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3)

2. 뜨거워, 뜨거워!

그의 말에 대답할 경황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처음 느끼는 강한 자극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나는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니 죽을 것 같다. 창피해서 죽겠고, 부끄러워 죽겠고……. 이런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아서 죽을 것만 같다.

그렇지 않아도 죽고 싶은데 그 마음을 알고 이 남자가 정말 나를 죽여주기라도 할 듯이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허억! 흐흡! 으응…….”

남자의 손이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손가락을 길게 위아래로 비비기 시작했다. 은밀한 돌기를 단 한 번 눌렀을 때도 미칠 거 같았는데 손으로 전체를 비비며 누르자 그야말로 정신이 아뜩해진다.

온몸이 성기가 된 거 같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 끝까지 짜릿짜릿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칠 거 같다는 말은 딱 이런 말이었다. 조금 더 세게 비비고 싶은 느낌, 아니 꽉 잡아서 비틀어주었으면 하는 음란한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내 이런 조급한 마음이 몸짓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천천히. 자아, 우리 천천히 즐기자고. 기다려!”

방정맞게 움직이는 내 엉덩이를 꽉 잡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게 더 창피하다. 어떻게도 할 수 없으면서 느끼고 싶은 마음과 느끼고 싶지 않은 마음이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의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었다.

“허억! 으윽…….”

이물감을 느끼며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벽을 건드리는 것이 소름 끼칠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선명한 움직임 뒤로 근질거리는 내벽을 건드리는 자극과 전율에 입에서는 연신 신음이 터졌다. 그가 내 신음소리를 더 듣고 싶기라도 하듯이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더 압박감을 주며 들고나는 그의 손가락에 내 엉덩이가 더 느끼고 싶다는 듯이 움직였다. 처음인 주제에 이렇게 느끼는 걸 보면 내가 정말 음란한 여자일까?

가슴 깊은 곳에서 자괴감과 목이 메는 슬픔이 올라오고 있었으나 야속하게도 머리와 달리 내 몸은 더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밤만 지나면 되는 거야. 최음제 그것 때문이야. 그러니까 오늘만 지나면 모든 걸 다 잊으면 돼. 지금 이러는 건 내 의지가 아니야!

“아악! 으응. 앙…….”

순간 갑자기 축축하고 말캉한 것이 느껴지면 세차게 빨려 들어가는 클리토리스에 모든 생각은 하얗게 날아가고 나는 죽어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온몸이 벌벌 떨리는 그 감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대체 뭘 하는……!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팬티를 젖히고 음부에 머리를 묻은 채 세게 빨고 있었다.

“응응……. 하악!”

엉덩이를 자꾸 비비고 흔들게 된다. 몸 안으로 훅하고 퍼지는 열기와 저릿저릿하게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흔드는 감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더 세차게 해주었으면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에 심장이 죽을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옆으로 젖혀진 팬티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찍소리를 내며 찢어진다. 훤하게 드러난 아래가 시원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바로 그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따뜻하고 축축한 혀로 집요하게 살을 가르고 돌기를 핥고 빨기를 계속함과 동시에 손가락은 빠르게 들고 나면서 열점을 건드린다.

“아앙, 으윽!”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이를 높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입술도 손가락도 어느 것 하나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독하게 달라붙은 빨판처럼 연한 살을 짓이기고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 곳을 건드리는 순간 펑! 머릿속에서 하얀 선이 터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얀 폭죽이 눈앞에서 무수하게 터지며 온몸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이 파드득 떨리면서 바로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이게 뭐지……. 말로만 듣던 오르가슴이란 게 이런 걸까?

숨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가볍게 공중에 떴다가 내려앉는 것만 같다. 순간적으로 느끼는 해방감과 시원함, 갈증이 채워지는 것 같은 만족감에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는 자신의 손놀림에 따라 그대로 반응하는 이랑을 보며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최음제를 복용할 정도라면 이미 닳고 닳은 여자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는 짓이 영 숙맥 같다. 그러면서도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건 단순히 최음제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당히 민감한 몸을 가진 여자였다. 처음 한국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관심이 갔지만 그저 스치려고 했다. 그러나 손목을 물어뜯었을 때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의지가 그를 잡았다.

형형한 눈빛과 의지를 가진 한국여자. 게다가 아주 잘 빠진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언뜻 봐도 모델 같은 늘씬한 몸에 가늘고 긴 목선은 딱 그가 선호하는 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음제로 몸이 달아오른 여자였다.

이렇게 안아주는 게 여자에게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 될 것이다. 이대로 내보내 봐야 아무 남자라도 안을 수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는 한 밤새 끙끙 앓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술잔에 넣는 최음제라면 그도 익히 알고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직접 사용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성감대가 무척이나 민감하다. 건드리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반응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난다.

그가 이랑을 번쩍 들어 침대로 갔다. 하나 걸치고 있는 스커트를 벗겨버리자 유려한 곡선을 이룬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이랑의 몸은 정말 아름다웠다.

알맞게 부푼 가슴과 가는 허리 그리고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큰 곡선은 정말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골반에 키스했다. 매끄러운 살에서는 향기가 난다.

이런 여자가 왜 최음제까지 복용하고 남자를 찾아간 거지?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절대 싸구려 콜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최음제를 복용한 게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까 그놈이 몰래 술에 탄 건가?

이랑이 그를 바라본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몸을 비비더니 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애무한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제 가슴을 직접 주무르는 걸 보는데 남자가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

이랑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 때문에 자꾸 두 다리를 침대에 비비게 된다. 남자가 눈동자를 빛내며 보다가 가슴을 덥석 물었다. 세게 빨기 시작하자 시원하고 아릿한 통증과 열기에 다시 허리가 휘기 시작했다.

“으음, 이제 제대로 해볼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가 내 귓불을 물었다. 할짝대고 질척이는 소리에 점점 더 흥분하게 된다.

휘익! 세상이 도는 것 같다. 그가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더니 바로 흉포하게 발기한 그의 페니스를 내 아래에 대고 비볐다. 손가락과 다른 뭉툭하면서도 열기를 담은 딱딱한 것이 아래에 느껴지자 부르르 몸이 떨린다. 흠뻑 젖은 아래로 그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악! 악!”

처음이니까 아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이렇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는데……. 정말 아프다.

“뭐야? 이건…….”

생각지 못하게 좁고 빡빡해서 쉽게 밀어 넣을 수가 없다. 게다가 굉장히 아파하는 모양을 보니 뭔가 잘못된 거 같다.

분명히 흠뻑 젖었는데 어째서 이런 거지? 이렇게 좁은 여자도 있나? 아니, 설마……?

“설마, 처음인 건가?”

묵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었다. 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러고 싶은 남자가 없었다. 엄마가 보수적이기도 했고 내 성향이 그래서이기도 했다.

“이랑아, 엄마는 사랑해서 너를 가졌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너는 결혼할 남자와 섹스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혼하지 않고 너를 낳은 것, 때로는 정말 후회하거든. 섹스는 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늘 하던 엄마의 말이 순간 떠올랐다. 친구 중에 아직 경험이 없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스물두 살에 아직 경험이 없다면 스페인 친구들은 기절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처음이라는 말을 해서인지 잠깐 남자가 주춤했다. 하지만 바로 무지막지한 힘으로 허리를 밀었고 그의 페니스는 바로 깊숙이 안으로 들어와 내 몸의 끝에 닿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악!”

한참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남자가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하다. 그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뚝 떨어져 내 얼굴에 떨어졌다.

“비명 다 질렀나? 집중해. 잘 느껴봐. 이제 적응이 좀 됐을 거야.”

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제 아까처럼 아프지는 않다. 다만 아래가 완전히 꽉 차서 뻑뻑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뭔가에 꿰뚫린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말없이 침을 꼴깍 삼키자 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악! 가만있어요! 흡!”

그가 내 입술을 거칠게 겹치며 빨아들이는 덕분에 비명은 하나도 새어나가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은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혀가 얽혀들어 빨리고 가슴은 그의 손에 이지러졌다. 아래는 그의 크기만큼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어져 그를 물고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아물린 그의 페니스와 내 아래가 움직일 때마다 점점 미끈미끈한 물기가 생기며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페니스를 귀두 끝까지 빼서 비비다가 다시 밀고 들어올 때마다 자지러지게 온몸이 전율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틀면서 죽을 듯이 조여 대면,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있는 대로 힘을 주며 그의 것을 물자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끊어질 거 같군. 아주 꽉 물어 주고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감질나는 거라도 없어지라고, 그 최음제인지 뭔지 아주 싹 사라질 때까지 할 거다. 그리고 오늘 일은 내 기억에서 완전히 잊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거지만 미칠 것처럼 좋았다. 근질근질하던 몸의 감각들이 오소소 일어나면서 그와 마찰되는 것이 좋았다. 아까 느낀 오르가슴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빨리 그 절정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나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엉덩이를 흔들며 따라붙었다.

“가만있어! 그렇게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면 안 되는 거야.”

그가 골반을 꽉 쥐며 말했다.

아휴, 쪽팔려!

입술을 꼭 깨물고 이 사이로 거친 숨을 색색 쉬어대자 남자가 세차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악! 하아!”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자극에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고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가 퍽퍽 몸을 쳐댈 때마다 자극이 한 계단씩 비상하고 있었다. 민감한 열점을 정확하게 자극하며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붕붕 몸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높이 쏘아 올릴 준비를 마친 로켓의 몸체처럼 어디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며 몸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래가 홧홧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타오르다가는 새카맣게 재만 남을 거 같은데도 불나방이 불을 찾아 달려들 듯이 나는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 닿을 것 같은 아득한 그 무엇을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안타깝게 찾고 있었다. 그가 깊게 밀려오면 꽉 조이며 비비고 물러나려 할 때는 힘을 풀며 어느덧 그와 호흡을 맞추며 따라가고 있다.

그러다 미칠 것 같은 진동이 아래서부터 부르르 온몸을 타고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완전하게 날아올랐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하얀 세상 속으로 날아올라 펑 터져버렸다. 하얀 폭죽이 끊임없이 터지며 그가 빠르게 몸을 빼서 아랫배에 뜨듯한 액체를 풀어내었다.

“으윽!”

그가 거친 소리를 내며 나를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배에 미끈미끈한 액이 비벼지고 있었으나 나도 그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아! 하아!”

내가 숨을 헐떡거렸다.

온몸이 노곤 했으나 잠시 후에 다시 달아오른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속이냐고!

아무리 발정 난 짐승도 나 같지는 않을 거다. 최음제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나? 벌써 두 번이나 오르가슴을 느꼈다. 물론 남자는 한 번 사정했지만 말이다.

다시 달아오르는 몸에 그의 팔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남자의 것도 다시 부풀며 선다.

나는 약 먹어서 그렇다 치지만 너는 뭐냐? 너도 약 먹은 거야?

진짜 이러는 나도 기가 막히지만 바로 또 발기하는 그의 것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으니까.”

“하악!”

할 말이 없었지만 좋았다. 또 하고 싶다. 이놈의 최음제! 자꾸 몸이 비비고 싶어진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가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에 탄탄한 허벅지를 넣고 비비자 조금 전의 정사로 물컹하게 젖어서 부푼 아래가 또 아릿하고 시원한 자극을 선사한다.

나 처음 시작부터 이래서 어떻게 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밤새 그 품에 안겨 정신없이 흐느끼고 흐트러지다 눈이 감겼다. 나중에는 더 이상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몸이 지쳐서 그의 얼굴을 보다가 정신을 잃은 듯이 눈을 감고 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둠 속이었다. 두껍게 쳐진 암막 커튼 사이로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고 있어서인지 온통 깜깜했다. 살짝 몸을 움직이자 옆에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남자의 팔이 느껴진다. 조심조심 침대에서 한 발을 내렸다.

으아악!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 이럴 수가……. 발을 떼려고 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미친놈들이 준 최음제를 먹고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하룻밤을 자다니. 아니 이게 하룻밤이라고 할 수 있나? 한 열흘 치는 한 번에 다 한 거 같다. 아! 창피해! 저 남자가 아주 색녀를 안았다고 생각할 거다.

둘 다 짐승처럼 엉겨 붙어서 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 남자의 품은 짐승처럼 거칠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남자의 깊은 눈매와 오뚝한 콧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런 말이 나왔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입술을 움직인다.

“당신도 잊어요. 나도 잊을게요. 물론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말이에요. 완전히 실수야, 진짜. 아니, 사고였어요.”

나는 간신히 옷을 입고 그의 화려한 방을 나섰다. 거의 다 찢어지다시피 한 옷들이었지만 대충 가리고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로 내 방으로 왔다. 짐을 싸다 나갔기 때문에 벌써 옷들은 가방 안에 다 들어가 있었다.

싸놓은 짐에서 검은색 진과 아이보리 니트를 꺼내 입고 위에 코트를 걸쳤다. 걸을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래가 다 없어져 버린 것 같기도 하고 몸 전체가 아래가 된 거 같이 아리다.

그대로 짐을 들고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불러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자동차 시트에 앉는데도 절로 신음이 났다. 아래가 엉망인 게 분명하다.

“산타후스타 역으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는 바로 콧소리를 내며 산타후스타 역으로 향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세비야의 거리는 조용하면서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몸은 전체가 다 아릿하고 마음은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덮고 또 덮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혹시라도 이진산이나 그 석상 같은 남자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산타후스타 역에 도착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고 걸어서 마드리드행 표를 샀다. 다행히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가 바로 있어서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뻐근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서 기차에 타고 자리에 앉아서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누구라도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 양아치 같은 이진산이거나 아니면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멋진 남자가 쫓아오지는 않을까 두렵다.

빨리 이 세비야를 떠나 마드리드로 가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해주는 빠에야를 먹으면 힘이 날 거 같다. 아니면 김치찌개라도…….

마드리드로 도착하면 다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살면 된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이 나이에 남자와 잤다는 건 어떻게 보면 늦었는지도 모르지 뭐. 스스로 위안을 하며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눈을 감고 빨리 기차가 떠나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안내 방송과 함께 기차가 출발했다. 드디어 이 세비야를 떠난다. 그 끔찍했던 밤도 이제 안녕이다. 도착하면 혜정이 이거 가만두지 말아야지.

아니,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으려나?

머리를 기대고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격렬한 밤이 달콤하게 느껴졌던 건 역시 약 때문일 거야!

* * *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시환은 흡족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옆으로 팔을 뻗었다. 당연히 있을 거로 생각한 여자가 없다. 그가 한 번 더 팔을 뻗어 침대 시트를 휘저었다. 온기가 없는 천의 감촉이 차다.

그가 인상을 쓰며 일어나 앉았다. 흐트러진 시트와 베개가 전날 밤의 격정을 말해주고 있을 뿐 여자는 없었다.

“하! 소리도 없이 사라져? 아침에 이 진시환을 버리고 간 여자는 네가 처음이군!”

내가 지금 무슨 막장드라마 대사를 읊고 있는 거야. 네가 처음이라니! 사람을 이렇게 후지게 만들다니. 그런데 진짜 처음이다. 여자가 날 버리고 먼저 간 건 말이다.

괘씸한 마음이 바로 불쾌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평원의 중심 도시 세비야. 정열의 도시이며 오랜 문화의 도시이기도 한 세비야의 오랜 세월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주인은 대대로 까스틸로 성의 주인이자 왕족인 까스틸로 가문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스페인 광장, 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건물이라고 하는 세비야 대성당. 그리고 여전히 투우 경기가 열리는 투우장이 있는 이 역사적인 도시는 수백 년간 까스틸로 가문이 통치하였고 현대화가 된 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현 스페인 국왕의 먼 친척이기도 한 까스틸로 가문은 불행하게도 마지막 성주의 딸인 이사벨 레티시아 까스틸로가 죽음으로써 그 명맥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이사벨 까스틸로가 죽자 그의 유일한 혈육이 세비아에 왔다.

라울 로카솔리노 까스틸로 진.

이사벨이 한국인과 결혼하여 낳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처음 이사벨이 한국인과 사랑에 빠졌을 때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 전체가 들썩였다. 그때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 까스틸로 가문의 영애> 라는 제목으로 진일호와 이사벨의 포옹 장면이 안달루시아 지역 신문에 실렸다.

유서 깊은 가문의 이 스캔들에 그녀의 아버지 까스틸로는 펄쩍 뛰었다. 까스틸로 가문의 여자가 동양인과 결혼을 한 유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한국인이 한국의 MK 그룹의 황태자라는 걸 알았을 때는 무작정 반대를 할 수만은 없었다.

올림픽 개최를 몇 년 앞두고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 한국의 MK사는 스페인에도 엄청난 매출을 보였으며, 최첨단 산업으로 스페인과 교역 중인 진일호 사장은 동양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겨우 스물두 살의 이사벨 까스틸로는 당시 유럽인과 견주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는 체격을 가진 진일호의 세련된 매너와 유쾌함에 빠져 아홉 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사랑에 빠졌고 바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둘 사이에서 아들 라울이 태어나고 몇 살 되지 않아서부터 파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은 이사벨에게는 너무나 힘들었고 진일호 사장은 그녀를 배려해 주로 미국과 스페인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MK 그룹을 이끌어갈 사람이었다. 젊어 한때라면 몰라도 언제까지 국외로만 돌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이사벨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다시 스페인 안달루시아 평원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나고 자란 세비야의 까스틸로 성으로 말이다. 당시 네 살의 라울은 어머니 이사벨과 함께 까스틸로 성에서 살았다.

안달루시아 지방 모든 사람의 눈에 그는 성의 어린 왕자였고 혼혈 특유의 아름다운 얼굴은 모두의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그리고 깊은 바이올렛을 떠올리는 검은 눈동자는 까스틸로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눈동자였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라울은 그곳에서 열 살이 될 때까지 자랐다. 그러나 이사벨과 진일호가 이혼하면서 라울은 태어나고 자란 스페인을 떠나 아버지의 나라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 후로 어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볼 수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혹독한 후계자 수업이 라울이 버텨내야 하는 환경이었다.

물론 진일호는 이사벨과 이혼한 후에 바로 재혼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수없이 많은 여성편력을 갖게 되고 라울 이외에는 다른 자녀를 갖지 못했다.

스페인의 이사벨을 잊지 못해서라는 말도 있었고,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성병으로 불구가 됐다는 소문도 많았다. 그러나 라울은 자라면서 그런 모든 소문을 냉소로 바라볼 만큼 냉혈하고 차가웠다.

아버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게 차갑고 똑똑한 라울. 한국이름 진시환의 청소년기는 그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욱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라울이 하버드의 입학 허가서를 받은 19살 봄에 그의 아버지 진일호는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일호의 형제들은 아직 어린 라울이 혼혈이라는 점을 들어 그의 모든 상속권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그런 혼란 속에서 라울의 든든한 편이 되어준 사람은 진건호 회장이었다.

첫 결혼에는 실패했으나 진일호는 진건호 회장의 자랑스러운 장남이었고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런 진일호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그렇다고 그 사랑이 퇴색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려서 친엄마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진시환이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 같은 손자였다. 유난히 출중한 외모에 명석한 머리,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손자 시환은 그의 기대주였고 희망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공부 마치고 와! 이 할애비가 네 자리는 든든히 지키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아직 어린 진시환의 모든 지분을 대리인으로 지켜내며 진건호 회장은 시환이 빨리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회사를 맡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5년 후 시환은 그야말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면서 보스턴 지사와 뉴욕지사의 임원들을 만나고 듣고 배웠다.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고 밤에도 잠도 거의 자지 않고 공부하면서도 주말이나 방학이면 어김없이 전 세계 MK 그룹의 지사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회사 돌아가는 일들을 분석했다.

아들과 손자들을 통틀어 이런 독종은 본 적이 없었다. 건장한 체격과 엄청난 체력. 명석한 두뇌와 냉정한 판단력. 무엇하나 진건호 회장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없었다. 단지 너무 차갑다는 것과 여자들이 많다는 것 빼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자와 제대로 사귀거나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의 시환을 본 적이 없다. 손자에 대한 보고 어디에도 데이트했다거나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여자를 바꿔가며 부르고 취한다는 것 말고는.

라울은 세상이 우스웠다. 다들 머리가 나쁘거나 약해빠진 사람들로 가득 차고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강한 상대에게는 굽실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유일한 재미는 기업을 키워가는 거였다. 그건 일종의 돈이 걸린 게임과도 같았다.

강한 그의 승부욕은 한번 계획한 사업은 끝까지 밀어붙여 목적을 달성하고 숫자상으로 늘어난 돈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들었을 때 만족한다. 이런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식히는 건 여자였다.

그저 몸을 가진 여자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풀어주고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면 사라지는 수많은 여자들은 언제고 어디서고 널리고 널렸다. 그런 여자들이 달라붙지 않게 관리하는 건 세베로가 했다.

세베로는 라울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까스틸로 성의 집사였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된 후로 어머니 이사벨은 세베로를 보스턴으로 보내 라울을 보살피도록 했다. 세베로는 라울의 모든 것을 보살피고 정리했고 여자들에 관한 문제도 그가 하는 일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가끔 세베로는 진심 어린 마음에서 라울에게 말했다.

“주인님, 제대로 된 사랑을 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계속 여자를 바꾸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고마워, 세베로. 하지만 사랑은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난 그냥 여자면 돼! 결혼은 때가 되면 필요한 집안의 여자랑 하게 되겠지.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즈니스잖아?”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라울의 대답에 세베로는 걱정했지만, 보스턴에서 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을 하는 라울은 정말이지 감탄할 만큼 모든 면에서 일을 잘했다.

그런 시환이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답고 자상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뒤 흔들어 놓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세비야의 가족묘지에 화려한 이사벨의 관이 묻혔다. 검은 상복에 검은 우산을 쓴 사람들이 조문하고 장례식이 끝난 후로는 매일 수 없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사인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거대한 안달루시아의 영토와 까스틸로 성, 그리고 사업체와 신문사, 하다못해 어머니가 후원하던 보육원과 양로원, 그리고 사회복지시설에 매달 지급되던 돈까지 다시 라울의 이름으로 사인을 해야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는 천국에서 만난다면 서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덧없는 인생을 느끼고 홀로 남은 외로움을 느꼈다. 계속되는 고된 일정에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슬프고 화가 났다. 이렇게 혼자 죽을 때까지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종이에 사인이나 하면서 말이다.

그가 이랑을 만나게 된 건 바로 이사벨 까스틸로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고 정리하기 위해서 세비야에 온 때였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지막 날은 성에 묵고 싶지 않았다. 까스틸로 성의 모든 무거움에서 벗어나 화려한 호텔에서 묵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한 그날 밤이었다.

다른 남자가 돈까지 지불한 여자를 더구나 최음제까지 복용한 걸 알면서도 침대로 끌어들인 건 평소 그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여자였다는 것에 관심이 갔고 팔목을 물어뜯길 때 흥분했다.

팔목을 파고드는 여자의 이빨이 주는 통증에 그녀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목선과 검은 생머리가 엄마 이사벨을 닮았다. 마치 팔목에 각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런 여자에게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버림을 받을 줄은 몰랐다.

감히! 내가 버리기 전에 나를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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