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
6.
다음 날 아침, 까스틸로 성을 나오는 나를 배웅하며 세베로가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그 순간 세베로를 보자 어젯밤 디아나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사라가 세베로를 멀리해? 흠, 최고의 집사인 세베로를 그렇게 밀어낸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우리 집사는 보통 집사가 아니거든. 바로 이 까스틸로 성의 집사라고!
“세베로,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잠깐 걷지.”
내가 아마릴리스가 피어있는 정원 쪽으로 걷자 세베로도 옆으로 걸었다. 남자 둘이 걸어가자니 역시 폼도 나지 않고 기분도 살지 않아 조금 걷다 나무 아래 섰다.
“세베로.”
“네, 주인님?”
“난 세베로가 뭐든지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
세베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른다는 듯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꼭 하나 있지. 그건 말이야, 자기 머리를 자기가 깎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저는 머리를 혼자 깎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야?
“모르긴 뭘 몰라? 연애가 잘 안된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세베로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강력하게 부인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그렇게까지 숨기지 않아도 돼. 사라가 마음에 드나?”
그러자 세베로는 잠시 주춤하더니 별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말했다.
“네, 마음에 듭니다.”
“그러면 사라가 팍 다가와서 안기나?”
“주인님, 그 표현은 좀…….”
“내 표현이 뭘 어때서? 제일 중요한 건 그거잖아.”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세베로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순순히 말했다.
“왠지 저를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도망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이런! 거봐, 천하의 세베로도 여자들의 마음을 다 얻을 수는 없다고. 내가 먼저 결혼한 입장에서 세베로를 도와주고 싶어.”
역시 세베로도 모든 여자의 마음을 얻는 건 아니야. 아무리 많은 여자의 마음을 얻으면 뭐하나? 내 마음에 드는 한 명의 마음을 얻어야지!
그런데 세베로는 이런 나의 도움을 받는 게 자존심 상하는지 정중하게 거절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빼지 않아도 된다니까? 세베로가 내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해.”
그러자 세베로가 회색빛 도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보며 묻는다.
“그래서 주인님은 저를 어떻게 도와주시고 싶습니까?”
“그거야 간단하지. 모든 여자들은. 아니야, 여자고 남자고 상관없어.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질투야, 질투.”
“질투요?”
“그럼. 나도 사실 임규빈이 디아나 옆에서 깔짝거리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임규빈이 디아나 옆에서 사랑을 하니, 순수한 사랑이니 이러면서 나서니까 눈이 뒤집히더라고.”
“그 말씀은 혹시 사라가 제게 질투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말씀이신지…….”
“맞아! 바로 그거야, 세베로.”
세베로는 역시 머리가 좋았다. 내가 슬쩍 운만 띄었는데도 말이지. 하지만 세베로는 아직 질투에 대해서도 그렇게 달려들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 생각엔 질투를 일으키는 것보다 우리 둘 사이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서로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만둬, 세베로! 여자들은 그런데 넘어가지 않는다고. 잘 생각해봐. 일단 그녀의 마음이 내게 오게 하고, 그다음엔 품에 안고, 그다음에 마음을 말하는 거지. 잡아놓은 다음에 말을 해야지 되는 거야.
괜히 신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말이나 다 해놓곤 말만 듣고 떠나가면 어쩌려고!”
이 정도로 겁을 주자 세베로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진지하게 묻는다.
“그럴 수도 있을까요?”
“그럼! 여자들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알아? 말로는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기껏 말을 해보라고.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있는지. 말로는 안 되는 거야. 몸이 부딪혀야 하는 거지. 그런데 마음이 조금 있을 때 몸이 부딪혀야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저를 위해 뭘 해주실 수 있는지…….”
이럴 때 세베로의 눈은 참 아이 같아. 순수한 눈동자를 하고 나를 보며 지금 사라 윤의 질투를 일으키게 해주세요. 하고 부탁하고 있는 걸 봐.
“걱정하지 마, 세베로. 사라 윤이 질투를 일으키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글쎄요. 하지만 굳이 도와주신다고 하시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됐어, 세베로! 바로 그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주인님, 주인님은 모든 면에서 아주 유능하긴 하지만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좀 실수하실 수도…….”
말끝을 흐리는 세베로에게 나는 확신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어디까지나 세베로에게 조언을 해주고 상황을 적절하게 연출해주는 거지. 그러고 난 다음엔 세베로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나는 돌아서 걷다가 다시 세베로의 팔을 툭 쳤다.
“사라 윤이 그렇게 좋아?”
그러자 세베로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귀여운 세베로, 결국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결혼에 있어서는 선배가 됐지. 물론 내가 아주 어릴 때 세베로가 결혼을 먼저 했었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세상이 두 번 바뀔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세베로는 혼자 살았잖아? 그러니 내가 선배인 건 맞지. 이제 앞으로 정말 세베로의 연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 * *
안달루시아 지방의 겨울은 서울보다는 훨씬 따듯하다. 낮에는 거의 여름 날씨같이 느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침저녁은 한겨울 날씨가 그대로 있어서 어찌 보면 하루 안에 봄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침저녁에는 한겨울의 차가운 날씨와 한낮에는 반소매를 입을 정도의 따뜻한 날씨가 오가다 보니 자칫 감기에 걸리기 쉽다.
물론 그렇긴 해도 서울보다 따듯한 건 사실이고, 겨울이라 그래도 푸른 풀을 볼 수 있어서 안달루시아에서 겨울을 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날씨 때문에 서울에 있는 친정식구들이 모두 이 까스틸로 성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다. 이곳이 따듯해서 오는 거라고 해도 아버지는 물론 날씨보다는 나와 태성이, 가연이를 보고 싶어서 오는 오시는 거다. 사실 우리가 스페인으로 가서 한동안 있겠다고 할 때 아버지는 걱정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고 싶어서 어떻게 지내니. 허허, 태성이 그놈 보고 싶어서 매일 눈에 밟힐 거 같구나.”
그 말은 맞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태성이를 예뻐하셨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까. 하긴 아버지는 어린아이들이 크는 걸 본 적이 없다. 조카라든가, 조카 손주는 그렇게 자주 볼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는 태성이가 어릴 때부터 유독 예뻐하셨다. 첫 손주였고 라울을 빼닮은 태성이지만 아버지 눈에는 나만 닮게 보인다고 하셨다. 아픈 틈에도 태성이 보러 성북동에도 자주 오시고, 우리가 갈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한남동으로 태성이를 따로 불러서 데리고 다니시기도 했다.
태성이는 아이 때부터 아이 같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 외할아버와도 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저를 사랑하는 걸 벌써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간혹 아장아장 걷는 태성이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걸며 아는 척했는데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좋으셨나 보다. 평생을 성북동에서 살았지만 동네 사람들과 말을 섞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태성이를 데리고 걸으며 사업과 상관없이 그저 할아버지로 인사를 받는 게 행복하셨을 거다. 말도 별로 없는 아버지가 그렇게 자주 태성이를 한남동으로 부르고 같이 문방구며 아이스크림 집을 데리고 다니셨던 것도 다 그래서였을 거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꼭 돈이나 지위가 모든 것을 채우는 건 아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버지가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을 안겨 주는 건 겨우 아장아장 걷는 태성이니 말이다. 그런 태성이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왔으니 아버지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한 그룹의 회장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그리움을 많이 안고 사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휴가를 내서 이 까스틸로 성을 방문한다고 하자 내 마음이 다 설렜다. 전화를 해도 아버지는 꼭 태성이 안부를 묻는다.
물론 가연이는 더 말할 수 없이 예쁜 손녀지만, 아버지 눈에는 그래도 장손이고, 첫정이 들어서 태성이가 더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갈 때 규빈이 내외와 창희도 데리고 가마.”
“정말이요? 그럼 이 까스틸로 성이 들썩들썩하겠어요. 언제쯤 오실 거 같아요?”
“뭐 다음 달 초에는 가지 않을까 싶다.”
다음 달 초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규빈 오빠 부부와 그 아들 창희, 그리고 아버지까지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까스틸로 성을 방문한다면 정말 북적북적할 수밖에 없을 거다. 태성이는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와서 놀기 좋을 거고 가연이는 또 더 공주대접을 받을 테니까 말이다.
“세베로, 세베로.”
나는 세베로를 부르며 거실로 나가다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혹시라도 또 사라 윤하고 같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바로 옆방 문이 열리며 사라가 나왔다.
“세베로는 아까 승마장 쪽으로 간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세요, 사모님?”
“사라, 손님이 오게 생겼어요. 다음 달 초에 친정 식구들이 온대요. 우리 까스틸로 성도 북적북적하겠는데. 아, 태성이보다 한 살 어린 조카애도 오니까 사라가 그 애도 같이 돌봐줘야 할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메마른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하는 사라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늘 침착하고 약간은 어두운 듯 그렇게 조용하다. 큰 변화가 없이 움직임도 조심스럽고 조용한 여자여서 그 옆에 있으면 나도 차분해진다고 할까?
아무래도 나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물론 이제 몇 년을 함께하다 보니 친숙함도 들었다.
“사라? 잠깐 나하고 차 한잔할래요?”
“그러세요.”
“어떤 차 좋아해요, 사라?”
“전 다 좋지만, 오늘은 그냥 홍차 하겠습니다.”
“음, 그래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그란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찻잎을 우렸다. 맑은 물에 찻잎이 퍼지자 바로 주홍빛이 번지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면 이렇게 찻물이 우러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찻잔에 찻물이 우러나는 동안에도 사라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래서 더 세베로가 좋아하는 걸까? 조용하고 뭔가 빨아당기는 깊이가 있는 그녀의 내면이 말이다.
세베로는 무척 유머 있고 모든 면에 신중하면서도 쾌활하지만 사라는 조금은 어둡고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사라, 혹시 세베로하고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네?”
내 말이 어딘가 껄끄러운지 사라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은 사라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면 세베로의 눈에는 훨씬 더 예쁘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깡마른 몸에 여유 있게 잘 맞는 원피스를 즐겨 입는 사라는 무척이나 여성스러워 보인다. 내가 차를 따라 주며 묻자 사라가 단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알고 지낸 건 아니고 그냥 안면만 있었어요. 한번. 서울에서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서울에서면 세베로가 왔었던 게 3년 전인데 꽤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사이인가 봐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봤는데 사라는 당황한 듯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
나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스페인 날씨며 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라는 안개꽃을 좋아하는데 까스틸로 성 입구에 핀 흰 야생화가 안개꽃을 닮아서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사라의 마음을 떠보았다.
“나는 세베로가 정말 좋아요. 내가 결혼할 때도 라울이 좋은 이유 중에 세베로도 있었으니까요.”
“정말이요?”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는 사라를 보며 나도 웃었다. 특이한 일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라울이 아주 말을 이상하게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세베로가 통역을 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세베로는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잖아요.”
내 말에 사라가 동의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세베로가 친절하고 정중하고 자상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여자는 없을 거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세베로가 사라를 많이 마음에 두는 거 같아요. 세베로가 여자에게 그렇게 특별한 관심을 두는 건 처음 보거든요.”
그러자 사라는 얼굴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왜지? 세베로가 싫은 건가?
잠시 조용하던 사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보고 물었다.
“사모님, 세베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요? 개인적인 일들도요?”
“아니요, 그냥 이 까스틸로 성의 유능한 집사라는 것 외에는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깊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세베로의 성품은 잘 알아요.”
이런, 우리가 벌써 이 까스틸로 성에 온 지도 두 달인데. 세베로,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같았으면서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한 게 없다고?
생각보다 세베로가 그렇게 적극적인 건 아닌 건가? 하긴, 그러고 보면 둘이 시간이 많았을 거 같지는 않다.
“나도 세베로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세베로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내 말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끄덕임 안에는 세베로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사라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사모님. 세베로는 유능한 집사이기도 하고 따듯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난 둘이 잘됐으면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럴 수 없을까요?”
내 말에도 사라는 고개를 젓는다. 그건 자신 없어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글쎄요, 전 상처가 있는 사람이어서요.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일 만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전 그냥 지금이 딱 좋아요. 사모님과 회장님도 좋으시고, 세베로도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고. 루벤과 이네스를 돌보면서 있는 게 가장 좋아요.”
“그런데 가족은 자주 연락하나요? 전에 전부 다 미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이곳에 한번 놀러 오시도록 해도 되는데.”
“그러실 수 없어요. 사실 어머니 한 분만 계시는데 많이 편찮으셔서 요양원에 계시거든요.”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 한 분이 가족의 전부라고?
“아, 그럼 치료비용도 많이 들어갈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라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서 말이다. 하지만 사라는 밝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급여를 충분히 주셔서 요양원에 보낼 만큼은 돼요.”
“사라, 어려운 일 있으면 꼭 말해요. 더 도움이 필요하거나 하면…….”
“지금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말하고 찻잔을 내려놓는 사라를 보자니 왠지 마음이 짠하다. 저 나이가 되도록 가족도 별로 없고 혼자 계신 어머니 요양비를 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그렇게 하고 있을 때 현관으로 세베로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던 작은 응접실은 현관에서 바로 가까이 있는 곳이어서 세베로가 들어서는 것이 바로 보였다.
“세베로.”
“아 세뇨라. 사라도 여기 있었군요.”
“막 차를 마시는 중이었어요. 손님들이 올 거 같은데, 서울에 있는 규빈오빠 내외와 아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오신대요.”
“잘됐군요. 모처럼 이 까스틸로 성이 북적이게 됐어요. 그렇담 그분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모두 다 알고 있어야 되겠군요.”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 눈길에 담긴 사랑에 내 마음까지 설렐 만큼 다정한 눈빛이었다.
정말 둘이 잘될 수 있으면 너무나 좋을 텐데.
“저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 세비야에서 가장 드레스를 잘 만드는 디자이너가 내일 오기로 예약했습니다. 세뇨라의 드레스를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죠. 카밀로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디자이너지요. 세뇨라도 딱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물론 드레스만요. 그 사람 자체는 뭐라고 할까…… 어찌 됐든 중요한 건 드레스니 말입니다. 이제 마드리드 궁에서 있는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카밀로의 드레스를 입게 되다니! 그에 관한 기사를 접하거나 드레스를 사진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그가 직접 내 드레스를 만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카밀로가 내 드레스를 만들러 온다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최고의 디자이너가 주인님과 세뇨라의 옷을 만들어야지요. 원하는 디자인이나 미리 생각해 보세요. 카밀블랑카면 뭐든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릴 테니 말입니다.”
세베로의 말을 들으니 정말 카밀로에게 드레스를 맞춘다는 게 실감이 난다. 옆에 있던 사라도 활짝 웃으며 축하해 준다.
“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알았어요. 세베로. 고마워요.”
나는 일부러 인사를 하고 슬쩍 자리를 먼저 빠져나왔다. 사라와 세베로 둘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슬쩍 빠져나오며 세베로를 한 번 더 보았으나 세베로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오로지 사라에게 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라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세베로를 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어색함으로 다시 찻잔을 들었다. 세베로는 유심히 사라의 행동을 보다가 티팟을 들며 말했다.
“찻잔에 물이 하나도 없는데 계속 마시고 있는 건가요? 자, 내가 따듯한 차를 좀 더 드릴까요?”
티팟을 기울여 차를 따라주자 사라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빈 찻잔인지도 모르고 그 앞에서 마시고 있는 시늉을 했으니 말이다.
“승마장에는 무슨 일이 있나요? 한참 있다가 오셨네요.”
사라는 애써 자연스러운 듯 세베로를 보고 물었다.
“네. 주인님이 아끼는 윈디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망아지가 태어났단 말이에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가까이 동물들과 있어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사라가 관심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평소 모든 일에 조용하고 덤덤하던 사라의 음성이 흥분으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세베로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이렇게 열정 있게 묻는 모습에는 아직도 소녀의 감성이 묻어난다.
“어떤 말이 태어났나요? 건강한가요?”
“원한다면 보여 드릴 수 있는데 같이 갈까요, 사라?”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손을 내미는 세베로의 손을 머뭇거리다 잡자 커다랗고 두툼한 세베로의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말했다.
“이대로 나가면 추울 수 있으니까 외투를 입고 나와요, 사라.”
“잠깐만요.”
사라가 방으로 들어가서 가벼운 재킷을 걸치고 나오자 세베로는 사라를 데리고 마구간으로 갔다. 마구간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자동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걸어서 간다면 25분 정도를 걸어가면 된다. 그중에서 세베로가 택한 방법은 물론 말이었다.
“이리 가까이 와요. 내가 태워줄 테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말 옆에서 손을 내미는 세베로를 보며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말을 타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같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사라. 어서 이리 와요.”
세베로가 사라의 손을 잡고 당기더니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는 번쩍 들어 올려 말 위에 앉혔다. 그리고 바로 사라의 뒤에 올라탄다.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고 발을 구르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아!”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사라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세베로가 단단히 잡고 말이 조금 더 속력을 내자 조금 전과 다른 소리를 낸다.
“와우! 대단해요!”
“말은 처음인가요?”
“물론이에요, 어쩌다 보니 처음이네요.”
“잘됐네요. 바로 승마장으로 갈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말을 탈 수도 있습니다.”
세베로는 그렇게 말을 하며 오렌지 가로수가 쭉 이어진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오렌지 향기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그리고 한참을 달리자 오렌지 가로수를 지나 그 옆으로 늘어선 올리브 나무의 가지도 흔들리고 있었다.
말발굽이 땅을 박찰 때마다 사라의 얼굴이 크게 출렁이며 흔들린다. 그녀에게서 나는 진한 딸기향의 샤워코롱이 느껴지자 세베로는 조금 더 사라를 당겨 안았다. 승마장에 도착할 때 즈음 세베로의 얼굴은 사라의 귓가에서 붙어있었다.
“세베로.”
긴장으로 목선이 단단하게 굳은 채 사라가 세베로를 불렀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보며 세베로는 애처롭게 사라를 불렀다.
“사라.”
긴장한 사라의 목선이 꿈틀거리며 침이 꼴깍 넘어가고 있는 걸 세베로는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라의 행동은 사실 세베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딸기 향은 뭐죠?”
“제가 좋아하는 향기에요. 거슬리시나요?”
“아니요, 저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달콤한 딸기 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게 딸기향기로 화제를 돌리자 사라는 다시 밝은 모습이 된다. 어째서 마흔이 다 된 나이에도 저렇게 남자를 어색해하는 건지 그게 궁금했다.
그러나 세베로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묻는다고 속 시원하게 대답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세베로가 웃으며 사라를 마구간 쪽으로 안내했다. 둘이 마구간에서 내려 윈디가 있는 곳으로 향했을 때였다. 그곳에 라울이 있었다. 뜻밖이었다.
“주인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마구간엘…….”
“어쩐 일이겠어? 윈디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온 거지.”
그런데 그 옆에는 꽤나 세련돼 보이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또 꽤 들어 보이는 그런 여자? 하지만 늘씬한 몸에 쫙 달라붙는 승마용 바지, 봉긋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쫄티를 입은 아주 글래머러스한 그런 여자였다.
“세베로, 내가 전에 말했지?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던 아가씨. 마침 오늘 시간이 된다고 해서 망아지도 보여줄 겸 여기 함께 왔어. 인사 좀 하지 이쪽은 블랑카. 이쪽이 세베로.”
라울에 소개에 그러자 블랑카가 세베로를 보고 활짝 웃는다. 화려한 웨이브 진 금발과 육감적인 몸매가 한눈에 눈에 들어오자 세베로는 난감하다는 듯이 바라봤고 그 옆에 있는 사라는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내가 말한 대로 미인이지? 세베로. 조만간 한 번 소개해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망아지까지 태어났다고 하니 내가 같이 오자고 했지.”
라울의 말에 세베로는 블랑카가 아니라 사라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라울이 사라가 질투하도록 해주겠다고 했지만 이제 겨우 사라에게 다가가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그러나 사라는 굳은 얼굴로 조금 전과 달리 세베로의 시선은 마주하고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히히힝!
커다란 말울음이 마구간에 울린다. 어린 새끼를 보고 윈디가 내는 소리였다. 조금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윈디는 갓 태어난 망아지를 혀로 핥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작지만 분명한 말울음 소리를 내며 갓 태어난 망아지가 발짝을 뗀다.
비틀비틀 걸으며 어미 옆으로 다가가 젖을 빨기 시작한 망아지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망아지의 소리도 이 어색한 자리를 달래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라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아지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세베로는 사라의 표정과 그 옆에 있는 블랑카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잘하지 못하면 완전히 엉망이 될 거다. 이제 겨우 마구간까지 함께 말을 타고 올 정도의 사이밖에 되지 않는데 사랑이 자라기도 전에 너무 무거운 짐을 올려놨다가는 질투는커녕 도망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사라의 감정이 질투를 할 만큼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게다가 블랑카는 남자들의 눈에는 아찔한 미인인지 몰라도 여자들의 눈에는 공감하지 못할 분위기이기도 하니까.
너무 풍만하잖아.
세베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사라 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라는 애써 덤덤한 얼굴을 하고 세베로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안색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세베로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라, 나한테 손님이 온 것 같은데 일단 돌아갈 수 있도록 성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러나 사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운동 삼아 삼십 분 정도는 걸어도 되니까 말이에요. 그냥 손님과 이야기하세요. 아주 아름다운 손님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사라는 괜히 말했다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굳이 세베로의 손님이라는 저 여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세베로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꼭 제가 데려다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 마음이 편해서 말입니다. 같이 가요. 사라.”
세베로의 목소리가 은근하고 낮은 소리로 사라의 귓가에 울렸다. 다정한 마음이 밴 낮은 음성에 사라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저기 세베로에게 소개할 여자라는 블랑카에게 세베로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물론 자기의 바람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베로가 돌아서 라울을 보며 말했다.
“주인님, 사라 선생님을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블랑카 양과 함께 계시겠어요?”
갑자기 반전된 상황에 라울은 눈을 크게 뜨고는 세베로 다가갔다. 그리고 세베로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세베로, 지금 질투심을 느껴야 하는 건 블랑카가 아니고 사라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베로가 라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라가 질투를 느끼기 전에 마음에 상처를 받아 죽을까 봐 말이지요.”
“뭐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상처받는 사람은 나라고. 내 상처는 어쩔 건데 말이야?”
라울이 눈썹에 힘을 주며 말하자 세베로가 싱긋 웃으며 인사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가시지요. 사라.”
세베로가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는 것을 보고 블랑카의 눈썹이 모였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현이 분명하다. 라울은 못 본 척 새로 태어난 망아지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블랑카는 라울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회장님, 분명히 저 세베로를 저한테 소개해주려고 한 거 아니에요? 내가 볼 때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은데?”
못마땅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라울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황당한 건 너만이 아니라고. 나도 아주 황당하거든. 기껏 마음먹고 사라하고 잘 맺어주려고 하고 있는데 세베로가 틀고 있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를 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세베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잘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저 여자가 질투를 느끼게 하던가, 아니면 정말 세베로를 정말 휘어잡던가. 그건 블랑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가까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말 울음소리 때문에 더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라도 할까 나도 모르게 블랑카 가까이서 힘을 주고 말하고 있을 때였다.
“라울?”
갑자기 들리는 디아나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디아나가 루벤과 함께 서 있다. 마구간에서 글래머러스한 여자와 단둘이, 그것도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이런 장면을 봐서일까? 디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런데 디아나의 눈썹이 바짝 힘이 들어가서 나를 노려본다. 저런 표정은 내가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을 때 나타나는 표정인데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이 디아나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닌데, 절대로 디아나가 질투를 느끼면 안 되는 상황인데.
그러나 나를 부르는 디아나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호하고 아주 차갑다.
“라울.”
디아나가 단지 내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뭐든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오해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가 막혀서 디아나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말을 버벅거렸다.
“디아나.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그러니까 라울, 누구예요? 손님이 왔네요?”
디아나가 딱딱한 음성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블랑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블랑카라고 해요.”
순간 디아나의 눈초리가 돌아가는 게 보인다. 블랑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는 디아나의 저 눈동자. 틀림없이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텐데!
잠깐, 디아나가 질투를 느끼면 나를 더 좋아하려나?
그때였다. 옆에 있는 루벤이 딱 적시에 파고들어 목소리를 냈다.
“아빠 지금 여자하고 있다가 엄마한테 들킨 건가요?”
아니 뭐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즘 유치원에서는 저런 것부터 가르치나? 6살짜리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다 루벤. 이 분은 손님이야.”
“여자 손님이네요.”
허! 저놈은 조그만 놈이 말투가 누굴 닮은 거야?! 누굴 닮았어?
“디아나, 내가 전에 말했지. 세베로가 연애를 잘할 수 있도록 내가 돕겠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사라가 질투를 하도록 세베로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아니다. 이야기를 안 했었나?”
“그런 말을 들은 적 없어요 라울, 하지만 반가워요. 블랑카. 라울의 아내, 디아나라고 합니다.”
디아나가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블랑카가 말을 했다.
“네, 망아지가 예쁘게 태어났다고 꼬셔서 왔는데 누군가 소개해준다고 하고는 사람은 나타나지도 않네요. 정말 나하고 데이트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회장님?”
미쳤어. 하나같이 미친 게 분명해. 아니 왜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거야. 질투를 느끼라고 한 사라한테는 세베로가 질투할 틈도 주지 않고 쉴드치지를 않나. 디아나는 또 이렇게 나타나기나 하고. 루벤 저 녀석은 뭐라고? 여자하고 있다가 엄마한테 들키셨네요? 하 참…… 그나저나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한담.
“아빠 나 좀 안아줘요. 망아지 잘 보게요.”
“어 그래, 이리와 망아지가 잘 보이게 안아줄게.”
루벤을 들쳐 안으며 그런 마음이 든다. 역시 이럴 때 가정적으로 보이는 건 좋은 거겠지?
“조금 더 높이 들어주세요. 망아지가 잘 안 보여요 아빠.”
“그래 어디 들어가서 볼까?”
나는 조금 객기를 부렸다. 이제 막 망아지를 출산한 윈디가 신경이 예민할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면 망아지 우리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망아지 대신 윈디 품에 얼굴이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게 다 저 세베로 때문이다. 내가 우리 문을 열고 태성이를 안은 채 들어서자 디아나가 소리쳤다.
“안 돼요 라울. 분명 세베로가 그랬어요. 망아지가 예쁘다고 가까이 다가가거나 하면 윈디가 발로 찰 거라고요.”
“그럴 리가 있나. 윈디가 나를 발로 찰리가 있나.”
“윈디가 아무리 당신을 따른다고 해도 갓 태어난 망아지보다 예쁘겠어요? 쓸데없는데 경쟁심 불태우지 말고…….”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루벤을 안고 울타리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늘 보던 윈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윈디녀석, 제 망아지만 감싼 체 나를 보고 경계심을 나타낸다. 콧김을 풍풍 내뿜으며 제 망아지를 보호하는 모습이 꼭 내가 루벤을 안고 있는 모습과 비슷한 거 같다.
“정말, 라울! 루벤 데리고 얼른 나와요?”
오기가 났다. 그런데 내 귀에 대고 루벤이 말한다.
“쓸데없는 데 고집부리다 다치는 수가 있다고 선생님이 그랬어요. 나가요 아빠.”
“뭐야?!”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자기 새끼를 보호하려고 있는 대로 긴장하고 있는 윈디를 보자 루벤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후퇴!
“아들, 니 말이 맞아.”
그리고 다시 루벤을 안고 나오자 디아나가 얼른 달려와 루벤을 받아 안는다.
“루벤, 괜찮니?”
하얀 볼에 볼을 비비며 걱정하는 디아나를 본다.
“나는 걱정이 안 되는 건가?”
그런데 정말 걱정이 안 되나 보다. 하긴 내가 자초한 일이니 말이다.
디아나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도대체 사춘기도 아니고 그게 무슨 객기에요? 그러다 정말 윈디가 화가 나서 발길질이라도 해서 루벤이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는데 블랑카가 불안정한 고음으로 말했다.
“이런, 옆에서 보니 우리 회장님 완전히 공처가시네. 안 그래요? 사모님?”
블랑카의 말에 디아나도 할 말이 없는지 그저 살짝 웃는다. 이런 불편한 상황이라니!
그런데 세배로는 언제 오는 거야. 언제까지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눈치 없는 아가씨랑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거지?
* * *
세베로는 사라를 말에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고삐를 잡고 달리던 세베로가 사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다시 말을 타고 갈 수밖에 없거든요. 불편하지 않지요?”
“네, 그런데, 세베로 아가씨를 소개받기로 했나요? 여자가 그리웠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지만 궁금했다. 못 물어볼 사이도 아니고. 세베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여자를 소개받는 게 신경 쓰이나요, 사라?”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궁금한 거였어요. 내가 신경 쓰고 말고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는 사라가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요.”
“네?”
말이 성 가까이 갔을 때 속도를 줄여 뚜벅뚜벅 걸어가며 세베로가 사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고요 사라. 내가 여자를 소개받는지,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하는 거 말이에요. 제발 나에게 신경 써 줘요. 날 궁금해하고 관심 가져 줘요. 내가 그런 거처럼 말이에요.”
격정적인 말이었지만 세베로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소화해내며 말했다. 말이 현관 앞에 완전히 멈추었을 때 사라가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세베로. 만나고 싶은 여자 있으면 만나요. 나는 그저…….”
“그렇게 말하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군요.”
마치 더 이상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세베로가 먼저 내려서 사라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사라가 몸을 내밀자 허리에 손을 얹어 번쩍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주인님이 벌인 일을 해결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제발 질투하면서 기다려주길 바래요. 사라.”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다시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멀어져가는 세베로를 보며 사라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남자는 필요 없어. 그저 좋은 사람으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가장 적절해. 그게 나한테 가장 합당한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사라는 성안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라는 서울에 있을 때보다 이 스페인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다.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마침 가정교사를 구하는 가정이 있어서 꽁꽁 태성이의 가정교사로 숨어버렸던 거다. 아무도 찾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데 이렇게 서울마저 떠날 수 있으니 더 할 수 없이 좋다. 이 스페인의 성은 마치 그녀에게 보금자리고 피난처고 안식처였다. 게다가 아주 다정하고 매력적인 남자도 있는.
* * *
이 세베로는 왜 안 오는 거야. 내가 이 두 여자의 눈초리에서 어떻게 무사할 수가 있겠느냐고? 게다가 아들놈은 아주 아침 드라마 분위기로 몰고 가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자 루벤의 눈과 딱 부딪힌다. 씩 웃는 저 루벤의 얼굴!
얄미우면서도 귀여운 알 수 없는 놈이다. 대체 저 루벤의 엉뚱한 눈초리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냐고. 그렇게 불편한 공기를 억지로 참고 있는데 저쪽 마구간 입구 쪽에서 세베로가 오는 것이 보였다.
“세뇨라! 이곳에 와계셨군요. 루벤 도련님도요.”
내 속 타는 건 보이지 않는지 디아나를 보고 먼저 인사하는 세베로였다. 뭐야? 다들 나만 빼고 한통속 인 거야?
“윈디가 낳은 망아지에게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루벤이 졸라서요. 혹시 달리 생각한 이름이 없으시면 루벤이 생각한 이름은 어떨까요? 라울 어때요? 저 망아지이름 루벤이 짓는 거요?”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망아지 이름이야 뭐 대충 지어도 되지.
“루벤, 생각해 놓은 게 있니?”
디아나가 루벤을 보며 묻자 루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라울.”
“뭐?”
갑자기 저놈이 왜 내 이름은 부르고 그래? 나를 부르는 루벤을 쳐다보자 루벤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한다.
“저 망아지 이름. 라울!”
“뭐라고? 안 돼!”
나는 있는 대로 소리쳤다. 괘씸하게 망아지 이름에 라울을 붙이다니. 그럼 개나 소나 말이나 아무나 쫓아다니면서 라울이라고 부를 것 아니야. 성주의 이름을 망아지 이름에 붙일 수는 없는 거였다.
“절대로 안 돼!”
나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소리쳤다. 눈썹은 일자가 되어 루벤을 있는 대로 노려보았다.
아주 예쁘다고 봐주니까 아빠가 우습지?
화만 나는 게 아니라 아들이 나를 말처럼 우습게 보는 거 같아 서운하기까지 하다. 루벤이 내 소리와 눈초리에 울먹일 듯이 그렇게 슬픈 얼굴이 된다.
“어우 라울, 그렇게 화내면 안 돼요. 아직 아이잖아요. 루벤, 라울이라는 건 아버지 이름인데, 아버지 이름하고 망아지 이름을 같이 부르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다른 이름을 생각해봐.”
그러자 루벤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데…….”
“뭐?”
제일 좋아하는 이름? 라울이라는 이름이 루벤이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라고?
갑자기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라고? 그러면 그냥 그렇게 이름을 붙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그러라고 하면 혹시 누군가 기분 나쁠 때마다 소리치는 거 아닐까?
라울! 달려. 라울 이 멍청이! 라울 어서 처먹어! 말에게 무슨 말은 못 하겠어?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라울! 달려 라울! 엉덩이 들고 달려! 힘차게!
그런 소리를 마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해댈 게 아닌가. 그뿐 아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라울! 엉덩이 들어!
하고 철썩철썩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내 엉덩이가 다 움찔움찔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자 도저히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 붙이고 싶은 이름이라 그래도 붙이게 할 수 없다.
하지만 눈앞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있는 루벤을 보자 나는 그 앞에 눈높이를 맞춰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루벤에게 말했다.
“루벤, 정말 아버지의 이름을 말에게 붙이고 싶어?”
그러자 루벤이 순진한 눈망울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옆에서 디아나가 말했다.
“루벤, 그건 아니야. 사람들이 아빠 이름을 마치 말에게 하듯이 그렇게 불러댈 수는 없잖아? 생각해봐. ‘말에게, 라울 앞발 들어, 라울 엉덩일 돌려!’ 이런 소릴 해도 괜찮겠니?”
그러자 옆에 있던 블랑카는 한술 더 떠서 말한다.
“달려 라울, 달려! 엉덩이 빠지게 달려! 멋진 거 같은데요? 라울이라는 이름?”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도무지 이 여자는 이렇게 천박할 수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나는 세베로에게 소개시켜줄 여자를 너무 잘못 고른 거 아니야?
일단 루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이름을 잘 정하는 게 중요했다. 루벤이 내 이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는 아주 만족하고 여유 있는 기분으로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루벤. 아빠 이름 하나만 있는 게 아니야. 아빠 전체 이름 외웠지 그때? 한번 말해봐.”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
“그래, 이 중에서 니가 붙이고 싶은 이름을 골라봐. 라울 빼고.”
“라울 빼고?”
“응, 라울은 안 돼. 모든 사람이 나를 라울이라고 부르잖아.”
“그럼 진. 진이라고 부를래요.”
“좋았어, 진! 지니라고 애칭같이 부르는 건 괜찮네. 그럼 이제 말의 이름은 지니다. 됐어? 아빠의 이름 중에 있는 거니까 니 마음에도 들지?”
그제야 루벤은 활짝 웃는다.
“좋아요! 지니!”
그러자 옆에 있던 디아나가 웃으며 한숨을 쉰다.
“정말 부자지간에 못 말리겠어. 하지만 지니라는 이름은 나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윈디도 좋았는데 지니는 더 잘 달릴 거 같은데요?”
“순수혈통이라 당연히 잘 달리지. 자 봐라, 루벤. 지니는 커서 니 말이 될 거야. 좀 지나면 지니를 탈 수 있게 해줄게.”
“와, 정말이요?”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새 망아지를 얻었고 이름도 근사하군요.”
나는 홱 돌아보며 세베로를 노려보았다.
‘도무지 여자들 사이에 나를 남겨놓고 어딜 간 거야?’
세베로는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옆에 있는 블랑카에게 팔을 내밀며 말했다.
“세뇨리따, 저를 보러 오셨으면 제가 이 경마장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베로가 블랑카에게 경마장을 안내하겠다는 말에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빨리 데리고 꺼져 세베로. 나는 디아나하고 있을 거거든?
“디아나, 여기까진 뭘 타고 왔지?”
“루벤과 함께 차를 타고 왔죠. 기사가 저쪽에 있어요.”
“그래? 그러면 루벤은 돌아가 있는 게 좋겠네. 아빠는 엄마하고 같이 말을 탈 작정이거든.”
“나두 나두! 나두 말 탈래요.”
망아지를 보고 흠뻑 빠져있던 루벤이 말이라는 소리에 팔짝거리며 저도 말을 타겠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안 될 말이다. 난 디아나와 어른스럽게 말을 탈 작정이거든.
“안 돼, 말에 세 사람이나 타는 건 안 된다고. 하지만 니가 타고 싶다면 잠깐 너한테 말을 태워주고 그다음에 엄마랑 타면 되겠다. 디아나 잠깐 기다려.”
그리고 나는 태성이를 앞에 태우고 승마장을 한 바퀴 돌았다. 말이 따그닥 따그닥 달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루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한다.
품 안에 조그마한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에도 웃음이 차오른다. 이런 걸 행복감이라고 하나?
올리브 나무에서 신선한 올리브 향이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아이의 웃음소리와 내리쬐는 햇볕이 현란하게, 가슴 뿌듯하게 그렇게 벅차오르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고 내려주자 태성은 더 조른다.
“좀 더 타면 안 돼요?”
“안 돼.”
“아빠.”
“됐어. 어서 루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사라에게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회장님.”
기사가 루벤을 데리고 가자 나는 디아나의 허리를 확 잡아 안았다.
“말 타고 싶지 않아?”
“라울!”
정말 라울은 못 말린다. 아들을 혼자 들여보내고 기어이 함께 말을 타자고?
“나는 디아나하고 말을 타고 싶어서 이 스페인에 오고 싶었거든? 그동안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오히려 없었잖아. 이제 조금 지나면 또 아버님과 임규빈 부부도 올 테고 그러면 더 정신없어질 테니 말이야.”
사실 루벤이나 라울이나 보채는 건 마찬가지다. 지금도 함께 말을 타자고 저렇게 조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전 루벤이 말을 더 태워달라고 하던 걸 엄하게 뿌리쳐놓고는 나에게는 같이 말을 타자고 하다니 말이다.
“그래요, 태워줘요. 말.”
나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말을 탈 줄 모른다. 결혼하고 난 뒤에 연거푸 아이들을 낳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승마를 배울 틈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라울의 품에 안겨서 말을 타는 것도 좋다. 말이 달릴 때마다 몸이 흔들리지만 단단하게 내 허리를 감싼 라울의 팔 때문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안정감이 점점 지나면서 야릇해진다. 라울의 손길이 옷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재킷 속으로 손을 넣더니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는 블라우스를 조금씩 잡아당기고 기어이 맨살에 손이 닿는다.
허리에 닿은 손이 앞으로 돌아가고 슬금슬금 위로 올라간다.
“라울! 여기는 지금 말 위에요.”
“그러니까, 딱 말 위가 좋은 거지. 이렇게 흔들리면서 말이야.”
라울의 손이 매끈한 살결을 부딪치며 야릇한 흥분감을 주고 있었다.
“이러려고 태성이를 먼저 보낸 거예요?”
“그럼! 미성년자 관람 불가거든?”
라울의 숨결이 귓가를 타고 내 가슴을 울린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지중해의 바람을 머금은 올리브 향이 났고,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내 귓불에서 울리며 잘근잘근 나를 잠식해가는 듯했다.
“디아나,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말이야, 어째서 결혼하고 난 뒤로 점점 더 풍만해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지?”
이게 칭찬이야? 풍만해진다는 말이 어쩐지 좋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뒤에 아름답다는 말만 빼면 말이다.
“라울, 몸무게가 2킬로 늘었거든요? 태성이 낳고는 전혀 늘지 않았는데 이네스를 낳고는 몸무게가 좀 늘었다구요.”
역시 여자들은 몸무게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그런데 나의 이런 예민한 반응과는 다르게 라울은 딴소리를 한다.
“그래서 그런가? 앞으로 2킬로만 더 늘면 더 마음에 들 거 같은데? 훨씬 더 풍만하고 여성스럽고…….”
“지금 당신 나 칭찬하는 거예요?”
“물론이야, 마음에 드니까.”
달리는 말이 점점 더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룬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환한 햇빛이 나무의 그림자로 컴컴하게 느껴지는 나무 사이로 가까이 들어왔다.
“길에서 벗어나고 있어요.”
“당연히 벗어나야지.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으슥한 곳이거든?”
라울이 올리브 나무 아래 말을 세우고 내게 깊게 키스해오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내 가슴은 무섭게 뛰기 시작한다.
“대체 뭘 어떡하려고…….”
“뭘 어떡할까?”
라울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콧김이 뜨겁게 목덜미를 데우고 있었고 덕분에 내 체온은 조금 더 상승하는 거 같다. 라울의 입술이 점점 목선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나는 점점 가슴이 부푸는 걸 느꼈다.
“라울.”
“디아나, 아이들을 얼마든지 더 낳아도, 디아나는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내게 여전히 마법을 부린 거 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거 같아.”
“맙소사, 라울. 갈수록 말을 잘해지는 거 알아요? 결혼 전에 이렇게 말했으면 난 아마 바로 당신하고 결혼했을 걸요?”
“나는 원래부터 말을 잘했다고.”
어련하겠어? 결국 자기가 무슨 말을 하면서 사는지 평생 모른다고 봐야 맞겠지.
라울의 손이 바지 속으로 파고들더니 다리 사이 예민한 속살을 비비며 파고든다.
“하아…….”
아득함을 느끼는 순간 라울이 번쩍 나를 들어 안더니 바지를 훌렁 벗겨버린다.
“라울!”
놀라서 불렀으나 라울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보고 묻는다.
“그치, 말 위는 좀 불안하지.”
그러고는 바로 안아 내리더니 올리브 나무 아래 수풀에 라울의 재킷을 깔고 앉더니 나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입술을 내려 그대로 가슴을 물었다. 바람이 젖은 젖꼭지가 차갑게 느껴지다가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자 신음이 터졌다.
“하아…… 라울……”
이미 젖어 든 아래가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비벼지고 있었다. 라울은 그대로 나를 그의 남성 위에 올려놓고 내리꽂듯이 앉혔다. 체중을 실어 그대로 그의 것을 받아들이자 아래가 터질 듯이 느껴진다.
“사랑해 디아나.”
라울이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김이 바람에 흩어지고 움직일 때마다 짜릿한 자극이 우리를 감쌌다. 옆에서 히히힝 거리는 말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울리고 라울의 손길에 나는 더욱 라울에게 매달리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햇빛은 찬란했고 올리브 나뭇잎은 바람결에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처음 까스틸로 성에서 그를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그의 아내로서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곳은 나에게 떨리는 곳이다.
* * *
세베로는 블랑카를 데리고 승마장 주변을 걷고 있었다. 넓디넓은 승마장을 터덜터덜 걸으며 안내하겠다고 끝도 없이 걷고 있자 높은 하이힐을 신은 블랑카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세베로, 도대체 뭐 하는 거죠?”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해서 지금 승마장을 구경시켜주고 있는 겁니다.”
“아니, 설마 이렇게 걸어서 이 넓은 승마장을 다 돌아보겠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단조롭기 그지없이 이 올리브 나무만 가득한 이 승마장을 말이에요!”
“물론입니다. 저는 이 승마장을 이렇게 걸어서 도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물론 거짓말이다. 승마장을 걸어서 어떻게 돈담? 말을 타고 돌아도 한 참 걸리는걸. 하지만 이 세뇨리따를 적절하게 떼어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 외에는 없는 거 같았다.
“하, 라울의 말로는 당신 참 유능한 집사라고 그러는데 융통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보이는군요.”
“그러게,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입니다만.”
“뭐에요? 지금 나한테 일부러 밉보이고 싶다는 거예요? 난 당신을 지금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구요.”
“무슨 말씀이신지?”
세베로는 블랑카의 말에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여자의 도움 같은 걸 받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런 세베로의 마음을 모르는 블랑카는 계속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까 그 여자였어요? 사라 윤? 그 여자가 질투심을 일으키도록 당신 옆에서 잘해줄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날 이렇게밖에 못쓰겠어요?”
라울이 말했던 질투하게 만든다는 게 이런 거였다니!
세베로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사라가 마음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 특히 다른 여자의 도움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습니다.”
세베로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세베로의 말에 블랑카는 절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는 제대로 되질 않죠. 원래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나야 그 사람이 제대로 들어오는 거 몰라요? 게다가 나는 당신과 10번의 데이트를 하기로 회장님과 약속했다고요.”
참 주인님다운 생각이다.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 말이다.
블랑카의 말에 세베로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상처를 남기면 오래 기억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 다치거나 나를 싫어한다면? 그건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세베로를 보며 블랑카가 탁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지금 겁나는 거 맞죠? 겁나면 이미 진 거예요. 그 여자는 당신의 호의를 받아들이다가 딴 남자에게 가겠죠.”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세뇨리따?”
“내 말이 틀린 건가요? 여자들이란 말이죠, 정말 신경이 쓰이는 남자한테 마음이 가는 거라구요. 나한테 뭐든지 잘해주기만 하는 그런 남자, 매력 없잖아요.”
그런 말을 듣자 세베로는 순간 자신감이 없어졌다. 여자에게 상처를 남길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건 세베로가 해왔던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라 윤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세베로의 한쪽 마음을 약하게 했다.
못 이기는 척하고 주인님의 뜻에 따를까? 그럼 사라 윤이 날 더 봐줄까?
참으로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머뭇머뭇하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어찌 됐든 나는 라울 까스틸로 회장에게 뭐, 약속받은 것도 있고. 이미 사례도 받았으니까 말이에요.”
블랑카는 세베로를 올려다보다가 싱긋 웃더니 갑자기 까치발을 딛고 세베로의 볼에 키스했다. 잠깐이었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뇨리따!”
“왜요? 설마 이 정도 키스도 당황할 정도인가요?”
“그럴 리가요. 단지 지금은 모든 게 불안정하다고 할까요.”
물론이다. 평소의 세베로는 여자의 이 정도 키스에 당황할 리가 없다. 하지만 사라 윤이 마음에 가득 들어와서 마치 다른 여자와 이정도 키스만으로도 사라 윤이 저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감정에 세베로 자신조차 이상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당신을 계속 만나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굳이 나한테 어떻게 하는 척하지 않아도 내가 틈날 때마다 당신에게 마음 있는 척할게요. 그렇다면 사라 윤은 긴장할 테니까요.
원래 여자는 나처럼 이렇게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자기 남자한테 눈독 들이는 걸 경계하거든요.”
블랑카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말하며 가슴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며 스스로 자만심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러나 세베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라는 나를 자기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허, 여자를 너무 모르시네. 세베로, 어찌 됐든 앞으로 기대해요. 단지 내가 다가갈 때 밀쳐내지는 말아요. 그건 절대 금물!”
검지를 세워 가로 흔들며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블랑카를 보며 세베로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런 게 더 나을지 어쩔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베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블랑카는 당분간 보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