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3)

8. 막장 캐릭터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민박집을 정리한다니?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민박집을 정리한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아줌마를 보면서도 나는 가만히 말없이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이런 정도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억지를 부리는 아줌마가 정말 싫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이 민박집 아줌마 경영 못 해요. 저는 이 민박집에 매어 평생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정리해야 하게 맞는 거고요. 이 민박집 제거잖아요.”

당당히 내 거라고 말하자 아줌마가 눈에 쌍심지를 세우며 소리친다.

“그래 이 민박집 네 거야. 그래도 그렇지. 친 이모 같은 나를 내가 너한테 그동안 해 준 게 어딘데! 네 엄마 죽었다고 이렇게 정리하겠다고 하면 도리가 아니지.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내가 지금 딸년도 애비 찾아가고 나 스페인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럼 아줌마도 돌아가세요.”

나는 긴말 않고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아줌마 같은 타입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데 선수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뭐? 야, 너 무섭다. 이모, 이모 할 때는 언제고 지금 나한테 아줌마라고? 진짜 얘가.”

“아줌마가 우리 엄마한테 언니 소리 안 하잖아요. 말끝마다 네 엄마, 네 엄마 하면서 저한테 이모 소리 듣기를 원하셨어요? 아줌마가 우리 엄마한테 네 엄마라고 하는 순간부터 아줌마도 저한테 더 이상 이모 아니에요.”

“아니 뭐야?”

할 말이 없는지 분해하면서도 다음 말을 잊지 못하는 아줌마를 보며 내가 정중하게 한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그렇게 스페인에서 말도 안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으면 돌아가세요. 그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스페인 오실 때부터 여기서 눌러살려고 오신 거 아니잖아요. 혜정이도 한국 가고 아무도 없는데 그럼 평생 제가 아줌마 봉양하고 책임져야 하나요?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야 너 무섭다.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니? 그래도 내가 이 민박집에 쏟은 정성이 어딘데.”

“민박집에서 가져가신 게 더 많지요. 혜정이하고 둘이 여기 있으면서 혜정이 어학연수 비용도 저희 어머니께서 대주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엄마 돌아가신 이후로 민박집에 들어오는 비용, 많은 부분 적자 내고 손해 본 거 아줌마가 가져가신 거 알아요.”

“야, 가져가긴 뭘 가져가 난 장 봐온 것밖에 없어. 그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그렇죠. 장 보시면서 부풀리고 영수증도 안 가져다주시고. 그래도 저 넘어갔어요. 그런데 이건 제 진로의 문제에요. 제가 아줌마 평생 봉양할 수도 없고 챙겨 드릴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헤어져요.”

“그럼 너는 나를 평생 안보겠다는 거냐?”

“혜정이도 한국으로 갔어요. 친딸도요. 저하고 언제까지 이러고 지내실 건데요? 저는 더이상 그럴 마음 없습니다.”

“아니 이게?”

한 대 쥐어 밖을 듯이 달려드는 아줌마를 살짝 피했다.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내 몸도 진로도 내 인생도 내가 지켜야 한다는 거 잘 안다. 이제는, 엄마가 없으니까.

“나는 못 나가 배 째! 난 못 나간다고.”

들어 눕는 아줌마를 보고 나는 일어났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음 오실 분도 여기서 민박집 하신다고 하니 그분한테 말씀 잘 드려서 여기서 일하시던가요. 어차피 민박집이라는 게 혼자서는 안돼서 사람 쓸 거예요.”

“뭐야? 아니 야. 너 진짜 이러고 나가는 거야? 난 못 나가 이대로. 난 억울해서 못 나가. 그러니까 돈이라도 내놓고 나가. 어? 돈이라도 내놓으라고!”

내 발을 잡는 걸 힘껏 발을 밀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발까지 잡고 늘어질 줄. 정말 상상을 불허하는 아줌마다. 우리 아줌마 이 막장 캐릭터를 어떻게 할까?

“아줌마. 긴 말 하고 싶지 않아요. 돈 가지고 계신 거 알아요. 한 푼도 드리고 싶지 않고 드리지 않을 거예요. 우리 엄마랑 저는 또 틀리죠. 저는 아줌마를 안지 1년 6개월밖에 안 돼요. 잘해주신 거 알고 그것도 충분히 사례했다고 생각해요.”

“사례는 네가 무슨 사례를 했다는 거야.”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 이대로 갑니다. 오후면 새로 이 민박집 운영할 사람 올 거예요. 지금처럼 이렇게 누워서 배 째라고 하시든가 알아서 하세요. 제가 그분들한테는 말해놓을 거예요. 전에 일하던 분이 못 나가시겠다고.”

“뭐? 일하던 분? 내가 일하던 사람이야?”

“엄연히 따지면 일하던 분이죠. 주인은 아니잖아요.”

“아니 이게!”

다시 달려드는 아줌마를 피해서 민박집을 나왔다. 엄마하고 십 년 이상 지낸 집이었다.

추억이 많았다. 어릴 땐 엄마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새로운 민박집 손님들에게 재롱도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저기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떠나는 게 아쉽지만, 엄마와는 달리 나는 평생 민박집을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나이가 더 들면 몰라도. 창문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다 들린다.

“야 이년아! 너 이렇게 나가서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너 나 이렇게 괄시하고 산 거 나중에 다 후회할 줄 알아! 독한 것 같으니라고!”

아줌마는 스페인어도 잘 모른다. 온 지 1년 반인데도 배울 생각을 안 하는지. 뭐든지 엄마나 나를 통해 했었고 혜정이도 스페인어 실력이 변변찮았다.

그러고 보면 혜정이는 스페인어는 잘 못 해도 남자는 잘만 만났던 것 같다. 하긴 가이드도 했으니 할 말은 하고 다녔겠지? 아무래도 아줌마하고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민박집은 순조롭게 계약이 되었고 나는 아줌마와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이대로는 못 나간다며 생떼를 부리는 아줌마를 두고 나왔다.

다음 민박집을 인수한 사람이 아줌마를 고용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본다.

저렇게 생떼가 심하고 일 안 하고 슬쩍슬쩍 물건이든 돈이든 집어가는 아줌마를 누가 좋아할까. 하지만 그것도 다음 민박집을 인수하는 사람과 아줌마의 문제다.

* * *

가방을 들고 얻어놓은 호텔로 향했다. 호스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이 정도로 지내기는 나쁘지 않다.

제대로 된 원 베드룸을 얻기 전까지 며칠은 이곳이 편하다. 간단히 식사는 사서 먹는 걸로 해결하고 나는 마드리드 대학의 사무실로 갔다.

신청해 놓은 일자리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대학으로 면접을 보러 오는 한국의 기업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채용하는 그룹은 MK사와 성진 그룹이다. 이 두 그룹은 해마다 졸업시즌 전후로 해서 한국계 스페인사람들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한다. 졸업식 끝난 지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곧 그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엄마하고 스페인에서 성공해서 살 생각만 했지. 그리고 나의 청소년기가 모두 다 이 마드리드에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엔 나도 한국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하고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 나의 동족. 그런 단어들이 촌스럽고 우습긴 하지만 그런 것들도 그리워지기는 한다. 어쩌면 싸가지 라울을 만나게 돼서 더 한국기업에 관심을 두게 된 걸까?

사무실에 갔을 때 바로 나를 알아보는 조교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내일 면접이 있는데 MK사는 내일이고, 다음 주에는 성진 그룹에서도 있어.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파티 플래너를 모집하기도 해.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와 푸드회사들은 신메뉴나 연회 같은 데에 꼭 필요하거든. 굳이 스페인에서 뽑아가야 할 이유는 없을 거 같기는 하지만 또 워낙에 다국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보니까 필요하기도 한가 봐. 너한테 추천서를 써줄게. 난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고마워요.”

“참, 호세가 찾더라.”

“네?”

“호세 말이야. 마르티나가 한국으로 간 뒤로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널 찾았던 거 같은데. 너 하고 연락이 안 됐나 봐.”

“네.”

“그런데 호세도 한국기업에 취업하겠다던데?”

“호세가요?”

호세는 한국계 스페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리지널 스페인 사람이었다. 집시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혼자 떠들기는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토종 스페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한국까지 가겠다고 결정을 할 정도라면 마르티나를 꽤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서 MK사에서 모집하고 있는 파티 플래너의 필요조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학은 충분히 되고 그동안 해왔던 원예수업이나 테이블 세팅 수업, 꽃꽂이 자격증, 모든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거다.

성진 그룹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파티 플래너를 모집하고 있었다. 순간 라울과 규빈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것에 영향받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두 군데 모두 원서를 작성했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업로드하고 필요한 약력들을 넣고 인증샷을 첨부하고.

아! 내가 합격이 될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스페인의 기업에도 몇 군데 이력서를 제출했다. 늦게까지 작업을 했던 탓에 피곤했다.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엄마를 불러본다.

“엄마, 나 도와줘야 돼. 나 정말 그 왕싸자가지 보다 더 잘 되게 도와줘. 그 앞에서도 절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게. 아니다. 그 왕싸가지는 그대로 잘 되게 두고, 나는 나대로 잘 되게…….

그런데 그 왕싸가지 라울은 내 생각 할까?”

자꾸 그가 떠오른다.

오늘은 원 베드룸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작은 원룸 아파트를 얻었으나 들어가는 날짜가 맞지 않아 며칠을 유스호스텔에서 묵고 오늘 들어간다. 짐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혼자 분주하게 이사를 했다.

가구와 싱크대, 세탁기와 냉장고 등 기본적인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옷 가방 몇 개 들고 들어갔다.

사실 민박집에는 가구가 많았고 내 짐도 많았지만 대부분 정리했다. 언제까지 과거에 연연해 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엄마의 일기장과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꼼꼼하게 적었던 책들은 모두 챙겼다. 또 엄마가 좋아했던 은으로 세공된 십자가와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야드로 도자기 인형도 말이다.

창가에 도자기 인형들을 쪼르륵 놓고 엄마의 십자가도 한쪽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바로 이사 오다가 산 화분과 아마릴리스 한 송이를 화병에 꽂았다.

아마릴리스를 산 건 세베로가 나에게 어울리는 꽃이라고 만들어줬던 그때의 부케가 너무 깊이 가슴에 와 박혔기 때문이다.

향기도 진하고 볼수록 청초하고 예뻐서 세베로가 나에게 아마릴리스를 닮았다고 말한 것이 기분이 좋다. 세베로는 정말 점잖은 집사였는데 그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혀.

“여보세요?”

“음.”

이건 무슨 매넌지. 전화를 해놓고 헛기침을 하는 사람이라니.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으면 끊을 생각으로.

“여보세요?”

“나야, 라울.”

세상에, 라울? 그러고 보니 그가 전화번호를 남겼다. 하지만 저장하지 않았다. 내 안에 미련을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그냥 돌아왔는데 그도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하긴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갑자기 왜?

“이사를 했다고?”

하, 기가 막히다. 오늘 이사를 했는데.

“네. 뭐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경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더 파고들까 봐 겁난다.

“잘 지내는가 하고.”

“물론 잘 지내고 있어요. 이사도 잘했고요.”

“음…….”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묵이다. 이렇게 할 말도 없는 남자가 도대체 전화는 왜 한 거야.

“하실 말씀 없으면 끊을까요?”

“잠깐.”

“말씀하세요.”

“우리 성에 다시 갈래?”

의외였다. 그가 지금 스페인에 있는 걸까?

“아직도 스페인에 있어요? 그때 분명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물론 돌아갔지. 어찌 됐든 지금은 스페인이야.”

“세비야에 다시 갈 거 같지는 않아요. 바쁜 일들도 있고. 기다려야 할 것도 있어서요.”

“그럼 내가 너의 집에 들르면 차 한 잔 줄래?”

“들리시면요. 하지만 세비야에서 여기는 한참이거든요. 마드리드에 올 계획이 있으세요?”

내가 그렇게 그에게 물었을 때였다. 소리가 났다. 전화로 들리는 소리 말고 바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말이다.

똑똑똑.

“잠깐만요, 누가 왔나 봐요.”

전화기를 든 채 현관으로 가서 물었다.

“누구세요?”

“지금 통화하는 사람.”

“네?”

나는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지금 통화하는 사람. 라울?

“라울?”

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정말 라울이였다. 이 남자, 커다란 아마릴리스 부케를 들고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라울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그가 입고 있는 코트에는 빗방울 자국이 있다.

“어떻게 왔어요, 여길?”

맨발로 있었기에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그의 눈을 보자 가슴에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이 사람을 보고 싶어 했나, 내가?

그가 손을 내밀며 케이크를 주었을 때 그것을 받느라 손가락이 살짝 겹치자 온몸이 진동하며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도 놀랐는지 손을 움찔하고는 다시 꽃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이 스치는 그 순간에 전율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도 나도 이렇게 손가락 끝만 스쳐도 진저리를 칠만큼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걸까?

그의 짙은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숨 막힐 듯 진한 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심한 듯 바라보는 것 같은데 내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했다. 어색한 공기를 바꾸려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케이크랑 꽃, 직접 준비한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직접.”

“너무 예뻐요.”

활짝 웃자 그의 표정이 이전엔 보지 못한 만족한 웃음을 띤다. 그런 그의 미소가 황홀해서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말하게 된다.

“정말 너무 예뻐요.”

부케를 들고 꽃냄새를 맡자 그가 내 볼에 볼을 비볐다. 따뜻한 손의 촉감. 나는 바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달아오른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그를 향해 달아오르며 열기를 품는 걸 그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단 들어와요. 고마워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 아마릴리스 부케를 놨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향을 머금은 부케 덕분에 작은 아파트가 화사해지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화병에 단 한줄기의 아마릴리스가 꽂혀있다. 그가 그걸 보더니 빙긋 웃으며 한줄기 아마릴리스를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며 말했다.

“꽃을 샀군.”

“네.”

왠지 아마릴리스에 세비야에서의 둘의 밤이 얽혀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차가 있나?”

“향기 좋은 차들이 있어요.”

나는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에 제비꽃 향이나 장미향이 우러나는 차들을 사다 놓곤 했다. 내가 유일하게 귀족적인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를 마시면 왠지 기품 있는 아가씨가 되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럼 권해주는 차를 마셔볼까?”

“장미향이 섞인 마리앙트와네트 어때요?”

“좋아.”

따뜻한 물에 차를 넣자 장미향이 방 안을 따뜻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그 앞에 찻잔을 밀어놓자 그가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쥐었다.

그의 손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섬세하게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뭘 하고 지냈지?”

“민박집을 정리했어요.”

“잘했군. 왜 그런 결정을 했지?”

“내 꿈은 민박집이 아니니까요. 사실 민박집 정리할 때 좀 곤란했어요. 이모처럼 가깝게 지냈던 아줌마가 있는데 그 아줌마가 민박집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했지?”

“민박집에 두고 왔어요. 알아서 하시겠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시겠지만 그렇게 큰 도움은 되어드리지 못할 거 같아요. 그 아줌마를 평생 책임질 수 없거든요.”

“남편이나 자녀가 없는 사람인 것 같군.”

“그 딸이 마르티나라고. 자기 아버지를 찾아서 한국에 갔어요.”

“그 아버지는 뭐하시는데?”

“저도 모르는걸요. 뭐 말로는 술 먹고 노름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 아빠를 찾아갔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연락도 없거든요.”

“그렇군.”

“알아서 하시겠죠. 아직은 젊으시니까요.”

“현명한 판단이야.”

그는 내 말을 들으면서도 점점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내는 눈길이 점점 뜨거워졌기 때문에 나는 찻잔에 코를 박은 채 눈도 들지 못했다.

“날 보는 게 어떨까?”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의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작은 원룸에 있는 그는 더욱 존재감이 또렷했다.

여전히 윤이 나는 새카만 머리와 오뚝한 콧날,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는 그립고 반갑고 익숙한 것이었다.

같이 있었던 시간은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은데 너무 깊이 각인돼서인지 오랜 시간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단순히 그리움으로 그렇게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볼을 만졌다. 그의 손길이 좋다. 험한 입담은 아직도 남아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보고 싶었나?”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긍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부정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보고 싶었다고 알고 있으면 되겠군. 나는 어땠을 거 같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아니, 알고 싶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겠지.

“한국에 가신 게 아니었어요?”

“갔지.”

세상에! 그러면 한국에 갔다가 그사이에 또 스페인에 왔다는 얘긴가?

“원래 이렇게 스페인에 자주 오나요?”

“글쎄. 자주 올 거 같군. 한국으로 갈 생각 없어?”

“한국이요?”

한국에 있는 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MK사라면 그의 입김이 작용해서 회사에 들어가는 일 같은 건 결코 하고 싶지 않다.

직장에서까지 남자의 입김이 좌우되는 건 동료의 지독한 따돌림, 이상한 시선. 이런 것들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말이다.

“모르겠어요. 한국행, 글쎄요. 간다 하더라도 당신을 믿고 갈 수는 없어요.”

“어째서지? 나는 충분히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을 텐데.”

“내 후원자가 되려면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 맞추기 어려울 걸요?”

“뭔데?”

“절대 나하고 연애하지 말 것, 나하고 섹스하지 말 것, 그리고 아무 때나 나한테 연락하지 말 것, 순수한 후원자로 내가 잘되기만 바라고 멀리서…….”

“됐어. 그만.”

그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썼다.

“그런 후원자 따윈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아.”

“그럼 당신은 뭐가 되고 싶어요?”

“뭐?”

“당신은 나한테 뭐가 되고 싶으냐고요.”

내 질문에 그가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길이 조금 더 진하고 애틋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뭐가 되고 싶냐고?”

라울이 그녀를 보며 순간 생각에 잠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천천히 생각해보면 내가 저 여자한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는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나만 바라봐.

둘째, 나만 생각해줘.

셋째, 나만 안아줘.

넷째, 나 말고 다른 놈한텐 눈길도 주지 마.

24시간 네 머릿속이 나만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런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존재는 무슨 존재지?

“나는 특별히 너한테 뭐가 되고 싶지 않아.”

또다시 시작됐다. 이놈의 혀. 잘근잘근 깨물어도 시원치 않다. 바라지 않는 게 없긴, 이렇게 많은데. 하지만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다. 이게 아마 가장 확실하게 정확한 표현일 거다.

“나한테 어떤 존재도 되고 싶은 게 없단 말이에요?”

“뭐, 전혀 없지는 않지.”

“그러면 말해보세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그러니까, 자주 연락하고…….”

“네.”

내 말에 그녀가 장단을 맞춰준다.

“매일 연락하고.”

“그리고요.”

그녀는 웃음 띤 눈으로 여유 있게 보며 묻는다.

“매일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요?”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봐.”

“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으세요? 저한데?”

“이런 걸 충족시키는 관계가 된다면 좋겠지.”

“저하고 결혼하고 싶으세요?”

“뭐? 천만에. 내가 너한테 그런 생각을 하고 싶겠어?”

한 방 먹은 거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걸까?

어찌 됐든 구체적으로 디아나하고 결혼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결혼이라니. 그건 비즈니스의 일종인데.

난 이 여자하고 비즈니스를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왜 결혼이라는 비즈니스를 이렇게 좋아하는 여자하고 해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 불안하다.

이 여자가 사업성이 있나?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집안의 명예를 드높일 만한 가문의 여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순간적인 인기가 필요할 때 소용되는 연예인이거나 인기인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이 여자는 결혼이라는 비즈니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천만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디아나는 당연히 예상된 대답이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나한테 원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요.”

그런가? 하지만 진심인데. 진심으로 네가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고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고 또 자주 연락하고 자주 보고 싶은데. 음,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그러니까, 그 차 마시고 돌아가세요.”

그건 싫다. 이제 더는 찢어진 레이스 팬티를 가지고 밤을 지새우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다. 이렇게 분위기도 좋은 아파트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다.

머릿속은 정확한 계산으로 한 치의 빈틈이 없이 이 여자가 지금 거절하지 않을 수 있는 최적의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결정한 것이,

“오늘 나를 사주지 않을래?”

이런, 가장 적합한 말이긴 하지만 스타일은 완전히 구긴다.

“네?”

“그러니까 저번에도 그랬듯이 20유로에 나를 사준다면 내가 오늘 밤…….”

아, 역시 세일즈는 쉬운 일이 아니야. 특히 나를 판다는 건 말이지.

“됐어요. 지난 번 한 번이면 됐지. 맨 날 그렇게 20유로에 팔리는 게 좋아요?”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20유로에 사겠다고 그러면 펄쩍 뛸 일이고 명예 훼손죄로 당장에 고소할 일이지만, 지금 디아나가 나를 20유로에 사준다면 나는 너무나 행복할 거 같다.

그때도 행복했거든! 물론 다음날 20유로를 침대에 던지고 갔을 때는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밤은 좋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오늘 쉽게 나를 사줄 거 같지 않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돈을 펑펑 쓸 수가 없어요. 아껴야 하거든요.”

“돈이 없으면 10유로라도.”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 어떻게 20유로가 아니라 반값에 팔겠다는 건지. 하지만 나는 오늘 밤 디아나 옆에서 자고 싶었다. 정말.

“더 깎아도 돼요?”

“더는 안 돼.”

“좋아요. 그럼 10유로 드릴게요.”

“그럼 나, 자고 가도 되는 거야? 진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래도 된다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나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기분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디아나가 나를 보고 웃는다. 활짝 핀 아마릴리스처럼 환한 웃음. 나는 이 여자가 정말 좋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당겨서 입술에 깊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 내 가슴을 쿵쿵 뛰게 하고 길 가다가 눈만 감아도 떠오르는 이 탱글탱글하고 젤리 같은 입술.

“디아나.”

라울의 파고드는 입술을 느끼며 생각한 건 어쩌면 이 남자가 나를 정말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이게 최선이다. 10유로의 밤!

사실 나, 당신이 좋아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은 엄청 싸가지 없게 하고 잘난 척에 입만 열면 뻥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다정한 눈빛과 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으니까. 물론 순간에 충실한 거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 남자는 수없는 여자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20유로에 이 사람을 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 이 남자의 돈은 받고 싶지 않다. 도움도!

어차피 한두 번의 대가에 지나갈 거라면 차라리 내가 그를 사는 게 낫다. 물론 팔아준다면 말이지. 그런데 이 남자 생각보다 싸구려다. 20유로밖에 안 줬는데도 다음에 오더니 또 반값을 할인해주겠단다.

이렇게 커다란 덩치를 하고 수천 유로에 달하는 옷을 입고 이렇게 깊은 바이올렛 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를 내게 향하고 10유로에 자신을 팔겠다고 하다니.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은 까스틸로 성의 성주도 아니고 MK 그룹의 사장도 아니다.

그냥 내가 아는 라울. 나에게 10유로에 자기 몸을 팔겠다고 오는 정말 귀여운 남자일 뿐이다. 내가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자 그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네가 내 몸에 손만 대도 떨려.”

“너무 유치한 멘트 아니에요?”

나는 천천히 그의 머리에 대었던 손을 내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에 볼을 기대며 신음했다.

“으음, 유치한 멘트라도 할 수 없어. 진짜 그런걸?”

그가 말하며 내 귓불을 물었다. 그의 숨결이 귓가에 느껴지자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난 당신의 숨결만 느껴도 어깨가 떨려요.”

“이건 더 유치하군.”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대담하게 손을 내려 아까부터 불룩하게 솟아 눈길을 끄는 그의 바지 앞쪽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사정없이 나를 당기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거칠고 격렬한 키스와 함께 그가 조급한 손길로 내 셔츠를 잡아 뜯었다.

두두둑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그가 나를 안고 그대로 침대에 뒹굴었다. 활활 타는 조바심이 그를 휩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제대로 그를 도발한 거다. 그의 입술이 바로 내 가슴을 깨물 듯 물었고 그의 손은 이미 반바지를 밀어내고 긴장으로 부푼 은밀한 속살로 파고들었다.

“하아…….”

“네 냄새는 날 미치게 해. 저주에 걸렸거나 중독이 된 거야.”

그가 중얼거리듯 내 살결에 입술을 댄 채로 말했다. 순간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정말이요? 와! 나랑 똑같네. 당신한테서는 올리브향이 나요.”

“거 봐. 우린 둘 다 저주에 걸린 거야. 그런 의미에서 크앙!”

그가 동물 소리를 내며 내 젖가슴을 크게 물고 핥고 빨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잡아먹히는 여린 짐승처럼 과장되게 소리를 질렀다. 발동한 장난기가 둘 다를 사로잡았다. 아니면 뜨거운 관능을 희석할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가 내 손을, 어깨를 당장 깨물어 먹기라도 할 듯이 집어삼킬 듯 입에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소리치면서도 그의 단단한 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둘 다 유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긴 10유로짜리 남자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나는 그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살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서로의 약한 곳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입 맞추고 쇄골을 질근 깨물었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지며 저절로 그의 몸에 다리를 감게 된다. 그의 입술이 점점 미끄러질수록 내 가슴은 팽팽하게 부풀고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몸이 비틀렸다.

“라울.”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잠시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내 눈동자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정말 기분이 이상해. 디아나. 한 번만 더 불러봐.”

“라울. 얼마든지 불러줄 수 있어요. 라울. 라울…….”

그러자 그가 다시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나도 알 수 없는 설렘이 생긴다. 올리브 향을 듬뿍 머금은 지중해 바람이 이 라울 특유의 체취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큰 몸에도 나를 감싸는 그는 마치 때로는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가슴으로 입술을 내렸다.

“흑…….”

떨림은 이제 더할 수 없는 진동이 되어 내 온몸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역시 단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것만으로도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 작은 마녀. 내게 무슨 저주를 건 거지?”

나는 허리를 휘었다. 덕분에 두 가슴이 그의 앞으로 더 나아가며 오뚝 선 젖꼭지가 그의 코끝에서 유혹하듯 부풀었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그의 앞에서 나는 관능적인 자세로 그를 휘두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 마녀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마녀의 피가 흐르는 걸까?

그가 눈앞에 있는 내 젖꼭지를 잘끈 깨물며 다시 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류가 흐르면서 아래로 왈칵 뭔가 쏟아지는 것 같다. 간질간질 움찔거리는 아래가 느껴지자 내가 그의 볼에 키스하며 말했다.

“무슨 저주일 거 같아요?”

그가 내 입술을 쪽 빨아들이고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얽고 빨다가 놓아주며 답했다.

“네가 무조건 맛있게 느껴지게 만들었지. 그리고 널 보기만 하면 먹고 싶게. 아니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라고…….”

그가 말과 동시에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손을 내려 내 젖어든 꽃잎을 가르고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굵은 손가락이 밀려들어 오면서 내벽을 사선으로 찔러대자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이 남자는 내 몸 안의 열점을 너무도 잘 안다. 그동안 몇 번의 섹스를 하면서 내 몸을 샅샅이 연구라도 한 걸까?

“당신 상태가 그래요?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고?”

그가 대답 대신 얼굴을 내려 내 아랫배에 볼을 비빈다. 그리고는 배꼽 주위를 혀로 핥다가 쪽 살을 빨아들였다.

“아앙…….”

야릇한 감각과 아릿한 통증이 동시에 일었다. 판판한 배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생기는 쾌감이었다. 그가 입안에 빨려들어 온 살을 오물오물 거리다 뱉자 배에 붉은 자국이 생긴다.

“그럼 나도.”

내가 그의 어깨를 빨다가 ‘앙’ 깨물었다. 살이 지근거리는 느낌에 아프게는 깨물 수가 없었으나 그는 크게 공격이라도 당한 듯이 엄살을 부리며 소리를 냈다.

“컥! 물다니. 각오해.”

그리고는 내 다리를 잡아 벌리고는 그곳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아흑……. 응…….”

차라리 뭘 물든 빨든 아니면 바로 삽입을 하는 게 더 낫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뜨거운 눈길만을 보내는 통에 엉덩이가 비틀리고 허벅지를 오므리고 싶어 비비적거리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너무해. 너무 창피해서 죽을 거 같단 말이에요. 뭐라도 좀 해요. 아니면 비키든지…….”

맙소사. 완전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내 입으로 뭐라도 하라니!

그러자 그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살살 내 아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눈길만으로 충분히 애무라도 된 건지 나는 살짝만 건드려도 신음했다.

“흐음……. 응……. 아흑…….”

그가 과감하게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짓이기며 비벼대자 나는 연신 신음하며 엉덩이를 비틀었다. 저절로 두 다리가 번쩍 들렸다. 그가 내 다리를 어깨에 얹고 얼굴을 내려 혀로 길게 핥았다.

“아응……. 흥……. 응…….”

부드러우면서도 짜릿한 쾌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숨 쉬는 거 같이 세포들이 깨어서 환호하고 있었다. 그가 혀를 놀릴 때마다 허리가 뒤틀리고 어깨가 움츠러들고 엉덩이가 흔들린다.

이제는 정말 그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그가 나를 애타게 애무하다가 몸을 위로 올리더니 나를 안고 돌아누웠다. 그의 위에 엎드린 나를 밑으로 밀어 내렸다. 밀리는 대로 내려가다 보니 눈앞에 검붉고 거대한 기둥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이걸……. 어떻게 하라고?

나도 모르게 뚫어지라 바라보니 그것도 나를 보고 끄덕끄덕 움직인다. 마치 인사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내 머리를 슬쩍 눌렀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이걸……. 빨라고?

딱 그렇게 느껴졌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빨라고?

눈앞에 끄덕이는 것을 손으로 잡았다. 뜨겁고 단단하지만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그런데 한 손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큰 걸 달고 다니려면 몸이 저렇게 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지?

두 손으로 잡자 저절로 살짝 미끄러진다. 미끄러뜨리지 않으려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 잡자 그가 소리를 냈다.

“끙. 아파.”

“앗! 아파요?”

아! 단단한 것에 비해 의외로 약하군!

나는 살살 쥐고 그 끝을 살짝 혀로 핥았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다시 나를 획 돌려 뉘고 내려다본다.

“넌, 그런 건 필요 없어.”

뭐가 필요 없다는 건지……. 윽!

그가 아까 본 그 거대한 걸 단번에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이 뒤로 밀리는 걸 두 손으로 골반을 꽉 움켜쥐고는 단번에 밀어 넣자 자궁 끝에 닿으며 진땀이 오싹 난다. 완벽하게 하나로 연결된 뒤에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넌, 요망해!”

뭐? 요망? 지금 그게 무슨 소린지. 나를 홀려서 10유로나 주고 사게 만들어놓고 나보고 요망하다니. 지금 요망한 건 너야 라울!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의 눈길을 보는 순간 다 사라졌다. 짙은 바이올렛을 띤 검은 눈동자가 기쁨과 희열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관능이 어려 사나운 듯하면서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기뻐한다는 것이 느껴지자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희열이 내 안을 감싸며 나 역시 더 느끼게 된다. 그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고 나면서 내벽을 찌르고 뭉개고 깊이 파고든다.

그 자극이 격해질수록 내 몸이 흔들리고 그의 앞에서 젖가슴도 출렁거린다. 그러자 그가 다시 출렁거리는 가슴을 입에 물었다. 가슴에서도 아래에서도 쉴 새 없는 자극이 나를 휘몰아가며 나는 바로 눈앞에서 터지는 하얀 불꽃을 느꼈다.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뜨겁지만 기분 좋은 그 자극의 어느 정점에서 그의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큭! 윽…….”

그리고 잠시 후에 그가 내 위로 털썩 몸을 내렸다.

무거워!

역시 나를 안고 옆으로 돌아눕는다. 둘 다 거친 숨결에 가슴이 들썩이지만, 얼굴은 만족한 웃음이 가득하다. 이런 만족감은 느껴보지 못한 거다. 그와 몇 번의 섹스를 했지만 나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뭐랄까? 마음도 몸도 하나로 녹아드는 충만한 행복감?

“디아나. 맨 날 맨 날 날 사주면 안 돼?”

맙소사. 이 남자 버릇 되겠다. 나중엔 돈이 없어서 못 살 판이다. 함께 절정을 느끼고 서로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는 건 이렇게 따뜻한 거였구나!

라울의 품은 아주 크고 따듯하고 든든하다. 만일 내가 어린아이라면 아버지의 품이 이 사람의 품 같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버지의 품은 알지 못한다. 엄마가 혼자 낳아서 키웠으니까.

이렇게 라울의 품에 안겨 있으니 막연하게 아버지가 그립다. 엄마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정말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게 된 거다. 그런데 이 남자가 이렇게 안아주니 정말 좋다. 좀 딱딱하긴 하지만.

“왜 이렇게 딱딱해요?”

“남자의 자존심이지. 이 가슴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에 푸쉬업을 얼마나 많이 하는 줄 알아?”

“푸쉬업 안 하면 다 없어지나요?”

“없어지지는 않지. 나는 원래 타고나기를 이렇게 타고나서…….”

“됐네요. 그러니까 타고나기를 워낙에 멋있게 타고났는데 그거 더 멋있게 만드느라고 푸쉬업을 그렇게 열심히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세상에, 그럼 기저귀 차고 기어 다닐 때도 복근 있고 가슴 딱 벌어졌어요? 징그러워라. 그런 애기 어디 안기는 하겠어요? 허벅지도 돌같이 단단했겠네. 그래요?”

마구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그가 삐쳤는지 노려본다. 나는 좀 심했나 싶어서 슬쩍 말을 돌렸다.

“어찌 됐든, 당신 몸 정말 멋있어요.”

“그런 말 많이 들었지. 여자들한테 말이야.”

역시 이 남자는 잠시도 치켜 주면 안 된다.

* * *

역시 여자들은 남자의 발달한 근육에 약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도 지금 내 근육에 뻑이 간 거군. 오늘부터 푸쉬업 더 해야지.

“그런 말 많이 들었지. 여자들이 말이야 이 가슴을 얼마나 멋지다고 하는지 알아?”

말과 함께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이게 지금 아무 때나 튀어나올 말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디아나의 눈초리가 확 달라지더니 나를 노려본다.

아! 이 여자가 노려보는데 왜 가슴이 찔끔하는 거야. 나 여자가 노려본다고 이렇게 영향받는 남자 아니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안는 여자마다 당신 가슴이 멋있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멋지다고 할 거라는 거지.”

무조건 잡아떼는 게 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녀를 보던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작은 집이군. 천장이 한눈에 들어오고 말이야!

“나는 모르겠네요. 당신 말고는 아직 경험이 없으니. 다른 남자들이 내 가슴을 뭐라고 말할지.”

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냈다.

“시끄러워. 그런 거 몰라도 돼. 다른 남자들 눈에는 네 가슴 같은 건 가슴으로 보이지도 않아. 단지 내 눈에만 예쁠 뿐이야.”

“뭐라고요?”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것도 가슴이라고. 누가 이런 가슴을 좋아하겠어. 절대 다른 남자들에게 가슴을 보여주거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거나 이런 짓은 해서는 안 돼.”

아! 나 지금 제정신이야? 말한 나도 기가 막히다. 나는 다시 그녀의 가슴을 양손에 꼭 쥐고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이건 가슴도 아니야. 알았어? 명심하라고. 절대로 보여주면 안 돼.”

그러나 그걸 시발점으로 해서 나는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예쁜 가슴을 만지면서 흥분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이런 가슴을 누구 앞에 내놓고 물어보겠다는 건지. 어찌 됐든…….

“하! 디아나!”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찌나 왕성한 성욕을 가졌는지 끝도 없이 그녀를 물고 빨고 핥았다. 끙끙거리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제풀에 절정으로 가버릴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조급해 보이지도 않도록 살살 그녀를 애무하며 열기를 끌어 올렸다.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물고 빨고 젖어든 그녀의 아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넓게 비비고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출렁거리며 점점 내가 원하는 고지까지 밀려 올라가 나른하게 몸을 휘고 비틀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달고 향긋한 숨결이 터져 나온다. 그녀의 안으로 힘 있게 들어가 허리를 퍽퍽 쳐올리자 순식간에 절정을 느낀다.

눈앞에 하얀 폭죽이 끝도 없이 터지는 아득함 속에서 나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향기를 원 없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게 벌써 몇 번짼지. 정말 이러다가 나중에 잊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아득한 걱정이 잠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제발 더 이상은 나를 흔들지 마요. 라울. 당신하고 나는 어차피 안 되잖아요. 난 당신하고 상관없이 내 길을 갈 거예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품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의 품에 깊게 얼굴을 묻고 파고들었다.

올리브를 가득 머금은 지중해의 바람이 느껴진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행복감이 들며 꿈나라로 날아갈 거 같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짹짹짹. 아, 시계 소리가 아니라 새소리였나? 눈을 떴을 때 집안 가득 그윽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

“어?”

일어나보니 라울은 벌써 일어났는지 자리에 없다. 하지만 겨우 원베드룸인 이 집안에서 그가 숨을 곳도 없었다.

“잘 잤어, 디아나? 아침은 내가 준비했지.”

라울이 아침을 준비했다고?

* * *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세베로에게 전화를 했다.

“네, 주인님.”

“난 여기 마드리드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마드리드로 어제 왔습니다.”

“그래.”

“즐거운 밤이 되셨습니까?”

“뭐?”

여우같은 세베로. 내가 지금 디아나와 함께 있다는 것까지 다 아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세베로답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전화를 주신 건 혹시 아침 식사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어떻게 알았어, 세베로. 맞아. 바로 그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모든 준비를 해 가지고 30분 이내로 디아나 양이 사는 아파트 앞으로 가겠습니다.”

“응. 그럼 30분 후에 내려갈게.”

“예.”

전화를 끊고 다시 침실에 가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새근새근 잠을 자는 그녀의 하얀 얼굴, 흑단같이 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에 흩어져있다. 이렇게 여리고 작은 몸으로 어떻게 밤새 나를 그렇게 받아주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아직도 뾰로통한 것처럼 부풀어있는 저 입술을 밤새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저 앵두 같은 입술을 쏙 빨아들이고 싶지만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세베로가 모든 아침 식사를 완벽히 세팅해서 나에게 넘겨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탁을 보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밤새 체력소모가 많았으니까 우리는 잘 먹어야 돼.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덮어주었다. 한 줌밖에 안 될 거 같은 이 가는 어깨. 생각할수록 미치게 좋다. 어떻게 하면 맨 날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조그맣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아니면 내 개인 비서를 만들어서 내가 가는 데마다 수행하게 할까?

안되지. 이런 마녀를 수행 비서로 삼았다가는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 텐데 그렇게 되면 일에 너무 지장이 많을 거 같아. 게다가 이 여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받으려고 하지 않잖아?

그렇다고 돈이 없는 저 여자가 나를 맨 날 10유로, 20유로에 사 줄 수도 없고. 내가 맨 날 저 여자가 나를 찾도록 만들려면 이 여자가 부자가 될 수밖에 없군. 그래야 나를 높은 가격에 사 줄 거 아니야?

아니지. 이렇게 사달라고, 그것도 최저가로 나를 팔겠다고 쫓아다니는 것도 미친놈 같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보니 시간은 삽시간에 지나 세베로에게 연락이 왔다.

“알았어. 세베로. 내려갈게.”

1층에 내려가자 세베로는 주렁주렁 엄청난 포장을 한 봉투와 상자를 내게 내민다. 한가득 밑에서부터 턱에 닿을 만큼 상자를 받고 말했다.

“고마워.”

“천만의 말씀을요, 주인님. 이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디아나 양은 잘 계신가요?”

“신경 꺼. 디아나에 대해서 신경 끄라고. 그녀는 내 여자야.”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베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어도 좀 심하긴 했지. 하지만 다른 남자들 입에서 디아나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도 마땅치 않았다.

잔뜩 상자를 들고 올라가서 하나하나 펴기 시작했다. 갓 짠 오렌지 주스와 올리브오일이 듬뿍 들어간 샐러드와 드레싱, 해산물을 듬뿍 넣고 만든 오믈렛과 갓 구워낸 빵, 그리고 최고급 수제 마멀레이드와 얇게 썬 하몽, 말린 토마토, 블랙 올리브.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아침 식사였다. 그대로 식탁 위에 쫙 늘어놓자 근사한 아침 식사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이제 여기에 커피만 내리면 된다.

디아나도 커피는 좋은 걸 마시고 있었다. 커피를 내리며 집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을 맡고 있자니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쁨, 누군가를 위해서 식탁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는 일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저 잠꾸러기 아가씨는 잠에 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하긴 저건 잠에 빠진 게 아니라 거의 기절 수준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찻잔을 준비하고 있을 때 디아나가 일어났다.

“라울, 잘 잤어요?”

아, 사랑하는 디아나. 내 이름을 아침에 불러주다니.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너무나 가슴이 뛰어. 하지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나도 잘 잤어?”

그녀가 커피 향을 맡으며 일어나 나와 식탁을 보곤 깜짝 놀란다.

“세상에 이게 다 어디서 나온 거지? 분명 우리 집 냉장고는 달걀 몇 개와 우유, 그리고 먹다 남은 치즈가 전부 다인데 말이에요. 밤새 램프의 요정 지니라도 왔다 간 거예요?”

“빙고. 바로 램프의 요정 지니가 왔다 갔지.”

“대단해요. 금방 씻고 나올게요.”

“같이할까?”

“벌써 다 씻으신 거 같은데요?”

그랬다. 나는 완벽하게 씻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더 씻어도 되는 데…….

“금방 나올게요.”

욕실로 들어가서 간단히 샤워하고 그녀가 흰 면티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는 안 그러더니 아침에 이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침을 꼴깍 삼킨다. 당연하지 먹음직스럽지 디아나?

차려진 식탁을 보니 나 자신이 대견하다.

“커피부터? 아니면 갓 짠 오렌지 주스?”

“둘 다 좋아요. 커피 한 모금 할게요.”

커피를 한 모금 하고는 식탁 앞에 앉는 그녀를 따라 나도 앉았다.

아! 아침을 이렇게 함께 하다니!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말린 토마토에 하몽을 얹고 먹는 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거다. 성에서도 보았다. 잘 먹는 거.

“오믈렛도 기가 막히게 맛있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를 10유로에 사준 세뇨리따를 위해서 150유로짜리 아침 식사를 대접하는 게 이 라울이라는 남자지.”

“정말 기분 좋네요. 당신을 자주 사야 되겠어요.”

“그렇다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지.”

“정말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요.”

“네가 없으면 내가 살게. 응? 얼마든지…….”

“아니요! 내가 절대로 안 받는다고 했죠?”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넌 고고하고 높은 세뇨리따고 나는 싸구려 왕족이다. 됐냐?

“그런데 이제 완전히 졸업도 했고 민박집도 정리했으면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는 건 어때?”

“그것도 생각해 볼게요. 내가 한국에 가는 게 좋을지. 하지만 내가 간다고 해도 당신하고 함께 가는 건 아니에요. 알잖아요. 우린. 오늘로 이게 끝이에요.”

포크를 쥐고 오믈렛을 먹다가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놈의 끝이라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너는 왜 그렇게 미래가 없어? 그저 바라보고 같이 있으면 좋고 그러면 되는 거지. 왜 맨 날 끝이래?”

정말 화가 난다. 왜 자꾸 끝이래?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레이저라도 나가서 저 머릿속 수술 좀 하면 좋겠다.

“이봐요, 라울. 진시환 사장님. 당신은 스페인에서는 왕족이고 한국에서는 MK사의 로열패밀리에요. 정통 후계자고, 사장님이시죠.

그런데 저는 어떤 줄 알아요? 이 스페인에서는 가족도 친척도 없는 고아에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여자고, 한국을 가게 되면 돈도 없고, 가지고 있는 집 한 채 없이 신입사원 정도밖에 안 될 거라고요.

그런 우리가 뭘 어떻게 해요. 그냥 좋을 때 한번 만날 여자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여자를 불러요. 그게 훨씬 현명해요.

저는 이런 관계를 유지할 만큼 그렇게 편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적어도 내가 어떤 남자하고 같이 밤을 보내거나 그 남자하고 결혼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과 나는 결혼이란 건 어차피 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이렇게 황홀한 밤을 보내고 이렇게 멋진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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