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비운의 공주?
목덜미의 얇은 살갗이 물린 순간 아찔한 느낌과 함께 혹시 그가 뱀파이어는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바이올렛 빛깔이 도는 눈동자를 한 뱀파이어라면 목을 물려도 황홀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때 불빛 아래 바이올렛 빛깔이 은은히 감도는 검은 눈동자는 지금 달빛을 받아서 조금 더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남자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얀 얼굴과 붉게 빛나는 입술도 지금까지 키스로 타액이 묻어서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뭔지 알 수 없는 신비감. 그리고 처음 겪은 남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지금 이 순간은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 세비야에서 나는 지중해의 바람이 불어 다 주는 알 수 없는 마법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말이다.
그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손을 가져다 손등에 키스했다. 그리고 손등을 따라 그 입술이 천천히 올라왔다. 혈맥이 팔딱거리는 손목을 지나 팔꿈치의 얇은 표피를 혀로 할짝대다가 팔을 따라 올라오는 그의 입술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쇄골을 할짝대다가 어느 틈에 아래로 더 아래도 내려갔다. 아까부터 부풀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젖가슴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웃!”
몸이 팔딱거리며 뒤틀린다. 온몸이 그의 입술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알 수 없는 희열에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듯, 오래 굶은 아기가 젖을 찾아 허겁지겁 빨듯이 그가 한 손으로 가슴을 쥐고 다른 한쪽을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작은 몸이 그의 허기진 입안으로 다 빨려 들어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젖가슴에서 아랫배 저 깊은 속까지 신경 줄이 당겨지고 있었다. 아릿한 아픔이 주는 통증에 인상을 쓰면서도 저릿저릿 달아오르는 희열에 아래가 젖어든다.
“하아……. 하아…….”
그가 신음하며 게걸스럽게 다른 쪽 가슴을 입에 문다.
“앗!”
이번에는 진저리를 치며 젖꼭지를 잘근거린다. 그 자극에 내 몸도 순식간에 비틀어지며 반응했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이게 꿈같다고 생각하는 나처럼 그도 지금의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거 같았다.
마치 깨면 사라질 꿈처럼 깨기 전에 하고 싶은 걸 다 하고야 말겠다는 듯, 그렇게 느껴진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 * *
동경에서 마드리드를 거쳐서 세비야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일부러 반나절을 지냈다. 쓸데없이 마드리드 대학을 한 바퀴 돌고, 한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민박집도 둘러보았다.
그놈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 이건 저주가 아니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녀만 떠올리면 몸이 반응하는 건지. 왜 가슴이 툭툭 불규칙하게 뜨끔거리는 건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 민박집 앞에서라면 디아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간 건 절대 아니다.
그냥 가 본 거다. 는 개뿔!
눈에 띄기만 하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작아작 씹어서 다 먹어버릴 기세였다. 눈에 띄기만 해봐! 어디. 분한 마음이 끝도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감히 날 이렇게 만들어놔?
엄마가 있는 스페인에서 떨어져 열 살에 한국에 뚝 떨어졌을 때를 제외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질근질근 입술을 자주 깨물지도 않았고 열네 살 이후 이렇게 자위를 자주 해본 적도 없었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따라올 여자가 줄줄이 늘어섰는데, 훤칠하고 아담하고, 풍만하고 관능적인 모든 타입의 여자들이 널려있는데 겨우 감히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아무도 눈에 안 들어오게 만들어?
그것도 경험도 없고 스킬도 하나도 없는 주제에?
그러나 민박집을 열 바퀴를 돌아도 디아나는 코끝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아주 무식스럽게 드센 한국여자가 민박집 앞에서 옆집 여자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천박해 보이는 그 여자를 두 번이나 보고는 민박집 앞을 도는 것도 멈추고 말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금쪽같이 귀한 시간을. 나하고 식사하며 사업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내년 스케줄 까지 짜여 있는 주제에. 지금도 세비야에 손님들이 와 있을 텐데. 엉뚱하게 마드리드 민박집 앞이나 기웃거리고 있다니!
흥!
그러나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무너진다. 서운하고 아쉽고…….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용서를 해줄까 생각했는데, 너는 절대 용서가 안 돼!
“사장님, 더 돌까요?”
운전기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뭐?”
“지금 계속 이 블록을 돌고 계시는데 계속 돌까요?”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묻는 기사를 보자, 기가 막히다. 엉뚱하게 기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더 돌긴 뭘 더 돌아? 이만큼 돈 것도 감지덕지할 걸?”
“네?”
“됐어. 어서 세비야로 가!”
세비야로 오는 내내 분했다.
뭐한 거야? 마드리드에서 그렇게 헛짓을 하다니!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는 거야. 내 의지를 넘어서는 저주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으면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 맞아. 마음먹기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 점점 다른 마음에 휩싸인다.
디아나!
어떻게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를 버리고 갈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때는 그렇다고 쳐도. 정말 나를 생각도 하지 않은 건가? 괘씸하게. 나도 이렇게 생각이 나는데 처음인 주제에 정말 나를 잊은 건가?
이런 생각이 넘실넘실 불꽃처럼 일어나자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불끈 주먹을 쥐고 무의식적으로 시트를 두드리자 기사가 말한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사장님?”
“왜?”
“지금 시트를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놈의 주먹이 왜 여길 두드리고 있어?
“아니야. 그냥 가!”
늦게 세비야에 도착해서 바로 승마를 했다. 올리브나무가 늘어선 초원을 달리는 건 이 세비야 영지에서만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니 가슴이 뻥 뚫리고, 그 망할 놈의 디아나 생각도 좀 덜하게 된다.
다행이다!
그런데 성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동양인 여자와 남자가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이놈의 눈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지 아무리 봐도 그 여자가 디아나 같다.
빌어먹을!
그래 이 마녀야. 네가 이겼다. 네가 건 저주가 내 의지를 이겼다.
혼자 한숨을 쉬고 그대로 성 주위를 크게 다시 돌았다. 다시 정원으로 가보니 산책을 하던 남녀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 눈에 띈 것이 어릴 때부터 유난히 좋아하던 떡갈나무였다. 이 떡갈나무는 수 백 년 된 거라고 하는데, 나뭇가지가 엄마와 내가 어릴 때 잘 놀던 방 창으로 뻗어있다.
가끔 나무를 타고 창으로 숨어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성에서 나를 찾느라 난리가 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그 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나무에 오르는 건 쉬웠다. 든든한 가지를 타고 창문을 열자 그대로 밀린다.
커다란 창으로 훌쩍 뛰어들어 방으로 들어섰다. 안락한 공기가 마음마저 따듯하게 느껴진다.
역시, 추억이 있는 방이라 그런 건가?
그런 생각에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을 때였다.
‘앗!’
꿈틀거리는 몸이 느껴진다. 누군가 있다.
반사적으로 몸을 제압하고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 헉!
디아나?
달빛이 가져다주는 마법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이 여자가 왜 이 방에?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숨결. 따뜻하고 말랑한 촉감! 이렇게 생생하다니! 디아나가 맞다.
한마디라도 하면 마법이 깨질 거 같아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그 보드라운 입술을 빨고 또 빨았다. 입안을 파고들어 파르르 떨리는 작은 혀를 잡아채고는 영혼까지 빨아먹고 싶은 마음으로 빨아댔다.
“하아……. 하……. 학학…….”
바로 아래서 숨이 차서 죽을 듯이 헐떡거린다.
이럴 수가……. 이건, 꿈도 마법도 아니다. 이건 진짜 디아나다!
마음으로 그렇게 찾아다니며 헤매면서도 정작 이렇게 찾아서 느끼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다.
디아나의 민박집 앞을 서성일 때 알았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는 걸 말이다. 다른 여자들을 안지 못할 정도로 잊지 못하면서도 그저 그 여자와 엮이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만 했던 걸까?
일단 데려다 놓으면 안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내 옆에 있으라고. 밤마다 안고 싶다고. 원하는 걸 다 해줄 테니 내 여자로 있으라고 말이다. 내가 질릴 때까지.
그래, 질려야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이 여자를 질리도록 안고 싶다.
* * *
“앗, 하응……. 응, 응.”
거칠 것 없는 손길이 이미 젖어든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아래가 파르르 떨리고 온몸이 저릿저릿 신경이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이 자극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제 이게 꿈이 아니라도 이 남자를 거부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렇게 잊겠다고 하며 매일 떠올렸던 건 바로 죽을 것처럼 떨리는 이 느낌 때문이었다는 걸 지금 알았다.
나는 이 남자를 그리워했다. 미워하고 미친놈이라고 욕하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매일 기억했다. 그런 놈에게서 잘 빠져나온 거라고 안도하면서도 마드리드로 돌아간 이후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앗!”
그가 가슴을 빨던 입술을 내려서 아랫배를 쪽 빨아들였다. 팽팽한 얇은 살결이 그 입술에 빨려 들어가며 새로운 통증과 자극을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물오물 내 몸을 씹어 먹기라도 할 듯이 아랫배를 씹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엉덩이를 움직이자 바로 꼼짝도 하지 말라는 듯이 골반을 꽉 누른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내린다. 그의 입김이 음모에 닿자 나는 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오싹함을 느꼈다.
다음에 벌어질 일이 가슴을 툭 떨어뜨린다. 피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할 거라는 기대감이 가슴을 더 벅차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핫……. 아……. 흑……. 응응……. 앙…….”
파들파들 떨리는 허벅지는 그의 두 손에 잡혀있고 내 허리는 마구 뒤틀리고 뒤로 휘면서 입에서는 미친 듯이 신음이 쏟아져 나온다. 연한 살이 마구잡이로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혀로 톡톡 건드릴 때마다 새로운 자극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정수를 흔드는 아찔한 자극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더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도 더 느끼고 싶다.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흔들자 이제 연한 살, 가운데 솟은 돌기를 질근 문다.
“아아아……. 학…….”
손가락이 아래로 파고들고 클리토리스는 그의 입술에 짓이겨지고 있었다. 아래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점점 빨라지고 안에서 구부린 손가락이 내벽을 긁으면서 이제 알 수 없는 전율이 규칙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뜨겁군!”
그의 목소리가 낮다. 낮은 목소리에서 울리는 섹시함. 그가 맞다는 안도감. 그러나 다음에 나온 그의 말에 내 가슴은 다시 툭 떨어지고 말았다.
“디아나!”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안 것인가?
“디아나! 디아나!”
그가 계속 내 이름을 부른다. 대답하고 싶다. 그러나 대답보다는 신음이 먼저 나왔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단단하고 뜨거운 것을 젖어든 아래에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안다.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거대하게 발기되고 힘줄이 불거진 그의 몸이 얼마나 나를 미치게 몰아붙였는지 안다. 그리고 그 뜨겁고 황홀한 자극이 나를 붙잡고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놓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아……. 흑……. 학……. 응……. 음…….”
그의 것이 쑥 밀려들어 왔다. 기대하고 바랐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보다도 나의 바람보다 더 강렬하고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큭!”
내 안으로 깊이 파고든 순간 그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졌다. 그의 신음을 듣는 순간 우리가 제대로 하나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내가 느끼는 이 전율을 그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있는 대로 힘을 주며 그의 것을 품었다. 조여 대며 놓지 않을 듯이 흡입했다. 몸살 나게 간지럽고 아래가 꽉 찬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하……. 끊어지겠군. 그래도 좋아. 너라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자궁 끝까지 몸을 밀어 넣더니 잠시 정지했다가 그다음은 조바심 나게 몸을 뺏다.
귀두까지 빼서 입구에서 비비다가 다시 밀어 넣는다. 넣을 때는 잔인할 정도로 힘을 주어 빠르게 쳐올린다. 그 힘에 내가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러자 그가 내 어깨를 단단히 잡고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는 몸을 쳐올리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만큼 밀어닥치는 그의 몸에 내 몸도 함께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는 힘껏 매달렷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보랏빛이 도는 신비한 눈동자가 내 눈길과 정확하게 마주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많은 말을 한 것 같이 알 수 없는 교감을 느끼고 있었다. 몸과 몸이 맞닿는다는 건 단순히 그냥 살갗이 부딪치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알 수 없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뭔가 어둡고 슬프고 또 어떻게 보면 과격할 만큼 잔인했다.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만큼 자극이 한계치를 넘어서서 온몸은 그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는 나의 이러한 것들을 무시한 채 그가 주는 자극을 고스란히 받으며 계속 폭주하고 있었다.
간질간질하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점점 하나의 진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 안에 있는 그의 페니스를 사정없이 조여 대며 나는 그의 것을 품은 채 날아오르며 경련했다.
“아아악…….”
어느 틈에 세상은 뿌옇게 흐려지고 머릿속은 하얀 폭죽이 터지듯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신없을 때에 그가 더 세차게 몸을 밀었다.
“악!”
다시 한 번 입에서 진한 신음이 쏟아지고 나는 있는 대로 허리를 뒤로 휘며 그대로 더 놓은 절정으로 쏘아 올려졌다.
자궁벽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몸을 그가 어느 순간에 더 세게 움켜쥐었다. 몸 안에서 무엇인가가 터지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 스르륵 빠지고 있어서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알 수 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내려앉는 깃털처럼 그렇게 나의 의식이 어디론가 내려가고 있을 때 나를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당겨 품에 안고 누웠다. 색색 숨을 몰아쉬면서도 나는 무겁게 감겨오는 눈썹을 그대로 내리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이대로는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의 것을 무엇인가 움켜잡았다.
그의 팔이었을까?
이대로 사라지지는 말았으면. 이번에 깨면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는데. 아니면 당신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지 그는 이미 내 이름을 안다.
“디아나!”
낮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내 귓가에 울린다.
내 이름을 안다. 나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그의 목소리 끝으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아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마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잊을 수 없는 밤을 두 번이나 함께 보낸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었다. 입 밖에 낼 수 없어도 다시는 만날 수 없어도 적어도 나의 영혼 깊숙이 각인된 그의 몸과 숨결과 채취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말이다.
포근한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의 팔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몰려드는 피로감과 나른함에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알 수 없는 행복감.
* * *
조금 추운 느낌이 들어서 있는 대로 이불을 덮고 웅크렸다. 짹짹짹짹 지저귀는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마드리드 나의 집? 어디, 어디?
그러나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이불을 움켜쥐고 한참 있자니 눈앞에 햇살이 아른아른한 느낌이 든다. 아른아른한 햇살과 계속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생소한 광경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기는 어디? 바닥에 보이는 녹색 카펫. 그래 녹색의 방. 그렇지. 세비야의 성에 온 거야. 환한 햇살이 넓은 창으로 비춰들고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앉아서 지저귀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맞아 그 남자. 도둑! 꿈?
그 사람이 누웠던 옆자리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마구 구겨진 침대 시트와 구겨진 베개. 그리고 시트에 잔뜩 진 얼룩! 꿈이 아니다.
몸을 보자 온통 울긋불긋 멍이 들어 있었고 온몸은 아릿하게 아프다. 이 모든 것이 어젯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뜨거운 정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침대에 온기는 없다.
이럴 줄 알았지만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는데…….
나는 물끄러미 창을 바라보았다. 보나 마나 다시 창으로 나갔을 거다. 그가 이 창으로 들어왔으니까.
정말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어떻게 이 성에 그렇게 스며들었다가 밤만 보내고 다시 가버릴 수 있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사람으로 변한 새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다시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는 것처럼 저 사람도 새가 되었을까?
갑자기 밖에서 지저귀고 있는 작은 새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큰 덩치의 남자가 저렇게 작은 새가 될 리가 없잖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바라본 녹색 방의 풍경은 놀라울 정도였다. 금실로 짠 무늬가 들어간 커튼은 실크였다. 광택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는데 그것을 만져보면서 나는 몸에 커튼을 둘러보았다.
옷을 해 입어도 손색이 없는 그런 감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커튼으로 옷을 해 입은 장면이 나왔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 같다. 이건 드레스를 만들고도 남을만한 천이었다.
커튼을 옆으로 치우자 좀 더 넓은 정원이 창 가득히 들어온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잔디며 잘 손질된 정원의 나무들이 이곳이 세비야 귀족의 성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옆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서 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입었다. 길지 않은 머리지만 단정하게 묶고 문을 열자 바로 문 앞에서 임규빈이 서 있다.
“어?”
갑작스럽게 문을 열자 둘 다가 놀랐다.
“규빈 씨.”
“디아나, 일어났네요? 지금 막 노크하려고 그랬는데. 우리 텔레파시가 통한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느낌이 그래요. 그런데 밤새 잠 못 잤어요?”
“네? 왜요?”
“더 초췌해 보여요. 그래서 그런가? 입술은 더 붉은 거 같은데.”
갑자기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밤새 그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느라고 입술이 더 붉게 부풀었나 보다. 민망해서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 규빈이 말했다.
“브런치 안 할래요? 아래층에 아주 고소한 오믈렛 냄새도 나는데.”
“네.”
함께 식탁에 앉았으나 아무것도 삼킬 수 없을 만큼 입안이 까슬까슬했다. 어른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고 했다. 그때 집사 세베로가 와서 인사를 했다. 정중하면서도 얼굴이 약간 근심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내게 오더니 말했다.
“방이 혹시 불편하시거나 문제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갑자기 왜 나한테만 이걸 묻는 거지? 혹시 이 사람이 어젯밤 일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예. 원하시면 방을 바꿔 드릴 수도 있는데.”
“아니에요. 이틀만 더 묵고 갈 건데요. 괜찮습니다.”
방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혹시 그 사람이 다시 방으로 오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어찌 됐든 그 방에 그냥 있고 싶었다.
“예. 알겠습니다. 커피 드릴까요?”
“예. 연하게 주세요.”
세베로가 직접 커피를 따라주었다. 왠지 그가 어제와는 나를 대하는 게 좀 다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뭐라 그럴까. 조금 더 정중하고 조금 더 조심스럽다고 할까.
“방들이 다 특색 있네요.”
“예. 방마다 다 돌아가신 이사벨님께서 꾸민 겁니다. 오는 손님에 따라서 내어드리는 방도 달랐고요.”
“그렇군요.”
“3층에 있는 방들은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만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녹색 방은 손님들께는 잘 드리지 않던 방입니다.”
그의 말이 어쩐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손님들에게 잘 내어주지 않던 방을 내게 준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왜 제게 그 방을 주신건가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갑자기 오셔서 그나마 늘 준비된 방이 그 방이라……. 원래는 잘 쓰지 않는 방이어서 불편하지는 않으셨나 해서요.”
“잘 안 쓰는 방이요? 그럼 녹색 방은 누가 쓰던 건가요?”
“이사벨님께서 아드님이 어렸을 때 함께 잘 놀던 방입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나무로 깎은 목마를 본 거 같아요.”
“예. 라울님께서 어릴 때 타던 목마죠.”
“아, 그렇군요.”
방 한쪽에 있는 작은 목마. 지금 보면 인테리어 소품같이 보이지만 정말 어린애가 타기도 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연하게 내린 커피를 마셨다. 커피의 향이 아주 좋았다.
“커피가 너무 좋아요.”
“네. 아시다시피 오늘 저녁에는 파티가 있습니다. 이 성에 묵으시는 분은 별로 많지 않지만, 오늘 파티에 오실 손님들은 많아서, 제가 직접 초대장을 작성하고 보냈습니다.”
“어느 정도나 오시나요?”
“70명가량 되실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많이요?”
“네.”
“그런데 세베로,”
“네?”
나는 세베로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파티의 준비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제가 파티 준비하는 걸 좀 구경해도 될까요? 제 전공이 그거거든요. 전 나중에 파티 코디네이터가 되고 싶어서요.”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대부분의 준비는 제가 하니까 제 옆에서 보시면 가장 잘 아실 수 있습니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잘됐네요. 디아나.”
임규빈이 앞에서 축하해주었다. 이 남자는 정말 다정하고 여자를 잘 배려한다. 재벌가의 아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다정함과 순수함. 그게 따뜻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세베로는 눈앞에서 자신을 보고 상냥하게 웃는 이 동양 여자를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귀티가 나는 갸름한 얼굴은 웃음을 띠고 있었고 통통한 볼은 앳되게 보인다. 까맣고 단정한 생머리를 하나로 묶었고 긴 목과 가녀린 어깨 그러나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처럼 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여자와는 다른 확실히 흔하지 않은 귀티 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를 향한 주인의 관심은 어떤 걸까.
어쩌면 불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실 어제 말 울음소리가 나서 나가보았을 때 분명히 그건 라울의 말이었다. 특별히 종자를 개량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이 말은 갈기를 휘날리며 뛸 때면 마치 전쟁의 신이 타고 다녔던 그 말처럼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세베로는 이 말을 돌보는 데에 특별히 더 심혈을 기울였다. 라울이 특별히 사랑해서 윈디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말이었다. 바람처럼 달리는 윈디를 타는 것은 라울뿐이었다. 윈디가 여기 매여져 있다는 건 벌써 라울이 이 저택 어딘가에 왔다는 얘기다.
라울은 오고 갈 때 연락을 안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세베로는 라울이 어디로 갔을까 돌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위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윈디가 매여져 있는 위쪽은 녹색의 방이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떡갈나무가 이어져 있는 그 방은 가끔 라울이 나무를 타고 들어가던 방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사벨과 함께 있었던 그 방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은 없지만 라울은 그 방을 좋아했다. 그래서 손님들이 오거나 해도 되도록 녹색의 방은 내주지 않았지만, 어제는 미리 연락하지 않은 손님이 왔기 때문에 그 방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손님이 있는 줄 모르고 라울이 바로 저 방으로 들어갔다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걱정스럽게 위를 올려보았으나 방에서는 어떤 기척도 있지 않았다.
약간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세베로는 윈디를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마자 라울이 그의 방에서 세베로를 불렀다.
“대체 그 방에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어떻게 그 방에 여자가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세베로. 질문은 지금 내가 하는 거야!”
말해서 무엇하랴.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분명 라울은 나무를 타고 그 녹색의 방에 들어간 거다. 그렇다면 손님이 깜짝 놀랐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라울이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산같이 위로 올리며 이마에 작은 주름을 잡았다. 그럴 때 그의 모습은 죽은 이사벨을 딱 닮았다. 이사벨도 조금 신경이 쓰이거나 예민해지면 한쪽 눈썹을 갈매기처럼 올리며 인상을 쓰곤 했는데. 세베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오신 손님인데 같은 층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달리 내어드릴 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이어서…….”
맞는 말이었다. 라울이 그 방에 들어간 적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혹시 손님이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건 세베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그 방에 묵었던 사람 치워버려.”
“예. 알겠습니다. 바로 방을 바꾸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나오려고 할 때였다.
“세베로.”
“네?”
다시 뒤를 돌자 아까보다 조금 더 인상을 쓰며 한쪽 눈썹을 높이 올린 라울이 다시 말했다.
“그냥 둬.”
“네?”
지금 그냥 두라고 말한 것이 무슨 말일까. 당연히 녹색의 방에 손님을 들이면 라울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안다면 치우라고 한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냥 두라는 말은 좀 이상했다.
“그냥 두라고. 어차피 이틀만 더 묵고 갈 사람들이잖아.”
“네. 그렇긴 하지만 라울님이 원치 않으시면…….”
“아니야. 그냥 둬. 괜찮아. 그냥 가 봐.”
“알겠습니다.”
세베로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그 방을 나왔다.
그냥 두라, 그건 어떤 의미일까?
어려서부터 성의 왕자로 자란 라울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 같은 건 못한다. 그저 재산과 가문을 지키고 품위를 지키는 일을 철저하게 교육받고 자랐을 뿐이다. 한번 정하면 번복하는 일 없는 그가 갈팡질팡 치우라고 했다가 그냥 두라고 하는 이 아가씨는 라울에게 어떤 여자일까?
그런 생각 때문에 앞에서 지금 웃고 있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저, 세뇨리따?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디아나예요.”
“한국인 같은데 스페인 어를 아주 잘하시네요.”
“네. 스페인에서 산지 10년은 된 걸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가 어쩌면 라울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세베로는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아 그러시군요. 파티 준비 중에 뭐가 제일 궁금하십니까?”
“전부 다요. 일단 파티 초청장은 어떤 거로 보내는지 궁금해요. 보여주실 수 있나요?”
“예. 이리 오십시오.”
따라오라는 말에 따라가면서도 과연 무얼 보여 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별거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를 따라 들어간 방에서 나는 한 번 더 환호성을 치고 말았다. 작업실 같은데 각양각색의 초대장 샘플들이 한쪽에 쭉 이어져 있었다.
“이걸 직접 고르나요?”
“모든 파티는 제가 계획합니다. 초청장을 보내는 것부터 어떤 컨셉을 가지고 꾸며야 할지 사람들에게 지시를 하지요.”
“아 그렇군요. 오늘 보낸 건 어떤 건가요?”
그러자 그는 연회색 빛깔의 초청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겉봉투는 연회색빛깔의 가로줄 무늬가 도돌도돌하게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그 위에 붉은 촛농을 녹여서 인장을 찍은 것이 보인다.
“이 인장은 뭔가요?”
“이것은 까스틸로 가문의 인장입니다. 초청장을 보낼 때는 늘 이것을 찍죠. 물론 요즘은 접착제가 발달해서 굳이 찍지 않아도 되지만, 까스틸로 가문의 파티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찍어서 내보냅니다.”
붉은 촛농 위에 찍혀진 인장에는 백합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아주 오래된 인장인가요?”
“네. 수백 년 된 것이지요.”
“아.”
왠지 주눅이 든다. 이놈의 가문이라는 건 어쩌면 이렇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건지. 오랜 역사와 거대한 부가 함께 축적된 이 성에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기도 하지만 주눅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꽃은요? 제가 있던 방에도 화병에 근사한 꽃이 있던데 이 많은 방에 일일이 꽃을 다 꽂아서 보내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꽃꽂이를 담당하는 메이드들은 따로 있어요. 오늘 파티에 쓸 꽃들도 그곳에 있죠.”
“그러면 파티의 꽃들도 일일이 고르시나요?”
“일일이 고르진 않지만, 메인이 되는 색이나 꽃을 지정하기는 합니다. 파티의 컨셉에 어울린다거나 특별히 게스트에게 어울리는.”
흥미로웠다. 손님들에게 어울릴만한 꽃을 고른다니 말이다. 세베로의 말에 무심코 나에게도 어울리는 꽃이 따로 있을까? 궁금해졌다.
“정말이요? 그럼 저에게 어울리는 꽃은 뭘까요?”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아마릴리스.”
“네?”
“아가씨는 딱 아마릴리스를 닮았군요. 제가 볼 때는 말이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이사벨님께서 좋아하셨던 꽃이었지요. 딱 세뇨리따처럼 까만 생머리에 긴 목선을 가진 청초한 분이셨지요.”
“아마릴리스?”
본적이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지만 말이다.
“오늘 특별히 아가씨를 위해서 아마릴리스를 준비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귀빈도 아니고 그냥 따라온 사람인데요.”
“아닙니다. 손님의 손님도 저의 손님입니다.”
그리고 라울님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시니 가장 중요한 손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뒷말은 하지 않고 그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참 말도 잘하시는 집사님이다.
“그리고 라울님께서 아가씨에게 따로 준비한 게 있는데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뭐요? 라울님이라면 이 성의 성주? 그분이 나에게 뭘 주셨다고요? 나를 어떻게 아시고요?”
세베로는 디아나가 전혀 라울에 대해 모르는 게 이상했다. 분명 어제 그 방에서 보았을 텐데 말이다.
“그분이 어떻게 세뇨리따를 아시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꼭 가져다주라고 하신 것이니 잠시 후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전혀 모르는 하늘같은 성의 성주가 나에게 뭘 주었다는 건지. 하사품? 너무 거지같아 보여서 옜다 받아라! 뭐 이런 건가?
“그 라울이라는 분은 지금 성에 계시기는 하는가요?”
“예, 어제 늦게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성주라는 말에 괜히 마음이 살랑인다.
역시 어릴 때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어. 성주라는 말에 바람들어가는 거 봐!
나는 혼자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야지!
세베로는 꽃을 꽂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메이드들이 앉아서 화병마다 꽃을 꽂고 있었다.
그중에서 백합 비슷하게 생긴, 그보다 조금 작고 향기로운 꽃들이 보였다. 백합과의 꽃이었지만 향도 은은하고 조금 더 소담스럽다고 할까?
세베로가 작게 만든 아마릴리스 부케를 내게 주며 말했다.
“이거 어떠십니까?”
“너무 예뻐요.”
“정말, 어울리십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보기에도 딱 어울리는 꽃이네요.”
그때 커튼 저쪽에서 살짝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 몰랐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지금 난 온통 앞에 있는 꽃들에 정신을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갖가지 색깔의 장미와 백합 그리고 리시아샤스 등이 싱싱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꽃꽂이에 대해서는 따로 배웠기 때문에 그들이 꽂는 것을 보면서 어떤 컨셉으로 꽃을 꽂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테이블 웨어요. 어떤 그릇을 사용하시는지, 또 어떤 식으로 테이블 세팅을 하는지 그런 게 너무 궁금해요.”
“정말 모르시는 게 없네요.”
세베로는 칭찬을 하면서 장식장에 보관된 그릇들을 보여주었다.
“와우!”
그릇들도 다 최고였다. 이런 그릇들이라니 그릇 값만 해도 억대는 나갈 것 같은 그 화려함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커트러리는 또 어떻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은 제품이 다 나왔다.
세상에! 요즘 은값도 비싸다는 데 여기에 있는 커트러리만 가져다 팔아도 떼부자는 되겠네.
그렇게 파티 준비하는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디아나 이리 와봐. 나 드레스 입는 것 좀 봐줘.”
“네.”
규은이 부르는 통에 그녀에게로 막 가고 있을 때였다. 세베로가 오더니 큰 상자 하나를 들고 말했다.
“아, 지금 세뇨리따 방으로 가려고 하는 중인데.”
“어? 저는 규은이 언니한테 가보려고요.”
“그럼 이건 방에다 갖다 놓도록 하겠습니다. 꼭 이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조금 전 그 부케도 들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갖다 두세요.”
나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규은이 드레스를 빌려주기로 했지만 직접 세베로가 준비한 것이 있다고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규은의 드레스는 깜찍해 보이면서도 귀여워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민소매에 프릴이 달리고 바이올렛과 회색이 어우러진 새틴 드레스는 그녀가 입자 발랄한 요정처럼 보였다.
“오 언니 드레스 너무 예뻐요!”
“그렇지? 내가 디아나 것도 하나 준비했어. 드레스 없을 것 같아서. 저건데, 한 번 볼래?”
아이보리색에 라임 색이 가미된 드레스도 귀여웠다. 무릎까지 오는 A라인으로 퍼진 드레스는 어깨 부분이 언발란스로 한쪽만 있는 디자인이었다.
“호오. 이거 조금 파격인데요?”
“뭘, 쇄골을 반만 드러나는 건데. 디아나는 어깨가 예뻐서 예쁠 것 같아. 입어 볼 테야?”
“아니, 방에 가서 입어봐야겠어요. 사실은 세베로 씨가 빌려주겠다고 하네요. 내가 없어 보였나?”
“그래? 그러면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거로 입어.”
“그럴게요. 조금 있으면 파티 시작인데 제 방에 들어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그래!”
정말 잘 사는 집 딸답지 않게 소탈하고 정이 많은 규은이었다. 규은의 방을 나와 앞쪽에 있는 녹색 방으로 가며 가슴이 설렜다. 아무래도 일상과 떨어진 곳에 와서인지 하나하나 신기하고 갑자기 동화 속으로 떨어진 거 같다.
이러다 구두라도 한쪽 흘려 봐?
혼자 말하고 혼자 씩 웃었다. 호호호! 완전 좋아!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 오늘 있는 파티 분위기 꼭 기억해서 사람들한테 나중에 이야기도 해주고 나도 파티 장식을 나중에 한 번 해봐야지.”
방에 들어가서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상자를 보았다. 단정하게 놓인 상자 옆에는 아마릴리스 부케도 놓여있었다.
드레스 하나 빌려주는 데 뭐 이렇게까지 공들여 포장을 했을까?
리본까지 메어 있는 커다란 상자를 보자 내가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큰 선물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들고 온 드레스를 옆에 놓고 상자를 옆에 놓는 순간.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은은한 백 아이보리 드레스였다. 그런데 드레스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는 진주 장식이 더할 수 없이 고급스러웠다.
어깨를 그대로 드러내는 튜브톱 드레스는 몸의 곡선을 그대로 따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는데 뒤트임이 꽤 깊게 있어서 걸으면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런 드레스를? 어우, 진짜 너무 예쁘다.”
거울 앞에 서서 입어보았다.
“이게 내가 맞아?”
긴 쇄골이 두드러지고 튀지는 않지만, 꽉 졸린 튜브톱 위로 가슴이 봉긋 솟아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늘 말했듯이 가는 허리와 풍만한 골반 선은 크게 곡선을 이루며 무척이나 세련되면서 여성스럽게 보였다.
찍자. 찍어. 이런 거 입고 찍을 수 있는 날이 언제 또 있으려고!
드레스를 입고 셀카를 찰칵찰칵 찍었다.
“내가 언제 이런 드레스를 입겠어? 아까 규은 언니가 준 건 귀엽고 이건 세련되고 섹시하고? 이게 낫겠다. 이게 훨씬 더 더 현대적이고 섹시하고 품격 있고, 뭐 더 할 말이 있나? 우와……. 너무너무 예쁘다.”
머리는 생머리이기 때문에 그냥 반 묶음으로 핀을 꽂았다. 목과 귀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특별히 가지고 온 목걸이도 없었고 귀걸이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어차피 내가 주빈도 아닌데.
똑똑.
문을 열어보니 규빈이었다.
“휙.”
규빈이 휘파람을 불었다. 눈은 감전된 거처럼 초롱초롱하다. 역시 내 미모에 뻑이 간 게 분명하다. 하긴 내가 봐도 너무 예쁘다!
“세상에 알아볼 수가 없네? 이거 디아나 맞아요?”
“네. 저도 거울보고 이게 난 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드레스네요. 나 혹시 이 성의 잃어버린 공주나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하여간 뭔 말을 못하지. 어떻게 옷 한 벌로 사람이 이렇게 변하나? 뭐 출생의 비밀이 있는 비운의 공주 이런 거 좋아해요?”
“…….”
장단 좀 맞춰주면 안 되나? 입술이 뿌루퉁하게 나오자 규빈이 빙긋 웃는다.
“그래도 아주 예쁘기는 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규빈이 그녀의 볼에 손을 대었다.
“우와 디아나 흥분돼요? 볼이 따끈따끈하네.”
그의 행동에 나는 몸이 굳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쉽은 사절이다. 살짝 얼굴을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나자 그가 조금 겸연쩍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게 조금 흥분되긴 하죠? 이런 파티는 처음이죠. 나는 파티는 따분하기만 한데.”
“그런가요?”
“네 하나같이 사람들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에 칭찬, 그렇게 돌아가는 게 파틴데.”
“그런가요? 저는 친구들하고 파티를 할 때는 늘 좋았거든요. 간식도 싸고.”
“간식은 최고일 거예요. 여기 음식은 소문나 있거든요. 이 성의 주인 라울은 한국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해요. 이 세비야 성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러더군요. 여기 음식이 최고라고.”
“잘됐네요. 어차피 저는 여기 사람들하고 많이 이야기할 것도 아닌데. 음식이나 잔뜩 먹어야겠어요.”
“이 드레스를 입고요?”
한껏 달라붙은 드레스는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서 정말 밥을 먹으면 배가 볼록 나올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아무리 먹어도 배는 안 나오더라고요.”
“하긴 같이 여행 다니면서 보니까 식성은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깡 말랐죠?”
“다 마르지는 않았어요. 보이지 않는 데로 쪘죠. 예를 들면 여자의 힘은 하체에서 나온다고요. 튼튼한 허벅지?”
내가 자신감 있게 말하자 규빈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내가 너무 허물없이 대하나?
“하여간, 내려갑시다.”
“일부러 저 에스코트하러 오셨어요? 그럼 규은이 언니는요?”
“양쪽에 손잡고 들어가려고요.”
“난 그냥 뒤에서 따라 들어가도 되는데.”
“아니요, 디아나는 내가 초대해서 모셔가는 거라고요. 내 손님이에요.”
그렇게 해서 규빈의 양팔에 이랑과 규은이 함께 입장했다. 규은과 규빈은 대부분 아는 사람인 것 같았지만 나는 입장한 뒤에 슬그머니 빠져서 스파클링 와인과 양고기 요리들이 잔뜩 있는 음식 테이블 뒤쪽으로 갔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호텔 전체적인 컨셉은 황금빛과 아이보리였다. 아이보리색 테이블보에 황금색 냅킨, 그리고 접시들도 모두 금테를 두른 접시들이었다. 은 식기들과 함께 더할 수 없이 품격 있고 고급스러웠다.
“휙!”
나도 모르게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건 도대체 아무리 머릿속에 넣어도 나중에 따라 할 수가 없겠다. 이 접시들은……. 한 테이블에 놓인 접시들만 해도 1억은 하겠다.
가운데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꽃 그림과 금테들은 틀림없이 24K 같았다.
“레녹스 저리 가라네.”
커튼도 금사와 아이보리가 어우러져서 정교하게 수놓아진 아라베스크 문양이 신비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렇게 뒤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두 잔 마셨을 때였다.
“여러분, 이 성의 주인이시자 이사벨 까스틸로의 유일한 혈육이신 라울 까스틸로님입니다.”
세베로의 안내에 따라 이 성의 주인이라는 라울이 등장했다.
대체 이런 성을 가진 대단한 상속자는 누구야?
나도 반짝 고개를 들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딱 떨어지는 슈트 발에 잘 빗어 넘긴 머리까지. 그야 말로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 본 것 같은 남자가 딱 등장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해 주먹을 꼭 쥐었다.
그 남자였다. 그 남자!
세비아의 호텔에서 본 석상 같던 남자. 최음제에 취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그 남자. 어제 녹색의 방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그 도둑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그 남자가 라울 까스틸로, 이 성의 주인?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순간 뒤로 돌았다. 그 남자하고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어서 이 연회장을 빠져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나를 콜걸쯤으로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어젯밤에 “네 옆에는 항상 남자가 있군!” 이렇게 말한 것도 규빈을 두고 한 말일 거다.
못살아!
그럼 뭐야? 저 남자 눈으로 본다면 나는 규빈 씨가 불러서 여기까지 온 그렇고 그런 여잔데 어젯밤 저 남자가 침실로 오니까 또 받아준……. 그야말로 완전 놀고 노는 여자네! 헐…….
빨리 눈 마주치기 전에 도망가는 게 수다!
이 사람 많은 데서 규빈과 규은에게 까지 망신을 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