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
2.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이었나 보다. 그의 목소리가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낮게 울린다.
“왜 혼자 못 재워! 원래 잠들면 혼자 재우잖아. 자기 방에서도 그랬잖아.”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요?”
내 입에서 기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울 말이 맞기도 하니까. 아니 그보다는 라울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잘 알아서일 거다.
“뭐가 아니야, 아니긴!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여기서 끝나고 마는 거야?”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우리 사랑이 왜 끝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라울이 이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이러는 중에도 태성이는 우리 침대 한가운데서 정말 잘도 자고 있다. 라울은 갑자기 태성이 발을 건드리며 말했다.
“이런, 루벤! 일어나! 엄마 아빠 사랑해야 해. 응.”
“아우, 그만둬요. 라울!”
나는 반사적으로 라울의 어깨를 탁 때렸다. 지금 자는 어린애한테 저러는 거 보면 장난이 아닌 거 같다. 손바닥에 살 부딪치는 소리가 차지게 나자 따끔했는지 라울이 어깨를 잡고 눈을 크게 뜬다.
“지금 뭐 한 거야, 디아나. 설마 루벤 때문에 날 때린 거야?”
“자는 애를 어떻게 깨워요. 오늘은 그냥.”
그냥 지나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라울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절대 안 돼! 그럴 수 없어! 보름 동안이나 떨어졌다가 한국에 와서 생각나는 건 디아나밖에 없는데. 지금 가자, 태성이 방으로.”
“태성이 방은…….”
태성이 방은 바로 우리 옆방이었다. 결국 나는 라울의 손에 끌려서 태성이 방으로 갔다. 싱글베드가 하나 있고 한쪽에 목마가 있고, 난간이 있는 아이 침대도 따로 놓아 가구가 훨씬 많은 방이었지만 우리 둘이 사랑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방이다.
라울이 침대에 앉더니 나를 반짝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디아나!”
어째서 이 여자는 배가 불러도 이렇게 예쁜 거지? 아니 배가 불러서 더 예쁜 건가?
출장 내내 많은 여자들을 보았다. 은근한 유혹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소개시켜 주겠다는 듯이 유명 모델이나 배우들을 합석하는 자리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예쁜 외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 디아나에게는 있다. 디아나의 향기, 따뜻한 눈길, 손만 닿아도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애절하게 올라오는 전율. 이런 건 다른 여자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분명히 안다.
그런 디아나와 보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 아들이라고 양보할 때가 아니다. 디아나를 안고 슬쩍 물었다.
“혹시 루벤 저 자식,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에요. 태성이가 요즘 예민해졌단 말이에요. 가정교사도 유모도 너무 자주 바뀌어서 그런 거 같아요. 나만 찾아요. 상담을 받아보든가 해야 될 거 같아요. 유모가 자꾸 바뀌어서 애가 안정을 못 찾는 거 같다고요.”
디아나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다.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루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내 아들이 말이다.
“그럴 리가 없어.”
“네?”
“그럴 리가 없다고. 내 아들이 그까짓 유모 때문에 그렇게 불안정해지고 그럴 리 없다고.”
“태성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에요. 만으로는 그래 봐야 두 돌이 채 안 됐다고요. 그런데도 라울 당신은 꼭 자신처럼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아. 자꾸 그러면 내 마음이 무겁다고요. 내 얼굴 어두워지는 거 안 보여요?”
물론 디아나가 걱정하는 건 알지만 내 아들이라면 그런 걸로 마음 약해질 거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아빠와 엄마가 함께 있는 데서 응석을 부리고 싶어서 그런다면 모를까. 하지만 디아나가 걱정하는 건 싫다.
라울은 디아나를 안으며 말했다.
“알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난 디아나가 너무 급해.”
귓가에 대고 작게 말하고 디아나의 나이트가운을 풀었다. 이미 침실에서 가운 하나만 걸치고 나온 탓에 가운이 풀리며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헉! 이 가슴.”
진짜 너무 좋다. 아기를 가지면 제일 좋은 건 가슴이 커진다는 거다. 진짜 보름 동안 못 본 사이에 더 커진 거 같다. 풍만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바로 얼굴을 묻었다. 디아나의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감싼다.
세상에,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다 왔는지 디아나는 모를 거다.
우리 둘은 바로 몸을 겹쳤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해도 마음이 급해서인지 어쩔 수 없이 다급하게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안았다. 가슴에 닿는 디아나의 매끈한 등이 아찔하다.
부드러운 디아나의 안으로 파고드니 살 것 같다. 내 몸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정에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고 가슴은 벅차 그녀의 가슴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아! 디아나!
뜨거운 숨결이 교차하고 디아나의 가쁜 숨결이 작은 신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천국 같은 절정을 느꼈다. 숨을 고르고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니 디아나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사랑하는 디아나! 그러나 내 몸에 닿는 그녀의 배가 단단하게 뭉쳐지는 게 느껴지자 나는 걱정이 된다. 혹시 아기가 또 디아나를 힘들게 하는 건가?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디아나? 당신 몸…….”
“괜찮아요. 라울.”
디아나가 내 품에 바로 머리를 대고 안겨든다. 아마릴리스 향기가 가슴 가득 들어오고 디아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볼에 비비며 우리 둘은 바로 깊은 잠으로 떨어졌다.
“아아…….”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 디아나 소리 같은데.
“아…… 라울.”
분명 디아나의 신음 소리다.
나는 눈을 뜨고 바로 몸을 돌렸다. 옆에서 자고 있는 디아나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나를 올려다본다. 스탠드 불을 켜고 보자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질려 있는 것 같다.
“왜, 무슨 일이야? 디아나.”
만삭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4~5주는 더 있어야 출산 예정일이기 때문에 진통이 올 리는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앞으로 3주는 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디아나가 자다 말고 이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 나를 부르고 있다.
“설마 배가 아파?”
“아…… 그런 거 같아요. 배, 배가 너무 아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한다. 아니 내 자식 놈들은 하나같이 아빠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야? 지금은 임신 초기도 아닌데 왜 이래?
태성이 때 한 번 유산할 뻔해서 얼마나 임신 초기에 조심을 했는데 지금은 초기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야?
“그럼, 어서 병원으로 가자.”
나는 놀라서 다급하게 옷을 걸치며 말했지만 디아나는 아파하면서도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일단 조금 쉬어 보면 어떨까? 아직 예정일이 너무 많이 남기도 했고, 어쩌면 밤에 우리가 무리해서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 쉬면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럴 수도 있다. 조심해서 했는데도 아기는 불편했을 수도 있다. 나는 디아나의 어깨를 감싸고 앉아서 만삭의 배를 살살 손으로 만져주었다.
“아가야, 이제 괜찮아. 아빠도 엄마도 같이 있고, 푹 쉬면 돼.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아프게 하지 마.”
그러나 진통은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 디아나는 작게 신음하며 괴로워했다. 배가 단단히 뭉치고 있었다. 결국, 디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병원을 가야 할 거 같아요. 주기적으로 자꾸 배가 아파서.”
“그래?”
너무 빠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임신 5개월부터 7개월까지는 세비야의 성에서 가족이 두 달 동안 행복하게 지내다 왔다. 돌아오고 나선 점점 배가 불러오기도 하고 나는 나대로 회사 일이 바빠서 그렇게 지냈는데 둘째 아기가 너무 빨리 나오면 안 되는데. 혹시 디아나에게 무슨 건강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대로 디아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디아나가 바로 분만 대기실로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너무나 피가 마르는 것 같다.
하여간 그냥 태어나는 놈이 없다니까. 이렇게 부모 가슴을 덜컥덜컥 흔들어 놔야 아기가 나오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돌아가신 어머니 이사벨이 생각난다. 내 기억에는 늘 날씬하고 예쁜 엄마였는데 엄마도 세비야의 그 성에서 나를 낳으실 때도 이랬을까?
아! 나는 왜 이렇게 하지 않던 생각들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결혼하고 아이 아빠가 되어가니 그런가 봐. 어쩔 수 없이 나도 나이가 드는 건가.
잠시 후에 분만 대기실에서 진찰하고 난 뒤에 의사가 나와서 말한다.
“자궁 문이 열린 건 맞는데 그렇다고 진통이 계속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은 경과를 좀 지켜봐야 하니 산모는 입원하고, 그만 가서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리기에 집에 가라는 겁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기가 늦게 나오는 게 좋은 상황입니다. 건강하게 있을 수만 있다면 엄마 배에서 더 있다 나오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한숨이 나온다. 나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원 수속을 하고 조금 있자 디아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집에 있는 태성이가 걱정되는지 나를 보고 어서 가보라고 한다.
“나 괜찮아요. 정말 아기가 나올 거 같으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태성이 혼자 두지 말고 가 봐요.”
“태성인 자고 있을 시간인데 뭘.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세베로도 있고.”
세베로는 우리가 스페인에서 올 때 함께 한국으로 왔다. 디아나가 아기를 낳고 나서 스페인으로 돌아가면 되겠다고 모두들 함께 온 거였다. 디아나도 태성이도 세베로를 좋아하니 말이다. 그러니 태성이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계속 나를 집으로 보내려 한다.
“그래도 일어났는데 엄마도, 아빠도 없으면 울 수 있어요. 유모도 없는데…… 요즘 들어 부쩍 낯을 많이 가리잖아요.”
“…… 알았어.”
영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태성은 내 아들이니 디아나 옆에만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안전하게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게다가 언제 연락이 갔는지 한남동에서도 전화가 왔다. 장인어른이다.
-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가려고 하니 자네는 그만 들어가 봐.
“지금은 오셔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이 분만 대기실에 들어오실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냥 집에서 기다리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임 회장님의 걱정하는 목소리에 나도 마음이 무겁다. 디아나만 병원에 두고 집으로 돌아온 건 아침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잔데다가 맥이 풀려 소파에 앉아있는데 아장아장 걸어서 태성이 나온다. 태성은 잠이 완전히 깨었는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보고 묻는다.
“엄마는?”
“엄마는 병원에 갔어. 아기가 나오려고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지? 태성아?”
맨날 했던 말이기 때문인지 태성은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엄마가 없으니까 허전하지? 나도 허전한데 너는 얼마나 허전하겠니.”
그렇게 혼자 말하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가만있는데 조금 이따 태성이가 우유 잔을 두 손으로 들고 온다.
저런 거 들고 다니다가 떨어뜨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는 눈으로 유심히 태성이를 보고 있는데 제법 씩씩하게 걸어와 내 앞에다 우유 잔을 내밀며 말한다.
“마셔. 엄마 곧 올 거니까. 울지 마.”
맙소사.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소리로 태성이가 나를 위로한다.
“지금 너, 나 위로하는 거야? 이 우유 마시고 울지 말라고?”
그러자 태성이가 고개를 끄떡끄떡한다. 너무 귀엽고 마음이 찡해서 나도 모르게 우유 잔을 옆에다 두고 태성을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이 어린 게 아빠를 위로하겠다고…… 그런데 잠깐만. 엄마 곧 올 테니까 울지 말라고? 네 눈에 내가 디아나가 없으면 꼭 울 것같이 그렇게 보인 거야?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
내가 저 녀석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바로 태성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준다. 무게감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쪼끄만 손으로 토닥토닥.
“진태성. 너 지금 아빠를 위로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성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따가워. 면도해.”
이런, 까칠한 놈 같으니라고. 그렇지. 막 감동하려고 그러는 아빠한테 따갑다고 면도하라니!
“싫어. 아빠 인제 자야 해. 밤새 잠 한숨도 못 잤거든?”
“코 재워주까?”
“뭐?”
“내가 코코 해줘?”
이놈, 날 닮아서 신동이 아니야? 어쩜 이렇게 말귀를 잘 알아듣는 거야.
그런데 진짜 이렇게 어린 태성이의 위로를 받는 건 사실이었다. 디아나와 아기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마음이 무거운데 태성이를 이렇게 안고 있으니 마음에 위로가 된다.
“그래, 아빠 재워줘. 태성아.”
번쩍 태성을 들어 안고 침대로 들어가 눕자 태성이 옆에 앉아서 내 가슴을 토닥토닥 해준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태성이를 보자 바로 들려오는 말이.
“자. 눈 감고. 눈뜨면 안 돼요.”
뭐야, 디아나가 맨날 이렇게 아이를 재운 거야? 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태성이 너, 아빠 잠든 다음에 뭐할 거야?”
“절대로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 거야.”
“진짜야?”
“응.”
그런데 진짜 졸음이 온다. 자존심이 상한다. 애가 토닥여 준다고 잠이 오다니. 하지만 밤새 디아나 때문에 병원에서 왔다 갔다 한 탓인지 너무 고단하다. 내가 잠들면 이놈도 내 옆에서 자겠지, 뭐.
그런데 눈을 떴을 땐 태성이 없었다.
“어? 얘가 어디 갔지?”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세베로가 기다리고 있다.
“세베로, 루벤 어디 갔지?”
“일어나셨군요. 지금 루벤 도련님은 공부 중입니다.”
“뭐야?”
“그저께부터 주인님이 채용하신 새로운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 22개월짜리가 나보다 바쁘군. 아침부터 수업을 듣다니 말이야?”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그 애가 어떤 수업을 하는지 몰래 보고 싶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문을 열어 살짝 보자 태성의 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엄마 없어서 막 울려고 그래서 내가 우유를 줬어요. 엄마 곧 올 테니까 울지 말라고 하고 토닥토닥 재워줬더니 금방 잠이 들었어요.”
“그랬어? 우리 태성이 정말 착하구나. 아빠가 엄마 없으면 우니?”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안 돼요. 아빠는 엄마만 찾아.”
저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정교사가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한다.
“지금은 발표력 시간입니다.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중이죠.”
“아, 그런가요?”
“네. 곧 루벤이 동생을 볼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별말을 안 하고 쓱 태성이 공부하고 있는 방을 둘러보다가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태성이 나를 보고 씩 웃는다.
고얀 놈!
* * *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차근차근 지금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궁 문이 3cm 정도 열려서 이 정도면 참 애매한 상황입니다. 입원하는 게 더 안전하기는 할 텐데 한두 주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만 한다면 집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럼 집으로 데리고 가도 되는 겁니까?”
“그건 전적으로 보호자와 산모의 뜻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 더 이상의 진전은 없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 주라도 더 엄마 뱃속에서 폐가 성숙돼서 태어나는 것이 앞으로 아이가 건강하고 면역력 있게 자라는 데 좋으니까요.”
의사의 말은 그러니까 2주 정도 더 엄마가 품고 있어야 제대로 사람이 된다는 말이었다. 결국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태어나면 폐가 덜 성숙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집에서도 안정만 취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거의 안정하고 쉬기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병원에 계시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그게 심리적으로는 더 불안정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떨렸다. 물론 디아나가 집에 와있는 것이 가장 좋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태성이도 매달릴 테고. 물론 내가 옆에서 든든히 디아나를 지켜주겠지만 말이다.
아, 임신 초기에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더니 이렇게 된 건지…… 디아나에게 미안하다. 사랑하고 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터덜터덜 입원실로 걸어가 디아나의 옆에 앉았다. 베이지와 화이트로 통일된 특실은 깔끔하지만 단조롭게 보인다. 물론 디아나가 있어서 생기가 돌지만 말이다. 디아나가 있는 곳은 어디든 환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는다.
아무래도 나 콩깍지 제대로 쓴 중독자가 맞다. 디아나 중독자.
“의사 선생님이 뭐래요? 나도 대충 들었지만.”
“그러니까 집에 가도 될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이미 깊은 안쪽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진통이 오면 빨리 병원으로 오면 된다고.”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들은 그대로 횡설수설 말하자 디아나도 이미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얼굴에 밝은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죠? 아이가 내 뱃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더 좋다고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디아나는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저렇게 배만 볼록 나온 가녀린 몸을 하고서 나보다 훨씬 담담한 것 같다. 역시 여자들은 독한 데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
“디아나, 안 무서워?”
“무서워요.”
디아나가 커다란 눈동자를 들어 나를 본다. 까맣고 둥근 눈동자를 보니 안쓰럽다. 그런데도 담담함이 어린 당찬 느낌은 이전보다 더 야무지다고 할까? 하긴 디아나는 대학생일 때도 아주 야무졌다. 당당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그런 여자.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나는 웃으며 디아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담담해? 디아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여기 있을래? 집에 갈래?”
“나야 당연히 집에 가고 싶죠. 태성이도 있고 당신도 있고. 아마 뱃속에 이 공주님도 그럴걸요? 늘 있던 환경에서 있는 게 더 안정되고 좋을 거예요.”
디아나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또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녀가 없는 집은 단 며칠도 허전하고 썰렁하니 말이다.
“알았어.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한 건 아니야. 갑자기 아기가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매일 신경이 쓰일 거 같아. 내가 아기를 받아야 하면 어떡해?”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디아나가 피식 웃는다.
“한마디로 무섭다는 말이죠? 당신이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듣네요. 세상에 무서운 거 없는 라울이 아기 받게 될까 봐 그렇게 무서워요? 태성이 때도 그렇게 겁을 먹더니.”
“무슨 소리야? 무섭다니? 그런 말이 아니야. 그냥 집에서 아기가 나올까 신경이 쓰인다는 거라고.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고.”
“정말 못 말려. 아기가 그렇게 막 나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진통 오면 병원으로 오면 되는 거지. 마음 편하게 가져요.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디아나, 하아…… 나는…….”
“알아요, 겁나죠?”
이럴 때 라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진짜 MK라는 거대한 그룹의 회장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회사 일을 결정할 때는 그렇게 냉철하게 잘만 하면서도 내 앞에서는 이렇게 솔직하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무섭죠?”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겨우 이까짓 일로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는 거야? 물론, 아기가 갑자기 집에서 나올까 봐……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디아나가 갑자기 감염이라도 된다면 병에 걸릴 수도 있겠지.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겁을 낼 것 같아?”
뭐야 지금, 겁을 낸다는 거야 내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라울은 내가 잘못해서 병에 걸리거나 아이가 갑자기 태어났을 때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다는 거다.
“무슨 소리에요, 라울. 집에 세베로도 있고, 또 아주머니들도 계시잖아요. 그리고 병원이 우리 집에서 먼 것도 아니고,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오면 돼요. 당신이 집에 있으면 당신이랑 같이 오고 만일 당신이 없으면 세베로랑 오면 되고요.”
“세베로하고? 흠…….”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나의 공주님이 처음으로 보는 게 아빠가 아니라 세베로라는 말이잖아.
“당신도 곧바로 달려올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위로하자 라울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
“나, 태성이 보고 싶어요. 나 없는 동안 태성이가 당신 잘 돌봐 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겨우 태성이한테 돌봄을 당하는 사람으로 보여?”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라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태성이가 잘해준 게 분명하다. 내가 늘 태성이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뱃속에 아기가 나올 때 병원에 가야 하거든? 그러면 태성이가 아빠를 보살펴 줘야 해. 알았지? 잘 대해줘야 해.”
“응. 엄마. 내가 우유도 주고 토닥토닥해줄게. 아빠.”
어쩌면 태성이는 그렇게 말이 빠른지 이제 두 돌 된 애가 가끔씩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한다.
“태성이가 잘해줬어요?”
“뭐…… 물론 내가 더 잘해주긴 했지만.”
“어떻게 잘해줬는데요? 나 막 샘나는데? 태성이가 나 없는 동안 당신만 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은근히 올려주면 이 남자는 진짜 으쓱해 한다. 사실 태성이가 라울보다 나를 더 따르는 것을 늘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라울이었으니까 말이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버지인 내가 태성이를 돌봐주는 거지. 하지만 우유도 가져다주고, 어깨도 토닥토닥…… 머리도 쓰담 쓰담.”
말하는 라울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핀다.
“아, 라울 어찌 됐든 당신이 행복해 보여 다행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어찌나 조심스럽게 감싸주는지 라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자 태성이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하지만 내가 번쩍 안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이를 안거나 무거운 걸 드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했으니까. 대신 옆에 있던 라울이 태성이를 들어 안아 내 눈높이에 맞추어주었다.
“엄마.”
“우리 태성이, 엄마 없는 동안에 잘 있었어?”
소파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태성이를 옆에 앉히고 쓰다듬어 주자 태성이가 배를 어루만진다.
“아가, 안 나왔어?”
“조금 있다가 나온 데.”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너무 빨리 나오면 건강하지 않을 수 있대. 음…… 태어나서 아야 아플 수가 있거든. 그래서 조금 늦게 나중에 나오는 게 좋데. 우리 태성이 무슨 말인지 알아?”
하긴 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녀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간식 시간이었는지 식탁 위에 있던 쿠키를 가져다가 내 손에 쥐여준다.
“엄마, 먹어.”
“우리 태성이 착하기도 하지.”
가슴이 뭉클하다. 이 작은 것이 손에 쿠키를 가지고 와서 엄마 손에 쥐여준 것이다.
“엄마만 주니? 내 것도 가지고 와 태성아.”
옆에 있던 라울이 딱딱하게 말하자 태성이 가만히 라울을 보다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고 억양 없는 소리로 말한다.
“니가 먹어.”
태성이의 말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세베로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가 가져다 드릴까요?”
“시끄러워. 됐어! 세베로.”
그렇게 아빠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하던 태성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잘 안다. 너무 많이 시켰던 거다.
아이만 보면 가져와라. 가져다 버려라. 똥개 훈련시키듯이 하니 이제 라울이 시키는 일은 들은 척도 안 한다.
“태성아, 그래도 아빠도 드시고 싶을 것 같아. 먹을 것은 가져다 드려야지 그렇지?”
그러나 태성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소파에 앉은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다. 라울의 눈에서 불꽃이 활활 올랐다.
질투가 난다. 얄미운 진태성, 루벤 데오필로 까스틸로 진. 하지만 이게 좋다. 이렇게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디아나의 눈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 * *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닷새가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무겁게 아래로 쳐진 나는 거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가 많았고 침대에 누워서 집안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아들 둘을 키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라울은 이상하게 태성이가 먹는 걸 뺏어 먹는 걸 그렇게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 태성이가 자기한테 주는 걸 보고 싶어 그러는 걸까? 그런데 짓궂은 행동을 하는 게 문제다. 과자가 꼭 하나 남았을 때 그걸 꼭 달라고 한다. 한 살 때는 주더니 지금은 라울에게 과자를 주지 않는다. 오늘도 그랬다.
“태성아, 그 과자 아빠 줘. 응? 그거 꼭 먹고 싶어. 아니면 반이라도 잘라서 줘.”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태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있는 서랍장을 낑낑거리고 잡아당긴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과자 봉투를 하나 꺼내서는 통째로 라울 앞에 가져다 민다.
“다 먹어. 다 먹으면 배 아픈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다가 배가 당길 정도로 웃었다. 그렇게 즐겁게 한 주가 흘러간다. 이제 한 주만 더 버텨준다면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 텐데.
“아가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나와, 응? 그래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데.”
그러나 일주일을 더 채우지는 못했다. 사흘이 지나서 양수가 터졌기 때문이다.
라울의 부축을 받으며 집을 나가기 전에 라울은 세베로를 불렀다. 세베로는 이런 상황에도 침착하게 다가왔다.
“루벤은 지금 뭐 하고 있지?”
“루벤 도련님은 잘 주무시고 계십니다. 도련님이 일어나는 시간은 8시니까요.”
“다행이네. 이번에 가면 진짜 아기를 낳을 것 같아. 루벤을 잘 부탁해, 세베로.”
“도련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영리하고 자기 할 일을 잘하시니까요.”
세베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디아나를 보고 빙긋 웃어주었다.
“순산하십시오. 세뇨라.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루벤 도련님 걱정은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고마워요, 세베로. 나……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세베로의 인사를 받고 차를 탔다. 바로 병원을 향하는 차 안에서 창밖의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가을 풍경들 사이에 무언가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바로 커다란 설렁탕 간판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설렁탕이라는 글자가 보이더니 점점 그 설렁탕집에 가까워졌다. 갑자기 병원으로 가기 전에 설렁탕집에 꼭 들어가고 싶었다. 사실 저녁 시간에 TV에서 설렁탕에 깍두기를 얹어서 먹는 걸 보고 침을 흘렸다.
“라울, 저기 잠깐 들어갔다가 가면 안 될까?”
“지금 무슨 소리야?!”
라울은 이미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집에서 통증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통증이 오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한 의사의 말 때문에 언제 통증이 시작되나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거다.
라울이 세상에서 제일 걱정스럽고 무서운 게 자신이 아기를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거다. 그러니 이런 반응도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디아나, 미쳤어? 지금 이 상황에 설렁탕집에 들어가자는 거야? 저게 뭔데, 나중에 아기 낳으면 설렁탕 체인점 사장님이라도 만들어 줄 테니까 지금은 그냥 가자고.”
그런데 이상하게 저게 꼭 먹고 싶다.
“라울…… 정말 저게 꼭 먹고 싶어요.”
그러나 내 말은 완전히 묵사발 당했다. 새파랗게 질린 라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기어이 기사에게 병원으로 바로 가라고 재촉했다. 병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의사들은 내진을 하고 진전 상황을 살펴봤다. 그러나 이상하게 진통은 주기적으로 오기는 하지만 그렇게 빨라지지 않고 있었다.
“허어, 며칠이라도 더 있는 게 아기에게 좋을 것 같은데…… 그냥 기다리지요.”
의사에 말에 라울은 갈등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 설렁탕 먹지 않고 와서 이러는 거야? 너무 오래 기다리면 엄마가 힘든데…….”
입원한 후 그렇게 3일이 지나자 라울도 집에 갔다 다시 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라울의 뒷모습이 어쩐지 안 됐다.
“불쌍한 라울…… 그나저나 태성이가 많이 기다리겠는데? 그렇다고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말이야.”
회사 일을 마치고 디아나의 병원에 들렀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디아나가 분만실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일을 해야 했으니까.
요즘 따라 바쁜 일들이 많아져서 집에 늦게 들어오면 태성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런 날은 세베로에게 오늘 태성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듣는다.
그동안 가정교사가 문제였는데 이번에 새로 온 가정교사가 그래도 잘 붙어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놓였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 있겠지만 디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이는요, 안정된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해요. 나 없는 동안 맨날 이렇게 태성이랑 같이 침대에서 잘 거예요? 물론 나는 같이 보면 아주 재미있지만 말이야. 당신하고 태성이하고 잠버릇이 같은 거 알아요? 자다 보면 한쪽 손을 이마에 올리더라고 그 작은 게 말이지요.”
그 말을 듣고 나도 일부러 태성이의 잠자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진짜 쪼끄마한 놈이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한 손을 머리에 올리고 잔다.
“내가 이렇게 잔단 말이야? 제법 멋있군.”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길이니 태성이 날 반겨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전에는 아빠가 퇴근하면 달려들어 안기기 바쁘던 놈이 요즘은 빙긋 웃으면서도 시크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 겨우 한국 나이로 3살밖에 안 된 놈이 왜 이렇게 뻣뻣한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또 생각해보면 웃음이 난다. 하긴 그런 게 딱 나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빠, 하고 달려오기는 하면서도 갑자기 그 앞에서 무게를 잡는다.
“오셨어요.”
저 말투도 너무 능숙한 거 아니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자 태성이 고개를 빤히 들었다. 그 눈이 꼭 이렇게 말하는 거처럼 보인다.
“아빠? 엄마 없어서 슬퍼? 내가 잘해 줄게.”
아니지. 아니야.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런 생각을 하겠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태성이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걸 앞으로 뻗는다.
“태성아, 이거 뭐야?”
태성이 씩 웃으며 말한다.
“내가 주는 거야. 힘내.”
태성이가 내민 것을 손에 받아 봤다. 곰돌이 모양 젤리 세 개.
“이거, 아빠 주는 거야?”
그러자 태성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응. 먹으면 기분 좋아.”
아, 귀여운 녀석. 태성이가 준 꼬마 곰 젤리를 입에 넣었다. 나도 어렸을 때 꽤나 좋아하던 거다. 물론 요즘은 먹을 일도 없고, 그런 걸 준 사람도 없었는데 이제 태성이가 준다. 입에 넣자 새콤하고 달콤한 젤리가 녹는다.
갑자기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이놈을 안 예뻐해. 나는 태성을 번쩍 들어 안았다. 태성이도 내 입에서 곰 젤리가 녹아가는 걸 보는 게 행복한 표정이다.
디아나가 없어서 그저 썰렁하기만 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 작은 녀석이 집안을 꽉 채운다. 요 작은 놈의 마음이 나를 다 감싼다.
태성이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잠들면 자기 방에 데려다 놓으려고 했는데 그만 나도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디아나에게 가자 아주 진지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라울, 아무래도 설렁탕 때문이 아닐까요? 나 진짜 먹고 싶단 말이에요.”
“꼭 먹어야겠어?”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디아나는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설렁탕집에서 아기가 나오기야 하겠어?
기어이 외출을 허락받고는 디아나를 데리고 설렁탕집을 갔다.
“여기 설렁탕 한 그릇 주세요.”
달랑 한 그릇을 시키자 디아나가 묻는다.
“당신은 안 먹어요? 여기 맛집이라고 TV에도 나온 집인데.”
나는 목소리를 쫙 깔고는 작게 말했다.
“지금 설렁탕이 넘어갈 거 같아? 언제 아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나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마음대로 해요.”
그렇게 설렁탕에 깍두기를 얹어서 디아나는 기어이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얼굴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하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면 디아나는 스페인에서 자라 설렁탕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을 텐데 왜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설렁탕을 먹는 나를 보며 라울이 놀랍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이런 곳에 함께 올 일은 전혀 없었는데 라울은 설렁탕같이 국물이 많은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나 때문에 여기 와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악, 아! 라울! 나, 지금 배가 아파요.”
이미 어느 정도 자궁 문이 열린 채로 기다리던 중이었다. 빠르게 진통이 시작되었다. 라울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나를 안았다. 그러나 진짜 배가 너무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아, 아악! 아기가 진짜 나오려나 봐요.”
“헉! 안 돼. 절대 안 돼! 여기서?”
라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설렁탕집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걱정을 해주고 서빙하던 아주머니가 내 신발을 들어 차에 넣어 주신다.
“빨리 병원으로 가! 빨리!”
차에 타기 무섭게 라울이 소리쳤고, 기사는 빠르게 병원을 향했다. 라울은 차 안에서 나를 꼭 안은 채 말했다.
“디아나, 참아. 아가야. 여기서는 안 된다. 진짜 안 돼. 응?”
진통이 시작된 나보다 라울이 더 아파 보인다. 아주 위독한 상태로 보여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미리 연락해서 차가 병원 앞으로 오기 무섭게 간호사들이 이동침대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그대로 침대에 실려 분만실로 향했다.
분만 대기실에서 간단한 내진을 하고는 바로 분만실로 가는데 라울이 가운을 입고 따라 들어와 옆에 있어 주었다. 내 손을 꽉 잡고 나만 바라보는 라울.
무서운 진통이 휘몰아치고 눈앞이 아득할 때 아기가 태어났다. 온몸에 힘을 빼고 옆을 돌아보니 라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 라울의 표정이 너무 감동적이다.
“라울, 설마 울어요?”
“그럴 리가. 내가 울다니! 아무리 디아나가 아기 낳는 걸 지켜보기 힘들고 차라리 내가 대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도 절대 울지는 않는 남자야.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꾸하는 라울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라울 자신은 모를 거다. 나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고백한 것도 모를 거다. 바보같이.
함께 사랑하고 함께 아기를 낳는다. 아플 때 옆에 있고 두려울 때 손을 잡고 이겨나간다.
지금 우리는 두렵고 힘든 순간을 또 함께 넘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나도 그도 지친 마음과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한 감동으로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벅찬 숨을 쉰다. 백 마디의 말보다 귀하고 위로가 되는 눈길이었다. 옆에서 바로 아기의 탯줄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갓 태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쁜 아기였다. 라울도 나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공주님이야.”
“라울. 우리 딸이 생겼네요. 당신 좋겠어요.”
“응. 행복해. 고마워. 디아나. 정말 수고했어.”
그렇게 겨우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때 간호사가 다가왔다.
“회장님, 비서실에서 시간이 다 되었다는 연락이 계속 오고 있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나는 라울을 보았다. 보나 마나 중요한 회의가 있을 거다. 이럴 때 연락이 올 정도면 대외적인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무슨 일 있어요?”
“음. 정부에서 주관하는 기업인 회의. 이제 가면 돼.”
“이제 가면 되는데 이렇게 연락을 하겠어요? 어서 가 봐요. 난 이제 괜찮아요. 좀 쉴게요.”
라울이 내 이마에 키스해 주고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눈을 감았다. 몰려드는 피로와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디아나가 딸을 출산한 소식은 바로 집에 있는 세베로와 태성이에게 그리고 한남동 친정과 회사에 퍼졌다. 회의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집으로 가지. 그리고 남은 오늘 일정은 모두 정리해.”
차에 타기 무섭게 나는 비서에게 말했다. 이제 집에 가서 태성이를 데리고 동생을 보여주러 갈 거다. 태성이 녀석은 여동생이 생겨서 얼마나 좋을까? 나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을 때가 있었는데.
하긴. 디아나가 나한테 여자고 아내고 여동생이고 전부 다야. 난 디아나만 있으면 돼.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나에게 진짜 여러 역할을 다 한다.
집에 도착하자 벌써 태성이는 세베로와 함께 외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태성아, 동생 보러 가자.”
“동생? 아가?!”
태성이가 신이 나서 뛰어다닌다. 동생이 생긴 게 저렇게 좋을까?
“동생 생기니까 그렇게 좋아?”
“응.”
“뭐가 그렇게 좋아?”
“나도 시킬 거야. 휴지 버리라고 그러고 과자 가져오라고 그러고.”
꽥!
태성이 말에 세베로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태성이 이놈은 정말 방심하면 안 되는 놈이다.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러나? 내가 저한테 심부름 좀 시켰다고 동생 생기면 그대로 하려고 했다니!
안 돼. 우리 공주님을 막 부려먹게 둘 거 같아?
유아용 카시트에 태성이를 앉히고 세베로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허벅지 위에 있는 내 손을 아주 작은 손이 꼭 누른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두들긴다. 귀여운 자식. 나는 태성이를 무릎에 앉히고 가만히 녀석의 눈동자를 보았다.
반짝이는 동그란 눈동자. 고집스러운 눈썹. 슬쩍 보면 나하고 똑같은 거 같지만 디아나도 닮았다. 신기하고 귀여운 얼굴이다.
“안 됩니다. 주인님. 도련님을 카시트에 다시 앉히세요.”
깐깐한 세베로. 다시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자 늦은 시각이 되어서인지 태성이는 스르륵 눈을 감는다. 불과 20분 거리인데 퇴근 시간이라 40분이 넘게 걸렸다.
병원에 도착하자 신생아실부터 들렀다.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저기 저 공주님이 내 딸인 걸 말이다. 유난히 또렷한 얼굴을 하고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자고 있는 공주님. 내 딸이다. 이 라울 까스틸로의 딸.
동생을 보겠다고 왔으면서 태성이는 내 품에서 잠이 들어 일어나지 못한다. 흔들어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태성아. 동생이다. 아가야.”
“아가?”
제 눈에도 이렇게 작은 사람이 신기한지 태성이 한참을 말도 없이 아기를 본다. 눈도 뜨지 않고 꼬물거리는 표정뿐인데도 눈길을 뗄 수 없다. 태성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너무 못생겨서 놀랐지만 지금 우리 공주님은 더할 수 없이 예쁘다. 빨간 얼굴도 예쁘게만 보인다.
아이가 신생아실에 잘 있는 걸 보고 디아나를 찾았다. 지쳐 보이지만 그래도 밝은 표정이다. 진통이 길기는 했지만, 마지막에는 빠르게 낳을 수 있어서 체력이 그리 많이 소모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의사가 말을 해줬다.
“디아나, 좀 잤어?”
나는 디아나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하아! 아기를 디아나밖에 낳을 수 없다니. 물론 나는 무서워서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귀여운 태성이도, 또 저렇게 예쁜 공주님도 낳았으니…….
“고마워.”
“나도 고마워요 라울.”
“뭐가 고마워? 아파서 내 머리라도 뽑고 싶지 않았나?”
“물론 그렇기는 해요.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아까 아기 낳을 때 생각이 났더라면 지금쯤 당신 머리가 반은 대머리가 됐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자 라울의 얼굴색이 확 변한다.
“하여튼 이 남자는 무슨 농담을 못 해. 그리고 이렇게 아기 낳느라고 힘들었는데 머리 좀 뽑히면 어때서, 싫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수고하고 힘든 거 너무 고맙고 미안해.”
“태성이 데리고 왔네요?”
태성이는 갓난아이를 보고는 바로 잠이 들었는지 라울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여튼 잠을 잘 자는 건 좋은 일이야.
“내가 오늘 좀 피곤했거든? 그런데 태성이가 내 손을 토닥토닥 해줬다.”
“요즘 태성이한테 위로를 많이 받네요?”
“음. 아무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아.”
“뭘 말이에요?”
“이놈이 나의 후계자라는 걸 말이야. 나처럼 마음이 넓잖아.”
* *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곳곳에서 자선 바자회가 있었고, 기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 파티도 자주 있었다. 부부 동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부인들만 모이는 모임도 있어서 이래저래 점점 더 바빠졌다.
이제 백일이 다가오고 있는 가연이를 떼어놓고 나갈 때마다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오늘은 오후 2시에 있는 간단한 다과를 곁들인 자선 파티였다. 식사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이런 오후의 티파티는 부담이 없다.
오늘 모임은 보육원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해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자선 파티였기에 나는 조금 더 신경을 썼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며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긴 6년 전 만 해도 나도 그랬으니까. 보육원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엄마와 함께 스페인에 살 때 늘 빠듯한 형편이라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어려운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언제나 그렇듯 이제 겨우 이십 대 후반인 나는 재벌 총수들이 모이는 모임에 가면 안주인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오늘은 바이올렛 투피스를 입고 목에 실버폭스 목도리를 둘렀다. 라울이 스페인에 갔을 때 사다 준 걸로 독특한 윤기가 있어 눈에 띄는 목도리였다.
물론 목도리를 사가지고 온 날에도 라울이 한 말이 있다.
“보고 싶어. 목도리만 두른 거.”
“완전 변태인 거 알아요?”
“사람을 뭐로 보고. 나 변태 아니야! 디아나 팬티에 집착하고 다 벗고 내 선물 두른 것만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변태는 아니라고.”
기어이 나는 알몸에 실버폭스 목도리를 하나 둘렀다. 그리고 진짜 여우가 되어버렸다.
“아오우…….”
여우 소리를 내며 장난치는 나의 알몸에 라울이 다가와 길게 혀를 내밀고 핥았다. 발가락에서 시작해서 허벅지 그리고 은밀한 속살까지 말이다. 그의 혀가 늑대의 길다란 혀처럼 내 속살을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아래의 느낌과 젖어 드는 느낌. 그리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전율이 나를 감쌌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딱 늑대 같이 느껴졌다. 실버폭스 목도리 하나를 두른 나를 그대로 끌어안으며 그가 유난히 커진 남성을 뜨거운 속살에 밀어 넣었다.
“흐윽…….”
그 밤에 여우 목도리 하나를 두르고 밤새도록 하나가 되어 타올랐다. 라울은 감촉 좋다고 하면서 얼굴을 비비며 진짜 늑대처럼 나를 핥아먹었다. 그 날을 생각하니 거울을 보는 내가 얼굴이 다 달아오른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건 깨끗하게 드라이한 거다. 이걸 목에 두를 때마다 라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마 자기가 두르고 다니고 싶어서 산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좋아하는 목도리였다. 은회색이 감돌아서 오늘 입은 투피스와도 잘 어울렸다.
차에 타자 기사는 바로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겨울 거리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추울 때라서 더 썰렁하고 힘들어 보이는 거리의 노점상들. 그렇게 밖을 보다가 나는 기사에게 잠시 차를 세우라고 했다.
“잠깐, 잠시만 멈춰주세요.”
그리고 뚫어질 듯 창밖을 향해 바라보았다.
분명 윤주 이모였다.
허름한 시장통에서 행상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초라한 행색을 하고 시장 한쪽에서 양말과 스타킹 같은 것을 팔고 있는 게 보인다.
함께 스페인에 있을 때는 늘 모양내기를 좋아했던 윤주 이모였는데 50대 중반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사모님, 내리실 건가요?”
말없이 밖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기사가 말을 걸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것 같은데요.”
“네, 출발해주세요.”
그렇게 출발한 뒤에도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처음부터 이모라고 불러서 그런지 그렇게 많은 안 좋은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호칭은 이모라고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렇게 시장에서 행상하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짠하면서도 또 마지막까지 잘못했다는 사과 한 마디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게 떠올라 얄밉고 분하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마드리드 민박집에서 어렵게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저러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나는 지금 이렇게 여유 있고 부유한 모습이고 윤주 이모는 행상을 하고 있다.
혜정이는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