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43)

- 외전 -

4.

“알았어. 기다려.”

전화를 끊자 아버지도 라울도 누구냐는 얼굴로 본다.

“혜정이에요. 조혜정.”

이름을 듣는 순간 아버지 얼굴이 바로 굳어버린다.

아버지는 혜정이를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 행세를 하고 아버지를 찾아왔으니 말이다.

“응? 조혜정? 설마 그 스페인에서 왔던 그 혜정이 말하는 거냐?”

아버지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인다. 평소 아버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놀랄 말은 라울에게서 나왔다.

“뭐? 혜정? 날 유혹하려고 했던 그 여자? 디아나하고 친하다는?”

옆에서 라울이 하는 말에 나는 놀라서 물었다. 라울이 어떻게 혜정이를 알고 게다가 유혹이라니 말이다.

“뭐요? 당신을 유혹해요? 아니, 당신이 혜정이를 본 적 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니까 말이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

“아버지, 혜정이 어머니가 금방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독한 거 같은데. 돈도 없고 굉장히 어려운 거 같아요. 도와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엉엉 울면서 말하는데……. 사실 혜정이한테 좋은 감정은 없지만, 이대로 그냥 모른 척해도 마음은 불편할 거 같아요.”

아버지가 입을 꾹 다문다.

“네 마음이 그러냐?”

“네.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죽어간다고 하는 걸 모르는 척하는 건 마음에 걸려요.”

그러자 아버지가 천천히 나를 보며 작게 말씀하셨다.

“그게 너구나.”

“네?”

“그게 바로 내 딸이라고. 내가 사랑했던 혜원이 딸. 혜원이도 그랬다. 남 아픈 거 못 보고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짓 못 하고…….

착한 게 나쁜 건 아니다.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 하지만 네가 지금 거기까지 달려갈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면…….”

“기사 보내면 돼. 잘 말해서 보내고 수술비 내주라고 하면 되지. 어떻게 된 건지도 알아보고. 그러면 되는 거야. 너까지 가서 또 그 인연에 얽힐 필요는 없다.”

아빠 말이 맞다. 혜정이가 안됐고, 윤주 이모가 저대로 죽게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그 얼굴을 보고 말을 섞으며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만히 있자 아버지가 비서에게 몇 가지 지시해서 보내는 게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가 일 처리를 하는 옆에서 라울이 말했다.

“그런데 그 혜정이라는 여잔 도대체 디아나하고 무슨 관계야?”

나는 천천히 돌아보며 오히려 물었다.

“그러는 라울은 혜정이를 어떻게 알아요? 혜정이 당신을 유혹하려고 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이 남자는 여자들은 다 저를 유혹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을 다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빤히 그를 보자 라울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앞에 있는 올리브 한 알을 들어 입에 넣으며 말이다.

“한 일주일 동안 가는 데마다 눈에 띄더라고. 가슴은 이만큼 나오고 엉덩이도 아주 커다랗더군. 이렇게 가슴이 드러나고 몸에 쫙 들러붙는 야한 옷을 입고 노골적으로 날 유혹하려고 그러기에 내가 한마디 해줬지.”

라울은 말하면서 손으로 자기 가슴 앞을 막 가리키며 여자 몸매를 흉내 낸다. 진짜 혼자 보기 아깝다.

“뭐라고 한마디를 했는데요?”

“뭐, 정신 차리라는 이야기. 내가 대체 누구냐고 물었더니 디아나하고 자매처럼 자랐는데 오해가 있어서 나한테 왔다나? 그래서 당신하고 오해가 있으면 당사자끼리 직접 풀라고 했어. 그리고 날 유혹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고. 속이 다 보인다고 말이야.”

라울이 이렇게 말하면 진짜 어떻게 말했을지 안 봐도 훤하다. 아마 혜정이는 라울이 완전 또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대놓고 그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그럼.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들어, 그런 사람들은. 그리고 무엇보다 날 유혹하려고 했던 게 기분이 나빴어. 내가 볼 땐 아무도 유혹할 수 없을 거 같던데. 딱 봐도 머리가 나빠 보이는데, 그런 수로 어떻게 누굴 유혹하겠어?”

라울의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직설적인 말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웃는 나를 보며 라울이 진지하게 묻는다.

“그럼 말해봐. 도대체 그 혜정이라는 여잔 뭔데?”

“우리 그때 만났을 때 말이에요. 스페인에서 제일 처음 만난 호텔이요. 내가 혜정이 대신 가이드 나간 거예요. 혜정이가 남자친구하고 약속 있다고 해서.”

“뭐야?”

라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면 그 혜정이 때문에 우리 둘이 만난 거라고?”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고맙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글쎄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걔 때문에 되게 위험했거든요.”

나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은 너무 위험하고 무서웠다. 그런 사람들과 위험하게 놀던 혜정을 생각하면 역시 인상이 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라울은 딱 부러지게 말한다.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나 같은 흑기사를 만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니 그 혜정이라는 여자는 나한테 고마운 여자네.”

독특한 계산법이긴 하지만 라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혜정이가 내 행세를 하고 아빠를 찾아왔어요. 윤주 이모가 내 머리카락 뽑은 거랑 손톱 자른 것을 가지고 유전자 검사 하라고 보냈다나요.”

갑자기 라울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짜 머리가 나쁜 사람들 아니야? 요즘 세상에 그런 걸로 유전자 검사해서 자식이라고 인정하는 집도 있나? 병원에 데리고 가서 피검사를 해야지.”

“아빠가 혜정이 오기 전에 유전자 검사하고 기다리셨대요. 물론 다시 검사하고 아닌 거 아셨지만 그냥 속은 척하면서 나를 찾으려고 기다리셨대요.”

“하여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더니 아버님은 나는 놈?”

“라울!”

“지금 나보고 한 말인가?”

돌아서는 아버지를 보면서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못 말린다.

아버지는 그저 싱긋 웃으시고는 비서를 보내서 입원 수속을 하고 상태가 어떤지 알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모르는 척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아버지 말이 맞으니까. 또다시 얽혀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일단 비서를 보냈으니 곧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될 거다.

어쩌면 혜정이가 또 있지도 않은 일을 부풀렸을 수도 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기도 하는 애니까.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 틀렸다.

비서가 알아본 바로 윤주 이모는 간 이식이 필요할 만큼 간이 손상된 상태고, 혜정이가 간을 이식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형편에서 본다면 엄청난 수술비와 입원비를 당해낼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혜정이는 사채도 쓰고 있어서 무척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도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히셨다.

“그런 사람들까지 도와줄 돈 없다. 선량하고 착한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양심도 없는 사람들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거냐? 그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아니야. 감히 너를 대신해서 내 딸이라고 와서 온갖 방탕한 짓은 다 하고…….”

아버지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아버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주 이모가 저대로 죽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는 거냐? 나는 그런 사람은 도와주고 싶지 않다.”

“아빠.”

나는 조용하게 아빠를 불렀다. 언성 높일 일도 아니고 아버지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의 생각은 아빠와 달랐기에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아빠도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굳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래, 말해라.”

“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 나한테 못되게 한 사람한테 저도 화나고, 또 혜정이 때문에 엄청난 곤란을 겪었던 적도 맞아요.

물론 그런 것 때문에 라울을 만나기도 했지만. 혜정이도 윤주 이모한테도 저는 정 없어요.”

“그럼 됐네. 모르는 척해라.”

“그런데 아빠, 이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뭐? 뭐가 다른 문제라는 거냐? 그렇게 독하고 악한 것들은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나아.”

“그건 아니죠, 아빠.”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자꾸.”

아빠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지 않자 아버지의 음성이 더 낮아진다. 아버지를 만난 뒤로 한 번도 의견 차이가 없던 우리 부녀였다. 나는 아버지가 이해하시길 바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용서 못 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다 좋은데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미운 게 대체 뭘까요.

이 세상에 있을 가치가 있고 없고를 어떻게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미운 게 대체 뭐냐는 물음에 아빠의 얼굴은 더 딱딱하게 굳어있다.

“뭐야?”

“저 그런 생각을 해요. 죽고 사는 것보다, 생명보다 더 미운 게 과연 합당할까요. 어떻게 죽음보다 누군가를 더 미워할 수 있겠어요. 멀리 있는 사람도 돕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도 죽어간다고 그러면 도와야 하는데…… 그래도 아는 사람이잖아요. 하나도 좋아하지 않아도 저대로 죽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랑아.”

“착한 척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 마음이 그래요. 도울 수 없으면 몰라도 죽는다는데 혜정이 엄마가 죽는다잖아요. 엄마가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너무 잘 아는데 아무리 미워도 죽게 둘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내 말에 잠시 말 없으시던 아빠가 천천히 물으셨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제가 할게요, 아빠. 찾아가서 만나거나 하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도울게요. 그럼 되잖아요. 그럴 생각이에요. 그것도 말리실 건가요?”

“말리고 싶다. 괘씸해. 니 엄마 그렇게 갈 때 한, 유언을 그렇게 못되게 한 거 용서가 안 돼.”

“그래서 죽이시게요?”

“내가 죽이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죽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돕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원망이 쌓일 거다. 누구를 향해서든 말이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사는 거 자체가 윤주 이모나 혜정이에게 이미 벌이었을 거다.

“돕지 않으면 죽어요, 아버지. 그냥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적절하게 할게요.”

옆에 있던 라울이 다가오며 말했다.

“진짜로 도울 생각이야? 그 나쁜 것들을?”

라울이 알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 그랬잖아, 라울. 혜정이 멍청하다고. 멍청해서 제대로 나쁘지도 못한 사람들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거 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 살린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나야 되지. 안 될 게 뭐 있어? 그리고 우리를 만나게 해준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못 도울 것도 없지.”

라울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를 만나게 해준 못된 사람’ 참 이상한 말이다. 그 말대로라면 라울은 날 만나게 된 게 싫다는 말이야? 하지만 라울은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하게 해주려고 한다. 지금도 자신의 생각은 별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울을 고맙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굳이 직접 얼굴 보고 돕지 않아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윤주 이모를 입원시키고 간 이식할 수 있는 수술비용을 대겠다고 비서를 통해서 밝혔다. 그 뒤로 한동안 혜정이한테는 연락이 없었다. 비서를 통해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중간중간 생각났다. 그래도 수술이 잘 되어야 할 텐데 하는 그런 생각.

수술 날이 오늘이다.

그런데 혜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하다가 아버지나 라울이 직접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하긴 그런 말이 아니어도 전화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까?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자 잠시 후에 메시지 알람음이 울린다.

음성 메시지를 열었다. 흐느끼는 혜정의 목소리였다.

- 이랑아, 고마워. 나 용서해주라. 너한테 참 못되게 굴었는데 너 엄마 돌아가시고 힘들었을 때도 나 너를 챙기지 못했어.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도 나더라. 그때 너 참 힘들었을 텐데 우리는 딴생각만 했다는. 정말 나빴지.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난 엄마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거든. 너무 고마워 이랑아. 나 오늘 수술 들어가는데 수술하고 난 뒤에는 나도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동안 너무 미안했고 고마웠다. 잘 살아 이랑아. -

수술 들어가기 전이어서 그런지 이전의 혜정이 하고는 사뭇 다른 목소리, 사뭇 다른 말투다.

혜정은 수술 들어가기 전에 병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찾아올 사람도 없다. 며칠은 간병인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만 간병인을 둘 만한 돈 같은 것도 아껴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사람이 찾아왔다. 남달호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일수를 갚지 못했다. 남달호도 다 알고 있어서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자를 받으러 오다니.

“나 오늘 일수 못 갚아. 수술해.”

“나도 알아.”

남달호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병실과 혜정을 둘러본다.

“둘러봐야 가져갈 것도 없어. 수술하고 나면 이자가 쌓이겠네.”

그저 답답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혜정의 말에 남달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 그것도 갚았더라. 누가.”

“누가?”

혜정의 눈이 커졌다. 빚을 갚았다니. 말만 들어도 어깨가 날아갈 듯이 가볍다. 매일 올무처럼 조여 오는 이자에 대한 압박에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하게 되는 생활이었다. 오죽하면 일수를 몸으로 갚았을까? 그런 빚이 없어졌다니!

남달호는 그런 혜정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 병원비 낸 사람이 갚았다고 하더라고. 원금 칠백만 원에 이자까지 해서 천백만 원쯤 되는데 다 갚았어.”

“그럼 넌 여기 왜 왔는데? 이제 일수 찍을 것도 없네.”

혜정은 눈앞에 있는 남달호를 보며 당장 꺼지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달호가 조금은 쑥tm러운 듯 혜정을 보며 말했다.

“너, 수술하는 거 보러.”

“뭐야? 니가 왜? 니가 뭐 내 남자친구나 돼?”

“그런 거 해보면 안 될까?”

“뭐야?”

뜻밖의 남달호의 말에 혜정이 가만히 침을 꼴깍 삼켰다. 수술 전에 어제부터 금식해서인지 왜 이런 말에 가슴이 뛰는 걸까? 아니 감동을 받는 걸까?

말없이 남달호를 바라보자 남달호가 가까이 다가와 혜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손가락 끝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미끄러진다.

“장난하지 마.”

혜정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미 알 거 다 아는 그런 사이다. 일수 찍는다고 만나서 정이라도 든 걸까?

남달호는 그런 혜정의 얼굴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눈길이 부딪치자 천천히 혜정을 보며 말했다.

“내가 니 남자친구 하면 안 되겠냐? 난 돈도 없고 이제 사채업자 밑에서도 나왔어. 일수 찍는 것도 안 해. 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런데 시골 총각도 괜찮으면 나 니 남자친구 해도 되냐?”

괜히 눈물이 난다.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게 분명하다. 남달호가 흐르는 눈물에 젖은 혜정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까짓 거, 간 조금 떼는 거 별거 아니야. 뭘 그렇게 울어.”

“누가 그래? 별거 아니라고? 난 무섭다, 뭐. 간 떼어내는 거보다 엄마 죽을까 봐 더 무서워. 그리고 너도 간 떼보지 않았잖아. 아플 거 같아.”

그 말에 남달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도 다시 억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래. 수술 잘하고 나와. 기다릴게.”

“정말? 기다릴 거야? 수술 끝날 때까지? 오래 걸릴 텐데?”

혜정의 말에 남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고갯짓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래. 나 시간도 많아. 기다릴게.”

그리고 잠시 후에 구윤주와 혜정이 나란히 수술실로 들어갔다.

* * *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많았다면, 1월에는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한 각종 행사들의 발대식이며, 창립식이며 이런 것들이 많이 있다. 디아나와 나는 기업에서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여러 봉사단체들의 오찬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유모와 가정교사도 있고 집안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돌아가기 때문에 요즘은 디아나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가연이도 이유식을 먹고 하면서 훨씬 더 엄마에게서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디아나가 아름답게 하고 모임에 나타나는 걸 즐겼다. 사람들이 모두 디아나를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칭찬할 때마다 내가 더 능력 있는 남자가 되는 거 같아서 기분 좋다. 오늘도 디아나는 보랏빛 원피스에 금사가 들어간 아이보리 재킷을 걸치고 나타나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회장님 사모님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십니다. 나이도 한창 예쁠 때고, 점점 더 예뻐지셔서 이거 이사들 부인들이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나이 지긋한 이사의 말에 나는 겸손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다들 아름다우신데 무슨 곤혹스럽다고.”

껄껄. 역시 디아나가 예쁘긴 예쁘지. 우리 디아나처럼 예쁜 부인은 아무 데도 없어!

이게 내 속마음이지만 말이다. 내 말에 앞에 있는 윤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그래도 다른 이사 부인들이 사모님 옆에서 있으려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분발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농담처럼 하는 윤 이사의 말에 디아나는 송구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 말이 저절로 나와 버렸다.

“그게 꾸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마음이라도 편히 가지시죠. 어차피 안 됩니다.”

아차! 말이 막 나왔다. 그러자 나를 보는 디아나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뭐? 내가 없는 말 했나?

그런데도 디아나의 표정은 딱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우 못살아 라울. 어디서 이런 말을 창피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직설적이고 거르지 않고 나오는 이 말투 당장 바꿔요. 주책바가지!

마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얼굴로 말하는 재주를 가진 거야? 그럴 리가. 아마도 내가 생각해도 찔려서 그런 거겠지.

나는 디아나를 보며 씩 웃었다. 뭐 벌써 한 말인데 어쩌라고. 푼수를 떨기는 했지만 새해의 시작이 또 이렇게 바쁘게 지나가는 건 더할 수 없이 좋다. 그렇게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한쪽에서 디아나와 함께 잠깐 따로 얼굴을 마주했다.

“디아나,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뭐. 당신만 주책 떨지 않으면 괜찮거든요.”

꼭 찔러서 한마디 하는 디아나에게 다시 웃어주며 내가 물었다.

“먹는 걸 못 봤네? 왜 안 먹는 거야?”

“사람 너무 많아서 그런지 먹을 건 잘 안 들어가요.”

음료만 몇 잔 마신 디아나. 아직도 사람들 많은 곳에 있으면 긴장하는 그녀가 안쓰럽다. 다들 편한 마음으로 대해도 될 사람들인데도 디아나는 사람들을 어려워한다. 물론 그 점이 더 착하지만 말이다.

나는 그녀 앞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연어 샐러드를 가져다주었다.

“이거라도 좀 먹든가.”

그런데 빨간 연어를 보니 장난치고 싶다.

“이거, 야들야들하고 보들보들하고 빨간 게 속살처럼 맛있겠다. 음. 먹고 싶다.”

은근하게 말하면서 디아나를 바짝 끌어안고 슬쩍 탱탱한 엉덩이를 쓰다듬자 디아나가 인상을 쓴다.

“그거 완전히 성희롱에 드는 말인 거 알아요?”

“음. 알아. 다른데 나가서 하다가는 그대로 잡혀갈 거 같아서 디아나한테만 하는 거야. 아내에게 하는 건 괜찮겠지? 너무 맛있겠다.”

길게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자 디아나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아니 애가 둘인데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 참. 이래서 더 디아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아래가 터질 것 같다.

“디아나.”

내가 심각한 얼굴로 부르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네?”

“큰일 났어. 못 걷겠어.”

“왜요? 어디 불편해요?”

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바지 앞에 대었다. 물론 음식 테이블이 가려서 남들은 알 수가 없다.

“미쳤어요?”

“응. 안 되겠다.”

나는 디아나 손을 끌고 휴게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렇게 바짝 긴장해 있는 그녀는 세비야 성의 파티에서 본 그때처럼 싱그럽다.

“뭐하게요?”

“키스.”

나는 말과 함께 그대로 입술을 겹치며 볼레로를 벗기고 어깨끈을 내렸다. 캡이 달린 드레스가 내려오며 그녀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다.

“라울. 그냥 집에 가서 해요.”

“아니, 지금이 좋아. 딱.”

나는 끝까지 갈 생각이 없었지만 놀란 토끼 같은 디아나가 좋아 그대로 입술을 물었다. 젖꼭지가 바짝 곤두선 그녀는 너무 선정적이다. 그대로 폭 좁은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는 다리 사이를 꽉 움켜쥐었다.

탁탁 내 어깨를 치는 디아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버둥거렸는데 얇은 실크 팬티는 이미 젖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민감한 돌기를 그대로 눌렀다.

“흐윽…… 라울!”

진짜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붉은 입술을 벌리고 있는 디아나는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다시 입술을 겹치고 한 손은 젖꼭지를 비틀며 다른 손은 다리 사이 젖어 든 골짜기 깊이 밀어 넣었다.

진짜 이러다가는 바로 위층 호텔룸으로 가야 할 거 같다. 미끈거리는 속살을 비비다가 민감한 살점을 비틀자 키스하는 중에도 신음이 터진다. 나는 참을 수 없어 바로 몸을 떼고 말했다.

“룸으로 올라가자.”

딱 그렇게 말하며 옷을 추스르는데 그때 디아나가 들고 있는 클러치백에서 계속 진동음이 들렸다.

“이거 계속 울리는 거 같던데.”

“그러게요. 전화 올 데 별로 없는데.”

디아나가 클러치 백을 열었다. 전화가 열 통도 넘게 와있다.

“이거 사라한테서 온 전환데? 전부다?”

사라 윤이라고 적힌 부재중 전화가 수북한 걸 보며 나는 디아나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은 디아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은 느낌?

“사라? 태성이 가정교사? 빨리 받아 봐.”

내 말에 바로 디아나가 전화를 받았다.

- 사모님, 지금 여기 응급실로 가고 있어요. 일이 좀 생겨서. 저기…… 큰일이.

“네? 누가 다쳤어요? 응급실은 왜?”

그렇게 전화를 하던 디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목소리도 바람에 종잇장이 파닥거리듯이 떨리고 있다. 옆에서 보는 내 가슴도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디아나의 다음 말소리에 가슴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태성이가요? 태성이가 왜요?”

- 루벤이 2층 창에서 떨어져서 지금 응급실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흑. 죄송해요. 사모님.

사라의 우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지금 갈게요. 지금 바로 갈게요. 라울 나 가봐야 해.”

정신없이 나가려고 하는 디아나의 손을 내가 잡았다. 루벤이 다친 거 같다.

“디아나. 같이 가자.”

나를 보는 디아나의 눈이 마구 흔들린다. 디아나가 덜덜 떨며 말했다.

“태성이가 2층에서 떨어졌대요.”

말하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젖어 들며 눈물이 뚝 떨어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작은 애가 2층에서 떨어지다니. 뭔가 잘못됐다. 분명 아닐 거다. 하지만 일단 흰 종이에 떨어진 먹물처럼 한 번 들은 말은 새카맣게 속을 태우며 번지고 있었다.

연회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디아나의 손을 꼭 잡고 나가며 윤 이사에게 말했다.

“집안에 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님이 마무리를 좀 해주세요.”

“예, 회장님.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얗게 질려있는 디아나의 얼굴과 다급한 내 목소리 때문인지 윤 이사는 두말도 하지 않고 얼른 가라고 인사를 한다.

“무슨 일인지 꼭 연락 주십시오, 회장님.”

가슴이 철렁한다는 게 이런 말일까. 어쩌면 이렇게 한심스러운 일이 있는지. 애를 돌보던 사람들이 몇인데 애가 2층에서 떨어진단 말인가. 그 2층이 애가 떨어질 2층이 아니었다. 그리고 2층이라곤 하지만 거의 미니 3층이어서 그 높이도 엄청나다.

거기서 떨어졌다면 살 수는 있는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옆에 있는 디아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당장에라도 죽을 듯이 질려있다.

“괜찮을 거야.”

나는 대책 없이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과 꼭 그렇게 괜찮아야 한다는 마음에 확신처럼 한 말이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파랗게 질려서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요? 태성이가 거기서 떨어졌다는데. 2층 난간에서. 왜 거기를 간 거지?”

MK 병원까지 가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디아나를 끌다시피 하며 응급실로 도착했다.

응급실 한쪽에 따로 칸막이가 쳐져 있고 태성의 가정교사 사라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다급하게 디아나와 내가 동시에 물었다. 사라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보는 나는 답답해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점점 인상이 험악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미 내가 들어설 때부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과와 외과, 흉부외과 과장이 각자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고는 그중에 외과 과장이 대표로 말했다.

“회장님, 지금 아드님께서는 전체 X-ray와 CT를 찍고 있는 중입니다. 환자는 조금 있으면 다시 이리로 올 겁니다. 이쪽에 앉으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앞에 있는 사라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당신 뭐 한 거야? 애를 어떻게 봤길래 2층에서 떨어져!”

그러나 디아나가 나를 말렸다. 디아나는 내 손을 꽉 잡고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에 서린 두려움과 아무 말 말라는 간절함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디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울, 나중에 해요. 그건. 지금은 우선 어떻게 됐는지 얘기부터 듣고…… 우리 태성이가 괜찮은지 그것부터…….”

우리 둘의 대화에 사라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덜덜 떨며 말했다.

“2층 응접실에서 같이 색칠놀이를 하다가 간식 가지러 잠깐 내려갔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올라와 보니 발코니 문이 열려있고, 태성이는 없고…… 아래를 보니 태성이가 커다란 쿠션을 잡고 울고 있었어요. 정신없이 바로 데리고 병원으로 오는데…….”

“도대체 왜 그랬대 그놈은.”

“그게 아직…… 말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라 윤이 흐느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도 거의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있을 때 바로 간호사가 태성이를 데리고 왔다. 태성이는 놀란 얼굴이기는 했지만 멀쩡해 보인다. 오히려. 우리를 보더니 엄마, 아빠 하고 부른다.

“태성아!”

디아나가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잠시 태성이를 바라보다가 의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게 지금으로는 찰과상 정도 외에 다른 소견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CT 이상도 없고 X-ray 이상도 없습니다. 하루 정도 경과 지켜보면서 토하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별 이상 없는 걸로 보이는데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아무 이상 없어 보인다고? 말을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2층에서 떨어졌는데 이렇게 멀쩡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습니까?”

내 말에 의사는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그게…… 커다란 쿠션을 안고 그대로 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쿠션 채로 바닥에 닿아서 놀라기는 했지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안정제는 한 대 처방했습니다. 놀랐으니까 주사 맞고 오늘 하루 잘 지내고 내일까지 봐서 이상 없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이 키우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건가?

너무 가슴이 떨려서 말도 안 나온다. 일단 하루를 지켜보기 위해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나와 디아나가 태성이 옆에서 주의 깊게 애를 관찰했다. 혹시라도 어디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심장이 바짝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하지만 태성이는 밥도 잘 먹고 과일에 아이스크림까지 먹고는 장난감을 들고 논다. 나는 태성이에게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태성아, 거기 위험한데 왜 그랬어. 뭐 때문에 쿠션 가지고 난간으로 간 거야?”

평소 어른스럽다 못해 능구렁이같이 똑똑했던 걸 생각하면 뭔가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게 뭘까? 그런데 대답은 의외였다.

“팽이 주우러.”

“팽이?”

“팽이가 나뭇가지에 걸렸어.”

도무지 무슨 말인지. 팽이가 나뭇가지에 걸렸는데 그걸 주우려다가 떨어졌다고? 그럼 쿠션은 다 뭐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똘똘해 보이는 놈인데도 역시 이제 막 네 살이 맞는 거야?

그날 밤을 조마조마하며 병실에서 태성이를 지켜보았으나 다행히 태성이는 편안하게 잠을 잘 잤다. 다음날 오전 중으로 의사의 회진이 한 번 더 있었으나 아무 소견이 없다고 퇴원해도 된다는 말에 다시 집으로 왔다.

나는 태성이가 떨어진 2층 난간에 꼼꼼히 보다가 태성이가 말한 팽이를 발견했다. 단풍나무에 걸린 노란 팽이. 태성이가 한참 잘 가지고 노는 팽이였다.

이게 저 나뭇가지에 걸렸다고? 그래서 저 긴 쿠션을 놓고 주우려고 했다고?

하, 참. 맹랑한 일이었다. 나뭇가지에 가지고 놀던 팽이가 걸려있자 그걸 줍겠다고 2인용의 기다란 쿠션을 난간에 걸쳐놓고 그 위에 올라선 거다.

쿠션하고 같이 떨어졌으니 망정이지. 세상에. 똘똘한 체는 혼자 다 하더니 역시 아기는 아기였다.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태성이 깔깔거리며 잔디밭에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이러면서 늙는다는 말이 딱 맞다. 너무 놀라서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어버린 거 같다. 태성이가 노는 옆에 디아나가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다. 디아나는 또 얼마나 놀랐을지.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 절실하게 지키고 싶은 사람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없던 것들이 많이 생긴다.

그전에는 그냥 내가 가진 것들, 그런 것들을 더 늘려가고 지키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내 한 몸, 내 좋은 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디아나를 처음 만난 이후로도 그녀를 갖고 싶어서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단순히 갖고 싶은 것, 내 맘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들, 지키고 싶은 것들, 내 손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이 생긴다. 이전과 달라지는 내 모습이 어떤 때는 낯설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놀고 있는 태성과 디아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도 햇빛 속으로 나아갔다.

“자 태성아. 같이 하자.”

공을 가지고 뛰어가 태성이에게 공을 던져주고 신나게 소리치자 태성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 공놀이가 그렇게 좋아? 그럼 내가 같이해줄게.”

“짜식은 2층에서도 떨어지는 주제에 꼭 어른 같은 소리만 하고 있어.”

* * *

구윤주의 간 이식 수술이 잘 진행되었다. 혜정의 간 일부를 떼어 구윤주에게 이식하였고 둘 다 무균실에서 한동안을 지내고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둘이 입원해 있는 동안 남달호는 매일같이 와서 둘을 보살피고 병간호를 한다.

“뭐야? 일수 찍으러 안 다녀, 이제?”

살 만해진 구윤주가 남달호를 보고 말하자 남달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 일수 안 찍어요. 좀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고향에 뭐가 있는데? 먹고살 만한 거라도 있어?”

구윤주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앞으로 살길이 막막한 구윤주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든 비빌 언덕이라도 있는 사람이 부러워서 물어 본 거다. 남달호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님이 농사지으시고 어머님이 순댓국집 하세요. 그래도 순댓국집을 한 지 20년 넘어서 나름 요즘 점점 바빠지고 있다고요. 가서 일도 도울 겸 이제 서울생활 청산하려고요.”

“생각 잘했네. 맨날 일수 찍고 건달 짓이나 하고 돌아다녀 봐야 뭐 얼마나 벌겠어? 괜히 시간만 지나가지.”

구윤주의 말에 옆에서 혜정은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그러면 그 순댓국집도 맛집으로 유명해지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네?”

혜정이 말에 남달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가서 열심히 하면. 어머니가 내려가면 잘 가르쳐 준다고 했어.”

“좋겠다. 그래도 의지할 데는 있네.”

혜정의 한마디에 옆에서 구윤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순댓국집 하는 엄마가 부러울 만큼 그런 처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혜정의 엄마라고는 하지만 혜정에게 비빌 언덕도 되어주지 못한다. 비빌 언덕이 되어주기는커녕 이렇게 간 이식수술까지 받았으니 딸한테 면목이 없다.

전에는 딸을 성진그룹에 보내서라도 팔자를 한번 고쳐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이제 다 죽다 살아나고 나니 그런 거 저런 거 다 필요 없다. 더욱이 딸 전과자까지 만들고 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이제는 남은 인생 혜정이하고 밥이라도 먹고 살고 저거 시집가는 거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병원에 모녀가 쌍으로 환자복 입고 큰 수술까지 한 형편이니 말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남달호가 구윤주를 보며 조금 어렵게 한마디를 꺼낸다.

“저기, 저하고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누구? 나?”

구윤주가 침대에 앉아 있다가 상체를 남달호 쪽으로 내밀며 눈이 커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바라보자 남달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당당하게 말한다.

“네. 혜정이랑 같이요.”

“우리 둘이 자네를 따라간다고?”

구윤주는 무슨 말인가 하면서도 좋아서 얼굴이 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혜정이 눈치를 보게 된다. 지금 이 말이 혜정이가 간다고 해야 뭐가 되도 되는 말이지 싶어서 바라보았지만 혜정은 발딱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이야? 얼렁뚱땅. 내가 왜 시골에 가?”

뜬금없는 소리라는 표를 팍팍 내면서 내가 왜 시골에 가냐는 혜정의 말에 남달호는 살짝 기가 죽는다. 마르티나니 스페인이니 남달호가 볼 때는 허영기 있는 말들을 하는 화려한 혜정이 시골에 따라간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녀가 다 아프고 일도 할 수 없고, 돈도 없는데 그냥 서울에 두고 가고 싶지가 않다. 아니 혜정을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싫다. 한번 부딪쳐 보는 셈 치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다.

남달호는 힘을 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둘 다 몸도 아프고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내가 보살펴주겠다고. 그리고 괜찮으면 결혼해서 그냥 시골에서 순댓국집 하면서 살면 어떨까? 어머니한테 가게 운영하는 법도 배우고.”

남달호의 말에 혜정은 가슴이 두근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청혼이다. 그러고 보니 좋아한다, 같이 자자고 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결혼하자고 한 남자는 남달호가 처음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반사적으로 튕기는 말이 먼저 나온다.

“싫어. 촌스럽게 순댓국이 다 뭐야?”

그러자 바로 구윤주가 혜정을 노려보았다.

“하여튼 저건. 지금 촌스러운 게 문제야? 어디 의지할 데도 없는데? 그리고 순댓국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넌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했잖아.”

옆에서 구윤주가 한마디 하자 혜정이 입을 꾹 다문다. 혜정이 입을 다물자 구윤주가 털썩 힘을 빼며 처량하게 말했다.

“나, 지쳤다. 서울생활. 차라리 스페인에서 민박집 할 때가 훨씬 나았어. 그때가 속은 편했던 거 같은데. 넌 여기가 그렇게 좋아? 이 고생을 하고?”

구윤주의 한마디에 혜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겹다. 늘 화려한 걸 쫓아다녔는데 화려한 건 손에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았다.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물건이 쌓이고 쇼핑을 하고 남자들과 놀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허한 게 채워졌던 적도 없는 거 같다.

하지만 순댓국집이라니! 정말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남달호가 달래듯 말한다.

“뭐, 꼭 당장 결혼을 하자는 건 아니야. 일단 아픈 두 사람만 이 서울에 두고 내려가기가 그래서 그래. 그래도 여기보다는 시골이 방 얻기도 더 싸고 그러니까.

한번 같이 가서 있어 보면 어떨까 하고. 나도 혼자 내려가기도 그렇고…….”

남달호의 말에 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구윤주가 한마디 더 했다.

“염치는 없지만 그럴 수 있다면 같이 가고 싶네. 서울엔 아는 사람도 없고 맨날 행상한다고 나가 있어 봤자 가슴만 답답하고. 혜정아, 우리 같이 가자. 응?”

구윤주가 조르듯 말하자 혜정이 엄마를 보고 점점 마음이 움직인다. 사실 엄마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게다가 남달호는 유일하게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매일 일수 찍으라고 하면서도 안아주고 일수도 대신 갚아 주었다.

“엄마가 그러면 나도 좋아.”

그러자 옆에서 남달호가 좋아서 활짝 웃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같이 간다고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정말 같이 가는 거야?”

“그래 뭐. 일단 가보고 지낼만한지 보지 뭐. 몸이 이래서 바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간 이식수술을 했기 때문에 혜정도 이전과 다르다. 그리고 죽다 살아나면서 느낀 게 있다. 엄마라도 꼭 옆에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 전에는 돈만 있으면, 화려하게 살 수만 있으면 식구들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혜정은 맨날 잔소리만 하는 엄마 같은 건 떼놓고 살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이 세상에 달랑 엄마뿐이라는 걸 알게 됐고, 매일 일수 찍는다고 하면서 저 대신 돈을 갚아줬던 남달호가 고마웠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게 찾고 싶었던 화려함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수술을 하고 마취에 깨어나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엄마와 함께 따뜻한 방에 같이 있고 싶다는 거였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면 그게 제일 행복할 거 같다는 그런 생각.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윤주가 말한다.

“그런데 우리 병원비 다 디아나가 냈다며. 우리라면 이가 갈릴 텐데 어떻게 병원비를 다 대줬나? 참 이상하다. 나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돈 많으니까 해줄 수도 있었겠지. 디아나 엄청 부자잖아. 내가 고맙다고 인사는 했어.”

혜정의 말에 구윤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맙다. 염치없다는 말이 딱 맞다.

“부자라고는 해도 우리가 한 일이 있는데…… 그런데 고마운 건 고마워도 나도 걔 앞에 다시 나타날 면목은 없다.”

“그래. 나타나지 말자. 엄마. 우리가 안 나타나는 게 도와주는 걸 거야.”

구윤주도 혜정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서로 만나봐야 뭐 좋겠다고. 이상하게 남 잘사는 것만 보면 부럽고 배 아프고, 하여간 제가 생각해도 심보가 못됐다는 걸 안다.

“그래. 걔는 걔대로 사는 거고 우린 우리대로 사는 거지. 스페인에서 혜원이 언니가 우리 보살펴준 것만 해도 고마운 거야. 그런데 디아나한테까지 신세를 졌으니 그저 우리가 고맙다 표현하는 거는 다시는 걔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밖에 없겠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 해야 될 텐데.”

“내가 할게. 내가 전화로 하면 돼. 내가 걔한테 잘못한 거 많이 있으니까 내가 할게. 엄마.”

“그래.”

혜정과 구윤주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퇴원을 하고 남달호의 고향인 충청도로 함께 내려갔다.

윤주 이모와 혜정이가 충청도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비서를 통해서였다. 수술비를 다 해결하고 어느 정도 생활할 만큼의 현금을 보냈더니 남달호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왔다.

- 이랑아 정말 고마웠어. 엄마하고 나하고 이렇게 편지라도 남겨야 너에게 마음을 표시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전화보다는 편지를 쓴다.

스페인에서부터 늘 니가 부러웠어. 어머니하고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공부 잘했던 것도, 나보다 더 예뻤던 것도 부러웠던 적이 많아. 그런데 그때부터 나 삐뚤어졌었나 봐. 부러운 것만 생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좋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사실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도 열심히 안 한 거 보면 말이야.

혜원 아줌마가 엄마하고 나한테 참 잘해줬는데 우리가 은혜를 참 원수로 갚았지? 그래도 니가 모든 자리를 제대로 찾아 잘살고 있어서 지금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니가 가진 건 나도 다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죽다 살아나니까 그런저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드네.

나 충청도로 가. 앞으로는 또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의지할 수 있는 남자 따라서 가게 됐어. 이번에는 나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네.

고맙다 이랑아.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 나도 그렇게 행복하게 살게. 서로 다시 얼굴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각자 행복하자. 정말 고마웠어. 우리 엄마도 그렇게 전해 달래.

안녕. -

나는 혜정이가 보낸 편지를 여러 번을 읽고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맺힌 것보다는 풀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관계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조금 더 손해 보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기왕이면 그 손해 보는 걸 내가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해 본 만큼 마음은 더 넉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태성이가 2층에서 떨어지고 집안이 난리가 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다행이 별일 없이 태성이는 멀쩡했고 여전히 라울과 묘한 경쟁을 하며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행복하다.

가연이도 낮잠을 자고 태성이는 어린이집에 가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에서 테이블 웨어와 꽃꽂이 사진들을 보며 있을 때였다.

“사모님, 저 이거요.”

태성의 가정교사 사라 윤이 내미는 봉투에 이게 뭔가 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요?”

“사직서예요. 루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사고가 났으니 제가 책임을 져야죠. 루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되고 난 후에 드리려고 기다렸어요. 그동안 너무 잘해주셨고, 저도 루벤 돌보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깍듯하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라에게 나는 더 이상의 말을 중단시켰다. 태성이 때문에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게 꼭 사라의 잘못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잠깐만요. 그렇게 마지막 작별 인사 같은 말은 일단 하지 말아요. 사라.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난 아무 말 안 했어요.”

사실 당황했다. 태성이 일이 그렇게 있었지만 그걸 가지고 가정교사를 문책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돌발적인 상황이었고 태성이는 엉뚱한 네 살짜리 남자아이니까.

물론 그때 라울이 가정교사를 향해서 소리쳤던 건 기억한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봤길래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때 사라 윤이 얼마나 당황하며 울었는지 기억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능한 가정교사를 이런 일 때문에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사라의 생각을 존중해요. 하지만 저희도 의논을 해볼게요.”

그리고 그 사직서를 가지고 그날 밤에 라울하고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이 사직서를 냈어요.”

라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런 라울의 반응이 싫었다. 사라가 얼마나 유능한 선생님인지 말하고 싶었다.

“라울,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당신 그런 반응은 사라가 그만두는 게 당연하다는 거 같아요.”

“맞아. 당연한 일이잖아.”

라울은 못 본 드라마를 보겠다고 VOD를 돌리며 담담하게 말한다. 아니 사람을 자르는 게 그렇게 쉬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라울이 얄밉다.

“라울, 그런데 나는 이런 선생님 또 찾기 어려울 거 같아. 어디서 이렇게 완벽하게 영어와 스페인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쉽겠어요? 게다가 성품도 좋고 무엇보다 태성이한테 잘하잖아요. 정확하게 야단칠 땐 야단치고 시간도 잘 지키고.”

그런데도 라울은 아무 말이 없다. 못 본 드라마를 찾아서 보기 시작하는 그는 내 말은 잘 듣지도 않는 거 같다.

“라울,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회사라면 이건 당연히 사직서를 낼 만한 일이야. 그런데 지금 디아나가 그렇게 말해서 고민하고 있는 거야. 태성이에게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보는 중이라고.”

“당신이 생각할 땐 그게 전적으로 선생님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요? 태성이는 개구쟁이 남자아이라고요.”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할 수 있지만, 잠시라도 혼자 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사실이지.”

라울의 말도 맞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일을 미리 알 수 있겠어?

“어떻게 애를 잠시도 눈에 안 떼요. 그렇게 키울 순 없지. 누구라도 말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라울이 나를 보고 말했다.

“디아나가 생각해서 좋도록 해. 내 생각엔 사직서를 받는 것도, 그대로 그 선생을 두는 것도 둘 다 나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 결정에 맡기겠다고.”

“그럼 난 잡고 싶어요, 같이 태성이 잘 키우고 싶다고요.”

“아! 저런. 결국 저 여자의 출생의 비밀이 저거였어? 친아빠가 따로 있다고?”

라울이 드라마에 몰입해서 하는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지나간 아침 드라마를 저녁에 보다니! 스페인의 라울 까스틸로 성주가 아침 드라마를 챙겨보는 걸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질 거다.

하여간 대한민국 아침 드라마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휴일에 한 번 보고는 저렇게 빠져드니 말이다. 어찌됐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다시 사라 윤을 잡았다.

“사라. 사고는 사고였어요.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더 조심하면 될 거 같아요. 물론 선생님도 그렇게 해주시겠죠?”

“미안해서 어떻게 있을 수 있을지…….”

사라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걱정하고 힘들어했는지는 내가 잘 안다. 참 마음씨도 고운 사라였다.

“놀란 건 다 마찬가지잖아요. 그때 선생님도 많이 울었고. 일단 태성이가 무사하잖아요.”

아마 나만큼이나 놀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사라 윤은 우리 집안의 식구처럼 그렇게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또 일 년 반이 지나면서 태성이는 다섯 살, 그리고 가연이는 세 살이 되었다. 라울은 MK 자동차의 신차 출시와 외국계 보험사와의 기업 합병과 같은 큰일들이 지난 뒤 한동안은 스페인에서 지내자고 했다.

한동안 회사일 때문에 애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게 바빴던 라울이었기에 나는 라울이 스페인으로 가자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 모두가 꿈에 부풀어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세베로는 라울이 온다는 말에 새로 승마장 울타리를 대폭 늘렸고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작은 놀이터도 만들어 놓았다. 라울은 아이들이 이 정도 컸으면 스페인에서 한동안 있다가 돌아가도 좋을 거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페인에서는 라울이 조금 더 가족과 있을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라울과 아이들과 함께 피크닉을 가거나 하는 건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라울은 바빴다.

우리 가족의 스페인 행에 태성의 가정교사인 사라 윤도 동행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우리 식구같이 되어버렸다. 키가 크고 몸이 깡마른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사라는 정해진 것을 딱딱 지키며 아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좋은 선생님이면서 유머감각도 있어서 태성이도 좋아했다. 덕분에 태성이는 그렇지 않아도 말을 잘하는 애가 하루가 다르게 말을 더 잘하게 됐고, 그것 때문에 라울하고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물론 태성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라울은 이전처럼 태성이를 어른같이 대하지는 않는다. 그때 그 2층에서 떨어진 일 이후로는 말이다. 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걸 그때 확실히 느낀 라울이었으니까.

세비야 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훌륭해 보인다. 들어가는 입구에 오렌지 나무도 가지런하게 정렬돼 있었고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서 있는 현관 앞 분수대도 우리가 온다고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라울 여기는 너무 멋져요. 안 그러니 루벤?”

“좋아요. 엄마.”

우리 둘의 대화에 라울이 바로 끼어들었다.

“그치, 루벤? 여기는 정말 멋지지? 너 어릴 때 한번 왔었는데 기억이 안 나지?”

태성이 돌 지나서 왔었다. 그때는 둘째 가연이를 임신했을 때이기도 하고. 너무 어려서 태성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여기서 말도 탈 수 있는데?”

라울이 말하자 태성이 신이 나서 라울에게 달라붙는다.

“정말? 아빠. 나 말 탈 거야.”

태성이는 한껏 들떠 있었다. 라울은 가연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기분이 좋아서 밖을 내다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오렌지 나뭇잎을 흔들며 싱그러운 향기를 실어다 준다. 오픈카를 타고 가기 딱 좋은 길이었다. 차가 현관 앞에 도착하자 세베로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세뇨라, 주인님. 이제 두 아이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드디어 완전한 가정을 이루셨네요. 그런데…….”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던 세베로의 얼굴이 갑자기 어둡게 굳어져 버렸다. 분명히 사라를 보고 얼굴이 굳어진 게 분명하다. 무슨 일일까?

세베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를 대해도 당황하는 일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베로를 만난 이후로 세베로가 이렇게 사람 앞에서 부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건 앞에 있는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사라는 파리한 얼굴로 하얀 대리석 석상처럼 그렇게 굳은 채 서서 세베로를 보고 있었다. 둘의 얼굴이 하도 이상해서 나는 어색한 공기를 뚫고 목소리를 냈다.

“혹시 두 분이 아는 사이에요?”

“네.”

“아니요.”

동시에 세베로와 사라의 목소리가 울린다. 사라는 아니라고 세베로는 안다고 대답하는 게 분명하다면 둘은 알고는 있지만 사라가 안는 척 하고 싶지 않은 사이라는 거다. 대체 무슨 사이일까?

그러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우리 모두를 내리눌렀다. 그러다 바로 세베로가 평상시처럼 표정을 정리하고 물었다.

“세뇨라, 여기 이 세뇨리따는 누구시죠?”

사라를 보고 묻는 세베로에게 사라 윤이 아주 공식적이고 딱딱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루벤의 가정교사, 사라 윤이에요.”

사라 윤은 세베로가 스페인으로 가고 난 뒤에 채용했기 때문에 둘은 처음 만났다.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그러나 둘은 분명 안면이 있어 보인다. 세베로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사라 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주인님과 세뇨라는 주인님의 방을 쓰시면 되고, 우리 예쁜 이네스 공주님은 녹색의 방 옆쪽에 따로 방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방을 사라 윤이 쓰면 되겠군요.”

세베로의 말에 라울이 고개를 저었다.

“방은 둘째 치고 식사가 급해. 너무 배가 고프거든.”

“그것도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손 씻고 이리로 오시죠.”

역시 세베로는 척척 어느 것 하나 준비해 놓지 않은 게 없었다. 식탁으로 들어서자 태성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태성이가 좋아하는 핫도그에 프렌치프라이까지 잔뜩 놓였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편식하지 않도록 일주일에 몇 번씩만 주는 핫도그였다.

“세베로, 루벤의 식성까지 잘 알아두었군.”

“물론입니다. 아직 모르는 건 우리 이네스 공주님의 식성이죠. 물론 우리 사라양의 식성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세베로가 사라를 보며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길이 마주치는 걸 보며 나는 어쩐지 둘의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뭔가 둘 사이에 사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연이가 쌩끗 웃는다. 쪼끄만 하얀 이가 고르게 보이며 웃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가 않다. 세베로는 가연이를 번쩍 들어 안아 하이체어에 앉히고 가연이 앞으로 부드러운 토마토소스 마카로니와 계란찜을 놓아주었다.

“이런 건 어떨지요?”

다정하고 재미있는 세베로. 나는 새삼 세베로의 배려에 미소를 지었다. 세베로가 없었다면 라울과 결혼했을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가연이가 다 잘 먹는 거예요. 고마워요. 세베로.”

세베로가 내 의자를 빼주며 인사했다. 그의 조금은 과장된 몸짓은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도 세베로의 눈길이 한 번씩 사라에게 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사라는 단 한 번도 세베로의 눈길에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세베로는 평소처럼 우리를 대했다.

“그런데 세뇨라,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라곤 도저히 믿지 못하겠는데요?”

그런데 이런 세베로의 말에 꼭 초를 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라울이다.

“자꾸 그렇게 헛말 하지 마, 세베로. 사람은 나이가 들기 마련이야. 이제 디아나도 스물여덟이나 됐다고.”

“그러니까요. 아직도 이십 대인 걸요. 주인님과는 차이가 나지요. 삼십 대와 이십 대는 아주 큰 차이지요. 세뇨라가 앞으로 있을 마드리드 궁의 무도회에 간다면 모두가 춤을 청할 걸요?”

세베로의 말에 라울이 눈썹을 올렸다.

삼십대와 이십 대의 차이라? 뭐야? 지금 나는 나이 들었다는 거야? 디아나만 젊고 예쁘다고 하는 말이야?

하긴 요즘 사업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다크서클이 턱까지 늘어진 거 같다. 이러다 정말 디아나하고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야?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런데 디아나는 무도회라는 말에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세베로, 마드리드의 무도회라니요? 설마…… 왕궁의 무도회를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세베로는 참 잘도 대답한다. 뭐 이 집안의 주인이 나야? 세베로야?

“초청장이 왔습니다. 마드리드 궁에서 있는 이번 무도회에 까스틸로 가문에서 꼭 오셨으면 하는 초청장이죠. 국왕의 직인이 이렇게 찍혀 있습니다.”

하며 세베로는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정말 대단해요. 국왕이 초청했다니요.”

옆에 있던 사라 윤의 말에 세베로의 눈길이 그녀에게 향했다. 세베로의 눈길이 조금 길게 머무는 걸 느낀 건 아마도 나뿐일 거다. 평소 세베로가 여자들에게 대하는 걸 가장 많이 본 사람도 나니까.

물론 늘씬하고 우아한 사라 윤의 모습이 딱 세베로의 이상형이라는 걸 나는 아니까 말이다. 사실 17년 전에 죽은 세베로의 부인도 딱 사라 같은 타입이었다. 세베로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까스틸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았으니 말이다.

엄마 이사벨이 여러 번 말했다. 세베로가 아내를 잃고 정말 죽을 거 같아서 걱정했다고 말이다. 그런 세베로가 사라에게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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