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니비 펀치 (외전 2)(비욘드데이)-허니비 펀치 (17/17)

회색 벽돌을 둘러놓은 3층 빌라 건물은 혼자 겨울에 머무르는 듯했다. 차갑고 축축한 얼음 빛깔을 뽐내며 사방에 닥쳐온 여름을 힘껏 밀어낸다. 건물의 주인이자 밤마다 이곳에 등 붙이는 입주민인 한천마도 이와 같다. 그는 한여름에도 겨울을 사는 남자다. 사시사철 편안한 얼굴로 선선한 데에 머무르며, 남들 땀 뺄 시간에 저만은 보송보송했다.

겉보기에 완벽한 한천마에게 흠이 있다면 단연 인성이다. 그는 타인의 희생을 무척 하찮게 여겼다. 간혹 남의 땀으로도 모자라 피도 살도 종국에는 뼈까지 빼내어 죽여 놓을 때가 있었다. 그 행각이 요즘은 특히나 극성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주변인들은 온통 바빴다. 사흘 밤낮을 새느라 강명경 실장은 두 눈 가득 실핏줄이 터져 어느 때보다 더 험악해 보였다. 부랴부랴 도박랜드 사업을 접느라 진땀 빼는 문진주 사장은 물론이고, 수행 기사 장덕배 또한 종일 차를 모느라 허리 보호대를 찰 지경이었다.

그들의 최종 보스, 성질 더러운 한천마 대표님께서는 공적인 일로 바쁜 와중에도 사적인 일을 더욱 늘렸다. 그때마다 그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모시며 잔심부름으로 발바닥을 달구는 일은 장덕배의 몫이었다. 금요일 밤 11시 25분에도 어김없었다. 뻑뻑한 두 눈을 부릅뜨며 장덕배는 석벽 빌라 차고지에 리무진을 댔다.

차고지 왼편에는 진남색 벤틀리가 이미 주차된 상태였다. 대각선 모양으로 삐뚜름하게 대 놓은 모양새가 차주의 초보적인 운전 솜씨를 자랑했다. 얄미울 만치 각진 벤틀리의 엉덩이를 긁지 않기 위해 장덕배는 심혈을 기울여 오른편 자리에 리무진을 세웠다. 그리고 재깍 하차했다.

기다란 차체를 둘러 걸은 그의 발은 트렁크 앞에서 멈췄다. 한 대표님께 안겨 드릴 짐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브랜드명이며 백화점 로고가 붙은 종이 가방은 내용물의 값어치를 자랑하는 양 플라스틱처럼 빳빳했다. 북북 찢어다가 땅에 묻어도 반백 년은 썩지 않을 기세였다.

제 월급의 서너 배가 담긴 짐을 양손 가득 챙겨 들고서 장덕배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비린내가 불쑥 그의 콧구멍을 찔렀다. 콧잔등에 작은 구김을 만들며 장덕배는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시커먼 구두가 툭 리무진 밖으로 발을 뻗었다.

몸은 여전히 뒷좌석에, 두 발은 차고지 바닥에 붙여 놓고 앉아 한천마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손톱 밑과 지문 틈새에 빼곡하게 낀 갈색 얼룩을 닦아 내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골프장, 공사장, 버려진 항구까지 들르며 만난 이가 많았다. 개중 여럿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성급하다면 성급하고 매정하다면 매정한 한천마의 결단으로 인해 요즈음 신산시는 무척 시끄러웠다.

어떤 치들은 그런 그의 행보를 놓고 급발진이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병석에 드러누운 한무상 회장이 일어나리란 기적도 기대하기 힘들고, 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한권우 또한 납작 엎드려선 처자식의 안위만을 위해 기도하는 때였다. 대표 직함이 당당한 그의 입지를 건드릴 풍파 한 점 없는 계절에 왜 문제를 일으키냔 말이었다.

그러나 한천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다가올 전쟁을 없애 버리기 위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다. 경찰이 단속 한 번 하지 않은 도박랜드를 제 손으로 엎어 버리고, 불만을 쏟아 내는 약쟁이들을 도시 밖으로 내몰고, 제대로 작당하기엔 몸집이 아직 작은 주적들을 죽여 놓은 이유는 모두 평화를 위해서다. 작금의 안정적인 나날을 평생으로 늘려 놓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물수건을 바닥에 팽개쳐 놓고 그는 제 셔츠에 향수를 뿌렸다. 종일 철 비린내를 풍기며 다녀 놓고는 귀가하는 마당에 치장한 것이었다. 묵직한 우디 향으로 타인의 체취를 없애 버린 뒤 그는 종이 가방을 한 아름 건네받았다. 그러곤 이마를 찡그렸다.

“에이, 씨발.”

여러 종류의 빵이 수북하게 쌓인 가방 속을 들여다보며 한천마가 중얼거렸다. 그에 장덕배의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등줄기로 곧바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싹 긴장한 그를 두고 한천마가 중얼거렸다.

“빵은 냉장고에 옮겨 두란 말 못 들었니.”

한천마가 물었다. 심드렁한 목소리에 못내 큰 실망이 담겨 있었다. 대표님의 오해를 풀고자 장덕배가 부랴부랴 대답했다.

“어유, 그럴 리가요! 새 빵 굽는 시간 맞춰서 대전까지 가서 사 온 건데요. 돌아오자마자 대전, 아니, 대, 대표실 냉장고에 넣어 뒀던 겁니다. 대표님 댁 냉장고를 말씀하신 건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좀 전에, 이십 분 전에 꺼내서 후딱 옮긴 거라 아직 시원합니다!”

사지가 얼어붙은 채로도 그의 혓바닥은 유연하게 나불댔다.

“이왕이면 직접 건네주셔야… 애가 좋아할 것 같아 그랬습니다.”

‘애’ 이야기에 천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자로 대고 그려 놓은 듯 반듯한 두 눈썹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아래로 쓱 내리자 더욱 깊어진 눈매에 그림자가 졌다. 이내 그는 실소하듯 콧김을 내쉬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자기도 이제 스무 살이랍시고, 애 취급하면 듣기 싫어해.”

제 변명에 납득한 듯한 천마의 반응에 장덕배는 얼른 허리 숙였다. 얼굴과 바닥이 수평을 이루도록 굽신굽신 인사하자, 천마가 턱짓으로 퇴근을 허락했다.

또 다른 문제로 덜미를 잡힐까 싶어 장덕배가 부랴부랴 차고를 떠났다. 오늘 미운털이 박혔다가는 조금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대표님께서 오래도록 키우며 돌봐 온 ‘애’가 아침부터 폭탄 같은 소식을 안겨 준 탓이었다. 그 애의 담당 교수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는, 휴학 신청을 받았는데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의견을 물어 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더러운 천마의 성질이 더욱이 나빠졌다.

스무 살배기 말썽꾸러기를 만나기 위해 천마는 석벽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1층 현관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실내 복도가 드러났다. 높다란 3층 건물에는 한천마를 포함한 한 가구만이 살고 있었다. 팔뚝에는 종이 가방 손잡이를 주렁주렁 걸고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는 신발장에 멈추어 섰다. 그대로 수 초간 움직이지 않고 휑한 거실만을 바라보았다.

장식장 위에는 물을 너무 많이 줘서인지 혹은 너무 적게 줘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잎이 노래진 페페로미아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몸통이 쪼글쪼글해진 선인장 화분이 줄을 지었다. 노상 트럭이나 지하철 꽃집에서 하나둘 사다 놓은 화분에 가려져, 그들 주인이 담긴 탁상 액자는 뒷전이었다.

천마는 도무지 소생 확률이 없어 보이는 화분들을 좌우로 밀어냈다. 그러자 세월이 묻은 사진들이 예쁘장한 피사체를 뽐냈다. 마지막 유치가 빠진 자리에 혀끝을 들이밀며 웃는 사진부터 명경에게 호되게 혼난 뒤 울면서 피자를 먹는 사진, 주민 등록증 발급을 위해 사진관에서 찍어온 증명사진에 이르기까지… 사각형의 액자마다 한 남자의 성장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개중 천마가 가장 아끼는 사진은 꼬맹이의 중학교 졸업식 날 함께 찍은 것이었다. 꽃다발을 왼손에 쥐고 부끄럼 많은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에 감춘, 꼬맹이의 가슴 위엔 ‘기설’ 두 글자가 박힌 명찰이 새파랬다.

그때부터 기설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기보다 모델 일을 하는 어른 같은 태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천마 옆에 붙어 설 때면 덩치도 성격도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공사가 다망하단 이유로 못 간다고 일러두었던 졸업식에 불쑥 찾아가 꽃다발을 던져 준 날, 녀석이 어찌나 부끄럼을 타던지 두 뺨은 물론이고 아래턱까지 발긋해졌더랬다. 천마의 어깨동무를 받으며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선 순간에는 교복 아래로 움찔거리던 기설의 어깨가 참 뜨거웠었다.

은하 고아원에 강명경의 둘째 딸을 맡기던 날에 천마는 이 애를 얻었다. 얼굴이며 무릎, 손과 발에 동상 흉터를 덕지덕지 달고서 그의 차에 올라탄 아이에게는 아무런 흑심도 욕망도 목적도 없었다. 육아는커녕 어른과도 제대로 된 관계를 쌓지 못하는 천마의 서툰 표현에 기설은 놀랍도록 빨리 적응했다. 타박하듯 건넨 칭찬에 볼이 빨개지도록 좋아했고, 버럭 내지른 윽박에도 주눅 드는 법 없이 팔팔했다.

딱 한 번, 천마는 기설을 울렸다. 러트 기운을 못 이겨 발작이 난 날의 일이었다. 네 방으로 썩 꺼져라, 가까이 오지 말라 소리치고 등을 떠밀기가 무섭게 기설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알파의 러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열네 살 베타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태도가 부드럽진 못하여도 손길은 늘 다정하던 형님께서 저를 때리려는 줄 착각하여,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머리부터 쓰러져 버렸다. 열 기운에 씨근덕거리면서 천마는 기설의 얼굴을 빠르게 살폈는데, 눈빛이 텅 비었고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대로 질겁을 해 바지까지 적셔 버린 꼴이 심상찮았다.

천마는 우는 기설을 버려둔 채 빌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이 육아 놀이도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맞는 오메가를 찾아 러트 시기를 보내느라 기설을 직접 달래 주지조차 못했다.

그래도 기설은 괜찮았다. 뜻밖에, 그는 집안을 깨끗하게 치워 놓고 얌전히 천마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받아 온 국어 시험지를 냉장고에 붙여 놓고는, 처음으로 70점을 넘겼으니 칭찬해 달라고도 했다. 주눅 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기설은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공포보다 큰 애정이 서려 있었다. 놀라 바닥에 나자빠지고, 무서워 오줌까지 지려 놓고도 그는 천마를 좋아했다.

그 일이 있고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천마에게 기설은 여전히 최악의 순간 마주했던 울보 꼬맹이였다.

‘꼬맹이’는 한천마를 묶어 놓는 하나뿐인 닻이었다. 심리적으로도 그러했고 지리적으로도 그러했다. 남을 못 믿어 죽어라 미워하고, 때론 직접 죽이기도 해 온 그의 마음에 기설은 당연하다는 듯 자리했다. 한편으론 크리스탈 빌딩으로 진작 옮겼어야 했던 거처를 여태껏 이 구닥다리 빌라에 처박아 놓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게 한무상이 곱게 죽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천마는 자주 그렇게 곱씹었다. 제 친부를 죽이기 위해 그는 일본인 교수와 거래했다. 따지자면 별칭만 교수일 뿐, 불법 약물을 만드는 약사였다. 그렇게 제조된 독극물은 곧바로 장덕배의 손을 통해 한무상의 목구멍에 도착했다. 문제는 부검에 대비하여 이것저것 따져 가며 만들어 낸 독의 치사율이 94%란 데에 있었다. 제아무리 높은 확률이래도 결과를 낳고 보면, 결국 되느냐 마느냐의 두 갈림길에 지나지 않는다. 한무상은 개중 생존의 길로 가 식물인간이 됐다. 문제의 약물은 약쟁이 네트워크를 통해 불법 유통되어 서울까지 흘러갔다.

그 때문에 한천마는 여러모로 재미없게 됐다. 교수를 처리하고 그와 관련한 모든 조사에서 발을 빼내느라 수고해야 했다. 일의 뒤처리가 찝찝하게 된 탓에 귀여운 꼬맹이를 속 편하게 세상에 내놓을 수도 없게 됐다. 오늘, 남들 불만을 한 몸에 받으며 청소부를 자처하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 저를 공격하기 위해 기설을 겨냥하는 일이 없게끔, 그 누구의 목을 미리 잘라 놓는 것이었다.

시간은 그런 한천마를 빗겨 흘렀다. 세월이 지나도 그에겐 주름 한 줄의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반면 기설의 시간은 그를 불쑥 어른이 되게 했다. 첫 사랑니를 뽑고 볼이 통통하게 부어오르던 꼬맹이가 사타구니에 수풀이 진 어른이 된다는 건 천마로선 퍽 섭섭한 일이었다.

거뭇거뭇하게 자란 털이야 피부과에 집어넣어다가 레이저 제모를 시켜 버리면 그만이라지만, 변해 버린 태도까지는 막을 수 없는 듯했다. 귀가할 때마다 쏜살처럼 튀어나와 ‘오셨어요’ 인사를 건네던 꼬맹이가 오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한 심기를 따라 천마의 고개 또한 서서히 삐뚜름해졌다.

“흠.”

불퉁하게 벗어 던진 구두가 신발장에 떨어졌다. 힐긋 아래를 살피던 그는 낯선 캔버스화 두 짝을 발견했다. 앞코에 검게 흠이 난 캔버스화는 연두색이었고, 이 집에 사는 두 남자 중 누구의 발에도 맞지 않게 작은 사이즈였다.

“…….”

무어라 소리를 치고자 입을 열자마자 천마는 제 발목에 튄 거뭇거뭇한 얼룩을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욕실로 향했다. 제 것이 아닌 핏방울이 튄 양말을 벗어 쓰레기통에 처박고, 손자국이 남은 발목은 샤워기로 헹궈 냈다. 커다란 상체를 숙인 채 집중해 발을 씻어 내는 그를 세면대에 자리한 두 개의 칫솔이 구경했다.

이내 그의 머리 위로 말소리가 흘렀다. 환풍구를 통해 2층의 소리가 울려 들어온 것이었다. 정확히는 2층 기설의 방, 화장실을 통하여 들려오는 소리였다.

10년도 더 전에 헐값에 사들인 이 빌라는 매매가는 올랐을지언정 방음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 사실은 천마만이 알았다. 같은 건물에서 5년을 함께 살면서도 기설은 아침마다 제가 불러 젖히는 노랫소리가 1층까지 울리는 줄 꿈에도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샤워하는 소리며 볼일을 보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기설의 머리가 어느 정도 굳고 어깨며 팔뚝이 다부져진 뒤에는 자위하는 특유의 기척이며 신음까지 간간이 울리곤 했다.

오늘, 천마의 귓가로 흘러 들어온 소리는 도란도란한 대화였다. 기설이 제 방으로 누구를 데려온 건지 두 사람분의 말소리가 조곤조곤 쉼 없이 이어졌다. 기설의 음성은 점잔을 빼느라 낮고 차분했고, 상대의 목소리는 조잘조잘한 게 새 지저귐처럼 듣기 좋았다. 그래서 더욱이 천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이 꼬맹이가 내 집에다 여자를 불러다 놀아?’

남자라면 뭐 달라지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천마는 본래 기설이 친구라며 사귀는 그 또래의 족속들을 싫어했다. 그는 기설을 청정 구역으로 여겼다. 한천마 자신은 발정기마다 좆이 발딱 서는 극우성 알파이자 섹스 중독자이지만 기설은 달랐다. 기설의 곁에 선 친구가 여자라면 그의 귀여운 꼬맹이를 성적으로 오염시킬 것 같아 싫었고, 남자라면 이미 오염된 노폐물 구더기 같은 벌레가 감히 우리 꼬맹이에게 찝찔한 땀 냄새를 묻힌다며 혐오했다.

러그에 젖은 발 도장을 툭툭 찍으며 천마는 부엌으로 향했다. 팔뚝에 주렁주렁 매달린 종이 가방을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은 뒤에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잊고 있던 피로감이 짜증과 함께 몰려들었다. 목울대가 불거지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천마는 두 눈을 깊이 내리감았다. 무거운 눈두덩이를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누르면서 그는 2층의 ‘꼬맹이’가 동거인의 귀가를 알아차리길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설의 방문이 덜컥 열렸다. 물속에서 울리는 양 멀찍이 들리던 목소리도 훨씬 또렷해졌다.

“진우 선배한테도 내가 말할게. 너 없으면 축구 지는데 어떡하냐고 난린데, 진짜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축구 좀 지면 뭐 어때서? 자기네들이 못하면 지는 거지, 그걸 왜 네 탓을 하나 몰라. 안 그래?”

그와 함께 이 집안에선 전혀 볼 일이 없는, 갓 성인이 된 어린 여자가 등장했다. 또박또박한 발음이며 목소리가 청춘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세로 주름이 독특하게 진 얇은 원피스에 머스터드 색 카디건을 걸치고, 흰 꽃 모양 큐빅이 박힌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입술에는 연홍색 틴트를 발랐고 뽀얀 팔엔 노트북이 든 납작한 가방을 든 채였다.

반면 기설은 편안한 청바지에 목이 늘어난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녀의 말에 ‘응’, ‘음’ 하는 침음만 늘어놓는 태도가 숫기 없고 건성으로 보였다. 그래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설의 깊은 눈동자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1층으로 통하는 계단 반절을 내려오기까지 한천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천마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은 있을지언정, 한 번만 보는 사람은 없게 마련이었다. 기설의 곁에 선 대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힐끔 눈을 굴렸다가 천마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처음에는 우두커니 앉은 거대한 남자의 형태에 놀란 듯 제자리에서 팔짝 뛰더니,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이 닿자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물 흐르듯 눈동자를 움직였다. 너른 어깨와 핏줄이 불거진 팔뚝,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을 차례차례 훑어 내린 뒤, 다시금 천마의 얼굴을 감상하는 식이었다.

“아….”

그렇게 몇 초를 멍하니 소비했다. 천마의 존재감에, 또 제가 보인 무례한 반응에 당황하여 그녀는 기설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얼른 표정을 고치며 싹싹하고도 씩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안녕하세요…!”

기운찬 걸음으로 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와 천마 앞에 바로 섰다. 그러곤 까딱 고개를 움직이며 인사했다.

“설이 형이시죠? 저는 같은 과 동기예요! 설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태은아.”

연신 감탄과 수줍음을 못 감추는 친구의 어깨를 툭, 기설이 건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가 봐. 벌써 열두 시야.”

“아, 응!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기설의 손짓에 따라 현관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는 힐끔힐끔 천마를 돌아보았다. 큰 미련이라도 남은 듯 연신 눈 굴리는 친구의 코앞을, 기설은 제 가슴팍으로 막아섰다.

“못 바래다줘서 미안.”

기설이 중얼거렸고,

“아냐, 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돼. 잘 자, 설아! 문자 할게!”

그의 동기는 끝까지 천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천마를 향해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하기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천마로부터 돌아오는 응답 따윈 없었다.

도어 록 잠금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기설은 휙 몸을 돌렸다. 무얼 변명하려는 양 그가 입을 열자마자, 천마는 오른손을 휙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느릿느릿 하나씩 굽히기 시작했다.

기설이 말했다.

“같은 과 동긴데, 근처에서 술 마셨대요. 오늘 왜 학교 안 왔냐고 걱정된다면서 들른 거예요. 과제랑 필기 보여 준다고.”

“너 휴학할 거라며.”

“네. 저도 그렇게 설명했어요.”

천마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접힌 손은 이미 주먹이었다.

“5초면 끝나는 이야기를 방 안에 처박혀서 도란도란 나누셨다?”

그러자 기설이 입을 벙긋거렸다. 마땅히 떠오르는 핑계가 없는 듯 혓바닥이 잠잠했다.

그의 태도만 보아도 천마는 겁도 없이 제 집에 다녀간 이와 기설이 아무 관계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태은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는 기설을 향한 호감을 서슴없이 드러냈지만, 기설의 태도며 대꾸는 퍼석하기가 거친 모래알 같았다.

언제고 제 형님을 하늘 보듯 살피는 기설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그가 손님을 집으로 초대했을 리 없었다. 그보다는 기설의 거처를 어디서 주워들은 동기가 과제를 핑계로 먼저 찾아왔을 가능성이 컸다. 착해 빠진 기설이 밤중에 술에 취해 저를 보러 온 친구를 문전박대하지 못한 것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집 나간 어처구니가 돌아오진 않았다. 사정이 어찌 됐든 마음에도 없는 여자애를 덜렁 집에 들여서는, 제 방까지 구경시킨 꼬맹이가 천마를 황당하게 했다. 무어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더욱 심보가 뒤틀렸다.

편편한 미간에 억지 주름을 만들며 천마가 입을 열었다.

“네 좆대로 휴학 신청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딴 식으로 막 굴 거니?”

기설이 머뭇머뭇 고개 숙였다. 그리고 구시렁거리듯 말했다.

“죄송해요. 이제 오지 말라고 문자 할게요.”

“문자 같은 소리 하네. 연락하지 마.”

“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짓누르며 천마가 물었다.

“휴학은 왜 하겠다는 거야.”

낮다 못해 묵직한 음성으로 뚝 떨어진 심문에 기설이 발뒤꿈치를 주춤거렸다.

“휴학하면 안 돼요? 형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네 휴학을 내가 왜 좋아해?”

“왜냐면… 형이… 싫다고 그랬잖아요. 내가 학교 다니니까 심심하다면서요.”

“뭐?”

예상치 못한 휴학 사유에 천마는 코웃음을 쳤다. 어제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따위로 학교 다닐 거면 그만둬’, ‘놈팡이처럼 집에 처박혀 지내면서 빨래나 해’ 하는 핀잔도 놓았었다. 암만 그렇대도 그렇지, 곧바로 휴학 신청을 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세탁실을 살펴보면 깨끗하게 빨아 놓은 수건이며 팬티들이 저를 반길 것 같아 더욱 골 때렸다.

“하하….”

주먹으로 식탁을 똑똑 두들기며 천마는 웃었다. 유쾌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실소였다.

천마가 투정 어린 잔소리를 뱉은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생이 된 기설이 무턱대고 싫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입시 코디까지 붙여 가며 기설을 가까운 신산대학교에 입학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대책 없는 꼬맹이의 학교생활에 있었다. 학과 동기들에게 있어 기설은 잘생기고 돈 많은, 호구였다. 어디서건 밉보이는 일도 고개 숙이는 일도 없이 지내라며 명품으로 치장하고 신차까지 뽑아다가 학교에 보냈더니만, 별 버러지 같은 새끼들에게 제 몫을 떼어 주는 기설이었다.

그라는 고아를 거두어다가 남부럽지 않은 소년으로, 건강한 청년으로 키워 내는 시간 내내 천마가 절감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래도 기설은 기설’이란 점이었다. 빵빵한 지갑, 명품 시계, 반지르르한 차 키를 갖고도 기설은… 기설이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기설이 지닌 돈과 친절을 뜯어먹지 못해 안달인 피라냐가 매우 많았다.

학기 초부터 기설은 베타는 물론이고 알파, 오메가들에게 고백을 줄줄이 받았다. 여자 동기나 선배들이 커피며 초콜릿, 필기 복사본을 건네줄 때마다 기설은 그 호의에 모조리 인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교시부터 전공 수업이 있는 목요일마다 30분 일찍 집을 나서서는, 저 편하라고 주어진 벤틀리에 동기 여자애 셋을 태워 주며 택시 기사 노릇을 해 댔다. 발표 자료며 리포트를 공유해 준 선배들에겐 교내 카페의 조각 케이크며 마카롱 따위를 사다 주기도 했다.

여자들은 먼저 베푼 것이라도 있지, 남자 동기의 경우는 그보다 더 나빴다. 친구라는 놈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계산은 늘 기설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많아 봐야 10만 원을 넘지 않았다. 신입생들이 술이라고 먹어 봐야 파전에 막걸리, 부대찌개에 소주였으니까. 한데 기설의 호구짓이 당연해지고 나니 이놈들이 보드카와 위스키, 열대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정수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포차에서 룸으로 단숨에 옮겨 간 것이었다.

기설이 용돈 카드로 남의 유흥비나 대 준다는 사실을, 천마는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다. 여태껏 각기 다른 이름의 클럽에서 몇십, 몇백만 원의 결제 알림 문자가 와도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아 왔다. 그의 육아 원칙은 단순했다.

‘마약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그리고 외박 금지.’

귀가 시간만 잘 지킨다면야, 기설이 어디에서 무슨 술을 맛보건 귀엽기만 했다. 천마를 의아하게 한 원흉은 오히려 푼돈이었다. 이틀 전 밤 10시 30분에 날아온 문자가 한 통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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