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3)

로얄 스캔들 2

4. 침대에서의 재회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규빈이 이랑을 보며 묻자 이랑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 굉장히 오래된 옛날 멘트인 거 아세요? 요즘 이렇게 말하는 사람 별로 없는데.”

“하긴, 내가 말해놓고도 뻘쭘하네요. 요즘은 이런 말 잘 안 쓰죠? 그런데 정말 어디서 본 거 같이, 낯익어서 그래요. 분위기도 그렇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건 이랑도 그랬다.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워낙 성품들이 좋으셔서 그래요. 큰어머니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규은 씨도 그렇고요.”

“어어 제 이름은 왜 뺍니까? 성격은 제가 제일 좋은데.”

“아, 네. 규빈 씨도 다정하고 좋으세요. 여자들 많을 것 같아요.”

“이런, 이런 데서도 잘난 사람은 어쩔 수 없죠? 하긴, 내가 조금 잘생기기는 했지.”

웃으면서 하는 그의 말에 이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곱상한 얼굴이라고 할까? 각진 데나 모가 난 곳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눈은 쌍꺼풀이 없어 좀 날카로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정하다.

“그런데 우리 지금 가는 곳은 어딥니까?”

마드리드 여행을 마치고 이미 바르셀로나 관광을 시작한 때였다

“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보케리아 시장이에요.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시장인데 원래는 고기를 파는 광장이라는 뜻이에요. 말대로 여러 가지 고기며 생선이며 골고루 다 있거든요.”

이랑이 설명하자 규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늘 그렇듯 옆에 있는 큰어머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긴 어디를 가든 그곳의 활기를 느끼려면 시장을 가는 게 좋겠지요. 그런데 냄새 좀 날 것 같은데. 큰어머니 괜찮으시겠어요?”

“아이 괜찮지. 우리 이러려고 온 여행이잖니.”

하긴, 이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시장 같은 곳을 다닐 것 같지는 않다. 입고 있는 옷도 다 명품이고 하다못해 질질 끌고 다니는 슬리퍼까지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여행치고는 서민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랑은 다니면서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설명했다. 한쪽에 하몽을 쭉 널어놓은 가게가 있다.

“아하 이건 하몽들이군.”

천장에 총총히 매달아 논 하몽들을 보며 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은 참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재미있게 잘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이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규빈을 보았다.

“네, 아시네요.”

“잘 먹습니다. 좋아해요.”

“네 여기 있는 하몽들은 최상품들이에요. 이쪽에 있는 건 5년 된 하몽이구요. 도토리를 먹인 돼지의 다리 살로 만든 거예요.”

“그런 얘기 들은 것 같아요. 돼지한테 도토리를 먹인다고.”

“가격들도 천차만별이지요.”

“오늘 저녁에는 호텔에서 하몽이나 먹어볼까?”

“그래, 그러자.”

마치 규빈과 규은은 큰어머니의 자식들이라도 되는 듯 셋이 뭉쳐 다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이 따로 다니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화목해 보이는 과정에 이랑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보고 싶다

정말 저녁은 값비싼 하몽을 먹었다. 하몽은 가격대가 천차만별인데 오늘 저녁에 먹은 하몽은 이랑도 처음 맛보는 거였다. 식사를 하며 파티 플래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규빈이 갑자기 활짝 웃으며 말했다.

“파티를 좋아한다니,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큰 어머니 우리 세비아에 들를 때 이 아가씨 데려가는 게 어때요?”

세비아? 거긴 여행일정 끝난 다음이다.

“파티 코디네이터가 꿈이래요. 그리고 이 아가씨 드레스 입혀놓으면 근사할 것 같지 않아요?”

“아유 실례되게 말이 그게 뭐니, 먼저 의향을 물어봐야지.”

큰어머니의 말에 규빈이 바로 이랑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말이에요. 이번 여행 일정 끝나고 세비아에 갈 건데요. 같이 안 갈래요?”

“세비아?”

“네, 대단한 귀족 집안에서 초대를 받았어요. 회사 일에 관련돼서요. 아버지가 거래하는 회산데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거든요. 스페인에 들른다고 했더니 자기 성에 꼭 오라고 초대를 해주셨거든요.”

“아 그래요?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성도 가지고 있고.”

“뭐, 스페인 왕족의 가문이라고 하죠. 아마? 그런데 그분도 한국 분이에요.”

갑자기 세비야라는 소리를 듣자 그날 밤이 생각이 나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울컥울컥 심장이 뜨거운 기운을 토해내며 순식간에 그날을 생각나게 한다

그 밤, 세비야의 밤에 만났던 남자. 이름도 모르지만 커다란 키, 보랏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 그리고 나를 보던 그 눈빛.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자 앞에 있던 규빈이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왜요, 부끄러워요? 갑자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져요. 세비야에 같이 가자는데.”

“아, 아니에요. 세비야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세비야라는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도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모한테 말한 건 열흘이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세비야에 들렀다가는 며칠이 더 늦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민박집에서 잔소리가 열 배는 늘어난 아줌마하고 같이 지내는 건 너무나 힘들었다. 세비야에 들려 파티를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비야에서 근사한 파티, 이틀인데, 동행할래요? 정말 그렇게 화려한 파티를 본 적 없을걸요?”

살살 꼬시면서 약 올리는데 그래도 함께 가자고 하는 말 뒤에 있는 배려와 호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앞선다. 에라, 모르겠다.

“아 그래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하지만 저는 드레스도 없고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아서 걱정이네요.”

그러자 옆에서 큰어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아유, 디아나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거기서 하나 더 준비하면 되니까. 규은아 어떠냐? 디아나가 파티에 같이 가면?”

“어우, 나는 너무 좋아! 디아나가 내 동생 같은 거 알아요?”

나이 차이가 세 살밖에 나지 않는데도 규은의 눈은 나를 한참 동생같이 바라 모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순수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동생 같다는 말이 참 정감 있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정말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네.”

“언니라고 해도 돼요. 언니라고 해요.”

“실례가 될까 봐.”

“괜찮아. 나이도 어린데 뭐. 언니라고 불러도 되지. 그럼 말 놓는다.”

“네 감사합니다. 언니.”

정말 세비야의 귀족들이 모이는 파티에 갈 수 있을까? 그 사람은……. 그 사람도 부자였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가슴이 쿵쿵쿵 뛴다. 하긴, 내가 가슴 뛰는 게 잘못된 거는 아니야. 그 사람이 처음이었는걸? 어쩌다 보니 그렇게 최음제에 취해서 얼떨결에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는 못할 것 같다

세비야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치 온 세비아가 그 사람의 땅 같아서 그 사람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그때 그 사람의 보랏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가 가슴에 들어와 박혔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날 리가 없으니까. 원래 이렇게 같이 밤을 보내면 이렇게 가슴에 남는 걸까?

그런 밤을 또 누군가 다른 사람하고 보낼 거라고 생각하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웃긴 일이지. 그 사람은 한 번 스친 사람인데 말이야. 더군다나 이름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하긴 알려줬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날 리는 없어. 그렇게 비싼 호텔의 특급 실에 묶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찾지도 않을 테니까.

“또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네?”

“왜 디아나는 가끔가다 다른 생각을 하지? 엄마 생각이라도 하는 거예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엄마 생각보다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규빈을 보자 그가 말했다

“드레스는 내가 골라주는 걸로 입어야 해요.”

남자가 드레스를 골라준다고?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제가 골라주는 것으로 입으세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내가 그보다는 더 감각 있다고 자부하니까 말이다.

“뭐요?”

“제가 그랬잖아요. 제 꿈이 파티 코디네이터라고. 그러니까 제가 골라주는 옷으로 입으셔야지요.”

“이것 참.”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랑의 말에 규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머 그러면 내 것도 골라줘요. 우리 다 드레스를 가지고 왔어요. 어떤 게 나은지, 디아나가 골라줘 봐요.”

옆에 있던 큰어머니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무난한 여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초대받았다는 스페인 왕족이 궁금하다. 그래서 규은과 같이 걷게 되었을 때 슬쩍 물어봤다.

“어떻게 한국 분이 스페인 왕족의 후예에요?”

“어머니가 스페인 왕족이었대. 돌아가셔서 엄청난 상속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인이지.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었거든. 너무 완벽해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완전 재수 없다고 할 수 있지.”

무심한 듯 털어놓는 규은의 말은 들을수록 입이 딱 벌어진다. 우리나라에도 스페인 왕족이 산다고?

“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는 그런 분은 만나지도 못하고 볼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관심이 있는 건 파티밖에 없거든요.”

“어찌 되었든 거기 가면 제대로 된 파티를 볼 수 있을걸? 찬찬히 봐둬.”

이제 아주 말을 놓고 있는 규은이가 정말 언니 같다

“네 찬찬히 봐둘게요. 언니. 드레스며 접시며, 꽃꽂이에 커튼까지! 잘 봐야지.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면 찍고 싶어요.”

“조심해서 찍어. 거기 집사도 보통이 아니라고 해. 미리 허락을 받는 것도 좋고.”

“네.”

이상한 열기와 가슴이 정신없이 뛰어대는 건 단지 그곳이 세비야에서이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 때문일까. 한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날 밤거리 노천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을 때 거리의 악사들이 칸초네를 부르고 있었다. 파란 밤 곳곳에 노란 가로등 불빛이 켜져 있고 칸초네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애절하다.

“큰어머니, 여기 마음에 드세요?”

“그래 규빈아 나는 여기가 좋다. 이렇게 우리끼리 오붓하게 하는 여행도 좋고.”

오붓하다고 하게는 하지만 늘 경호원이 둘은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이랑은 알고 있었다. 뭐하는 집안일까? 하지만 좋은 사람들인 것은 확실했다. 말투도 온화하고 표정도 부드럽고 이런 가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면 혜정이도 아버지를 찾아 떠났다. 나도 아버지가 있을 텐데 어머니가 나중에 알려준다고 하셨는데 말도 못 듣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 나 잘 있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선율에 맞춰 가슴이 묘하게 흔들린다. 한줄기 눈물이 흐르자 규빈이 다정하게 다가와 물었다.

“디아나, 울어요?”

“아니에요.”

“이거 눈물 아닌가?”

손을 들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자 이랑이 깜짝 놀랐다. 옆에서 가족들도 보고 있는데. 그러나 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하게 물었다.

“왜 울었는지 말해 봐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내가 딱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아 보이는데……. 누가 그리워요?”

“네, 엄마요.”

“엄마?”

“돌아가신 지 몇 달 됐어요.”

말과 함께 눈물이 펑 터진다. 옆에 있던 규빈의 큰어머니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고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겠네. 그럼 지금 누구랑 지내요?”

“음, 엄마 옛 친구하고 같이 있어요. 제가 이모라고 부르고 있는데 엄마 돌아가시고 나니까 민박집 운영하는 것도 서툴고 힘들어서 칸초네를 듣다 보니 엄마 생각이 더 났어요.”

“그럴 만도 하네, 그래도 기특하게 잘 지내고 있네요.”

큰어머니가 이랑을 위로하는 눈길로 말했다.

“네, 다행히 졸업도 했어요.”

정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 저절로 정이 간다. 연주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리의 예술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감동을 주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규빈이 이랑에게 말했다.

“엄마 생각날 때 울음 참으려고 하지 마요.”

“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게 당연하지. 억지로 참으면 마음에 병 돼요.”

다정한 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눈빛과 그의 말은 마음을 만져주고 있었다. 이랑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얼굴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여자에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착각할 것 같아요. 다들.”

“어떻게요?”

말을 하면서 그의 눈이 조금 더 부드러운 빛을 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다 나한테만 잘해준다고 착각할 것 같아요.”

“디아나에게만 잘해주고 있는 거 맞아요.”

“네?”

“벌써 우리 함께 한 게 열흘이에요. 디아나가 마음에 들어요, 나.”

“아,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가 하는 말은 내가 가이드로써 마음에 든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게 무슨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 남자가 좋아한다고 고백 하는데 감사하다고 하는 여자 처음 봤어요.”

“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당황하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규은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규빈을 흘깃 보며 말했다.

“오빠 장난 그렇게 치는 거 아니야. 디아나가 당황하잖아. 오빠가 그렇게 마음에 든다고 한 여자가 한둘이야?”

“야! 너 지금 그렇게 말하면 디아나가 날 어떻게 보겠어?”

역시 힐난도 가볍다. 둘 다 지금 뭐하는 거야? 중간에 나……. 사람이거든?

“오빠, 나도 오빠 이해해!”

“뭘 이해하는데?”

“나도 디아나가 마음에 들어.”

이건 숫제 나를 놓고 남매가 놀고 있다. 하지만 나쁜 말이 아니다.

“저도 가족 분들이 다 좋아요.”

서로서로 다 좋아한다는 고백이 되어버린 묘한 분위기에 규빈의 얼굴이 어색하게 웃는다

하하하…….

* * *

바르셀로나에서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마음도 편하고 좋은 손님들과 함께 여행할 기회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더군다나 임규빈은 여행 내내 너무 다정한 눈으로 쳐다봐서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그가 날 다르게 생각할까?

잠깐이지만 그가 날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건 다 부질없는 일이다. 어차피 여행은 꿈이고 나는 그들의 꿈에 등장한 조연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다정한 눈길로 봐주고 말해주고 더군다나 세비야에 함께 가자고 하다니

세비야!

생각할수록 만감이 교차하는 그런 곳이다. 그때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잘생긴 남자와 보낸 하루 때문에 세비야의 ‘세’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는 게 아무래도 이번에 세비야 여행을 제대로 하고 돌아온다면 이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러나 트라우마라고 규정짓기도 뭐하다. 사실 그렇게 최음제에 취해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은 기분 좋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 남자가 너무나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툭 떨어지고 아랫배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밤에 그렇게 울부짖던 게 나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생각에 자꾸 빠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 잊기로 했으면 잊어야지. 그 밤은 없었던 거야. 내 인생에서 세비야에서 그렇게 낯선 남자와 뒹굴었던 그 밤은 없는 거야!

타올랐던 그 순간이 너무나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어도 그건 그냥 꿈이었어. 그래

단단히 스스로에게 이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세비야까지는 정말 빨리 왔다. 그런데 세비야에 도착하고 난 다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게 그분이 보내준 차라고요?”

이런 차는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웬만한 좋은 리무진 같은 건 간혹 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럭셔리하게 꾸며진 실내라니. 가만히 앉아있기도 뭐하게 움찔움찔 눈치를 보게 된다

“긴장하지 마세요. 뭘 그렇게 긴장해요.”

규빈이 하는 말에 그저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가 있느냐고.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

규빈 씨나 규은 씨는 너무 자연스럽게 리무진 안에 앉아서 어머니에게 필요한 게 없나 묻고 우리를 초대한 라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엄마는 라울을 본 적 있어요?”

“나야 본 적은 있지.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 같지는 않더라. 고독한 표범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자 옆에서 규은이 웃어댔다

“아니 엄마 무슨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건 말을 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고. 그만큼 잘생긴 남자는 본 적도 없는 거 같다. 영화배우들보다 더 잘생긴 거 같더라고.”

“정말? 그럼 나 좀 어떻게 잘 보여야 되는 거 아니야 엄마?”

“그래서 널 더 데리고 온 거야. 아빠가 그러셨어. MK 그룹하고 같이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너무 좋을 거라고. 그런데 네가 그 라울이라는 사람 마음에 들 수 있겠어?”

“라울? 이름이 참 멋있어요.”

옆에서 살짝 끼어들자 규은이 금방 그 말에 동조한다

“정말이야. 멋있잖아. 라울? 와. 생긴 것도 그렇게 잘생겼다고? 제대로 한 번 파티를 즐겨봐야 되겠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말에서 느껴지는 장난기는 전혀 남자에게 관심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그런 규은을 보며 규은의 어머니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데?”

“내가 뭐, 지금 잘해 본다고 하잖아.”

“그거 다 건성인 거, 엄마가 모를 줄 알아? 하여튼 규은이 너는 일할 생각 하지 말고 좋은 남자 고를 생각이나 해.”

“좋은 남자를 골라도 일은 해야지. 남편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지만 일은 영원한 거 아니야?”

“참, 누굴 닮아 저런지.”

“할아버지 닮아서 그렇지 뭐.”

“규은 씨, 할아버지 닮았어요?”

“네. 할아버지 닮았죠. 우리 할아버지는 로맨티스트거든요. 예전에는…….”

“그만 안 해?”

“하긴 뭐, 아버지 형제들은 다 로맨티스트잖아. 큰아버지도 그랬고.”

그 말에 옆에 있던 큰어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는다

“어, 큰어머니.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지 모르겠지만 규빈이 큰어머니를 보며 죄송하다고 하자 큰어머니가 해탈이라도 한 듯이 담담하게 받는다.

“아니야, 맞는데 뭘.”

“너는 말조심 안 해!”

어머니의 말에 옆에 있던 규은의 아버지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형제가 로맨티스트인 건 맞지. 특히 형님은.”

“여보, 그만 해요.”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차마 끼어들 수가 없어서 가만있자 차가 오히려 더 느리게 가는 것 같다. 그러게 똑같은 차를 타고 가도 그 분위기가 어떠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진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규빈이 다가오며 말한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거예요. 세비야는 벌써 왔는데 성까지 가려면 조금 더 가야 되거든요.”

“정말 성이라니.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성에서 파티를 한다니 너무 기대 돼요. 그런데 왜 아까 아버님 형제들이 로맨티스트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규빈은 목소리를 한참 낮추며 말했다

“사실 우리 큰어머니는 자녀가 없어요.”

“아.”

“큰아버지께서 예전에 바람을 피운 적 있어요.”

“바람이요?”

“네.”

“그래서 그 뒤로 형제들이 로맨티스트니 이런 말 하는 거 조심하는 중이에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 있는 많은 잘 사는 사람들은 여자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여자 말고 진짜, 진짜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고요.”

“큰어머니 너무 안 되셨다.”

“글쎄요.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그래도 잘 지내고 계셔요. 원래 두 분 다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니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해서 잘 지낸다? 무슨 부부지간이 동업하는 사이도 아니고

“자, 아이스크림 좋아한다고 그랬죠? 여기요.”

“감사합니다.”

잠시 쉬는 동안에 큰어머니를 보자 그분은 전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구나. 남의 집 가정사인데 뭐. 파티만 한번 갔다가 가면 좋겠다. 아, 거기는 어떨까!

한마디로 입이 딱 벌어지는 곳이었다. 차를 타고 성 근처로 갈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성에 들어서고 난 다음엔 입이 더욱 딱 벌어졌다. 대문에서부터 성 안까지가 이거는 500미터도 넘는 거 같다

가운데 커다란 분수와 조각상이 있었는데 원형을 이룬 그 조각상이 있는 분수들 주변으로 자동차가 경기라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끝없이 긴 정원의 양옆으로 엄청나게 큰 오렌지 나무들이 주렁주렁 오렌지를 달로 이어져 있었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커다란 꽃처럼 달린 오렌지들이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이라면 어디서나 일상적으로 보는 오렌지 나무들도 이렇게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느낌이 다르다

게다가 잘 다듬어진 가지들이 보기에도 좋다. 반짝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지중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픈카를 나눠 타고 있었는데 나는 규빈과 규은과 함께 있었다

“와아. 정말 주눅이 들어요. 저만 그럴 거예요.”

그러자 깔깔 웃으며 규은이 소리쳤다

“디아나, 나도 이런 데 오면 주눅이 든다니까.”

“정말요? 그러니 저는 어떻겠어요?”

“그런가?”

웬만한 속도로 달려서도 꽤 가서야 성이 드러났다. 고딕양식의 뾰족뾰족한 첨탑이 지붕을 이루고 있는 이 성은 마치 디즈니랜드에 있는 디즈니 성처럼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 속에 있는 성 그대로 만들어놓은 것 같이 그렇게 보였다

차가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 올려다보이는 대리석에 한 번 더 놀랐다. 성으로 올라가는 모든 계단은 우윳빛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대리석 계단을 다섯 계단쯤 올라갔을 때 육중한 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남자가 나와 인사를 했다

잘 빗어넘긴 검은 머리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양복, 깊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동자의 빛은 기품 있었고 다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일행을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저는 까스틸로 가문의 집사 세베로입니다. 주인님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지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우와, 말로만 듣던 집사? 게다가 영어도 능숙하다. 집사가 이렇게 멋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열린 문 안으로 규은과 규빈 그리고 내가 들어섰다. 이미 어른들께서는 막 도착하셨다고 한다

헉!

실내는 더 했다. 군데군데 황금으로 테를 두른 액자들이 걸려있었고 중세 복장을 한 여자와 남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라울님께서는 내일 있을 파티에 바로 오실 거 같습니다. 묵으실 방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웬만한 호텔보다 더 방이 많아 보인다. 이 커다란 성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걸까?

방을 안내하겠다는 말에 규빈과 규은 그리고 내가 세베로의 뒤를 따랐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가는 동안 어김없이 이어진 대리석 계단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복도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품격에 저절로 발꿈치가 들릴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이길래 이런 성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을까?”

혼자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규은이 말했다

“이거는 그냥 성만 가지고 유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 까스틸로 가문은 이 근처에서 생산되고 있는 양모 대부분을 사들여서 엄청난 방적 회사를 가지고 있어. 거기다가 투우에 사용되는 소와 최고급 종의 말이 있는 엄청난 목장까지 전부 다 이 까스틸로 가문 거래.”

“정말 놀랐어요. 사람이 이렇게 부자면 어떨까요?”

“뭘 어떻겠어? 싸가지 없겠지!”

규은이 얼굴을 돌리자 우리는 웃고 말았다. 정답일 거라는 데 동의한다.

“하긴 이 스페인에서 투우는 엄청난 산업이기도 해요. 게다가 품종을 개량한 소들은 가격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스페인에 오래 살다 보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내 말에 규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걸 다 이 까스틸로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일을 저 세베로라는 집사가 알아서 한대. 대단하지?”

“기업가라고도 할 수 있네요.”

“하지만 기업가는 아니지. 까스틸로 가문에 속한 집사니까.”

둘이 속삭이듯 한국말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육중한 마호가니 방문을 가리키며 세베로가 말했다

“이곳은 세뇨르 임규빈이 묵을 방입니다. 남쪽으로 이어져서 산이 바로 보이는 데 있죠.”

“감사합니다. 난 방도 배정받았으니까 들어가야 되겠네. 그런데 우리 규은이 하고 이랑 씨 방은 어딘지 알고나 들어가고 싶은데.”

“그럼 함께 오시죠.”

세베로가 우리를 데리고 바로 그 옆으로 몇 발짝을 움직였다. 옆방은 규은이에게 배정되었다. 규은의 방에는 오렌지색 작은 액자가 걸려있었다

“오렌지 방이네.”

“그러게.”

그리고 나는 그 건너편에 있는 녹색 액자가 걸린 방을 배정받았다

이런 방에 머물 수 있다니!

방문을 열자 방문에 걸려있던 작은 녹색 액자처럼 초록색 카펫이 깔린 방이 드러난다. 신선한 공기가 마구 뿜어져 나올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디아나, 내 앞방이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와요. 무섭다든지, 사람의 온기가 필요하다든지.”

말을 하며 씩 웃는다

필요한 게 뭐가 있겠어. 장난같이 말하면서도 규빈의 그런 것이 능글맞게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 같다

창문이 유난히 크게 난 방은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석양이 아름답게 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렌지 빛 석양이 바닥에 깔린 초록 카펫의 색도 다르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유난히 커다란 나무가 창가에 있어서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창문을 두드리듯 그렇게 닿아 있었다. 언뜻 보니 이 나무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도 내려갈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3층 높이에서 나무를 타고 아래로 내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방 안을 돌아보며 푹신한 침대에 앉아서 발을 흔들어 보았다

우리 엄마도 살아계셔서 같이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혜정이도 서울에서 잘 있을까? 아마 같이 왔으면 수다 꽤나 떨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건 이렇게 좋은 곳에 와도 쓸쓸하고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다. 혜정이처럼 나도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없으니까 아빠라도 계시면

그런데 아빠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고 다른 형제들도 있고 날 본 척도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찾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갑자기 웬 가족 생각을. 그런저런 생각에 휩싸였을 때 바로 저녁식사를 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일일이 문을 두드리는 메이드의 소리에 내려가서 식사를 했다. 제대로 된 스페인 정찬이었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데에 감사하면서 주는 대로 많이 먹었다. 특히 잘 숙성된 올리브는 입맛을 더욱 돋게 하였다. 치즈와 올리브 또 소고기까지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오늘은 다들 피곤할 텐데 그만 쉬지?”

“네.”

“그런데 여긴 놀게 너무 없네?”

“이런 데 와서 놀기를 바라다니.”

“알겠습니다. 어머니.”

규빈이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산책 안 할래요? 여기 진짜 정원이 끝내주던데. 걷기만 해도 운동 다 될 거 같은데요? 규은아 너는 어떠니?”

“아, 나는 안 돼.”

“그럼 디아나, 같이 걸어요. 조금만.”

워낙 많이 먹어서 그대로는 잠잘 수도 없을 거 같아서 규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훈훈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두운 정원은 가로등이 켜진 것 외에는 정말 깜깜하다. 불빛도 그리 많지 않다. 딱 성에서 나오는 불빛을 제외하면 말이다

규빈은 옆에 서 있으니 늘씬한 키며 날렵한 몸이며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까지 함께 걸으면 기분을 좋게 한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들게 하는 남자가 옆에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 누군가 말을 타고 휙 지나가는 거 같았다. 너무 빠른 속도여서 얼굴도 볼 수 없었고 말을 타고 가는 뒷모습만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지나가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말이 일으킨 바람 때문일까?

“이만 들어가 보고 싶어요. 피곤했나 봐요.”

내 말에 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성으로 들어왔다. 녹색의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앉자 한숨이 나온다. 간단히 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정말 이 이불의 감촉도 너무나 좋다

“이건 도대체 면이야? 실크야?”

매끈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면은 피부에 닿으니 서늘하면서도 시원하다. 한쪽 라벨을 보니 ‘이집트 200수’라고 적혀있다. 고단해서 눈을 꼭 감고 누웠다. 눈을 한번 떴다 감을 때마다 창을 통해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 꿈결 같은 그런 여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덜컹덜컹 창문에서 소리가 났다. 가슴이 덜컹 뛰는 게 무서워서 꼼짝도 안 했다

‘설마 누가 침입하는 거야?’

그런데 정말 창문이 열리더니 웬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조차 지를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 그림자는 다짜고짜 침대에 오더니 털썩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아!”

짧고 강렬한 외침이 작게 퍼졌다. 그러자 침입자도 놀란 듯 흠칫하며 바로 나를 깔고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눈은 더 커지고 말았다. 강렬하게 내 시선을 잡은 건…….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

“앗.”

그 눈동자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는 침대 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무방비상태로 털썩 누우려다 이불 속에 내가 있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는 거 같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잠시 꿈틀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이불이 확 젖혀지고는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몸을 눌렀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달빛이 들어오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헉! 틀림없다. 그 사람이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세비야의 호텔에서 그때 처음 같이 밤을 보낸 그 남자. 너무 놀란 입술에서 비명이 나왔다

“아앗! 당신……. 읍.”

그때 순식간에 그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진한 올리브 향이 지중해의 바람을 타고 들어오며, 낮에 그 햇살과 어우러졌던 진한 향기가 코로 가득 숨어들었다. 나는 더할 수 없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깜빡깜빡!

아무리 봐도 그때 그 남자다. 꿈이 아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도둑인가? 그렇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문을 열고 들어왔겠지?

이렇게 멋진 외모를 하고 그렇게 최고급 호텔에 묵었으면서 겨우 도둑이라고? 혼란스러운 눈빛이 그를 향하고 깜박이자 낮은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꽤 재미있군!”

한국어였다. 그도 내가 누군지 벌써 안 거다. 그때 그 밤을 같이 보낸 여자라는 걸. 그러니까 이렇게 한국말로 하는 거겠지?

“넌 참 재주가 좋군. 남자를 꼬시는 능력도 타고난 거 같고.”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그리고 타이밍을 잘 맞추는 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가 한 손으로 막고 있던 내 입술에서 손을 뗐다

자유가 된 입술을 놀려서 뭔가 말을 하려던 찰나에 내 입술은 다시 막히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그대로 내 입술에 와서 부딪혔다

“흡, 흡…….”

뭔가 소리를 내려 하였으나 한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내 작은 입술을 집어삼킬 듯이 빨아 당기고 바로 입술을 가르며 혀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그의 혀에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단지 그의 한 손이 내 머리를 잡고 있을 뿐인데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키스 한 번으로 잊으려고 했던 그날 밤이 고스란히 떠오르며 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때의 그날도 분명 사고였는데. 그럼 지금 이건 뭐지?

이것도 우연한 사곤가? 왜 이렇게 생각지 못한 우연이 이 남자하고만 겹치는 거야!

내가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다리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 아래에 깔려서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소심한 발가락만 꼼지락거릴 뿐이다

그는 승마복에 케이프까지 걸치고 있어서 잔뜩 옷을 입은 상태였고 나는 달랑 하얀 면 잠옷 하나를 입은 것뿐이었다

그와의 키스가 짙어지면서 내 옷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그는 손쉽게 잠옷을 옆으로 젖혔다. 몇 개의 단추로 여며져 있던 잠옷은 쉽게 벌어지며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여전히 겹쳐진 입술은 단 한마디도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의 혀가 입천장과 치열을 하나하나 건드리며 나의 혀를 잡아채서 억세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어서 발버둥 치다가 기어이 숨이 넘어갈 듯이 꺽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말 숨이 가빴다

이렇게 거친 키스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방비한 상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숨이 차다 못해 산소부족으로 하얘질 정도가 되어서야 그가 입술을 뗐다

“나하고 잠자리를 하고 그렇게 소리도 없이 도망을 가? 감히?”

지금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그때가 언젠데? 상당히 뒤끝이 긴 거 아니야?

그러면 그때 그렇게 하고 다시 얼굴 볼 일이 있을 줄 알았어? 아니.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 보기를 바랐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우리 어제 약에 취에서 밤새 죽여줬네요. 뭐 이런 말이라도 해?

자기도 그 밤은 생각지 않은 밤이었을 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자꾸 말을 해서 뭘 하겠는가.

“어서 나가요. 여긴 내 방이에요.”

가슴이 드러나고 잠옷이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채 말을 하려니 민망하고 창피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말이라도 해야지!

“언제부터 여기가 네 방이지?”

“오늘 안내받았어요. 여기 집사님이 내 방이라고 한 방이에요. 당신이야말로 도둑주제에…….”

그러자 남자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리는 것 같았다

“세베로?”

집사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철저히 조사했나 보다. 도둑질하기 전에. 지능적인 도둑인 거야?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불러봐. 이 모습을 그대로 들키고 싶다면 말이야.”

말과 함께 그 남자의 입술이 다시 나를 겹쳤다. 그리고 손은 무척이나 빨리 잠옷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맙소사!

그런데 한번 몸을 섞은 남자와 여자라는 건 이런 걸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의 손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사실 그를 부인하려고 애썼고 잊으려고 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였다

그 밤에 빛나던 그 까만 눈동자와 내 입술을 겹치며 부드럽게 토해내던 올리브 향이 진하게 배어든 입술과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타오르게 했던 그의 손길들이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나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저리치게 끔찍한 기억이었으면서 또 그만큼 황홀하기도 한 진하게 각인된 밤이었다

지금 그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이 침실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나를 덮치고 있는 거였다.

이것도, 이것도 깨고 나면 꿈인 걸까?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키스에 나는 그의 목을 두 팔을 감았다. 한 번이라도 더 그를 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그의 이 뜨거운 키스를 기억하면서 한 번 더 이런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키스는 더 진하고 더 집요하고 더 정열적이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뜨거움을 끌어내는 그런 키스였다. 그의 손길은 어느 틈에 내 잠옷을 벗겨 내고 나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한참 이어지는 긴 키스와 애무 사이에 벌떡 일어나더니 케이프를 벗어 던졌다. 케이프를 벗어 던지자 몸에 딱 들러붙는 승마복 바지와 재킷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마치 잡지 모델이 빠져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단추와 버클을 풀었다. 자기 옷을 쉽게 벗어 던지고는 달빛을 받으며 조각상 같은 몸을 드러냈다. 남자의 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고 있다

그 밤에는 그를 바라볼 경황이 없었다. 그저 최음제 때문에 달아오른 내 몸을 감당하기도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이 남자의 몸은 정말이지 완벽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과 같다

단단한 팔의 근육과 잘 단련한 가슴 그리고 초콜릿 복근이 빽빽이 들어찬 복부까지. 그보다 더 눈길을 잡았던 건 말의 근육처럼 단단한 그의 허벅지 근육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비스듬히 일어나 앉으며 그를 향해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싫지는 않았지만 두렵고 무서운 것도 여전했다. 이 상반되는 감정이 휘몰아칠 때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건 내가 가진 습관이었다. 도무지 어쩔 수 없을 땐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 그러나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의 입술이 다시 겹쳐왔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면서 묘한 열기를 일으킨다

딱딱하지만 부드럽고 매끈한 살결이 닿고 있었다. 이게 꿈이라고 해도 다시 한 번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자고 나면 다시 흩어질 거다!

이 사람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으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가지고 다시 창문으로 사라지겠지. 슬픈 도둑과의 하룻밤이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겹쳤던 입술을 살짝 떼며 입술의 표피에 스치듯이 작게 말했다

“집중해.”

세상에. 집중하라고? 대체 뭐에?

“엇.”

그다음은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과의 섹스에 집중하라는 말이었다. 그가 내 어깨를 당겨 안으며 몸을 뒤로 밀었다. 등에 닿는 침대의 푹신한 느낌과 매끄러운 면사의 촉감이 푹 꺼지는 침대에 부피감까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체중을 받으며 나는 침대 속으로 꺼지듯이 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가 내 허벅지에 닿으면서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얇은 표피에 느껴지는 아찔한 느낌. 그가 살짝 나를 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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