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백
“입고 왔겠지? 입었을까?”
라울은 하얀 장갑을 끼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금장을 두른 작은 접시에 블랙과 그린 올리브 몇 알이 놓여 있었다.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올리브는 어린 시절부터 즐기는 거였다.
그린 올리브 한 알을 들어 입에 넣고 씹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괜히 보냈나?”
그녀가 입을 걸 꼭 보고 싶었다. 그 옷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가씨처럼 예뻤던 엄마 이사벨 까스틸로에게 그가 선물했던 옷이었다. 불행히도 이사벨이 그 옷이 도착하기 전에 죽는 바람에 그대로 이 성에 보관되어 있던 건데, 디아나가 이 옷을 입은 걸 꼭 보고 싶었다.
화려한 금장 조각이 들어간 커다란 거울 앞에서 보우 타이를 한 번 더 바르게 하고 힘 있게 일어났다.
키가 높은 문이 열리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불빛을 반사하는 연회장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디아나를 찾는다.
휘리릭
눈을 한 번 돌리기도 전에 찾았다. 음식 테이블 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가슴이 사정없이 뛴다.
진주가 총총히 박힌 아이보리 튜브톱 원피스! 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가늘고 긴 목선과 여린 어깨. 아무리 숨어 있어도 바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뭐야? 눈도 마주치기 전에 돌아서는 거야?
이건 숫제 나를 무시하는 거야? 아니 어젯밤에는 날 받아줬잖아. 설마 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거야?
정말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어제 그 침대에 누운 디아나를 보고 얼마나 신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달빛을 타고 온 요정이 아니라면 내 성에 내 어린 시절 누웠던 하필 그 침대에 디아나가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드레스까지 보냈는데, 저렇게 예쁘게 입고 감히 나를 외면해? 아니야. 외면한 게 아니라 못 봤을 거야!
말이 돼? 왜 못 봐? 응? 다 나만 기다리는데. 나를 못 봤을 리가 없지. 당연하지. 내가 주인인데. 모든 여자가 나 한 번 보겠다고 이 성에 초대받기를 얼마나 원하는데……. 그럼 개무시?
그런 마음이 들자 사람들과 인사를 하면서도 초조하다. 점점 음식 테이블 뒤로 숨는 디아나에게 어서 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인사해야 할 손님들이 많아?
제길. 다 꺼져. 디아나 빼고! 휴!
디아나 쪽으로 가면서 계속 사람들과 인사를 하면서도 한 번씩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하는 행동이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역시 그녀는 청초하고 아름답다.
아무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음식 테이블 뒤쪽에 서 있다고 해도 말이다.
초청한 주빈들과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성진 그룹의 임규빈과 규은도 있었다. 성진 그룹의 회장 부인인 규빈의 큰어머니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마음은 빨리 음식 테이블 뒤에 숨은 디아나에게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렇게 건성 인사를 진심 어린 표정으로 하던 그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의 앞에 디아나와 함께 있던 임규빈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성진 그룹 회장의 조카. 성진 인프라의 기획실장.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성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정하고 인상 좋지만 애송이!
“아!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규빈 씨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으신 것 같습니다.”
“네?”
아차! 마음에 있는 말이 너무 바로 나왔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여자에게 인기가 좋다니! 그래, 너! 디아나 옆에서 얼쩡거리지 마!
싱긋 웃으며 말을 자연스럽게 마무리하면 되는 거지 뭐.
“아까 뵈니 양쪽에 아름다운 세뇨리따를 모시고 등장하시던데요. 저도 부러웠습니다.”
“아, 한 분은 제 누이이고 한 분은 제 손님입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라울의 표정이 묘하게 바꾸었다. 손님이라고? 여자가 아니고?
나도 모르게 경계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얼굴에 웃음이 돈다.
“어떤 손님인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마음에 둔 여자?”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호감이 가고 있는 여자거든요.”
뭐야? 호감?
말을 하면서 임규빈이 디아나 쪽을 보며 싱긋 웃는다. 반대로 내 얼굴은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그래도 매너는 지켜야지.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셨다니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요?”
“글쎄요, 아직 제대로 사귀지도 않고. 그냥 호감 있는 중이라서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기분이 안 좋다. 호감이라니…….
“그렇군요. 아직 밤을 보낸 사이는 아니라는 말인가요?”
너무나 노골적인 라울의 말에 임규빈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말인데 뭐. 남자들의 최종 관심사는 그거 아니야?
“친구 중에는 대 놓고 그런 말을 하거나 여자를 많이 아는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그런 것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정색하며 말하는 이 애송이! 그래 너는 플라토닉 러브나 실컷 해라! 멀리 떨어져서 말이지.
“그러시군요. 우리 임규빈 씨는 순정파시네요.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훌륭한 파티입니다.”
슬쩍 말을 돌리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걸어서 테이블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 여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살짝 내려놓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어딜 가는 거야?
* * *
세비야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그 남자와 만나게 될 줄이야! 하긴 어쩌면 만나고 싶어서 더 세비야에 동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사람은 정말이지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사람이잖아.
까스틸로 가문의 후계자? 옛날로 치면 영주님이야? 그걸로 모자라서 MK 그룹의 사장? 도대체 뭐가 이렇게 대단하냐고…….
MK 그룹의 회장이면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이잖아. 그런 사람과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야. 엮여 봤자,
얼마면 돼?
이럴 게 뻔하다. 진짜 내가 제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멘트가 그거다. 한 번도 이런 허영을 꿈 꿔본 적도 없다. 열심히 내 실력 키워서 취업하고 유명해지고 명성과 돈을 얻고 그걸로 엄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매일 손이 부르트도록 청소를 하고 민박집을 하면서 나를 키워준 엄마에 대한 보답은 그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살았다. 일찍 일어나 엄마를 돕고 학교에 가 수업을 하고 끝나면 늘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서는 민박 일을 도왔다. 그래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없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일 허무한 건 그거였다.
엄마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잘 돼서, 명성 있는 사람이 돼서 많은 돈을 벌어서 엄마랑 같이 여행도 하고, 엄마의 나라 한국도 함께 가고 싶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런 건 다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게 있었다. 이건 내가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열심히 나의 실력을 키우는 것.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것. 그런데 그런 것이 부잣집 남자를 잡는다거나 백마 탄 남자를 만난다거나 이런 것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내가 원하는 게 없었으니까. 부잣집이라는 건 그만큼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자유나 꿈, 그런 거겠지.
물론 잘사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들도 많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안다.
그 호텔에서도 그랬고 어젯밤에도 그랬다. 도대체 자기가 이 성의 주인이면서 그렇게 나무를 타고 몰래 창문으로 스며드는 것은 뭐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어찌 됐든 이 성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컸다.
일단 뒤쪽으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렸다. 대리석 계단이 하이힐에 부딪히며 또각또각 소리가 난다. 그 소리마저도 왜 이렇게 차갑게 들리는지 세비야에서는 혼란의 연속이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쩌면 나와 세비야가 잘 안 맞는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피해 야지. 세비야가 날 피할 수는 없잖아?
건물을 나오자 바로 옆에 커다란 떡갈나무가 가지를 길게 뻗어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녹색의 방 옆에 있던 그 떡갈나무와 같은 나무다. 나무 아래 가서 조금 쉬고 싶었다.
드레스는 또 왜 이렇게 꽉 끼는 건지. 철렁철렁하며 드레스 자락을 살짝 올리고는 걸었다. 부드러운 잔디가 이어진 곳은 하이힐을 신고 걷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일단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고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살 것 같다. 역시 자유로운 것 이상의 값진 것은 없어.
숨을 들이쉬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잡는다. 커다랗고 힘 있는 따뜻한 손의 감촉에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놀라서 확 돌아보니 라울? 대체 여길 왜 따라온 거지 이 남자?
뭐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보니 가슴이 무거운 바위에 깔린 것처럼 아팠다.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절대 엮여선 안 되는 남자라는 것이 슬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뻔히 알고 있어서 이러는 걸까?
라울이 다가오자 분명 울고 싶을 만큼 처참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무 가깝다. 진한 올리브 향기와 생각이란 걸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존재감에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깊숙이 파고드는 거야? 왜 이렇게 다가오는 거야?
말 한마디 않고 쏘아보자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하이힐을 벗어서 이제 나는 그의 턱선까지 밖에 오지 않고 있었다.
“재주가 좋군. 그새 다른 남자를 꼬셔서 내 성까지 입성을 하다니.”
저놈의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굳이 변명이고 뭐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성인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바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나? 이건 그냥 비아냥거리는 거야. 가는 길마다 남자가 바뀌는군.”
비아냥거리는 거라고? 그럼 남한테 비아냥거리면 안 된다는 건 못 배워 처먹었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저런 사람하고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게 최고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의 맞붙다시피 가까이 다가와 우뚝 선 남자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나무등치처럼 버티고 선 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누구 마음대로?”
“네?”
“누구 마음대로 이만 가냐고.”
뒤에는 떡갈나무 앞에는 싸가지 없는 라울나무. 아주 아주 못된 나무. 두 나무 사이에 끼인 것 같은 답답함이 든다.
“제가 이 성에 들어온 게 불쾌하신 것 같아서 빨리 가겠다는 말이었어요. 비켜 주시겠어요?”
그가 특유의 깊은 눈동자를 야릇하게 빛나며 나를 쳐다본다.
아! 저 눈길은 정말이지 적응이 안 돼.
어떻게 된 게 사람을 저렇게 꿰뚫을 듯이 쳐다보는 거야. 마주할 수가 없어 눈을 감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어 눈을 뜨려고 할 때 그의 입술이 다가와 겹쳐졌다.
“흐읍…….”
농밀한 입술이 겹쳐지고 그의 혀가 파고드는 동안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말은 비켜주시겠어요? 하고 말하면서도 입술이 다가올 때 바로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
안 돼! 절대 이대로는 안 돼!
아무리 입술이 달콤하고 정신 못 차리게 좋아도 그렇지 서로 말도 없이 입술부터 맞부딪히는 건 아니라고 봐!
라울을 밀어내려고 주먹을 쥐고 어깨를 때렸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 남자의 힘이 얼마나 센지는 익히 알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도 함께 밤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이 남자의 키스에 그대로 눌려버리고 싶지는 않다.
왼발을 들어서 힘껏 그의 정강이를 찼다.
“아얏!”
아파라……. 구두를 신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맨발이 딱딱한 정강이뼈에 닿자 내 발이 아프다. 그런데 그보다 더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들어 올린 한 다리를 그가 손으로 잡은 거다.
그가 내 한쪽 다리를 올려 잡고 그 무게로 나를 눌렀다. 다리가 벌어지면서 한발로 휘청이며 서있자니 바로 등이 떡갈나무 껍질에 닿으며 아파져 온다.
“윽.”
소리를 내며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 자세. 이걸 어떡하나? 그렇지 않아도 긴 트임이 있는 드레스가 벌어지면서 그대로 허벅지가 드러나고 라울의 한쪽 팔은 내 허리를 다른 한쪽 팔은 내 다리를 잡고 있다.
그렇다고 내 두 팔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한발로는 도저히 그의 무게까지 버틸 수가 없어서 살겠다고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차라리 죽지!
그러자 라울이 그대로 떡갈나무에 나를 밀어 다시 입술을 겹치며 파고든다. 또 시작되었다. 이성을 허무는 이 마성의 키스!
* * *
뭔가 다정한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잘 어울리는군. 정말 멋져 디아나!
이런 칭찬이라도. 아니면,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보고 싶었어. 디아나!
이런 고백성 멘트라도 날릴 생각이었다. 물론 해본 적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육 개월을 잊지 못하고, 아니 잊는 건 고사하고 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그녀를 떠올리며 살았는데 그 정도 말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 남자를 꼬셔서 내 성에 입성하다니…….”
내 입을 깨물고 싶었다. 왜 이런 말부터 나오는 건지…….
물론 임규빈과 함께 왔다는 것부터가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그놈은 애송이에 특유의 진지한 눈길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호감이 간다고?
속이 뒤틀린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디아나의 얼굴을 보고 튀어나올 줄이야.
일단 수습을 해야 한다. 뭔가 다른 다정한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막상 디아나 얼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촉촉하게 젖은 입술과 가늘고 긴 목. 여린 어깨. 하얀 살결. 게다가 구두를 벗어들고 맨발로 잔디를 밟고 있는 모습은 마치 달빛요정이라도 서 있는 거처럼 보인다.
이대로 또 달아날 것만 같은 생각과 그저 안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저 촉촉한 입술을 깨물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말이 먼저 나오겠어?
가슴이 죽어라 뛰어대며 그녀를 안았다. 입술을 겹치자 파닥거리고 밀쳐내려고 하면서도 고스란히 키스를 한참을 받아낸다. 키스만 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았는데 아래가 점점 뻐근하게 부푼다.
펄떡펄떡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고 아래로 피가 몰리면서 조금 더 안고 싶었다. 이런 나를 두고 먼저 가겠다고?
작은 입술이 젤리같이 탱글탱글하고 달콤하다. 종일이라도 물고 있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먼저 가는 건 절대 안 된다. 이건 분명히 해야 한다.
입술을 떼고 보니 너무 격한 키스에 산소가 부족했는지 파래져서 숨을 몰아쉰다. 심했나?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일지 몰라도 가는 건 마음대로가 아니지. 여기는 내 영역이거든.”
철썩!
말을 마치기도 전에 뺨에 뭔가 와서 부딪쳤다. 있는 힘껏 쳤는지 그녀 몸도 휘청하는 걸 단단히 받쳐주었다. 여전히 한 다리는 내 손에 걸려서 다리를 벌린 채로 그녀가 소리친다.
“왜요? 나한테 왜 이래요. 어제 내 녹색의 방에 파고들었던 것도 당신이잖아요. 지금도 뭐하는 거예요?”
* * *
미친놈이 틀림없다. 돈이 많아서 미쳤거나 아니면 지위가 너무 높아서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아니면 이렇게 보자마자 입술부터 들이대고 이럴 수는 없다. 있는 힘을 다해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라울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녹색의 방? 그 방을 그렇게 부르나?”
“네. 녹색 카펫이 깔렸으니까!”
“유치하군. 그런데 거기도 내 방이야.”
“그게 더 유치해요! 여기 있는 성 자체가 당신 거니까. 하지만 난 손님으로 여기에 왔고 그 방으로 배정을 받은 거라고요. 내가 머무는 동안은 내 방이에요.”
“지금 방타령이 중요한가?”
대체 이 남자의 속셈을 알 수가 없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제일 먼저 그걸 해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보며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며 묻는다.
“그런 사람이 뭐지?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한다는 거야.”
낮고 무겁게 말하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솜털이 일어서며 온몸이 전율한다. 그의 입김에도 반응하는 내가 낯설다.
“나를 그날 호텔에서 봤을 때 콜걸 취급했잖아요!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요.”
정말 아니라고. 울고 싶었다. 아니라는 걸 알아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할복이라도 할 것처럼 절절하게 말했는데…….
“알아.”
“네?”
안다고? 그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알고 있다고 했다. 그가 내가 콜걸이 아니라고 안다는 데 안도했다. 다행이라고.
“알고 있어. 마드리드 대학의 졸업반이었지. 지금은 졸업했고, 민박집을 운영하는 집 딸이라는 거. 직업이 콜걸은 아니지만, 그때 상황은 비슷했어.”
천하에 나쁜 놈. 이런 놈하고 말을 섞은 것 차제가 불필요했다.
내가 대체 왜 세비야에 왔을까. 그까짓 파티, 성에서 일어나는 파티는 그냥 잡지로 보면 되지!
온 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벌써 왔고 이 남자하고 또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이렇게 헐벗은 체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드레스를 택했지?
어깨가 훤하게 드러난 드레스는 팔을 올리자 아래로 내려갈 것만 같다. 게다가 그가 마구 허리를 휘감아 움직일 때마다 진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지금은 섹시하고 싶지 않다고!
이 드레스가 훨씬 더 섹시하다고 좋다고 입었는데 지금 훌러덩 다 벗겨질 것만 같다. 진짜, 규은이 언니가 준 드레스를 입을 걸 하고 후회하고 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드레스 때문에 온몸의 신경이 미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숨이 더 헐떡거린다.
내 눈을 내려서 드레스가 얼마나 내려갔나 보는데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젖꼭지가 다 나올 거 같다.
누가 보면 어떡해?
신경이 가닥가닥 갈라지는 거 같은데 그가 떡갈나무 뒤쪽으로 휙 몸을 당겨 안고 돌아갔다.
나무 뒤쪽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다행이다. 사람들이 없어서…….
아니지. 지금 앞에 제일 위험한 라울이 있잖아. 나 머리가 나쁜 게 분명해.
그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바짝 끌어당겨 올렸다. 아까처럼 한 발로 서있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가 당겨 올리자 발이 공중에 떴다.
“그래서 콜걸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그날 밤 그렇게 함께 하고 말도 없이 사라졌나? 그게 더 콜걸 같다는 생각하지 않아?”
반들거리는 그의 눈은 완벽히 검은 색을 띠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남자 화가 나면 완벽히 까만 눈동자가 되는구나.
“웃기지 마요. 나는 당신이 준 돈 한 푼도 가지고 가지 않았어. 그리고 그때는 최음제 때문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사고였잖아요. 당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죠?”
“글쎄 그럴까? 그 밤 내내 나에게 그렇게 매달려 놓고 그게 단순히 최음제 때문이었다고? 너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 최음제 때문이라는 건가?”
“그래서요? 마음이 있으면 뭘요, 마음이 있었다면 어쩌려고요? 누군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버렸는데 이제 와서 마음이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해요!”
“그 말은 너는 본능적으로 그런 밤을 즐긴다는 거지. 그러지 않았나? 아니면 나를 좋아했거나.”
기가 막혔다. 어쩌다 처음을 보낸 남자가 이런 남자였을까?
“놔주세요. 갈 거예요.”
“내가 말했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일지 몰라도 갈 때는 아니라고. 네가 이렇게 가면 성진 그룹은 곤란해질걸? 내가 일행이 말도 안 하고 간 것에 대해 불쾌해할 테니까. 성진 그룹은 우리 그룹과 긴밀한 관계란 말이지. 물론 우리 MK사가 훨씬 더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성진 그룹? 그분들이 성진 그룹 사람들이라고요?”
설마 했는데 역시 성진 그룹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소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대그룹 사람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거야.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하고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상관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파티에 같이 오게 된 거지? 그쪽 일행하고 같이 온 거 아닌가?”
“알았어요. 먼저 가지 않으면 되는 거죠? 그럼 성진 그룹의 사람들이랑 일정을 같이 하면 되겠군요.”
뭐야? 왜 그 사람들이랑 일정을 같이해? 나하고 같이 하자고 하는 거잖아. 몰라?
이 여자가 지금 누구 답답해 죽는 거 보려는 거야?
“알았어요. 제대로 예의를 지킬게요.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겠어요. 됐지요? 이제 그만 놔줘요. 나는 이제 방에 들어가서 쉴 거예요.”
“너는 늘 말과 몸이 따로 놀더라고. 지금도 그런지 어디 한 번 볼까?”
“무슨 소리에요!”
그러나 차마 그 말은 다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튜브톱 드레스를 확 잡아 내렸다. 휑한 공기에 수줍은 가슴이 어쩔 줄 모르고 드러나고 말았다.
“넌 이곳이 참 민감했던 것 같아. 아니었나?”
혼자서 중얼거리고는 그의 손이 그대로 그렇지 않아도 긴장한 가슴을 움켜쥐며 다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안에 들어간 가슴을 타고 찌릿한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아! 도무지, 이런 상황이라니.
그런데 사람의 처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걸까? 아니면 그때 이후 어젯밤까지 그 사람에게 철저하게 길들었기 때문에 내 몸도 나보다 그 사람에게 더 잘 듣는 걸까?
싫다고 하고 밀어내면서도 그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느껴지고 내 몸 안에서부터 반응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디아나. 하…….”
그가 애틋하게 내 입술에 입술을 비비며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가슴이 부르르 떨리며 온몸이 죄어드는 것 같다. 어젯밤 달빛 속에 뜨겁게 합쳐졌던 몸이 다시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내 귓불로 옮겼다. 귓가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어깨를 움츠렸다. 밭은 숨이 끝없이 몰려온다. 흉곽이 부풀며 가슴이 불룩 솟고 있었고 아래가 젖어들며 간질거린다. 내 변화가 당황스럽다.
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쇄골을 혀로 핥자 그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몸이 떨린다. 움츠리는 어깨에도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라울…….”
내 목소리도 젖어들어 낮게 울린다. 내가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없게 색정적으로 들렸다. 허벅지가 움찔움찔하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계속해. 또 불러봐. 내 이름.”
그가 가슴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긴장한 젖꼭지가 여지없이 그의 입술로 빨려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었다. 상체가 뒤로 휘자 반사적으로 하체가 더 앞으로 밀리며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손으로 허리를 휘감고 바짝 당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쥐고 다른 한쪽 가슴을 세차게 빨고 있는 이 남자가 라울. 이 성의 성주라니!
게다가 맞붙은 하체 때문에 단단히 발기한 그의 페니스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미 그의 것을 알기에 더 의식되는 걸까?
뜨거운 열기가 그의 하체와 맞붙은 내 아래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내 느낌대로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를 더듬으며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드레스의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T팬티를 입었다. 앞의 음모만 가려줄 뿐 엉덩이는 줄 하나인 덕분에 그의 손안에 탱탱한 엉덩이가 맨살로 그대로 잡히고 말았다.
“으흐…….”
그가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냈다. 허벅지를 붙이고 싶었지만 파고든 손은 집요하게 한 줄 팬티를 젖히고 파고들어 예민한 돌기를 꾹 누른다. 왈칵하고 무엇인가 아래로 쏟아졌다. 미끌미끌한 액체를 느끼며 나는 죽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이거 놔요!”
한 참의 키스가 이어진 뒤에 헐떡거리는 숨을 내쉬며 작은 틈에 그를 밀어냈다. 밀려날 거라는 건 나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는 역시 꿈쩍하지 않았다. 단지 얼굴을 떼고 조금 더 진한 눈길로 나를 본다. 그의 손이 내 턱을 꽉 쥐고 있어서 나는 고개조차 돌릴 수가 없었다.
“내 말 잘 들어. 이대로 다시 파티에 돌아가는 거야.”
“네?”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내 눈에 띄는 곳에 있으라고 임규빈과 나간다면 가만두지 않아.”
“그 사람은 당신 같은 그런 불한당이 아니에요!”
“뭐라고?”
비틀린 눈썹과 눈빛이 순간 무섭게 느껴졌다. 잔인하게까지 생각되는 험한 인상에 난 움찔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였다.
너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물론 나도 이러면 안 되지만. 임규빈 씨 좀 보고 배워! 뭐 이런 뜻을 담은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분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듯한지 알아요?”
그러자 그 사람의 눈이 잔인하게 바뀌며 내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턱이 으스러질 거 같다.
“잘 들어. 그 임규빈이라는 애송이가 너한테 다정한지 친절한지 모르겠지만, 걔도 남자거든.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하고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왜죠? 나는 당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누구와 무얼 하든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물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지만 난 내 성에서 음란한 여자가 이 남자 저 남자 홀리고 다니는 건 볼 수 없거든?”
너무 심했다.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도 첫날을 보낸 남자였다. 혼자 있을 때는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잊자고 하면서도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독한 말을 하다니.
정말 마음이 상해서 입을 꼭 다물고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노려볼 기운도 열정도 그의 독설에 다 죽어버린 것처럼 그를 보기가 싫었다. 그러자 그런 내 눈을 보는 그의 눈에도 조금 전의 그 독기가 슬그머니 빠지는 거 같다.
나는 외면했다. 그러자 그가 내 얼굴을 다시 제 눈앞으로 돌렸다. 그가 차근차근 가르치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따라 들어와. 아니면 먼저 들어가던가. 아니.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군. 이 꼴을 하고 내가 들어간 잠깐이라도 다음에 다른 놈 눈에 띄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그가 허리까지 내려온 내 튜브톱 드레스를 커다란 손으로 바짝 위로 올려 입혔다. 그의 손에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이 일그러지며 드레스 안으로 들어가 차분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이 남자는 여자의 드레스를 많이 입혀본 건가?
손으로 몸을 훑으며 옷매무새를 만져서 털어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이힐을 손에 들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앗!”
라울이 나를 반짝 들어 안더니 내 눈을 보며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전의 말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완벽하게 조화로운 웃음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슴이 쿵쿵 뛴다.
“맨발로 걷는 건 좋지 않아. 관리를 잘하고 있기는 하지만 발에 상처가 날 수도 있지.”
“내려줘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요!”
“상관없어. 그리고 내가 여자를 안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라울의 대답은 철저히 무심해 보였다. 그러나 손가락에 내 구두를 걸고 나를 안고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묘하게 나를 흔들었다.
“…….”
지금 이러는 라울의 모습은 다정한 연인 같다. 그런 악담을 하고서 이런 행동을 하는 그의 본심은 과연 뭘까?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
“부르지 마. 부를 일 따위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하는 말마다 허무하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고 왜 이따위로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성큼성큼 잔디 정원을 지나서 첫 번째 대리석 계단에 나를 내려놓고 신발을 신긴다.
큰 손으로 내 발을 들고는 구두를 신겨준다. 그의 손이 하도 커서 내 발도 그의 손바닥으로 다 감싸진다. 잔디를 밟아서 더러워진 발을 손으로 쓱 훑어주고는 샌들을 신겨주었다.
갑작스러운 이런 태도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냉소적인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으나 나는 그가 신겨주는 대로 샌들을 신고 계단을 올라갔다. 뒤돌아보거나 이러고 저러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엮여도 잘못 엮인 게 맞았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달달 볶아대고 성진 그룹 사람들한테도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제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갈 수밖에.
파티장으로 들어오자 바로 규빈이 다가왔다.
“디아나, 대체 어디를 갔다 오는 거예요? 얼마나 찾은 줄 알아요?”
“저를 찾으셨어요?”
“그럼요! 디아나가 내 파트너잖아요.”
슬쩍 긴장이 풀린다.
“네.”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지. 안 그래?”
완전히 잘린 뒷말이 신경이 쓰이면서도 나보다 나이도 많고 다정한 규빈 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제 말 놓으려고. 괜찮지?”
“네. 괜찮아요.”
“뭣 좀 먹었어?”
사실 먹은 게 거의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이리와. 내가 먹기 좋은 걸로 서빙해 줄 테니까.”
“아니에요.”
그가 손목을 잡고 테이블 저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문이 열리고 라울이 걸어들어왔다. 그가 들어서자 내 눈은 그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눈은 어떻게 된 건지 허공을 돌다가도 결국 그를 찾는다.
그는 나를 쏘아보고는 규빈에게 잡힌 내 손목을 쏘아 보았다. 지독한 눈길에 손목이 다 화끈거리는 것 같다. 나는 슬그머니 규빈의 손에 잡힌 손목을 뺏다. 왠지 몰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저 남자는 나를 아주 싸구려에 이 남자 저 남자 꼬시고 다니는 여자로 알고 있을 테니까 굳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규빈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거 먹어봐요. 입에서 살살 녹는 거 있죠?”
그는 나에게 캐비어와 치즈가 얹어진 카나페를 내밀었다.
“네.”
목으로 뭐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까슬까슬했으나 포도주와 카나페를 입에 넣었다. 살살 녹는다는 말은 딱 맞았다. 풍미와 촉감까지 그대로 입안에서 녹아드는 카나페를 천천히 씹고 있을 때였다.
그가 손목을 잡고 나를 당겼다. 얼떨결에 이끄는 대로 따라 나가자 정문 연회장 밖이다. 문밖으로 나가다 뒤를 돌아보니 라울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어! 규빈과 나가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규빈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규빈은 내 손을 끌고 바로 탁 트인 중앙 정원으로 나왔다. 연회장에서 앞에는 화려한 등들이 정원까지 이어져서 동화 속의 성을 연상케 했다.
낮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규빈의 말소리가 들린다.
“디아나, 나 진짜 디아나가 마음에 드는데 왜 내가 말하는 걸 그렇게 농담처럼 들어요?”
“저도 진짜 마음에 든다니까요.”
“그래요? 그럼 우리 사귈까요?”
약간 뜸을 들이고 말하는 그의 말투 때문인지 약간 마음이 흔들린다. 습기를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현란한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나는 나름 지혜롭게 답했다.
“딱 여행 기간 동안만 사귀어요. 우리.”
“뭐예요? 설마 지금 나 딱지맞는 거예요?”
“아니라니까요.”
마주보고 말하다 내가 먼저 방향을 돌려 다시 연회장으로 걸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라울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다. 그러자 규빈도 따라 걷는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하얀빛을 내며 청초하게 핀 아마릴리스가 보인다.
이렇게 땅에서 올라와 피어 있는 건 처음 본다. 언제나 꽃시장에서만 꽃을 사서일 거다. 세베로가 나에게 어울리는 꽃이라고 부케도 보냈는데……. 부케는 아직도 연회장 한쪽에 그대로 놓여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나는 잠시 그 꽃을 바라보았다.
“이거 따줄까요?”
“왜요? 머리에 꽂으라고요?”
“아, 그러고 싶으면 그러던가요.”
“누굴 갑자기 꽃 꽂은 여자 만들려고 그래요? 그냥 두세요. 그런데 이 꽃 참 예쁘네요. 근데 규빈 씨는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그러게, 이름이 뭔지 모르겠네.”
규빈이 갸웃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도 꽃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 성에서 느끼는 비밀을 간직한 거 같은 아마릴리스. 내 마음에 두고 싶은 꽃이었다. 이름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이렇게 정원을 잘 손질하고 가꾸고 놓으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어갈 텐데 이 집주인은 여기에는 별로 살지 않는 거 같아요.”
“네. 라울은 한국에서 더 많이 있죠. MK 그룹 알죠? 그 그룹의 대표예요.”
“그럼 회장?”
“그 그룹 사장이고 할아버지가 회장이죠. 한국 이름은 진시환.”
“진시환?”
“그래요. 진시황제보다 더 냉혹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한국에서 거의 자랐기 때문에 여기에는 잘 오지도 않을 걸요?”
“그럼 주인도 없는 집을 이렇게 가꿔놓는가요?”
“그 전에는 어머니가 사셨다니까.”
“그렇군요. 왠지 이 안에 있으면 어느 시대에 있는 건지 모를 것 같아요.”
“그렇긴 하죠?”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과 그 잔디밭을 기하학적으로 가르며 놓인 나무들이 정원을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들어가 봐야겠어요.”
“잠깐만요. 디아나!”
“네?”
규빈이 손을 잡고 나를 당겼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조금 더 진하고 강렬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자니 가슴이 덜컥 떨어진다.
“왜 그러세요?”
규빈이 내 손목을 잡고 진지한 눈으로 보며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내가 사귀자고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나, 디아나 정말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또 그 감사합니다. 자꾸 그렇게 밀어내는 말 할 거예요?”
그 순간 무거운 소리가 옆에서 울렸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사랑 고백이라도 하시나?”
분명히 임규빈과 함께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는데도 버젓이 내 앞에서 임규빈의 손을 잡고 나가다니!
라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바로 따라가려고 성큼 발을 내딛는데 바로 세베로가 왔다.
“세비야 시장이 잠시 뵙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
지금 말고 나중에. 지금은 디아나를 따라 가야 한단 말이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에 저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지금 세비야 세금과 양모 유통단계에 대한 행정적 문제로 세비야 시장을 만나야 하는데 거기서 왜 디아나 소리가 나오는 거야? 라울 너 진짜 저주에 걸렸구나.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머리를 흔들며 온통 신경은 문밖으로 나가는 디아나와 임규빈에게 가면서도 세베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대머리 시장이 부인과 함께 와서 인사를 하고 부인은 살짝 사라져 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까스틸로 가문과 세비야 시에 조금 더 유리한 행정에 대해 의논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양모 유통단계는 3단계 이상은 힘들 거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데 라울, 어디 불편한가요?”
시장은 아까부터 안전부절 못하고 가끔씩 암체어의 팔걸이를 주먹을 쥐고 때려대는 라울을 보고 이상해서 물었다.
“네? 아니 왜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 양모 유통단계에 대한 생각이 잘 들지 않기도 하겠지요?”
“네?”
이건 무슨 소린지. 시장은 입이 떡 벌어져서 손으로 몇 가닥 없는 제 대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이 까스틸로 성의 입장을 말씀해 주시면…….”
“네. 이 까스틸로 성은 밤이 더 매혹적이지요. 그래서 무드에 약한 여자들은 이런 밤 정원에서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취하기 쉽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고백이라도 한다면…….”
갑자기 라울이 벌떡 일어났다.
숙맥 같은 디아나! 까스틸로 성의 분위기에 취해서 임규빈이 사귀자는 고백이라도 한다면 바로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선 채로 다다닥 빠르게 말했다.
“시장님, 저도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모의 유통단계는 3단계로 하고 없어지는 유통단계에 대한 마진은 생산자들에게 더 돌아갈 수 있도록 하지요.
까스틸로 성에서는 약간의 이득이 있겠지만, 세비야에서의 선전효과와 좋은 이미지로 연 4억 유료의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아하! 역시 계산법이 남다른 라울이군요.”
조금 전까지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도 이렇게 정확하게 계획을 발표하는 걸 보면 역시 천재적이라고 하는 라울이 맞다.
그럼 아까 그 헛소리는 천재들이 가지는 광기인가? 장단을 맞추는 게 좋겠지?
“그럼, 오늘 이 까스틸로 성에서 고백을 받는 세뇨리따는 반드시 넘어가겠군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자 라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며
“안됩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바로 나가봐야겠습니다. 좋은 시간 가지십시오. 시장님.”
선 채로 빠르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라울을 보고 어리둥절할 때 세베로가 올리브가 들어간 마티니 잔을 들고 와서 시장에게 권했다.
“저희 주인님은 가끔 소설을 쓰시는데 대단한 장면이 떠오르면 저러기도 하십니다. 취미이지만 몰입하시지요. 아시지요? 이 까스틸로 성의 예술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 아……. 그렇지요.”
실제로 대대로 까스틸로 성의 성주들은 조각과 시, 음률에 능해서 르네상스 이후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키웠으며 그리고 성주 자신도 위대한 예술품을 남기기도 했다.
죽은 라울의 엄마 이사벨 까스틸로도 의상 디자인에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이사벨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해서 아직까지 스페인 귀족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남아있었다.
그러다보니 세비야 시장은 세베로의 말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티니를 마셨다.
그러나 세베로의 속은 긴장으로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주인님, 사랑에 빠지는 건 좋지만, 사업은 제대로 하셔야 하지요. 하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앞에 있는 시장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세베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사랑에 빠진 젊은 성주를 더 신경 써서 보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러다 차이기라도 하면 가문 전체가 난리가 날 거다.
반드시 사랑을 쟁취하도록 이 세베로가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세베로가 연회장 안을 라울 대신 다니면서 하나하나 챙기고 있는 동안 라울은 바로 정원으로 나갔다.
시장하고 이야기 하는 동안 벌써 모든 일이 이루어 진 건 아닐까?
디아나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규빈 씨!
그럼 우리 바로 침대로 갈까요?
네.
“으아악! 안 돼. 안 돼!”
주먹 쥔 두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라울이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예쁜 디아나가 아마릴리스를 보며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세베로 말대로 아마릴리스는 딱 우리 디아나 같아!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규빈이 그런 디아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한다.
라울이 인상을 쓰며 가까이 다가가 나무 뒤에 살짝 숨었다. 꽃 이름을 아네, 모르네, 쓸데없는 말만 하자 콧방귀를 뀌던 라울의 귀가 커졌다,
“내가 사귀자고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나, 디아나 정말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뭐? 정말 임규빈의 사귀자는 말이 감사하다고?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바로 앞으로 나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사랑 고백이라도 하시나?”
큰 소리로 말하자 디아나가 놀라서 본다. 옆에 있던 임규빈도 당황했는지 보다가 인사를 한다.
“연회장에 안 계시고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진시환 사장님?”
딱딱하게 묻는 규빈의 말에 눈썹을 위로 올리며 뭐라고 말할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말도 하기 전에 디아나가 먼저 말했다.
“성주님도 산책하셨나 봐요. 저는 이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두 분이 산책마저 하시고 오세요.”
그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쌩하니 가버린다.
디아나! 나를 좀 자세히 보고 잠깐만 있다가 들어가지. 이 달빛에서 딱 이 조명 아래서 보면 내가 조금 더 근사해 보일 수 있는데…….
속으로 디아나가 야속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임규빈이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도록 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달을 보고 크게 기지개를 켜고 옆에 있는 임규빈을 보며 말했다.
“참 좋은 달밤이군요.”
“네. 그렇군요.”
건성으로 인사하는 임규빈의 얼굴이 안 좋다. 그래서 나는 좋다!
* * *
정말이지 라울의 고약한 등장에는 신물이 난다. 어떻게 이 넓은 성에서 내가 가는 데마다 이렇게 따라다니는 건지. 이러다가는 정말 사람들이 날 뭐로 볼까?
나는 바로 규은과 이 여행의 최고 어른인 회장님 사모님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먼저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때 규빈의 큰어머니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잘 됐다. 큰어머니는 바로 나를 걱정하는 말을 먼저 했다.
“이런 큰 파티가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지는 않나요?”
“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어색하긴 하지만 저야 뭐 사람들이 관심도 없을 텐데요.”
“저런, 무슨 그런 말을요. 여기 있는 남자들 다 디아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 못 봤어요?”
“아유 아닙니다.”
부끄러운 칭찬에 고개를 돌렸으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곳곳에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들이 있다. 드레스가 너무 튀었나?
“디아나는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졸업하면 뭐할 생각이죠? 어머니도 안 계신다고 하고.”
“글쎄요. 졸업하고 난 뒤에는 제가 원하는 게 있어요.”
“파티 플래너가 되겠다고 했죠?”
“네. 연회나 그런데 관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초대해 주신 게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다행이네요. 만일 괜찮은 부서가 있으면 우리 성진 그룹에도 한 번 원서를 내보세요.”
“네?”
성진 그룹에 원서를 내라니? 그럼 한국에서 직장을 가지라는 건가?
“한국에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규빈의 큰어머니는 기품 있지만 절대 거만한 말투가 아니었다. 다정한 물음에 나도 소탈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한국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디아나가 앞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몸가짐도 바르고 감각도 있고. 한국에서도 잘할 거 같아요.”
너무 고마운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회장님 사모님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걸 말해줘서 그게 고마웠다.
“제게 너무 잘해주시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정말 너무 잘 대해 주셨다.
“그러네, 아가씨는 왠지 익숙한 것 같네요. 디아나하고 여행하는 것도 즐거웠고 이런 파티에 같이 와도 손색이 없이 우아하고 사랑스러워서 더 좋아요.”
계속되는 칭찬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이런 따뜻한 칭찬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아 정말, 엄마가 돌아가고 난 뒤로는 아줌마가 정말 이상해 진 것 같다. 소리만 지르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학교 다니면서 민박집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우리 규빈이가 우리 디아나한테 관심을 많이 두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알고 있죠? 우리 규빈이는 아가씨 짝은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갑작스러운 그 말에 나는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규빈 씨가 다정하게 대해주는 동안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그를 딱히 나의 남자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둘 사이에 사귀자고 말이 오간 것도 진짜 농담 같은 한마디였는데 이렇게 앞서 넘겨짚어서 말을 하다니.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
“혹시라도 아가씨가 상처받을까 봐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규빈이 엄마는 참 괜찮은 동서지만 자기 아들한테 욕심이 많아요. 무슨 말인지 알지요?”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규빈 씨가 잘해 주시기는 하지만 손님이시죠. 제가 이렇게 초대받아서 왔다고는 하지만 제 본분을 잊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여행 기간이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면 저는 제 생활로 돌아가야죠. 임규빈 씨는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저 내일 아침 일찍 먼저 가야 할 거 같아요. 실은 그 말씀을 드리려고 사모님을 찾고 있었어요.”
“아가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그런데 일찍 가야 한다니 서운하네요.”
너무나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말을 듣다니. 무슨 신분제 사회도 아니고. 물론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좋아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역시 함께 어울릴 사람들은 아닐지도 몰라.
이 세비야에 온 것도 저 라울이라는 사람도 다시는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어색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빌어먹을 라울이 또 다가왔다. 대체 이 남자, 홍길동의 후예야?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어 안녕하세요. 라울. 진시환이라는 이름보다는 정말 여기서는 라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
“아닙니다. 어떻게 부르셔도 다 좋습니다. 제가 한참 어린데요.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아니지요. 까스틸로 성의 주인이시고 왕족이시고 서울에서도 MK사의 사장님이신데 어떻게 말을 놓겠어요.”
“그런데 함께 오신 이 분은 누구신지.”
“아 여행할 때 가이드해준 아가씨예요. 성품도 좋고 식구들이 다 좋아해서 이곳에 함께 오자고 했지요. 졸업하면 근사한 파티 플레너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그래서 마침 구경도 시켜줄 겸.”
“아아. 그렇습니까?”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도대체 이 남자의 꿍꿍이는 뭘까? 생각하지 말자. 그냥 싸이코라고 생각하고 말자. 내일이면 안 볼 텐데. 뭐!
머리가 복잡했다. 벌써 마드리드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 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렇게 있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다. 안 신던 하이힐에 발을 쿡쿡 쑤시고 그가 입혀준 드레스는 신물이 날 정도로 불편하기만 했다.
한쪽에서 왈츠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이올린과 피아노, 첼로의 연주로 간단한 실내악 왈츠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연주를 하며 왈츠를 춘다는 건 너무나 로맨틱하다.
스페인 손님들이 하나 둘 쌍을 이루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남자와 함께 왈츠를 추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꿈치가 흔들흔들했다.
그러고 있을 때 바로 규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세뇨리따. 한 곡 추실까요?”
그가 손을 내밀었으나 나도 모르게 큰 어머니 눈치를 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큰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나를 본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바로 손을 뻗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틈을 타고 라울이 정중하게 다가와서 규빈에게 말했다.
“성주에게 첫 곡을 양보해주시겠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말에 규빈이 당황하자 옆에 있던 사모님이 말했다.
“그래, 규빈아. 첫 춤인데. 성주가 출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안 그러니?”
“아, 네. 큰어머니.”
규빈은 자기가 신청한 춤이 이렇게 흐지부지되는 게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울에게 정면으로 자기의 기분을 내색할 만큼 그렇게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안 되겠는데요. 디아나. 바로 다음에는 나하고 춰요.”
“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는 라울과 춤을 추게 되었다. 기본적인 왈츠 정도야 못 출 것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많이 모인 성에서 그것도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성주와 함께 춤을 추는 건 보통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연회장 제일 가운데로 다가가자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세뇨리따는 누구지요? 너무 신선하네!”
“이사벨을 닮았어. 더 청초한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 나는 라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집중해. 그리고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말은 역시 고압적인 단어들이었으나 말투는 다정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여태껏 본 중에 가장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이런 춤은 처음이지? 하긴 이런 파티를 와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여간 나오는 말마다 싸가지야. 그래 처음이다!
“네, 처음이에요. 미안해요. 발 밟아서.”
“물론 이 구두는 네가 막 밟아도 되는 그런 구두는 아니야. 수제 구두 장인이 생산하는 몇 안 되는 구두지. 뭐 너 같은 사람은 평생 사고 싶지도 않을 만큼 비싼 구두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의외였다.
“하지만 괜찮아.”
“네?”
“괜찮아. 너하고 춤추는데 이 정도의 대가라면 지불할 수 있어. 그러니 집중해. 나만 보라고.”
그 말에 저절로 그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다. 깊은 눈동자는 여러 가지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입만 열면 폭탄 같은 남자의 눈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로맨틱하고 섬세하다.
라울의 팔에 얹은 손을 통해 그의 단단한 팔이 느껴진다. 그가 내 허리에 감은 손에서도 열감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는 늘씬하게 기다란 팔을 허리를 지나 내 등에 휘감고는 바로 몸을 빙글 돌렸다.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서 그는 능숙하고도 부드럽게 나를 리드하며 홀 중앙에서 우아하게 왈츠를 추었다. 춤은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쏟아지는 눈길은, 와우!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홀 중앙에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라울의 팔에 안겨서 춤을 추며 느끼는 건, 부딪히는 시선마다 강렬하다는 거다. 여자든 남자든 우리를 향해서 엄청난 시선들을 쏟아낸다.
하긴 그렇게 대단한 라울 까스틸로와 춤을 추고 있는데 여자들이고 남자들이고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동작 하나하나 샅샅이 보지 않겠느냐고.
내가 미쳤지! 아니 하필 거기서 춤을 신청하나. 거절할 수도 없게 말이야.
대체 이 남자가 내 옆에 있어서 좋은 거라곤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표정이 굳은 거야?”
도무지 존대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고 써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말꼬리는 댕강댕강 잘라 말한다.
“별생각 안 했어요.”
“춤출 때는 춤에 집중해야지. 턱 들고.”
내가 그의 말에 따라 턱을 들자 그가 나의 시선에 정확히 시선을 맞추고 나를 옭아매듯이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렇게 시선도 나를 보는 거야. 그래야 우아하게 춤이 되거든?”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라울의 눈을 보고 그의 스텝에 맞춰서 움직이자 정말 매끄럽게 춤이 춰진다. 리드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겠지?
그는 정말 나를 우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품에 가깝게 당겨 리듬을 탈 때는 다소곳하게 밀어내며 크게 원을 그릴 때는 우아하고 화려한 백조의 모습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손에 이끌려서 왈츠를 췄다. 나 자신도 깃털처럼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씩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괜찮게 추는 편이군.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편이야.”
만족한다는 듯이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이 연속해서 두 개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사이 사람들의 시선은 완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에 박힌 진주가 반짝 바짝 빛을 내고 있었다. 내 드레스에 내가 흠뻑 빠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요.”
“당연하지. 지금 나와 춤을 추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마. 너를 보는 게 아니라 나와 춤추는 여자를 보는 거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지금 라울과 춤추는 사람은 나니까 말이야. 하지만 라울 이 싸가지는 완전히 자기도취수준이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거 같다.
하긴 그의 말이 맞기도 하지.
“그러니까 왜 나한테 춤 같은 걸 신청하고 그래요. 아무하고 춰도 다들 당신을 바라볼 텐데요.”
“그야. 네가 원했으니까!”
컥! 기가 막힌다는 말은 딱 이럴 때였다. 대체 내가 언제 그와 춤추기를 원했다는 거지? 양심에 걸고 맹세코 난 이 사람과 춤추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렇게 춤을 출 거라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성주가 이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내가 원했다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잖아.”
“그 자리에서 어떻게 거절을 해요. 성진 그룹 사모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인가 보지? 그럼 이건 어때?”
쿵!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는 격렬한 음악이 시작될 때 라울이 나를 번쩍 들어서 한 바퀴를 돌리며 아래에 내려놓았다.
“와!”
환호성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졌다. 바닥에 사뿐하게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가 팔을 빙그르르 돌리자 나는 그의 팔의 동작에 따라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렸다.
빙글 돌린 몸이 그의 품에 그대로 떨어지자 그가 바짝 허리를 당겨 안으며 잔잔하게 스텝을 밟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설마 날 망신주고 싶으세요?”
“망신스럽다고? 이 라울하고 춤추는 게 망신스럽다는 거야? 아님 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워서 보는 시선이 망신스럽다는 거야? 과분한 시선이지.”
젠장. 과분하기는. 너도 한번 당해봐! 내가 만일 널 잡고 빙그르르 돌려서 내리면 넌 좋겠냐?
더군다나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데. 하지만 사랑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엄청 신경이 많이 쓰이는 남자이기는 하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가 여전히 스텝을 밟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네. 말씀하세요.”
“저기, 임규빈과는 어떤 사이지?”
뭐 어떤 사이야, 어떤 사이는. 그냥 오다가다 만나서 가이드 해준 사이지. 아니지. 또 하나 있지. 날 이곳으로 초대해준 사이.
“뭐 별 사이는 아닌데요. 사모님이 넘보지 말라 그러네요.”
“뭐?”
“임규빈 씨 넘보지 말래요. 수준 맞지 않는다고. 우리 그런 사이에요. 됐어요?”
그러자 라울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웃으면서도 팔은 잘 돌려준다. 그의 손동작에 따라 나는 빙그르르 바닥을 돌면서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춤을 춘다는 건 결코 불쾌한 일이 아니다. 아니,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파티를 좋아하고 파티 플래너가 되고 싶어 하는 것 중에는 바로 이 춤도 있다.
즐거운 선율과 웃음이 오가고 또 이렇게 몸을 움직여가며 즐거움을 표현해내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내가 행복한 건 아니다. 나는 이 남자에게서 빨리 떨어지고 싶다. 하지만 라울은 계속 묻는다.
“그래서,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임규빈 씨 같은 남자 좋잖아요. 그런데 쳐다보지 못할 나무라고 옆에서 못 박아주니까 안 쳐다보려고요.”
“그래? 원래 쳐다보지 못할 나무 같은 건 안 쳐다보나?”
“음, 관심 없어요. 사람 타고 어디 올라가고 싶지도 않고. 난 내 실력으로 내가 올라갈 거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정말 근사하게 나한테 걸맞은 남자를 만날 거예요.”
당당하고 당돌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나를 그가 가만히 내려 보다가 말했다.
“디아나?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준 거지?”
“엄마가요.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 안 계셔요.”
뭐 이런 얘기까지……. 이 남자한테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나는 다음 말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빙글 돌리려 했지만, 그가 확 잡아당겼다.
“왜요, 여기선 돌아야 해요.”
“아니, 리드는 내가 하는 거지.”
그는 춤을 추며 한쪽으로 빙글빙글 돌며 갔다. 그의 리드에 따르다 보니 점점 홀 중앙에서 벗어나 구석으로 가게 된다. 많은 사람이 다들 춤을 추다 보니 그들 틈에서 라울이 나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홀 한쪽으로 가는 것이 눈에 잘 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계속 쳐다보고 있던 사람은 봤겠지만, 그는 커튼 옆쪽으로 휙 몸을 돌려 들어가더니 나를 당겼다. 덕분에 나도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조용한 곳에 다다르자마자 그가 한 말이었다.
“왜요? 나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두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나처럼 문란해서 이 남자 저 남자 꼬시는 여자는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가이드 일정은 끝났어요.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요.”
“아까보다 훨씬 고분고분해졌군. 말도 없이 가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건 내가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고 했던 말 때문인가?”
“어찌 됐든 사람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고 되도록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고요.”
그러나 그는 가도 좋다는 말 보다는 다른 것을 물었다.
“말해봐.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데?”
“그때, 우리가 처음 세비야의 호텔에서 만났을 때, 여행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며칠 안 돼서요.”
말하는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젖고 있었다. 엄마 생각을 하면 맨 날 이렇다. 그가 턱시도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손을 잡고 살며시 쥐여 준다.
나도 모르게 코까지 풀어가며 눈물을 닦고 차마 그 손수건을 돌려줄 수가 없어서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버려.”
맙소사. 이렇게 고급 손수건을. 나는 말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고 그 손수건을 쥐고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돌아가면 뭘 할 거지?”
“아무거나요.”
그러자 또 기분이 상했는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한다.
“성의 없이 말할 거야?”
성의 없이 말하면 한 대 치기라도 할 건가? 하지만 궁금해하는 게 가상해서 진지하게 말했다.
“민박집을 정리하든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내가 원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원하는 회사가 어떤 회산데?”
“그러게요, 원서를 내고 싶은 회사가 몇 군데 있어요. 파티 플래너가 꿈이거든요.”
“그래서?”
“돌아가면 준비를 할 거예요.”
그러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또 그 싸가지 화법이 튀어나온다.
“그건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닌가?”
“그건 내 실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을 두고 오르지 못할 나무니 뭐니 그런 말 하는 거 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 봤자 다 사람인데. 더 비싼 거 먹고 더 좋은 데서 잔다고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인 것도 아니잖아요?”
진심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바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그건 나한테 하는 말인가?”
“스스로 판단하세요.”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건 단순히 열정에 들뜬 눈도 아니었고 뭐라 그럴까, 어찌 됐든 기분 나쁜 눈은 아니었다. 약간은 귀여운 듯이? 하지만 그래 봤자 왕싸가지.
어차피 내가 기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다. 그와 밤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그야말로 오르지 못할, 나무라도 너무 높은 나무다 보니 남자친구나 애인 같이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때 세베로가 라울을 찾아왔다.
“주인님.”
그가 라울에 가까이 가서 뭐라고 말하자 라울이 나를 한번 보고는 바로 세베로와 함께 연회장으로 나갔다. 나는 그 길로 그냥 내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3층까지 올라오는데도 하이힐이 벗어 던지고 싶게 힘들었다.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앉아서 내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예쁜 드레스이긴 하지만 그의 손이 닿았던 드레스라 그런지 어서 벗어버리고 싶었다.
캡이 있는 드레스는 벗어버리자 얇은 팬티 한 장이다. 상체 이곳저곳에 그의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으! 무식하게 힘만 세서.
간단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창문이 생각이 났다. 단단히 창문을 닫고 잠갔다.
설마. 성주씩이나 된 게 다 드러났는데 오늘도 나무를 타고 올라오기야 하겠어?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반짝 떴다.
“라울!”
나를 보고 있는 건 분명 라울이었다. 창으로 드는 달빛을 정면으로 맞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건 착시현상일까?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방문도 분명히 잠갔다. 옛날식 커다란 자물쇠는 보기에도 든든해 보였다. 웬만한 장정도 쉽게 열 수 없어 보이는 문을 어떻게 소리도 없이 연 거지?
그러자 그가 정말 중세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열쇠를 잠깐 들어서 보여준다.
“설마, 이 성이 모두 내 거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여기도 내 방이거든!”
맙소사! 내가 말을 해서 뭐해?
다시 열쇠를 내려놓는 라울은 제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도둑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물론 도둑처럼 보이지 않는 아주 잘생기고 돈 많고 또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 난 줄 아는 그런 도둑 말이다.
씩 웃는 그의 얼굴에서 눈만은 진지하고 더 깊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 달빛을 받으며 있는 이 남자의 얼굴은 사람을 홀릴 만큼 잘 생겼다.
하지만 얼떨결에 그와 밤을 보내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트를 꼭 가슴에 끌어안고 일어나 앉으며 그를 보고 말했다.
“나가주세요. 여기 왜 왔어요?”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어 천천히 내 볼을 감쌌다.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아무 관계도 아닌 남자하고 또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내 손목을 꼭 쥐고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나를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보면 마음이 흔들리잖아.
정말 흔들렸다. 더군다나 몸은 이미 그와의 밤을 보낸 기억을 하는 것처럼 그를 향해서 신경이 올올이 일어나고 있었다.
“왜 밀쳐내는 거지?”
“왜냐구요? 당연하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밤을 같이 보낼만한 그런 사인가요?”
“이미 두 번이나 보낸 거로 알고 있는데.”
“그건 전부 다 우연이고, 사고였잖아요.”
“그럼 지금은 사건 사고 아니면 이렇게 맨 정신에 그냥 만나면, 이렇게 날 밀어내고 싶은 건가?”
그는 애가 타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물론 내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이 사람이 나 때문에 애가 탈 게 뭐가 있어?
파티에서 보니까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여자든지 그의 침실로 달려들 기세였다. 거의 반라의 여자들이 가슴과 등을 훤히 내놓고 그가 손을 내밀어 주기만 바라는 눈으로 나를 죽일 듯 째려보는 걸 봤다. 얼마나 살기를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야? 흔들어놓고 상처 주고 싶어서? 저리 꺼져!
그러면서도 그가 묻는 말에는 정작 대답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밀어내고 싶다고 그렇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마음 한쪽에선 그와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겨우 뜸을 들여서 말을 한다.
“그래요. 난 이렇게 어정쩡하고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하고 쉽게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비록 당신과 처음도 두 번째도 얼떨결에 함께했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끌리는 사이기는 하지.”
그가 내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전에 그의 격렬한 입맞춤에 비하면 너무 부드러워서 적응이 안 될 정도였지만, 살짝살짝 내 입술을 핥으며 안타까울 만큼 감질나게 키스하고, 그러다 내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흔들려고 했으나 소용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입술을 빨고 혀로 핥으며 부드럽게 파고든다. 입천장을 훑고 잇몸 하나하나 건드리다가 내 혀를 감싸며 그때부터는 점점 세게 얽혀들며 빨아당긴다. 전염이라도 된 듯이 나도 그의 혀를 빨았다. 혀가 부딪히며 마찰을 일으키자 점점 더 흥분하게 된다.
키스의 달콤함만으로도 충분히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성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의 긴 키스를 받는다. 숨을 헐떡거릴 만큼 긴 키스가 멈춰지고 난 뒤에 난 말했다.
“그냥 나가주세요. 당신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나하고 엮이고 싶지 않잖아요. 사람들 있는 데서 우리는 서로 아는 체도 안 하던 그런 사이인 거 몰라요?”
우린 그런 사이다. 그게 어쩌면 서운했던 걸까? 왜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걸까?
“그럼 사람들 앞에서 아는 척하면 되는 건가? 그걸 원한다며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대체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뭐라고 아는 척을 하려고요?”
“있는 그대로. 사건에 얽혀서 몇 번 잠자리를 한 사이라고.”
“미쳤어요? 우린 그냥 사건이고 우연으로 만났던 사람들이라고요. 원래 사건 사고로 얽힌 사이는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요. 몰라요? 이렇게 찾아오면 안 되죠. 누가 알면 어쩌려고.”
그러자 그가 인상을 썼다.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이다.
“내 성에서 내가 다니지 못할 곳은 없어.”
그래 잘났다. 이 방, 이 성. 아니 저 앞에 땅들도 다 네 거라며? 하여간 있는 척하긴!
“아니죠. 나에게 이방을 내어준 순간부터 이방은 내방이라고 했잖아요. 원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돌아가겠다고…….”
그러나 그 뒷말은 그의 입술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키스하며 나를 당겨 안았다.
키스가 지속될수록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만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내 몸도 점점 달아오르면서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섹스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발 나가주세요. 나가달란 말이에요.”
내가 발을 퉁퉁 구르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밖으로 들렸던 것일까? 똑똑 소리가 난다.
“디아나, 디아나 있어?”
그러자 그가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귓가에 낮게 이야기했다.
“소리쳐도 좋아. 난 나가지 않을 거니까. 이 침대에서 너를 안고 그대로 누워 있을 거야.”
내 눈이 놀라서 커졌으나 그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어떻게 할 테야? 여기서 사람들한테 다 고백할까? 우리의 관계 말이야.”
내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그는 약간 놀란 듯 손을 떼며 말했다.
“그럼 소리 질러. 원하는 대로. 내가 네 침대로 파고들었다고 소리치란 말이야.”
똑똑 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디아나 혹시 무슨 일 있어요?”
규빈의 소리였다. 오늘 밤 나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남자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다른 남자와, 그것도 이곳 성의 성주와 이렇게 침대에 있는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니에요. 규빈 씨 그냥. 별거 아니에요. 고단해서 이제 자려고요.”
“그래요? 같이 차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좀 늦기는 했지만. 안 되겠네요.”
“미안해요. 규빈 씨.”
“잘 자요.”
그가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 빙긋 웃는 듯 나를 보며 옆에 있던 그가 다시 내 턱을 자기에게 돌렸다.
“왜 소리치지 않았지?”
“여기서 소리쳐서 내 이미지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저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거든요.”
내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말이지, 그 말은?”
“잘 보이고 싶다고요. 그렇게 사건이나 사고로 당신 같은 남자하고 밤을 보내고 그런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요. 나에게 막 호감 느끼고 있는 사람이에요. 나도 호감 느껴요.”
그러자 그가 거칠게 어깨를 잡고 잡아당겼다.
“나는 안 된다고 하면서 왜 임규빈에게는 호감을 느낀다는 거지?”
“저 사람은 이렇게 다짜고짜 침대로 파고드는 남자는 아니니까요. 다정하게 대해주고, 정중하게 대해주잖아요. 내 꿈이 뭔지도 묻고, 나한테 호감 있다고 고백하고 그러니까 호감을 갖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임규빈도 너한테 만만한 상대는 안 될 텐데. 왜 임규빈하고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규빈 씨하고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랑을 비하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 질색이었다.
“상관없어요. 좋아하기만 하다면, 결혼 같은 건 상관 안 하고 연애할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런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지?”
“당신하고는 사랑의 감정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요. 모르겠어요?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단 말이죠?”
“아는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