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 딸이다.
“알았어요. 현찰로 낼게요. 다 얼마에요?”
친구들에게 한턱내겠다고 왔다가 카드가 정지되니 이거 무슨 망신이야. 구윤주가 인상을 쓰며 지갑을 열었다.
“32만 원입니다.”
“32만 원?”
현금이 얼마 없다.
“야, 니들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좀 내봐.”
“아니 얘는 사겠다고 큰소리 칠 때는 언제고.”
“아, 사려고 했는데 카드가 안 되잖아. 이거 완전히 스타일 구기네. 혜정이 이 계집애한테 물어봐야지.”
당장 혜정에게 전화를 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는다. 구윤주가 친구들을 보내고 계속 혜정에게 전화를 하자 겨우 혜정이 전화를 받는다.
“야, 이거 왜 카드가 안 돼? 응 내가…….”
“지금 여기 강남 경찰서야.”
“뭐? 경찰?”
갑자기 겁이 덜컥 난다.
“왜? 왜?”
“신원 조회 중인데, 좀 올래요?”
“애는, 내가 미쳤니? 무조건 임 회장 불러. 성진 그룹에 전화하라고 해. 알았어? 끊는다.”
구윤주는 겁이 나서 혜정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자기도 잡혀갈까 무섭다.
“성진에서 알아서 꺼내주겠지. 재벌 딸인데 뭐가 걱정이야?”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구윤주였다.
* * *
임 회장은 초조하게 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임 회장 앞에 임규빈이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규빈을 보며 임 회장이 물었다.
“규빈아.”
“네. 회장님.”
“그냥 큰아버지라고 불러라.”
“예, 큰아버지.”
“너 그때 스캔들 기사 났던 그 아가씨 말이다.”
“네. 디아나요.”
“그 아가씨 진짜 좋아하냐?”
잠시 머뭇거리던 규빈이 똑바로 대답했다.
“네. 큰아버지. 저 그 아가씨 좋아해요. 보고 있으면 왠지 저하고 비슷한 거 같고 친근감도 느끼고요. 반듯하고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큰아버지?”
“그래. 친근감을 느끼겠지.”
사촌인데 당연히 친근하게 느껴졌겠지. 그러니 저 반듯한 놈이 그리 마음이 끌렸을 거다. 내 잘못으로 애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규빈에게도 미안했다.
“네?”
갑자기 임 회장이 그런 말을 하자 임규빈이 오히려 반문했다. 친근하게 느낄 만도 하다고?
“내가 봐도 친근감 가게 생겼더라.”
“그렇지요? 누가 봐도 반듯하고 예쁜 아가씨예요. 큰아버지 마음에도 들었다고 하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그 아가씨 네 짝은 못될 거 같다.”
그 말에 규빈이 인상을 쓴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이 반대할 거라는 건 말이다.
“큰아버지. 스캔들 때문에 선입견 갖지 마세요. 디아나 참 좋은 여자예요. 전 제대로 그 아가씨하고 교제해보고 싶어요. 물론 교제한다고 다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에 그만큼 남은 아가씨는 처음이에요. 그 여자하고 평생 함께 있고 싶어요.”
규빈의 말을 들을수록 임 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규빈아, 때로는 사람들은 헛것을 보기도 한다.”
“디아나는 헛것이 아니에요. 당당하고 현실감 있는 여자예요.”
“그래. 디아나는 헛것이 아니지. 하지만 네가 품은 감정 말이다. 그게 그 아이한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큰아버지! 지금 말씀하시는 건…….”
그때 벨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라울 사장과 이랑의 얼굴이 보이자 임 회장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곧 다 말할 거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라.”
대문이 열리자 라울은 경계하는 마음으로 디아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대리석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 화강암을 잘 다듬어서 만들어놓은 계단은 한국적인 운치를 더하게 만들어져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서 짙은 향이 나오며 싱그러움을 더해주어서 올라가면서 긴장이 조금 풀린다.
“라울.”
“왜?”
“나 긴장돼요. 전혀 모르는 집에 와서요. 왜 나를 보자고 하셨는지. 혹시 그 스캔들 때문에 규빈 씨하고 만나지 말라고 그러는 걸까요?”
“그럼 더 잘됐지. 어차피 만나지 않을 건데. 그리고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라울이 내 손을 꼭 잡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한가운데로 커다란 통나무를 깊게 박아서 길을 만들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처리를 한 검은 나무들이 징검다리처럼 대문 쪽에서 현관까지 길게 쭉 놓여있다. 그래서 정원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통나무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듯한 운치를 전해주고 있었다.
옆으로 펼쳐진 잔디밭과 가장자리를 쭉 둘러싼 대추나무, 향나무, 라일락과 가는 대나무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서자 길게 대리석 회랑이 있는 집이 나타난다. 현관은 활짝 열려있었고 현관까지 회랑 바닥은 전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기품 있으면서도 중후한 멋이 있는 임 회장의 집에 들어서자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이랑이 라울의 손을 꼭 잡았다.
“라울.”
“넌 내 여자야. 내 여자가 이런데 와서 떠는 거 못 봐주겠어. 게다가 여긴 우리 경쟁사거든? MK그룹의 여자가 겨우 성진에 와서 떤다는 건 말이 안 돼. 배에 힘주고, 어깨 쫙 펴고!”
그의 말대로 배에 힘을 주고 어깨를 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는다.
“여기서 키스할 수도 없는데 그렇게 똥그랗게 쳐다보지 마.”
라울이 내 턱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 그의 웃음을 보자 조금 긴장이 풀린다.
“어서 오십시오.”
현관문으로 나오며 제일 먼저 맞아준 건 임규빈이었다.
“안녕하세요, 규빈 씨.”
“어? 디아나 왔어요?”
“어, 규은 언니.”
임규은과 그때 보았던 큰어머니도 모두 다 와있는 게 반갑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임 회장이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진 사장. 이쪽으로 앉으시오.”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어 존대하는 임 회장에게 라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내가 가서 앉자 임 회장은 찬찬히 나를 살펴본다. 살펴보는 그 눈길이 하도 강렬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정이랑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말하자 임 회장의 눈이 흔들리는 것 같다. 내 착각이겠지.
“정이랑이라고 했나?”
“네.”
“어머니가 정혜원 씨, 맞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너무 놀랐다. 임 회장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내 뒷조사를 해본 걸까?
“큰아버지, 어떻게 이랑 씨 어머니 이름을 아세요?”
옆에 있던 규빈이 더 놀라서 말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임 회장의 부인은 묵묵히 가만히 있다. 모든 것을 아는 듯 말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가 궁금해서 임 회장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라울은 가만히 있다. 평소의 라울이라면 임 회장을 보고 뒷조사를 해보셨나 본데 불쾌하다는 말 정도는 할 사람이었는데 아무 말이 없으니 그것도 이상하다.
내가 라울을 보자 라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임 회장이 말했다.
“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하고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정혜원 씨는.”
“네?”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놀라서 임 회장을 보았다. 임 회장은 모두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라울을 보며 다른 것을 물었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라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는 규빈이 나섰다.
“큰아버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이랑 씨를 좋아합니다.”
“규빈아, 잠깐만 기다려라.”
임규빈이 반발하는 눈길을 보냈으나 임 회장은 더 단호한 얼굴로 규빈을 누르고 눈을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정혜원 씨는 내가 평생에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자였다. 이랑이는 내 딸이야!”
“……!”
임 회장의 옆에서 묵묵히 앉아있던 임 회장의 부인이 작게 숨을 뱉었다. 아주 작은 숨소리였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거실 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그 순간에 이재은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남편에게 모든 이야기를 미리 전해들은 이재은이었다. 이랑을 오라고 하기 전에 임 회장은 이재은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혜정이는 내 딸이 아니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분명히 보내온 머리카락으로 유전자 검사를 했을 때 딸이라고 나왔잖아요.”
“그랬지.”
담담하다 못해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임 회장을 보며 이재은이 추리하듯이 되물었다.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이 세상에 당신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혜정이 아니면 대체 누구예요?”
“이 아이야!”
임 회장이 그녀의 앞으로 크게 확대한 이랑의 사진을 놓았다. 청초한 모습의 이랑이 살짝 미소 짓고 있다.
“이 애는…….”
이재은은 사진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스페인 여행을 했을 때 가이드를 했고 규빈이 마음에 들어 했던 디아나! 그 아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MK그룹의 사장과 규빈과 함께 스캔들이 터졌던 그 여자다. 너무 기가 막히지만, 사진을 찬찬히 보니 그 옛날 마주했던 정혜원이 떠오른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닮았네요. 축하해요. 진짜 딸을 찾았네요.”
이재은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하자 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숙연해 보인다.
“고마워. 그리고 부탁이 있어.”
“부탁이요? 평소 잘 안 쓰던 말을 하시네요. 뭐예요? 그 부탁.”
“우리 이랑이에게는 잘 대해주면 좋겠어.”
“…….”
“그 아이는 잘못이 없어. 내가 지은 죄가 커서 그 애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스페인에서 자랐지. 생활도 넉넉하지 못했을 테고……. 내가 마음이 많이 아파.”
“…….”
“그 애는 혜원이가 아니야. 그냥 내 딸이야. 그러니까…….”
“알겠어요. 당연한 거니 부탁이니 뭐니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마세요. 나도 그 정도로 몰상식한 여자 아니에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내가 데려다 키웠을 아이예요. 물론 그렇게 될까봐 정혜원 씨가 잠적했겠지만요.”
“…….”
“그 여자가 사라져서 나 원망 많이 했잖아요. 사실 우리가 이렇게라도 같은 집에서 지냈다는 게 신기할 정도지요. 나도 생각 있는 여자예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 역할까지 당신이 간섭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됐고.”
임 회장은 이재은의 말에 안심했다. 그녀는 할 일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하는 여자였다.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흔들림도 없다. 적어도 머릿속에서 자기 역할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선다면 말이다.
이렇게 말한다는 건 이랑이를 자녀로 생각하고 그에 맞게 대하겠다는 말이다. 어차피 감정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재은이었다.
“고마워.”
“제게 안 쓰던 말을 자주 쓰니 불편하네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럼 식구들 불러서 공개하세요. 서방님과 동서는 유럽에 가 있으니 규빈이 규은이 불러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세요.”
그게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 * *
“이랑이는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이 맞다. 이미 모든 조사를 마쳤다. 그러니 규빈이 규은이도 이제 친 사촌으로 알고 그렇게 대하면 된다.”
너무나 충격이 심해 모두가 말을 못하고 있었다. 임 회장은 모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혜원에게 딸이 있는 줄 몰랐었다. 알았다면 이랑이는 이 집에서 컸을 거다.”
임 회장의 눈길이 나를 향한다.
왜 나를 보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무겁고 둔탁한 것에 깔린 것 같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앞을 응시하자 임 회장이 내 눈을 보며 천천히 다시 말한다.
“딸이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로 그렇게 놓쳐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십 년 넘게 찾았다. 정혜원을 말이다. 그런데 딸 하나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더구나. 이랑아, 내가 네 아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임 회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옆에 있는 라울을 보았다. 라울이 나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
나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입이 풀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큰아버지, 무슨 말씀이에요? 이랑 씨가 큰아버지 딸이라니. 그럼 이랑 씨가 제 동생이란 말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지금 하시는 거예요? 대체 무슨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큰아버지.”
말과 함께 일어서려는 규빈의 팔을 옆에 있던 규은이 잡았다.
“오빠, 그만해. 지금 이랑 씨 놀란 거 안 보여?”
그러자 규빈의 눈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린 이랑의 얼굴로 향했다. 입술색도 거의 없다. 그런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이랑이 안쓰럽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옆에 있는 라울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자 말할 수 없는 질투심이 솟구친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지금은 모두가 충격이겠지만 이건 진실이야.”
그 옆에 앉아있는 부인은 여전히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아주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저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자신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멍한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부인의 눈에 나는 남편이 외도로 낳은 자식이겠네. 우리 엄마가 저 부인에게는 남편을 가로챈 여자였겠네.
막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어디로라도 도망가고 싶다.
“진 사장. 잠깐 이랑이하고 같이 얘기할 시간을 주겠나?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싫어요. 라울, 난.”
임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라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지가 않다. 그냥 못들은 거로 하고 싶다.
그냥 다 싫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라울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손을 잡은 채 임 회장에게 고개를 돌려 조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회장님. 지금 말씀하신 게 다 진실이라고 해도 내 여자가 힘든 건 싫습니다. 다음에 하시지요.”
그러자 임 회장이 나를 보며 말한다.
“제발, 이랑아. 나한테 시간을 좀 줘라. 부탁이다.”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임 회장은 라울을 보며 다시 말했다.
“내 말이 충격적이고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아무렴, 내가 자네 불러놓고 이런 얘기 쉽게 하겠나. 그리고 내 딸이라고 해도 혼외자녀인데 자네나 규빈이 규은이에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게 나라고 쉽겠나?”
라울이 임 회장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 회장의 말을 수긍을 한다는 걸까?
나는 라울이 어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딱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때는 싫다고 해도 번쩍 들어 안고 잘도 나가면서 어째서 지금은 가만히 있는 걸까?
내가 애원하는 눈으로 라울을 보았다. 내 마음은 간절히 라울이 나를 데리고 이 견디기 힘든 자리를 떠나주었으면 하는 거였다.
“라울.”
그러나 라울은 나에게 다른 말을 했다.
“이야기 들어봐. 진짜인지 아닌지. 임 회장님이 말하는 어머니 이야기도 들어보고. 그래야 너도 판단을 할 거 아니야. 디아나 너도 아버지 궁금해했잖아.”
궁금해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등장. 게다가 혼외자녀라니. 사생아라는 말이 아닌가?
라울 앞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혼외자녀라는 충격적인 말을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더구나 부인이 옆에 있는데 하다니!
그런데도 아버지라고 해서일까? 임 회장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단정하고 잘생긴 중후한 얼굴, 정감 가는 눈동자. 그러고 보면 내 눈과 닮았다. 입술 모양도 나와 비슷하다.
임 회장이 다시 내 눈을 본다. 그 눈에 담긴 간절함과 슬픔이 나를 적시고 있었다. 임 회장은 라울을 보며 다시 부탁했다.
“잠시면 되네. 이랑이와 서재에서 이야기할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게.”
“알겠습니다.”
라울이 대답을 하는 순간 규빈이 나섰다.
“큰아버지, 저도 들어야 되겠어요.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대체 왜 이랑 씨에게 이러는 건지 저도 알아야…….”
그러나 단호하게 규빈을 부르며 말린 건 임 회장의 부인이었다.
“규빈아!”
그저 이름을 부르고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젓는 부인의 기세에 규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규빈을 보며 알았다.
저 남자, 나에게 진심이었구나. 날……. 좋아했다. 그런데 우리가 사촌이라는 거다!
사촌. 나는 이 집안사람이라는 얘기다.
“이랑아, 날 따라 들어와라.”
일어서며 말하는 임 회장의 말에도 나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무거운 마음이 바위 같아서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때 손끝에 힘이 느껴진다. 라울이 잡고 있던 내 손을 꽉 쥐었다. 눈을 돌려 그를 보니 라울이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들어가 보라고. 괜찮다고.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 힘이 난다.
그래, 언제나 현실은 내가 받아들이기 벅차고 힘든 것들이었다. 늘 아랫배에 힘주고 당당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겨냈는데, 임 회장의 이야기, 못들을 것도 없다.
마음을 정하자 바로 일어섰다. 임 회장이 나를 보자 이제 담담하게 그 눈길을 받았다. 임 회장이 서재로 가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서재는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문이었다. 걸어가면서도 다시 한 번 라울을 보자 라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라울이 저렇게 있는데 무서울 거 없어. 별일 없을 거야.
서재는 붉은빛이 도는 마호가니 가구로 꾸며져 있었고 두 벽면이 모두 다 책장으로 가득했다. 한쪽 벽면은 전체가 통유리로 된 창이었다. 밖에 있는 굴곡진 소나무가 그대로 보이고 소나무 아래는 커다란 돌확이 놓여있다.
물이 찰랑거리는 돌확에는 연꽃잎이 커다랗게 떠있고 그 사이로 연한 분홍빛 연꽃이 피어있었다.
신선함과 청량감을 주는 돌확과 연꽃으로 시선을 둔 채 서 있자 가운데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임 회장이 말했다.
“연꽃이다. 네 엄마도 좋아하던 꽃이었지. 저걸 보면 네 엄마가 생각나.”
임 회장의 말끝에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난다.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남자의 감정. 애틋함과 열정이 녹아든 그 느낌.
엄마의 남자였다는 게 실감 난다. 엄마를 사랑했던 남자.
가만히 임 회장의 건너편 소파에 나도 앉았다. 임 회장이 옆에 있는 협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내 앞에 놓았다. 손바닥만 한 수첩 같은 것을 펼치니 거기에는 엄마의 젊은 시절의 사진이 있었다.
생머리를 앞가르마를 타서 단발로 늘어뜨린 엄마는 살짝 부는 바람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엄마의 젊을 시절 사진. 사진만 봐도 눈물이 흘렀다.
내가 아기 때 나를 안고 찍었던 사진들 속의 엄마 모습과 같은 모습이었다.
젊고 예쁜 엄마!
“엄마.”
목이 메고 코끝이 찡하더니 바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임 회장이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서 내게 건네주었다. 티슈를 받아드는데 그의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임 회장도 떨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임 회장의 손끝이 떨리는 걸 보자 오히려 내 마음은 조금 안심이 된다. 적어도 이 일이 내게만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거다.
“네 엄마는 아주 예쁘고 환하고 발랄한 봄바람 같은 여자였다. 처음 보고 그날 밤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한눈에 반한 거지. 나한테는 행운이었다. 물론 나는 네 엄마에게 악연이었겠지.”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서 임 회장의 말을 그냥 듣고 있었다. 임 회장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두 눈이 마주쳤을 때 가슴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 같았다. 슬픔이 공명하여 울리며 그 순간 눈물이 뚝 떨어진다.
임 회장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냥 눈길이 마주쳤는데 가슴이 울렸다. 아버지라는 걸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그 눈에 어린 슬픔을 보는 순간 내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팠다.
묻고 싶은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 대한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엄마는 무척이나……. 좋은 분이셨어요.”
젖은 목소리로 나는 내가 아는 엄마를 표현했다.
너무 좋은 엄마!
너무나 보고 싶은 엄마!
우리 엄마!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나는 울었다. 그 고운 엄마를 사랑했다는 한 남자의 앞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래. 네 엄마는 무척 좋은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네 엄마를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런데 내가 욕심을 냈지. 밤잠도 자지 못하고 혜원이만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죽을 것같이 그녀를 원했다.”
임 회장의 젖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게 보인다.
“내가 결혼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네 엄마를 안았어. 이혼하려고 했다. 죽도록 이혼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네 엄마는 너를 임신한 채 나를 떠났다. 아무리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더구나.”
“…….”
“그렇게 꼭꼭 숨어서 스페인에서 민박집을 할 거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니. 미안하다, 이랑아. 날 용서해다오. 네 엄마, 불행하게 하고 평생 너 하나 키우면서 죽게 한 나, 용서해라.
그래도 고맙다. 이렇게 나타나 줘서. 혜원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 가슴 가득한 혜원이에 대한 사랑을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하고도 함께 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
티슈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되도록 격한 감정을 갖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엄마의 슬픈 사랑의 열매가 나였구나.
그렇게 숨어서 엄마가 나를 키우며 임 회장을 사랑했구나.
아름답고 젊은 엄마에게 구애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내가 어릴 때 엄마를 도와주며 곁에 있으려고 했던 남자들을 엄마는 모두 밀어내고 혼자 살았다. 나만 키우면서!
엄마도 사랑했던 거다. 잊지 못한 거다.
“네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엉뚱한 애가 내 딸이라고 왔더라. 혜정이라고.”
“혜정이요?”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혜정이가 아빠 찾으러 간다고. 엄마 돌아가시자마자 떠났는데……. 그럼 그게…….”
“그래. 아마 네 엄마한테 말을 들었나 보지.”
“걘 지금 어떻게 됐어요? 어디 있어요? 그럼 저 대신 딸 행세하고 그러고 지냈나요?”
“그래. 괘씸하게도. 그래서 이미 구속되어 있다.”
“네? 혜정이가 감옥에?”
“그래.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내가 그렇게 했다. 하지만 네 이름까지 거론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로, 다른 잘못으로 감옥에 가 있다.”
그럼 아줌마가 알고 혜정이를 나 대신 이곳에 보낸 거다. 하아. 정말 대책 없는 아줌마다.
“이랑아, 내가 네 아빠다. 면목 없고 자격 없지만, 이제라도 너를 찾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네 이름이 왜 이랑인지 아니?”
“아니요.”
“네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우리가 한참 사랑을 할 때 내 성이 임 씨니까 만일 딸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이랑이라고 짓자고. 그러면 임이랑. 평생 임 이랑 같이 산다는 말 그대로 임이랑.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으냐고.”
“…….”
내 성이 임씨. 임이랑. 임과 함께. 엄마!
“네 이름 들었을 때, 이름만 듣고도 알았다. 내 딸이라는 거. 임이랑. 임 씨 성을 이제야 붙여주게 되겠구나. 지금까지는 네 어머니 성대로 정이랑으로 살았으니까. 이랑아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우리 엄마가 유부남을 사랑하고 나를 가졌구나. 나를 임신한 채 혼자 나를 낳고 스페인에서 긴 시간 민박집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늘 밝고 웃기만 했던 엄마가 너무 불쌍해져서 가슴이 멍하니 답답해져 온다.
그런데 아빠 말을 듣고 보니 아빠가 너무 밉다. 왜 엄마를 그렇게 아프게 했는지, 이미 결혼해놓고 왜 엄마를 욕심냈는지…….
엄마가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점점 더 가슴이 아파져 온다.
“우리 엄마는요, 평생 밝게 웃으면서 나를 키우셨어요. 민박집 운영하면서 여행객들하고 잘 지내시고, 손재주도 좋아서 음식도 잘 만드시고, 바느질도 잘하고 수도 잘 노셨어요.
민박집 곳곳에 엄마의 손때가 묻은 장식품이 있고 엄마가 애써 키운 화분이 있고 엄마가 만들던 냄새가 배어있어요. 정리하고 세를 줬지만 팔지는 못했어요. 그리울 때마다 가보고 싶어서 민박집이 너무 다르게 변해있으면 마음 아플까 봐요. 그런데 지금 얘기 듣고 보니까 나는 아버지가 용서가 안 돼요.”
“이랑아.”
“어떻게 용서해요. 저도 여잔데. 저도 커보니까 사랑하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프다는 거 아는데. 남자가 너무 높아서 욕심내지 못하겠는 마음 저도 너무 잘 아는데. 그런데 그런 엄마한테 결혼했다는 말도 안 하고 왜 사랑한다고 했어요?”
“…….”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도 혜원의 앞에서 그 말을 하지 못 했을 거 같다. 그렇게 말하고 혜원을 놓치기에는 그녀를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시간 속에서 되물었다. 다시 돌아가도 결혼 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안았을 거냐고?
백만 번을 더 자신에게 물어도 그렇다. 그녀를 놓칠 수는 없었을 거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러나 눈앞에서 내 딸이, 혜원의 딸이 울며 다그칠 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는 그 말밖에 말이다.
“미워요. 난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나하고 둘이 살았던 엄마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는데, 아버지에게 충격 받고, 사랑의 아픔을 혼자 감당하느라 나를 혼자 낳고 살았을 엄마는 너무 불쌍해요.”
“이랑아…….”
“나는 지금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회장님이 용서가 안 돼요. 내 아버지로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그리고 저도 너무 충격이에요.
비록 엄마가 혼자 나를 키웠지만 그래도 사생아일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당당하게 사랑했다가 헤어져서 그냥 나 낳고 키웠다고 생각했어요.
전 더 이상 회장님께 듣고 싶은 얘기 없어요. 이만 가볼게요.”
일어서는 내 뒤에서 임 회장이 한 번 더 소리쳤다.
“이랑아 그래도 나는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네 엄마를 똑 닮은 네가 이렇게 이 세상에 살아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줄 아니? 요즘은 네 엄마한테 매일 고마워해.
네 엄마한테 그 전에는 미안해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고마워해. 이렇게 혜원이를 똑 닮은 이랑이가 이 세상에 있어서 나는 너무 행복하다.
그러니 너무 오랜 시간 걸리지 말고 내게 돌아오거라. 내가 혜원이에게 못다 해준 사랑, 너한테 해줄 수 있도록.”
“지금도 상황은 똑같아요.”
나는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자 임 회장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똑같다니. 뭐가? 뭐가 똑같다는 말이냐?”
“모르세요?”
내 얼굴은 완전히 젖어있었고 나는 격한 음성으로 임 회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고요. 저 스페인에서 가이드할 때 회장님 사모님 뵀어요. 담담하고 지혜롭고 똑 부러지시는 분이더군요. 임 회장님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분 앞에 서면 괜히 죄인 된 거 같을 거예요.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저는 회장님의 사생아일 뿐이잖아요.”
“그건 이랑아…….”
임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보며 눈을 감았다. 괴로운 마음이 느껴졌지만 하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사모님 앞에서 회장님은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나도 떳떳하지 않아요. 내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거 아니었더라도 난 사모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죽은 엄마는 지금도 사모님 앞에서는 남편의 여자일 뿐이라고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어요.”
“제발, 이랑아…….”
* * *
거실에서는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재은 성진 갤러리 대표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고 있었고 임규은은 들썩거리는 임규빈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라울은…….
이건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 사촌 형님이야? 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감히 내 여자를 넘보고 내 앞에서 좋아한다고 말하지를 않나, 그것도 모자라 지금 나에게 당장 결투라도 신청할 듯이 바라보는 저놈이 내 형님?
에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그나저나 디아나가 많이 울 텐데…….
마음이 너무 슬프다. 우리 아버지가 이혼을 했다고 할 때도 이렇게 마음 아프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사실 나도 열 살 때 부모가 이혼해서 어머니 품을 떠나 혼자 한국으로 왔다. 그 때 어머니 때문에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런데 그때의 감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울었다는 기억만 날뿐. 하긴 그 때도 남들 앞에서는 울지 않았으니까.
나야 태어날 때부터 남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다.
감정을 함부로 보여서 약점을 잡혀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들에게 주인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 설령 나이가 어리더라도 말이다.
나야 그렇게 지내왔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디아나는 아니다. 그녀는 천진하고 밝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내 사랑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감정을 다 합해도 디아나를 향한 내 풍성한 사랑의 감정은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거다. 지금 나의 모든 감정은 그녀 때문에 생기고 소멸한다.
내 마음과 감정을 모두 가져가 버린 디아나!
그런데 지금 디아나가 저 서재에서 자기 아빠를 처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며 또 얼마나 울까를 생각하니 그게 더 가슴이 아프다.
많이 울면 어쩌나?
왜 이렇게 인생은 꼬이는 게 많은지. 아! 그런데 할아버지!
갑자기 생각이 할아버지에게 미치자 주먹이 꽉 쥐어진다. 성진 그룹의 딸인 줄 아신다면…….
빨리 날짜 잡으라고 하셨으니 어서 프러포즈하고 날짜 잡아야겠네. 만일 딴소리를 하신다고 해도 날 막을 수는 없어.
어차피 힘의 논리니까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말이야. 누구라도 디아나를 상처주거나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내가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임 회장이 평소 온화한 사람이라고 평이 나 있기는 하지만 또 모르지. 혹시 딸이라고 막말을 하거나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 들어가 봐야지.
내가 일어나자 이재은 대표가 따라 일어난다.
“혹시 서재로 가려는 거면 잠시만 더 기다리시지요. 진시환 사장님. 처음 만나는 거니 두 사람 다 이야기 풀기가 힘들 수도 있어요.”
“디아나가 너무 힘들까 봐 그럽니다. 한 번에 너무 진을 빼면 병날 수도 있으니 제가 한 번 들어가 봐야 합니다.”
내가 말하자 임규빈이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본다.
이런, 눈 안 깔아?
당장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지금 임규빈은 사촌 동생을 얻은 것 보다는 좋아하는 여자를 잃어버린 게 더 클 거 같으니 참는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디아나 데리고 가겠습니다. 디아나가 힘든 건 제가 참을 수가 없어서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재은 대표가 말하며 내 앞으로 과일을 밀어준다. 참 그러고 보니 이재은 대표도 묘한 여자다. 남편의 딸을 받아들이는 여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담담하니 말이다.
하긴 이런 일을 처리하고 받아들인 것도 사업처럼 그렇게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 * *
임 회장도 나도 더 이상 말이 없이 침묵 속에 앉아있었다. 바로 아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나 그런 나를 이해하는 임 회장이나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때도 지금도 사모님 앞에서 회장님은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나도 떳떳하지 않아요.”
라고 한 내 말이 임 회장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신경이 너덜너덜한 거 같다. 서재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라울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라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라울이 단단한 팔로 나를 안았다.
“울었어? 디아나?”
나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왜 흔들었는지 누가 봐도 운 게 뻔한데.
“가요.”
내가 말하자 바로 라울이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팔이 내 어깨에서 나를 잡고 있었다.
“이랑 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거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임규빈이 일어서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