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
3.
혜정이가 그때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는 건 알고 있다. 서울에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를 통해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쯤이면 나왔을 텐데 그 애는 뭘 하고 있을까?
이십 대 후반, 그러나 학벌도 없고 전과자가 된 혜정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텐데…… 아, 다 잊어버리자. 내가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해? 그러나 윤주 이모의 모습이 무겁게 머릿속에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자선 파티에는 사모님들이 가지고 온 간단한 물건들이 있었다. 물론 밑에 사람들에게 시키기도 하고 한 것이지만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준비해 온 것이었다. 나는 아마릴리스 부케와 쿠키를 내놓았다.
쿠키는 아는 분께 부탁하여 구운 거고 아마릴리스 부케는 세베로의 도움을 받아 직접 만들었다. 세베로는 얼마 전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가연이가 조금 더 크면 함께 와서 지낼 수 있게 성을 수리하고 있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아마릴리스도 가득 심어놓겠다고 했다.
세비아의 성에서 피어있던 그 아마릴리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나처럼 이 아마릴리스를 보며 행복한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바자회 물건들 중에 쿠키와 아마릴리스 부케가 가장 먼저 떨어졌다. 옆에서 사모님들이 한 말씀 하셨다.
“역시 젊은 사람 감각은 다른가 봐. 물건이 먼저 떨어지는 걸 보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사모님이 내신 물건도 너무 예쁜걸요.”
옆에 있는 제이그룹 사모님은 비단 복주머니에 사탕을 잔뜩 넣어서 판매하고 있었다. 알록달록 비단을 엮어 만든 것이라서 여간 예쁜 게 아니었다.
“아가씨, 벌써 다 팔았어요?”
규빈 오빠의 부인이 된 지한영도 성진그룹을 대표해서 바자회에 나와 작은 접시를 판매하고 있었다. 새언니는 직접 그림을 그린 접시를 판매했는데 독특한 그림 때문에 반응이 좋아 보였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가워요. 언니, 규빈 오빠도 요즘 잘 있죠?”
“그럼요.”
“창희는 어떻게 하고 나왔어요?”
규빈 오빠와 한영 언니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고, 이름이 임창희였다. 태성이보다 한 살 어려서 이제 겨우 돌이 지났다.
“아버님이 오늘 집에 계셔, 그래서 맡기고 나왔지. 그나저나 요즘 라울은 어떻게 지내는지 통 한남동에도 잘 안 오고. 큰아버님이 보고 싶어 하시던데. 큰아버님이 우리가 갈 때마다 종종 물어보시거든요. 아가씨는 좋아 보여요.”
“언니, 나도 요즘 한남동에 통 못 갔어요. 라울이 너무 바빠서 나도 집에만 있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곧 가봐야겠어요. 전화통화는 좀 했는데.”
아빠는 늘 한결같다. 아빠의 일생은 어찌 보면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젊으신 아빤데, 60대 중반의 건강한 분이니 지금이라도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셨으면 좋겠지만 아빠 앞에서는 그런 말은 꺼낼 수도 없다.
사랑 없던 긴 결혼생활 때문인지 아빠는 결혼이라는 것에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도우미들이 들어와 행사장을 정리하고, 또 한 쪽에 있는 음식들을 정리하고 하는데 언뜻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분명 혜정이었다. 혜정이가 왜 여기에 있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혜정이는 마드리드에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날씬하고 쾌활해 보이는 모습. 단지 얼굴이 조금 더 말라 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원래 화려한 생김새 때문인지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반가움보다는 두려움, 또 무슨 일에 엮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그대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냥 화장실 쪽으로 가려고 행사장을 나와 복도를 한참 걷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이제 완전히 사모님이 됐구나?”
그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혜정이라는 걸. 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자 혜정이 다가온다.
“야, 너 정말 세련돼졌다. 이제 사모님 티가 팍팍 나. 어쩌면 너랑 나랑 이렇게 차이가 크게 나게 됐는지 모르겠다. 마드리드 민박집에서는 너나 나나 고만고만했잖아.”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어쭙잖게 안부를 묻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혜정이의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할 수도 없었다.
분명 혜정이는 나를 대신해서 나인 척하고 아버지를 찾아갔었고 내 행세를 하며 지냈으니까.
그건 분명히 사기였고 나쁜 짓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혜정이가 성진그룹 딸로 한국에 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유치장에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지나간 일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불쾌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마드리드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일부러 이름을 부르며 쫓아온 혜정에 대한 그저 담담한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혜정은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부러움 가득한 얼굴로 말한다.
“정말 너무 비싸 보이는 옷이다. 그 털, 그거 여우 털이야? 정말 너무 멋지다.”
만나자마자 옷 이야기부터 하는 혜정이.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런 애였다. 있는 돈 다 털어서 옷 사고 화장품 사고 남자들 만나서 놀기 좋아했던 그녀였다. 옷 사느라고 돈을 꿔가서 갚지 않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면서도 그런 혜정이 안돼 보인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를 보자 혜정이가 계속 말한다.
“난. 여기 오늘 알바로 왔어. 나야 그렇지, 나는 일부러 이런 데만 쫓아다녀. 원래 내가 화려한 거 좋아했잖아. 너같이 화려한 남자라도 물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래. 혜정이는 원래 그랬으니까, 늘 화려한 걸 좋아하고 많은 걸 가지고 있는 남자를 만나기를 원했다.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났던 거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나와 라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기분 나쁘다.
“그래, 그러면 이제 화려한 곳에서 화려한 남자 만나게 되기를 바랄게. 난 너하고 더 이상 긴말을 하고 싶지 않아.”
간단히 인사하고 지나려고 하자 혜정이가 기분이 상했는지 갑자기 소리쳤다.
“왜, 나 같은 사람하고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니? 난 감옥에도 다녀왔어. 알지? 나 너한테 잘못한 거 죗값 치렀다고 생각해. 니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니? 난 사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인데 감옥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었잖아.”
참 어이없는 말이었다. 뭘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말귀를 알아들을지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난 작게 한숨을 쉬고는 혜정이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줌마가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넌 니가 행동했고 그렇게 나인 척 생활했잖아. 그리고 넌 나한테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니가 죗값을 치렀다고 하지만 니가 교도소에 갔던 건 마약 복용과 풍기 문란 때문인 걸로 아는데?”
그러자 혜정이가 달려들 듯이 얼굴을 쳐들며 말했다.
“넌 그렇게 많은 걸 가지고도 내 사과까지 받아야 해?”
“아니, 이제 다 필요 없어. 하지만 내가 무엇을 가진 것과는 상관없이 넌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에게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한테 잘못한 거니까.”
혜정이 잠시 풀죽은 듯이 주춤하더니 빠르게 말했다.
“그래, 원한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잘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니가 나 좀 봐주면 안 돼?”
“뭐?”
“나 좀 도와주면 안 되냐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어? 우리 엄마는 어떻게 사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도 윤주 이모가 행상하는 걸 보고 온 터였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날 이모와 혜정을 이렇게 마주치다니.
혜정이의 말이 가슴에 와서 딱 꽂힌다.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안다. 돈을 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그럴 관계는 절대 아니다.
“대체 뭘 도와달라는 거니?”
당연히 돈을 달라고 할 줄 알았다. 혜정이가 그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정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남자 좀 소개해 줘.”
“뭐?”
정말 이런 말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혜정이가 남자를 늘 찾아다녔던 것도 알고 있지만 이런 말을 나를 보자마자 하다니.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남자를 소개해 달라는 거야?”
“무슨 남자는? 니 주위에 있는 돈 많은 남자 말이야. 남편이 재벌이라며.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그러니까 주변에 남자들도 많을 거 아니야. 결혼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난 그냥 그런 남자한테 스폰이나 받으면…….”
“그만해, 혜정아.”
나는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서 말을 막았다. 내가 무슨 포주도 아니고, 어떻게 스폰서를 소개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상종하지 못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우리, 그냥 만나지 않은 걸로 하자. 너한테 그런 말까지 내가 들어야 하겠니? 그냥 서로 못 본 걸로 하자.”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 걸었다. 그러자 뒤에다 대고 혜정이 소리를 쳤다.
“고고한 척하지 마! 너도 마드리드에서 민박이나 하고, 알바하고 돌아다녔잖아. 나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 결혼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 하나 소개해 달라는데 그 정도도 해주기 싫다는 거야?”
걸어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스폰이라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혜정이가 크게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누구나 재주는 없어도 성실하게 일을 하면 남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만일 혜정이가 그런 걸 원했다면, 직장 같은 걸 알아봐 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혜정이는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은 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아니까. 엄마는 왜 저런 사람들하고 엮여서 나한테 그 인연을 물려준 걸까?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엄마는 그렇게까지 외롭고 고단했을까? 윤주 이모 같은 사람을 동생이라고 거둬주고, 혜정이의 학비를 대주고. 진짜 생각할수록 엄마가 답답하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착하게 살아서 내가 이렇게 복 받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접어두자.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집으로 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집으로 오는 중간에 다시 그 시장통 앞을 지나갔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다시 봐야 이미 지나간 인연이다. 또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모는 물론 혜정이가 그런 모습으로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본 것도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혜정은 이랑과 헤어진 뒤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너하고 나하고 다른 게 뭔데? 너나 나나 뭐가 그렇게 다를 게 있어서 너는 재벌 사모님이 되고 나는 이러고 있느냐고. 전과자 낙인까지 찍혀서 제대로 일도 구하지 못하고.
혜정의 마음속은 이랑과의 비교에서 올라오는 질투와 시샘만이 가득하고 있었다. 거울을 봐도 제 얼굴이 더 나은 것 같다.
내가 훨씬 화려하게 생겼는데. 가슴도 훨씬 더 풍만한데. 남자들도 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이랑이 저건 마드리드에서 인기도 별로 없었는데.
그러고 보면 이랑이 마드리드에서 남자하고 데이트하고 다니는 것도 별로 본 적이 없다. 늘 공부하고 알바하고 궁상맞게 민박집 일만 하는 그런 애였다.
내가 디아나보다 뭐가 못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밤길을 걸어가다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보인다. 남달호였다. 사채업자의 꼬봉. 매일 일수 찍으라고 쫓아다니는 덩치만 좋은 놈.
아니나 다를까 앞에 나타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늘 듣던 소리다.
“일수 갚는 날이야.”
“흥! 갚으면 될 거 아니야.”
혜정이 노려보자 남달호가 앞에 있는 허름한 모텔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턱을 그쪽으로 향했다. 혜정이 한숨을 쉬고는 바로 그가 가리킨 모텔로 들어섰다. 그렇게 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로 들어서자 혜정은 그대로 털썩 침대에 누워서 짧은 스커트 속 팬티만 밀어내 벗었다. 그리고 남달호를 보고 말했다.
“어서 해.”
그러나 남달호는 다른 날 같이 그저 달려들지 않고 침대 옆에 앉더니 가만히 혜정을 본다.
“뭐가 그리 급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내려 입술을 눌렀다. 다정하게 입술을 빨자 혜정이 한참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다가 말했다.
“뭐야? 갑자기 무슨 키스? 어서 볼일이나 봐.”
“내 마음이야. 어차피 일수 갚는 거잖아.”
남달호가 다시 키스하며 혜정의 웃옷을 벗기고 가슴을 베어 물었다. 젖꼭지를 깨물 듯 물고 빨자 혜정이 허리를 틀며 신음했다. 혜정의 신음소리를 듣자 남달호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혜정의 허리를 꽉 잡고 짧은 스커트를 위로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엉덩이에 얼굴을 박고 그녀가 달아오르도록 아래를 혀로 건드리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혜정이 엎드린 채 엉덩이를 흔들었으나 남달호는 떨어지지 않고 더 집요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허름한 모텔의 침대 위에서 혜정이 가쁜 숨을 쉬며 허리를 틀었다. 거칠게 부딪히는 남달호의 몸이 오늘 따라 버겁게 느껴지는 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남달호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혜정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아. 으음…….”
혜정이 신음하자 마음에 드는 듯 남달호가 그녀의 매끈한 배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몸으로 일수 갚는 거 하지 말고 돈으로 좀 갚아라, 돈으로. 물론 몸도 좋긴 하지만.”
남달호의 손이 혜정의 가는 허리를 휘감고 둘은 바로 뜨겁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몸짓이 이어진다. 끝까지 단단한 것을 뽑았다가 있는 힘을 주어서 쑥 밀어 넣는다.
“하악.”
혜정이 그 자극에 소리쳤으나 남달호는 골반을 꽉 틀어쥐고는 계속 몸을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혜정의 허벅지 안쪽이 달달 떨리고 절정의 자극에서 고개를 털며 비명을 지를 때쯤 남달호가 세게 몸을 밀어 넣었다가 순식간에 몸을 떼었다.
침대 위에 뿌려진 액체를 보며 혜정이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남달호는 지치지도 않는지 연거푸 두 번을 혜정 위에서 헐떡였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며 몸을 떼었다.
그러고는 혜정이 옆에 있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로 이어지는 담배연기에 혜정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매너 좀 지키면 안 돼? 일 끝나기가 무섭게 담배를 피다니. 몸에 담배 냄새 밴단 말이야.”
“왜? 뭐 어디 대단한 집안 아가씨 대우라도 해줘? 그러게 일수는 돈으로 갚아야지, 왜 몸으로 갚는다고 그래. 나도 본전은 빼야지.”
남달호가 두어 모금 담배를 빨더니 혜정을 생각해서인지 바로 담배를 끊다. 그런 남달호를 혜정이 가만히 보다가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그런데 자기 말이야. 이거 일수 받는 거 말고 흥신소 일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 뒷조사도 하고 스케줄 그런 것도 캐내고 하는 거 말이야.”
“돈이 되는 건 다 하는 거지 뭘. 왜? 누구 뒷조사할 거 있어?”
남달호의 말에 혜정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잘하면 돈 좀 만질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한데, 혹시 어떤 사람 스케줄 좀 알아봐 주면 안 되나?”
“어떤 사람?”
남달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동안 혜정이 돈이 될 만한 일이라고 한 것들 중에 제대로 돈이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 말고는 허영기 있고 뻥도 심한 그녀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건 그래도 불쌍하다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몸으로 일수 갚다가 정이라도 든 걸까?
남달호가 관심을 보이자 혜정이 발딱 일어나 앉으며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MK 그룹 회장.”
“뭐?”
남달호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치며 혜정을 쳐다본다. 장난을 쳐도 분수가 있지 MK 그룹 회장이라니 말이다.
“너 지금 MK 그룹 회장이라 그랬어?”
“응.”
“그 젊은 회장은 왜? 니가 그 사람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가 좀 꼬셔 보려고.”
“미친년. 그런 사람이 너 따위에 넘어가겠어?”
기가 막히니 욕이 먼저 나온다. 진짜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이런 밑바닥 인생이 누굴 꼬셔? 그런 남자는 배우도 모델도 박사 학위 가진 비서들도 어떻게든 한번 엮어보려는 남자다. 완전히 미쳤다는 듯이 쳐다보는 남달호를 보며 혜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뭐 어때서! 너도 지금 나 좋다고 이러는 거잖아.”
“물론 니가 괜찮긴 해.”
남달호가 그렇게 말하며 혜정의 몸을 쭉 훑어본다. 그러고 보니 어디 한구석 빠지는 데가 없다. 가슴도 풍만하고 허리도 가늘고 엉덩이며, 게다가 잠자리 스킬까지 죽여주니까.
“정말 꼬실 수 있겠어?”
“그럼. 나보다 훨씬 못한 여자가 지금 부인이야. 내가 그 아내를 아는데 학교 다닐 때도 내가 훨씬 더 인기 있었어. 걘 처녀 딱지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고. 알아? 잠깐이면 돼. 뭐 대단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한밑천 잡을 정도면 되는 거 아니야? 난 꼭 그 사람을 꼬셔야 되겠어.”
“도대체 왜?”
“그런 게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 못 하는 거.”
부셔버리고 싶다. 디아나 그 계집애가 나보다 잘사는 것도 배가 아프고 날 무시하듯 쳐다보던 그 눈에서 남편 뺏기고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우는 것도 보고 싶다.
라울을 유혹하겠다는 그런 생각에 혜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작정하면 뭐든 하겠다고 나서는 혜정의 성격을 아는 터라 남달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라니. 뭐 여자들 일인가 봐.”
“맞아. 여자들 일이야.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의 스케줄 알아볼 수 있겠어?”
워낙 높은 사람이라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물은 것인데, 의외로 남달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이게. 사람 우습게 보네. 내가 마음먹으면 뭘 못해? 스케줄 알아보는 정도야 별것 아니지. 차가 뭔지 알아내고, 우연히 한두 번 마주치게 해주면 되는 거 아냐?”
“맞아. 그거야. 내가 원하는 게 그거라고. 어떻게든 MK 진시환 회장하고 마주치게만 해줘. 그럼 어떻게든 꼬셔볼 테니까. 나도 이 지긋지긋한 생활 그만하고 싶어서 그래. 한밑천 잡으면 좀 떼어 줄 테니까. 그걸로 우리 빚은 청산하는 걸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마치 진시환 회장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한밑천 잡을 것처럼 말하는 혜정의 말에 남달호가 다시 코웃음을 친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가? 잘못하면 또 사기나 협박 이런 걸로 걸리기 십상이다.
이미 남달호는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혜정이 하겠다는 걸 굳이 말리고 싶지도 않다. 하고 싶다는 거 하면서 좋아하는 거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왠지 뭐라도 좋아하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남달호가 적당히 맞장구쳤다.
“나야 좋지. 빚만 갚으면. 물론 니 몸이 또 탐나긴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아쉽네. 오늘 일수 제대로 갚아야지?”
남달호가 다시 혜정의 위로 올라탔다. 조금 전 두 번의 정사로 젖어있는 아래에 깊이 손가락을 밀어 넣고 건드리자 혜정이 죽을 듯 소리친다.
“바로 넣어도 되겠네. 내가 그렇게 죽여줬나?”
“미친…….”
그러나 죽여주는 건 사실이다. 몸집이 얼마나 좋고 그게 큰지 아래가 꽉 차는 거 같다. 그리고 제일 좋은 건 거칠지 않다는 거다. 때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한다. 어떤 때는 남달호가 정말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절대 이자를 그냥 넘기지는 않는다. 지금도 땀을 흘리며 이자를 받겠다고 세 번째 정사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힘 있게 허리를 올려치자 다시 울렁거리는 너울 같은 절정이 찾아오고 있었다.
속살이 벌벌 떨릴 정도로 진한 쾌감이 몰려올 때 남달호가 제 남성을 빼더니 바로 혜정의 젖어 든 속살 바로 위 예민한 돌기를 입에 물었다.
“아아악!”
올라가고 있던 절정이 무지막지하게 휘몰아쳤다. 사채 이자를 갚지 못해서 사흘이 멀다 하고 몸으로 갚고 있는 혜정이었다.
허름한 모텔 방에서 뒤엉킨 신음이 울리고 있었다.
* * *
“어서 오세요, 사모님.”
집에 들어서자 태성이와 태성의 가정교사인 사라가 인사를 한다. 태성의 새 가정교사로 들어온 사라 윤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39세의 여성이다. 그녀는 스페인어와 영어에 능통하고 한국어도 아주 잘했다.
한국에서 살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덕분에 영어와 스페인어, 한국어 모두에 능통한 그런 여자였다. 사실 이런 여자가 어떻게 태성이 가정교사로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사라는 여러 면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가정교사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밝은 편은 아니었다. 결혼했던 사람이 한국남자여서 한국에 들어왔으나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이혼을 했다고 한다. 말은 정확하게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있었을 거라고 어렴풋이 느껴졌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런 아픔 때문이었는지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돌보며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살고 싶어서 태성이 가정교사로 지원하게 된 것 같다.
“사라, 우리 태성이 잘 있었나요?”
“네. 사모님. 아주 잘 지냈어요. 태성아 오늘 뭐 했는지 어머니한테 한번 말씀드려봐.”
사라가 정확한 스페인어로 말하자 태성도 스페인어로 말한다.
“오늘은 그림책 보면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리고 같이 진흙 놀이도 했어요.”
“와, 우리 태성이 훌륭한데?”
나는 태성이 볼에 뽀뽀를 해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귀걸이와 커다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꺼내놓고 라울이 늘 좋아하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라울은 부드러운 옷감으로 된 원피스를 좋아했는데 덕분에 나는 집에서 입는 옷은 거의가 다 라울이 선호하는 옷감으로 만든 원피스였다.
늦지 않은 시간에 저녁 준비가 다 되어서 태성이를 먼저 먹이고 가연이 방으로 들어갔다. 모빌이 돌아가며 작은 소리를 내고 있었고 가연이는 깜빡깜빡 동그란 눈으로 모빌을 쳐다보다가 나를 알아봤는지 빙긋 웃는다. 정말 곧 백일이 다가와서 그런지 얼굴에 살도 통통하게 오르고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다.
한국 이름 진가연. 스페인 이름은 이네스 말라그로스 까스틸로 진. 라울이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다. 라울과 나 사이에서 이렇게 예쁜 아이가 둘이나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가연이의 작은 손가락을 쥐고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방글거리는 가연이의 얼굴을 보다가 안아 들고 거실로 나갔다. 라울이 오면 함께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생각지 않은 약속이 생겨서 오늘 좀 늦을 거 같아.”
“라울. 미리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언제 그러지 않은 적이 있나?”
그러고 보면 라울은 자상한 남편이다. 말은 늘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훨씬 친절하니 말이다. 늦어지거나 하면 꼭 전화를 한다. 물론 꼭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먼저 밥 먹으라는 얘기죠? 알았어요, 너무 늦지 않게 와요. 기다릴게요.”
라울의 전화를 끊고 가만히 가연이 옆에 앉아서 아이가 잠드는 걸 본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혜정이 얘기는 제대로 라울에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뭐 좋은 일이라고.
아빠하고 그렇게 떨어져 살았던 것도 그런데, 누군가 모두를 속이고 감쪽같이 내 행세를 했다는 얘기까지는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생각지도 않게 윤주 이모와 혜정이를 봐서 그런지 머릿속이 시끄럽다.
요즘 디아나는 너무 예쁘다. 나는 취향이 이상한 걸까? 디아나라면 무조건 예뻐 보이니 말이다. 사실 임신했을 때 배가 나온 디아나도 너무 예뻤다. 오죽하면 내가 여자의 참된 아름다움은 배가 나왔을 때라고 말했을까.
나는 그게 아부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디아나가 배가 볼록 나와서 뒤뚱뒤뚱하는 것도 너무 예뻤으니까. 그런데 요즘 가연이를 낳고 난 다음에 더 예뻐졌다. 백일이 다 되어가는 동안에 벌써 나왔던 배는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다시 가녀린 몸이 되었다.
요가 선생이 따로 와서 개인지도도 하고, 마사지도 받고 그래서 그런지 별로 임신 전이나 다를 바 없이 날씬하고 판판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너무너무 좋은 건 아이를 낳고 나면 가슴이 더 커진다는 거다. 덕분에 이전보다 더 관능적이고 무르익은 몸매가 되었다.
풍만한 가슴. 게다가 가연이가 먹는 달콤한 즙도 나온다. 그래서 요즘은 디아나 생각밖에 나지 않아 어떻게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데 어째서 매일 이렇게 갑작스런 일정이 불쑥불쑥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앞으로 경제 판도가 많이 변하게 될 테니까 다들 긴장하고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업마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느라 난리니 말이다.
요즘 핵심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그 무엇이다. 그게 무엇이든 경제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게 될 거다. 스마트폰 시장이 언제까지 팽창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차세대를 대비한 신규 사업 프레젠테이션이 있다.
다 끝내고 집에 가면 11시가 조금 넘겠군. 디아나는 잠이 들어 있으려나? 물론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회장님, 국수가 불겠습니다.”
아, 맞다. 간단한 먹으려고 시켜놓은 국수가 퉁퉁 불고 있었다.
이런, 디아나. 아직까지도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은 걸 보면 큰일이군. 초강력 울트라 캡숑 콩깍지이야.
회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 딱 예상대로 11시 10분이다. 문을 열자 바로 디아나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올 때면 언제나 현관까지 와서 맞아주는 디아나. 나는 그래서 집이 너무너무 좋다. 오자마자 디아나를 꽉 끌어안는데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다녀오셨어요.”
때때거리는 소리로 태성이 인사를 한다. 잘 시간이 넘었는데 깨어 있다.
“누굴 먼저 안아야 하는 거지? 디아나는 이미 안았는데.”
멀뚱히 아래 태성을 내려다보자 태성이 나를 올려다보고 씩 웃더니 한마디 한다.
“엄마하고 뽀뽀해.”
“니가 하지 말래도 할 거야. 그런데 니가 하라니까 더 하고 싶지 않잖아?”
“어머, 라울? 나랑 뽀뽀하고 싶지 않다고요?”
이런, 그런 말이 아닌데. 태성이 때문에 디아나가 삐치면 안 돼지. 디아나에게 가볍게 키스하자 그녀가 웃는다.
“태성이도 안아 줘야죠.”
디아나가 가볍게 내 볼에 키스를 돌려주며 말한다. 태성을 번쩍 안아 주자 높이 올라선 것이 좋은지 깔깔거리고 웃는다.
“너도 뽀뽀해줄까?”
그러자 태성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든다.
“따가워. 하지 마.”
“짜식, 그래도 할 거다.”
두 볼을 잡고 뽀뽀하자 인상을 쓰면서도 씽긋 웃는다. 귀여운 태성이.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이 딱 이런 말이군.
잠잘 시간이 지난 태성이를 안아 방에 들어가 눕히고 물었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태성이가 왜 잠을 자고 있지 않은 거지?”
“자다가 깼어요. 자다 깨서 아빠 왔냐고 물어서 안 왔다고 했더니 자기도 아빠 보고 자겠다고 이렇게 깨어 있어요.”
“그렇지. 넌 하루 종일 내가 보고 싶었던 거지. 맞지?”
두 눈을 마주치고 묻자 태성이 “흥” 하고 콧방귀를 낀다. 하여간 까칠한 놈이다. 그런데도 내복 바람으로 누워 있는 태성이가 갑자기 더 귀여워 보인다. 시간이 워낙 늦어서인지 눈에 졸음이 가득하다.
토닥토닥 두들겨주자 태성이 바로 잠든다. 태성이가 잠들기 무섭게 나는 디아나의 손목을 잡고 침실로 왔다. 침대에 앉아 디아나를 날름 당겨 안았다.
“가연이는 잠들었지?”
“네. 유모하고 같이 잘 자요.”
“디아나.”
새삼 감격스러워서 목소리가 잠긴다. 사실 오늘따라 유독 디아나 생각이 났다. 오죽하면 저녁으로 시켜놓은 국수가 디아나 생각하다 불었을까?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고 가슴에 얼굴부터 묻자 디아나가 막 머리를 밀어낸다.
“아유, 그만 좀 해요. 이제는 가연이 거잖아요.”
“누가 그래, 가연이 거라고. 원래부터 내 거였잖아. 거 참 이상하네. 태성이가 태어났을 때도 태성이 거라고 그러더니 이건 원래가 내 거였어.”
못 말리는 라울. 그러나 이렇게 한결같이 집착하듯 나밖에 모르는 라울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라울이 뜨거운 입술을 겹쳐왔다. 그의 손안에 꽉 잡힌 가슴에서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온몸이 달아오르는 뜨거움에 허리가 절로 뒤로 휜다. 라울의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고 그의 입술에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흥분을 느낀다. 억센 팔에 안기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디아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출근하자. 내 사무실에 앉아서 마주 보고 있는 건 어때?”
맙소사! 이건 또 무슨 말인지. 회장 사모님이 책상 가져다 놓고 회장과 마주 보고 앉아있으면 그 사무실에 대체 누가 들어올 수 있겠냐고?
“진심은 아니지요?”
“진심이야. 너무 바빠서 얼굴 볼 틈이 없잖아. 응? 집에서도 가연이 먼저, 태성이 먼저. 애들 잠 다 재우고 자다 깨도 가서 보고. 나는 언제 봐? 예전처럼 그렇게 같이 출근하면 안 될까?”
대꾸할 만해야 대꾸를 하지. 말 같아야 상종을 하지.
“으응…… 하아…….”
하긴 대꾸할 틈도 없이 라울의 손이 나를 흔들었다. 허벅지를 바짝 당기고 몸을 밀착시키자 훅하고 숨을 들이켜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라울은 그대로 내 안으로 파고들며 조금 더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디아나.”
라울이 나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마주 보고 있으니 그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더 뜨겁게 느껴진다. 등에 닿는 그의 커다란 손이 안정적으로 받쳐 주자 내가 라울을 보며 말했다.
“피곤하지 않아요?”
“당연히 피곤하지.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 지금 힐링 중이잖아. 디아나를 안고.”
“라울. 당신은 어째 점점 더 말을 잘하는 거 알아요?”
“난 원래 잘했어. 내가 언제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곤란한 적 있었나?”
그래 잘났다. 흥, 말 잘해서 청혼도 그렇게 했었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만 난다.
둘의 움직임이 관능에 물들어 가면서 우리는 리듬을 타고 사랑을 나눴다. 라울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더니 어느 순간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스르르 힘을 푼다.
나도 그렇게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 잠깐의 사이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낀다. 아이들도 잘 자라 주고, 라울 하는 일도 계속 잘 되고, 매일 매일이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그런 감사 뒤끝으로 윤주 이모와 혜정의 모습이 살짝 스친다.
만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걸. 눈을 감는데 갑자기 혜정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남자 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스폰이라도 받게.”
혜정이는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걸까?”
엥?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눈을 뜨자 라울이 내 입술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난 아무래도 디아나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 같아.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걸까?”
“후훗…… 원하면 지금이라도 그 마법 풀어 줘요?”
“안 돼. 그건 안 돼. 마법이 풀리고 나면 생쥐와 호박마차만 남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내가 생쥐인가요, 호박마차인가요?”
“아니지, 당신은 무조건 주인공이지.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는 그대로야. 생쥐나 호박마차로 변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됐지, 뭘요.”
라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날 당겨 안았다.
“어쨌든 이런 마법은 평생 안 풀려도 괜찮아.”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마무리를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디아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 혼자 와이프를 보겠다고 집으로만 갈 수도 없어서 저녁 약속도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생전 없던 일이 생겼다. 바로 내 차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가 끼어들더니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일어난 일이라 차가 크게 흔들리면서 나는 몸이 앞으로 쏠렸다.
허, 참! 저런 낡은 차를 가지고…… 안전띠를 하고 있지 않았으면 앞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인상을 쓰며 기사를 보자 기사가 바로 돌아보며 말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나가보겠습니다.”
앞차에서 내린 사람은 여자였다. 운전도 험악하더니 차에서 내린 여자도 어딘가 천박한 인상에 누구라도 유혹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몸에 쫙 들러붙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다.
죄송하다고 연신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여자의 눈은 기사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바로 내게로 말이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얼굴을 돌렸다. 기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니까. 차에 흠이 난 거 같지도 않고.
그런데 여자는 내 쪽을 보며 계속 고개를 숙이고 마치 저를 봐달라는 듯이 몸을 움직이는 것 같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여자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바짝 빼고 다리를 꼬듯이 몸을 비꼰다. 저렇게 눈길을 끌며 봐달라니! 이거 차도 일부러 이런 거 아니야?
당연히 일부러 그런 거 맞는 거 같다. 뭐 꼭 봐달라는데 못 볼 것도 없고. 그런데 굉장한 글래머다. 하지만 저런 글래머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예 본 척도 하지 않고 기사가 이야기를 끝내고 차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요상한 건 이 여자가 그 뒤로도 계속 눈에 띈다는 거다. 하루는 만찬이 있어서 간 호텔 행사장 복도에서 부딪히고 그다음은 회사 건물 앞에 대기해 놓은 차를 타기 직전에 살짝 부딪힐 뻔했다.
의도적인 게 아니라면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이렇게 마주치게 될 리가 없다. 뭔가 이상했다. 어설프고, 촌스러우면서. 분명 의도적으로 내 앞에 얼쩡거린다. 빨갛게 칠한 입술, 천박하게 들러붙는 옷. 도대체 저런 꼴로 내 앞에서 왜 얼쩡거리는 거지?
결국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물론 그 여자가 원수는 아니지만, 하도 집요하게 내 앞을 얼쩡거리는 그 여자한테 잠시 틈을 줬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는 눈이 커다래지더니 쪼르르 반색하며 말했다.
“MK 회장님이시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라는 걸 알고 주변을 맴돈 게 분명하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쳐다보면 웬만한 사람은 지레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이 여자도 움찔했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을 꺼낸다.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전 디아나하고 스페인에서 형제같이 자란 사람이에요. 그런데 디아나와 오해가 있어서 최근에는 못 보고 있거든요. 남편이시니까 우리 사이에 다리를 좀 놓아 주세요. 전 진짜 디아나를 좋아하거든요. 우리 엄마랑 디아나 엄마하고도 언니, 동생 하는 사이고 같이 살았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지금 처음 보는 여자가 디아나 이야기를 하면서 나한테 접근하는 거야? 이름이라도 들어본 여잔가?
“이름이 뭡니까?”
“혜정이요. 한국 이름은 혜정이고, 스페인 이름은 마르티나에요.”
“그래서, 디아나와 만나겠다고 내 앞을 그렇게 얼쩡거린 건가?”
날카롭게 묻는 말에 혜정이라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디아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만큼도 말을 섞지 않았을 거지만 그래도 디아나 이름을 꺼내니 바로 묵살하게 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바로 말을 붙인다.
“네. 그랬죠. 어떻게든 디아나와 만나서 오해도 풀고 싶고 형제같이 지냈는데 남편분과 인사도 하고 싶고 해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너무 유치한 접근법이다.
“그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닌데. 게다가 그렇게 사람을 유혹이라도 할 것 같이 천박한 느낌이 나는 옷을 입고 얼쩡거리면 오해받기 딱 십상이지.”
“네?”
천박하다니. 대놓고 이렇게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유혹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가 났나?
“디아나와 화해를 하고 싶다. 이런 말이잖아. 그래서 나를 따라다녔다고. 그런 일이라면 당사자인 디아나를 직접 보고 말하는 게 맞는 일이지 않을까? 뭐, 디아나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포기하는 게 좋고.
우리 디아나는 그렇게 아무나 내치는 사람이 아닌데 디아나가 만나지 않을 정도라면 아주 상대하기 싫은 나쁜 사람일 확률이 크고. 이봐. 그쪽 나쁜 사람이야?”
점점 기가 막혀서 입이 떡 벌어지는 여자가 겨우 작은 소리로 말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뒷말이 나오지 않아서 입술을 질끈 깨무는 걸 보고 다시 말했다.
“반응을 보니 나쁜 사람이 딱 맞네. 그러니까 디아나가 안 만나려고 하는 거겠지? 그런데도 자꾸 내 앞을 얼쩡거렸다는 건 디아나를 만나는 건 뒷전이고 날 유혹하고 싶었던 건가? 그런데 어떡하지? 난 디아나보다 더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뭐야, 이 남자 또라이 아니야?
“음, 그렇게 날 유혹하고 싶으면 한 바퀴 돌아봐.”
손가락을 휙휙 돌려가며 돌아보라고 하니 얼떨떨한 얼굴로 진짜 한 바퀴를 돈다. 저 여자 머리가 빈 게 확실하다.
“내가 볼 때는 그쪽은 누구도 유혹할 수 없을 거 같군. 수준을 더 높이던가 하지 않으면 말이지.”
너무 솔직하게 말을 해서 놀랐는지 여자의 눈이 점점 커지면서 입이 딱 벌어진다. 당연하지 이런 꼴로 앞에 있으면서 그럼 무슨 말을 하길 바라나? 혹시 디아나에게 못되게 굴고 그랬던 여자는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니 더 한마디 하게 된다.
“음, 아무리 봐도 양아치나 어울릴만한 옷차림이군. 당신 여자 양아치? 맞아?”
“아! 아니요? 난 양아치 아니에요.”
“음. 뭐 조사해보면 다 나와. 어찌 됐든 이런 천박한 옷차림으로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날 유혹하겠다고 하는 건 버리는 게 좋아. 그런데 디아나하고 대체 무슨 관계야? 정확하게 말을 하든가.”
“그게 그러니까…….”
더듬거리며 뭔가 말하려는 걸 딱 자르고 말을 이었다. 저렇게 더듬거리는 걸 보면 정당하지 못한 관계라는 말이다.
“아니, 굳이 듣고 싶지도 않네. 난 디아나 말만 들을 테니까. 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디아나에게 잘 보이면 돼. 디아나를 통해서 들으면 몰라도. 아, 참고로 날 유혹해서 뭘 얻어내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땡전 한 푼 얻어낼 수 없을 거야. 원래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거 모르나?”
내가 그렇게 계속 말을 하자 앞에 있는 여자는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작은 목소리를 냈다.
“뭘 꼭 얻어내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물론 얻어내려고 하는 거였다. 디아나 남편을 꼬셔서 가정도 파탄 내고 돈도 한밑천 얻어낼 생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이건 뭐. 씨알도 안 먹히는 이상한 남자다. 게다가 말이 폭탄이다.
“얻어낼 게 없다면 뭐? 뭐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나? 디아나랑 풀어야 할 오해가 있으면 당사자랑 직접 푸는 게 좋지 않을까? 나한테 이렇게 오지 말고 말이지. 자 이제, 나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했지? 더 이상 내 눈앞에 보이면 다음부턴 경호원들한테 말할 거야. 스토커로 신고를 하든, 뒷조사를 해서 구린데가 있으면 합법적으로 뭘 하든,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돌아섰다. 뒤에서 여자의 표정이 어떨지 안 봐도 훤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단지 저런 여자가 디아나와 잘 지냈을 리 없다는 생각. 도대체 디아나는 저런 여자하고 뭐 때문에 얽혔던 걸까?
하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만큼 중요한 여자였다면 틀림없이 나한테 말했을 테니까 말이다.
혼이 쏙 빠지게 라울이 말하고 가버리고 난 뒤에 혜정은 얼이 빠져 서 있었다. 저렇게 엉뚱한 남자는 처음이다.
“돈이 너무 많으면 사람들이 이상하더니만 디아나 정말 이상한 남자랑 살고 있는 거 같네. 그나저나 디아나의 남편을 유혹하겠다는 것도 이제 물 건너 가버렸고 뭘 하지? 아이 참 신경질 나.”
그렇게 말하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또 있었다. 안 봐도 뻔하다. 일수를 찍은 지 며칠 지났으니 또 일수를 갚아야 할 판이다.
“알았어. 갚으면 되잖아. 가자고. 모텔이든 여관이든.”
혜정이 소리를 치자 남달호가 인상을 쓴다.
“오늘은 안 갚아도 돼.”
“왜? 뭐 때문에 그래?”
그러고 보니 달호의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뭔가 일이 있어서 얻어터진 게 분명하다. 저 덩치에 맞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다. 힘은 장사면서 왜 서열이 그렇게 한참 밑인지 모르겠다.
“맞은 거야? 뭐야? 깡패가 어디서 맞고 다녀?”
혜정이 흘겨보며 말하자 남달호가 심드렁하게 천천히 대꾸한다.
“난 깡패는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딱 깡패 맞구먼. 맞지 뭐. 일숫돈 찍어가면서 돈 안 내는 사람들 패기도 하잖아.”
“이게 진짜.”
혜정이 말에 남달호가 인상을 쓰자 혜정이 바로 꼬리를 내린다. 얻어터진 남자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
“에잇, 알았어. 알았다고. 그리고 오늘 일수 안 갚아도 되면 뭐? 언제 갚아? 내일?”
“아니, 됐고. 술이나 한잔하자.”
포장마차. 오징어에 소주 한 병을 시키고 꼬치구이도 두어줄 시켰다. 잔에 술을 채우고 건배를 하더니 둘 다 한 번에 다 비우고 꼬치를 들었다.
남달호가 혜정을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됐어? 무슨 재벌을 꼬셔 본다더니.”
“말도 하지 마. 완전 상또라이야. 나 같이 완벽한 여자를 보고 눈길도 안 주는 거 보면 고자인지도 몰라.”
혜정의 말에 남달호가 콧방귀를 꼈다. 이미 진시환에 대해서 웬만큼 알아본 달호였다. 혜정의 말이 얼마나 뻥인지 다 안다.
“고자는. 애가 둘씩이나 있다더라.”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뒷조사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지. 멀쩡한 남의 남자 고자 만들지 말고, 너도 정신 차려.”
남달호는 앞에 있는 소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에잇! 나도 이 짓, 더 이상은 못 해먹겠어.”
“그래? 잘됐네. 그럼 나 이제 일숫돈 안 갚아도 돼?”
혜정이 날름 꼬치를 들며 말하자 남달호가 고개를 젓는다.
“하여튼 말하는 거 하고는. 나 아니면 더 독한 놈이 너한테 들러붙겠지. 그놈들은 몸으로 찍는 일수 같은 건 안 받아줘. 그동안 니가 일수 안 찍은 거 내가 대신 다 찍었잖아.”
“대신에 난 다른 걸 줬잖아.”
“그러니까. 그거 받아주고 대신 일수 갚아줄 놈이 어딨겠냐고.”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혜정이 한숨을 쉬며 앞에 있는 오징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다 넣고 질근질근 씹었다.
정말 그러고 보면 앞에 있는 달호가 일수를 대신 찍어줬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엄마 장사도 시원치 않고 불규칙하게 하는 알바로는 이자도 못 갚는다.
“넌 언제까지 여기에서 이렇게 살 건데?”
“내가 뭘?”
“여기저기 알바나 하고 가끔씩 술집 가서 이차 뛰고 그런 식으로 해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남달호가 콕 집어서 맞는 말을 하자 듣기가 싫다. 정말 이렇게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진짜 팩트에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나쁜 놈.
“남이야, 무슨 상관이야?”
혜정이 앞에 있는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 맛도 밍밍한 게 꼭 저같이 싱겁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켜는데 남달호가 다시 말한다.
“너희 어머니도 몸도 안 좋으신 거 같던데 계속 저렇게 행상은 할 수 있는 거야?”
양말을 팔고 있지만 사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어떻게 된 게 여자 둘이 먹고살게 이렇게 없나. 이럴 줄 알았으면 스페인에 있을 때 스페인어라도 확실히 배울 걸. 그랬으면 뭔가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 그때 맨날 아르바이트로 여행 가이드 한다고 놀러 다니고 남자나 만나고 했던 게 왜 이렇게 후회스러운지.
“됐어. 술이나 한 잔 줘.”
그렇게 혜정이 술을 들이켜자 달호가 이런 말을 한다.
“너, 뭐하면 나하고 같이 시골에 안 갈래?”
“뭐?”
“그래도 거긴 밭농사라도 지으면 밥은 먹고 사는 거 같은데.”
지나가는 말같이 했지만 남달호는 나름 힘을 주어 한 말이었다. 이런 건달 생활은 오래 해봐야 답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시끄러워. 밥은 너나 실컷 먹고살아. 난 밥 싫어. 스테이크 먹고 싶다고.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사람이? 난 절대로 안 가.”
혜정이 소리쳤으나 남달호는 능글맞게 다른 말을 했다.
“그래도 사람 일은 또 모른다. 시골 가서 대박 치는 사람들도 꽤 있어.”
“순 날건달이 일수나 찍으러 다니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살았으면서, 농사는 지을 줄 아냐?”
“이래 봬도 농사는 잘 지어. 지겨워서 서울로 온 거지.”
“아이고, 고등학교는 졸업했냐, 너?”
혜정이 아주 무시하면서 말하자 남달호는 기분이 상한 듯이 말했다.
“농업고등학교 나왔어, 나. 그러는 너는 고등학교 졸업했냐?”
“나도 뭐. 고등학교는 졸업했어. 마드리드에서. 에잇, 이런 이야기 그만두자. 어서 일어나.”
그렇게 소주를 몇 잔 기울이고 혜정이 구윤주가 하는 행상이 있는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리어카 끌고 들어가는 건 도와줘야지 안 그러면 여간 화를 내는 게 아니니까. 투덜거리며 리어카 근처까지 갔을 때였다.
혜정을 본 구윤주가 반가운 듯 말한다.
“아이고, 힘들다. 혜정아, 이거 니가 좀 끌어봐.”
“제가 끌겠습니다.”
꾸역꾸역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달호 뒤를 따라 혜정과 구윤주가 걸어간다. 혜정은 리어카를 끌어주는 남달호가 고맙다. 그간 돌아봐 주는 사람 하나 없던 구윤주와 혜정이었다. 차가운 날씨에 날리는 눈발까지 있어서 더 차가운 밤이었다.
구윤주가 혜정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저 일수 찍으러 다니는 놈이 왜 남의 리어카는 끌어주겠다고 그래? 뭐 더 받을 거 있다는 거야?”
“아니야. 그냥 도와주는 거야. 지금은 힘든데 뭐 일수 찍는 놈이든 깡패 놈이든 리어카만 밀어주면 고마운 거 아니야?”
“그건, 그래.”
구윤주의 걸음이 더 느려진다. 정말 이상하게 몸이 아프다. 구윤주가 걷다 쉬다를 반복하는 동안 남달호는 리어커를 끌고 먼저 집 앞쪽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엄마 왜 그래.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진짜 많이 아파?”
“그래, 많이 아파 이년아. 제대로 먹는 게 있기를 해? 돈 한 푼 없어 서 매일. 그러니까 당연히 아프지.”
없어서 더 화가 나고 남의 딸들은 돈도 잘 번다는 데 옆에 있는 딸년은 뭘 하는 건지. 하지만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째려보자 혜정도 맞받아 소리친다.
“나도 하느라고 하거든?”
“화장품 좀 작작 처바르고 좀 돈 좀 아껴.”
“버는 게 있어야 아끼지.”
그렇게 시끌시끌하게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남달호가 리어카를 단단히 문 앞에 묶어놓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나마 사람 온기가 조금 더 있는 거 같다.
* * *
“라울! 오늘은 우리 가연이가 옹알이를 제법 한참 동안 했어요. 진짜예요.”
내 말에 라울이 나를 슬쩍 째려본다.
“흠, 전에 태성이가 날 알아보고 웃었다고 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배냇짓이라 그랬죠. 애가 태어나자마자 그랬잖아요. 그때는 진짜 웃은 게 아니라고요. 가연이는 오늘 진짜 옹알이를 했고요.”
“우리 가연이가 진짜 옹알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정말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그러고는 가연의 앞으로 갔다.
“까꿍, 까꿍! 아빠다. 가연아 말 좀 해봐. 아빠 그래 봐.”
라울이 가연의 앞에서 온갖 재롱을 다 떨자 가연이 깔깔 웃으며 옹알옹알 소리를 냈다.
“어, 진짜네? 진짜야.”
라울이 신기해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태성이 말한다.
“그렇게 좋아?”
태성의 말에 나는 그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라울은 인상을 쓰며 태성을 쳐다봤다.
“그래! 좋다. 왜?”
“그럼 계속해.”
아이 같지 않게 뚝 떨어지는 말을 하고 돌아서 나가는 태성을 보고 라울이 손짓을 했다.
“이리와. 루벤.”
태성이 올까 말까 한 얼굴로 보자 라울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태성이 쪼르르 달려온다. 태성을 높게 안아 들고 라울이 말했다.
“우리 루벤도 아기였을 때 가연이처럼 아빠 보고 웃고 소리 내고 그랬는데.”
“진짜?”
“그럼! 태성아 가연이 이쁘지?”
아이 앞에 내려놓자 태성이 가연이 이름을 부른다.
“이네스. 가연이.”
“그래. 가연이. 스페인 이름은 이네스. 예쁘지? 어떤 게 더 예쁘니?”
“이네스.”
정확한 발음으로 이네스라고 하는 태성의 머리를 내가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는 태성이도 루벤도 다 예쁜 이름 같아.”
“가연이도 이네스도 다 예뻐.”
태성이도 똑같이 말한다. 라울이 기어이 한마디를 했다.
“우리 까스틸로 가문으로 말하면 말이지, 스페인의 왕위 계승 서열이…… 대한민국의 굴지의 기업으로…… 우리 가문이…….”
계속 이어지는 라울의 말에 나와 태성이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가연이만 보고 웃었다.
12월 31일 마지막 밤이었다. 함께 식사하자고 모두가 한남동으로 모였다. 아버지는 가연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서 이리저리 가연이를 보고 또 보신다. 얼굴에 가득한 웃음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랑아, 아무리 봐도 너를 쏙 빼닮은 것 같다. 진 서방 때문인지 너보다는 조금 더 코가 오뚝하지만, 전체적인 얼굴은 쏙 닮았네.”
가연이를 보는 아버지 마음은 어떠실까? 어쩌면 딸인 나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사셨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뭉클하다.
“아무리 봐도 네가 어렸을 때 꼭 이랬을 거 같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지. 우리 이랑이도 정말 예뻤을 거야. 암. 틀림없지. 가연이 보면 안 봐도 훤하다. 아이고. 예쁜 거.”
가연이도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줄 알고 저렇게 방긋거리는 거겠지? 아빠인 라울에게도 저렇게 잘 웃어주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애들은 꼭 아빠 놀리는 거처럼 새침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라울은 애들만 보면 예뻐서 껌뻑 죽는다.
지금도 할아버지 무릎에 안긴 가연이를 보며 입이 귀에 걸려서 자랑이다.
“아버님, 우리 가연이가 정말 예쁘지요? 디아나 닮아서 정말 예뻐요.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하고도 많이 닮고 디아나하고도 많이 닮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깨물어주고 싶은 것도 디아나랑 똑같아요.”
맙소사!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아버지 역시 민망하지도 않으신지 라울의 닭살 돋는 말에 오히려 얼굴이 환해지신다.
“그래, 그래, 이렇게 보고 있으면 예뻐서 이가 뽁뽁 갈리잖아. 진짜 귀엽고말고. 하하! 참, 이따가 규빈이네 부부도 오라고 했다. 작은아버지 편찮으셔서 그쪽 집에서 식사한다고 했으니까 차 마시러는 이리로 올 거야. 자네도 규빈이 자주 못 보지?”
“예. 아무래도 자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얼마 전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어요.”
라울은 규빈 오빠가 결혼한 뒤에는 그 질투심을 좀 거둔 거 같다. 종종 기업인 모임에서 만나면 집에 와서도 규빈 오빠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그게 늘 한결같다는 것이다.
“임규빈이 그렇게라도 결혼한 건 순 내 덕이야. 아니면 디아나 닮은 여자만 구하다가 아직도 결혼을 못 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 라울만의 착각이지만 어쨌든 라울은 늘 그렇게 말한다. 지금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다는 말을 듣자 나는 라울의 말이 생각나서 웃었다. 이렇게 단순하고 아이 같은 사람이 밖에 일은 잘하는 게 신기할 뿐이다.
아버지는 라울이 규빈 오빠 이야기를 하니 그것도 좋으신가 보다. 가족끼리 연락도 하고 서로 만나면서 잘 지내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 아버지시니 말이다.
“그래. 성진이나 MK나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잘해 주고 있으니 정말 든든해.”
“아버님 같은 연륜 있는 분이 계속 지켜주셔야죠.”
라울은 말을 정말 잘한다. 하긴, 원래도 나 빼놓고 다른 사람들한텐 이 정도는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빠가 가연이를 내게 안겨주시며 말했다.
“자, 가연이 요람에 눕히고 우리 식사하자. 너 좋아한다고 특별히 해산물 요리 많이 하라고 했다.”
한쪽 요람에 가연이를 눕히고 태성이와 함께 네 식구가 둘러앉았다. 특별히 얘기를 해두셨는지 빠에야도 있고, 랍스터와 새우 그리고 태성이 먹기 좋게 부드러운 수프와 파스타가 넉넉하게 나왔다.
식탁에 둘러앉으니 새삼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다. 엄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들이 있으니까 집안이 꽉 차는 것 같다. 진 회장, 자네도 어서 들지. 자네 좋아하는 스테이크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했어.”
“네.”
라울이 포크를 드는데 옆에서 태성이가 말한다.
“할아버지 많이 드세요. 어른이 먼저 드시고 먹는 거라고 했어요.”
라울이 포크를 들다 말고 태성이를 째려본다. 진짜 너무 웃긴 아버지와 아들이다.
“허허, 우리 태성이 말하는 거 보게. 그래. 이 할아버지가 먼저 먹을 테니 태성이도 얼른 먹어라.”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조금 더 자주 와야겠다. 사실 가연이를 낳은 뒤로는 자주 오지 못했다. 와야지 하면서도 어쩌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아이들과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아버지가 점점 나이 드신다는 걸 잊는다.
태성이 낳고는 몸조리도 이곳에서 했는데 가연이 낳고는 그러지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성북동으로 찾아오실 때 빼놓고는 뵙지 못했다.
“더 자주 올게요, 아버지.”
“그래야지. 뭐든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하고.”
“네.”
그렇게 식사를 하고 건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여서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우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나온다.
“디아나, 나 혜정이야.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게 생겼어. 제발이지 좀 도와줘. 응? 수술할 수 있게 좀 도와줘. 진짜야. 지금 여기 한국병원이야.”
엉엉 우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혜정이 목소리였다. 뜻밖의 소리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한국병원?”
갑자기 윤주 이모가 어디 편찮으신가? 하지만 뭘 물어볼 틈도 없이 혜정이는 계속 말했다.
“그래.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너한테 잘못한 거 한두 가지가 아닌 거 알아.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연락할 데가 하나도 없어. 제발 도와줘. 응? 디아나. 제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미운 마음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윤주 이모가 위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