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한천마의 집도 꼭 그와 같았다. 그의 집은 친절하지 않다.
짙은 회색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면 곧바로 라운지가 드러난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좌측 공간은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나쁘게 보자면 휑한데, 어두운 조명 아래에 기다란 테이블과 벤치형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손님을 위한 공간은 그게 전부다. 화분 하나 없이 검은 가구로 채워 놓은 삭막한 자리 너머, 집주인의 사적인 영역으로는 고개를 기웃댈 창문조차 없었다.
그래도 대다수 손님은 방문에 만족했다. 삭막한 라운지 벽면을 채운 작품들 덕이었다. 값나가는 작품들은 이곳이 주택의 초입인지 도심의 갤러리인지 분간되지 않게 했다. ‘한천마의 소장품’이란 이유만으로 더욱 대단하고 의미 있어 보이기도 했다. 손님들은 그의 안목을 훔쳐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뒀다. 정작, 한천마가 가장 아끼고 또 가장 값나가는 작품은 따로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말이었다.
<빛과 잎, 01>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그 추상화는 집 안의 중심부, 거실 벽면에 존재했다. 2층 천장까지 환하게 이어진 높이와 5m 너비의 벽면에는 언제나 햇볕이 닿았다. 천장의 창을 통해 떨어진 햇볕은 아침이면 샛노란 마름모를 그렸고, 점심이면 하얀 정사각형으로 변했다가, 저녁이면 주홍색 직사각형이 되었다.
그러나 서정적인 전시 공간의 유효 기간은 2년에 불과했다. 이 집의 가장 어린 식구, 한이지가 두 살이 되자마자 말끔한 인테리어는 풍파를 맞닥뜨렸다. 크레용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지는 제 손이 닿는 구역 구석구석 낙서를 남겼다. 한 해가 다르게 값이 겅중 뛰는 유명 화가의 작품조차 이지에겐 스케치북에 불과했다. 작품 귀퉁이에까지 크레용 낙서를 새기고야 만 것이었다.
그래도 천마는 작품을 작가에게 도로 맡기거나, 전문가를 써 낙서를 지우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 딸아이의 지성 없는 낙서가 천진난만한 그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설의 의견도 그와 같았다.
잘빠진 턱에 중지를 얹고, 진지한 얼굴로 기설이 말했다.
‘멋진 오징어 그림이네요.’
‘…집이잖아. 세모난 게 지붕이고.’
‘아하.’
다가온 주말에는 사람을 불렀다. 벽면 하단을 작품 색에 맞추어 파스텔 톤으로 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갖은 도구를 챙겨 온 전문 인력은 금세 퇴근했다. 페인트 롤러를 처음 만져 본 기설이 흥미를 보였고, 천마가 벽 하나를 그에게 내준 덕이었다. 주말 내내 페인트칠을 하면서 기설은 즐거웠다. 더불어 잘하기까지 했다. 기설이 어여쁘게 발라 놓은 벽면은 고스란히, 한이지 전용 스케치북이 됐다.
‘많이 더러워지면 내가 다른 색으로 덧칠할게요.’
기설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가 그려 놓은 고양이와 두 아빠, 86cm 높이 직선 위에 새로 그린 89cm의 키를 잰 흔적보다 예쁜 색은 없었다.
천마는 온 집 안을 통틀어 그 벽면 자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체형에 맞추어 공산품보다 크게 제작한 소파에 앉아 감상하기에 딱이었다. 소파 바로 옆에는 가죽 에그 체어가 자리했는데, 둥그스름한 의자 정중앙엔 하루 24시간 중 14시간가량 고양이가 들어앉아 있었다. 늙고 건방지고 뻔뻔한 고양이는 에그 체어가 제 전용석인 줄 아는 듯했다.
천마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은 부엌에서 이어지는 정원의 휴식 공간이었다. 구태여 정원이 있는 집을 찾아 깐깐하게 인테리어를 맡긴 집주인치고, 천마는 그 자리에서 낮잠을 자지도, 커피를 마시지도,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노래를 듣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잘 가꾸어 낸 정원의 존재 의의는 하나뿐이었다. 일찍 귀가한 날에 그곳으로 직행하여, 햇볕에 발을 내놓고 낮잠 자는 기설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그 밖에도, 어린아이가 널브러뜨린 장난감이며 고양이가 흘리고 간 수염이며 갖은 생활감이 넘치는 집 안 곳곳을 천마는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편안하게 하는 곳은 단연 2층의 침실이었다. 기설이 이지를 위해 아이의 방을 꾸며 주었다면, 천마는 기설을 위해 그들 침실을 꾸렸다.
방 한가운데에 배치된 캘리포니아 킹 사이즈 침대는 밤마다 호텔에 휴가를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기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은 아주 큰 사이즈로, 맞은편 벽면에 설치했다. 원한다면 언제든 암막 커튼을 쳐 놓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심해 괴물이나 외계인 따위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요즈음 기설의 관심사는 닭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였다. 장을 봐 온 헬퍼와 부엌에 마주 서서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란 닭이 어떤 알을 낳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꼬꼬댁’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리는 이부자리 곁에는 미니 냉장고까지 딸려 있었다. 서재의 책장 한편에 국어사전과 육아 노트, 그리고 포테이토 칩 쿠키 상자가 같이 꽂혀 있는 꼴을 본 천마가 따로 선물한 것이었다. 미니 냉장고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기설이 먹는 것이라면 뭐든 제 입에도 넣고자 하는, 두 살 아이의 감시를 피해 어른용 간식을 숨겨 두는 저장고였다.
기설은 그들 침실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다고 듣기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고, 너무 저만 위해 준 게 아니냐며 괜한 걱정을 늘어놓기도 했다. 기설이 기뻐하는 만큼이나 천마도 그 공간을 사랑했다. 사각형의 침실 안에 그 자신의 페로몬과 기설의 체취가 한데 뒤엉켜 넘실거리는 것이 특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천마는 완벽한 방에 존재해선 안 될 소품을 발견했다. 침실에 딸린 욕실의 귀퉁이, 휴지통 뒤에 떨어진 그것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벌써 포장을 뜯고 사용까지 마친 상태였다.
“…….”
이마를 찡그리며 천마는 기다란 작대기를 집어 들었다. 막대 끝에 코를 대고 냄새부터 확인했으나, 쓰인 지 오래된 듯 무취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자 결과 표시 창에 뜬 붉은 줄 하나가 보였다. 음성이었다.
그에 천마는 몹시 불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명명백백하게 제 불만의 근거를 밝힐 수 없었다. 아무튼 기분이 나빴다.
심기가 팍 상한 채로 그는 욕실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짜증을 삭이려 노력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불만의 형체는 분명해지기만 했다.
뭐가 문제냐 하면, 기설이 임신 여부를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기설이 양변기에 얌전히 앉아 소변을 보고,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쥐고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조차 천마를 넌더리 나게 했다. 기설은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고, 임신을 해선 안 되는 몸이었다. 그런 주제에 왜 남몰래 임신 테스트기 따위를 구해 와서는, 제 소변을 찔끔 묻혀 임신 여부 따위를 확인하고, 구태여 실망을 느끼느냔 말이었다.
결국 천마는 제 불만을 침실 한가운데로 가져갔다. 한 줄을 띄운 임신 테스트기를 커피 테이블 중앙에 올려놓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 뭐 하고 있니?”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밝고 상냥했다.
“잠시만 이리 와 볼래?”
그에 기설이 ‘네’ 하고 저 멀리서 우렁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경쾌했다. 그러나 침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기설은 두 발을 우뚝 멈췄다.
“…왜요?”
막 건조를 마쳐 보송보송해진 새 잠옷 차림으로, 싱글벙글하던 기설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천마의 표정을 힐끔힐끔 살피다가, 기설은 커피 테이블 위의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했다.
그의 고개가 문 뒤로 슬금슬금 후진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제 맞은편 자리를 손짓하며 천마가 말했다. 기설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화제를 바꿀 수는 없을까 고민하는 눈짓이었다.
“얼른.”
천마가 재차 말했다. 그제야 기설이 쭈뼛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며, 그는 얼른 변명했다.
“혹시 몰라서 그냥 써 본 거예요.”
소리 없이 의자에 착석하는 기설의 전신을, 천마는 한눈에 훑었다. 이마와 콧잔등은 반질반질하고, 턱은 다부진데 뺨은 탱탱했다. 전신에서 생기가 넘쳐 흘렀다. 너른 어깨와 늘씬한 허리, 탄탄한 근육으로 빛나는 그는 젊은 베타였다.
저 몸이 철저하게 망가지는 데에 일곱 달이 걸렸다. 작금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까진 2년이 걸렸다.
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질질 흘리던 모습일랑 천마는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너….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 다 잊었어?”
매섭게 얼굴을 굳히며 천마가 물었고,
“안 잊었어요.”
기설이 재깍 대꾸했다. 그저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어째서 천마의 심기가 상한 듯 보이는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변명할 순 있었다.
“확인 정도는 해 볼 수 있잖아요. 그냥…, 진짜로 그냥요. 혹시 몰라서 해 본 거라니까요.”
“해 볼 필요도 없잖아.”
“그래도 전에 형이랑 노팅을 했으니까.”
“아니. 임신할 거 같았으면 노팅도 안 했어.”
어차피 아기집이니 무어니, 그런 것은 더는 기설에게 남아 있질 않았다. 그는 이제 완전한 베타였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고 천마도 수차례, 안전한 검사와 검진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한데 아직도, 기설은 ‘혹시’로 시작되는 망상을 껴안고 사는 듯했다. 그는 그만큼 순진하고 그만큼 엉뚱했다. 모두가 기형이고 불완전하다고 말해도 저에게는 기적이고 완벽했던 아이, 이지를 임신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같은 기적이 두 번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멍청하게 믿는 것이었다.
“…설아.”
그렇게 부르기만 할 뿐,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통이 이는 듯한 착각에 그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이내 엄지 끝마디로 소지의 절단면을 문질렀다.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보이는 습관이었다.
기설은 자신이 이지를 창조해 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 아이를 제 배 속에서 지켜 내고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련의 시련은 훌륭한 모험담이 됐다. 이지의 존재는 기설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런 기설에게 두 번 다시 같은 기적은 없을 것이라고, 천마는 차마 짚어 줄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 제 손가락도 잘라 냈건만 기설을 실망시키는 일은 그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
때문에 천마는 그저 침묵했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선 이는 기설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는 천마의 무릎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곤 두 팔 벌려, 근심으로 얼룩진 아름다운 알파를 끌어안았다.
“형.”
천마의 머리를 부둥켜안고서 기설이 말했다.
“나도 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요. 진짜, 별 뜻 없었어요.”
“설아.”
“나 이제 안 아플게요.”
언뜻 이상하게 들리는 문장이었다. 그래도 천마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그는 세상 무엇보다도, 하물며 평생에 걸친 복수로 손에 쥔 SS 그룹의 존위보다도 기설의 건강에 집착했다.
기설도 그 사실을 알았다.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제 배 안에 움튼 작은 아이를 꺼낸 이후 1년간 그는 만삭 때처럼 자주 아팠다. 평소 자랑할 것이라곤 건강뿐이었건만, 평생에 그렇게 잔병치레를 한 해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찬 음식을 먹으면 꼭 배탈이 났고, 멀쩡하던 발톱 하나가 갑자기 빠지더니 새로 자랐다. 격렬한 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고, 평소처럼 걸어 다녔을 뿐인데 발목에 금이 갔다. 더운 날이면 더워서, 추운 날이면 추워서, 환절기면 또 환절기여서 몸살이 났다.
그때마다 간병은 천마의 몫이었다. 감기 한번 걸려 본 적 없는 극우성 알파의 병시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극진했다. 하루건너 또 하루, 기설의 몸에 남은 출산의 흔적들을 복습하는 날들이었다.
“그래.”
미심쩍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마는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어디 불편한 덴 없고?”
문득 기설은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만일 형님께서 사람이 아닌 귀신이었더라면, 목소리를 변조해 가며 사람을 속이고 뼛속까지 발라 먹는 범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장산범’이 아니라 ‘신산범’이라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냥한 말씨에 현혹되었다가 두 번 다신 발을 못 빼고 사로잡혔겠지.
그러곤 아리송해졌다.
‘지금이랑 별로 다르지 않은데…?’
멍하니 망상에 잠긴 기설의 엉덩이를, 천마가 ‘팡’ 소리 나게 두들겼다.
“설아.”
“아야, 네?”
“아픈 곳은 없냐니까.”
“엉덩이 아파요, 형.”
맞은 쪽 엉덩이를 손으로 덮으며, 기설이 구시렁거렸다. 그에 천마는 능청스럽게 베타의 엉덩이를 쓰담쓰담 어루만져 주었다. 새 잠옷의 원단이 보드랍고 매끄러운 덕에, 탄탄한 엉덩이를 움켜쥐는 감촉은 두 배로 좋았다. 그 바람에 천마는 기분이 좋아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는 제 왼쪽 허벅다리에 기설을 주저앉혔다. 그러곤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디 보자, 우리 아가. 용돈이 모자라진 않아?”
“안 모자라요.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해요.”
기설이 순순하게 대답했다.
그에겐 지갑과 함께 선물 받은 카드가 하나 있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유치한 카드를 들고 다니기 머쓱하다고 구시렁거린 날, 저녁에 선물 받은 물건이었다. 제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진 카드를 쥐고, 기설은 담력 시험을 하는 기분으로 백화점에 들렀다. 그러곤 ‘잔액 부족입니다’ 안내가 돌아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비싼 넥타이와 구두, 원피스를 구입했다. 넥타이는 한천마의 목에 걸렸고 구두와 원피스는 이지에게 입혀졌다.
그런데 다음 달 1일, 카드사에서 연락이 왔다. 첫 달 전월 실적을 못 채우셨는데, 혹시 저희 서비스가 충분치 못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소리에 기설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리바리하며 전화를 끊고 문진주에게 짧은 강연을 들었더랬다.
“내 카드…, 평소엔 형이 쓸래요? 나는 필요할 때마다 빌려서 쓸게요.”
기설이 은근슬쩍 꺼낸 말에, 천마는 황당하다는 듯 즉답했다.
“번거롭게 왜 그 짓거릴 해?”
“…….”
“왜. 현금이 필요하니? 뭘 사고 싶은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스물다섯 살의 다 큰 베타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천마는 그를 아이 다루듯 했다. 등허리를 도닥거리며 일거수일투족을 캐묻는 식이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바꾼 주치의는 친절한지, 헬퍼가 요리하는 이지의 식사는 마음에 드는지, 새로 온 기사는 또 어떤지… 질문은 다양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다.
“다들 친절하고, 일 잘하고, 괜찮아요.”
기설은 고용인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애초에 남을 평가하는 일 자체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천마가 일일이 거론하며 물을 때에나 고민하는 시늉을 보일 뿐, 결론은 늘 ‘다 좋다’였다.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천마가 또 한 번 확인했다.
“다 좋아? 운전기사도?”
“조한 씨요? 네. 운전도 잘하고…. 괜찮은 사람이던데요.”
사실 기설은 윤조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알게 된 지 고작 두 달째였지만, 두 달 내내 그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약속된 시간에 절대 늦지 않았고, 운전은 반드시 안전하게 또 부드럽게 했다. 무엇보다 피부가 좋고 반듯반듯한 인상이라 낯을 많이 가리는 이지가 싫어하지 않았다. 이미 기설은 그와 벌써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런들, 구태여 형님 앞에서 남과 친한 척 티를 내진 않았다.
문진주만 하더라도 그랬다. 문 사장님이던 그는 기설에게 ‘진주 형’이 된 지 오래였고, 강명경도 사석에서는 ‘명경이 형’, 이지 앞에서는 ‘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한천마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기설에게 형이어도 되는 존재는 한천마뿐이었다.
“흠….”
목구멍 안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를 내며, 천마는 몇 초간 기설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심문을 마쳤다.
어리둥절하니 멀뚱멀뚱 그를 마주 보다가, 기설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지 푹 잠들었어요, 형.”
천마는 그러한 말들에 일일이 설레지 않는다. ‘그러니 섹스를 하자’는 의미로 알고 몇 차례 기설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치킨 시켜 먹을래요?”
“후우….”
한숨의 의미를 모르는 것인지, 혹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기설은 웃음 지었다. 볼우물이 패도록 웃는 낯이 천진난만했다.
***
성인 남자의 허리에 정수리가 닿는, 커다란 테디베어는 돈 냄새 나게 꾸며진 상태였다. 복슬복슬한 머리에는 뜨개 모자가 씌워졌고, 허리에 두른 하늘색 앞치마에는 딸기 자수가 놓였다. 하얀 씨앗을 표현하는 데에는 조그만 진주알이 쓰였다. 당장이라도 인형에게서 벗겨 여느 아이에게 입혀도 손색없을 퀄리티였다.
윤조한은 장식용 테디베어를 방패 삼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 함을 열고 새로운 연락은 없는지 확인하는 엄지가 다급했다. 기대와 달리 그가 기다리던 이로부터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제가 보낸 문자가 어땠는지 복기하면서 조한의 두 눈은 점차 가늘어졌다. 제 쪽에서 안달복달 난 기색을 보여 버린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점잖고 성실한 인상으로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상대의 무응답에 안달이 난 바람에 어린 티를 내 버린 것도 같았다.
화면 위를 문지르던 손은 금세 멈췄다. 시야 밖에서 아른거리는 손짓을 알아채고 그는 재빨리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그로부터 서너 발짝 떨어진 거리, 주얼리 브랜드의 키즈 매장 한가운데에서 기설이 재차 손짓했다. 다가오라는 의미인 줄 알고 한 발 다가섰다가, 윤조한은 주춤거렸다. 그의 예상과 달리 기설은 멀리 떨어진 곳의 카우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조한은 잠시간 머뭇거리다, 기설의 뜻대로 편한 자리로 가 앉았다. 오전 내내 혼미하게 바빴던 탓에 정신이 다소 멍했다.
그가 동행하는, 기설의 일정이 특별히 힘든 업무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기설은 화원에 들러 올리브 나무 한 그루를 샀다. 그러면서 그는 고양이에게 무해하다는 식물 여러 종을 추천받아, 예정에 없던 세 개의 화분을 더 구매했다. 다음으론 가구점을 찾아가 주문해 둔 의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백화점에 도착한 뒤 쇼핑만 두 시간째였다.
어디에서건 궂은일을 담당해 온 윤조한이었다. 오늘처럼, 백화점 안을 누비면서 누구의 짐이나 들어 주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쇼핑 조수라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언제 끝날지 명확한 기준이 없었고, 들렀던 곳을 두세 번씩 되돌아가며 봤던 물건을 보고 또 봐야 했다. 각 브랜드 매장마다 상주하는 직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해서, 차마 건성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쉬운 일이리라 상정했던 탓에 더더욱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윤조한은 나름대로 운동광이라 자부했다. 주말에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 도장을 찍어 왔다. 그런 그조차도 이렇게 피곤한데, 도대체 기설은 반나절 내내 어떻게 저토록 쌩쌩한 건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조한과 달리, 한 팔 안에 두 살 아이를 내내 안아 들고 다녔다.
‘누가 누굴 지키는 건지 모르겠네….’
내심 조한은 백기를 흔들었다. 지친 기색 한 올 보이지 않는 기설의 체력이 못내 부러웠다. 한천마와 동거하는 어린 애인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상상한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둘 사이에 자식까지 있단 소리를 듣고, 그가 떠올린 기설이라는 남자는 여리여리한 오메가였다. 일과를 도울 기사가 필요할 정도라면 약한 사람일 테고, 한천마의 선택을 받았으니 그만큼 매력 있는 남자일 터였다.
새롭게 주어진 업무를 잘 해내고자 조한은 기설과 관련된 서류까지 구해다가 살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어떤 자료에도 그의 사진이 실려 있질 않았다.
때문에 조한은 기설을 만난 첫날 무척 당황했다. 한천마의 실물을 처음 본 날 받은 충격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는 조한이 떠올린 ‘예쁜 남자’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그와는 대척점에 선 매력을 지닌 베타였다. 한천마의 개인 경호실장이라는 직급이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깨는 딱 벌어졌고 전신에는 군살 한 점 없는 데다, 긴 팔과 다리는 겉보기에도 단단했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몹시 형형했다. 그야말로 광채가 도는 눈동자였다.
오늘, 기설은 그 빛나는 눈동자로 머리핀 두 개를 진지하게 살피고 있었다. 좌측에 놓인 핀은 돌고래 모양으로, 큼직한 터키석을 가공해 만들었다. 우측에 놓인 핀도 그와 비슷한 물고기 형태였는데, 조그만 오팔 두 개가 구피 커플처럼 맞붙어 있었다. 왼쪽, 오른쪽… 기설은 두 개의 머리핀을 번갈아 이지의 조그만 머리 위에 대 보았다. 그리고 종알종알, 자기주장 강한 두 살 아이와 진지한 논의를 나누었다.
“이지는 주황색이 더 좋아? 왜 주황색이 좋아?”
“왜냐면, 왜냐면은 이거는 물고기가 두 마리야.”
“음…, 근데 돌고래는 혼자잖아. 이 돌고래도 이지 머리에 붙이면, 이지랑 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으음…. 그래도 물고기가 좋아.”
“그래? 그렇구나.”
이지의 뜻대로 구피 모양 머리핀을 결제하면서도 기설은 돌고래 모양 머리핀을 옹호하길 쉬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조한이 듣자 하니, 오팔의 독특한 무늬가 그 돌고래를 특별한, 줄무늬 돌고래로 만들어 준 듯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냥 사지.’
조한이 생각했다. 점원의 생각도 그와 같은 듯했다. 결제를 마치는 기설 옆에 붙어서, 보석을 세공한 디자이너의 이름이며 한국에 딱 하나 들어온 물건임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자니 그랬다. 그래도 기설은 푸른 머리핀을 구매하진 않았다. 그의 지갑은 그보다는 이지의 결정력에 따라 열리는 듯했다.
긴 시간을 들인 쇼핑이 끝났다. 결과적으로 조한의 팔에 들린 짐은 그리 많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돌고래 생각을 지워 내면서, 기설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주어진 돈이 적으냐면 그렇진 않았다. 마구잡이로 쇼핑을 한다고 해서 혼이 나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의 형님께서는 기설의 안목을 몹시 높게 샀다. 기설이 갖고파 하는 물건이라면, 그에 얼마를 쓰건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기설은 소비에 있어 조심스러웠다. 제가 쓸 물건은 꼭 필요한 것만 구매했고, 이지에게 쓸 물건도 이지 본인이 원하는 것만 구매했다. 만에 하나 잡초를 불로불사의 영약으로 속아 백억에 구매한대도 잘했다고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 사기꾼의 목을 칠 형님이었지만, 그래도 귀한 돈을 바보처럼 쓰고 싶진 않았다.
점심시간이 벌써 지나 버린 탓에 카페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텅 빈 계산대 앞으로 가 기설은 차근차근 메뉴를 살폈다. 그런 기설의 뒤로, 자리를 지키던 손님 중 하나가 일어나 다가왔다.
“아기가 참 예쁘네요. 아까 매장에서 화보 사진으로 본 것 같은데, 혹시 모델인가요?”
듣기 좋은 칭찬의 근원지를 향해, 기설이 고개 숙였다. 구불구불한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흰 코트를 입은 여자가 그의 곁에서 미소 지었다. 기설도 그에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모델은 아니에요.”
기분 좋게 물꼬를 튼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참 예쁘다, 착하다, 순하다… 이지를 칭찬하는 말에 기설은 우쭐했다. 그와 달리, 어깨를 단단하게 굳힌 채 눈치 보는 이는 윤조한이었다.
‘작업 거는 걸 모르는 건가, 지금?’
아니나 다를까, 긴긴 대화 끝에 여자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조카 사진을 보여 주는 척 시늉하다가 연락처를 묻기도 자연스러웠다. 그제야 기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멋쩍은 듯 말했다.
“저… 아기 아빠입니다.”
그와 동시에, 어른들의 긴 대화에 지친 이지가 소리쳤다.
“오빠, 오빠. 이지 배고파.”
“…….”
“…….”
두 성인 남녀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쪽은 기설이었다.
“진짜… 아빠 맞습니다. 이건, 고양이가 저를 오빠라고…, 아니, 제가 고양이를 키우는데 걔 앞에서는 오빠라고 불려서. 아니, 제가 저를 그렇게 불러서요….”
“네…. 그러시군요.”
서서히 흐려져 가는 미소를 애써 유지하다가, 김이 샌 듯 여자 손님이 실소했다. 소리 내어 털털하게 웃어 버리고는, 이내 맛있는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그러곤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모카크림케이크는 절대로 주문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기설은 아보카도샐러드와 몬테크리스토샌드위치, 부드러운 크림빵,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 그리고 이지 몫의 데운 두유를 주문했다. 메뉴는 모두 테이크아웃했다.
걷기 싫어하는 딸을 안아 든 기설을 대신하여, 음식을 챙기는 일은 조한의 몫이었다. 종이 가방과 음료 두 잔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반질반질한 범퍼를 뽐내는 벤틀리에 도착하자마자 조한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러곤 두 부녀가 타기를 기다렸다가, 챙겨 온 음식과 음료를 조심스레 옆좌석에 내렸다.
트렁크 안에 쇼핑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실은 뒤 조한은 운전석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뜻밖에, 부스럭거리는 소음과 함께 기설의 손이 불쑥 뻗어 왔다. 당황한 채 조한이 돌아보자,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가 보였다.
“밥 좀 먹고 출발하죠.”
그러면서 기설은 이가 보이게 웃었다.
“카페에서 자리 잡고 좀 편하게 먹으려고 했는데, 어색해서….”
황당하다는 듯, 재밌다는 듯 웃는 얼굴이 조한을 놀라게 했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보여 준, 제 나이대의 청년처럼 보이는 웃음이 천진난만했다. 그마저 이지가 뻗은 손에 의해 닦이고야 말았다.
“그래, 이지도 배고파?”
기설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먹일 때면, 기설은 제 딸 이외의 외부 요소는 전부 잊어버렸다. 두 살 어린아이와 그는 하루 종일 대화했다. 샌드위치를 느릿느릿 먹어 치우며, 조한은 백미러를 통해 그들 부녀를 구경했다.
꾸물꾸물, 크림빵 조각을 쥔 손을 펼치며 이지가 물었다.
“있잖아, 여기는, 여기는 왜 줄이 있어?”
조그맣고 부드러운 손에서 후두둑, 크림 덩어리가 떨어졌다. 기설은 옷 위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음…. 이건 있잖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긴 건데… 손금이라고 하는 거야. 손금.”
“손….”
“손금.”
“손…. 손금.”
“그래. 손이 접히면서 줄이 생기는 건데….”
말끝을 흐리며 기설은 입맛을 쩝 다셨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알려 주는 것은 아무래도 재미가 없었다. 잠시간 고민하다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이지의 손아귀에 남는 빨대 하나를 꼭 쥐여 주며, 기설이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 이지가 아기 때는 말이야, 아빠 배 속에서 탯줄이라는 거로 아빠랑 이어져 있었어. 그때 우리 이지가 아빠를 안 놓치려고, 그 줄을 꼭 잡고 지냈거든.”
그러면서 기설은 이지의 손에 제 검지를 쥐게 했다. 좌로, 우로 살살 흔들어 주자 이지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근데 아빠 배에서 나올 때가 돼서, 쑤웅 하고 나올 때는 이제 탯줄이 필요 없어져서, 이지가 줄을 놓았어. 그래서 줄을 잡았던 자국만 여기 손바닥에 남은 거야.”
쑥, 손가락을 빼내며 기설은 부러 아이의 손바닥을 손끝으로 긁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이지는 놀란 듯 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곤 재차 제 손금을, 그리고 기설을 번갈아 살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며 정수리의 가르마까지 한천마를 쏙 빼닮은 한이지였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저를 낳아 준 남자가 기설임을 당당히 드러냈다. 특히나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때면,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은 작은 광채를 품고 반짝반짝 빛을 뿜어냈다.
제 손바닥을 쫙 펴 보이며, 이지는 자랑하듯 말했다.
“이지가 꼭 잡았어!”
“그래, 정말 잘했어. 이지가 아빠 꼭 잡고, 아빠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
“응. 이지도…, 이지도.”
“이지도 아빠한테 고마워?”
“응.”
“그럼 이거 한 입 더 먹자.”
“응.”
편식 심한 아이에게, 차량 뒷좌석에 앉아 크림빵 한 조각과 두유 세 모금을 자연스레 먹이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더랬다. 특히나 이지는 타고나길 작고 여렸다.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고비를 여럿 넘기며 살아남은, 체중 미달의 어린아이에게 ‘싫으면 먹지 마’ 하며 밥상을 치워 버리는 방법을 쓸 순 없었다.
대신에 기설은 이지가 먹고파 하는 것을 조금씩, 자주 먹이길 택했다. 유아용 쿠키, 우유와 반반 섞은 요거트, 채소를 넣지 않은 국수, 곰돌이 젤리의 머리만 제외한 부분, 김과 흰 밥 등 원하는 게 생길 때마다 먹이고 또 먹였다.
오늘처럼 다른 대안 없이 바깥에서 식사할 때, 기설은 두 살 아이를 정신없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메뉴 투정을 할 새도 없이, 이지가 건네는 모든 ‘왜’에 열심히 대답을 꾸려 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설은 크림빵을 바삐 뜯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이지야. 아… 읍.”
소리 내며 크게 벌린 기설의 입이 턱 막혔다. 크림 묻은 손으로 기설의 입술을 가로막으며, 이지가 종알거렸다.
“여기. 여기는 왜 이렇게 생겼어?”
그에 기설이 장난스레 ‘으브븝’ 소리 내며 입바람을 불었다. 볼이 봉긋해지도록 웃음을 터뜨리며, 이지는 크림으로 더러워진 기설의 입술 위를 거듭 만지작거렸다. 명경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입술 위의 자국을 지워 주려는 동작이었다. 명경의 경우 그 자욱이 흉터였지만, 오늘 이지가 새로이 발견한 것은 기설의 인중이었다.
“여기는 인중이라는 건데….”
윗입술에 묻은 크림을 혀로 핥아 없애며, 기설은 제 외투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 소독제와 물티슈, 비타민 젤리와 함께 조그만 손거울이 튀어나왔다. 이내 이지의 얼굴이 거울 안에 비쳤다.
“이지한테도 있어. 보여?”
“응.”
더듬더듬, 이지가 제 입술 위를 매만졌다. 아이의 입에 빵조각을 넣어 주며, 기설이 속삭였다.
“아빠가 우리 이지 다른 아기들이랑 안 헷갈리려고, 우리 이지 태어난 날 여기에 손가락을 콕 찍었지.”
그러면서 그는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손끝으로 아주 살짝 맞대자, 이지의 조그만 인중과 그의 손 끝마디가 얼핏 딱 맞아 보였다. 이지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래서 아빠 딸이라고 자국이 남은 거야.”
뒤이어 도란도란,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면서 이지는 빵 한 조각을 다 먹었다. 배가 부르고 몸이 편안해지자 이지는 기설의 어깨에 대고 작게 트림했다. 대화의 흥이 꺼지지 않은 듯 종알종알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조잘대기도 잠깐,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통해 부녀의 모습을 살피면서, 조한은 조용히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기설은 외투를 포대기 삼아 이지를 편안하게 안아 주었다. 그의 상체에 코알라처럼 안긴 채 이지가 작은 숨을 색색거렸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조한이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아. 예?”
기설의 반응은 조한을 머쓱하게 했다. 아이에게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빵을 먹이는 동안에, 기설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기색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조한을 볼 뿐만 아니라,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동자를 어리둥절하게 굴렸다.
아주 작게 헛기침을 하며, 조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따님을 훌륭하게 키우고 계시잖습니까.”
그러자 기설의 반응이 더욱 모호해졌다. 눈을 끔벅이며, 백미러를 통해 조한과 시선을 마주할 뿐 그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질 않았다. 차량 내부의 훈훈한 분위기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제 실수를 깨닫고, 조한이 바삐 사과했다.
“주제넘은 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오늘 종일 아가씨께서 아주 행복해 보이셔서요. 전에 일하던 부서에서는 못 보던 광경이라….”
“아아.”
그제야 기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뒷좌석 시트에 등을 기대어 붙이며, 그는 흘러내린 이지의 오른팔을 제 어깨에 편히 걸쳤다.
“…….”
그리고 침묵이 닥쳐 왔다. 조한은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주차장 자리에서 천천히 차를 빼냈다. 백화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 너른 도로에 오른 뒤에도, 기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한 또한 구태여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말을 뱉지 않았다. 얌전히 운전대를 쥐고, 아주 조심스럽게 차를 몰 뿐이었다.
붉은 등 신호 앞에 멈춘 뒤에야, 기설이 텁텁한 침묵을 깨 주었다.
“형, 원래는 무슨 일을 하셨댔죠?”
조한은 그 질문이 못내 반가웠다. 어색한 분위기에 좀이 쑤시고 갈증이 나던 참이었다.
“작년 한 해 내내 건설 팀에 있었습니다.”
“으음….”
토닥, 토닥… 기설은 습관적으로 잠든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SS 건설은 워낙 덩치가 큰 회사여서, 단순히 ‘건설 팀’이라는 말만으로는 윤조한이라는 남자가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조한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알면서도, 그는 구태여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며 지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수다를 이어 가 보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질문을 건넸다.
“기설 씨는… 경찰 대학을 다녔다고 그러셨던가요.”
그러자 잠든 아이의 등을 도닥이던 기설의 손이 멈췄다.
“…….”
윤조한이 그러했듯이, 기설 또한 제 입으로 자신의 출신이나 학벌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었다. 조한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기설은 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조한의 말마따나 기설이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신산 대학교의 경찰 행정학과 신입생 명단에, 한천마가 그를 꽂아 넣다시피 했다. ‘개인 경호실장’이라는 직급을 대뜸 달아 주던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학교에 건물이라도 새로 지어 준 것이냐고, 심각하게 묻는 기설을 향해 천마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고 핀잔을 꽂았다.
제대로 시험을 친 적도 없고 면접을 본 적도 없으니, 부정 입학일 게 뻔했다. 기설은 그 호의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그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그는 계절마다 자주 아팠고, 아프지 않은 날은 이지를 키우느라 바빴다.
대학생이라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천마는 기설을 유혹했다. 한번 다녀오기나 해 보라며 엉덩이를 두들겨 대기에, 별수 없이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자리에 모습을 비추기는 했었다. 그러곤 곧바로 휴학 신청을 했다.
제각각 수줍음과 설렘, 열기를 품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들 사이에서 기설은 구경꾼이었다. 잘생긴 얼굴과 큰 키, 천마가 입혀 준 비싼 옷 덕분에 말을 걸어 오는 이들이 더러 있긴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몇몇 학생들이 기설의 휴대폰에 제 연락처를 저장하기도 했다. 그중 키가 크고 모델처럼 마른 동기 하나가 주기적으로 안부 문자를 보내 주었는데, 뭐 하냐는 질문에 아이 건강 검진일이라는 답을 보낸 뒤로는 더는 연락이 없었다.
“으음.”
아주 먼 옛날 일처럼 흐려진 기억을 되짚으며, 기설이 어영부영 대답했다.
“다녔다기보다는…, 학생이긴 한데요…. 지금 휴학 중이고… 아마 제대로 졸업도 못 할 거 같습니다.”
최대한 사실만 눌러 담은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양 양심이 찔렸다. 열 오른 귓불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네. 그러셨다고 듣긴 했습니다.”
조한이 말했다. 기설은 그가 ‘들었다’고 말하는 이야기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질문할 새가 없었다.
“늦었지만 조의를 표합니다.”
대뜸 건네 온 아리송한 말 때문이었다.
“…….”
재차 침묵하며 기설은 두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그러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들은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대외적으로, 기설의 부모는 작년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상태였다. 천마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산 사람을 죽인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이미 죽은 이도 산 사람인 양 꾸며 낼 줄을 알았다.
다행히도 조한은 기설의 침묵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 눈치였다. 그에게 있어 기설은 성실하게 대학 생활을 하다가, 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한천마라는 사업가를 만난 젊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러니 슬픔에 잠겨 입을 다물어도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2층 자택 안, 차고에 도착하여 조한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는 동안, 기설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지를 챙겼다. 아이가 깨지 않게끔 살금살금 움직이는 기설의 등 뒤로, 조한은 오늘 쇼핑한 물건들을 집 안까지 옮겨 주려 했으나 시도에서 그쳤다. 알람음을 듣고 바삐 뛰어나온 헬퍼가 그에게서 짐을 빼앗듯이 받아 간 탓이었다.
“편안하게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대신에 조한은 기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기설은 그를 한 번 돌아보더니, 작은 묵례를 건네고는 너른 집을 향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뒤에도 조한은 차고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는 도로 운전석에 올랐다. 벗어 둔 자신의 외투와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더듬더듬, 뒷좌석 시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도청기를 먼저 회수했다.
그러곤 휴대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한천마의 애인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기설, 25살, 현재 휴학중이며 한천마의 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