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련
어떻게 마드리드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오후 돌아온 이후로 계속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잠만 잤다. 혜정이를 가만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면 최음제를 먹고 낯선 남자와 밤을 보낸 일까지 다시 헤집게 될까 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집이 좋다. 침대가 좋다. 익숙한 이불 속에서 나른하게 뒹굴고 있을 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랑아, 오늘은 수업 없어?”
웬만해서는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는 엄만데 오늘은 엄마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왜 또 목소리가 저렇게 안 좋은 거야? 일어나 나와서 우유를 한잔 마시며 보니 엄마의 입술이 새파랗다.
“엄마,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 입술 파래.”
심장이 안 좋은 엄마는 가끔 몸이 안 좋으면 저렇게 입술이 파랗게 변한다.
“그래, 갈게. 근데 약 있어 아직.”
“약 있어도 오늘은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내 걱정은 말고 어서 학교나 가! 마지막 학긴데 지각하지 말아야지.”
“아, 지각 안 해. 오늘은 1교시 수업이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이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윤주이모가 빨래를 들고 나왔다.
“언니, 이 빨래 여기에 두면 되?”
“응. 그건 거기에 두면 돼.”
엄마는 손짓하며 윤주 이모에게 말했다. 손을 움직이는 것도 심상치 않게 힘이 없어 보인다. 걱정하며 엄마를 보는데 윤주이모가 나를 보고 인사한다.
“잘 잤니? 오늘 웬일로 수업을 다 빠졌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수업은 휴강이에요. 오후 수업만 하면 돼요.”
친 이모는 아니지만, 엄마는 작년부터 한국에서 찾아온 윤주이모를 돌봐주었다. 오갈 데 없는 아줌마는 언니언니 하며 엄마를 따랐고 어차피 혼자 하기에는 벅찬 민박집이었기에 엄마도 의지하며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민박을 운영한 지는 십년도 넘었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다. 이모하고는 젊었을 때 엄마랑 같이 마드리드에서 유학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십년 전부터 이 마드리드에서 민박을 운영했는데 덕분에 나는 많은 여행객하고 스스럼없이 친해지며 자랄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성격이 좀 밝긴 하지. 그런데 작년에 아줌마가 민박집을 찾았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 뒤로 아줌마는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낸다. 혜정이는 나와 동갑인 아줌마 딸이다.
“천천히 배워서 너도 독립해야지. 그때까지 일 착실히 배우고 있어.”
“알았어. 언니.”
아줌마는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신다. 혜정이가 아무래도 이모를 닮은 거 같다. 엄마가 이모하고 친한 게 신기하다. 엄마는 저런 성격이 아닌데 젊었을 때 함께 유학했다는 게 그렇게 서로를 형제같이 묶어줄 만큼 좋은 기억이었을까?
윤주이모는 일을 하면서도 하는 척할 때가 많다. 내 눈에 그러면 엄마도 알 텐데 엄마는 윤주 이모가 그런 걸 너그럽게 봐준다.
“늦지 말고 와. 오늘 다녀와서 일할 거 있어.”
“알았어요.”
늘 집안엔 일거리가 많다. 이번에 한꺼번에 온 한국인들은 식성이 좋아서 다른 때보다 음식을 더 많이 한다. 엄마한테는 꼭 내 힘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오늘 입술색이 파란 엄마를 두고 학교에 가는 건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에서도 어쩐지 엄마가 걱정되었지만 약을 먹고 쉬는 거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걸 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늦은 오후쯤 됐는데 갑자기 급하게 학과 사무실에서 사람이 쫓아왔다.
“디아나, 디아나.”
“네?”
“엄마가 병원에 계시데. 위독하다고 그래.”
“뭐라고요?”
아침부터 입술이 파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가슴이 쿵쿵쿵쿵 뛰었다. 순간 머리끝이 다 쭈뼛 서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아침에 유난히 입술이 파랬던 엄마가 떠오르자 무릎이 후들거린다. 엄마는 심장으로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없어서 정말 고아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무섭다. 한번 쓰러졌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하는데 이번에 민박 일이 바쁘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무서운 생각과 함께 가방을 들고 뛰어 나갔다.
달리는 발걸음이 엉키고 있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그때 바로 앞에 오토바이가 섰다. 늘 나에게 친절한 호세였다.
“어서 타 이랑! 병원으로 바로 갈게. 어디로 가는지 다 들었어. 빨리 타기나 해!”
헬멧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며 호세가 나를 태웠다. 허리를 꼭 잡기가 무섭게 오토바이가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 * *
병원 응급실.
“헉헉.”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이랑의 엄마인 혜원의 손을 꼭 잡은 건 최근 자매처럼 지내고 있는 윤주였다.
“언니. 조금만 힘을 내. 이랑이한테 연락했어. 곧 올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힘을 좀 내!”
“윤주야.”
나오는 말은 알아듣기도 어려울 만큼 작았다. 20여 년 전 마드리드에서 함께 유학할 때 만난 인연이 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났던 건 1년 전 정혜원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였다. 혜원은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제대로 된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있고 마드리드에 대한 소식도 괜찮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혜원이 그렇게 민박집을 성공적으로 운영 할 수 있던 것은 이랑의 도움이 컸다.
이랑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도와가며 민박집을 운영했고 유창한 스페인어와 그곳 현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인 혜원에게 큰 도움도 되었다. 그곳에 윤주가 딸을 데리고 온 것이 1년 전이었다.
“어머 너 구윤주 아니야?”
“어머 언니가 어떻게 여기에?”
“응. 그렇게 됐어.”
혼자 이랑을 키우며 마드리드에서 살기 시작한 지가 10년이 지났다. 살면서 생기는 이런저런 사정이야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응. 이혼하고 옛날 생각나서 마드리드 온 거야. 나도 딸 하난데……. 어머 그러고 보니 언니 딸이랑 우리 딸이랑 동갑이겠네.”
“그러네. 우리 둘 다 유학 마치고 돌아가서 각자 사느라 연락도 못 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만나네.”
혜원은 이혼하고 오갈 곳 없는 윤주를 잘 받아주었다. 혜원의 도움으로 윤주와 윤주의 딸 혜정은 마드리드에서 바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 혜정은 정규 과정은 아니지만, 마드리드 대학의 어학연수 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물론 늘 이랑이 도와주었고. 그런 까닭에 지금 이렇게 급한 응급상황에서 윤주가 정혜원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언니 힘내. 이랑이가 올 때까지라도.”
“안 돼……. 안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 말 명심하고 꼭 들어줘. 우리 이랑이……. 아빠가 찾으러 올 거야.”
“아빠?”
“응……. 이랑이도 몰라. 하지만 너한테 미리 말해 둘게.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우리 이랑이 성 진 그룹 임 회장 딸이야.”
“뭐라고?”
성진 그룹이라니. 대한민국 굴지의 그룹인 성진 그룹의 임 회장의 딸이라니. 이런 일이……. 윤주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찾아오면 꼭 우리 이랑이가 아빠한테 잘 돌아갈 수 있게 잘 말해줘. 나도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 사람에게 임신했다는 말도 못하고 떠났지만 이랑이는 그 사람 딸이야.”
윤주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혜원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보랏빛이 살짝 감도는 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가 진해졌다. 눈썹을 모으며 시환이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밤의 그 뜨거운 열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벗어 던진 옷가지들이며 흐트러진 침대 시트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맹랑하게도 옆에 있어야 할 여자가 없다.
단정한 이마에 풍성한 머리카락, 긴 목과 가는 어깨, 도대체 그런 여자가 왜 그런 양아치 같은 놈과 어울렸던 거지? 아니지. 나랑 어울렸던가?
그랬다. 간밤에 그녀는 분명히 최음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온몸이 달아올라 깽깽거리고 앓는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대로 내보내 봐야 다른 놈한테 떨어질 게 분명했기에 품에 안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달아오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처녀일 줄이야. 그런 여자가 겁도 없이 그런 놈을 상대하다니!
그 놈을 한국에서 본 적이 있다. 양아치로 소문이 난 놈. 한주 산업의 이진산! 마리화나를 얼마나 피워댔는지 복도에서 잠깐 봤을 때도 그 냄새가 역겨울 정도였으니까. 그런 놈이 이 스페인에 왔다는 거지?
어차피 생각지 않은 하룻밤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여자가 없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빠져나간 여자는 처음이다. 늘 많은 여자들이 다가오고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익히려고 내게 낯을 들이대는데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순간 자존심이 상한다.
하긴, 어떤 여잔지도 모르는데, 잘 됐지.
그러나 그렇게 막 굴러먹는 여자가 아니라는 건 어젯밤을 보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도 약 기운과 열기 때문에 달라붙는 이중적이고도 묘한 그녀의 얼굴이 진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 가슴 한쪽을 찌르르하게 당기고 있었다. 파들파들 떨렸던 속눈썹과 붉은 입술이 터질 때마다 뜨겁게 뿜어져 나왔던 숨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묘한 분위기의 여자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수다. 오히려 잘됐는지도 모른다. 달라붙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기분이 나쁜 건 여전하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 던진 돈도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이렇게 돈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건 뭔가 계산이 맞지 않는다. 그게 더 불쾌하다.
거래 없는 섹스란 불편한 거다. 부담스럽고 뭔가 께름칙하다.
왜 그냥 간 거지?
그때 전화가 왔다.
“사장님, 서울로 빨리 오라는 회장님 전화입니다.”
“어련히 내가 알아서 갈까 봐. 준비해.”
“네.”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온 길이었다. 스페인 왕족 출신인 이사벨, 그게 그의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MK 그룹의 진일호. 결코 넘어설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산이었고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놓은 장본인이었다. 원망했으나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지금 전화한 회장님은 할아버지다. 그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는 엄마 이사벨을 닮았지만 큰 체격은 아버지 쪽일 거다.
엄마는 스페인 여자였으나 아담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고 갸름한 얼굴에 까만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마 젊은 시절에 아버지가 빠질 만도 한 그런 여자였을 거다.
지금 이 스페인에 있는 건 어머니의 사망으로 어머니의 명의로 있던 세비야의 거대한 영지와 주택 그리고 예금이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세비야에 머무른 지가 벌써 보름이다. 사실은 간단히 법적인 일만 해결하고 돌아가려고 했으나 세비야에 오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에 대한 기억, 그 환한 웃음과 부드러움. 레이스와 마호가니 가구가 가지고 있던 안락함과 육중한 분위기, 고풍스러움. 이런 것들이 마음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연락이 온 건 예정보다 늦어진 일정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아마 수행 비서에게 전화를 했던 거 같다.
그래, 가야지.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 스페인과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엉뚱한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별거 아니겠지 했는데 왠지 마음에 걸린다. 돈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일까?
그 여자, 첫 경험인데 그렇게 거칠게 밤을 새우다시피해서 몸이 안 좋을 거다.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하는 여자를 향한 이상한 끌림. 아무래도 이 세비야에서는 여자들의 기억이 날 놔줄 거 같지가 않다. 엄마에 대한 기억도, 하룻밤 잤던 그 뜨거운 여자도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잊을 거다.
라울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한 리무진에 올라타다가 주춤했다. 이대로 그냥 가서는 안 될 거 같은 느낌. 놓치고 싶지 않은 뭔가가 그를 멈추게 한 걸까?
그가 차를 타지 않고 문을 잡고 서있자 옆에 있던 수행비서가 바라보았다.
“뭐 좀 알아봐.”
“뭐 말입니까?”
“어제 내 층에 묵었던 한국인들 있어. 한주 산업의 이진산이라고, 어제 밤에 이진산이 불렀던 한국여자가 누군지 알아보고 조사해서 좀 알려줘.”
“여자요?”
아하, 경호원들에게 들은 바가 있다. 어제 진시환이 여자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나?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라면 주변에 두지 않는 진시환이었다. 여자를 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여자하고도 두 번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만큼 뒤처리도 깔끔했고 주변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진시환이었다.
그런 진시환이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밖에. 그런데 알아보면 뭐하나? 바로 비행기를 탈 사람이.
알아보라는 지시만 남겼을 뿐 시환은 그대로 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가 이랑에 대한 보고를 받은 건 비행기 타기 직전이었다. 게이트에서 탑승하기 전 라운지에 앉아있을 때 메일이 한통 왔다.
[호텔로 부른 한국 여자는 국적: 스페인. 이름: 디아나, 22세, 마드리드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친구 대신 여행 가이드로 온 거로 돼 있습니다.]
연락처와 주소가 함께 왔다. 메일을 바라보던 시환의 눈이 무엇인가 생각하느라 조금 더 짙은 보랏빛을 띠었다. 그러나 노트북을 닫고 다시 눈을 감았다. 까딱까딱 한 발로 바닥을 톡톡 치며 그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마드리드 출발, 서울행 4429기에 탑승할 손님은 지금 곧 탑승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제일 먼저 탑승을 하고 시환이 다시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도로 넣는다.
‘디아나라, 디아나.’
그가 몇 번 입술을 중얼거리고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비행기는 그대로 이륙하여 스페인을 떠나 한국을 향했다.
‘역시, 엮이지 않는 게 맞다.’
* * *
같은 여잔데, 어떻게 남자를 만나도 누구는 성진 그룹의 화장될 사람을 만나고 나는 그런 도박에 술이나 처먹는 남자를 만났을까?
여기가 응급실이고 앞에 있는 친한 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이랑이는 팔자가 피겠다. 하는 그런 생각.
“알았어. 언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말 그만해. 어서…….”
하지만 혜원은 계속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다. 만일 이대로 이랑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버지라도 꼭 찾아가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이랑이에게 아빠 이야기를 해 줄걸 그랬다.
가슴에 차오르는 후회와 점점 숨이 가빠오면서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혜원은 마지막 힘을 다해 부탁했다.
“내가 고집 부려서 우리 이랑이 아빠도 못 만나고 혼자 살게 했는데……. 내가 너무 잘못했어. 이랑이 아빠도 딸이 있다는 거 알고 얼마나 놀랐을까.”
“이랑이 아빠한테 말했어? 응? 딸이 있다고? 뭐라고 말했는데?”
“딸이 있다고 했어. 그러니 오면 혹시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더라도 우리 이랑이 꼭 아빠에게……. 알았지?”
“걱정하지 마! 언니. 정말 걱정하지 마!”
그리고 뭔가 더 이야기하려는 듯 바라보던 정혜원이 눈을 감았다.
삐-
모니터에 곡선을 그리던 선들이 일시에 직선을 그리며 심장 정지를 알렸다. 소리가 들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 그리고 조금 후.
“엄마! 우리 엄마 여기 있어요?!”
이랑이 총알같이 응급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정혜원은 하얀 시트에 덮인 상태였다.
얼굴이 가려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섬뜩하게 무서울 수 있다니! 너무나 무서웠다. 엄마가 죽었을까 봐. 아니 저건 죽은 사람에게 하는 짓이었다. 얼굴을 가리다니!
“엄마……. 엄마…….”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딱 그 말이었다. 이랑은 시트를 걷고 엄마를 보았다. 아직도 그대로인데……. 그냥 자는 거 같은데……. 왜, 왜 시트를 덮은 거야?
그대로 침대에 엎드려 엄마를 안았다. 아직 경직이 시작되지 않은 엄마의 몸은 아직도 따뜻하다. 말도 안 된다. 엄마! 엄마가 죽은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어깨가 흔들리며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온다.
“엄마아! 엄마! 악!”
이랑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꿈쩍하지 않는 엄마를 안고 이랑이 몸부림을 쳤다. 그런 이랑을 보는 윤주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한참 있다가 혜정이 와서 이랑을 부축했으나 시신을 안치소에 옮길 때까지 이랑은 오열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도 이랑을 보면서 윤주의 머릿속에는 성진 그룹이라는 그 네 글자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슬퍼도 시간은 가고 산 사람은 살게 된다. 정신없는 중에도 장례는 치러졌고 이랑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윤주가 하는 대로 장례를 마무리했다.
장례를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랑은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웠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흐르고 벌렁거리는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 마드리드에 덜렁 민박집 하나 남겨두고 엄마가 죽었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 떠나질 않고 몸을 누른다. 이랑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이랑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윤주가 혜정을 잡아끌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혜정의 팔을 잡아 뜯는 윤주의 손끝이 다급하다.
“아, 왜 그래 엄마!”
“너 내 말 똑똑히 들어 이년아. 너 이제부터 내 딸 아니다.”
“아! 진짜. 왜 또. 내가 돈 조금 더 썼다고 딸 아니래! 이건 뭐 레퍼토리가 똑같아. 알았다고. 그 돈 채워놓으면 되잖아. 내가 진짜. 다음 달에 아르바이트 하는 거에서 돈 들어오면 줄게.”
엄마 지갑에서 얼마 슬쩍해간 걸 또 귀신같이 알아서 딸이 아니라고 이러는 거야?
혜정은 엄마를 째려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윤주가 혜정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아얏. 왜 때려?”
평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는 엄마를 혜정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니 엄마가 무섭고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며 말한다.
“야! 잘 들어. 너 내가 성진 그룹 딸로 만들어 줄게.”
“뭐? 엄마 돈 거 아니야? 갑자기 성진 그룹은? 한국에 그 성진그룹 말하는 거야?”
혜정은 엄마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성진 그룹이라니. 게다가 뭐라고? 딸?
“내 말 잘 들으라고. 널 찾으러 아빠가 올 거야.”
“우리 아빠? 술 마시고 놀음하다가 죽었다며. 아주 죽은 걸로 생각하라며.”
“아니 그 아빠 말고 성진그룹 회장이 딸 찾으러 오면 네가 죽은 혜원 언니 딸이라고 할 거야.”
“뭐?”
“그러니까 너는 엄마 말만 믿고 그렇게 행동하면 돼.”
“엄마.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체 하나도 모르겠네.”
“너 말해봐. 너 내 딸로 이렇게 평생 민박집 딸로 살 거야? 아니지. 이 집도 이랑이 건데. 알지?
너 나 같이 더부살이 하는 여자 딸로 살 거야 아니면 성진 그룹의 제대로 된 공주님으로 살 거야? 이게 인생 최대 기회인 거 알지? 너 어떡할 거야.”
하는 말이 흥분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강요 어린 질문에 대답하면서 망설일 것은 전혀 없었다.
“그야 당연히…….”
“그래 그러면 앞으로 그렇게 알고 있어. 디아나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유전자 검사. 그런 거 있잖아. 요즘 세상에 어떻게 바꿔? 차라리 이랑이 한테 잘 보이고 잘 돼도 우리 좀 보살펴달라고 하면 안 될까?”
겁이 덜컹 난다. 탄로가 나면 큰일이잖아.
“야, 너 같으면 얼마나 보살펴 줄 거 같아? 응? 네가 재벌 아빠 찾아서 부자 되면 넌 이랑이를 얼마나 챙겨줄 거 같으냐고?”
“그야…….”
맛있는 밥이나 몇 번 사주고 말 거 같다. 뭐 자랑은 실컷 하겠지만 뭘 챙겨줘?
이런 생각을 하자 침이 꼴깍 넘어간다.
“어차피 딸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이랑이는 내가 여기서 잘해줄게. 그럼 되는 거잖아. 유전자 검사는 내가 다 생각이 있어.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줄 테니 나머지는 운이고 또 너 하기 나름이야. 대신 너 자리 잡으면 이리 송금하는 거 잊지 마! 알았지?”
끄덕끄덕
머리를 끄덕이는 데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거였다.
“알았어. 대신 엄마가 벌인 일이야. 제대로 못해서 나 엉망으로 만들면 안 돼.”
“더 엉망일 게 어디 있어? 이 스페인에서 민박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모 아니면 도라고 하번 해보는 거지 뭐! 탄로 나더라도 우리는 손해 볼 거 없어.
몇 달이라도 버틸 수 있으면 버티는 거고, 그동안 챙길 수 있는 돈 있으면 챙기면 되는 거야. 알았어?”
비장하게 말하는 구윤주의 말에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날 늦은 시간까지 자는 내 방에 윤주이모가 들어왔다.
“디아나. 괜찮아? 이제 좀 일어나야지. 어서.”
“괜찮아요. 조금 더 잘게요.”
“하긴……. 그런데, 일어나서 뭐 좀 먹고라도 자라. 이렇게 잠만 자다가는 큰일 난다.”
“감사해요.”
억지로 일어나자 바나나와 과일을 갈아 만든 음료에 평소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와 하몬을 얹은 바게트까지 준비해 주셨다.
입이 깔깔해서 전혀 먹을 수 없을 거 같았지만 일부러 나 생각해서 이렇게 준비해준 이모가 고마워서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아몬드를 넣어 부드럽고 고소한 바나나 쉐이크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정신이 좀 든다.
엄마가 없는데 이렇게 윤주이모하고 혜정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좀 싸가지 없기는 해도 혜정이도 정은 많은 애니까.
“이랑아, 이제 힘내야지. 내가 너 오늘 기분 전환 되라고 머리도 해주고 네일아트도 해줄게. 여자애가 이러고 있으면 힘이 더 빠지는 거야!”
윤주이모는 한국에서 네일숍을 하다 왔다고 했다. 여기서도 간간히 민박하러온 한국 여자들에게 네일아트를 해주고 심심치 않게 용돈 정도의 벌이를 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한테 해준다고 하는 건 처음이다.
그러자 옆에서 혜정이 소리쳤다.
“엄마. 나도. 나도 해줘!”
“시끄러. 넌 좀 가만 못 있니?”
사납게 노려보자 민망해서 이랑이 말했다.
“그냥 마르티나 해주세요. 전 괜찮아요.”
“아니다. 이러고 있지 말고 내가 둘 다 해줄 테니 둘 다 나가서 놀다 와!”
색색가지 메니큐어와 젤들을 늘어놓은 테이블 위에 내 양손이 올라갔다. 손가락 가볍게 마사지하고, 손톱깎이로 손톱을 자른다.
“아얏!”
따끔하게 머리카락이 뽑히는 아픔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어머. 너 어쩌면 새치가 이렇게 있니? 하나 뽑는다는 게 여러 개 뽑혀서 아프겠다. 미안.”
윤주이모의 손에 꽤 많은 머리카락이 들려있다. 윤주이모가 싱긋 웃더니 빠르게 말을 돌린다.
“너는 손톱이 좀 짧은 게 어울린다. 내가 잘 다듬어서 네 마음에 들게 해줄게.”
이모가 손톱을 깎고 다듬고 바르는 동안에도 내 눈에는 그 현란한 색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흐른다.
“디아나, 너 그리고 머리도 조금 자르자. 조금 층지게 자르면 훨씬 가볍고 좋아.”
바로 가위를 가져오는 이모를 보며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벼워지고 싶다. 엄마도 내가 맨 날 엄마 생각만 하고 있는 걸 바라지는 않으실 거다.
사각사각 솜씨 좋은 이모가 정말 머리를 가볍게 해주셨다. 그날 나는 혜정이와 거리로 나가서 생전 사지도 않던 옷도 한 벌 샀다. 여러 가지 색이 들어간 민소매 원피스였다. 어찌됐든 힘을 내야하니까.
그런데 혜정이 나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이랑아, 너는 아빠 본 적 있어?”
“아니.”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제일 생각난 게 아빠였다. 만일 아빠라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아빠 얼굴도 모른다. 엄마는 아빠 사진도 보여주신 적이 없으니 말이다.
“너는, 너는 아빠 기억 나?”
그러자 혜정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기억 나.”
“그래? 좋겠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래도 기억이 있으니 말이야. 부럽다.”
나는 솔직히 그렇게 말했다. 혜정이에게 뭔가 부러웠던 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부럽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나, 스페인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서울에 갈 거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잡고 싶을 만큼 혜정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혜정이 말대로 스페인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빈말이라도 한마디는 했다.
“그래도 좀 더 열심히 적응해 봐. 널 좋아하는 남자애들도 많잖아.”
“아니, 난 역시 서울이 더 잘 맞는 거 같아. 남자는 서울에도 많잖아.”
혜정이라면 어딜 가도 남자들이 많을 거다. 그건 사실이다.
* * *
6개월 후.
“네, 여기 공항 입국출구 앞이에요. 네,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말하면서 입국장 앞으로 다가갔다. 가다보니 한국 여행사에서 나온 직원도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나를 찾고 있었다. 내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자 직원이 반갑게 다가온다.
“아, 아가씨가 디아나? 반가워요. 가이드 일은 좀 해봤어요?”
“예, 스페인에서 오래 살아서 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해봤어요. 그리고 지금은 막 졸업해서 시간도 넉넉해요. 걱정 마세요.”
졸업을 했지만 민박일이 너무 많아서 바로 취업을 하지 못했다. 이모 혼자서는 전혀 일이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민박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나에 대한 보상처럼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행을 한다는 건 새로운 세상의 일부를 경험하는 거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낯선 사람들의 인생의 한편에 참여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가벼운 만남은 서로에게 피상적이지만 서로 좋은 느낌만을 남기려고 하니까.
“이번에 오시는 분들은 한국 굴지기업의 로얄 패밀리래요. 사적으로 조용히 가족여행을 하고 싶다고 오시는 거라 특별히 정중하게 모셔야 해요. 일부러 지사 사람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아, 네, 알겠습니다. 가족여행이면 정말 가이드하기 좋아요. 짓궂은 남자손님들도 없을 테고요.”
한번 씩 생각이 난다. 한참 지난 거 같은데 세비야의 그 밤이.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엄마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돼서 혜정이가 아빠를 찾아 한국으로 떠난 뒤에 이모와 나는 민박집을 둘이서 운영하느라고 너무나 힘들었다.
그리고 이모는 아직 민박을 운영하는데 서툴렀다. 사람들하고 시비가 붙은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 많은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걸 나 혼자 해야 할 때가 너무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가이드는 힘든 일상으로부터의 휴식처럼 생각되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하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았지만, 그동안 민박 운영을 하느라 몸이 너무 고달팠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너무나 기다려졌다.
가이드 하러 가는 날까지도 이모는 화를 냈다.
“야! 민박 운영하는 게 더 중요하지, 그깟 가이드가 뭐가 중요해. 몇 푼이나 번다고.”
“이거 미리 한다고 신청했던 거예요. 제가 안가면 안 돼요.”
“그까짓 것 펑크가 나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늘도 또 한국에서 사람들 오기로 했는데. 아직 장도 안 봐놨는데 무슨 열흘씩이나 다녀온다니.”
“대신에 사람 한명 쓰면 되잖아요. 이모.”
“아휴 어떻게 된 게 남는 것도 별로 없어. 이렇게 힘들 걸 네 엄마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이상하게 호칭이 ‘언니’가 아니라 ‘네 엄마’가 됐다. 민박집은 분명 우리 집인데 왜 자꾸 내가 일하는 사람같이 느껴질까?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이모를 도와가면서 민박을 잘 운영을 해야지’ 라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서러울 때가 많았다. 떠나는 아침에도 짐을 싸서 나오기 직전까지 감자를 깎았다.
“이 많은 감자를 나 혼자 어떻게 다 깎아.”
한가득 쏟아놓은 감자를 보며 나는 기가 막혔다. 이렇게 감자 반찬을 많이 하면 사람들 평이 나빠져서 안 된다. 게다가 도우미 아줌마도 불렀는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따가 일하는 사람이 오기로 했는데.”
“그 사람들이 꼼꼼히 하겠니. 네가 샘플이라도 좀 깎아 놓고 가. 그래야 이렇게 깎으라고 하지.”
이건 마치 무슨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감자 깎는데 샘플이 필요할까? 하지만 나오는 순간까지 열심히 했다.
“그리고 싸인 몇 개만 하고 가.”
“네? 무슨 싸인?”
“아니 네가 싸인해야 되는 것들 있잖아. 미리 해 놓고 가야지.”
“네, 웬만하면 다녀와서 할게요.”
“너 없는 동안에 네 싸인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제가 해야 되는 거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하얗게 눈을 흘긴다.
“저건 하여튼 까다롭기는, 어른이 좀 하라고 하면 좀 좋아?”
함부로 싸인해서 안 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엄마가 늘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대꾸하지 않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엄마 손이 곳곳에 남아있는 예쁜 민박집이었는데 돌아가신 지 석 달 만에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기 시작하고 이제는 아무리 정리를 한다고 해도 예전 같지 못하다. 민박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예전보다 적어진 것 같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후기를 봐도 이전보다 좋다는 평이 없다. 두 번 왔던 분 중엔 어머니가 그립다고 말한 분도 있었다.
졸업까지 했는데 이 이후로는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다. 원래 하고 싶은 건 파티 코디네이터니까. 민박집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세를 주든가.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엄마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뭔가를 정리하고 결정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나선 가이드 길이었다. 마드리드에서 관광하고 바르셀로나로 가서 닷새를 머무는 게 이번 손님들의 일정이었다.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같이 호텔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일당도 넉넉히 쳐주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마드리드 공항 앞에서 이랑은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성진’ 이라고 쓴 글자였다.
‘사람 이름인가? 성진이 뭐야? 설마 그 성진 그룹의 성진?’
요즘은 마드리드에서도 한국 핸드폰과 컴퓨터 등이 인기다. 그중에 성진과 MK사의 제품이 가장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성진 그룹의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을 한번 했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을 했다. 거기는 지사도 이곳에 있는데 뭐하느라고 가이드를 쓰겠어.
어떤 사람들일까, 가족이 함께 온다고 했는데?
플래카드를 들고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입국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을 때였다.
“아, 안녕하세요?”
서글서글한 눈매의 인상 좋은 남자가 이랑에게 다가오며 인사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성진인가?
“안녕하세요? 성진 씨 인가요?”
“하하하…….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전 임규빈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뭔지도 모르는 성진이라고 쓴 걸 들고 계십니까?”
“네, 이걸 들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자세한 설명을 못 들어서. 사람 이름인 줄 알았어요.”
“가족이 함께 왔어요. 저기 오시네요. 저희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큰어머니세요.”
총 5명이었다. 나이 드신 어른이 세 명, 20대로 보이는 남매. 모두 인상이 좋아 보였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가이드로 나올지는 몰랐는데요?”
눈앞에 임규빈이 이랑을 보고 건넨 말이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은 여러 번 봤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정중하고 기품이 있었다. 이전에 재벌 3세라고 와서 마리화나를 피우던 이진산을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전. 디아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여행이 즐거우시면 좋겠어요.”
“여행은 벌써 즐거워요. 이렇게 미인이 안내를 해주는데. 학생이에요? 전공이 뭐예요?”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전공은 실용 디자인이고요.”
이랑이 스스럼없이 웃으며 답하자 규빈이 빙긋 웃으며 계속 관심을 보인다.
“실용 디자인? 그럼 시각 디자인, 뭐 이런 건가요?”
“일상에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디자인 전반에 대해서 배워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정확히 말하자면 파티 코디네이터예요.”
“파티 코디네이터?”
리무진에 타고 이동을 하면서도 규빈이라는 남자는 계속 내게 눈길을 주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말을 시켰다. 나는 옆에 앉은 어른들에게도 눈길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의 눈길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네, 그래서 따로 플로리스트 과정을 밟고 있고요, 의상 디자인도 공부하고 있고요. 전체적인 파티 코디를 하는 거지요.”
“아하. 서울에서는 파티가 일상은 아닌데 이쪽에서는 수요가 많나요?”
“음, 스페인은 아직 입헌 군주국이잖아요. 귀족도 있고, 또 상류 사회에서 수요가 많아요. 그리고 저는 예쁜 게 좋아서요. 그래서 파티를 좋아해요. 꿈꾸게 되고. 일상은 어떻게 보면 매일 반복되는 거지만 파티는 순간의 꿈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파티 코디네이터가 되고 싶어요.”
“이런, 이렇게 야무지고 예쁜 꿈을 가진 아가씨를 봤나. 디아나같이 예쁜 사람은 결혼 잘해서 그냥 예쁜 옷 입고 남편 덕에 살고 싶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요?”
정말 의외였다. 이런 말을 하다니. 아주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불시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게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하시다뇨. 요즘은 여자들도 그렇지 않을걸요?”
“아니. 대부분 여자가 그렇다고 봐요. 아니니 규은아?”
“아니. 오빠가 무례했어. 디아나라고 했죠? 디아나가 아주 예뻐서 오빠가 저러는 거예요. 내가 봐도 너무 예뻐요.”
옆에 있던 그의 동생이 말했다. 규빈의 동생 규은은 작고 동글동글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오빠가 키가 큰 것에 비하면 규은이 키가 작은 것은 의외였다. 친남매 치고는 사이가 좋다고 할까? 보통이란 여행을 오면 싸우기도 할 것 같은데 둘은 그런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규빈과 규은과 함께 온 부모님역시 사이도 좋아 보이고 인상도 좋았다. 큰어머니라고 같이 오신 분은 기품 있고 눈길이 따뜻하다. 조카라고 하는데 규빈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마드리드 곳곳을 다녔다. 어른들이 있어서 한가로운 일정이었다. 한두 곳을 보고 쉬고 차를 마시고 또 최고급 매장을 가서 쇼핑을 했다. 평소에는 너무 비싼 것들만 있어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왜 혼자 오셨어요?”
어른들이 쇼핑하는 동안 지루해하며 서성이는 규빈을 보며 내가 물었다. 여행사 정보를 보니 스물일곱으로 되어있다. 규은이 스물다섯이니 둘 다 나보다는 나이가 많다.
“아 큰아버지가 너무 바쁘셔서요. 같이 다니시려면 생전 여행 못 하실 것 같아서 우리랑 같이 오셨어요.”
“그러면 자녀분도 안 계세요?”
“네, 큰아버지 댁에는 자녀가 없어요. 하긴 얼마 전에 딸이 생기기는 했지요. 아! 그 동생도 스페인 이름이 디아나라고 했는데. 어찌 됐든 그래서 우리가 큰아버지 댁 아들딸 노릇도 같이 하고 있지요.”
“네, 새로 딸이 생기다니. 그럼 아기를?”
“하하하……. 이런 정말 순진한 아가씨네. 뭐. 큰아버지도 몰랐던 딸이 스페인에서 왔어요. 뭐 이야기하자면 복잡해요.”
“네…….”
알고 싶지도 않고 복잡할 거 같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달려오다 이랑의 앞에서 넘어졌다.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바로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랑이 바로 다가가서 아이를 일으키자 아이가 본다.
“에구. 괜찮니?”
이랑이 방긋 웃어주자 아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뒤이어 오는 아이 엄마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아이를 안고 가는 것을 규빈이 보고 있었다. 티 없는 이랑의 웃음에 규빈이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낯설지 않은 여자였다.
동경의 한 호텔.
소회의실에서 한국 MK사와 미츠모도 사(社)의 릴레이 회의가 3일간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회의의 안건은 핸드폰 구매 시 무료 업데이트해주는 콘텐츠의 기간과 다운로드 당 제공되는 보조금액의 근소한 차이에 관한 거였다.
10원, 5원 차이가 어마어마한 손익의 기로를 가르는 것이기에 두 회사 모두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알리는 데 타협이 없다. 이렇게 3일 동안 계속된 회의가 마지막으로 타결되는 날이었다.
“정말, MK사의 젊은 사장의 집념에 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똑 부러지는 사업능력이 있으니 앞으로 50년은 더 MK사를 믿고 거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츠모도 사의 회장은 진시환 사장과 악수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겨우 자신의 조카 벌밖에 되지 않는 진시환과 3일간의 회의를 하면서 그의 치밀한 분석력과 물러서지 않은 뚝심, 그리고 날카롭고 냉철하게 사물을 보는 시각에 홀딱 반한 것이다.
“천만의 말씀을요. 관대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를 한 진시환은 그대로 룸으로 올라갔다. 3일간의 피를 말리는 회의에 모두 나가떨어졌으나 진시환은 그런 중에도 끄떡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다. 피로감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어서 샤워하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올라가는 데 생머리에 긴 목선을 가진 호텔 직원이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데 눈길이 간다.
디아나를 닮았다!
그의 눈길이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그 여자를 향하자 옆에 있던 수행비서가 그를 눈여겨본다.
시환은 룸에 들려 바로 옷을 갈아입고 피트니스를 찾았다. 늦은 시각이어서 피트니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늘 하던 대로 간단한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하고 땀에 젖어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다시 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카드 키가 꽂혀있다. 시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 비서가 연락 없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니라면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그가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들어서자 스위트룸의 커다란 거실 소파에 조금 아까 본 그 생머리에 긴 목선을 가진 여인이 속옷 바람에 와인잔을 들고 라울을 보고 웃는다. 풍만한 가슴이 브래지어 컵에 넘칠 듯 드러나 있고, 입고 있다고 생각한 팬티는 중심부가 갈라져 거뭇한 음모가 그대로 보이는 선정적인 자태였다.
“제가 선물이라고 하네요. 한 잔 드릴까요?”
남자를 시중드는데 익숙한지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으며 한 다리를 세웠다. 검은 음모 사이로 이미 흥분으로 젖어 반들거리는 붉은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마도 계속된 회의 끝에 피로를 풀라고 수행비서가 미츠모도 사와 함께 넣어준 선물이 분명하다.
시환이 아무 동요 없이 그녀를 보았다. 순간 머릿속에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열에 들떠서도 몸을 가리려고 하며 수줍어하던 뜨거운 입술. 향기로운 몸과 하얀 피부.
“선물은 고맙지만 받은 걸로 치지. 그만 나가.”
일본어로 말하자 여자가 바로 일어선다. 여자는 난감한지 그를 향해 돌아서서 브래지어를 풀었다. 하고 있을 때도 젖꼭지까지 비치던 레이스 브래지어가 풀어지자 출렁하며 커다란 인공적인 가슴이 드러난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더 찌푸려진다. 소담하게 예쁘게 봉긋했던 디아나의 가슴과 전혀 다르다.
“내가 나가면 더 곤란해지지 않을까? 나가서 누가 들여보냈는지 불쾌하다고 할까?”
말 한마디에 여자가 바로 기모노를 두르고 인사를 한다. 시환이 문 쪽을 가리키자 여자가 바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나간다.
“휴!”
저도 모르게 한심하다는 듯 한숨이 터진다. 왜 자꾸 비교가 되는 건지.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건지. 시환이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색 레이스 팬티. 한쪽 솔기가 찢어진 팬티다. 스페인의 그 밤이 지나고 호텔방에 남아있던 것을 가방에 집어넣고 한국으로 왔다.
미친놈!
이걸 왜 넣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혼자 있을 때면 꺼내보고 가지고 자고 샤워할 때 함께 빨아서 또 가지고 다니게 된다.
넌 변태야. 이 자식아!
제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팬티를 가지고 허벅지와 팬티를 꺼낼 때부터 터질 듯이 부푼 페니스에 가져다 댄다. 마치 그날 디아나의 몸이 닿는 거 같은 흥분과 안도감.
빌어먹을!
무슨 저주라도 걸어놓지 않았다면 이럴 수는 없다.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의 레이스 팬티 한 장 가지고 자위라니!
그런데 그날 이후로 다른 여자보다 이게 더 좋다. 참 환장할 노릇이다. 레이스 팬티로 페니스를 감싸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손이 어느 순간 꽉 힘을 주며 멈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울컥울컥 하얀 액체가 쏟아지며 레이스 팬티를 적셨다.
“하아……. 완전 미친놈 되게 생겼네.”
그가 젖은 팬티를 빈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러나 일어서서 다시 돌아서서는 몸을 숙여 그걸 주워들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가 욕실을 울리기 시작한다. 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기억이 자꾸 몸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한쪽에 걸어놓은 하얀 레이스 팬티에서 달콤한 샤워 젤 향이 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보물이라도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