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랍 보석상
디아나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착상 혈치고는 출혈이 많은데다가 유산 기운도 있어서 유산 방지 주사를 맞고 며칠 절대 안정을 취하면 낫는다고 했다. 나는 어디 마음 붙이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로 지내다가 장인어른께 전화했다.
할아버지께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워낙 단단하신 분이기는 하지만 연세가 많다 보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의 상태가 나아지고 안정적인 임신이라고 말하면 그때 말씀드릴 생각이다.
- 자네 잘 있나? 이렇게 전화를 다 주고 고맙네. 우리 이랑이 잘 있지?
“…….”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장인은 그 잠깐의 순간에 뭘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목소리가 무겁게 바뀐다.
- 이랑이에게 무슨 일 있나? 혹시 심장이 안 좋은 건 아니지?
“네?”
심장이라는 말에 내가 더 놀랐다.
- 우리 이랑이 외가 쪽으로 다들 심장이 약해서 나는 이랑이도 그럴까 매일 그게 걱정이야. 그런 건 아니지?
“네. 그런 건 아닙니다.”
- 다행이네. 그래 신혼여행은 어때? 거기 좋지?
“네.”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뭐라고 먼저 말해야 할지.
- 그런데 자네 목소리가 썩 좋은 거 같지가 않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버님, 이랑이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임신 5주인데 하혈을 해서요.”
“…….”
“팜 주메이라의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 걸린다고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임 회장의 숨결이 조금 길어진다. 걱정하고 놀란 게 분명하다. 이런 전화를 하게 돼서 나도 너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 괜찮을 거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자네하고 이랑이 닮았으면 괜찮지 않겠나?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의료진은 최고로 하고.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거기 있다가 돌아오게.
“예, 그럴 생각입니다.”
- 이보게. 내가……. 갈까?
임 회장의 이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얼마나 걱정이 되면 그룹 총수가 바로 오겠다는 말을 할까?
“아버님, 저희 신혼여행 온 겁니다. 설마 여기를 오시겠어요? 디아나는 괜찮을 겁니다. 곧 연락드릴게요. 할아버지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말씀드리려고요.”
- 그래. 알았네. 나도 말 안 하지. 소식 바로 주게.
장인의 말대로 이랑과 아기는 이틀이 지나자 점점 안정을 찾았다. 나는 디아나의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면서도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기가 무사 하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얼굴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었다.
* * *
우리의 아기가 무사하다. 라울도 나도 너무 기뻐서 서로 안고 축하했다. 병원에서 퇴원해서 개인 섬으로 돌아온 우리는 얼굴만 마주하면 웃었다. 라울은 밤새도록 내 배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정말 이 안에 애기가 있다는 거야? 이렇게 판판한데? 이 속에서 어떻게 사나. 배를 좀 늘려줘야 하는 거 아냐?”
“배는 저절로 늘어나요 라울. 오히려 너무 늘어날까 봐 문제지. 배가 보기 흉하게 다 터지기도 한 대요. 올리브 오일 같은 걸 많이 발라줘야 한대요.”
“내가 발라줄게. 지금 발라줄까?”
“아니요. 지금 말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살갗이 아주 얇아지면 그때 발라야죠. 이제 라울도 나도 정말 아빠 엄마가 되는 공부를 해야겠어요.”
“알았어. 나도 열심히 보고 있다고. 아기가 하도 겁을 줘서 정신 바짝 차린 예비 아빠가 되는 중이야.”
“할아버지께는 연락 드렸어요? 정말 좋아하실 텐데 말이지요.”
“좋은 소식이니 네가 해. 디아나.”
라울이 전화를 걸어 귀에 대어 준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후에 할아버지의 비서가 전화를 받는다.
“저 여기……. 저 임이랑인데요.”
- 아, 네. 사모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회장님 지금 바쁘신가요?
- 네, 지금은 통화가 힘들 것 같습니다. 제게 말씀해 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뭐야? 전화 바꿔. 김 비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울을 바꿔주었다.
“왜? 할아버지 회의 중 아니면 바꾸지? 거기 어디야?”
- 그게……. 저기……. 사적인 모임 중이십니다. 바로 전화 드리도록 할까요?
“응. 그럼 할아버지께 좋은 소식 있으니 곧 전화 달라고 해. 그런데 대체 내가 모르는 사적인 모임이 있어?”
라울이 날카롭게 질문한다. 그리고 몇 마디를 하고는 라울은 전화를 끊었다.
“노인네가 어디 그렇게 사적인 모임이 또 있어? 공적인 모임도 몸이 모자랄 판에. 하여튼 우리 할아버지는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라울이 말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할아버지도 사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잖아요. 좀 있으면 전화 주시겠지요.”
그런데 전화는 그렇게 금방 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나 지난 뒤에 걸려왔다.
- 아가, 전화했느냐?
“네, 할아버지, 저 임신 했어요. 아기가 6주가 됐어요.
- 이런! 아주 재주가 좋구나. 집안에 경사네. 경사. 어쩌면 그렇게 예쁜 짓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구나. 나도 너희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내 선물보다 네 선물이 훨씬 더 크구나. 고맙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 * *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나는 디아나의 전화를 얼른 빼앗아 말했다.
“할아버지.”
- 이놈, 네가 이제껏 한 일 중에서 제일 낫다. 가끔은 신통한 일도 하는구나!
“아, 할아버지. 제가 한 일들이 다 괜찮지. 안 그런 게 있습니까?
- 예끼 이놈. 자랑하려고 건 거구나. 하긴 자랑할 만하지. 진 씨 집안에 경사다. 내가 얼마나 좋은지 아픈 것도 잊겠구나.
“!”
“할아버지 아프세요?”
- 아, 아니. 아프긴. 너 내가 아픈 거 봤냐?
“그러니까요. 웬만하면 몸살도 안 나시는 분이 아픈 것도 잊겠다고 하시니 묻는 거지요.”
- 그만큼 좋다는 거지. 난 펄펄하다. 네놈 오면 테니스 한판 해야지.
“알았어요. 할아버지. 그런데 임신 초기여서 여기에서 한 달은 더 있다가 갈 생각이에요. 8주까지는 조심하는 게 낫다고 해서요.”
- 그래. 회사에 전화해서 일정 조정하고. 알았지?
“네. 그런데 할아버지.”
- 왜?
“그렇게 좋으세요?”
- 그래. 좋다. 사업 잘됐다는 것보다 더 좋다. 네 아들까지 보면 내가 증손주를 보는 건데……. 하하하. 너는 내가 얼마나 좋은지 감도 잡지 못할 거다.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가 전화를 끊으셨다. 전화를 끊자 디아나가 나를 본다.
“우리 여기서 한 달이나 더 있다가 가요?”
“응. 아무 걱정하지 마. 의사가 이제 돌아가도 괜찮다 싶을 때까지 신혼여행하지 뭐.”
“너무 좋아요. 입덧도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아마.”
디아나의 말처럼 입덧은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았다. 긴장하고 결혼식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고 몸이 예민해져서 더 빠르게 입덧을 했는지도 모른다.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고 그와 함께 구운 새우를 먹고 열대 과일주스를 마시면서 내 몸은 빠르게 좋아졌고 이제 어지간한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러는 사이에 한 달은 너무나 쉽게 지나갔다.
“일주일만 더 있어.”
“일주일이요? 저는 괜찮은데 라울 바쁘지 않아요?”
“내가 신혼여행에서 한주 더 있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라곤 절대로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지?”
“고마워요.”
“응. 기상상태도 최적인 날로 꼽아보라고 했어. 가능하면 전용기가 흔들려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손님이 올 거야.”
“누가요?”
“보석 세공사.”
“보석이요?”
“모르는구나. 전 세계의 진귀한 보석들 대부분은 이 아랍 쪽으로 온다고. 두바이도 마찬가지지. 특별히 디아나에게 어울릴만한 보석을 주문했거든. 매일 똑같은 목걸이만 하고 있잖아.”
“하지만 이 목걸이는 당신한테 처음 받은 선물이잖아요. 그리고 볼 때마다 예뻐요. 신문에도 났던 목걸인걸요? 비싸다고 들었는데.”
“그 목걸이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진짜 멋진 보석을 선물할 생각이야.”
그리고 얼마 있다 보석 세공사가 왔다. 보석 세공사는 아랍 전통복장을 하고 그 옆에 수행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함께 있었고, 들고 온 보석함도 어마어마했다. 아랍의 보석상인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가지고 온 카탈로그의 두께도 대단하지만, 개수역시 열개도 넘는 거 같다. 사진에 보이는 건 하나같이 진귀한 보석들로 이런 크기를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카탈로그를 보다가 본격적으로 그가 가지고 온 케이스에서 하나하나 꺼내서 펼쳐놓은 보석들은 입이 떡 벌어지게 어마어마하게 광채가 난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와 비둘기의 심장보다도 더 새빨갛게 느껴지는 루비, 그리고 신비스럽게 빛나는 사파이어와 바다의 빛깔을 머금은 에메랄드까지 그 크기와 색깔에 압도되었다.
“세상에 이런 걸 이렇게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라울. 난 이런 거 처음 봐요. 몇 캐럿인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좋아? 부인을 즐겁게 하는 건 남편의 능력이고 그런 부인의 행복은 남자의 자랑이지. 원하면 많이 해줄게.”
“이런 걸 어디 하고 다니겠어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이런 걸 하고 다닐 수가 있을까?
“무슨 소리? 민박집 딸 디아나는 이런 거 하고 다닐 일이 없지만, MK그룹의 진 시환 회장의 부인은 모임마다 하고 다니면 돼. 보험도 들어놓고 금고에 보관하면 되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난 디아나가 이런 걸 하고 파티에 나가서 모두의 눈길을 받는 게 좋아. 내 아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특히 스페인의 사교계에서라면 당연한 거지.”
맞는 말이었다. 난 아직도 내가 민박집 딸에 가이드 하는 디아나로 생각할 때가 많다.
“고마워요. 라울.”
“천만에. 내 아내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고 또한 의무이기도 하지. 아름답고 품위 있고 또 그만큼 고귀한 신분이라는 걸 나타내는 가장 좋은 것이 바로 보석이니까. 어서 골라 봐.”
그의 말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보석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디아나는 목걸이를 잘하니까 커다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그거와 어울리는 다른 세트를 만들면 좋을 거 같군.”
그러자 그 보석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통 이렇게 큰 알로는 반지를 많이 하시죠. 반지가 좀 더 보이기도 쉽고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그가 보여주는 보석은 손가락 한 마디를 차지할 만한 큰 것이었다. 이렇게 큰 걸로 반지를 만들어 끼는 사람이 있다니…….
“좋은 대로 해. 큰 걸로 반지를 하고 작은 걸로 목걸이를 하든 큰 알로 목걸이를 하고 작은 걸로 반지를 하든.”
라울은 기분이 좋아서 얼마든지 고르라고 했지만 나는 그보다는 보석의 가격이 더 궁금했다. 그래도 그 앞에서 얼마냐고는 차마 뭇지 못하겠다.
How much is it?
이 한마디가 입안에서 맴돌고 입술이 근질근질한데 어째서 라울도 보석상도 가격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는 걸까?
그러다가 기어이 뱉고 말았다.
How much is it?
그러자 보석상이 난감한 얼굴을 한다. 라울이 나를 보고 웃는다.
“이건 가격이 형성되지 않은 거야. 이런 보석들은 대부분 하나밖에 없는 거라. 임자가 나타나면 그게 값이고, 흥정하기 나름이지.”
“엥? 시장도 아니고 값을 깎아야 한다는 거야?”
내 말에 라울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격은 걱정하지 말고 골라 봐!”
난 차라리 돈이 더 좋은데. 보석이 얼마나 할지 모르는데 고르라니 고를 수가 없다.
“라울. 난 돈이 더 좋아요. 그거 주면 내가 쓰고 싶은 거 쓸게요.”
그러자 라울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디아나. 돈은 넘치게 많잖아. 성진 그룹의 지분만으로도 평생 몇 대가 먹고 살만큼 많고 내가 앞으로 줄 돈으로도 뭐든지 살 수 있어. 쌓아놓고 살 만큼 줄게. 그래도 돈이 필요해?”
난 고개를 갸웃했다.
지분이 돈이라고?
물론 그게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의 값어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쌓아놓고 살만큼의 돈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돈이 많다면 돈으로 목걸이를 해서 걸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돈을 보석으로 바꿔서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게 더 낫다. 돈을 먹을 수가 없으니 음식으로 바꿔 먹듯이 말이다.
맙소사! 진짜 돈 걱정 하지 않고 보석을 사는 이유는 그거였다니! 그런 세상이 진짜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이건 어떠십니까?”
보석상은 특별히 안쪽에서 보석함 하나를 꺼냈다. 그 보석함은 가장 안쪽에 있던 걸로 열쇠를 돌려서 열어야 하는 거였다. 카리브 해의 해적에서나 볼 수 있는 진짜 보석함!
세상에. 나는 선뜻 뭘 고르지 못하고 보고 있었다.
“우리 사모님께는 이걸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권해준 건 핑크 다이아몬드였다. 분홍빛을 띠는 다이아몬드의 화려함에 나는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세팅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가 카탈로그에서 보여준 것은 다른 다이아몬드고 주변을 뺑 돌아가며 장식을 해놓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심플한 디자인 같지만, 다이아몬드의 크기 자체가 압도적으로 큰 데다 주변을 수놓고 있는 다이아몬드도 일부 이상은 되어 보인다. 그래서 세팅을 마친 다이아몬드는 두 번째 마디 넘어설 정도로 커다란 크기에 번쩍번쩍 빛이 난다.
“이 아름다운 손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라울.”
나는 너무나 감격해서 라울을 돌아보았다. 그가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임신 축하선물이야. 물론 결혼 축하선물이기도 하지.”
“하지만 반지라면 청혼할 때 한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그거하곤 별개야. 내가 보기에도 이게 예쁘네. 이걸로 하고 가격은 세베로와 이야기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바로 반지 사이즈를 재고 그와 함께 세트로 만들 목걸이 디자인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두껍고 커다란 보석이 박힌 호화로운 디자인이었다. 들어갈 금값만으로도 차 한 대는 사고도 남을 거 같다.
“이렇게 두껍지 않아도 되는데…….”
“이 정도 두껍지 않다면 이런 크기의 보석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안전한 디자인이기도 하고요. 보통 보험회사에서도 안전을 생각해서 이런 디자인을 선호하지요.”
“아…….”
그리고 내 입은 다물어지지가 않아서 침도 흘릴 판이었다. 이런 호화로움은 이전에 놀랐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거였다. 역시 보석! 호화로움과 사치의 결정판!
이런 것도 필요로 하는 세계도 있구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서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와 함께 그 주변을 수놓을 다이아몬드 그리고 금과 브로치와 목걸이에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보석을 라울이 사들였다.
보석상이 돌아가고 난 후에 라울이 자랑스럽게 나를 안으며 말했다.
“우리가 떠나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세팅을 해준다고 했으니 기대해도 돼. 디아나.”
“고마워요. 라울.”
내가 그의 팔에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라울이 나를 번쩍 들어 안고 작게 말했다.
“빨리 입덧이 나아서 함께 사랑할 수 있으면 더한 것도 해줄 수 있어! 진짜야.”
맙소사! 라울 정말 그 생각밖에 없는 거야? 그 밤에 라울은 절대 섹스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디아나. 이건 섹스가 아니야. 그냥 이대로 자다가는 몸에서 사리가 나올 거 같으니까 디아나 맛만 보는 거야!”
내가 먹을 거야? 맛을 보게?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정말 너무나도 절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디아나. 잠깐만……. 응?”
그가 내게 키스하더니 내 온몸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정말!
목덜미를 물고 빨기 시작하더니 다시 입술을 겹치고 혀를 얽으며 진액을 빨아먹듯이 혀를 낚아채 쪽쪽 빤다.
뜨거운 입술이 점점 아래로 향하더니 부푼 가슴을 혀로 핥으며 유륜을 따라 할짝거리고 바로 젖꼭지를 물고 세차게 빤다.
“흑……. 하……. 라울!”
고문과도 같은 지독한 쾌락의 전율이 온몸을 감싼다. 그의 입술이 한참을 젖꼭지에 머물더니 아기가 있는 아랫배에 입술을 대었다. 쾌감과 함께 아랫배가 움찔거리기 시작하고 열기에 입술이 마른다.
자극이 심해서인지 자궁이 수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배에 닿자 배가 땅긴다.
“아! 라울. 아기가 싫어하는 거 같은데요?”
“@$#&&!$# !!!”
8주가 지날 때까지 한 달을 더 두바이 섬에서 머물다가 여객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용기는 기체가 작아서 혹시 흔들릴 위험이 있을까 걱정이 들어서 대형 여객기를 이용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온 덕분에 전용기 못지않은 호사를 누렸다. 확실히 전용기보다 기체가 흔들리는 건 덜했다.
성북동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동안 내내 라울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이 신혼생활을 즐겨야 되는데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게 돼서 이게 웬일인지……. 디아나 언제든지 할아버지가 힘들게 하거나 성북동에 살기 싫으면 말해. 내가 언제든지 분가 한다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 해요 우리 같이 성북동에서 일 년 동안 살기로 했잖아요.”
“전혀 생각에도 없던 일이잖아.”
“하지만 당신 나하고 한남동 우리 아빠 집에서 지낼 때도 참 좋았잖아요.”
“그건 장인어른이 워낙 좋으신 분이니까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는 또 다르다고.”
“내가 볼 때는 할아버지도 참 좋은 분이세요. 나한테 아주 다정한 분이시거든요.”
“무슨 소리야, 우리 할아버지는 다정과는 거리가 먼 분이야.”
“그렇지 않아요. 같이 살아 보면 알 거예요 난 할아버지 좋아요.”
“흥 맘대로 해. 시집살이 힘들다고 울고불고 해도 난 몰라.”
“걱정 말아요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라울과 나는 성북동 집에 도착해서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들어서자 웃으시며 제일 먼저 우리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할아버지!”
나는 깜짝 놀라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안내한 우리 방이라는 것은 바로 이 집에 주인이 쓰는 안방이었다.
“여기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방이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안방을 써요?”
“왜 못써? 여기가 네 집이고, 네가 이 집 주인이니까 당연히 안방을 써야지.”
“할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새파랗게 젊은 우리가 안방을 쓴다고요?”
“그래 내가 아무리 살아있어도 이 집 주인이 너니까, 네가 안방을 써야지. 뭐 잘못 된 거 있냐?”
“이 집이 왜 제 집이에요? 제 집은 따로 있잖아요.”
“아니다. 이 집이 네 집이야. 내가 등기도 다 이전했거든. 네 이름으로 말이야. 그러니 안방을 쓴다 못 쓴다 말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할아버지 말씀에 라울과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내 나이가 이제 몇 년 있으면 90이야. 90이 다 되도록 안방 차지하고 있는 거 부담스러워. 나도 젊은 너희들에게 의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작은 방에서 지낼 거다.”
“정말이세요,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저 정말 부담스러워요.”
라울은 화가 난 듯이 목소리를 키워서 말했다. 내가 볼 때 라울은 화가 난 거 같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씀하셨다.
“부담스러워야지. 당연하지. 나는 평생 부담스러웠다. 이제 그만 부담스러우려고. 너희가 나 좀 편하게 해주면 안 되겠니?”
이건 반칙이다. 어떻게 일 년만 같이 살기로 했는데, 집을 통째로 안겨주며 같이 살자고 하는 건지, 정말 부담스럽다.
“평생 같이 살자는 소리 아니야. 전에 말한 대로 1년만 같이 살면 돼. 아가야 여기 인테리어 어떠냐?”
할아버지는 디아나를 부르며 바로 화제를 바꾸신다. 할아버지가 원치 않는 대화를 끝내는 방법이었다. 일단 할아버지가 결정하고 이렇게 구조까지 바꾼 것을 보면 단단히 마음먹은 게 분명하다.
“좋아요 할아버지. 정말 벽지 색깔도 구조도 욕실이나 드레스룸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요. 이걸 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이렇게 하라고 한 건가요?”
디아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새로 꾸민 방을 보며 아주 행복해 한다.
이거 완전 미끼 같은데…….
* * *
라울이 아무리 퉁퉁거리며 마음에 안 들어 해도 소용없다. 나는 아주 마음에 드니까.
게다가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정말 감동이었다.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는 안방과 드레스룸 그리고 욕실까지 잡지에서나 본 듯한 최첨단 인테리어와 최신 기기들로 가득하다.
“나야 뭘 아나. 사람들에게 너희들 쓰기 좋은 걸로 디자인 뽑아 보라고 했더니 몇 개 가지고 왔더라. 그래서 나는 그냥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몰랐을 뿐이야.”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세요. 이렇게 꾸미는 거, 그거 정말 어려운 거예요.”
할아버지가 내 말을 듣고 기분 좋아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냐? 그게 정말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그럼요. 그거 결정하는 공부 한 거예요 저도. 이렇게까지 잘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나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인사를 했다.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은 느낌, 한 번도 할아버지의 애정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랐지만, 결혼해서 이렇게 할아버지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하여간 할아버지는 사람 놀라게 하는 일 참 잘해요.”
라울의 말해 할아버지가 씩 웃으시며 말했다.
“네놈도 놀랄 때가 있냐? 내가 너 키우면서 놀란 거에 비하면 네가 나 때문에 놀란 건 새 발의 피다. 이놈아.”
그렇게 성북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9주가 넘어선 후로는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성북동에서 아주머니들이 해주는 음식도 정말 맛있었다. 아주머니들에게 한국 음식도 조금 더 자세히 배울 수가 있었다.
물론 스페인에서 엄마한테 배웠던 것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 엄마 정말 음식을 잘했는데, 덕분에 나도 음식 솜씨 있다는 소리도 듣는다.
그렇게 성북동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를 만나서 처음 한 일은 건강검진이었다. 미리 예약된 성진병원의 건강검지센터 VIP실에서 검진을 받고 일주일 뒤에 검사결과를 들었다.
“괜찮다고 하는구나.”
아버지가 밝은 얼굴로 내게 말한다.
“괜찮다고 그랬잖아요. 아버지. 저는 스페인에서도 한 번도 아픈 적 없어요. 얼마나 건강한데요.”
“그렇게 가는 몸을 가지고 건강하다고 해봐야 믿지도 않아.”
아빠는 웃으며 내 손목을 쥐고 말하셨다. 팔목에 느껴지는 아버지의 손의 온기에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믿어요. 이제. 믿으셔도 돼요. 건강검진에 다 나왔잖아요. 다 괜찮다고.”
“그래도 난 걱정이 돼. 혜원이도 그렇게 일찍 가고 네 외할머니도, 그 위에 할머니도 다 심장병으로 일찍 갔잖아. 그러니까 혹시 너도 엄마를 닮아서 심장이 약할까 봐 맨 날 그게 걱정이 됐어.”
아버지는 엄마가 스페인에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많이 슬프셨는지 늘 내 심장을 걱정했다. 우리 외가 쪽으로는 심장이 다 안 좋아서 여자들이 단명을 했으니까.
아빠는 나도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셨던 거 같다. 하도 아버지가 걱정을 하니까 의사가 이야기했다.
“임이랑 씨는 그 어머니하고 또 다릅니다. 아버지로 임 회장님을 두지 않았습니까. 임 회장님 가정은 병력도 없고 다 건강하십니다. 임 회장님도 지금까지 건강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버지를 닮아서 임이랑 씨도 심장이 튼튼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조바심내고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의 말이 맞다. 나도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일찍 죽지는 않을까? 차라리 엄마 따라서 일찍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다행히 나는 아빠를 닮았는지 그렇게 나빠질 수 있는 심장이 아니라고 한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아빠 또 나한테 오믈렛 해주실 수 있어요?”
“오믈렛?”
“내가 한 거? 가자 집으로. 바로 해 줄 테니까.”
“거기 있는 도우미들 다 기절하겠네. 임 회장님이 부엌에를 다 들어오고.”
“뭐 사람이야 변하는 거지. 사실 나도 오믈렛 해서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가자.”
말 한마디에 아버지 차를 타고 한남동으로 돌아왔다.
전에 내가 아버지에게 말한 대로 아버지의 방은 이제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내가 볼 때 아버지는 이렇게 엄마를 추억하면서 사는 게 훨씬 행복해 보인다. 이전에 이재은이 아버지 부인으로 있을 때보다 말이다.
버섯을 많이 넣고 양파와 다른 약간의 야채를 넣고 커다랗게 만든 오믈렛은 정말 맛이 좋았다. 아버지한테 이렇게 좋은 솜씨가 있는 줄은 몰랐다.
“너무 맛있어요. 아빠. 아빠도 좀 드셔 보세요.”
“아니, 됐다. 많이 먹어라. 너 먹는 거 보고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딱 알 거 같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날 보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이 오믈렛을 먹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면 우리 아빠는 더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웃으면서 우리 엄마를 바라보셨겠구나. 저렇게 사랑하셨구나 하는 생각.
“이랑아, 아기 낳고 몸조리는 우리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니?”
“네?”
친정에서 몸조리하라는 아버지의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살고 있는 집에서 몸조리를 하지 않고?
“한국에서는 다들 친정에서 몸조리한다. 물론 스페인에서는 몸조리라는 말도 생소하겠지만, 한국 여자는 애 낳고 몸조리를 해야 해. 아마 네 엄마가 있었으면 차근차근 말해주었을 거다. 물론 우리 집에 여자가 없지만, 몸조리는 우리 집에서 하면 좋겠다. 내가 아주머니들 산간호 잘하시는 분으로 골라서 모시라고 그렇게 지시할게.”
“아이 안돼요. 아빠. 몸조리는 전문적인 조리원에서 하는 게 나아요. 갓 태어나서는 손도 많이 가고 밤낮 많이 바뀌니까요. 요즘은 다 그렇게 한다고 하던데요?”
“그러냐? 그럼 산후 조리원처럼 사람들 다 집으로 불러서 집에서 하지 뭐. 김 박사도 매일 와서 상태보고 그럼 되지 않겠니?”
“그러게요. 그럼 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
그날 밤에 나는 라울을 보고 말했다.
“라울, 아버지가 나 아기 낳으면 몸조리 한남동에서 와서 했으면 하시는데.”
“할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시려나 모르겠네. 일 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아빠도 적적하기도 하시고 또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엔 한국에서는 대부분 친정에서 몸조리를 한 대. 그래서 아버지가 해주시고 싶으신가봐.”
“너는 어떤데?”
“나는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적적해 보여서.”
“그래?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지 뭐. 그런데 아직도 출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데도 벌써 그런 말이 나오네?”
라울의 말에 나도 공감한다. 어째서 출산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일찍 정하려는 걸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미리 아기방도 꾸미고 사람도 부르기 위해서 그러신 거 같다. 할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거다.
“당신이 할아버지한테 잘 말씀 드려요.”
라울이 기회를 봐서 할아버지께 몸조리를 한남동에서 한다고 말한 건 그러고도 2주 이상 지나서였다.
이제 임신 중기에 접어들면서 배도 약간 나왔다. 입덧도 완전히 사라지고 얼굴에도 살이 올라서 라울과 할아버지는 아주 좋아했다.
라울이 이야기를 꺼낸 건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아이스 홍시를 먹을 때였다. 살짝 녹은 아이스홍시는 할아버지께서도 좋아하는 거여서 우리 집에서는 자주 먹는다.
마침 TV에서 산후조리에 돈이 얼마가 드니, 호화로운 산후 조리원은 얼마가 드니 이런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때는 저런 거 없었는데. 그저 친정에서 몸 풀고 두어 달 있다가 오면 그게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 대부분은 일하고 사느라 산후 조리도 별로 못 하고 그렇게 살았지. 요즘은 시대가 아주 좋아.”
“그렇지요? 할아버지. 산후조리는 역시 친정에서 해야지요?”
“뭐?”
할아버지가 라울이 좋아하면서 말하자 뭔가 하는 얼굴로 보신다. 하여간 라울은 찬스를 잘 살린다. 하필 이럴 때 그런 방송이 나오고 할아버지 입에서 산후조리는 친정에서 하는 게 최고라는 말이 나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니 말이다.
“할아버지, 우리 디아나도 한남동 장인어른께서 몸조리를 해주신대요. 잘 됐지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바로 굳어진다.
“안 된다. 나도 얼마든지 몸조리해 줄 수 있어. 집에 사람들 부르면 되는 거지.”
너무나 단호한 말에 나도 놀랐다.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실 줄은 정말 몰랐다. 할아버지의 말에 라울이 확 인상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할아버지, 우리 여기서 일 년이나 살잖아요. 아버님 댁에 가서 한두 달만 있다 올게요.”
“흥, 임 회장이 딸 좀 예쁘게 봐 달라 그러고, 그렇게 나한테 와서 사정할 때는 언제고 결혼시키자마자 데리고 가겠다고?”
나는 갑작스럽게 변하는 이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 산후조리가 뭐 대단하다고 어디서 하면 어때서 이러는 걸까?
물론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면 좋겠다는 거였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렇게 정색을 하시니 좀 서운한 생각도 든다.
“몸조리하는 동안만이요. 아무래도 친정이 더 나을 수도 있죠.”
라울이 여러 번 말했으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신다. 나는 라울에게 그만하라고 눈짓을 했다. 산후조리가 뭐라고 할아버지가 저렇게 싫어하시면 아버지께 양해를 구하면 된다.
설마, 우리 아빠도 저러시지는 않겠지?
그날 밤이었다. 늘 9시쯤 되면 출출해서 뭔가 먹을 것을 찾곤 했는데 거실로 나가니 할아버지께서 주방에서 나오시며 말씀하신다.
“아가, 이리 와봐라.”
“네.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께서 주방에서 나오시기에 냉큼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나를 보며 웃으며 정말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순간 할머니로 착각할 만큼 말이다.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예?”
“너 지금 뭐 먹고 싶은 거 없냐는 말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가만히 있다가 쉽게 떠오른 걸 말했다.
“치즈 김밥이요.”
“치즈 김밥? 거기 가만있거라.”
말을 하고는 할아버지께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신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할아버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젓는다.
“너는 따라 들어오지 말고 거실에서 기다려.”
“네?”
“내가 왕년에 자취도 오래 했던 사람이야. 치즈 김밥 해줄 테니 기다려.”
그러더니 할아버지가 진짜 요리라도 하실 것처럼 앞치마를 두르신다. 너무 놀라서 일어나서 말렸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그냥 라울에게 사오라면 돼요.”
“아니다. 거기 앉아있어라.”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해주시는 걸 어떻게 받아먹어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너 주는 거 아니고 네 뱃속에 있는 내 증손주에게 주는 거다. 내가 그 녀석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매일 안 먹어도 배부르고 사는 게 즐거워.”
“할아버지 괜찮아요. 내일 먹어도 되고, 사오라고 해도 되고…….”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해. 증조할아버지가 우리 예쁜 손주 김밥 한번 싸주고 싶어서 그런다.”
오늘따라 라울은 늦게 들어오는데 할아버지가 기어이 부엌에 들어가셔서 김밥을 싸시겠다고 재료들을 꺼내신다. 차라리 어디로 숨고 싶었다.
아니, 팔십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가 싸 주는 김밥을 어떻게 앉아서 먹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는 거기 있거라.”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계란 지단을 부치시고 당근을 써신다. 그것도 아주 잘.
“아주머니 불러도 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내가.”
그러고 있을 때 라울이 들어왔다.
“디아나,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주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김밥을 싸신대.”
“뭐라고? 할아버지가 뭘 해?”
라울은 아주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보며 반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이라고 했다.
“아기를 위해서 직접 김밥을 싸주시겠대.”
내가 손을 배에 얹으며 말하자 라울이 쿡쿡거리고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할아버지가 요리했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 걸 어떻게 먹여.”
“네 이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옛날에 자취생활을 얼마나 많이 했던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사업 시작하느라고 정신없을 때 쫓아다니면서 일하고 혼자 대구에 떨어져서 자취 생활하고 그랬어. 그때 김밥도 다 싸먹어 봤어.”
“대체 그게 얼마 전 얘기에요 할아버지?”
“뭐 육십 년도 안 됐다.”
맙소사. 육십 년도 안 됐다고? 60년 전에 싸보신 김밥을 지금 싸시겠다고?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혹시 우리 할아버지도 치매는 아니겠지?
“차라리 제가 할게요.”
아무려면 할아버지만도 못하겠어?
“넌 이리 와서 거들어.”
할아버지는 나에게 다 준비된 김밥을 말아 보라고 하셨다.
“뭐 이딴 거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밥을 말아 본 적은 없지만 김 깔고 밥 깔고 그 위에 야채 얹고, 고기 얹고, 치즈 얹어서 둘둘 말면 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