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3)

- 외전 -

7.

라울과 승마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드레스를 제작하는 의상실에서 디자이너가 나와 있었다.

“세뇨라, 이렇게 아름다우실 줄 몰랐습니다. 말로 듣던 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합니다.”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나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금발에 웨이브 진 머리를 하고 파란 눈동자를 한 디자이너는 남자였다. 이름은 카밀로. 그의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남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여성스러워서 웃는 목소리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뭐라 그럴까? 가녀린 여성인 척하는 남자 같다고나 할까?

하긴, 깡마른 몸은 전체적인 선 자체가 남자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락없이 게이 같은 디자이너에게 몸을 맡기자니 영 찜찜하다. 옆에 라울도 함께 있었는데 라울도 디자이너를 보더니 인상을 팍 쓴다.

“흠, 혹시 애인이 남자인가?”

갑자기 묻는 라울의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나도 그가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묻는다는 게 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럴 정도니 카밀로는 어땠을까?

“네?”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는 카밀로에게 라울이 한 번 더 묻는다.

“남자친구 있는가 묻는 건데. 애인이 남자냐고?”

대놓고 게이냐고 물어보는 이 무례한 말투에 나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상대편 디자이너는 오히려 바로 알아듣고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물론이죠. 내 허니는 유도선수예요. 정말 멋진 남자지요.”

맙소사, 게이가 맞아!

나는 여전히 말없이 있었으나 침을 꼴깍 삼켰다. 더 이상 라울이 폭탄 같은 말만 해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카밀로가 그렇게 대답하자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밀로가 치수를 먼저 재겠다며 다가왔는데 나는 오히려 그가 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는 생각에 편안하게 치수를 쟀다. 하지만 라울은 달랐다. 그가 다가가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머! 회장님께서는 보기보다 낯을 가리시나 봐! 이렇게 멋진 바디를 가지고 계시면서 말이에요. 정말 회장님은 우리 허니보다 더 멋지신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줄자를 가지고 다가가자 라울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린다. 라울이 남자를 보고 저렇게 질리는 건 처음이다. 나는 장난기가 돌아서 라울 쪽으로 가며 말했다.

“라울. 왜 그래요? 카밀로는 정말 정확하게 치수를 재는 거 같은데 말이에요.”

라울은 내 말에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대체 이 디자이너는 누가 데리고 온 거야?”

“세베로요. 세베로가 그러는데 세비야에서는 다 이 사람에게 옷을 맞춘대요. 가장 드레스를 잘 만드는 디자이너라고 했어요.”

그러자 라울이 눈을 질끈 감는다.

“어서 치수를 재요. 그래야 빨리 끝나지요.”

라울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로는 바로 달려들어 라울의 치수를 쟀다. 그리고 연신 같은 말을 했다.

“오오! 멋져요. 회장님. 정말이지 회장님 바디는 탐나는 바디에요. 이런 바디는 정말 처음이야!”

그가 그렇게 말하며 라울의 가슴둘레를 재자 라울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손대지 마!”

“…….”

카밀로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줄자를 떨어뜨렸다. 결국 사이즈를 재는 건 거기서 끝났다. 미리 주문하던 옷의 치수가 있다면 세베로가 치수를 가져다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울은 그렇게 대충 치수를 재고는 나가버렸고 나는 그 뒤에 남아 남극처럼 썰렁한 분위기를 견뎌내야 했다.

카밀로가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계속 한숨을 쉬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패션 감각은 정말 남다른 거 같다. 목에 긴 시폰 스카프를 두르고 까만색 가죽 코트를 입고 있는 게 여간 멋스럽지 않다. 여자도 저렇게 입으면 예쁠 거 같다고나 할까?

함께 온 조수는 의외로 덩치가 좋은 남자였다.

“자, 카밀로 씨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는 워낙 사업으로 바쁘다 보니 신경도 아주 예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차를 마시면서 기분 전환을 하시지요. 평소 잘 드신다는 초콜릿을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빛깔 좋은 차와 초콜릿을 내려놓고 세베로가 분위기를 띄우자 조금 지나서 카밀로도 꽁한 마음을 풀고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조금 떨어져 있는 세베로 곁으로 다가가 작게 물었다.

“그런데 세베로, 정말로 이렇게 남자가 여자 드레스를 잘 만든다구요?”

“물론입니다. 이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카밀로보다 더 유능한 디자이너는 없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세베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카밀로 쪽으로 갔다. 그러자 카밀로가 두꺼운 파일을 꺼내며 말했다.

“어떤 분위기로 무도회에 가실지 제가 대충 추려봤습니다. 이번에 무도회에 참석하시는 귀족들이 주로 선호하는 디자인입니다. 남자 여자 커플룩으로, 한번 보시겠어요?”

사진을 보자 턱시도와 드레스들이 가득하다. 남자 여자가 커플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드레스의 분위기는 현대적인 것부터 고전적인 것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드레스의 스커트 모양도 18세기 풍으로 확 퍼지 것에서부터 인어라인이나 에이치라인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저 사진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떠오르는 그런 드레스들이었다. 그중에는 아주 고전적인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등이 깊게 파이고 몸에 들러붙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사진도 있었다.

나는 바로 고를 수가 없어서 몇 개를 고르며 정하면 연락하겠다고 카밀로를 돌려보냈다. 사실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옆에서 지켜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더 고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 남자였다. 느껴지는 건 여자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날 밤 나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걸로 해야 될지 잘 모르겠네.”

내가 사진 몇 개를 놓고 고민하자 라울이 그걸 보고 콧방귀를 끼며 웃는다. 그게 못마땅해서 뭐냐는 듯 라울을 보자 라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왜 이래, 디아나? 파티 플래너가 꿈이지 않았나? 드레스도 잘 고르는 걸로 아는데 말이야.”

“물론이에요, 라울. 하지만 다른 사람을 코디해주는 거랑 다르게 내가 직접 입는 건 정말 어렵단 말이에요.”

하긴, 나는 의상을 잘 골라서 한국에서 재벌 사모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도 단연 내 의상이 눈에 띄기는 했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또 어떨지. 그리고 단 한 번으로 절대 실수하지 않을 드레스를 고르려는 욕심에 정말 고민한다.

“자신감 가지라고! 원하는 대로 해봐. 나는 뭐든지 디아나가 고르는 대로 입어줄 테니까.”

“세련되고 현대적인 게 좋아요, 아니면 우아하고 고전적인 거?”

“현대적이고 세련되면서 고혹적이면서도 우아하면 좋겠군.”

“세상에, 라울. 욕심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

“한번 어울리게 골라봐!”

라울이 그렇게 말하자 더 못 고르겠다. 라울이 옆에서 보다가 사진 4장을 다 한꺼번에 손에 쥐며 말했다.

“고민할 거 없어. 세련되고 현대적이고 고혹적이면서도 우아하게 네 벌 다 맞추라고 하면 돼!”

“네? 네 벌을 다 뭐하게요? 하루만 가면 되는 걸요?”

“됐어. 네 벌 다 가지고 있다가 입고 싶은 날 입어. 드레스를 입고 설 무도회는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야.”

그래 잘났다! 드레스 고르느라 머리 쓴 나만 바보지.

정말 라울 옆에 있으면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이 다 별거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게 너무 기막히다. 하긴 모든 고민은 아끼면서 하려고 할 때 있는 거였다. 나는 아직도 절약하는 게 몸에 배서 이런 라울의 행동을 보며 고맙다기보다는 재수 없게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내 남편이지만 말이다. 좁혀지지 않는 사고방식의 격차 같은 걸 거다.

“됐어요. 난 한 벌이면 돼요. 그냥 고를 거예요. 사진 이리 줘요.”

그러나 라울은 바로 세베로를 불러서 사진을 모두 주며 말했다.

“이 네 가지 디자인으로 커플로 다 맞춰.”

“네, 주인님.”

단 한마디 토시도 달지 않고 세베로는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렸다. 결국 네 벌의 드레스가 생긴 거다. 하루의 무도회를 위해서 말이다. 이제 밤마다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라울이 저렇게 다 시켜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고민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네 벌의 드레스가 와도 입고 가야 하는 건 하나이니 말이다.

아우, 어떤 드레스를 할까?

나는 조금 더 고전적인 걸 골랐다. 그게 무난할 거 같기도 하고 턱시도를 입고 있는 라울의 옆에 있을 때 우아하게 보이는 걸로 말이다. 어깨가 드러난 튜브톱에 허리는 18세기 드레스로 강조되는 그런 드레스였다.

드레스는 일주일 후에 가봉하고 그 뒤에 일주일이 더 있다가 나온다고 했다.

아! 마드리드 궁이라니. 그것도 왕이 참석하는 무도회!

전에는 관광객으로 가서 그저 개방된 방만 봤는데 정말 그곳에서 왕과 함께 무도회를 즐긴다는 말인가? 가슴이 두근두근 설렌다.

드레스 가봉을 마치고 올라와서 내 방 침실 한쪽에 놓여있는 마네킹 상체에 드레스를 꺼내서 입혀보았다. 이 드레스는 결혼식 하기 전에 라울이 고른 거다. 아래에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없어서 상체만 있는 그런 드레스.

아까 가봉을 하다 보니 이게 생각이 났다. 그때 드레스를 고르며 의상실에서 그런 어이없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마네킹 위에 드레스를 입혀놓자 긴 리본이 땅에 끌리며 영롱하게 진주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어느새 올라왔는지 이네스가 말했다.

“너무 예뻐요 엄마! 원더풀! 이거 나 줘.”

“이네스!”

“아 나도 이거 입고 싶어.”

이네스가 바닥까지 늘어진 드레스 리본을 손에 잡으며 말한다. 네 살 된 이네스의 눈에 이 드레스가 얼마나 예뻐 보일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이 드레스는 아주 야한 추억이 있는 드레스였다.

라울이 아끼는 물건들 중에 보물 1호쯤 될까? 늘 드레스 룸 한쪽에 이렇게 드레스를 걸어두니 말이다. 이걸 보면서 그 사람도 그날을 떠올리겠지?

“안 돼 이네스. 저건 엄마 거야. 절대로 너한테 주지 않을 거야.”

“왜요?”

“이네스에게는 더 예쁜 드레스를 맞춰주면 되지?”

라울도 어느 틈에 들어와서 이네스를 번쩍 들어 안으며 말했다.

“이 드레스는 말이야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드레스거든. 물론 엄마가 입은 것만 좋아해.”

“라울! 애한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당신 너무 짓궂어요.”

정말 우리의 결혼 전의 추억이 이 드레스에 고스란히 감춰져 있다.

“디아나, 그 드레스 거기 그렇게 놔. 왔다 갔다 하면서 보면 즐거워지게 말이야. 물론 오늘 밤에 입어야 되는 거 알지?”

장난꾸러기 라울. 하지만 이 세비야에서 라울은 좀 더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할 수 있다. 이네스를 데리고 출근하는 일도 있고, 서울에서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라울의 팔에 안긴 이네스가 라울을 보고 웃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 책 읽어 줘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이네스가 라울을 보고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가 많다. 전에는 아빠는 재미없게 읽어서 싫다고 하더니 말이다.

“그래. 우리 단둘이 읽으러 가자.”

라울이 이네스를 데리고 이네스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꼭 닫는다. 대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기에 단둘이만 읽는다는 거지?

나는 잠시 후에 이네스의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소리 나지 않도록 밀었다.

맙소사!

나는 라울이 이네스에게 책 읽어주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흐응. 할머니 나는 드레스가 없어서 무도회에 갈 수가 없어요. 흑흑…….”

라울이 마치 진짜 신데렐라처럼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며 우는 시늉까지 하면서 책을 읽어준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 진짜 드레스를 입은 여자처럼 그렇게 허리를 요염하게 흔들면서 손으로 입까지 가리고 아가씨처럼 말한다.

그러자 이네스는 라울이 읽어주는 책에 완전히 몰입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라울은 완벽한 1인극을 펼치고 있었다.

지금 내 눈으로 보는 게 진짜 라울 맞아?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 거지? 저렇게 책 읽어주는 건 언제 또 연습한 거야?

그렇게 한참을 책을 읽는 동안 라울은 마녀도 됐다가 할머니도 됐다가 신데렐라도 됐다. 그리고 왕자님까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었다.

“어때? 이제 세베로 보다 내가 더 잘 읽어주지?”

라울이 이네스를 보며 말하자 이네스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맞아. 그런데 아직 사슴처럼 말하는 건 세베로 보다 못해. 하지만 다른 건 다 세베로 보다 아빠가 읽어주는 게 좋아.”

“정말? 정말이지? 그럼 아빠가 사슴처럼 말하는 것만 더 연습해서 또 읽어줄게. 아! 우리 이네스 정말 예쁘다.”

라울은 이네스의 말이 아주 흡족한지 행복한 얼굴로 이네스를 번쩍 안고는 한 바퀴를 돈다.

대체 사슴처럼 말하는 건 또 뭐야?

* * *

“세베로, 나예요.”

간드러진 목소리로 들려오는 이 목소리. 그런데 남자 목소리다. 블랑카라면 또 모르지만 이 남자 목소리는 디자이너 카밀로가 분명하다.

“네, 말씀하십시오.”

“세베로. 나, 정말 세베로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잔 거 알아요? 어쩌면 나한테 전화 한 통 없을 수가 있어요?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원망이 가득한 여자 같은 그런 목소리. 그 순간 세베로는 눈치챘다. 게이인 카밀로가 저에게 관심 있다는 걸 말이다. 이제 곧 주인님 부부의 드레스를 완성해서 올 텐데 마구 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드레스가 나오는 건 내일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흑. 나 진짜 당신한테 반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신사답고 남자다울 수가 있는 거지요? 난 꼭 당신 같은 남자에게 배려받고 사랑받고 싶어요.”

오! 마이 갓!

세베로는 전화기를 들고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진짜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전화기를 들고 있는데 사라가 다가오더니 빤히 세베로를 본다. 세베로는 반사적으로 사라를 보며 웃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웃음기 있는 상냥한 말투가 사라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 있는 카밀로는 세베로의 상냥한 목소리에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베로. 당신이 이렇게 웃으며 말해주다니! 내일 봐요. 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세베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세베로, 아이들 미끄럼틀이 삐걱거려서 사람을 불러야 하는지 좀 봐주겠어요?”

“물론 이에요. 사라.”

세베로는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이런 작은 스킨십이 확실히 사라의 마음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다음날 질투로 활활 타는 일이 있을 줄은 둘 다 몰랐다.

다음날은 카밀로가 가봉을 하러 왔다. 드레스는 잘 나왔고 라울과 디아나도 만족했다. 그런데 가봉을 끝낸 카밀로가 바로 세베로를 보며 말했다.

“허니? 우리 오늘 따로 만나기로 한 거 맞지요?”

카밀로의 단 한 마디에 디아나도 사라도 얼어붙었다. 단지 라울은 세베로를 보며 한마디 했다.

“설마, 넘어간 거야? 카밀로에게?”

말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에 수습할 수 없는 카밀로의 말. 게다가 사라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허니, 어서 가요.”

카밀로가 다가와서 팔짱을 끼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던 사라가 갑자기 세베로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세베로, 아이들과 함께 외출하기로 한 거 잊었어요?”

마치 화가 난 연인처럼 가까이 다가와 하는 그녀의 말에 세베로가 웃었다. 아이들과 마차를 타고 북쪽 울타리 너머로 가기로 하기는 했지만 이런 그녀의 반응은 분명 질투였다.

세베로는 웃으며 카밀로에게 말했다.

“카밀로 드레스가 정말 잘 나왔네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리고 저는 애인이 이미 있습니다.”

“어쩜. 세베로. 너무해요. 나 잡아도 소용없어요. 흑. 나중에 연락할게요.”

우는 표정을 하며 카밀로가 뛰쳐나가자 뒤를 따라 건장한 조수가 따라간다.

“허니! 이게 무슨 일이야?”

조수가 애인이었나 보다.

잘못하다가는 치정 싸움에 말려들겠군.

세베로는 생각했다. 사라를 보며 한 번 더 웃어주자 사라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시간은 빨리 지나가서 나는 라울과 함께 마드리드 궁을 향해 떠났다.

“하루밖에 안 걸리지만 애들 부탁해요, 세베로, 사라.”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다녀오세요. 회장님.”

사라와 세베로의 인사를 받고 우리 둘은 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라울, 요즘 세베로하고 사라는 아무 진전이 없어 보여요.”

“아니, 그렇지 않아. 요즘 블랑카가 세베로를 만나러 오고 있으니 점점 진전이 있을 거라고.”

“그게 사라가 질투하지 않으면 전혀 소용이 없잖아요.”

내가 볼 때 사라는 전혀 질투하는 것 같지 않다. 담담하고 조용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 오늘도 둘은 전쟁을 치르게 될 테니 말이야.”

“전쟁이라뇨?”

“뭔가 걸리적거리는 것도 있어야지 가까워질 거 아니야. 아이들과 함께 말이야. 내가 루벤에게도 부탁해 놓았거든.”

대체 라울은 무슨 생각에서 저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라울이 벌리는 일이라 미덥지가 않다. 더군다나 이제 겨우 6살인 루벤에게 뭘 부탁했다는 걸까?

“루벤, 이리 와봐.”

“왜요? 아빠?”

어젯밤에 루벤을 부르자 루벤은 바로 다가오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며 왜냐고 묻는다.

자식. 아빠가 부르면 바로 와서 안기는 맛이 있어야지 왜는?

“내일 아빠 엄마가 마드리드에 가는 거 알지?”

“네, 왕이 여는 무도회에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그렇게 좋나요? 우리는 너무 어려서 못 간다고 이네스도 그러던데 말이지요. 아빠도 여자들처럼 그런 데가 좋아요?”

허! 참. 이놈은 정말 말하는 것마다 왜 이래?

“루벤. 무도회가 좋은 게 아니라 엄마와 함께 가는 게 좋은 거야. 생각해봐. 엄마가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에 서면 어떨 거 같으니?”

그러자 루벤이 활짝 웃는다. 조 귀엽고 어린 머리로도 상상을 하는 게 분명하다.

“아주 아름다울 거 같아요. 우리 엄마는 제일 예쁘니까.”

“그렇지. 생각만 해도 예쁘겠지? 너도 상상만 해도 그렇게 웃잖아. 좋아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루벤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인 건 분명하다. 디아나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아빠도 좋은 거예요?”

“그래. 나도 그런 화려한 파티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

물론 한때는 엄청 좋아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반해서 쳐다보는 것도 좋고 수많은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다 놀 때 이야기다. 그런 건 다 디아나를 만나기 전에 끝을 냈으니 말이다.

“루벤, 하지만 엄마가 그런 곳에 가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지. 알겠지?”

루벤이 커다란 눈동자를 말똥말똥하게 뜨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때 보면 천사가 따로 없다.

“나도 커서 엄마랑 무도회에 갈 거예요.”

“그렇지. 이다음에 커서 엄마랑 이네스랑 같이 가자.”

“네.”

루벤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내게 다가와서 두 팔을 벌린다. 안아달라는 표시다. 아무리 시크하게 굴어도 6살 인생은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 말이다. 나는 루벤을 안고 볼에 뽀뽀했다.

입술을 대면 보드라운 아기살을 깨물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너무 귀여워서 말이다. 하지만 용건은 이제부터다.

“루벤. 아빠 엄마가 마드리드에 간 동안 사라에게 세베로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둘이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물론 아빠가 시켰다는 말은 하지 말고 말이야. 너도 사라와 세베로가 결혼하면 좋겠지?”

“아니요.”

“왜?”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다. 지가 싫을 이유는 또 뭐야?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또 이해가 된다.

“내가 커서 사라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맙소사! 이런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지. 6살 인생에서 가장 멋지게 보이는 여자가 선생님 일 수 있다는 걸 왜 나는 생각지 못했을까? 하지만 엄마보다도 10살은 많은 여자야. 이놈이 이렇게 조숙한 놈이었어?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하여간 엉뚱한 놈.

“넌 너하고 비슷한 아이와 결혼하는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마음을 접어. 사라는 세베로와 결혼해야지. 그렇게 도와주면 아빠가 올 때 경주용 자동차 모형을 사가지고 올게.”

“정말이요?”

바로 루벤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놈이다. 그럼. 6살에는 모형 자동차가 여자보다 좋은 법이야.

뭐 그 정도로 말해놨으면 머리 좋은 루벤이 사라에게 한마디는 하겠지. 설마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러지는 않겠지. 그러면 또 어때? 세베로 정도면 진짜 괜찮은 남편감인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가고 있는데 디아나가 나를 부른다.

“잠깐만요 라울. 보타이가 잠깐 삐뚤어진 거 같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몰라도 이야기 하다말고 혼자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에 잠긴 라울의 보타이를 바로 해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라울은 진짜 너무 잘생겼다.

반듯한 콧날과 짙은 곤색의 턱시도를 입고 신비스럽게까지 보이는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까지.

“라울, 내가 당신 잘생겼다고 말한 적 있던가?”

“아니, 없어. 하지만 내가 잘생긴 건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디아나가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럼 말하지 말까요?”

“아니! 그런 건 표현해야 되는 거야. 말해봐, 얼마나 잘생겼지?”

하여간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지. 잠깐 저 얼굴에 빠져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심 내 남편이 잘생긴 것도 사실이니까. 듣기 좋은 말 정도 못 해줄 것도 없다.

“라울,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당신한테 빠져들지 않을 여자가 없을 거 같아. 나 긴장해야 될 거 같아요.”

이 정도면 감동할 정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 남자 전혀 감동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어떻게 해? 나 진짜 긴장하지 않는데 긴장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했거든.

라울이 날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눈썹을 모으며 말한다.

“지금 누굴 놀려? 나야말로 불안한 상태라고.”

“왜요?”

그러자 라울이 손가락으로 내 귓불을 천천히 만지며 내 턱을 한 손으로 감싸고 말했다.

“너무 예쁘잖아 지금. 이런 상태로 다른 놈들 앞에 내놓고 싶겠어? 당신하고 춤추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서면 그 꼴을 어떻게 보냐고.”

웬일이야? 이 남자 지금 얼결에 진심을 말한 거야? 아니면 나처럼 립 서비스? 괜히 되묻지 말자. 정말 그러냐고 물으면 나오는 말은 한마디.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일 테니 말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라울. 난 당신하고만 춤출 테니까.”

사실 춤 같은 건 출 수 있을 거 같지도 않다. 익숙하지도 않은 데다가 정말 왕이 등장하는 무도회라니.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 떨려요.”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린다고 하자 라울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떨지 마. 쫄지 말라고. 디아나는 이제 이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이고,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의 부인이야. 알지?”

“알아요, 라울. 하지만 떨리는걸요?”

그러자 라울이 긴 팔고 내 어깨를 감싸고 바짝 옆으로 당겨 안는다. 얼굴을 돌려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입김을 불어 넣어준다. 그러자 신기하게 떨리는 게 멈춘다.

하긴 떨건 또 뭐야. 나야 그냥 라울 옆에만 있으면 되는 거지.

차가 마드리드 궁전 앞쪽으로 다가가면서 거대한 궁의 모습이 보인다. 방이 2,800여 개나 되는 이 거대한 궁전은 평소에는 50개 정도의 방을 관광객에게 열어놓는다. 덕분에 나는 마드리드 궁에 여러 번 와봤다.

물론 50개의 방을 다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관광객들과 함께 개방된 방들의 대부분을 열어보았다. 그중에서 왕관의 방은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을 의식해서 만들었다고도 한다. 베르사유의 화려함보다 더 웅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드리드 궁전 바로 앞에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에는 고야나 벨라스케스,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의 그림들이 전시돼있다. 역사가 숨 쉬는 궁전에서 열리니 무도회라니! 수백 년 전에도 이런 무도회가 열렸을 것이고 수많은 여인들이 나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저 궁에 들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 거대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점점 더 쿵쿵 울리며 떨리기만 한다. 차라리 내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낫겠다. 무도회 말고 내 가정. 내 아이들 말이다.

“애들은 잘 있겠죠?”

일부러 뇌를 환기시키려고 아이들에 대해 말하자 라울이 웃는다.

“지금 여기 와서 애들 생각하다니. 무슨 걱정이야? 유모도 있고, 가정교사도 있고, 당신이 그렇게 신뢰하는 세베로도 있잖아?”

“라울. 맞아요. 지금 이 순간은 당신 옆에서 당신만 보고 있을게요. 나 촌스럽지 않게 잘 행동할 수 있게 그렇게 리드해줘요.”

“됐어! 디아나를 보고 누가 촌스럽다는 생각을 할 거야. 아마 궁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동양 여인일걸? 보나 마나 다 나이 든 귀족들이나 와있을 테니 말이야.”

“정말요? 아유, 그럼 또 거기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려나?”

이미 서울에서 기업 사모님들 모임에 나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제일 어려서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았는데 여기서도 또? 게다가 사람들 눈길은 또 어쩔거냐고. 라울 옆에만 있어도 날아드는 눈길에 맞아 죽을 거 같은데 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라울은 담담하게 말한다.

“어딜 가나 그건 어쩔 수 없어. 할아버지뻘이나 아버지뻘인 사람들이 대부분 작위를 가지고 있거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나같이 부모님 일찍 돌아가신 사람들이나 그 작위를 그대로 수여한 거지. 나는 오죽하겠어?”

하긴 라울은 어떨까? 삼십 대 초반에 회장에 취임하고 지금까지 어디를 가나 제일 어렸을 거다. 그러나 어리다고 힘의 논리에 밀려서는 안 되는 게 기업의 생리다 보니 저 사람이 저렇게 요상한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라울이 안쓰러웠다.

“알았어요, 라울.”

정말 라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제일 어린 축에 들 거라는 말, 말이다. 마드리드 궁의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그렇게 긴장했건만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간혹 자녀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세가 지긋한 귀족들이었다.

나는 신혼여행 때 두바이에서 라울이 선물해줬던 그 커다란 목걸이와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눈에 튀어서 착용할 수 없었는데 이 스페인 궁전에 오니 이 정도의 목걸이는 누구나 착용하고 있다.

살구색 드레스는 허리가 바짝 조여져서 아래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살구색 드레스의 은근한 섹시함과 단아함이 여성스러움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덕분에 짙은 남색의 턱시도를 입은 라울의 옆에 서 있으면 내가 더욱 돋보인다.

처음부터 그렇게 보이도록 디자인하고 꼼꼼하게 점검한 거였다. 까스틸로 성의 우아함과 동양적인 신비감이 감돌게 의도한 우리의 드레스 코드는 궁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이 디자이너인 카밀로는 옷만은 정말 확실하게 만드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무도회장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다 나와 라울에게 향한다. 하긴 이 스페인 궁에서 동양여인은 나 하나인 거 같기도 하다.

“라울, 사람들이 다 나만 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여기를 둘러봐. 디아나처럼 예쁜 사람이 있나.”

“지금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와요. 너무 긴장했나 봐.”

그러나 그 정도 긴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국왕이 참석하자 그 앞에서 인사할 때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으니까. 라울은 단단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주었고 왕과의 인사 때도 아주 담담했다.

그는 역시 까스틸로 성의 성주이고 스페인의 왕족 출신인 게 분명하다. 그동안 엉뚱하고 말도 잘 못 하고 사람 기막히게 하는데 질려서 그가 정말 왕족일까 의심했던 적이 많은데, 이곳에서 보니 그는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많은 귀족들이 와서 인사를 하고 라울이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했지만 그게 귀에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중에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알바로 남작이었다. 그는 40대 초반 정도 돼 보이는 사람으로 아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이 너무 강하다고나 할까? 많은 귀족 부인들이 다 알바로 남작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게 보인다. 아마 그는 유명인사쯤 되나 보다. 그의 세련되면서도 은근한 분위기는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하고 있었다.

나도 절로 눈길이 갔다. 그가 멀리서부터 내게 그 은근한 열기가 감도는 진한 눈길을 주며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강렬함 때문에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런 그가 천천히 나와 라울 앞으로 오더니 말했다.

“이런, 까스틸로 성의 젊은 부인은 말할 수 없는 미인이군요.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아름다움이랄까? 전 알바로 남작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치 나를 전에 보기라도 한 듯이 반갑게 인사하며 집요하리만치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덕분에 라울의 시선이 기분 나쁘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디아나 까스틸로입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했지만 알바로 남작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고, 나는 두 남자의 시선 사이에 갇혀버린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그런 어색한 순간에 알바로 남작은 바로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사벨을 닮은 거 같기도 하네요.”

그가 그렇게 인사를 하자 라울이 유독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머니와 닮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많이 닮지는 않았는데. 일부러 관심을 끌기 위해 한 말인 거 다 알지.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 알바로 남작?”

라울의 말에 나는 눈알만 굴려서 라울과 알바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혹시 실례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라울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알바로 남작은 다른 말을 꺼냈다.

“물론입니다. 잘 지냈지요. 까스틸로 성에는 한 번쯤 놀러 가고 싶었는데 영 초대를 안 해줘서 말이죠.”

능청맞게 하는 그의 말에 라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아주 꼭꼭 집어서 말이다.

“하, 나는 내가 돋보이고 싶어서 여자에게 인기 많은 남자는 초대하지 않습니다. 특히 알바로 남작 같은 바람둥이는 말이지요.”

맙소사! 라울, 그거 농담 맞지? 정말 진담으로 한 말 아니지?

나는 땀이 다 흐르는 거 같았다. 하지만 알바로 남작은 아주 여유 있게 받아쳤다.

“물론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 성이라면 정말 가고 싶군요. 그사이 자녀도 둘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알바로 남작은 말하면서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고 라울은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들과 딸 모두 다 아주 깜찍하고 예쁘죠. 하지만 절대 보여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성에 초대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겁니다.”

“이런, 정말 유감이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뇨라의 딸이라면 정말 궁금한데. 얼마나 예쁠지 말입니다.”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서 오가는 말을 들어보면 결투라도 하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저런 말들을 하면 어떻게 미소 짓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끼고 있던 실크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라울은 대체 뭐라고 대꾸할 건지.

“하하, 남한테 보여주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죠. 그래서 절대로 알바로 남작을 초대할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하도 노골적으로 말하자 알바로 남작도 질렸는지 고개를 돌리더니 저쪽에서 다가오는 아름다운 귀부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바로 남작이 손을 흔들자 그 여자는 바로 라울과 시선을 맞추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라울의 시선도 그 여자를 향했다. 그런데 라울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기분 나쁘게 보인다.

아는 여자야? 혹시 전에 돈 떼어먹은 여자인가? 왜 표정이 저래?

다가온 여자가 알바로 옆에 서자 알바로가 소개했다.

“까스틸로 부인, 콘차 후작부인입니다.”

그러자 다가온 여자가 먼저 인사했다. 그녀는 내 이름을 듣고 아주 반가운 듯 그렇게 반응했다.

“어머, 말로만 듣던 라울 까스틸로의 부인. 반가워요. 엠마 콘차예요.”

라울만 바라보던 그녀의 눈길이 인사를 하며 내게로 향한다. 그런데 그 느낌이 그저 편안하지는 않았다. 웃으면서 인사하는 데도 묘한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불타는 듯한 빨간 드레스는 마치 그녀가 불의 여신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게다가 유달리 커다란 시트린 목걸이는 휘황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화려한 그녀의 모습에 내가 눈을 떼지 못할 때 콘차 후작부인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스가 정말 예쁘네요. 까스틸로 부인. 게다가 이런 목걸이는 정말 희귀한 거 같군요. 중동에서 맞추기라도 한 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신기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콘차 후작부인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정도 크기의 보석을 구하기 쉽진 않죠. 유럽에 있는 보석들이라면 웬만큼은 다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 누군가 중동에서 이 목걸이를 사주었는데 말이죠.”

그녀가 목걸이를 손으로 살짝 어루만지더니 빙긋 웃었다. 아마 그녀도 남편이 사준 거겠지. 나처럼. 그런데 정말 커다란 보석은 누구 손에 있는지도 대충 안다는 말인가? 참 신기하다.

“드레스 색상과 정말 어울려요. 아름답네요.”

육감적인 몸매를 한 콘차 후작부인은 30대 후반쯤은 되어 보이는 거 같았다. 젊고, 아름답고, 눈을 뗄 수가 없이 화려한 부인이었다. 물론 그녀의 귀걸이며, 목걸이며, 반지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까.

“오늘 같은 날 샴페인이 빠지면 안 되지요. 내가 가져올게요.”

“내가 돕지요.”

콘차 부인과 알바로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샴페인을 가지러 가는 동안 나는 라울을 보았다. 인상이 안 좋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살짝 옆으로 몸을 돌렸을 때 라울에게 묻자 라울이 한마디 했다.

“쓰레기 같은 바람둥이에다 딱 그 바람둥이하고 어울리기 좋은 바람둥이 같은 여자지, 뭐.”

“라울!”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들리면 어쩌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인상 쓰며 조용하라고 했지만 라울은 계속 말했다.

“진짜야. 저 알바로 남작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마. 새로운 귀족 부인들이 오면 한 번씩 꺾어보겠다고 하는 그런 놈이니까.”

“설마요?”

“설마?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어? 저 알바로 남작에게 넘어가지 않은 부인들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디아나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면 눈도 마주치지 마.”

그런 말을 듣자 겁이 났다. 갑자기 이 넓은 왕궁의 홀이 사기꾼 귀족과 바람둥이들의 집합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난 돌아가고 싶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라울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바짝 당겼다. 그리고 그때 음악이 시작되었다. 국왕 부부가 먼저 춤을 추기 시작하고 조금 후에 몇몇 귀족이 앞으로 나오자 라울도 내 허리를 잡아끌며 빙글 몸을 돌리며 무도회장으로 나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라울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다 쏠리는 걸 감당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아주 매끄럽게 내 몸을 돌려가며 왈츠를 추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의 눈길 같은 건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라울의 손에 이끌려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자 그이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만족한 웃음을 짓는 그에게 나도 활짝 웃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은 라울도 나도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그도 나도 이럴 때가 가장 행복하다. 서로의 눈 속에 담긴 내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화려한 무도회장의 한쪽에는 최고급 올리브들이 각양각색으로 진열되어있었다. 그중에 블랙 올리브는 유달리 커다랗고 윤이 나는 것이었다. 알바로 남작은 그 올리브 앞에서 가장 큰 블랙올리브 하나를 들어 입에 넣고는 샴페인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콘차 후작부인이 그런 알바로 남작 옆으로 다가오며 그를 보고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알바로.”

“오랜만이에요, 엠마.”

“그동안 유럽에 없었다고 들었는데 미국에서 원하는 만큼 진탕 놀다 온 건가요?”

“그야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 유럽의 부인들보다는 미국 여자들이 훨씬 더 화끈한 건 사실이니까. 개방적이고.”

“무슨 그런 말을! 요즘 세계가 하난데 미국여자, 유럽여자 나눈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어디서나 인기가 좋잖아요.”

“물론이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콘차 후작부인만큼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알바로의 눈길이 끈적하게 엠마의 몸을 훑어본다. 그러나 엠마는 그런 눈길을 받는 데 익숙한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게, 오늘도 심심하네. 맨 나이 든 귀족들뿐이고. 오늘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인가 봐요.”

그녀의 눈은 라울의 품에 안겨서 왈츠를 추고 있는 라울을 향했다. 젊고 아름다운 디아나를 향하는 그녀의 눈에는 질투가 어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길을 보며 알바로가 덧붙였다.

“어쩔 수 없겠죠. 눈을 뗄 수가 없는 미모에 젊으니까. 라울의 어머니 이사벨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똑 닮은 거 같지?”

“그 말 들었어요. 까스틸로 성의 새로운 안주인이 이사벨을 꼭 닮았다고. 실제로 보니 이사벨보다 더 예쁜 거 같아요. 동양적인 신비함이 있잖아요? 그리고 저 살결, 무슨 색이라고 말해야 될까. 진주같이 은은히 빛이 나는군요. 정말 아름다운 여자예요.”

“그런데 라울은 엄청나게 발톱을 세우고 있더군요. 내가 자기 부인에게 인사라도 건네면 인상을 쓰고.”

그들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바로 라울과 디아나가 왈츠를 추고 있는 곳이었다. 둘이 매끄럽게 스텝을 밟아가며 춤을 추고 있자 마치 공연이라도 보듯이 주변에 있는 나이 든 귀족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아나의 살구색 드레스는 슬쩍슬쩍 황금빛 안감을 비추어서 무척이나 섹시하면서도 우아했다.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다운 여자군. 저런 여자 옆에 저렇게 사나운 라울이 버티고 있다니 말이야.”

“그러면 우리 내기 한번 할까? 어때요, 알바로?”

큰 표정의 변화 없이 미소 지으며 엠마가 말하자 알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늘 환영이지. 내가 콘차하고 내기해서 진 적 있나?”

“물론 없죠. 하지만 나도 당신의 내기에선 진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요.”

“좋았어. 그럼 당신은 라울, 나는 디아나와. 그렇게 하면 되는 건가? 누가 먼저 하룻밤을 보내는가, 그게 우리의 내기겠지?”

“그러게. 하룻밤 정도는 너무 쉬운 걸까? 그 증거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알죠?”

“물론이지. 이렇게 심심한 궁전에서 저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 내기 상대가 나타나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행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해요.”

둘이 샴페인 잔을 들고 잔을 맞추었다. 둘 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가볍게 볼에 키스했다. 아주 다정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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