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3)

30. 프로포즈 강의

지경아의 얼굴이 당장 울 것 처럼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고 규빈은 달래주고 싶었다.

“우리 예비처제가 고3 생활 힘들어서 잠깐 놀러 온 겁니다. 매제.”

“그럼 수업도 다 안 끝났겠군. 이봐. 땡땡이. 그런 건 대학 때나 가능한 거지. 지금 땡땡이치다가 인생이 다 땡땡이가 되는 수가 있어.”

“수업 시간 다 끝났어요. 끝나자마자 이리로 온 거거든요? 오늘 선생님들 교육이 있다고 단축수업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공부로 대학가지 않아요. 조금 더 특별한 걸로 갈 거예요.”

“그럼 우리 고3 아가씨는 뭐로 들어갈 생각이지?”

“외모요!”

그 말에 라울이 고개를 한 번 끄덕하더니 아주 턱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외모? 요즘 대학은 외모로도 뽑아주나 보지?”

“물론 준비하게 조금 더 있죠, 저는 모델학과에 갈 거거든요.”

“어디 한번 일어서봐.”

옆에 있는 규빈이 라울과 지경아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면서 어떻게든 끼어들어 보려고 했지만 아주 끼어들 틈이 없다. 일어서란다고 지경아가 벌떡 일어선다. 둘 다 못 말린다.

라울의 앞에 일어선 지경아를 보고 라울이 손가락을 휙휙 돌리며 말한다.

“돌아봐.”

지경아가 완전 모델 포즈를 하고 두어 바퀴를 돌자 라울이 입을 열었다.

“키도 별로 안 크고, 얼굴도 그렇게 예쁘지 않고, 카메라도 잘 받을 것 같지도 않고 무슨 수로 모델 학과에 간다는 거지? 우리 디아나는 훨씬 더 예뻐도 모델 같은 거 하겠다고 안 하는데. 헛바람이 들었군.”

“네? 다들 내가 모델 될 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거라고 하는데 왜 오빠만 그렇게 말해요?”

“난, 실제로 모델들 많이 본 사람이야. 그룹 모델도 내가 OK 해야 쓰니까. 그러니까 아주 정확한 눈이라고 생각하면 돼. 왜냐고? 난 광고주니까. 광고주 마음에 들지 않는 모델은 모델이 안 되니까.”

라울의 말에 지경아 눈이 동그래진다. 이 사람은 진짜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무슨 준비를 했지?”

“학원에 다녔어요. 모델학과 가려면 연기도 해야 한다고 해서 특기도 배우고…….”

“됐어. 다 필요 없어. 모델에게 필요한 건 신체 조건이 먼저야. 나머지는 다 용서가 돼. 그런데 넌 모델학과 가도 모델은 안 돼.”

“정말이요?”

라울의 말에 지경아가 바짝 긴장해서 물어본다. 라울이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한다.

“음. 꼭 모델이 되려면 이십 년 후에 해.”

“이십 년 후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줌마 모델. 그건 키도 보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이미지만 보니까. 잘 살아서 이미지 좋게 나이 들면 그 때는 할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지금부터 헛바람 불어서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는 게 어때? 웬만한 전문대라도 가지 그래. 사람이 너무 자기 분수를 몰라도 안 돼.”

그러자 지경아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라울의 말주변머리에는 지경아도 한방에 가버리는 것 같다.

“예비 처제 오늘은 안 되겠네. 사업상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만 돌아가.”

규빈은 이 두 폭탄들을 어서 떼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지경아가 규빈을 보고 말했다.

“규빈 씨! 나, 이 오빠 마음에 들어요.”

라울을 턱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규빈은 입을 딱 벌렸다.

“뭐라고?”

“이 오빠 마음에 든다고. 엄청 차갑고 말도 싹수없지만 소개해줘요. 이런 남자가 내 남자로 길만 들면 나밖에 모르는 그런 남자거든. 내가 맡아볼게.”

지경아의 말에 규빈은 눈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그런데 라울은 담담한 얼굴이다.

“미안해. 아까 말하는 거 못 들었나? 유부남이고 내 매제야. 그러니 마음을 단념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언니가 나 버리면 줍겠다더니 순간적으로 잘도 변하는군.”

“하여튼 좀 괜찮다 싶으면 꼭 다 임자가 있다니까. 난 형부에게 형님이라고 해서 진짜 젊은 줄 알았더니 아저씨네.”

지경아가 중얼거리자 라울이 차가운 얼굴로 냉랭하게 말했다.

“흠. 남자 보는 안목은 있는 거 같으니 다행이군. 나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에 애 아빠니까 단념하고 그 안목으로 다른 남자를 잘 고르면 모델학과 가지 않고도 잘 살 수는 있을 거 같군.”

라울의 말에 경아가 눈을 모로 뜨고 가방을 메고 일어나는데 규빈이 말했다.

“예비 처제, 다음에 놀러 올 때는 미리 말을 하고 와. 그때는 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알았어요. 망고 잘 마셨어요.”

“모델 꿈은 접어. 될 것 같지가 않아.”

돌아가는 지경아의 뒤통수에 대고 한 번 더 말하는 라울이었다. 그러자 걸어가던 지경아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그럼 뭘 하라고요?”

“아무 학교나 경영과 같은 데 가서 기본이라도 배우고 아버지 아이스크림 매장이라도 해봐. 하는 거 봐서는 돈을 잘 벌 거 같으니까.”

“치!”

지경아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리자 규빈은 한숨이 다 나왔다.

“예비 처제를 저렇게 해서 보내서 마음이 안 좋네.”

“뭐야 형님? 저 베리 베리 집 딸이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결혼할 생각입니다.”

“프러포즈할 때는 절대 가운 입고하면 안 돼.”

“예? 아니, 프러포즈할 때 가운 입고하는 그런 정신 나간 남자가 있겠습니까?”

규빈의 말에 라울은 규빈을 쫙 째려봤다. 세비야에서 새벽 3시에 가운 입고 프러포즈했다 무참히 거절당했던 기억이 났다.

“이미 알고 있었군. 복장도 중요하다는 걸.”

“당연하지요. 복장도 중요하고, 분위기도 중요하고 선물도 중요하고.”

“그럼 잘됐네. 이번에 한남동 아버님 생신 때 다른 호텔이나 레스토랑 빌리지 말고 집에서 하자고 디아나가 그랬거든, 그때 베리 베리 아이스크림 집 딸도 데리고 오지.”

“부담스러워할지 모르겠네요.”

“그게 바로 남자의 능력이라는 거야. 아무리 부담스러운 자리라도 나오게 하는 거.”

라울의 말에 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매제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제 점점 나에게 잘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어떻게 디아나를 그렇게 매제 말을 잘 듣게 만들었어요?”

“디아나가 내 말을 잘 듣나?”

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요즘 디아나 말 안 들으면 맞는데! 생각해보니 처음에 만날 때를 생각해봐도 내가 디아나 말을 잘 들었지 디아나가 내 말을 잘 들은 적은 없는 거 같다.

정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내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다 못해 20유로에 사라고 까지 했으니, 아니지 10유로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그러고 보면 디아나가 나를 사랑한다고 쫓아오거나 나에게 모든 걸 맞추기 위해서 했던 건 뭐가 있지?

하나도 없다. 결혼 전에는 정말 하나도 없다. 깽깽대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회사 사무실에 데려다 놓고 잡아먹고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정신없이 만들어 놓고 회의실을 꾸미라고 하고는 매일 쫓아다니면서 키스하고 안고, 그러다 스캔들 터지고. 정신없는 중에 청혼해서 결혼했다.

디아나가 날 좋아한다고 그나마 내가 확신할 수 있던 건 모나코 여행할 때 따라온 정도?

내가 누구한테 연애나 결혼을 조언할 상황이 아니군! 하지만 남들은 그런 거 모르겠지?

“남자는 말이야 패기가 있어야지. 언제나 모든 걸 준비해 놓고 확 휘어잡고 가는 거야. 여자가 따라올 수밖에 없게.”

“그게 매제 스타일이군요. 그런데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라서요. 더군다나 지한영 씨는 굉장히 활발하고 자기 사업에 적극적이어서요.”

“사업하는 중이면 접근하기가 더 편하지 않나? 형님은 그 여자보다 훨씬 사업도 크게 하고 오래 했으니 조언을 해주면서 다가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게……. 아이스크림 매장이라 성진 건설 사업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일단 성진 그룹은 직접 고객을 상대하고 판매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평가하는 거로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심지어 저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해요.”

“그럼 선물이지. 꽃, 보석, 핸드백. 모든지 좋은 걸로 공세를 하는 거야.”

“예, 저도 그럴 생각이긴 한데, 매장에 있는 내내 유니폼을 입고 있어요. 그것도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고. 뭘 걸칠 틈이 없다는 이야기죠.”

그렇게 어려운 상대를 만나서 과연 공략할 수 있을까?

“그럼 돈 더 많이 줄 테니 사업 때려치우라고 하던가.”

“그게……. 아마 절대 안 될 것 같은데요.”

“하긴 디아나도 사업이 아니라 직장인데도 아예 건들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여자, 어디 얼굴이라도 보고 싶네. 한남동 아버님 집에는 데리고 올 수 있는 거지?”

“네, 데리고 가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정말 임정환 회장의 생일에 규빈은 지한영을 데리고 왔다. 이랑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라울이 태성이를 안고 있을 때였다.

“어머, 어서 오세요.”

모두 규빈이 사귀는 아가씨가 궁금해서 현관으로 몰려들었다.

생기발랄한 얼굴에 적당히 살집이 있는 건강해 보이는 몸매. 그리고 곱슬곱슬한 머리가 웨이브 져서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는 모습이 생동감 있고 좋다.

그녀는 이랑을 보더니 따로 인사하며 딱 알아맞혔다는 듯 말했다.

“혹시 임규빈 씨 사촌 여동생 아니세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임규빈 씨한테 이야기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네?”

무슨 말인가 해서 바라보자 그녀가 나를 보며 말한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예쁘세요. 이러니까 그런 일이 생겼나 봐요.”

“남편께서 임규빈 씨가 동생 같은 사람을 예쁘게 생각한다고. 임규빈 씨에게 소개하시는 모든 여자한테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오라고 했데요.”

“네?!”

살다 살다.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래서 임규빈 씨가 스물여덟 번이나 조선 시대 마지막 여자 같은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들하고 선을 봤다고 그러던데요.”

지한영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초토화됐다. 모든 웃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라울은 그런 지한영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지한영 씨가 뽑힌 거군요. 모두 다 생머리를 하고 나왔는데 곱슬머리를 하고 나와서. 그래서 두 사람이 이어진 거면 모두 내가 깔아 놓은 떡밥 때문이었던 거고.

하긴 그런 곱슬머리는 생머리 여자 스물여덟 번은 봐야 색다르게 보이겠지요. 남자는 긴 생머리가 로망인데 형님이 곱슬머리에 넘어갈 리가 없는 데 말이지요.”

“…….”

썰렁하다는 말은 딱 이럴 때 하는 말이다. 냉기가 넘쳐나는 이 분위기를 어쩔 거냐고.

“라울…….”

나는 태성이를 안고 있는 라울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라울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불이라도 뿜을 거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때리는 것도 모자라 꼬집는 거야? 한 번만 더 그러면 경찰에 이를 거야!”

“헉!”

내가 기가 막혀서 보자 라울이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오며 더 작게 말했다.

“말로 해. 이런데서 꼬집으면 자꾸 흥분한다고.”

건드리질 말아야지.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꾹 참으며 지한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라울의 말에도 웃으며 답한다.

“그런가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요. 제가 MK 사장님께 엄청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뭐 꼭 감사를 받을 생각을 안 했지만 감사를 하시고 싶으시다면야 말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악.”

말하고 있는데 내가 라울의 발을 꽉 밟았다.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다. 어쩜 규빈이 오빠한테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생머리를 묶고 오라고 할 수 있나.

라울이 나를 보며 인상을 쓴다. 지금 인상 쓸 사람이 누군데. 그런데 앞에 있는 한영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더한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시면 나도 머리 푸르고 하나로 묶고 싶어요.”

“그런다고 다 이런 분위기가 나오는 건 아니죠. 이건 오직 디아나니까 가능한 헤어스타일로…….”

옆에 있던 라울이 기어이 한 마디 더하자 나는 확 째려봤다.

라울은 나한테 대놓고 예쁘다. 생머리가 너무 좋다. 단정하고 단아하다.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냥 넌 나를 미치게 해, 넌 내 것이야. 나만 가질 거야. 뭐 이런 종류의 말만 해놓고 밖에 나가서는 멀쩡한 여자들을 다 생머리에 하나로 묶게 했다는 거야?

그런데 라울의 말에 지한영은 전혀 무안해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저도 이렇게 예쁘게, 이런 분위기가 나오면 당장 생머리 하겠어요.”

“그렇지요? 우리 디아나니까 이런 머리해도 이렇게 예쁜 거지요.”

아! 어디 숨을 구멍 없나?

나는 라울이 이렇게 내 자랑을 대놓고 하고 다니는 남자인 줄 정말 몰랐다.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몰라서 태성이를 보고 웃고 있는데 지한영이 다시 말한다.

“그런데 정말 쪽 머리를 해도 예쁘시겠어요,”

“쪽이요?”

“왜 전통 옷을 입으면 머리에 큰 비녀를 꽂고 쪽 머리를 하잖아요.”

“아, 그거요. 사극에 나오는 거 같은.”

나는 드라마에서 본 머리를 생각하며 말하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에 꼭 그렇게 해보세요. 쪽 머리를 해서 예쁠 수 있는 얼굴은 진짜 미인이라고 하잖아요. 다음에 스페인에서 파티한다면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사람들이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반할 것 같은데요.”

“무슨. 오늘은 지한영 씨가 주인공이에요. 얼마나 예쁘고 성격도 좋은지 규빈 오빠가 정말 사람 잘 골랐네요. 저는 요즘은 아이 키우느라 아무것도 못 꾸며요.”

라울이 태성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태성이가 어설프게 발작을 뗀다.

“어머 얘가 태성이군요. 규빈 씨가 조카가 아주 예쁘다고 자랑을 많이 했거든요. 신기하네. 그런데 아빠하고 붕어빵이네요!”

이제 조금씩 서기도 하는 태성은 테이블을 잡고 서서 지한영을 땡글땡글한 눈으로 바라보다 방긋방긋 웃었다.

“정말 너무 예뻐요 웃는 게!”

말랑말랑한 실리콘 자동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지한영이 한 번 안으려고 하자 태성이가 인상을 쓴다.

“왜? 나 싫으니 태성아?”

지한영이 태성이를 보며 묻자 방글방글 웃기는 하면서도 선뜻 안게 두지를 않는다.

“얘가요, 아무나 손대고 안고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콧대 높은 것까지 아빠랑 똑같아요.”

옆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자 라울이 흘낏 보더니 태성이를 번쩍 안고 저리로 간다. 모두가 그런 라울과 태성이를 보며 깔깔 웃었다. 정말 붕어빵이라는 말이 딱이다.

남자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는 동안 나는 지한영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탈하고 건강하고 참 야무진 아가씨를 골랐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대로 사귄 사람이 규빈 씨가 처음이에요.”

“아 그러세요? 왜 그랬을까요?”

“제가요, 짝사랑하고 차이는 게 전공이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유가 다 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예쁘시고 생기도 있는데.”

“그게, 내 머릿속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이상형을 자꾸 뒤집어 쓰이나 봐요. 잠깐 눈에 들어오는 사람한테 자꾸 이상형의 남자를 투영하고 혼자 상상하다가 몇 마디하고 차이고 혼자 실망하고 깨지고 이런 일을 반복했거든요. 그런데 규빈 씨하고는 아니에요. 굉장히 솔직했고 저도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고요.”

“잘됐어요. 정말 우리 식구가 될 수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랑 씨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더 성숙한 것 같아요.”

“아이가 있어서 그런가 봐요.”

“절대 아니에요! 외모 이야기가 아니라 얘기를 해보니까 그렇다고요. 마치 많은 일을 겪은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긴 엄마가 돌아가시고 라울을 만나고 혜정이와 윤주 아줌마가 그런 일을 꾸미고 라울과 스캔들을 겪고 2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른스러워 졌을까?

지한영은 우리 집안의 모든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규빈 오빠의 편안한 모습을 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 * *

할아버지 병세가 조금씩 더 악화되면서 이제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자신의 병을 숨길 수 없게 됐다.

라울은 그런 할아버지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자주 할아버지에게 드시고 싶은 게 있나 물어보기도 하고 함께 산책하러 나가기도 했다. 이전의 라울이라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때는 할아버지가 건강하기도 하셨고 라울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한다든가 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라울도 많이 바뀌었다.

태성이를 낳고 난 다음부터 더 그런 것 같다. 물론 태성이하고 신경전을 벌일 때가 많지만 말이다.

이제 발짝을 한두 걸음씩 떼기 시작하는 태성이는 너무나 귀여워서 라울도 그런 태성이를 보며 마음이 살살 녹는지 저도 모르게 까꿍까꿍 하면서 태성이에게 잘 보이려고 할 때가 많다.

할아버지는 라울과 함께 산책할 때는 늘 태성이 유모차도 끌고 나가자고 하지만 요즘은 할아버지 한 분을 챙기기도 쉽지 않아서 태성이까지 나가게 되면 내가 유모차를 밀고 나갈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눈이 안 보인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정말 눈이 안 보일 때가 많으신 것 같다. 밖에 나갈 때도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조심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이른 봄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길을 걸으며 말했다.

“꽃향기가 좋다.”

무슨 꽃인지 보이시는지 안보이시는 건지 궁금했으나 나는 그저 그 향기가 매화 향기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할아버지, 매화 향기 정말 좋죠? 매화가 정말 예쁘게 피었어요.”

“그래, 매화구나. 향기가 그윽한 게 꿀을 담고 있는 거 같은 그런 향기다.”

“맞아요. 벌들이 많네요.”

“벚꽃은 향기가 없는데 매화는 향기가 참 좋지. 매실도 열리고 꿀도 얻을 수 있고 그러고 보면 매화만 한 꽃이 없구나.”

“할아버지는 매화를 좋아하세요?”

“할아버지는 꽃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

옆에서 라울이 말하자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더니 라울의 팔을 한 대 탁 치셨다.

“너는 그게 탈이야, 내가 왜 꽃을 안 좋아해? 나도 꽃 좋아해.”

할아버지가 꽃을 좋아한다고 해도 라울은 아니라고 말한다.

“할아버지가 꽃을 사는 것도 본 적이 없고 꽃 보고 좋다고 말한 적도 한 번도 없으면서 꽃을 좋아한다고 그러면 사기죠. 할아버지는 꽃 안 좋아하세요.”

“누가 나한테 꽃 주는 거 봤냐?”

“네?”

정말 그랬다. 누가 진 회장에게 꽃을 주는 걸 본 적이 없다. 파티나 연회가 있어도 꽃이 아무리 가득 그곳에 꽂혀있어도 그 한 송이를 뽑아서 진 회장에게 주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도 라울도 할아버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나도 꽃 좋아해. 그런데 그렇더라. 평생 일하느라고 꽃을 좋아해도 꽃을 볼 틈이 없더라고. 내가 좋아하면 사다 가꾸고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는 안 되더라.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나한테 꽃 주는 사람도 없어졌더라? 시환아, 나만 그런 게 아니야. 그러는 너는 너한테 꽃 주는 사람 있니?”

꽃 주는 사람? 없다. 꽃을 사서 디아나에게 주었던 적은 있지만 받아본 적도 없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남자들이 꽃을 접하는 일 그렇게 많은 일이 아니구나.

“그래서 원 없이 꽃 많이 볼 수 있게 하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나는 못하려나 보다. 시간 좀 내 봐라, 주말에. 같이 가자.”

“어딜 가자고요. 할아버지?”

“경기도. 남양주 쪽으로 좀 가자. 보여줄 게 있다.”

“태성이도 데려갈까요?”

“데려가도 상관없는데 아직 바람 차지 않니? 거기에 어디 들어갈 데도 마땅치 않으니까 태성이는 두고 가자.”

“네.”

그래서 주말에는 유모에게 태성이를 맡기고 할아버지와 라울과 함께 남양주 쪽으로 갔다. 한가롭게 부는 바람도 부드러운 햇빛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요즘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마음. 할아버지가 요즘 그러셨다. 그래서인지 태성이도 할아버지를 무척 따른다.

남양주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서 산밖에 없는 어떤 곳에 다다랐을 때 기사가 말했다.

“회장님,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나 좀 부축하고 내려 봐.”

라울과 기사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내리자 나도 따라 내렸다. 얼마쯤 걸어가 아래쪽으로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주변에 나지막한 산이 이어져 있는 한곳에 도착하더니 할아버지께서 말했다.

“이 주변 좀 쭉 돌아봐라. 십만 평이다.”

“네.”

“이랑아.”

“예, 할아버지.”

“너 좀 여기 꾸며볼 수 있겠니?”

“네?”

“여기에 전부 다 꽃밭으로 한번 만들어 봐라. 우리나라에서 제일 꽃들 많은 그런 곳을 한번 만들어 봐. 공원으로 만들어도 좋고 식물원으로 만들어도 된다. 모두 즐길 수 있게 말이지. 전 세계에 있는 꽃이란 꽃은 다 갖다 늘어놓고 우리나라 토종 매화며 진달래며 곳곳에 한 번 심어 봐.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할아버지.”

“그래, 네가 꽃 좋아하고 꾸미는 거 좋아하지 않니? 그러니 여기에 제일 좋고 예쁜 꽃 많은 공원을 만들어서 사람들 모여서 파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도 한번 만들어 봐라.

이곳에 오면 사람들이 다 꽃향기에 취하고 기분 좋아져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전통 꽃도 많이 갖다놓고 서양 꽃도 많이 갖다놓고, 아 왜. 전에 라울이 말한 적이 있다. 네가 아마릴리스를 닮았다나.”

“그런 말을 했어요. 라울이?”

“그래. 완전 팔푼이가 돼서 둘이 산책할 때는 네 자랑하느라고 입에 침이 마를 거다.”

그러자 라울이 할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제가 언제 디아나를 칭찬했다고. 꼭 제가 디아나를 칭찬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다 보니 꼭 칭찬같이 들렸었겠죠.”

“업어 치나 매치나. 네놈이 종일 디아나만 생각하고 디아나 자랑만 하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할아버지.”

“그래. 이랑아, 여기 마음에 드냐? 안 드냐?”

“마음에 안 들다니요. 어떻게 이런 데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어요? 이렇게 예쁜 덴 처음이에요.”

나지막한 산들이 이어져 있고 중간 쪽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약간 아래쪽으로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십만 평이나 되는 이 넓은 땅을 전부 다 꽃으로 메워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네가 여기를 꽃밭으로 가득 채웠을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훨훨 날아다니다가 이 꽃밭에 와서 앉아서 네가 꾸며 논 건 다 보마.”

“할아버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라울은 오히려 할아버지를 보며 큰소리를 낸다.

“뭐에요? 할아버지. 그런 말씀을 하시고. 지금 그렇게 뻥 치시는 거 아닙니다. 할아버지 딱 봐도 백 세 이상은 거뜬히 사실 거 같은데 자꾸 그렇게 죽는다, 죽는다 하시면서 겁주시는 거예요? 이런 것도 다 협박입니다.”

“예끼, 이놈은 말을 해도. 내가 백 살까지 살아서 네놈한테 좋을 게 뭐 있어? 너는 빨리빨리 내 지분 다 받고 유산 상속받고 그런 게 좋은 거지. 그런 게 다 힘이잖아.”

“됐어요, 힘 필요 없어요.”

라울이 속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얼굴은 답답함으로 굳어져 있다.

“뭐야? 네놈이 힘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그동안 살았는지 다 잊은 거야?”

그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로 스무 살부터 그룹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디아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고 태성이를 얻고 난 뒤로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정말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지분이 아니라는 걸.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재계 서열이나 성장률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착각이라는 걸 말이다.

돈과 명예가 있으면 마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 같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정말 행복에 직접 관계되는 건 그게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와 사랑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됐어요. 할아버지. 필요 없어요.”

“잘 생각하고 말해. 안 주는 수가 있어.”

“열 번 말해도 마찬가지예요. 할아버지가 더 오래 저희 옆에 있는 게 회장이 되는 것보다 지분을 더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에요.”

할아버지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서서 가만히 계셨다. 말씀이 없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시고 말했다.

“이랑아.”

“네, 할아버지.”

“고맙다.”

“네?”

“고맙다, 이랑아. 네가 우리 시환이 사람 만들어줬구나. 나도 평생 놓지 못하고 알지 못한 걸 라울이 지금 알고 있잖니.”

“저는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평생 사업을 손에서도 마음에서도 떼어놓질 못했다. 회사가 성장하고 커지고 내가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시환이 할머니도 시환이 아버지도 제대로 돌보고 키워주질 못했지.

회사가 크고 돈이 많아지면 그 사람들도 다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평생 재계서열 1위를 목표로, 1위를 했을 때는 그것을 지키려고, 2위로 밀려났을 때는 악착같이 1위가 되려고 그렇게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행복한 게 아니더라.”

“…….”

“이렇게 우리가 함께 있는 거 이게 행복이더라. 그러니 둘 다 아끼고 항상 감사해라. 날 사랑해줘서 고맙고 함께 내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아주는 게 제일 감사한 거더라. 알겠니?”

라울도 나도 할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남양주에 다녀오신 후로 할아버지는 더 바빠지셨다. 주주총회가 열렸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분을 모두 라울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도 작성하셨다.

그 외에 부동산이나 남아있는 재산 중에 작은아버지와 사촌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그다음 달에 라울은 MK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 * *

규빈의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웬만해선 외출을 하시지 않았지만, 사돈의 결혼식은 꼭 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랑아.”

“네, 할아버지.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번 사돈네 결혼식에 갔다가 그 후로는 병원으로 들어갈까 한다.”

“할아버지.”

“이렇게 집으로 맨 날 의사를 부르는 것도 힘들고 너나 라울이 아픈 사람하고 허구한 날 같이 지내는 것도 옳은 것 같지가 않아. 이제 병원에 들어갈 때도 됐어.”

“하지만 병원에 들어가면 갑갑하고 싫다고 그러셨잖아요. 저희 괜찮으니까 그냥 집에 계세요.”

“아니다. 이제 보이는 것도 거의 없어. 이렇게 있는 것도 힘들고 차라리 병원에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거 같다. 사돈네 결혼식이 내일모레니 그때까지만 잘 같이 있자.”

“할아버지.”

눈물이 쏟아졌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눈물을 꼭 삼켰다.

이제 할아버지는 거의 보이지 않으신다. 어떨 때는 조금씩 희미하게 보이는지 그럴 때면 꼭 태성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셔서 태성이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요 예쁜 얼굴을 얼마나 더 볼지 모르겠다. 증손주까지 이렇게 보고 갈 수 있으니 나는 참 복된 사람이야. 아이고, 우리 태성이 잘 나기도 했네. 아빠를 닮아 그런가, 엄마를 닮아 그런가.”

태성이가 라울의 판박이라는 건, 보는 사람마다 하는 얘기였다. 할아버지도 여러 번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태성이는 증조할아버지를 참 잘 따랐다. 얼굴을 만지자 침이 쭉쭉 묻어나는 손으로 할아버지 손을 만지작거린다.

“하부브.”

이제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한 태성이는 할아버지 발음을 하지 못해서 하부브, 하부브 하면서 할아버지를 따랐다.

“이랑아, 연시 좀 가져와 봐라.”

할아버지는 아직도 얼린 홍시를 좋아하신다. 나는 얼린 홍시를 투명한 그릇에 담아 숟가락과 함께 가져다 드렸다. 잘 보이시지 않는 걸 알기 때문에 떠서 입에 먹여 드리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앞도 보이지 않고 좋아하는 홍시조차 다른 사람이 먹여주는 걸 먹게 될 줄 알았겠냐. 그걸 진즉에 알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거다.”

“네? 어떻게요, 할아버지?”

“그러게. 생전에 이런 날은 올 거 같지가 않더라. 내 힘 있고, 내 돈 있고 주변에 다 사람들이 있으니까 생전 늙을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약해지는 날이 올 거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나간 날은 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지금은 이렇게 너를 의지하고 있으니 내가 진즉에 이럴 걸 알았다면 사람들한테 더 잘하고 살았을 거 같다.

약한 사람 사정도 알아주고 말이다. 그때는 약한 사람들이 능력 없고 무능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

말하는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면서도 빛나고 있었다.

“네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참 고맙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오히려 그때 저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때 받아주신다고 해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렇지. 그때는 네가 임 회장 딸인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임 회장 딸인 걸 알기 전부터 너 참 괜찮고 마음에 들었어.”

“제가 어머님을 닮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고 그러셨어요.”

“그래. 그 며느리가 서양 애긴 했지만, 꽤 괜찮았는데. 라울 하나 낳고 이 집안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이혼을 하고 떨어져 나간 게 평생 마음에 걸렸다. 아마 라울 아비 놈이 우리 집안에서 최초로 이혼한 놈일 거야.

너네는 평생 함께 살아라. 살다 보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지만 싫은 거 지나가면 또 좋은 것도 오더라. 나도 평생 집안 식구 귀한 거 모르고 살았다. 그렇지만 나이 드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더라.

내가 그렇게 싸돌아다니면서 사업하고 여자 만나고 온갖 거 혼자 다 하고 다니는 동안에 라울 할머니가 집안을 지켰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그때는 그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러고 사업을 할 수 있었지.

여자가 많았는데도 부인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아들 먼저 저 세상 보내고 힘들어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도 고맙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내 아들들도 없고 지금 라울도 없었을 테니까. 라울이 없으면 너도 없고 태성이도 없었을 거 아니냐.”

“할아버지.”

“그래. 요즘은 맨 날 돌아보면 고마운 것밖에 없다. 젊은 시절에 내가 잘해주지 못했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멱살 잡고 싸웠던 사람도 생각나. 그래도 돌이켜보면 다 고맙더라.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인생이 이렇게 엮어져 왔겠지.

사돈 결혼식엔 꼭 갈 생각이다. 보이는 만큼 보면 되는 거고 축하는 해줘야지.”

“네. 할아버지. 규빈이 오빠도 고마워할 거예요.”

* * *

“규빈 씨, 드레스 나왔다고 그러는데 같이 안 갈래요?”

“응. 같이 가야지. 미리 시간도 비워놨으니까.”

“그럼 그 드레스 숍에서 만나요.”

지한영이 고른 드레스는 튜브톱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양쪽 끈을 특별히 자잘한 크리스털을 촘촘히 박은 끈으로 달고 가슴 부분과 허리 부분에 역시 같은 크리스털로 반짝반짝하게 가는 띠를 만들어 둘렀다.

덕분에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드레스가 됐다. 드레스의 폭도 넓게 하지 않고 살짝 퍼진 정도로만 해서 날씬해 보이는 그런 드레스였다.

“크라운으로 할까요? 화관으로 할까요?”

“난 크라운으로 쓰고 싶은데.”

“나는 아무거나 좋습니다.”

디자이너를 보며 말하자 옆에 있던 지한영이 툭툭 쳤다.

“그럼 나, 이 크리스털로 할래, 오빠.”

“그래, 그 크리스털 크라운이 예쁘네.”

이제 규빈과 지한영도 서로 말을 놓는다. 규빈은 오빠 소리 못 들어 환장한 사람도 아닌데 서로의 호칭을 정하자고 했을 때 무조건 오빠라고 했다.

“오빠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요?”

“좋잖아, 오빠.”

“난 오빠라고 부르는 거 별론데. 근친상간 같잖아요.”

“결혼 전까지는 오빠, 결혼하고 나면 아빠.”

입고 있던 드레스를 다시 벗어놓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규빈이 그녀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저녁 식사였지만 둘 다 늦게 점심식사를 했던 터라 간단하게 먹고 그다음은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갔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들어오는 스카이라운지 한쪽 테이블에서 술잔을 마주한 채 규빈이 말했다.

“내일모레가 결혼식이네.”

“그러게, 시간 잘 가네요.”

“그런데 아직도 안 되나?”

“네?”

규빈의 눈동자가 조금 탁하게 보인다.

“날짜도 잡았고 청첩장도 돌렸고 내일모레면 결혼식인데 그래도 오늘 밤에 꼭 들어가야겠어?”

그의 눈동자에 어린 열기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그의 뜻에 따르겠다는 표시였다.

호텔 룸은 미리 룸서비스를 시켜놓았는지 화려한 안주와 와인이 놓여있었다. 얼음에 꽂혀있는 와인 잔이 청명하게 느껴진다.

“와인을 마시기엔 여기가 분위기가 더 좋지 않겠어?”

규빈이 말하며 붉은 액체를 따르자 보석이 떨어지는 거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유리잔에 가득 루비와 같은 색의 포도주가 넘실거린다. 불빛이 유리잔에 비춰서 그것은 정말 보석처럼 보인다.

“건배할까?”

호텔의 조명이라는 게 참 묘해서 여섯 일곱 개의 부분 조명이 겹쳐지는 곳은 더욱 환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은근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호텔의 룸에 데려다 놓자 갑자기 활달하던 지한영이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는다. 수줍음과 부끄러움 그리고 두근거림과 설렘이 어우러져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겹쳐지자 그 안에 들어있는 포도주가 찰랑찰랑 움직인다.

“들어. 긴장을 좀 풀어줄 거야.”

다른 포도주보다 조금 더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포도주였지만 목으로 넘어가고 난 뒤에는 향긋한 여운을 남긴다. 그의 말이 맞았다.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자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살짝 펴진 듯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진다.

규빈의 입술이 한영의 입술을 머금었다. 키스할 때마다 떨리는 그녀의 손끝이 지금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흔들렸다.

규빈은 씩씩하면서도 이런 쪽으로 서툰 지한영이 귀여워서 키스하다 말고 콧등을 비볐다. 그가 옷을 벗을 때도 그녀의 옷을 벗길 때도 어찌나 수줍어하는지 규빈도 덩달아 가슴이 떨린다.

길고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며 지한영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을 쥔 규빈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비밀스러운 살결을 더듬을 때도 지한영은 숨을 멈추고 굳어 있었다.

“날 봐. 한영아.”

그의 눈이 다정하게 지한영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이마에 잘게 키스하며 웃었다.

“긴장하지 마. 나야. 신랑.”

끄덕끄덕.

그녀의 눈이 그의 눈길과 얽힌 채 흔들렸다. 그런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규빈이 그녀를 안는다. 그녀가 규빈의 손길에 따라 반응하며 그에게 안겼다.

그의 손이 비밀스러운 살을 열고 미끌미끌한 액체를 끌어내었다. 그가 건드리는 곳마다 활활 타오르듯 뜨거워졌고 그의 입술이 젖꼭지를 물로 빨기 시작하자 아릿한 쾌감이 그녀를 덮었다.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깔려있었기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페니스가 좁은 질구를 파고들 때 느끼는 통증조차도 그와 눈을 맞춘 채 잘 이겨내었다.

좁고 뜨거운 그녀의 속살은 그의 페니스를 무섭게 조이며 달라붙었고, 끝없이 흡입하듯 잡아당긴다.

가슴 속이 저릿하도록 뜨거운 감동이 규빈을 휘감았다. 그는 그녀의 안 깊이 저를 풀어놓으며 격정의 밤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규빈은 온전히 저를 받아들이는 지한영의 품 안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던 모든 마음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정사가 한 차례 지나가고 다시 가볍게 입술이 마주쳤다. 포도주향이 서로의 입에서 묻어난다. 포도주에 취해서인지 곱슬 거리는 그녀의 머리가 더 예쁘게 보인다. 규빈이 그녀의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머리가 참 마음에 들어.”

“생머리가 아닌데도?”

“생머리가 아니어서 더 좋아. 가장 너다운 머리. 지한영다운 곱슬머리. 원래 곱슬인가?”

“원래 곱슬머리여서 늘 웨이브 파마해요. 스트레이트 펌을 해도 깨끗하게 나오지 않거든요. 대신에 웨이브 파마는 아주 잘 나오죠.”

그녀가 말할 때마다 포도주 향기가 퐁퐁 솟아난다. 규빈이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제 이마를 비볐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느낌이 드는 지한영.

씩씩하고 일 잘하고 목소리도 큰 그녀가 규빈의 품 안에서는 수줍은 열네 살 소녀처럼 떨고 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규빈을 더욱 애가 닳게 했다.

그런 모습에 그의 중심으로 뜨거운 열기가 다시 몰리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또?”

“응. 또.”

다시 거칠어지는 숨결과 뜨거운 열기가 깊어지는 밤처럼 더 깊어지고 있었다.

* * *

“지한영, 어서 일어나. 일어나야 할 거 같은 시간인데.”

맙소사. 해가 솟았다. 밤새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은 만져보니 퉁퉁 부어서 푸석푸석한 게 분명하고 곱슬머리는 아마 비비며 자는 동안에 산발이 됐을 거다.

이런 모습을 규빈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한영은 일어나는 대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말했다.

“먼저 가세요. 먼저 가요, 규빈 씨. 나는 나중에 갈게.”

“그게 무슨 소리야. 호텔에 들어와서 남자가 여자를 두고 가는 경우가 어딨어?”

“그러면, 그러면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와. 절대로 이 대로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안 본 모습이 뭐가 있다고 가리는 거지? 지한영.”

“제발, 제발. 플리즈. 그러면 나가서 산책좀 하고 와요. 그동안에 내가 일어나서 씻고 준비 다 하고 있을게.”

일어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억지를 부리는 그녀를 보며 규빈이 나오는 웃음을 참으로 대꾸했다.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만약에 내 말 안 들어주면 나 여기서 이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꼼짝도 안 할 거야.”

“꼭 그래야겠어?”

“꼭 그래야겠어.”

“자꾸 고집 부릴래?”

“고집 부릴 거야. 그러니 제발 놔두고 좀 나가요.”

“다른 사람들은 같이 샤워도 한다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 얘기고, 난 죽어도 못해.”

이쯤 되면 이런 억지도 장단을 맞춰 줘야할 것 같다. 아니면 정말 창피해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럼 내가 도대체 얼마나 있다 들어와야 되는 건데?”

“한 시간.”

“날 보고 한 시간을 밖에서 뭘 하라고.”

“그럼 30분?”

“그럼 이렇게 하자. 화장실 안에서 다 해결하고 나와. 그럼 되지? 난 여기 있을게.”

“그럼 잠깐이라도 나가요. 그러면 내가…….”

“됐어. 이런 방법이 있잖아.”

규빈이 시트 채 그녀를 둘둘 말아 번쩍 안았다.

“이대로 바로 욕실에 내려주면 되는 거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 밖은 보이지도 않게 이불에 둘둘 말려서 그대로 바닥에 내려졌다.

“여기는 화장실이야. 볼일 다 보고 나와.”

문을 닫는 소리에 살짝 머리를 내밀어 보자 시트에 둘둘 말린 채 욕실 바닥에 덩그러니 있다.

“하……. 다행이다.”

혼자 있게 됐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나온다. 얼른 욕실 문을 잠그고 거울을 봤다. 머리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부스스하게 산발을 하고 얼굴은 퉁퉁 붓고 입술은 더 빨갛게 부었다.

몸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하고 봐줄 수가 없다. 지한영은 바로 뜨거운 물을 틀고 샤워커튼을 쳤다. 좁은 곳에 있을수록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인다. 떨어지는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나 잘한 거 맞지?”

처음을 잘 치러낸 뿌듯한 마음이 그녀의 안에 가득했다. 이제 정말 그와 부부가 된다.

* * *

결혼식에 민폐 하객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을 신부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게 죄목이 된다면 디아나는 사형감이다.

일부러 하얀색을 피해서 진한 남색의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디아나의 모습은 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짙은 남색으로 더 돋보이고 아름다웠다.

신부대기실에 지한영을 보기 위해 들어가 신부의 옆으로 가자 하얀 원피스와 대조되는 짙은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가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 엄마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벽한 몸매에 깨끗하고 단아한 갸름한 얼굴, 머리는 하나로 묶었을 뿐인데도 더할 수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 건 바로 귀금속이었다. 두바이에서 특별히 라울이 제작하라고 했던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는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며 빛이 나고 있었다. 라울은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하객들로 온 경제인들과 연신 인사를 했다.

“부인이 너무 아름답군요.”

“아, 정말 미인이십니다.”

계속되는 칭찬에 디아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연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직도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은 젊은 아내를 옆에 둔 라울의 모습은 새신랑보다도 더 행복해 보인다. 규빈은 그런 라울 옆에 가서 째려보며 말했다.

“오늘 민폐 하객 1호가 디아나하고 매제인 거 알아?”

“어쩔 수 없는 미모니까 받아들여. 형님.”

너무나도 라울다운 반응이었다.

규빈의 결혼식에는 당연히 지한영의 동생인 지경아가 왔다. 교복을 입지 않고 신부의 동생답게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작은 핸드백을 메고 왔다. 신부 대기실에서 라울과 디아나는 딱 지경아와 마주쳤다. 지경아는 저번에 하도 라울에게 호되게 당해서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사돈처녀. 그동안에 아가씨가 다 됐군. 대학 입시 끝나 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됐지? 어디라도 붙었나?”

고3에게 대학입시 결과를 물으면 사형이라는 말도 모르나 이 아저씨?

그런데 옆에 있는 여자가 너무 예쁘다. 지경아가 디아나를 보며 말했다.

“설마 이 언니가 부인이에요?”

“그래, 내 아내야. 내가 전에 말했잖아. 디아나처럼 예쁜 여자도 모델 안 하고 사는데 너는 어림도 없다고.”

“우와 정말 예쁘다.”

“예쁘지?”

옆에 서 있는 디아나는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다. 눈을 반짝이며 디아나를 보며 예쁘다고 하는 여자는 여자라기보다 학생처럼 어리다.

“안녕하세요, 저는 저기 신부 동생이에요.”

“아 그래요? 언니하고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네, 규빈 오빠한테 형님이라고 그래서 저는 규빈 씨 동생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소개해달라고 그랬는데 결혼했다고. 이렇게 예쁜 언니랑 결혼했을 줄은 진짜 몰랐네.”

그러자 라울이 옆에서 인상을 쓰며 말한다.

“왜 사람 말을 못 믿지? 내가 그랬잖아. 내 부인 같이 예쁜 여자도 모델 안 한다고.”

“우와 정말 이렇게 예쁜데 왜 모델 안 하세요? 모델보다 훨씬 더 예뻐요.”

옆에 있던 라울이 한마디 한다.

“모델을 하기엔 키가 조금 작지. 그런데 너는 디아나만 하잖아. 그러니까 모델은 절대 안 된다고.”

그러자 지경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치, 그래서 모델학과 안 갈 거예요! 하도 사람 기를 죽여 놔서. 그래서 그때 말한 대로 그냥 전문대 경영학과로 목표를 바꿨다고요. 나도 그냥 대학 일찍 졸업하고 아빠 아이스크림 매장이나 받아서 사업하려고요. 돈 버는 재주는 따로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내가 볼 때 돈 버는 재주는 있는 것 같아. 남자 보는 눈도 정확하고.”

디아나는 너무 기가 막혔다.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라울이나 그 말에 대꾸하는 지경아나 옆에 있기 민망하게 솔직한 말들만 한다.

“말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라울, 도대체 왜 숙녀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냉혹하게 말해줬지. 내 말을 잘 듣는 것 보니 말귀 알아듣는 재주는 좋은 것 같군. 아이스크림 매장 열심히 키우고 보자고. 사업 수완이 정말 있나 볼 테니.”

“그래도 난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꿈 많은 여고생인데 너무 냉정하게 말해준 거 아니에요? 꿈꿔볼 시간은 줘야지요!”

지경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라울이 받아쳤다.

“아니지 꿈만 꾸다가 얼어 죽는 것보다는 밖이 춥다는 걸 말해주고 단단히 입고 나가게 해주는 게 더 중요한 거야.”

어련할까. 라울은 지경아에게 아주 엄격하게 말해주고는 디아나를 데리고 나왔다. 인사를 하고도 볼이 뿡뿡 부어있는 얼굴을 한 지한영의 동생은 천진하고 귀여웠다. 모두가 축복하는 그런 결혼이었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행복했다. 그렇게 규빈의 결혼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성북동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계속 엄마를 찾았다는 태성이는 돌아왔을 때는 잠이 들어있었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부쩍 쇠약해지셨다. 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는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다.

“디아나, 라울. 내 말 잘 들어라. 내가 어차피 가망 없는 몸인 건 너희도 잘 알겠지? 혹시 심장이 멎어도 심폐소생술은 하지 마라. 편안히 가게 해줘. 뇌사 상태가 혹시 먼저 온다고 해도 인공 장치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이제 조금만 힘들면 나도 여기를 잘 떠날 수 있다.”

더할 수 없이 자그마한 몸이 되어서 할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누워계셨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통증이 너무 심할 때 모르핀 정도만 조금 투여해주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상을 마감하고 떠날 날을.

그리고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모든 절차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엄청난 규모의 장례를 치르고 어마어마한 손님을 맞이하느라 라울은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었다. 나 역시 그랬으나 라울은 틈틈이 나한테 들어가라고 했다.

“너까지 여기 계속 있을 필요는 없어. 그러다가 병나니까 집에 들어가 있어.”

간간이 나를 들여보내며 라울은 장례 기간 내내 빈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이 더 없어지고 문상객들에게 인사를 하며 표정 없는 얼굴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쉽게 표정을 드러내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건 그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한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던 건 오직 나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장례 기간 힘들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힘이 들어서인지 자꾸 구역질이 나오고 속이 메슥거린다. 장례가 마치고는 이틀을 꼬박 잠만 잤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에 아침을 먹으려다 나는 심하게 비위가 상하는 걸 느끼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있는 걸 다 토해버렸다.

생리 기간이 언제였더라?

예정일이 지난 지 열흘밖에 안 지났는데 설마 또 임신인가?

바로 약국에 가서 검사기기를 사다 검사를 했다. 분명한 두 개의 빨간 줄을 보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임신이다. 둘째 아기다. 피임하지 않았으니 자연적으로 생긴 아기였다.

태성이 이제 11개월인데 벌써 아이를 가졌다. 이제 태성이는 두 돌도 되기 전에 형이 되게 생겼다.

나는 마음이 조금 착잡했다. 아이를 원해서 생기는 대로 낳자고 라울과 함께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어린 태성이 형이 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임신 소식에 기뻐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라울하고 통화를 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듣고 싶은 게 라울의 목소리였다. 혹시 회의 중일까 싶어 비서실에 먼저 전화를 했다.

“회장님 지금 회의 중이세요?”

“아닙니다. 오전 미팅 끝나고 지금은 혼자 계십니다.”

“알았어요.”

나는 통화보다 직접 보고 이야기하려고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라울의 사무실로 갔다. 라울은 조용히 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웬일이야 디아나. 여기를 다 오고. 그렇지 않아도 디아나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할아버지가 남긴 일들로 아주 폭탄을 맞았는데, 이렇게 위안이 되게 디아나가 왔네.”

그가 나를 바짝 안고는 또 테이블에 앉힌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할 때도 이렇게 곧잘 날 테이블 위에 앉혔다.

“저기 넓은 소파 많은데 왜 나를 여기 앉혀요?”

내가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자 그가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말했다.

“여기가 내가 매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여기 있어. 가고 나도 디아나의 온기를 느끼려고. 전에도 여기 앉은 적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술을 맞춘다.

“오늘 이렇게 온 건 스페셜한 무엇을 원해 선가? 예를 들면 사무실에서 정사?”

“그런 소리 좀 하지 말아요. 할 얘기가 있어서예요.”

“할 얘기? 조금만 있다가 듣자.”

그리고 그가 길게 입 맞췄다. 입을 맞추며 바로 블라우스 리본을 풀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섹스하지 못했다. 그가 뜨거운 입술을 겹치며 입술을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떨어뜨린다.

뜨거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젖꼭지가 긴장으로 톡 불거져 있었다. 그의 혀가 감싸고 빨기 시작하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쾌감이 든다.

추릅추릅.

사무실 안에 은밀하게 젖가슴을 빠는 소리가 울린다. 그의 입놀림에 가슴이 점점 부풀면서 아래가 젖어든다.

라울이 다른 쪽 가슴으로 입술을 옮기며 빨아들이며 손을 치마 안으로 넣어 허벅지를 더듬었다. 그의 손길에 은밀한 곳이 반응하며 움찔거린다.

내 앞에 선 그의 바지가 크게 부풀어 있다. 그 속이 어떤지 안 봐도 훤하다. 나는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만졌다. 그가 바로 버클을 풀고 드로즈를 내리자 발기한 그의 페니스가 끄덕거리며 허공에서 움직인다.

살살 그의 페니스를 잡고 움직이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하고 싶어.”

그가 내 가슴을 물고 젖어든 팬티를 옆으로 젖히며 은밀한 속살을 건드리기 시작하자 나는 허리를 틀며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잠, 잠깐만요. 조심해야 해요.”

“왜?”

그가 몽롱한 눈을 들어 나를 보며 물었다. 그 눈에는 욕정 어린 어리광도 함께 묻어있었다.

“둘째 아이가 생겼어요.”

“뭐?!”

라울의 눈이 커다래졌다.

“진짜?”

얼굴에 환하고 큰 웃음이 걸린다.

“아기가 생긴 게 그렇게 좋아요?”

“그럼 당연히 좋지. 역시,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군.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허전했는데 이렇게 식구 수를 채워주니 말이야. 쌍둥이면 더 좋겠다.”

라울의 마음이 그렇게 허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물었다.

“쌍둥이 좋지요. 그런데 집안에 쌍둥이 있어요?”

“아니 없어.”

아쉬운 듯 내 가슴을 다시 빨며 그가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나는 그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어쩌려고?”

그가 나를 보며 묻자 나는 그의 것을 조금 더 힘주어 잡고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당신 급한 거 같아서요. 내가 해줄게요.”

부드러운 손안에서 그의 것이 점점 더 부풀더니 그의 눈썹이 쾌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만지자 그가 바로 페니스를 손에서 빼며 옆에 있던 티슈에 사정했다.

“휴우. 아주 대단하네. 그동안 금욕했더니 손길에 바로 가네.”

그가 내 볼에 키스하고 옷을 추슬렀다. 그리고 내 블라우스 리본도 묶어주었다.

“우리 집안에 쌍둥이가 없어서 아쉽군.”

“우리 집안에도 없어요. 그러면 우리 둘 사이에서 쌍둥이가 태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요.”

“쌍둥이가 아니라면 이번에는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이는 벌써 생겼는데 아니면 서운해할 거 아니에요.”

“언제부터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있지?”

“금방이에요. 태성이 때도 그랬잖아요.”

“그래. 그럼……. 이제 입덧 시작하겠네.”

그의 얼굴이 점점 걱정스럽게 굳어진다.

“아침에 다 토했어요.”

“이런, 이걸 어쩐다. 벌써 시작이군. 과일은 좀 나으려나? 태성이때는 과일은 좀 먹었는데.”

“그러게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말만해.”

“아직은 없어요.”

“조심해야 할 때네. 고마워 디아나. 너만 옆에 있으면 나는 다 할 수 있어.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너하고 아이들이 힘이 되니까.”

“그래서 내가 라울 무섭지 말라고 아이를 또 선물해주는 거예요.”

“고마워.”

그의 눈이 따뜻한 웃음으로 반짝인다. 행복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같이 점심 먹자.”

“같이 갈 순 있어도 먹는 건 잘 못 먹을 수도 있어요.”

“깔끔한 데로 가자고.”

라울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한정식 집이었다. 미리 예약하지 않았을 텐데도 용케 자리를 마련해서 정갈하고 깔끔한 넓은 방에서 단둘이 음식을 두고 마주 앉았다.

“여기 사람도 별로 없고 냄새도 안 나고 좋지?”

“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특별히 원하는 거 해준다고 했어.”

“특별히 원하는 거 없어요.”

“밥 냄새나면 거기 있는 샐러드하고 냉채 같은 거 좀 먹고.”

“알았어요. 그러고 보면 한국 음식 참 다양해요. 사용하는 소스도 그렇고.”

“그렇지?”

“라울은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 보냈는데도 한식을 참 잘 먹는 거 같아요.”

“응. 나는 한식이 더 잘 맞더라고. 물론 다 좋아하지만. 우리 결국 제대로 여행하지 못하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또 이렇게 둘째 아기를 가져서 또 여행하기 힘들어졌네.”

“그러게요. 사는 게 생각보다 바쁘게 돌아가네요.”

“내가 바빠서 그렇지.”

라울이 그렇게 말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라울만 바쁜 게 아니라 나도 바빴으니까. 아이를 낳고 라울을 내조를 하는 데에는 집에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회장 부인들이 만나는 모임도 있었고 그곳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을 방문하거나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또 자선 바자회 같은 것들도 있어서 틈틈이 나가야 했기 때문에 꼭 라울만 바빴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라울은 내가 집에서 태성이하고 라울만 봐주기를 바랐지만 대외적인 활동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대그룹 사모님들이어서 내 나이가 가장 어렸다.

나가 있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자리들이었지만 또 MK그룹이 재계서열 1, 2위를 다투다 보니 그곳에 나온 부인들의 관심이 나에게 쏠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긴장하면서도 되도록 많은 분과 인사를 하려고 애쓰곤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훌렁 지나가 버린 거다.

“당분간 조심해야 하니까 부인들 친목모임에 당분간 나가지 말고 자선파티에도 나가지 마.

그런 것들보다 우리 아기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태성이 때도 엄청 놀랐잖아.”

“그때는 라울이 잘못한 거잖아.”

그 밤에는 라울이 너무 흥분해있었다. 하긴 신혼여행 간 첫날이기도 했지만, 그때 이후로는 얼마나 조심을 했는지 모른다. 둘째 애는 생기자마자 그때 일이 떠올라서 라울에게 하는 말이었다.

“…….”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그러면 우리 아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한 5개월쯤에는 세비야에 한 번 다녀올까요? 당신만 괜찮으면 말이에요.”

“세비야? 세베로가 좋아하겠군. 태성이를 보면 엄청나게 나하고 닮았다고 떠들어댈 텐데 둘째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로 가면 세베로가 껌뻑 죽을 판이군.”

“그러게요. 세베로가 정말 좋아할 거 같아요. 태성이도 세베로를 좋아할 텐데. 세베로는 아기들하고 여자들한테 정말 잘하거든요.”

“그 말은 꼭 나는 못한다는 말로 들리는군.”

“당신은 세베로하고 경쟁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세요. 세베로는 타고나길 다르게 타고났으니까.”

“그럼 뭐 나는 타고나길 여자하고 어린 애한테 못하는 사람으로 타고났다는 말인가?”

“입만 열면 폭탄에다 어린 애하고 경쟁하려고 드는데 무슨 수로 그런 사람들을 헤아리겠어요?”

“이번에 세비야에 가선 그런 생각을 완전히 고쳐주겠어.”

“알았어요.”

그날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 라울은 나하고 같이 식사했는데 어느새 이런 걸 시켰는지 집안에는 갖가지 과일이 가득했다.

“이게 다 뭐에요?”

“회장님께서 사모님이 입덧 시작하셨다고 뭐 좋아할지 모른다고 보낸 거예요.”

“이런 과일은 생전 처음 보네요.”

열대 과일에서부터 남미에서 나는 과일까지 갖가지 과일이 모양도 예쁘게 포장되어서 식탁 위를 가득 메웠다. 그중에 커다란 자몽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시어서 잘 먹지 않는 건데. 그것을 만지작거리자 아주머니가 바로 묻는다.

“사모님, 이걸 좀 깎아볼까요?”

“네. 좀 깎아주세요.”

세상에. 그렇게 쓰고 시고 한 자몽이 어쩌면 이렇게 달게 느껴지고 시원한지. 자몽 하나를 다 먹자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혹시 딸 아닐까요? 이렇게 신 걸 잘 먹는 걸 보면. 정말 잘 드시네요. 다행이네요. 사모님, 입에 맞는 과일이라도 있어서. 입덧 심하면 그것참 힘든 건데.”

아주머니 말이 딱 맞았다. 나는 다른 음식은 잘 먹지 못하면서도 자몽은 잘 먹었다. 자몽 덕분에 한동안에 입덧도 가라앉고 다시 음식들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라울은 내가 둘째 임신한 뒤로 태성이와 더 가깝게 지냈다. 서로 고집을 부릴 때면 태성이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치면서도 라울은 태성이에게 정말 좋은 아빠였다.

작은 비행기를 가지고 집 안에서 날려가며 태성이의 관심을 끌었다. 이제 막 발짝을 떼는 태성이는 꽈당꽈당 넘어지기도 잘했는데 그럴 때마다 라울은 우는 아이 옆에 앉아서 일어나라고 말만 하고 안아주질 않는다. 그러면 또 태성이는 아빠 말에 따라서 한참 울다가도 혼자 일어난다. 태성이가 다 일어나고 난 뒤에야 안아주면서 아팠느냐고 달래주는 라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라울도 정말 아빠가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디아나.”

“네?”

“얘기할 게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내가 태성이의 간식을 챙겨서 나오며 말하자 라울이 태성이에게 카스텔라를 주며 나를 보고 말했다.

“당분간 한남동에 들어가 살자.”

“한남동에요? 그래도 되겠어요?”

“어. 생각해보니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우리 이렇게 적적한데 우리는 그래도 세 식구에다 곳 네 식구가 될 거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적적한데 한남동 아버님 혼자 계시는데 얼마나 쓸쓸하시겠어? 같이 지내자. 그리고 거기에서 지내다가 아예 아기도 거기서 낳고.”

“당신 불편하지 않겠어요?”

“내가 불편할 게 뭐 있어? 여기 있으나 한남동에 있으나 난 너만 있으면 다 편안해.”

“고마워요. 라울.”

나는 라울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내 치맛자락을 잡고 태성이가 잡아당긴다. 입을 뿌뿌 내밀고 뽀뽀뽀뽀 자기에게도 뽀뽀해달란다. 그걸 보고 라울이 인상을 팍 쓴다.

“흥, 어림도 없어. 너는 기다려, 한참 더.”

그리고 다시 내게 길게 입 맞추었다.

한남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한 건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우리를 보며 행복해하셨다. 태성이도 할아버지를 따랐고 덕분에 나는 조금 편안하게 입덧이 가라앉았다.

아버지도 라울도 퇴근할 때면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손에 들고 왔다. 태성이는 그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다리는지 해 질 녘이 되면 대문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임신 4개월이 지나가면서 라울과 나는 태성이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갔다. 세베로는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우리를 기다렸다.

“세뇨라. 정말 엄마가 되셨군요. 입덧하는 걸 보고 못 봤는데 이렇게 주인님을 똑같이 닮은 도련님을 낳으셨네요. 정말 장하십니다.”

세베로는 라울보다 내게 더 열광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의 임신을 축하해주었다.

“주인님, 그동안 올리브 나무를 더 심었습니다. 지금 승마장 길이 더 길어졌습니다. 말 타고 달리셔야지요?”

“좋지. 그럼 우리 태성이를 태우고 한 번 돌아볼까?”

“라울 괜찮겠어요?”

“걱정하지 마. 태성이도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이 라울 까스틸로의 아들이라면 말이야.”

라울이 바로 옷을 갈아입고 태성이를 안고 말에 올랐다. 단단하게 태성이를 몸에 묶고는 가볍게 말을 달리자 태성이 웃음소리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울리며 들린다.

나는 라울이 한 바퀴를 돌아올 때까지 정원을 걸었다. 하얗게 피어난 아마릴리스가 전보다 더 많아졌다. 잘 손질된 까스틸로 성의 정원을 걷자니 라울과의 만났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디아나!”

“엄마!”

라울이 나를 부르자 태성이도 말 위에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아빠와 함께 말에서 내리는 태성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벅차다. 이제 내년이면 예쁜 딸도 태어날 거다. 라울이 태성이를 안고 내게 다가왔다.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행복하게 빛나고 있다. 그의 이런 눈동자를 보는 내 눈도 함께 빛났다. 우리는 태성이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떡갈나무가지가 늘어져 창을 두드리던 녹색 방. 어린 시절 라울이 놀던 그 방은 이제 우리 아이들의 놀이방이 될 거다. 마법처럼 만나서 사랑했던 그 방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며 행복을 키워갈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 말이다.

(본편 끝,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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