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43)

16. 덫

그가 허리를 밀어 넣을 때마다 자궁 끝에 페니스가 닿으며 온몸에 식은땀이 오싹 난다. 견딜 수 없는 자극에 허리가 뒤틀리면서도 그를 더 깊이 품고 싶은 모순된 감정에 더욱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리게 된다.

그의 눈길이 좋다. 뜨겁게 나를 바라보며 내 안의 열정과 욕망을 불러일으켜서 무섭게 빨아들이는 그의 깊은 눈은 지금 진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그가 결합된 아래를 더욱 밀착시키며 나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그의 위에 앉게 되자 체중을 실은 몸이 그의 페니스 위에 깊게 내려앉는다. 완전히 맞물린 살이 비벼지며 또 다른 자극을 전달하고 있었다.

“흐윽……. 라울……. 난……. 나 지금……. 하아…….”

입술이 떨리며 말이 새고 있었으나 그의 입술이 나의 말을 모두 빨아들였다.

“괜찮아. 가봐. 끝까지……. 보고 싶어.”

그가 말과 함께 내 허리를 잡고 크게 들었다가 놓으며 몸을 튕겨 올렸다. 몸이 내리꽂힘과 동시에 아래서 밀고 올라오는 그의 불기둥이 엄청난 세기로 안을 흔들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뭉근하게 자궁을 울리며 온몸으로 전달하는 아찔한 자극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래가 엄청나게 그의 페니스를 물고 조여든다. 죽을 것만 같은 희열이 엄청난 너울성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가 다시 허리를 쳐올리면서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응…….”

눈앞에 보이던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까맣게 흐려 보인다. 두 눈을 감음과 동시에 까만 허공에서 하얀 폭죽이 번쩍거리며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주는 지극한 쾌감과 희락이 나를 덮으면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한 번 더 나를 안고 깊이 몸을 밀어 넣으며 내 안에 뜨거운 사정을 했다. 몸 안에 퍼지는 그의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품에 늘어졌다. 부르르 어깨가 떨리면서 촉촉하게 눈가가 젖어있었다.

그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어. 허니. 내 작은 마녀.”

그가 내 이마에 키스하고 자잘한 입맞춤을 정수리에 퍼붓기 시작했다. 잠깐 가쁜 숨을 몰아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가 내 어깨에 입술을 대고 간지럽게 말했다.

“디아나,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네 방에 숨어들어야할까?”

“언제까지? 이게 처음이거든요.”

“알아. 그런데 앞으로 계속 그럴 거 같아서 그러지.”

대놓고 계속 숨어들겠다고 말하는 이 남자를 보며 내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탁 쳤다.

“완전 스캔들 메이커가 되고 싶은 거군요. 가는 데마다 쫓아다니면서. 스페인에서도, 한국에서도, 회사에서도, 이제는 집까지?”

“그래. 그래야 될 거 같아. 난 네 스캔들 메이커야. 알아? 나하고만 나는 스캔들. 뭐가 어때서.”

“…….”

할 말 없다. 이제 라울 말고는 다른 사람하고는 절대 엮일 일이 없겠다. 이렇게 대놓고 스캔들 퍼뜨리는 걸 낙으로 삼는 남자가 들러붙었으니 말이다.

나는 라울의 품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똑같은 내 침대였지만 그의 품에 안겨서 자니 훨씬 더 포근하다. 슈퍼 싱글이라고는 하지만 둘이 자기에는 좁은 침대였는데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울은 나를 꼭 안고서는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무래도 디아나, 너는 마녀일 거야.”

“왜요?”

내가 웃으며 눈을 감은 채 말하자 그가 말했다.

“나한테 맨 날 저주를 걸거든. 네 옆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지만 좋은 꿈도 꾸게 해주지. 네가 나타나는 꿈. 네가 나를 사랑하는 꿈. 알몸으로 활짝 웃으며 나를 희롱하는 그런 꿈.”

내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당신 꿈에 그렇게 야하게 나타난단 말이에요?”

“그렇게 나타나길 매일 원하지.”

그가 웃으며 나를 당겨 안는다.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에 마음이 흔들린다. 아늑한 침대 안이 행복하다. 나도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요, 라울. 새벽같이 일찍 빠져나가려면 말이에요.”

“한 번만 더……. 응? 한 번만…….”

그가 다시 나를 안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바람이 둘 사이를 삼킬 듯 휘감고 있었다. 사랑과 애욕이 녹아든 그 바람결에 나는 그의 품에서 다시 절정에 올랐고 순식간에 닥쳐오는 멀티 오르가슴 속에서 죽을 듯 떨었다. 그리고 거의 기절하듯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똑똑똑!

벨을 누르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두드리는 문소리에 나도 라울도 함께 눈을 떴다.

“뭐지?”

라울이 일어나 문을 열겠다고 하는데 내가 기겁했다.

“지금 그 꼴로?”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대신해서 내가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세뇨리따, 너무 일찍 이지요?”

세베로였다. 이 새벽에 여기에? 놀라서 보자 그가 내게 쇼핑백을 건네준다.

“주인님께 필요할 거 같아서요. 아래에 차 대기하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역시 세베로였다. 쇼핑백 안에는 속옷과 양복 커다란 선글라스가 들어있다. 라울이 쇼핑백을 들고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하고 빠르게 준비를 한다.

“오늘 일찍 조찬회가 있어. 세베로가 그걸 준비해 온 거야.”

라울은 옷을 입고는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침대에 누워 보면서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 멋진 진시환 사장님이 저렇게 도둑고양이같이 살금살금 다니는 뒷모습을 보는 건 정말 재미있다.

* * *

“이게 이진산의 입찰 담합 자료라고?”

임정환 회장이 서류를 받아들며 말했다.

“네, 다른 건설사들과 함께 짜고 그동안 수주한 입찰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말씀하신 대마초 연락망입니다. 일부 마약은 직접 유통도 했습니다. 그 하수인 명단이고요. 이건 함께 대마초를 피며 섹스 파티를 하는 인물들 명단입니다. 그런데…….”

말을 흐리는 비서의 말에 임 회장이 고개를 들며 다그쳤다.

“말끝을 왜 흐려? 뭐 잘못됐어?”

“그런데 혜정 양이 같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임 회장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이 말했다. 마치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럴 줄 알았어. 아니 그러라고 소개시켜 준 거야. 감히 날 가지고 논 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우리 이랑이가 오기 전에 청소해놓고 부를 거다. 절대 다시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말이지.”

임 회장이 비서를 보며 다시 지시를 내렸다.

“제대로 밟아서 증거 확보하고 결정적일 때 제보해. 형사들 준비하라고 해! 알았지?”

그 눈이 어찌나 서늘한지 처음 보는 임 회장의 차가운 모습에 비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늘 감정의 기복이 없던 임 회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서늘한 모습으로 이진산과 혜정을 함께 엮고 있었다.

* * *

혜정은 J호텔 1103호 앞에서 잠깐 망설이고 있었다.

이렇게 부르는 대로 다녀도 상관없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제대로 결혼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결혼한다고 그랬는데. 양가에서도 다 알고. 이 남자도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잖아. 피차 즐기는 건데 뭐가 나빠?

딩동.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이진산이 보인다.

“어서 와. 파티가 막 시작되려고 하거든.”

들어가 보니 메케한 냄새. 아, 마리화나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서는 구할 데가 없어서 피우지 못했는데.

혜정은 구미가 동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다른 여자들과 남자들도 있다. 그룹으로 놀자는 말이다.

“우리 서로 아는 사인데 뭐. 지난번에도 그렇게 놀았잖아? 집에다 가만히 모셔놔야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잖아? 너도 놀 만큼 놀아본 것 같은데. 합류하자.”

지난번 이진산과 술을 마시고 뒹굴었던 게 생각난다. 술에 뭘 탔었는지 다음다음 날까지도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 때도 깨어보니 셋이었다.

이미 시작됐는지 메케한 마리화나 냄새에, 적당히 술에 취한 남자와 여자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여자들은 거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의 차림이었는데 그마저도 슬금슬금 옆에서 벗기고 있다.

“뭐, 이런 파티 처음이야?”

처음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이런 파티를 하면서 노는지는 몰랐다. 혜정이 술을 한잔 마시며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처음 아니야.”

“역시. 너 화끈해서 마음에 든다.”

그가 큰 손으로 혜정의 젖가슴을 잡으며 그녀를 당겨 안고 자기가 피우던 마리화나를 입에 물렸다. 몽롱한 연기가 올라오며 난잡한 파티가 시작되고 있었다.

메케한 냄새가 가득한 호텔 안은 남자와 여자들이 뒤엉켜 음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응……. 응응……. 하……. 더……. 더…….”

간드러지는 신음을 내는 여자에게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들러붙어 있었다. 달랑 미니스커트 하나를 허리에 두고 있는 여자의 젖가슴을 한 남자가 빨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젖가슴은 다른 여자가 빨고 있다. 여자가 더 세고 집요하게 달라붙어 여자의 젖꼭지를 질근거리고 있었고 그 여자의 아래는 다른 남자가 점령하고 있다.

죽을 듯이 신음하며 허리를 뒤트는 여자의 아래서 남자가 그녀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고 있었다. 페니스를 밀어 넣으며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비벼대자 여자가 신음을 넘어선 비명을 지른다.

“아악……. 응……. 응……. 아아……. 흑…….”

그런 난잡한 옆에서 이진산이 혜정을 덮치고 있었다. 소파에 엎드린 채 혜정이 엉덩이를 높이 들고 이진산을 받아들인다.

이진산은 완전히 취한 상태로 혜정의 엉덩이를 크게 손으로 내리쳤다. 새하얀 엉덩이에 커다란 손자국이 빨갛게 나는데도 혜정은 소리치며 좋다고 웃어댄다.

“아야! 깔깔깔…….”

이리저리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혜정의 골반을 꽉 쥐고 이진산이 페니스를 거침없이 박아 넣었다.

“아악……. 으……. 너무 세게 하지 마!”

“싫어. 나는 세게 하는 게 좋아.”

이진산이 세게 허리를 밀어 넣자 혜정이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지른다. 몸이 흔들리며 그녀의 젖가슴이 흔들리자 옆에 있던 남자가 소파를 잡고 엎드린 그녀의 밑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가슴을 입으로 문다.

“앗! 뭐야?”

“뭐긴. 나도 좀 빨아보자고.”

밑으로 파고든 남자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아래로 이진산이 페니스를 쳐대며 혜정이 정신없이 소리치고 신음했다.

그런 한쪽에 작은 꽃병의 구멍으로 카메라 렌즈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룸 안의 사람들은 약과 술에 취해서 그런 것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 * *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거 알아봤습니까?”

임규빈이 비서를 통해 보고를 받으며 물었다.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는 이랑에 대한 거였다.

“예. 정이랑 씨는 지금, MK푸드 지사에 있지 않고 MK상사로 차출돼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MK상사요?”

임규빈의 눈썹이 모였다. 며칠 동안 계속 전화를 했지만 이랑은 받지 않고 MK푸드에서도 그녀를 보지 못한다는 말에 알아보라 지시한 거다. MK상사로 차출돼 나갔다면 진시환 사장이 그녀를 데려갔을 확률이 높다.

그녀와 진시환의 스캔들이 터진 후에도 규빈은 그걸 믿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진시환과의 그런 스캔들이 거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바로 그녀는 헛된 꿈을 꾸고 남자를 쫓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귀자고 해도 거절했던 거니까. 스페인에서의 열흘 이후에 그녀를 잊지 못했기에 규빈은 이제 그녀를 놓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떠오른다면 부딪혀 보고 그녀의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처럼 다가갈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다가갈 수 없다면 진시환도 마찬가지일 거다.

정말 진시환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임규빈은 그렇게 조급한 성격이 아니다. 얼마든지 느긋이 기다리면 디아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가 얻고자 하는 것을 은근과 끈기로 쟁취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디아나가 전화를 받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진시환이라면 쉽지 않겠다는 정도의 판단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알기로 진시환정도의 남자라면 디아나와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는 다시 디아나에게 전화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MK사 사원 아파트 주소가 이겁니까?”

“예.”

“알겠습니다.”

임규빈은 아파트 주소를 가지고 찾아갔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 집에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녀가 언제 끝나는지 그런 걸 알 수가 없었다. 문자를 보냈으나 역시 답장이 없다.

“그럼 깨끗이 거절이라는 건데…….”

그의 마음이 조금 더 간절해진다.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지 않고 점점 또렷하게 그녀가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인연이다. 내 짝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생각이 날 리가 없다.

그런 확신에 이렇게 아파트까지 찾아온 거다.

혹시 스캔들 때문에 상처받아 사람들과의 연락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지켜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MK 사장과의 스캔들이라면 나와 함께하는 이겨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아쉬운 마음에 벨을 다시 눌렀다. 그녀의 힘든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다. 스캔들로 움츠러든 마음을 안아주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 문 앞에서 이제 돌아설까 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임규빈 씨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역시, 디아나였다. 운명은 어쩔 수가 없다.

“디아나.”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놀람과 반가움으로 환하게 펴졌다. 뭐 이렇게까지 반기는지 미안할 정도다. 그동안 전화도 받지 않았는데 집까지 찾아오다니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규빈 씨, 한국에서는 그냥 이랑이라고 부르세요.”

“아니, 나는 처음부터 디아나라고 불렀기 때문에 디아나가 편해. 그런데 디아나, 왜 전화 받지 않는 거지?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없고. 혹시 씹은 거야?”

“네? 어……. 그런데, 그 전화기 요즘 사용하지 않아서요. 그 전에 쓰던 전화기는 잘 보지 않아요. 서울에 온 뒤로 전화기를 바꿔서요.”

내 말이 그렇게 좋은 말인 걸까? 전화기를 바꿔서 답을 못했다고 하자 그가 아주 다행이라는 듯이 좋아한다.

“아 그랬군요. 나한테 연락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가서 잠시 차라도 한 잔할래요?”

“그게, 밖으로 다니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스캔들 기사가 한 번 터지고 나서는 또 어디서 누가 사진을 찍지는 않을까 하는 사진도 들고, 라울 하나로도 시끄러운데 성진의 후계자라니! 이건 정말 안 될 말이었다.

“그럼 차라리 잠깐 들어오세요. 별거 없지만, 커피정도는 드릴 수는 있어요.”

캡슐 커피를 내리면서 규빈의 앞에다 놓으며 나도 그 앞에 앉았다. 작은 2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자 어색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왠지 들떠 보인다. 신이 난 거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그를 보자 내가 더 어색해진다. 괜히 방으로 들였나?

그가 이 앞에 이렇게 와있는 게 사실은 부담스럽다. 라울의 스캔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이 사람도 성진 그룹의 조카였으니까.

“규빈 씨, 나 다시 찾지 말라고 그랬는데 왜 또 찾아왔어요. 이렇게 찾아오면 나 진짜 부담스럽다니까요.”

일부러 가볍게 말하는 내 말투 때문이었을까? 그가 나를 보며 씩 웃는다.

“그렇게 은근슬쩍 웃으면서 도망가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 그렇게 쉽게 단념할 것 같았으면 디아나하고 MK 사장 스캔들 기사 났는데도 디아나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알지?”

그러니까 더 부담스럽다고. 웃으며 거절할 때 알아줘요. 제발! 그런데 내 속마음을 그는 전혀 모르는 걸까?

“알아요, 깊게 생각하고 찾아와줘서 더 고마워요. 하지만 그때 말했던 것처럼 사귈 생각 없어요. 나는 일하고 싶어요.”

나는 완곡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아니지 이정도면 정확하게 전달한 거지. 그런데도 이 남자는 딴말을 한다.

“일해. 일하는데 나도 보면서 일하라고.”

그러니까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응? 물론 임규빈은 좋은 남자다. 어찌 보면 라울보다 반듯하고 철이 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는 라울이 가득하거든.

“그러지 마세요. 우리 그냥 스페인에서 즐거운 여행을 함께했던 그런 친구 같은 사이로 남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거절의 멘트는 없을 거다.

확실하게 사귈 마음 없다. 친구로 남자. 이렇게 말했는데 그런데도 이 남자는 또 딴소리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오빤데 친구는 말이 안 되는 게 아닌가?”

“사회에서 5년 정도는 동년배로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이 남자도 져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단호하게 말한다.

“얼렁뚱땅 그거는 아니지. 규은이한테는 언니라고 하면서, 왜 나한테는 동년배니 어쩌니 그러는 거지?”

기어이 오빠 소리를 듣겠다는 거야? 그래, 못 부를 것도 없지. 오빠라고 부른다고 손해 볼 것도 없고. 그래 불러줄게. 불러준다.

“그럼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 할래요? 오빠라고 불러 드려요?”

“그럼 그렇게 하던가. 오빠라는 소리 좋네.”

생각보다 이 남자 적극적이다. 사실 풍기는 외모는 조금 샌님 스타일인데 말이야. 막상 오빠라고 부르려니 또 뭔가 탐탁지 않다.

“저, 임규빈 씨, 회사에서 직함 뭐에요?”

“실장.”

“실장님. 그냥 우리 알고 지내는 사이해요. 나 이렇게 임규빈 씨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또 무슨 소문이 날까 진짜 겁나요. 임규빈 씨도 사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나? 왜. 나 평범해.”

네가 아무리 평범하다고 해도 그게 평범이라는 게 되니? 응? 넌 성진 그룹 회장의 조카이고 후계자야. 이걸 몰라서 그래?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성진 그룹의 사람이잖아요.”

“성진 그룹에 사람들이 한둘이야? 그럼 성진 그룹 사람들 다 안 평범한 거야? 사람들이 다 평범하지.”

“자꾸 이렇게 말장난하지 마요. 앞으로 성진 그룹 후계자라고 다 나와 있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를 저만 부인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게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진짜 나는 왜 이렇게 못 오를 나무들만 꼬이는 거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자기 생각을 나열한다.

“이제 겨우 회사 들어갔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는걸. 그것도 스캔들이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디아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일단 오늘 온 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이 말 하려고 왔어.”

“네?”

“뭐, 어떤 사이가 됐든 상관이 없고. 일단 디아나가 한국에 온 건 규은이도 알고 우리 부모님도 아니까. 그냥 집에 한 번 놀러 와. 내가 초대할게.”

“아 그때 큰어머니랑 부모님이랑?”

“그냥 간단한 이야기 하면서 식사나 하자고.”

그는 아주 쉽게 말했다. 성진 그룹 회장 사모님과 그 일가들이 있는 집에 오라고? 그게 쉬워? 그때는 여행지였고 지금은 다르지.

“너무 어렵고 높은 자리에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디아나, 그때는 그렇게 어렵게 대하지 않았잖아. 우리 규은이하고 파티도 같이 간 사인데.”

“그때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할 그때였다. 벨이 울렸다. 누굴까 싶어 인터폰을 보자 다시 깊게 모자를 눌러쓴 라울이다.

“라울!”

바로 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데 다시 벨을 울린다.

저 사람을 계속 저기에 서 있게 하면 다시 스캔들에 휘말릴 텐데, 그렇다고 이 안엔 지금 규빈 씨가 있는데. 모르겠다!

일단 문을 열자 라울이 바로 문을 밀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규빈을 보고 온통 얼굴이 굳어버린다. 그런데 라울을 본 임규빈은 아주 태연하게 인사를 한다.

“진시환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아, 성진 그룹의 임규빈 실장?”

작게 중얼거리고는 얼굴이 무섭게 변하더니 나를 본다. 정확하게 째려본다. 아니 그보다 더 무섭게 본다. 칼날 같은 눈길에 내가 눈을 끔뻑였다.

“방에 남자도 들이나?”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이 남자 무슨 생각을 하고.

“남자로 들인 거 아니에요. 그냥 아는 오빠 사이라고나 할까, 그냥 아는…….”

오빠라는 소리에 라울은 더 화를 낸다. 내가 실수한 거야?

“언제부터 오빠였지?”

규빈은 라울이 이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와 라울의 스캔들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때 그러고 보면 파티에서도 라울의 눈이 디아나에게 향했던 게 생각이 난다. 그런데 왠지 오기가 난다.

“제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뭐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아? 이제 스물일곱이 나이가 많기는 뭐가 많아. 감히 내 앞에서. 임 실장이 나이가 많다고 하니 우습군.”

일부러 말꼬리를 자른 건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걸 과시하기 위함인 거 같다. 그래 봐야 라울이 규빈보다 세 살 많으면서. 그런데 이 남자들이 남의 방에 와서 갑자기 웬 나이 싸움! 애들도 아니고. 한 살 더 많은 게 더 훌륭한 건가.

“여보세요 들. 그냥 두 분 다 앉으시지요. 라울 커피 한 잔 내려줄까요?”

“됐어.”

남자 둘의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거 같다. 이런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다.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서 나보다 엄청 큰 덩치들이 지금 뭐하는 거지?

“진시환 사장님이야말로 이곳에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몰랐나? 우리 스캔들 터진 사이인 거?”

아 저 남자 스캔들 터진 게 무슨 자랑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라울의 얼굴은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스캔들이라는 거.”

“그저 스캔들이 아니야. 그게 우리 사이야.”

그게 우리 사이라니? 그럼 몸 팔아서 목걸이 받은 사이라고? 아니면 라울이 몸 팔고 싶은 사이? 하긴 팔긴 팔았지만.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두 남자들을 보다가 슬그머니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물이라도 줘야 하는 걸까?

“그저 스캔들일 뿐으로 알고 있는데요. 진짜였습니까?”

규빈이 담담하게 묻는다. 그러자 라울 역시 아주 침착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봤나? 우린 완전히 그런 사이지.”

“해명 기사 난 거 봤습니다. 진시환 사장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저도 짝사랑입니다. 디아나한테.”

“뭐야?!”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이쯤해서 둘 다 내쫓든가 해야지……. 이러다가 여기서 싸움이라도 날 거 같다.

“둘 다 나가주세요. 도대체 왜 여기에서 이러는 거예요? 임규빈 씨 차만 마시고 가기로 했죠? 손님이 와서요. 오늘은 이만 가주세요. 라울, 나가요. 제발 둘 다.”

나는 인상을 쓰며 소리를 키웠다. 내 딴에는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둘 다 밀어내듯이 밀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어서들 꺼져!

“얼른 나가주세요. 여기 사원 아파트인 거 알죠? 라울은 빨리 모자 눌러쓰고요.”

나는 라울의 모자를 그에게 안겨주며 빠르게 말했다.

그러자 두 남자가 다른 반응이 나온다.

“알겠습니다.”

“싫어!”

물론 알겠다고 한 건 규빈이고 싫다고 한 건 라울이었다.

“둘 다 내가 싫어요. 나가요!”

문을 열어놓고 막 둘을 밀어내려고 그럴 때 규빈이 나가면서 한마디를 했다.

“그런 스캔들이나 터트리고 당신은 디아나에게 좋은 애인이 될 수 없어. 힘만 들게 할 뿐이지.”

그러자 라울이 화가 나서 바로 문지방 있는 데서 규빈의 멱살을 확 틀어잡았다.

“뭐야? 죽고 싶어?”

그의 눈과 온몸에서 사나운 기운이 흘러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옆에 있던 나는 너무 놀라서 두남자의 팔을 잡았다.

“정말 왜 이래요?”

큰 소리도 못 내고 억눌린 음성으로 말하고 있을 때 찰칵찰칵 플래쉬가 터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거 빨리 잡아야 되는데…….”

나는 놀래서 사진을 찍은 사람을 쫓아가려고 무작정 뛰었다. 도대체 누군지. 그러나 한 층도 가지 못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저 남자들은 도대체 뭐 하는지 거야? 스캔들 나도 상관없다는 거야? 차라리 빨리 가버려라.

바로 내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단에 쭈그리고 있는데 저벅저벅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옆에 와서 말을 한다.

“여긴 왜 쭈그리고 있는 거야?”

역시 올려다보니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살벌하게 내려다본다.

“규빈 씨는요? 갔어요?”

“지금 내 앞에서 그놈 얘기를 묻고 싶어? 내가 도대체 너 때문에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 거야?”

“무슨 얘기에요? 뭘 나 때문에 망가져요? 나야말로 당신 때문에 막 망가지고 있거든요? 이 시간에 여기를 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럼 뭘 어쩌라고.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와야 될 거 아니야.”

“모자 하나 눌러쓴다고 세상이 다 가려져요? 가세요. 난 그냥 들어갈 거예요.”

올라가려고 일어섰으나 그러는 내 손목을 그가 확 낚아채서 품에 안았다.

“못 보내. 너 못 보낸다고. 이대로 저 방으로 내가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다시 그놈이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또 방문 열어주려고? 따라와. 가자.”

“싫어요. 악!”

그가 번쩍 나를 둘러메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으로 다니는 사람이 아무리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렇게 라울의 어깨에 짐짝처럼 메어 내려가자니 기가 막히다. 아니 말로 하면 될 걸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그가 너무 화가 난 거 같아 차라리 달래는 걸 선택했다.

나는 최대한 애교 있는 목소리로 애원하며 말했다.

“라울, 알았어요. 내가 따라갈 테니까 제발 내려줘요. 이러곤 못 가요. 진짜 스캔들 난다고.”

“벌써 났어.”

씨도 안 먹힌다. 진짜 화가 난 거 맞다.

“라울 내가 당신 따라 걸어갈게요. 내려줘요.”

“됐어. 매고 가는 게 더 편해.”

너는 편한지 몰라도 나는 죽겠거든.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고. 머리로 피가 몰려 죽겠어.

“진짜 제발. 응? 내려줘요. 제발이요. 내가 당신 꼭 잡고 갈 테니까. 간다고요. 내려줘요.”

들은 척도 안 한다. 아주 사람 말을 개무시하고 힘자랑하고…….

하여튼 되게 못됐지만, 지금은 달래는 수밖에.

“라울, 오빠!”

우뚝! 그의 걸음이 멈췄다.

뭐라고? 지금 디아나가 뭐라고 했지? 분명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오빠?

가슴이 마구 뛴다. 임규빈 그놈과 같이 있던 건 괘씸하지만, 오빠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살랑살랑 기분이 이상하다.

“힘들어?”

“네, 머리고 피가 몰려서 못살겠어요. 진짜 힘들어요.”

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려오거나 올라온다는 소리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난 스캔들이고, 그까짓 스캔들 백번 나면 어때? 그냥 내려가려고 하는데,

“라울, 미안해요. 오해하게 해서. 많이 화났어요?”

왜 이렇게 가슴이 간질간질하는지. 디아나가 부르는 내 이름이 귓가에 달콤하게 닿는다.

“아니, 화난 거 아니야.”

화가 났는데 지금은 다 풀어진다. 내 이름을 부르고 게다가 오빠라는데 더 화낼 일이 뭐야?

사실 아까 임규빈 그놈이 오빠 같은 사이라고 하는데 완전히 꼭지가 돌았다. 오빠라니! 그놈이 왜 오빠야?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한 번도 오빠라고 안 해놓고.

그래서 그런지 디아나가 오빠라고 하니까 마음이 다 풀어진다.

한 층을 내려와서 그녀를 내려놓았다. 바로 세워놓으니 얼굴이 빨갛다. 피가 몰렸나?

“자.”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는다. 손안에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손.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을 잡으니 뭔가 안에서 날뛰던 화가 싹 가라앉는다. 내 마음을 쥔 열쇠 같은 그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서 안고 자야지.

생각만으로도 아래로 피가 몰려서 터질 거 같다. 무조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라울! 제발 좀 천천히 가요.”

이 남자. 어찌나 차를 세게 모는지 나는 자동차 손잡이를 잡고 간을 졸였다. 한강 다리를 순식간에 건너고 강변북로를 지나 한참을 가서 내린 곳은 지난번에 왔던 남양주의 별장이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있자. 어차피 집으로 가면 벌써 파파라치가 떴을 거 같아서.”

“출근은 어떻게 해요?”

“데려다 줄게. 한 시간도 안 걸려. 어차피 나, 공개적으로 너 짝사랑하는 놈이라고 소문났어. 더 이상 어떤 스캔들도 상관없어. 그런데 디아나 나 짝사랑인 거니?”

그가 굳어진 얼굴로 다그치듯이 묻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대답을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지고 색도 어두워진다. 한마디로 포악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대답해봐. 나 짝사랑이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라울도 나한테 정식으로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니 나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무리 포악해 보이고 험악해 보인다고 그에게 밀려서 사랑한다고 먼저 고백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는 라울은 나 사랑해요? 나한테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한 적 한 번도 없는 거 알아요? 그러면서 신문에 짝사랑이라고 소문부터 내고.”

내 말에 그는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눈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내 어깨를 꽉 잡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럼 사랑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왔을 거 같아? 내가? 생각해봐. 내가 온몸으로 사랑한다고 했잖아.

MK상사 사장이, 이 라울 까스틸로 진이 너만 따라다니고 있잖아. 몰라? 있는 스케줄 줄줄이 펑크 내면서도 너랑 밥 먹잖아. 너랑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지식경제부 장관 하고 약속도 미루잖아.

뭐든 네가 제일 우선이잖아. 가야 할 출장도 가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코딱지만 한 네 아파트에 못 들어가서 안달이잖아. 이래도 더 필요해? 꼭 말로 해야 해?”

“라울!”

그이 말에 놀랐다. 나하고 있고 싶어서 출장도 미루고 지식경제부 장관과의 미팅도 미뤘다고?

이런 곰탱이 같은 라울!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맨 날 자기처럼 바쁜 남자가 나를 보러 일부러 올 거 같으냐고 그런 말만 했으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울, 우리 둘은 처음부터 사랑한다는 말보다 밤을 먼저 같이 보냈잖아요. 사고였고요. 도대체 몇 번째까지가 사고였고 몇 번째부터가 사랑이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요. 난.”

진짜 그랬다. 처음은 무서운 사고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우연이었다.

정말 그랬다. 몇 번째부터가 우리가 사랑이었을까? 사고로 시작됐고 우연히 겹쳤던 것 같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모르긴 왜 몰라? 첫날만 사고였고 그다음부터는 전부 다 내 염원이었어.”

염원이었다고? 무슨 염원?

“나를 첫날 이후로 계속 사랑했다는 말이에요?”

“그래 이 바보야. 그걸 꼭 말을 해야 알아? 처음 너와 함께 밤을 보내고 바로 다음에 잊으려고 했지. 육 개월 동안. 장장 육 개월 동안을 잊으려고 했다고.

그렇지만 잊을 수가 없었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서 미친놈처럼 마드리드 너희 민박집까지 가서 열 바퀴나 돌고.”

“마드리드에 날 보러 왔다고요?”

디아나가 동그란 눈으로 날 보며 묻는다. 그럼 내가 널 보러 갔지 누굴 보러 갔겠어?

“물론 널 보러 간 건 아니지만……. 아무리 돌아도 코빼기도 안 보이더군. 그래도 민박집을 열 바퀴나 돌면 혹시라도 널 볼까 했는데…….”

왜 이놈의 입은 왜 이럴 때도 너만을 보러 갔다는 말이 안 나오는 건지. 하지만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거 맞지, 나?

“어찌 됐든 사랑한다고. 내가. 이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이 디아나를 사랑한다고. 매일 매 순간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으면 네가 까스틸로 성에, 그것도 내 어린 시절 추억이 녹아있는 그 녹색 방에 누워있겠느냐고.”

고백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잘 나오는 말이 왜 그동안 그렇게 안 나온 거야?

“그러니까 그건 우연이죠.”

“우연은 무슨 우연이야. 내가 하도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니까 하늘에서 우리 어머니가 너를 내 성에 싹 보내준 거겠지. 난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매일 이 여자를 보고 싶어 해서 어머니가 나한테 선물로 그 녹색 방에 디아나를 넣어준 거라고. 그러니까 두 번째부터는 필연이었던 거다.

“그리고 내가 무슨 짐승이냐? 아무 여자나 막 안게?”

“짐승은 맞죠. 아무 여자나 막 안으면서 살아왔잖아요. 지금까지.”

이럴 때 이 여자는 어쩌면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그건 널 만나기 전 얘기지.

“어찌 됐든 지금은 내가 너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이게 짝사랑이 맞느냔 말이야. 말해! 맞아 안 맞아?”

맙소사. 무슨 사랑 고백을 이렇게 추궁하듯이 들어야 하는 건진 모르지만 지금 이 남자는 나한테 정확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을 한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눈빛이 달콤하거나 진지함보다는 화가 나 있는 거 같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화나요?”

“뭐?”

“나한테 지금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그게 화가 나냐고요.”

“아니. 그게 화나는 게 아니야.”

그가 갑자기 푹 가라앉으며 말한다.

“그럼요?”

“말이 잘 안 나오잖아. 말이. 그게 화가 난다고.”

나는 손을 뻗어서 그의 볼을 만졌다. 그러자 그가 조금 더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본다.

“화 안 내도 돼요. 말 잘하고 있어요.”

“뭐라고?”

“당신 말 아주 잘하고 있다고. 나 정확하게 알아들었다고요. 당신이 나 처음 본 이후로 계속 생각했다는 거. 나 보려고 마드리드에 와서 민박집 열 바퀴나 돌고 내 생각 많이 해서 우리가 당신 성에서 그렇게 두 번째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다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당신, 지금 말 진짜 잘하고 있다고요.”

내 말에 그가 와락 나를 껴안았다.

역시 이 남자는 말하는 것보단 몸으로 하는 걸 훨씬 잘하는 건 맞다. 따듯한 그의 품에서 내가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가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춘 체 작게 말했다.

“그러니까 디아나 널 데리고 그렇게 휴가를 가고 전용기를 타고 다니고 괜히 그랬겠느냐고 내 말이.”

“그러니까요. 그렇게 나를 끌고 다니면서도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하고.”

“그건 네가 거절했잖아. 청혼했을 때도.”

“그렇게 청혼하면 다시 해도 거절이에요. 가운에다 슬리퍼나 신고.”

정말 그런 청혼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분위기는 또 어땠는데……. 스캔들 막아줄 테니 결혼하자고?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물론 그때는 울었지만.

라울이 빙긋 웃으며 내 귓가에 대고 작게 바람을 불어넣는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불어닥치자 가슴이 단단하게 뭉쳐진다. 이 남자는 아주 작은 몸짓으로도 내 안의 관능을 불러일으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다.

“으음…….”

나는 살짝 몸을 비틀며 작은 신음을 뱉었다. 이제 그의 뜻대로 내 몸은 자동으로 반응하는 거 같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유독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롱한 크리스털 구슬 아래로 흩어지는 빛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올리브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라울의 향기다.

그가 여전히 내 귓불을 희롱하듯 바람을 불어넣으며 작게 말한다.

“글쎄 그 가운은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 싸구려가 아니라니까?”

“아, 좀! 내가 그때 말했죠? 그러거나 말거나 가운은 가운이라고.”

“큭큭! 알았어. 프로포즈하기에는 복장 불량이라고 인정할게. 그런데 이게 다야?”

“네?”

내가 그의 입김에 달아오른 멍한 눈을 들어 그를 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달아오른 볼이 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싶다. 그의 눈이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애욕을 머금은 보랏빛이 진해진다는 건 이제 그가 나와 사랑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이제 그냥 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말이다. 그가 내 젖꼭지를 손가락 끝으로 쥐고 비틀었다.

“훗…….”

괴롭히듯 꼬집듯 비틀자 온몸에 전류가 흐른다. 내 입술이 벌어지자 그가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빨고 살짝 깨물다가 입안으로 파고들며 혀를 건드린다. 살짝살짝 건드리다가 무섭게 휘감아 빨아 당기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몸이 달아오른다.

“아아……. 라울!”

이런 이 여자 진짜 마녀 아니야?

어떻게 내 고백만 날름 받아내고 다음이 없는 거지? 그런데 내게 고백하지 않아도 나는 이 여자가 날 사랑한다는 데 전혀 의심이 들지 않는군.

맞아! 난 네 고백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래도 듣고 싶기는 하군. 하늘을 찌르게 도도하고 똑똑한 디아나는 어떻게 사랑을 고백하는지 말이야.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고야 말겠어!

나는 그녀의 귓불을 물고 계속 장난을 쳤다. 귓불을 혀로 핥았다가 귀속에 혀를 넣고 질척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디아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움츠린다. 이런 그녀는 정말이지 귀엽다.

한입에 널름 삼키고 싶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참아야지. 백 입에 나눠먹을 거다.

내가 다시 그녀의 귓불을 물고 가슴에 손을 대니 가슴이 단단히 뭉쳐있다. 벗겨보면 젖꼭지도 오뚝하게 섰을 거다.

그 귀여운 핑크빛 돌기를 상상만 해도 못 견디겠다. 나는 빠르게 그녀의 셔츠를 벗겨버리고 브래지어 후크도 풀었다. 내 생각대로 그녀의 흰 젖가슴에 진한 핑크빛 돌기가 오뚝 서있다. 보기만 해도 침이 흐른다.

“디아나, 나에게 할 말 없어?”

“아앗……. 으응……. 하아……. 라울…….”

말과 함께 젖꼭지를 물고 세차게 빨았더니 그녀의 입에서 대답 대신 신음이 나온다.

하하하…….

내 귀에 그녀의 신음이 고백처럼 들린다. 그래도 어림없지.

그녀는 헐렁한 셔츠에 레깅스를 입고 있어서 옷을 벗기기에 편했다. 나는 그녀의 레깅스를 팬티와 함께 내려버렸다. 알몸이 되어 내게 매달려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찔한 만큼 사랑스럽다.

“말해봐. 디아나. 응?”

설마 내가 뭘 말하라는 건지 모르지는 않겠지? 당연히 들었으면 저도 해야지. 베이비!

나는 대답을 기대하며 그녀의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손안에 차지게 들어오는 엉덩이에 내 아래로 피가 몰린다.

빨리 나도 벗고 싶다. 아래에 드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내 페니스는 해방을 원하며 나를 압박한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 두드러지는 까만 음모를 보자 이제 정말 못 견딜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여유 있는 남자니까.

“라울……. 나…….”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음모에 코를 박았다. 부드러운 음모 안에 감춰진 걸 맛보는 게 더 먼저였다. 할짝거리며 속살을 벌리고 작은 진주알을 찾아 입에 물자 그녀가 내 머리를 잡고 다리를 휘청인다.

내가 그렇게 좋아? 디아나? 이게 지금 사랑 고백 맞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도 고백은 들어야지.

“아아아……. 라울……. 못 견디겠어요. 제발 나도 말을 좀 하게 해줘요……. 읏…….”

손가락을 속살 안에 밀어 넣자 말하다 말고 몸이 펄쩍 요동친다.

디아나, 너도 느껴보라고 고백을 하고 싶은데 몸이 먼저 달아올라서 대답을 못하겠는 이런 감정 말이지!

나는 그녀의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부드럽고 촉촉한 촉감을 한껏 느낀다.

아, 진짜 디아나의 이곳은 너무 좋다.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나를 희열로 몰고 간다. 핥고 빨기를 반복할수록 점점 젖어들며 꿀을 흘린다.

난 정말 못 참아!

내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앞에서 마구 옷을 벗는데 마음이 급해서 다리가 바지에서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런 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해요. 라울! 나도 당신 사랑해요. 당신 짝사랑 아니라고.”

쿵! 쿵쿵쿵!

나는 드로즈와 바지를 다리에 낀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거였나?

그냥 말만으로도 쌀 거 같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그녀가 나를 보고 웃으며 다시 말한다.

“라울. 정말 사랑해요.”

“다시 말해봐.”

“사랑해요, 라울. 당신 나 짝사랑하는 거 아니야. 나도 당신 사랑한다고.”

내 눈앞에서 눈부신 나신으로 서서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하는 콧대 높은 마녀를 본다.

디아나! 내 사랑.

그녀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단순히 뜨거움 이상의 감동이 가슴에 울린다. 사랑의 고백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단순한 말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고 영혼을 흔드는 단 한마디! 온 인생을 통틀어 들은 가장 행복한 말.

내 사랑이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

내 가슴의 폭발할 거 같은 사랑이 그녀의 사랑과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내 안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그녀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끝도 없이 높은 하늘로 올라가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사랑해!”

그 말 외에는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다. 온몸이 울리는 이 뜨거운 감동!

“라울 울어요?”

그녀가 물기 어린 촉촉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그녀의 눈도 젖어 있다. 내가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겹쳤다.

그래. 운다. 눈물 나게 행복해서 운다. 신음소리가 고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녀의 의지와 영혼을 담은 사랑한다는 말에 눈이 젖어들고 있다.

“사랑해!”

그의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난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내 귀를 타고 가슴을 떨게 하고는 온몸으로 흡수된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가 따뜻하게 나를 안는다. 모든 것이 따뜻하다. 그의 눈빛도, 그의 숨결도 그리고 그의 품도.

다시 입술이 겹쳐지면서 나는 높이 까치발을 디뎠다. 그가 내 허리를 감싸고 코끝을 비비며 다시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술이 겹쳐지고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건드린다.

가슴이 저릿저릿 울리는 게 그전과는 또 다르다. 정말 이 사람이 나를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이렇게 안정감이 들 줄은 몰랐다. 그와 같이 밤을 보내면서도 늘 걱정했던 건 이 사람이 장난은 아닐까, 진심이 아닌 건 아닐까. 하는 거였다.

내 안에서 그래 상관없다. 나도, 나도 즐기는 거다. 나도 그냥 좋은 그때만 충실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나도 하지 않을 거다. 이런 마음으로 지내왔다. 그런데 스캔들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나를 처음 본 이후로 계속 사랑했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다 녹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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