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3)

22. 탈의실의 격정

이럴 때 이 남자는 정말 대책이 없다. 갈아입다 지쳐서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턱으로 마네킹을 가리킨다.

“사실은 내가 마음에 드는 건 저건데.”

그건 그냥 파격적인 장식용으로 입혀놓은 상의만 있는 드레스였다. 튜브톱에 엉덩이 쪽을 부풀리고 허리 아래는 그저 살짝 레이스로 가려놓은 상의만 있는 드레스!

“이걸 입어보라고요?”

거의 쇼걸 수준의 드레스였다. 아니 쇼걸이 아니라 스트리퍼나 입으려나?

옆에 있던 디자이너가 눈이 커다래져서 말했다.

“사장님, 이 드레스는 밑에 치마를 달아야 하는데 아직 달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상의만으로도 너무 멋지게 나와서 이렇게 전시한 건데 이게 마음에 드시나 봐요. 그러니까 일단 상의만 있는 거라……. 원하시면 시간에 맞게 만들어보도록…….”

“됐습니다. 일단 입히고 다들 나가요. 저 사람이 이 옷 입은 거 꼭 봐야겠습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런데 디자이너는 라울의 말을 듣더니 빙긋 웃으며 옆에 있던 아가씨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 데리고 나갔다.

커튼이 가려진 탈의실 안에서 나는 드레스를 입혀주는 아가씨 도움을 받아 라울이 원하는 그 드레스를 입었다.

맙소사! 난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기절할 뻔했다. 가슴을 꽉 조이며 강조한 드레스 위로 가슴살이 풍만하게 드러나 보이고 허리 아래로는 딱 팬티만 가리는 레이스가 살짝 가로로 드리워져 있다.

엉덩이 쪽은 풍성한 리본 레이스가 밑으로 땅에 끌리게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드레스 아래로 다리가 드러나고 엉덩이 위에서부터 늘어진 리본이 땅에 끌리는 영락없이 할리우드에서 춤추는 쇼걸의 복장이었다.

옷 입는 걸 도와준 아가씨가 인사를 하고 나가고 나는 탈의실 안에서 기가 막혀서 서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커튼이 확 열리며 라울이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본다.

예리하면서도 진한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피부를 뚫기라도 할 것 같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의 눈길을 거울을 통해 마주했다. 부끄러운 마음과 알 수 없는 열기가 함께 피어오르며 볼이 달아오른다. 내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몸 안의 열기를 뱉어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라울의 눈이 조금 더 애욕으로 짙어지는 게 보인다.

* * *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 미치겠네! 정말.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리처럼 붉은 입술을 벌리고 거울을 보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디아나 이리 와봐.”

내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자 디아나가 더 커다랗게 눈을 뜨고는 본다. 흰자위가 깨끗해서 더 검은 눈동자가 선명해 보이는 걸까?

생머리를 하나로 묶어 더 청초해 보이는 디아나의 얼굴과 그 아래로 드러나는 풍만한 가슴은 천사와 요부를 하나로 합쳐놓은 듯 그렇게 보인다.

“어서 와보라고.”

드레스를 갈아입는 곳은 커튼 안쪽으로 두 계단 정도 위였다. 그녀가 매끈한 다리 아래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 또각또각 걸어서 내려온다.

대리석 계단에 울리는 하이힐 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그 가는 굽 위에 그녀가 놓여있다.

불안정한 것이 가져다주는 아찔한 유혹이 지금 디아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이 안정되지 않아서인지 불안하게 돌아가는 눈동자에는 평소 단정한 그녀의 얼굴과 다르게 흐트러진 관능을 드리운다.

가는 어깨가 드러나고 가슴은 풍만하게 솟아있고 잘록한 허리 아래는 입은 듯 안 입은 팬티만을 살짝 가린 레이스다.

그러니까 이게 스커트가 아니라 스커트를 달기 전 상의만 입은 거라 이거지.

이 상태가 제일 예쁜데.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계곡. 다리가 벌어지는 딱 그 지점을 교묘하게 가린 이런 드레스라니!

그런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아래로 몰리며 페니스가 무섭게 곤두서는 게 느껴진다.

“라울, 왜요? 잘 못 걷겠어요.”

말을 하며 그녀가 내려오기 무섭게 내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끌어안았다. 그녀의 놀란 눈이 더 커지면 내게 안긴다.

“라울, 여기가 지금 어딘지는 알아요?”

“여기가 어딘지는 내가 더 잘 알거든?”

초미니스커트 드레스를 보면서 이걸 입은 그녀를 상상하며 안고 싶었다.

이렇게 드레스를 입히고 안을 수 있는 기회란 일생에 한 번뿐일걸?

생각보다 훨씬 더 야하고 아름답다. 지독한 관능과 순백의 레이스가 가져다주는 상반되는 유혹에 나는 넋이 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안고 손을 아래로 내리자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그대로 손에 들어온다. 디아나가 긴장으로 숨을 들이켤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더 풍만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라울, 누가 오면 어쩌려고…….”

“다 나가라고 했잖아. 내가 들어오라고 하기 전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거든. 아무도 안 들어오면 그럼 되는 건가?”

커다란 탈의실 안쪽에 자리 잡은 커튼을 친 탈의실에는 2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나는 디아나를 안고 바로 두 개의 대리석 계단을 뛰어올라 탈의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디아나를 소파에 내려놓고는 둥글게 이어진 커튼을 쳤다. 그러자 우리 둘만의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대형 거울만이 우리 둘의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

“라울.”

이런, 이렇게 요염할 수가!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디아나는 더할 수 없이 야하면서 순진해 보인다.

내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며 재킷을 벗어 옆에 걸었다.

손으로 그녀의 목선을 더듬으며 풍만하게 드러난 가슴 주위를 쓰다듬자 그녀가 움찔한다.

“너무 예뻐. 특히 이 드레스 진짜 마음에 들어.”

“이거 아직 스커트는 달지 않은 거라고 했잖아요. 왜 이런 걸 입히고 그래요?”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도 이미 내가 생각하는 것을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

“결혼식 할 때 입는 건 스커트를 달아달라고 하고, 이건 이대로 하나 더 사서 집에다 두자.”

내가 말하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하얀 실크팬티의 매끄러운 촉감에 바지가 터질 것 같다.

“왜요?”

이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디아나의 얼굴은 완전히 발개졌다. 손가락으로 팬티 위 갈라진 틈을 비비자 그녀의 목이 뒤로 꺾어진다.

“사랑할 때 입으려고.”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빨며 가슴을 간신히 가린 드레스를 밑으로 잡아 내렸다. 쉽게도 내려가는 드레스가 허리에 뭉치고 그녀의 가슴이 활짝 드러난다.

입술을 겹친 채로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크게 돌려가며 가슴을 만졌다. 한 손 가득 들어오는 봉긋한 가슴과 도드라진 유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인다. 그녀의 혀를 빨아들이다가 귓불을 물었다. 거친 숨이 귓속을 파고들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쏟아진다.

여자들은 귀가 예민하다고 했지. 그래서일까? 그녀가 짙은 속눈썹을 내려뜨리며 눈을 감는다.

“라울……. 어쩌려고?”

어쩌기는. 일단 한번은 가져야겠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죽을 거 같거든.

나는 입술을 내려 그녀의 가슴을 베어 물었다. 달콤한 즙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입안에 도드라진 유두를 혀로 굴리며 쪽쪽 빨자 그녀의 허리가 크게 뒤로 휜다.

* * *

라울의 입술이 가슴을 빨아들이자 나는 아래로 뜨거운 액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뜨거운 입술에 가슴이 점점 더 크기를 불리고 있다.

나는 눈을 내려 그를 보았다. 바지 앞섶이 불룩 솟아있다. 손을 뻗어 그의 페니스를 더듬자 그가 벌떡 일어난다.

빠르게 버클을 풀고 지퍼와 드로즈를 한꺼번에 내리자 거대하게 부푼 그의 것이 튕기듯 공기 중에 나와 끄덕거린다.

그가 내 앞으로 섰다. 그의 것이 바로 내 앞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내 두 손안에 겨우 들어온 그의 것이 뜨겁다.

“큭! 디아나.”

손에 쥐었을 뿐인데 그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대로 쥐고 있자 그가 조금 허리를 밀며 페니스를 내 손안으로 민다.

“디아나. 물어봐. 보고 싶어.”

그가 내 볼을 잡고 올리며 눈을 마주치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벌려서 그의 것을 물었다.

겨우 귀도 끝만 간신히 물었는데도 입을 크게 벌려야 했다. 그가 내 머리를 잡고 입안으로 천천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으음…….”

깊숙이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에 온몸이 가득 차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욱…….”

입천장에 닿는 그의 페니스에 울컥 소리가 난다. 그러자 그가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안 되겠다. 아직 무리야.”

그가 내 입술을 핥으며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얽혀든 혀의 감촉이 가져다주는 뜨거운 격정에 몸이 떨린다.

혀가 얽혀들면서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비빈다. 둥글게 가슴을 비비던 손이 유두를 잡고 비틀자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흐른다.

라울의 손길을 받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낯선 곳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이렇게 가슴을 희롱당하자 말할 수 없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하응…….응…….”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은 채 그의 애무를 받다가 자꾸 뒤로 눕게 되자 라울이 나를 안아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

발기한 그의 것이 내 아랫배를 찌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라울이 가슴을 입에 문 채로 다리를 벌리자 내 그 위에 걸쳐진 내 다리도 자연적으로 벌어진다.

얇은 실크팬티는 이미 다 젖어서 그대로 달라붙어서 은밀한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을 내려 은밀한 곳을 비비기 시작했다. 바짝 긴장하여 그에게 달라붙자 그가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그의 페니스를 길게 비빈다.

손가락과는 다른 열기가 느껴지며 예민한 신경이 바들바들 떨리며 그에게 반응한다.

“거추장스럽군.”

그가 순간적인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툭 소리를 내며 팬티가 한쪽 다리에 걸쳐진다. 거치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드러난 음부에 그의 페니스가 조금 더 빠르게 비벼지며 쿠퍼 액을 바른다.

이미 젖어든 내 아래에 그의 쿠퍼 액이 함께 비벼지며 질척한 소리가 나자 나는 겁이 났다.

“라울, 여기는……. 정말 누가 올까 봐…….”

“하……. 걱정하지 마. 넌 지금 내 품에 있잖아. 감히 내 품에 있는 여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울이 말과 함께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빠르게 전달되는 자극이 반복적으로 나를 흔들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아……. 라울…….”

깊게 손가락이 밀려들어 온다. 내 몸을 너무도 잘 아는 라울의 손가락은 열점을 건드리기 시작하더니 내가 반응하자 꾹꾹 누르며 나를 순식간에 흔들어 놓았다.

“아앙……. 흐응……. 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내 허리가 뒤로 휘었다. 그의 손이 단단하게 나를 받쳐주면서 얼굴을 가슴에 묻는다.

“너무 예뻐. 이렇게 아무 데서나 예뻐서는 안 되겠는데…….”

라울이 말과 함께 뭉툭한 귀두를 밀어 넣었다. 자세가 불안정하다 보니 끝까지 밀려들어 가지 못하고 끝에서 비벼지는 성기가 마찰을 일으키며 더욱 민망하고 자극적이다.

그가 나를 들어 안고는 꼿꼿이 선 그의 페니스 위에 깊게 내려 앉혔다.

“하앙……. 흑……. 하아…….”

사정없이 파고드는 굵고 긴 기둥이 자궁 끝을 찌른다. 느낌은 자궁마저 관통하여 가슴까지 파고드는 것 같은 강렬함이었다.

“하아……. 라울…….”

“잘하고 있어. 이제 움직여 봐.”

그가 허리를 잡고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그의 것이 안에서 점점 몸집을 불리는 거 같다. 아래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점점 더 그의 크기만큼 벌어지고 은밀한 속살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이물질을 조여 대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있는 대로 힘을 주어 조여 대자 알 수 없는 갈망이 차오른다. 희열과 함께 더 느끼고 싶은 아득한 무엇을 원한다.

“큭……. 디아나. 움직여…….”

그가 이제는 내 허리를 잡고 위아래로 쳐대기 시작했다. 쿵쿵 소리를 내며 질척한 소리가 탈의실 안을 울리고 그의 입술이 신음이 터지는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자 내리눌리는 힘과 쳐올리는 힘이 만나는 지점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른다. 타버릴 것만 같은 그 느낌이 그에게도 전달되는지 그의 입에서도 격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맞닿아 비벼지는 짜릿한 자극이 점점 강도를 높이며 휘감는다. 그도 나도 이제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조금 더한 자극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그는 내 허리를 잡은 채 더할 수 없이 빠르게 나를 들었다가 내려놓았고 더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깊은 곳을 자극하는 페니스의 힘에 압도되어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몰아쉬며 찔리고 흔들렸다.

“아아아……. 악……. 흑…….”

그의 페니스가 내 안의 어느 지점을 쳤을 때 나는 온몸을 경직하고 바르르 떨었다. 죽을 것 같은 전율에 눈앞에서 하얀 조명이 수없이 부서져 내린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세상이 다 빛나고 있었다.

자극이 겹치며 채 넘어가지 못한 타액이 그의 입술에 비벼진다. 더는 견딜 수 없는데 그의 몸짓은 멈추지 않는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런 떨림과 자극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입에서도 진한 신음이 터졌다.

“컥! 윽!”

격렬하게 쳐대던 그의 몸이 멎었다. 그리고 땀에 젖은 나를 안고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디아나!”

“하아……. 라울…….”

라울은 아주 만족해서 나를 안고 입 맞추고는 둘 다 옷을 입었다. 나는 또 노팬티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내 팬티는 라울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내 팬티를 전에도 가져간 것 같은데……. 알아서 버렸겠지?

입고 있던 상의뿐인 드레스는 그대로 사고, 같은 드레스로 그 상의에 맞는 드레스를 맞춰서 돌아왔다. 의상실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보너스를 챙겨주고 말이다.

장난기 많은 그가 마음에 쏙 들어 하는 드레스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참 엉큼한 모습이었지만 이 아래에 스커트만 단다면 아주 우아한 드레스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 * *

“면회다.”

면회라는 소리에 혜정이 눈이 똥그래져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하긴, 면회를 올 사람이라곤 엄마밖에 없는데 엄마가 오지 않으니 말이다.

혜정은 혹시 아빠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오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도무지 바깥소식도 모르고 전해 듣기로는 이진산도 아직도 구치소에 있다고 하니 말이다.

이제 판결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람들 말로는 실형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냥 스페인에서 놀면서 지냈을 때가 딱 이었는데…….

매일 엄마를 원망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막상 나가 앉아보니 엄마는 더 초라한 모습으로 와있다.

“엄마 꼴이 이게 뭐야?”

“뭐는……. 오피스텔도 나왔고, 돈도 못 내서 야반도주했어. 그리고 먹을 것도 없고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알아?”

“그러게 이거 다 엄마 때문이잖아. 스페인에서 이랑이네 민박집만 잘했어도 웬만큼은 살았잖아.”

“이게 그냥. 그래도 네가 조금이라도 호강은 했지 나 때문에.”

“엄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 있는데 무슨 호강이 필요가 있어? 먹을 거라도 좀 넣어주지 그랬어. 사식도 아무도 안 넣어주고.”

“나 먹을 것도 없어서. 사식은 빵하고 우유라도 넣었어. 그냥.”

“으이, 치. 이랑이는 한번 찾아가 봤어?”

“야, 말도 마라. 디아나 그게 얼마나 야무진지. 아휴 날 좀 불쌍히 여겨줄까 해서 갔더니 야, 돈 만 원밖에 안 주더라 야.”

“그동안 돈 주고 산 것들 좀 팔아보지.”

“야 그거 다 팔아봐야 한 달 먹을 것도 안 나오고. 아휴 참.”

“엄마가 나 대신 좀 말해주면 안 돼? 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다 시켰다고 그렇게 좀 말해주면.”

“이게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너 하나 감옥 가면 됐지 나까지 가야겠어? 그렇게 많이 살지는 않을 거래. 아휴 모르겠어. 변호사 쓸 돈도 없고. 그냥 살 만큼 살고 나와라.”

“엄마가 진짜 친엄마 맞아?”

혜정이 소리를 치자 뒤에서 교도관이 말한다.

“정숙하십시오.”

서로 째려보며 혜정과 윤주가 면회 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청주에 같이 가겠니? 이번 주말에 가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전화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아빠.”

“이제 아빠라고 불러주는구나.”

기뻐하는 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매일매일 결혼준비가 정신이 없다. 그런 틈에도 라울은 사람들을 물리치고서라도 틈틈이 나를 안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무 준비도 안 해도 돼. 나만 열심히 바라봐야지. 너 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건데 결혼한다고 날 쳐다보지도 않으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는 그렇게 틈틈이 자기 사랑을 확인했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윙크를 한다.

그의 윙크는 정말 여자들을 녹일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 일단 눈이 크고 깊다. 매끈한 이마와 우뚝한 콧날 덕분에 눈은 더욱 깊어 보인다.

그리고 그 깊은 눈이 보랏빛을 띠는 검은 색 눈동자이다. 그런 눈으로 윙크를 하면 매일 보는 나도 가슴이 덜컹한다. 나는 그의 윙크에 미소로 답해주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라울을 보며 말했다.

“나 이번 주말에 청주에 가요.”

“또? 맨 날 나만 왕따시키고. 나도 같이 가. 청주.”

“안돼요.”

“왜 안 된다는 거야? 디아나가 가는데 나도 갈 거야.”

저런 아이 같은 말을 잘도 한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건 안돼요.”

“어째서지?”

“그건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평생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빠의 가슴 아픈 공간이요. 나는 딸이기 때문에, 엄마의 딸이기 때문에 나에게만 허용하는 아빠의 내면이기도 해요. 그래서 라울은 데리고 갈 수가 없어요.”

“음…….”

이 여자 말이 맞다. 다른 남자의 사생활에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 따윈 나도 없다. 임 회장이 나의 장인이 될 분이긴 하지만 그도 한 남자니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담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 따위 내가 관심이 있겠는가. 하지만 디아나는 다르다. 디아나가 주말에 임 회장과 함께 청주에 가면 주말은 종일 나 혼자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당신은 바쁘잖아요. 이번 주말에도 여러 가지 미팅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알았어. 그럼 디아나가 청주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 나머지 미팅도 다 당겨서 그날 종일 일만 할 거야. 그래 나는 일하다가 쓰러질 거다. 그러면 디아나는 가슴 아파하겠지?”

갑자기 이런 아이 같은 오기가 샘솟는다. 그렇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저 웃음 가득한 눈을 보자니 마음이 저절로 풀리기도 한다.

“빨리 와.”

“일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냥 주말 스케줄만 소화해도 당신 무척 바쁘다는 거 알거든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여기 사무실이에요.”

“그래.”

“나 사무실에 나오지 말까 봐요.”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번쩍번쩍 들어 안는 것도 민망하고 결혼 날짜까지 받아놨는데 그냥 집에서 당신 기다릴게요.”

“안 돼.”

“왜요, 또.”

“회사에서도 보고 싶거든?”

내 말에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진다. 이렇게 살짝 볼이 붉어질 때 그녀의 모습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디아나를 회사에서도 보고, 집에서도 보고.”

“꿈도 야무지셔.”

그런데 정말 그의 꿈은 야무진 꿈으로 끝날 거 같다. 청주에 내려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결혼할 때까지 집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니?”

“네?”

“내가 이혼하게 된 건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됐다. 이미 그 사람도 집에서 나간 지 한참이다. 그러니 나 혼자 있기에 적적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결혼 이주밖에 안 남았지만, 그 사이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구나. 평생 딸로 돌봐주지 못했는데 결혼하기 전 이주라도 나한테 허락해 줄 수 없겠니?”

“글쎄요. 그런데 라울이 어떻게 생각할지.”

라울은 분명히 지독하게 반대할 거다. 그 사람이 떼쓸 걸 생각하면 벌써 힘이 빠진다.

“아, 진 사장이 반대할 수도 있겠다. 그래. 진 사장이 잠시도 널 놓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알지만 그래도 결혼할 때까지는 친정에 있는 게 좋지 않겠니? 그래야 결혼하고 나서도 친정에 대해서 마음이 더 갈 테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너를 집에서 내 딸이라고 부르며 있고 싶구나.”

나는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아빠와의 정을 쌓기에는 이주라는 건 턱없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아빠의 집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청주의 집을 정리할 수 있게 내가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언제까지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서 아빠가 이렇게 청주에 오가는 게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청주 집에 들어서자 아빠가 더욱 신이 난다.

“오늘 저녁은 내가 직접 해주고 싶은데. 나는 주말에는 가끔 여기서 밥을 해먹고 그러거든.”

“아빠는 뭘 잘하시는데요?”

“난 오믈렛을 잘하는데. 내가 한 오믈렛은 너의 엄마도 정말 좋아했거든.”

“그래서 아빠도 혼자서 오믈렛 해서 드시고 그랬어요?”

“어, 그랬지.”

“아빠.”

“응?”

아빠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본다. 이 집에서 아빠는 훨씬 더 젊어 보인다. 엄마와의 시간 속에 있어서일까?

“이제 그만 하세요.”

“뭘 말이냐?”

“이 청주 집. 이제 그만 정리하세요. 부부가 결혼해서 살아도 이사를 하잖아요. 이제 아버지 집에 아버지 혼자 계시니까 차라리 이 집에 있는 엄마 사진이랑 엄마하고 정 들었던 물건들 가지고 가고 청주 집은 그만 정리하세요. 그게 옳은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엄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마음이 많이 아프셔서 그랬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엄마는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 그리고 엄마 아빠의 사랑의 산물인 제가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엄마가 아빠 많이 사랑해 드리지 못했지만, 사랑이 적은 건 아니었어요. 절 보면 아시잖아요.”

내 말에 금방 또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래. 그렇구나.”

아빠가 손을 뻗어 내 볼을 만져주셨다. 따듯하고 커다란 손.

“그래, 이랑아. 이제 네가 있지. 네 말 알아듣겠다.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집 정리하도록 하마.”

“네. 꼭 그러셔야 해요. 저도 이제 아빠 집에 들어가잖아요. 우리 같이 엄마를 추억할 수 있게 방을 꾸며요. 그러면 되죠?”

내 말에 아빠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렇게도 엄마를 함께 공유하는 게 행복하신 걸까? 아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래. 네 방을 꾸며야 되겠구나.”

“보름밖에 안 있을 건데요. 간단히 하세요.”

“왜. 그래도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잠이라도 자게 될지 어떻게 아니?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 방처럼 꾸며놓으마. 스페인에서도 그런 방에서 지냈다며?”

“네. 엄마가 좋아하듯이, 저도 그렇게 이런 분위기가 좋아요.”

그리고 아빠와 더욱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 행복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한남동에 들렸다가 다시 라울에게 가려고 하자 아빠가 나를 부른다.

“왜 오늘부터 여기 있지.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라.”

“아니에요. 아빠.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요. 오늘은 가서 라울에게 얘기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래. 라울에게 말 좀 잘해라. 진 사장이 또 나하고 있는 보름도 샘을 내지는 않겠지?”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 * *

“안 돼. 말도 안 돼. 어째서 이제 와서 친정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아니, 말이 돼? 여태껏 네가 있는지도 모르고도 잘 사셨던 분이 왜 너를 데리고 같은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여태껏 내가 있는지도 몰라서 정도 주지 못했고 사랑도 하지 못했으니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고 하시는 거잖아, 우리 아빠가.”

“그러니까 그냥 마음으로만 그렇게 사랑하시면 되잖아. 그리고 너한테 지분도 주셨고. 얼마나 사랑을 많이 하셨어. 그러면 됐지. 꼭 집에다 데려놓고 시집을 보내시겠대?”

“당연하지. 생각해봐. 만일 나와 라울의 딸이 시집가려고 한다면 라울은 더 같이 있고 싶지 않겠어? 나는 그럴 거 같아.

우리 아빠는 나하고 함께 있어본 적이 없잖아. 그래서 더 그러고 싶으신 것 같아. 난 우리 아빠의 마음 이해해.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빠하고 있을 거야.”

“안 돼. 안 돼 디아나.”

이제는 무조건 떼를 쓰기 시작한다. 뭐라고 말해도 들으려고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라울을 난 그래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라울. 나 우리 아빠 집에 들어가는 거야. 아빠하고 같이 시간 보내야지. 이제 결혼하고 나면 평생 당신하고만 있을 건데.”

“그래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회사에서는 잘 보지도 못하잖아.”

“말도 안 돼. 난 같은 사무실에 있잖아.”

“하지만 내가 사무실에 없는 시간이 더 많잖아.”

맞는 말이었다. 라울은 사무실에 가만히 있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미팅과 현장 방문 그리고 새로운 보고를 받느라 거의 사무실에 있지 못했다.

그래도 같은 회사 안이니까 잠깐씩이라도 얼굴을 보고 키스를 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내가 그 사무실에는 필요 없을 거 같아. 라울이 나 잡아다가 놓고 결혼까지 승낙도 받았으니까. 나 이제 아버지 집에서 결혼준비에 전념할게.”

“뭐? 그럼 난 언제 봐? 내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빠 집으로 찾아오든가. 또 낮에 시간 내서 보면 되죠.”

“말도 안 돼. 나한테 이러려고 아버지 찾았나? 내가 장인어른을 만나 뵙고 말씀을 드려야겠어.”

라울이 단단하게 마음먹은 듯이 말한다. 우리 아빠가 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뭐라고요? 딸하고 이 주간 있는 그 시간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절대 집에 보낼 수가 없다고요?”

“아니.”

“그러면요?”

“나도 살게 해달라고.”

“뭐라고요?”

“나도, 나도 디아나하고 같이 임 회장님 댁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결혼 전에 처가에 들어가서 결혼 준비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라울. 제발 좀……. 그게 말이 돼요?”

“왜 말이 안 돼? 기껏 보름인데 나도 같이 들어가서 살 거야.”

정말 못 말리는 라울. 그런데 이 사람이 하려고 하면 그게 다 말이 되는 게 된다.

“아버님. 저한테도 방 하나 주십시오.”

“정말인가?”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저 말이 기뻐할 말인가?

“혼자 얼마나 적적하시겠습니까. 저도 이제 곧 사위가 될 텐데 아버님의 적적함을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아버님 댁에 들어가서 결혼할 때까지 있겠습니다.”

“이보게 진 사장.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

눈을 깜빡이며 아빠가 라울은 본다. 나는 옆에서 얼굴만 빨개져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디아나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네도 들어오겠다는 말이지?”

“그렇죠. 저도 자식입니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했는데 결혼 전까지 아버님 옆에서 같이 있겠습니다. 아침 식사도 같이하고 저녁에 운동도 같이하고.”

“디아나 때문인가?”

“아닙니다. 제가 겨우 디아나 때문에 이렇게 회장님 댁에 들어온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회장님을 생각해서, 물론 디아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것 때문에 회장님 댁으로 들어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시작이다. 라울의 이 횡설수설. 아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울을 보더니 말했다.

“고맙네.”

아빠까지 라울처럼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네? 그럼 들어와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자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니 나는 정말 고맙네. 집에 방 많은데 뭐. 디아나는 2층에 꾸며둔 방을 쓰고 라울은 서재 옆에 있는 1층 방을 쓰면 되겠네. 들어오게. 치워놓으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부터 있어도 좋아.”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렇게 나는 라울과 함께 아빠의 집을 들어갔다. 아빠가 꾸며준 내 방은 정말 스페인의 엄마 방처럼 아이보리 침대커버에 레이스커튼으로 정갈한 분위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엄마의 취향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청주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그런 느낌. 너무 안정되고 익숙한 분위기에 나는 침대에 앉아 이불을 폭 싸고 끌어 앉았다.

“엄마, 나 너무 행복해요. 엄마가 나한테 해줬던 모든 사랑 그대로 아빠한테 느끼고 있어요. 엄마도 행복하지요? 천국에서 나 이런 모습 다 보고 있지요.”

혼자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아서 달빛이 비치지 않는 창가에는 한쪽 벽에 걸려있는 작은 리스가 보인다. 작은 조화로 만든 거지만 엄마는 직접 라벤더와 갖가지 꽃들을 섞어 생화로 리스를 만들어 걸어 놓고는 하셨다.

스페인에서 많이 자라는 꽃으로 만들어 걸어놓으면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 엄마가 해줬던 감자튀김, 그리고 간간이 구우셨던 구수한 냄새가 났던 빵.

이 방에 있으니 엄마의 모든 것이 떠오른다.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살그머니 방문이 열린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자는 척했다. 방문이 열리더니 덩치 큰 그림자가 들어온다.

보나 마나 라울이겠지.

이렇게 살금살금 들어오는 라울이 보니 세비야 성에서의 밤이 생각이 난다. 그때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살그머니 들어오는 라울이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내가 저 사람한테 참 많이 익숙해 졌나 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다가올 때까지 깨어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침대로 다가오더니 옆에 있는 스툴을 당겨 앉는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디아나.”

“왜요?”

물었으나 대답 대신 입술이 겹쳐온다. 그가 아랫입술을 물고 쪽쪽 빨아 다니다가 살짝 놓아주고는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구나.”

“세상에 꿈도 크셔라.”

그러나 아주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와 있겠다고 했을 때부터 상상하던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라울이 여기 올 이유가 없으니까.

나 때문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면 라울이 뭐하느라고 성진 그룹 회장 댁에 들어와서 살겠는가.

“아빠 주무시는 거 맞아요? 이러고 들어오는 거 다 아실 텐데?”

“그런 거 상관없어. 우리 이러라고 여기 있으라고 그러신 거 아니야 아버님도?”

“그럴까?”

“당연하지.”

그리고는 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집에서 안방에 아빠가 있는데 2층에 이렇게 올라온 라울 때문인지 이상한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낀다.

“도대체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요? 이사 온 첫날에 내 방에 오면 어떡해요.”

“이사 온 첫날이니까 너한테 온 거야. 그런데 이건 우리 집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 난 디아나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온다고 할 때 나를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런데 이렇게 내가 따라오니 완전히 잘했다고 생각해.”

바람이 불어 가는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울의 빌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운치였다.

오래된 저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니까. 창가에 가는 대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가만히 소리를 들으며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를 보던 라울이 말했다.

“이 집도 세비야의 성처럼 오래된 것 같군.”

“세비야의 성처럼 오래될 수는 없어요. 세비야에서는 몇백 년이지만 이 집은 기껏해야 40년?”

“그렇군. 어디에 있어도 너만 있으면 다 좋은 것 같아.”

가끔 라울은 툭툭 자신의 진심을 뱉어낼 때가 있다.

“정말이요?”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됐어요.”

그가 내 허리를 당겨 안으며 허리를 밀착시켰다. 단단한 그의 허벅지가 느껴지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여기서 자고 가려는 거예요?”

“안 그렇다면 여기에 왜 왔겠어.”

하긴, 물은 내가 바보지.

그는 능숙하게 내 잠옷을 걷어내고 저도 바로 알몸이 되었다. 이제 그의 벗은 몸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단단한 복근과 무성한 음모 그리고 아직도 눈길을 주기 민망한 그의 중심.

탄탄한 짐승의 뒷다리 같은 허벅지는 보기만 해도 긴장감이 든다. 가장 남자답다고 느껴지는 몸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려면 운동 많이 해야 하나요?”

“아니, 나는 원래 태어 날 때부터 이랬어.”

또 시작이다. 그리고 정말로 시작되었다. 그와의 뜨거운 사랑의 밤이 말이다.

그의 입술이 귓불을 물고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아득하게 신경을 잡아끌고 사라지는 그의 노련한 애무에 내 어깨가 점점 귀에 올라가 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리자 한쪽으로 드러난 긴 목선에 이를 박고 진하게 흡입한다.

“안 돼. 그럼 자국 남아요.”

“하아……. 상관없어. 어차피 결혼할 여자니까. 다들 이해해. 그리고 난 디아나의 이 가는 목선에 심장이 멈추는 거 같거든.”

이럴 때 보면 너무나 말을 잘한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도 MK그룹의 사장으로 있는 건 단순히 로얄 패밀리여서만은 아니다.

MK그룹은 라울이 맡은 이후 계속 흑자를 내고 있고 성장세에 있다고 평하고 있으니 말이다. 옆에서 보면 전화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의 그 냉철함이나 정확한 화술도 한몫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내 앞에서는 그렇게 되지도 않은 말들로 횡설수설하고 절대 나 때문에 뭘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할까?

특히 이해가 안 되는 건 뭐든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는 거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허벅지 근육이 말 근육일 수가 있나?

내가 바보야? 아니면 이제까지 그렇게 말하면 다른 여자들은 다 믿어주었나?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그를 보았다. 막 입을 열어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홀딱 빨아버린다.

“음음…….”

입술을 가르고 혀가 파고들더니 이제는 아예 혀를 몽땅 빨아먹을 듯이 잡아채서 쭉쭉 빨아당긴다. 혀가 마찰을 일으키며 몸이 뜨거워진다.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겠다.

그가 겨우 혀를 떼었을 때 물어보았다.

“하아……. 라울……. 궁금한 게……. 흑……. 있어요.”

그가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가슴으로 입술을 내려 젖꼭지를 세차게 빨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서 뒷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중에…….”

그리고 그가 다른 쪽 가슴을 손에 쥐고는 젖꼭지를 희롱하듯 혀로 핥다가 질근질근 이로 문지른다. 뜨거운 바람이 휙 부는 거 같더니 아랫배 깊숙한 곳이 울렁하며 아래로 뜨거운 액이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지 말고 좀…….”

“알았어. 말 해봐.”

내가 그의 머리를 밀어내자 그가 고개를 반짝 들고는 나를 본다. 그의 눈동자가 퇴폐적일 만큼 흐려져 있었다.

입술에 반질반질 윤이 나는 타액은 이상하리만치 야하게 보인다.

“왜 나한테 말할 때만 그렇게 횡설수설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거예요? 회사에서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말도 잘하면서 말이에요?”

“내가 그랬나? 별거 아니야.”

그가 툭 말을 뱉고는 다시 내 가슴을 쥐고 빨기 시작한다.

“흑……. 으응…….”

입술의 교묘한 자극에 신음하면서도 은근히 화가 난다. 사람이 물으면 성의껏 답을 해야지 별거 아니라니?

별거는 아니라도 자신은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아……. 그럼 왜요? 별거는 아니라도 뭔가……. 악!”

그가 내 다리를 활짝 벌리고 속살을 세게 빨아들였다. 갑작스러운 거센 자극에 나는 너무 놀라서 허리를 비틀었다. 정말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몸은 그의 애무에 정직하게도 반응한다. 두 다리를 구부려 활짝 벌리고는 집요하게 클리토리스를 빨고 속살을 길게 핥아 올리기를 반복한다.

아찔한 자극이 주는 전율에 떨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혀가 이제는 여리고 작은 구멍을 파고들며 속을 헤집는다.

“하아……. 하아……. 라울……. 응……. 말해줘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정말 궁금했다. 나한테만 그러는 이유가…….

그가 한참을 물고 빠는 동안 나는 몽롱한 중에 짧고 강렬한 절정을 맛보았다. 숨을 헐떡이며 나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자세를 잡고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거대하게 발기된 그의 것이 늘 그렇듯이 엄청난 질량감으로 다가오며 안을 꽉 채운다.

“하하……. 응……. 으음……. 라울…….”

“학! 디아나……. 으음…….”

라울이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내 위아래 입술을 한꺼번에 쪽 빨아들이고는 말했다.

“너무 좋아하는데 그대로 표현하면 디아나가 나를 우습게 알까 봐. 표 내지 않으려고…….”

“…….”

그게 말이 돼? 그래서 청혼도 사랑하는 표 내지 않으면서 하겠다고 그렇게 한 거라고?

그런다고 그게 표가 안 나?

이건 더 말 같지 않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라울이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원래 날 때부터 그래.”

“윽! 하아……. 윽.”

그가 세게 허리를 밀어 넣자 깊은 안쪽이 자극받으며 방금 전 절정으로 예민해진 속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연거푸 허리를 쳐올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디아나를 자존심 세워가며 사랑한다는 건 아니야. 뭐 자존심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지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지만, 그가 허리를 점점 더 빠르게 올려치면서 나는 점점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 같지 않은 말들만 듣다 보니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들린다. 그러니까 많이 사랑해서 헤매게 된다는 거지?

* * *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아버지와 나, 라울이 함께 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평소에 라울과 나는 이런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왜, 아침에 이렇게 밥 먹고 다니지 않았니?”

“네 아빠, 이렇게 아침을 차릴 수는 없어요. 간단하게 먹었거든요. 국이랑 찌개 정도에 반찬 한두 개 정도.”

“네 엄마는 아침이면 찌개 끓이고 요리도 하고 밥상을 잘 차렸는데 스페인에서는 아니었나 보다?”

“스페인에서는 이렇게 못 차리죠, 민박집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야채랑 과일 정도? 간단한 요플레와 빵. 이런 거 위주로 해요. 밥 먹고 싶은 사람들 위해서는 국 하나 정도 끓여 놓고요. 물론 김치는 떨어뜨리지 않았으니까.”

“그래. 어서 먹어봐라. 엄마하고 나하고 식성이 비슷했던 거로 안다. 간도 비슷하게 맞았지.”

“네.”

맑게 끓인 된장국에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으니 따뜻하고 구수하다,

“맛있어요, 아빠.”

“많이 먹어라.”

라울도 국에 밥을 말아서 잘도 먹는다. 이 사람도 이런 한식 아침을 좋아하나?

“라울 맛있어요?”

“응 맛있어.”

“많이 먹어요.”

앞에 있는 굴비를 라울 쪽으로 밀다가 아빠가 생각나서 아빠 쪽으로 크게 밀었다.

“아빠 드세요.”

그러자 라울의 눈에서 번쩍하고 스파크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나를 본다. 하여튼, 나는 앞 접시에 굴비 한 마리를 덜어서 라울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맛있을 것 같네요.”

그러자 라울의 눈이 반달로 휜다. 이렇게 자그마한 눈길과 웃음이 오가면서 아침 식탁이 풍요롭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얼굴은 완전히 흡족한 얼굴이고 라울은 먹기 바쁘다.

이런 가족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 가슴이 벅차오른다.

회사도 그만두고 한남동 아버지 집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가 며칠 째다. 라울도 아예 한남동에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서 은근히 걱정된다.

라울의 할아버지가 아시면 가만히 계실까?

* * *

“야 이놈아 결혼도 하기 전에 처가살이부터 하느냐?”

나는 회장실에서 할아버지 앞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인마. 네가 좋아하는 게장 싸서 빌라로 보냈더니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너 거기서 안 산다며. 거기 도우미 아주머니도 청소만 하고 간다더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여자가 좋고 여자가 좋으면 처가 말뚝에 절을 한다고 해도 그렇지. 결혼도 하기 전에 거기 들어가서 살겠다는 거야 뭐야.

아예 데릴사위라도 하겠다는 거야? MK그룹 그대로 짊어지고 성진에 가져다 바쳐라. 아예.”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일단 한번 발동이 걸리면 중간에 끼어들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단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너 자꾸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내가 디아나를 예쁘게 봐주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 아니 멀쩡한 놈을 꼬여서 친정까지 꿰차고 들어가서 살다니. 거, 보다 보니 되게 맹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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