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날아라 스캔들!
“바보!”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으며 살갗에 징징 울리도록 입술을 비비며 말했다. 뜨거운 입김과 혀가 목덜미를 핥을 때마다 몸이 전율한다.
“못난이, 바보, 둔탱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열렬히 눈으로, 몸으로 말하고 고백했는데 그렇게 못 알아듣나?”
“치,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알아들어요? 맨 날 나보러 온 거 아니라며. 내가 뭐 할 일이 없어서 너 보러 다니겠냐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한테 내가 뭐 그렇게 자신감 있다고 ‘라울은 그래도 날 좋아해’, 이렇게 생각을 하겠냐고. 난 당신한테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여자잖아요.”
그러자 그의 눈이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인상을 쓴다.
“지금 장난해? 네가 자신감 없으면 누가 자신감 있어? 넌 네가 대단한 여자인지 그렇게 몰라? 너 대단한 여자 맞아. 너 대단하니까 내가 너한테 이렇게 목매다는 거고, 너 대단하니까 임규빈이 그렇게 아파트까지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도 돼. 아니 반드시 가져. 자신감.”
자신감이라는 게 반드시 가지란다고 갖게 되는 그런 건가? 참 라울다운 말이다.
“내가 이렇게 가슴 떨리게 얻은 네가 자신감 없으면 난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넌 대단한 여자고. 대단한 여자니까 그에 걸맞게 자신감 갖고 살아.”
이 남자 한번 말하기 시작하니까 정말 달콤한 말을 잘도 뱉는다. 나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한테만 자신감 가질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라울은 나를 번쩍 들어 안고 소파로 가서 나를 자기 무릎 위에 놓고 눈길을 맞췄다.
“그럼 우리 지금 사귀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까지 고백하고 사랑하는데 당연히 사귀는 거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딴 놈한테 눈길 주면 안 돼. 알았지?”
끄덕끄덕.
“당신도요.”
“당연하지. 아니 이제 그러고 싶어도 못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줄 수가 없다고.”
“왜요?”
“너밖에 안 보이는 병에 걸렸거든. 일명 디아나만 보이는 눈병!”
이 남자 점점 더 귀여워진다. 그런 눈병이라니!
사실 나도 그런 병을 앓기 시작한지 한참 되었다. 라울만 보이는 눈병!
그가 내 눈에 키스했다. 눈두덩이에 닿는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의 촉감에 속눈썹이 떨렸다. 다음에 코에 그리고 양 볼과 입술. 그리고 그가 나를 반짝 들어 안고는 자신의 부푼 페니스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미 한참 젖어있는 내 아래로 그의 단단한 것이 느껴지더니 뻐근하게 아래를 벌리며 침입한다. 나도 모르게 그의 것을 빨아들이듯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허벅지 위에 내려앉았다.
아래가 모두 꽉 들어차서 아랫배까지 가득 차버린 것 같은 느낌! 그의 것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물론 그는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하아……. 사랑해요. 라울.”
“사랑해 디아나!”
한번 말하기 시작하니 이렇게 좋은걸! 말이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완벽하게 결합한 아래가 미끌미끌 움직이는데 서로의 하체를 품고 비비며 키스를 한다.
입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혀가 마치 그의 성기처럼 느껴진다. 아래도 입술도 모두가 그의 성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외설적인 느낌. 그러면서도 미칠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건 그의 사랑 고백이 주는 격정 때문일 거다.
그의 눈길이 뜨겁다. 입술을 겹치고 아래를 움직이며 그가 뜨겁게 내 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불덩이 같은 그를 품고 물결치듯이 그를 휘감았다.
내 안의 속살이 질척하게 그의 페니스를 휘감으면서 달라붙어 조이고 문다. 그의 것을 아주 깨물고 조이고 싶다. 갈증! 맞다. 이건 갈증이었다. 그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자지러지게 좋으면서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절정에 대한 갈망.
그가 세차게 몸을 쳐올리자 나는 빠르게 흥분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뒤로 젖히며 젖가슴을 세게 물었다. 질근 거리며 젖꼭지를 물고 빨자 아래가 더 조여든다.
“아주 깨무는군. 하아……. 좋아. 디아나. 잘하고 있어.”
라울이 점점 거칠게 몸을 쳐대기 시작했다. 아래를 찌르는 힘의 세기에 저절로 몸이 뒤로 밀린다. 그가 단단히 허리를 잡고 골반을 누르며 세게 밀어닥치자 순식간에 오르가슴 속으로 빠져든다.
“아아아…….”
“큭!”
짧고도 강렬한 절정을 둘이 동시에 느끼며 난 그의 품에 안겨서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품에 안겨 있는 내가 아이처럼 느껴지는데 모순되게도 나는 아직도 그의 것을 내 안에 품고 있었다. 부피를 줄이지 않은 페니스가 아직도 내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울…….”
“음…….”
그가 낮게 대답하며 내 정수리에 키스했다. 그가 이렇게 정수리에 키스할 때면 무척이나 자상하게 느껴진다. 둘 다 막 사랑을 나누고 나서 벌거벗고 있는데도 겹쳐진 몸이 따뜻할 뿐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가 나의 등을 큰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나른하게 눈이 감긴다.
“라울, 우리 사진 찍힌 거 괜찮을까?”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나만 믿어!”
우리는 바로 침대로 자리를 옮겨 그 밤을 활활 불태웠다. 끝도 없는 사랑이 그에게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의 사랑을 온 힘을 다해 받아들였다. 그건 마음과 몸이 함께 녹아드는 완벽한 사랑의 행위였다.
황홀한 전율에 우리를 함께 날아오르고 동시에 몸을 떨었다.
그런 그의 품에서 나는 생각했다.
맞아. 당신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기는…….
다음 날 아침에 인터넷에 기사가 났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MK 사장과 성진 그룹 실장 재벌 3세들의 치정극. 로얄스캔들!]
모자를 뒤집어쓴 라울과 임규빈이 멱살을 잡고 있는 사진과 그 사이에 있는 나는 반이 잘려서 인터넷에 올라왔다. 맙소사.
한낮으로 가는 시각. 혜정이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살그머니 집으로 들어가려고 길을 걷고 있다. 밤새 이진산과 패거리들과 광란의 밤을 보내고 이제야 집으로 향하는 있는데 전화가 온다.
“뭐야 엄마.”
“뭐는 이 기지배야. 너 밤새 어디 있다 온 거야? 너 옛날 버릇 또 나와? 너 또 마리화나나 그런 거 피우는 거 아니지? 서울에서는 그런 거 하면 잡혀가 이것아. 여기가 스페인인줄 알아? 얼마 안 있으면 결혼도 한 대매. 너 그러다 재벌 집이고 뭐고 그냥 막 쫓아내는 거 아니냐? 거짓말한 거 들통나서 쫓겨나기 전에, 개망나니 같다고 쫓아내게 생겼어.”
펄펄 뛰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혜정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 엄마 좀 가만있으라니까.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그 결혼할 남자하고 같이 있다가 온 거야. 그러니까 괜찮다고.”
“뭐야? 너 벌써 휘어잡은 거야? 이제 겨우 만난 지 몇 번 됐다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구윤주는 혜정이 이진산과 같이 있다는 말에 바로 목소리가 바뀐다. 그런 반응이 신이 나는지 혜정도 의기양양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능력 있는 거지. 만난 지 몇 번 안 됐는데 벌써 나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사실 사족을 못 쓴다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자신도 섹스파티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결혼할 남자하고 이렇게 질펀하게 그룹섹스를 하고 논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후한이 좀 두렵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내가 한주 산업의 실질적인 안주인이 되면 엄마 진짜 호강시켜준다.”
“정말이냐?”
“그러니까 아빠나 내 주변에서 얼씬 못하게 해.”
“내가 잘 해결했어. 그러니까 연락도 없지.”
그런데 집 앞쪽으로 가까이 가자 누군가 기웃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조찬식이다.
“헉. 엄마! 지금 집 앞에 누가 왔는지 알아? 조찬식이 왔다고.”
“뭐야? 아니 그 인간이. 내가 지금 갈게 알았어? 당장 가서 결판을 내야지.”
“엄마 맘대로 해. 난 그냥 지나칠 거야.”
그러나 혜정이 살짝 몸을 피하려고 하는 걸 어느 틈에 보고 조찬식이 다가왔다.
“혜정이 너 이년, 좀 맞을래? 어디서 아버지를 피해 가?”
들통이 난 혜정이 있는 대로 조찬식을 째려본다.
“뭐에요? 아빠 왜 그래? 저번에 돈 다 줬잖아. 아니, 아저씨. 이제부터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 거야. 난 지금 성진 그룹 임 회장 딸이거든. 아저씨. 딸 잘사는 거 생각하고 그냥 앞길 빌어주면 안 돼?”
그러자 조찬식이 험한 인상으로 다가와서는 확 말을 내뱉는다.
“나야 빌어주고 싶지. 그런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지 않냐. 응? 어떡하겠어. 먹고 살려면 돈이 있어야지. 그리고 돈이 있어야 딸의 앞날도 빌어주고 그러는 거지.”
조찬식은 그러는 혜정의 손에 계좌번호를 적은 종이를 쥐어 주며 말했다.
“야, 지금은 당장 쓸 것도 없거든. 그 지갑 좀 열어봐라.”
혜정이 질렸다는 얼굴로 가방을 바짝 메고 지나가려니까 조찬식이 머리를 휘어잡고는 질질 끌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골목 안에는 다니는 사람도 없다.
“이년이 돈 있는 집구석에 들어가더니 아빠를 개떡으로 아네!”
“아악. 진짜. 안 놔요?”
“돈 털어 내놔! 아니면 같이 경찰서 가자. 다 큰 딸년 한 대 때렸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어? 하지만 너는 사기죄로 걸려들걸?”
“알았어. 알았다고 다 주면 될 거 아니야?”
현찰 있는 거 다 털어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진짜 다시 오면 이제 정말 나도 가만 안 있어. 알았어? 아빠랑 같이 감옥 가면 될 거 아니야.”
“이게 말이면 단줄 아나? 넌 평생 나한테 감사해야 해! 네 팔자 전부 내가 준 거야. 돈 있으면 있는 대로 꼬박꼬박 내 생각해서 용돈 부쳐라.”
그때 구윤주의 목소리가 울린다.
“부치긴 뭘 부쳐! 이 인간이 거기 안 서!”
“아니 저 여편네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혜정이 너. 내가 알았으니까 용돈이나 부쳐. 많이도 안 바래.”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구윤주를 피해 도망간다. 구윤주가 조찬식을 따라 뛰자 혜정은 막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구윤주는 조찬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욕을 해대며 주저앉고 그걸 본 조찬식이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며 웃는다.
조찬식이 손에 쥔 돈을 보고 좋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웬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조찬식 씨?”
“네, 그런데 누구쇼?”
“잠깐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덩치 큰 남자들이 그의 양팔을 꼈다. 조찬식이 누군가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조찬식을 놓치고 구윤주는 혜정에게 전화를 했다.
“조찬식 그 인간이 뭐래? 또 돈 뜯겼어?”
“그래. 엄마, 조금 아까 아파트 앞에 와서 기다려서 내 지갑에 있는 돈 다 뜯어갔다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진짜 이 인간 가만두지 않는다. 조만간 만나서 담판 지을 테니까 넌 그 한주 산업인가 그 재벌 3세나 잘 후려봐. 결혼 날짜도 빨리 잡고 말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전화를 끊고 방에 들어가 드러누웠다. 어떻게 밤을 새웠는지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남자 저 남자 여섯 명의 남녀가 뒤엉켰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거 그 집에서 알면 안 되는데. 지도 같이 놀아놓고 설마…….
그때 이진산은 이진산대로 자기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나도 아무리 노는 거 좋아하지만, 놀아도 너무 걸레 같은 걸 부인으로 삼는 거 아니야? 사업도 좋지만. 참, 내가 본 여자 중에 제일 걸레네. 뭐, 어차피 뭐 정략결혼인데 아무려면 어때.’
이진산이 벌떡 일어나 앉고는 양말을 벗어 툭 하고 저쪽으로 집어 던졌다.
* * *
연일 인터넷에 ‘로얄 스캔들 2탄’이라는 이름으로 규빈과 나 그리고 라울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졸지에 나는 둘도 없는 악녀가 되고 라울은 순애보를 간직한 사장님이 됐다.
공개적으로 짝사랑이라고 까지 고백하고 구애를 하는 라울을 버리고 그보다 더 젊은 성진 그룹의 후계자를 꼬드겨낸 나는 천하의 마녀가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얼굴 볼 수도 없는데 사무실이라고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고 라울의 얼굴만 보고 있자니 이럴 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사장실 안에 숨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울었더니 눈이 퉁퉁 부어서 눈이 안 떠진다.
“뭘 그렇게 눈이 붓고 그래. 다 지나가.”
라울이 내 부은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부은 눈으로 쫙 째려보며 말했다.
“그러게 왜 와요. 둘 다. 둘 다 보기 싫어.”
“그런 소리 말고 그냥 네 일에 몰두해. 응? 일은 잘하고 있는 거야? 월급 받으려면 잘해야지.”
“잘하고 있잖아요. 일주일에 세 번씩 테이블셋팅 완벽하게 해놓고, 꽃도 꽂아놓고. 향기도 좋은 걸로 향초도 갈아가면서 나는 내 일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요.”
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소회의실이 얼마나 분위기가 좋아졌냐 하면 중역들이 툭하면 소회의실에서 차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가곤 하니까 덕분에 소회의실은 빈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하, 이렇게 멋진 분위기를 다 그, 그분이 하셨다는 말이죠? 허허, 어려도 솜씨가 아주 좋은가 봅니다. 우리한테는 얼굴도 한번 안 보여주느라고 사장실은 요즘 폐쇄됐다죠? 전부 다 이 소회의실에서만 하니까 사장실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그분뿐인 거 같습니다.”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들이 건물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내 귀에도 들어오는 소리였으나 어느 누구도 대놓고 라울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라울을 그렇게 째려보며 컴퓨터를 켰을 때 스피커폰으로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회장님께서 오고 계신답니다.”
“뭐? 소회의실로 모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라울의 할아버지가 오고 있다는 건데 갑자기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다.
“저기 회장님이면 할아버님 아니세요? 저 어디 가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디아나.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어딜 나가겠다고. 그냥 내 옆에만 꼼짝 않고 있어야 되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님이 이쪽으로 들어오시기라도 한다면.”
“오시면 인사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이리 안 오셔. 내가 아까 소회의실로 모시라는 말 못 들었어?”
“들었다.”
말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라울의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진 회장님. 나는 벌떡 일어나 그대로 서버렸다. 하필 이렇게 얼굴이 부었을 때 오셨는지.
잘 붓는 체질도 아닌데 늦게까지 인터넷을 너무 많이 보고 속상해서 울다 잤더니 진짜 부었다. 이런 못난 얼굴로 첫 대면을 해야 하다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라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자 회장님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가만히 본다.
“어디 고개 들어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더니 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예쁘긴 예쁘네. 이리 와 좀 앉아봐라.”
하며 소파로 가자 라울이 나서며 말했다.
“할아버지, 소회의실로 모시라고 했는데 왜 일로 들어오세요?”
“인마. 내가 소회의실로 가든 여기로 오든 내 마음이야. 이렇게 이쁜 아가씨를 꽁꽁 감춰두고 사장실이 폐쇄됐다는 연락받고 왔다. 나한테 인사도 시키지 않고 언론에 먼저 올라갔냐?”
“아, 폐쇄한 게 아니라 앞으로 모든 결제는 소회의실에서 하려는 거예요.”
“그러게. 소회의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중역들이 그 자리에서 뜨지를 않는다며. 어디, 아가, 너.”
진 회장이 나를 똑바로 보며 호칭했다. 아가라니!
“네.”
내가 인사하자 진 회장이 말했다.
“어디 안내해봐. 소회의실로.”
나는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안고 종종걸음으로 소회의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며 진 회장이 코를 킁킁거린다.
“하하, 거 참 향기 좋네. 이게 다 무슨 향기냐.”
“이건 허브 테라피입니다.”
“뭔 테라피? 하여튼 기분 좋은 냄새네. 테이블도 좋고. 나도 여기 앉아서 차 한 잔 마시자.”
“네.”
비서실에 연락해서 바로 차가 나오고 소회의실과 사장실로 연결된 문을 벌컥 열어놓고 소회의실에서 진 회장과 라울이 앉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서 있다 슬그머니 사장실로 가려는데 진 회장이 불렀다.
“거기, 아가. 이름이 뭐라고?”
“정이랑입니다.”
“그래, 정이랑. 이리 와서 좀 앉아봐.”
“네.”
가만가만 가서 그 앞에 앉자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한다.
“흠, 이사벨을 닮았네.”
“할아버지.”
라울이 진 회장을 불렀다. 그 부르는 소리에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왜? 내가 이 아가씨 어떻게 할까 봐 그래? 아주 죽은 네 엄마를 빼다 닮은 여자를 데려다 사장실에 앉혀놓았구먼.”
내가 그렇게 이사벨을 많이 닮았을까. 스페인에서도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라울의 할아버지 진 회장은 84세의 나이에도 큰 키에 꼿꼿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 할아버지들과 달라 보였다. 눈빛이 예리한 것은 라울과도 닮았다. 단지 라울이 훨씬 서구적으로 생겼다고 할까?
라울의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니 당연한 거였다. 진 회장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나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정하거나 푸근한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미소에 나도 조금 경계심을 풀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어머님께서 저하고 비슷하신가요?”
“그래. 많이 닮았네. 목도 길고 가는 게 얼굴도 갸름하고 생머리에. 그런데 네가 더 예뻐. 걔는 서양 애잖아.”
며느리였던 이사벨에 대한 진 회장의 기억에서 가장 큰 것이 서양 애라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나는 가만히 눈을 라울에게 돌렸다. 라울은 별 변화가 없이 할아버지를 보고 있다가 나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 언제 결혼할 거야?”
“네?”
갑작스러운 진 회장의 말에 나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해서 가만있었다. 그러자 라울이 나선다.
“거참, 할아버지 좀 그만 하세요. 언제 결혼하든 그런 건 다 제가 알아서. 언제부터 할아버지가 제 여자들까지 신경 썼어요?”
“시끄러워. 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못난 놈이라며.”
진 회장이 담담하게 찻잔을 들며 툭하고 말을 던진다.
“누가 그럽니까?”
“세상 사람이 다 그래. 네놈이 저 아가씨 짝사랑하다가 지금 더 젊은 놈한테 뺏기게 생겼다며. 가문의 명예가 있지 내가 성진 그룹에 며느릿감을 뺏길 수는 없지 않으냐.”
“할아버지.”
라울은 완전 죽상이 됐다.
“도대체 누가 그럽니까? 뺏기다뇨. 이 라울이 내 여자나 뺏길 그런 놈으로 보입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있는 대로 공들여서 비싼 돈 들여 가르쳐놨더니 여자 하나 간수를 못 하고 공개적으로 짝사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다가 이제는 뺏기게 생겼다니까 내가 안 나서게 생겼냐고. 그것도 하필 성진 그룹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스캔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반응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하필 성진? 성진에 뭐 안 좋은 감정 있으신가?
“그런 거 아닙니다. 디아나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라울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진회장이 라울을 나와 라울을 번갈아 보며 다시 말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성진과의 경쟁은 뭐든 이겨야 해. 알아? 그러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저, 회장님.”
나는 조심스럽게 진 회장을 불렀다.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진 회장이 무조건 성진과의 경쟁 때문에 결혼을 하라고 하는 것 같아 보여서다. 적어도 속였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부르자 진 회장은 고개를 돌리며 빙긋 미소 짓고 말했다.
“그래. 아가. 말해 봐.”
침이 말랐다. 손끝이 떨려 주먹을 쥐었는데도 떨리는 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저는요, 어머니 돌아가신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부모도 없고 그저 간신히 대학만 졸업한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 다 알고 있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
다 알면서 결혼하라는 걸까?
“그래 내가 다 알아봤지. 스페인에서 자라고 민박집 하면서 컸다고. 공부도 잘 했고 재주도 있는 그런 아가씬 거 나도 알아.”
“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알다시피 돈은 우리 집에 많으니까 됐다. 아마 한국에서 제일 많을걸? 명예도 차고 넘치고. 원하는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인물 그만하면 됐고 심성도 어머니하고 민박집 하면서 애 많이 써서 착할 테고 내 눈에 봐도 그 정도면 마음에 드네.
어찌 됐든 일단 이건 자존심 문제야. 성진하고 MK 간에 말이지.”
“할아버지. 이거 제 결혼이지 성진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라울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자 진 회장이 인상을 쓴다.
“너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내가 죽은 임 회장과 앙숙이었던 거 알지?
물론 임 회장 죽고 그 아들 임정환은 회장이 돼서도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지만, 임 씨 집안에 며느리 뺏기는 짓은 못 한다. 더구나 이렇게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기사까지 났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임규빈하고 결혼할까 봐 무조건 라울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울이 막무가내인 건 할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정말 그래서 결혼해야 한다니.
나는 얼떨떨했으나 진 회장은 나를 보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불거진 이상에 시환이 저놈이 너 뺏기는 꼴은 내가 못 보겠다. 그러니까 둘 다 잔말 말고 빨리 날짜 잡아.”
“저기……. 회장님. 저는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됐고.”
도무지 할 말이라곤 이거밖에 없는 것인지……. 머릿속이 하얘서 나온다는 말이 지금 이 MK그룹의 회장 앞에서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느니, 내 일이 중요하니 이런 말을 하려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
그런 말을 하려다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진 회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씽긋 웃으며 말한다.
“일하는 게 좋아? 앞으로 원 없이 하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일거리가 없겠어? 이 MK 모든 계열사 중에 너 일 하나 할 게 없겠냐. 봐라.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 빨리 날 잡고 결혼부터 해.”
결혼부터 하라는 말에 라울은 얼굴이 벙글벙글하다.
“그렇게 좋으냐 이놈아?”
“아 할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데도 뭐 불만이십니까?”
“그래. 불만이다. 자식아 그래도 사람이 체면이 있지 언론에다 대고 짝사랑하는 여자라고 떠들고 그랬으면 냉큼 데려와야 할 거 아니냐. 어쩌자고 성진 그룹에 그 너보다도 어린놈한테, 에이 쯧쯧쯧.”
그 말만 들으면 화가 난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 스캔들 때문에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논스톱으로 결혼까지 가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스캔들이 이렇게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좋은 방법인줄 알았으면 미리 쓸 걸 그랬다.
게다가 할아버지 앞에서는 저 디아나도 아무 말 못 하잖아? 아, 그놈에 일하겠다는 거, 자기 혼자 성공하겠다는 그 말로 다가가는 나를 얼마나 밀어냈는지.
할아버지가 단단히 쐐기를 박으신다. 물론 할아버지 스타일이다.
“그럼 일단 날 잡는 걸로 알면 되겠냐?”
“아니요, 회장님.”
아, 디아나! 이 여자 진짜 간도 크다. 기어이 할아버지 앞에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날 잡는 건, 저하고 라울하고의 문제에요. 저 제대로 프러포즈도 아직 못 받았어요. 할아버지.”
뭐야?
디아나의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대로 프러포즈를 한 적이 정말 없구나. 도대체 나 뭐했지?
한번 한 적이 있긴 한데 그거는 새벽 3시에 슬리퍼에 가운 입고했다고 완전 퇴짜 맞고 그 뒤로는 내가 기다려준다고 그러고 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맹렬한 눈길이 느껴진다.
“너는 뭐 했어 인마? 언론에 대고 짝사랑한다고 떠들어대면서 아직 제대로 프러포즈도 안 했어? 맞아?”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할아버지에게 허점을 잡히게 생겼다. 노인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잡으며 그냥 넘어가지 않는데 말이다.
“이제 하려고…….”
아, 이 라울답지 못한 대답. 평생에 이런 대답을 하게 될 줄이야.
“너도 그런 말 쓰냐? 다른 것도 아니고 제 여자 문제에서. 사업에는 내가 말도 하기 전에 트집 잡을 수 없게 다 해놓고는 어쩌자고 정작 네 일에 이렇게 된 거야?”
할아버지 앞에서도 절대 틈을 보이지 않고 살아왔던 이 라울의 치명적인 위기다. 이렇게 허점을 보이게 됐다니…….
이거 다 디아나 때문이야. 조금만 덜 홀렸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는데. 저 여자 앞에 있으면 어떻게 된 게 계획이니 뭐니 이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으니 말이야. 그런데 이 여자 대차게 한마디를 더한다.
“회장님 말씀대로 결혼하겠습니다. 라울이 제 마음에 들면요.”
디아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본다.
“뭐야? 참 당돌하구나. 재미있어. 그래, 뭐가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냐?”
“제대로 프러포즈 받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둘이 알아서 하게 시간을 조금 주세요.”
“시간 줄 거 없어. 얼른얼른 라울 너는 프러포즈하고 아가 너는 얼른얼른 수락하고 빨리빨리 기자들 불러서 결혼하게 됐다고 터트려. 그래야지 내 속이 편하겠어.
나는 성진한테 지고는 못살아. 성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죽은 진 회장이 죽어서도 신나 할 거 아니야. 날 놀리고. 며느릿감도 빼앗겼다고 말이지. 나는 무조건 성진은 이겨야겠어.”
할아버지의 말에 라울은 싱글벙글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떠밀리는 게 어쩐지 불편하다. 옆에서 라울이 진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바로…….”
“됐어. 네 말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문제는 얘하고 얘기하는 게 훨씬 똑 부러지겠구먼. 그래 너. 아가, 예쁘네. 라울하고 한번 우리 집으로 와. 제대로 밥 먹으면서 보게.”
“네.”
그렇게 해서 진 회장은 한참을 사장실과 소회의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놀다가 갔다.
할아버지 앞에 있는 라울은 어찌나 그렇게 당당하던지 평소보다 힘이 두 배로 들어가 있는 거 같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무슨 힘겨루기 하는 장수를 대하는 거 같다.
진 회장은 여유 있게 라울의 허세를 받아넘기면서도 잠깐이라도 틈이 있으면 재빠르게 공격한다. 라울은 절대 할아버지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있는 대로 몸에 힘을 주며 이야기한다.
저러니까 더 어린애 같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데 이렇게 느껴지는 게 이상하지만 말이다.
그럼 나는 라울이 내게 청혼하기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퇴근 시간 무렵에 라울에게 전화가 왔다.
“아, 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임 회장님.”
임 회장?
라울이 저렇게 깍듯하게 존대하며 임 회장이라고 할 사람은 성진 그룹의 임정환 회장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런데 왜 전화를 했을까? 혹시 스캔들 때문일까?
하여간 그놈의 스캔들 때문에 할아버지도 오시더니 이제 성진의 임 회장까지 전화를 해?
나는 어디로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가슴이 바짝 오그라들어서 라울의 전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설마 나를 거론하지는 않겠지?
“디아나를 보고 싶다고요?”
맙소사! 기어이 내 이름이 나왔다. 진짜 나 대한민국을 떠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피가 모자라는 것처럼 머리가 하얘지는 걸 느끼고 라울을 보자 라울이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네, 그건 좀 곤란한데요.”
역시 라울이다. 설마 나를 냉큼 보내지는 않겠지. 정말 이런 스캔들 때문에 성진 그룹의 회장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다. 이러다가 대통령까지 만나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회장님, 무슨 이야기인지 저에게 먼저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여잡니다.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특히 이런 시기에 디아나를 거기에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라울이 단호하게 거절을 해도 임 회장이 뭐라고 자꾸 말을 하는지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라울이 임 회장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대체 뭐라고 말하는 걸까?
당장 나를 데려오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는 걸까?
라울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아예 입을 다문다. 라울이 놀랄 정도로 크게 협박을 한 걸까?
“정말……. 이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네, 같이 와도 좋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내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라울?”
사장 테이블에 마주 보이는 책상에서 그의 통화내용까지 듣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일이라는 걸 해야 된다는 것도 우습지만 이런 자세로 일해도 괜찮은 게 더 우습다.
이제 종일 그를 보고 있는 게 더 익숙하다는 거다. 라울은 일하다 나를 한 번씩 빤히 쳐다봤고 그런 라울에게 눈을 맞추면서 나는 웃어준다.
참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래서 좋은 점이 또 있다. 일하는 라울의 표정이 변하는 걸 섬세하게 다 알아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받은 전화는 어쩐지 뭐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에 물어본 거다.
평소의 그가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주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랄까?
“성진 그룹 임 회장이 널 데리고 오라네.”
아주 무거운 표정이다.
혹시 라울…….
임 회장에게 너무 심한 협박을 받아서 나를 넘기는 거야?
“나요? 그분이 왜요?”
물론 스캔들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야속한 라울 결국 나를 임 회장에게 넘기는구나.
“잠깐 너를 보고 싶대. 그래서 내가 보낼 수 없다. 그랬더니 나하고 같이 와도 된다고 하더군. 임규빈 때문에 널 부르는 게 아닌 거 같아. 어찌 됐든 너 혼자는 절대 보낼 수가 없고 나랑 같이 가면 괜찮지 않을까? 가기 싫다고 하면 안 갈게.”
벌써 가겠다고 대답하는 거 다 들었거든! 뭐 가서 오해라고 하지 뭐. 그런데 임규빈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왜?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여유 있는 척 물었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어요. 라울과 함께라면. 사실 그분들은 그 임 회장님 사모님이랑 동생 분 가정이랑 같이 스페인에 온 적이 있어서요. 그때 가이드 해드려서 다 알고 있거든요.”
“그건 나도 알아.”
“그럼 같이 그냥 들려 봐요. 라울하고 같이 오라고 그런 거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 *
그 시각 조찬식은 험악한 사람들 앞에 앉아있었다. 험하게 차에 태워져서 이곳에 왔다. 한 사람이 묻는다.
“전에 만난 그 혜정이라는 아가씨가 딸이야?”
조찬식이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 덜덜 떨면서 눈을 굴렸다.
“딸이야, 아니야, 그것만 말해. 아니 이 세상에 딸을 딸이라고 말을 못하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은 성진 그룹의 임 회장 딸로 둔갑해있는 혜정을 자기 딸이라고 해도 될지 안 될지 몰라 겁먹고 있을 때 앞의 테이블에 칼 하나가 탁 꽂힌다.
딱 봐도 이 사람들은 아주 위험하고 험악하다.
“딸이야, 아니야?”
“딸 맞습니다, 딸 맞습니다.”
조찬식이 벌벌 떨면서 딸이라고 자백하자 그 앞에 다시 계약서 하나를 내놓는다.
“감옥 갈래, 배 탈래?”
“네?”
“그 딸을 성진 그룹 회장 딸로 둔갑시켜 놨으니 사기죄잖아. 사기죄로 감옥 갈래, 배 탈래?”
당장 오줌이라도 지릴 듯이 무섭다. 조찬식이 떨리는 입을 열고 사정을 했다.
“제가 이 나이에 배를……. 전 힘든 일도 별로 안 해봤고…….”
더듬거리며 말을 하는 목소리가 겁에 잔뜩 질려있다.
“그래? 그럼 감옥 가면 되겠네.”
“네? 아……. 아닙니다. 배 타겠습니다.”
“그럼 여기 계약서에 사인하고.”
“그런데 이게 무슨 뱁니까?”
“별거 아니야. 새우 잡이야.”
새우 잡이 배. 말로만 듣던 그 새우 잡이 배에 팔려가는 건가? 가슴이 덜덜 떨리면서도 조찬식은 서류에 사인을 했다. 아니면 여기서 죽을 거 같았다. 감옥에 가는 것도 무섭다. 떨리는 손으로 사인하고 그들을 본다.
“이제 된 겁니까?”
“그래, 이 길로 배 타고 가서 다시 한국 들어오지 말고 사기 치지 마. 우리 같은 사람들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완전 깡패 같은 사람들이 그대로 조찬식을 데리고 새우 잡이 배로 떠났다. 조찬식에게 계약서를 받은 사람이 나오자 밖에는 정장 입은 한 사람에게 말한다.
“조혜정이 친딸이라고 합니다. 이대로 그냥 배 태웠습니다. 시끄러울까 봐. 여기 서류에 사인했으니 확인하십시오.”
“잘했어.”
그리고 바로 전화를 한다.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해서 보냈습니다.”
“알았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전화를 끊고 임 회장은 창밖을 바라보다 서랍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사진 한 장. 손바닥만큼 작은 액자에 들어있는 화사한 모습의 여자. 디아나를 똑 닮은 젊은 시절 정혜원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