이름은 왜 불러?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한 남자하고 춤까지 추고 시시덕거리더니.”

찔러대는 그의 말이나 눈길보다 나는 목걸이가 더 급했다. 아끼느라 몇 번 하지도 않은 건데 말이다.

“라울, 내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뭐야? 그새 정분이 나서 남자에게 풀어 줬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라울.”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고인다. 정말 아끼는 목걸이였는데 여기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게 그렇게 잠금장치가 쉽게 풀리는 게 아닌데. 내가 창백해져서 말하자 라울은 그제야 내 눈을 응시한다.

“라울, 어떻게 찾죠?”

그런데 이럴 때 라울은 예상외로 침착하고 또 여유 있다. 라울이 내 어깨를 감싸며 작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을 거야. 지배인에게 말해보도록 하지. 못 찾는다고 해도 괜찮아. 그렇게 하얗게 질리지 않아도 돼.”

정말 감쪽같다. 몸에 손을 댄 사람도 없는데. 그렇다고 그 알바로라는 귀족이 내 목걸이를 훔쳐갔을 리도 없고. 하지만 라울과 춤을 추고 나서도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라울과 내가 주변을 바라보며 라울이 지배인에게 목걸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콘차 후작부인과 알바로 남작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콘차 후작부인의 손에는 바로 내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이거 혹시 까스틸로 부인의 것이 아닌가요? 좀 아까 본 것 같은데.”

“예, 맞아요.”

그러나 목걸이를 찾아가지고 오는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을 보는 라울의 시선은 무척 불편하고 못마땅하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라울이 바로 앞으로 나가며 후작부인의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목걸이를 찾았군.”

“저쪽에 떨어져 있어서 제가 주웠어요. 물론 알바로 남작이 먼저 발견해서 말해주었지요.”

콘차 후작부인이 말하자 라울은 두 사람을 쏘아보며 아주 느리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들 찾으셨군요. 꼭 숨겼다가 찾은 것처럼 말이지요.”

왜 저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라울은 두 사람을 무척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런 라울을 보며 옆에서 알바로 남작이 여유 있게 한마디를 한다.

“이런, 귀한 목걸이를 찾았는데 뭔가 성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하는 게 뭡니까? 아내가 아끼는 목걸이를 찾아주셨으니 당연히 성의 표시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콘차 후작부인이 말했다.

“까스틸로 성에 좀 초대해 줘요. 나랑 알바로 남작이 함께 가고 싶었거든요.”

라울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바라보며 하는 그녀의 말에 라울이 인상을 썼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거지?

나는 목걸이를 다시 찾은 것만 너무 기뻐서 그들이 성에 초대해달라고 하는 것을 전혀 거슬리게 듣지 않았는데 라울은 아닌가? 이 목걸이가 없어졌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성에 좀 초대해주면 어때서 저러는 거지.

내가 목걸이를 걸려 하자 옆에 있던 알바로 남작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찾았으니 제가 걸어 드리면 어떨까요?”

“네?”

그가 바로 다가오더니 내 손에 있는 목걸이를 들었다. 그러자 라울이 그의 손에서 목걸이를 탁 뺏으며 말했다.

“찾아주신 건 고맙지만 내 아내의 목덜미에 손가락 하나 대는 것을 제가 용납할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아마 소문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무척이나 집착하고 있는 아내라서요.”

“아아…….”

알바로 남작은 알았다는 듯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라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목걸이 하나 거는데 왜 이렇게들 신경전이야? 다들 꺼져. 내 목걸이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걸 수 있다고.

“라울. 내가 걸게요.”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라울은 내 어깨를 꼭 잡으며 말했다.

“아니, 꼭 내가 걸어줘야겠어.”

기어이 라울은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목걸이 하나 걸어주면서 얼마나 목에 키스를 하는지 앞에서 보는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을 보기가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라울이 목걸이를 걸어주고 옆에 서자 알바로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새삼스러울 게 뭐 있나, 내가 잘 알고 있지. 라울 까스틸로가 얼마나 집착이 심한지 말이야. 우리는 한때 연적이기도 했으니. 안 그런가? 물론 내가 졌지만 말이야.”

알바로 남작은 말하며 눈을 돌려 옆에 있는 콘차 후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콘차 후작 부인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야, 내가 모르는 이야기인가?

나는 알바로 남작의 말이 은근 신경이 쓰였다. 라울과 둘이 연적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그럼 그 연적의 상대는 누구지? 내가 라울과 결혼했으면 지금 알바로 남작의 부인일까?

하지만 알바로 남작이 아직 독신이라는 것은 바로 다음 대사에서 밝혀졌다. 라울이 알바로 남작을 보며 한마디를 던졌기 때문이다.

“남작님이 아직 독신이라고 말을 그렇게 막하면 안 되지. 내 아내가 기분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는가 보군. 아니면 오래전 졌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뼈에 사무쳤나?”

독신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멀뚱멀뚱 있자 라울이 다가오더니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으로 쓸어보며 빙긋 웃는다.

“딱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법이지.”

목걸이가 예쁘다고 하는 말인 거 같으면서도 나를 보며 하는 말은 마치 내가 자기 옆에 있어서 아름답다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런 라울을 보는 콘차 후작부인의 눈길이 곱게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잃어버린 걸 찾았고, 빛나는 목걸이가 목에 걸리자 허전함이 사라진다. 내가 활짝 웃자 라울이 내 손을 잡고 알바로 남작과 콘차 후작부인을 보며 말했다.

“목걸이를 찾아줘서 감사하고 뭐든 말하라고 했으니 집에 초대하기로 하겠습니다. 시간 날 때 미리 세베로한테 말씀해주신다면 말입니다. 두 분 다 세베로는 알고 계시지요?”

“어? 세베로? 세베로를 모를 리가 없죠.”

콘차 후작 부인이 나서며 말했다.

“아직도 세베로가 까스틸로 성에 있나요?”

“뭐 당연한 말씀을. 그럼, 다음에는 까스틸로 성에서 뵙기로 하지요. 조금 이르지만 먼저 가겠습니다.”

라울이 내 손을 잡고 무도회장에서 나왔다. 커다란 숄을 두른 내 팔을 감싸고 마드리드 궁의 대리석 계단을 지나 정원을 내려오자 내가 라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저 두 분, 원래부터 알던 사람이에요?”

“뭐 두 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쓰레기들이야.”

알바로 남자작과 콘차 후작부인에 대해 말하는 라울의 얼굴은 싸늘했다. 저런 차가움은 내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인데 말이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을 왜 성으로 초대했어요? 지금이라도 물러요. 그럼 되잖아요.”

“아니, 초대할 거야. 왕궁에서 뱉는 말인데 지켜야. 하지만 두 사람 다 마음에 들지 않아.”

갑자기 라울이 뭔가 생각하는듯하다가 나를 보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저 알바로 남작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절대 단둘이 있는 시간은 만들지 마.”

“알겠어요. 그런데 당신 설마 내가 알바로 남작에게 넘어가기라도 할까 봐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설마?”

그러자 라울은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쁘게 사람을 뭐로 보고 말이야. 내가 이미 유부녀라고 해도 아직은 엄연한 20대인데 40대 초반의 남자에게 넘어갈 거라는 거야?

“그런데 라울, 정말로 저 알바로 남작하고 연적이었어요?”

“쓸데없는 걸 다 기억하네. 뭐야 그놈이 하는 말을 다 기억하고.”

“하지만 그건 다 당신하고 관련된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나 진짜 질투할 건데? 대체 어떤 여자기에 대단한 귀족들이 연적씩이나 하면서 열을 올렸던 거예요? 그 여자는 지금 뭐한데요?”

정말 말을 하다 보니 더 질투가 난다. 내가 바짝 곤두서서 말하자 라울은 그게 좋기라도 한지 웃는다.

“디아나, 그렇게 반응해 줘서 고맙기는 한데 질투 같은 건 전혀 할 필요 없어.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디아나뿐이니 말이야.”

라울이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뭐해요! 사람들 보는데.”

“다 보라고 하는 짓이지. 어때, 오랜만에 이렇게 들어 올려주니까.”

“내려줘요.”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라울이 긴 팔까지 높이 뻗어서 나는 2m도 훌쩍 넘는 허공에서 라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왕궁 정원 한복판에서 이렇게 높이 들려서 내려다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이 남자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였다.

“아니, 이렇게 볼 거야. 나한테는 디아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내 말 듣지 않고 알바로 남작하고 춤까지 췄으니 이 벌을 어떻게 받을 거지?”

“라울,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먼저 콘차 후작 부인하고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가슴을 보는 걸 봤단 말이에요.”

“그렇게 드러낸 가슴을 보지 않는 사람도 있나? 어찌 됐든 알바로 남작하고 춤을 춘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사실 여기 오면서 단둘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거든.”

라울은 마드리드 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호텔 스위트룸을 미리 예약해 놨다. 그곳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실내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리고는 라울이 음악을 틀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가벼운 왈츠. 라울은 내 허리에 손을 감고 카펫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나만 보고 이렇게 단둘이 춤을 추고 싶었어. 그렇게 사람 많은 데서 있는 건 불편하거든.”

“라울, 목걸이를 잃어버린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그렇게 떨어질 만큼 약한 목걸이는 아닌데…….”

“내 생각엔 알바로 남작이 그랬을 확률이 높아.”

라울이 아주 담담하게 말했으나 나는 너무 놀랐다.

“왜요? 훔쳐가려고 했으면 가져갔으면 됐을 텐데, 그럼 대체 왜 도로 가지고 왔을까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라울은 전혀 이상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구실을 만들어서 까스틸로 성에 오려고 했겠지. 늙은 여우와 너구리의 작전일 수도 있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라울,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 전혀 낯이 익지 않은 건 저번에 까스틸로 성에서 파티를 할 때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지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 처음 만난 파티 말이에요. 그때도 성에 오지 않았던 사람인 거죠.”

“당연하지. 내가 세베로한테 저 두 사람은 절대로 초대하지 말라고 했었거든.”

“왜요? 당신이 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두운 한빛은 그럴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예민할 필요 없잖아요?”

“물론이야 그렇게까지 예민할 이유는 없지.”

라울이 나를 들어 안고는 테이블 한쪽 옆에 앉혔다. 내 볼이 붉게 상기되었는지 라울이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샴페인 몇 잔 마셨어?”

“한잔 정도 마시다가 말았어요. 마실 시간이 없었잖아.”

“여기서는 많이 마셔도 돼.”

라울이 잔에 담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겹친다. 달콤한 샴페인이 라울의 입술과 함께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꼴깍 넘어가는 샴페인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알콜의 기운이기도 하겠지만 라울의 눈길이 뜨거워서였다.

“라울.”

나도 모르게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의 이름이 나왔다. 라울이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목덜미에 코를 비빈다. 간지러운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몸은 더 달아오른다.

“성에서도 좋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는 건 더 좋지 않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엄청난 까스틸로 성에서 늘 사람들을 챙기고 일을 하고 아이들을 걱정하고 지낸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단둘이 호텔에 있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 마드리드 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거 알아?”

라울이 내 목선을 따라 손가락을 내리며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점점 가슴골을 향해 내려가자 나는 긴장으로 더욱 잠긴 소리를 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가장 아름다웠던 거 맞아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말 한마디를 해도 어차피 그렇다고 할 거면서 이렇게 돌려 말하는 라울. 정말 못 말린다.

“라울도 정말 멋졌어요.”

“물론이지.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는 늘 듣던 얘기야.”

도무지 이 사람한테 겸손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다.

그것도 내 앞에서만 그런 건가? 흥 그래, 잘 났다 라울 까스틸로? 라울의 손이 다정하게 내 두 볼을 감싼다. 그리고 눈을 맞춘다.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더욱 진해지는 보랏빛. 이건 그가 나를 사랑하려고 할 때마다 빛나는 빛깔이다.

“내가 이 스페인에서 제일 경계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왕궁의 파티야 온갖 소문이 다 거기서 퍼져 나오니. 눈길 한 번만 간수를 잘하지 못해도 말이야. 그런데 오늘은 오고 싶었어.”

“왜요?”

“디아나를 자랑하고 싶어서.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이 이렇다고.”

“오늘도 이사벨을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내가 말하자 라울이 내 얼굴을 꼼꼼하게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닮았어. 우리 엄마랑. 하지만 디아나가 훨씬 더 예뻐. 사랑스럽고. 물론 내 눈에만 그런 거지만. 알지?”

“알아요. 당신 눈에만 그런 거. 그런데 당신 눈에만 그러면 돼. 당신 눈에만 예쁘면 된다고요.”

라울의 손이 천천히 가슴골 안쪽을 따라 내려온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은밀함. 언제나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또 새롭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도 내가 라울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 거다.

예전에는 결혼하면 사랑은 다 없어지는 줄 알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와 아빠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나를 혼자서 키워서 그런가? 그런데 이미 아이를 둘을 낳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사랑한다.

아니 더 깊게 사랑하는 것 같다. 익숙함까지 더해진 말할 수 없는 중독. 그 중독이 주는 안락함. 그래서 이 남자를 더 사랑한다. 그리고 라울도 나와 같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별히 열등감을 가지는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라울과 함께 마드리드 궁에 있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거대한 성에서 쟁쟁한 가문의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어떻게 안 들 수가 있을까?

나는 늘 긍정적이고 힘 있게 미래를 설계하고 당차게 살아가는 그런 여자였지만 라울을 만난 이후로는 내가 이전에 꿈꿔보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들 앞에 부딪히고는 한다. 사실 궁 안에서 나는 나 혼자만 초라한 성냥팔이 소녀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고 그 옆에 라울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자랄 때부터 뒷심이 부족해서일까?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그리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도 잘해서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를 안고 있는 라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라울, 실은 나 말이죠. 아까 마드리드 궁에 있을 때 좋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었지만, 그보다는 주눅이 들고 슬펐어요.”

내 말에 라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린다.

“정말?”

내가 커다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라울이 나를 단단히 잡고 말했다.

“이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의 부인이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이 주눅이 든다고?”

라울이 가슴을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내게 물었다. 그의 손길에 훅하고 절로 숨을 들이켜며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알아요. 하지만 주눅이 들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마드리드에서 민박집을 하고 또 알바로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공부를 하던 그런 여대생이었으니까요.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너무 높고 너무 부자인 사람들 앞에 그렇게 섰을 때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자 라울이 내 볼을 입술로 간지럽게 비비며 말했다.

“그럼 이런 데 다신 오지 말까?”

“아니에요, 그런 말이 아니라요. 그렇게 주눅이 들었는데도 당신이 옆에 있어서 괜찮았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있으면 어디 있어도 다 괜찮아요. 주눅이 들었지만, 당신이 내 팔을 단단히 잡아줬기 때문에 거기서 당당하게 있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그 재서야 라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고맙다고?”

“고마워요.”

“말로만?”

그가 나를 번쩍 들어 나를 자신의 배 위에 얹어 놓았다. 그하고 같이 있으면 내가 마치 아이가 된 것 같다. 이렇게 마음대로 번쩍번쩍 안아 드니 말이다.

“무겁지 않아요? 나도 옛날 같지 않은데.”

“겨우 2킬로 불었다며. 그건 보통 사람은 밥 한 끼만 든든히 먹어도 불어. 겨우 2킬로 가지고 아줌마 티 너무 내는 거 알아? 근육량으로 2킬로가 늘면 오히려 살은 빠져 보일 수도 있다고. 오히려 내가 볼 때는 더 빠진 것 같은데?”

라울이 그렇게 말하며 내 등에서부터 허리 엉덩이까지를 손으로 쓸어본다.

“그렇군. 더 단단해지고 말이야. 거 봐 내 말대로 운동하니까 좋지?”

“맞아요.”

사실 라울의 말을 듣고 까스틸로 성에 있는 헬스를 이용했다. 라울은 평소에도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대부분 승마를 했지만 승마를 하지 않을 때는 성 한쪽에 준비해놓은 헬스장에서 헬스 트레이너와 함께 늘 헬스를 한다. 그리고 나한테도 하라고 권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바빠서 못했지만, 이 까스틸로 성에서야 굳이 헬스장을 가는 것도 아니고 성안에 있는 곳을 이용하는 것이니 더 하기가 좋았다.

나는 보통 때 사라 윤하고 같이 운동하기도 했는데 그녀도 운동하고 난 뒤 깡마른 몸이 조금 더 보기 좋아졌고 나는 아이를 낳고 난 뒤에 조금 퍼진 몸이 더 단단해졌다고나 할까? 근육량이 늘면서 몸이 피곤한 것도 덜하고 확실히 운동은 좋은 것 같다.

“그러니 이 단단한 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톡톡히 해야 할걸?”

“흐흑! 라울…….”

라울의 손이 단단하게 내 가슴을 쥐며 깊은 키스를 시작했다.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다리를 누르며 파고들자 나는 점점 더 가쁜 숨을 쉬며 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오자 긴장한 가슴이 점점 팽팽하게 부푼다.

“운동을 잘 시킨 거 같아. 아! 디아나.”

집요한 입술의 움직임. 드레스와 턱시도는 하나하나 침대 옆에 쌓이기 시작했다. 풍성한 드레스와 그의 실크 셔츠까지 겹겹이 쌓이는 걸 의식하면서 나는 라울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가 여전히 가슴을 입에 물고 손을 내려 내 소담스러운 수풀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기 전부터 고조된 성적 긴장감으로 음모 한 올 한 올이 곤두서 있었는데 그런 곳을 그가 덥석 잡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흐른다.

“으음…….”

비음 석인 내 신음에 그가 씩 웃으며 단단한 허벅지로 내 다리를 더 넓혔다. 까만 음모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매끄럽게 젖어 든 내 속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크게 비볐다.

뭉근하게 퍼지는 전율에 내 허리가 크게 휘자 그의 손가락이 속살을 벌리며 숨어있는 진주알을 찾아 짓뭉개듯 비볐다. 날카로운 쾌감에 숨이 막힐 듯 나가 헐떡였다. 크고 두꺼운 손가락에 비벼지는 비밀스러운 진주알은 너무도 민감하다.

“으응…… 하아…….”

라울이 조금 더 힘을 주어 비비자 타다닥 하고 머릿속에서 하얀빛이 터지는 것 같다. 아찔한 감각에 내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라울의 손은 그런 반응에 탄력을 받아 조금 더 아래의 연한 속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문을 가르고 파고들어 깊게 밀어 넣자 내 안이 저항하듯 오밀조밀 움직이며 이물질에 달라붙는다. 생각지 못한 힘이 손가락에 느껴지자 라울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졌다.

“으음…… 죽이는군. 역시 운동 효과야.”

“하아…… 라울. 진짜 운동 효과가 있어요?”

내가 야릇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하자 그가 그대로 손가락을 늘리며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예민한 곳을 입으로 깨물 듯 빨아들였다.

“아아…… 하……”

나는 갑자기 맞은 벼락같은 진한 자극에 허벅지를 바르르 떨었다. 무서운 자극을 피해 도망가고 싶으면서 동시에 더 닿고 싶다. 상반되는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그러나 라울은 내 하체에 얼굴을 묻은 채 일어나지 않고 무섭게 핥고 빨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부드러운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격정에 못이기는 뜨거운 흡입에 나는 아득한 감각을 붙잡고 떨며 헐떡였다.

두 다리를 꽉 잡고 앉은 채로 내 골반을 더 잡아당기자 내 등이 침대에 닿은 채로 하체는 완전히 허공을 향했다. 그런 내 벌어진 속살에 얼굴을 묻은 라울이 무서운 자극에 움찔거리는 속살을 인정사정없이 핥고 빨고 있었다.

내 아랫도리에 묻은 라울의 얼굴과 빨갛고 긴 혀가 살을 핥아 올리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자 외설스러움에 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허공에 들린 다리가 가슴에 닿을 듯하고 피가 거꾸로 몰리는 거 같은데도 그보다는 그의 혀끝에서 전해지는 미칠 거 같은 자극이 더 크다.

격렬한 전율이 아랫배를 휩쓸고 애널까지 움찔거리게 하더니 꼬리뼈를 타고 척추를 흔들며 머리에서 하얀 불꽃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아아아…… 아응…….”

견딜 수가 없어 발버둥 치며 나는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라울 그런 내 위로 덮치듯 엎드려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는 내 입술을 깊게 빨아들이며 혀를 밀어 넣었다.

참을 수 없이 발기한 남성 끝으로 통증이 느껴지는지 그가 인상을 쓴다. 라울이 삼각팬티를 밑으로 내리자 뜨거운 열기를 품은 그의 것이 튕겨 나와서 끄덕거린다.

달아오른 속살에 대고 라울이 문지르자 내가 펄쩍 뛰듯이 허리를 틀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절정의 여운으로 민감한 속살에 닿는 그의 것에 저절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입술을 빨아들이며 손으로 제 것을 쥐어 내 속살에 대고 조금 더 질척한 소리가 들리도록 비비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다른 뭉툭하면서도 뜨거운 감촉에 절로 긴장하게 된다. 닿는 것만으로도 그 위용이 남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얼굴을 돌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손을 내려 그의 것을 잡았다.

한 손안으로 다 감싸지지 않는 크기는 여전하다.

“짐승.”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에 라울이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그래. 난 짐승이야. 짐승하고 매일 하다시피 하면서 살았잖아. 어때? 오늘 더 마음에 들어?”

“말하는 것도 딱 짐승 수준이야.”

“그것도 좋은 말이야. 기대해.”

라울이 씩 웃으며 내 볼에 키스했다.

“아앙아…… 아…… 으…….”

라울이 내 안으로 깊게 손가락을 밀어 넣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예민한 진주알을 입에 물었다. 내 향기가 진하게 들어온다. 늘 느끼지만 내 안에 이런 짐승의 본능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내 향기가 달고 좋다.

갈급하게 내 속살을 빨아 당기며 은밀한 액을 맛보자 점점 흥분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안을 긁어대며 민감한 곳을 찾듯이 건드려본다. 신음이 음악처럼 높낮이 있게 흘러나온다.

그중 어느 곳을 누르자 파르르 떨며 몸을 뒤트는 게 보인다. 그가 열점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혀와 손가락으로 누르고 짓이기면서도 숨은 진주알을 찾아 빨아대는 통에 온 신경이 발작적으로 흔들린다. 내가 정신없는 중에도 그의 손가락은 점점 빨라지며 기어기 깊이 있는 내 열점을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아아아. 거기…… 아윽…….”

정신없이 소리치는 내 안으로 그가 단숨에 묵직한 것을 박아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지독한 무게감과 한껏 벌어진 아래가 경련을 일으키자 내 비명이 커졌다.

“하아아아…….”

아래가 꿰뚫린 것 같은 느낌. 몸 전체를 완전히 채워버린 것 같은 거북함과 아래가 터져 나갈 것 같은 느낌에 나가 입을 딱 벌린 채 고개를 저으며 밭은 숨을 내쉬자 그가 한 번 더 허리에 힘을 주어 밀어 넣는다. 깊은 안쪽 끝에 닿는 오싹한 전율에 내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으읔. 죽이게 조이는군.”

그가 신음 같은 말을 뱉었다.

“대단하네. 운동하더니 아주 명기가 됐군.”

“명기?”

“말 그대로 아주 죽이게 조인다고.”

“흐윽…….”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내뱉었다. 라울이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바들바들 떨리는 아래가 엄청난 자극을 온몸으로 퍼뜨리고 있었다. 이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래 전체를 꽉 채우고 오든 신경을 한꺼번에 자극하는 통에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대체 내가 그동안 한 운동이 어떤 운동인데 이런 거지?

“운동하면 다 이래요?”

숨을 몰아쉬면서도 궁금해서 묻자 라울이 내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트레이너에게 말했지. 골반 근저근을 단련시키는 운동을 집중적으로 시켜달라고 말이야.”

세상에! 어쩐지 유달리 허벅지며 요상한 자세로 숨 참으며 엉덩이에 힘주는 운동을 하더라니! 그럼, 나 명기되는 훈련만 죽어라 한 거였어?

“못살아. 정말.”

“그렇게 좋아? 내가 아주 죽여주지. 천천히.”

그 말이 그 말이 아닌데……. 하여간 라울은 못 말린다. 할짝거리며 입술을 핥다가 부드럽게 혀를 감아들어 온다. 숨결을 나누며 그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자 따뜻한 온기 때문인지 무섭게 그를 물고만 있던 속살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그가 천천히 뒤로 그의 것을 약간 뺏다가 다시 밀어 넣자 조금 전과는 다른 매끄러운 자극이 나에게 전달된다. 길이가 길어서인지 깊은 안쪽 끝에 닿는 짜릿한 충격은 여전했다. 그가 다시 뒤로 몸을 물렸다가 앞으로 밀었다.

“하아…… 흑…….”

신음은 나오지만, 통증은 아니었다. 아래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의 것을 꼭 물기 시작하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굉장해. 으음…… 운동 더 열심히 해.”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듬을 타듯 움직이는 그의 남성을 따라 내 속살이 얽혀들며 그를 조이고 빨판처럼 빨아 당긴다. 하나로 맞물린 살이 무섭게 얽혀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아나!”

이런 아찔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분명 운동하면 많이 좋아질 수 있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처음처럼 좁을 수가 있을까? 완벽하게 조여드는 부드러우면서 탄탄한 속살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유연해졌는지 거의 다리가 완전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위로 올려도 옆으로 벌려도 유연하게 벌어지며 내 것을 받아들인다. 원 없이 완벽하게 깊은 곳까지 내 것을 밀어 넣을 수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디아나가 이렇게 명기까지 되다니!

나도 모르게 허리를 있는 힘껏 올려쳤다. 뿌리 끝까지 밀어 넣자 깊은 안쪽 끝에 닿는 느낌과 함께 무섭게 조여드는 디아나 안에서 그대로 사정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그대로 몸을 빼냈다.

깊게 닿는 아찔한 감각에 몸을 떨던 디아나가 갑자기 빠지는 허전함 때문인지 눈을 떴다. 나는 그대로 디아나의 몸을 휙 옆으로 돌렸다. 휘청하며 매트리스를 짚고 중심을 잡는 디아나의 다리 한쪽을 옆으로 높이 들었다.

활짝 벌어진 은밀한 살이 아직도 자극으로 움찔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미치겠네, 정말.”

나는 단번에 밀어 넣었다. 옆으로 돌려진 채로 내 것이 묵직하게 뚫고 들어가자 디아나가 크게 신음한다.

모든 신경과 세포가 아래로 쏠리며 한꺼번에 울려대는 통에 죽을 것만 같다. 그러나 흔들리는 그녀의 골반을 흔들림 없이 잡고 그 상태로 나는 무섭게 허리를 쳐올렸다.

옆으로 누운 채 내가 미는 대로 흔들리자 디아나의 소담스러운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탱탱하게 복숭아처럼 예쁜 모양을 잡은 디아나의 가슴은 그 끝의 진한 젖꼭지가 더욱 요염하게 보인다.

“언제까지 예쁠 작정이야?”

“당신이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하여간 타고난 마녀가 분명하다. 난 이미 디아나에게 완전히 항복했는데 말이다.

라울의 품에서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뜨거운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 내내 라울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이러면 정말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닌데…….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기에 우리는 아직 너무 젊었고 사랑의 설렘은 여전히 우리를 아주 낯선 세상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뜨거운 몸짓으로 흔들리던 우리 둘은 서로의 품에서 아주 곤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편안한 복장으로 라울과 함께 마드리드를 산책했다. 늘 살던 곳인데 몇 년 사이에 이렇게 관광객 같은 마음으로 여행하고 있다니 말이다.

“전에 있던 민박집 가보고 싶지 않아?”

라울이 내 손을 잡고 걷다가 물었다. 엄마와 함께 하던 민박집. 생각만 해도 그립고 떠올리기만 해도 엄마가 보고 싶다. 그러나 내 대답은 달랐다.

“민박집이요? 겁나서 못 가보겠어요.”

“뭐가 겁나지?”

“많이 달라졌을까 봐요. 엄마하고 같이 살았을 때랑 많이 달라졌을까 봐 정말 겁나요.”

“그럴 리가 있나! 되도록 크게 훼손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엄마하고 지내던 민박집은 세를 주어서 그곳에서 한국 사람이 여전히 민 밥집을 경영하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 발달 돼서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되도록 분위기를 많이 바꾸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분명 많이 달라졌을 거다.

“가자! 가서 보고 달라졌으면 다시 원상복구 하라고 하지 뭐!”

라울이 이끄는 통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민박집을 향했다. 골목에 들어서자 벌써 익숙한 정경에 눈물이 먼저 고인다. 엄마와 얼마나 많이 이 길을 다녔던가?

민박집에 들어서자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디아나. 민박집 어떤가 한 번 둘러보겠어요?”

“안녕하셨어요.”

인사를 하고 민박집 내부로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놀라울 정도로 엄마와 함께했던 그대로였다. 엄마가 좋아하던 말린꽃도 그대로고 한쪽에 흰 레이스가 달린 꽃을 수놓은 천을 걸어놓은 소파도 그대로였다.

게스트 룸에 들어서자 엄마와 내가 열심히 꾸며놓고 닦고 했던 그대로 잘 보존된 민박집을 보자 눈물이 다 글썽해진다.

“어떻게 이렇게 잘 가꾸셨어요. 정말 하나도 안 바꾸셨네요?”

민박집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자상한 눈으로 말씀하신다.

“이것보다 더 예쁘게 바꿀 수가 없겠더라고요. 어쩌면 이렇게 야무지고 꼼꼼하게 구석구석 잘 가꾸셨는지. 그리고 이렇게 소파에 수놓은 천을 놓으니 더 정갈한 느낌도 들고 말린꽃들도 생각보다 향기가 오래 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다 그대로 있어요.”

“맞아요. 말릴 때 한 번 살짝 쪄서 말렸기 때문에 꽃잎들이 빛깔도 잘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일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디 옥상에 한 번 가보겠어요?”

엄마와 나는 옥상에다가 빨래도 널어놓고 한쪽에 꽃 화분들을 늘어놓고는 했었는데…….

“네 올라가 볼게요.”

빠르게 걸어 올라가자 라울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온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민박집 아주머니가 조금 전에 걸어 놓았는지 침대 시트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와, 그대로야 정말.”

노란색 국화 화분도 자줏빛 다알리아도 몇 년 전에 있던 화분들도 그대로. 더 신기한 건 한쪽에 상추와 고추, 방울토마토가 있는 거다.

“이것도 엄마하고 심었던 그대로네?”

내가 감격해서 말하자 라울이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햇살을 받은 라울의 눈동자는 밝은 보랏빛을 띠고 있어서 평소의 검은 빛이 거의 없다. 신비스러운 눈동자 색 때문에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내가 라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웃자 늦게 따라 올라온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묻는다.

“그렇게 좋아요? 하긴 나도 여기가 참 좋아요. 석양이 질 때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힐링 되고요. 그래서 여행객들도 이곳을 좋아해요.”

그때도 그랬다.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이 옥상에서 모여 맥주나 음료를 마시고 과자를 나눠 먹으면서 더러 기타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간단한 야식을 가지고 올라오셨다.

엄마가 잘 만들었던 감자튀김과 커다랗고 바삭한 스낵들이 생각난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따듯해지는 건 엄마의 사랑이 모든 기억 속에 스며들어 있어서일 거다.

“감사합니다.”

나는 민박집 아주머니께 인사했다. 정말 고마웠다. 엄마와의 추억을 이렇게 잘 보존해 주셔서. 엄마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해줘서.

“감사하긴 뭐가 감사해요? 세도 싸게 줘서 나 여기서 돈도 잘 벌고 있는데. 그리고 나 제법 유명한 민박집 됐어요. 우리 집 반찬 맛있다고.”

“그건 전적으로 아주머니 능력이시고요.”

“그렇지요? 하지만 물어봤지. 그전에는 뭘 잘했나 하고.”

“우리 어머니는 제육볶음 잘하셨어요. 그리고 감자볶음도 잘하시고.”

“그래서 나도 제육볶음도 하고 감자볶음도 하고 그래요. 그래도 나는 주특기로 다른 걸 했지. 잡채.”

“그 손 많이 가는걸요?”

“쉽게 쉽게 하지. 그래도 민박집 와서 잡채 먹으면 좋아하더라고.”

“그럼, 저도 오늘 여기서 밥 먹고 가도 돼요?”

“아이고 그럼! 점심은 평소에는 안 하지만 특별히 오늘은 집주인이 오셨으니 내가 잡채를 해드려야지.”

그렇게 해서 민박집에서 후루룩 후루룩 잡채를 먹었다. 라울은 내 옆에서 잡채를 먹으며 한마디 했다.

“정말 여기 요리가 맛있군. 다음에는 밥 먹으러 이리로 와야겠어.”

딱 라울다운 말이다. 그렇게 민박집까지 돌아보고 나니 내가 이제는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절감한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치열했는데 지금은 그때를 생각하면 한참 멀리 온 것 같다.

“그런데 라울, 정말로 그 알바로 남작을 초대할 생각이에요?”

“이미 초대한 거야. 언제든지 오고 싶다고 한다면 오게 해야지. 오게 하고 싶지 않지만.”

“미안해요. 내가 목걸이를 그때 잃어버려서.”

“미안해할 거 없어. 그때도 말했지만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디아나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긴장한 건 나였다. 알바로 남작은 나보다 네 살 위이다. 젊은 시절에 스페인에 그렇게 오래 머물렀던 건 아니지만, 마드리드 궁에서 무도회가 있거나 하면 어머니 이사벨과 함께 간간이 참석했었다.

그리고 20대의 나는 혈기왕성하고, 겁 없는, 그리고 자만심 가득한 그런 청년이었다. 물론 지금이 그때와 다른지 나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보다는 훨씬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작과 내가 한 여자를 두고 연적 사이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당연히 그 여인을 차지한 건 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이 바로 콘차 후작부인이 된 엠마였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엠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십 년 전 젊었을 때는 정말 대단한 미인이었다. 궁에서 그녀와 염문을 뿌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성한 연애를 했고 또 많은 남자들이 모두 그녀를 원했으니까 말이다.

나 역시 그녀에게 반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쾌활한 성격과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을 달고 다녔다. 알바로 남작은 그런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을 했고 나는 그런 그들의 관계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또 복잡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나한테 한 말이 생각난다.

“라울, 니가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니든 나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엠마는 조심해야 돼. 이미 정혼자가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나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있단 말이다. 위험할 수도 있고 연적을 만들 수도 있으니 제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엠마는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이사벨의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뜨거운 젊음은 발산을 원했고 눈에 보이는 탐나는 것은 모두 손에 넣고 싶었다.

원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뒤는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내가 볼 때 알바로 남작은 누구보다도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명의 여자와 각기 다르게 마주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만큼 매력적이고 모든 면에서 능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엠마가 관심을 가진 건 당연히 젊은 나였다. 나는 그때 정말 패기 있고 무서운 거라고는 모르는 그런 까스틸로 성의 성주가 될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외할아버지 까스틸로 백작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어머니의 관대한 사랑을 받으며 서울 할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으로 나는 무서울 것 없는 청년으로 자랐으니까.

그날은 궁에서 무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일곱 명이나 되는 아가씨들과 번갈아가며 춤을 추었다. 물론 그중에 엠마도 있었다. 그러나 한참 돌아가며 춤을 추다가 내가 엠마를 찾았을 때 그녀는 무도회장에 없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바로 남작을 찾았다. 그도 없다면 둘이 함께 나갔을 테니 말이다. 이상한 질투와 오기가 함께 뻗쳤다. 절대로 엠마를 알바로에게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4살 위여서 훨씬 더 노련하고 여자들을 다룰 줄 아는 알바로 남작이었지만 사교계 최고의 미녀를 그에게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무도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방문이 열려있는 곳을 보았다. 그곳은 낮에 여인들이 낮잠을 잘 때 사용하는 방이었으나 이런 저녁 시간에는 비어있다는 걸 알고 있다.

방문을 열고 열린 문틈으로 슬쩍 안을 보자 방에서 발코니로 향하는 문이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섰으나 아무도 없었다. 발코니를 향하는 창문이 열려있었고 커튼이 나부끼고 있어서 발코니 가까이까지 다가 가보았다. 알바로 남작과 엠마가 그곳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었다.

알바로 남작의 손이 엠마의 깊게 패인 드레스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의 젖가슴을 쥐고 있었다. 오프 숄더의 드레스는 이미 아래로 내려져 그녀의 선정적이고 흰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고 알바로 남작은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엠마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벌리고 작은 신음과 함께 뜨거운 숨을 뱉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선정적이었는지 둘의 그런 모습을 보는 내 아래는 온통 피가 몰려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씨익 하니 웃음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면 완벽한 승리가 될 거 같다는 생각. 하지만 은밀하게 지켜보고 싶은 생각도 함께 들고 있었다.

대체 알바로 남작은 어떻게 여자를 다루는지 보고 싶었다. 특별히 관음 성향이 있지 않아도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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