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질투가 좋다
“할아버지께서는 말씀을 그렇게 곱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쩌면 회장님께서 마음이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냥 제가 알아서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괜히 할아버지를 만났다가 임 회장마저 반대하게 될까 봐 싫었다.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임 회장이 싱긋 웃는다.
“지금 자네 얼굴 보면 진 회장님께서 섭섭하시겠네. 딱 디아나만 생각하는 그런 얼굴이네.”
“맞습니다. 저는 지금 디아나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서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래. 결혼 잘하게 될 거야. 나도 결혼시키기 전에 사위 될 사람 얼굴이라도 보고 밥이라도 둘이 먹으려고 불렀네.”
“네.”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도 임 회장은 디아나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내가 임 회장 보다 디아나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임 회장이 안 됐다.
“……. 그러게. 그런 사람이 있더라고. 디아나 엄마가 나한테 그랬지. 처음 보고.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예쁜 건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그렇지. 우리 디아나 엄마도 정말 예뻤거든. 아마 지금의 디아나보다 더 예뻤을 걸?”
그럴 리가……. 디아나보다 더 예쁜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다. 설령 디아나 어머니라고 해도 말이다.
내가 갸웃하며 보자 임 회장이 웃는다.
“왜, 자네 눈에 디아나보다 더 예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가?”
“네.”
“하하하…. 그래, 우리 디아나가 참 예쁘지. 내 딸인데 말해 뭐하겠나. 그런데 죽은 디아나 엄마도 참 예뻤네. 사진을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여기 있네. 한 번 보게.”
임 회장이 앞으로 내미는 사진을 보자 정말 디아나를 딱 닮은 아름답고 청초한 여인이 보인다. 디아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고른 치아와 웃는 모습은 디아나를 똑 닮았다.
“미인이시군요.”
“그렇지. 긴 시간 사랑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네. 그런 여자가 지구 상 어딘가에서 내 딸을 키웠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내가 그리워하며 마음 아팠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
핏줄이라는 게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는지 평생 모르고 살 뻔했는데 우리 디아나가 와서 나는 매일 행복하다네. 그리고 이제는 든든한 사위까지 생기게 됐군. 생각지도 못한 MK 차기 주인으로 말이야.”
“감사합니다. 저는 혹시 아버님도 반대하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나처럼 사랑에 목말랐던 사람. 사랑해보고 잃어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반대하고 말고 할 수가 있겠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내가 디아나 엄마를 먼저 만났으면 참 행복했겠지만 그러질 못했으니 자네와 디아나는 정말 얼마나 축복인가 말이야.”
진심어린 축복의 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임 회장은 자신이 못다 한 사랑까지 디아나를 향해 축복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아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랑이라는 거 알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 그렇게들 많이 살지. 나도, 디아나 엄마를 만나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거 몰랐었으니까.”
“혹시 저희 할아버지께서 심하게 말씀하시거나 하더라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저희 할아버지가 심하게 대하신다고 해서 저를 미워하지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허허 아버님이라. 그 소리 참 듣기 좋군. 그런 거 없네. 나는 이랑이도 자네도 그냥 고맙기만 해. 어서 들게. 여기 신선로가 참 좋더라고.”
“예. 아버님도 많이 드십시오.”
돌아가신 아버지한테서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정을 느끼며 나는 임 회장과 함께 식사했다.
* * *
“무슨 식사를 이렇게 길게 하고 와요?”
사무실에 들어오자 디아나가 부루퉁한 얼굴로 라울을 본다.
“왜 내가 그사이에 보고 싶었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다른 때는 점심 약속이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하더니 오늘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가서 이렇게 늦게 들어오다니. 여자 만났어요?”
뭐야? 디아나도 질투하는 거야?
그런데 이 여자가 질투하는 거 같으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뭐예요? 그 웃음?”
“여자 아버지를 만났지.”
“네?”
“임 회장님 만났어.”
“아버지요?”
“응.”
디아나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돈다. 그러고 보면 디아나도 임 회장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궁금할 텐데 다음 말이 없다.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아니요. 없어요.”
돌아서려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렇게 가는 팔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일단 팔을 잡으니 저절로 당겨 안게 된다. 품 안에 그녀를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왜요?”
어깨를 움츠리며 묻는 게 꼭 강아지 같다.
“임 회장님 좋은 분이야. 우리 결혼 밀어주고 싶다고. 할아버지 만나러 가신대. 그 말씀 하시려고 만나자고 했어. 그리고…….”
말하는 동안 디아나가 가만히 내게 기댄다.
“그리고 또 뭐라고 하세요?”
“디아나에 대해 물으셨지. 식성은 어떤지. 뭘 좋아하는지…….”
“…….”
“이제 됐지? 아버님이 우리 둘을 밀어주시면 결혼은 바로 되겠네.”
“할아버지께서 혹시 반대하세요?”
디아나는 성진과 MK의 사이를 모르니 전에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아니, 그럴 리가. 전에 디아나 마음에 들어 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불편한 진실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임 회장이 할아버지를 만나서 이야기가 잘 되면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니 말이다.
“전에 회의실 완전히 바뀌었는데. 오전 내내 작업했거든요.”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들어가 볼까?”
말과 함께 바로 성큼성큼 걸어서 소회의실 문을 열었다.
“우와 오늘 컨셉은 뭐지?”
“라벤더요.”
라벤더? 그러고 보니 은은하게 라벤더 향도 느껴진다. 테이블보를 진한 바이올렛과 연한 바이올렛으로 꾸미고 한쪽에 라벤더도 한 바구니 꾸며놓았다. 그리고 은은히 풍기는 향에 저절로 심신이 안정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좋네.”
라울이 저렇게 한마디 하는 건 참 큰 칭찬이다.
“덕분에 난 아직 점심도 못 먹었거든요?”
“이런. 임 회장님이 맛있는 거 사주셨는데 디아나는 굶고 있었다니. 같이 나갈 걸 그랬나?”
“아니에요. 아직은 뭐랄까. 내 아버지라는 건 알겠고 수긍도 하고 인정도 하는데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뭔가 서먹한……. 아버지를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생각이 많이 나서…….”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다가와 나를 꼭 안아준다. 그의 따뜻한 품. 단단한 팔. 언제나 그의 품에 안기면 행복하다. 잠깐의 포옹이었지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같이 무슨 얘기 했어요?”
“우리 어떡하면 결혼 잘할까.”
“네?”
“결혼해야지. 프러포즈도 받아들였고, 빨리빨리 결혼해서 디아나 닮은 딸도 낳고 싶다고.”
“딸일지 아들일지 어떻게 알고.”
“무조건 딸을 원해.”
“못살아. 결혼도 하기 전에 그렇게 대놓고 나한테 딸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있지.”
그가 내 볼을 엄지와 검지와 살짝 꼬집듯이 쥔다.
“디아나, 내일쯤 기사가 날 거야. 호적에 올리신 거 그리고 성진 그룹의 지분을 너한테 증여하는 거. 기사로 내실 거라고 하더군, 어차피 사람들 알게 될 거고.”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디아나가 필요하고 말고가 아니지, 임 회장님이 딸로 인정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만큼 존중해달라는 말이지. 은근슬쩍 뒷말이 나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시겠다는 말씀이야.”
그렇구나!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건 이런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구나. 만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받는 게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 표정은 뭐지?”
“뭐가요?”
“뭐라 그럴까,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다는 표정 같은데?”
이 남자 예민하게도 내 마음을 꿰뚫어볼 때가 있다. 말주변머리도 없으면서 이렇게 툭툭 던지는 말은 참 예리하다. 하지만 그대로 수긍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딱 보니까 그렇구먼,”
“라울, 알다시피 나는 엄마 말고는 누구에게 뭘 그렇게 많이 받아 본 적이 없어요. 물론 라울한테는 예외지만요.”
“그렇지? 나한테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 목걸이도 받고, 반지도 받고, 나도 헐값에 샀잖아. 진짜 내가 그렇게 싸구려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 내 값이 좀 올라갔나? 이제 월급도 들어왔으니까 이만 원은 아니겠지?”
“그만해요.”
어쩌면 저렇게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을 하는지……. 그 내용하고 전혀 다르잖아?
“그래, 맞아. 그동안 내가 준 건 새 발의 피지. 나한테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아버지한테 받게 되는 거야. 하지만 내가 질 수는 없지. 나와 결혼한다면 말이야. 이 나를 포함한 MK그룹은 디아나가…….”
“그만 좀 해요. 진짜.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지. 라울, 나는요……. 그런 건 나한테 돈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내가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뭐.”
“애들 같은 소리를 하는군. 쓸 수 있는 잔돈이 좋은가?”
그런가? 맞다. 나는 그런 지분이니 어마어마한 돈이니 이런 건 감도 오지 않고 돈 같지도 않다.
“물론이에요. 차라리 목걸이가 더 좋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마음 써 주실 줄 몰랐어요. 정말 아버지께서 내 걱정을 하시는군요.”
“어쩌면 디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시지. 잘살기를 바라고. 또 디아나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셔.”
“……. 난 아빠에 대해서는 이해하려는 정도예요. 마음은 아직 모르겠어요. 아빠가 정말 그렇게 날 생각하신다니…….”
“그럼 나라도 그럴 것 같아. 디아나와 나 사이에 딸이 나온다면. 그 딸한테 얼마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겠어?”
“…….”
“그러니까 많이 사랑해 드려. 그나저나 이 고집쟁이 노인네가 임 회장을 만나면 뭐라고 말할까?”
* * *
성북동에 있는 진 회장의 집은 한남동에 있는 임 회장의 집보다 두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돌아가신 임 회장의 아버지가 한남동에 터를 잡고 공사를 할 때 진 회장은 성북동에 그보다 두 배는 더 큰 크기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과연 차를 타고 달려도 담이 끝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벨을 누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게 펼쳐진 잔디가 보인다.
아기자기한 꽃나무나 그런 것이 있다기보다는 남성적인 미가 잘 보이도록 쭉 펼쳐진 잔디밭과 굵은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한다.
정원에 있는 등은 작은 석탑으로 정원으로 보자면 동양적인 신비감이 들기도 하다. 겉으로 보이는 동양적인 정원에 비해 실내는 완전히 서구적이었다.
거실 한쪽에는 박제된 사슴의 머리가 걸려있었다. 물론, 멋있기는 했지만 임 회장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진 회장의 호전적인 정서가 드러나는 그런 벽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 그리 앉지.”
“안녕하셨습니까. 진 회장님.”
“그래 거기 앉아 임 회장. 여기 마실 것 좀 내다 줘요.”
진 회장의 말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진하게 우려진 대추차를 내와 앞에 과일과 함께 내놓았다.
“식사는 했나?”
“간단하게 했습니다.”
“나도 했어. 역시 저녁은 간단하게 하는 게 좋아. 그렇지?”
“예.”
“그래, 집까지 다 찾아오고 무슨 일이야.”
“안부 인사도 드릴 겸…….”
“떽, 노인을 놓고 놀리면 못써. 자네같이 바쁜 사람이 나한테 겨우 안부 인사하자고 여기까지 오겠어. 아마 무척 중요한 일일 테지. 말해 봐. 나도 다 짐작하는 게 있어.”
“네”
묵묵하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임정환 회장을 보며 진 회장은 그가 임규빈과 라울이 함께 디아나를 좋아해서 그 일로 왔다고 생각했다.
어림없지. 이렇게 찾아온다고 내가 손주 며느릿감을 뺏길 거 같아?
“흠, 혹시 조카 며느릿감 때문에 그래?”
“네?”
의외의 말에 임 회장이 반문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며느릿감 달라고 그러는 거면 단념해. 내가 볼 때는 라울하고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빨리 날짜 잡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며느릿감 내놓으라고 땡강 부릴 거면 그것만 마시고 가라고.”
진 회장다운 돌직구 발언이었다. 임 회장은 슬쩍 웃으면 대추차를 한 잔 마셨다. 규빈이하고 관계를 오해하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살살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임 회장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말했다.
“차가 아주 좋습니다.”
“그래. 이거 내가 심심풀이로 대추 농장 하나 만들라고 했거든. 한 번씩 가서 둘러보면 좋아. 열매도 단단하니 좋고. 그거 가지고 끓인 거야.”
“예. 정말 향이 진하고 맛도 좋습니다.”
임 회장이 다시 한 모금 차를 들자 진 회장이 빠르게 말했다.
“나 성격 급한 거 알지? 어서어서 말해봐. 괜히 빙빙 돌려 대추차 좋다고 하지 말고.”
“아닙니다. 정말 대추차가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럼 많이 먹어. 우리 집에 대추 청 만들어놓은 것도 있으니 싸줄 수도 있어.”
“감사합니다. 그, 기사 났던 아가씨 이야기는 맞습니다.”
“내가 그랬잖아. 그래, 그럼 들어볼 것도 없어. 무조건 라울하고 결혼시킬 생각이야. 그러니 임 회장이 단념하고 그거 마시고 가게.”
“그런데 며느릿감으로 달라는 거는 아닙니다.”
“그래? 그럼 뭐?”
“제 이야기를 조금 드리려고요.”
“그래 해봐.”
호기심 있는 눈초리로 임 회장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진 회장을 보며 임 회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아버지하고 연배가 비슷하시니 아버지한테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기 전에 사설이 긴 거 보니 말하기 힘든 것 같군.”
“예. 꺼내기 부끄러운 이야깁니다. 예전에 몹시 마음에 들어 하던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래, 살다 보면 남자들 그러기도 하지.”
진 회장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80대 중반에 접어드는 할아버지의 연륜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다고. 그런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부인이 있는 몸으로 엄청이나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많이 배우고 똑똑한 아가씨였는데 제가 너무 욕심을 냈던 가 봅니다.”
“가진 거 많은 남자야 여자 욕심낼 수도 있지 뭐. 원래 손안에 넣고 싶은 거 못 넣으면 더 안달이 나잖아. 다들 그렇지.”
“그런데 그게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상심했습니다.”
“원래 여자가 많이 배워서 생각이 많으면 남자 손에 잘 잡히지 않지. 그래서?”
이제 진 회장은 완전히 궁금해서 몸을 앞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소파간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제가, 유부남이어서 절 떠나갔습니다.”
“에이고, 그냥 옆에 있어도 호강시켜줄 수 있는데. 자네가 좀 잘 달래보지 그랬나? 그렇게 좋아했다면 말이야.”
“오래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십 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안됐구먼. 뭐 어쩌겠나? 포기해야지. 쯧쯧…….”
“그런데 아마 그 여자가 그때 임신을 했던 가 봅니다. 저한테는 말도 안 하고 아이를 잘 키웠더군요.”
“그래? 아이고 그 여자 고집도 보통은 아니구먼. 어쩌자고 애를 혼자 키워. 웬만하면 아버지를 찾아줘야지.”
“얼마 전에 찾았습니다. 그 딸.”
“그래?”
“제 어미를 똑 닮은 아주 예쁜 딸로 자랐더군요. 그 애가 디아납니다.”
“뭐야?”
찻잔을 들고 있던 진 회장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찾잔 받침에 찻잔이 내려앉았다. 얼굴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진 회장을 보며 임 회장도 긴장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진 회장이 가만히 임 회장을 바라보자 임 회장이 자세를 더 반듯하게 고쳐 앉으며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아닙니다. 제 딸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하러 온 겁니다.”
“뭐야?”
눈에 힘을 준 채로 진 회장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임정환을 바라보았다. 임정환 회장의 눈은 그런 진 회장의 무서우리 만치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하고 조심스럽게 눈길을 그의 인중정로도 내렸다.
아랫사람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눈길이었다. 그런 임 회장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진 회장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제대로 말해 봐. 무슨 말인지.”
“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진시환 사장과 우리 이랑이 둘이 함께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잘못 둔 죄로 스페인에서 엄마하고 민박집 하면서 컸습니다.
이랑이 엄마가 죽으면서 말해줘서 겨우 이제야 찾았는데, 제가 아버지로 해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습니다. 우리 이랑이 잘 부탁합니다. 회장님.
부족한 것도 있고 마음에 안 드시는 면도 있겠지만, 부디 예쁘게 봐주시고 결혼도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 이랑이에게 성진 그룹의 지분도 증여했습니다. 내일이면 신문에 날 겁니다.
어차피 알게 되실 텐데 그 전에 말씀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미리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임 회장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진 회장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놈도 알고 있나?”
“…….”
“라울 그놈도 알고 있나 이 말이야? 알면서도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던 거야?”
진 회장이 흥분한 음성으로 묻자 임정환은 차분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애들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랑이가 처음에는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충격도 큰 것 같아서 저도 힘들었습니다. 주말에 겨우 마음을 열었고 진시환 사장도 회장님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제가 먼저 찾아뵙겠다고 했습니다.”
“…….”
“이랑이 혼외자식이라고 홀대하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는 단 하나뿐인 딸입니다. 혼수도 예물도 절대 모자라지 않게 해서 보내겠습니다. 혹시 아무것도 해오지는 않나 서운해하실까 봐 미리미리 지분도 증여했습니다.”
진 회장이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다시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놨다.
“그러니까 자네 딸을 우리 집에 시집보내겠다는 말인가?”
“예, 회장님.”
여전히 낮은 자세로 대답하는 임 회장을 보고 진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성진하고 MK가 뭐 그리 좋은 관계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딸을 시집보내려는 이유가 뭔가? 다른 그룹에 보내면 다들 감지덕지하고 떠받들어 모실 텐데 말이야.”
“둘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이랑이 가지고 기업에 유리하게 이용할 생각 없습니다. 정략결혼으로 힘들었던 건 저 하나로 족합니다. 이랑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주고 싶습니다.”
가만히 듣던 진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흥. 임정환 회장이 로맨티스트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군. 사업가로 좋은 자질은 아니야.”
진 회장이 앞에 있는 찻잔을 다시 들었다. 조금 놀란 게 가란 앉는 걸까?
“회장님께서 이미 두 아이 결혼 허락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라도 제 딸이라는 걸 알고 반대하실까 봐 미리 찾아온 겁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 내가 돌아가신 자네 선친과는 많이 경쟁했으니까.”
“예.”
“물론 지금은 MK가 좀 더 커졌지만, 예전에는 성진 그룹이 독보적으로 1위였지.”
“예.”
“내가 따라잡았어. 성진이 하는 걸 뭐든지 먼저 하려고 했지. 아직도 몇몇 계열사는 성진이 더 우위에 있는 거 알아.”
“예.”
“그래. 처음부터 성진 딸인 줄 알았으면 반대했겠지. 그런데 내가 걔를 한번 봤어. 자네 딸 말이야”
“우리 이랑이를 보셨군요.”
“그래. 임이랑이 되겠군. 이제. 내가 만났을 때만 해도 정이랑이라고 소개하더군. 그런데 그 애가 참 예쁘더군. 그 애 엄마도 그렇게 예뻤나?”
“예. 예뻤습니다.”
“하긴, 예뻤겠지. 남자 애간장을 그렇게 녹일만한 여자라면 예뻤겠지. 예쁘기도 한데다가 아주 야무지더군. 똑똑하고.”
“그 애 엄마도 똑똑했습니다. 우리 성진 그룹에 스페인어 강사로 왔었으니까요.”
아직도 아련한 사랑을 잊지 못한 듯 임정환의 입에서 여운이 느껴진다.
“그랬구나. 예쁜 데다 똑똑하고 남자 홀릴 만했겠네. 조금 덜 똑똑했으면 자네 품에 안고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똑똑해서 저나 딸이나 고생했겠구먼.”
진 회장의 말에 임정환 회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무 똑똑해서……. 혜원이가 너무 똑똑하고 너무 자주적이어서 나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네 말 다 알아들었네. 하필이면 성진 그룹의 딸. 그것도 딸인지도 모르고 지내온 사생아라니…….”
굳이 사생아라는 단어를 써서 임 회장을 건드렸지만, 여전히 임 회장은 머리를 조아린 채 가만히 있다. 그런 임 회장을 보고 있자니 진 회장은 좀 심했나 싶기도 하다.
“사실 임 회장 말 듣고 썩 내키진 않아. 자네 딸이라는 거 알고 나니까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까지 와서 머리 숙여서 딸을 부탁할 줄은 정말 몰랐군. 하긴 원래 핏줄이라는 게 좀 그래. 그럼 라울 그놈은 알고 있었다 이거지.”
“네. 미리 만나서 말을 했습니다. 아니 이랑이에게 말하기 전에 진 사장에게 먼저 말을 했으니까요. 진 사장 허락 없이는 딸 얼굴도 못 보겠더군요.”
그 말에 진 회장이 껄껄 웃는다.
“그래 그놈이 좀 그렇지. 디아나를 어떻게 하지도 않을 건데 탁 싸고,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으로 날 보더군. 하여간 그놈도 제 아비를 닮아서 그래.
제 아비가 그, 이사벨을 좋아할 때 그랬거든. 내가 서양 여자를 오죽 반대를 했겠어. 그렇게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하고도 이혼을 했는데.
어찌 됐든 자식 하나는 걸작으로 놔 났지. 우리 라울이 말이야. 꽤 괜찮은 놈이거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이랑이에게는 과분한 그런 사람이지죠.”
“그렇긴 하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고, 그 인물 좋은 거 봐. 자기 아버지가 체격이 좋았는데 제 어미까지 닮아서 얼굴도 끝내주잖아.”
진 회장이 라울 자랑을 하며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런 진 회장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회장님.”
“뭐 그 정도면 이랑이도 빠지지 않아. 내가 그 애를 보고 싹 마음에 들었거든. 사실 그 애가 죽은 이사벨도 좀 닮았어.”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저도 죽은 라울의 아버지와 몇 번 만날 때 며느님도 같이 봤습니다.”
임정환은 이사벨과 사업상 있는 파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젊은 시절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서양 애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하도 공주같이 커갖고 이거 원 집안에 적응을 잘 못 하더라고. 어찌 됐든 라울도 상처라면 상처가 있는 애지. 엄마아빠가 일찍 이혼하고 부모가 다 일찍 죽었으니까.
그런 애한테 디아나만 한 짝이 어딨겠어. 일단 죽고 못 살게 좋아해서 라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니까. 원래 남자라는 게 단순하잖아.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면 영혼이 다 편안해지지.”
팔십이 훨씬 넘은 노인네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꽤 로맨틱하다. 임정환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진 회장이 보며 말한다.
“나도 사랑 그런 거 아는 사람이야. 젊었을 때 여자깨나 따랐지. 나도 이게, 외모가 이 정도면 괜찮잖아.”
“그럼요 회장님.”
“물론 나는 평생 조강지처는 옆에 뒀지. 그게 더 나쁜 놈이었을까. 오고 간 여자는 많았으니까 말이야. 옛날엔 다 그러고 살았어. 걱정하지 마. 아버지가 딸을 지극하게 사랑해서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머리 숙이는데 내가 뭐 어떡하겠어.
예쁘게 받아줘야지. 하긴,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라울 그놈이 가만있을 줄 알아?
어디 내가 일부러라도 한번 반대를 해봐야 하겠네. 어떻게 나오나. 그놈 그게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거야.
‘할아버지가 반대하셔도 저는 할 겁니다. 어차피 할아버지는 저 말리실 힘없습니다. 계속 반대하시면 스페인에 가서 살겠습니다.’ 내 말이 틀렸는가 어디 봐.”
* * *
다음날.
“계속 반대하시면 스페인에 가서 살겠습니다.”
라울이 벌떡 일어나자 진 회장이 탁 째려보며 말한다.
“이놈아 너도 내 생각에서 한치를 벗어나지를 못해. 내가 네놈이 딱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앉아.”
앉으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선 채로 인상을 썼다.
다른 건 몰라도 디아나에 대한 험담이라면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싫습니다. 디아나에 대해서 흉보실 거면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제 임 회장님한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있는 대로 화가 나서 할아버지를 향해서 말했다. 어제 임 회장이 다녀간 뒤로 계속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걱정돼서 아침에 전화했더니 임 회장은 ‘할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네.’ 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래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또 불러서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애는 안 돼.”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저 말리실 힘없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 휘둘릴 만큼 그렇게 힘없는 손자가 아닙니다.”
나는 비장하게 할아버지에게 먹힐 만한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힘의 논리로 사시는 분이니까.
“흥, 그 말도 내가 생각한 거랑 똑같아.”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할아버지를 봤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다른 하실 말이 있는 걸까?
“잘 아시면서 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떠보려고.”
“예?”
“네놈 떠보려고. 네놈 반응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그랬다.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거랑 토시 하나 안 틀리냐. 그다음 말도 내가 해주랴?
할아버지, 제가 이 MK에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충분한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저는 이미 스페인에 할아버지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계속 반대하신다면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틀려 이놈아?”
좔좔 뱉어내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도 입을 떡 벌렸다.
정말 어쩌면 그렇게 내가 하려던 말 하고 똑같은 말을 하시는지.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내 속을 잘 알고 계셨나?
“그래서 포기했다.”
“네?”
“네놈이 이렇게 나올 거 같아서 내가 포기하고 그냥 디아나 우리 집 며느리로 잘 받아들이겠다고 임 회장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감동했냐 이놈아? 어이구 그놈의 사랑이 뭔지. 네 아버지도 그 이사벨을 데려올 때 무척이나 나한테 저항했지. 네가 지금도 날 보면 알겠지만 내가 서양 애를 며느리로 맞을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사람 일이라는 게 그래. 어제 임 회장이 와서 그야말로 머리까지 숙여가며 자기 딸을 잘 부탁한다고 하더라. 임 회장 그 사람도 그 애 엄마 사랑하느라고 평생이 삭았어. 남자라는 게 그렇지. 한번 혼을 뺏기면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살 수가 없지. 내가 너 넋 나간 꼴 보기 싫어서 허락한 거야.”
“디아나도 마음에 들어 하셨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내 마음에 쏙 들어. 이사벨도 닮았고. 그런데 그 애 엄마도 닮았다는 거 보니까 이사벨이나 그 디아나 엄마나 비슷하게 생겼나 보지? 그래서 남자들이 다 그렇게 넋이 나갔나?”
“할아버지. 말씀 좀 가려 하세요.”
“내 말이 뭐? 다 맞는 말이지. 어찌 됐든 허락할 테니까 잘살아 봐. 손주들도 좀 많이 좀 낳아보고. 어떻게 집안에 이렇게 손이 귀해. 네 작은아버지들도 겨우 딸 하나씩이고.”
맙소사! 그러니까. 결국, 결혼 승낙했다는 말 한마디를 하려고 나를 이렇게 애먹이고 떠봤다는 말이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하기는. 대신에 얼른얼른 기사 내고 빨리빨리 날 잡아.”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 * *
다음날은 온종일 [임이랑], [디아나 정], [디아나 임].
모두가 다 이랑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됐다. 오전에는 성진 그룹의 주식이 임이랑에게 18%나 갔다는 기사였다.
임 회장이 가지고 있는 지분의 절반에 해당되는 엄청난 양이 이랑에게 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이랑은 재계에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오르게 됐고 방송에서는 임이랑이 주식을 증여받은 게 주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더군다나 임이랑이 MK그룹의 사장 진시환과 곧 결혼을 할 거라는 이야기까지 돌게 되면서 성진 그룹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날 저녁에 난 기사에 비하면 말이다.
그날 저녁에는 임이랑과 진시환의 결혼 발표로 매스컴이 난리가 아니었다.
[MK의 진시환 사장, 성진 그룹의 딸과 결혼.]
[성진 그룹의 딸인지 모르고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내 짝.]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
[스페인 민박집의 재투성이 아가씨, 재벌 아버지에 재벌 남편!]
여러 가지 제목으로 이랑에 관한 기사가 끊이질 않았다. MK 본사에도 기자들의 전화가 쇄도했고 아예 기자들에게 전화를 받는 담당자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왜 일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어요. 천천히 발표해도 되는데.”
나는 라울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회사 지분을 증여한 걸로 떠들썩한데 라울이 결혼발표까지 하는 바람에 이제는 얼굴이 팔려도 너무 팔렸다.
라울은 내 마음도 모르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뭘 천천히 발표해. 우리 할아버지 엄청 기분파거든? 얼른얼른 발표하고 얼른얼른 결혼하라고 그러는데 거기다 대고 뭘 천천히 해.”
“그리고 결혼 날짜도 너무 빨라요. 보름 동안에 어떻게 결혼준비를 해요?”
정말 기가 막히다. 나한테는 딱 한 마디, 우리 결혼 빨리할 거다. 해놓고 그날 기사에 2주 후에 결혼이라고 발표를 내다니.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버님께는 내가 말씀드렸어. 결혼 빨리해도 되겠다고. 그랬더니 언제든지 괜찮다고 하셨거든?
할아버지는 무조건 빨리하라고 그러셨고. 내 딴엔 그래도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2주라는 시간을 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
“못 살아. 2주 동안 무슨 준비를 해요.”
“아무것도 준비할 거 없거든? 그냥 몸만 오면 되니까. 사실 내일모레 해도 상관없어.”
“그거는 라울 생각이고. 아마 드레스를 맞추는데도 2주는 넘게 걸릴걸요?”
“그런 게 어딨어. 사람들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만들면 언제든지 시간 맞춰서 만들어 내는 게 디자이너들이야. 그러니까 반지는 이미 했고, 드레스는 오늘 맞추러 갈까? 아니면 내일?”
정말 이 남자는 말릴 수가 없다. 저렇게 밀어붙이니 어떡하겠어. 그래서 그날 오후에는 당장 드레스를 맞추러 가게 됐다.
“일단 여기 있는 디자인들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한번 입어보시고요. 그런 디자인으로 조금만 변형시키면 될 거 같은데. 아니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모델 같으실까. 진짜 신부가 예뻐도 너무 예쁘네.”
“그렇죠? 제가 좀 여자 보는 눈이 있습니다.”
디자이너 앞에서 말하고 있는 라울의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다.
“저 정도 몸매면 모델을 해도 낫죠. 얼굴은 일반 모델보다 더 청순하니까 여러모로 우리 디아나가 모델보다 괜찮을 겁니다.”
맙소사. 바보 아니야 지금? 디자이너 앞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드레스가 쭉 있는데 몇 벌을 골라보더니 라울이 몇 개를 가리킨다.
“이거, 이거, 이거 입어봐. 그리고 이건 맨 나중에 입어봐.”
정말. 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 틈에 그렇게 샅샅이 봐서 드레스를 골라주는지, 그가 골라주는 대로 입어보기만도 바빴다. 처음에 입은 건 목까지 레이스가 꽉 들어차고 손목까지 레이스가 있는 드레스였다. 우아하고 청순한 느낌이 들었으나 라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군.”
그다음에 입은 건 등이 깊게 파여서 허리까지 패인 것으로 등 전체가 삼 분의 일도 넘게 드러나 보이고 앞쪽으로는 가슴 쪽으로 깊게 파여서 망사가 달린 것이었다. 소매는 반소매 정도. 내가 볼 때는 너무 관능적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도 고개를 저었다.
“저것도 안 되겠군. 다음.”
다음에 입은 건 우아한 라운드 네크라인에 진주가 총총히 박혀있는 드레스였다. 프렌치 소매 정도의 길이. 허리는 더욱 잘록해 보이고 부풀어있는 거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소녀 같아.”
그다음에 입은 옷은 오프숄더의 커다란 리본 장식이 앞쪽에 있어서 리본 한가운데에 진주가 달린 것이었다. 허리가 더 가늘어 보이고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퍼져있었는데 그것도 예쁘게 보였다. 사실 나는 입어 본 드레스가 다 마음에 들었다. 어떤 걸로 입어도 말이지.
“어머, 이거는 진짜 예쁘다. 넓은 홀에 비해서 신부가 더 우아하게 보일 거 같고, 키도 커서 이 목선이며 어깨선이며 진짜 너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러나 그것도 라울은 고개를 흔든다.
“도대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있기는 해요? 이렇게 많이 입어봤는데 다 싫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