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남자 있어요
규빈을 보며 묻는 그녀는 생기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전혀 선을 볼 생각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규빈은 조금 얼떨떨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규빈이 맞는다고 대답하자 진한영이 미소 지으며 싹싹하게 대답한다.
“거기 잠깐 앉으세요. 제가 아이스크림 대접해 드릴게요.”
한영은 커다란 접시에 아이스크림 퐁듀를 준비해서 가지고 나와 늘어놓았다. 칸칸이 나뉜 접시에 과일과 아이스크림이 있고 가운데는 초콜릿 녹인 것이 들어있어서 꽤나 근사해 보인다.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당연히 아이스크림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런,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네.”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듯한 얼굴과 말에 규빈은 웃음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사람 처음 보세요?”
“네. 제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이스크림 가게에 와서 아이스크림 싫어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찬 것도 싫고 단 것도 싫어서요.”
“그런데 왜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전 그래서 아이스크림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이거 죄송해서 어쩌지요? 괜히 아이스크림 집으로 오라고 했네요.”
한영이 인상을 쓰며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자 규빈이 천천히 메론 아이스크림을 집어 초콜릿에 적시며 말했다.
“이건 먹어볼게요. 차가운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단것도 안 좋아하지만 차려주신 성의를 생각해서 말입니다.”
규빈이 그렇게 말하며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닿은 초콜릿이 벌써 딱딱하게 굳어 훌륭한 맛을 내고 있다. 업계 판매 1위를 지키는 아이스크림답다고 할까?
“안 드십니까?”
규빈이 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한영을 보며 규빈이 물었다.
“저는 매일매일 너무 많이 먹어서요. 조금 아까도 신제품 출시된 것을 잔뜩 먹어봤어요.”
그녀는 소탈하게 말한다.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사장 딸답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이전까지 만나 왔던 여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선보기 싫으셨나 봐요. 매장으로 오라고 하신 거 보니까.”
규빈이 묻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선 보기 싫은데 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이런 모습 좋아할 거 같지 않아서 이리 오시라고 했어요. 기분 나쁘셨나요?”
“아니오. 기분은 나쁘지 않은데 궁금은 하네요. 선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는 건데 왜 굳이 이런 방법을 썼는지 말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작게 숨을 뱉으며 말한다.
“저희 아버지께서 MK그룹하고 거래하시는데 거기 진시환 사장님께서 직접 중매를 한 거여서요. 감히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선을 본다고 해서 내가 간택될 거 같지도 않고 그런덴 관심도 없거든요.
저 이 아이스크림 매장 경영하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밖에 안 됐어요. 제대로 키워서 진짜 멋지게 만들어보고 싶거든요. 그냥 잠깐 와서 나 본 걸로 됐다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보시기에 저 별로 매력 없잖아요.”
참 맹랑한 여자다. 스물일곱 살이면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데 어쩌면 이렇게 발랄하고 쾌활하면서 맹랑할까.
규빈은 그녀의 말에 장난기와 흥미가 함께 발동하였다. 물론 끌리기도 했다. 끌리는 여자가 시작도 하기 전에 먼저 뒤로 빼니 더 흥미가 생긴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요. 나 매력 없어요?”
“네?”
갑자기 묻는 규빈의 말에 한영이 눈을 깜빡였다. 질문의 요지를 잘 알지 못하겠다.
“아니요.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멋있어요.”
“생각했던 거 보다? 대체 어떻게 생각을 했는데요?”
“뭐, 집안 좋은 귀공자. 그거야 다 아는 사실이고요. 그리고 자기 취향 고수해서 딱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 찾는 남자? 세상에 있을 거 같지도 않은 이상형을 만들어 놓고 세상에 여자가 없네,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남자일 거로 생각했어요.”
“와! 사람 앞에 두고 너무 신랄한 거 아니에요?”
“그랬나요? 그렇다는 게 아니라. 만나기 전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그럼 지금의 나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말이네요. 그렇지요?”
그런 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기가 괜찮은 남자라고 말하니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그 정도 말에 수긍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임규빈이라는 남자는 외모가 멋지다. 말도 정중하고 잘 한다.
“네.”
간단한 대답에 규빈이 지한영을 보며 담백하게 물었다.
“꽤 괜찮은 남자고 멋지다고도 했는데, 그런데도 나 사귀어보고 싶지 않아요?”
규빈의 말에 대답하다 보니 말이 이상하게 흐른다.
나랑 사귀자는 건가? 왜? 내가 선 보기 싫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나? 그래서 나와 사귀다가 자기가 먼저 차버려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그런 말인가?
“혹시 저 놀리시는 건가요? 아니면 뭐, 감히 네가 뭔데 먼저 거절이야. 거절을 해도 내가 해! 뭐 이런 건가요?”
목소리를 키워 말하자 직원들이 힐끔거린다. 그러고 보니 지한영은 목소리가 큰 편이다.
“이런. 혹시 콤플렉스 같은 거 있어요? 저는 지한영 씨 놀릴 마음 없습니다.”
“그럼 제가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제가 매력이 있어요?”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 대체 이 여자는 자기가 매력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거 같다.
“네. 매력 있어요. 지한영 씨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중에 제일 매력 있는 아가씨에게요. 제가 요 두 달 동안 선을 정말 많이 봤거든요.”
규빈이 딱 잘라서 말하자 지한영이 규빈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꼴로 있는데요?”
입고 있는 유니폼을 스스로 훑어보며 말하는 그녀는 더욱 천진하게 보인다. 규빈도 그녀의 유니폼을 쭉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러게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거 같네요.”
강한 호감을 나타내자 지한영은 잠시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는 거 같다. 그 잠깐의 시간이 재미있다. 마음에 드는 여자애를 골려주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지한영과 잠시 같이 있었지만 유쾌한 마음이 든다. 오랜만에 갖는 마음이었다. 그런 규빈의 앞에서 그녀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매력이 있다니,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어쩌나 내 매력을 보여주고 싶은 남자가 따로 있어서요.”
“그 말은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아요.”
그 말에 규빈은 약간 실망하며 자존심도 상했다. 도무지 진시환 사장은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남자친구까지 있는 여자가 마지못해서 이렇게 선 자리에 나온단 말인가.
하긴 선 자리에 나왔다고 할 수도 없다. 자기 직장으로 찾아오라고 했으니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다. 대부분의 여자는 규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모양을 다 내고 최고의 옷을 입고 향수를 뿌려대고 공들여 화장하고 그 앞에서 생글거렸다.
그런데 지금 이 지한영은 유니폼을 입고 쓰레기를 버리질 않나 자기 집 아이스크림을 대접하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남자친구가 있다니.
“솔직히 불쾌하네요. 아무리 마지못해서 선을 봤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필요 이상 솔직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는 정도로 어필해도 될 거 같은데요. 그것도 나중에 사람 통해서요.”
“그런 거 좋아하세요?”
지한영이 오히려 반문한다.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해진다. 규빈이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솔직한 게 좋으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서 이번엔 냉랭한 말투가 나갔다.
“아닙니다. 그런 거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무례하게 생각됐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솔직한 게 좋잖아요. 나 좋아하는 남자 있어요. 물론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 선보는 남자 앞에서 이렇게 맹랑한 말을 하는 이 여자의 말에도 그게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선을 보다 보면 이런 일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오기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말은 제대로 사귀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짝사랑?”
“네. 하지만 곧 사귈 거예요. 내가 쫓아다니는 남자거든요.”
“쫓아다닌다. 일방적인 감정이로군요.”
규빈은 일부러 더 그녀를 찌르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지한영과 나누고 있는 대화는 이전에 선봤던 여자들과 나눈 어떤 대화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금은 장난기도 발동하고 오기도 나서 규빈은 속으로 재미를 느끼며 계속 지한영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차피 토요일 오후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재미있게 생각한 것도 있었다.
지한영은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말에 발끈해서 규빈을 보며 말했다.
“사귀기 시작했다고요.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 느껴요.”
“대체 어떤 남자가 나 같은 사람보다 더 멋있게 느껴졌던 겁니까?”
“그냥 내 눈에 멋있어 보이는 남자요.”
“직업이 뭔데요? 모델이나 영화배우 뭐 이런 겁니까?”
규빈의 생각에는 자기보다 멋있게 보이는 남자라면 당연히 모델 주면 될 거로 생각했다. 요즘 여자들 남자들 외모에 많이 빠지니까. 하긴 그렇게 남자 외모를 보고 만나는 여자라면 또 만나 볼 것도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이스크림 트럭 운전하는 사람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황당할 수가!
선보러 나와서 상대방 여자의 짝사랑하는 남자친구 얘기를 과연 들어주는 게 맞나 싶다가도 너무 스스럼없이 말하는 지한영에게 홀리듯이 그녀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상대는 아이스크림 차를 모는 기사라고요?”
“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는 이 여자, 정말 뭐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지금 아이스크림 트럭 모는 기사에게 밀리고 있는 거야?
점점 더 기가 막히지만 앞에서 얘기하는 여자가 순수하고 예뻐 보인다.
“그럼 그쪽은 지금 지한영 씨가 이 아이스크림 매장 사장이라는 거 알아요?”
“아니요, 모르죠.”
“그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냥 아르바이트하는 걸로 알고 있죠.”
“일부러 그 남자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고?”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없어 보여요? 아니 정규직이냐고 묻길래 내가 아니라고 그랬지요. 나는 사장이니까 정규직은 아니죠.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했죠. 자영업자에 속하잖아요 사장은.”
“그건 그렇죠.”
딱 맞는 말을 하고 있기는 한데 어딘가 묘하게 이상하다. 하긴 정규직이냐는 질문 자체가 말 안되고 웃기는 질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한영은 그 자영업자라는 사실을 꽤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거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자영업자지만 임규빈 씨는 월급 사장이죠.”
“그렇죠.”
“저는 이 매장을 제 전 재산 털어서 아버지한테 제대로 계약해서 산 거거든요.”
“대단하시네요.”
얘기할수록 재미있는 아가씨다.
“그 남자는 정규직 여성이 매력이 있나 봐요. 그래도 그렇지. 조금만 관심을 두고 여기 직원들한테 물어만 봐도 내가 사장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굳이 내가 사장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거든요.”
“내가 볼 때는 그 남자 생각하는 폭이 좁은 거 같아요. 정규직이 아니라고 다 아르바이트생인 건 아닌데 말이지요.”
“좀 그렇긴 하지요? 내가 정규직이 아니라고 했더니, 아, 그럼 아르바이트생이시군요?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눈길도 안 줘요.”
“그런데도 그 남자가 좋아요?”
“멋있거든요.”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대체 나보다 더 멋있는 아이스크림 차, 모는 남자 누굽니까? 갑자기 오기가 나네, 보고 싶고.”
“아, 아이스크림 차가 네 시는 돼야 오는데 지금은 세 시밖에 안 됐으니까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보고 가실래요?”
갈수록 태산이다. 여자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시간이나 노닥거리다가 그 여자의 짝사랑 하는 남자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재미있게 토요일 오후 보냈다고 생각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차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규빈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간단한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요 근래 만난 여자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여자였다.
* * *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분명 우연도 함께 겹쳐줘야 하는 걸까?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토요일 오후, 공교롭게도 규빈이 이번에 선볼 장소는 지한영의 아이스크림 매장 바로 앞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규빈이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차를 몰고 있을 때 라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지금 소개팅하러 가는 거 맞나?”
“네. 그런데 매제. 대체 나를 이렇게 고문하는 이유가 혹시 내가 아직도 디아나에게 마음이 있을까 봐 이러는 거면 이제 제발 그만 해줘요. 나 진짜 디아나 싫어요. 이제.”
“싫다고?”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규빈의 말에 라울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이건 계획과는 다른 거다.
규빈이 너무 디아나를 좋아하는 건 싫지만 선보기 싫어서 이제 디아나도 싫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라울의 목표는 무조건 임 규빈 결혼시키기니까 말이다.
“왜 우리 디아나가 싫다는 겁니까? 세상에 디아나처럼 싫어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여자를 싫어하다니.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저 마지막 말. 결국 라울은 늘 그걸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디아나 남편이 나를 너무너무 고문해서 디아나도보기 싫다고요……. 그럼 원하는 대로 된 거 아닌가? 그러니까 나 좀 선보라는 말 좀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 형님. 내가 지금 형님 선보게 하는 거로 한남동에서 얼마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줄 모르지? 장인어른뿐만 아니라 규은이 처형과 숙부님, 숙모님 전부 다 내가 최고라고 하거든.
그러니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 만날 때까지는 그런 말을 하지 말고 두루두루 많은 사람의 위해 선을 보는 게 맞아. 그리고 오늘 선보는 여자는 조금 더 마음을 가지고 보라고. 정말 마음에 들 거 같은 여자라서 소개하는 거니까.”
더 말해서 뭐할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요즘 라울의 모든 대화는 선이었다.
* * *
“지금 오빠하고 통화 한 거예요? 설마 오늘도 선보러 가요?”
“응. 열심히 봐야지. 그래야 결혼이라는 거 할 거 아니야? 일단 사람을 봐야 마음에 들지 안 될지 알 수가 있지.”
계속 규빈에게 선을 보라고 닦달하는 라울이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오늘은 조금 말려 볼까 했다.
사람이 사람 만나고 좋아하는 게 그렇게 딱딱 계획대로 되는 일도 아니지 않나?
그러나 라울은 정색을 하며 내게 묻는다.
“혹시 내가 못 가져도 너는 나만 바라봐. 뭐 이런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하고 결혼하고 살면서 임규빈이 다른 여자하고 선보고 결혼하는 거 신경 쓰이고 싫어?”
말 안 되는 억지 부리지 시작하면 대책이 없는 라울이다. 나는 라울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옆에 있는 태성이를 안고 의자에 앉혔다.
식탁 위에 있는 이유식을 먹이기 위해 죽을 그릇에 덜었을 때였다. 라울이 다가오며 나에게 한 번 더 묻는다.
“왜 내말에 대답 안 해? 진짜 임규빈이 선보는 거 싫어?”
“아니요. 좋아요. 좋은데, 그렇게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데도 못 들은 척 하고 계속 선만 보라고 하면 그것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원래 사람은 자꾸 만나봐야 하는 거야.”
“태성아 밥 먹자.”
내가 태성이 얼굴을 쓰다듬고 이유식 한 숟가락을 들어 막 먹이려고 하는데, 라울이 숟가락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입을 벌린다.
“이거 전복죽이지. 아까 직접 만드는 거 다 봤어. 어디 나도 한입만 줘봐.”
그러자 태성이가 아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며 잡아당긴다.
“아아…….”
갑자기 일어난 일에 라울이 소리를 내며 태성의 손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간신히 빼내자 태성이가 그 틈에 기어이 자기 얼굴을 그 앞으로 내밀며 입을 벌린다. 내가 입에 전복죽을 넣어주자 오물오물 받아먹으며 좋아한다.
너무나 황당하게 벌어진 일에 나는 웃음이 터졌고 라울은 놀라서 태성이를 본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로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찍 터진 거 같다. 그리고 태성이는 절대로 라울에게 밀리지 않는 대단한 아들이다.
라울의 전화를 끊고 규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보니 하필 지난주에 지한영을 만났던 아이스크림 매장 바로 앞에 있다.
왠지 마음을 잡아끄는 아이스크림 매장을 훑어보고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한 남자가 내린다. 다부져 보이는 외모, 얼굴은 조금 우락부락한 인상인 거 같은데 딱 봐도 저 남자가 그 때 그 지한영이 좋아한다고 한 그 트럭 기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약속시각보다 좀 일찍 도착했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냥 지나는 척하며 트럭 앞쪽으로 가고 있는데 기사가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매장에 가져다 놓고 나온다. 그런데 그 남자 뒤를 지한영이 쫓아나온다.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뭐라고 말하는지가 너무나 듣고 싶다. 트럭 모퉁이에 살짝 기대서서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둘의 말소리가 들린다.
“혹시 뮤지컬 좋아해요? 내가 뮤지컬 표 있는데.”
지한영이 기사를 쫓아 나오며 말하자 기사가 우뚝 선다.
“이보세요, 지한영 씨. 나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에이 거짓말이죠?”
지한영이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 결혼식을 못해서 그렇지 동거하는 여자 있어요. 곧 결혼할 겁니다.”
“커플링도 안 꼈는데.”
“사진 보여드려요?”
그러자 지한영이 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 나는 아이스크림 집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그런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그만 들이대세요.”
말할 수 없이 예의 없고 무례하면서도 거친 그 말에 지한영이 꽁꽁 얼어붙어 서 있다. 어린 나이에 저런 여자를 매장 사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무시하는 말투를 내뱉는 다는 게 어이없었다. 규빈이 앞으로 나가면서 지한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한영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그 말에 트럭기사가 가만히 쳐다본다.
“아이스크림 잘 옮겨 놨어요? 아, 여기 사장님인 거 모르셨어요?”
처음 보는 남자가 하는 말에 트럭기사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지한영을 본다. 규빈은 그 남자가 역겹게 느껴져 일부러 더 사장님이라는 말에 꼬박꼬박 넣어가며 지한영에게 말을 걸었다.
“지한영 사장님, 요즘 아이스크림 가게 잘 됩니까?”
그러자 지한영이 당황한 눈으로 규빈을 보다가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옆에 있던 트럭 기사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분이 여기 사장님이세요?”
“네. 여기 사장님 맞아요. 그런데 그쪽은 사장님 대하는 거랑 아르바이트생 대하는 게 다른가 보죠?”
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 그녀가 뛰어 들어간 아이스크림 매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서 옆에 있고 싶다. 하지만 선보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아이스크림 매장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야할 시간이었다. 왠지 그녀를 위로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너무 오지랖 넓다는 생각에 규빈은 건너편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
어떤 여자가 나올까 궁금한 마음도 들었으나 역시 앞에 만났던 어떤 여자들처럼 이 여자도 생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원피스를 입고 있다.
네모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게 머리를 묶어서인지 참 안 어울린다.
* * *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의류매장에서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규빈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가며 그래도 선을 보러 나온 여자에게 좋게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마디를 꺼내놓고도 규빈의 머릿속에는 조금 아까 트럭 기사에게 거절당하던 지한영이 떠올라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규빈 씨?”
“아, 네. 죄송합니다.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아니에요. 사업하시는 분들은 다 그렇죠. 제가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짜 제 꿈은 현모양처거든요. 결혼하면 집에서 아기하고 살림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네. 그러세요?”
규빈은 그 안 어울리는 머리 좀 어떻게 했으면 하는 생각에 슬쩍 물어보았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머리를 잘하세요?”
“아, 네. 사람들이 이렇게 생머리를 해서 하나로 묶는 게 나한테 참 어울린다고 해서요. 제가 좀 원래 단정하고 그런 분위기여서요.”
못 살겠다. 어째서 물어보면 모든 여자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생머리를 묶고 다녔다고 하는 건지.
여기가 조선 시대도 아니고 만나는 여자마다 다 생머리에 하나로 묶고는 원래부터 그렇게 살았다니 밖에 나가면 저런 머리 한 여자들이 흔하지 않은데 선보러 나오는 여자들은 평생 그러고 살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조화 속인 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진짜 라울은 대단한 능력자인 것만은 맞는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디아나하고 비슷한 외모를 가진 여자들만 골라낼 수가 있을까?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면 외모가 비슷한 게 아니라 꾸미는 것만 비슷하려고 한 거지. 디아나는 갸름한 얼굴에 긴 목선을 가지고 있어서 머리를 하나로 묶으면 우아해 보이고 예쁘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그런 머리를 해놓으면 갑자기 조선 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순이 머리가 돼버린다는 걸 왜 여자들은 모를까?
무슨 곡절이 있지 않은 다음엔 다 이런 머리만 하고 내 앞에 선을 보겠다고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있는 집 아가씨들이 그렇게 스타일리시하지 못하고 촌스러울 수 있는 건지.
규빈은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려졌다. 그래도 그 아가씨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정도의 시간을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매장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자기 배경과 상관없이 순수한 자기 매력으로 트럭 기사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던 그녀가 어쩐지 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순수한 마음에 호감이 가기도 한다.
생기 있는 눈동자가 지금쯤 풀이 죽어있을까? 어쩐지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활기차게 외치는 직원들 사이에 지한영도 있다. 얼굴엔 생기가 가득해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고 규빈이 다가갔다.
“지한영 씨.”
“예?”
규빈의 얼굴을 보자 지한영도 잠시 멈칫하더니 바로 응대를 한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맙소사, 이 여자는 정말 이상한 여자가 틀림없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얼떨결에 한 대답이었다. 지한영 이렇게 물으니 아이스크림 집에서 뭐가 필요하겠는가. 스물다섯 가지도 넘는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원하시는 것을 고르라고 하는데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뭘 좋아하는지 고를 수가 없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네. 어떤 아이스크림을 원하십니까?”
“달지 않은 걸로요. 차갑지 않은 거면 더 좋고요.”
그 말에 지한영이 물끄러미 규빈을 보더니 빵과 빵 사이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걸로 추천해준다.
“겉에는 빵으로 싸여있어서 차가운 느낌도 들지 않으실 거고요, 요거트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라 다른 아이스크림에 비해 많이 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도와주실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시간 좀 내 주세요. 저 아이스크림 먹는 동안 얘기 좀 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들이 우와 소리를 내며 지한영을 본다. 지한영이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빙긋 웃는다.
“알겠습니다.”
함께 테이블에 마주 앉아 규빈이 지한영을 바라보고 있다.
“왜 들지 않으세요?”
“천천히 먹겠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아이스크림은 천천히 먹으면 다 녹아요.”
“전 차가운 걸 안 좋아하니까 녹은 다음에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괜찮아요?”
“뭐가 말이에요?”
“아까.”
“아, 아까 차이는 거 목격하셔서요? 저 오늘 완전 재수 없는 날이에요. 차이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힌 데 그걸 선본 남자가 봤으니까 말이에요. 잊어주세요.”
잊어 달라, 픽 소리를 내도록 규빈이 웃었다.
“그렇게 선명하게 남은 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두고두고 놀리시던가요. 그런데 어떡하죠? 우리는 두고두고 볼 일이 없는데.”
지한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규빈이 조금 아까 일을 일부러 아는 척하는 게 불편했다. 그러나 규빈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말한다.
“글쎄, 우리가 두고두고 볼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앞으로 봐야 알겠지요?”
“어째서죠?”
“내가 여기 단골 아이스크림 집으로 찍었으니까.”
“단것도 안 좋아하고 차가운 것도 안 좋아하면서 아이스크림 집은 왜 오시겠다는 거예요?”
“녹여 먹으려고요. 차가운 거 싫어하니까 녹여서 먹으면 되죠.”
그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이 지한영이 규빈을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차이는 거 목격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도 되겠다거나 만만하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천만에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알기로 임규빈 사장님은 생머리에 단아한 여인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머리도 곱슬곱슬하고 얌전하지도 않은 제가 마음에 드셔서 이러는 건가요?”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죠? 내가 생머리에 단아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저희 부모님께서 여러 번 당부하셨어요. 중간에서 소개해주신 분이 신신당부했다고. 그런데 나는 머리도 이렇게 곱슬곱슬하고 그렇게 단아하지도 못하거든요? 아까 봤죠? 저 이만한 쓰레기통도 혼자서 다 들어 비워요.”
“그러게 힘이 참 좋아 보이시더라고, 요즘 여자 같지 않게.”
규빈이 웃으며 말하자 지한영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그거 은근 성차별인 거 아시죠? 요즘 여자들은 왜요? 여자들은 다 약해야 돼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보기도 좋고요.”
규빈이 아이스샌드를 포크로 조금 잘라 입에 넣으며 말하자 한영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나오라고 했어요?”
참, 사람 미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더니 라울이 사람들한테 소개하면서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나오라고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라울, 정말 원수가 따로 없네!
현대를 사는 여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나오나. 오늘 만났던 게 스물여덟 번째 선이었는데 오늘 만난 여자까지 모두 다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나왔다.
이화 학당도 아니고 아예 거기에 생활 한복까지 입고 나오라고 했으면 금상첨화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임규빈이 크게 웃고 말았다.
“응? 도대체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중간에서 소개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알고 있어요. MK그룹의 사장님이시라고. 가문의 영광같이 부모님이 떠들어댔으니까요.”
“그런가요? 그 MK 사장이 진시환 씨라고 제 매제 됩니다.”
“아, 그러세요? 뭐 깎아내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압니다. 제 사촌 여동생이 진시환 사장하고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 사촌 여동생이 정말 예쁘게 생겼어요.”
“아, 그러세요?”
대답하는 게 영 퉁명스럽다. 하긴 여자에게 다른 여자 예쁘다고 하는 말이 뭐 그렇게 듣기 좋은 말도 아니고.
“그런데 그 동생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자라지 않았거든요. 제가 처음 스페인에서 봤는데 마음에 쏙 드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촌 여동생이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사촌 여동생이 그렇게 생머리에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을 때가 많아요. 내가 그 동생을 예뻐했더니 매제가 내 이상형이 딱 자기 부인이라고 생각해서 중간에서 소개하면서 전부 다 그렇게 말을 했던 거 같아요.”
“정말이요?”
그 말을 듣더니 지한영이 웃음을 터트린다.
“덕분에 저는 지금까지 스무 번도 넘는 소개팅을 했는데 모두 다 생머리에 하나로 묶은 조선 시대의 마지막 여인 같은 여자들하고만 소개팅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내 눈에 지한영 씨가 예뻐 보이겠어요, 안 예뻐 보이겠어요?”
개화기 여자들하고 선보고 다녔다는 규빈의 말에 깔깔거리고 웃던 지한영이 규빈을 보고 말했다.
“그래도 매제가 정말 생각 많이 해 주는 거 아닌가요? 그분도 기업하느라 바쁠 텐데 말이에요.”
“날 생각해주는 게 아니라 질투해서 빨리 결혼시켜 버리려는 걸 겁니다. 자기 부인 앞에 얼쩡거리는 거 싫어서 말입니다.”
“에이 설마요. 사촌 동생이라고 했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나쁘다는 거겠지요. 아니면 그런 선을 보게 하겠어요? 지한영 씨도 생머리였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말하는 나도 믿기 어렵지만, 정말인 걸 어떡합니까?”
규빈의 말을 들으며 웃었더니 마음이 많이 풀어진다. 지한영이 한참을 웃다가 임규빈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난 오늘 재수 없는 날은 맞아요. 아까 봤잖아요. 그 트럭 기사, 진짜……. 어떻게 나한테, 내가 아무리 아르바이트 직원이라고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글쎄, 아마 그 남자의 기준은 여자의 직업이 무엇이고 벌이가 얼마큼 되느냐가 더 중요했던가 보죠. 사람마다 여자를 보는 기준도 다르잖아요?”
“그럼 임규빈 씨가 여자를 보는 기준은 뭐에요?”
“내 마음을 끄는 여자.”
“네?”
“내 마음을 끄는 여자가 내 기준이에요. 그런 면에서 지한영 씨는 내 마음을 끌고 있고요.”
임규빈의 말에 지한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람 놀리지 마세요.”
“그리고 나, 있는 대로 뻗쳐 입고 나온 사람보다 그렇게 유니폼 입고 일하는 거 인상적이었어요.”
“인상적이라고 이렇게 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알아요. 관심 끄라고 그랬던 거.”
그 말에 지한영이 진지한 눈으로 규빈을 바라보았다.
그때 규빈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갈색빛이 도는 단정하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그 눈동자에 규빈을 담고 있었다.
* * *
요즘 라울은 퇴근할 때 파일을 몇 개씩 갖고 와서 고심하며 있을 때가 많다. 나도 들어가서 보면 규빈 오빠한테 어떤 여자가 더 어울릴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나도 들어가서 이 여자가 더 낫겠어요, 하며 의견을 권하기도 하지만 사실 규빈 오빠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기에 그런 걸 잘 못 하겠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정서를 잘 몰라서 거기에 나와 있는 프로필이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도 라울이 좋아하는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오늘도 고민이 많아요?”
“음 이 세 명 중에 다음번에는 누구를 소개해줄지 고민하고 있어.”
“저번에 베리베리 아이스크림 딸하고도 잘 안됐다고 들었는데 오늘 만난 여자도 별로였대요?”
“알 수가 없지. 두 번 만나기 전에는 계속 소개를 해줘야 하니까 말이지.”
“그래요? 어디 봐요.”
세 개의 파일 중의 하나는 너무 앳돼 보이는 얼굴이다.
“이 여자 너무 어린 거 아니에요? 나이가 스물하나? 이제 겨우 대학교 2학년인데 나이 차이도 너무 많이 나잖아요, 여덟 살이면.”
“여덟 살이 뭐가 많아? 디아나와 나도 일곱 살 차이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나는 대학도 다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물론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러고 만났는데. 여기는 대학교 2학년이라니.”
“일곱 살 차이나, 여덟 살 차이나. 이 정도면 뜻밖에 잘 어울릴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아? 임규빈이 오빠, 오빠 소리 되게 좋아하는데 얼굴로 봐서는 오빠 소리 엄청나게 잘하게 생겼네.”
“그러게,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괜찮아, 괜찮아. 마음에 들고 예쁘고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런데 예쁜 게 먼저에요? 마음에 드는 게 먼저에요?”
“그거야 당연히 예쁘고 마음에 들어야지.”
“그러니까 둘 중에 어떤 게 먼저인 거 같냐구요.”
“두 개는 떨어질 수가 없는 거야. 예쁘면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예쁜 여자니까.”
참, 내가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라울하고 무슨 말을 하겠어.
“그래서 다음에 만나게 해줄 여자는 스물한 살짜리에요?”
“응, 이 여자로 정했어.”
“그 전에 오빠가 만일 두 번째 만난다는 사람이 생기면요?”
“생길 거 같지도 않아. 어쩌면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서 두 시간이 약간 안 되는 시간까지 이야기하고 일어나서 정중하게 에스코트하고 두 번을 안 만나는지 모르겠어.”
“정말 딱 규빈 오빠답네요.”
내가 그 말을 하자 라울이 나를 쫙 째려본다.
“임규빈에 대해서 뭘 그렇게 많이 알지? 오빠답다니?”
“내가 뭘 그렇게 많이 알겠어요? 그저 몇 번 봤을 뿐이지.”
그러자 이 말은 흡족한가 보다.
“그렇지? 몇 번 봤을 뿐이지? 결혼을 늦게 한다는 건 참 불행한 일이야.”
“네?”
“이렇게 좋은 결혼생활을 일찍 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나는 몇 년 더 전에 만나서 디아나가 스무 살이었어도 결혼했을 거 같아.”
“내가 안 했을 거 같네요. 그 나이에 내가 뭐가 아쉬웠다고.”
“그럼 지금은 아쉬워서 나랑 결혼한 건가?”
“아니요, 당신을 사랑해서요.”
내가 그를 보고 작게 윙크하자 그가 입을 딱 벌린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내 볼을 꼬집더니 코끝에 쪽하고 입을 맞춘다.
“이 여우 같으니라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꼬리가 달렸을 거야 분명히.”
라울이 장난을 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한쪽 손으로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내 엉덩이를 손으로 쓸며 다리 사이까지 길게 쓰다듬는다.
생각지 못한 곳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실 몸이 움찔거린다. 지난번 호텔에서 진하게 사랑을 나눈 후로는 내가 그를 원할 때가 생긴다. 이전보다 그를 더 원하게 되는 건 그만큼 그가 주는 쾌락에 길들었기 때문일까?
“놔요. 정말 창피하게”
“창피해? 뭐가? 뭐가 창피한데?”
아무리 부부고 사랑을 나누는 사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몸을 만지면 아직도 창피하다. 하지만 그는 내 말에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라울이 나를 끌어당겨서 책상 쪽을 보도록 세웠다. 그리고 뒤에서 바짝 하체를 밀착하고는 당겨 안는다.
그의 손이 앞으로 돌아와 바로 나의 젖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얇은 옷 위로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손에 숨이 거칠어진다.
라울이 귓불을 물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올리브향이 진하게 풍긴다. 그에게서 나는 올리브 향은 어쩌면 나만이 그에게서 느끼는 특별한 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 마음속에 라울은 진한 올리브 향으로 각인된 남자였다.
그의 손이 빠르게 셔츠 속으로 파고들더니 브래지어를 올리고 젖꼭지를 건드리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으응……. 하…….”
치마 속으로 파고드는 손은 바로 팬티를 끌어내리고는 갈라진 틈을 세게 눌렀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숨이 멈추는 것 같다.
“앗!”
다리가 꼬이고 저절로 엉덩이가 뒤로 빠진다. 라울이 엉덩이를 더 뒤로 빼고는 그의 몸을 비빈다. 부푼 그의 페니스가 엉덩이에서 느껴진다.
넓게 퍼지는 플레어스커트 안으로 그의 손이 클리토리스를 집요하게 누르고 비비기 시작하자 나는 다리가 휘청했다. 그가 갑자기 내게서 떨어졌다.
찰칵! 소리를 내며 서재 문이 잠긴다. 문이 잠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밖에는 유모가 태성이를 데리고 놀고 있고 2층에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이런 시간에 서재에서 섹스를 한다면…….
문이 잠겼을 뿐인데도 내 머릿속은 섹스에 대한 우려와 은근한 기대가 범벅되고 있었다.
“태성이 안 자는데…….”
“괜찮아. 아줌마가 계시잖아.”
“그래도…….”
그러나 그는 내 뒷말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대로 다가와 내 셔츠를 머리 위로 훌렁 벗겨버리고 플레어스커트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안아서 의자에 앉히고 양쪽 팔걸이에 다리를 하나씩 걸어 올렸다.
“아아……. 라울…….”
민망하게 다리를 벌린 자세에 몸을 앞으로 구부리려고 했지만 라울이 바로 내 몸을 뒤로 밀었다. 등에 닿는 가죽의자의 서늘한 감촉에 젖가슴이 더 단단해지고 젖꼭지가 단단하게 뭉치며 꼿꼿이 선다.
활짝 벌어진 아래에 라울의 눈길이 따갑게 닿는다. 뜨거운 눈길의 애무를 받으며 속살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응응……. 하……. 라울…….”
벌어진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무릎을 오므리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라울이 손으로 허벅지를 꽉 잡고 활짝 드러난 음부를 핥아 올렸다.
“하으……. 응…….”
예상한 것이었고 어쩌면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르지만 물컹한 것이 속살에 닿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르 떨려오는 전율에 이상한 신음이 터진다. 내가 들어도 끙끙거리는 고양이 앓는 소리처럼 들린다.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소함. 감은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책장의 고풍스러움이 이런 음란하게 느껴지는 자세를 하고 바라보자 더 색다르게 느껴진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양장본의 책은 <삼국지>다. 한글이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건 무슨 책일까? 한국의 문학 소설일까? 아니면 역사책 일까?
온몸이 아찔한 이 순간에 하필 저 책이 눈에 들어와 신경을 거슬리는지.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아서인지 말과 글은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어도 저런 책에는 무척 약하다.
“삼국지가 뭐예요?”
“뭐?”
갑자기 삼국지가 뭐냐는 말에 라울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가 내 다리를 잡은 채로 얼굴을 들었다. 여전히 민망한 자세로 둘 다 쾌감과 욕정으로 흐려진 눈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삼국지? 그건 갑자기 왜?”
내가 턱으로 바로 눈앞에 양장본으로 책장 한 칸을 빽빽하게 채워진 삼국지를 가리키자 라울이 큭큭 웃더니 바로 인상을 쓴다.
“삼국지 같은 소리 할 여유가 있단 말이야? 안 되겠는 걸.”
라울이 입술을 한입에 물고는 거칠게 혀를 잡아채서 빨기 시작했다. 입안의 모든 수분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진한 입맞춤으로 머릿속이 휑하니 비워지는 것 같다. 그가 입술을 물고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꽉 잡힌 젖가슴이 아릿한 통증과 함께 전율을 가져다주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활짝 열린 아래의 민감한 살이 그의 무릎으로 꽉 눌려 비벼지자 있는 대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물론 내 비명은 그의 입안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한꺼번에 점령당한 모든 열점이 전달하는 지독한 쾌락에 휩싸였다. 가슴 끝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빨갛게 변하며 도드라지고 비틀렸고 입안의 혀는 그의 혀에 얽히면서 뜨거운 욕망을 생산하고 있었다.
내 몸 안 저 깊은 속에 감춰져 있던 욕망에 불을 지펴서 들끓게 하는 라울의 애무에 나는 활활 타버릴 것만 같은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아래를 비비고 있는 그의 무릎이 조금 더 속살을 압박하며 비비자 나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간질거리면서 깊은 안쪽으로 느껴지는 헛헛함은 그의 페니스를 품고 싶은 뜨거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끈한 그의 무릎으로 넓게 힘을 가하며 속살 전체를 비벼댄다. 뭉근하면서도 아찔한 쾌감이 아래를 흔들기 시작하더니 음부 전체 진동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압박을 가며며 비벼대자 무릎 뼈에 클리토리스가 직접 닿아 짓뭉개지면서 무서운 쾌감을 선사한다. 몸 안이 술렁거리며 마치 폭주하는 청룡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울렁이며 흔들리는 야릇한 감각에 몸이 뒤틀린다. 놓고 싶지 않은 쾌감의 줄을 따라 모든 감각을 집중하면서 나는 계속 올라가고만 싶었다.
여전히 이어지는 진한 키스에 입술과 혀가 서로 엉켜 누구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오고 가는 타액의 달콤함과 부드러우면서도 도들 거리는 혀의 감촉에 눈을 감은 채 거친 호흡이 오고 간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은 아래로 향한다. 점점 지진을 일으키듯이 흔들리기 시작한 은밀한 살결들이 세차게 흔들리며 온몸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가 클리토리스를 압박하던 무릎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세게 비비자 순식간에 온몸이 덜덜 떨리며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절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아아아……. 응……. 흑…….”
그가 내 입을 가로막던 입술을 떼어내자 내 입에서는 색스럽기 그지없는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 때 문에서 소리가 났다.
똑똑.
“시환이 있니?”
헉! 할아버지의 소리였다.
“…….”
놀란 내 눈이 커지고 터져 나오던 신음을 삼키느라 딸꾹 하고 딸꾹질이 터졌다. 빳빳하게 경직되며 절정을 느끼던 머리는 아직도 흔들리는 몸 안의 감각으로 어질한데 당황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동자만 굴렸다.
그런데 이 원수 같은 라울!
대답 대신 내 아래로 내려와 의자 앞에 무릎을 꿇더니 지금 막 절정으로 아직도 달달 떨리고 있는 아래의 은밀하고 연한 속살을 입술로 빤다.
똑똑.
“시환아.”
다시 한 번 할아버지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 신음이 커다랗게 울렸다.
“헉……. 응응……. 으응……. 아아아…….”
아무리 멈추려고 입술을 깨물어도 멈추지 않고 신음이 나온다. 조용한 서재에 할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리는 내 신음이 방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라울은 계속 집요하게 클리토리스를 할짝거리며 톡톡 혀로 건드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렇지 않아도 벌어져 있는 속살을 더 벌리며 그 안으로 깊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아아……. 흑…….”
못된 라울. 할아버지가 부르셔도 자기가 좀 막아주면 안 되나?
할아버지 여기 디아나 없어요. 아니 그럼 더 이상하고……. 제가 조금 있다가 2층으로 갈게요. 뭐 이렇게라도 말이다.
내 신음으로 할아버지를 물리치려는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나 알아봤자 소용없다. 나는 라울이 건드리는 대로 신음하면서 나른해지는 감각에 눈을 감고는 그의 머리카락에 내 손가락을 묻었다.
단 두 번의 노크소리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으으……. 불쌍한 할아버지. 어떻게 하나? 나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으응…….
그러면서도 할아버지 생각보다 지금 막 내 아래서 나를 연주하는 라울의 손길과 혀 놀림에 더 빠져든다. 그의 애무가 진해질수록 내 아래는 두껍게 부풀며 왈칵왈칵 미끌미끌한 액체를 쏟아낸다.
라울은 속살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자극하면서 깊게 파고들어 내벽을 긁으며 꾹꾹 눌러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아니 나를 어디까지 보내려는 걸까?
이제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애무가 진해질수록 더 느끼게 된다. 이제는 그의 혀나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페니스를 원한다.
그의 커다란 기둥이 깊게 나를 찔러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거센 몸짓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를 품고 날아가고 싶다.
“하아……. 라울……. 이제 그만. 응? 이제 해줘. 응?”
내가 신음하며 허리를 뒤틀며 말하자 라울이 반질거리는 입술을 아래서 떼고 나를 본다. 전에도 본 적 있는 진한 보랏빛의 색스러운 눈동자.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선명한 보랏빛으로 보이고 있었다.
“라울……. 응?”
“어떻게 해줄까? 응? 말해.”
“…….”
내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가 알아서 해주었으면…….
원하지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색스럽고 부끄러운 말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말하면…….”
말하면 해주겠다는 거야? 지금? 응? 치사하게……. 그러나 나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간절하게 원하는 건 맞지만, 그의 말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그만하지 뭐.”
“뭐라고?”
디아나는 여우가 분명하다. 사람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놓고 그 말 한마디 하기 싫어서 그만두자고?
자기는 느끼기나 했지. 나는 최고의 느낌을 위해서 지금까지 참고 또 참으며 그녀를 맛보기만 했는데 넣어달라는 한마디를 하기 싫어서 관두자고? 이런 여우! 역시 마녀였어. 세비야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넣어달라는 말이지? 알았어.”
나는 혼자서 다 말하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앞으로 당겼다. 의자 끝으로 당겨진 그녀의 활짝 벌어진 음부가 발갛게 부풀어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속살 전체가 움찔거리며 움직인다.
아! 넣고 싶어 죽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