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죽을 병
디아나가 죽을 것 같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토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 이렇게 토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우리 집안은 대체로 건강하다. 할아버지도 잔병이 없다. 어머니하고는 어려서 같이 산 것 말고는 아픈 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디아나가 토하는 걸 보는 지금 내 심장은 너무 놀라서 멈출 거 같다.
아! 사람들은 너무 행복한 순간을 조심하라고 하더니 결혼을 하고 디아나가 자타가 인정하는 완벽한 내 여자가 되어 행복한 이 순간에 디아나가 죽을병에 걸렸나 보다.
지금 얼굴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겁먹은 눈으로 날 쳐다보는 디아나도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뭐하십니까? 어서 세뇨라를 침대로 모셔야지요. 제가 안을까요?”
뭐? 이런 중에도 자기가 안을까요? 하는 세베로를 향해 무서운 눈길을 돌리고 옆에서 다 토하고 늘어져 있는 디아나를 들어 안았다.
일단 환자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래. 그래야지.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가? 별거 아닐 거야. 디아나. 들어가자.”
별거 아니긴. 아무래도 아주 중병인 거 같아. 나는 절망했다. 그러나 디아나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안정적인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주인님 얼굴을 좀 펴세요. 주인님 때문에 세뇨라가 더 놀라겠습니다.”
“응?”
내가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었나. 있는 대로 양 입술 끝에 힘을 주고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니 입술에 경련이 날 것 같다.
창백한 얼굴을 한 디아나가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한다.
“라울 미안해요. 당신 식사해야 하는데.”
“지금 내 식사가 문제야? 얼른 올라가자.”
라울의 얼굴을 봐도 내가 중병에 걸린 건 맞는 것 같다.
살다보면 이렇게 토할 수도 있는 건가? 사실 난 한 번도 토한 적이 없다. 건강했고 생활도 규칙적이었고 음식도 골고루 잘 먹었다.
역시 믿어지지 않게 행복한 순간은 불행과 가까울지도 모른다. 자꾸 눈물이 나온다.
일단 믿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 구역질이 나온다. 내장이 속에서 뒤집히면서 올라오는 역겨움이란 뭐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주인님, 이거 세뇨라께서 양치하실 물입니다.”
세베로는 바로 생수가 든 컵과 물을 뱉으라고 대접까지 가지고 왔다. 나는 세베로가 주는 물로 입을 헹구고 넓은 킹사이즈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속이 울렁울렁하다.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통 긴장하거나 음식을 잘못 먹어도 이럴 수 있습니다.”
“문어를 먹고 탈이 났나? 아니면……. 오늘 무얼 먹었지? 늘 먹던 건데 뭐가 잘못된 거지?”
“평소 먹던 음식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인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닥터를 부르겠습니다.”
의사를 부르러 가겠다는 세베로를 내가 말렸다.
“세베로, 나는 지금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일단 잠시 있어보고요.”
“맞아, 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옆에서 라울이 세베로를 보고 말한다. 라울도 뭔가 무서운 거다.
“오오, 두 분 주인님, 그렇게 겁먹을 일이 아닙니다. 물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지요. 아주 놀라운, 어떤 일일지도…….”
세베로가 고개를 갸웃한다. 세베로는 늘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지만 지금 이럴 때는 같이 걱정해주지 않는 게 좀 서운하기도 하다.
“세베로, 내가 걱정되지 않나요?”
“물론 걱정되지요. 힘드실 테니까요. 하지만 큰 병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베로. 그렇지? 큰 병은 아니겠지?”
라울이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얼굴로 세베로를 보며 묻는다. 라울의 저런 말을 들으니 내가 더 큰 병에 걸린 거 같다. 다 보기 싫어!
“괜찮아요. 라울. 조금만 잘게요. 자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아. 당신은 다른 걸 조금 만들어 달라고 해서 먹으면 어떨까요? 난 혼자 좀 잘게요.”
“싫어. 네가 먹지 못하는 데. 네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같이 먹자. 그리고 혼자 자겠다니. 오늘 신혼 첫날인데 무슨 말이야?”
두 번만 신혼이었다가는 난 죽을 게 분명하다.
“지금은 못 먹을 것 같아요. 하지만 자고 일어나서 먹을 수 있으면 같이 먹어요.”
그리고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만 하루가 넘어서 제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거였다. 온몸이 나른한데 달콤한 꿀잠을 잔 거 같다.
밤이 될 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겨우 잠에서 깼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내 손에 뭔가가 잡혀있다.
엥?
세상에 알몸인 라울이 내 옆에 누워서 내 손으로 자기 페니스를 감아쥐고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잡고 잠이 들었다.
못살아. 자다 깨도 민망하고 창피하다. 손을 빼려고 하니 내 손을 덮은 라울의 손도 움직이며 그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라울이 여전히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본다.
“괜찮아?”
“네.”
그의 눈동자가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다.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아주 많이 걱정이 될 때는 이렇게 눈동자 색이 짙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내 손을 가져가 제 페니스를 잡고 잠이 들다니! 정말 이상한 남자다.
“이게 뭐예요? 이런 때도 이러고 싶어요?”
내가 손을 떼며 인상을 쓰자 그가 다시 내 손을 가져가 페니스 위에 댄다. 내 손이 닿자 그의 것이 금방 다시 고개를 든다.
“당연하지. 지금 내가 내 온기를 디아나에게 주고 있는 거잖아. 몰라? 영화에 보면 아픈 사람 안아서 기를 나누어 주는 거?”
말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차라리 말을 말자.
나는 가운을 입으며 그에게 물었다.
“몇 시에요?”
“밤 11시.”
오전에 이 섬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다가 토한 걸 생각하면 온종일 잠이 든 거다.
“식사는 했어요?”
“아니 나도 옆에서 잤어.”
“라울. 점심도 안 먹었는데 저녁까지 거르고 그러면 안 되죠.”
“디아나는 어때. 뭔가 먹고 싶은 게 있어?”
“글쎄요 속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은데. 간단한 파니니 샌드위치라도 하나 할까요?”
그런데 그 뒤로 냉큼 가지고 온 파니니도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샌드위치를 입 앞으로 가져가자마자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해서였다.
역시 보통 병은 아니다!
샌드위치 한 조각도 먹지 못하고 계속된 헛구역질에 바로 닥터가 올라왔다. 새벽 열두 시 반, 의사는 간단한 증상을 보고 진찰을 하고는 말했다.
“혹시 생리가 언제 있었습니까?”
“네? 지지난달 말에.”
“그럼 지난달은 생리를 하지 않았군요.”
“네. 지난달은 하지 않았지만 뭐 곧 할 거예요. 물론 이번 달도 아직 이지만.”
“평소에도 이렇게 생리주기가 불규칙했나요?”
이 의사는 자궁암을 의심하는 건가? 자궁암도 토하고 그러나?
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 내 나이에 병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다. 주변에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니까.
난 내가 자궁암에 걸릴 확률이 별로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아니요. 전 생리주기가 아주 규칙적이고 건강합니다. 자궁암 병력이 있는 가족도 없고요”
“자궁암!”
라울의 얼굴이 새파랗게 된다. 그도 무서운 거다.
“저……. 정말, 디아나가 그렇게 큰 병일까요?”
의사를 보고 묻자 의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의사는 우리를 보고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한다.
“일단. 자궁암은 아닙니다. 다행이지요?”
“제대로 검사도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가 있습니까? 그럼 자궁암 말고 뭐 의심이 가는 병이 있나요?”
“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안 한다. 나는 긴장이 돼서 이불을 꽉 잡았다. 그러자 라울도 내 손을 꽉 잡는다.
“가벼운 병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요.”
“네,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생명이 걸린 일이니 말입니다.”
생명!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임신인 것 같습니다.”
“…….”
“네?”
“축하해야 할 일 같은데 정확한 검사는 내일 해보도록 하고요. 일단 임신 테스터기는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
라울과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의 눈길과 내 눈길이 황당하게 얽혀들며 그의 눈동자 색이 점점 보랏빛으로 환하게 변해가고 있다.
의사가 가고 난 뒤 갑자기 라울이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빙빙 두 바퀴나 돌려서 내려놓고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정열적인 키스가 한참을 이어졌다.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이 아파져 온다.
“으음……. 응응…….”
내가 아프다고 어깨를 비틀자 그가 천천히 힘을 빼며 내 혀를 깊게 옭아매며 핥고 빨기를 반복한다.
“진짜야? 진짜 임신이야?”
“나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 좋아서 이러는 걸까? 아기라는 말은 좋지만 내가 임신했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디아나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임신 맞는 거야?”
“내일 봐야 안다고 하는 말 못 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조금 퉁명스럽게 말이 나간다. 그런데도 라울은 나의 이런 기분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거 같다.
라울이 임신 검사기를 들고 내 손을 끌며 욕실로 향했다.
“라울 왜 이래요?”
“왜는? 어서 해봐야지. 내가 해줄게. 가자. 응? 이거 어떻게 하는 건지 설명서를 봐야지.”
라울이 테스터를 꺼내고 그 안에 있는 설명서를 찬찬히도 읽는다. 그동안도 나는 기분이 묘했다.
아기라니! 이제 막 결혼을 했는데. 게다가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많고, 어찌 됐든 이렇게 빠른 임신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라울이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좀 된 거 같다. 처음에는 콘돔을 꼬박꼬박 챙겨서 하루에도 콘돔을 몇 개씩 쓰더니 언젠가부터는 처음에만 하고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하고.
뭐야? 라울이 작정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드니 라울이 얄밉다. 자기가 임신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말도 없이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다니.
“간단하네. 여기에 소변을 묻히면 줄이 두 개면 임신이래. 하나면 아니고. 야호! 디아나, 정말 아기였으면 좋겠다.”
라울이 큰 소리로 말하면서 활짝 웃는다.
“응?”
나는 대충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런 임신 테스트를 꼭 해야 하나?
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배탈 나서 그런 거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내가 라울의 아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라니!
스물넷에 아기 엄마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어서 들어가자. 응? 내가 해줄게. 응?”
아니 이 남자는 대체 뭘 해주겠다는 거야? 여기에 소변을 묻혀야 한다며? 그런데 뭘 해줘?
대신 자기 소변이라도 묻히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할게요. 이리 줘요.”
“잘할 수 있겠어?”
그럼 이걸 못하겠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임신이면 진짜 어쩌냐고!
라울이 테스터를 주며 나를 보고 말했다.
“임신이 아니면 어쩌지?”
기막혀라. 언제부터 아기를 원했다고 임신이 아니면 어쩌냐고? 임신이면 어떡하냐고!
테스터를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
화장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감돈다. 디아나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자 정말 가슴이 떨린다. 임신이구나. 임신이었으면. 아기가 정말 생기면 디아나가 집에서 아기를 키우며 나를 기다린다는 거지!
그야말로 여우 같은, 아니 천사 같은 디아나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집에서 나만 기다리면서 지낸다는 말이군.
그렇게 되면 정말 회사에 나갔다가도 바로 들어가고 싶겠네. 우리 아기들이면 얼마나 예쁠까?
그런데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지?
나는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물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거 아닌가?
디아나는 소변을 볼 때도 소리가 나지 않나? 하긴 여자들은 앉아서 누니까! 소리라도 좀 내지. 궁금한데…….
임신이면 누구나 하는 거니까 병은 아닌 거지? 병은 아니니까 섹스는 해도 될 거 아니야. 구역질은 좀 해도 느끼는 건 다 느끼겠지?
그럼 오늘도 해도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자 아래가 점점 부풀고 있다. 피가 몰리면서 아래로 질량이 몰리는 거 같다. 이럴 때는 몸무게의 반이 그곳의 무게일 거 같다.
그런데 정말 소리가 나지 않네.
“디아나!”
“…….”
나는 문을 살짝 두드리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디아나!”
“지금 하고 있어요. 기다려요.”
“두 줄이야? 응?”
“정말! 지금 하고 있다니까!”
선 두 개 나오는 게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나는 화장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 라울의 아기라니!
틀림없이 여자아기일 거야. 나를 닮아서 깊고 진한 눈동자를 가지고 하얀 얼굴에 디아나를 닮은 가늘고 긴 목선에 둥근 어깨를 하고. 섹시한 가슴과 가는 허리 그리고 디아나처럼 빵빵한 엉덩이를…….
아니지 이건 아기 모습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아기를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사촌 여동생 중에 결혼한 애가 있기는 하지만 아기는 안 보여줬던 거 같은데?
인터넷 사진 속에 나오는 그런 예쁜 딸?
“우리 디아나 내 옆에 꼭꼭 붙어있으라고 아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가 화장실 문에 붙어서 말하자 잠시 후에 문이 열렸다. 디아나가 검사기기에 나타난 선명하게 붉은 두 개의 줄을 보여준다.
“라울. 임신 맞아. 어떡해요?”
뭐야? 디아나의 이 반응은?
나는 디아나가 나처럼 기뻐할 줄 알았는데 지금 디아나의 얼굴은 완전히 망했다는 얼굴이다.
“아기가 생겼다고! 우리 아기!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자들은 아기를 가지면 다 기뻐하는 게 아니었나?
“라울. 아기가 생긴 건 정말 기뻐요. 하지만 나는 정말 일로 성공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아기가 일찍 생기면 경력도 쌓을 수가 없고. 그러다 나이가 들면 내 일도 할 수가 없잖아요.”
맙소사!
디아나는 아직도 자기가 직장을 얻지 못해서 애쓰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디아나! 난 너무 기뻐. 이제 디아나가 아기를 키우며 어디도 가지 않고 내 옆에만 있을 거 아니야?”
“아기가 빨리 오지 않아도 난 당신 옆에서 어디 가지 않아요.”
“디아나는 모르겠지만 난 이미 삼십 대거든? 그러기 때문에 빨리 아기가 보고 싶어. 일 같은 건 얼마든지 나중에 할 수 있어. 내가 일 할 수 있게 해주면 될 거 아니야? 전에 할아버지 하신 말씀 못 들었어?”
“네?”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 일하고 싶으면 원 없이 하게 해주겠다고. 이 큰 그룹에 너 하나 일 할 게 없겠느냐고.
나중에 하기 싫다 소리 나올 때까지 경력 불문 일 할 수 있게 해주면 될 거 아니야?”
“정말이에요?”
이제야 디아나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지금 임신보다 일하게 해준다는 말이 더 좋다는 거야?
“물론 정말이야.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나는 아기가 빨리 생기면 좋겠어. 내 나이도 생각해야지.”
“무슨 소리에요? 이제 겨우 서른이면서.”
“나와 디아나의 아기라면 어서 보고 싶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더라고요.”
“나도 그 속담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 근데 지금 내가 그렇다는 말이야?”
“신혼여행 와서 아기 타령하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려서 그게 큰일이지요. 정말 어떡하나!”
작게 한숨까지 쉰다. 대체 디아나는 왜 이러는 거지? 일도 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임신이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멋진 신혼여행지에 와서 이러고 있는 건 유쾌하지 않아요. 마구 다니며 놀고 싶은데.”
“얼마든지 데리고 올 수 있어. 그리고 지금도 입덧해도 다 돌아다니면 돼. 다니다 토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오늘 밤도.”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웃으며 허리를 휘감고 바짝 하체를 밀착시킨다.
“임신은 다들 하는 거니까, 섹스도 얼마든지 해도 되겠지?”
그런가?
“물줄까?”
“네.”
“주스는 어때?”
“주스는 마시고 싶어요. 오렌지 주스요.”
말만 하면 어디에 램프의 요정이라도 있는 거 같이 갓 짠 오렌지 주스가 내 앞에 도착한다. 한 모금 마시자 그건 먹을 만하다.
“맛있어요.”
“다행이군. 뭐라도 맛있는 게 있어서.”
“라울도 뭐라도 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디아나 앞에서 먹어도 돼? 아니면 내려가서 일 층에서 먹고 올까?”
“편하게 먹고 와요. 주스 마시고 쉬고 있을게요.”
어차피 시차도 적응되지 않아서 밤낮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라울이 식사를 하러 내려가고 나는 인터넷으로 임신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누구나 다 하는 거라고 해도 임신은 만만한 일 같지는 않다. 그런데 상상을 하니 너무 좋다.
예쁜 아기가 내 뱃속에서 자란다고 하니 말이다. 쭉 임신과정을 살펴보고 있을 때 라울이 올라왔다.
“뭐 보고 있었어?”
“임신에 대해서요. 아기가 이렇게 자란대요. 인터넷 사진으로 태아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가 빙긋 웃는다.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초기에는 벌레 같군.”
세상에! 지금 아기 아빠 되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야?
내 눈이 막 세모가 되려고 하는데 라울이 다시 한마디 했다.
“그런데 우리 아기는 이렇게 자라지 않을 거야. 생길 때부터 훨씬 예쁠 테니까. 나를 닮아서 예쁜 딸이 배 안에서부터 모양 잡으며 자라고 있을걸?”
다른 사람이 말하면 웃겠지만 라울이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면 꼭 그럴 거 같기는……. 개뿔.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돼?
“혈색이 좀 나아졌네.”
라울이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릴까?”
“뭘요?”
“디아나가 임신해서 너무 힘들어서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일 년 살기로 한 거 못살 거 같다고.”
하여간 이 사람은 틈만 있으면 이 얘기를 한다.
‘디아나가 불편해할지도 모르니 할아버지 집엔 들어가 살지 말자.’
‘할아버지는 무시하면 된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 만일 정말 임신을 하게 된다면 어른이 있는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노는 걸 보는 건 너무 좋을 거 같다.
사람이 함께 살면 당연히 서로에게 불편한 점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겠지만, 그거보단 따듯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살며시 눈을 째려보며 라울에게 말했다.
“또 그 얘기에요? 할아버지 들으시면 진짜 서운해하시겠요. 손주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어쩌면 그렇게 할아버지 마음을 몰라요?”
“할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야. 디아나가 힘들까 봐 그러는 거지.”
“나 안 힘들어요. 아니 나 할아버지 사랑도 받고 싶어요. 우리 맨 날 가족도 많지 않고 그렇게 살았잖아요. 당신도 그렇고 나도.”
내 말에 라울이 잠시 수긍하는 듯하다가 다시 인상을 굳히면서 말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잔소리 대마왕인 줄 알아? 일단 말을 한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디아나도 그런 잔소리 몇 번 들으면 아마 그런 소리 안 나올 걸? 그리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는데. 라울에게만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나는 전혀 그렇지 않지. 사람 겉으로 봐서 모르는 거야. 디아나가 볼 때 나는 어떤데? 나는 겉으로 보는 거랑 속이랑 똑같아?”
천만의 말씀이다. 처음 봤을 때 라울은 군신 마르스처럼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물론 지금도 멋지기는 하지만 입만 열면 그렇게 폭탄일 줄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나하고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어려져만 가는 거 같아서 처음 봤던 그 석고상 같던 라울의 모습이 점점 변해가는 걸 느낀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또 왜? 뭐 때문에 웃는데?”
“당신이 좋아서.”
“내가 좋아서 웃는 것치곤 웃음이 조금 이상해.”
그가 믿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본다. 하긴 내가 너무 웃기도 했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뭐라 그럴까.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나를 우습게 보는 거 같기도 하고.”
“당신을 우습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당신의 프러포즈가 생각이 나서 너무 웃겨요.”
“내 프러포즈가 어때서?”
“내가 그대로 한번 재연해 볼까요? 나 외워버렸는데.”
“됐어, 조용히 해. 그만하면 됐어. 프러포즈라는 건 딱 한 번 들은 걸로 끝이야. 머릿속에서 지워.”
“싫어요.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라울이 다가와서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양쪽 머리를 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말한다.
“결혼해줘. 사랑해. 이 두 마디 외에는 다 지워. 알았지?”
그리고 말과 함께 키스를 한다. 한 번, 두 번,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귓불을 물고 빨기 시작한다.
훅훅.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입김에 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토하고 늘어졌던 게 생각나지 않게 그의 손놀림은 집요했다. 가슴을 크게 잡고 비비다가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잡고 비틀며 잡아당기자 짜릿한 전율이 돈다.
“흐흑.”
그가 내 가슴으로 얼굴을 내렸다. 민감한 젖꼭지가 그의 입에 빨려 들어가자 뜨거운 기운이 아랫배를 돌아 허벅지가 움찔 거린다.
물론 민감한 속살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려 손바닥으로 넓게 아래를 비비기 시작하자 타다닥 불꽃이 이는 거 같다.
“디아나. 사랑해.”
라울이 손바닥으로 클리토리스를 압박하며 비벼대기 시작하자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에 임신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가 입술을 내려 아랫배를 깊게 흡입하자 판판한 살결이 빨려 들어가며 빨갛게 자국이 난다. 그가 흡입한 살을 물고 혀로 세게 핥자 진저리를 치게 된다.
손가락을 깊게 삽입하고 흔들자 엉덩이가 흔들린다.
“으응……. 앙……. 하아……. 응…….”
내 신음에 내가 더 민망할 만큼 이제 그의 손놀림에 나는 잘도 반응한다.
“라울……. 이래도 될까?”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푹 쉬라고.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고 푹 쉬자. 응?”
그가 말과 함께 내 손에 그의 페니스를 쥐어주었다. 매끈한 것이 이미 쿠퍼 액을 머금고 있는 게 느껴진다. 손으로 살살 문지르자 그의 얼굴에 쾌감이 드러나며 내 안을 건드리는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렸다.
집중적으로 열점을 공략하다가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나는 순식간에 몸을 경직시키며 떨었다. 그 덕분에 내 손안에 있던 그의 페니스를 쥐고 세게 흔들었다.
“큭. 디아나. 못 참겠다.”
그가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그의 페니스를 내 안으로 세게 밀어 넣었다.
쿵!
다른 때보다 더 세게 짓찧는 느낌이 들었다. 아찔한 전율이 일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아아…….”
“좋아? 더 해줄까?”
그가 말도 끝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세게 허리를 밀어 넣었다.
“악!”
배가 뒤틀리면서 뭔가 아래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서 입을 붕어처럼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라울을 보자 라울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디아나! 피가…….”
그의 말에 아래를 보니 그의 페니스에 피가 묻어있다. 시트에도 피가 점점이 떨어져 있다.
“라울!”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라울이 나를 눌렀다. 급하고 놀라는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가만있어. 디아나. 이대로 누워있어. 내가……. 내가 의사를 부를게.”
그러는 동안에도 내 배는 점점 아파져 오기 시작한다.
라울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 단 한 번도 그는 이렇게 겁나는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라울은 먼저 가운을 꺼내 들고는 내게로 왔다.
“디아나, 의사가 올 거니까 이걸 먼저 입자. 디아나…….”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나는 겁이 났다. 배가 아프고 시트를 적신 피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이대로 아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무섭다. 내게 이렇게 일찍 아기가 생겨서 어떡하나 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서 이런 일이 생긴 것만 같아서 더 두렵다.
“세베로, 닥터를 불러. 기왕이면 산부인과 전문의로. 그리고 지금 어서 와.”
라울이 전화를 끊고 내 가운을 들추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디아나. 아직도 피가…….”
“라울…….”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기가 오자마자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된지 12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모든 생각이 아기에게로 쏠린다.
인터넷에서 임신 초기에 조금 조심하면 얼마든지 성생활은 가능하다고 했다. 조심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했다.
조심 한 거 같은데…….
아랫배를 뒤트는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라울도 눈을 질끈 감으며 길게 숨을 토해낸다. 그의 손이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힘을 주었다. 그도 두려운 게 틀림없다.
똑똑.
새벽 시간이었지만 세베로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침실로 왔다.
“세베로. 의사는? 응?”
“바로 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산부인과 전문의가 오려면 몇 시간은 걸립니다. 이곳은 섬이니까 말입니다. 비행기를 보내면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을 겁니다. 세뇨라께서 많이 안 좋으십니까?”
“하혈을 해!”
라울의 단 한마디에 세베로의 얼굴도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제 겨우 생긴 태아는 까스틸로 가문의 장자이다. 생기자마자 유산이 되거나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귀한 까스틸로 가문은 임신하게 되면 가문의 내려오는 규율대로 조심해야한다. 아침이 되면 그것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임신 확정소식도 받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겨서 세베로도 당황했다.
“주인님, 혹시…….”
설마 어제 그렇게 멀미하고 입덧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잠자리를 가졌단 말인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흐트러진 라울의 옷을 보니 더 물을 것도 없다.
가운 하나를 걸치고 창백하게 늘어져 있는 디아나를 보자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없다. 이미 일은 일어났고 나머지는 태아의 생명력에 달린 것이다.
“세뇨라, 제 말 들리시지요?”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눈물이 나온다.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
엄마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엄마가 계셨다면 이럴 때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고 엄마 말대로 하면 다 잘 될 텐데…….
“세뇨라. 혹시 모르니 일단 다리를 조금 높이 올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제가 쿠션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세베로가 긴 쿠션을 가져오자 라울이 내 다리를 하나씩 들어서 쿠션 위에 올렸다. 아마도 유산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인 거 같다.
아가야. 제발 엄마 안에 꼭 붙어있어. 응?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러니 엄마 떠나지 마!
나도 모르게 계속 속으로 아기에게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괜찮은 거야? 응?”
라울이 세베로에게 물었으나 세베로는 정확하게 답을 하지 않았다.
“세베로. 말 좀 해 봐. 다른 때는 듣기 싫은 말도 잘 하면서 이럴 때 입을 다물면 어떡해? 응?”
그러자 세베로의 얼굴이 차갑게 굳으며 말했다.
“주인님, 임신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뇨라가 입덧과 멀미로 힘든 것을 아시지 않았습니까? 조심을 했어야 합니다. 일단 쿠션을 저렇게 놓고 안정을 하고 의사의 말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
라울이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저런 라울을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지금 내 마음은 아기에게로만 향하고 있다. 불안한 시간은 빨리 가지를 않는다.
세베로가 온 지 5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의사가 오지 않는 게 초조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야?”
라울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그때에 의사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시지요? 왔다가 간지 몇 시간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러나 내 얼굴을 본 의사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하혈하고 있나요? 얼굴이 창백합니다.”
내게로 다가오는 의사를 보며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슬픔과 두려움이 몰려와서 걷잡을 수가 없다.
정말 아기가 잘못된 걸까?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의사의 말에도 라울은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주인님, 잠시 진료를 할 수 있게 나가셔야 합니다.”
세베로가 말을 하자 그제야 라울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간다. 라울이 나가자 더 겁이 난다.
“잠시 하혈을 어느 정도 했는지 봐야 합니다. 혹시 유산이 된 건 아닌지도 알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아래를 보겠습니다.”
라울 이외는 아무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곳을 의사가 본다니까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기가 더 중요하니까…….
의사는 이불을 걷고 시트와 다리 사이를 보고는 아랫배에 손을 대었다.
“앗!”
살짝만 눌러도 배가 아프다.
“아기가 잘 있나요? 잘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네?”
의사를 보며 나는 애원했다. 아직 배가 아픈 건 아기가 잘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기가 없다면 배도 안 아프겠지.
의사가 침착하게 이불을 내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남편 되시는 분과 잠깐 이야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살짝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죽을 것처럼 무서운 마음은 가라앉는다.
“잠이 오면 잠시 주무세요. 지금 상황에서 푹 자는 건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겁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갔다.
아가야,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몰랐어. 제발 이대로 가지 말고 엄마에게 기회를 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나는 조금이라도 다리를 높게 들고 싶어서 베게도 하나 쿠션 쪽으로 던졌다. 움직이지 않고 다리를 높이 들려고 말이다.
* * *
“지금 상태로는 뭐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아직 완전히 유산이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정도 하혈이면 잘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가 생겼다고 좋아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겨우 그 정도 섹스로 아기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체위도 정상 체위였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저 상태로는 초음파나 검사를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일단 최대한 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상태를 보면서 필요하면 주사를 맞고 또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전문의는 오겠지만, 장비를 다 가지고 오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팜 주메이라의 병원으로 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몸을 따뜻하게 해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의사의 말을 종합하면 아기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가능하면 주사나 약을 쓰기보다는 안정하고 아기가 엄마 자궁에서 안정하도록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섹스는 절대 금물입니다.”
마지막 말이 쿵 하고 가슴을 때렸다. 역시 그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게 다입니다. 팜 주메이라에는 연락을 하겠습니다. 오전 중으로 전문의가 올 겁니다. 저는 그 전에 또 와서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사가 말하고 나갔다. 세베로는 의사가 나자 함께 나갔다가 잠시 후에 따뜻한 물주머니와 간단한 스프를 가지고 왔다. 옆에는 주스도 두 종류나 있다.
“세뇨라. 몸을 따듯하게 하고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아기씨를 잡을 수 있어요. 지금은 아기가 무척 화가 난 거 같습니다. 잘 달래줘야 하겠지요?”
세베로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동안에도 라울은 석고상처럼 내 옆에 의자를 가져다 앉아있었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 했고 완전히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먹어야 아기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에 수프를 한 숟가락 떠 넣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더니 스프 잔 위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세뇨라. 괜찮을 겁니다.”
세베로의 말에 나는 넘어가지 않는 수프를 꿀떡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슬픈데도 수프를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아기가 힘을 낼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먹을 거다.
울다가 또 구역질도 한 번씩 하면서 나는 수프를 반쯤 먹었다. 그저 수프를 먹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온몸이 땀에 젖었다. 어떻게 몸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작은 점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아기가 나를 흔드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내가 수프를 먹고 누우려고 하자 라울이 나를 눕도록 도와주고 다시 옆에 앉는다.
“주인님, 잠시만 저를 좀 보실까요?”
세베로가 라울을 불렀으나 이번에도 라울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멍하게 내 손만 잡고 있다.
“라울, 세베로가 할 말이 있대요. 응?”
내가 말하자 그제야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 디아나. 눈을 좀 붙여. 내가 계속 옆에 있을 테니…….”
나는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게 말하는 라울의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해 보인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하고 세베로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가 되자 나는 간절히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어쩌다 내가 아프면 늘 나에게 그러셨다.
“디아나. 괜찮아. 열은 곧 떨어질 거야. 나쁜 세균들을 우리 디아나 안에 있는 좋은 병사들이 다 무찌르느라고 열이 나는 거야. 어서 잘 먹고 힘을 내야지? 곧 괜찮아질 거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주면 열이 나는 중에도 기분이 좋고 엄마 말대로 그렇게 다 나을 거 같았다.
지금 엄마가 계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아기에게 말했다. 꼭 엄마가 나에게 하듯이.
“아가야. 괜찮을 거야. 힘들지만 엄마가 너를 꼭 품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서 귓불이 축축해진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무서울 때도 나한테는 괜찮다고 하셨을까?
* * *
“주인님, 지금은 주인님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혹시 아기가 유산되는 일이 있더라도 주인님께서 세뇨라를 위로해주고 잡아주셔야 합니다.”
“…….”
세베로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리는 말이라고는 유산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생명이 왔다 가는 게 이렇게 간단할 수가 있는 건가?
그냥 하던 대로 사랑했을 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주인님?”
세베로가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냉정한 표정으로 세베로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사 앞에서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건 평생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알았어. 세베로. 그런데 이런 일에 대해 들은 적 있나?”
“네, 대대로 내려오는 집사들의 일지에 보면 이사벨님도 처음 주인님을 가지셨을 때이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이 조심하셨다고 했습니다. 대대로 까스틸로 가문에서는 임신 초기에는 침대를 트윈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마디로 하지 말라는 얘기군. 이제 막 결혼을 했는데 내 신부를 아기가 채갔다는 말이야. 그것도 엄청 무섭게 겁을 줘가면서 말이지. 그런데도 나는 진짜 무서워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거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베로가 안됐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그 웃음에 공감이 간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아기만 무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거 같다. 아기의 등장과 더불어 나의 완전한 패배였다.
아가! 내가 두 손 들었다. 완전 항복이라고. 그러니 엄마 안에 붙어있어. 더 이상 고집부리고 못살겠다고 뛰쳐나오면 반칙이다.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라울이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진 적이 없는 내가, 점처럼 작은 아기에게 완전히 졌다. 그놈이 디아나를 독차지 하더라도 나는 그 아기의 아빠니까 말이다.
“그래서 세베로는 나도 침대를 트윈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주인님께 그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바로 옆에서 참는 건 더 힘이 들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나는 오기가 났다. 그래 섹스는 좀 참는다고 쳐도 옆에도 가지 말라고. 디아나의 그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몸을 안고 자는 재미마저 포기하라고?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침대는 그냥 둬. 난 디아나 옆에서 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베로가 돌아서려고 할 때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물었다.
“괜찮겠지?”
“…….”
“괜찮다고 말 해. 응? 이렇게 아기를 잃어버린 조상도 있었나?”
그러자 세베로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묻는다.
“솔직히 말할까요? 아니면 원하시는 대답을 할까요?”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는 그대로 디아나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잠이 들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짙은 속눈썹을 내리 감고 있다. 눈썹에 눈물이 맺힌 걸 보니 울다가 잠이 든 거 같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날부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 누워 안아주고 싶지만, 겁이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나는 베개를 들고 침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갔다.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불편하다. 이 라울이 소파에 누워서 뒤척이다니!
하지만 아기가 잘못된다면 그건 더 참을 수 없을 거 같다. 나와 디아나의 첫 아기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지.
할아버지!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안다면 펄쩍 뛰면서 두고두고 나를 갈굴 때마다 써먹을 게 분명하다. 장인인 임 회장도 슬퍼할 거다.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하긴 내 아기니까.
날이 밝아서 팜 주메이라의 병원 산부인과 의사가 진찰을 왔다. 그는 디아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의료 헬기를 부르겠습니다. 이동 침대차에 실어서 호송하면 충격이 덜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진짜 잘못된 거야?
“지금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라고. 대체 어떤 상태기에 의료헬기를 타고 가야한다는 거야?”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 이런 상태가 더 못살 거 같다.
“아기 심장 소리가 아주 약합니다. 제대로 초음파를 해서 상태를 알고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부인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의료헬기 부르십시오. 최대한 빨리.”
나는 디아나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앉았다.
“기분이 어때? 디아나?”
“괜찮아요. 의사가 뭐래요?”
“음, 아기가 잘 있대. 그런데 기왕이면 병원에 가서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의료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 한대. 괜찮지?”
내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긴 그녀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아기가 많이 안 좋아서 그런 건 아니겠죠?”
“아니야. 안정적으로 아기에게 필요한 걸 해주려면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내가 옆에 있을게.”
내 말에 디아나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팜 주메이라의 병원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
스페인에서는 언제나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가서 기도했는데 그 뒤로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기도했던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병원에서 디아나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에 초조해하고 있을 때에 세베로가 왔다. 세베로는 의료헬기를 타지 못해서 따로 온 거였다.
“세베로. 아빠가 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군.”
“하지만 세상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이지요. 잘 견뎌내실 수 있습니다. 주인님도, 세뇨라도 그리고 우리의 고집쟁이 아기씨도 말입니다.”
그래 아기는 완전 고집쟁이가 분명하다.
고집쟁이라도 좋으니 잘 있다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 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