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라울, 몸을 팔다!
그는 정색하며 마치 나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그저 세비야의 호텔에서 그 밤에 만난 게 다였다. 그리고 어젯밤과 오늘. 그러니까 그가 나에 대해 안다고 해야 아까 말한 대로 민박집 딸인 거 그거 하나다. 콜걸이 아니라는 거!
“네? 뭘 안다는 거예요? 대체 나에 대해 아는 거 있으면 좀 말해 봐요!”
“디아나 정. 이제 스물세 살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대학 졸업하고 엄마하고 민박집을 하다 엄마는 돌아가시고, 어정쩡한 백수. 가이드나 하면서 남자들을 꼬시는 게 일이지.”
“…….”
이럴 줄 알았다. 말 한 내가 잘못이다. 그 정도는 학교 동창도 다 알고 민박집에 하루 묵은 손님들도 다 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자신이 읊은 이 내용이 자랑스럽기라도 하는 듯이 당당하게 나를 본다.
“이정도 알면, 그럼 된 거 아닌가? 내가 널 이만큼 알면 그러면 되는 건가?”
“장난해요. 지금?”
내가 발끈해서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힘을 줄수록 나는 점점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뻗칠수록 그의 얼굴이 다가와 내 얼굴에 비비며 말했다.
“그냥 나도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심이 가서 알아둔 거야. 뭐 일종의 뒷조사 같은 거지. 그런 걸 왜 알아본 건지 모르겠지만 내 관심을 받으니까 좋지? 게다가 난 너하고 조금 더 있고 싶어.”
그래, 관심을 받아 황송하다. 이런 싸가지는 때려서 쫓아내야 한다. 내가 발로 차려고 하자 그가 바로 그의 무릎으로 내 다리를 누른다. 나는 있는 대로 힘을 쓰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그가 요동치는 내 몸을 아주 덮으며 누른다. 덕분에 자세가 묘하게 됐다.
“놔요. 사람은요 의지와 감정이라는 게 있는 거예요. 당신만 기분이 있고 당신만 하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라 나도 하고 싶은 게 있고, 의지가 있다고요.”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건 저 임규빈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건가?”
이상하게 오기가 났다. 이 사람을 성질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무렇게라도 당장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 들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와중에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도 미친 거지.
하지만 내 이성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된 게 나는 이렇게 남자하고의 처음이 이상하게 꼬이게 된 건지.
“지금 당장 나한테서 떨어지란 말이에요!”
“소리 질러 그러면, 소리 지르면 떨어질 테니까.”
그가 다시 몸을 겹쳐왔다. 신기한 건 내 마음이었다. 밀어내고 싶은 마음과 안고 싶은 마음이 왜 한꺼번에 드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하고 몸을 먼저 부딪쳤기 때문인가?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뭐든지 해줄 테니까 말만 해. 돈? 보석? 필요한 게 뭐야. 말해. 뭐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만 정이 따 떨어진다.
아니 이렇게밖에 못해? 정말이지 조금만 다정해도 넘어갈 거 같았다. 그 잘난 얼굴에 말이다. 그런데 딱 정떨어지는 소리로 내 정신을 차리게 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래, 너 돈 많다. 이거지?
“난 이대로는 못 가! 절대 안 갈 거야.”
그가 나를 당겨 안으며 귓불에 키스를 퍼부었다. 나도 그가 싫지 않다. 그하고 함께 하는 게 싫지 않다. 이런 내가 나쁜 여자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품이 그립기도 하고 좋았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내가 얼굴을 뒤로 빼며 말했다.
“원하는 게 있어요.”
그러자 그가 풀어주며 나를 본다. 얼굴은 흡족한 미소가 가득하다.
“역시 나는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 원하는 게 없는 사람한테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래. 말만 해. 뭐야, 내가 뭘 해줄까.”
“돈 받고는 안 해요.”
“그럼 돈 말고 뭐. 보석, 땅, 집, 차? 말만 해.”
“내가 오늘 당신 살게요!”
내 나름 유일하게 그를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도 정이 떨어져라!
“뭐?”
“내 돈 받으면 하겠다고요.”
이건 또 무슨 얘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나를 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인 거처럼 눈이 커다래져서 말이다.
“돈을 내가 받는다고?”
한 번도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나를 사겠다는 말이야?”
너무 기가 차서 코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말을 잘못한 게 분명하다. 아니면 돈을 달라는 소리를 하기 싫어서 알아서 달라는 말인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사겠다고? 내가 얼마의 값어치가 있는지 알기는 해?”
“그건 사는 사람 마음이에요. 팔고 싶지 않으면 그냥 나가면 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몸을 팔고 싶지는 않지요? 그러니까 나가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지금 왜 갑자기 내 몸을 파는 게 화제가 된 거지?
내가 남창이야? 이게 진짜! 계산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나는 그저 디아나를 안고 싶을 뿐인데 디아나를 안으려면 내가 돈을 받아야 된다고? 돈을 받으면 내가 돈 받고 몸을 파는 거야? 아닌 거야? 도무지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네가 필요한 걸 말하란 말이야.”
“그래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필요한 건 당신. 그런데 난 당신한테 돈 받고는 안 해요. 돈 주면, 내가 주는 돈 받으면 할게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덤벼들기야 하겠어? 그게 내 마음이었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더군다나 나는 돈을 많이 쳐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거든.
그런데 이 남자가 정말 제정신 맞아? 엉뚱한 말을 한다. 그것도 말을 더듬으면서 말이다.
“꼭 사야겠으면, 기왕 그럴 거면……. 많이 줘. 내 자존심 상하지 않게.”
지금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기왕 돈을 줄 거면 많이 달라고. 그래도 내가 스페인 왕족에다 MK사의 사장인데 자존심이 있지.”
어이가 없다. 정말 몸을 팔겠다는 거야? 나한테?
기가 막혀서 쳐다보자 그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난 이대로는 못 가. 절대로. 꼭 너를 안아야겠다고. 그런데 내가 널 안으려면 내가 돈을 받아야 한다며. 내 몸값은 네가 쳐주는 거라며! 그러니까 기왕 그럴 거면 돈 많이 달라고!”
“비싼 사람하곤 안자요.”
“뭐? 그럼 내가 싸구려란 말이야?”
“싫으면 관두세요.”
어떻게든 관두게 하고 싶다. 내가 남자를 돈을 주고 사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내가 눈을 돌리며 생각에 젖어들었을 때 그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거 같아 보인다.
절대로 여기서 관둘 수는 없어!
나를 좋아한다고도 하지 않고, 다음에 또 만난다고도 하지 않는 이 여자를 이렇게 두고 간다면 언제 또 안을 수 있겠어? 게다가 이 여자는 임규빈이 좋다는데!
오늘밤 확실하게 나를 각인시켜 놓는 거야. 그래. 디아나가 나 때문에 잠을 못 자게 만드는 거지. 나도 팬티라도 흘리고 갈까?
어떻게 들어온 방인데. 어떻게 요렇게 깜찍한 여자를 눈앞에 두고 나갈 수가 있겠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내가 주는 대로 받을래요? 아니면 말구요.”
“무슨 요구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워. 그냥 내 돈을 받아.”
“돈 받고는 안 한다고 했죠? 서로 돈 관계가 없으면 불안하다면서요. 그러니까 내가 주겠다고요.”
틀린 말은 하나도 아닌 거 같은데 돈을 준다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에라, 모르겠다.
“알았어. 맘대로 줘. 조금 줘도 돼. 키스해도 되지?”
그가 달려들었다.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키스였다. 손을 머리로 돌려서 천천히 받히고 훨씬 여유 있게 느긋하게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확실히 이 남자는 거래가 있다고 해야 안정이 되는 스타일일까? 그러면 앞으로 이렇게 이 남자를 안을 때마다 내가 돈을 주면 되나? 어차피 싸구련데 뭐!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는 나를 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내 이마를 꼼꼼히 쓸어가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는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더할 수 없이 진하게 빛을 발하며 나를 보자 내 가슴도 덜컥 떨렸다.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쌌다.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내가 돈을 주고 당신을 산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먼저 그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키스해주자 그는 황송해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내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오늘 내가 돈을 주고 산 내 거라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를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 더 적극적이 된다.
가진 자의 오만을 나도 조금 느끼나 했다. 그런데 그의 입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당황해서 허리가 들썩였다.
“디아나.”
온몸이 진동하며 점점 감전되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욕정이 일으키는 전류에 감전된다. 그건 감전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절절 흐르는 전류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가 한 번씩 몸을 밀어 넣으며 내벽을 자극하고 예민한 점을 쿡쿡 찌를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며 뒤틀린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몸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으나 그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밀어 칠 때마다 침대 헤드 보드에 머리를 부딪칠까 걱정이 됐지만, 그는 바로 내 몸을 잡아당겨서 다시 짓치고 들어왔다.
“흑…… 아…… 앙…… 응……으…….”
갖가지 요상한 신음이 터지고 있었다. 더 깊게, 깊게. 더할 수 없을 만큼 깊게 들어온 그가 순간 엉덩이를 딴딴하게 굳히고는 정지했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빼서 내 배에 뜨거운 액을 쏟아냈다.
미끌거리는 액체가 배꼽으로 흘렀다. 연한 밤나무 향이 나는 것 같다. 그가 그대로 몸을 겹쳐 눕자 그의 배에도 사정액이 묻었다. 둘 다 닦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이 노곤했다.
그가 바로 일어나 티슈를 가져와 내 몸을 먼저 닦아준다. 정성스럽고 꼼꼼한 손길은 다정하게만 느껴진다. 이건 또 왜일까?
그가 나를 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커다란 손이 내 볼을 완전히 감싸서 내 눈을 저에게 맞춘다. 달빛을 받은 떡갈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흔들리고 부는 바람이 창문에 나뭇잎이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며 신비스럽게 보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관자놀이에 대었다. 천천히 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보았다. 신비스러운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손끝에 밀린다.
“만져보고 싶었나?”
끄덕끄덕
진짜 만져보고 싶었다. 저 짙은 눈썹이 어떤 느낌일지. 이 잘생긴 얼굴에 손을 뻗어보고 싶었다. 달빛이 주는 마법이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뾰족뾰족한 첨탑이 있는 거대한 성의 성주와 이렇게 함께한다니.
아니 그런 성주를 오늘 밤 내가 샀다니!
“디아나.”
마치 오래 그리워한 연인처럼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며 등을 천천히 더듬었다. 커다란 손이 따뜻한 감각을 남기며 등을 따라 내려가서 엉덩이를 꼭 쥔다. 다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지더니 나를 안아 몸을 휙 돌린다.
이제 그의 배 위에 아이처럼 엎드린 꼴이 된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뜨겁게 변한 눈길이 내 몸을 위로 끌어 올린다. 입술이 겹쳐지면서 그의 숨결이 훅 들어온다. 아랫입술을 핥고 빨기를 반복하자 내 입술이 살그머니 열렸다.
나도 그의 입술을 빨았다. 톡톡 입안의 혀를 두드리는 그의 혀가 순간적으로 내 혀를 빨아들이고는 그의 손이 내 엉덩이를 조금 더 세게 자극적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절정으로 부드럽게 젖어있는 아래가 다시 그의 손길에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한참의 키스 후에 입술을 뗀 그가 그대로 나를 더 위로 올렸다. 그러자 내 가슴이 그의 얼굴에 닿는다. 가슴이 아래를 향해 내려지자 복숭아처럼 늘어진다. 그런 내 가슴을 그가 양손에 하나씩 쥐고는 이쪽저쪽 빨기 시작했다.
“응응……. 흐응……. 앙…….”
가슴 전체가 그에게 점령당한 채 빨리고 있다. 꽉 쥔 두 손이 쉴 새 없이 자극하며 거세게 빠는 탓에 젖꼭지가 떨어질 듯이 강한 자극이 느껴진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더 달라붙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며 교차하면서 내 가슴을 빨고 있는 그를 내려다본다.
눈을 감은 채 열심히 가슴을 빨고 있는 그가 아이처럼 느껴진다. 이런 게 모성애를 느끼는 걸까?
그때 라울이 눈을 번쩍 떴다. 내 가슴을 문 채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더 세차게 가슴을 빨았다.
“하아……. 아……. 아파요…….”
그러자 다른 쪽으로 옮긴다. 그의 입안으로 내 가슴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 참 묘했다. 그가 드디어 가슴을 놓아준다.
“하아…….”
그리고 나를 더 위로 올리며 저는 아래로 내려간다. 침대 헤드 보드에 몸이 닿자 나도 모르게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 너무 민망해. 정말 이럴 수는 없어!
그가 누운 채로 내 아래에 얼굴을 댄 채 누워있다. 이런 외설적인 장면은 진짜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야한 영화도 이렇게 야하지는 않다.
그가 달아나려는 내 골반을 꽉 움켜잡고 예상대로 그곳을 사정없이 빨기 시작했다.
“아악……. 흑……. 아앙…….”
침이 줄줄 입가로 흘렀다. 그의 단 몇 번의 입놀림으로 나는 파르르 떨다가 눈앞에서 핑핑 터지는 빛을 경험하고 말았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서 사정없이 떨어댔다. 그러자 그가 바로 나를 내려서는 그의 페니스 위에 내리꽂듯이 앉혔다.
환희에 찬 결합이었다. 내벽이 죽을 듯이 경련을 일으키며 그의 페니스를 조여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더 조이고 싶고 더 느끼고 싶다.
돈을 주고 사서 이런 걸까? 아니면 그가 나를 이렇게 길들여 놓은 걸까?
그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죽을 듯이 몸을 쳐올리며 포효했고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가 더 세게 몸을 밀어 넣자 깊은 안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커다란 너울 같은 전율이 온몸을 덮으며 나는 말로만 듣던 멀티 오르가슴을 느꼈다.
그가 내 자궁 깊은 곳에서 나를 찌르던 페니스를 빠르게 꺼내 다시 뜨거운 사정을 하고 있었다.
사정 후에 당겨 안으며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다. 마치 잊지 못하고 마주한 뜨거운 연인처럼 말이다.
단 한 번 함께 밤을 보냈으나, 잊으려고 했던 6개월 동안 그도 나처럼 잊지 못한 건 마차 가지였을까?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왔던 모든 말들을 종합해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디아나! 꿈 깨고 정신 차려!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그냥 오늘 밤일 뿐이야!
디아나의 그런 마음과 달리 라울은 지금 황홀 그 자체이다.
이 느낌이다! 따뜻하고 말랑하면서도 나를 뜨겁게 받아주고 또 내 품으로 떨어지는 디아나의 부드러운 감촉!
찢어진 레이스 팬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살. 정말 이대로 여기 눌러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거 같다. 잠에 빠져들면서도 라울은 디아나의 온몸을 더듬고 만지고 끌어안았다.
* * *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몇 번이나 뜨겁게 나를 안았던 라울은 옆에서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어스름해 보인다.
여전히 참 잘생긴 남자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그에게 성진 그룹의 식구들하고 같이 움직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 사람에게 잡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나와 어젯밤에 미리 싸두었던 가방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일찍 일어난 세베로가 일층 로비에 있었다. 언제 봐도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인 그가 신기하다.
“세뇨리따, 좋은 아침입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죠?”
그는 내 가방을 보고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다시 말을 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디아나?”
그는 내가 지금 떠나려는 것을 바로 눈치챈 거 같았다. 내가 라울과 함께 밤을 보낸 건 아마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역까지만 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충분해요.”
“혹시 어젯밤에도 라울님이 실수라도 했나요?”
“네?”
그가 갑자기 라울에 대해 말하자 나는 당황했다.
세베로가 알고 있나? 전날에도 그가 창을 넘어 내게 들어왔다는 걸 말이었다.
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무응답이 가장 확실한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차를 부르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세베로는 내게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로비에 있는 암체어는 두꺼운 실크를 씌운 마호가니 의자였다. 안정감 있는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뛰던 가슴이 진정이 된다. 조금 후에 세베로가 다가오며 말했다.
“차가 대기 됐습니다. 원하시는 데까지 데려다 줄 겁니다. 그런데 혹시 라울님께는 미리 말씀을 드렸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내 기색을 살피다가 빙긋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언제든지 이 성에 놀러 오십시오. 저의 손님으로 말입니다. 디아나가 온다면 대환영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세베로. 안녕히 계세요.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있는 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천만의 말씀을요.”
세베로가 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가방도 트렁크에 넣어주고 나는 그대로 차를 타고 까스틸로 성을 빠져나왔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봐서는 아직 완전하게 날이 밝지도 않은 것 같은데 두드리는 소리에 무심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
그리고 뒤에 말이 없다. 아직 잠겨있는 라울의 목소리를 듣고 그저 기다리는 세베로다. 라울은 일단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알았어. 내려갈 테니 밑에서 봐.”
말을 하고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앉는다. 그의 단단한 상체가 드러나면서 침대 시트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우람한 근육과 단단한 복근. 그리고 흰 피부가 묘하게 섹시하다.
밤새 원하는 만큼 만족하도록 정사를 나눈 탓에 그의 몸에서는 수컷의 페로몬이 진하게 풍기고 있다.
그런 자신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만족감을 느끼는 배부른 맹수 같은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는 자기 방이 아니다. 그렇지 디아나의 방이지.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뭐야. 또 도망간 거야?”
옆을 보자 텅 비어있는 자리, 벌써 두 번째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런 못된 버릇을 가졌다니. 한 번도 모자라서 또 이렇게 도망을 간단 말이야?
씩씩거리며 옆을 보았다. 그런데 바로 옆,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20유로! 순간적으로 가슴이 턱 막혔다.
“뭐야. 이 진시환이 20유로라고? 이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이 20유로? 대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200위 안에 드는 왕족이,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그룹의 사장인 내가 20유로?
“으악! 너 가만 안 둬!”
벌떡 일어나자 그의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단단한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까지. 그가 알몸상태로 20유로를 들고 몸부림을 쳤다.
“감히 이 나를, 이 진시환을! 내가 아무리 싼 값에라도 사 달라고는 했지만, 달랑 20유로에 이 진시환을 샀단 말이야?!”
차라리 1유로라면 이해가 간다. 산다고는 했지만,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명예를 위해 1유로를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정말 값을 매긴 거다. 그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20유로에!
그리고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벌써 두 번이나 나를 버리고 갔다는 거다. 가운을 걸친 체 슬리퍼를 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늘 정장을 착용하고 나오는 라울이 가운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내려오자 당황한 것은 세베로였다.
“주인님, 무슨 일이시죠?”
“시끄러워. 왜 불렀어. 그리고 어디 갔어. 디아나. 빨리 말해.”
“네, 저도 디아나님 때문에 문을 두들겼습니다. 주인님께서 거기 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라울은 자신이 디아나 방에 있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계속 디아나의 행방만 궁금해했다.
“그래, 난 거기서 잤어. 그런데 디아나가 안 보여.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네, 아침에 짐을 싸서 내려오셨습니다.”
“뭐? 감히 두 번이나 나를!”
그러나 뒤에 말은 세베로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차마 하지 못하고는 몸에서 검은 아우라를 품어내며 콧김을 뿜어낸다. 그런 라울을 보고 세베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역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시기에 차를 불러줬습니다.”
그러자 라울의 눈썹이 평소에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위로 올라갔다.
“뭐야? 차를 불러주면 어떡해! 그럴 때는 못 가게 해야지!”
“붙잡으라고 하신 명령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중하게 모시라고 하셔서 예의를 지켜서 원하는 것을 해드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신경 쓰는 거 못 봤어?! 어머니께 선물했던 옷까지 그 여자한테 입혔잖아! 지금 당장 찾으러 갈 거야. 차를 대기시켜!”
허둥지둥 다시 올라가려는 라울을 보며 세베로가 헛기침을 했다. 뭔가 다음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래서?”
“기사한테 바로 역으로 가지 말고 승마장에서 두어 바퀴 돌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말입니다.”
“뭐?”
“혹시 주인님께서 찾으실까 걱정돼서요.”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할 때면 턱을 살짝 당기는 세베로의 습관이 그대로 나온다.
“고마워 세베로.”
라울이 세베로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 맞추고 바로 옷을 입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저런 라울의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어린 시절의 라울을 알고 있고 청년기와 대학 이후의 모습을 쭉 지켜봤으나 저렇게 흥분하고 좋아하는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버드에서부터 10년의 생활을 쭉 지쳐보았다. 한 여자를 제대로 사귀는 것을 본 적 없어 걱정하던 세베로의 눈에 이제 한창 멋있는 나이에 어린 여자에게 흠뻑 빠져있는 라울이 너무 대견하다.
그렇게 빠져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지가 그런 줄도 모르고 있는 라울이라니!
세베로는 그런 라울의 뒷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걱정되었다. 복잡한 재벌들 간의 일. 더군다나 스페인 귀족 집안의 혼혈로 태어나서 지독하게 공부만 해서 차갑게 머리를 굴리기만 한 라울이었다.
이 여자 저 여자 취향대로 밤을 보내면서도 누구와도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라울을 보며 걱정이 되었었다. 자신의 전 주인인 이사벨님이 사랑에 실패하고 오랜 기간 아파하셨던 것을 보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또 라울 같이 저렇게 어느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섹스만 하고 사는 것은 더더욱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 라울이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딱 제 어머니 이사벨과 이미지가 비슷한 청순한 한국 여자와.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한 여자는 없다는 것이 세베로의 생각이었다. 이미 라울은 더 이상의 돈이나 명예는 필요치 않은 남자다.
그에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그를 사랑에 빠뜨릴 수 있는 여자만이 그의 배필이라고 세베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디아나는 청순하고 전 주인님을 닮았다. 그리고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가 모두 능통한 한국인이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딱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세베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 생각일 뿐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민이었으니까.
* * *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얼마만큼 간 거지?”
라울은 바로 말을 타고 승마장 주변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분명히 세베로가 승마장 주변을 몇 바퀴 돌라고 했으면 이제 곧 보여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 가는 차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건 시속 20km 이상 나올 수가 없는 속도였다. 저 속도로 승마장을 돌고 있었다니. 대체 저 안에서 디아나는 차가 저 속도로 승마장을 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하긴 어제 그렇게 고단했으니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을지도 모르겠군.
그가 싱긋 싱긋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날듯이 뛰어서 윈디가 차를 따라잡았다. 라울이 가까이 가자 기사는 바로 차를 멈추고 내려서 인사를 했다. 기사가 차에서 내렸는데도 안에서 디아나는 기척이 없다.
라울이 말에서 내려 차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는 곯아떨어진 디아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기사에게 눈짓하자 기사가 어디론 가로 사라졌다. 말들과 양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 한쪽 갓길에 멋진 리무진이 서 있고, 그 옆에 윈디가 서서 풀을 뜯고 있다.
디아나는 계속 잠에 빠져들어 있고 라울은 그런 디아나의 얼굴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며 두 팔을 팔짱끼고 턱을 괴고 있다.
어떻게 잡아놔야 할까. 무슨 말을 해서 못 가게 해야 할까. 아니,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수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그의 명석한 두뇌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경우의 수도 그녀의 얼굴을 보니 눈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눈썹이 가지런할까. 어떻게 이렇게 코는 오뚝할까? 그리고 입술은 어떻게 이렇게 반짝반짝 윤이 나며 탱글탱글하고 앵두처럼 붉을까?
말할 수 없는 유치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면서도 아침에 주웠던 20유로가 떠오르자 눈썹이 확 모여든다. 이렇게 천진하고 예쁜 얼굴로 사람을 20유로짜리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천사처럼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저 제 앞에서 이렇게 완전 무방비 상태로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고맙기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 보고 있자니 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아니 그럼 이렇게 새근새근 자는 걸 저 기사 놈은 계속 보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무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렇게 무방비하게 천진한 모습은 말이다.
남자들이 다 어떤 놈들인데 겁 없이 이런 차 안에서 잠이 들어? 그것도 역으로 가는 길도 아닌 데서 이렇게 느리게 가고 있는데?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열린 창으로 한 점 바람이 올리브 향을 몰고 휙 들어왔다. 그 향기에 디아나가 눈을 떴다.
“어?”
차가 서 있고 자기 바로 옆에는 라울이 뚫어질 듯 저를 보고 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 하고 있기는. 널 보고 있잖아. 지켜주고 있는 거 안 보여?”
“도대체 뭘 지켜주고 있다는 거예요? 기사님은 어디 있어요?”
“기사는 내가 잠깐 보냈어.”
“왜요?”
“내가 말했지. 말 안 하고 가면 가만 안 둔다고. 그리고 너, 나 보기 무섭지 않아?”
살기를 띠고 날카롭게 바라보는 눈이 정말 가슴 뜨끔하다. 하지만 뭐,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아니요. 무섭지 않아요. 왜요?”
“왜요? 하……. 진짜……. 내가 이래봬도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것에도 해당 되는 사람이야. 정학하게 187위.”
참, 무슨 소리야? 앞에 186명의 왕족이 다 죽지 않는 한 절대 왕이 될 리 없다는 거잖아. 나랑 다를 게 뭐야? 나도 절대 왕이 될 리가 없거든!
“본론만 말하세요. 당신의 왕위 계승 서열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이게 본론이야.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그리고 MK사의 일 년 매출이 얼만지 알아?”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 아침부터 사람 잡아놓고 헛소리 하는 건 정말 말릴 수도 없다. 차라리 걸어서 가자.
내리려는데 문을 손으로 막는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어딜 가려는 거야?”
“본론만 말하세요. 그런 대단한 사람인 거, 저도 다 알고 있어요.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고 돈도 많고, 땅도 많고 성도 있고 그런 사람이라는 건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가는 거야?”
“그래서요? 더 이상 거기에 어떻게 있어요. 거기에 계속 있으면 사람들도 눈치 챌 거예요. 우리 관계를 말이에요.”
“우리 관계가 뭐, 우리 관계 아무것도 아니라며. 네가 그랬잖아.”
“그래요. 그러니까 아무 관계도 아닌데 당신이 계속 내 침실에 들어오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네가 나를 20유로에 샀다는 거야. 그게 알려지면 너 하고 나 둘 중에 누가 더 쪽팔릴 거 같아!”
“가격이 마음에 안 들었나요?”
“젠장,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자꾸 까불면 가만 안 둬. 디아나 정. 내가 어떻게 봐서 20유로짜리야. 이 어마어마한 성의 성주고 MK 그룹의 회장이 겨우 20유로밖에 안된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밤에는 20유로밖에 안 돼요.”
‘헉!’
사람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더니 기가 막혀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도저히 못 참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차 안이 쩌렁쩌렁 울린다. 아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다 쳐다볼 만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어떻게 해서 20유로야, 근거를 대봐.”
“난 하루에 20유로 이상 아무것도 안사요.”
“뭐?”
“저는 하루에 20유로 이상 주고 뭘 사본 적이 없다고요.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순수한 용돈은 20유로예요. 그러니까 당신을 사줄 사람이 20유로 이상 쓸 수가 없으니까 당신은 20유로 이상은 안 되는 사람이라고요.
내가 쓸 수 있는 한계액으로 정한 게 하루에 20유로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20유로, 그 이상은 안 돼요.”
“뭐야?”
왠지 같은 20유로라는 말인데 가슴이 스르르 한 게 마음이 풀어지는 거 같다. 그런데 왜 하루에 20유로밖에 안 쓰기로 정했을까?
“왜 하필 20유로야?”
“왜긴 왜겠어요? 돈이 없으니까 그렇죠. 나는 쓸데없는데 돈 잘 안 써요.”
“그럼 나는 쓸데없는 건 아니네. 하루에 쓸 수 있는 돈 다 주고 샀으니까.”
“그래요.”
“근데 만약에 네가 쓸 수 있는 돈이 100유로, 200유로, 1000유로 그렇게 되면 그거 다 주고 나 샀을 거야?”
끄덕끄덕.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가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아! 20유로에 나를 사준 게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르겠다. 난 자랑스러운 20유로짜리 남자야.
“알았어. 일단 날 20유로에 산 건 그럼 용서해주지. 그런데 왜 말도 하지 않고 지금 가는 거야?”
“이제 가야 해요. 이 이상 머무는 건, 폐가 될 뿐이고 어저께 성진 그룹의 사모님과 규빈 씨, 규은 언니한테도 다 인사했어요. 그러니까 가게 둬요.”
“뭐야? 그럼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고 하다못해 집사 세베로에게까지 인사했으면서 왜 나한테는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거지?”
왜겠니? 넌 말이 안 통하잖아. 그리고 밤새 그러고 아침에 얼굴을 어떻게 봐?
하지만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고 갈 수 있어서.
“꼭 가야겠어?”
“네, 가게 둬요.”
그가 조금 어두운 얼굴이 되더니 손을 앞으로 내민다.
“줘 봐!”
응? 뭘? 20유로 이상은 못 준다니까? 은근 뒤끝 긴 남자잖아. 이 사람!
“핸드폰 달라고. 어서.”
잠깐 그를 보다 핸드폰을 내밀자 바로 낚아채더니 번호를 찍고 통화를 누른다. 잠시 후에 그의 주머니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그러자 그가 종료를 누르고 다시 폰을 돌려준다.
“전화해. 아니, 내가 전화하면 무조건 받아!”
“…….”
“대답 안 해?”
“무조건 받을 수는 없어요.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이면 못 받을 수도 있어요.”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계속 부담스럽게 열기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무거워 슬쩍 고개를 숙이자 그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싸고 다정하게 비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보는 거지 우리?”
“모르겠어요. 우리가 다시 볼 일이 있을까요? 혹시 보고 싶다면 그것도 한번 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봐요. 우리가 과연 다시 보는 게 맞는지.”
“뭐?”
“보고 싶다고 그냥 보는 거, 그거 당신은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이제 당신 돈 주고 안사요. 그리고 난 돈 받고 안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필요가 없는 사이인지도 몰라요.”
젠장.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되는 거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 그 말을 수긍하기가 왜 이렇게 싫은 거야. 그렇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고 나도 생각해봐야 하는 건 맞다. 또 시간이 필요하다는 여자를 억지로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이제 돌아가야 해요. 내 꿈을 위해서, 또 내가 정리해야 할 일도 있거든요.”
“내가 다 해줄게.”
“제발 그만 해요. 남이 다 해주는 거 싫어요, 나.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요. 내가 정리하고 내가 결정하고 그 결과가 힘들더라도 이겨나가고 싶어요. 그게 내가 사는 삶이니까. 내 삶을 왜 당신이 살아요? 내가 결정할 걸 왜 당신이 해요. 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야무지고 단단한 여자였다. 아직 어리기만 한데…….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볼의 촉감을 놓치고 싶지 않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어린 새를 날개를 부러뜨려 지금 당장 옆에 앉힐 수는 없다.
당장 오늘 오후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로서는 말이다. 일 년의 스케줄이 거의 잡혀있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잡혀있는 회의와 미팅이 줄줄 이다. 그녀를 잡는다고 해도 단지 몇 시간뿐이다.
젠장. 보이지 않는 족쇄가 이렇게 많았었나?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 일하고 당연하게 미팅을 하고 모든 것들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여자와 헤어져야 한다니까 줄줄이 잡혀있는 스케줄이 모두가 족쇄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는 게 가장 편하겠어?”
“네.”
“만일 내가 널 보고 싶으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당연하기도 하겠지. 천하에 라울이 지금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어쩌면 안 보고 싶을지도 모르지. 그래 내 마음 나도 몰라!
* * *
내가 보고 싶을 수도 있다고?
그 말에 가슴이 스르륵 울렸다.
날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지금 이 개 싸가지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 거지? 여태껏 했던 말을 종합해보면 저 남자는 절대 나를 보고 싶어 할 거 같지 않았는데.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했던 행동을 보면 보고 싶어 할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어요. 난. 아무것도. 어차피 당신은 한국에서 사업하고 나는 이 스페인에서 살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괜히 슬픈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당연한 건데 말이다.
그가 내 말을 듣더니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만 명심해둬. 넌 내 울타리 안에 있어. 네가 뭘 하든, 어디를 가든 난 알 거야. 알았어?”
안된다고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나쁘지도 해롭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끄덕끄덕.
한 번 더 고개를 움직이자 그가 내 이마에 입술을 깊게 눌렀다.
“가. 가서 하고 싶은 거 해. 하지만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어. 우리.”
내가 만일 당신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나는 보고 싶어도 먼저 찾지 않을 테니까. 그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너무 높이 있고 너무 크고 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인생이 있으니까. 당신의 그 크고 높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그냥 말려들고 싶지는 않아.
“안녕 라울.”
“곧 볼 거야 디아나.”
그리고 그가 차에서 나가자 기사가 왔다. 그리고 기차역까지 바로 도착했다. 아까 그렇게 긴 시간을 대체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가까운 기차역을 그렇게 오래 차를 타고 있었다니 말이다.
역시, 모든 게 그의 결정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보내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렇게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갈 수는 없었을 거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민박집은 역시 정리를 하는 게 옳을 거 같다. 내가 언제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민박집은 엄마의 꿈이었지 내 꿈은 아니었어.
그래서 열차 안에서 인터넷에 스페인 한인 민박 렌트를 올렸다. 어차피 유명한 민박집이기 때문에 잘하면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 해왔던 노하우를 꼼꼼히 적어놓은 수첩도 있으니 말이다.
열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기사를 작성해서 한인사이트에 올리고 블로그에도 올렸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아줌마는 혜정이를 찾아서 한국으로 가시는 게 맞아.”
어차피 스페인어도 모르고 언제까지 내가 그분을 모시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동안도 함께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더 이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없는데 억지로 하는 거, 다른 사람의 의지대로 내 인생이 휘둘리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