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1화 (31/43)

로얄 스캔들 7

- 외전 -

1.

“주인님,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휴가입니다. 잘 즐기다 오겠습니다.”

평소의 말쑥한 정장 차림과는 달리 은회색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캐주얼한 재킷을 입은 세베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멋진 중년의 신사였다.

깊고 진한 회색빛 도는 눈동자와 정중함이 몸에 밴 움직임은 그의 품위를 더해주는 듯 보였다.

오늘 세베로가 휴가라고?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라 나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울이 뭐라고 하는지 기다렸다. 그러자 아주 느긋한 목소리가 울린다.

“다녀와. 세베로. 좋은 시간 보내라고.”

씩하고 한쪽 입가만 올린 라울의 표정이 어쩐지 불량한 느낌이 든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량하다기보다는 은밀한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건 여자로서 느끼는 육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마치 수컷끼리 오가는 은밀한 언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세베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라울의 그런 말에 세베로는 여전히 단정하게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입니다. 주인님. 그리고 세뇨라, 몸조심하세요. 이틀 후에 다시 뵙겠지만 말입니다.”

한창 배가 부른 나를 보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세베로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세베로. 하지만 아직 출산 날짜는 넉넉하게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틀간 휴가인 줄 난 몰랐네요. 혹시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요?”

“그저 가끔 있는 일탈이랄까요?”

세베로는 여유 있게 웃고는 현관을 나섰다. 나가는 세베로의 뒷모습에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어서 라울에게 물었다. 물론 평소에도 묻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라울, 그런데 세베로 말이에요. 왜 아직 여자가 없어요? 세베로 정도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세베로 같은 남자, 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들렸던 걸까? 세베로에 대해서 궁금해서 물어본 게 잘못된 걸까? 라울의 눈썹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더니 눈동자가 진한 보랏빛에서 어두운 검은색으로 바뀐다.

“지금, 나하고 같이 살면서 세베로가 멋있다고 하는 거야? 내 앞에서 세베로가 딱 디아나 당신 타입이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니 그러면 왜 세베로를 두고 나하고 결혼을 한 거지?”

하여튼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라울이 아니었으면 세베로를 만날 수나 있었나? 그리고 세베로가 왜 아직도 혼자냐는 질문이 이런 쪽으로 튀는 거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라울. 세베로는 그냥 여자들이 봤을 때 멋있는 사람이라고. 저렇게 다정하고 젠틀한 세베로를 어떤 여자가 싫어하겠어요? 당연히 나도 세베로를 좋아하고요.”

어디 더 질투해 보든가. 하여간 아무 데서나 라울은 가장 주목을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 심보가 얄미워서 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라울의 눈이 완전히 세모가 되었다. 왜 이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유치해지는 거지?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런 그의 유치함에 익숙해진다는 거다.

“내가 당신 그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만일 세베로를 더 먼저 만났으면 말이지요, 세베로를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에요?”

그제야 라울의 얼굴이 풀어진다. 세베로와 내가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걸 이제야 생각한 거야? 그리고 지금 나이 차이를 떠나서 지금 세베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모든 얘기를 자기하고 결부시키는 거야?

곱지 않게 보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라울이 나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세베로도 여자 있었어. 늘. 아마 지금도 있을걸?”

“정말이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세베로가 데이트하러 나가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세베로가 유능한 거야. 남자가 봤을 때 저렇게 표 안 나게 데이트하는 사람들이 더 무섭거든.”

정말 의외였다. 세베로에게 늘 여자가 있었다니 말이다. 혹시 이거 라울이 내가 세베로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괜히 모함하는 거 아니야?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야 나는 세베로 젊었을 때부터 아니까. 세베로가 결혼했던 것도 알고.”

“정말이요?”

그런 말은 정말 금시초문이다. 세베로가 결혼을 했었다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세베로가 정확하게 몇 살인지도 모른다. 그런 걸 라울에게 물어본 적도 없다. 하긴 물었어도 도끼눈을 뜨고 그런 건 왜 묻느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라울이 슬그머니 허리에 팔을 두른다. 그의 손길이 허리에서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자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그럼…… 이혼한 거예요?”

당연히 이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혼자 있을 테니. 그러나 라울은 다른 말을 한다.

“이혼한 게 아니야.”

“그럼요?”

“죽었어. 암으로.”

“네?! 어쩌면 그런 일이…… 젊은 나이에 말이에요?”

“그래, 세베로가 서른 살쯤 됐을 땐가? 한참도 전에 이야기지. 세베로가 지금 마흔아홉인 걸 생각하면 말이지.”

정말 뜻밖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하고 여유 있고 보살피는 업무가 딱 맞는 그런 세베로였으니 말이다.

“저런, 너무 안됐어요. 그런데 그 뒤로는 재혼도 안 하고 이제까지 혼자 사는 거예요?”

“그거야 개인적인 일이라 잘 모르겠지만 재혼한 적은 없고. 여자는 있었던 걸로 알고 지금도 있을걸?”

“정말이요?”

“글쎄, 어찌 됐든 여자들이 다 세베로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고 세베로가 여자들을 만나고 데이트를 하는 것도 사실이지. 아마 세베로는 정력도 끝내줄걸? 그 허벅지를 봐! 나하고 테니스 칠 때도 절대 지치지 않지. 그러니 어떤 여자들이 안 좋아하겠어?”

하여간 말을 해도 꼭 자기 관점에서 말을 한다. 나는 세베로가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게 허벅지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세베로의 친절함이나 다정함 때문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정력까지 세다면 더 좋아하려나?

아이, 몰라! 진짜 라울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나까지 점점 이상해진다니까.

라울은 나를 안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세베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세베로는 집사로서 아주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절대 감정을 드러내거나 데이트라던가 그런 개인적인 일로 세비야에 있는 성의 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이제 세베로 이야기는 그만하지. 지금 디아나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 남자는 세베로가 아니라 바로 나거든.”

라울이 그렇게 말하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임신 8개월에 들어서는 배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볼록했지만 라울은 전혀 불편하지 않게 부드럽게 뒤에서 나를 감싸 안고는 몸을 쓰다듬는다.

“아아…… 라울.”

“쉿! 설마 안 된다느니 더 조심해야 한다느니 그런 말이라면 하지 마! 지금도 몸에서 사리가 나올 만큼 조심하고 있거든!”

귓가를 간질이며 속삭거리는 그의 입김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런 웃음도 그의 손길에 점점 달아오르면서 작은 신음으로 바뀐다.

임신으로 더 부푼 가슴은 예민하기 그지없다. 그런 예민한 가슴을 손으로 감싸 쥐자 오싹한 전율에 몸이 떨린다. 라울이 입술을 내려 가슴을 빨자 젖가슴이 온통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다.

그의 손이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젖어 든 속살을 문지르는 손끝에는 느긋한 부드러움이 느껴지지만 귓불을 핥는 입김은 뜨겁기만 하다.

“하아…… 라울.”

“왜 이렇게 예쁜 거야. 평생 정신 못 차리게 마법이라도 건 거지.”

귓불을 물고 속삭이는 라울의 말에 웃음이 터진다. 그렇게 예뻐 보인다니 정말 다행이지만 이렇게 몸이 맞닿기만 하면 달려드는 건 대체 언제까지일까?

라울의 단단한 남성이 파고들었다. 키스와 애무로 충분히 젖어 있었지만 진한 자극을 남기며 파고드는 단단한 라울의 몸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픈 건 아니지?”

치골을 바짝 들이대고 묻는 라울의 목소리는 열정으로 들떠 있었다. 아픈 건 아니다. 너무 자극적일 뿐. 고개를 젓자 라울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뒤에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한다.

교묘하게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비틀며 아래를 꽉 채운 그의 남성 때문에 연거푸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온다. 그의 한 손이 그렇지 않아도 부푼 예민한 돌기를 자극하자 나는 순간적으로 절정을 느끼며 타올랐다.

그런 내 골반을 꽉 잡은 채 라울은 조금 더 빠르게 몸을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숨을 토하며 나를 더욱 끌어안는다. 따뜻한 정사 뒤에 오는 나른한 행복감. 라울의 입술이 다시 내 목덜미를 비비고 있었다.

“사랑해. 디아나.”

“나도요. 라울.”

은근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신사동의 한 재즈 바에서 세베로는 와인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즐기는 세베로였다. 스페인에서는 이렇게 와인을 마시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기도 했다.

물론 서울에서도 휴일이면 여행을 하거나 이태원 등에서 한국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저 느긋하게 와인의 향기와 조용한 자유를 맛보고 싶었다. 재즈도 와인도 좋았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딱 세베로가 선호하는 그런 곳이다.

세베로는 테이블을 잡지 않고 바에 앉아서 기분 좋게 와인을 한 모금하고 크림 같은 치즈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감촉을 음미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에 한 여자가 의자 하나를 건너 옆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앉자 달콤한 딸기 향기가 세베로의 숨에 섞여들었다.

그 상큼한 향기 때문이었을까? 세베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바텐더를 향해 작게 말했다. 숙인 고개 때문에 머리카락이 쏟아져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 제일 독한 걸로, 스트레이트로 한 잔 주세요. 한 잔만 먹어도 다른 생각 같은 건 하나도 나지 않는 그런 걸로요.”

억양이 순수 한국인 억양은 아니었다. 교포나 외국인?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와인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단숨에 삼킨 여자가 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기침 때문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이 세베로의 눈과 마주쳤다. 턱이 뾰족하게 보일 만큼 갸름한 얼굴은 말랐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지금 마신 술 때문인지 흐릿하게 보였지만 독한 술을 즐겨하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지금도 기침을 하느라 정신없는 걸 보면 말이다. 세베로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의 앞에 놓았다.

“그렇게 마시면 써요. 얼음물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세베로는 바텐더에게 얼음물을 한잔 달라고 하고는 다시 옆자리의 그녀를 보았다.

영어로 말하는 세베로에게 그녀는 손수건을 들고 입을 닦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정말 독하네요. 아무 생각이 들지 않게 말이지요.”

살짝 웃는 그녀의 얼굴은 분명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아주 슬퍼 보였다.

그러나 세베로가 인상을 쓴 것은 단순히 그녀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든 멍 때문이었다. 아는 척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맞은 게 분명했다.

관자놀이에 있는 푸르스름한 멍과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그녀가 조금 더 세베로의 마음을 파고든다. 무겁게 느껴지는 안쓰러운 아름다움.

그가 굵은 목소리를 낮게 울리며 그녀를 향해 말을 던졌다.

“뭔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세뇨리따.”

미소 지으며 묻는 세베로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옆으로 가서 앉아도 되는가를 물으려고 할 때였다. 그녀가 세베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같이 나가실래요?”

당돌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클럽에서 춤이나 추고 원나이트를 즐기는 그런 어린 여자는 아니었다. 세베로는 말 대신에 그녀를 훑어보았다. 니트 원피스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모습이 특별히 멋을 낸 것은 아니지만 세련되고 분위기 있어 보인다.

슬퍼 보이는 흐릿한 눈과 가녀린 실루엣 때문인지 몰라도 세베로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를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전혀 헤프게 보이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

세베로는 말 대신 일어서서 그녀의 옆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먼저 제의해 놓고도 약간 망설이듯 세베로의 손을 바로 잡지 않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세베로는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그러자 여자가 세베로의 손을 잡는다.

둘은 재즈 바를 나와서 가까운 호텔로 들어섰다. 세베로는 능숙하게 키를 꽂고 안으로 들어섰으나 여자는 한 걸음 반은 느리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까이서 본 여자의 얼굴은 세베로의 짐작대로였다. 관자놀이에 든 멍은 화장으로 가렸어도 표시가 날 만큼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마른 몸. 팔목도 손도 가늘고 희다.

“교포인가요?”

“네.”

“이름 물어도 되나요? 난 세베로에요.”

세베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에 앉으며 말하자 그녀도 세베로를 따라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그러나 세베로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베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름 같은 거 모르는 게 나아요. 그냥 지금 이대로 날 안아줄 수 있어요?”

“…….”

“싫어요?”

커다란 눈을 위로 뜨며 묻는 그녀를 보며 세베로가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여자는 안아달라고 먼저 했으면서도 세베로의 키스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다. 세베로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중에 말해 줘요. 그럼.”

여자의 귓불을 물고 뜨거운 숨을 불어넣자 잔뜩 긴장한 그녀가 눈을 감으며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세베로는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품에 파고든 여자의 정수리에 키스하고 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니트 원피스를 벗기자 아이보리 슬립이 눈에 들어온다. 부드러운 슬립의 감촉보다 어깨에 난 푸른 멍이 더 그의 눈을 자극했다.

세베로는 천천히 여자의 멍든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다가 그곳에 입 맞추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앙상한 어깨에 이런 자국을 낸 놈을 향해 분노가 치밀었으나 세베로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세베로가 키스한 곳이 멍든 곳이라는 걸 그녀도 알았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세베로를 보며 물었다.

“보기 흉한가요?”

세베로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흉하지는 않다. 안쓰러울 뿐. 그녀는 관자놀이의 푸르스름한 멍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세베로가 다시 그녀를 안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세베로의 단추를 풀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걸 세베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몇 번의 입맞춤이 오가며 둘의 숨결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조금 전에 독한 위스키를 마신 여자의 입술에서는 위스키 맛이 났다.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먼저 원나이트를 제의한 여자가 어째서 불량하거나 쉽게 느껴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세베로는 딸기 향을 풍기면서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는 가을 같은 여자를 품에 안았다.

“하아. 난, 오늘 정말 슬퍼요. 누군가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당신이어서 다행이에요. 당신…… 좋은 사람 같아요.”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세베로를 보며 한 말이었다. 착하게 느껴지는 여자. 억누른 감정이 말과 말 사이에 새어나오고 있어서 세베로는 말 대신 그녀를 더 꽉 안아주었다.

“쉿! 당신은 남자라면 누구든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멋진 여자예요.”

세베로의 말에 그녀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다른 남자가 했다면 뻔한 멘트였을 텐데 이 남자의 말은 다르다.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진정을 담은 그런 말. 그런 목소리. 눈길.

여자가 세베로의 눈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재즈 선율같이 나른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가지 여자였다. 그녀의 가는 팔이 목에 감기자 세베로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 줌도 안 되는 가는 허리와 보드라운 살결, 갈증 나는 딸기 향과 촉촉하게 젖어 드는 몸이 그를 정신없이 빠져들게 한다.

세베로의 단단한 다리가 그녀의 좁은 허벅지를 누르며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달뜬 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첫눈에 알아본 그대로였다.

가늘고 여린 목덜미와 어깨, 하얗고 매끄러운 살결.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민감한 반응. 세베로의 손길을 두려워하면서도 건드릴 때마다 떨며 반응한다. 크다고 할 수 없는 가슴이지만 입술이 닿자 신음했다.

도드라진 젖꼭지를 입에 물자 흠칫 놀라면서도 강한 흡인력에 머리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튼다. 세베로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가는 허리를 휘어 감고 아래를 비비자 다리를 꼰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다리를 벌려 남자의 허리에 감았을 거다. 뭔가 다른 반응이었지만 조금 더 조급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세베로는 가슴을 빨던 입술을 천천히 내려 매끄러운 배에 키스했다. 출산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그런 배였다. 어린 여자의 배처럼 그렇게 납작하고 판판하고 부드럽다. 배꼽에 혀를 밀어 넣자 여자는 몸을 웅크리려고 한다.

세베로가 단단히 허벅지를 잡고 다리를 벌렸다. 젖어 든 속살이 발갛게 보이자 아무리 여유 있는 세베로라도 조바심이 들었다.

바로 한입에 속살을 베어 물자 뜨거운 신음이 방안을 울렸다.

“하아…… 거긴…… 흐윽.”

채 말도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는 여자의 반응에 세베로는 더 집요하게 혀에 힘을 주어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안의 느낌과 촘촘하고 조밀조밀 움직이는 속살이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이다.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고 돌기를 혀로 건드리자 엉덩이가 바르르 떨리면서 맑은 액체가 쏟아진다. 세베로는 더할 수 없이 부푼 남성을 그녀의 젖어 든 속살에 대고 비볐다. 부드러운 살결의 마찰이 일으키는 황홀한 짜릿함.

이 이상 시간을 끈다는 건 낭비였다. 세베로가 힘주어 안으로 밀어 넣자 말할 수 없이 조여 대는 속살에 가슴이 다 내려앉을 것만 같다. 꿈에도 원하던 이상형의 여자. 이렇게 잘 맞는 그런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마음을 파고드는 건 내내 젖어있는 눈이었다. 쾌락에 흐트러져 있을 때조차 슬프게 젖어 있던 그녀의 눈. 세베로가 그녀의 눈두덩이에 키스했다. 그리고 조금 더 힘을 주어 몸을 밀어 넣었다.

깊은 안쪽 끝에 닿는 그 아찔함에 힘차게 몸을 밀고 빼기를 반복하는 동안 여자의 팔이 세베로에 목에 감기고 두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긴 채 매달려 신음하고 있었다. 활짝 핀 난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동작이 점점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세베로의 단단한 팔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연이어 깊은 안쪽 끝을 자극하는 세베로의 커다란 남성에 그녀의 목덜미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세베로는 빠르게 몸을 쳐대면서도 그녀의 젖은 등을 쓰다듬으며 다시 도드라진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하아, 하아…….”

“당신은 너무 멋진 여자야.”

세베로가 그녀의 상체를 들어 안았다. 몸무게 그대로 눌리며 세베로의 것이 깊게 들어찬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세베로에게 매달렸다. 세베로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골반을 잡고 무섭게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들어 올렸다가 내리꽂듯이 내려놓으며 허리를 쳐올리자 내리 꽂히는 힘과 올려치는 힘이 맞부딪치며 하얗게 눈앞이 부서진다. 있을 수 없는 자극이었고 상상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세베로는 그녀를 그렇게 안고 몸을 비비다가 순간적으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뜨거운 액체가 뿜어져 흩어진다. 이런 황홀한 여자를 만나다니. 세베로가 연거푸 그녀의 얼굴과 목에 키스했다. 그녀와 하나가 되는 게 너무 좋아서 세베로는 밤새 몇 번이나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새벽이 다 돼서 그도 그녀도 잠에 빠져들었다. 자면서도 세베로는 그녀를 꼭 당겨 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행복한 밤이었다.

다음날 세베로가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둘러보아도 여자의 흔적은 없었다.

아침이라도 같이 할 생각이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얼굴도 안 보고 갈 필요까지 있었을까?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하룻밤을 같이 보낸 그 여자가 그립다. 사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면 사람의 인연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데도 많이 아쉽다. 그녀가 있던 침대를 한 번 더 쓸어보다가 결국 일어났다. 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아쉬운 마음을 한 번 더 누르고 그대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세베로는 경주행 KTX를 탔다. 열차 안에서도 어젯밤의 뜨거운 숨결과 작은 새처럼 가늘었던 그녀가 생각난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는 여자를 만났다.

“그렇게 떠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혼자 중얼거리다 눈을 감았다. 빠른 열차가 소음도 없이 철로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내일까지는 휴가다. 세베로는 나름의 휴가를 혼자서 보내고 있었다.

* * *

“앉아!”

또 시작이다. 라울이 태성이만 보면 하는 소리다. 나는 주방에서 간식을 챙기고 있다가 라울의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빠르게 거실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태성이가 라울의 말에 바로 쪼그리고 앉는다.

“일어서!”

정말 군대도 아니고…… 아이만 보면 “앉아”, “일어서”를 외치는 라울이나, 라울이 말할 때마다 바짝 군기가 들어서 앉았다 일어나는 태성이나 정말 못 말린다.

“제발 그만 좀 해요. 애한테 왜 자꾸 그런 걸 시켜요?”

나는 태성이가 라울처럼 이상한 구석이 생길까 그게 걱정이었다. 태성이가 잘 걷고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후부터 라울은 애만 보면 앉아 일어서를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귀엽잖아. 내 말이라면 다 듣고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말이야.”

그런데 그게 얼마 가지 않아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하루는 라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태성이가 와서 인사를 했다.

“다녀오셨어요.”

라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더니 바로 태성을 보고 늘 하던 대로 한마디 했다.

“음. 우리 태성이. 앉아!”

그러자 태성이가 가만히 라울을 보다가 그대로 걸어서 소파로 가더니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단 한마디 대꾸도 없이 말이다.

“쟤, 왜 저래?”

“후후,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어요?”

생후 22개월에 이미 자기 살길을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태성이가 되었다. 라울은 태성이를 무척 사랑하고 기대도 컸지만, 그 표현법은 참 독특했다.

“당신, 해고야!”

흥분하여 호통을 치는 라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난 뒤로 바로 문이 열리고 침통한 얼굴의 가정교사가 거실로 나왔다. 이게 벌써 몇 번짼지. 그런데 그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이어지는 일이었다.

“뭐야, 아이가 자고 싶다고 시간도 아닌데 마구 재우고, 스페인어 시간과 한국어를 사용하는 시간도 제시간을 지키지 않고 어겼다고? 이봐, 당신도 해고야!”

정확하게 열네 번째 가정교사가 해고된 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라울! 지금 열네 번째로 가정교사를 해고한 거라고요. 당신, 알고는 있어요?”

“그런가? 도대체 제대로 된 가정교사 구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루벤에게 가장 완벽한 가정교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나한테 있다고. 내 아들이 어떤 애인 줄 알아? 한국 이름은 진태성. 바로 MK 그룹의 차기 후계자지. 그다음 스페인에서는 어떻고! 그 이름도 고귀한 루벤 데오필로 까스틸로 진. 바로 우리 외조부이신 루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거지.”

하여간 저 소리도 이제 자다가도 외울 정도다. 저 사람의 자부심은 도무지 가라앉을 징조를 보이지 않는다.

결혼 전에는 자기 이름을 들먹이더니 이제 입만 열 면 태성이 이름을 들먹거린다.

다행히 한 세대가 흘러서 태성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서 한참 멀어졌는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말이다.

하긴 아직도 라울은 왕위 계승 서열이 있다. 중간에 세 분이 돌아가셨는지 184위. 앞으로 183명의 왕족이 모두 한꺼번에 죽으면 라울이 스페인 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아직도 나와 라울이 다를 건 없다. 183명이 한꺼번에 죽는 일은 없을 테니 나도 그도 왕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문제는 이제 22개월 된 태성이의 가정교사를 구한다고 난리가 아니라는 거다.

정작 태성이는 저렇게 장난감을 가지고 잘 놀고 있는데 말이다. 내 눈이 태성이를 바라보고 다시 라울에게 향하자 라울은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MK 그룹의 스페인 지사와 안달루시아 최고의 세비야의 성, 그다음에 세비야의 방적과 양모 공업의 최고 경영자가 될 아이라고. 그런 아이에게 최고가 아닌 가정교사를 둔다는 것은 이 라울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최고의 가정교사를 찾으라고. 이렇게 애 하나를 다루지 못해서 맨날 바꿔치지 말고 말이야.”

어쩔 수 없는 라울이었다. 결혼하고 많이 달라지는 거 같긴 했지만, 뼛속까지 배어 있는 그 자부심과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직도 잘 바뀌질 않는다. 더군다나 태성이에 대해선 더하다.

태성이가 아들이라 더 그런지, 이건 아들이 아니라 아예 기업 후계자를 키우겠다는 심산이다.

그것도 이제 겨우 두 돌이 안 된 태성이에게. 물론 한국 나이로는 3살인 거 안다. 하지만 이렇게 귀엽고 내가 볼 땐 그저 아기인데.

물론 태성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발육 상태도 좋고 말도 잘하는 건 사실이다. 부자간의 대화를 보면 기가 막히니까.

태성이는 끄덕끄덕 아빠가 어릴 때 탔던 목마를 탄다. 라울도 어렸을 때 목마를 좋아했다고 하더니 태성이도 딱 그래서 세비야의 녹색 방에 있는 그 목마를 자주 탔다. 그래서 한국으로 올 때 그 목마를 가지고 와서 서울에서도 매일 타고 있다.

오목오목 살이 패는 통통하고 귀여운 손으로 목마의 손잡이를 잡고 말을 타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운지…… “까!” 한 번씩 소리를 지르며 말 위에서 온몸을 흔들어댄다.

그런 태성이가 귀여워서 라울은 서재에도 목마를 하나 더 마련해 두었다. 자기가 일하는 동안에도 아이가 거기서 목마를 타도록 말이다.

라울은 태성이를 귀여워하면서도 일상에서도 두 개의 언어를 습득하도록 꼭 태성이를 부를 때도 한번은 태성이라고, 한번은 스페인 이름인 루벤이라는 이름을 부른다. 처음에는 태성이가 헷갈렸으나 요즘은 태성이라고 불러도, 루벤이라고 불러도 잘 반응한다.

그런데 문제는 라울에게 있다. 라울은 그렇게 자기가 직접 뭘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뭐가 있으면 옆에 사람에게 자주 시키는데 태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성이는 아빠 말을 잘 들어서 라울이 ‘저기에 있는 올리브를 집어와.’ 그러면 테이블 위에 있는 올리브를 집어다 아버지 앞에 가져다주기도 하고, ‘루벤. 거기 종이 좀 가져와.’ 하면 종이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워낙 앉았다 일어서로 단련이 되어 있었으니 할 말도 없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그럴까? 루벤이 끄덕끄덕 목마를 타고 있을 때였다. 라울은 서재 책상에 앉아있고 나는 서재 안의 소파에서 태성이가 목마를 타는 걸 지켜보며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라울이 태성이를 불렀다.

“루벤! 여기 테이블 위에 있는 쓰레기 좀 갖다 버려.”

그건 라울이 까먹고 난 캐러멜 껍질이었다. 나는 태성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러자 태성이는 라울이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계속 끄덕끄덕 말을 타더니 아주 담담한 어조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니가 버려.”

태성이의 말에 라울이 너무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나를 부른다. 눈동자가 원형을 이루며 흰자위 위에 떠 있다.

“디아나! 들었어? 쟤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런 줄 알아?”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글쎄, 저놈이 나보러 니가 버려 그랬어.”

“…….”

“니가 버리래. 나한테!”

놀라 흥분하며 말하는 라울의 얼굴을 보고 나는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그럼. 그렇게 당하기만 할 태성이는 아니니까.

나는 늘 태성이라고 부르고, 라울은 루벤과 태성이를 번갈아 부른다. 뭐, 완벽하게 두 개의 국적을 가진 훌륭한 남자로 키워야 한다나? 어찌 됐든 그날 이후로 라울은 태성이를 째려볼 때가 많았다. 아들한테 펀치를 한방 먹고 나서 말이다.

“그러게 애한테 좀 작작 시키지. 옆에다 데려다 놓고 자꾸 심부름시키니까 그렇잖아요. 아까 캐러멜 껍질만 해도 쓰레기통은 당신 쪽에 더 가까웠다고요.”

“귀여우니까 그렇지. 응? 저 쪼그만 게 꼬물꼬물 그 작은 손으로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아동 노동력 착취에요.”

“뭐가 착취야!”

“그나저나 가정교사 어떡할 거냐고요. 아직까지도 정해지지 않아서 내가 하루 종일 태성이한테 매여 있잖아요.”

아기 때부터 태성이를 돌봐주던 유모가 건강이 안 좋아서 그만두는 바람에 스페인에 갈 때 함께 가지 못했다. 스페인에서 적당한 보모와 가정교사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렇게 허구한 날 가정교사를 해고하여 사람이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자꾸 바뀌다 보니 적응을 못 해서 그럴까? 어떻게 된 건지 이제 태성이도 모든 가정교사를 스스로 퇴짜 놓고 있었다.

아이를 보러 들어가면 몇 시간이 안 돼서 으앙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떻게 해도 진정이 안 된다.

이러다 애가 성격파탄자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나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문제는 태성이가 겨우 적응이 되고 나면 이번에는 라울이 그 가정교사를 또 해고한다. 이렇게 되기를 반복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으아앙!”

새벽 한 시에 태성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간이 너무 절묘했다는 거다.

라울은 스페인에서도 계속 일이 있어서 자주 출장을 가고 매일 바빴다. 서울에만 계속 있을 수도 없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그리고 세비야를 오가며 업무를 보곤 했기에 그날은 보름 만에 서울에 돌아온 거였다.

“디아나, 이리와.”

목소리를 그윽하게 깔며 라울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도 그의 품이 그리웠다. 두 팔을 라울의 목에 걸고 그를 올려다보니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흡족하게 빛을 발하며 내 입술에 지그시 입술을 겹쳐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키스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가슴이 설렌다. 이 남자가 주는 관능적인 눈길과 손길은 언제나 나를 이렇게 들뜨게 한다. 이미 임신 8개월의 부푼 배를 하고 있는 나였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나…… 이렇게 배가 불러도 예쁘게 보여요? 안아주고 싶을 만큼?”

“무슨 소리야. 여자는 배가 나와야 예쁜 거라는 걸 디아나가 임신하고야 알았다고. 진정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볼록 나온 배에 있어.”

라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 사람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도 이렇게 확신에 차서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손길이 커다랗게 부푼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크게 부푼 배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인지 배가 크게 꿈틀거린다.

“어! 아기가 움직이네. 아빠가 만지는 거 알아서 이러는 거겠지?”

“맞아요. 이제 4주만 지나면 언제든지 아기가 나올 수 있다고요.”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문지르며 말캉한 것이 파고든다. 숨결이 얽히며 뜨거운 관능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우리 둘은 그리워했던 시간만큼 서로를 안고 길게 키스했다. 배가 불러왔으나 한창 안정기인 8개월이어서 문제는 없다. 라울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디아나, 날 얼마나 보고 싶어 했지?”

“태성이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당신을 그리워했죠.”

나는 라울이 좋아할 만한 말을 했다. 출장 간 동안 정말 라울이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니까.

라울의 손길이 뒷 지퍼를 열며 공기 중에 등이 드러난 게 느껴진다.

“라울…….”

진짜 이 사람은 종잡을 수 없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주고, 나 역시 이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게 둘이 함께 침대에 들었다. 이불이 버석거리고 그의 손길이 팽팽한 가슴을 쥐고 엉덩이 사이로 그의 몸이 느껴진다.

그렇게 둘이 한참 사랑을 하려고 할 때였다. 바로 그때 태성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깜짝 놀라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일어서자 라울이 말했다.

“몸도 무거운데 내가 가볼게. 자다가 깨는 일은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이지? 낮에 무서운 걸 봤나?”

그리고 잠시 후에 라울은 태성이를 안고 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라울?”

“그러니까,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네.”

“네?”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다고. 그러니까 디아나가 좀 재워봐.”

“이리 주세요.”

나는 태성이를 침대에 받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태성이가 나를 보고 좋아한다. 태성이는 우리 침실에 들어온 후로는 울음도 뚝 그치고 기분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다시 자기 방으로 데려가자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저를 떼어놓고 갈 것을 알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두 번이나 제 방으로 가기만 하면 울기를 반복한다.

“아, 참!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거야. 이봐, 루벤. 잘 들어. 너는 바로 세비야 성의 성주가 될 사람이야. 그렇게 함부로 아무 데서나 울고, 잠도 혼자 자지 않는다고 그러면 안 돼! 사나이로서…….”

그러나 한참 이어지는 라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우리 침대에서 태성이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뭐지, 이거…….”

잠이 든 태성이를 보며 라울이 중얼거린다. 잠자는 아기만큼 천사 같은 건 없다. 라울도 그런 태성이를 보며 얼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이렇게 예쁘게 잠든 아기를 보며 행복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 같다.

그런데 아들이 예쁜 건 예쁜 거고 자기 자리는 찾아야 하는 게 이 라울이라는 남자일까? 기어이 태성이를 다시 안으려고 한다. 다시 데려다 제 방에 재우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런 라울의 팔을 잡았다.

“라울, 낮에 낮잠도 별로 자지 않았는데 그냥 자게 둬요.”

“그럼 나는 어디서 자라고!”

“당신…… 태성이 방에서…….”

알아서 자면 되지.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 넓은 집에 잘 데가 없을까?

지금 내 눈에는 태성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예쁘게 자는 애를 어떻게 깨워? 보고 또 봐도 예쁜 태성이다. 그런데 옆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눈길.

“뭐? 나보고 태성이 방에서 자라고? 그럼 디아나는?”

“이 넓은 방에 애를 혼자 재울 수도 없고. 나야 여기 태성이 옆에서 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라울의 눈이 가운데로 몰린다. 화가 많이 나면 일어나는 현상인데 지금이 그렇게 화가 날 땐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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