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어 머무르던 차량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퇴근 시간, 검정색 SUV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지정된 자리에 차를 댄 뒤에도 차주는 한참 운전석에 머물렀다. 상사에게 전달할 물건과 서류들을 하나의 종이 가방에 정리해 담은 뒤, 명경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주 씨.”
주차장의 텅 빈 자리, 카스토퍼에 앉아 있던 이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밝은색 캐시미어 코트는 소중하게 접어 품에 껴안은 채였다. 왼손으로 청바지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면서, 문진주가 웃었다.
“왜 이렇게 늦어요.”
그에 명경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그는 오늘이 혹시 기념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진작에 연차를 준비시켜 놓은 문진주의 생일은 물론 아니었다. 그 자신의 생일도 아니었다. 그럼, 그 밖의 어떤 중요한 날이던가?
“…같이 퇴근하려고 들렀는데.”
당황해 얼어붙은 알파를 올려다보며, 문진주가 말했다. 그제야 명경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러곤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곱씹었다.
“같이 퇴근을 하려고요?”
“네.”
“저랑?”
“네. 오늘 야근은 아니죠?”
목석같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서 명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문진주는 활짝 미소 지으며 그와 함께 움직였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이다 보니 그들은 여러 부분이 잘 맞았다. 가타부타 아직 남은 용무가 있음을 알릴 필요도 없이, 회사에 들렀으니 대표 이사실을 찾아가겠거니 먼저 짐작하고 붙어 걷는 식이었다.
승강기로 통하는 입구 앞에서, 명경은 재깍 유리문을 열고서 문진주를 기다렸다. 사소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웃음 짓던 문진주가 문득 물었다.
“오늘 누가 죽었어요?”
명경의 시선이 그를 따라 제 목 아래로 향했다. 그가 가진 넥타이는 모조리 검정색으로, 장례식장에 갈 때에만 옷장 밖으로 나오곤 했다. 문진주도 그 사실을 뻔히 알기에 쉽게 유추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명경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선물로 넥타이핀을 주셔서, 오늘만 매 봤습니다.”
승강기 호출 버튼을 누른 뒤 명경이 다시 돌아보았을 때, 문진주는 웃는 얼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가씨’ 세 글자가 그의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보기 좋은 미소는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눈을 굴리며 들은 말을 여러 차례 곱씹은 끝에, 문진주는 명경의 가슴 중앙, 넥타이 위에서 반짝이는 은색 핀을 보며 말했다.
“…이지가요?”
“네.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뇨…. 이지가… 나한텐 아무것도 안 줬는데…. 명경 씨한테는 선물도 줘요?”
예상치 못한 말에 명경의 표정도 그대로 멈췄다.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딱히 그런 특별한 건 아니고…. 설이랑 쇼핑 갔다가 이지가…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집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특정해서 주려던 게 아니라, 일단 사고 보니…. 설이 말로는 누굴 줄 거냐고 물었더니 이지가 저를….”
정확히는, ‘명경 삼촌 꺼’라고 큰소리로 또박또박 외쳤다고 했다. 삼촌을 보겠다고 졸라대는 통에 기설이 곤혹스러워하며 영상 통화까지 걸어왔다. 잠시 전화 괜찮으시냐는 기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이지는 휴대폰 화면 가득 뽀얀 얼굴을 들이밀었다. 삼촌 줄 선물이 있다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대던 어린 아가씨는 세상에 둘도 없이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지가 명경 씨를 더 좋아하나 봐요.”
어린 아가씨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명경 삼촌을 향해 진주 삼촌이 구시렁거렸다.
“난… 넥타이도 자주 매는데…. 지난주에 세 번이나 만났는데….”
“지지난 주에 받은 겁니다.”
“지지난 주엔 네 번 만났는데….”
“…….”
명경은 그를 달래어 줄 말을 찾느라 한참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으로 입을 다물자, 그는 성난 깡패처럼 보였다. 바위 덩어리 같은 어깨며 안면에 온통 그늘이 졌다.
그런 명경 앞에서 문진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에휴’, 한숨을 커다랗게 내쉬었다.
“…그럼, 이건 진주 씨한테 드릴 테니까 진주 씨 걸로 하죠.”
한참 말을 골라낸 끝에 명경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휴대폰 배경 사진조차 공 풀장에서 노는 한이지 사진인 문진주는 제자리에서 거의 펄쩍 뛰다시피 하며 말했다.
“애가 준 걸 어떻게 남을 줘요? 이지가 알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이지는 딱히 신경 안 쓸 텐데요….”
“에휴!”
두 번째, ‘에휴’에 명경의 볼이 움찔거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승강기가 도착했다. 명경이 먼저 올라탔고, 문진주가 뒤따랐다. 투덜투덜, 어떻게 아이가 준 선물을 남을 주려 하느냐는 잔소리도 함께였다.
종알종알 말소리로 가득 찬 승강기 안에서 명경은 애써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는 모습이며 놀랄 때마다 제자리에서 팔짝거리는 애인의 모습이 꼭, 툭 건드리면 알알 화내는 치와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 점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고, 화내는 모습도 좋은 걸 보면 평생 이 사람을 싫어할 일은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키스합시다.”
“…….”
잔소리가 뚝 끊겼다. 승강기가 ‘땡’ 소리를 냈다. 은색 문이 좌우로 매끄럽게 열렸다. 다시 문이 닫힐 때까지, 문진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더는 커질 수 없을 만치 커다래진 채 명경의 심각한 얼굴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문진주가 대답했다.
“네.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다시, 승강기 문이 열렸다. 문진주가 열림 버튼을 눌러 준 것이었다. 명경은 그를 한참 마주 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종이 가방을 쥔 채 복도로 발을 뻗었다. 그가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등 뒤로 타닥 소리가 바쁘게 울렸다. 닫힘 버튼을 연타하는 소리였다.
명경에게는 부끄러움 많은 문진주를 놀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경험은 많고 숫기는 없는 오메가가 재빨리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애초에 그의 목이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어, 도긴개긴이었다.
헛기침을 수어 차례, 쿵쿵거리는 가슴 위를 주먹으로 두들기기도 수어 번을 한 끝에 그는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러곤 대표 이사실 앞에 섰다.
대표 이사실의 문을 열자마자 명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늘의 마지막 업무차, 대표님께서 주문한 새 셔츠를 구해 온 참이었다. 브랜드명이 박힌 종이 가방 손잡이를 황망하게 쥔 채 명경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대로, 턱이 빠져라 경악을 못 감추며 그는 한천마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천마는 상의를 벌거벗은 채였다. 탄탄한 가슴이며 굵은 팔뚝, 매끈한 허리와 복부를 훤히 내놓은 채 목둘레에 넥타이만 하나 두르고 있었다. 왼손에는 응고된 피 얼룩으로 더러워진 흰 셔츠가 들려 있었는데, 마침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던 참이었다.
힐끔 눈길을 움직여, 천마는 거울을 통해 명경의 이상한 표정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실소하며 말했다.
“우리 설이가 열심히 묶어 준 거거든.”
넥타이를 가리키며 건넨 소리였다. 그러니 둘레를 살살 늘려 목에 걸어 두고, 매듭이 풀리지 않게끔 신경 써 가며 셔츠만 벗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경이 놀란 이유는 그의 삐뚤빼뚤한 넥타이에 있지 않았다.
“…차에 치이기라도 하셨습니까?”
시퍼렇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린 멍울이, 천마의 팔뚝에서 시작해 팔꿈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고난 피부색이 짙은 탓에 중앙부는 거의 거멓게 보였다. 좀비에게 물린 게 아닌지, 괴사 중인 것은 또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정작 천마는 제 팔뚝이 어떤 꼴인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신경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껏 인지하지 못한 듯 굴었다. 몸을 휙 돌려 거울에 제 팔뚝을 비추어 보더니 ‘흠’ 소리 내며 감탄하고, 서서히 웃음 짓는 것이었다.
“대표님.”
희게 질린 얼굴로 명경이 재차 불렀고,
“여기 깁스라도 찰까? 아가 놀릴 기회인데….”
천마가 노래하듯 말했다.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명경은 안심했다. 하기야, 기설이 아니고서야 누가 천마의 몸에 흠집을 남기겠는가. 또 기설이 아니고서는, 한천마의 팔뚝에 저런 멍을 남겨 놓고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을 순 없을 터였다.
저벅저벅, 명경이 천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천마가 오른손을 올려 보이기에, 새로 구해 온 셔츠를 들려 주었다. 그러곤 쓰레기통에 처박힌 셔츠를 챙겨 들었다. 구해 온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델에 동일 사이즈인, 타인의 DNA로 더러워진 셔츠는 소각할 예정이었다.
이제, 이렇게 증거를 없애는 일도 거의 끝물이었다. 종이 가방 속에 놓인 수많은 서류가 그것을 증명했다. 개중 하나에는 윤조한의 서명이 담겼다.
명경의 마음은 무거운 반면 천마는 그야말로 룰루랄라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그는 셔츠를 갈아입고, 삐뚤어진 넥타이를 정성껏 맸다. 그러곤 명경에게 뒤처리를 내맡겨 둔 채 퇴근했다.
천마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설에게 제 팔뚝을 어떻게 보여 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팔이 잘 안 움직인다고 우선 엄살을 좀 부린 다음, 기설이 멍울을 찾아내면 그제야 아픈 척 나뒹굴어 볼까.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뛸 듯이 좋아졌다.
마음씨 착한 그의 기설은 처음에는 당황해 얼굴을 벌겋게 익히다가, 자신의 폭력성이 어쩌고 하며 쓸데없이 땅굴을 팔 게 뻔했다. 적당히 아픈 척을 하며 놀려 주면 전전긍긍하며 사과해 올 테니 꼬투리를 잡은 김에 즐거운 밤을 보낼 수도 있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천마는 집에 도착했다. 근래 들어 가장 유치한 망상에 사로잡힌 채 그는 웃는 낯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한데,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오는 귀여운 베타가 없었다. 아빠 아빠 하며 저를 찾아야 할 두 살 아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천마는 2층 위를 올려다보았다. 건방진 고양이도 내려오질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지를 재우려다가 고양이와 함께 잠들었나 보다 생각됐다.
한풀 재미가 꺾인 채 천마는 이지의 방으로 곧장 향했다. 그러나 작은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든 이는 그의 딸아이 하나뿐이었다. 잠든 아이의 천사 같은 얼굴을 눈에 담고, 천마는 아주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든 채 러그 위를 살금살금 걸었다.
다음으로 그는 2층 테라스 자리를 지나가듯 살폈다. 푹신푹신하게 잘 자란 화분 중앙에, 털 결이 반질반질한 고양이가 똬리를 틀고 누워 있었다. 비싼 화분을 죄 망가뜨리며 경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나른하게 가늘어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고양이가 언제든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천마는 테라스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그리고 그의 발이 멈춘 곳은 그들 침실 앞이었다. 매끄러운 문을 열자마자, 뜻밖에 모호한 공기가 천마를 반겼다. 예상한 것과 달리 기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저 멀리, 침대 너머 바닥에 그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동그랗고 까만 뒤통수와 너른 어깨가 보였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서며 천마는 얼굴을 굳혔다. 인기척을 내는데도 기설이 뒤를 돌아보질 않고, 오히려 큰 어깨를 움츠러뜨리는 모양새에 그는 신경이 뾰족해졌다.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불쑥 튀어 나갔다.
“아가. 지금… 우는 거야?”
그러자 쿨쩍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허!”
누가 내 새끼를 울렸나 하고, 성급하게 화가 난 채 천마는 침대를 둘러 걸었다. 성큼성큼 다가서던 그의 발은 그러나 기설의 몸 주변에 흩어진 서류를 본 순간 얌전해졌다. 종이의 색깔부터 양식에 이르기까지 몹시 눈에 익은 서류는, 다른 무엇도 아닌 가족 관계 증명서였다.
“…….”
2년 전 겨울의 끝물, 기설이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천마는 이지의 출생 신고를 마쳤다. 그와 동시에, 기설의 동의 없이 제멋대로 혼인 신고도 함께 했다. 그러곤 제가 저지른 짓을 확인하고자 증명서를 서너 장 받아 왔다.
“음, 설아.”
이런 식으로 발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에는, 복잡하고 지저분한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칠 만한 모가지도 여럿 쳐내고, 재빨리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여태 그러지 못한 것은 천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처음 한 해 동안은 기설도, 이지도 많이, 자주 아파서 경사를 올릴 시기가 아니었다. 올해 들어서는 후일 문제를 일으킬 법한 몇몇 사업체를 천천히, 소리 소문 없이 제 손으로 박살 내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변했다. 이지도 자라나는 마당에, 불안의 조각을 남겨 둔 채 결혼식을 올릴 순 없었다. 독한 병균에서부터 시작해 하찮고 시시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장애물로 느껴지는 것들을 전부 박멸한 뒤 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때 가서 ‘사실 진작에 혼인 신고를 마쳤다’고 기설에게 서류를 보여 준들 무어 문제가 되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오늘, 대뜸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천천히, 천마는 기설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러고는 한 번, 두 번, 도닥이며 농담했다.
“아가. 네 생각보다 형이 나이가 많아서 우는 거야, 지금? 아저씨랑 결혼해서 쇼크받았니?”
그러자 훌쩍훌쩍 코 먹는 소리가 뚝 그쳤다. 울다가 웃는 기설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귀엽고 바보 같았다.
“네, 그것도 그렇기는 한데요….”
웅얼웅얼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흠뻑 젖은 채였다. 언제나 말똥말똥하던 두 눈은 퉁퉁 부은 바람에 크기가 평소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마와 콧잔등, 턱은 새하얀데 두 뺨은 유독 발갰다. 천마의 생각보다 더 오래, 진작부터 한참을 운 기색이었다. 그대로 덥석, 그는 천마의 허리를 부여잡고 슬픈 아이처럼 엉겼다.
제 허리를 죄는 기설의 두 팔을 챔피언 벨트처럼 느끼면서, 천마가 웃었다. 웃으며 그는 기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설과 달리, 천마는 기쁨에 취해 우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화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웃어 보였다.
“좀 더 제대로….”
천천히 허리 숙여, 낮은 높이에 매달린 기설의 머리통에 입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제대로 하자. 조만간, 제대로.”
나랑 결혼하자. 천마가 말을 꾸려 내기도 전에,
“네. 좋아요.”
기설이 대답했다. 성급한 승낙에 천마는 실소했다. 기설이 좋건 싫건 그런 것은 천마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벌써 혼인 신고도 모두 마친 데다 일평생 죽어도 놓아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기설은 울어도 웃어도, 죽는다고 해도 한천마의 사람이었다.
“신혼여행도 가자, 어때? 너 여행 가 본 적 없다며.”
“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아니면 섬은 어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회유를 건네며, 천마는 가까스로 기설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기설은 알파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새처럼 키스하는 기설의 입술은 물론이며 뭉개진 귀와 곧은 목이 온통 새빨갰다.
감동에 취한 어린 베타를 껴안고 천마는 그와 한 침대에 누웠다. 지난 2년간 언젠가는 행하리라 생각한 프러포즈를 마친 순간, 그는 얼떨떨했고 아리송했고 아쉬웠다. 형님께서 준비해 둔 이벤트를 죄 말아먹은 줄도 모르고서, 기설은 그의 품 안에 그저 바짝 달라붙었다.
이내 기설이 중얼거렸다.
“저… 생각해 보니까 있어요, 여행 간 적.”
눈물에 젖어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작은 빵처럼 보였다. 천마는 ‘으음’ 하는 침음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금강에서 만난 코치 형이랑, 형수님이랑, 형수님 친구랑 바다에 갔었어요.”
금강이라면 기설이 속했던 복싱 실업 팀이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코치 형’은 천마의 구둣발에 코가 밟혔던 놈 같았다.
“바다 어디?”
“모르죠. 제가 운전한 게 아니라서.”
“자고 왔어?”
“네. 갔다가 수영 배웠어요.”
“수영 배우고 밤에 뭐 했어. 잤니?”
“수영했는데요.”
쿨쿨 잠을 잤냐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섹스를 했느냐는 질문인 줄도 모르고서, 기설은 ‘저 수영 잘해요’ 하고는 으스댔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뭐든 잘하는 기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알려 주면 무엇이든 금세 익혀서, 이제는 잠자리에서도 선수급이었다.
허탈한 심문을 그치고, 천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기설을 생각했다. 그 시절, 어리고 덜 자란 기설을 생각했다. 밤바다에 나가 홀로 수영하고, 더운 열기를 소금물에 헹구며 거품을 만드는, 첨벙첨벙 작은 파도를 가로지르는 그를 생각했다. 그러자 기설의 해말간 기운이 나른하게 제 눈꺼풀에 스미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마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그려진 셔츠 차림새로, 그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감각에 취해 차창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웬 꼬맹이를 만났다. 각목 하나를 손에 들고 두 무릎을 달달 떨면서도, 당당하게 거짓말하는 어린 꼬맹이는 말라깽이 소년이었다. 머리칼은 부엌 가위로 쳐 냈대도 믿길 만큼 거칠게 잘렸고, 목과 손은 새하얀데 뺨은 회빛이었다. 불어 터진 모양새의 귀는 물론이고 입술 위, 팔뚝, 무릎에 멍울이 달려 있었다. 대충 살펴도 엄청난 사고뭉치 같았다.
“아저씨들 차인 줄 모르고 그런 거예요. 어떤 아줌마가 돈 주고 시켜서 그런 거예요.”
허둥지둥 변명하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천마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곤 아무런 질문도, 꾸중도 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어른의 큰 손이 다가오자 아이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대비하는 것과 달리, 천마의 손은 부드럽게 소년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아가야.”
그리고 천마는 확신했다. 더럽고 구불구불한 뒷골목, 콘돔과 일수 전단지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도로 위에서, 소년을 이렇게 부르는 어른은 아마도 제가 처음일 것이라고.
“나랑 같이 살래?”
웃음을 못 감추며 천마가 물었다. 어째선지 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변덕스러운 알파였으므로, 이처럼 기분이 좋고 운수가 좋은 ‘오늘’이었더라면,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의리 있는 꼬맹이를 기꺼이 거두었을 수도, 있었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응?”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연거푸 물어도, 소년은 어깨를 움츠린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나랑 같이 살자, 어때?”
이러다 목에 담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될 즈음 되어서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멋쩍게 얼굴을 찌푸렸다. 예쁘게 웃어도 모자랄 판국에, 절 데려가겠다는 어른 앞에서 보이는 표정이 이런 식이라니. 애교라고는 똥에 쓸래도 없는, 지푸라기같이 헝클어진 머리칼의 못나 빠진 소년이었다.
그대로 천마는 제 차에 소년을 태웠다. 세단의 뒷좌석에 앉히고 보니 소년의 더러운 팔꿈치며 무릎, 까무잡잡한 얼룩이 진 뺨이 좀 더 제대로 보였다. 몇몇 상처들은 제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남이 가한 폭력으로 새겨진 듯했다. 뺨의 회빛 얼룩은 동상의 흔적 같기도 했다.
그래도 딱 하나, 천마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소년의 눈이었다. 여느 시골 마을에 가면 한 마리쯤 있을 법한, 국산 똥강아지 눈매처럼 얇은 쌍꺼풀에 아래로 처진 속눈썹을 매단 것이, 자세히 살펴보니 꽤 귀여웠다.
소년은 자신을 기설이라 소개했다. 성은 없고, 그냥 기, 그리고 설. 그래서 기설이라 했다. 그에 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저도 성은 없고 그냥 천마. 천마라고 알려 주었다.
“네, 천마 아저씨….”
“…이 애새끼가. 누구더러 아저씨래?”
넙죽 데려간 고아를 제대로 키워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먼저, 천마는 좋은 학교를 골라 아이를 입학시켰다. 한데 기설은 예측 불가능한 사고뭉치였다. 아이는 매일 새로운 사고를 쳤고, 그 사실을 천마에게서 완전히 꽁꽁 숨겼다. 그 바람에 천마는 기설의 담임 교사에게 전화를 받은 뒤에야, 아이의 학교생활이 불행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담임은 기설을 문제아라 칭했다. 기설이 반의 학급 회비를 훔쳤고, 체육 선생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교내에서 풍기 문란한 일까지 벌였다고 말이었다. 그에 천마는 기설의 작은 방을 수색했다. 쭈뼛거리며 눈물방울을 단 아이의 책가방에서 튀어나온 것은 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책 한 권, 그리고 얼룩덜룩한 글씨로 뒤덮인 반성문 서너 장이었다.
“잘못했어요.”
기설의 사죄는 지나치게 재빨랐다. 황당한 마음에 실소하는 천마 앞에서, 그 아이는 제대로 걷지조차 못했다. 두 팔을 엉거주춤 상체에 딱 붙인 채, 머리 위로 주먹이 날아올까 봐 거듭 목을 까딱거렸다.
“등신처럼 굴지 말고 이리 와.”
덥석 기설의 어깨를 붙잡고, 천마는 그 애를 작은 침대에 앉혔다. 그러곤 맞춤법이 죄 틀린 반성문을 들이밀었다.
“이거 네가 쓴 거야? 설아. 네가 왜 이런 걸 써? 뭘 잘못해서, 뭐가 죄송한데? 반성할 짓을 하긴 한 거니?”
쏟아지는 질문에 기설은 당황한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위협을 느끼면 곧바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기설이었다. 그러나 그는 표현에 서툰 아이일 뿐, 도둑은 아니었다.
어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느니 풍기 문란한 일을 저질렀다느니, 두 모함은 그럴싸했다. 기설은 어른 정강이가 아니라 대가리를 깨고도 남게 호방했고, 육체미로 따지자면 또래 아이들 눈으로 볼 때 충분히 문란할 성싶었다. 그러나 학급 회비를 훔쳤다는 말은 그야말로 개소리였다.
돈이 필요해서 도둑질을 할 것 같으면, 이 집안 금고를 털어먹으면 될 일이었다. 하다못해 거실 소파며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천마의 외투, 혹은 바지 주머니만 뒤져도 현금이 다발로 들어 있었다. 한데 기설은, 그러지 말라 해도 어른의 옷가지를 주워다가 차곡차곡 정리해 놓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었다. 그런 기설이 애들 코 묻은 학급 회비 따위를 훔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 설아. 네가 한 거 아니지?”
“…….”
“아가야. 어른이 묻잖아. 대답해야지?”
“…….”
“야 이 애새끼야. 말 안 해? 말 안 하면 그 돈 내가 갚아, 어?”
“…….”
그제야 기설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제가 풀 죽도록 꾸중 듣는 건 괜찮아도, 한천마의 주머니에서 사라진 학급회비 몫의 돈이 빠져나가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주눅 든 소년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일은 천마가 해 본 어느 험한 짓거리보다 더 좆같은 일이었다. 기설의 딱 닫힌 입술을 열기까지 천마에겐 기나긴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번 말문을 틀기 시작하자 기설은 여느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그러듯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섞어 가며 제 감정을 토로했다. 긴긴 이야기 끝에 먼저 팔을 뻗어 천마를 끌어안기까지 했다.
천마는 기꺼이 기설의 말을 믿어 주었다. 학급 회비를 훔친 것은 제가 아니며, 덩치 큰 체육 선생이 위협을 하기에 방어한 것뿐이며, 저를 놀리려고 알파들이 멋대로 옷을 벗겼다는 말이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슬픈 감정을 혼자 삭이는 기설의 보호자 행세 하기는 생각 외로 재밌었다. 학급 회비를 훔친 진범은 험상궂은 끄나풀들을 학교 주변에 배치해 놓자 금세 잡혔다. 체육 선생은 폭행죄로 고소하여 학교에서 퇴출했다. 주도해서 기설을 괴롭힌 알파에게는 접근 금지 명령까지 떨어지게 해, 그들 가족이 신산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이외에도 기설은 종종 소란을 일으켰다. 9할은 그는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들들 볶는 탓에 일어난 일이었고, 1할은 들들 볶이다 못해 폭발한 기설이 저지른 사고였다. 그때마다 천마는 나서서 편을 들어 주었다.
“설아. 남한테 욕을 해도 괜찮고, 몇 대 패도 괜찮고, 실수로 죽여도 괜찮아. 대신에 전부 내가 보는 앞에서 해. 어쭙잖게 숨기려고 낑낑거리지 마. 시답잖은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마.”
그 덕분에, 기설은 무척 기고만장한 꼬맹이로 성장했다.
기설에게 새 교복을 지어 입히던 날에, 천마는 문득 제가 거둔 소년이 제법 예쁘다고 생각했다. 가진 상처가 모두 아물고, 말라빠진 팔다리며 볼품없던 목이 길고 튼튼하게 뻗고 보니, 소년은 인형처럼 예뻤다. 눈도 코도 입술도 자로 재 가며 빚어낸 듯 뚜렷한 것이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다른 치들 말에 의하면 기설은 전보다 더 건강해졌고, 또 멋있어졌다는데, 천마의 눈에 그는 그저 예쁜 아가였다. 제가 해 준 일이라고는 집구석의 방 하나를 내어 주고, 계절마다 입을 옷을 챙겨 주고, 굶지 않을 수준으로 밥과 용돈을 챙겨 주고,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보일러를 대 줄 뿐인데도, 기설은 눈에 띄게 변했다. 훨씬 밝아졌고, 순해졌고, 귀여워졌다.
해가 지날수록 정리할 일이 많아, 천마가 늦게 귀가한 밤이면 기설은 퉁퉁 부은 눈을 달고 잠옷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미적미적 현관 앞으로 다가와서는,
“다녀오셨어요,”
멋쩍게 인사했다. 개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천마는 생각했다.
기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눈 깜빡하면 훌쩍 변해 있는 식이었다. 어느 날 주말에 기설은 같이 영화를 보러 가면 안 되냐고 졸랐다.
“친구들 다 봤다는데, 되게 재밌대요…. 남들 다 보는 거, 저랑 형님만 안 보고 사는 거 같아요.”
언젠가는 부하들이 하는 소리를 주워듣고는 ‘형님’, ‘형님’ 하며 천마를 새로운 호칭으로 불렀다.
“나중에 저는 왼팔 시켜 주세요. 저 잘할 수 있습니다, 형님.”
천마가 출장을 다녀온 새에 더러운 길고양이를 주워다 놓고 오늘부터 키울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이름도 지었는데요. 경이라고 부르게요.”
또 어떤 날 밤에는, 두 남자 사이에 시선의 높낮이가 부쩍 줄어들었다.
“우리… 계속 같이 사는 거죠? 형.”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설의 주민 등록증은 잉크가 말라 보송보송했다.
그 어떤 날에 천마는 기설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타고나길 길바닥 짐승이어서 그런지, 제 손으로 키운 아이를 잡아먹으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일랑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제가 키우고 제가 다듬어 내고 제가 지켜 낸 아이여서 그런지, 하나하나 발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눈물로 두 눈이 팅팅 부은 채 잠든 기설을 끌어안고, 천마는 즐거운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단꿈을 짧게 꿨다.
“…….”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는 그들의 침실을 휘 살폈다. 정수리 위에는 건방진 고양이가 뱃살을 늘어뜨리고 누워 있었고, 그의 팔 안에는 기설의 허리가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기설의 등 뒤로, 언제 방을 옮겨 온 건지 새근새근 이불을 덮고 잠든 이지가 보였다.
잠시간 잠결을 헤매다가, 천마는 기설의 따끈한 잠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그의 복부에 남은 길고 짧은 흉터들을 더듬었다. 세월 대신 사고의 나이테를 지닌, 기설을 확인하고 천마는 안도했다. 그대로 두 팔 뻗어, 그는 제 어린 베타와 딸아이를 한데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이제 한천마는 꿈자리가 그리 두렵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절의 꿈을 꾸건, 그는 자신이 아는 단 한 가지 형태의 집을 득달같이 지어 낼 자신이 있었다.
<허니 펀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