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43)

- 외전 -

5.

그런데 세베로가 사라에게 눈길을 주는 걸 자세히 보면 그저 죽은 아내와 닮아서, 아니면 호감이 가는 여자에게 주는 눈길만은 아닌 것 같다. 마치 하룻밤 잔 연인을 보는 것 같잖아?

세베로가 사라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조금 더 깊고 짙게 느껴진다. 그의 눈길이 길게 사라에게 머물며 뭔가 계속 어떤 신호를 보는 것 같다고 느끼며 나는 스테이크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뭐, 별 일 아니야. 다 우리 가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니까. 뭐 이 정도 초청장이야…….”

그런데 내가 말하고 있는데 왜 여자 둘이 다 세베로만 쳐다보는 거야? 응?

“흐음. 세베로, 어디 초청장을 가져와 봐.”

내 앞으로 온 초청장이니, 나 정말 멋있어 보이지 않아?

그런데 왜 디아나도 사라 윤도 날 안보고 초청장만 보는 거야?

여자 둘의 눈이 세베로가 들고 있는 초청장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들자 바로 앞에 있던 루벤이 나를 보며 씩 웃는다.

마치 아빠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여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요? 하는 듯한 눈길이다.

아! 저 아들놈은 이상하게 나를 아래로 보는 거 같단 말이야.

“루벤. 어서 먹어라!”

내 말에 루벤이 크게 오물렛을 떠서 먹는다. 역시 아이들은 먹을 때하고 잘 때가 제일 예쁘다. 디아나와 사라가 초청장을 바라보자 세베로가 초청장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설명했다.

“일 년에 몇 번 이 까스틸로 성으로는 국왕께서 보내시는 우편물이 오곤 한답니다. 여기 이렇게 직인이 찍혀있죠.”

세베로는 친절하게 사라 윤에게도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사라 윤은 왕가의 문장이 찍힌 직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볼이 점점 빨개진다. 세베로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둘이 반한 거야? 아니면 둘이 미리 알고 있던 거야? 정말 궁금하네.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나는 디아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디아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나를 보고 웃는다. 역시 디아나가 제일 예뻐!

그래도 저 세베로가 이 성안에서 여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건 역시 신경 쓰이는 일이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 * *

식사를 마치고 세베로는 사라를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계단과 복도를 지나 방으로 가는 내내 세베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함께했던 사람을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희열에 들떴던 그 날 밤 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다정했던 손길과 키스도 뜨겁게 안아주던 단단한 품도. 그런 생각을 하자 자꾸 꼴깍 침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게 된다.

“여깁니다.”

방문을 열며 안내하는 세베로의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세베로가 따라 들어선다.

“사라. 예쁜 이름이군요. 사라.”

세베로의 말에 사라가 굳어버린 듯 그대로 정지했다. 세베로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기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둘의 공유한 추억이 되어버린다.

“전…….”

세베로가 그대로 사라를 당겨 안았다. 커다란 세베로의 품에 가는 사라의 몸이 그대로 파묻힌다. 그녀를 안자 세베로가 작게 한숨 쉬며 눈을 감았다.

“영원히 놓쳐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게 왔군요. 사라.”

세베로의 다정한 말에도 사라는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

* * *

밤이 깊어지자 가장 어린 가연이는 먼저 재워주고 침실로 들어섰다. 생각해보니 세베로와 사라의 알 수 없는 긴장감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둘을 의식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식사를 했다. 세베로에게 여자가 생긴다면 사라 같은 여자는 딱 좋지 않을까? 하는 비약도 하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온 까스틸로 성의 침실은 라울과 나를 결혼 전의 그 시간으로 돌려놓는 것만 같았다. 라울은 짙은 남색에 황금빛 수가 놓인 나이트가운을 입고 내 앞에 서서 집요한 눈길로 내려다본다.

그 가운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딱 그 가운이다. 저 차림으로 내게 결혼하자고 했던 게 엊그제 같다. 아직도 그대로 있다니!

“그게 어떤 가운인지 나 다 알아요.”

내가 올려다보며 말하자 라울이 내게 다가오더니 씩 웃으며 내 턱을 들어 올린다.

“그렇지. 이게 바로 복장 불량으로 퇴짜 맞은 그 가운이지. 그래서 벗어버릴 생각이야. 이렇게.”

악!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손가락은 벌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라울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도도하게 하늘로 솟은 그의 자존심까지 말이다.

서울에서 이 스페인으로 날아오기 전날까지 라울은 새벽이 다 되어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그만큼 계속되는 회의와 일 때문에 이렇게 느긋한 시간은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자고 있는 내 몸을 더듬는 손길에 눈을 뜬 적도 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늦어도 라울은 날 안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를 안았다. 그의 손길에 길들여진 건 당연한 거였다. 그래서일까? 지금 저런 스트립을 보기만 해도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라울이 바로 달려들어 내 가운을 벗겨냈다.

“아니, 뭐야? 이렇게 많이 입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뭐가 많다고 그러는 건지. 위, 아래. 그리고 그 위에 얇은 슬립이 다인데.

“겨우 세 개가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많지. 날 봐. 난 이렇게 디아나의 수고를 덜어주는 거 안 보여?”

그러니까 날 위해서 이렇게 벗고 있다는 건가? 하여간 못 말린다. 그럼 또 나도 할 말은 있지.

“무드를 선사하기 위한 선물로 보이지는 않나요? 라울?”

내가 몸을 꼬며 요염한 눈으로 바라보자 라울의 턱이 아래로 딱 벌어진다. 저기에 침만 흘리면 딱 강아지! 아직도 나에게 저런 눈길을 주는 라울.

“어머, 잠깐만요. 라울!”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나는 나를 부르는 디아나의 입술을 크게 베어 물어버렸다. 탱글탱글한 요 입술. 그렇게 한참을 달콤한 입술을 머금다가 다시 몸을 떼고 그녀 앞에 섰다. 그러자 당당하게 앞에선 나에게 그녀가 시선을 준다.

침대에 앉아 두 팔로 위아래를 가리고는 디아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뚫어지라 쳐다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그대로 그녀를 덮치듯 눕히고 입술을 겹쳤다.

이런 도발적이면서도 청순한 눈길이라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도 어째서 이렇게 날 쥐고 흔드는 걸까?

눈길만으로도 견딜 수 없게 요염한 디아나! 이 세비야의 밤이 더 이렇게 만드는 걸까? 까스틸로 성의 마법은 언제나 디아나 편인 게 분명하다. 내가 이토록 설레니 말이다.

비비적거릴 때마다 살과 살이 마찰을 일으킨다. 녹아내릴 듯, 사라질 듯 그렇게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에 나의 것이 점점 더 단단하게 부풀고 있었다. 입술을 빨던 입술을 턱으로 그리고 목선을 지나 얇은 살갗 아래 펄떡거리는 디아나의 맥박이 느껴지는 쇄골 위로 내렸다.

가슴의 둔덕을 지나 붉은 그것을 입에 물고 또다시 한참을 빨아들이며 그녀의 숨이 턱에 차도록 애무한다. 양쪽 가슴이 단단하게 부풀고 그의 입속의 열기로 익은 듯이 빨개지면서 그녀의 심장이 무섭게 뛴다.

아마 아이들보다 내가 더 많이 빨았을 거다. 당연하지 이건 내 건데.

내가 부푼 젖꼭지를 입안에 넣고 굴리며 빨고 지근거리자 디아나의 머리가 뒤로 휘며 긴 목선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나는 디아나의 저 희고 가는 목선만 보면 정말 환장할 것 같다.

혀를 길게 내밀어 뱀파이어처럼 그녀의 목선을 핥는다. 그렇게 핥아서 가슴까지 내려오자 그녀의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가슴에 남는 입술 자국이 내가 보기에도 선정적이다.

그렇게 선정적인 자국을 내던 입술을 다시 미끄러뜨려서 탄탄하고 매끈한 배로 내려간다. 아이 둘을 낳고도 여전히 옴폭 팬 듯 날씬한 얇은 배를 진득하게 입술을 누르고 혀로 핥자 그녀의 허리가 또다시 뒤틀린다.

아랫배에 닿는 뜨거운 열기도 열기지만 다음 나의 행동을 뭔가 예감이라도 하는 듯 움찔거리며 미끌미끌하게 젖어 드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녀의 눈에 어린 당황스러움과 기대감, 두려움과 희열이 나를 점점 더 끌어당긴다.

“디아나!”

내가 관능에 잠긴 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내 이름을 부르며 답한다.

“라울.”

차근차근 먹어치우듯 입술을 아랫배 더 아래로 내리자 그녀의 가슴이 점점 더 크게 들려 올라간다. 흉곽이 부풀며 다리가 바르르 떨린다.

“사랑해!”

“아아…… 라울.”

달뜬 목소리가 무슨 뜻인지 잘 안다. 디아나는 몸이 달아오르면 저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지금 딱 이때 넣으며 얼마나 뜨겁게 조이는지 너무나 잘 안다.

뻐근하게 부푼 것을 그대로 그녀의 좁고 뜨거운 안으로 쑥 밀어 넣자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매 목에 팔을 감으며 매달린다. 정말 이러면 나도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아찔하다.

무섭게 허리를 밀어 넣자 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디아나의 잦아든 목소리도 몸이 겹쳐지는 소리도 나를 흥분하는 소리다.

끝까지 몸을 밀어 넣기를 반복하는 동안 디아나의 흐느낌이 들린다.

“라울. 하아…… 나 죽을 거 같아.”

한마디로 내가 죽여주는 남자라는 거다. 이런 소리만큼 황홀한 소리는 없다. 나는 그런 그녀의 안으로 터질 것 같은 남성을 밀어 넣고 그대로 사정했다. 한순간에 몸 안의 불기둥이 빠져나가며 느껴지는 희열.

“디아나.”

나는 다시 디아나의 얼굴과 볼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그대로 달려들어 핥아대는 라울 때문에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 하긴 세비야에서 보내는 첫날이니 이런 사랑을 나누기에 딱 맞는 밤이기도 하다.

며칠은 모두가 쉬면서 지냈지만 우리 가족은 또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라울은 세비야에 있는 까스틸로의 영지와 양모 회사를 둘러보고 MK 그룹의 세비야 지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루벤은 나이에 맞는 킨더스쿨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이네스는 가정교사인 사라와 세베로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세베로는 이네스와 사라와 함께 있을 때도 정말 노련하게 못 하는 게 없다. 모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어린 이네스와 이제 마흔이 되는 사라까지 다 잘 다루니 말이다.

내가 이네스에게 가려고 거실을 지날 때였다. 세베로가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사라에게 말하고 있었다.

“사라, 오늘은 세비야 대성당에 가보지 않을래요?”

세베로가 사라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세베로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친근하게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언제나 세뇨리따나 세뇨라, 아니면 이름과 성을 깍듯하게 부르며 예의를 차리는 세베로였다.

그런데 더 놀란 건 세베로에게 하는 사라의 말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냥.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대해줘요. 제발. 그냥 그날은 잊어줘요. 세베로.”

사라와 세베로 사이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라울의 말이 생각난다. 세베로가 늘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세베로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다. 세비야에 온 뒤로 종종 세베로를 유심히 보게 된다.

세베로에게도 좋은 사람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세베로에게 어떤 사람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들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세베로 역시 아주 독특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외모는 훌륭하다. 큰 키만큼 체구도 크고 몸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뚱뚱한 건 아니지만 건장한 체격인 것만은 사실이다. 머리도 늘 단정하게 빗고 수염도 잘 다듬어있다. 무엇보다 세베로의 매력 포인트는 눈이다. 진한 회색을 띠는 부드러운 눈동자는 언 듯 보면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깊은 눈으로 사람을 위로할 때는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말이다.

하다못해 태성이나 가연이도 울다가도 세베로가 나타나 달래주면 금방 뚝 그친다. 세베로는 정말 아이들을 달래는 덴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가연이는 세베로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런데 그렇게 세베로가 가연이한테 사랑을 받을수록 점점 라울의 미움을 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세 살 된 가연이는 누가 봐도 한숨이 나올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게다가 오목하게 들어간 커다란 눈은 마치 인형처럼 보인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 누구라도 볼에 키스라도 하고 싶은 그런 아이다.

그런 가연이가 앉아서 소꿉장난 접시 위에 음식들을 담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샌드위치와 닭고기 모양을 접시를 예쁘게 올려놓고 있으니 어김없이 라울이 가서 물었다.

“와아, 우리 이네스, 이거 다 아빠 주려고 만드는 거구나?”

그러자 가연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야, 이거는 다른 사람 줄 거야.”

가연이의 말에 라울은 장난스럽다고 하기에는 뭐할 만큼 심각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며 가연이한테 물었다.

“이네스, 그럼 이걸 누구한테 줄 거지?”

“세베로!”

“뭐야?!”

“이건 세베로 거야. 세베로! 이리와, 내가 세베로 주려고 이렇게 했어.”

세베로가 다가오자 라울이 세베로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이걸 다 받을 생각이야? 나 하나도 안 주고?”

기가 막힌 일이다. 마치 진짜 먹을 거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라울의 말이나 그에 응하는 세베로도 보통은 아니다.

“주인님, 저는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가 주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하나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가연이의 바로 옆 소파에 앉더니 가연이가 주는 음식을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는 듯 먹는 시늉을 한다. 그 옆에서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가연이와 그런 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노려보는 라울을 보며 나는 정말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에 라울은 중대한 결정을 하고 내게 말했다.

“나, 앞으로 이네스를 데리고 출근할 생각이야!”

“뭐예요? 하루 종일이요?”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지만 이렇게 황당한 말은 처음이다. 세 살짜리 이네스를 데리고 출근을 하겠다니! 그럼 거기서 식사며 간식이며 놀이며 게다가 낮잠까지 재우겠다는 거야?

내가 눈꼬리를 올리며 바라보자 라울이 조금 주춤하며 자기 말을 수정한다.

“종일은 아니고, 중간에 집에 보낼게. 그래도 나하고 반나절은 같이 있어야 해. 그래야 정들지. 매일 세베로하고 있으니까 나보다 세베로를 더 좋아하잖아. 이네스 아빠는 바로 나거든.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183위, 그리고 이 까스틸로 성의 성주이자 MK사의 회장인 나라고!”

또 시작이다. 라울을 누가 말려? 이제 이네스를 독점하기 위한 라울의 몸부림이 시작된 거다. 예상은 했지만 참 걱정된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딸바보 아빠는 보기 좋다!

유치하지만 사랑 많은 라울! 이래서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

“가자, 우리 이네스.”

반짝 가연이를 들어 안으며 말하는 라울을 보며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정말, 저 어린 이네스를 회사 회장실에 데려다 놓고 2시간씩 있겠다는 건지.

“라울, 정말 이네스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예요?”

하긴, 물어서 뭘 할까? 이미 이네스를 데려다 놓을 준비를 다 했으니까 말이다. 라울이 이네스를 사무실에 데려가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하며 가구를 골랐는지 잘 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이네스가 혹시라도 졸릴지 모른다고 해서 내가 이네스를 위해서 최고급 마호가니 아기 침대도 갖다 놓고, 이네스가 좋아하는 작은 목마도 갖다 놓고, 인형까지 완벽하게 준비해놓은 걸 몰라?”

정말 그랬다. 라울은 이네스를 데리고 두세 시간 회장실에 있겠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내가 한 말은 그럴 수 없다는 거였으니까.

“아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깨어있지 못해요. 놀 게 많은 것도 아닌데 회장실에서 당신하고 단둘이 뭐 하겠어요? 걔는 졸리면 아무 때라도 자야 하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울이 전화를 걸었다.

“내 사무실에 어울릴 만한 걸로 아기용 침대 하나만 맞춰서 갖다 놔.”

그리고 라울의 말이 떨어지고 며칠 되지 않아서 정말 라울의 모든 가구 색과 딱 맞아떨어지는 마호가니 아기 침대가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하긴, 라울이 이네스라면 뭐든 최고로 해주고 싶어서 그렇지 않아도, 원래 좋은 것들도 더 특별한 것으로 주문해서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이 정말 많았으니까 말이다.

이네스는 역시 아직 아기라서 그런지 라울이 번쩍 들어 안자 좋아서 라울의 목에 팔을 걸곤 활짝 웃는다.

“이네스 너도 좋지? 아빠 따라가는 거?”

“응, 좋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인형같이 예쁜 가연이를 보고 라울의 얼굴이 활짝 갰다.

“디아나도 언제든지 와. 가능하면 이네스를 데리고 갈 때는 디아나가 오면 좋겠어. 물론 디아나가 바쁘면 유모를 보내겠지만 말이야.”

“생각해봐요, 라울. 나까지 회장실에 간다면 우리 태성이 빼놓고 세 식구가 다 회장실로 출동하는 거라고요. 태성이가 알면 얼마나 소외감 느끼겠어요?”

“뭐야? 소외감이라니. 사내자식이 돼서 그런 데서 소외감 느끼고 기죽고 그러면 될 일이야? 더군다나 저는 학교도 가면서 말이야.”

“하, 킨더가든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어찌 됐든. 걔가 거기 가 있는 동안에 우리가 셋이 따로 모여 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어마어마한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어리다고 해도 루벤도 그 정도의…….”

“그만 해요, 라울.”

나는 라울의 말을 딱 잘랐다. 나는 태성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진 않다. 물론 장성하면 MK 그룹의 회장이 될 수도 있겠고, 이 까스틸로 성을 물려받기도 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마치 그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아기처럼 그렇게 키울 수는 없다.

“아직 어린 애잖아요. 그리고 가능하면 가연이 데리러는 내가 갈게요. 이네스, 조금 이따가 엄마가 데리러 갈게.”

그러자 가연이 활짝 웃는다.

“난 아빠랑 있을 거야.”

깜찍한 이네스는 라울이 데리고 간다고 하자 벌써 라울에게 붙었다. 어쩌면 그렇게 상황판단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알았어. 아빠하고 잘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갈게. 그런데 라울 정말 괜찮겠어요?”

“뭘 걱정하는 거야? 내 딸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래?”

“꼭 그렇다기보다는 회사에 직원들도 있고…….”

“됐어. 회장실에 아무나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다녀올게, 디아나.”

이네스를 품에 안은 채로 라울이 나를 당겨 안고는 입을 맞췄다. 나를 보는 라울의 시선은 늘 한결같은데 이네스를 볼 때 보면 꼭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이네스를 향한 라울의 집착은 참 대단하다.

“어우, 이네스 어떡하니. 아빠의 소유욕 장난 아닌데 말이야.”

나는 걱정 반 농담 반으로 이네스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내가 이네스를 안고 비서실에 들어섰을 때 비서진들은 모두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다음엔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인형같이 예쁜 이네스를 보고 얼굴이 활짝 갠다.

“회장님, 따님인가 봐요. 너무 예뻐요.”

“내가 예쁘다고 했잖아. 오늘부터 데리고 출근한다는 말 안 했나?”

“하시기는 했지만…….”

하긴 당황하긴 하겠지. 이 회장실에 아기가 온 적은 처음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이네스니까.

“당분간은 이네스와 함께 출근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바로 문을 닫고 회장실로 들어왔다.

“이네스, 여기서 같이 있자.”

내려놓기가 무섭게 이네스가 사무실 안을 뛰어서 한 바퀴를 돌더니 낮은 소파에 털썩 앉는다. 그건 아이보리색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이네스를 위한 작은 소파였다. 내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파, 그 위에 앉아있는 이네스는 인형처럼 귀엽다.

“여기 앉아서 인형 가지고 놀고 그림책 보고 있으면 돼. 알았지?”

“응. 알았어. 아빠는 저기서 일하는 거지?”

아! 이 나긋나긋하고 앙증맞은 목소리. 역시 딸이 최고다. 게다가 얼마나 똑똑한지 세 살짜리가 아빠 일하는 것도 다 알고 말이다. 나는 이네스를 보며 씩 웃었다.

“응. 그렇지. 졸리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 아빠. 걱정하지 마.”

인형을 들고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네스는 눈에 통째로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귀엽다. 아이가 사무실에 온 것만으로도 사무실이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이런 게 아이에게서 나오는 분위기라는 건가?

똑똑.

“들어와.”

“회장님, 늘 마시던 대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따님을 위해서는 주스를 가지고 왔는데. 말씀하신 컵에 넣어왔습니다.”

아기용 컵에 주스가 담겨 나왔다. 이네스는 까르르 웃으며 주스를 쪽쪽 빨아 먹는다. 빨간 입술이 맨질맨질해서 주스를 꼴깍꼴깍 삼키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뭐 하는 거야? 나가지 않고.”

비서도 넋을 놓고 이네스만 보고 서 있기에 한마디 해서 내보냈다. 아무나 그렇게 쳐다보라고 데리고 나온 게 아니다. 이네스가 나를 좀 더 가깝게 느끼고 나도 이네스를 더 많이 보기 위해서 데리고 온 거다.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있어야지. 그래야 다음에 소꿉장난해서 음식을 차리면 날 줄 거 아니야. 세베로에게도 밀리다니. 그럴 수는 없지.

“이네스, 말해봐. 아빠가 좋아, 세베로가 좋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네스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세베로.”

“뭐야, 세베로. 넘사벽이야? 도대체 어떻게 이네스의 마음을 다 가져간 거지? 다른 여자들의 마음도 다 그렇게 가져가 버리고 있는 거야?”

* * *

세베로는 3층 테라스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라 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크게 펼쳐서 사라 윤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세베로!”

커다래진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세베로가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녀는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나직하게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세베로. 그날 밤의 모든 건 잊어달라고 말했잖아요. 그걸 기억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이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요. 그날 밤을 다 잊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사라에게 이렇게 할 겁니다. 당신은 감싸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세뇨리따니까요. 당신이 묻지 말라고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다가오지 말라고는 하지 마요. 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으니까요.”

“세베로.”

사라 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이가 큰 안달루시아 지방의 기후에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얇았고, 아직 해가 높이 뜨지 않은 탓에 낮은 기온에 부는 바람은 거셌다.

세베로는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두른 채 그대로 사라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뒤에서 나란히 선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오렌지 나무 가로수가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저 오렌지 나무는 다 세베로가 심은 건가요?”

“아니요. 옛날부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오렌지 나무를 좀 더 다듬은 거죠. 하지만 저기 보이는 좀 더 여린 나무들은 제가 심은 거예요. 가로수를 조금 더 길게 만들기 위해 심었죠.

영지는 충분하니까. 오렌지 나무를 세뇨라가 좋아하거든요.”

세베로의 말에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디아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아이들도 정말 예쁘고요. 난 이 집에 온 게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루벤과 이네스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세베로를 만난 것도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라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딱 함께 일하는 다정한 집사로 있고 싶은 게 사라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라의 마음과 달리 세베로는 계속 다가가며 그녀를 흔들었다.

“사라가 이 집안에 들어온 건 나에게도 행운이에요. 난 그날 밤 이후로 쭉 당신을 그리워했는데 이렇게 한집에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지 알아요?

내가 혼자 당신을 생각하며 이 까스틸로 성을 지키는 동안 당신은 우리 주인님 가족과 함께 서울에 있었던 거군요. 참 이것처럼 인연인 것도 없을 거예요. 사라. 많이 생각했어요.”

“제발 세베로.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마요.”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세베로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마른 얼굴의 커다란 눈동자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베로는 그런 사라를 보며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왜죠? 왜 내가 당신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 아름다웠던 그 밤을 내가 기억하면 왜 안 되는 거죠?”

“그건…… 제가 잊고 싶은 날의 밤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세베로. 당신 말투는 정말 독특하네요.”

말은 독특하다고 했지만, 뭐라 말할 수 없이 느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세베로의 말투는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사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당신이 웃을 수 있다면 독특한 말투도 좋은 거로 생각합니다. 사라, 내가 키스해도 될까요?”

그녀를 보고 묻는 말에 사라는 고개를 돌려 세베로를 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베로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커다랗고 두툼한 세베로의 입술. 겹쳐오는 입술의 열기에 사라가 숨을 들이켰다.

사라는 당황했으나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사실, 이 세비야에서 다시 세베로와 마주치는 순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베로의 입김이 사라 윤의 귓가에 닿았다. 세베로의 숨결은 안정감 있고, 다정하고 촉촉했지만, 그 입김이 사라 윤의 귓가에서 울리자 사라는 크게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힐 듯이 크게 가슴이 부풀고 어깨가 귀에 붙을 정도로 움츠러들게 된다. 그런 것을 보며 세베로가 침착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긴장돼요.”

“이렇게 해도?”

세베로가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입술을 겹쳐왔다. 사라는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세베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세베로는 그 남자가 아니야. 이 남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혼자 속으로 그렇게 말해도 역시 두려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는 순간 어떤 기억이 무섭게 떠오르자 사라는 몸을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세베로의 입맞춤에 전혀 빠져들 수가 없었다.

한 번 떠오른 기억은 무섭게 그녀를 휘어잡고 두려움으로 몰아친다. 세베로는 그런 사라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져 다시 다정하게 그녀를 안았다.

“내가 실수했어요? 사라?”

품 안에서 바짝 긴장해 있는 사라가 세베로의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내 키스가 그렇게 싫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빙긋 웃으며 묻는 세베로에게 당황한 눈으로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사라를 보며 세베로는 사라에게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다. 그러니 섣부르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 * *

부부의 침실이 있는 2층에서 나는 손톱을 다듬다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이런 적막이라는 건 익숙하지가 않다. 늘 아이들과 정신이 없거나 아니면 라울을 받아주며 보내다가 이렇게 갑자기 조용해진 침실이라니 말이다.

게다가 태성이가 킨더스쿨에 가고 라울이 출근하고 나면 언제나 내 옆에서 조잘조잘 말을 하던 이네스마저 라울을 따라 출근하고 나자 나는 갑자기 공허함을 느꼈다.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인데, 자유롭다기보다는 왠지 허전하고 나만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은 정도다.

안 되겠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테이블보라도 다 바꿔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2층을 나섰다. 거대한 까스틸로 성은 2층에는 우리 부부의 침실이 있고 한참 떨어진 곳에 태성이의 방이 있고, 이네스의 방이 있다. 그리고 3층에는 아이들의 놀이방과 함께 유모의 방과 사라의 방이 있다. 이곳에 온 뒤로 정말 사라와도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테이블 웨어를 바꿀 때 좀 봐달라 고 할까?

나는 사라 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대리석 계단에 깔려있는 두꺼운 카펫 때문에 내가 3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런 면을 나는 참 즐긴다. 이 까스틸로 성이 아니라면 이렇게 두꺼운 카펫이 깔린 곳이 어디 그렇게 흔하겠나?

까스틸로 성의 카펫은 특별히 주문 생산한 걸로 구두 굽이 파묻힐 정도다. 덕분에 아이들에게는 무척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3층을 올라갔을 때였다. 계단 바로 앞쪽에 보이는 테라스에 은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았다.

세베로가 사라를 끌어안은 채 격정적으로 키스하고 있었다. 눈을 꼭 감은 사라의 얼굴이 보이고 세베로의 든든한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얼른 계단 기둥 있는 쪽으로 몸을 숨겼다.

“저런, 정말 세베로가 사라를?”

둘이 안면이 있는 것 같다는 것 정도는 느꼈지만, 설마 저런 관계일 줄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 만났을까? 그것보다도 세베로가 이 까스틸로 성안에서 어떤 여자하고 키스하는 일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 여자와는 평생을 살 거라고 했던 라울의 말이 생각난다.

라울에게 지금 내가 본 것을 정말 말해주고 싶다. 그날 밤에도 라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라울, 아무래도 사라하고 세베로하고 어떤 관계에 있는 게 아닐까?”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둘의 눈길이 자꾸 얽히는 거 같아서요.”

그런데 이 남자 정말 딱 자기 같은 말만 한다.

“눈길이 얽힌다…… 눈길이 얽혀서 뭐하겠어? 몸이 얽혀야지.”

“아우 라울. 제발 그만하면 안 돼요? 장난이 아니에요. 내가 볼 때 둘이 이전부터 알고 있고 보통 이상의 어떤 관계가 있는 거 같다니까요.”

“그러니까. 장난이라면 모를까 눈길이 얽히는 거 가지고 뭔 일이 일어나겠냐고. 얽히려면 다리가 얽혀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나를 잡아당겨 다리 사이에 가두고는 바로 내려다보며 짓궂게 웃는다. 진짜 이 남자하고는 진지한 말 자체가 안 된다. 나는 낑낑거리며 라울의 다리 사이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쓰다가 포기하고 라울을 보며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는 안 그래요? 세베로가 사라하고 특별한 관계인 거 같지 않아요?”

내가 반항을 멈추자 라울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내 턱을 손으로 잡고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세베로가 이 까스틸로 성 안에서 어떤 여자하고 키스를 한다면 아마 그 여자는 이 까스틸로 성을 벗어나지 못할걸? 평생 세베로와 함께 살아야 될 테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키스 한 번에 발목이라도 잡힌다는 거야? 아니면 세베로의 키스가 그런 마성의 키스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요? 까스틸로 성안에서 키스 한번 했다고 해서 평생 같이 살다니. 설마 세베로의 키스가 그 정도 위력이 있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이 까스틸로 성이 그런 거야. 디아나도 나하고 이 성에서 키스했잖아.”

“난 당신하고 이 성에서 처음 키스한 건 아니에요.”

“어찌 됐든. 세베로 같이 공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내 말이 맞을걸. 까스틸로 성은 그의 직장이기도 한데, 그가 이곳에서 누군가하고 키스를 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같이 살 여자일 거라는 거야. 내 말은.”

“아, 라울. 로맨틱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억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정말 그럴까요?”

내가 미심쩍게 말하자 라울은 내 허리를 더 바짝 당겨 안으며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살짝 입술을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세베로와 사라 둘이 언제 입술이 교차하고 다리가 얽히는지 나는 그것만이 관심이거든?”

“그만 해요, 제발.”

이런, 그리고 그다음에 정말 우리 다리가 얽혀 버렸다. 라울은 세베로의 키스 이야기만으로도 자기가 더 흥분한 것 같았다.

그때 라울의 말을 생각한다면 정말 세베로가 사라하고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세베로가 키스하는 건 왜 이렇게 로맨틱한 거지?

살짝 다시 보자 사라의 허리가 뒤로 크게 휘어진다. 든든한 팔로 사라의 허리를 감싼 채 키스를 하고 있는 세베로를 보니 라울이 생각난다. 이미 출근한 지도 두 시간이 지났는데 과연 이네스하고 잘 있을까?

* * *

“아빠, 졸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눈을 감고 있는 나에게 이네스가 소리쳐 묻는다.

“아니, 졸리지 않아.”

“그런데 왜 눈 감고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이네스를 보았다. 이네스는 인형을 안고 작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네스의 머리카락 색은 참 독특하다. 까만색인데 햇빛에서 보면 보랏빛이 살짝 감도는 것 같다. 아니 푸른빛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마치 내 눈동자 색처럼 그렇게 신비한 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은 어머니 이사벨과 디아나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것 같다. 눈을 뗄 수 없는 깜찍함. 이네스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처럼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그저 보고만 있어서 웃음이 나온다.

“이리와, 이네스.”

인형을 안은 채로 쪼르르 달려오는 이네스를 반짝 들어 무릎에 앉히고 보자 나를 보며 생긋 웃어준다.

요염하기는. 디아나를 똑 닮아서 이렇게 요염한 거겠지? 어쩌다가 이런 예쁜 딸이 생겼을까. 디아나가 아니라면 이렇게 예쁜 이네스도 없었겠지?

천천히 이네스의 볼을 쓰다듬자 이네스가 한마디 한다.

“이 동화책 아빠가 읽어줄 거야?”

아기사슴 밤비.

음, 글자도 몇 개 없는 거 못 읽어줄 것도 없지만, 지금은 보던 서류가 급하다.

“이렇게 잠깐 앉아서 기다리면 아빠가 읽어주지.”

“응.”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가만히 있는 이네스를 무릎에 앉힌 체 골똘히 하던 생각을 마저 한다. 마지막 계약서는 사인하기가 꺼려지는 그런 계약 건이었다. 밀쳐둬야 될까? 망설이며 서류를 다시 꼼꼼히 보고 있는데 이네스가 귓가에 대고 말한다.

“세베로는 읽어달라고 하면 바로 읽어주는데 아빠는 기다리라고 하고. 또 오래 기다리라고 하고.”

“뭐? 세베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불만스러운지 볼이 빵빵하게 부은 이네스가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본다. 나는 이네스 보다 더 눈에 힘을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네스가 나를 세베로하고 비교하는 건 못 참는다. 백전백패니 말이다.

“자, 어디. 잘 들어 이네스. 아빠는 세베로보다 훨씬 바쁘고 아주 높은 사람이거든. 그리고 세베로 보다 훨씬 책도 잘 읽어.”

“정말?”

“그럼.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어.”

그러자 이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뭔데?”

“세베로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어주지만 아빠는 이네스한테만 읽어준다는 거야. 그야말로 독점이라고.”

“독점?”

이네스가 내 말을 또박또박 따라 한다. 아 귀여운 이네스. 그래. 독점. 이게 얼마나 좋은 말인지 너는 모를 거다. 나는 평생 너한테만 동화책을 읽어줄 테니까 말이다. 아닌가? 나중에 디아나가 또 아기를 낳으면 읽어야 하려나? 몰라. 일단 지금은 이네스 독점 맞아.

“그래, 이네스. 독점하는 거라고. 내가 엄마를 독점하는 거처럼 말이야. 이 아빠가 읽어주는 책은 너만 듣는 거니까. 알았지?”

“알았어. 아빠. 최고.”

이네스가 최고라고 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기분이 좋다. 나는 또박또박 아기사슴 밤비를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고 있는데 이네스가 계속 듣더니 말했다.

“뭐야, 꼭 책 읽는 거 같잖아.”

“뭐? 당연히 책을 책 읽는 거 같이 읽지. 책 읽는데 책 읽는 거처럼 읽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읽으라고?”

눈초리가 사나워지며 이네스를 보는데 이네스는 당돌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세베로는 그렇게 안 읽어주는데. 진짜 사슴같이 읽어준단 말이야. 진짜 사슴이 말하는 거 같이.”

이런 망할 세베로 같으니라고. 도대체 책을 어떻게 읽어준 거야. 어떻게 하면 사슴같이 읽느냐고!

내가 말없이 가만히 이네스를 보자 이네스가 작게 한숨을 쉰다.

“그냥 아빠대로 읽어줘. 난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악! 들어 줄 수 있다고? 이 내가 지금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딸이 감동하기는커녕 들어줄 수 있다니!

그 길로 나는 비서실에 연락을 했다.

-네 회장님!”

“아이들 동화책 재미있게 읽어주는 그런 거 있지?”

-네, 구연동화 말씀인가요?

“그런 거 가르치는 사람 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네스 입에서 세베로보다 내가 최고라는 말을 듣고야 말 거다.

라울은 이네스를 데리고 출근하기 시작하고부터 서재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일 때문이라도 문을 잠그는 일은 없는데 요즘은 문을 꼭 잠그고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왜 문까지 걸어 잠그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부부침실 테라스 난간으로 가서 서재를 엿보았다. 그런데 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보인다.

라울이 동화책을 펴놓고 늑대나 여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주둥이를 내밀고 “우우우” 소리를 내고 있다.

저 사람이 미쳤나? 저래서 문을 잠근 거야? 동물처럼 울어보고 싶어서?

아는 척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라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하나둘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라울의 저런 이상한 행동보다는 오히려 세베로가 더 궁금했다.

세베로가 사라 윤을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저렇게까지 열렬하게 구애를 하는 거겠지? 아, 세베로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서 너무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봐도 사라가 세베로를 멀리하는 거 같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세베로였다. 라울을 향한 그의 충직한 마음이나 행동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한 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잠깐씩 세베로와 사라 윤 사이를 유심히 보다가 그날 밤 라울에게 얘기했다.

“라울.”

“무슨 일이야?”

“난 말이에요, 세베로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잘됐으면 좋겠어요.”

“뭐, 그렇게 되면 좋기는 하겠지만 그게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하고 맺어지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이런 말을 할 때면 늘 장난스러운 라울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라울의 말대로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하고 맺어지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베로가 그렇게 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라울. 당신 말대로, 정말 세베로가 이 까스틸로 성에서 누군가와 키스를 한다면 그 여자하고 평생 살게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왜 묻지? 꼭 세베로가 키스라도 했다는 거 같군. 설마 그 사라 윤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라울을 보며 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하여간 눈치는 귀신같다. 그렇게 귀신같은 눈치로 내 마음도 좀 잘 알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아니나 달라? 라울이 무슨 귀신같은 눈치?

뭔가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라울의 눈에 나는 뭐냐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요?”

“그럴 리 없겠지만, 디아나에게 키스를 했다든가 말이야.”

“그만 해요! 라울!”

정말 터무니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 되면 속이 다 뒤집어질 거 같다.

하여튼 또라이 기질은 어디로 안 간다니까! 그렇다고 내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라울의 턱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라울은 강아지도 아닌데 내가 턱을 만지작거리면 나른한 표정을 한다.

아침에 아무리 깨끗하게 면도해도 저녁이 되면 라울의 턱수염은 어느새 까슬까슬하게 자라서 손끝이 닿는 감촉이 재미있다.

“그게 아니라 세베로가 정말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요.”

“그 말은 사라에게 키스하는 걸 봤다는 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그러자 라울이 내 턱을 두 손가락으로 꽉 쥐더니 다짜고짜 입술을 겹쳐온다.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빨아 당기며 다가오는 통에 주먹을 쥐고 어깨를 밀었다.

“아니, 말 좀 하자구.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세베로가 키스했다는데 왜 자기가 이러냐구.”

한참을 농밀한 키스를 하던 라울이 내 허리를 잡고 제 무릎 위에 탁 앉히더니, 씩 웃는다.

“어때, 이 정도로 격렬하게 했어? 다른 커플 키스하는 걸 본 소감은 어떤데?”

나는 말 대신 하얗게 노려봤다. 도무지 뭐라 말을 못 해. 내가 무슨 관음증 환자도 아니고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세비야 대성당 앞 광장에만 나가도 키스하는 커플은 많고 많은데.

“라울, 아마 내가 모르긴 해도 세상에서 당신만큼 키스 잘하는 남잔 없을 거예요. 달콤하고 격렬하고 뜨거운 키스.”

“그래?”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울이 씩 웃는다.

“그럼 그다음 말을 들어볼까?”

하여간 칭찬을 하면 안 돼. 아니 칭찬으로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거지? 뭐 원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베로보다 더 키스를 잘하는지 이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겐 당신의 키스가 최고니까. 알았어요?”

내 말에 라울은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그런 거나 경쟁하고 그러는 남자가 아니야. 당연히 누가 봐도 내가 훨씬 섹시하지.”

“그런데 세베로하고 사라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볼 땐 사라가 세베로를 밀어내는 거 같아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의외의 말이었다. 세베로 정도 되는 남자가 친절하게 다가간다면 어느 여자나 좋아할 거 같았는데 라울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건가?

“왜요, 라울? 나는 사라에게도 세베로만한 남자는 없을 거 같은데. 물론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베로는 나이보다 훨씬 더 젊은 느낌이잖아요. 노련하고 배려심 있고…….”

“아주 세베로의 예찬론자가 되겠군!”

“그래도 당신도 세베로가 잘됐으면 좋지 않겠어요?”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네?”

나는 라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라울이 뭐?

“당신이 뭐요?”

“날 몰라? 내가 나섰다 하면 다 결혼시키는 남자잖아. 내가 임규빈도 그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집 딸하고 결혼시킨 거 몰라? 내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었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라울이 규빈오빠를 결혼시키기 위해서 어떤 짓을 했는지 훤히 알고 있는데 설마 그 방법을 지금 쓸 리는 없고.

“그래서,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요?”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든다. 라울이 말을 잘해서? 아니면 뭐 돈으로? 어느 쪽이라도 사라와 세베로를 라울이 연결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라울은 아주 당당하고 포부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세베로가 사라하고 결혼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써볼게.”

“그런데 힘을 이상하게 쓰거나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라울이 눈에 힘을 주면 묻는다.

“왜? 내 중매실력을 무시하는 거야? 지금? 임규빈 결혼해서 애기 낳고 잘 사는 거 봐! 나같이 바쁜 사람이 그런 일에 신경 쓰겠다는 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아?

세베로니까 내가 신경 쓰는 거야. 디아나가 세베로를 워낙 걱정하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 라울이 규빈 오빠를 결혼하게 한 건 순전히 내 옆에서 미혼으로 있는 거 보기 싫어서 떼어놓는 거였지만 세베로는 진심으로 돕는 거니까.

하지만 오히려 망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도 엉뚱한 데가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세베로는 알아서 잘할 거 같지 않아요?”

“중이 제 머리 깎는 거 봤어? 나같이 능력 있는 남자도 디아나를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하는 것마다 이상하게 꼬이지를 않나, 하여튼 자기 일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나와 결혼하기 위해 마음 꽤나 졸이기는 했나 보다. 이제야 솔직하게 실토를 하는 거 봐. 그것도 무의식중에 말이다.

“글쎄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점수를 따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세베로라구요. 세베로가 당신의 조언을 받아들이거나 그런 입장은 아닌 거 같아. 정확하게 말하면 라울 당신이 세베로에게 그렇게 뭘 조언하고 그럴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말하는 동안 점점 라울의 눈썹이 조여들더니 말했다.

“말해 봐. 나한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뭐지?”

“당신의 말투요. 당신 정말 말을 못 하잖아요.”

“누가 그래? 내가 말을 못 한다고? 이 내가 일 년이면 얼마나 많은 연설을 하는지 알기나 해?”

“흠, 그러게…… 연설문 같은 걸 읽을 때는 정말 대단하거든? 그리고 거래처 사람들하고 사업을 하는 능력도 탁월하고. 하지만 연애할 때 말솜씨는 정말 신이 내린 언어 부적응자라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그때 청혼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내가 디아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만 생각한 것은 아니야. 틈틈이 생각하기도 했지. 절대로 하늘에 별은 따다 줄 수 없지만 그렇게 잘해주겠다는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아니야.-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식거리고 웃자 라울이 나를 슬쩍 째려보며 묻는다.

“지금 뭘 생각하기에 그렇게 웃는 거지?”

“뭘 거 같아요?”

“설마 나는 아니겠지?”

왜 아니겠니? 딱 너지!

“청혼 때…….”

“그만! 그만해! 그만 떠올리라고! 청혼 같은 건 그 날만 생각하고 잊는 거야!”

라울이 인상 쓰며 말했지만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엉뚱한 걸로는 최고지만 이렇게 오래 기억되는 재미있는 청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았어요. 지금 생각하니 말이에요.”

“흥. 그것도 말이라고.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조언만 해주고 말은 세베로가 할 테니까 말이야. 세베로가 그 반질반질한 입술로 얼마나 말을 잘하겠어?”

그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맞는 말이다. 라울이 아무리 형편없이 조언한다고 해도 세베로는 아주 매끄럽게 말을 잘할 테니까.

그런데 그것도 내 착각이었다. 남자들은 모두 엉뚱한 데가 있다는 걸 내가 잠깐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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