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스캔들 5
20. 앙숙
엄마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웃고 있는 아빠의 얼굴, 정말 잘 생겼다.
이렇게 환하게 생긴 멋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게 안 믿어질 정도로 아버지는 멋있게 보인다. 둘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저 사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뭐 마실래? 내가 지난주에 내려올 때 사다 놓은 레모네이드 있는데 줄까?”
아버지가 바로 재킷을 벗어놓으며 와이셔츠 소매를 걷는다. 너무도 익숙한 모습.
이렇게 혼자 와서 청소하고 엄마와의 사진을 보고 이곳에서 있다가 추억을 곱씹고 있었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무거나 주세요.”
말을 하고는 침실로 가보았다. 깨끗이 정돈된 침실도 오래 비워있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침실에는 아이보리 시폰으로 된 침대 커버가 단정하게 씌워져 있고 레이스와 자수가 수 놓인 베개커버가 보인다.
스페인의 엄마 방과 거의 흡사한 분위기!
믿어지지가 않는다. 스페인의 엄마 방도 딱 이랬다. 아이보리 레이스커튼과 침실에 하나 있는 소파에도 꽃을 수놓은 하얀 덮개가 등받이에 놓여있었다.
엄마도 이 집을 잊지 못하고 이 방과 똑같은 분위기로 스페인의 침실을 꾸미고 그러고 살았던 거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페인의 엄마 방도이랬어요.”
“뭐라고?”
“엄마가 스페인에서 이 방처럼 엄마 침실 꾸미고 그러고 살았어요. 이런 아이보리 침대 커버에 머리맡에는 이렇게 협탁을 두고 이렇게 생긴 스탠드를 두고 방안에는 늘 꽃향기가 가득했는데.”
“그래. 네 엄마가 이 방안에 늘 꽃을 꽂아두었다. 그리고 말린꽃도 이렇게 두었지. 이제는 향기도 나지 않구나.”
말린 꽃잎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리병 안에는 이제는 색 바랜 말린 장미꽃잎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
아버지와 내가 함께 울었다.
아버지와 나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같은 엄마의 정서를 누리며 살았다. 이렇게 만나서도 우리가 공유했던 엄마의 기억은 같았다.
가슴에 무거운 바위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같은 감정을 공유한 사람에 대한 동질감이 더 느껴진다.
“너는 혜원이하고 오래 살아서 행복했겠구나. 나는 석 달밖에 함께하지 못했다.”
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가슴속에 아빠에 대한 미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가 사랑했던 남자. 내 아버지이기 전에 엄마의 연인이었다.
방 안에 묻어있는 모든 공기조차 두 사람이 사랑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톡톡.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빗물 때문에 바로 창이 부옇게 흐려진다. 소나기인가 보다. 나는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꺼내 놓은 레모네이드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잔을 들어 손에 쥐었다.
차가운 레모네이드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아버지와 나는 식탁에 마주하고 앉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더 편안해 보인다.
“라울을 사랑하니?”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울을 사랑해요. 그런데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선뜻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적어도 내가 조금 더 성공하고 나 자신이 그 사람 앞에 더 당당할 때 그때 그 사람 받아들이려고요.”
“그러지 마라.”
“네?”
“사랑은 말이야, 사랑할 수 있을 때 해야 되는 거야. 알아? 그 사람 너무 애태우게 하지 마라.”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라울과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다 보니 은연중에 그와 함께하면서도 그에 바짝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차이가 나도 너무 났으니까. 특히 스페인의 그 세비야에서 본 그는 동화 속, 거대한 성의 왕자였다. 그에 비해 나는 아르바이트로 가이드 하는 아가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건 꿈도 꿔보지 못해서 더 그를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떳떳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또 나 자신이 너무 막대한 그의 돈과 지위에 휘둘리지는 않을까 조심하고 늘 한 발짝 뒤에 떨어져 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에게 사랑한다는 고백도 이제 겨우 하고……. 그동안 그가 얼마나 나를 배려해줬는지가 느껴진다.
“디아나.”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의 눈빛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았던 이 청주 아파트가 내 안에 있는 그를 향한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비록 잘못했지만, 엄마를 사랑한 그 순간에는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힘들게 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내가 태어난 근원이 두 분의 사랑이니까, 그 사랑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가지고 나를 낳아서 스페인에서 민박집을 하며 그렇게 평생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졌던 엄마를 떠올리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차오른다.
이제 라울이 내게 프러포즈를 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받는 것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동안 라울을 사랑하면서도 그의 구애를 한 발짝 뒤에서 밀쳐내는 거로 내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또 어찌 보면 비겁함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하려는, 그래서 그를 사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였다.
그런데도 그는 기꺼이 20유로에 자신을 팔아주었고 내 옆에 있어 주었다. 지극히 낮아지면서까지 나를 사랑해주는 그에 대한 깊은 고마움과 사랑이 속에서 올라왔다.
“아버지.”
“아빠라고 불려줄래? 그래 아빠라고 불러봐. 그래 늘 꿈을 꾸었다. 혜원이와 나 사이에 예쁜 딸이 생겨 그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혜원이가 내 옆에서 있어 줬으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
현실이 아닌 것을 너무 바라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간절했는데도 절대 내 앞에 혜원이는 나타나지 않더구나. 하지만 그 간절함 때문인지 이렇게 지금 네가 나타났으니 나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 아빠라고 불러다오.”
그러나 아빠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천천히 할게요. 천천히……. 그래도 이곳을 계속 지키고, 이 집을 가지고 계셔서 너무 감사해요. 엄마의 젊었을 때, 사랑받았을 때를 간직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이랑아.”
아버지 품에 태어나 처음 안겼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순간이 오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으나 엄마가 마지막 가면서 내게 아빠를 찾아주고 가셨다.
엄마, 감사해요.
* * *
“뭐야 도대체. 친아빠를 찾고 나니까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 전화도 제대로 안 되고. 도대체. 아버지하고 어디를 간 거야. 나만 왕따시키는 것 같고.”
디아나가 아버지와 청주에 간다는 연락 이후 연락이 되지 않자 몹시 초조하다.
물론 아버지하고 같이 갔으니까 안전이 걱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아버지가 다른 남자라도 소개해준 건 아니겠지?
사실 MK그룹과 성진 그룹이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잖아?
특히 할아버지 대에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지.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게 성진하고 경쟁하려고 그러셨는지 성진에 돌아가신 임 회장과 우리 할아버지는 진짜 경쟁 관계였거든.
나이도 같으셨고 하는 일도 같으셔서, 물론 우리 할아버지가 좀 더 독하기는 하셨지.
그러니까 지금 MK그룹이 성진 보다 높은 레벨에 있지. 하지만 성진의 임 회장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그런 경쟁 관계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지의 다음 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성진의 임 정환 회장은 그렇게 누군가와 경쟁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나야 워낙에 성진 그룹에 임 회장과는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또 내가 조금 더 최첨단이지. 아직 성진은 후계자가 정확하게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임정환 회장이 나를 그렇게 많이 미워하시지는 않겠지? 하 참, 걱정이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전화가 없는 거야?
딱 이럴 때 전화벨이 울린다. 디아나 전화였으면…….
“디아나? 왜 이렇게 전화가 되지 않는 거지?”
디아나가 먼저 전화한 것은 정말 처음이다. 그렇게 도도하게 전화 한 통을 하지 않더니 웬일이지?
혹시 이별 통보라도 하는 거야? 진짜 아버지가 누구라도 소개해줬다는 거는 아니겠지?
“여보세요?”
다다다 쏟아내는 내 말에 디아나가 여보세요를 반복한다. 하긴 내가 좀 너무 나가기는 했지
“음. 디아나.”
“라울.”
난 이 라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이름을 부르는 디아나의 목소리에 가슴이 떨린다. 당장 눈앞에 있으면 고 예쁜 입술을 먹어치울 텐데 전화기 너머라니…….
“무슨 일이야?”
내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그녀가 그 예쁜 목소리로 조곤조곤 내게 말을 한다.
“나 지금 여기 청주에서 아버지하고 같이 올라가고 있어요. 예전에 어머니 아버지 살았던 집에 내려왔어요.”
“음 그래?”
웬일로 나한테 이런 걸 다 말해주는 걸까. 예쁜 디아나. 마음이 풀어진다. 목소리만 들어도 말이다.
“여기 와서 보니까 라울 생각나서요. 나 하루 종일 연락 안 돼서 생각했을까 봐.”
“나 무척 바쁜 사람이야…….그 런 것까지 신경 쓰고 생각하고 그럴 리가…….”
“알아요. 너무 바빠서 내 생각할 틈 없다는 거.”
젠장. 대화가 이렇게 나가면 안 되는데…….
“끊을까요? 많이 바쁘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안 돼. 내가 얼마나 전화를 기다렸는데.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전화 끊지 마.”
“아, 그래요?”
“음. 디아나,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두지?”
멋있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녀에게 점수를 따야 할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시간이야 늘 비워두지요. 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안 끝내주면 집에도 못 가잖아요.”
“그래. 당연하지. 내가 사장님이니까, 그래도 오늘은. 회사로 들어오지 않아도 돼. 집에서 쉬었다가 차 보낼 테니까 나와.”
“알았어요. 그럼 바로 집으로 갈게요.”
오늘은 디아나가 깜짝 놀랄 만한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다. 이미 우리가 사귀고 있다고 사랑한다고 서로 고백했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해야겠지?
“세베로?”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날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말씀해주십시오.”
“이 서울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디일까?”
“어떤 프러포즈를 원하십니까? 기가 막히게 화려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소박하고 작으면서 감동을 주는 그런 것을 원하십니까?”
“글쎄, 내가 디아나에게 기막히게 돈 많이 쓰는 프러포즈를 하면 디아나가 좋아할까?”
“글쎄요, 디아나 양께서는 그런 것보다는 조금 더 섬세한 것이 좋겠죠. 하지만 반지만큼은 훌륭해야 할 거고요.”
“그거야 당연하지. 디아나가 낄 건데.”
“그럼 제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반지는 주인님이 직접 하시는 게 나을 거고요.”
“물론이지.”
“그럼 제가 까르띠에 매장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사실 미리 몇 가지를 특별 제작해서 주문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세베로?”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은 집사의 본분이지요. 당연히 프러포즈 할 것이니 반지가 빠져서는 안 되지요.”
“알았어. 그러면 내가 가서 보고 바꿔야 할 것이 있으면 말할게.”
“알겠습니다.”
청주에서 돌아와 씻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누워 있는데 벨이 울린다. 정말 여기 올 사람이라고는 임규빈과 라울뿐인데 또 누굴까? 문을 열자 세베로다.
“세뇨리따?”
“세베로! 들어오시겠어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쉬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전해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세베로는 커다란 상자를 내게 안기며 말했다.
“오늘 저녁, 주인님을 만나실 때 입고 나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머, 옷을 준비해 주신 거예요? 직접?”
“네 그 안에 작은 아마릴리스도 넣어 드렸습니다. 세뇨리따가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세베로. 나 세베로 팬인 거 알아요?”
“이런 영광이.”
“세베로 때문에 라울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저는 제 본분을 다한 거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뇨리따.”
“고마워요. 세베로. 잘 가요.”
세베로가 가지고 온 상자에는 원피스와 볼레로가 들어있었다. 까만 미니멀 블랙 드레스는 무릎 바로 위까지 오며 광택이 있는 실크였다. 볼레로는 화려한 금사로 된 니트였는데 짜임이 독특해서 움직일 때마다 광택이 다르게 난다.
광택 있는 황금색 볼레로가 마치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세련되면서 화려한 느낌이 보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제대로 된 외출복이 없는 내 사정을 세베로는 어떻게 알았을까?
* * *
“나와 결혼해 주겠어?”
아니, 이렇게 평범한 거로는 절대 안 돼.
“디아나, 나와 결혼해 준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
이건 너무 뻥이 심하지. 그냥,
“내 아이를 낳아줘 디아나.”
이건 너무 운치가 없어. 대체, 이렇게 많은 말 중에 청혼할 때 쓸 말이 이렇게 없다는 말이야?
내 마음에 드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
풍선을 띄우고 장미꽃 백송이?
이런 건 너무 시시해, 그렇다고 놀이동산에서 폭죽을 터뜨려?
그것도 우스운 건 마찬가지지. 마음에 안 들어.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이렇게 청혼할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를 못한 거야?
대부분은 결혼하게 되면 반지를 맞추고 그다음에는 그냥 결혼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훌륭한 비즈니스인 결혼은 담당자들에게 맞기면 되는 거였는데…….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참 많이 힘들군.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하다 시간만 지나고 있었다.
이런, 프러포즈가 이렇게 떠오르지를 않는다니.
“세베로!”
세베로를 부르자 그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급할 때는 세베로가 있어야해.
“세베로, 여기 바로 서 있어. 응 그 자리에…….”
“이렇게 말이지요. 주인님,”
커다란 덩치로 서 있는 세베로를 보자 뭔가 이상하다.
“아니, 여기 의자에 앉아봐.”
내가 말하자 세베로가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말했다.
“이제 내가 세베로를 디아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프러포즈를 해볼게. 잘 하는지 봐.”
그러자 세베로가 인상을 쓴다. 양미간에 불만이 가득한 거 같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한다.
“이러면 제대로 된 프러포즈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주인님. 저는 디아나 양과 많이 다르거든요.”
“됐어. 그냥 디아나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봐.”
체격 좋은 세베로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러나 역시 세베로 말이 맞았다. 디아나라고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저 가지런한 수염을 보면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십시오. 주인님.”
턱을 치켜들며 들을 준비가 다 됐다는 세베로를 보자 완전히 김이 샌다. 저런 덩치를 보면서 청혼 연습을 한다고 한 내가 잘못된 거다.
“됐어. 하기는 뭘 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그럼 제가 해볼까요?”
“나를 디아나라고 생각하고?”
“예, 주인님을 디아나라고 생각하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손을 이리 내보십시오.”
우와! 곰 같은 남자한테 손을 잡히니 기분이 이상하다. 세베로가 손등에 키스하려고 하자 기겁을 하면서 손등을 뺏다.
“뭐하는 거야 지금!”
“세뇨리따라고 생각하고 청혼을 하려고…….”
“됐어! 그런 거 그만두고 그냥 말로만 해봐. 정말 마음에 들면 내가 외워서 디아나에게 해볼게.”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고 세베로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디아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당신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지. 나는 디아나를 만난 이후로도 많은 생각을 하고 사업을 했거든. 디아나만 생각했다는 건 과장된 거야.”
“하지만 늘 디아나 양을 생각한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디아나만 생각한 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처음 만난 이후로 나는 많은 잡다한 생각과 일을 하며 틈틈이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면서 청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베로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기는 하지. 계속해봐.”
내가 손짓을 하자 세베로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아나, 당신은 나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 으으. 그건 너무……. 닭살 돋아.”
“디아나, 나와 결혼해줘요. 그러면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건, 그건 너무 진부하잖아. 영원이라니. 사람의 앞날은 알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함부로 영원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세베로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주인님께서 제게 한 말을 제가 종합해서 해보겠습니다.”
“해봐, 내가 뭐라고 했는지.”
“디아나,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이후로 틈틈이 당신을 생각했어요. 닭살 돋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나의 유일한 사랑이 맞습니다. 하늘의 별도 따다 준다고 하면 뻥이겠지만 내 마음은 그러고 싶습니다. 영원을 장담할 수 없지만 나와 결혼해준다면 영원히 행복하게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디아나.”
“오오. 그거 좋군, 내가 한 말들을 합치면 그렇다는 말이지? 좋아. 맞아.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거야. 좋은 사랑의 고백이야. 진솔하면서도 내 마음을 담은. 역시 나는 말을 잘해.”
“좋습니다. 주인님. 역시 주인님의 생각은 참 담백하고 좋습니다. 그러면 반지는 챙기셨나요? 제가 한 번 구경해 봐도 될까요?”
“안 돼 절대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디아나한테 제일 처음으로 보여줄 거거든?”
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디아나가 내 반지를 보며 놀라는 얼굴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나온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뭐 그렇다면 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지만 말입니다.”
슬쩍 삐진 듯 얼굴을 돌리는 세베로. 세베로도 삐진다. 삐지면 저렇게 고개를 돌린다. 저럴 때는 기분을 맞춰주는 게 좋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한 번 볼 테야 세베로?”
“네? 뭐 꼭 보여주신다면야…….”
세베로가 싱긋 웃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보였다.
“주인님 것과 같은 거군요.”
“그렇지. 나도 디아나와 같은 반지를 끼고 싶거든.”
“하지만 주인님이 끼기에는 알이 너무 큰 거 아닐까요? 남자들은 이렇게 큰 알은 끼지 않는 것 같은데.”
좀 크기는 한가?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디아나와 같이 삼 캐럿으로 했는데…….
“다른 남자들이 뭘 끼건 나하고는 상관없어. 나는 디아나하고 같은 걸 낄 거고 디아나한테 큰 다이아를 선물해주고 싶으니까 나도 큰 다이아를 끼는 거야. 나 정도라면 이 정도는 껴야지.”
“옳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은 손가락이 길어서 반지가 커도 잘 어울리십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군요.”
“그런데 이 장소. 정말 괜찮은 거야?”
사방이 유리로 된 작은 돔형의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 노을을 감상할 수 있게 한강 중간에 마련된 높이 솟은 카페는 360도를 돌아가며 한강과 주변의 경관이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이 비쳐들면서 주변은 더할 수 없이 낭만적인 자연의 빛이 들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 어둠이 내리면 불빛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그럼요. 주인님과 세뇨리따의 취향에 어울리는 가장 근사한 장소입니다. 그러니 이제 디아나 양이 올 때까지 주인님은 심호흡하면서 기다리기만 하시면 되겠네요. 곧 올 겁니다. 차를 보냈으니.”
“세베로?”
“네 주인님.”
“내가 고맙다는 말을 했던가?”
“그건 청혼에 성공하시고 난 후에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테이블에 앉아있자니 가슴이 절로 두근두근하고 손가락이 절로 톡톡 테이블을 두들긴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올까.
사실, 까스틸로 성에서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아마릴리스를 든 것을 본 순간 완전히 심장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니.
사람들은 디아나가 엄마 이사벨을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함이 있다.
물론 엄마를 닮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품어내는 향기는 엄마의 것과는 다르다. 엄마의 것보다 따뜻하고 은은하면서 매혹적인 향기. 그것이 나의 디아나의 향기다.
저쪽에서 디아나가 걸어 들어온다. 내 심장이 쿵쿵 뛴다. 까만 블랙 드레스에 우아한 황금빛 볼레로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여신 그 자체였다.
내가 숭배해야 할 나의 여신. 클레오파트라가 이 자리에 온대도 디아나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거다. 내가 홀린 듯이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고른 치아를 들어내며 활짝 웃고는 그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내게 건네준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자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세베로가 준비한 실내 오케스트라였다. 마치 까스틸로 성에서 무도회를 열 때와 같은 느낌의 바이올린과 첼로가 함께 연주하는 실내 악곡이었다.
“너무 멋져요, 라울. 어쩜 이런 장소를.”
넓은 홀은 완전히 360도를 돌아가며 노을이 지는 한강이 눈에 들어온다. 오렌지빛 석양이 불타는 듯 빛을 발하고 라울의 얼굴도 석양에 물들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넓은 홀에 테이블은 오직 한 개뿐이다. 그리고 바로 아름다운 조명과 아마릴리스를 섞은 꽃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홀 한쪽은 춤을 출 수 있도록 비워두었다.
내가 그녀와 춤을 추고 싶으니까.
“라울,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준비하다니. 너무 행복해요.”
“디아나가 행복하면 나는 디아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겠지?”
“라울답지 않게 너무 말을 잘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이리 앉아 디아나.”
내가 의자를 빼주자 디아나가 그곳에 앉았다. 미니 드레스 아래로 드러나는 그녀의 예쁜 종아리에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어느 한 곳 모가 나지 않게 예쁜 디아나.
“오늘은 무슨 날인가요?”
“무슨 날일 거 같아. 이렇게 정장을 하고 내가 기다렸는데.”
“설마 라울.”
“맞아.”
내가 일어서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울!”
그녀가 감동하여 나의 이름을 부른다. 내 이름이 라울이라는 게 너무 좋다. 라울, 라울, 라울. 듣기만 해도 저절로 행복하고 저절로 흥이 날 것 같지 않은가?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디아나. 사랑해.”
여기까지는 진짜 너무 잘했다.
그다음은 아까 세베로가 말한 그대로 해야지!
이 남자, 내게 청혼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무릎을 꿇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이 남자를 만나서 너무나 행복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석고상처럼 단단하고 각진 그저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포악한 남자? 아니면 변태 성욕자? 하지만 그다음에 까스틸로 성에서 만난 다음부터는 쭉 사랑했다.
이 남자, 나를 위해 이렇게 멋진 홀을 준비하고 실내악을 연주하게 하고 이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얼마나 멋진 청혼을 할지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디아나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만 생각한 것은 아니야. 틈틈이 생각하기도 했지.”
맙소사! 뭐야 지금. 이게? 틈틈이 생각하기도 했다고?
“물론 그렇다고 생각을 전혀 안 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
맙소사.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이 남자의 다음 청혼 말을 기다렸다.
“네가 나의 단 하나의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어. 그건 너무 닭살이 돋기 때문이야.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지.”
뭐라고?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내가 단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게 닭살 돋아서 진실이라도 말을 안 하겠다는 거야?
“남자 중에는 하늘에 별도 따다 주겠다고 하는 놈들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거짓말은 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절대로 하늘에 별은 따다 줄 수 없거든. 그렇지만 그렇게 잘해주겠다는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아니야.”
나는 이제 점점 눈썹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나한테 뭐라는 거야?
“하지만 디아나가 나하고 결혼해준다면 절대로 영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들기도 해. 나하고 결혼해줘 디아나. 거절 같은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할거지?”
“…….”
그의 청혼이 끝났다. 내 눈썹이 위아래로 깜박깜박 움직인다. 그의 청혼이 끝나자 음악 소리도 끝났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이.
그런데 이런 청혼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결혼해달라는 말에 마음은 YES다. 하지만 이 사람의 청혼을 통합해 보자면 무슨 말이야?
“오오. 라울…….”
나는 길게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내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본다.
그 눈에는 평소 자신감이 아니라 초조함이 가득해 보인다. 이렇게 말해놓고 지금 걱정하는 거야, 라울?
청혼할 때까지 이렇게 하다니!
하지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남자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다. 남에게 한 번도 구부린 적 없는 무릎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러니까 이런 말주변머리 없는 건 내가 이해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 그 마음을 내가 잘 아니까.
“…….”
머릿속이 복잡해서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라울은 인상을 쓰며 한쪽 무릎을 여전히 꿇은 체 나를 보며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일 여기서 거절 한다면?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볼 때 나는 당신의 청혼을 거절할 수가 없어. 더군다나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 앞에 한쪽 무릎까지 꿇은 그에게 설마 말주변이 너무 없어서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청혼을 거절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도 단순하게 YES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라울, 당신의 청혼은 정말이지 형편이 없어요.”
“뭐라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화가 나고 있다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당신 때문에 프러포즈 듣는 내내 화가 나려고 했거든.
“어쩌면 그렇게 말주변머리가 없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내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거야?”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더 이상 약을 올렸다가는 진짜 화가 날 거다. 아니면 슬퍼하려나?
나는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말 주변머리가 너무 없어서 내 기분을 상하게 할지라도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당신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리고는 그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며 그가 내 손등에 키스하고 말했다.
“뭐야 디아나. 그렇다면 그 말의 결론은 YES?”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가르며 들어와 말캉한 혀가 관능적으로 얽히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입 맞추자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과 올리브, 빠에야와 하몽을 곁들인 말린 토마토. 스페인에서 함께 즐겼던 만찬들이 줄줄이 나오고 음악에 맞춰 라울과 함께 춤을 추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 둘 만에 춤은 에로틱하면서도 유쾌하고 가슴이 설렌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잡고 그의 단단한 팔이 등에 닿자 우리 둘의 눈은 열정으로 얽히고 있었다.
“디아나. 사랑해!”
“나도요. 라울.”
음악에 맞춘 발이 움직이면서 살짝 부딪친다. 구두와 구두가 맞닿았을 뿐인데 둘 다 은밀한 곳이 맞닿은 것처럼 몸이 달아오른다.
그의 집요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이 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가자. 집으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열기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이제 청혼을 하고 수락을 했으니 마음도 전과 다르다.
그곳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 라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 언제나 그렇듯 세베로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축하드립니다. 세뇨리따. 오늘 프러포즈를 받으셨다고요?”
“어떻게 알았어요. 세베로?”
“그 준비를 누가 했겠습니까?"
세베로가 정중하게 말하며 빙긋 웃는다. 역시 세베로!
“당연히 세베로가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었어요. 음식도, 음악도, 또 아름다운 분위기도요.”
“감사합니다. 세뇨리따.”
세베로가 싱긋 웃자 옆에 있던 라울이 내 어깨를 감싸며 말한다.
“오늘 프러포즈한 건 나지 세베로가 아니거든 디아나?”
“알았어요,”
심술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라울의 팔짱을 끼고, 그의 팔을 내가 다른 팔로 쓰다듬으며 웃어주자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금방 풀어진다. 우리가 현관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세베로가 말을 한다.
“모든 준비는 다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만 물러날까 생각 중입니다.”
“당연하지.”
라울이 말한다. 이럴 때 제일 적응이 안 된다. 라울은 사람을 부리는데 익숙하고 당당하다. 정말 수고한 세베로. 고마워. 내가 마음을 담뿐 담은 눈으로 세베로를 보자 그도 웃으며 인사를 한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세뇨리따.”
세베로가 인사를 하자 라울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방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그의 방에 있는 넓은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고 라울이 바로 불을 껐다. 달빛이 은은히 비추며 레이스 커튼이 흔들린다.
“이건 뭐죠?”
“나의 프러포즈 2탄이지. 스트립쇼를 보여주겠어. 오직 디아나만이 볼 수 있는. 내가 선사하는 쇼지.”
그가 말과 함께 리모컨을 움직이자 스르르 붉은 커튼이 내려오고 은은한 붉은 등이 켜진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 이 남자의 스트립쇼를 보게 된다고?
“정말요? 그럼 나는 유일하게 까스틸로 성의 주인인 라울 까스틸로의 스트립쇼를 보는 여자가 되겠군요.”
“물론이야. 스페인 왕도 보지 못한 거지.”
라울이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스트립쇼를 하는 남자가 저렇게 당당해도 되는 거야? 하여간 이 남자는 언제든 당당하다.
어디, 다 벗고도 저런 표정이 나올까?
“좋아요. 어디 한 번 해봐요.”
그가 옆에 있는 리모컨을 움직이자 흐느적거리는 아주 관능적인 재즈의 음악이 흘렀다. 음악만 들어도 나른하다고 할까?
그가 아주 천천히 넥타이를 풀더니 한 바퀴 돌고는 넥타이를 나에게 집어 던졌다. 나는 그 넥타이를 들고 한 번 손을 흔들고는 내 어깨에 걸쳤다.
남자 넥타이가 또 이렇게 관능적일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자 그가 재킷을 벗어서 또 나한테 던진다. 나는 그 재킷을 받아 옆에 있는 소파에 걸쳤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그는 앞과 뒤로 움직이며 바지 버클에 손을 댄다.
손만 가져가고 버클 앞에서 한참을 손가락으로 버클을 희롱하듯 몸을 움직인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이 남자 진짜 멋진 스트립쇼를 하고 있다.
버클을 풀고는 허리띠를 길게 빼더니 그것을 마치 뱀 쇼를 하듯이 흔들어 댄다.
남자가 하는 뱀 쇼!
혓바닥까지 날름거리며 눈동자를 돌려대는 게, 뱀이 홀리는 대로 눈을 돌리는 아랍 상인처럼 느껴진다. 눈물 나게 웃긴다는 말이 딱 이 말이다.
나는 웃음이 나와 봐 줄 수가 없었다. 그가 뱀처럼 흔들어 대던 허리띠를 내게 던졌다.
“으악! 뱀이다.”
나도 그것을 들고 뱀을 움직이듯이 꾸부리며 장난을 치자 그가 좋다고 웃어준다.
우리 지금 이러고 노는 거야? 허리띠 하나로 뱀이라고?
사랑하면 유치해진다고 하지만 천하에 라울 까스틸로 진이 이러고 논다. 진짜 못살아!
라울이 표정이 다시 바뀐다. 조금 전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다시 관능적인 표정을 하고 셔츠의 단추를 푼다. 하나, 둘 단추가 풀어지면서 그의 단단한 가슴이 드러난다.
저렇게 표정이 바뀌는 라울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남자가 내가 처음 봤던 그 석고상 같았던 남자가 맞나?
라울이 몸을 빙글 돌며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의 쩍쩍 갈라진 근육이 조각처럼 드러나면서 자신의 가슴을 펄떡펄떡 움직이다. 양쪽 가슴이 펄떡펄떡 움직이는 것을 보자 너무나 웃기다.
“그건 연습해야 하는 건가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지.”
“나에게 스트립쇼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물론이지. 아니! 절대 아니지. 내가 겨우 디아나한테 보여주기 위해 이걸 연습했을 것 같아?
천만에. 꼭 너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특기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습한 거야.”
여전히 양쪽 가슴을 울퉁불퉁 움직이며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라울 까스틸로 진이 그렇게 가슴 근육을 움직이는 특기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했을까?”
말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연습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뒤돌아서자 탄탄한 그의 엉덩이가 드러나며 바지가 밑으로 스르륵 흘러내린다.
한 장 남은 드로즈로 감싼 엉덩이가 그가 힘을 줄 때마다 불룩불룩 움직인다. 조금 아까는 가슴이 울퉁불퉁하더니 이제는 엉덩이가 한쪽씩 움직여댄다.
딴딴하게 굳어진 엉덩이가 힘을 줄 때마다 흔들리는 걸 뒤에서 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이 웃기다. 그가 돌아선 채로 팬티를 아래로 내리자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벌렸다. 그가 짠하고 뒤 돌았을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
“꺅!”
하늘로 치솟은 그의 물건이 도도하게 나를 향해 끄덕거린다. 라울의 높은 콧대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내 앞에서 완전히 나체가 될 때까지 스트립쇼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힐 뿐이다. 그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자, 내가 했으니 너도 해야지 디아나.”
“뭐라고요?”
“그럼, 내 것만 보고 말 생각이었어?”
“그런 게 어딨어요?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지, 내 선물. 그러니까 이제는 네 선물도 보여줘야 할 것 아니야. 어서 시작해봐.”
억지로 나를 침대에서 밀어내더니 앞에 세운다. 그의 것은 여전히 빳빳하게 선 채로 움직인다. 일단 눈을 어디 둘 수가 없다.
그가 다시 음악을 틀었다. 조금 더 끈적끈적하고 관능적인 음악이 나온다. 그러자 그가 조명을 바꾸어 켰다. 스텐드의 약한 조명이 붉게 빛나다가 계속 바뀐다.
“라울. 대체 조명이 왜 이래요? 마치 업소 같아요.”
“당연하지 내가 아주 다양하게 바뀌도록 하라고 지시했거든. 봐.”
그가 다시 리모컨을 누르자 이번에는 현란하게 돌아간다. 마치 클럽처럼 말이다. 도저히 못 말리는 라울.
“난 진짜 못해요.”
“변명이 안 돼. 나도 처음 한 거거든. 일단. 벗어.”
나는 망설이다가 그의 앞에 서서 뇌쇄적인 눈빛으로 그를 보며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신만을 위해서이에요.”
“오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몸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가슴을 불룩하게 나오게 하고 허리를 흔들자 그가 입을 떡하고 벌린다.
난 천천히 볼레로를 벗어서 그에게 던졌다. 진한 향이 배어 있는 볼레로를 들고 그가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그리고는 내 볼레로로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래까지 가지고 가서 그의 불같은 기둥을 볼레로를 비빈다.
처음 입은 건데……. 드라이 해야겠다.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나는 민소매 블랙 실크 드레스를 입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한쪽 다리를 천천히 구부렸다. 비틀어진 몸의 곡선 때문에 가슴과 엉덩이가 더 돋보이게 된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풀리는 게 보인다. 조금 있으면 침도 흘릴 거 같다. 나는 어깨끈을 살짝 내렸다. 그랬다가 다시 올렸다.
“그런 게 어딨어. 내릴 거면 내려야지!”
“이건 내 마음이거든요?”
나는 천천히 뒤돌아 한쪽 어깨를 내렸다. 그러나 지퍼가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손으로 더듬고 있는데 그가 얼른 달려들어 지퍼를 쭉 내리더니 원피스를 훌러덩 벗긴다.
“그거는 아니지! 이건 쇼거든요? 잠깐만 참아요.”
“어떻게 참아. 어떻게?”
그가 말을 하더니 달려들어 키스했다. 나는 억지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스트립쇼를 하라면서요! 좀 참아 봐요! 이 음악 끝날 때까지만!”
“얼마나 남았지?”
“4분 20초.”
“말도 안 돼. 4분을 어떻게 참으라고.”
그는 마치 강아지처럼 헐떡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풀어진 지퍼를 만지며 살짝 다시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자 그는 감질맛 난다는 듯이 내게 소리쳤다.
“내린 걸 다시 올리는 게 어딨어! 당장 내려!”
나는 그를 살짝 째려보며 지퍼를 내리고 한쪽 소매에서 팔을 뺐다. 그리고 나머지 소매를 빼고 가슴을 살짝 가린 채로 뒤를 돌았다.
“그런 게 어딨어! 가리는 게 어딨어! 누구 감질나서 죽는 거 보려고? 처음이라고 하더니 완전 선수네. 선수야.”
그럴 리가 있나. 단지 나는 조금씩 그의 심리를 이용할 뿐이고 그는 나를 보고 참지 못하니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뿐이다.
“조금만 참아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달려들어 내 원피스를 몽땅 벗겨버렸다. 달랑 브래지어와 팬티 두 개 남았는데 그걸 못 참나?
속옷 차림으로 그를 억지로 밀어내면서 말했다.
“2개가 남았잖아요. 아직 음악은 3분도 더 남았거든요? 스트립쇼를 해달라고 해놓고는 쳐다도 못 보면 어떡해요?”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나를 냉큼 들어 안고 침대로 가 눕히며 그 위를 덮쳤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하라고 했으니 끝내는 것도 내 마음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참을성이 없으면서 경영을 하지?”
“누가 그래 내가 참을성이 없다고? 이거는 치밀하게 계획된 거라고. 하라고 하고 덮치는 거!”
곧 죽어도 못 참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그.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라울이 좋다.
달빛이 비춰드는 그의 침실은 떡갈나무만 드리워진다면 스페인의 그의 성 같은 기분이 든다. 넓고 웅장하지만, 한없이 아늑하고 따뜻한 까스틸로 성. 그것은 그의 품과도 같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 눈을 감았다.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아까 마신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의 맛이 느껴진다.
단 몇 번의 손놀림으로 벗겨져 나가는 브래지어.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걸려 내려가는 작은 팬티.
유두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에 단단하게 돌기가 뭉친다. 아래로 느껴지는 공기는 음모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거 같다.
다음에 다가올 자극을 예상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그가 내 턱을 잡는다.
“눈떠. 디아나!”
반짝. 설렘과 부끄러움으로 눈을 들자 눈앞에 보이는 그의 신비한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웃고 있다.
불빛을 반사해서 마치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해 보이는 눈동자는 나를 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 들어있는 알몸의 내가 낯설다.
“이제, 우리 이렇게 평생 살 수 있는 거야. 눈뜨기 무섭게 도망가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 볼까 봐 변장하고 나가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면 어디서는 언제든 널 안을 수 있어.”
“그게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의 볼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의 눈동자 안에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좋아. 그것만 꿈꾸며 살았으니까. 너를 내 방에 내 침대에 데려다 놓고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어.”
“라울…….”
“응?”
“지금 당신, 이제까지 말한 것 중에 가장 로맨틱하게 말 잘하고 있는 거 알아요?”
“내가?”
“네, 나 라울이 말 한대로 이제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 영원히. 라울 아내로.”
“영원히?”
“응. 영원히. 당신 여자로.”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있으니 너무 황홀하다.
내 여자로 평생!
내가 원할 때마다 안을 수 있고, 다른 사람 모두 내 여자라고 인정하고, 내 아이를 낳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꿈꾸게 한다.
저 작고 예쁜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어쩌면 이렇게 달달할까?
한입에 입술을 머금고 깊게 빨아들였다.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몸이 어쩌면 이렇게 귀엽고 자극적인지. 정말 마법에라도 걸린 게 분명하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 끝의 연한 분홍빛 유실을 입에 물었다. 신음과 함께 펄떡이며 허리를 뒤트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예쁘다.
“하아……. 라울…….”
“더 불러줘. 내 이름.”
가슴을 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내려서 판판한 아랫배로 내려오자 내 귓가에 그녀가 부르는 내 이름이 울린다.
“라울. 라울……. 사랑해요.”
“디아나…….”
매끈한 허벅지를 입술로 핥다가 까맣고 반들거리는 음모에 얼굴을 묻었다. 속살을 가르고 도드라진 진주알을 입에 물자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린 속살이 주는 미칠 것 같은 갈증과 그녀의 향기와 신음에 아래로 피가 몰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다. 길게 그녀의 꽃잎을 핥아 올리자 엉덩이를 뒤로 빼며 도망가려 한다.
어림없지. 디아나 너는 이제 평생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골반을 꽉 쥐고 내 입술로 더 바짝 그녀의 몸을 당겼다. 내 입술에 닿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살결이 사랑스럽다.
진짜 내 여자가 된 거야. 모두가 널 내 여자로 인정하고 나는 너에게서 딱 널 닮은 딸도 보고 싶어.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서 가슴이 뛴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맙다.
내가 터질 것 같은 페니스를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끄러우면서 빡빡하게 조여 오는 아찔한 감각.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그 자극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하아……. 디아나. 이 마녀. 내 사랑.”
“라울…….”
허리를 쳐올릴수록 진하게 묻어나는 그녀의 향기.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물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깊게 허리를 밀어 넣자 페니스 끝이 자궁 끝에 닿는다. 진땀이 배어 나오도록 강렬한 자극에 더 빠르게 몸을 쳐올린다.
“아읏……. 흑…….”
그녀가 내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매달린다.
지금 디아나도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페니스를 끝까지 빼내어 귀두를 입구에 얕게 묻고 흔들자 또 다른 자극이 전해진다. 조금 더 깊게 위쪽으로 찌르자 그녀가 온몸을 움츠린다.
그녀의 열점이다. 그 한곳만을 공략해서 자극하며 빠르게 몸을 쳐대자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린다.
“아아악……. 윽…….”
그녀가 절정을 느끼며 경직하자 나를 물고 있는 그녀의 속살도 무섭게 조여든다. 깨물 듯이 조여 대는 자극에 나는 다시 깊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섭게 예민한 속살들이 수도 없이 많은 빨판같이 나를 빨아들이며 조여 댄다.
“디아나!”
그녀의 안에 끝도 없이 긴 사정을 하며 나는 존재 자체를 그녀의 바다에 던져버린다.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 * *
소수의 예약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한정식 집.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낮은 담으로 이어진 중간 담들은 흡사 어느 고궁과도 같다. 그러나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한식당이다.
저녁에는 한국 전통 무용 공연이 있고 때로는 명창들이 나와 소리를 하기도 하는 이곳에 두 사람이 떡 벌어진 상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색색가지 고명이 올라간 도미찜과 신선로, 그리고 삼색전과 갈비찜. 한 상에 다 올릴 수 없을 정도의 음식을 마주하고 앉은 건 라울과 임 회장이었다.
“한 잔 받게나.”
“네.”
따뜻하게 데워진 정종을 작은 잔에 따르자 맑은소리가 났다.
“저도 한 잔 올리겠습니다.”
라울이 하얀 백자 주전자를 손에 쥐자 임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밀었다. 작고 하얀 백자 잔도 흔하게 보는 것과는 빛깔이 다르다. 맑은 액체가 소리를 내며 잔에 담기자 라울이 살짝 고개를 돌려 한 모금을 마신다.
“술은 즐기는 편인가?”
한 모금 마시는 라울을 보며 임 회장이 물었다. 이랑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부쩍 모든 것에 관심이 가고 알고 싶다.
이랑을 찾은 것만도 매일 감사한다. 그렇다 보니 사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랑이만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랑의 짝은 성진보다 더 잘나가는 기업의 후계자이며 스페인의 왕족인 진시환이었다. 진시환을 사위로 맞을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조심스럽고 그러면서도 가슴 뿌듯하다.
“낮이고 근무 중이라 많이는 못 마십니다.”
라울이 정중하게 답한다. 어린 나이서부터 워낙 재계의 수장들과 함께하다 보니 젊은 나이에 비해 어른들을 대하는 것이 익숙하다.
“나도 그러네. 술은 즐기는 편이 아니지.”
“저도 그렇습니다.”
“맞아. 술이라는 게 때로 사람 기분 좋기도 하지만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하고 평소에 몸이 느끼는 것과 다른 정서를 주기도 하니, 낮에는 자제하는 것이 좋지. 어서 들게나. 자네는 뭘 좋아하나.”
임 회장이 라울에게 권했다. 뭐든 맛있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랑에게 잘해주기만 한다면 뭐든 다 주고 싶다.
“저는 다 잘 먹습니다.”
“어릴 때 스페인에서 있어서 양식을 더 좋아하지 않나?”
“그런 거 없습니다. 굳이 들자면 저는 한식을 더 좋아합니다.”
“그렇군, 나는 생선을 좋아해. 해산물이라면 껌벅 죽지.”
임 회장이 말하며 도미찜을 한 젓가락 든다. 맛있게 먹는 임 회장을 보며 라울이 웃으며 말했다.
“디아나가 회장님 식성을 닮았나 봅니다.”
“그래? 디아나가 나처럼 해산물을 좋아하나?”
“네. 스페인에서는 빠에야를 좋아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골고루 잘 먹지만 해산물을 좋아하더군요.”
“그 애. 식성은 좋은가?”
아버지에게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지만, 아직 이랑이와는 식사를 몇 번 못 했다. 그래서 딸이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
“예, 아주 잘 먹고. 활기차고 건강하지요. 저 같은 남자한테도 기죽지 않을 만큼 말이지요.”
“그래? 재미있군. 사실 자네는 여자들이 먼저 안달이 나는 걸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말이야. 다들 자네와 사돈을 맺고 싶어 난리도 아니었지. 안 그런가?”
“그런가요? 저는 잘 몰랐습니다. 단지. 디아나 말고는 제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없었던 건 맞습니다. 여자는 그냥 여자. 결혼은 그냥 비즈니스의 하나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었으니까요.”
“하긴, 자네만 그런 게 아니니까. 아마 재계 대부분의 후계자가 그렇지 않겠나? 사랑을 해볼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한 거지.”
임 회장의 말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 안됐다. 내가 볼 때 임 회장은 참 괜찮은 기업가다. 인격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했는데 어쩌다가 사랑에는 그렇게 실패했을까?
“저도 디아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사랑을 몰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디아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제 엄마를 닮아서 그럴 거야. 디아나 엄마도 참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지.”
“아버님도 많이 닮았습니다. 식성도 그렇고.”
“그래, 그 말이 맞나 보군. 나도 처음 봤을 때부터 딱 내 딸인지 알겠더라. 녀석, 많이 울었는데 위로는 해줬나?”
“네.”
“자네를 이렇게 미리 부른 건 내일이면 경제신문에 디아나에 관한 기사가 날 거 같아서야. 내가 우리 성진 그룹의 지분을 증여해서 그 변동 내용이 기사화될 것 같아서. 내가 서둘러 바로 호적에 올리면서 일단 지분부터 줬네.”
“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재계해서 핏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집안의 일원이 된다는 건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정도가 그의 영향력을 재는 척도이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사랑받느냐 하는 애정도의 표시이기도 했다.
또한 다음 세대, 앞으로 그 그룹의 실질적인 힘이 누구에게 실리느냐가 결정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빨리 서두르는 건 그만큼 임정환 회장이 이랑을 깊이 생각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네에게 또 말할 게 있는데 나 이혼했네.”
“네?”
“자녀도 없고 그래서 모든 절차가 간소하더군. 이번 달 안으로 이혼 판결이 날걸세.”
“아……. 예.”
함부로 자세히 물어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걸 라울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디아나의 등장으로 이 부부의 이혼에 영향을 미쳤겠지.
갈비찜을 들어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연하게 잘 조려진 갈비찜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디아나도 이걸 좋아하려나?
이제 무얼 먹어도 디아나가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맛있는 게 있으면 먹이고 싶다.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우리 디아나, 많이 사랑하지?”
그렇지 않아도 디아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임 회장이 묻자 내가 다 가슴이 뜨끔하다.
“네, 많이 사랑합니다.”
“그런 것 같았어. 저번에 우리 집에 올 때도 디아나가 자네를 많이 의지하더군.”
“네.”
“자네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 그런데 너무 많이 차이가 나서 처음에는 헤어지려고 했었다면서.”
이런. 디아나,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하여간. 하지만 내가 꽉 잡고 있는데 자기가 헤어지고 싶다고 해서 헤어질 수 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속에 쏙 들어왔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더군요.”
그렇게 말하자 임 회장이 웃으며 앞에 있는 전 하나를 입에 물었다. 해물전이었다.
저것도 디아나도 좋아하겠군.
“본인들이 사랑하고 집안도 서로 기울지 않고 다 좋은데……. 문제는 말일세……. 자네 할아버지 진 회장님일세.”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얼굴이 굳어졌다. 할아버지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디아나가 성진 그룹의 딸인 걸 안다면 말이다.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일세, 우리 성진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 진 회장님이니 말일세.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와 진 회장님이 많이 경쟁하셨지. 그리고 큰 입찰 몇 건을 가지고 오는 바람에 지금도 자동차 산업과 통신은 성진이 우위에 있지.”
“네, 그것 때문에 성진이라면 아직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싫어하시는 분한테 우리 디아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겠나.”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물론 디아나가 임 회장님 딸인지 모르셨을 때지만요.”
“그래, 이제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 내 딸인지 안다면. 더군다나 혼외자녀인지를 안다면 말일세.”
그건 임 회장의 말이 맞았다. 그건 나도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지금 할아버지가 찬성하고 반대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디아나와는 결혼할 테니 말이다.
단지 할아버지께서 심하게 반대하거나 하면 디아나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예뻐하는 사람은 한없이 예뻐하지만 어긋난 사람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것이 할아버지다.
그런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기에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하겠네.”
임 회장이 담담하게 앞에 있는 잣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내 딸 일이니 진 회장님은 내가 만나서 해결하겠네. 딸 혼사 길을 내가 열어줘야지.”
“회장님께서 하시겠다는 건…….”
괄괄한 할아버지를 임 회장이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임 회장과 할아버지가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경제 조찬이나 청와대 만찬에서는 여러 번 만났지만 말이다.
“내가 직접 진 회장님을 만나 뵙겠다는 걸세. 기사가 나가기 전에 오늘 밤이라도 잠깐이라도 뵐 생각이네.
이미 약속을 해 놓았네. 댁으로 찾아뵙기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