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3)

로얄 스캔들 3

9. 취업

너무 가슴이 아프다. 마치 커다란 펀치를 가슴에 뻥하고 맞은 거 같다. 저 어린 여자가 대체 나에게 뭘 한 거지?

그럼 저 여자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나? 그러면 너는 저 여자를 사랑해?

대답할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이 여자가 좋은 건 맞다. 보고 싶고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나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는데 밤에 그렇게 안겼나?”

“처음엔 정말 사고였죠? 그다음엔 생각나고 당신이 같이 있는 게 좋았어요.”

“좋았다고?”

좋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다시 가슴에 무지개가 싹 생기면서 마음이 좋아진다.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래서 우리 어제도 같이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이걸로 된 거예요.”

“뭐가 됐다는 거지?”

“좋은 추억이요.”

“뭐?”

“좋은 추억을 가질 수 있잖아요. 나도 당신도.”

빌어먹을 추억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없으면 나는 또다시 그 레이스 팬티를 가지고 밤을 보내야 한다고. 싫어 이제. 레이스 팬티가 아니라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먹먹한 가슴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계속 이야기한다.

“라울. 난 이제 23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내가 꿈꿔왔던 걸 시작하는 건 이제부터라고요. 당신이 좋기도 하지만 당신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내 꿈을 펼쳐보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큰 소용돌이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이제부터 항해를 시작하는데 당신같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내 인생의 첫 출발부터 두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을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내가 왜 소용돌이야. 나는 순풍이야! 돛을 달아줄 수 있고, 바람도 일으켜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그녀의 말이 맞다. 그건 내 생각만 하는 거였다.

그런데 라울, 네가 언제부터 남의 생각도 했지? 머릿속에서 온통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 옆에서. 방법이 없을까.

“알았어.”

“참, 라울? 이 마드리드에 온 건 세비야에 가기 위해서인가요?”

“아니. 잠깐 마드리드만 들렸어. 바로 오늘 바르셀로나에서 회의가 있거든.”

“오늘 오후에요?”

“그렇지.”

“그럼 바로 가야겠네요. 일부러 들러줘서 고마워요.”

“일부러 들린 게 아니라…….”

널 보러 왔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이 꼬였다. 맞아 널 보러 일부러 온 거야. 그러나 그녀는 나를 잘 안다는 듯이 웃으며 말한다.

“알아요. 바르셀로나 가려다 심심해서 들렸겠죠? 절대 내가 보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내가 할 말을 줄줄 꿰뚫다니 이 여자 도대체가 고단수군. 하지만 저 작은 입술을 움직이면서 귀엽게 말하다니. 넌 정말……. 요물이야.

“그래서 고맙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디아나가 내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어제 사다 놓은 아마릴리스 향기가 방 안 가득했다. 그녀의 커피 향을 머금은 입술에 나는 순한 애완용 강아지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아요?”

끄덕끄덕.

이 아침이 참 따듯하다.

* * *

“아니 혜정이 이년은 왜 연락도 안 되고. 응? 엄마가 그렇게 죽을 똥을 싸고 재벌 집에 밀어 넣었으면. 응? 자리 잡히는 데로 빨리 엄마한테 연락해야 할 거 아니야. 핸드폰을 바꿨으면 바꿨다고 말을 하고, 돈이라도 좀 입금을 하던가. 6개월이면 좀 자리를 잡았을 텐데 어째 이렇게 연락도 없는 거야.”

이랑이 민박집을 정리하고 떠난 뒤에도 기어이 그 민박집을 떠나지 않고 윤주는 그다음 민박집을 인수한 사람 밑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일이라는 것이 고용된 사람으로 일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랑과 이랑의 엄마가 있었을 때는 봐주고 또 봐준 것이었다.

시작한 일이 끝이 없고 쉴라치면 아줌마 뭐하냐고 그러고 도무지 못해먹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오는 길이었다.

구윤주는 그동안 민박집에서 슬쩍 해 놓은 돈이랑, 새로 온 민박집 주인에게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려 얻은 돈을 세어보았다.

한국 갈 여비 이상은 충분히 되긴 하지만 한국에 가 봐야 바로 들어갈 곳도 없고 혜정이하고 연락이 돼야만 갈 곳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 구윤주는 잔뜩 심술이 나서는 중얼거린다.

“이랑이 이것도 나쁘고 독한 년이지. 어떻게 나를 버리고 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찾아갈 수도 없고…….

그나저나 말도 안 통하는 내가 이 스페인에서 얼마나 있겠어. 일단 서울로 가서 혜정이를 찾아야지.

혜정이 이년 만나기만 해봐. 이 나쁜 년. 엄마한테 연락도 안 하고 돈 한 푼 안 보내고 자기 혼자 호의호식하겠다는 거겠지 뭐. 자기가 거기서 잘 못됐어 봐. 나한테 연락했어도 열 번은 더했지.”

윤주는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간신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말도 안 통하는 스페인 생활에서 얻은 것도 특별히 없고 하긴, 앞으로 평생 등 따시고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혜정이 그걸 재벌 집 딸로 들여보내 놓았으니 이제 서울 들어가서 팔자 피는 건 확실해.

잘 됐지 뭘. 이랑이 그거야 마드리드에서 평생 살 텐데. 서울에서 볼 것도 없고. DNA 검사를 한 번 했으면 됐지 맨 날 또 하고 또 할 것도 아니고. 이제 서울 가서 팔자 피고 살날만 남았다.”

윤주는 스튜어디스에게 말해 와인 한잔을 가져다 달라고 하고 한 잔 한 잔 연거푸 석 잔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 * *

“디아나? 좋은 소식이 있는데?”

학교 사무실에 들르자 직원으로 있는 셀린느가 좋은 소식이 있다고 반색을 하며 말한다.

“입학허가서 한 통과 취업 합격 통지서 두 통이 와있네? 와, 다른 애들은 한 통도 안 오는데 대단해! 디아나, 축하해!”

하면서 세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유명한 꽃꽂이 전문학교에 어플라이한 합격 통지서고 또 하나는 MK사의 푸드 사인 MK 음식의 합격 통지서, 또 하나는 성진 푸드의 합격 통지서였다.

두 군데 모두 새로운 요리가 나왔을 때 테이블 세팅과 홍보용 영상을 준비하는 부서에 어플라이 한 것이었다. 디스플레이에 관련된 회사들에도 지원했었지만, 이 두 곳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한국에 갈 수 있으니까.

그곳에 가서 한국사람들과 일할 걸 생각하면 기분이 들뜬다. 내가 이렇게 기분 좋아하는 데에는 어쩌면 라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 당당해지고 어느 만큼 성공하면 라울같은 사람에게 사귀자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목표가 아니어도 나는 내 일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작 결정하지 못한 것은 MK사와 성진 푸드 중에 어디를 택할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푸드사로는 성진 푸드가 훨씬 더 오래되고 역사가 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잘 갖춰진 것도 있고 엔터테인먼트 사도 있어 함께 연회를 하기도 한다. 일 할 기회가 더 많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MK푸드는 그에 비해 역사는 조금 짧지만, 훨씬 더 화려하다고 할까? 색다른 음식을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계발하는 편이다. 그래서 시연회도 잦고 연회도 많다. 그리고 그 사람의 회사다. 그래서 더 가기를 꺼리는지도 모른다.

연봉도 MK사가 조금 더 많다. 어디를 가는 것이 좋을까? 물론 라울에게 연락해 볼 수도 있고 나에게 사귀자고 제의를 한 규빈 씨에도 연락을 한다면 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 적어도 내가 입사를 한다면 말단 사원이니까 하늘처럼 까마득히 높은 사장에게 다이렉트로 연락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한국에 가게 되었다. 기왕이면 스페인보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던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정말 외롭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적으로 차이가 크게 나기는 하겠지만 내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점과 내가 태어났다는 점에서 택하게 됐다. 물론 연봉도 높고.

무엇보다 즐거운 건 취업이 됐다는 거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생활이 기대된다. 높고 높은 MK 회장 같은 건 뚝 떨어진 계열사의 말단 직원하고 부딪칠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난 내 힘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힘으로 뒤에 숨어서 조금 더 잘살고 조금 더 잘 먹고 잘 입는 거 그거 말고는 밤일이 주로 되는 그런 사업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

어쩌다 몇 번 그 남자하고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한테 내 인생이 다 휘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규빈 씨 큰어머니의 말도 들었기 때문에 규빈에게는 더 연락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내 힘으로 합격했다.

얼마나 두근대고 설레는지. 합격 통지서를 보고 또 보고 한 번씩 가슴에 안고.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디를 갈까?

* * *

“뭐야? 디아나가 우리 MK푸드의 신입사원으로 합격했다고? 그걸 왜 내가 이제 알았지? 분명히 얼마 전에 디아나를 만났는데?”

기분이 언짢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말했으면 당장에 합격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세베로가 신중히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걸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뭐? 합격시켜준다는데 왜!”

“제가 봤을 때 세뇨리따 디아나는 절대 남의 도움을 받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특히 남자의 도움은. 더군다나 주인님처럼 큰 힘을 가진 남자에게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고집을 누가 말리느냐고. 모든 여자가 괜찮은 남자 만나 팔자 고치고 싶어 하는 이 세상에 그게 뭐하는 사서 고생이냐고.”

“하지만 그래서 더 주인님께서도 디아나 아가씨에게 더 관심을 두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디아나에게 빠지는 건 그거하고는 조금 다른 문제다. 일단 그녀의 생각이나 생활을 알기 전에 그녀에게 반했다.

하긴 그것도 그녀의 거센 저항 때문이었나? 아직도 손목에 그녀의 이 자국이 남아있는 기분이 든다. 호텔 복도에서 이빨로 팔목을 물어뜯었을 때 이미 그녀가 각인됐는지도 모르니까.

“그 말이 맞아 세베로. 그럼 앞으로 MK푸드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겠군.”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분 좋게 말하는데 세베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글쎄요.”

“글쎄라니?”

회사에 취업했으면 회사에 가면 볼 수 있는 게 당연하지. 거기서 글쎄라니?

“사실은 디아나 아가씨께서 이 MK푸드에만 지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어디에 또 취업했는데?”

“성진 푸드에도 지원을 했고,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성진 푸드? 그건 절대 안 돼!”

있는 데로 성질이 뻗치기 시작한다.

“감히 MK사와 성진 그룹에 같이 합격을 하다니. 더군다나 성진 그룹은 임규빈이 있는 데잖아. 임규빈 그놈이 사귀자고 프러포즈까지 했는데 거길 어떻게 갈 생각을 한 거지? 기분 나쁘군, 어떻게 MK사와 성진 그룹을 같이 동시에.”

그러자 세배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인님은 너무나 모르십니다. 요즘처럼 취업하기 힘든데 어떻게 가고 싶은데 한 곳에만 원서를 넣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디아나 양은 MK사와 성진 그룹 말고도 수많은 회사에 원서를 넣었을 겁니다.”

“그래? 그럼 MK사에 안 올 수도 있을 거란 말인가?”

“그러게요. 역사를 보면 성진 푸드가 우리 MK사 보다 더 기니까요. 연봉은 우리가 더 많지만, 체계적인 건, 성진 그룹이 더 잘되어 있습니다.”

“말도 안 돼. 연봉 높으면 장땡이지. 그러니까 디아나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절대로 말도 안 돼. 당장 내가 가서…….”

“그렇게 되면 절대로 우리 MK사에 오지 않을 겁니다.”

“왜?”

“그게 디아나 아가씨니까요. 제 생각에는 그보다는 MK푸드 스페인 지사에서 연락을 한 번 더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어떻게?”

“그러니까 신입 사원 중에 뭐 수석 합격이라고 해서 인세티브를 더 준다거나? 아니면 바로 스페인에 있는 MK푸드의 연회 일을 맡겨 본다든가. 이런 식으로 해서 바로 MK푸드 사로 흡입할 수 있는 거지요.”

“오오. 세베로 역시. 나도 딱 그런 생각을 했다고. 바로 연락을 해봐. 응? 이렇게 되면 틀림없이 먼저 오겠지. 설마 성진 그룹에서도 이렇게 연락하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것처럼. 내 손이 닿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를 내 손 아래에 넣어야 한다. 라울의 마음이 쿵덕쿵덕 뛰고 있었다.

* * *

“여보세요?”

“네. 여긴 MK푸드의 마드리드 지산데요.”

“네, 안녕하세요!”

“디아나 정께서 이번 신입사원 모집에 수석 합격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세티브로 특별 보너스가 지급되기로 되어있어서요.

그와 동시에 이번 마드리드에서 있을 연회에 함께 참여해서 일을 해보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정말이요?”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기회에 특별 보너스까지!

사실 어디로 갈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연락이 오고 바로 실전에서 일할 기회를 준다고 하니 MK사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은 특별한 벌이 없이 그저 있는 돈을 쓰고 사는 중이어서 경제적인 것도 큰 부담이었는데 상금도 있다고 하니 더할 수 없이 좋다.

“세상에,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야. 엄마, 엄마 들었어? 엄마가 도와줘서 그런 거지? 너무 고마워! 엄마, 나 정말 열심히 살게.

엄마가 어디서 보고 있어도 자랑스러운 그런 딸이 될게. 그러니까 엄마도 하늘에서 행복하게 나 봐. 알았지?”

하늘을 보며 엄마를 떠올리자 눈물이 난다. 보고 싶어도 마음껏 울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무게가 더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 * *

“인사과에 연락 넣어. 이번에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디아나 정은 신입사원 연수받지 않고 그냥 바로 바르셀로나 MK 식품 시연회에 참석해서 일하게 된다고. 그래도 신입사원 중에 따돌리거나 눈치 주지 않게 명단 늘 발표하고.

그다음에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일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특별히 합류하게 됐다고 발표하고. 나도 이번 바르셀로나 MK푸드 신상품 시연회에 참석한다고.”

“네? 그건, 주인님은 그 기간에 파리에서 있는 MK자동차 설계 발표회의 일정이랑 겹치는데…….”

“그건 다른 이사 보내면 되잖아.”

“…….”

한 번도 하지 않던 일이었다. 다른 이사가 가기로 되어있는 회의도 열일 제쳐놓고 직접 가던 내가, 그렇게 공을 들인 신차 개발 설계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니 말이다.

세베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침묵이 가져다주는 묘한 분위기에 슬쩍 세베로의 눈치를 보게 된다.

분명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이러는 게 평소하고 다르다는 거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변덕도 부릴 수 있는 거지.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렇게까지……. 좋습니까?”

세베로의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뭐가.”

“어……. 세뇨리따가 말이지요. 그렇게 좋으십니까? 자동차 설계회의도 미루고 바르셀로나로 갈만큼?”

“무슨 소리야.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이번 바르셀로나 MK푸드 시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생각해 봐. 맛없는 음식이 세상에 나온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고.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음식이란 생명과 바로 직결되는 거야.”

“특히 사장님 생명과 직결되는 거 같습니다. 이 시연회가 말이죠.”

세베로는 가끔 얄미울 만큼 사실을 꼭 집어낸다. 얄미운 세베로!

“하긴 자동차의 안전보다 맛없는 음식이 세상에 더 해가 될 수도 있지요.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MK물산의 사장님이십니다. MK푸드의 사장님이 아니고.”

너무 딱 맞는 말을 하는 세베로가 이럴 때는 쫓아내고 싶을 만큼 얄밉다.

“하지만 나는 MK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사람이잖아? 어차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회사의 행사에 참석하는 건 당연해.”

“음 주인님께서 바르셀로나 시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면 MK푸드의 사장은 냉큼 날아와야겠군요.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결국, 내가 움직이는 바람에 MK푸드의 이사진도 이번 바르셀로나 시연회에 참석하게 되는 대 이동이 있게 될 거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따지다가 언제 또 디아나를 볼 수 있겠어?

“그러든지 말든지.”

“그리고 이번 신입사원 연수에 참석하는 게 신입사원들과 친해질 기회가 될 텐데요. 디아나 양에게는 말이죠.”

세베로는 디아나가 신입사원 연수에 참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걸 말하는 거 같았다. 물론 계속 직장생활 하려면 그것도 중요하다는 걸 내가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싫다고. 다른 신입사원들이랑 친해지는 걸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잖아. 특히 이번 MK푸드 신입사원 남녀 성비가 어떻게 되지?”

“70:30으로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위입니다.”

“그러니까. 기껏 신입사원이라고 뽑아도 몇 명 안 뽑는데 그것도 대부분 남자가 많아.

그런데 합숙 훈련까지 한다고. 청춘 남녀를 함께 연수한답시고 몰아넣고 매일 인사하고 밥 먹고 하는데 어떻게 눈에 안 띌 수가 있겠느냐고? 신입사원 연수에 절대로 보내고 싶지 않아.”

그건 안 될 말이다. 딱 임규빈 정도 나이밖에 되지 않은 것들이 디아나 앞에서 어른어른.

우리 디아나가 얼마나 예쁜데. 그놈들이 잘 보이려고 얼마나 들이대겠어?

생각만으로도 불쾌하다. 그런 생각으로 앞에 있는 올리브를 하나 들어 신경질적으로 깨물었다.

“물론 세뇨리따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게 싫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말이겠지요. 설마 주인님이 디아나 양을 보는 불특정 다수의 남성에게 까지 질투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정말 얄미운 세베로. 난 그런 게 아니야.

“당연하지. 디아나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을 디아나가 보는 게 싫어……. 그게 그건가? 어찌 되었든 디아나가 신입사원들 물 흐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 거야.”

“알겠습니다. 주인님. 어찌 되었든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세베로는 뭐든지 알아서 잘하지만 가끔 저렇게 눈치가 빤해서 그게 걱정이란 말이지. MK푸드의 바르셀로나 시연회라니. 아직도 3주나 남았군!

나는 책상 위에 톡톡톡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주 얼굴을 보기에는 MK푸드는 너무 멀리 있다.

어떻게 MK물산에 데려다 놓든가 아니면 내 방에 내 전용 비서로 데다 놓는 방법은 없을까?

* * *

인천 국제공항에 마드리드에서 출발 여객기가 승객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승객 중에는 윤주도 있었다. 짐을 찾고 인천 공항 출국장을 나오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혜정이 이년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야.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해. 워낙 높은 집으로 보내놨으니 이거 어디로 찾아봐야 찾을 수 있는 거야? 도대체 뭘 어떻게 지낸 거야?”

혜정은 서울에 오자마자 스페인식 이름은 바로 버려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물어도 그냥 이제는 스페인에서의 일을 잊고 임혜정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스페인에서 디아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였다. 하루하루가 바늘방석 같아서 몸이 홀쭉 빠졌다.

누군가 너 가짜지! 하고 나타나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며 지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건 잊어버렸다.

풍족한 삶, 넓은 방. 화려한 인테리어. 그리고 상상도 못 할 액수의 용돈을 받으며 그녀는 완전히 스페인에 있는 엄마를 잊어버렸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끊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과 모조리 연락을 끊고 싶었다.

매일매일 백화점으로 쇼핑을 간다. 새로 나온 명품 화장품 신상이란 신상은 다 긁어모으고 속옷부터 시작해서 겉옷까지 모두 명품으로 도배하고 밤이면 몰래몰래 클럽으로 갔다.

밤새 실컷 놀고는 아침이면 집으로 돌아와 내내 자고는 오후에 일어나 다시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갔다. 이런 생활이 가능했던 건 그녀가 임 회장 정실의 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임 회장과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식사하기는 했지만 임 회장이 딸이라고 한번 말해준 것 말고는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파트를 하나 얻어주고. 물론, 엄청나게 크고 그녀가 상상하지 못했던 호화로운 아파트였다.

다달이 쓸 생활비를 보내주고 끝이었다.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으나 없다고 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으냐고 물었으나 정말이지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1년을 마드리드에 있으면서도 대학 문전에도 갈 수가 없어서 어학연수나 하다가 온 혜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쇼핑과 화려하게 입고 밤이면 클럽에서 춤을 추고 남자들을 만나는 거였다.

괜찮은 남자들은 몇몇 만났다. 마리화나는 피울 수 없었지만 술을 마시고 남자들과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아침이면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청소를 해주고 음식을 해놓고. 기사도 하나 딸려있었다.

필요한 곳에 가자고 하면 태워다 준다. 이렇게 신 세상 같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스페인에 엄마를 찾고 할 일이 아니다.

그러던 그녀가 혼비백산할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오후쯤 일어나서 백화점으로 갔을 때였다. 지하 3층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웬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혜정을 보며 소리쳤다.

“조혜정! 너 혜정이 맞지! 야 이년아 너 조혜정 아니야?!”

놀라서 바라보니. 몇 년 전 엄마하고 이혼한 그 남자! 아버지가 맞았다.

세상에. 사는 내내 술에 도박에 툭하면 때리면서 이년 저년 하던 그 아버지가 백화점에 왜 있는 거지?

멀뚱멀뚱 서서 자신을 그저 보고 있자니 조찬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혜정이 이년아 너 아비를 보고 모르는 척해?”

그러나 혜정은 눈도 깜짝 않고 기사한테 말했다.

“저 아저씨 정말 이상한 것 같아요. 난 스페인에서 와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보고 조혜정이라고하는 거예요.”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조찬식은 틀림없이 자신의 딸이 맞는 것 같아 소리를 질렀으나 가까이도 가지 못했다. 기사가 앞에서 가로막고, 혜정은 모르는 척 앞으로 간다.

하긴 혜정이라고 하기엔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범접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차를 끌고 왔다. 게다가 기사도 있다.

아닌가? 잘못 봤나?

긴가민가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혜정을 쳐다보는데 기사가 딱 가로막고 말한다.

“저분은 아저씨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대단한 집안의 따님이시거든요. 괜히 문제 일으키시지 말고 가시지요.”

그 말에 조찬식은 고개를 갸웃하고 슬며시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알아봤나 봅니다.”

그러나 돌아와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청소하다 생각해 봐도 분명히 조혜정이 맞았다.

아무리 자신이 술에 절어 살고 도박에 빠져 살아 가산을 탕진하고 지금은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해서 청소나 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딸을 못 알아보겠는가?

하지만 이상했다. 저게 저렇게 잘 살 수가 없는데. 아닌가?

그런데 만일 정말 자신의 딸이라면…….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나. 딸년 하나 잘 낳았더니 팔자를 고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차장에는 차도 있고 한쪽에 대기하는 기사들도 많이 있다. 알아보려고 하면 저 차가 어느 댁 차인지 다 알 수 있다.

조찬식은 그런 생각에 차번호를 따로 적어 놓고 근처에 있는 기사들에게 어느 집안 차인지 수소문해봤다. 기사들이 서로 알고 있어서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기사 소개도 서로 알음알음 한다는 것 정도는 조찬식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찾아보니 그 차는 성진 그룹의 소속이다. 대단한 집 딸이라고? 쟤가 성진 그룹의 딸이라고? 미친 거 아니야?

돌아서서 기웃거리다가 보니 혜정을 태워온 그 기사가 보인다. 기사 뒤로 멀찌감치 뒤를 따라간다. 그러자 얼마 안 가 혜정이 보인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쇼핑을 하는 혜정의 모습을 유심히 본다.

어릴 때 습관부터 시작해서 턱 밑에 점이 있는 것까지 혜정이 틀림없다.

“그놈의 여편네가 무슨 수를 써서 혜정이를 성진 그룹의 딸로 뒤바꿔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참. 이래서 자식은 낳고 볼 일이네!”

혜정이 여성 화장실로 들어서자 기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매장에서 기다린다. 그 틈을 타서 조찬식은 청소 도구를 들고 백화점 화장실 근처에서 기웃거리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혜정의 팔을 움켜잡았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하자 저쪽에 있던 엄 기사가 놀라서 달려와 조찬식을 제압했다.

“이 아저씨. 아까 그 아저씨네. 아저씨 대체 왜 이러세요? 바로 경찰에 가고 싶어 그러십니까?”

그러나 조찬식은 엄 기사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혜정을 보고 소리쳤다.

“조혜정. 너 이대로 도망갈 수 있을 거 같아! 잘 됐다. 이대로 같이 경찰에 가자 그래! 우리 한번 제대로 지문 검사부터 해볼까?”

“지문 검사?”

그 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혜정은 뒤돌아 도망가려다 우뚝 멈춰 서서 정신을 차리며 덜덜 떨리는 눈으로 뒤로 돌아섰다. 술과 노름으로 매일 엄마와 지겹게 싸우고 어린 저를 때리곤 했던 그 아버지 조찬식이 틀림없다. 그러나 혜정은 단단히 버티고 서서 엄 기사를 보며 말했다.

“내가 이분하고 얘기를 좀 해야 되겠어. 이대로 피했다가 나중에 또 뭐라고 할 거 같아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대로 그냥 경찰을 부르시면 됩니다.”

“아니야. 가까운 커피숍으로 가자.”

백화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커피숍으로 걸어가려다 생각해보니까 마주 앉아 길게 말하는 게 어쩌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커피숍으로 가려다가 아무래도 앉아서 얘기하면 길어질 거 같아서 백화점 앞쪽에 있는 나무그늘 아래 벤치가 있는 곳에 섰다.

“엄 기사, 나 그냥 이분하고 잠깐 얘기하게 떨어져 있을래?”

“아가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경찰에 넘기면 됩니다.”

“괜찮아. 어차피 엄 기사가 다 보고 있을 거잖아. 잠깐만 저쪽에 가 있어.”

그러자 엄 기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조금 멀어져갔다.

* * *

바르셀로나를 향하는 열차는 설렘 때문인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가지고 있던 원룸은 아직은 정리하지 않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바로 한국으로 가게 될 거라는 말에 웬만한 짐은 다 챙기고 친구들에게 짐을 맡기고 왔다.

덜컹덜컹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슴에는 뽀얀 희망이 새록새록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신입사원이 되자마자 MK푸드에서 개최하는 바르셀로나 시연회에 스텝으로 참가할 수 있다는 건 더할 수 없는 기쁨이다.

정말 실제로 연회가 펼쳐지는 걸 보고 싶었다. 어떻게 되는지. 물론 낯설고 일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겠지만,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 해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더군다나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연회를 참관하기 위해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정말 내가 행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첫 일부터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라울이 떠오른다. 그 사람 내가 MK푸드에 취업했다는 걸 말해주면 좋아해 할까?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왠지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지난번 그가 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는 원룸에 들른 날이었다. 가기 전에 내게 핸드폰을 주며 말했다.

“내 번호, 일 번에 저장했다. 핸드폰 요금도 다 내 계좌에서 나간다고. 한마디로. 공짜! 알아? 그러니까 전화해! 아낀다고 안 하고 그러지 말고 꼭 전화하라고. 아니면 내가 하는 전화라도 받아!”

그러나 나는 전화하지 않았고 그가 몇 번 했지만 쉽게 받을 수가 없었다. 그건 우리의 관계가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기에 그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니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게 겁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취업을 해서인지 배에 힘이 들어간다. 몇 마디 안부인사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MK사의 최신 핸드폰이다. 전화기를 들고도 또 망설이게 된다. 전화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점점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무거워질 거 같아서 전화할 수가 없었다.

마드리드의 원룸으로 찾아와 함께 밤을 보낸 뒤로는 그가 이전과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상함이나 다정함 같은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사랑을 느낀다는 건 상처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고서는 뛰어들 수 없는 거다.

하지만 나는 일을 더 하고 싶지 사랑에 상처받고 싶진 않다. 더군다나 그는 골리앗처럼 거대한 배경을 가진 남자니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순간의 감정에 내 인생 전체가 휘말리는 그런 일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런데도 한참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결국 터치하고 말았다.

전화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전화를 하는 이 모순된 마음. 신호가 갈수록 그래, 받지 않을 거야. 이제 끊으면 돼. 이제 끊으면 돼. 그런데 신호가 채 다섯 번이 울리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디아나.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자기 손가락으로 전화한 거 맞아? 누가 막 목 조르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전화한 건 아닌가?”

전화를 받자마자 반갑게 말하는 라울의 목소리였다.

“내 손가락으로 내가 누른 거 맞아요.”

“내가 전화해도 받지 않더니 웬일이지?”

“그냥 잘 지내는지, 서울 날씨는 어떤지 궁금해서요.”

“음, 서울 날씨는 좋지. 나도 출장길에 올라서 말이지.”

“아 출장 가세요?”

어디로 가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전 세계 어디든 그 사람이 갈 곳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혹시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MK푸드에 입사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걸 꾹 깨물었다.

“아니에요. 저도 어디를 좀 가는 중이라. 잘 다녀와요.”

“디아나.”

“네?”

“전화 좀 자주 해. 손가락은 뒀다가 뭐에다 쓰는 거야?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거 몰라? 누르라고. 눌러. 1번.”

나는 웃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실시간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 눈앞에서 보는 거 같다.

“알았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흥. 나한테 할 말이 뭔지 나는 다 알지. 우리 MK푸드에 입사해서 지금쯤 바르셀로나로 향하고 있다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기다려. 나도 바르셀로나로 갈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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