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3)

29. 매 맞는 라울

살살 귀두를 문지르다가 바로 허리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그렇게 절정을 느끼고 애액으로 반들거리는 속살인데도 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언제나 좁다. 출산했는데도 이렇게 좁은 걸 보면 이건 타고나기를 원래 그런 게 분명하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뒤로 꺾이며 내 목에 팔을 감는다. 완전히 삽입되자 그녀의 속살이 내 페니스를 꽉 옥죄며 휘감아 빨아들인다.

“큭……. 디아나.”

촘촘한 주름이 완벽히 감아 조여 대는 짜릿한 감각에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의자에서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 내 몸쪽으로 더 밀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고는 그녀를 들고 일어섰다. 삽입한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무게가 더하여져 더 깊게 들어간다.

“아악……. 라울…….”

공중에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웠는지 디아나가 더 내게 팔을 감으며 안긴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매끈한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허리를 쳐올렸다.

그녀가 매달려도 가벼운 솜털같이 느껴진다. 오직 내 감각은 삽입된 페니스를 조여 대는 그녀의 속살만 느껴질 뿐이었다.

“괜찮아. 내가 안고 있잖아.”

“무겁지 않아요? 이러다 떨어질 거 같아요.”

“절대 안 떨어뜨려. 큭…….”

내가 다시 허리를 올려치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진다. 맞닿은 치골이 비벼지며 일으키는 자극이 진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내가 이럴 정도면 디아나가 느끼는 것은 더할 거다. 부딪치는 부위의 여린 살을 잘 알고 있다.

“흐윽……. 라울……. 응…….”

역시 그녀는 눈을 내리감고 진한 여운이 주는 떨림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선 채로 그녀를 안고 세게 허리를 놀렸다. 내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려 내가 찔러넣을 때마다 몸을 떨며 휘감기는 그녀가 더할 수 없이 예쁘다.

그리고 예쁜 것 이상으로 아찔하다. 그녀의 안으로 찔러 들어갈 때마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며 허벅지가 불끈불끈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소에 하체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쾌감은 배가 된다. 디아나는 처음에는 서서 정사를 나누는 것이 불안한지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내가 든든하게 받쳐주자 안정감을 가지고 내게 매달리고 신음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대편 책장 옆에 걸어둔 거울에 우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디아나의 등과 엉덩이가 보이고 그녀의 갈라진 틈으로 드나드는 나의 검붉은 페니스도 간간이 보인다.

거울로 보는 정사가 또 다른 자극으로 다가온다.

“하아……. 라울…….나…….”

그녀가 앓는 소리를 하며 내 귓가에 거친 숨을 뱉어낸다. 그녀의 이런 소리는 거의 절정이 다가왔을 때 내는 소리다.

나는 조금 더 세게 허리를 올려치다가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치골까지 닿도록 깊게 삽입한 채로 맞닿은 곳에 힘을 주며 비볐다.

“아아아악! 하……. 흑…….”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다가 축 늘어졌다. 두 번째 느끼는 절정이다. 나는 가쁜 숨을 참으며 그녀를 바닥에 내렸다. 오랫동안 다리를 벌리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자 휘청한다.

의자를 끌어다가 거울 앞에 앉아서 그녀를 나와 나란히 하게 앉혔다. 내 허벅지에 앉아서 등을 내 가슴에 대고 머리를 기댄 디아나가 눈을 감을 채 숨을 색색 몰아쉰다.

그러다 눈을 뜬다. 앞에 거울을 보더니 얼굴을 붉힌다.

“라울……. 이게 뭐야.”

“잘 봐. 지금 네가 얼마나 예쁜지.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 미치는지 말이야.”

나는 거울을 보며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 페니스 위에 자리를 맞추어 내렸다.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사라지는 내 검붉은 페니스가 거울을 통해 그대로 보인다.

그녀의 다리를 조금 더 벌리자 페니스와 그 아래 고환의 모양까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외설스럽지만 부부만의 은밀한 비밀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예쁜 가슴 끝에 달린 분홍 젖꼭지가 앵두처럼 느껴진다. 흔들리는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젖가슴을 거울을 통해 보면서 그 과실을 손으로 잡았다. 손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과 거울을 통해 보이는 색스러운 광경이 함께 어우러진다.

갸름하고 단정한 하얀 얼굴은 청순하기 이를 데 없는데 거울을 통해 보는 색스러운 몸이 주는 유혹은 나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간직하는 디아나의 이런 모습이 소유욕을 만족하게 한다.

그런 모습이 보이자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뜨겁게 분출을 원하며 끓어오른다. 나는 허리를 올려치며 그녀를 빠르게 들썩거렸다. 몸이 올라갔다 내려앉을 때마다 지독한 자극으로 몸이 흔들린다. 그녀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단지 페니스만이 아니었다.

온 내장까지 딸려 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자극에 내 입에서는 연신 거칠고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큭……. 윽…….”

나는 마지막을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다가 세게 그녀를 찔러 들어가서 크게 몸을 원처럼 비볐다. 자궁 끝에 닿는 감촉과 깊게 비벼지는 그 자극에 나와 그녀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크으윽…….”

“하아아악……. 흑…….윽…….”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그런 그녀의 볼을 손으로 감싸고 내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돌려서 한 번 더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녀를 안았을 때였다. 그때 밖에서 또 태성이 우는 소리가 난다. 아기 우는 소리가 나자 축 늘어져 있던 디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반짝 든다.

“괜찮아. 유모도 있고…….”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나갈까 봐 괜찮다는 소리를 먼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지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잘 기어 다니며 놀고 있는 걸 보고 들어왔는데 괜찮을 거야. 응?”

나는 마음이 바빠서 그녀의 가슴을 세게 잡고 젖꼭지를 비틀었다. 그러나 신음 대신 말소리를 낸다.

“잠깐만요. 태성이가 울잖아요.”

“괜찮다니까. 이리 와. 내가 그녀의 허리를 꽉 쥐고 내 몸에서 못 빠져 나가게 하면서 제발 태성이가 울음을 그치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태성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한술 더 떠서…….

“음마……. 음마마……. 엄마.”

엄마를 찾는다. 안 되는데. 지금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내가 디아나의 허리를 꽉 움켜잡자 그녀가 몸을 홱 돌리더니 내 어깨를 세게 때렸다.

찰싹!

“좀 놔요. 태성이가 나 찾는 소리 안 들려요?”

디아나의 손이 이렇게 매운지 처음 알았다. 잘 그을린 내 어깨에 손자국이 났다. 나도 놀라서 순간 손을 떼자 그녀가 순식간에 일어나 티셔츠와 치마를 걸치고 나간다.

혼자 벌거벗고 거울 앞에 앉아있자니 참 기다 막히다. 거울을 통해서 아직도 서 있는 내 페니스가 보인다.

서재 문이 닫히기 전에 디아나의 음성이 들렸다.

“어구……. 우리 태성이 엄마 찾았어?”

세상에! 나도 디아나를 찾고 있는데……. 이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데, 나는 때리고 버리더니 태성이에게 달려간다.

완전 백전백패다. 디아나에게 잘 보이려면 태성이를 예뻐하면서 점수를 따는 게 수다!

* * *

태성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바로 뛰쳐나왔다. 라울이 나를 더 안고 싶어 하는 걸 모르지 않지만, 아기가 우는 데 섹스할 수 있는 엄마가 어디 있겠어?

나오다 뒤를 보니 라울의 인상이 점점 굳어지는 게 흘깃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아기가 우니까.

태성이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던졌는데 실리콘 자동차가 테이블 밑으로 굴러 들어가 버리자 그것을 찾으려고 테이블 밑으로 자기도 기어들어갔다. 머리는 들어갔는데 그다음 등이 들어가지 않아 안간힘을 쓰다가 그게 되지 않자 울음을 터뜨린 거였다.

테이블 다리 사이에 얼굴이 끼어서 버둥버둥하는 걸 유모도 어쩌지 못하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꺼내자 놀라서 한바탕을 더 울다가 울음을 그친다.

“아기가 포기를 몰라요. 조금 기다리며 내가 꺼내줄 건데 그 새를 못 참고 머리를 집어넣어서 이렇게 되었네요.”

유모도 놀라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니다.

딱 라울을 닮았다!

지한영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임규빈은 그때 알아차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상형은 바로 이렇게 열정을 담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라는 걸.

처음 디아나를 봤을 때도 그랬다. 물론 예쁘고 고운 얼굴과 몸가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열정이 있었다.

가이드를 하는 내내 사물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녀의 눈엔 빛이 있었다. 그래서 더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디아나를 봤을 때 느꼈던 것처럼 지금 지한영의 눈동자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 보며 규빈은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지금 저보고 사귀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우리 만나봅시다. 나 지한영 씨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전 아직 임규빈 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사귀어보면 돼요. 우리 규칙적으로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거 어때요?”

“글쎄요. 저는 임규빈 씨 같은 타입을 이상형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녀의 말에 임규빈이 그녀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나 줘. 언니.”

갑작스러운 발랄한 목소리에 임규빈도 지한영도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짧은 교복 치마가 허벅지에서도 한참 위를 올라가서 간신히 팬티를 가린 정도다. 체크무늬 스커트가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고 그 위로는 터질 것 같이 딱 달라붙는 블라우스가 보인다.

꼭 입고 꿰맨 거 같이 교복을 입은 당돌하고 깜찍해 보이는 여학생이 한 말이었다.

“어, 경아야. 너 왜 일로 왔어?”

“왜 일로 왔긴. 학교 끝나고 목도 마르고, 언니도 보고 싶고 그래서 왔지. 그런데 저 오빠 언니 이상형 아니면 나 줘. 저 오빠 딱 내 이상형이다.”

규빈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순식간에 지금 여자 둘에게서 이리저리 떠밀려가게 생긴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규빈이 지한영과 그 동생 경아를 보았다.

“누구죠?”

규빈이 지한영에게 물었다. 도무지 연관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 내 동생이에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데 여덟 살 차이에요. 그래서 지금 고3이에요.”

“고3이 이 시간에 오나요?”

규빈은 자기가 아는 모든 고3들은 밤 11시도 넘어서 집에 간다고 들었는데 토요일이라고는 하지만 이 시간에 아이스크림 집에 있는 고3이 익숙하지 않아 물었다. 그러자 지경아가 바로 규빈의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난 공부 잘해요. 지금 집에 와도 충분히 대학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오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경아야, 언니 손님이야. 그리고 그렇게 말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손님은 무슨 아까 보니까 언니한테 사귀자고 프러포즈했는데 언니가 거절하던데. 언니 마음에 안 들면 나 줘. 난 이 오빠 마음에 들어.”

똑 부러지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당돌한 꼬마 아가씨 앞에 앉아있는 규빈이 황당한 표정으로 지경아를 보며 씩 웃는다. 그리고 조금은 능글맞은 투로 맞장구를 쳤다.

“하긴 이 오빠가 언니들한테 인기가 좀 있지. 사람 보는 눈이 있네?”

“이 오빠 뭐 좀 통하는 거 같아. 진짜 마음에 들어. 나하고 사귀고 싶지 않아요?”

야무지게 보조개를 패며 눈을 반짝이는 지경아를 보고 규빈은 다시 웃었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미성년자하고는 사귀지 않는데?”

“조금만 있으면 스무 살 돼요. 대학 입시도 수시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입시 끝나고부터 연애하고 졸업하고 대학 입학하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그럼 괜찮지 않아요?”

“지경아! 너 무슨 초면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동생이 당돌한 건 알았지만 처음 보는 남자에게 하는 걸 보고 지한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규빈은 여유 있게 지경아의 말을 받는다.

“성인이 되려면 스무 살 되고도 조금 더 있어야지. 나는 지한영 씨가 마음에 들거든.”

“뭐야, 여기 있는 우리 그럼 나란히 줄 선 거야? 언니는 그 트럭운전사 좋아한다며.”

맙소사 여기에서 그 트럭운전사 이야기가 나오다니. 지한영의 얼굴이 빨개지며 잠시 비통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 운전사 얘기하지 마. 오늘 끝났어.”

“뭐야 좋아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끝났어?”

그 말까지 하자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좋아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라는 말에 임규빈이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경아야, 아무 데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지.”

“뭐 별말도 아니지 뭐. 언니가 좋아하고 차이는 게 어디 어제오늘 얘기야? 보나 마나 언니가 여기 사장이라는 얘기 끝까지 안 했겠지 뭐.

요즘은 여자 예쁜 것만 가지고 남자한테 어필 안 된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차라리 당당하게 나 여기 매장 사장이다. 너 마음에 드는데 너는 나 어떠냐. 내가 능력도 되는 여자 거든. 이렇게 말했으면 언니 벌써 사귀고 있을걸?”

“그만해, 경아야. 임규빈 씨, 아이스크림이 다 녹다 못해 빵이 죽이 됐어요.”

지한영은 당황해서 규빈에게 화제를 돌렸다.

“괜찮아요. 난 이렇게 먹는 거 좋아요.”

“내가 안 괜찮아요. 아이스크림은 차갑게 먹어야죠.”

“그런 편견을 버리세요. 난 이렇게 녹은 아이스크림 떠먹는 거 좋아합니다.”

임규빈이 그렇게 말하며 녹은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자 한영이 일어났다.

“그러시면 드시고 가세요. 저는 이만…….”

“아직 대답 안 했어요. 우리 함께 사귀어 보자고요. 설마 나를 이대로 이 열아홉 살짜리 동생에게 넘기겠다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지경아가 싱긋 웃으며 언니를 본다.

“언니 마음에 안 들면 버려. 내가 주어 가질게.”

앉아서 나란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임규빈과 지경아를 보고 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날일까?

“그냥 사귄다고 해요.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요.”

“그래요. 사귀어봐요, 어디. 얼마나 가는지. 아까 내 동생한테 들었죠? 나 원래 짝사랑하다 차이는 게 전문이라고요.”

“그래서 지금 나한테 차일까 봐 미리 나를 차겠다는 거예요?”

“아니요.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요. 채이든 차든. 그렇게 자신 있어 하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 나한테 차일 수가 있으니까.”

“설마 여태껏 차였던 게 한이 맺혀서 무작정 사귀다가 한번 차보는 게 꿈이거나 이뤄야 할 목표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지금 사람을 뭐로 보는 거예요? 내 목표는 제대로 사귀어서 같이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라고요.”

“거 참 바람직한 목표를 가지고 계시네요. 그럼 어디 한번 사귀어봅시다.”

* * *

“조금씩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볼까? 햇살이 좋은데. 낮에는 조금 덥지만.”

라울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할아버지도 같이 나갔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께서 태성이 얼마나 예뻐하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그놈이 모든 사람의 관심을 다 뺏어 갔어. 예전에 할아버지는 나한테 면박을 주거나 잔소리를 해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는데 요즘 태성이 말고는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

“라울, 나는 정말 당신한테 관심이 많아요.”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 하지.”

째려보는 그 눈이 딱 어제 그렇게 서재에서 날 버리고 가놓고 그런 마을 하느냐고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내가 그렇게 서재를 나오고 한참 뒤에 라울이 서재에서 나오면서 얼마나 심통을 부리던지. 물론 그 밤에 한참을 더 라울에게 시달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님께서 요즘 조금 여위시는 것 같은데. 외출도 잘 안 하시고. 같이 나가자고 하면 나가실까요?”

“그래? 할아버지가 그러셔? 닥터 윤한테 내가 물어봐야겠네.”

“식사량도 조금 줄었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 회사도 많이 안 나오시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늦게라도 회사에 한번은 나오시는 분이 안 나오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매일 출근하시는데요.”

“이상하군, 출근은 하시는데 회사는 오시지 않고.”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새살림이라도 차리셨을까?”

“설마요.”

80대 중반이지만 아직도 정정한 할아버지. 게다가 대한민국 굴지의 회장이다 보니 할아버지를 유혹하려는 젊은 여자들이 많다. 물론 그런데 흔들리거나 하는 그런 분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행보가 이상할 때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정말 젊은 여자라도 생기셨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도 연세가 많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지실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긴장된다. 정말 꽃뱀의 표적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아직 치매 기운은 없지만, 할아버지께서 혹시 판단력이 흐려져서 꽃뱀 같은 여자들한테 넘어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요즘 할아버지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

라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당연히 회사로 가시거나 사업을 하고 다니시는지 알았으니까 말이다.

“정말 꽃뱀을 만나시거나 하지는 않으시겠지?”

“할아버지 같은 분이 쉽게 여자에게 넘어갈 거 같아요? 절대 아니라고 봐요. 난.”

그러자 라울이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본다.

“왜 그렇게 봐요?”

“내 생각에는 여자에게 안 넘어가는 남자란 있을 수가 없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말이야. 왜냐하면……. 나 같은 남자도 여자한테 넘어갔으니까.”

“당신이요? 누구? 설마 나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 같이 아쉬울 거 없고 부족한 거 없는 남자도, 디아나한테 넘어가니까 세상에 오직 아쉬운 건 디아나뿐이더라고. 그러니 할아버지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은 더 하지 않겠어? 젊음에 대한 갈망이나 늙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할 테니 말이야.”

나는 라울의 말에 절대 공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젊음을 아쉬워하는 분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자부심이 있는 분이세요. 젊어서 이미 여자도 아주 많았고요.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 손주가 할아버지를 너무 모르는 거 아닐까요?”

“그런 소리 마! 남자는 팔십이 되도 구십이 되도 남자야!”

“아니요. 남자도 오십만 넘으면 여성호르몬이 많아진다고 했어요. 그럼 라울은 팔십이 되도 지금처럼 짐승일 거 같아요?”

“뭐? 내가 짐승이라고?”

“그럼 아니라는 말이에요?”

“짐승이라면 수컷?”

그가 말을 하며 능글맞게 웃는다. 나도 픽 웃었다. 알긴 다 아는구나!

* * *

할아버지 일로 신경이 쓰여서 나는 다음날 일찍 출근해서 따로 비서실장을 불러 말했다.

“요즘 회장님 동선 다 파악하고 만나는 사람, 통화내용 일일이 다 보고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

“뭐? 매일같이 병원엘 가신다고? 왜 그런 말씀을 나한테 안 하시고? 오늘 닥터 윤 미팅 잡아놔.”

“알겠습니다,”

MK 병원의 병원장인 닥터 윤은 마주하고 앉은 나를 보며 얼굴이 무거웠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마음이 무겁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막연한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아마 지금쯤은 느끼는 증상이 많으실 겁니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글씨도 쓸 수 없고……. 뇌암 말기입니다.”

너무 뜻밖의 소리를 들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웬만한 일에는 충격을 받지 않는 나였지만 닥터 윤의 말에는 멍하게 있게 된다.

“아니, 지금…….”

“절대로 말씀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씀 안 드렸지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뭐요? 대체 언제부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큰일을 할아버지는 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작년이라면 디아나와 결혼하고 임신하고 그런 시기다. 매일 함께 즐겁게 보였는데 암 투병 중이셨다고?

“작년에 발견했습니다. 아직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 암세포의 움직임도 느려서 시간을 끌고 있지, 아마 거의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럴 리가. 작년 언제 부 텁니까? 작년 언제?”

“사장님 결혼하신다고 할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그런 걸 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신 겁이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함구령을 내리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회장님 말씀이 어차피 말한다고 나을 병도 아니고 살 만큼 살았는데 우리 손주 재롱이라도 보려면 걱정하는 말은 안 하는 게 낫다고.”

손주! 내가 아직도 할아버지에게는 손주! 내가 사는 건 재롱.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셨나? 가슴이 쿵쿵 울린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게.

“그럼 작년부터 벌써 일 년 이상을 투병 중이시란 말입니까?”

“크게 투병 중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뭐합니다. 암을 억제하는 약을 들고 계시기는 하지만 사실 그게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암 자체에 진행이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있어서요. 사실 처음에는 일 년 안에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 년!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 일 년만 함께 살자고 하신 이유가 그러란 말인가?

머리끝이 쭈뼛하게 선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숨기실 수가 있을까?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그것도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미루어 짐작하기에 몇 달을 넘기시지 못할 것 같은데, 지금도 많이 힘드실 겁니다.”

“…….”

침묵이 흘렀다. 의사도 더 해줄 말이 없는 것 같았고 나도 더 물어볼 말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내 입술은 풀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다. 완고한 할아버지다운 행동이었다.

“특별히 다른 증상은 없으신지,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의사에 말에도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사실 내 눈은 늘 디아나와 태성이를 향하고 있었다. 식사시간 외에는 늘 2층 할아버지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할아버지는 그저 잘 지내시는 힘 있고 능력 있는 분이셨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늘 혼자 사업 구상을 하고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젊은 시절에도 종종 서재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그럴 때는 모두 할아버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즘도 그러시는 줄 알았다.

의사는 차근차근 나머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량이나 체중은 이미 줄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안 그래도 집사람이 할아버지 체중과 식사량이 준 것 같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예, 그러면 이제 제대로 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계십시오.”

의사와 간단히 이야기하고 병원장실에서 나오며 나는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옥상으로 향했다.

잘 가꾸어진 텃밭과 푸른 잔디, 꽃, 나무 들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있었다.

이런 일이라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니!

정말 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너무 정정하시고 너무 꼿꼿해서 그런 생각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할아버지가 그렇게 집을 내 명의로 옮겨주고 1층 방을 고쳐서 우리한테 주신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미리 생각한 거였다. 2층으로 옮기시고 스스로 물러서서 계신다는 거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주주총회일 거다. 나를 회장 자리에 앉히시고 지분 상속을 유언하시겠구나!

다음 주로 잡힌 주주총회가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알자 더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와 떨어져 서울에 온 후로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정을 받으며 살았다.

나를 지금의 MK 사장으로 만들어 주신 것도 할아버지다. 그런 할아버지가 끝까지 아프다는 말도 하시지 않고 혼자 투병하셨다는 걸 생각하니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오열이 터졌다.

가을 햇살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흘러내리는 눈물로 흐려져 보인다.

* * *

회원제로 운영되는 클럽 안에 있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임정환 회장과 진 회장이 마주 앉았다.

“이곳 음식이 참 맛이 좋습니다.”

“그렇지? 아마 대한민국에서 스페인 음식은 가장 잘하는 곳일 거야. 우리 디아나도 한번 데리고 와서 사줘야지.”

진 회장이 말하자 임 회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한다.

“디아나 예쁘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쁘게 봐줘서 그런 게 아니라 걔는 예뻐. 생긴 것도 예쁜 애가 하는 짓도 예뻐. 첫 아들까지 낳아줬잖아. 태성이가 생긴 것도 어쩌면 그렇게 라울 판박인지 고집스러운 것도 그래.

나는 라울이 아기 때는 잘 보지를 못했어. 걔가 스페인에서 태어났잖아. 스페인 성에서 아마 왕자님같이 떠받들고 키웠겠지. 그

래서 애기 때 모습은 모르지만 적어도 열 살 이후의 모습을 보면 똑 닮았어.”

“제가 봐도 태성이는 라울을 많이 닮은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러니 우리 집에 와서 큰일 해준 거지, 디아나가.”

말을 하며 새우를 조금 먹다가 진 회장이 얼굴이 굳어지며 숟가락을 놓는다.

“그런데 회장님 어째 얼굴이 좀 안 좋으십니다. 몸도 좀 야위신 것 같고…….”

“늙어서 몸무게 많이 나가봐야 병밖에 없지 뭐. 나같이 이렇게 깡깡하니 마른 사람이 원래 더 건강한 법이야.”

진 회장은 강철 체력으로 업계의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임 회장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보는 진 회장은 폭삭 작아져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건강이 안 좋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됐어. 건강이 좀 안 좋으면 어때? 살 만큼 살았지.”

“그래도 앞으로 증손주도 더 보시고 우리 진 사장이 사업 제대로 경영하는 것도 보셔야지요.”

“그것도 됐어. 사업도 저 정도면 아주 잘해, 저놈이. 날 닮은 거지 그건. 그런데 여기 빠에야는 진짜 맛이 있네. 여기 봐요.”

웨이터를 부르자 바로 다가온다.

“여기 이거 좀 하나 포장 좀 해 봐요. 하몽하고 같이.”

“예. 알았습니다.”

“디아나 갖다 주려고. 애기 키울 때는 체력소모가 많아서 잘 먹어야 하거든.”

“친정아버지보다 더 자상하게 신경을 써주셔서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됐다니까. 이제 우리 집 식군데 뭘. 사실 이렇게 만나자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네?”

“사실 나, 병에 걸렸어.”

“무슨 말씀이신지.”

“뇌암이래. 그것도 말기. 아마 올해 넘기기 힘들 거야, 나.”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것에 비해 그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임 회장은 눈을 크게 뜨고 진 회장을 보았다.

“회장님.”

“됐어. 그렇게 놀랄 것도 없고 뭘 더해보려고 할 것도 없어. 이미 병원에 다닌 지도 꽤 됐고. MK 병원이 우리나라에서는 실질적으로 최고잖아. 아마 성진 병원보다 의료적으로 좀 더 앞설걸?”

이런 상황에서도 진 회장은 MK가 성진에 뒤지는 거는 싫어서 하는 말이었다.

“예, 그렇죠. MK 병원이 회장님께서 신경 많이 쓰셔서 최첨단 기기도 많이 갖다놓고 세계적인 석학들도 모시고 해서 의료적으로 앞서있습니다.”

“뭐,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어찌 됐든 MK 병원에서 두 손 들었어. 뭐, 자기네가 할 수만 있으면 고치겠지. 나를 덜 봐주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요.”

임 회장이 입에서 긴 한숨이 토해졌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상심할 일은 아니고, 그래서 우리 라울 좀 부탁한다고.”

“회장님.”

임 회장은 뒷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진 회장을 부르고도 말이 없었다.

“뭐 물론 기업적으로야 라이벌이기는 하지만.”

“아닙니다. 라이벌은요. 가족 같은 회사인데.”

“그래도 기업의 생리가 그러진 않지. 뭐. 내가 그런 거 봐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나까지 가고 나면 우리 라울이 가족이 하나도 없어. 물론 디아나가 있고 아이가 있긴 하지만 자기 쪽으로 어른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라울 같은 놈도 아마 힘이 빠질걸?”

“그렇죠.”

“그러고 보니 라울하고 디아나에게 나 가고나면 남는 어른이라곤 자네밖에 없네.”

그 말을 듣자니 더 가슴이 아프다. 임 회장은 이럴 때에 혜원이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태성이 보러 자주 오고, 또 우리 라울. 성질이 조금 까칠한 사위기는 하지만 많이 도와주고 예뻐해 달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그래. 살다 보니 내가 성진 그룹 회장한테 내 새끼를 다 부탁을 하네. 그러니까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맞아. 애들이 그렇게 결혼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알았으면 반대했을 걸?

그런데 인연이 되려니까 스페인에서 만나서 이렇게 데리고 오네. 하여튼 우리 집안은 스페인에 뭐가 있는지 그렇게 색시를 스페인에서 맞아. 죽은 라울 아비도 그렇고 라울도 그렇고.”

“몸이 많이 불편하시진 않으십니까, 회장님?”

“안 아프다고 그러면 거짓말이지만 견딜 만은 해. 괜히 애들한테 미리 말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진 회장의 비서가 포장한 음식을 들고 바로 진 회장 옆으로 왔다.

“나 좀 부축해 봐. 가지 이만. 임 회장도 잘 가고. 아니, 오늘 아예 우리 집으로 함께 갈 텐가? 태성이 보러.”

“예. 그러지요.”

“같이 차타고 가세.”

임 회장은 진 회장의 차를 타고 성북동으로 향했다. 임 회장의 차는 뒤에서 진 회장의 차를 따라 성북동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 재계에서는 존경받는 진 회장이 앞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임 회장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진 회장이 가고 난다면 라울과 디아나도 많이 힘들겠구나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사람, 그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그렇게 무거워지면 되나. 나이도 많은 사람이. 하긴 나이 많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청춘이야. 내가 볼 때는 딱 그 나이가 좋은 때야. 더도 말고 딱 육십 대 초반. 제일 좋을 때지, 한창 일할 때고.”

진 회장의 말에 임 회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네는 재혼 안 하나?”

“예?”

“아직도 젊은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텐데 재혼 안 하느냐고. 디아나만 보고 살아도 되겠어?”

이런 사적인 질문을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받는 건 처음이다. 임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내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 뭐 디아나 아버지니까 하는 말이야.”

“전 못할 거 같습니다, 회장님.”

“왜? 디아나 엄마 때문에?”

대답이 없자 진 회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 사랑이라는 게 참 이상한 거야. 사랑에 한번 가슴을 잘못 데면 그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 이왕 그런 거면 재미있게 건강하게 지내고. 만일 나, 가고 난 다음이면 애들이랑 같이 살아. 궁상맞게 혼자 살지 말고.”

“회장님.”

“뭐 어때서.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도 되고 애들이 그 집에 가서 살아도 되고. 좋을 대로 해. 나야 디아나 덕분에 마지막 2년은 호강하고 가는 거지 뭘. 고 예쁜 게 집에 들어와서 집안 분위기도 다 달라지고 애기 우는 소리까지 있고 진짜 사람 사는 거 같애. 이렇게 좋은걸.”

“…….”

진 회장의 말에 임정환 회장은 아무 말을 못했다. 그저 묵묵히 차가 성북동 진 회장의 집으로 다다르는 것을 보며 뻑뻑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차가 도착하고 두 회장이 함께 집으로 들어갔으나 어째 집이 조용하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오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말한다.

“예. 태성이가 방금 목욕하고 잠들었고요, 태성이 엄마도 고단해서 막 잠들었어요.”

“라울은 아직 안 왔나?”

“저 여기 왔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막 퇴근한 라울이 굳은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다가 옆에 임 회장이 함께 온 걸 보고 인사를 한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음, 오늘 저녁을 회장님과 함께했더니 태성이 보러 오자고 그래서 같이 따라왔네.”

“예.”

“어디 손부터 씻어볼까?”

두 할아버지가 다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부터 씻고 나온다. 아기를 보려면 철칙이다. 겉옷을 벗고 태성이 방으로 들어간다. 알록달록한 모빌이 천정에서부터 내려와 달려있고 커다란 난간이 있는 아기 침대에서 태성이 새근새근 잠을 잔다. 정말 라울을 똑 닮은 얼굴이었다. 입술은 디아나를 닮았다.

“허허……. 그놈이 그새 또 많이 컸습니다. 며칠 만에 봐도 쑥쑥 크는 게 못 알아보겠습니다.”

“그렇지? 요 고집스러운 눈매를 봐. 영락없이 라울이라니까.”

“할아버지, 제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생겼나요?”

“사람들은 다 멋있다고 그러지만 네가 얼마나 고집불통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팔다리가 길쭉길쭉하니 이놈도 라울만큼 클 거 같죠?”

“그럼요. 아버지보다 더 크겠죠.”

“그래. 마음에 들어.”

그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진 회장이 나오는 기침을 두 번 멈추고는 허리를 편다.

“에이 애기 많이 보는 것도 힘들어. 그냥 나가야 되겠다.”

“저는 조금 더 보다가 나가겠습니다.”

임 회장은 아기의 침대 난간을 잡고 여전히 시선은 태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부축해 드릴까요?”

“이놈, 노망이 네가 나냐? 집안에서 무슨 부축. 일없다.”

나가려는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아 드렸다.

할아버지의 팔이 이렇게 가늘어졌던가?

언제나 쨍쨍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내셔서 팔이 이렇게 가늘어진 것도 몰랐다.

함께 사귀기로 한 뒤부터 지한영은 하루가 다르게 더 예뻐지고 있었다. 그녀는 숱 많고 곱슬 거리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는데 그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흔들릴 때마다 복슬강아지를 만지는 것 같이 기분이 좋다.

정말 사람의 매력이란 각기 달라서 디아나의 찰랑거리는 머리가 그렇게 예쁜 것 같더니 지금 지한영의 풍성한 웨이브 머리는 더 예쁘게 느껴진다.

사람이 좋고 예쁘면 그 사람의 것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지 생명력 넘치는 힘 있는 목소리도 그녀의 성큼 거리는 걸음걸이도 전부 귀엽게 느껴진다.

규빈은 지한영과 자전거를 타거나 요트를 타는 등 활동적인 데이트를 즐길 때가 많았다. 그건 지한영이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규빈도 주 중에는 연속되는 회의와 과다한 업무로 힘들 때가 많았기 때문에 주말이나 퇴근 후에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땀을 빼는 게 좋았다. 그런데 열아홉 살 예비 처제가 종종 데이트에 낄 때가 많았다.

“언니, 마음에 안 들면 버리라니까? 이제 한 달 정도 됐으니까 느낌이 올 거 아니야. 어때, 버릴 거면 미리 말해줘.”

맙소사. 성진 그룹의 사장인 내가 이렇게 두 자매 사이에서 짐짝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이야. 하지만 지경아도 통통 튀는 매력이 귀여웠다.

단지 공부를 열심히 안 하고 놀기를 좋아해서 언니인 지한영이 골치를 앓을 때가 많았다. 규빈이 회의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 우리 경아가 거기 찾아간대요. 좀 있으면 들어갈 것 같은데 야단쳐서 돌려보내요.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미안해요. 너무 예쁘다고 오냐오냐하고 키웠더니 애가 버릇이 없어진 것 같아.

규빈은 문자를 보다 전화를 했다.

“예비 처제가 지금 우리 사무실로 쳐들어온다는 건가?”

“그렇게 처제, 처제 하지 마세요. 우리가 진짜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규빈 씨가 자꾸 처제, 처제 하니까 자기가 정말 처제라도 된 듯이 저렇게 행동하잖아요. 내가 돌아오라고 전화도 몇 번 했는데 받지도 않아요. 오거든 무안하게 해서라도 보내세요.”

“싫은데?”

“그럼 어쩌려고요.”

“마침 나도 회의 끝났어. 처제랑 조금 놀다가 들여보낼게.”

“누구 마음대로 처제예요? 나 이제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처제예요? 자꾸 그러면 우리 경아 버릇 나빠져서 안 돼요. 나 규빈 씨 안 보는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한영 씨가 그렇게 콧대 높게 튕길 때가 아닐 텐데. 지한영이 나를 버리는 순간 나는 지경아에게 가게 돼 있거든. 사람 원조 교제하는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고 날 그냥 챙겨서 가지고 있는 건 어때?”

“지금 경아 두고 나한테 협박하는 거예요?”

“아니지, 처제가 맨 날 그러잖아. 언니가 버리면 내가 주워 가진다고. 그러니까 나는 한영 씨가 아무리 나를 버리겠다고 해도 믿는 구석이 있거든.”

“그만 좀 해요. 어찌 되었든 제 동생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요.”

“됐고. 그 신 메뉴 개발은 잘 돼 가나? 새로운 매실 맛 아이스크림 만든다고 하더니.”

“네, 잘 돼 가고 있어요. 이번에 제대로 된 신 메뉴 나오면 특허 낼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지한영 거거든요.”

“기대되네.”

“아이스크림 안 좋아하면서 기대된다고요?”

“응. 한영 씨가 만드는 거니까.”

그때 인터폰에서 소리가 났다.

-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드디어 예비 처제 오셨네. 너무 걱정하지 마. 조금만 놀다가 들여보낼 테니까.”

“고마워요.”

규빈은 일어나 여유 있게 사장실 문을 열었다.

“이게 누구신가.”

“안녕하세요? 갑자기 왔는데도 전혀 안 놀라시네요?”

“어서 들어와.”

지경아가 사무실을 들어오더니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본다. 대리석과 마호가니 원목으로 꾸며진 사무실은 깔린 카펫도 최고급이었다. 발을 디디면 구두코가 파묻힐 정도로 두껍고 촘촘하다.

“우와! 여기가 규빈 씨 사무실이에요?”

“거 규빈 씨, 규빈 씨 하지 말고 이쯤 해서 그만 형부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싫어요, 우리 언니가 버리면 나 진짜 오빠한테 사귀자고 할 텐데 형부라고 하다가 나중에 규빈 씨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이 당돌한 처제는 호시탐탐 이렇게 접근을 한다.

“뭐 마실 거줄까?”

“여기도 그런 거, 다 있어요? 마시고 싶은 거, 다?”

“그런 건 아니고 웬만한 건 있으니까.”

“그러면 난 초코 프라푸치노, 계피도 조금 넣고요.”

“그런 게 잘 되려나 모르겠네. 정비서 잠깐 들어오지.”

“네 사장님.”

“여기 있는 꼬마 손님께서 특별한 음료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가능한지 알아봐.”

“말씀하십시오.”

“와, 여기 정말 카페에 있는 메뉴 다 돼요?”

“그렇지는 않지만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주문하면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아아, 난 또 여기 비서실에서 온갖 걸 다 만드는 줄 알았지요. 됐어요. 그럼 전 그냥 망고바나나 주스 먹을 거예요.”

“망고 하고 간단한 케이크 종류 부탁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여기 소파도 되게 좋다. 우리 아빠 사무실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아버님이 검소하신가 보지?”

“검소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짠돌이시죠. 이게 차인가 봐요. 자수성가 한 집과 대대로 부자인 집 차이.”

망고바나나 주스와 초코 시폰 케이크을 가져오자 지경아는 잘도 먹으며 계속 말을 한다. 그렇게 지경아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MK물산에 진시환 사장님께서 오셨는데요.”

“어어.”

약간 곤란하기는 했지만 진시환이 바로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소파에 편히 앉아 망고를 쪽쪽 빨고 있는 고등학생이 눈에 들어오자 라울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규빈 씨 누구예요?”

그러자 그런 경아의 소리를 들은 규빈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진다.

“그런 이 꼬마 아가씨는 누구지?”

“꼬마 아니에요. 다 컸어요. 그런데 오빠는 누구세요? 우리 규빈 씨 친구?”

“형님, 설마 지금 원조 교제라도 하는 거야? 이런 망아지 같은 아가씨하고?”

망고를 빨던 지경아가 뿜었다. 라울처럼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경아가 인상을 쓰며 라울을 보고 소리쳤다.

“뭐라고요?”

“이봐 학생. 내 말 잘 들어. 이런대서 이렇게 짧은 치마 입고 망고 주스나 마시고 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의도하고 그러는 거야?”

라울이 얼마나 서슬 퍼런 눈으로 쏘아보며 말하는지 지경아가 그 말을 듣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당돌한 지경아이기는 해도 아직 어리다. 라울이 작정하고 차갑게 말하면 얼어버리는 게 당연하다.

“형님, 그동안 내가 주선해주는 선을 안 본 이유가 이 꼬맹이 때문인가.”

라울의 말에 너무 기가 막혀서 규빈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렴 내가 원조 교제나 하는 그런 놈으로 보였어요?”

“그럼 저렇게 허벅지가 다 보이는 치마를 입고 앉아서 망고 주스를 빨며 규빈 씨라고 부르는 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지?”

“이 치마가 뭐가 짧다고 그러는 거예요? 규빈 씨하고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런 사이가 아니면 그럼 무슨 사이지?”

“우리 언니 애인이란 말이에요!”

“애인?”

듣고 보니 기억이 난다. 임규빈이 아이스크림 집 큰딸하고 만나고 있다고. 그러면은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둘째 딸? 그러나 라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언니 애인을 뺏으러 온 건가? 그 짧은 치마에 입고 꿰맨 것 같은 윗도리 입고? 조금만 살찌면 헐크가 되겠군. 학생이 공부 안 하고? 자매가 다 그런가? 언니도 이러고 다녀?”

라울이 말이 계속 되면서 지경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옆에 있던 규빈은 눈을 감았다. 중매를 서더니 그 말솜씨로 이제 아예 갈라놓을 작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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