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3)

13. 골빈 재벌의 선물

비행기가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나는 라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요. 같이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는 내 말이 마땅치 않은 듯 시니컬하게 보며 말했다.

“같이 나갈 수 없는 게 아니라 같이 나가지 않는 거지.”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스페인에서 그렇게 기사가 났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은 한국의 인터넷에는 스캔들 기사가 뜨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조심하면 괜찮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은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벌써 났을 거야. 몰라?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식 주고받는 요즘인 거. 마음 단단히 먹어. 잠깐이면 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차라리 같이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냥 같이 나가자.”

“말도 안 돼요. 무조건 먼저 나가요. 나는 그냥 이대로 나가서 공항버스 타고 갈 거예요. 알았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라울이 먼저 입국장으로 빠져나가고 내가 막 입국장으로 빠져나올 때였다. 여기저기서 사진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혼자 덜렁 서서 긴장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주변을 돌아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당연한 게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신입사원은 나 혼자였고 라울과 전용기로 들어와서 그를 보내고 혼자 나왔으니 말이다. 같이 옆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찍어 대는 사진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세뇨리따! 내 뒤로 오세요.”

어디서 나왔는지 세베로가 와서 나를 등 뒤에 감춰주며 쩔쩔매고 있는 내짐을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정중한 한국말로 말하며 길을 뚫고 나를 데리고 나가는 세베로가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도 워낙 놀라서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세뇨리따, 이쪽으로 빨리 오십시오.”

다급하게 자동차 문을 열며 세베로가 말했다. 무슨 차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를 따라 자동차로 뛰어가서 얼떨결에 탔다.

“그러게 함께 나오자고 했잖아. 어디 봐. 많이 놀랐어?”

그 안에는 타고 있던 라울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차가워진 내 손이 크고 따뜻한 라울을 손안에 들어가자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거 같다.

“뭐에요. 우리 같은 차를 타고 가면 스캔들 더 커지는 거 아니에요?”

“됐어. 이미 기사 났어. 이야기는 커졌고. 그냥 두었으면 너 거기서 사진 다 찍히고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거잖아.”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 자기 차에 태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말끝이 떨렸다. 정신이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혹시 이런 일이 아주 많았던 거 아닐까?

나는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추스르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라울이 인터넷에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실시간으로 기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진시환 사장의 여자. 스페인 왕족이기도 한 라울 까스틸로 진의 여자].

제목이 거창했다. 실시간으로 내 사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일개 사원의 월급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목걸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 사진이 기사에 나온다.

뭐? 이 목걸이가 그렇게 비싼 거였어?

천천히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그가 선물한 거니 좋은 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기사화될 정도로 비싼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선물이니, 그의 마음이니 행복하게 받았다.

하나 정도 그의 선물을 몸에 지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받았는데 이게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에 보니 내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목걸이가 티파니에서 한정판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라는 것과 가격대까지 다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공이 몇 개야?

외제 차 두 대 값에 가까운 목걸이 가격을 보고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댓글은 차마 볼 수도 없었다. 몸 팔아 목걸이 받으니 좋으냐는 말부터 해서 별말이 다 쓰여 있었다.

“그런 건 보지 마.”

라울이 핸드폰을 닫았다.

“내가 하는 전화도 다 안 받는 사람이 댓글까지 다 보고 있네. 하여간 쓸데없는 것만 보고 있어.”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걸 보고 라울이 앞에 있는 세베로에게 말했다.

“어디로 갈까.”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베로가 데리고 간 것은 남양주에 있는 별장이었다. 남양주로 가는 동안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라울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나는 창밖을 보며 가슴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려하던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말았다. 삼 일간의 휴가를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어야 했다.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할 때 각오했어야 했다. 이 전에 마드리드에서 같이 있었던 때를 생각하고 안전할 거라고 낙관한 게 잘못이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다니.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지위와 돈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힘없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옆에 앉아있는 그가 다르게 보였다. 스페인에서 봤던 그 사람이 아닌 거처럼 느껴진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감이란 이렇게 큰 거였는데 어째서 그걸 느끼지 못했지? 아니야.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차가 멈춰 서고 한적한 산속에 조용한 별장에 들어오자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차가 들어선 곳은 잘 가꾸어진 정원과 북미스타일의 주택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그의 별장인 거 같다. 스페인의 성에 비하면 초라할 만큼 작지만 아담하면서도 이곳 역시 정원은 엄청 넓다.

차에 내리면서 두리번거리자 라울이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는 사유지니까. 세베로, 디아나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뭐라도 좀 해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점검하겠습니다. 잠시만 있다가 들어오십시오.”

세베로가 먼저 들어가고 나와 라울은 함께 큰 나무 아래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탁 트인 전망과 멀리 보이는 산이 멋지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연이 주는 안정감에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나를 보며 라울이 빙긋 웃는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정말 실감나게 스캔들이 터졌지?”

그랬다. 그의 말대로 스캔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내 자리로 파고들어야 한다.

“나 사원 아파트를 신청해 놨는데. 그리로 들어가야 해요. 사원한테 지급하는 아파트요.”

“알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들어가는 게 옳을까? 그리고 디아나도 이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겠어?”

그는 나를 걱정하는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들어가야지요. 어차피 그저 스캔들일 뿐이에요.”

“맞아.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스캔들을 그냥 덮을 건지 그대로 말할 건지. 그걸 정하는 게 중요하지.”

“네? 뭘 그대로 말을 해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우리가 무슨 사인가?”

“우리가 무슨 사이에요?”

사랑한다는 고백도 아직 하지 못했다. 새벽 3시에 결혼하자고 해서 거절했다. 그러나 아직도 진지하게 사귀자고 한 연인사이도 아니었다. 라울은 그런 고백이나 사귀자는 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사랑을 느끼지만, 규정된 건 아무것도 없는 사이. 함께 밤을 보내고 함께 있으면 좋은 사이. 도무지 이런 관계를 무슨 관계라고 할까. 둘 다 말이 없었다. 내가 눈을 내리자 내 목에 있는 붉은빛 도는 목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목걸이 내가 차기에 그렇게 비싼 거예요?”

“당연하지. 그럼 내가 싸구려를 선물했을 거 같아? 고르고 골라서 딱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랐어. 내 안목이니 당연히 비싸야지.”

“하! 정말 이럴 때도 이게 비싼 거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이 목걸이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저 남자의 저런 잘난 척은 정말 할 말이 없다. 자기 안목이니 당연히 비싸야 한다니!

나는 목걸이를 풀려고 두 손을 목 뒤로 넘겼다. 그러자 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풀지 마.”

서릿발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주춤했다. 말이 칼날같이 예리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라울의 말은 정말 서늘한 칼날처럼 느껴져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지금 풀려고 하는 거잖아. 풀지 말라고. 매일 하고 다녀. 이 내가 너에게 주려고 직접 고른 거야. 알아? 한 번도 직접 이런 여자 물건을 고른 적 없는 내가 직접 골랐다고. 너 주려고.

어머니 선물도 다 세베로에게 지시했던 내가 처음 산 거야. 그런데 그걸 겨우 스캔들 기사 때문에 풀려고? 안 돼. 남한테 보이는 거 싫으면 위에 스카프라도 두르고.”

그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덕분에 그의 눈동자가 아주 까맣게 되는 걸 보자 나는 그를 달래보고 싶었다.

“지금 이 목걸이 때문에 더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사람들 시선을 자극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받았다고 해. 골빈 재벌이 선물했다고.”

여전히 차갑게 떨어지는 말투에 가슴이 다 서늘하다. 목걸이를 떼는 순간 죽이라는 명령이라도 할 것 같다.

목을 쳐라!

나는 눈을 감았다. 잠시 이렇게 눈을 감으면 일단 보이는 게 없으니 좋다.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이 목걸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라울, 제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남들 때문에 내가 선물한 거, 목에서 떼는 거 보기 싫어. 그냥 하고 다녀!”

“…….”

답답한 마음에 그도 나도 서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공항에서부터 이럴 줄을 몰랐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너무 방심했고, 이 목걸이도 그렇게까지 비쌀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예쁘다고는 생각했고 그가 나를 생각해서 줬다는 것에 감격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를 늘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다가오는 것이 좋았고, 그에서 선물을 받는데 기뻤다. 그래도 어떻게든 결론은 내려야 한다.

“당신이 책임져요.”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가 해결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흐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울면서 해결해달라고 떼쓰는 거 같아 울고 싶지 않은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라울이 내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책임질게.”

“어떻게 책임지게요.”

“어떻게든 책임질게.”

“그래요, 당신이 책임져요. 당신이 다 뒤집어써요. 당신은 언론이 뭐라고 비난을 하던 다 받아낼 수 있잖아요. 난 아니에요. 이제 막 입사해서 사회생활 시작하려고 하는데 당신한테 휘말려서 일도 시작하기 전에 꽃뱀 취급이나 당하고, 아무것도 못 하고!”

나는 엉엉 울었다. 정말 슬펐고, 그가 앞에 있었기 때문에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답답했다. 라울이 해결한다는 말도 별로 미덥지 않았다. 아무것도 잘 될 거 같지 않은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어차피 이 사회에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나였고, 라울하고는 별개의 문제니까. 점점 어깨가 들썩거린다. 그러자 그가 초조한 듯이 손을 내밀어 내 볼을 감쌌다. 그리고는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를 기울이며 내 눈동자를 보고는 차근차근 말했다.

“내가 다 책임질게. 미안하다. 내가 할 수 있어.”

나는 젖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보랏빛은 조금 더 진하게 거의 까맣게 보였다. 눈동자가 짙어지자 그의 얼굴이 다소 어둡게 보인다.

“지금은 어떻게 해줄까. 일단 여기서 조금 있다가…….”

“그냥 바로 갈래요. 그냥 지금 바로 사원 아파트로 갈 거예요. 데려다 주세요.”

“잠시만이라도 있다가 데려다 줄게. 여기는 조용하잖아. 사원 아파트로 들어간다고 해도 오늘은 시끄러울 수 있어.”

“그럼 내일은요! 내일모레는요?”

“책임지라며. 책임질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그가 내 젖은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알았지? 울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아주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네가 울지 않으면 다 해줄게. 여론도 잠재울 수 있어.”

* * *

“여보세요.”

혜정이 구윤주와 시시덕거리다 걸려온 전화를 받자 갑자기 긴장한다. 바짝 긴장해서 전화를 받는 혜정을 보며 앞에 있는 구윤주도 숨을 죽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거 같다.

“네, 아버지. 오늘이요? 꼭……. 가야 하나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끊어지는 전화에 구윤주가 혜정을 보고 말했다.

“아니, 누군데 받자마자 그래? 너 같은 게 그렇게 긴장하는 사람도 다 있어?”

“아버지…….”

“아버지? 누구 조찬식?”

그 말에 혜정이 있는 대로 신경질을 냈다.

“아니! 누가 내 아버지야? 내 아버지는 임 회장이잖아. 엄마까지 왜 그래? 조찬식이 누군데? 누군데 내 아버지래? 이럴 거면 엄마도 가. 없어지란 말이야.”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는 혜정의 소리에 그제야 구윤주가 말을 더듬는다.

“아버지? 그럼 누구……. 성진 그룹 회장? 진짜 그 임정환 회장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구윤주의 눈이 동그래진다.

“네가 진짜 출세를 하기는 했구나. 회장이 전화를 다 하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래, 뭐라는데?”

“오늘 저녁에 집에 오래.”

“집에? 너 그 집에서 안 살아?”

“응.”

“왜? 딸인데?”

“몰라, 오니까 그냥 사촌과 집안 식구들 모여서 밥 먹으면서 얘가 숨겨진 내 딸이다. 그런 줄로 알아라. 한 마디하고는 그냥 아파트 하나 얻어줬어.”

“몇 평인데?”

“40평.”

“혼자 사는데 40평? 이야, 좋다. 그런데? 그럼 됐지 뭐.”

“그런데, 사실 아직 몇 번 보지도 못했어.”

“재벌들은 다 그러냐, 어떻게 몇 번을 못 봐? 그래도 딸인데.”

구윤주의 말에 불안한 듯 표정을 지으며 혜정이 말했다.

“나도 같이 지내는 건 싫어. 거기 사람들이 얼마나 날카롭고 예리한지, 아주 거짓말 같은 거 했다가는 다 들통 날 것 같아. 그냥 적당히 이러고 있는 게 좋아.”

혜정은 어깨까지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친다. 진짜 거기 사람들은 너무 무섭다. 조용하면서도 예리한 눈으로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하면 당장 내가 가짜라고 자백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면? 오늘은 왜 오래?”

구윤주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물었으나 혜정은 여전히 신경질뿐이다.

“몰라……. 겁나.”

“겁낼 것 없어, 야. 그런데 나도 겁은 나겠다.”

그리고 그 밤에 혜정은 한남도 임 회장의 집으로 가서 임정환 회장의 앞에 앉았다.

뜨거운 차가 김을 내고 있었지만 마시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맛도 모르겠는 차는 왜 주는지, 할 말이 있는 거 같지 않은데 불러다 놓고 차만 마시고 있는 임 회장이 겁이 나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임 회장은 천천히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는 혜정을 보며 물었다.

“혜정이 너 요즘 어떻게 지내냐.”

평범한 한 마딘데 왜 이렇게 무게감이 느껴지는지, 혜정은 부르르 떨어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뭐 더 필요한 거는 없냐?”

“네.”

전혀 자신감이 들지를 않는다.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아버지라는 사람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어 미칠 거 같다.

하긴, 당연하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아버지라고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뜯어먹고 있는데 이 정도도 힘들지 않을 수는 없겠지.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도망가고 싶기만 한 걸 억지로 참으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게냐.”

임 회장의 눈이 조금 더 무게를 실어 불편한 기색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표정도 목소리도 거의 변화는 없었다.

“네, 저는 그냥 이렇게 놀면서 지내는 게 좋습니다.”

공부라니, 죽어도 하기 싫은 게 공부다.

그러자 임정환 회장이 천천히 눈을 들어 혜정을 바라봤다. 그 눈길이 하도 겁이 나서 눈을 내리깔자 임 회장이 말했다.

“사람이 놀고만 살 수는 없지.”

그때 이재은이 들어와 임 회장의 옆에 앉았다. 임 회장도 무섭지만 혜정은 이재은이 더 무섭다. 이재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남편이 바람피워 난 딸이 아닌가. 혹시 저 여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저를 죽여 버리지는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이재은은 늘 조용하고 말도 차분하게 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사람들이 어째서 흥분을 안 하나?

그때 이재은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가 있니? 일이라는 걸 해야지. 아니면 결혼이라도 하던가.”

“네? 결혼이요?”

“그래.”

사진을 한 장 앞에 내놓는다. 멀끔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이재은이 혜정에게 말한다.

“한주 산업의 이진산 이사다. 서른셋. 젊어서 이사된 지 얼마 안 된다. 한주 산업 정도면 우리 집안 하고 그렇게 크게 기우는 집안은 아니고 웬만한 집안이니 괜찮을 거다. 좀 놀기 좋아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너 하고도 잘 맞는 것 같고.”

뭐? 한주 산업의 이사? 그럼 그 남자도 재벌이잖아? 생긴 것도 반반한데. 그럼 나 정말 결혼하는 건가? 그럼 나 정말 재벌에 들어가는 거야? 혜정의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성질은 네가 맞추면 될 것 같고. 공부도 안 하겠다고 하니. 일찍 결혼하는 건 어떠니?”

좋아. 정말 좋아. 이렇게 어중간하게 가짜 딸 노릇 하며 있는 것보다는 재벌 집으로 시집이라도 빨리 가는 게 좋지 않겠어?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행이구나 고집은 없어서. 거기에 고집이라도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조금은 냉랭한 기운이 돌게 말하는 이재은을 보자 역시 혜정은 눈을 내렸다. 도무지 이 사람들하고는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때 옆에 있던 임 회장이 물었다.

“그래, 그런데 넌 누굴 닮았니? 정말 아무도 닮지 않았구나.”

“네?”

혜정이 아무도 닮지 않았다고 하는 임 회장의 말에 혜정을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리며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정혜원 아줌마가 이 사람의 연인이었다는 건데. 모르겠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네. 엄마도 제가 엄마도 아빠도 많이 안 닮았다는 말은 했습니다.”

“그래, 내가 봐도 둘 다 안 닮은 것 같구나.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성격도. 말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말이지. 네 엄마는 참 학구적인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나도 그냥 노는 거라면 해본 적이 없고…….”

한마디로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노느냐는 말이다. 무거운 눈길과 함께 그렇게 말하는 임정환 회장의 목소리가 너무 무섭게 느껴져 혜정은 꼼짝 않고 있었다.

들통나는 거 아니야?

혜정은 속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참느라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꼬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임정환 회장은 다시 혜정을 꼼꼼히 본다. 그 얼굴은 딸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예리한 눈이 마치 뭔가를 수사하는 형사의 얼굴 같이 보인다.

인사를 하고 나와서는 밥 먹고 가라는 말에도 속이 좋지 않다며 마다하고 바로 혜정이 집으로 돌아가자 이재은이 임 회장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을 좀 해보세요. 이진산이라면 세상이 다 아는 양아치에 막돼먹은 사람인데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자 창밖을 보며 서 있던 임 회장이 그대로 선 채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뭐, 잠깐 꿈을 꾸게 하는 거지. 제대로 될 때까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임 회장을 보다가 이재은이 밖으로 나갔다. 이재은이 나가자 임 회장의 핸드폰이 울린다.

“그래, 제대로 알아봤나?”

- 네, 맞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온 거.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고?”

- 그런 거 같습니다.

“괘씸한…….”

임 회장의 한쪽 손이 옆에 있는 책상을 탁하고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책상 위에 있던 작은 크리스털 조각상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그 작은 진동이 조용한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어휴 간 떨려서 못 살겠네 정말. 이진산이라고? 빨리 결혼하고 싶다. 시집가면 성진 그룹은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무서워.”

혜정은 집으로 돌아와 도우미 아줌마가 식탁에 차려놓은 것을 앉아서 먹다가 밥공기를 들고 TV 앞으로 가서 먹다가 옆에 두고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봤다.

“뭐 재미있는 것은 없나?”

그런데 거기에 이랑의 사진이 보인다.

“남자를 잘 물어? 뭐야 얘. 한국에 온 거야?”

그런데 그 기사가 MK 사장과의 가십거리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자 고개를 흔든다.

“이것도 헛바람이 들었구나? 골치 아프게 됐네! 도대체 한국에는 왜 들러 온 거야. 아 왜 죄다들 한국으로 기어들어 와서 나를 피곤하게 해.”

* * *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MK그룹의 사원들이 사는 이 원룸 아파트는 모든 사람이 MK사 직원들이다. 물론 계열사들이 다 다르기는 하지만 출근 시간이 같아 아침 시간이면 모두 바쁘게 건물을 나온다.

하루를 쉬고 바로 오늘이 출근 첫날이다. 정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배에 힘을 주고 주먹도 불끈 쥐어 본다.

“잘 할 수 있어. 디아나! 정이랑! 화이팅!”

거울 속 나는 단정하면서도 일 잘하게 생겼다. 혼자 파이팅을 하고 건물에서 나와서 몇 발짝을 내디뎠을 때 작게 클랙슨이 울렸다.

또 라울인가?

돌아보니 임규빈이다. 이랑이 굳은 듯 서 있자 임규빈이 차에서 내려 이랑이 앞으로 와 인사를 한다. 스페인에서 보고 몇 개월 만이다. 중간에 여러 번 규빈이 연락을 해서 통화는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보니 반갑다.

“디아나. 정말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할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서울에 왔으면서 연락을 안 해?”

“어떻게 아셨어요?”

하긴 물어보나 마나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뿌리고 들어왔으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나쁜 소문에 휩쓸린 거지?”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규빈 씨는 잘 지냈어요?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겠어. 디아나 만나러 왔지. 디아나. 잠깐 이야기해도 되나?”

“지금 출근 시간이라.”

“차에 타. 데려다 줄게.”

“아니, 멀지 않으니까 그냥 갈게요. 셔틀버스도 있고.”

“그냥 타지.”

그가 힘을 주어 말한다. 그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다. 뭐라고 할까? 스페인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힘이 있어 보인다고 할까? 고집도 부리는 이런 사람이었나?

오랜만에 만나서 잠깐 출근길에 태워준다고 하는 걸로 서로가 부딪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차에 타자 그가 운전하며 말했다.

“소문, 사실이야?”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인할 수는 없다.

“소문은 과장된 거예요.”

“그러면 됐네. 그럼 오늘부터 진짜 사귀자.”

아, 이 사람은 또 아침부터 왜 이러나?

나 첫 출근이어서 지금 엄청 긴장하고 있거든. 그러니 이딴 소리 하려면 꺼져!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싱긋 웃으며 그를 보며 말했다.

“그때 제가 말씀드렸는데. 기억 안 나요?”

“기억 나. 스페인하고 한국은 너무 멀어서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했지? 이제 한국에도 왔으니 문제는 해결된 거 같고. 나는 디아나하고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

“저 지금 MK사 사장하고 소문나서 곤란해 보이는 거 안보이세요? 성진 그룹의 후계자하고도 소문나면 나 한국에 못 있어요. 바로 한국 떠야 해요.”

진짜였다. 어쩌다가 스캔들을 몰고 한국에 들어오게 돼서 지금도 엄청 힘든데 출근 첫날에 임규빈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캔들 내지 말고 진짜로 사귀자고.”

“그게 그거지요. 사귀기도 전에 소문이 먼저 날 텐데.”

“조심해서 사귀어보자.”

“아니요. 나 오늘이 첫 출근이에요. 그만 하세요. 난 그냥 임규빈 씨 봐서 반가운 걸로 딱 여기까지만 좋아요.”

갑자기 라울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면 라울은 그렇게 밤을 함께 보낸 적도 많은데도 나한테 진지하게 사귀자고 한 적이 없다. 스캔들 기사가 나고 새벽 3시에 불쑥 결혼이나 하자고 그러고.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못 들은 걸로 할래요.”

“들은 걸 어떻게 못들은 걸로 하지? 벌써 3번째잖아.”

“전 일에 충실해지고 싶어요. 아직은 누구도 사귀고 싶지 않아요.”

“내가 도움 될 수 있을 텐데. MK 사장과의 가십거리 말이야.”

“마찬가지예요. 그쪽으로 가십이 되나 성진 그룹으로 되나. 그런데 나 이렇게 거물들하고 휩쓸릴 만한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난 진짜 그런 사람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몰라도 지금은 라울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다들 올려다보지도 못하게 높은 나무들만 나에게 얼씬거리는 거야?

“디아나 그런 사람 맞아.”

“네?”

“거물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MK의 사장이 됐든, 성진 그룹의 실장이 됐든 그만큼 디아나가 매력 있으니까 다가오는 거라고. 그리고 운명이든 우연이든 나하고 인연이 닿았던 것도 맞으니까. 거물이라고 하면 거물일 수도 있는 거야.”

아침 바람이 차창으로 스미며 머리가 날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자 규빈이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고는 바라본다.

“나는 디아나하고 열흘 같이 있어봐서 알잖아. 디아나는 스캔들에서 말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리고 디아나만큼 내 마음에 깊게 남았던 여자도 없어. 그래서 진지하게, 아주 정중하게 사귀자고 프러포즈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만일 거절하려면 다른 핑계 대지 말고 진지하게 디아나의 마음을 얘기해줘. 그게 나한테 맞아.

내가 정중하게 하는 프러포즈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길거리에서 불쑥 거절하지 말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그때 거절해줘. 그렇다면 수긍할게.”

단정하고 반듯한 임규빈이 내 앞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프러포즈를 하다니.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은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맞다. 더 진지하고 더 깊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역시 내 대답은 거절일 것이다.

내 마음속에 이미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가슴이 아릿한 것. 나 정말 라울을 사랑하게 된 거 같다. 나의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임규빈은 나를 MK사 사옥 앞에 내려주었다.

새로 들어가야 할 부서로 이동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하며 나를 흘깃흘깃 보는 게 보인다.

휴! 이제 진짜 시작이다.

직장생활!

복도를 걷는 내내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에 심호흡을 크게 했다. 단단히 아랫배에 힘을 주고 걸어가면서 라울이 다 책임져 줄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여간 뻥은! 도대체 책임진다고 해놓고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언제 해명을 할 거야? 책임진다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책임졌겠지.”

똑똑 문을 열고 연회 기획파트로 들어섰다. 그러자 사람들이 밝게 맞아준다. 일단 첫 반응은 다행이다.

“어서 오세요. 디아나 정, 한국 이름 정이랑 씨 맞죠?”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다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했다. 연회 기획파트에는 사원들이 많아서 네 개의 팀으로 나뉘어있다. 나는 그중에서 제3팀에 발령받아서 3팀 팀장님과 인사를 먼저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편안한 분위기에서 얘기한다.

“인터넷에 먼저 올라와서 얼굴을 먼저 봤네요. 물론 거의 가려져서 못 봤지만요.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일합시다.”

“네.”

차라리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해주니 좋다. 삼십 대 중반 정도의 한 팀장은 여자였고 아주 쿨한 성격이었다.

“물론 처음 기사 났을 때는 엄청 반감을 가졌는데 오늘 진시환 사장님께서 해명한 기사가 났더라고요. 오해가 싹 가셨어요.”

옆에 있던 직원의 말에 나는 그저 웃었다. 사람들은 뭔가 더 이야기 할 법도 한데 한마디도 더 하지 않고 바로 내가 할 일에 대해서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런 결제 시스템이군요.”

“그러니까, 이랑 씨는 기획안을 바로 팀장에게 올리면 되는 거고요. 결제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하면 돼요.”

설명을 들으면서도 계속 라울이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내 이야기가 어떻게 낫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거였다.

이 남자 직접 인터뷰해서 기사를 실었나? 아니야, 그렇지는 않았겠지. 비서 통해서 해명을 했을 거야. 세베로가 했을까? 세베로는 집사지 비서는 아니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라울이 뭐라고 해명기사를 냈는지 빨리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느라고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가벼운 티타임 정도의 시간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부스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켰다.

[로얄 스캔들의 진실은? 진시환 사장의 스캔들 해명.]

[일명 로얄 스캔들이라는 MK그룹 진시환 사장의 스캔들에 대해 진시환 사장이 직접 대변인을 통해 해명했다.]

여기까지만 읽고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뭐라고 해명을 했나.

[그 아가씨는 내가 짝사랑하는 아가씨입니다.]

뭐? 뭐라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짝사랑? 지금 날 사랑한다고 언론에 대고 떠드는 거야? 나한테는 제대로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지 않고?

헤드라인만 읽고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입만 열면 폭탄인데 설마 언론에 대고 그러지는 않겠지. 아래 비서진도 있는데 중간에서 언어를 정화하지 않았을까?

* * *

기사 올리기 두 시간 전.

“사장님, 이대로 기사를 내보내는 건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언론인데 어떻게 이렇게 내보냅니까?”

“그냥 이대로 내보내. 딱 이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래야 아무 말도 안 하지.”

“이러면 사장님 이미지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딱 이렇게 내보내. 뒷일은 내가 책임져.”

“이러면 회장님께서 걱정하실 텐데요…….”

“그런 건 신 비서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비서실장은 받아 적으면서 진땀을 흘렸다.

[그 아가씨는 내가 반해서 쫓아다니는 아가씨입니다. 저 때문에 안 좋은 소문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도 곤혹스럽습니다. 얼마나 공들여서 따라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스캔들이 터져서 이러다 차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작정하고 환심 사려고 하는 건 난데, 목걸이가 무슨 대가니 몸을 팔았느니 이런 말까지 나오면 제가 그 아가씨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을 팔고 싶은 사람은 접니다. 만일 그 아가씨가 사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 * *

맙소사!

나는 기사를 보고 기겁했다. 이 남자 진짜 기사에 대고 몸을 팔고 싶다는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그 밑에 달린 댓글은 열렬히 환영하는 투다.

- 내가 살게. 얼마면 돼?

이런 댓글부터 시작을 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댓글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 사내자식이 몸을 팔다니

- 멋있다. 남자가 쉴드치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그래도 응원한다는 댓글까지 난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래놓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했구나. 분명히 해명되기는 된 부분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걸 해명이라고 한 거야?

결국엔 뭐야 썸씽이 있는 사이라는 걸 인정한 꼴이잖아.

회사 사람들도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할 뿐이지 얼마나 궁금할까?

아! 내가 이런 남자한테 해명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말한 내가 죄지. 죄야. 어쩐다?

그렇긴 하지만 진시황제라고 불릴 만큼 한국 기업 안에서는 이미지가 차갑고 냉철한 걸로 유명한 거 같은데 이렇게까지 망가지면서 기사를 내주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첫날 내 사무실 생활은 아주 만족스러울 만큼 평이했다.

아무도 왕따를 시키거나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있어도 공개적이었다. 더욱 고마운 건 진시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난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다 가십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진시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고 대화의 소재로 꺼내지 않고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는 개뿔. 그렇게 생각 한지가 오 분이 지나지 않아서 팀장이 연락이 왔다.

“이랑 씨, 사장님 호출이시네?”

“네? 사장님이요?”

“아, MK푸드 사장님실에 지금 MK상사 진시환 사장님이 오셨대. 사장실에 있는데 이랑 씨 올려 보내라고 그러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연회 기획3팀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동그란 눈들이 다 나를 향한다. 라울! 또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왜요?”

내가 묻자 전달해준 팀장이 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본다.

“정이랑 씨! 정말 몰라?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거야? 진정어린 남자의 고백이라면 웬만하면 받아 줘. 진시환 사장님이 짝사랑하는 거라며. 공개적으로 짝사랑한다고, 저 정도 구애하면 웬만하면 받아줘라.”

아주 소문을 벌지 벌어.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씩씩거리고 사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다 한 결같이 나를 예전부터 알기라도 했듯이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나도 하나하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사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사원증에 이름표도 정이랑이라고 달고 다니고 있으니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래, 나 광고하고 다닌다. 진시환 사장하고 스캔들 있는 바로 그 여자다!

아니지, 당당하게 배에 힘을 줘야지. 난 짝사랑을 받고 있는 쪽이라고. 배에 힘줘, 힘줘.

그러나 사장실 바로 앞에서 노크할 때는 있는 대로 힘이 빠져 어깨가 움츠러든다.

“네?”

“정이랑 씨, 안에서 사장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깍듯하게 안내하는 비서를 따라 MK푸드 사장실로 들어가자 거기에 정말 라울이 앉아있다. 라울은 자기 사무실처럼 앉아있고 정작 사무실 주인인 MK푸드 사장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들어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물론 우리 사장님께. 라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분에 넘치는 반김이 맞다.

“아, 정이랑 씨. 반가워요. 전에 본 적 있죠. 우리. 바르셀로나에서.”

더 친밀감을 강조하듯이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던 것까지 들먹이며 인사를 하는 사장님. 저 라울 때문에 사장님만 불쌍하다.

“네. 사장님. 바르셀로나에서 격려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거기 좀 앉으세요. 나 참, 이 나이에 젊은 사람들 오작교 되게 생겼네.”

“네?”

사장님 말에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살짝 머리가 벗겨진 MK푸드 사장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라울을 본다. 그 옆에 있는 진시환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을 뿐이다.

“아, 세상에 둘도 없이 콧대가 높은 우리 진시환 사장님께서 정이랑 씨한테 완전히 홀딱 빠져가지고, 이렇게 나한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달라네?

보고 싶은데 만나주지 않는다고 사장실로 불러달라고.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시환 사장님인데. 정이랑 씨, 우리 진시환 사장님 별명이 뭔지 알아요?”

“네? 아니요.”

설마 진시황제라는 그 소문 얘기를 하지는 않겠지.

“진시황젭니다. 진시황제. 폭군 중의 폭군이었죠.”

“능력 있는 폭군이었죠.”

옆에 있는 라울이 말한다.

그래, 잘났다. 라울. 진시환! 이렇게 회사로 찾아와서 그것도 사장실에서 면회 요청이라니……. 능력 있게 스캔들에 불 지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나는 라울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사장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라울은 갑자기 변죽이 좋아지기라도 했는지 사장님을 보며 계속 말한다.

“능력 있는 폭군은 아무리 폭군이어도 후세에 이름이 남지요. 물론 제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요. 진시황제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능력 있는 면에서는 같지만.”

잘난 척을 안 하면 라울이 아니지. 나는 라울이 말하는 동안에도 그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제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지 뭡니까. 그래서 이렇게 여기까지 사장님께 찾아왔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요청을 드릴 생각으로 말이지요.”

뭔 공식적인 요청? 뭐, 다른 용무도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일어난다. 나도 따라 일어나자 사장님이 말한다.

“둘이 얘기해요.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사실 오늘 청주 공장에 가는 날이에요.”

“아, 바쁘신 시간에 왔군요.”

라울이 말하자 사장님은 그에게 괜찮다는 웃음을 보내며 나를 본다.

“괜찮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 됐습니다. 사장님, 우리 이랑 씨 좀 잘 부탁합니다. 우리 MK푸드의 신입사원이니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울이 사장님을 보고 말한다. 대체 날 왜 이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지?

그리고는 MK푸드 사장이 나가버렸다. 조용해진 사장실에서 라울이 나를 본다. 아무리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눈길이 하도 따끔거려서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가 막혀, 전화를 아무리 안 받아도 그렇지 남의 회사 사장실로 찾아오다니.

“지금 정신 있어요? 남의 회사 사장실로 찾아오면 어떡해요?”

“언제부터 여기가 디아나 회사가 됐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회사에 가깝지. 난 MK푸드의 지분도 35퍼센트나 가지고 있거든?”

맙소사. 그래 잘났다. 너 부잔 거 나도 다 알아. 그래도 그렇지 사장실에서 지금 데이트라도 하다는 거야?

“여기 왜 왔어요? 빨리 용건만 말하세요.”

“내 인터뷰 기사 봤어?”

자랑스러운 듯 아주 잘한 일에 칭찬이라도 받고 싶다는 것처럼 들린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오만한 미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눈동자에 도는 보랏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이 좋다는 걸까?

“네. 봤어요. 그걸 해명이라고 해놓은 거예요?”

“가장 확실한 해명이잖아. 내가 짝사랑하는 것도 맞고. 그리고 사람들이 더 이상 너를 꽃뱀이라고는 안 하잖아.”

에구. 내가 못 살아. 이런 남자하고 무슨 말을 할까. 그냥 빨리 들을 말 듣고 보내는 게 상책이다.

“여긴 내 회사 사장님 실이에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어서 하고 가세요.”

그러자 그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깊숙하게 몸을 넣고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딱 전형적인 사장님 포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정이랑 씨, 오늘부로 MK상사에 특별히 차출됐습니다. 어서 짐 챙겨서 MK상사로 출근하세요.”

이게 무슨 소린지. 오늘 막 출근해서 일 배우고 있는 사람 불러서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 여기서도 아는 게 없는 데 차출?

“네? MK푸드에 들어와서 오늘 첫날 출근인데 뭘 차출이 돼요? 제대로 일을 해보지도 않았다고요”

“바르셀로나에서 보니까 일 잘 하더만. 그러니까 우리 MK상사의 특별 연회팀에 오늘부터 차출돼서 근무하는 거로 했어.”

“네? 아니 거기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다른 경험 있는 분들도 많을 텐데…….”

“물론 많지. 하지만 내가 특별히 정이랑 씨를 지명했지. 딱 내 마음에 들어서.”

아주 만족한 얼굴을 하고 말하는 라울을 보니 점점 걱정이 몰려온다. 이 남자 때문에 이제 내 직장생활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다. 경력이라도 쌓고 착실하게 월급 저금해서 내 파티 플랜 숍이라도 내려고 했는데 말이다.

“대체 며칠이나 필요한데요? 차출이면 한 일주일이요?”

“무기한. 아직 기한을 정하지 않아서 말이야.”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무기한 차출? 그래 다 좋다. 일단 일하고 월급 받고 보험 되면 되는 거지.

“그럼 나는 거기에 무슨 부서로 출근하면 되나요?”

“그냥 사장실로 출근하면 돼.”

“사장실로요? 지금 장난해요? 대체 비서도 아니고 사장실에서 뭐하는데요?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직장이란 말이에요. 지금 설마 나 데리고 놀려는 거예요?”

나는 울상이 되어 라울을 보며 따졌다. 아무리 높고 돈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꿈꾸던 직장생활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건 너무 싫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 말에 정작 자신이 기분이 상했는지 인상을 팍 쓰며 말한다.

“정이랑 씨. 지금 그 말 무슨 말인지 알아? 지금 내가 경영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하는 건가? 난 사업가고, 투자 대비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그리고 회사에서 장난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가 보랏빛이 도는 검을 눈동자를 빛내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나에게 대단한 것을 알려주는 듯.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누구라도 열정이 피어오를 듯 경영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있다.

“나는 경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이라고 생각해. 중역들이 회의하고 결재를 받을 때 편안한 마음을 주는 안정감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앞으로 나는 웬만한 사람 접대를 사장실 옆에 있는 소연회실에서 하려고. 그러니까 거기 테이블 세팅과 분위기 메이킹을 할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그 일을 디아나가 해주면 될 거 같은데.”

꽥! 결국, 사장실로 출근해서 옆에 있는 소회의실이나 꾸며보라 이거잖아!

라울은 입을 딱 벌리는 디아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 여자, MK상사의 사장실로 출근하라는 말에 눈이 똥그래졌다. 놀랄 때 이 여자는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짙은 눈썹이 갈매기처럼 올라가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은 더 커다랗게 동그래진다.

앵두 같은 입술은 살짝 오므라져서 그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서 저 앵두 같은 입술을 그대로 입에 물고 한참 빨고 싶다. 탱글탱글하고 젤리같이 말랑말랑하고 생각만 해도 심장이 툭툭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데 자기는 놀랐다고 말을 한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남의 일을 그렇게 함부로 들었다 놨다 해도 되는 거예요?”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봐줄 때가 있지만 절대 타협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네가 보고 싶다는데, 옆에 두고 싶다는데 도대체 볼 틈이 없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선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떡하겠는가. 이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도 써야지.

“잘 들어 디아나. 지금 회사에서 발령을 내는 거라고. 그런데 함부로 일을 들었다 놓았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이건 공식적으로 이미 MK푸드 제3팀 팀장에게 전달된 사항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자 순진하게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제 사회 초년생이라 팀장만 무섭지?

“맞지. 이건 공식적으로 MK상사에서 MK푸드에 요청한 거고 정식 발령은 MK푸드에서 낸 거라고. 알아? 그리고 일단 우리 MK상사로 발령 난 이상 나는 디아나 사장님이지. 알아? 하하하.”

지금 이 순간처럼 내가 사장인 게 좋은 적은 없었다. 난 너무 신이 났지만 그녀는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화난 것 풀어주는 건 내 몫이지. 그럼 난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바로 MK상사로 출근하자고. 같이 가면 될 거 같은데.”

“같이 간다고요? 아니 무슨 신입사원이 사장님 차를 타고 가요?”

“이건 내 특별 스카우트 제의니까, 차출명령 내린 것도 나고. 그러니까 내 차를 타고 가도 괜찮아.”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난 뭐가 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서 로얄 스캔들이니 뭐니 난린데.”

“로얄 스캔들이 맞긴 하지. 내가 황족이니까. 더군다나. 나는 왕위계승 서열이……. 나불나불…….

요즘 같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왕족이나 마찬가지고……. 나불나불…….”

진짜 못 들어주겠다. 이래도 저래도 네가 왕족이라는 거지. 저 말을 더 듣느니 차라리 그냥 함께 가는 게 낫겠다.

“그래요. 잘났어요.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라울 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짐 싸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떠나실 때 호출해주세요. 얼마든지 내려갈 테니까요.”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내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벌써 가려고?”

“짐 싸야죠.”

“오늘 처음 출근했다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여기 있다가 같이 가.”

그가 내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리고 바로 당겨 안는다. 품 안에 안기자 바로 그의 향기가 밀려들어 온다. 서울에서도 느끼는 지중해 바람과 올리브 향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순간 눈을 감았다.

아찔한 그의 향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고 그가 입술을 겹쳐온다. 뜨거운 입술이 벌어지며 말캉한 혀가 내 입술을 가르며 들어온다.

“아……. 라울……. 지금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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