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캔들
공항버스가 강남역 정거장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잠시 정차한 다음 다시 출발하려고 문을 닫았다. 차가 막혀서 한 참 오느라 그동안에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구윤주가 눈을 번쩍 뜨고 기사한테 말했다.
“어어, 여기요! 저 내려야 해요! 내리라고 말도 안하고 떠나면 어떡해!”
“아 거 아주머니 진작 말씀하시지. 방송도 했는데 무슨 말을 안했다고. 어서 내리십시오.”
뒤늦게 내리겠다고 나서는 구윤주에게 문을 열어준 기사가 영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윤주는 내려서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휴 거의 2년 만에 오는 거긴 하지만, 뭐, 크게 변하지도 않았네. 그나저나 얘가 어디 있어?”
“엄마!”
언제 왔는지 기다리고 있다 혜정이가 튀어나온다.
“어머머머. 너 좀 봐봐. 너 이거 진짜 샤넬이야?!”
“응. 뭐 이 정도야.”
“야 한 바퀴 돌아봐라. 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두르고 신발도 보아하니 해외에서 수제로 만든 게 틀림없다.
“너 이거 제대로 물었구나? 거봐, 엄마한테 고맙지?”
“고마워 엄마. 그런데…….”
바로 조찬식에 대해 이야기하려는데 구윤주가 바로 말을 막는다.
“시끄러워 이것아. 고맙다고 하면서 연락도 안 하고.”
“아 이제 하려고 했지. 생각해봐. 생전 안 보다가 자식이라고 하고 들어왔는데 나도 자리 잡기가 쉬워? 나도 한 몇 달 동안은 꼼짝도 못 했어. 밤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고.”
“당연하지 이것이 그럼. 요즘은 그러면, 요즘도 밤에 놀러나가?”
“…….”
등을 찰싹 때린다.
“이게 미쳤어, 미쳤어. 그러다 들통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이 들통나기는.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다고. 그나저나 갑자기 왜 들어왔어.”
“아, 이랑이 그게 민박집 정리하고 나 버리고 갔잖아.”
“어우 정말? 그것이 왜 그랬데!”
“야 그년이 그러더라. 딸년도 나 버리고 아빠 찾아 가는 마당에 내가 아줌마를 봉양할 수 있겠냐고.”
“나는 왜 걸고넘어져, 지 민박집 정리하면서.”
“맞는 말이지 뭘! 어찌 되었든 나 목말라 죽겠다.”
“저기 카페 있네. 엄마.”
시원한 음료를 시켜 마시며 카페에서 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조찬식 그놈이 너를 알아봤다는 거지?”
“그래, 있는 돈 다 털어줬어.”
“야 어쩌냐? 그놈 그거 악질인데. 나 이혼하는데도 엄청 고생한 거 너 알지?”
“그래서 어떡해.”
“뭘 어떡해. 한 번 그러고 말았다며. 네가 뉘 집 딸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가만히 있어. 그 백화점 싸돌아다니는 것 좀 그만하고.”
“그래서 그 백화점 안가. 다른 백화점 가 이제.”
“야, 그러면 너 뭐 그 한도 없는 카드 뭐 그런 거야?”
“아니 뭐, 한도가 없기는, 한도가 너무 많아서 지금껏 그만큼 써본 적도 없어.”
킬킬 웃으며 말하는 혜정을 보며 구윤주가 말했다.
“야 그러면 이 엄마 집부터 어떻게 좀 해보자. 응?”
“정말 엄마 묵을 데도 없어? 아 뭐야.”
“야, 그럼 내가 정말 한 푼도 없지. 그때 있는 돈 탈탈 털어서 너랑 같이 스페인으로 갔잖아.”
“알았어. 빨리 가자. 일단 오늘은 호텔에서 묵고 바로 오피스텔 계약하지 뭐. 돈만 있으면 비어있는 것도 많아.”
그때 전화가 왔다. 임정환 회장의 비서였다. 늘 비서를 통해 전달사항을 받는 혜정이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오늘 한남동 자택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왜요?”
‘회장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걸까?
* * *
“흑……. 라울……. 하아…….”
달빛이 떡갈나무 그림자를 드리우며 라울의 침실을 비추고 있었다.
나뭇잎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안을 훔쳐보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실 한 올 걸치지 않고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라울은 벌써 한참을 내 몸 곳곳을 핥으며 나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발갛게 부푼 내 젖꼭지를 물고 할짝대고 있었다.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다가 이제는 혀끝으로 탁탁 치듯이 핥는 통에 온몸이 가슴이 된 것 같았다. 가슴을 핥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끼고 있었다. 내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휘청하면 단단한 팔로 잡고 다시 핥기 시작한다.
그의 손은 한참 전부터 내 아래를 드나들며 만지고 비비고 애가 닳도록 길을 들여서 이제는 허벅지 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하아……. 그만해요. 그냥 해요. 우리…….”
“그만하라면서 그냥하자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해놓고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내 다리 한쪽을 어깨에 메고는 바로 입술을 내려 부푼 아래를 덥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앗! 아…….”
민감하게 부푼 아래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말할 수 없는 자극을 전달하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나를 침대에 밀어 눕히고는 다리만 당겨서 그의 어깨에 얹은 채 그는 여전히 바닥에서 몸을 숙여 집요한 애무를 멈추지 않는다.
할짝거리는 혀가 클리토리스를 건드리고 빨다가 그가 그 민감한 곳을 질근 깨물었다.
“아아악! 하아…….”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며 소리치자 조용한 방안이 울린다. 여전히 달빛은 창으로 넘나들고 떡갈나무는 바람에 일렁이듯 흔들리고 있다.
“디아나. 너무 예뻐.”
그가 말과 함께 그의 페니스를 밀어 넣으며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적당한 무게감이 주는 안정감.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페니스를 미칠 듯 휘감으며 조여들고 있었다. 아래를 꽉 채우는 그를 온힘을 다해 빨아 당기듯 조이자 그가 신음했다.
“큭! 넌 날 미치게 해. 디아나!”
그리고 그의 말처럼 그가 미친 듯이 몸을 쳐대기 시작했다.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탁탁 이어지며 자궁 끝까지 파고드는 그의 페니스가 무서울 만큼 선명하게 느껴진다. 몸 안을 찔러댈 때마다 식은땀이 오싹 배어들며 그와 나의 피부는 땀으로 윤이 나고 있었다.
지독한 관능이 우리를 휩싸고 물결치는 전율에 둘의 몸이 파닥파닥 튕겨 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와 나는 절정의 한 가운데서 정지했다. 불빛이 눈앞에서 명멸하고 거친 숨이 서로의 입안으로 파고든다.
함께 깍지를 끼고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며 꿀 같은 단잠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은 라울이 직접 운전하는 집 차를 타고 안달루시아 지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들판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지브롤터 해협이 보이는 바닷가까지 함께 했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나는 선글라스까지 끼고 그의 바로 옆 좌석에서 절경에 취해 있었다. 먼지 날리며 달리는 이 광활한 평야와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가 옆에서 따스한 웃음을 보내주면 나는 그 웃음을 받아 다시 미소로 대답했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보다 먼저 웃음에는 웃음으로 반응하고 그의 짧은 키스에는 키스로 되돌려주게 된다.
사랑한다는 느낌! 미소와 키스가 주는 황홀한 설렘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모래사장에서 우리 둘은 키스를 하며 굴렀다. 고운 모래가 다리에 묻고 등에 배기는 것 같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피스 수영복위에 커다란 랩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모래가 묻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라울도 나를 안고 신나서 풍덩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물장구를 치다가는 또 나와서 함께 고운 모래사장에 누웠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에게 열중하기도 바빴으니 말이다. 그는 틈만 나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볼을 어루만지며 입에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아득함을 느끼며 그의 입술을 빨고 핥았다. 서로의 입술이 반들반들해지고 발갛게 물들어 윤이 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 키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다닌 곳은 대부분 사람이 많지 않았고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은 없었으니까. 정말로 그랬다. 이곳에서 나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라울은 아니었다.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고 대대로 안달루시아를 지배해왔던 까스틸로 성의 성주였다. 나는 미처 그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도 신경 쓰지 못했다.
나와 함께 다니면서 그게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그런 것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볼 때 그는 나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은 그날 밤에 터졌다. 인터넷에 온통 라울과 나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제목이 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꽃뱀에 걸린 걸까? 라울 까스틸로 안달루시아의 성주.]
나와 라울이 바닷가에서 함께 키스하고 뒹구는 장면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장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까스틸로 성의 성주, 왕위 계승권까지 있는 뼈대 깊은 귀족 라울 까스틸로가 동양의 한 이름 없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다.]
기사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여자가 틀림없다. 사진을 봐도 내가 더 적극적으로 그를 몸으로 유혹하는 것처럼 그렇게 찍혀있었다.
홀터넥 수영복 끈이 풀어져 가슴이 다 드러난 상태로 그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등과 옆의 가슴선이 다 나왔지만 다행히 그의 팔에 가려져 젖꼭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음란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게다가 나는 배경도 없는 그야말로 어떤 가문의 딸이라고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여자니까.
사진이 찍혔던 곳이 어딘가 생각해본다. 낮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해변도 까스틸로 가문의 사유지야.”
그가 팔을 펼쳐 들고 말했다. 고운 모래가 펼쳐진 해변은 세계적인 해수욕장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 개발하지 않았어요? 돈 많이 벌수도 있었을 텐데?”
“그보다는 그냥 두고 보고 싶었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했던 추억이 있는 바닷가니까.”
그의 어린 시절은 이런 것이었을까?
하긴 사람도 없는 가족만의 해변에서 부모님과 놀고 세계 최고의 것만을 누리고 살았을 거다.
그 해변에서 함께 한참을 놀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해산물이 가득 들은 빠에야를 먹고 다시 차를 타고 평야를 누볐다.
곳곳에 목초지들이 있어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게 보였고 아직도 나이 어린 양치기들이 양을 몰고 있었다. 이런 안달루시아에 한가로운 평야를 그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또 함께 이렇게 여행을 하며 기쁨을 공유한다는 건 지상에서 맛보는 천국의 삶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스캔들로 터지자 그때 느꼈던 행복감은 어디로 가고 걱정과 두려움이 먼저 몰려온다.
라울은 기분이 어떨까?
* * *
“누구야? 누가 이따위 기사를 낸 거야?”
나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세베로 앞에서 책상을 내리쳤다.
세베로는 가만히 들으며 아무 말이 없다.
“누가 우리 디아나를 이렇게 깎아내리는 글을 쓴 거야! 이 기자 누군지 당장 보고 기사 내려.”
“주인님, 이미 늦었습니다. 저 기사를 내린다고 해도 이미 순식간에 퍼져나간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SNS까지 다 올라왔을 텐데요.”
세베로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럴 때는 세베로의 침착함에도 화가 난다. 어떻게 디아나를 저렇게 헐뜯을 수가 있는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다 내려. 그리고 어째서 디아나를 그렇게 형편없는 여자같이 기사에 쓴 거지? 도대체 누구야?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거야.”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아마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디아나를 헐뜯으려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성주님은 우리 까스틸로 가문의 실권자니까요.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까스틸로 가문의 성주가 스페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지요.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의 여자와 말입니다. 그게 안달루시아의 까스틸로 성을 지키는 성주의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난 한국인이야. 내가 까스틸로 성의 성주이긴 하지만 나 역시 한국인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고. 스페인인이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라고.
내가 한국 여자하고 사랑하는데 누가 그걸 헐뜯어. 누구도 디아나를 건드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 난.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디아나를 함부로 말해선 안 돼. 디아나는 내 여자고 내가 감싸줄 거라고!”
나는 흥분해서 마구 소리쳤다. 세베로가 내 앞으로 찻잔과 올리브가 담긴 접시를 밀었다. 차 한 모금 마시고 흥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에 더 화가 난다. 이럴 때는 내 말에 장단이라도 맞추어 같이 흥분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세베로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반박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하, 세베로 지금 제정신이야? 내가 디아나 하나 지켜주지 못할 거 같아?”
“아니요. 진지하게 여쭙는 겁니다. 어떻게 디아나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까?”
“뭐라고?”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세베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디아나는 내 여자고 내가 지켜주겠다는데!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든 막아서…….”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인님께서 디아나 양 옆에 있는 한 이런 소문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옆에 데리고 있다는 건 상처만 줄 뿐이고 끝없는 오해와 기삿거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뭐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인님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각, 기업들의 시각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주인님과 손을 맺고 싶어 하는 게 기업들의 생각이고, 여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주인님에게 잘 보여서 이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쟁쟁한 기업들과 내로라하는 아가씨들을 다 마다하고 그저 순수하고 착하고 예쁘기만 한 디아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알맞은 울타리를 지어주지 않으니까 디아나 양만 저렇게 욕을 먹고 있는 게 아닙니까.”
“뭐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 맞는 얘기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그녀를 한 번씩 보는 것만도 너무 벅찼으니까. 단 사흘간 함께 여행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하늘이 뒤집어질 정도로 기쁘고 좋았는데 겨우 이틀 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런데 내가 막아줄 수 없다니.
“네. 주인님은 막아주실 수 없습니다.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뭐? 결혼?”
“네. 주인님의 사랑의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정말 디아나 양을 감싸주고 싶다면 확실한 까스틸로 성의 안주인으로서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도 함부로 디아나 양에게 말하지 않죠. 지금같이 그냥 사랑한다고 만나고만 다니다가는 디아나 양은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 건 일반사람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결혼, 그건 비즈니스야.”
“그건 일반사람들의 생각은 아닙니다. 사업하는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의 생각이죠. 대체로 일반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죠.”
이건 참으로 신선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그런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정말 쭉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부모님도 결국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에 결혼이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왕족 출신의 어머니와 한국 기업의 후계자인 아버지. 둘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혼이었지만 그 역시도 실패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세베로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고 말 하고 있는 거였다.
“뭐라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을 한단 말이야?”
“예.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죠. 평생 두고 볼 수 있는 사람. 평생 지켜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님은 한 번 더 생각해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뭘 말이야?”
“결혼에 대한 주인님의 생각을요. 그리고 정말 디아나 아가씨를 이렇게 몇 번 사랑하다가 영원히 안 보게 돼도 괜찮은지요?”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영원히 안 본다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영원히 안 볼 수도 있다고? 디아나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세베로가 말했다.
“네. 영원히 못 보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사에 놀라고 질려서 꼭꼭 숨어버린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등에 식은땀이 쭉 났다. 디아나가 날 피해서 숨어버린다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절대로 나는 견딜 수 없을 거다.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지만 디아나는 이제 신입사원이고 직장을 버리고 그럴 리가.”
“아니요, 그럴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말이죠. 그녀를 제대로 잡아서 울타리를 쳐주지 않는다면 달아날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아니요. 그건 전적으로 주인님에게 달렸죠. 하지만 결혼이라는 게 가장 든든한 울타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배우자는 동급이니까요. 라울님과 같은 동등한 대우를 디아나가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으신지 그걸 혼자 생각해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겠습니다. 주인님.”
그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디아아에게 결혼해달라고 하면 결혼할까? 아니지, 지금 농담해? 내가 결혼하자는데 거절할 여자가 어디 있어?
디아나! 과연 나는 결혼을 할 만큼 디아나를 사랑하나?
그녀가 보고 싶고 그녀의 옆에 있고 싶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정말 그녀가 나를 피해서 꼭꼭 숨거나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거 같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그 여자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는가?
지금은 그렇다. 디아나를 볼 수 없다면 힘들 거다. 하지만 사람은 다 힘들어도 산다. 엄마가 없어졌을 때도 살았잖아?
그런데 내가 디아나 없이 힘든 걸 참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 뭘 위해서 그래야 하는 거지?
이미 돈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을 만큼 많고 명예도 이 이상은 필요 없다. 굳이 그녀 없이 참아가며 지켜야 할 게 도대체 뭐야?
없다. 전혀 없다. 그녀가 뭐 잘못된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돈이나 집안 같은 거야 내가 있으니 그걸로 됐다.
결혼! 디아나와, 디아나와 결혼한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까. 디아나가 있어야 되니까. 없으면 못 살겠으니까. 그녀를 내 옆에 두기를 원하니까.
왜 이 생각을 이제야 했지? 진작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았을 거 아니야.
그래, 결혼하는 거야. 스캔들도 말끔해지고 디아나와 옆에 있어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는 거 같다.
맞아! 그러지 뭐!
* * *
비어있는 원룸 오피스텔 하나를 계약해서 들어가며 구윤주가 어깨를 들썩들썩했다.
“야, 여기도 좋다 야. 월세랑 관리비, 다 네가 내는 거 맞지?”
그러나 그 말을 듣는 혜정의 얼굴은 영 신통치가 않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혜정이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알았어.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런데 엄마. 진짜로 아빠는 무조건 엄마가 막아줘야 해.”
“걱정하지 마. 나 이제 호강하는 일만 남은 거지? 이야. 그 한도 많은 카드로 네 것 사면서 내 것도 좀 사고. 그 많은 용돈에서 나 조금 주고. 그럼 우리 둘이 잘 살잖아. 그렇지?”
“아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엄마는 무조건 아빠만 막아줘. 응? 알겠지.”
그러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모르는 전화다. 조찬식이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뜬다. 전에 만났을 때 번호를 따갔다.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집으로 찾아간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혜정이 화면을 보고 전화를 받지 않자 옆에 있던 구윤주가 전화기를 보더니 다짜고짜 전화기를 뺏어든다.
“아니, 이 인간이 어디라고 전화야?”
- 어, 이놈의 여편네. 아주 딸 옆에 붙어서 잘 살고 있고만.
“당연하지. 내가 내 딸 옆에 있지 그럼 누구 옆에 있어? 다시 전화하지 마. 또 전화하면 그때는 너 죽고 나 죽어. 알아?”
- 혜정이가 왜 네 딸이야? 엄연히 조혜정이야. 조혜정!
“이 인간이 아주 딸 앞길을 막을 인간이네. 얘가 어떻게 조혜정이야. 얜 임혜정이야. 알아? 또 한 번 전화만 해봐. 내가 아주 콱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야. 너 이 인간 전화 스팸처리 해. 받지 마. 지가 설마 집으로 찾아오겠어? 한번 어디 그래 보라지. 내가 아주 가만 안 둘 테니까.”
“알았어. 엄마. 그런데 정말 엄마만 믿고 전화 받지 않아도 되는 거지? 엄마가 아빠 막아 줘야 돼. 알았지, 응?”
“야. 걱정하지만. 조찬식 그놈은 어떻게든 내가 잘 막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도 걱정이다. 그놈이 오죽 독해야지. 오죽하면 내가 이혼하고 도망갔겠어.”
딸에게도 생색내느라 일부러 죽는시늉하는 구윤주를 혜정이 째려본다.
“엄마. 나 이렇게 만든 거 엄마야. 잘못되면 엄마나 나나 다 감옥 가는 거야.”
“알았어. 무슨 감옥은. 그런 소리 하지 마! 야 그런데 네가 나보다 더 안 되기는 했다. 부부는 이혼하면 남이라는데 너는 자식이라 이혼도 못 하고.”
“엄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혜정이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 * *
인터넷 마다 올라온 기사를 보았다. 모두가 나에 대해서 악담을 하고 있다.
이름 없는 동양 여자, 알 수 없는 여자, 유혹, 밀회, 섹시한 외모,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단어들이 암시하는 건 결국 내가 라울을 유혹하여 밀회하고 뭔가 그에게서 얻어갈 것 같다는 그런 내용이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그가 아무리 애원해도 함께 휴가를 보내는 건 아니었다. 이럴 줄 몰랐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럴까 봐 미리부터 그렇게 경계해놓고 말이다.
그의 옆에 있는 나는 이렇게 초라하다는 걸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이렇게 날카롭게 바라보니 가슴이 무너졌다. 엄마는 나를 정말 귀하게 키웠는데 가진 건 많지 않았어도 나는 엄마의 세상에서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당당하게 열심히 살았어도 그의 옆에 있으면 나는 이렇게 꽃뱀 같은 여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기사를 보면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호감 어린 선물, 눈길 웃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제대로 연애를 해보지 않은 나였으니까.
그리고 밤을 보낸 첫 남자였으니까.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이렇게 여행까지 온 거니까. 나도 그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좋아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우리의 배경은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확인사살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기사를 보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그는 내가 보고 있는 노트북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는 내 턱을 돌려 자기를 향하게 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치고 너무 당당하고 딱딱하다.
“뭐가요?”
“이런 기사가 나게 해서.”
“당신이 일부러 낸 것도 아닌데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니, 미안해.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네가 남자하고 뒹굴어도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열 남자하고 뒹굴었다고 해도 말이지.”
이걸 지금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야? 아니면 위로라고 하는 말이야? 뭐라고 반응을 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멍하고 바라보다가 그냥 내 말을 했다.
“상처받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당신 옆에 있으면 내가 이러니까.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우리 하루 더 남았잖아요. 하루 잘 보내고 헤어져요.”
“…….”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럴 때는 보랏빛이 더 진하게 돌고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보랏빛이 더 진하게 도는 지금은 어떤 감정일까?
“제가 그랬잖아요. 당신은 거대한 소용돌이라고. 스페인에 있을 때 끝내요. 이렇게 간단한 기사라면, 이 정도라면 당신이 내릴 수도 있고, 좀 퍼진다고 해도 그러다 말 거예요. 난 이 삼 일의 휴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요. 당신도 그래야 되는 거 알잖아요.”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한 말이
“같이 가.”
“그래요. 같이 가요. 딱 같이만 가요. 비행기까지만. 내리면 우린 남이에요. 하긴 지금도 남이지만.”
내가 너무 잘라서 말해서인지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힘드니까.
“디아나.”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꼼짝 못 하게 자기 시선으로 옭아맸다.
“말해요, 들을게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당신 바라보면서 당신 하는 말 다 들을게요. 하세요.”
가슴이 무너졌지만,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랑 결혼할래? 그래. 결혼하자. 널 지켜줄게. 이런 가십거리 되게 두지 않을게. 결혼하자.”
갑자기 망치로 얻어맞은 거 같았다. 새벽 세시에 가운을 걸치고 서서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지금 뭘 하자고?
“지금 이 기사 때문에 결혼하자는 건가요?”
그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이 기사 때문에. 이런 기사 더는 나지 않게 결혼하자.”
그가 결혼하자고 했을 땐 가슴이 떨렸다. 쿵 하고 떨어지며 그의 말에 설렜다. 하지만 기사 때문에 결혼하자는 말에는 한 번 더 가슴이 무너졌다. 그건 설렘과는 다른 거였다.
“기사 때문에 결혼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까지 날 지켜주지 않아도 돼요.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하면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기사 때문에 결혼까지 하면서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러자 그의 얼굴이 찌푸려 들었다. 뭔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뜸을 들이다 말했다.
“지금 거절하는 거야? 이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하는데 거절한다고?”
그는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되물었다. 그럼 내가 이런 결혼을 할 거 같아? 실내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기사 막아줄 테니 결혼하자고 하는 그런 결혼을 할 바에는 차라리 그냥 스캔들 안고 사는 게 낫겠다. 남의 말인데 뭐 얼마나 할 거야?
내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요? 기사가 아니라면 나하고 결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우리 오늘까지 같이 있으면서 그런 말 한마디도 없었잖아요.”
“그래 맞아. 물론 안 했겠지. 하지만 기사가 났잖아.”
왜 이렇게 갈수록 말이 힘들어지는 거지? 난 좋은 의도로 결혼하자는 건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화를 내?
진짜 좋아서 이렇게 결혼하자고 하는데 이걸 몰라? 이 라울이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거잖아. 가문이고 집안이고 비즈니스고 다 떠나서 너와 결혼하겠다는데 이걸 정말 몰라?
안 되겠다. 역시 여자는 차분하게 설명을 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거 같다.
“흠흠.”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목을 정화했다. 한마디로 헛기침을 두 번 하고 그녀를 보았다. 화를 내고 있는데도 이렇게 예쁜 디아나!
알았어. 알아듣게 잘 말해줄게. 그러면 되는 거지? 이제 마지막 밤을 불태워야지. 또 언제 이렇게 안고 잘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걸로 언쟁하면 안 되지.
“디아나. 난 생각을 바꿨어.”
내 말에 그녀가 토끼 같은 눈동자를 살짝 움직이며 나를 본다.
아! 이런 눈으로 날 보면 난 또 할 말이 생각나지 않고 일단 한번 안고 싶다. 키스하고 말하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일단 빨리 말하고 키스하는 거야. 그래.
잠시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바꿨는데요?”
“결혼이라는 거 말이야. 나는 결혼은 비즈니스라고 생각했어. 가장 큰 거래처와 혼사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아니면 우리 집안에 필요한 재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집.”
“그런데요? 저는 그런 조건에 하나도 맞지 않아요.”
“그런데 결혼은 비즈니스가 아니야. 아닌지도 몰라.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한다고 하더군. 나는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는지 모르겠군.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결혼했는데도 그 지경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사랑 자체가 거짓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내 머릿속에서 결혼은 비즈니스였어. 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돼.”
“어떻게 바꾸려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걸로. 디아나, 너를 사랑하니까 너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이런 기사 따위는 절대로 널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사랑하니까 결혼하겠다고 말했으니 이럼 된 거지. 하하하.
난 내가 정말 말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서 키스하려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팔을 뻗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건지…….
“아니요, 싫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싫다고?”
“그래요. 싫어요.”
“왜? 왜 싫어?”
설마 내가 싫다고? 이 내가? 이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이 싫다고?
“일단 나를 사랑하니까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건 말이 이상하잖아요. 진짜 사랑한다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이 여자 바보야? 어떻게 그럴 몰라. 아니 말이 뭐가 중요해? 내가 결혼을 하자고 말하고 있잖아. 그런데 싫다고?
나는 화가 나는 걸 참으며 나름 침착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또 있나?”
“네, 사랑한다고 쳐요. 그래도 당신 혼자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이 한밤중에 갑자기 다짜고짜 들어와서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가운에 슬리퍼를 신고? 나는 이런 프러포즈 같은 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뭐? 이 가운이 어떤 가운인데. 웬만한 사람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제 실크 가운이야. 그리고 이 슬리퍼는…….”
“됐어요. 아무리 그래 봤자 슬리퍼고 가운이지. 비싸다고 이런 거 입고 연회에 나가지는 않잖아요. 이런 거 입고 인생에서 중요한 만남을 하는 사람 봤어요? 왜 아주 국제회의에 나가서 이 가운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싸구려 가운이 아니라고 해보시지요.”
“…….”
“결혼하자고 하는 건 프러포즈인데, 일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을 이렇게 스캔들 기사 때문에 다짜고짜 와서, 그것도 새벽 세시에, 침실에서 결혼하자고 불쑥 말하는 그런 프러포즈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결혼이라면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에요. 이런 기사에 떠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너무 말을 잘해서 단 한마디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요점은 내 복장 불량으로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 없다. 뭐 이런 말인가?
그리고 기사 때문에 결혼하고 싶지 않다.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네. 그럼 이제 정말 제대로 말을 해줘야지.
“기사에 떠밀려서 하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말했잖아. 결혼에 대한 생각을 내가 바꿨다고.”
그래 중요한 건 이거지. 왜 감동하지 않는 거지?
“당신은 생각을 바꿨는지 몰라도 나도 내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이상이 있고 꿈이 있고 정의가 있다고요. 이런 건 아니에요.”
“무슨 얘기야. 너 나하고 이틀 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날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아니, 사랑한다는 눈빛, 손길, 어느 거 하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없으면서 어째서지?”
“말했잖아요. 결혼이라는 건 나한테도 중요하다고.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해봐야 한다고요.”
“알았어. 그럼 혼자 실컷 생각하라고.”
진짜 키스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나오는 수밖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잖아.
라울이 탕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공기의 진동에 방안이 다 출렁했지만 이내 적막감이 돌아오며 싸늘하게 춥게 느껴진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눈물이 났다.
내가 집안도 변변치 않고 아무런 대단한 게 없는 여자라서 저렇게 쉬운 거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렇게 대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 숄을 꺼내서 어깨에 감고는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검은 어둠을 밝히는 등이 곳곳에 보인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 때문에 정원은 낭만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 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누가 말을 타려는 걸까?
자세히 보니 라울이었다. 그렇게 나가더니 밖으로 뛰쳐나가 말을 타는 것 같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 이럴 때 말이 타고 싶을까?
윈디라고 불리는 저 말은 새까만 털이 인상적이다. 낮에 보니 눈동자도 새까맣고 반짝반짝 빛나는 게 등은 윤이 나는 검은색 갈기로 덮여있었다.
말을 탄 라울이 달리기 시작한다. 끝없이 펼쳐진 정원 너머로 그가 아득하게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침대에 누웠다.
“엄마,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등 떠밀려서 하는 결혼은 우리에게 좋지 않을 거야. 난 어떤 때도 나를 존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그리고 난 자신이 없어. 엄마. 사실 그 사람하고 결혼까지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해서 너무 당황스러워. 물론 그가 내게 결혼하자고 했을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즉흥적으로 말하는 건 아닐까? 엄마,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나한테 좀 알려줘.”
그렇게 반쯤 기도하는 듯 생각하는 듯 눈가에 눈물이 젖을 때까지 침대에 앉아 있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손길이 느껴진다.
따뜻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이마에 촉촉한 것이 닿았다. 다음은 두 뺨에 차례로 입술이 닿았다.
눈을 뜨자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라울이 내 침에 옆에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벗은 상체는 아름다웠다. 단단한 상체가 달빛을 받으며 그림처럼 보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은 잠결에 봐서 그런지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왔어요, 라울?”
내가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다시 입술을 내려 이마에 키스했다.
“울었어?”
아직도 눈가가 젖어있는 걸 느꼈는지 그가 내 볼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 안 울었어요.”
“울었는데 뭘. 우리 감정소모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네가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게. 알았지? 그러니까 끝이니 헤어지니 그런 말만 하지 마. 알았어?”
끄덕끄덕.
고마운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도 라울과 헤어져서 그와 완전히 결별하고 살 자신은 없다. 시간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가 달빛이 떨어지는 내 이마에 한 번 더 키스했다.
“디아나, 미안해.”
“…….”
“그런 기사가 터지게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거절했을 때 난 속이 다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고.”
“라울.”
내가 손을 내밀어 그의 뺨에 손을 대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바로 입술을 겹치며 나를 안았다. 그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고 그것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뜨거운 고동치는 심장이 전염이라도 된 듯 내 심장도 그렇게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뭐라 하든, 기사에 떠밀려서 떠내려가고 있든 말든, 우리는 서로 사랑이라는 걸 하고 있다. 그것만은 둘 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목에 팔을 감자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디아나.”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가슴이 툭 떨어진다.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이제는 그의 입김만 닿아도 가슴이 팽팽하게 부풀고 젖꼭지가 딴딴하게 뭉쳐진다. 그가 유심히 가슴을 바라보며 입김만 불어도 가슴뿐 아니라 은밀한 곳까지 움찔거리며 달아오른다.
그는 바로 가슴을 입에 물지 않고 계속 바라보며 입김을 후하고 불어넣는다. 저절로 몸이 흔들리고 몸이 배배 꼬인다. 간지러운 느낌과 뜨거운 피부가 그를 향해 튀어 나갈 거 같다. 그의 머리를 감싸 두 팔로 안으니 그의 얼굴이 가슴에 와서 닿는다.
그제야 그가 입술을 벌려 내 가슴을 물었다. 내 살이 뜨겁다고 느꼈으나 그의 입술은 더 뜨거웠다. 빨려 들어가는 가슴이 아릿한 통증을 남기면서 뜨거운 입김에 녹아드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앗……. 하아……. 으…….”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며 세차게 빨아 당기자 몸이 뒤로 꺾인다. 허리를 단단히 받친 그가 한 손으로 가슴을 쥐고 입술로 할짝거리며 이쪽저쪽 가슴을 오고가자 허벅지가 떨리며 다리가 꼬인다.
“널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알아? 자, 봐!”
그가 내 손을 가져다 그의 터질 듯 부푼 페니스를 쥐어 주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것은 그 끝이 쿠퍼 액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그의 페니스를 쥐고 움직였다. 그러자 그가 나를 침대에 천천히 밀어 넘어뜨렸다. 넓은 침대는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등에 닿는 촉감과 향기로 기분 좋은 느낌이 배가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면서 내 아래는 점점 더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애무에 길들여져서 그가 입술을 대면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그다음, 또 그다음을…….
그의 손이 다리를 벌리자 뜨거운 입김이 아래에 닿는다. 움찔거리는 아래는 아랫배까지 당기며 그가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진한 애무나, 아니면 깊은 삽입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부끄러웠다.
부끄럽고 피하고 싶은 마음과 기대하고 원하는 마음이 상충하면서 피부에 작은 소름이 돋는다. 그의 눈길이 아래를 찌른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말캉한 것이 와 닿으며 클리토리스를 건드렸다.
살짝살짝 혀로 건드릴 때마다 단단하게 솟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아래가 민감해져서 견딜 수가 없다. 어디라도 대고 비비고 싶을 만큼 예민한 신경에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그가 나를 뒤집었다.
알몸으로 엎드려 그가 하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엉덩이만 뒤로 뺀 채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다리는 활짝 벌어져 적나라한 자세다. 이런 자세를 하다니!
민망해서 몸을 움직이려 하자 그가 골반을 꽉 쥐고 엉덩이를 더욱 위로 올린다.
“하아……. 라울……. 부끄러워요…….”
“아니야. 예뻐. 이렇게 둥글고 하얗고 매끄러운 몸이 뭐가 부끄러워. 난 더 보고 싶어.”
그가 말과 함께 엉덩이를 깨물었다. 깜짝 놀라 몸이 단단히 굳자 혀로 살살 핥는다. 부드러운 혀가 크게 원을 그리며 엉덩이 살갗을 핥자 허리가 저절로 돌아간다. 커다란 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쥐고 다른 쪽을 핥다가 바로 엉덩이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핥아 올리자 무섭도록 짜릿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뇌수를 흔들었다,
“아앗……. 하아……. 하아…….”
아찔한 감각에 신음하자 그가 크게 엉덩이를 두 손으로 비비며 잠시 주춤하더니 본격적으로 갈라진 틈을 따라 내려가며 핥기 시작했다. 애널을 핥을 때마다 머리끝까지 전율하며 몸이 흔들린다,
“거긴……. 싫어. 하지 마요. 응?”
엉덩이를 흔들며 싫다고 하자 그가 조금 더 입술을 내렸다. 젖어든 아래를 길게 핥고는 손가락을 넣어 내벽을 긁는다. 구석구석 탐색하는 듯 안쪽 살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찌르고 손가락을 구부려가며 건드리는 통에 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디아나. 너무 예뻐.”
그가 두 손으로 부푼 살을 벌리며 혀를 밀어 넣었다. 지독한 전율이 민망한 자세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더 강하게 흐르고 있다. 여린 속살이 그의 입술에 눌리고 꼿꼿한 혀에 찔리며 가슴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가 더 입술을 내려서 클리토리스를 제대로 물었다.
“하……. 윽……. 앗……. 응응……. 으…….”
작은 돌기가 숨어들 틈도 없이 더 깊게 물고 지근거리자 순식간에 몸이 굳어지며 끊임없는 전율이 흘러넘친다. 저절로 엉덩이가 흔들리며 몸을 꿈틀거릴 때쯤 그가 커다란 그의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으윽……. 큭.”
좁은 통로를 밀고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에 나도 그도 동시에 신음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질은 그의 것을 받아들이며 환호하듯이 신경들이 일제히 살아나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반쯤 들어온 그의 것이 다음 바로 끝까지 밀고 들어오자 깊은 삽입에 자궁이 흔들린다.
아랫배가 뒤흔들리는 묵직한 전율은 질량 감 있는 그의 것이 휘저어놓으면서 점점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쿵 그의 것이 들어와 몸을 칠 때마다 진하고 묵직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건 혀로 빨 때와는 전혀 다른 깊고 커다란 파동이었다. 한번 쿵 하고 밀어 넣으면 자궁 끝에 닿는 강한 힘으로 식은땀이 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한 전류가 몸에 흐르면서 으드득 이가 맞부딪칠 만큼 쾌감이 몸을 흔든다.
“아아……. 하……. 라울…….”
앓는 소리를 내며 그를 부르자 그의 배가 내 등에 닿으며 그의 손이 내 가슴을 어루만진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우고 살살 돌려가며 가슴을 주무르자 가슴에서도 자극이 퍼지기 시작하며 아래와 가슴에서 생기는 자극이 함께 어우러지며 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쿵쿵. 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등에 닿는 그의 몸이 함께 흔들리다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단단히 내 골반을 잡고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빠른 속도와 강한 동작으로 내 안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아! 아아…….”
얼마 안 있다가 나는 눈앞에서 하얀 폭죽이 연거푸 터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고 내가 없어져 버릴 것만 같기도 하다. 침대를 잡고 있는 내 팔이 부르르 떨리며 나는 얼굴을 침대시트에 묻으며 그대로 몸을 내렸다. 그러나 내 엉덩이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들려있었다.
그는 줄지 않는 속도로 몸을 쳐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빠르게 몸을 빼내었다. 따뜻한 액체가 엉덩이에 뿜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언제나 철저한 라울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내렸고 그는 티슈로 내 엉덩이를 닦아주고는 그대로 내 몸을 덮으며 안았다.
눈을 뜨면서 라울의 품에 얼굴을 더 꼭 묻고 눈을 감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좋고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아직 내 미래를 이 사람과 함께 하고 결혼이라는 걸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사람도 즉흥적으로 새벽 세시에 결혼하자고 아무 준비도 없이 떠들어 댈 정도로 당황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라울에 대한 내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스캔들이 터졌다. 이 엄청난 스캔들 앞에서 나는 그냥 힘없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내가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떠들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어제 밤늦게 본 기사는 점점 나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모른다고 했던 기사가 몇 시간이 지나자 MK 푸드의 신입사원이라는 게 뜨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스페인에서만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대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런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가십에 떠밀려서, 아니면 즉흥적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겪어내야 될 일이 있으면 겪더라도 제대로 순서를 밟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 그거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면 이제 다시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새날을 맞는 수밖에.
나는 라울의 품을 살짝 빠져나와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섰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떡갈나무가 싱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신선한 아침이슬을 머금은 푸른 잔디는 상큼하게 펼쳐 져 있고 그 갓길에 피어있는 갖가지 꽃과 나를 닮았다고 했던 아마릴리스도 아침 햇살에 막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닥쳐와도 이겨나가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사랑을 지켜나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한 바퀴를 뛰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 와서 달리기 시작했다.
“세뇨리따, 좋은 아침입니다.”
“어? 세베로. 이렇게 운동복 차림으로 있는 건 처음이에요.”
늘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기고 정장 차림을 하고 있던 세베로가 운동복 차림으로 정감 있는 동네 아저씨처럼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
“웬일로 이렇게 아침 일찍 조깅을 하는 거죠? 세뇨리따?”
“힘내려고요.”
“아, 힘내야만 하는 일이 생기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시끄러운 세상사에서 버텨내려면 힘이 있어야죠. 세상 풍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말이죠.”
“좋은 말씀입니다. 세뇨리따. 저도 그래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베로도 힘내야 될 일이 있나요?”
“그럼요. 우리 주인님과 세뇨리따가 풍파를 이겨내려면 저도 그만큼 힘이 세야 하지 않겠습니까. 디아나 양,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디아나 양 편입니다. 주인님과 디아나 양이 대립하는 일이 생겨도 저는 디아나 양 편을 들 겁니다.”
“왜요?”
나는 걸음을 멈추며 세베로를 돌아보았다. 아침 햇살에 세베로의 웃는 얼굴이 더 부드럽게 보인다. 웃을 때 양 눈가에 잡히는 굵은 주름도 다정하다.
“세베로는 라울의 집사잖아요. 그런데 왜 제 편을 든다는 거죠?”
“아가씨가 행복한 게 궁극적으로 우리 주인님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아니까요. 두 분이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디아나 양이 이기는 게 우리 라울님을 행복하게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아마 주인님은 디아나 양에게 이기더라도 디아나 양이 울고 있다면 불행할 테니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간단합니다. 우리 주인님은 아주 능력 있고 머리 좋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지만 가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알아도 인정 안 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디아나 양에게라면 주인님은 이기고 나서도 밤잠 못 잘 게 뻔하거든요. 차라리 지고 나면 잘 잘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무조건 디아나 양 편을 들 거라는 거죠.”
나는 웃고 말았다.
“궤변 같기는 하지만 너무 감사해요.”
“그러니까 디아나 양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제게 말씀하십시오. 보통 주인님의 일은 거의 제 선에서 해결이 되거든요.”
세베로는 달리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나를 보고 웃었다. 그동안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도느라 나도 숨이 꽤 찼다.
“헉……. 헉…….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네요. 저 이제 한국으로 가요.”
“압니다. 저도 이번에만은 주인님을 수행해서 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정말이요?”
현관이 가까이 다가와서 이제 걷는 수준으로 속도를 늦추고 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목과 어깨에 얼룩을 남기자 세베로가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주었다. 어쩌면 세베로는 이 수건을 주려고 나와 함께 뛰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세베로.
“네. 보통은 제가 스페인에 있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새로운 집사에게 한번 일도 맡겨볼 겸 이번에는 라울님을 수행하고 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새로운 사람이요?”
“새로 왔다고 해도 십 년은 지났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하.”
세베로는 슬쩍 가까이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
“훈련받는데 십 년 씩이나 걸렸는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목이 달아날 판이죠.”
“무서운데요?”
“천만에요. 집사들도 엄격한 훈련과 실전 경험이 필요한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몽을 드릴까요?”
“말린 토마토도요.”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라울이 긴 기럭지를 자랑하며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다. 마치 스포츠 용품 회사의 광고모델 같다. 그런데 얼굴은 멀리서 봐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저기 주인님이 나오셨네요. 얼굴이 안 좋으신 게 보나 마나 주인님을 따돌리고 우리 둘이 조깅을 해서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설마요…….”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자 세베로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은 내가 너무 멋져서 늘 경계하시는 거 같습니다. 특히 디아나 양에게 말이지요. 아마 조금 후면 나만 빼고 둘이 뭐하는 거냐고 할 걸요?”
그때 딱 세베로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거기 둘! 나만 빼고 지금 단 둘이서 뭘 하는 거야?”
라울이 소리치는 게 들려오자 나는 진짜 웃고 말았다. 세베로는 진짜 라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 같다.
“세뇨리따,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주인님 곁에서 너무 멀리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 주인님은 강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면이 있거든요. 외로운 시간을 많이 보낸 분입니다.”
그의 애정이 어린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럴게요. 저도 이런 가십 때문에 직장에서 밀려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저는 들어가서 아침을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현관 앞에서 세베로와 라울이 무슨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았을 뿐인데도 영지가 워낙에 넓다 보니 힘이 빠진다.
이러다간 아침 먹을 기운도 없을 거 같아. 다리가 꼬이는 거 같아.
헉헉.
숨을 내쉬며 걸어가다 보니 청초하게 핀 아마릴리스 향기가 나를 잡는다. 아침 햇살을 받아 막 피어난 아마릴리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넌 좋겠다. 맨 날 이렇게 예뻐서. 사람들이 다 너보고 예쁘다고만 해서 넌 얼마나 좋을까? 나는 어떨까.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어?”
돌아보니 라울이었다. 어느 틈에 현관 앞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말이야, 그렇게 몰래 빠져나가는 거, 안된다고 했지?”
“잠깐 산책했을 뿐인데요. 더군다나 늦잠 잤잖아요, 라울은.”
“내가 늦잠을 잔 게 아니지. 네가 일찍 일어난 거지. 게다가 다른 남자하고 아침부터 시시덕거리고. 밤을 보낸 남자가 이렇게 있는데 다른 데 눈을 돌리는 거야?”
뭐? 시시덕거리고 눈을 돌리고? 하는 말마다 기막히다. 참, 일일이 대꾸하면 나도 똑같아진다. 패스!
“그래서 나 찾으러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그래. 뭐하나 하고 보니까 아마릴리스에게 넋두리나 하고 있고.”
“넋두리가 아닌데.”
“사람들 시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걱정해요.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은 당신의 아지트 안에 이렇게 있지만 당장 공항만 나가도 시끌시끌할 텐데.”
“사람들은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 없어.”
관심이 없긴 개뿔!
둘이 함께 공항으로 들어서자 공항 안에는 웬 파파라치들이 그렇게 많은지. 파파라치뿐이 아니었다. 일반인들까지 어찌나 사진을 찍어대는지. 평생 사진 찍을 거 오늘 다 찍었다.
그런데 세베로는 참 독특하게 우리를 방어해줬다. 얼굴 있는 데를 다 팔로 가리고 자기 얼굴을 디밀고 그래서 찍혀진 사진 중에 대부분은 다 세베로의 사진으로 도배됐으니까 말이다. 그 밑에 댓글들이 끝내줬다.
-저 아저씨 누구야?
-얼굴 좀 치워요. 아저씨.
-그 팔로 얼굴을 그렇게 가리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아저씨의 희생정신은 높이 평가합니다.
-온몸을 바쳐서 막아주시네요? 대체 아저씨는 누구세요?”
세상은 참 좋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출입국장에서 찍힌 사진을 게이트 앞에 마련된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다.
“세베로, 사진이 정말 잘 나왔군.”
“감사합니다. 주인님.”
“세베로 덕분에 내 얼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네요. 감사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두 팔과 두 다리, 머리만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진의 세례를 어떻게 피했는지. 물론 나도 선글라스를 끼긴 했지만 모든 사진은 세베로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세베로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얼굴 팔리는 거 괜찮아요?”
“저야 영광이죠. 좀 지나면 저는 자랑스러운 집사로 기사를 도배할 거 같은데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 아저씨는 누구인가?], [라울의 집사 세베로]. 라는 제목의 여기저기 작은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걸 웃어야 할 일인지. 라울은 내가 그렇게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고 따로 가겠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전용기를 타야 한다며 좌석예약을 미리 취소했다. 덕분에 나는 한국으로 올 좌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라울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이제 한국에 도착하면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부터 기사가 될 거다.
푸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긴 비행시간이지만 중간 중간 세베로가 과일과 크래커, 올리브와 아몬드를 가져다주어서 심심하지 않게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울은 그게 못마땅했나?
“세베로, 왜 이렇게 군것질을 많이 가져오는 거지? 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오지 마. 디아나와 둘이 있고 싶다고.”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게 싫었다. 세베로가 너무 무안할 거 같다. 그리고 나는 정말 세베로가 가져다주는 군것질거리가 좋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세베로는 전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말한다.
“주인님은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디아나 양은 꼭 군것질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가씨들은 이런 게 있어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런 군것질거리들을 먹을 때 행복하다.
“설마, 그럴 리가 있어? 정말이야 디아나?”
라울은 전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나를 보았지만 나는 세베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먹을거리가 있으면 좋지요. 그게 뭐 잘못이에요?”
라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여자들은 이렇게 종일 먹어야 행복하다고? 식사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몬드에 육포를 오물오물 먹더니 이제 과일에 크래커까지 이렇게 먹을 수가 있어?
“진짜 먹는 게 행복하다는 거야?”
“네!”
세베로가 빙긋 웃는다. 대신 라울은 인상을 썼다.
아침에 같이 뛰면서 나 몰래 비행기에서 먹을 간식을 같이 짰나?
나만 빼고 자꾸 세베로와 뭔가 통하는 거 같은 게 기분 나쁘다.
휴!
“알았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간식을 가지고 와!”
디아나. 조 작은 입으로 하루 종일 오물거리면서 많이도 먹는다. 나도 점수 따려면 먹을 것들을 아주 잔뜩 사다 놔야겠네. 많이 먹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좋아하는 게 많은 거야?
“한국에 가면 일정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가장 나답게 디아나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별거 없어요. 짐 풀고 그 다음 날에는 출근을 해야 되죠. MK 푸드로. 만일 가서 왕따 당하거나 기사 때문에 시달림당하거나 그런 일이 생겨도 잘 이겨내야겠지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네?”
“절대 없을 거라고.”
“당신은 사회생활을 너무 몰라요. 워낙 꼭대기에 있어서.”
“그건 네 편견이야. 내가 사회생활을 모를 거라는 건 말이지.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내가 막아줄 테니까. 네가 닿는 곳은 어디든지 손을 쓸 거야. 그러니 디아나 걱정하지 마!
이런 생각을 하면 혼자 신이 난다. 적어도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된다는 게 말이다. 그러나 디아나는 믿지 않는 거 같다.
“그건 당신 생각이죠. 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있어도 상관없어요. 난 이겨낼 수 있으니까. 난 당당하게 내 실력으로 합격했거든요.”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사실이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입사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바로 알기는 했죠. 그러니까 바르셀로나로 온 거 아니에요?”
하여간 이 여자는 모르는 게 없다. 그렇다고 내가 순순히 그렇다고 할 거 같아?
“이런,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설마 너 하나를 보겠다고 바르셀로나를 갔겠어?”
이 남자 또 시작이다. 그래, 그 말이 맞긴 하지.
“맞아요. 내가 착각했네요. 설마 나를 보려고 바르셀로나를 왔겠어요? 그럼 한번 들어볼게요. MK 상사의 사장님께서 다른 일정도 다 있을 텐데 MK 푸드의 스페인 시연회에 오신 이유가 뭔가요?”
어쩐지 항복을 받아내고 싶다. 날 좋아해서 나 때문에 바르셀로나에 왔다는 걸 말이다.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나오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고 말이지. 더군다나 MK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음식이 맛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지. 내가 직접 맛보고 그거에 대해 평가를 하기 위해서 온 거지.”
참으로 거창하고 장황한 설명이지만 결국 날 보러 왔다는 얘기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러니까 넌 전혀 특혜를 받은 게 아니지.”
“나도 특혜 받았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의심 가는 어떤 면이 있긴 하지만 그냥 묻어줄게요.”
“고마워, 디아나.”
“그렇게 순순히 자백을 해주니 더 고맙네요.”
“자백이라니.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말이야. 나같이 교양 있는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거야. 나는 말이지……. 나불나불…….”
나는 그냥 자는 척을 했다. 저 잘난 척에 허풍은 아무리 들어도 끝이 없다.
비행기가 비행을 시작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나자 점점 지루해진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런데 축축한 게 입에 닿는다. 입술을 파고들고 달콤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지난번 열차에서 꾼 것 같은 꿈일까.
“또 라울?”
눈을 뜨지 않아도 꿈속에서도 이게 라울인지 알겠다. 지중해의 바람을 품은 올리브 향기.
음, 그의 손이 가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 꿈이 너무 생생해.”
“너무 생생해?”
눈을 뜨자 아니나 달라? 그 넓은 자리 다 놔두고 왜 내 자리에 와서 앉아있는 거지 이 남자?
“라울, 지금 여기 비행긴 안인 거 알아요?”
“그래. 전용 비행기지. 함부로 사람이 들어오지도 않고. 이 자리가 키스하기 가장 좋은 자리라는 거 몰라? 내가 괜히 너를 죽어라고 전용비행기에 태웠는지 알아? 한번 해보는 게 내 꿈이거든.”
“뭘요?”
“섹스.”
“미쳤어요? 세베로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데?”
나는 펄쩍 뛰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휙 당겨 안고는 귓가에 대고 말했다.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밖에서 빨간 불이 켜지지. 그건 안에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야. 비행기 안에서 회의를 하기도 하거든. 보안이 필요한 중요한 회의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가 말하면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좌석 위쪽에 문 잠김 표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아! 정말……. 흑…….”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잘도 손을 움직이더니 브래지어 후크를 먼저 풀고 셔츠를 브래지어와 함께 올리고는 그대로 얼굴을 묻는다. 진정으로 딱딱해진 젖꼭지를 입으로 물고는 혀로 굴리기 시작한다.
“으응……. 진짜 너무해.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해요?”
“음, 아직도 여섯 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가 말과 함께 젖꼭지를 질근 물었다.
“흐흑…….”
두 손으로 바짝 가슴을 올려 잡고는 가운데로 몰아서 이쪽저쪽 핥으며 빨자 그 모습이 너무 야해서 민망하다. 민망하면서 즐기게 되는 이 묘한 상황에 몸이 뒤로 밀렸다. 그러자 휙 하고 좌석 등받이가 넘어가면서 완전히 침대가 되어버린다.
“어머, 이게…….”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다리 한쪽을 휙 하고 자기 어깨에 올려버렸다. 자동적으로 뒤로 눕게 된 나는 천장의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벨벳 느낌의 방음 천으로 꾸며진 실내는 환한 아이보리와 브라운으로 일반 집의 거실 같이 느껴진다.
“아아……. 음……. 응…….”
그러나 비행기 내부의 인테리어도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울이 실크 팬티채로 은밀한 곳을 한꺼번에 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타액으로 축축해진 팬티를 통해 그의 입김이 바로 느껴진다.
조금도 적응할 수 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그의 모든 애무가 나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금이 어떤 상황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도 라울의 단단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얇은 티셔츠 위로 그의 단단하게 뭉쳐진 작은 젖꼭지가 도드라져서 그 끝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그가 훌렁 셔츠를 벗었다. 단단한 가슴에 내가 혀를 가져다 대었다.
혀끝에 닿는 딱딱한 촉감에 나도 모르게 질끈 깨물자 그의 몸이 경직되며 내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바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윽……. 응……. 아응…….”
거칠게 다가오는 입술이 이전과는 또 달랐다. 옷을 입은 채 흐트러져서 그곳만을 내놓고 있다는 게 더 야하게 느껴진다. 그가 바지를 내리자 튕기듯 페니스가 허공에서 흔들린다. 그가 내 입가에 그것을 대어주며 거꾸로 엎드리며 내 팬티를 밀어 내렸다.
이런 생각도 못 한 흉측한 자세라니!
눈앞에 그의 페니스가 끄덕이며 보이고 있었다. 서로의 성기만을 바라보는 이런 자세가 있다니!
이 남자는 정말 얼마나 많은 섹스를 한 걸까?
그저 그의 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내 다리를 활짝 벌리고는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길게 혀로 핥으며 손가락으로 만지자 바로 숨이 넘어갈 거 같다.
“학학…….”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자 그의 것이 벌어진 내 입으로 다가온다. 그가 내 입안으로 그의 것을 밀어 넣었다.
“우웁…….”
부드럽게 혀로 핥다가 빨자 그가 펄쩍 뛰어오르듯 일어난다.
“역시 넌 그런 건 안 하는 게 나아. 내가 할게…….”
그리고 그가 바로 내 안으로 밀어 넣는다. 깊은 삽입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리에 말린 스커트 아래로 활짝 드러난 하체와 위로 말려 올라가 가슴만 드러난 상체, 모든 것이 외설스럽기만 한데도 그와 함께라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니까. 나도 그가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