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43)

10. 야한 열차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잠깐 눈을 감았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얼굴을 만진다. 살짝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니 이제는 그 손이 귓불을 만지고 목선을 타고 내려와 가슴을 손에 쥔다.

비몽사몽간에도 내 가슴을 쥔 그 손이 라울 같아서 가슴을 앞으로 밀었다.

아니지! 라울일 리가 없잖아.

눈을 뜨니 정말 라울이었다. 이 사람이 언제 내 옆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소리도 없이 짓는 그 미소에 마음이 다 녹아버릴 거 같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자 그가 바로 입술을 겹치며 파고든다.

“디아나!”

그리고 그의 손길이 바로 셔츠 속으로 파고들더니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고 젖가슴을 꽉 잡는다. 놀란 가슴이 단단히 뭉치며 젖꼭지가 꼿꼿하게 선다. 그가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우고는 가슴을 쥐고 비틀었다.

“하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삼켰지만, 그의 입술과 혀에 막혀 어차피 신음이 새어나갈 거 같지도 않다. 그가 조금 더 힘을 주어 젖가슴을 꽉 쥐자 아래로 왈칵 애액이 쏟아지며 젖어드는 게 느껴진다.

“여기는 또 어떻게 탄 거예요? 분명히 처음 탈 때는 없었는데?”

“그런 게 중요한가?”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이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어찌나 정교하게 가슴을 애무하는지 그 감각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는 가슴을 애무하는 걸로 나를 절정으로 보내버릴 생각인 거 같았다.

계속 몸을 밀착해서 입술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내 몸은 유리창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차창으로 스페인의 평야가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모두 내 셔츠 속으로 밀어 넣어 가슴을 만지는 통에 허리가 자꾸 휜다.

손으로 만지는 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셔츠를 올리고는 바로 입술을 내린다. 손을 타서 불긋불긋한 하얀 젖가슴에 젖꼭지가 도드라져 있었다. 라울이 입술을 내려 세차게 빨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혹시 주변에 누구라도 있으면 어쩌나 해서 둘러보니 내가 탄 열차에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모두 창밖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열차 등받이가 높아서 살짝만 몸을 구부려도 앞에서 뭘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데서…….

그런데 이런 데서 애무를 받는 게 이렇게 짜릿한 일이었나?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내 가슴에 얼굴을 내리고 정신없이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 단단히 힘을 준 혀로 젖꼭지를 톡톡 건드리듯 핥아 올릴 때마다 가슴이 전율한다.

온몸이 가슴이 되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에 눈을 감았다. 그가 두 손으로 가슴을 쥐고 양쪽을 오가며 빨고 물자 이제는 고개마저 흔들린다. 그러면서 뭔가 조금 더 은밀하고도 자극적인 것이 기다려진다.

내가 슬쩍 손을 내려 그의 중심부를 더듬었다. 생각한 대로 그의 것이 단단히 발기되어 손안 가득 잡힌다. 그것은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아서 두 손으로 그것을 감쌌다. 그러자 그가 내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입김이 온몸에 불을 지피는 거 같다. 그의 손이 얼굴을 감싸며 귓불을 크게 비비자 마찰로 나오는 소리가 끔찍할 만큼 몸을 전율케 한다.

“여기서 이러면…….”

“여기라서 더 좋아. 네가 있는 곳은 어디라도 괜찮아…….”

그가 말과 함께 다시 키스하기 시작했다. 혀와 혀가 얽혀들고 타액이 오가며 점점 숨이 가빠지자 그가 내가 입고 있는 긴 스커트 밑으로 손을 넣었다. 풍성한 스커트 안은 팬티 한 장을 입었을 뿐이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더니 팬티 한 장을 옆으로 젖히며 내 음모를 살살 손으로 더듬었다. 털 하나하나가 올올이 서면서 머리카락까지 곤두서는 걸 느낀다.

“하아…….”

“좋지? 나를 느껴. 디아나.”

그가 귓불을 질근질근 물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난 이 사람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라울의 손길을 기다렸나?

아니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내 몸은 이미 너무나 뜨겁게 달아올라 이곳이 열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매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손가락을 깊이 넣고 내벽을 긁자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자 그가 손을 치우고 입술로 내 입술을 막아준다. 오가는 숨결이 느껴진다. 지중해 바람을 머금은 올리브향기!

그 숨 막힐 듯한 라울의 향기와 아래로 느껴지는 뜨거운 손짓에 눈이 가물가물하다.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엄지로 솟아오른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핫!”

머릿속이 휘이 돌며 하얀빛이 소용돌이를 친다. 그 소용돌이가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너무 센 빛에 놀라서 퍼뜩 눈을 떴다.

열차가 터널을 지나 한없이 펼쳐진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차창을 통해 엄청난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며 손을 보니 양손에 우산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있다.

그의 것이라고 잡고 있던 게 우산이었다니. 게다가 대낮에 열차에서 이렇게 음란한 꿈을 생생하게 꾸다니…….

누가 볼까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이 별로 없는 열차는 조용하다.

못살아!

아무래도 라울하고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음란한 생각이 내 무의식 속으로 전달 된 게 분명하다. 바르셀로나에서 또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런 꿈을 꾸나?

그러면서도 잡고 있는 우산 손잡이는 놓고 싶지가 않다. 그대로 열차가 바르셀로나를 향해 가고 있었다.

* * *

백화점 앞 나무 아래서 조찬식은 혜정을 보며 소리쳤다.

“혜정이 너 이년, 너 도대체 어떻게 성진 그룹의 딸로 뒤바꿈을 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런 건 아빠가 알 필요가 없어. 아빠가 날 왜 아는 척을 하는 거야? 정말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으니까 다신 찾지 마세요.”

그러자 바로 손이 올라갔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거라 걸핏하면 때리던 습관이 남아있어서 조찬식은 순간 손이 올라갔지만 멀리서 엄 기사가 보고 있는 게 보이자 부들부들 손을 내리며

“못된 년, 어릴 때부터 앙칼지더니! 아비라고 부르든 말든 알아서 하고 돈이나 내놔.”

“뭐라고요?”

“당연하지. 이렇게 근사하게 빼입고, 너 신고 있는 구둣값 하나라도 주면 되겠구먼. 돈 없어?”

그러더니 마구잡이로 가방에 손을 댄다. 저기서 엄 기사가 보고 있는 걸 느끼자 혜정이 소리쳤다.

“그만 좀 못해요? 저기서 보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정말 이대로 그냥 같이 경찰서 갈까요? 그래요, 같이 그냥 감옥 들어가서 콩밥 먹으면 되겠네. 그러면 아버지도 돈 한 푼 못 받는 거고, 나도 그렇고.”

그러자 그제야 조찬식은 손을 내렸다.

“알았어. 내가 급해서 그러니 있는 거 다 내놔, 일단.”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다고 이렇게 큰 소리에요? 그냥 차라리 감옥 가요. 나도 그냥 감옥 갈래. 나도 전과자 되고 아빠도 개털 되는 거지 뭐. 그게 원하는 바야?”

그러자 그 재서야 조찬식이 헛기침을 킁킁 두 번 하고는 말했다.

“아니, 뭐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있는 거 조금씩 주면……. 나 그냥 너무 힘들어서 그래. 청소하면서 살고 있다고. 내가 지금 네가 가진 거라도 좀 주면 그냥 당분간 모른척하고 사마.”

“당분간? 다시는 찾지 마세요. 다시는!”

혜정은 지갑에서 오만 원 권을 있는 대로 꺼내서 마구잡이로 조찬식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나도 돈 없어. 뭐 재벌가 딸내미 좋아하네. 인제 그냥 이러고 껍데기만 다니는 거야. 자꾸 나보고 돈 달라고 그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두둑한 오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들고 조찬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면 충분하다. 이거면. 그래 됐다. 가라. 나 다신 너를 찾지 않으마.”

그제야 혜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시는 찾지 마. 다시 찾으면 그냥 같이 감옥 가는 거야. 내가 말했지? 딸 전과자 만들고 당신 어차피 개털이야.”

“아버지한테 당신은. 알았으니까 어서 가.”

오만 원짜리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조찬식이 말했다. 혜정이 파르르 떨어가며 엄 기사와 함께 차로 향했다. 뒤에서 조찬식이 그런 혜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완전히 화수분이 생겼네. 이제 내 팔자는 핀 거야.”

혜정은 조찬식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뒤로는 안절부절못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아버지하고 부딪힌 거지.”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 이 좋은 방에 이 좋은 집에 좋은 옷에 좋은 화장품에, 원하는 대로 밤새 클럽에 가서 놀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술주정꾼 아버지 때문에 모두 잃을 수 없다.

다급한 마음에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엄마 구윤주에게 전화를 했다.

구윤주는 서울에 막 도착해 공항을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혜정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럼 그렇지. 이러니까 이게 내 딸년이지. 내가 한국에 온 지는 어떻게 알고 이렇게 금방 전화야.

여보세요? 야 이 혜정이년, 너 도대체 왜 그렇게 연락이 없어?”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거였다.

“뭐야, 정말. 나 아버지 만난 거 알아?”

“그래, 네가 아버지 만나려고 여기 왔잖아. 그래 회장님,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

“그만 좀 하라고. 조찬식, 조찬식을 만났다고. 그 술과 노름에 미쳤다는 그 아버지 말이야.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버젓이 백화점 지하에서 청소를 하고 있더라고. 날 보자마자 당장 돈 내놓으라고!”

“아니, 그 돈을 왜 그놈한테 줘? 나한테 줘야지.”

미치겠는 건 엄마나 아버지나 다 마찬가지다.

“그만 좀 해. 그런데 한국에 왜 왔는데?”

“왜 오긴? 이랑이 그년이 말이야, 날 그 스페인에서 버리고 가지 뭐냐? 하여간 긴 말할 거 없어. 만나서 얘기하자.”

“알았어. 엄마. 그러면 일단 공항버스 타고 강남으로 와.”

* * *

마드리드가 내륙에 있는 스페인의 수도라면 바르셀로나는 해안을 끼고 있는 더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다. 젊은이들의 도시이고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있는 축구의 도시이기도 하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손을 잡고 축구장이 있는 곳으로 전부 모여든다.

아버지의 어깨에 당당히 목말을 타고 바르셀로나 깃발을 흔드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곳엔 어김없이 거리의 악사들이 있다. 경기장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연주를 하면 사람들이 그 예술성을 인정하며 앞에 있는 모자에 동전을 넣곤 한다.

어떤 여자들은 미끈한 다리에 바르셀로나 깃발을 문신하기도 하는데 전혀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바르셀로나의 주 축구장인 캄프누는 스페인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십만 관중이 모인다는 이 축구장을 사람들은 몹시도 사랑한다.

바르셀로나는 여러 번 온 적이 있다. 지난번에 임규빈 가족을 안내한 곳도 이곳이었으니까 말이다. 세비야가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라면 이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지방의 가장 큰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MK푸드가 시연회를 하는 것은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좀 더 화려하고 정열적이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도시이니까 말이다. 젊은이들은 외국의 문물이나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는데 훨씬 더 개방적이다. 아마 동양의 음식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바로 MK사로 가기 전에 바르셀로나 거리를 한번 걸었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기도 했지만 일단 현재 바르셀로나의 분위기 같은 것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뽑았을 것이고 MK사의 시연회에 신입사원 연수에도 보내지 않고 바로 투입하는 것도 내가 어학이나 스페인의 분위기를 한국인들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만한 실력을 한 번 더 갖춰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음식점들도 기웃거려봤다. 대파가 나는 때여서 칼솟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칼솟은 석쇠에 구워서 고기와 파를 같이 먹는 음식이다. 대파를 길게 자르지도 않고 겉이 시커멓게 타도록 석쇠에 굽고 고기도 굽는다. 이 칼솟을 고기와 함께 호두와 견과류가 들어간 로메스쿠 소스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벌써 이렇게 대파가 맛있는 계절이 된 거다. 바르셀로나를 한번 돌아보자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도 더 솟는다.

그때 멀리 움직이는 케이블카가 보인다. 고성들이 군데군데 있는 바르셀로나는 역시 스페인 특유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MK 지사로 방문을 하자 어떻게 알고 신입사원에 대한 환영치고는 융숭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디아나. 얘기 들었습니다. 신입사원인데 바로 우리 시연회에 스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은 여자였다. 그런데 한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페인 사람이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한국인이 반, 스페인 사람이 한 30%,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이나 홍콩, 중국의 동양인들이에요. 국제적인 맛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이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때요, 바르셀로나. 자주 왔었나요?”

“네. 여러 번 왔습니다.”

“우리 MK사 시연회가 열리는 데는 타라고나 해변에 있는 호텔이에요. 경치가 정말 좋겠죠?”

세상에, 타라고나 해변에 있는 호텔이라니!

말만 들어도 눈이 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타라고나 해변은 지중해의 발코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중해가 푸르게 보이는, 그야말로 해안 전망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그런 해변의 호텔에서 시연회를 한다면 정말 사람들이 감탄할 거다. 어쩌면 음식보다 경치에 더 취할지도 모른다.

“디아나가 맡은 일은 테이블 세팅 보조예요. 물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옆에 있는 제인에게 말해주면 돼요.”

노랑머리를 한 제인은 미국에서 온 테이블 세팅 전문가라고 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체계적인 플랜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었다.

“테이블 세팅은 두 파트로 나눠서 합니다. 주빈들을 위한 앞부분에 설치된 테이블과 좀 더 많은 일반인들을 위한 테이블이에요.

주빈들을 위한 테이블은 조금 더 중후하게, 또 일반인들은 낯설지 않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테이블로 세팅을 합니다.

모든 그릇들은 주빈 테이블은 최고급 테이블웨어로 들어가고요. 일반인들과 기자들이 있는 석에는 다른 식기를 씁니다. 꽃들은 컨셉을 정해서 꽃집에 가서 부탁해야 돼요. 꽃꽂이 전문가가 있는 꽃집을 거래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컨셉을 정하면 디아나가 바로 가서 설명하고 꽃을 준비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해요. 알겠죠?”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신이 났다. 일반 가정에서 하는 소규모의 파티가 아니다보니 사용하는 식기들도 다양했다. 주빈들의 테이블웨어는 물론 최고급 식기들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식기들도 절대 그 감각에서 뒤지지 않는 멋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게 일회성이 있는 플라스틱이라는 거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식기들이 가득한 곳에서 제인이 손가락으로 이거, 이거 지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그 식기들이 어느 테이블에 들어갈 것인지 준비하고 있었다.

냅킨의 종류도 수도 없이 많다. 샘플들을 늘어놓고 그중에서 테이블 컨셉에 맞는 것을 고르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 난 주빈 테이블에 올라갈 냅킨으로 연한 그레이 색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거 어때요?”

“그레이네요. 중후한 멋이 있긴 하네.”

“네. 저번에 세비야의 성에 가서 보니까 이 그레이와 골드로 테이블을 꾸몄는데 굉장히 멋있었어요. 아이보리와 골드하고는 조금 느낌이 다르지만요.”

“그거 좋겠네. 그레이와 골드라. 그럼 그레이가 많이 연해야겠네.”

제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거기에 있는 그레이톤의 냅킨 샘플들을 다 뽑아서 일렬로 늘어놓았다. 하얀 테이블보에 늘어놓으며 어떤 게 나은지 대조하고 있을 때였다.

“와우. 도착했대.”

“뭐라고? 누가?”

“정말? 사장님이? 이 바르셀로나에? 웬일이야?”

“그러게. 원래는 참석한다는 말이 없었는데. 뭐 대단한 분이라도 오나 보지? 바르셀로나 시장이라도 오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MK푸드 사장이 여기까지 오겠어? 시연회 하나 보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잠깐 보고 디아나는 열심히 냅킨샘플들을 한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샘플들을 늘어놓았다 다시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다. MK푸드의 사장이 누가 됐든 상관없다. 이제 갓 입사했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

“지금 도착해서 사무실로 올라오고 있대. 지사장이 바짝 긴장해있던데?”

“지사장이 긴장할 만도 하지. 한국에서 MK푸드의 사장이 직접 날아왔는데. 통상적으로 있는 시연횐데 뭐 이렇게까지 사장이 다 날아오고 그래?”

“그러게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얼마 안 돼서 냅킨 샘플을 선반에 다시 다 넣어두고 이번에는 커트러리를 보고 있을 때였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주르륵 줄을 서서 고위직들이 들어선다. 물론 나야 그들이 고위직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인사를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와서 걸음을 떡 멈추더니 그가 말했다.

“아, 자네가 디아난가? 이번 신입사원?”

“네.”

나는 바짝 얼어서 인사를 했다. 가장 높아 보이는 이 사람. MK푸드의 사장이라고 하는데 MK푸드의 사장이 말단 직원 앞에 와서 인사를 하는 일도 있나?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해. 디아나. 우리 MK푸드의 미래는 신입사원들에게 달려 있잖아?”

맙소사. MK푸드의 미래는 모르겠지만, 사장이 일개 신입사원에게, 그것도 신입사원연수에도 가지 않고 바로 이 시연회에 스텝으로 참석하게 된 나에게 관심을 갖는 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MK푸드의 사장이 손을 내밀었으나 바로 악수를 하지도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배가 팔꿈치로 툭 친다. 놀라서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서 악수하자 그가 한 번 더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한다.

“여기서 즐겁게 일하고 좋은 경험도 쌓고 이력도 쌓아요. 정말 우리 MK푸드 잘 부탁해요.”

반은 농담 같은 말이지만 왠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마치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거같이 보인다고나 할까?

아! 착각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런 착각을 하게 인사를 할까? 나는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아니에요. 디아나. 열심히 까지는 안 해도 돼요. 그냥 즐겁게만 해주면 돼요.”

무슨 사장이 신입사원에게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하라고 말하나. 하긴 요즘은 회사 분위기가 신입사원들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긴가? MK푸드 참 좋네.

* * *

“사장님, 아무래도 이틀 이상 일정을 뺄 수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마드리드로 가서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그 일들을 해결하고는 영지를 한 번 둘러보셔야 합니다. 영지 한쪽 해변에서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어느 부분에 어디까지 허락하실지 확인해 보시고 결정을 해주시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마드리드에서 일정을 다하게 되면 바르셀로나에서 이틀밖에 못 있는 다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그 이상은 시간을 뺄 수가 없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이틀 후에는 파리로 가셔야 해서요.”

“뭐가 이렇게 복잡해?”

단 한 번도 일이 많다고 해 본 적 없고 일정을 조절해 본적 없는 라울이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최대한 일정을 빼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비서진들은 난감하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일정은 혼자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약속이라면 미룰 수 있지만, 회사 대 회사의 일정은 미룰 수가 없다. 게다가 국제적인 회의들은 시간 변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만든 게 바르셀로나에서 이틀이었다. 하루는 시연회가 있는 당일이고 하루는 그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하루 더 빼봐.”

“그게……. 조금 곤란하게 돼서.”

어차피 MK푸드의 바르셀로나 지사는 시연회가 끝나고 나면 며칠 휴가를 준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신입사원이라고 해도 디아나도 휴가를 받을 것이다.

그 디아나의 휴가를 어떻게든 함께 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그런데 비싼 연봉을 주고 고용한 비서들이 하루 일정을 더 빼는 데 이렇게 능력이 없어 쩔쩔매다니! 모두 갈아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사장은 나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서 일정에 휘둘리는 거야? 세비야에서 이틀 일정 하루로 집약해봐. 프랑스는 나 대신에 김 이사를 대신 보내. 이렇게 되면 되는 거 아니야?”

“사장님, 그렇게 되면 강행군을 하셔야 해서.”

“지금 내 체력 걱정을 하는 건가?”

그렇게 해서 라울은 마드리드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온종일을 뺑이를 돌고 말았다. 중간에 식사할 시간조차 빠듯해서 차 안에서 샌드위치로 때워가며 일을 하는 라울을 보고 세베로가 말을 했다.

“이렇게 식사시간도 빼놓지 않고 일을 하시는 건, 몸에 해롭습니다.”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해 세베로. 나는 더 좋은 게 있어서 이러고 있는 거거든?”

“하긴, 이렇게 샌드위치 먹고 바로 세비야에 가서 종일 죽기 직전까지 일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쉬면되겠네요. 디아나 양 옆에서 말이지요. 두 배로 기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안다는 표정을 하는 세베로를 순간 째려보고는 우적우적 닭고기 샌드위치를 계속 먹었다.

뭐, 세베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까. 죽지만 않고 디아나가 머무는 곳까지 가면 그녀의 옆에서 쉴 수 있다!

그 생각만 하면 몸에 힘이 불끈 솟아서 아무리 일이 바빠도 다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새벽에 세비야에 도착해서 간단한 주스로 아침을 때우고 바로 세비야 주거래은행의 서류에 사인하는데 두 시간이 걸리고, 물론 아무리 바빠도 서류는 꼼꼼하게 다시 봐야 한다.

아무리 미리 봐둔 서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문구 하나 바뀌어도 사건이 되는 게 계약서이다 보니 말이다.

바로 다음 일정은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영지를 돌아봐야 한다. 지브롤터 해협의 바람이 불어오는 간척지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페인의 남부 해안지도를 바꾸게 될 간척사업으로 까스틸로 성의 영지는 더 늘어나고 안달루시아 지방의 특산물도 차이가 생길 거다.

“주인님, 저기 바위가 있는 곳은 물살이 세서 간척사업이 진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 지도 줘봐!”

양팔을 걷어붙이고 지도를 보고 있는데 지방의 한 아낙이 우유를 가져다준다. 오래도록 까스틸로 영지에서 낙농업을 하는 가정이라고 감사의 표시라며 오렌지도 한 바구니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세베로 마셔!”

세베로와 나는 커다란 잔의 우유를 단숨에 마셨다. 갓 짠 우유가 주는 신선함과 고소함이 기분 좋다. 그리고 바로 지도를 펼쳐 들고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저 바위 있는 곳까지는 무조건 막아야 해. 기술적인 면이 문제라면 간척사업에 일가견이 있는 한국의 기술진에게 도움을 청해 봐.

내가 알기에는 아산만 쪽의 물살이 센 지역도 간척한 걸로 알거든. 어떻게 해서든지 저 바위까지 막고 땅으로 만들어!”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많은지 아무리 일을 계획하고, 사람들한테 시킨다고 해도 최종 결정은 내가 해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결정만 내리러 돌아다니는데도 바쁜 것이다.

그래도 시연회가 있는 다음에 디아나와 휴가를 즐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물론 그녀에게는 아직 말도 하지 않았고 허락은 더더욱 받지 않았다. 하지만 뭐, 내가 하고 싶다는데 납치라도 해서 꼭 끌어안고 사흘 동안 함께 있고 말 거다.

이틀 가까운 일정을 밥도 차 안에서 때우고 일해서 하루를 더 벌었다. 그렇게 되면 3일은 디아나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좋아서 가만히 있다가도 히죽히죽 웃음이 난다.

* *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말 정화통화하기 힘들군요, 저에요 임규빈!”

임규빈? 거의 석 달 만이었다. 그때 세비야의 라울의 성에서 인사를 한 뒤로 연락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연락을 받자 반가웠다.

“어머 규빈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여러 번 통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전화가 잘 안 되네요. 시차도 있고……. 그래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디아나는 그때 내가 말한 거 생각해보고 있어요?”

“네?”

“그때 내가 말했잖아요. 나하고 사귀는 거. 그리고 나 말 놓기로 했는데 하도 오랜만이라 다시 존대하게 되네요. 그럼 나 이제 다시 말 놓는다.”

나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맘대로 해라. 존대든 반말이든 말이지.

“그러니까요. 생각을 해봐도 방법이 없네요.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사귈래야 사귈 재간이 없잖아요?”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정색하고 말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걸 많이 보여줄 생각이야. SNS에 가입해. 친구 허용도 하고. 그러면 나에 대해 많이 보여줄게.”

“많이 안타깝지만 전 그런 거 못해요. 제 핸드폰은 2G거든요.”

물론 얼마 전에 라울이 준 폰은 스마트 폰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할 일도 없어서 그런 건 하나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요? 2G 폰? 아직도 그런 거 쓰는 사람도 있나?”

“굳이 스마트 폰이 저는 필요가 없어서요.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통화만 하면 되거든요. 이제 취업도 했으니 앞으로는 생각해볼게요.”

“취업했어? 어디에?”

그가 취업했다는 내 말에 목소리를 키웠다.

“들으면 조금 놀랄 걸요? MK푸드에 취업했어요. 지금은 MK푸드 바르셀로나 지점에 있고요.”

“이런, 왜 성진 푸드에는 원서를 내지 않았지?”

목소리에 불만이 묻어있었다.

“물론 성진 푸드에도 냈지요. 합격도 했고.”

“그런데 왜 MK푸드로 간 거야?”

“음.”

그의 말에 잠시 머뭇머뭇했다. 물론 처음에는 성진 푸드 쪽에 갈 생각이 더 많았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MK푸드 바르셀로나에서 이번에 시연회가 있는데 그쪽에 바로 합류하는 거로 하고 보너스도 더 먼저 줬거든요.”

“이런, 나한테 먼저 말했으면 내가 먼저 보너스 줬을 텐데!”

“아니에요. 여기 일 재미있어요.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에요?”

“잊지 못하겠어. 디아나!”

“네?”

“디아나를 잊지 못하겠어. 그래서 연락했어. 우리 앞으로 계속 연락하자. 천천히 연락하면서 그렇게 우리 사귀자.”

그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규빈의 큰어머니에게 들어서 그의 마음이나 관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귀자고 한 게 한 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 라울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 바르셀로나로 오는 기차 안에서 그런 꿈을 꾼 걸 보며 내가 얼마나 라울에게 길들여져 있는지 내 자신도 모를 정도이니 말이다.

나는 가능한 그의 말을 희석하기로 했다.

“유럽 끝에서 한국은 정말 멀거든요? 인터넷으로 사귀고 전화로 사귀는 거 조금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인터넷으로 사귀다 헤어지겠어요. 너무하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를 거절하고 싶었다. 내가 볼 때는 임규빈이라는 사람, 절대로 내 짝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고 함께 있어도 물론 좋은 사람이지만 그때 성진 그룹의 회장 부인이 말한 것처럼 분명한 차이는 있다. 그리고 막 입사해서 일에 몰두하고 싶지, 남자 때문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만일 내가 누구와 사귄다면……. 그런 생각을 할 때 문득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머리를 흔든다.

“하여튼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전화 주세요. 가끔. 저도 전화 걸게요.”

“정말이죠. 그래도 모든 가능성은 열어둬야 해요.”

“알았어요. 스페인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주세요.”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서 전화해준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누군가 생각을 해서 전화를 걸어줬다는 것 자체가 참 감사한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시연회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새로 나온 음식 만드는 것을 시연하고 또 음식을 맛보고. 결국에는 음식이 주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파티다. 그러기에 연회 준비를 한다는 것은 보통 정성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세베로라면 굉장히 침착하게 일을 진행하겠지? 세베로가 생각이 났다.

“디아나.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대환영입니다.”

세베로의 말이 생각이 나서 세베로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그때 세베로는 라울 옆에 있었다.

“아, 디아나, 웬일이에요. 반갑습니다.”

디아나라는 말이 나오자 라울의 눈썹이 쫑긋 올라갔다. 지금 디아나가 세베로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거야? 왜 나에게도 하지 않는 전화를 세베로에게 하는 거지?

“네, 디아나. 네 그때 만들었던 그 초대장 종이를 파는 곳이요. 네. 조금 있다가 메일로 주소와 그 종이의 재질에 대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물론 잘 지냅니다. 그러지요. 바르셀로나에 가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몇 마디 안 하며 통화를 하는 중에 라울을 보자 점점 라울의 눈초리가 예리하고 살기를 띠면서 세베로를 향한다. 목이 컥컥 막히는 것 같은 살기를 느끼며 세베로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디아나.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전화가 끊기기가 무섭게 세베로가 라울을 향해 헛기침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주인님.”

“세베로. 지금 통화한 사람이 그 디아나가 맞아?”

“네. 그 세뇨리따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디아나가 세베로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나한테도 안 하는 전화를 왜 세베로한테 하느냐고. 지금 나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거야?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설마 제가 디아나 양과 사귈까 봐 그게 걱정이 되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베로. 디아나는 딸 같은 여자야. 지금 세베로한테 가당키나 해?”

“맞습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살기 가득한 질투의 눈길은 조금 거둬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질투라니. 나는 그런 질투나 하는 남자가 아니야. 몰라? 내가 누군지?”

“잘 압니다. 주인님. 스페인 왕족의 후예이시고 MK 그룹의 사장님이시고 왕위 계승 서열도 있는 대단한 분이지요. 그런 분이 질투의 눈길을 보내시고 그러시면 힘이 듭니다. 물론 제가 나이가 많아도 경쟁의 대상으로 보일 만큼 매력적이라는 건 알지만 말입니다.”

“맙소사! 세베로 너무 나갔어. 그리고 나는 질투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난 질투가 어떤 건지도 몰라. 나같이 퓨어한 사람이 질투라니!”

말을 하면서도 세베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당장 태워죽일 듯하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이 전화의 용건은 초대장 종이의 재질에 관해 묻고 그 종이를 판매하는 곳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알겠다고 했고 또 안부 전화 이상의 것은 안 했습니다. 무엇보다 디아나 양께서는 라울님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정말? 정말 디아나가 내 안부를 물었어? 뭐라고? 응?”

그러자 세베로가 대답은 하지 않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말해줘. 세베로. 디아나가 뭐래? 내가 보고 싶다고 해? 아니면 안부 전해주세요. 이래?”

“아니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주인님 안부는 묻지 않았습니다.”

라울이 획하고 얼굴을 돌렸다. 세베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면 창밖을 본다. 이제 내일 모레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을지 몹시 기대된다.

* * *

시연회를 하루 앞두고 MK 푸드의 바르셀로나 지사 스텝들은 대부분이 타라고나 해변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내일 있을 시연회 준비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가까이서 모든 것을 지시해야 한다.

직원들의 룸은 가장 작은 것으로 연회장에서 가까운 층으로 배정되었다. 최고급 호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원들이 이용하는 작은 룸들은 최고급 호텔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소박했다.

하지만 창 너머로 보이는 경관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저런 경치가 보이는 호텔이라니!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절경을 이루는 절벽과 산, 그리고 해안가가 늘어져 있다. 내려다보니 해안가에서 비치발리볼을 하는 여자들이 눈에 띈다.

비키니와 거의 T팬티에 가까운 수영복을 입고 출렁출렁 공을 쳐 낼 때마다 남자들의 모든 시선이 여자들에게 향한다. 벗은 여자만큼 흡입력 있는 건 세상에 없다고 했나? 내려다보는 나조차도 시선을 뗄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다 라울과의 그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벌써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는지도 3주가 지났다. 한 달 만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취업하고 이렇게 바르셀로나 지사에 합류해서 시연회 준비를 하고 이런 일들을 라울이 다 안다면 무슨 생각 할까?

문득문득 그의 독설이 그립다. 그가 보고 싶고 입만 열면 잘난 척을 하는 그가 점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이 시연횐데 지금 이럴 시간이 어딨어.”

질끈 머리를 올려 묶고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밖으로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딩동.

문을 열어보니 문짝에 가득 들어차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다.

“헉.”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누구야. 설마!

“라울!”

문을 채 열지도 못한 체 서서 그를 부르자 그가 슬쩍 내 몸을 밀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가까이만 와도 올리브 향이 싱그럽게 퍼진다.

“사람이 왔으면 말이지 문을 활짝 열고 반겨도 모자랄 판국에 그렇게 서 있으면 어찌 자는 거야.”

“아니 여기는……. 웬일이에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여기 묵는지.”

“질문은 하나씩만 하는 거야. 그렇게 한꺼번에 물으면 뭐부터 대답하지?

첫째, MK 그룹의 계열사인 MK 푸드의 시연회가 있어서 왔고. 내가 묵는 호텔에 누가 묵었나 보니 디아나가 있길래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러 이 룸에 온 거야. 됐어? 그리고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여기 MK 그룹 사장이었던 거 기억은 하나? 내가 작정하면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물론 기억하지만……. 하지만,”

“MK 푸드에 아는 사람도 많거든? 이번 신입사원에 명단을 보니까 디아나 정이 있더라고. 바르셀로나에 묵는 디아나 정이 여럿도 아닐 거고 더구나 한국계 스페니쉬. 바로 알았지.”

그가 거의 지기도취수준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완전히 잘난 척 하는 발바리 같다. 하지만 반갑다. 눈앞에서 떠들어주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래도. 바르셀로나로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정말 반갑네요.”

“내가 언제부터 어디 가는지 다 디아나한테 말했었나? 그리고 내가 하는 전화를 다 받지 않았잖아. 사람이 전화를 씹었으면 그 다음엔 냉큼 전화해야지.”

“전화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데요. 더군다나 한국이나 미국 같은 곳으로 출장을 갔을 수도 있어서 전화하기가…….”

“변명하지 마! 그 통화료는 다 내 계좌에서 나간다고 했잖아. 하여튼 됐고, 방이 이게 뭐야. 이렇게 좁은 방에 있는 거야?”

“하루 이틀 있을 건데요 뭐. 그리고 여긴 내방이에요. 좁든 말든 라울하고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MK 푸드 시연회가 바로 내일이거든요.”

“물론 알고 있지. 그래서 내가 여기 와있는 거잖아. 그것 때문에 내가 와있는 건데.”

그는 방안을 유심히 돌아보고는 시선을 내개로 돌렸다. 마주보이는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가 일 난다.

“그래서 놀아줄 정신이 없어요. 라울!”

“놀아주다니.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몰라? 나야말로 놀 시간이 있을 거 같아?”

“물론 알죠. 그러니까 그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렇게까지 들러줘서 너무 고마워요. 라울.”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라울이 나를 당겨 안았다. 그의 넓은 품에 폭 안기자 지중해의 바닷바람을 타고 진한 올리브 향이 숨 가득 들어온다. 역시 이 남자의 향기가 맞다. 라울에게서 나는 이 올리브 향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언제나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던 이 남자의 행동을 보면 이렇게 다정한 포옹이라는 건 실로 감격스러웠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빨리 내려가 봐야 해서”

하며 몸을 끙끙거리며 비틀자 그가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어 당겨 안는다.

“네 냄새. 고팠거든?”

라울이 정수리에 얼굴을 박으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아마릴리스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향기.

“바로 내려가 봐야…….”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그의 키스에 나도 모르게 반응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까치발을 디뎠다. 나보다 훨씬 큰 라울, 이렇게 서서 키스를 하려면 까치발을 들 수밖에는 없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당겨 안아 올려줬다.

“정말 여기는 웬일이에요. 볼 일이 많은 사람이니 일을 하러 왔겠지만. 너무 뜻밖이에요.”

너 보러 온 거야. 너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이 둔탱아! 그 정도 사인을 줬으면 알아도 벌써 알았겠네.

마음속으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이러다가는 모이라고 하는 시간까지 갈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매몰차게 이 남자를 밀칠 수가 없다. 더 안겨있고 싶다.

“선물이 있어.”

“뭔데요?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잠깐만, 꼭 줘야 해.”

“저 지금 내려가 봐야 해요. 제발요. 저 지금 신입사원이거든요?”

“그래, 그럼 내가 기다리지.”

“그래요. 바쁘실 텐데 일 보시고 이따가 저녁에 봬요.”

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다. 피곤에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그냥 내려가기 마음이 무거워서 다시 그를 보고 앉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5분만 재워주고 가면 안 될까? 정말 피곤하거든. 네 옆에서 잠들고 싶어서 잠도 못 자고 서류보고 오는 길이야.”

웬만하면 거절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정말 피곤하게 보인다.

“여기서 잘 거예요?”

끄덕끄덕.

최대한 불쌍하게, 최대한 모성본능을 일으키게……. 그런데 진짜 그녀를 보니 긴장이 풀리는지 피곤이 몰려온다.

“여기 누워요.”

그녀가 침대에 앉으며 말하자 바로 그녀의 옆에 착하게 누웠다.

“안아서 재워줘야지.”

이런 말이 잘도 내 입에서 나온다. 그런데 저절로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정말 그녀가 날 안아서 재워주면 좋겠다. 이런 간절한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이 그녀가 내 품으로 파고든다.

“지금 바로 내려가야 하지만 당신이 정말 피곤해 보여요. 불쌍해서 안아주는 거니까 5분 안에 잠들어야 해요.”

“아흥. 그럼.”

그러지만 품에 들어온 토끼를 그냥 둘 사자가 어딨어?

날름!

탁! 아야야…….

나도 모르게 혀를 날름 내밀어서 그녀의 입술을 맛보는데 이 여자 만만하지가 않다. 정강이를 바로 발로 차더니 발이 아픈지 소리를 낸다. 전에도 맨발로 내 정각이 차고 혼난 적이 있으면서 왜 기억을 못 하나?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너무 좋다. 하얀 셔츠에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5분 안에 이 예쁜 디아나를 안고 할 수 있는 일은?

허겁지겁 입술을 겹쳤다. 순간 아득하게 눈이 감긴다. 몽롱하게 현실이 이차원적으로 겹치는 건 진짜 피곤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디아나를 안고 그냥 잠들 내가 아니다.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감아 쪽쪽 빨자 그녀의 향기가 스며든다. 꽃향기를 머금은 달콤한 향기.

‘아!’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자 그녀의 어깨가 움츠려진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목덜미는 언제나 내가 열광하는 부분이다. 혀로 귓불을 핥아 올리자 그녀가 몸을 꼰다.

아! 정말 환장하겠다.

단추를 풀려고 보니 어느 틈에 그녀가 옷을 벗었다.

이런 서비스를 해주다니!

흥, 그러니까 나만 원한 게 아니었다는 거지? 당장 내려가야 한다고 하더니 어느 틈에 먼저 옷을 다 벗고. 그래 어서 와. 베이비!

나도 벗어야지. 그런데 나도 어느 틈에 다 벗었다. 아! 내가 언제 벗었지?

역시 둘의 마음이 같으니 옷 같은 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는구나!

둘이 함께 있는데 옷 같은 건 정말 필요 없는 게 맞다. 천연 그대로 태고의 자유로운 아담과 이브처럼 아름다운 맨살로 함께 하는 거야.

잠 못 자고, 먹을 거 못 먹어가며 일하고 날아온 보람이 있다. 이렇게 보자마자 안아주는 디아나와 함께 있다니 말이다.

이미 흥분해서 도드라진 디아나의 젖꼭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얀 가슴 둔덕에 수줍게 분홍빛을 드리운 젖꼭지.

저걸 빨고 싶어서 매일 꿈을 꾸고 그리워하고 그녀의 팬티를 잡고 온몸에 비볐는데.

사람 변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여자였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됐지.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가진 여자. 청초한 꽃 같으면서 뜨거움을 가진 여자!

그녀의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계속 입술을 내렸다. 가슴 둔덕에 얼굴을 묻고 아까부터 침 흘리며 삼키고 싶었던 젖꼭지를 덥석 물었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젖가슴 그리고 입안에서 단단히 뭉쳐진 유실이 달다.

쪽쪽.

있는 힘을 다해 빨자 그녀의 허리가 뒤틀린다. 내 팔 안에서 파닥거리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어 감고 하체를 밀착하자 단단히 발기된 나의 것이 그녀의 보드라운 살에 닿으며 물기를 묻힌다.

이미 쿠퍼 액을 흘리고 있는 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그녀를 꿰뚫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말이다.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빨며 양쪽을 오가는 동안 그녀의 가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커다랗게 풍선처럼 더 커져만 가는 그녀의 가슴에는 빨간 젖꼭지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다.

“아! 늘 원하던 대로 그녀의 가슴이 점점 더 커지는구나!”

황홀함에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의 가슴에 매달려 마구 키스하기 시작했다.

내 아래도 점점 커져서 마치 커다란 몽둥이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디아나, 이것 봐. 내가 이렇게 흥분했어. 진짜 황홀하게 해줄게.”

나는 그녀의 손을 가져다 내 것을 쥐게 했다. 그녀는 커다래진 가슴이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 것을 보았다.

그녀의 작은 손은 내 몽둥이처럼 부푼 페니스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서 내가 함께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한 페니스가 그녀와 내 손이 닿자 마구 쿠퍼 액을 흘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둘의 맞잡은 손으로 내 페니스를 쥐고 흔드는데 얼마나 황홀하다.

“디아나. 이리 와. 누워봐!”

그녀가 너무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며 눕는다. 커다란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 그리고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이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몸매가 아니다!

너무 황홀해서 그대로 얼굴을 내려 그녀의 음모에 코를 박았다. 부드러워! 부드러워!

음모도 어떻게 이렇게 비단결처럼 부드러운지. 분홍빛 살을 입에 물고 빨았다.

“하응……. 응응……. 아!…….”

그녀의 콧소릴 섞인 신음에 몽둥이 같이 부푼 페니스가 더 커진다. 더 커지면 그녀의 안으로 못 들어가는데…….

서둘러 그녀의 은밀한 속살에 커다란 페니스를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학학……. 으……. 윽…….”

비비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녀의 좁은 입구에 대고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윽!”

사정없이 그녀의 안으로 페니스가 빨려 들어가며 바로 사정을 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눈이 감긴다. 그녀가 나를 품에 안아주자 나는 그대로 의식이 사라진다.

* * *

“뭐야? 저 남자 정말 피곤했나봐!”

나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며 라울을 생각했다. 피곤한 채로 들어와 재워달라고 해서 5분만 재워주려고 했는데, 옆에 눕자마자 키스 한 번 하고는 2분 만에 잠이 들었다. 잠에 빠진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오는데 혼자 잠꼬대를 했다.

“내가 황홀하게 해줄게!”

아마 저 남자 꿈속에서 황홀한 가 보다. 꿈속에서라도 즐거워서 다행이다.

연회를 준비한다는 건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연회의 모든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미각, 촉각, 시각 후각까지 모든 감각이 만족하도록 펼쳐 놓아야 한다.

미각은 요리사들이 책임지지만 그 외의 모든 디스플레이와 서비스는 연회담당부서의 몫이다. 모두가 긴장해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신입사원인 나는 오죽할까?

하지만 룸에 있는 미운 짐승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연회준비가 끝날지 모르는데, 설마 그때까지 자고 있지는 않겠지?”

얼마나 피곤하면 키스하다 말고 그대로 잠이 들까?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혼자 내 호텔 룸에서 자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물론 말도 안 되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수가 따로 없다.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다 왔기에 저렇게 피곤해서 쓰러져 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려면 펜트하우스 두고 왜 하필 내방에서 자느냐고!

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있기가 정말 힘들었다. 내 방에 라울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일할 수가 없다. 살짝 올라가서 자고 나갔는지 라도 보고 싶었다.

망설이고 생각하다가 결국 선배 제니에게 말을 꺼냈다.

“저, 잠깐 룸에 갔다가 올게요. 두통약을 하나 먹고 와야겠어요.”

제니는 커다란 테이블보를 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테이블 보 하나가 재단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깔아도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테이블보를 돌리다가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두통! 그러니까 딱 내가 필요한 게 그거네. 내가 이런데 신입사원이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어? 어서 가서 약 먹고 나도 좀 가져다줘. 뭐라도 먹고 이 테이블보 어떻게든 해야겠으니. 어서 다녀와!”

불량테이블보 덕분에 나는 쉽게 룸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룸으로 향하는 중간에도 가슴이 콩콩 뛴다. 라울이라는 이 남자는 정말 나에게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남자였다.

신경을 온통 끌어가는 바람에 일에도 집중할 수 없다니! 이제 겨우 신입사원 주제에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우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올라가면 바로 쫓아내야지! 아주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발로 뻥 차줄 테니 기다려. 라울!

그런데도 가슴은 이상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잘 자고 있으려나?”

나는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 * *

“헉!”

눈을 뜨자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디아나의 방에 와서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는데 눈을 뜨니 혼자다.

혼자인 거 까지는 그럴 수 있다. 디아나가 또 정사 후에 혼자 나가버렸다면 말이다. 그런데 옷을 입은 채 그대로다.

하다못해 넥타이도 다 풀지 않고 그저 느슨하게 내려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젖어있다. 아래가 아주 불쾌하게 흠뻑 젖어 있다. 이 말은 혼자 했다는 이야기다.

남의 방에서 몽정을 했다고? 이 나이에?

“으아아악!”

너무 기가 막혀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이불을 확 뒤집었다. 바지도 이불도 시트도 다 얼룩이 져 있다. 게다가 부인할 수 없는 이 냄새!

이건 남의 방에서 다 큰 성인이 오줌을 싼 것과 뭐가 달라?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쁘다. 더 나쁘게 생각할 거다. 빠른 수습이 필요하다.

“세베로, 디아나 방으로 내 옷을 좀 가져다 줘! 가능한 빨리.”

“어떤 종류의 옷이 필요하신 겁니까? 주인님?”

“아무 옷이나 빨리.”

“용도를 말씀해 주시면 조금 더 편하게 옷을 준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지금 상황을 제게 말씀해 주시면?”

“알 거 없어. 알 거 없다고. 그냥 평상복으로 해. 나 지금 휴가 중이잖아.”

“아니요. 아직은 휴가가 아닙니다. 내일 연회가 끝나고 난 다음부터가 정확하게 휴가지요. 그러니 아직은 정장차림이 맞는 복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아무거나. 빨리 가져와. 어떤 색으로 하냐. 셔츠 색은 뭐냐 묻기만 해봐. 그냥 빨리 가져올 수 있는 걸로 최대한 빨리 가지고 와!”

“네, 알았습니다. 주인님. 혹시 구두도 필요하시다면…….”

뚝!

하여간 세베로는 너무 완벽한 게 문제야.

나는 전화를 끊고 바로 프론트에 전화를 했다. 급하게 시트를 갈아달라고 샤워하고 있을 테니 그동안 갈아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빨리 이 축축함과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다.

쏟아지는 물에 몸을 씻으며 생각해도 정말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 거야? 하여간 마녀 같으니라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다니!

그러나 뜨거운 물에 씻으며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 이제 할 일은 내일 연회를 마치고 디아나와 사흘간 노는 것밖에 없다. 이런 휴가를 써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신이 난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거울을 보니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인다. 단단한 근육도 마음에 들고,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고 있는데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주인님,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침대 시트를 갈고 있으니 잠시 후에 나오십시오.”

“알았어.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디아나가 오면 문 앞에서 좀 막아. 내가 옷 다 입을 때까지 말이야.”

“네.”

* * *

어? 저기 보이는 방이 내 방 맞는데, 지금 뭘 하는 거지?

방문이 활짝 열려져 있고 그 앞에 세베로가 서 있다. 이 남자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내방에서 잔 게 뭐가 자랑이라고 세베로까지 불러?

씩씩하게 걸어가자 세베로가 앞을 막는다,

“세뇨리따, 안녕하셨습니까?”

“네, 세베로도 잘 지냈지요? 그런데 지금 뭘 하는 거지요?”

“침대 시트를 갈고 정돈하는 중입니다.”

“라울은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중입니다. 그래서 잠시 후에 들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네? 아니 근데 왜 펜트하우스 두고 내 방에서 그런 걸해요? 잠깐 자겠다고 방을 빌려주었더니 이제 완전히 나를 쫓아내네.”

“…….”

세베로도 내 말에 동조하는 지 아무 말이 없었다.

진짜, 진짜 이상한 남자가 틀림없다. 팔짱을 끼고 서서 조금 있자 멀끔한 남자가 완벽한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내 방에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침대 시트를 가는 직원도 이미 나가고 완벽하게 정돈된 방을 보며 나는 기가 막혔다.

세베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들어가시라고 한다.

지금 누구 방에서 주인행세야?

“여기 내 방이거든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어디 초상났어요?”

그는 구김하나 없는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까지 매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생긴 거 하나는 정말 잘 생긴 남자다. 이렇게 서 있는 것만 봐도 심장이 충격을 받은 거 같으니 말이다.

“흠흠, 이건 일할 때 입는 기본 정장이야. 초상났느냐니!”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하고는 나를 본다. 압도적인 시선만큼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는 내 방이니까.

“어서 가요. 남의 방에서 자고 있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히잖아요. 바로 내려가 봐야 한단 말이에요.”

“그럼, 내가 걱정돼서 이렇게 일하다 말고 왔다는 말인가?”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게 얄밉다.

“누가 걱정돼서 그런데요? 주인도 없는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왔지요. 시트 간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갈고 그래요?”

째려보자 그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쥔다. 어깨에 닿는 그의 커다란 손에 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그는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말한다.

“나야 용건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시간이 좀 필요한 거라서 말이지. 지금 바쁘면 밤에 다시 올게.”

“알겠어요.”

그가 몸을 구부려 내 볼에 키스했다. 알 수 없는 남자지만 향기도 분위기도 나를 설레게 하는 건 분명하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지만 당차게 말했다.

“같이 나가면 안 되는 거 알죠? 당신 아는 사람은 바로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알아보겠어.”

“요즘 같은 세상에,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렇기도 하군. 그럼 먼저 나가지. 나는 조금 있다가 나갈 테니 말이야!”

아주 숫제 여기가 그의 방인 거 같다. 여러 말 하기 싫어서 나는 두통약을 가지고 먼저 나왔다.

그녀가 나가자 라울은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이걸 주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른다. 받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이 이렇게 벅찰 수 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반짝반짝 광채를 내고 있었다.

라울은 그녀가 묵는 호텔 내부를 둘러보다 창가로 갔다. 넓게 펼쳐지는 해안가 너머로 지중해 물결이 넘실거린다. 비치발리볼을 하는 여자들에게 눈이 가자 휘파람이 휙 나온다. 거의 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줄 비키니를 입고 출렁출렁하고 있는 여자들의 탱탱한 엉덩이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역시, 역시 좋아.”

그러나 디아나가 저러고 비치발리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다른 놈들이 얼마나 침을 흘리며 바라보겠어?”

손에 들고 있던 반짝이는 것을 안주머니에 넣고 든든한 마음으로 그녀의 방을 나와 펜트하우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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