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스캔들 1
1. 한국 재벌 3세의 스페인 왕족
“마셔!”
눈앞에 노란빛 액체가 감도는 술잔을 앞으로 내미는 이 남자가 낮에 내내 교양 있는 척 하던 그 남자가 맞아?
내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술잔을 들고 와서 마시라고 하는 손님 앞에서 나는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너무 기막혀서 눈을 돌렸는데…….
맙소사! 이것들이 다 뭐야?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뒤엉켜 있다. 여자들은 입었다고 하기에도 뭐하게 심하게 헐벗은 상태였다. 금발의 한 여자는 튜브톱 티셔츠가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 허리에 뭉쳐있고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 채 한 남자가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헛, 저런!’
눈이 점점 커졌다. 가슴이 화끈하고 충격 받은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다. 이런 적나라한 포르노를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남자의 손이 가슴을 주무를 때마다 여자의 입이 벌어지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에 팬티가 걸려있고 남자의 손은 그대로 여자의 치마 사이로 파고 들어가 있었는데 치마가 하도 짧아서 남자의 손과 여자의 은밀한 곳까지 다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커플은 더 심했다.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린 채 여자가 남자의 페니스를 입에 물고 있었다. 짧은 티셔츠에 T팬티 하나 걸친 여자는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난 채 쪽쪽 소리를 내며 남자의 것을 물고 오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럴을 받는 남자의 눈은 옆에 있는 여자의 치마 사이로 향하고 있다.
옆에 있는 남자의 손이 여자의 치마 사이로 들어가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치모를 가르고 들어간 손가락을 돌려가며 찌르고 만지면서 다른 여자에게 성기를 물린 채 남자가 음탕한 눈으로 보며 웃고 있다.
그들은 옆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더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서 포르노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이 음란한 광경에 이랑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시 독한 술기운이 느껴지는 노란 액체가 든 잔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다가선다.
“자, 얼른 마시라고!”
“…….”
뭐,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이 나를 부르고 지랄들이야? 피곤해 죽겠는데…….
그러나 말은 다르게 나간다.
“손님, 가이드 일정은 다 끝난 걸로 아는데요.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마리화나를 피우고 그룹 섹스하려면 지들끼리 할 것이지 왜 나를 부른 거야?
분명 오늘 저녁에 과달키비르 강의 싼 뗄모(San Telmo) 다리를 지나서 황금의 탑을 보는 걸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안달루시아의 중세 도시인 세비야를 안내해 주면 된다고 해서 왔고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펼쳐지는 호텔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술잔을 보고 다시 남자를 보는 내 시선에 힘이 들어갔다. 레이저를 뿜을 수만 있다면 이 두 눈에서 그대로 레이저를 쏘아서 찌직 태워버리고 싶다.
“어쭈! 지금 눈에 힘주는 거야?”
남자가 대체 왜 나를 이리로 부른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오늘로 모든 가이드 일정이 끝났고, 내일은 아침 일찍 게스트들이 비행장으로 떠나기 때문에 아침 일찍 나도 떠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이미 가이드 비용까지 다 받았다.
그런데 방에서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주선해 준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각이었는데 1701호로 가라는 말이 이상했다.
“네? 왜요? 일정은 다 끝난 거로 아는데요?”
“그래? 하지만 너는 마르티나 대신 아닌가?”
마르티나.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는 혜정의 스페인 이름이었다.
갑자기 남자친구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이 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자기대신 가 달라고 조르고 졸랐다. 한 번 펑크 내면 다음에는 다시는 이 일을 못한다나…….
학수고대하고 기다리던 이 럭셔리 가이드 일정을 나한테 넘기면서 자기가 더 아깝다고 발을 동동 굴렀던 혜정이 생각난다.
“그거 진짜 내가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알아? 가서 잘 해야 돼. 너 나한테 엄청 고마워하게 될 거야. 진짜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가 줄줄이 있는 가이드를 너한테 넘기는 거니까. 너 아르바이트 갔다 와서 나한테 한턱내야 해.”
연신 당부를 하더니 혜정 말대로 정말 호화로운 여행이었다. 가이드는 손님들이 어디에 묵느냐에 따라서 묵는 곳이 달라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이 팀들이 재벌 3세쯤 된다고 하더니만 정말 최고급 호텔에서만 묵었고, 덕분에 식사며 호텔이며 리무진까지 생각지도 못한 호화판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늦은 밤 자신들의 방으로 오라고 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르티나가 약속한 거라고요?”
“그래. 마르티나 대신 온 거잖아. 전부 다 그 일정 그대로 소화할 거라고 마르티나한테 연락 왔는데……. 그러니까 어서 가봐.”
혜정이 대신 온 이상 혜정이가 하겠다고 약속한 건 다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들어온 방이었다.
그런데 들어온 이 방의 상황은 너무나 야릇했다. 코를 찌르는 마리화나 냄새.
그 퀴퀴하면서도 풀을 태우는 것 같은 역한 냄새에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대학에 있는 애들 중에도 피우는 애들이 있어서 이 냄새를 기억한다. 정말 역한 냄새였다.
이 사람들 마리화나를 피운다!
경계하라는 신호로 머리끝이 쭈뼛하게 선다. 그러나 그것보다 지금 더 놀라고 있는 건 그들의 모습이다.
남자 셋에 여자 둘. 두 여자는 나른하게 취해서 이미 상반신은 다 벗어버린 것 같았다. 벌거벗다시피 해서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옆에 있는 남자들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들의 눈빛도 총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흐릿한 눈. 아무래도 모두 다 함께 마리화나를 피운 것 같다.
이 짓거리를 하려고 돈을 처들여서 여기까지 왔냐? 이것들아!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방안의 광경에 질려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무서웠다.
눈썹을 찡긋하면서 술잔을 내미는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 흐트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독하게 계산적이면서도 야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술을 마시나 마시지 않나 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너나 실컷 마셔!
순간 술잔을 빼앗아 휙 얼굴에 부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는 생각과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야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됐습니다. 저는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뭘 그렇게 빡빡하게 그래? 수고했다고. 오늘까지 아주 성실하고 친절한 가이드였어.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건데? 그만큼 정중하게 대해줬으면 이제는 좀 넘어오는 맛이 있어야지, 안 그래?”
그가 술잔을 가져다 내 입술에 바짝 갖다 대었다.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 끝에 살짝 술이 묻자 독한 향이 바로 코끝으로 올라온다.
“이거 한 잔만 마시고 가. 수고했다고 인사하는 거잖아.”
마시지 않으면 당장 어떻게라도 할 거 같은 그 눈빛. 분명히 이 사람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매너 있고 친절했다.
하지만 지금의 말투는 낮에 보였던 정중함을 모두 다 태워버리고도 남게 집요하면서도 양아치처럼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러쿵저러쿵 길게 말하는 것도 싫었다.
혜정이 그게 이런 일정을 만들어놓고 이걸 나한테 넘겼다고? 미쳤어. 정말.
그러나 지금은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며 그에게 물었다.
“이것만 마시면 가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술 한 잔 먹이고 싶어서 불렀다고. 마르티난가 뭔가 하는 게 안 와서, 봐! 지금 난 파트너가 없잖아. 어찌 됐든 네가 대신이라며, 네가 대신 다 한다고 들었는데 술 한 잔도 안 마시려고? 나는 술 한 잔 같이 하는 거에 꽤 많은 돈을 지불했는데. 그러지 말고, 술 한 잔 마시고 같이 놀자.”
그랬다. 여행 가이드의 비용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많은 돈을 받았다. 그게 오늘 혜정이 그 기지배가 함께 술 마시고 놀아주기로 한 대가인 게 분명하다.
“같이 놀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뭐야? 못 놀겠다. 이 말이지?”
남자의 눈빛이 잔인하게 변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눈을 옆으로 돌리자 한 여자의 다리 사이로 두 남자의 손이 파고들고 있었다.
여자의 입에서는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이 터지고 있었고 이런 음란한 광경을 보며 서있느니 얼른 마시고 이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럼 술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같이 놀아드리지 못한 비용은 환불을 청구하시면 드릴게요.”
그러자 피식 기분 나쁜 웃음이 새어 나온다.
“환불? 그런 게 어딨어? 한번 거래가 됐으면 그걸로 끝이지. 그래, 어디 술 한 잔 먹는 거나 보고 말하자.”
술 한 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몸에 소름이 돋는 거 같다. 남자의 눈빛이 점점 탁해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눈빛이 이성을 잃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문 쪽 손잡이를 돌아보았다. 여차하면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말이다.
심장이 벌컥거리게 뛰고 있었고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경계의 벨이 울리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경보였다. 분명 나는 위험한 상황에 혼자 서 있다. 남자들 셋이 덤빈다면 꼼짝 하지 못할 거다.
눈앞의 이 남자가 달려들면 어떻게 할까? 여차하면 이빨로 깨물고 발로 남자의 거기를 힘껏 차고 그리고……. 온갖 호신술 동작을 생각을 하며 침을 꼴깍 삼키는데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손을 뻗는다.
“자, 얼른.”
술잔을 입술에 부딪치며 조금 더 강압적인 눈빛으로 강요하는 남자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마실까? 말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빨리 한 잔만 마시고 이 방에서 나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들었냐? 씨발! 한 잔만 마시고 가겠단다. 지한테 처들인 돈이 얼만데. 하여튼 꼭 괜찮은 것들은 더 비싸게 굴어.”
차마 듣지 못할 욕설이 귀에 스치자 일 초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밑에서부터 확 올라오는 알코올 기운에 나도 모르게 기침을 두어 번 했다.
화악! 진짜 독하다. 컥!
옆에 있는 술병을 보니 발베니 40년산.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술이다. 이런 비싼 술을 이런 거지발싸개만 못한 놈들이 먹는다는 걸 알면 술을 만든 사람이 벌떡 일어날 거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더 반듯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만 가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야비한 눈길이 조금 더 위험하게 내 시선을 잡고 노려보며 놓지 않는다.
“뭐, 이대로 간다고? 지금 장난해? 그리고 네가 제대로 갈 수는 있을 거 같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 듣고 싶지 않아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탁하고 손목을 잡은 손이 나를 휙 끌어당겼다. 휘청하며 그 품에 풀썩 안기는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알코올 기운과 함께 뭔가 몸이 이상했다.
온몸이 근질근질하며 근육들이 마구 움직여대는 것 같은 이 이상한 느낌. 분명 뭔가 달랐다.
몸이 뜨거워지면서 온몸에 개미떼라도 지나가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살아나서 뛰어대고 있었다. 뭐라도 갖고 몸을 비비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느끼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썼다.
“놓으세요!”
“놓긴 뭘 놔. 미리 다 약속하고 온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모르는 척하고 그래? 아하, 좀 더 받아내려는 수작인가? 알았어. 더 줄게. 더 주면 될 거 아니야!”
질척한 남자의 손이 닿기만 해도 강간이라도 당할 것처럼 무섭게 느껴지고 있었다. 실제로 남자의 손은 한 손으로는 팔목을 잡고 다른 손은 어느새 내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가이드만 하는 거로 알고 왔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얼굴이 따라와 얼굴 가까이 닫는다.
“이것도 하기로 한 일의 일종이야. 네가 할 일.”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콕콕 치더니 그가 몸을 빙글 돌렸다. 손을 잡고 한 바퀴를 돌고 나자 속에서부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인형처럼 다루는 이 기분. 내가 하찮게 여겨지는 이 쓸모없는 것 같은 기분은 난생처음이다.
엄마하고 마드리드에서 민박집을 하며 지낸 것도 십 년이 넘었다. 그래서 학교 수업만 지장이 없으면 아르바이트로 서울에서 오는 여행객의 가이드를 했다.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간혹 사람을 낮춰 보며 이것저것 시켜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진상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이거 놓으라고요!”
순간 반동을 이용해서 손목을 빼냈다. 갑자기 내 손을 놓치자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뭐? 놓으세요? 이게, 진짜 죽고 싶나. 이리 안 와?”
“전 이만 가겠습니다.”
“이리 오라고!”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치자 옆에 있는 남자들이 낄낄거리고 웃으며 여자들을 희롱하는 게 눈에 보였다.
혜정이 이 기지배! 도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거야? 어떤 일을 하겠다고 했던 거야?
혜정이가 평소에 남자들과 잘 어울리는 건 알고 있었다. 남자들도 수시로 바뀌었고 외박도 잦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놀겠다고…….
이런 일을 벌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랬으면 나한테 말이라도 했어야 되는데, 그럼 혜정이가 말한 고마워해야 할 거란 말이 결국 이런 거였나?
“정이랑! 디아나 정! 너는 다른 건 다 좋은데 결벽증이 문제야. 제대로 남자를 알게 되면 그때는 날 이해할 거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게 많은데 넌 맨 날 그러고 사는 거야? 학교랑 집만 오가고, 아르바이트나 하고! 야, 인생이 그게 다가 아니야.”
자기 혼자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하던 말이 귓가에 빠른 화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농밀하게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키스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빨리 나가려고 했으나 남자는 손목을 다시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내 몸은 점점 달아오르고 발가락마저 힘이 들어가게 근질근질하다. 이건 뭐지?
“이리 오라니까!”
확 잡아끄는 남자의 손길에 내 셔츠의 앞 단추가 튕겨져 나갔다.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기 때문이다. 역시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니 반사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진다.
힘껏 깨물자 그가 놀라서 순간 손목을 놓았다. 순간 나는 무작정 문을 열고 밖으로 뛰었다.
뒤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양아치 같은 놈이 나를 따라잡겠다고 문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죽어도 도망가야 한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죽기 살기로 뛰었다. 그러다 뭔가에 탁하고 부딪쳤다.
“앗!”
놀라서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니 거대한 석상 같은 남자가 반듯하게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뛰다가 부딪쳤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부딪친 내가 오히려 휘청했다.
유난히 검은 머리 때문에 피부가 더 하얗게 보이고 있었으나 얼굴은 얼음으로 만든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쫓아오는 남자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남자의 팔을 잡고 그 뒤로 숨었다.
순간적으로 놀라기도 했고 갑자기 뛰었기 때문에 심장이 드럼을 치는 것처럼 빠르게 울려대고 있었다. 남자가 귀찮아한다는 걸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뛰어봤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잡힐 게 뻔하다.
양아치 같은 그놈이 다가오더니 남자의 뒤로 숨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는다.
“야, 너! 이리 안 와?”
맞아. 저 나쁜 놈이 한주 산업의 이진산이라고 했다. 낮에 여행할 때는 분명 반듯하고 매너 있는 남자였다. 간혹 느끼한 눈길로 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양아치 본색을 드러내다니 이건 뭐라 말할 수도 없는 쓰레기였다.
진산이 아니라 진상이다. 진상도 저런 진상이 없다.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 귀신처럼 다가오다니, 게다가 아까보다 점점 더 눈빛도 흐려지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리화나를 피운 게 분명했다.
게다가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지금쯤 저 머릿속은 제정신이 아닐게 뻔하다. 나는 그가 다가오자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매달리듯 뒤로 숨었다. 그러자 구김 하나 없는 슈트를 쫙 빼입은 그 장신의 남자가 인상을 쓰며 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헉! 소름 끼치게 차가운 눈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얼굴이 섬뜩해서 나도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말 한마디 없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양복을 입은 전쟁의 신, 마르스 같다.
“이봐, 비키지?”
영어로 하는 이진산의 말에 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버티고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남자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내 키도 170cm는 되는데 이 남자 뒤에 서니 바위 뒤에 숨은 것처럼 완전히 가려진다.
‘영어를 모르나? 스페인 사람이면 모를 수도 있지. 그래서 이렇게 꿈쩍도 안 하는 건가?’
슬쩍 보이는 얼굴이 동양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혼혈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그보다는 당장 저 양아치로부터 숨고 싶은 생각이 먼저였다.
뒤에서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스페인어로 소리쳤다. 그러나 장신의 남자는 내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이진산이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올 때도 꿈쩍하지 않고 있다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지?”
단 한마디였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이진산도 잠깐 주춤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정신 나간 양아치는 흐린 눈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며 소리쳤다.
“비켜. 오늘 내가 데리고 놀 여자야. 그러니까 너는 상관하지 말고 꺼지라고!”
이제 혀까지 꼬이는 거 같지만 유창한 영어로 떠들어대는 이진산의 말에 석상 같은 그 남자가 날 쳐다본다.
‘너 그런 여자야?’ 하는 듯한 남자의 눈빛.
그 눈빛에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아래로 내려다보며 목을 죄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냥 가이드만 하고 일정이 끝나는 거예요. 난 저 사람하고……. 아무튼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묻지도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나는 뭐라고 해명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영어와 스페인어로 말하다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자 뜯어진 셔츠 사이로 속살이 보인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런 차림에 달려 나오느라 땀에 젖은 얼굴까지, 영락없이 술에 취한 콜걸로 보일 게 분명하다.
도대체 뭐라고 말하지? 나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그가 긴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바짝 당겨서 자기 품 안에 안더니 다가오는 이진산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여자 별론데, 돈 지불했으면 데리고 가!”
뭐라고?
기가 막혔다. 뒤에 있던 나를 앞으로 끌어내어 이진산에게 밀어주며 데리고 가라고 하는 거다.
이진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인다. 그의 웃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끝이 쭈뼛하게 올라서는 것 같은 감각에 이가 갈리고, 할 수만 있으면 이 두 남자를 다 물어뜯고 싶다.
하지만 무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소리 지르는 것뿐이다. 그것도 겁에 잔뜩 질린 떨리는 목소리로…….
“그 돈, 돌려주면 될 거 아니야? 돌려준다고!”
나는 마구 소리쳤다. 완전 미친놈한테 잘못 걸린 거다. 아니 미친놈들!
도와달라고 했더니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짐승 같은 놈한테 나를 내주는 놈이 정상일 리가 없다.
저렇게 멋진 허우대를 가지고 연약한 여자를 도와주지 않다니!
순간 열이 뻗쳤다. 아니 사람이 도와달라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잡아서 냉큼 바치듯이 데리고 가라니! 나쁜 놈!
순간 나는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꽉 물어버렸다. 개처럼. 물고 놓지 않았다.
끌려갈 판인데 뭘 못해?
“아얏!”
남자가 순간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불독처럼 물고 절대 놓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세게 팔을 뿌리치자 어쩔 수 없이 놓쳐 버렸다. 나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놈! 넌 양심도 없어? 여자가 도와달라는 소리 안 들려?
급하니까 한국말이 나온다. 스페인에서 십여 년을 살았는데도 급하면 한국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엄마나 민박집 손님들과 늘 한국어를 해서일까? 모국어라는 건 이래서 무섭다.
나는 있는 대로 살기를 뿜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소리를 쳐서인지 아니면 물어뜯어서인지 남자의 얼굴이 순간 움직였다. 눈썹이 모이며 뭔가 동요하는 빛이었다.
그의 눈이 정면으로 나의 눈을 향했다. 나도 피하지 않고 그의 눈길을 받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다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저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싸늘하면서도 사람을 샅샅이 꿰뚫어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리고 그 눈길 끝이 내 심장을 찌르며 왠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번엔 나를 도발하는 건가?”
뭐라는 거야? 다들 꺼져!
그런데 아까부터 온몸이 근질근질하더니 그 느낌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남자를 노려보는데 왜 이렇게 내 심장이 뛰는 거지?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느 틈에 그의 팔을 잡은 손이 나도 모르게 그를 더듬듯이 만지고 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그 느낌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덕분에 남자를 더 꽉 잡는 꼴이 되었다.
남자는 말없이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나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본다. 그 눈길이 하도 강렬하고 집요해서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한국말로 소리치고 난 뒤 분명 그 석상 같은 남자의 얼굴이 잠깐 움직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찡그렸다. 그가 잠깐 고개를 뒤로 돌리고 까딱하자 이진산 앞으로 가드 두 명이 와서 가로막았다.
“니들은 또 뭐야? 비켜! 비키라고 이 새끼들아.”
큰소리를 쳤으나 가드들은 이진산 앞을 딱 막아섰다. 양아치 이진산이 가드들에 막혀서 내가 있는 곳까지는 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마음이 바뀐 거지?
분명 귀찮다는 듯이 이진산에게 나를 보내려던 남자가 지금은 그를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순간 판단했다.
이 남자를 꽉 잡고 있어야 양아치 이진산에게 벗어날 수 있다!
“제발, 저 좀 숨겨주세요. 아까 깨문 건 미안하지만 이대로 가면 저 사람한테 끌려갈 거예요.”
이 호텔 안에서 어디로 간들 이진산이 마음먹으면 날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여행사로선 최고의 VIP인 그를 신고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나나 혜정이나 좋을 게 없다.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남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러자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눈길을 내렸다.
그가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에 힘을 주자 어깨에 그 힘이 전해진다. 다시 보내려는 걸까? 긴장이 된다.
이진산을 보며 그가 말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말이지. 이 여자는 내가 데리고 간다.”
“뭐야!”
이진산이 소리를 질렀으나 어느 틈에 그 석상 같은 남자는 내 어깨를 감싸듯이 손을 얹은 채 걷기 시작했다. 끌려가듯이 따라가면서도 일단 이진산에게서 멀어진다는 게 안심이었다.
역시, 다 살게 마련이야.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 바로 마드리드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온몸이 근질거리고 열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내 어깨에 두른 그의 팔에 볼을 비비며 몸을 꼬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작게 말했다.
“그렇게 흥분이 돼?”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지껄이는 남자를 무시하면서 그의 손에 끌려서 걷는데, 그가 몇 걸음 떨어진 방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는 계속 이진산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야! 어딜 가! 돈을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너, 이리로 안 와? 썅!”
거칠게 욕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가 방문을 닫자 안은 조용한 적막이 감돈다. 방음처리가 잘된 방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방안을 둘러본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여기 17층이 VIP들만 묵는 로열층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아까 이진산의 방하고도 비교되지 않는 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금장의 가구들이 늘어져 있었고 아라베스크 문양이 수놓아진 것 같은 실크 벽지에서는 광택이 나고 있었다. 커튼도 금사로 섞어 짠 것이었고 주름진 커튼을 붙잡고 있는 커튼 술도 금사였다. 자줏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거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런 방이 있었다니.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뭘 보는 거지? 벗어!”
한국말이었다. 그런데 뭘 벗어? 대체 무슨 말이야?
“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만 있다가 나갈게요.”
그가 한국말로 하니 나도 그대로 한국말로 대답했다. 이 사람 한국말도 잘하네!
그런데 내가 말하자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한발 다가온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거리고 어디에라도 비비고 싶은데 그가 다가오자 그대로 덮치고 싶다. 물론 덮쳐봐야 매미가 고목을 덮치는 꼴이겠지만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입에 침이 고이고 꼴깍꼴깍 게걸스럽게 목을 움직이며 침을 삼키고 있다. 숨도 가빠지는 게 정말 이러다가 뭔 일 나는 건 아닌지……. 다리가 저절로 꼬이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데 이런 이상한 생각과 욕구가 드는 건 무슨 일인건지 정말 모르겠다.
“뭐? 나간다고?”
남자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훑어보는 그 눈길이 어찌나 집요하고 강렬한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살아나 그의 눈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두려움과 긴장감이 돌면서 가슴이 팽팽하게 부푸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몸이 이상했다. 저 아래가 움찔거리며 온몸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그럼, 여기는 왜 따라 들어온 거지?”
이제 정확한 스페인어였다. 그럼 나도 스페인어로…….
“그러니까 아까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밖에 있는 저 남자가 조용해지면 바로 나갈게요.”
“내가 왜 널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냐고? 내가 도와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날 이 방에 데리고 돌아온 게 아니야?
“……. 왜 저를 구해준 거죠?”
“구해준 게 아니야. 아까 말했듯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데리고 들어온 거야.”
“…….”
엄마는 내 긴 목에 비해 어깨가 너무 빈약하다고 했다. 그나마 쭉 뻗은 긴 다리와 가는 허리, 풍만한 골반 라인은 마음에 든다면서 밥을 잘 먹어서 조금 더 통통해지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
매처럼 날카로운 눈길로 내 몸을 그가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 눈길 때문인지 아까 먹은 술 때문인지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온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고 조금 전까지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더니 이제는 입술이 자꾸 마르는 거 같다.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다리가 비비 꼬이는 거 같은 이 야릇한 느낌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다가오며 내 턱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술 때문인지 내가 느끼기에도 야릇하게 눈이 떠진다. 그가 내 눈을 쏘아본다.
왜 이렇게 보는 거지? 내가 뭐가 이상하냐?
그러나 그가 그렇게 쳐다보는 건 당연한 거였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움, 입에서 자꾸 작은 신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끙, 소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는데 그가 단 한마디를 했다.
“아프로디씨아꼬!”
아프로디씨아꼬라면……. 응? 뭐야, 최음제라고? 내가 아까 마신 술이 그럼 최음제를 탄 거? 그래서 이렇게 온몸이 달아오르나?
아무 것으로라도 몸을 마구 비비고 싶은 이 느낌. 온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나면서 아래가 움찔거리고 저 남자를 마구 만지고 싶은 이 느낌이 최음제 때문이라고?
그가 턱을 잡고 있는 손으로 내 볼을 쓸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손을 끌어다 내 가슴을 비비고 말았다. 팽팽해진 가슴에 그의 손이 닿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온몸이 더욱 달아오르며 한숨이 터졌다.
‘이런,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제대로 걸렸군.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왔단 말이지? 최음제까지 마시고 남자를 찾아와 놓고 거절한 건 돈이 적어서인가?”
응? 아닌데, 그게 아닌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것조차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관능적으로 꼬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저 사람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안 봐도 훤하다.
“아니에요. 내, 내가 마신 게 아니에요……. 아까 그 남자가 먹인 거예요.”
허둥거리며 말을 하면서도 정작 남자의 손은 여전히 내 가슴에 있었다. 내가 그 손을 잡고 계속 가슴을 비비고 있으니 말이다.
맙소사!
이건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와 밤을 보낸다면 좋아하는 사람하고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남자 경험이 없지만 이건 아니었다.
‘혜정이 기지배!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나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런 말과 달리 입에서는 자꾸 신음이 나온다.
끙끙 소리를 내며 아직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 그도 내가 하는 짓이 기가 막혔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다. 아니면 이걸 즐기는 걸까?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다.
잘생긴 남자다. 아니 멋있다고 해야 하나? 스페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동양적인 분위기지만 그렇다고 한국, 중국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반듯한 이마와 길게 뻗은 코와 깊고 뜨거운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든 게 몽환적으로 보인다. 이 남자가 이렇게 멋져 보이는 것도 다 약기운일 거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게 너무도 뜨겁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고이고 저 남자를 덮치고 싶다는 야릇한 생각까지 든다.
남자와 첫날을 보내게 된다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좋겠지만, 어차피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멋진 남자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
“하아, 몸이 너무 뜨거워요.”
내 말에 남자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가겠다더니?”
나는 여전히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가슴을 비볐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지금은 이 남자와 밤을 보내고 싶다. 겁나기도 하지만 알 수 없이 뜨거운 몸 때문에 자꾸 그에게 몸을 비비게 된다.
어차피 날 콜걸로 알고 있는 남자였다. 오늘 밤 지나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남자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 대담하고 당돌해진다.
“그래서요? 정말 나갈까요?”
내가 당돌하게 말했더니 남자가 짙은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나를 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내 허리를 휘어 감고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말했다.
“이게 내 대답이야.”
바로 눈앞에서 빛나는 신비한 눈동자. 그 멋진 외모에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가 재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재규어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바로 다가와 겹쳤다.
“흐흡!”
몸이 겹쳐지자 단단한 그의 허벅지가 느껴지면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더 몸을 밀착시키게 된다. 머리로는 거부하려고 하는데 몸은 맞닿은 감촉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를 꽉 잡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힘차고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어느새 내 허리를 받치고 있는 그의 팔에는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득하고 아찔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이건 약 기운 때문이야. 내가 이러는 게 아니라고.’
머릿속에 최음제 때문이라는 생각이 뱅뱅 돌고 있었으나 몸은 그에게 더 달라붙으며 뜨거운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잘생겨서 그런 걸까? 새카만 머리카락에 짙은 눈썹 그리고 남자의 입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붉은색 때문인지 거부감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내가 미친 게 분명해. 이건 분명히 약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하아, 몸이 너무 뜨거워.
아랫배에서부터 뭉근하게 퍼지는 열기며 팽팽하게 부푼 가슴에 닿은 그의 몸에서 생전 처음 느끼는 야릇한 감각까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까부터 바싹 마르던 입술은 그의 입술이 닿자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키스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열여섯 살 때 이후로 키스한 경험이 몇 번인가 있었지만,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남자들의 입에서 나는 냄새도, 느낌도 좋았던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다르다!
팽팽하고 탄력 있으면서 뜨겁게 휘젓고 들어온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이렇게 야한 여자였어?
그런데 몸이 달아올라 죽을 것만 같다. 입이 마르고 당장 물기가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빨아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정신없이 남자의 혀를 빨았다. 갈증이 눈앞에서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침없는 농밀한 키스가 이어지면서 타액이 흘러내렸지만 그런 것을 의식할 틈도 없이 나는 그에게 매달렸다.
긴 키스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재킷 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를 들더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 가져가도 좋아.”
나를 콜걸로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순간 기분이 상한다. 하지만 이내 다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 뜨겁고 앞에 있는 남자가 어서 나를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는.
돈다발을 집어던지며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보다는 그가 날 안아주었으면 하는 갈증이 훨씬 더 먼저 올라왔다.
머리를 흔들며 옆에 있는 테이블을 잡고 다리를 꼬았다. 겹쳐지는 허벅지의 열기에 혼자 달아오르는 내 모습을 보며 남자가 빠르게 넥타이를 풀어 집어던진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다가왔다.
나를 번쩍 들어서 콘솔 위에 앉히더니 흐트러진 셔츠를 확 잡아 뜯었다. 속절없이 벌어진 셔츠 사이로 하얀 브래지어 속의 내 가슴이 드러난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이 더 부풀었다. 그의 눈길이 가슴으로 떨어지자 가슴이 나 좀 만져달라는 듯이 그를 향해 솟아오르는 것 같다.
그가 그대로 가슴에 입술을 내리며 팔을 돌려 브래지어를 풀었다. 가슴에 시원한 느낌이 느껴지면서 젖꼭지가 단단하게 뭉쳐져 솟구친다. 그저 공기 중에 닿는 짜릿한 감각만으로도 내 입에서는 신음이 터졌다.
“하아, 하아!”
그러나 바로 다음에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입술이 너무나 세차게 젖꼭지를 빨았다. 땡땡하게 뭉쳐져 부푼 가슴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아릿한 통증과 함께 짜릿한 쾌감을 퍼부었다.
아래로 뭔가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다. 젖어든 팬티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남자의 큰 손에 내 가슴이 들어가며 일그러졌다. 한쪽 가슴을 입으로 빨면서 다른 한쪽 가슴을 손에 쥐고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고 비틀자 입에 빨려 들어간 가슴 못지않은 감각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가슴만으로 이렇게 흥분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자의 가슴이 이렇게 예민한 건 줄 정말 몰랐다.
내 몸이었지만 알지 못했던 걸 지금 이 남자가 알려주고 있는 거였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런 자세가 얼마나 민망한지 알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급한 뜨거움에 반응하고 있었다.
타액이 묻어서 반들거리는 가슴이 번갈아 그의 입술에 빨려 들어가고 세차게 빨려서 빨개진 가슴이 공기 중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게 시원했다. 그 아찔한 감각에 떨면서도 마음은 거부하고 싶었다.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모순된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휘휘 돌고 있다.
그가 젖꼭지를 질끈 씹었다. 더 거센 자극이 신경 줄을 팽팽하게 잡아 뜯으며 감당할 수 없는 희열에 내가 허리를 뒤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를 두 팔로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그가 내 가슴에서 떨어지는 게 싫었다.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두 팔을 몸에 붙이고 가슴을 더 불룩하게 모아서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래로 자꾸 미끌미끌한 무엇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앉아 아래로 내린 두 다리를 비틀며 근질거리는 은밀한 살을 테이블에 비볐다. 압박감이 느껴지자 더 강하게 느끼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흔들게 된다.
엉덩이를 흔드는 내 몸을 그가 두 손으로 더듬으며 내려가더니 다리를 쓰다듬었다.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진하게 누르며 비비더니 허벅지 안쪽을 꽉 잡는다. 그리고 점점 더 손을 내려 테이블 아래서 흔들리는 양쪽 발목을 잡고 위로 치켜들었다.
덕분에 반동으로 등이 테이블에 닿으며 그대로 눕고 말았다. 그의 양손에 잡힌 발목 때문에 두 다리가 확 벌어진다.
“아앗! 하아, 저기…….”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핥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망한 자세가 부끄럽고, 그의 눈앞에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누워있는 게 창피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은밀한 곳은 아까부터 움찔거리며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
자극이 필요하다. 근질거리는 아래를 어딘가에 세게 비비고 싶고 사정없이 조이고 싶다. 지금 팬티에 가려져 있지만, 완전히 젖어든 얇은 천 아래에서 무언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그 느낌만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가 젖어든 팬티를 빤히 바라보았다. 흠뻑 젖어서 살에 달라붙은 팬티 위를 그가 꾹 눌렀다.
“허억!”
너무나 민감한 돌기가 그의 손가락 끝에 가한 힘에 일그러지며 강력한 전류가 아래부터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정수를 쳤다. 단 한 번의 손짓에 넋이 나가는 걸 느꼈다.
남자의 보랏빛 도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렇게까지 흥분하다니……. 원래부터 이렇게 민감한 건가? 아니면 약 때문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자하고 이렇게까지 가본 적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