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3)

19. 뜨거운 위로

천천히 눈을 돌려 규빈을 올려다보았다.

내 사촌오빠. 내 사촌오빠다.

그렇게 친근감을 느꼈던 건 핏줄 때문이었을까? 규빈이 그렇게 나를 좋아하고 잊지 못한 것도 바로 핏줄의 끌림 때문이었을 거다.

“디아나!”

규빈이 부르며 다가오려고 하자 라울이 정색을 하고 내 앞으로 나선다. 라울의 얼굴을 봐서는 전에 내 집 현관 앞에서 같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요. 오빠!”

“…….”

작게 말했지만, 오빠라는 단 한 마디에 규빈이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잔인하지만 가장 단호하게 그를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단 한마디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가요. 라울.”

그의 마음이 아픈 것이 느껴져 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내가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서자 규빈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도 이제 더는 나를 이랑 씨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미안해, 규빈 오빠.

어색한 호칭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서글프다. 태어난 근원에 대한 흔들림이 가져다주는 불안정함이 나를 힘들게 한다.

라울이 내 어깨를 꼭 잡고 나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라울의 마음은 어떨까?

이 여자 마음속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울고 나온 게 틀림없다. 코끝이 빨개지고, 지금도 울고 있다.

눈물이 흘러서가 아니라, 그녀의 심장이 울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디아나의 손을 꼭 잡고 차를 출발했다. 차가 가는 내내 디아나는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울고 있자 더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프다. 임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디아나는 임 회장의 혼외자녀이다.

혼외자녀라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하지만 외동딸이다. 임 회장에게는 어떤 자녀도 없으니까. 다른 여자들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좋아할 거다. 성진 그룹이라면 MK그룹과 서열을 다투는 한국의 손꼽히는 그룹이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아버지가 생긴 거다. 그러나 지금 디아나에게는 그런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이 먼저인 이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순수하고 용기 있는 디아나.

나는 디아나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어깨를 당겨 팔을 둘렀다.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온기가 닿자 몸에 열기가 퍼진다.

어떻게 디아나가 임 회장의 딸인지 말할 수 없이 궁금하지만, 지금은 물을 수 있는 때가 아니다.

“괜찮아?”

그녀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울고 싶으면 더 울어도 돼.”

“아니요. 나 울지 않을 거예요. 난 절대로 울지 않을 거예요.”

울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흐느끼며 울고 있는 그녀에게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대로 나의 집으로 갔다. 오늘 같은 날은 절대 그녀를 사원 아파트에 혼자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따라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곳에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차가 청담동에 서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여기가 어디예요?”

“내가 사는 집”

“왜 이리로 왔어요? 나는 그냥 사원 아파트로…….”

“쉿! 오늘은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 알았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게 말하자 디아나가 어깨를 움츠린다. 주차장에 내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자 세베로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세뇨리따.”

“세베로.”

디아나가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해서 질투를 할 뻔했다. 내가 인상을 쓰자 세베로가 빙긋 웃는다.

그래, 세베로. 전에 세베로가 말한 대로 나는 세베로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게 맞다.

디아나가 세베로에게 길게 인사하지 못하도록 찬바람이 쌩 불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뇨리따. 주인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미리 준비했습니다. 우선 따뜻한 물에 허브향 입욕제를 준비했으니 씻으시고 나오십시오. 그럼 식탁에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내가 뒷말을 잘랐다.

“됐어. 세베로. 지금 식탁에 다 준비해놓고 다들 사라져. 이 층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내 말에 세베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엉큼하게 웃는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제 내일 부르실 때까지 모두 나가라고 하겠습니다. 저도 내일 오겠습니다.”

“좋아.”

세베로가 라울에게 인사를 하자 나는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도대체 이 남자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무조건 둘만 있겠다고 그래.

그러나 사실 라울의 말이 맞았다. 이백 평이나 되는 복층 빌라에서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지내는 건 정말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라울과 단둘이 있는 게 낫다.

라울이 나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넓은 욕실에 원형의 커다란 욕조가 있고 은은한 로즈마리와 장미꽃 향기가 가득하다. 욕조에 떠있는 장미꽃잎의 붉은빛이 시선을 끌고 있었다. 꽃잎과 달리 따로 입욕제를 풀어서 향기만으로도 긴장이 풀린다.

푹신한 카펫 같은 커다란 매트가 깔린 욕실바닥을 맨발로 디디고 서 있으니 보드라운 감촉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라울이 나를 안고 입을 맞춘다. 짧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내 거 풀어줘.”

딱 그의 가슴에 안긴 눈에 보이는 셔츠 단추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단단한 가슴이 드러나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것도.”

허리를 밀어 버클을 앞으로 내밀자 내가 버클을 풀었다. 지퍼를 내리자 그의 바지가 바닥에 사르륵 떨어진다. 더는 보기 민망해 얼굴을 돌리자 그가 나를 안았다.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어깨 아래로 옷을 잡아당기자 바로 속옷차림이다. 고개를 숙이자 그가 바로 내 턱을 들어 올리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길고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키스를 하며 손을 뒤로 돌려 바로 브래지어 후크를 열자 해방된 가슴이 시원하게 느껴지며 젖꼭지가 꼿꼿하게 선다. 그의 손이 바로 단단하게 뭉친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비비자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그의 무릎이 바로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팬티를 걸고 밑으로 내린다. 그리고는 바로 제 드로즈를 벗어버리고는 나를 안아 들었다.

“하아…….”

작은 한숨이 뜨거운 바람을 내며 터져 나왔다.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르는 열기였다.

알맞은 온도의 따뜻한 욕조 안으로 들어가 나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는 눈길을 마주친다. 그의 눈이 더 깊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욕실의 조명과 욕조의 붉은 꽃잎 때문에 지금은 완전히 보랏빛을 띠는 눈이었다.

“라울…….”

그가 내 입술을 머금고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인다.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구석구석 맛보고 뜨겁게 혀를 얽으며 희롱하다가 바로 입술을 내려 가슴을 물었다.

“흐윽…….”

“디아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나만 느껴!”

라울이 낮은 소리로 젖꼭지를 희롱하듯 말했다. 입술이 젖꼭지에 스치며 아찔한 감각을 퍼뜨린다. 따뜻한 물 때문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더 관능적이다.

그의 입술이 한참 젖가슴을 핥고 빨기를 반복했다. 점점 몸이 나른해 지면서 물속에서도 젖어드는 아래가 느껴진다. 그가 내 두 팔을 욕조 난간에 넓게 벌리고 하체를 들었다.

내 몸은 머리와 어깨를 욕조에 기댄 채 물 위에 둥실 길게 뜨고 말았다. 그가 내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고 내 허리를 받치고 있어서 나는 다리를 벌리고 물 위에 떠있는 꼴이 되었다.

“라울…….”

물 위에서 해초처럼 흔들리는 내 음모가 고스란히 보인다. 바로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라울이 씩 웃더니 조금 더 내 몸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내려 내 수풀에 얼굴을 묻었다.

“흐음…….”

바로 수풀을 가르고 숨겨진 속살을 혀로 벌리고는 클리토리스를 핥아 올리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울린다.

“하아앙……. 앙…….”

뒤틀리는 내 몸을 그가 꽉 움켜잡고 조금 더 집요하게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욕실 천장의 별처럼 박힌 조명들이 한꺼번에 회오리를 치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아……. 아아…….”

욕실 안에 울리는 뜨거운 신음이 나른하게 퍼지는 쾌감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주는 부드러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나를 흔들고 있어서 조금 전까지의 무겁고 답답한 슬픔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은 두 곳으로 나뉘지 못하는 것이었는지, 그가 주는 자극에 반응하고 떨면서 나는 욕조 난간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신음하고 있다.

“라울……. 그만……. 아아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자극에 그에게 애원하듯 소리 냈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허벅지 안쪽과 속살을 물고 빨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입술을 아래에 댄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아니, 견딜 수 있어. 더 느껴. 완전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흐느끼다가 완전히 가. 절정 끝에 가서 내 품에서 자.”

“으응……. 하…….”

입술을 예민한 살에 댄 채 말하자 그 입술이 움직이면서 진한 자극을 전달한다. 엉덩이가 흔들리고 허리가 뒤틀린다.

반사적인 몸짓이었지만 그는 그런 몸짓조차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내 골반을 꼭 쥐고 혀를 꼿꼿하게 세워 아래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질 내벽이 그의 혀의 자극으로 바르르 떨린다. 이물질 같은 그의 혀가 민감한 곳곳을 건드릴 때마다 엄청난 쾌감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빠르게 퍼져서 뇌수를 치고 흔든다.

여전히 아래를 빨며 그가 보랏빛이 도는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민망한 자세와 행동을 하면서도 진지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고 함께 사랑을 나눈 적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나의 은밀한 곳을 빨고 있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너무도 부끄럽다.

“감지 마. 나를 봐.”

말을 하면서도 계속 느껴지는 자극에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을 간신히 떴다. 그가 다리 사이에 얼굴을 대고 여전히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이게 좋아. 이렇게 나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나만 키스할 수 있는 이곳에 키스하는 게 좋아. 그러니 너도 나를 봐. 널 사랑하는 내 모습을 봐. 그리고 날 느끼는 네 모습을 보여줘.”

“아하……. 라울……. 못 견뎌……. 더는 못 견딜 거 같아.”

점점 아래에 지진이라도 나는 듯 자궁 안부터 신호가 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질근질근 물어가며 온몸으로 그를 느낀다.

질 내벽을 긁듯이 찌르는 그의 혀와 주변을 자극하는 입술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은데 그는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아아악……. 으응……. 하…….”

그의 손가락 끝에서 클리토리스가 짓이겨지고 뭉개지며 날카로운 자극을 몸으로 퍼뜨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엄청난 너울이 아랫배와 가슴으로 퍼지면서 천장의 모든 불빛이 하얗게 폭발하며 쏟아져 내린다.

“하아……. 윽……. 하……. 하……. 응…….”

아래가 사정없이 움찔거리며 아랫배가 경련을 일으키듯 흔들리고 있다. 색색거리는 숨결이 모든 자극과 경련에서 나의 중심을 잡으려는 듯 가쁘게 들고 난다. 그런 나의 진동을 잠깐 기다렸다가 그가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흥……. 응……. 라울……. 라울…….”

두 팔을 벌리고 난간을 잡은 채 둥둥 떠 있는 내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그가 나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뒤집어 엎드리게 한다. 따뜻한 물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길은 힘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단단한 팔은 요람처럼 아늑하다.

이제 난간을 두 손으로 모아 잡고 엎드린 꼴이 된 나의 등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엎드린 내 귓불을 물고 작게 숨을 불어넣는다.

“하아…….”

내가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너무 예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슬퍼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슬퍼져.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그의 위로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귓불을 물고 핥던 그의 입술이 척추를 따라 키스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오르가슴으로 예민한 몸은 그의 입술이 등뼈를 따라 키스할 때마다 머리카락 끝까지 올올이 서는 것 같은 전율을 선사하며 한없이 나를 요동치게 한다.

“내가 말했던가?”

라울이 여전히 등뼈에 입술을 대고 혀로 할짝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디아나를 핥아 먹으면 내 안에도 네가 가득해지는 것 같다고? 그래서 네가 내 모든 생각 속까지 점령해 버리는 거 같다고 말이야.”

“하아……. 말도 안 돼.”

“아니, 정말이야. 네가 날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끊으면 내 머릿속도 네 생각이 덜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그렇게 해요.”

“아니, 그래도 그럴 수가 없어. 넌 너무 맛있어. 중독성도 강해서 자꾸 너를 이렇게 핥고 싶어. 그리고 난 이제 너 없이는 안 돼. 그러니까 널 차지하고 먹어버릴 거야.”

“식인종 같아요.”

내가 어깨를 귀까지 올려붙이며 말하자 그가 천천히 내린 입술을 꼬리뼈 끝, 엉덩이가 갈라지는 그 틈에 대고 말했다.

“식인종 맞아. 디아나만 먹는 식인종.”

“하아……. 으응…….

그의 혀끝에서 전해지는 아찔한 전율이 꼬리뼈를 타고 머리를 강타했다. 정신없이 흐느끼기 시작할 때 아래로 거대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니스가 와서 닿는다.

단단함으로 표출되는 강함과 힘이 그대로 내 안으로 파고들며 속살이 넓히자 질 내벽이 침범자를 향해 달라붙는다.

꽉 들어찬 그의 것을 조이고 달라붙어 있는 대로 흡입하듯 안으로, 안으로 빨아들인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길들인 그대로 그를 빨아들여서 죽일 듯이 조여 대며 나 역시 쾌감을 느낀다.

단단한 그의 것에 찔리면서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지독한 자극에 몸을 떠는 내가 요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그의 입에서는 내 이름이 뜨겁게 퍼지고 있었다.

“디아나. 사랑해.”

그의 페니스가 내 몸을 파고든다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의 고백은 내 영혼을 파고들며 뜨거운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나를 사랑하는 그를, 내가 사랑하는 그를 더 품고 싶다. 그를 완전히 내 안으로 밀어 넣고 싶은 지독한 욕망이 지금 그의 페니스를 잘라낼 듯이 조여 대며 휘감고 달라붙는다.

“컥! 이제 달린다.”

그가 거친 숨과 함께 말하고는 빠르게 몸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쳐댈 때마다 커다란 욕조 안에 파도가 몰아치듯 물결이 찰싹거리기 시작했다.

미칠 것만 같은 갈망이 둘을 삼킬 듯 휘몰아치고 그의 몸짓에 거친 파도 같은 물결이 욕조를 넘어서며 소리를 낸다.

“아아아…….”

“윽. 디아나…….”

큰 파도 같은 물이 출렁하고 욕조를 넘치며 소리를 낼 때 우리 둘은 동시에 절정을 느끼며 몸을 맞대고 부르르 떨었다. 라울이 내 등에 가슴을 대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삽입되어 맞물린 곳이 함께 움찔거리며 떨리고 있다. 그가 내 안에 깊이 사정하며 안으로 뜨거운 것들이 느껴진다.

“하아……. 이리 와.”

그가 나를 돌려 안고는 나른하게 욕조 안에 기댔다. 둥둥 떠다니는 붉은 장미꽃잎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팔이 어깨를 감아 앞으로 돌아와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쥔다. 그의 손안에 내 가슴이 들어가자 따뜻한 안정감을 느낀다.

그가 천천히 손으로 내 몸을 어루만진다. 한껏 사랑하고 난 손길은 더 부드럽다. 물속에서 느끼는 나른함에 내가 그의 품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단둘이만 있는 이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 그의 사랑과 위로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제 그의 마음이 나의 가장 안락한 집이 되었다는 걸 느낀다.

* * *

그녀를 흔들의자에 앉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한껏 사랑을 나눈 그녀를 커다란 타월에 싸서 안고 나와 따뜻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주고 가운을 입혀서 흔들의자에 앉히자 그녀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눈을 감고 기댄다.

살살 의자를 흔들어주며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에게 말했다.

“따뜻한 우유를 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를 보고 픽 웃으며 내가 말했다.

“싫어도 먹어.”

우유를 데워서 따듯한 컵을 손에 쥐어 주자 또 울음을 터트린다.

“진짜 아빠래요. 그분이 내 아빠래요. 나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이야기 들은 적도 없는데 우리 엄마 사진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엄마를 사랑했대요.

결혼한 남자가 아가씨를 사랑해도 되는 거예요? 나쁜 놈인 거죠? 결혼도 안 하고 여자 임신시키고 그러면 나쁜 남잔 거죠?”

그렇게 말하는 디아나의 말을 듣자 갑자기 걱정된다. 나는 피임을 잘했던가? 그녀를 더 단단히 잡고 싶은 마음에 요즘은 일부러 피임하지 않고 있었다.

나도 나쁜 놈인 건가?

디아나가 아빠를 원망하는 이런 순간에 왜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임 회장이 이해가 된다.

꼭 나빠서가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다 보면 안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거 아닌가. 물론 결혼했다는 말도 안 한 건 잘못이지만,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면 과연 놔줄 수 있을까?

내가 유부남이라고 하면 떠나갈 게 분명할 때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말해야 했다. 평생 후회하더라도…….

아, 모르겠다. 디아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결혼은 비즈니스라고 생각하고 했을 거고 그렇게 아무나하고 결혼하고 난 후에 디아나를 만났다면……. 나라도 그랬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 보면 나도 나쁜 놈인가 보다.

아니지. 그렇게 되면 디아나가 그 엄마처럼 그렇게 혼자 살다가……. 그건 절대 안 되지.

정말 감사한 일이네. 내가 결혼하기 전에 디아나를 만나서!

“디아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싶어.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아이도 갖고 싶어. 나 역시 네가 내 아이를 낳아줬으면 좋겠어. 점점 너를 안을 때마다 피임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그녀가 멍한 눈을 들어 나를 본다.

“나 제대로 고백하는 거야. 사랑해 디아나. 내가 프러포즈할 수 있게 나한테 기회를 줘.”

“하지만 난 사생아에요.”

“디아나,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아버지, 어머니한테 그렇게 영향을 받아. 사생아니 뭐니 그러는 건 어린애들한테나 하는 말이지 너는 그냥 디아나야. 그냥 정이랑이라고. 네가 정이랑이 됐든 임이랑이 됐든 나한테는 상관없어. 넌 나한테 그냥 디아나야. 내 여자야. 그러니까 부모 때문에 울지 마.

그리고 부모 때문에 나에게 선을 긋지 마. 네가 임 회장의 딸이라는 걸 알기 전에 나와 먼저 알았고 사랑했잖아. 모든 사람이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쉬운 건 아니야. 넌 그래도 아버지라도 있잖아.”

그 말에 그녀의 눈이 더 동그래진다. 그래, 난 아버지도 없으니까……. 우스운 생각이 들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난 아버지도 없어. 아버지하곤 사이가 좋지 않았지. 어머니하고 이혼한 뒤로 수도 없이 여자를 갈아치우셨거든. 그래서 늘 불만이었어. 여자 같은 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사랑하게 됐어.

내 앞에 디아나가 나타났으니까. 네가 나를 물어뜯고 내 몸에 너를 각인시켰지.”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어찌 됐든 상관없어. 난 너 아니면 안 되고 네가 누구의 자식이든 사생아든 알에서 태어났든 하늘에서 떨어졌든 난 너만 사랑해. 넌 내 여자야. 그러니까 다른 것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나만 봐.”

내 말에 디아나가 수긍하는 눈빛으로 자게 한숨을 쉰다.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이 되어 보여서 다행이다. 그녀에게 우유를 먹이고 흔들의자를 밀어주었다. 가만히 그녀의 눈이 감기는 걸 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할 다음 단계를 구상한다.

프러포즈! 제대로 해야지.

* * *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 봤자 너희만 힘들어. 금방 나가게 돼 있어 나. 변호사 오라고 해!”

형사들을 보고 소리치는 이진산의 말에 베테랑 형사가 비꼬며 답한다.

“아, 그러십니까? 네네, 그러시겠지요. 참, 여기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저기 저 아가씨도 자기가 성진 그룹 숨겨진 딸이라나 뭐라나 난리를 치더니만 연락도 안 되고 성진에서 전화도 안 받는데. 이번에는 어디로 연락을 드릴깝쇼?”

“뭐?”

이진산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성진에서 연락을 안 받아? 왜? 저 여자 변호사 성진 그룹에서 안 왔어?”

“아예 모른다고 하더라고. 왜 한주 산업도 전화를 안 받으려나?”

경찰이 한주 산업에 전화 하자마자 바로 변호사가 오겠다고 하자 옆에서 이진산이 말한다.

“내가 그랬잖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시작했나?”

“잘 알아. 잘 알아. 그런데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경찰한테 막 반말하고 그러면 나도 반말하지. 나도 완전 또라이 경감이거든?

자, 이진산 씨 걸린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줄줄 이네. 이번엔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겠어. 그런데 저 아가씨는 이진산 씨하고 약혼할 사이라고 그러는데 맞아?”

경찰이 이진산에게 묻자 옆에 있던 혜정이 다급하게 이진산을 보며 말했다.

“우리 결혼할 사이잖아요. 말 좀 잘해줘요.”

“뭘 말을 잘해? 성진 그룹하고 상관도 없는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말에 혜정이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우리가 같이 보낸 밤이 얼만데. 나하고 하는 게 좋다며? 우리 결혼할 거라고 첫날부터 호텔 간 사이잖아. 양가 다 알고 있다고.”

혜정의 말에 이진산이 픽하고 코웃음을 쳤다.

“야, 나하고 처음 만나서 호텔 간 여자가 한둘인지 알아? 그런 여자들 다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서울을 줄로 서서 가로질러.”

“뭐라고? 이 나쁜 놈!”

“나쁜 놈? 누가 나쁜 놈인데? 성진 그룹에서 전화도 받지 않는다며. 네가 제대로 성진 그룹 딸이면 반응이 이렇게 나와야지. 봐. 한주 산업에서 변호사 왔거든? 세 명이나.

모른다고 전화도 받지 않고 부인한다면 너는 거기 딸이 아닌 거지. 성진 그룹하고 상관도 없는 게 지금 나하고 엮이려고 드는 거야? 그리고 넌 머리가 비었냐? 누가 결혼할 여자하고 이러고 노나? 안 그럽니까, 형사님들?”

이진산이 오히려 형사들을 보며 묻는다. 조금 전 화면으로 어떻게 마리화나를 피우고 섹스파티를 했는지 다 본 형사들에게 묻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이진산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 자꾸 없는 사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그것도 사기죄에 해당합니다. 성진 건설 딸은 아무나 되나?”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형사가 말한다.

“그게 너무 원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도 있으니 정신 감정 의뢰해볼게요.”

“뭐야 지금? 날 보러 미친년이라고 그러는 거야? 야! 너 이진산! 어떻게 나를 하루아침에 그렇게 모른 척할 수가 있어? 좋다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뭐하는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지? 참나 재수가 없으려니 별게 다 꼬여 들고. 그리고 널 물고 빤 게 나 혼자야? 여기 같이 온 놈들 다 물고 빨았어. 이거 왜이래? 누구 발목을 잡으려고.”

“야! 이 파렴치한 놈아. 이 나쁜 놈아!”

소리를 지르는 혜정에게 형사들이 조용히 하라고 다그치자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이진산을 쏘아본다. 하지만 이진산은 전혀 반응이 없다.

“이진산 씨,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단순히 대마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걸린 게 많아요. 고생깨나 하시겠습니다. 실형 선고받을 확률이 훨씬 높고요.”

“장 변호사,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나 변호사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게……. 이번에는 좀 힘들 거 같습니다.”

“뭐야? 젠장.”

앞에 있는 형사 테이블에 있는 기물들을 막 던지자 형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진산, 여기 경찰서거든. 그렇게 함부로 난동부리면 죄가 추가될 수 있다는 거 몰라?”

그러자 이진산이 형사를 보며 눈을 감는다.

“맘대로 해. 맘대로.”

경찰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구윤주는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혜정이 쪽으로 가려고 하자 경찰이 막는다.

“지금 조사 중입니다.”

“아이, 내가 지금. 잠깐 얼굴만 보면 된다고요.”

“아줌마, 저 아가씨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차마 딸이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경찰서에서 발각이 날까 싶어가지고…….

“그냥, 아는 아가씨예요.”

“그러니까. 아는 아가씨 가지고는 안 된다고요. 조사 중에는 가족도 면회 안 되는 거 몰라요? 참, 저 여자. 진짜 안됐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보호자도 없고 말이야. 정신도 이상한지 성진 그룹 딸이라고 떠들어대는데 성진에서는 전혀 모른다고 하고.”

“뭐에요? 모른다고 한다고요? 아니 저 아가씨 분명 성진 그룹 딸 맞는데.”

“증인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뭐 증인을 한다기보다는.”

구윤주는 자기도 경찰서에 잡혀갈까 무서워서 몇 마디하고 저쪽에서 혜정을 멀리서 좀 보고는 그냥 나간다.

“아이, 기지배 그러게 잘 지내라니까는 왜 그래. 그런데 성진에서 왜 모른다고 그러는 거지. 아이고, 이랑이 그게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더니 임 회장이 찾은 거 아니야? 이랑이 그년을 한번 찾아가 볼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구윤주가 경찰서 앞을 왔다갔다 갈팡질팡하고 서성인다.

“진짜 딸 찾은 거 축하해요. 내가 보니 딱 정혜원을 닮았네요. 당신도 닮았고요.”

이재은이 서재 책상에 앉은 임 회장 앞에 서서 말했다. 임 회장은 이재은의 말에도 그녀를 보지 않고 시선을 멀리 창밖으로 두고 있었다.

“응.”

“임이랑이라. 이름 한 번 그 여자답게 지었네요. 예쁜 이름이에요.”

묵묵히 창밖을 보던 임 회장이 입을 열었다.

“당신한텐 미안해.”

임 회장의 말에 이재은이 생소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묻는다.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도 해요? 당신은 나한테 평생 미안한 거 없는 사람이잖아요. 특히 정혜원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에요.”

혜원이 사라진 뒤로 그야말로 무늬만 부부인 채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이재은 역시 결혼할 때부터 아내로서의 사랑 같은 건 생각지 않고 결혼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우호적인 인간관계와 경영자로서의 대우였다. 그녀 역시 갤러리 대표로 있으면서 사업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혜원이 사라진 뒤 임정환과는 그 우호적인 인간관계 자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 정환은 자기 자신도 용납이 안 되서 오랜 시간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지냈으니 말이다.

그는 혜원을 놓친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의 마음을 잡지 못한 자신, 그리고 빨리 이혼해 주지 않은 이재은을 원망했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혜원을 그리워하며 죽지 못해 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둔해지고는 그저 일하며 살았다. 그런 임정환이 옆에 있었던 이재은이기에 지금 임정환이 자기 앞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둘이 정혜원이라는 이름을 대화에 올려본 것도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이재은이 바라보자 임정환 회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랬지. 내가 혜원이와 이렇게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게 모두 당신이 이혼을 안 해줘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래. 미안해. 이랑이 찾고 난 다음에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더군.”

그러자 이재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머릿속은 온통 정혜원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군요. 이랑이를 찾고 보니까 그제야 제대로 정신이라도 들어요? 몇십 년간 그렇게 쳐다보지도 않더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요.”

원망의 말을 할 때조차 이재은은 감정을 넣지 않은 듯 냉정하게 말했다. 이미 다 지나간 감정들이었다.

더 이상 그 것 때문에 화가 나지도 따지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응. 없던 아이가 태어나서 저렇게 클 정도의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랑이가 그러더군. 자기는 당신 앞에서 평생 떳떳하지 못하다고. 죽은 엄마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그 애가 그렇게 말할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당신한테도 혜원이한테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임 회장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고 독백을 하듯이 이재은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재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듣는다.

“그럼 됐어요. 나, 이랑이한테 특별히 나쁜 감정 없어요. 그리고 당신 딸이 있다고 그랬을 때 많이 나도 후회했어요. 임신한 여자를 그렇게 몰아붙여서 아이 가진 채로 혼자 떠나가게 만든 게 나인 거 같아서요. 사실 나 때문에 그런 것도 맞죠. 그때 찾아갔었으니까.”

“뭐라고?”

“그래요. 나 그때 찾아갔어요. 당신한테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그 여자를 본 건 당신이 아니라 나에요.”

임 회장의 놀란 눈이 이재은을 향했다. 힘이 들어간 커다란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재은은 그때 임정환 몰래 정혜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후로 정혜원이 자취를 감추었다. 길길이 날뛰는 임정환에게 차마 자기가 정혜원을 찾아갔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후로 지금까지 이십여 년을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홀몸이니 누구하고라도 결혼해서 잘 살겠지. 그 정도 미모에 그 정도 재능이 있으면 어디를 가도 잘 살겠지 하고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예쁜 얼굴이니 남자들도 많이 꼬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그때 정혜원이 이미 임신했다는 것과 임정환의 딸을 낳아 키웠다는 걸 알고 마음이 찔렸다.

그렇게까지 모질게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아이 엄마로도 사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종적을 감추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이 괴로웠다. 정혜원을 똑 닮은 이랑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놀라는군요. 지금이라도 이혼하고 싶나요?”

“…….”

“이제 나도 이혼해줄 수 있어요. 원래 정혜원이 다시 나타난다면 이혼하려고 했어요. 그동안 경영도 할 만큼 했고 친정에서 받은 유산도 있고 이혼하게 되면 또 재산이 늘어나니까 그런 거 관리하면서 재단 운영하고 지내면 돼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정말 이혼을 하겠다는 거야?”

임정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이재은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당당하게 대답한다.

“네. 이혼해요. 이제 이혼해도 돼요.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 재산이 당신 딸에게 가는 것도 별로예요. 그냥 내가 관리하다가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상속하고 싶어요. 당신 옆에 있는 것도 지겹고요.”

이재은의 말은 즉흥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임정환과 정혜원 사이에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생각한 거였다.

듣고 있는 임정환도 그걸 알아챘다. 이 정도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는 건 이재은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거다.

“왜, 진작 그러지 못한 거지?”

허탈한 마음에 임정환이 고개를 돌려 이재은을 보며 말하자 이재은이 말한다.

“이혼한다고 하니 이제야 나를 제대로 봐 주는 군요.”

“…….”

“예전에는 가보면 뭔가 다른 게 있을 줄 알았어요. 이 성진 그룹의 안주인 자리 딱 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런데 별거 없어요. 당신 옆에서 삼십 년 있는 동안 정말 별거 없었어요. 차라리 독립해서 내 재산 내가 관리하며 사는 게 낫겠어요.

정혜원이 다른 남자랑 잘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 혼자 이겼다고 생각했지요.

당신이나 정혜원이나 죽고 못 살 거처럼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지만 결국 당신 옆에 있는 내가 이겼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죽은 사람을 어떻게 이겨요? 당신 딸 키우며 당신 생각하다 죽은 여자를 내가 무슨 수로 이겨요?

딸 이름도 임이랑. 참 기가 막혀서. 평생 당신이랑 산다는 거잖아요. 이랑이 이름 부르며 늘 그 여자는 임이랑 함께 산거잖아요.

이랑이도 죽은 정혜원도 내가 없으면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기본적인 우호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 당신과 더 살 이유도 없어요. 내가 어리석었던 거지요.”

“…….”

오랜 족쇄가 스스로 풀어지고 있었다. 임 회장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재은을 바라보았다. 이재은은 그런 임정환의 얼굴을 담담히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

“나도 미안했어요. 그때 정혜원에게 그랬거든요. 임신했어도 아이 엄마로 사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그 아이도 내가 데려다 키울 거라고. 그래서 사라진 거 맞아요. 그러니 나도 미안해요. 서로 미안한 것도 청산했으니 내일 바로 변호사 통해서 서류 보낼게요. 재산 관계는 합리적인 선에서 변호사끼리 하라고 하지요.”

“알았어.”

임정환의 말이 떨어지자 이재은이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를 하고는 서재를 나간다.

그야말로 오랜 악연이었다. 함께 부부라는 이름으로 질기게 함께한 모진 시간이었다. 임정환이 한숨을 쉬며 창밖의 연꽃을 바라본다.

물 위에 둥둥 떠서 그린 듯 피어있는 연꽃을 보며 임정환의 입에서 긴 한숨이 다시 터진다.

“혜원아!”

“혜원아, 이랑이가 날 받아주지 않을까 봐 겁난다. 너 지금 나 보고 있니? 그렇게 숨어 살다가 이제라도 이랑이 내게 보내준 거 이제 날 용서한다는 거니?

나도 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랑이한테 더 잘하고 싶어. 그런데 그 애가 날 받아주지 않을 거 같아. 네가 잘 키워서 지금까지 나 없이도 잘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겠지.”

마음이 무겁다. 어떻게 딸에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다. 겁나고 두렵다. 잔잔한 물 위에 떠있는 연꽃은 동요가 없다. 화사하게 웃던 혜원의 얼굴이 요즘은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사님, 책임은 다해야 하는 거잖아요. 윗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건 안 돼요. 윗사람이 책임지고 다가가야지요.”

회사 일에 있어서도 똑 부러지게 책임을 다하라고 했던 혜원이 떠오른다. 지금 있다면 지금도 이렇게 말할 거다.

“그래도 우리가 다가가야죠. 우리가 부모니까.”

“혜원아……. 그럴 게. 내가 다가갈 테니 네가 도와줘. 우리 이랑이가 나를 받아들이도록.”

* * *

“저 장 보러 나갔다 올게요. 테이블보도 갈아야 하고 꽃시장에도 들러야 해요.”

이랑이 사장실에 앉아있는 라울을 보며 말하자 라울이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지금 성진 그룹의 따님께서 그런 걸 직접 하시겠다고?”

스캔들 이후 아주 회사 근처에 파파라치들이 쫙 깔려있는 상황이었다. 디아나가 여차하면 기사가 되는 상황이다 보니 아주 신경이 쓰인다.

“나 놀려요?”

이랑이 쫙 째려보며 말하자 라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든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잖아. 성진 그룹의 외동딸을 데려다 이런 일을 시킨다고 임 회장님이 뭐라고 할까 봐 그래. 원래 조용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거든. 임 회장이 딱 그런 분이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분명히 나한테 내가 누구여도 난 그냥 디아나라고 했잖아요. 여긴 내 직장이고 난 내 일 열심히 할 거예요.”

저럴 때 저 여자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자기 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야 할까? 어떨 때 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디아나가 하고 싶다는 걸 다 들어줄 수밖에. 정말 이 라울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일단 무게를 잡고 말했다.

“그러면 기사 부를게. 차타고 다녀와.”

“말단 직원이 장 보러 가면서 사장님 차를 타고 가도 되겠어요?”

“그건 것 좀 따지지 말고 좀 타고 가면 안 되나?”

“됐어요. 맨 날 하던 대로 혼자 내려가서 내가 타고 싶은 거 타고 장 보고 올게요.”

“나도 같이 갈까?”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내가 알기로는 오늘 일정이 빡빡하거든요? 나하고 장 보러 다닐 틈이 어딨어요?”

이랑은 그렇게 말하고는 핸드백을 메고 아래로 내려갔다. 웃음이 나온다.

정말 나중엔 라울하고 같이 장 보러 다닐 일도 있겠지?

그렇게 MK 사옥을 나와서 몇 발짝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이랑아, 너 이랑이 맞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줌마였다. 대체 아줌마가 어떻게 나를 찾아온 걸까?

스페인에서 헤어진 뒤로 몇 번 생각이 나긴 했지만 혜정이를 대신 성진 그룹으로 보냈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는 정말 정이 다 떨어졌다.

한마디로 말도 섞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인사를 하게 된다.

“아줌마, 여긴 웬일이세요?”

추레한 몰골을 한 아줌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스페인에서 보고 벌써 얼마 만인지 모른다.

“야, 이랑아. 나야 나. 정말 이랑이 맞네. 얼마 만이니?”

막상 인사는 했지만 가까이서 아줌마를 보는 순간 혜정이가 나대신 성진의 딸이라고 찾아왔다는 그 말이 생각이 난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아줌마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야, 너 이렇게 큰 회사에 취직했냐?”

욕심 가득한 눈알이 회사 건물을 훑고 또 나를 훑는다. 얼마나 잘 사나 보려는 걸까?

“네.”

“잘됐다. 축하한다. 그런데 너 말이야 혹시,”

“말씀하세요.”

“혹시 뭐 친아버지 찾거나 그런 건 아니지?”

사람 간보는 이런 얄팍한 표정. 정말 싫다. 나는 아주 냉정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얘기 들었어요. 혜정이가 저 대신 딸이라고 찾아갔었다는 얘기. 아줌마가 시킨 거지요? 엄마가 죽기 전에 부탁했나요? 제 아버지 찾아주라고?”

그러자 아줌마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젓는다.

“에구머니나.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잘 몰라. 그게 어떻게 성진 그룹에 딸로 둔갑했는지. 나야 그냥 아버지 찾으러 간 줄 알았지. 그 애 아버지.”

정말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떠든다. 말을 해서 뭐할까? 입만 아프다. 그냥 지나쳐 가려는데 기어이 또 소리를 치며 말을 건넨다.

“너 그러면 그 성진 그룹의 회장을 만난 거구나? 응?”

“네.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었어요. 어떻게 혜정이가 우리 엄마 딸로 둔갑해서 성진 그룹에 찾아갔는지. 하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아줌마가 진실을 말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죠.”

“아이, 그게 말이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변명거리가 없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줌마한테 뭐라고 말했나요? 전 그게 궁금할 뿐이에요. 혹시 나에게 다른 말씀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또 숨기는 게 있으면 말해요.”

“아유 그러니까…….”

뜸만 들이고 말도 없는 아줌마를 보다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알았어요. 대충은 알 거 같아요. 더 이상 거짓말 같은 얘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제가 아줌마 사기죄로 고소할 거 같아요.”

“뭐야? 고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옛정이 있지. 네 엄마가 그랬다. 내가 고집부려서 이랑이 아빠도 못 만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빠 꼭 만나서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라고……. 그런데 이랑아. 옛정이 있는데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되니?”

유들유들한 얼굴로 기어이 도와달라고 하는 아줌마를 보자 역겹다.

“옛정을 이런 식으로 갚으세요? 핏줄까지 속여 가며 돈 찾아가셨는데, 도대체 절 왜 찾아온 거예요?”

“아, 그게 내가 당장 있을 곳도 없고 돈도 없고, 혜정이 그거는 감옥에 가서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설마 저한테 돈 달라고 오신 거예요?”

“아니, 아무 데라도 뭐 있을 수 있게만 해주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있을 곳도 알아서 찾아보시고 없으면 무료급식소라도 찾아가세요. 당장 드실 게 없으면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아줌마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본다.

“야,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어떻게 이것만 줄 수 있냐? 응? 그래도 너 하고 나하고 같이 살았던 정이 있는데!”

“경찰 부르겠습니다.”

전화기를 꺼내자 아줌마가 허겁지겁 만원을 쥐고는 도망간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니 허탈하다. 사람은 어디까지 추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우리 엄마는 왜 저런 아줌마를 동생이라며 데리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장을 보러 발길을 옮기는데 앞에 차가 와서 선다. 바라보니 임 회장의 차다.

“타라.”

창문이 열리고 임 회장이 내다보며 말했다. 나는 선뜻 타지 못하고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기사가 내리더니 돌아와 뒷문을 열어준다.

“아가씨, 타십시오.”

가만히 차 안에 들어가 앉자 차가 출발했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난 거냐?”

아무 말 할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또 갑자기 생긴 아버지에게 그동안 단 한 번도 부려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어리광을 한꺼번에 부리고 아버지가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

아빠를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더 난다. 그래서 더 임 회장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선뜻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흰 머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는 검은 갈색 머리가 오후의 석양을 받아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갈색에 가까웠으나 우수에 젖어 있었다. 오뚝한 콧날과 약간은 둥근 느낌이 드는 얼굴은 전형적인 미남이라고 할 수 있다.

말 없는 아버지를 나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깝게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어쩐지 마음 아프다. 엄마를 사랑한 저 눈은 엄마를 잃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에 얼마나 많은 지난 추억이 들어있을지 마음이 아파져 왔다. 어쩌면 엄마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일만 하며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마를 기억하고 그리워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는 나를 의식했는지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청주에 간다.”

“청주요?”

청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어째서 가는지 말이 없어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말을 아끼는 걸까?

라울은 입만 열면 폭탄이지만 그래도 말을 잘하는데 아버지는 말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엄마는 왜 사랑했을까?

재미있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말이다.

“청주에 우리가 함께 살았던 그 집.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지금 아빠가 말하는 ‘우리’는 엄마를 말하는 건가?

“같이 산 적이 있었나요? 살림을 차렸었나요?”

제대로 불륜이었다. 부인 있는 사람이 아가씨하고 살림을 차리다니.

나는 더 절망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라는 걸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왜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셨어요? 서울의 부인이 그렇게 무서우셨어요? 그렇게 무서웠으면 만나질 말지. 청주까지 도망가서 살림을 차리고 부끄럽지 않으세요?”

“이랑아!”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가슴이 울컥 올라온다. 핏줄이라는 건 이런 걸까?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자 눈물이 흐른다.

모질게 말하는 이런 상황이 슬프다. 아버지가 비겁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혜원이, 아니 네 엄마 고향이 청주야. 몰랐니?”

“…….”

몰랐다. 엄마는 청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한국의 어디에 대해서도 말이다.

“몰랐나 보구나. 하긴 그러니까 내 이야기도 한마디 하지 않았겠지. 이랑이 네 외할머니가 편찮으셨어요. 물론 그때는 내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았던 때이기도 하지. 엄마가 나를 피해서 이리로 왔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엄마도 아빠를 피하기도 했구나. 당연히 그랬을 거 같다.

“내가 샅샅이 조사해서 알아냈다. 무작정 왔더니 얼굴이 반쪽이 돼서 나오더라. 어머니가 위독하셨지. 그리고 바로 돌아가셨다. 심근경색이었다. 멍하니 있는 네 엄마를 그냥 두고 올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 엄마는 날 밀어낼 힘이 없었지.”

“심근경색.”

갑자기 힘이 쪽 빠진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병명이었다. 그럼 할머니도 그렇게 돌아가신 건가?

그렇다면 엄마가 너무도 이해가 된다. 나도 엄마가 돌아가시고 세상을 맞설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의지하신 걸까?

우리 엄마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는 죽고 애인은 유부남이고. 그런데도 사랑하고 좋았다면. 그런데 남자까지 그렇게 사랑한다고 달라붙으면 과연 헤어질 수 있었을까?

갑자기 라울이 생각났다.

나도 라울을 밀어내지 못했다. 세비야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오고 나서 이사를 했던 그 밤에 찾아온 라울을 밀어내지 못하고 함께 밤을 보냈다.

알 수 없는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어째서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힘든 걸까?

어째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도 가닥가닥 나뉘어 흔들리는 걸까?

“네 엄마하고 삼 개월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행복했지. 혜원이가 음식을 하고 내가 빨래를 개고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참……. 좋았지.”

‘좋았지’ 라고 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엄마의 이름을 말할 때 보이는 아버지의 열정이 서글펐다.

엄마는 늘 나에게 웃어주었는데 그 웃음을 그리워하며 지금까지 보냈을 아버지가 마음 아프다.

“어떻게 그런 집이 지금까지 있는 거지요?”

벌써 이십삼 년이 지난 일이다. 내 나이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도 내가 말 안 되는 집착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집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저 이렇게 두고 한 번씩 내려와서 살펴보고 추억을 떠올리고 혹시라도 네 엄마가 이리로 찾아오지는 않을까 그렇게 기다리면서 지냈다.”

차가 막히지 않아 청주에는 바로 도착을 했다.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이제는 이십 년이 훨씬 넘은 오래된 아파트였으나 내부는 깨끗했다.

지금도 멋져 보이는 장식장에 찻잔 세트가 진열되어 있고 장식장 가운데는 젊은 엄마와 임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 액자가 보인다.

예쁜 엄마. 그리고 그 옆에 멋진 아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