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설은 추웠고, 더웠다. 물에 젖는 불쾌감이 들기도 했고 바싹 건조해지는 감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완전해졌다.
딱 좋아, 완벽해… 무의식중에 기설은 흡족했다. 피부 위를 둘러싼 공기는 고양이 체온만큼 따듯했다. 복부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춥지 않았고, 호흡이 힘들 만큼 덥지도 않아 적당했다. 부드러운 수증기에 감싸 안긴 듯한 습도도 좋았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아무런 빛도 스미지 않게끔 지켜 주는, 어둠마저 편안했다.
단 하나, 별수 없이 남은 문제는 배 속 아기의 움직임이었다. 제가 잠들어도 배 속의 생명은 깨어 있을 수 있단 사실을, 기설은 임신 후에야 알았다. 태동이라는 것이 심장 두근거리듯 설레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 역시 근래 익힌 사실이었다. 특히나 이지의 태동은 갈비뼈가 저리고 뱃가죽이 아릴 만큼 거칠었다. 이따금 아기가 저를 너무 닮아, 벌써 훅 갈기는 법을 익힌 게 아닌가 싶었다.
하아, 허억… 씨근덕거리는 소음이 귀에 거슬려, 기설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이 제가 뱉는 숨소리임을 깨닫기도 전에, 누군가 그를 감싸 안아 주었다. 거목처럼 커다랗고 구름처럼 포근한 감각이 기설의 등에서부터 팔뚝, 손목을 타고 뻗어 왔다. 포옹은 손깍지로 완성되었다.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기설의 고통은 반감되었다. 헐떡헐떡 바쁜 숨결이 한결 가라앉았다.
다정은 멈추지 않고 기설을 어루만졌다. 기설이 왜 아파하는지 그 이유를 추측하려는 양, 더듬거리며 이마의 온도를 확인하고 심장이 뛰는 속도를 살폈다. 바쁜 손길이 이윽고 베타의 부른 배 위에 도착했다.
퉁.
이 안에 저가 들었다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 이지가 발을 굴렀다.
퉁, 퉁….
기설은 힘겨운 콧김을 내쉬었다. 태동이 타인의 손바닥까지 울리는 게 훤히 느껴졌다. 아픔을 참아 보려 그는 움찔 손을 웅크렸고, 누군가 힘주어 제 주먹을 통째로 움켜쥐는 감각에 눈을 떴다.
희미하게 열린 시야로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기설은 자신이 숲 한가운데 누워 있다고 착각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우며 야자나무와 행운목이 서 있었다. 백색 화분을 타고 녹색 아이비가 늘어졌다. 구불거리는 넝쿨에 붙은 이파리가 무성했다.
눈동자를 굴려 살펴본 바닥은 기설의 체형을 따라 푹신하게 눌린 채였다. 매트리스에 누운 것이 아니라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 있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딱 그만큼 편안하고, 따듯하고 온전했다.
‘꿈이구나.’
기설은 확신했다.
“…형….”
그래서 바삐 천마를 찾았다. 제 꿈까지 찾아와 손을 잡아 줄 남자는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잠꼬대하듯, 기설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이지 혼자서 낳기 싫어요.”
꿈속에서만 뱉을 수 있는 진심이 있었다. 아침이 오고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가슴 안에 고인 무거운 짐을 털어 내고 싶었다. 그리고 꿈속 한천마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아가’라고 불리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고 투정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나, 죽으면 어떡하지. 이지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형이 날 다 까먹으면, 그럼 어떻게 하지….”
경이 보내 주지 말지. 당장 보내 달라고 말한 게 아니었는데. 내가 보고 싶은 게, 경이만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홀가분하게 경이 방을 비워 버리고서 저마저 홀가분하게 놔 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응어리진 말들이 수없이 많았다.
원망이 향하는 곳에는 결국 한천마가 있었다.
“다 형 때문이에요. 난 임신할 수 있는 줄도 몰랐는데… 형 잘못이잖아요. 형 때문에 몸이 너무 아파요.”
기설이 투정하자,
“그래. 다 나 때문이야.”
꿈이 대답했다.
“형 때문에 난 오줌도 제대로 못 싸…, 그리고 배도 너무 아파요. 맨날 먹고 싸고 토하는 거밖에 안 해요. 형 때문에 나 병신 됐어요.”
“…그런 못된 말은 쓰지 말자.”
우후죽순 불평을 늘어놓다가, 기설은 문득 숨소리를 컥컥 터뜨렸다. 입을 벌리고 마른기침을 내뱉은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등 뒤의 존재가 크게 일렁였다.
그 바람에 기설은 미소를 지을 뻔했다. 저로 인해 가쁜 천마를 생각하니 못내 만족스러웠다. 안절부절못하는 인기척이 연이어 어깨를 두들겼다. 저를 다독이는 손길을 만끽하며, 기설은 떠오르는 투정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그래도 형은 나 의심하기만 하고. 난 진짜 몰랐는데…. 이상한, 그 의사, 그 개새끼한테 검사받기 싫었는데.”
“…….”
“나… 진짜 오메가 아니에요. 거봐요, 네? 지금도… 오메가 안 됐잖아. 내가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실없이 시작된 말끝에 눈물이 비쳤다. 희미하게 웃는가 싶던 입꼬리도 아래로 내려갔다. 꽉 다문 입술이 실처럼 얇아지고, 힘 들어간 턱에 호두 무늬가 도드라졌다. 예전 일을 되새김질하자니 새삼 서러워진 탓이었다.
그래도 기설은 괜찮았다. 어차피 꿈이기에, 괜찮았다. 꿈에서라면 누구에게든지 못 보일 행태가 없었다.
그러나 천마는 달랐다. 이마에 핏대를 불룩 세운 채 그는 혀를 깨물고픈 충동을 느꼈다. 현실과 꿈을 혼동한 어린 애인이 한 마디, 두 마디 속내를 비칠 때마다, 천마는 괜찮지 못했다. 차라리 욕설 섞어 모욕을 새기는 말을 듣는 편이 덜 아플 터였다. 아이처럼 칭얼칭얼, 맨정신으론 부린 적 없던 투정을 쏟는 기설이 천마를 마음 아프게 했다.
지난날 어느 밤에는, 기설의 투정을 다른 누군가가 들어 주었을까? 답은 뻔했다. ‘아니요’. 세상 누구도 지치고 피로한 기설의 잠투정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스물두 살이 되도록 기설은 제 잠버릇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스물, 열아홉, 열여덟… 어느 때라도 좋으니 천마는 일찍 기설을 만났어야 했다. 조금 더 일찍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제 옆자리에 두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하루라도 일찍 기설을 믿어 주었어야 했다.
“그래, 설아.”
오늘에서야 천마는 늦은 답을 꺼내 놓았다.
“…너, 절대 오메가 아니야. 믿어. 믿을게.”
“형이 미워요.”
“형이 미안해.”
이내 기설이 맥 빠진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헉헉거리는 숨결이 재차 거칠어졌다. 아홉 손가락을 뻗어, 천마는 기설의 배 위를 어루만지며 태동을 살폈다. 그러나 기설의 부른 배는 그저 잠잠했다. 그가 울음 짓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근데 나는… 형, 고아 만들었잖아요.”
한차례, 천마가 눈을 끔벅였다. 제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솔직히 말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날 때부터 그는 고아였다. 한무상을 만나고 그의 성씨를 제 이름 앞에 붙인 뒤에도, 그는 여전히 고아였다. 한무상의 사업을 물려받고 그 집안을 집어삼키고 그의 유산 대부분을 독식한 뒤에도, 천마는 그 남자를 아버지로 여긴 적 없었다.
그러니 황당했다. 저는 그다지 상처 입지도 놀라지도 않은 일을 두고, 기설이 눈물을 찔찔 흘리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울음 지으니 무진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형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우는 기설은 도둑질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 같았다. 손안에 쥔 사탕을 빼앗아 낚아채며, 네 부모를 부르겠다고 윽박지르면 꼭 그런 표정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내가 미워졌으면… 어떻게 해요?”
“설아.”
“미안해요. 형 고아 만들어서….”
고개 숙여, 천마는 우는 베타의 관자놀이에 입을 붙였다. 소리 없는 입맞춤을 남기며 뭉개진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괜찮아. 나는 아빠 있는 것보다, 아빠 되는 게 더 좋아.”
“…….”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기설의 높은 콧대를 기어코 등반해 냈다. 가로로 흐르며 콧잔등에 고이는가 싶더니, 뚝 직선으로 떨어져 베갯잇을 적셨다.
“그래서. 너는?”
천마가 물었다.
“설아. 너는 괜찮니?”
그러자 기설이 마른침을 삼켰다.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으려 노력하며, 그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래.”
모든 감정을 말로 쏟아 낼 순 없는 법이었다. 진심이란 게 구태여 1부터 100까지 전부 통하지 않아도 좋았다. 20에서 30을 비추는 것으로도 괜찮은 관계를 맺기엔 충분했다. 손바닥을 흐르는 핏줄의 잎맥 하나, 눈동자에 비치는 그림자 하나, 뇌리를 잠시 스쳤다가 떠나는 상념 하나까지 죄 훑어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천마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기설이 먼저 웅크렸던 손을 펴고, 제 피부 아래에 숨겨 놓은 말을 꺼내 보여 주기까지 가만히 곁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별수 없었잖아. 설아. 응?”
그러니 천마를 달구어 놓는 이 조바심은, 이성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노망난 노인네가 날 낳아 준 남자를 죽였다는데, 네가 뭐 어쩌겠어. 죽일 만하니까 죽인 거잖아. 안 그래?”
어서 동의하라고 독촉하듯 쏘는 말에, 기설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은… 형이 아니라서 그런 말 하는 겁니다.”
천마의 왼쪽 눈썹이 위로 추켜 올라갔다. 미간 사이에 홈을 만들고 입꼬리에 실소를 걸치며 그가 혀를 찼다.
“어쭈. 말투 차가워진 거 봐. 누굴 얼려 죽이려고.”
“이건 꿈이니까…. 내 꿈이니까 형도 그렇게 말해 주는 거라고요.”
“이거 꿈 아닌데?”
빗방울처럼 자리바꿈하며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기설은 몇 초간 등 돌린 자세 그대로 누워만 있다가, 문득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저를 둘러싼 비현실적인 공간과 곁에 누워 있는 한천마, 그리고 나신인 채 훤히 뻗은 제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둔한 몸으로 엉거주춤하며 기설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신하고 편안한 감촉으로 전신을 안아 주던 매트리스에서 벗어나자, 날 선 현실 감각이 불현듯 밀려들었다.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기설을, 천마는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왼쪽 팔꿈치를 침대에 괴고 주먹 위에 턱을 올린 그는 여유로웠다.
저를 쫓지도, 잡지도 않는 알파를 피해 기설은 달아나려 했다. 그가 한 발 두 발 물러설 때마다 천장의 센서 등이 자동으로 켜지며 사방을 밝혔다.
인공적으로 심긴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어 방 안의 공기를 정화했다. 한편에서는 가습기가 소리 없이 돌아가고, 벽면에는 산소 농축기의 제어판이 달려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진갈색 책장이 줄지은 서재 자리, 부드러운 방석이 깔린 흔들의자, 그리고 불투명 유리로 지어진 욕실이 나란했다.
기설이 더듬더듬 말했다.
“형… 이. 어… 어떻게.”
그제야 천마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뻗은 두 다리가 우아하게 교차됐다.
“어떻게 너를 찾았느냐고?”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왜, 형네 아버지를… 그렇게 했는지.”
벙찐 질문에 천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뻔하잖아.”
그것 말곤 해 줄 말이 없었다.
기설이 대뜸 한무상을 살해할 이유가 달리 없었다. 살아 있어 봐야 천마의 입지에는 유의미한 위협이 되지 않는 한무상이었다. 구태여 그를 죽일 때에는, 그만이 아는, 누설되지 않아야 하는 사실이 있었을 터였다.
기설은 천마가 아는 중 가장 충직한 개였다. 기설이 어떠한 진실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인간은 세상에 한천마뿐이라는 걸, 다른 누구보다도 천마 자신이 잘 알았다. 그러니 뻔한 일이었다.
“괜찮아, 설아.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확신하고 싶지 않았을 뿐, 사실은 천마도 알았다. 버려진 사무실의 더러운 소파 위에 가로로 누운 밤이면 몇 차례고 수도 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했었다. 저를 낳아 준 아빠를 죽인 이가 아무래도, 저라는 씨를 뿌려 놓은 다른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었다.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날엔 기분이 참, 더럽게 좆같을 거라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과연 기설은 천마에게 있어 선물이었다. 저에게서 진실을 은폐하려 한 각고의 수작이, 저를 지켜 주겠노라고 살인까지 저지르고야 만 기형적인 애정이, 천마는 무척 기꺼웠다.
“…….”
반면 기설은 오만상을 구겼다. 그에게서 진실을 떨어뜨려 놓으려 노력했건만, 오히려 천마에게 힌트를 준 셈이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기설은 알 수 없었다.
‘바보, 바보, 멍청한 새끼….’
의심하고 자책하는 마음은 이내 설움이 됐다. 코 밖으로 더운 숨이 시근덕거리며 새어 나왔다.
언제 다가와 제 팔목을 잡아챌지 모를 알파를 피해 기설은 뒤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문득 ‘컥’ 하고 크게 기침했다. 길게 뻗은 고개가 흔들리고,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크게 울렸다.
그제야 기설은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진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새하얗게 벗겨 놓은 전신 가운데 유일하게 감춰진 부위는 다름 아닌 목덜미였다. 두 손 들어, 그는 제 목을 죄는 부드러운 목걸이를 더듬더듬 매만졌다. 잘 다듬어진 가죽이 목덜미와 성대 부근에 바짝 둘려 있었다.
이내, 기설은 자신이 한천마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한천마가 머무르는 침대 헤드 위, 벽면에 걸린 쇠고랑과 기설의 목이 가느다란 줄로 이어져 있었다.
다리의 힘이 풀리는 기분에, 기설은 의자를 급히 찾았다. 빈혈이 돌 때는 어디에건 안전하게 몸을 앉혀야 했다. 마침 목줄이 허용하는 가장 먼 거리에 놓인, 낮은 높이의 카우치가 있었다. 그 푹신한 자리에 벌거벗은 볼기짝을 앉히자, 얇고 가벼운 목줄에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뭐가 그렇게 바빠? 설아.”
직선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목줄 위에 손가락을 걸고, 천마가 웃었다.
“또 어딜 가려고 그래.”
그가 손목을 휘 돌리자 목줄이 그의 손금을 가로질렀다. 단단한 밧줄을 양가죽으로 감싸고, 한 올 두 올 박음질까지 마친 목줄이었다. 대충 살펴도 개를 산책시키기 위한 건전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리 와.”
빙글빙글 꼬인 손잡이가 한천마의 아름다운 손에 묶이고, 끄트머리에 걸린 은빛 쇠고리는 기설의 희고 곧은 목에 채워졌다. 목줄이며 목걸이가 두 남자와 각각 잘 어울렸다.
“형. 나… 는, …헉!”
천마가 잡은 줄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기설의 몸이 카우치 위에서 크게 들썩거렸다.
“…형.”
당황한 와중에도 기설은 천마를 연신 불러 댈 뿐, 이렇다 할 반항을 선보이진 못했다. 그에게 문제는 목에 감긴 가죽 줄이 아니었다. 진실로 닻이 되어 기설을 잡아 누르는 것은, 그 자신의 부른 배였다. 둔하고, 무겁고, 균형을 잡기조차 힘겨운 몸뚱이는 전직 복서의 운동 신경조차 퇴색시켜 놓았다.
기설이 보기에, 야속한 미소를 띤 형님께서도 그 사실을 아는 듯했다. 그러니 느긋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아주 천천히 여유를 부려 가며 목줄을 당기는 것이었다.
등허리에 힘을 주며 기설은 앞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바닥을 바짝 디딘 제 두 발을 브레이크 삼으려고도 해 보았다. 그래 봐야 온 방바닥이 푹신한 러그로 덮여 있어 무의미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기설이 물었고,
“여기? 기도실.”
천마가 대답했다.
새삼 예민해진 얼굴로 기설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체로 발가벗겨지고, 목에는 줄이 채워진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그를 둘러싼 공간은 여전히 보기 좋았다. 넓은 공간 어디에도 사람을 다치게 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푹신한 침대를 가득 채운 두툼한 이불과 쿠션들이 그러하듯이, 곧게 세워진 가구마저 하나같이 모퉁이가 둥글둥글했다.
동시에 어디에도, 그 흔한 십자가 하나 보이지를 않았다.
‘…기도? 형이 기도를 한다고?’
한천마라는 인간에게 ‘기도’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을 터였다. 그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쯤은 지나가는 승려도 알 사실이었다.
‘기도실’은 법망을 피하고자 설계 도면에 대충 붙인 이름에 불과했다. 2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이 방은 빌딩 안의 작은 숨구멍이요, 벙커였다.
물론 현행법상 비상시 개인 소유의 대피 공간도 군용 피난 시설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 따위, 기설이 알 필요는 없었다. 천마에게 있어 비상 상황은 그의 아이를 임신한 어린 애인이 또다시 도주하는 것이었고, 기설은 한천마의 벙커에 입장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인이기 때문이었다.
정작 기설은 그 영광을 누리는 데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오히려 불안했다. 반듯한 이마에 구김이 졌다.
“이거 풀어 주세요.”
기설이 꿋꿋하게 요청했다. 대답 대신, 천마는 손아귀에 쥔 목줄을 잡아끌었다.
가죽 줄이 팽팽해지고, 기설의 목덜미 전체로 뻐근하게 아린 힘이 전달됐다. 제자리에서 버텨 보고자 기설은 카우치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래도 타고나길 우악스러운 힘을 버텨 내긴 불가능했다. 결국 기설의 몸뚱이와 그를 앉힌 묵직한 카우치가 통째로 끌리기 시작했다. 침대와 카우치 사이에 깔린 두꺼운 러그가 지그재그로 구겨졌고, 기설의 두 발바닥은 온통 푹신한 감촉에 빠졌다.
점차 가까워지는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설은 몇 번이고 두 다리에 힘을 주려 애썼다. 그러나 기설의 몸도, 힘도 예전 같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깎이고 상한 만큼 천마는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한 팔로 손쉽게 기설을 잡아끄는, 그는 어느 때보다 완벽한 알파였다. 쇠약해진 몸으로 기설은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마침내 1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게 되어, 기설이 말했다.
“…형, 다시 아프면 안 되잖아요!”
천마에게 가 닿지 않으려, 절박한 마음에 외친 소리였다.
“아파도 돼.”
천마의 답은 손쉬웠다. 그에 기설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이지 금방 태어나니까… 두 달, 아니 한 달만 더. 조금만 더 떨어져서 지내면….”
“싫어. 설아. 너는 나 없이 혼자 아픈 게 최선인 줄 알지. 나는 아파도 너랑 같이 있어야겠어.”
다정하게 다가온 말에 기설은 눈을 지르감았다. 속눈썹이 일자로 뭉개지며 더운 눈물방울이 겉으로 비쳤다. 천마가 팔을 뻗어 그것을 닦으려 하자, 기설은 그의 손을 쳐 냈다. 퍽 소리가 나도록 거센 손길이었다.
“제가 싫어요. 형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
기설이 말했다. 이를 세게 악문 탓에 뭉개져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그에 천마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어린 소년이라도 된 양, 마음 상한 티를 역력히 드러내며 말했다.
“좀 전엔, 내가 보고 싶어서 죽겠다면서.”
“…그래서 더 싫어요.”
기설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구어졌다. 수척해진 만큼 날카로운 턱선 위에 얕은 홈이 파였다. 어금니를 꽉 악물어 생긴 자국이었다.
불현듯 수치심이 기설을 점령했다. 벌거벗은 제 육신과 몸을 감싼 흰 피부가, 아주 간만에 수치스러웠다. 하얀 피부야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라지만, 지난날 그는 새하얄지언정 뽀얗거나 창백하진 않았었다.
“이런 건… 이상해요.”
평생 기설은 오늘만큼 나약해 본 적 없었다. 날카로운 흉기에 배가 뚫리고 뒤통수를 돌로 내리찍히지 않는 한, 그는 두 무릎을 무너뜨린 적 없었다. 팔다리를 어찌 두어야 할지 몰라 어수룩하게 꿈틀거리는 경험 따윈 기설의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 짓는 짓일랑 어린 시절에도 해 본 적 없었다.
“지금 이런 건, 다, 내가 이상해서…. 이런 건 내가 아니에요.”
그러니 오늘, 먹는 것도 싸는 것도 혼자서는 해내지 못하고 무능력한 남자는, 순전히 기분에 따라 하루 일과가 좌지우지되는 여린 베타는, 그는 기설이라는 남자가 아니었다.
“설아.”
천마가 입을 열었고,
“형 옆에서 이러고 있고 싶지 않아요.”
기설이 그의 말을 틀어막았다.
여전히, 그는 제 배 속 아이를 몹시 사랑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원대하게 품고 지켰다. 덕분에 그나마, 괜찮은 척을 할 순 있었다. 그런들 제 몸의 모든 기둥이 꺾이고 부러진 듯 함락당한 기분을 떨칠 순 없었다.
어디로든 달아나 숨고픈 마음이 조바심이 됐다. 목줄을 당기던 손아귀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설은 목걸이를 풀고자 했다. 부드러운 가죽 틈새에 무턱대고 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그러나 목덜미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을 듣고, 자물쇠의 존재를 깨달았을 뿐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오히려 목걸이가 배배 말리며 안으로 죄여, 제 목을 조르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켁.”
이마까지 단숨에 붉어진 채 기설이 끙끙거렸다.
기설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를 그만두고, 천마는 목줄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휘청거리는가 싶던 기설의 몸이 알파의 품에 천천히 무너졌다. 굵은 허벅다리 위에 앉혀진 채, 기설은 막힌 숨을 연신 컥컥거렸다.
쯧… 혀를 차며 천마는 기설의 목덜미 뒤를 빠르게 매만졌다. 지나치게 안쪽까지 채워져 있는, 금색 버클 하나를 풀어 주자 목걸이가 단숨에 느슨해졌다.
기설의 숨구멍이 훤히 트였다.
“헉…, 허억….”
헐떡헐떡 숨 들이켜는 소리 들으며, 천마는 베타의 부른 배를 다독였다. 그리고 말했다.
“늦었지만 고마워, 설아. 나 대신 복수해 줘서.”
“…….”
“아기도 이렇게 무럭무럭, 혼자서도 잘 만들고 있어 줘서.”
“…….”
꽁하니 입을 다문 채 기설은 바닥만을 노려보았다.
“네가 나 좀, 계속 도와주면 안 되겠니.”
말없이 잠잠한 베타를 향해, 천마가 애원했다. 애처롭다는 표현이 걸맞도록 사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기설은 그를 믿지 않고자 노력했다. 목소리만 다정하고 부드러울 뿐이지, 시선을 올려 마주 보면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냉담한 계산이 놓여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기설이 홱 얼굴을 들었을 때, 코끝이 서로 닿도록 가까운 거리에는 슬픔 어린 알파만이 존재했다.
“설아. 형 좀 도와줘.”
천마가 말했다. 기설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벙긋벙긋 움직였다.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려요?”
“하던 대로.”
이내 길고 우아한 검지 끝이 기설의 턱에 닿았다. 둔하게 눈을 깜빡이며, 기설은 제 턱뼈에 아로새겨지는 지문을 느꼈다.
“하던 대로… 머리를 비우고, 생각 없이, 바보처럼 하하 호호 해도 좋아. 어떤 모습이든지 그저 내 옆에 좀 있어 주면 안 되겠어?”
시야를 가득 채운 천마의 얼굴이 불안한 듯, 괴로운 듯 보였다. 이마를 찡그리고 눈썹 끝은 아래를 향한 채 기설의 두 눈동자를 바삐 살피는, 그는 기설이 알던 뻔뻔한 알파가 아니었다.
기설은 무엇이고 궁리 끝에 느리게 익혀 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울상으로 망가진 천마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라는 알파도 실수를 하고 자책을 하고 한탄을 하는 인간이구나 깨달았다.
그런 한천마에게, 기설은 거절을 내놓을 수 없었다.
“설아.”
천마가 부르면,
“…네, 형.”
느리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하하… 맥 빠진 웃음소리를 낼 뿐, 천마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실린 눈동자에 기설의 얼굴을 담겼다. 그 눈빛이 기설의 가슴을 두들겼다.
기설은 제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그가 일평생 두고 보지 못할 광경이 있다면 그건 한천마가 을이 되는 모습일 터였다. 이뤄지지 않는 짝사랑을 하는 듯, 중요한 자리에서 바람맞은 듯, 갖고픈 것을 제대로 쥐지 못해 안절부절못하여 속을 태우는 듯. 을의 자리에 놓인 한천마를 기설은 견딜 수 없었다. 한천마 본인은 괜찮다 하더라도, 그가 어여쁘게 미소 띠며 자조하는 것조차 기설은 싫었다. 보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를 그렇게 만드는 이가 자기 자신이래도 매한가지였다.
두 팔 뻗어, 기설은 천마의 목덜미를 세게 휘감았다. 그를 와락 끌어안자 매끈한 가죽끈이 가슴 위에 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천마의 어깨에 제 콧대가 뭉개지도록 깊이 얼굴을 파묻는 게 우선이었다. 좌로, 우로 비비적거리며 제 체취를 묻히고, 그의 몸에 밴 향수 냄새를 흡입하다시피 빨아들였다.
느닷없는 포옹에 천마는 잠시간 멈추어 있다, 기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제 품 안에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두 남자 사이엔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고픈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은 탓이었다. 여러 말들이 한데 뭉쳐 부글거리다가 터져 버리고 증발하여 그러했다.
문득 기설은 슬펐다. 천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는, 서로 간에 고백을 들으며 재회의 포옹을 나눌 적에는 아주 기쁠 줄 알았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도 높은 기쁨은 슬픔과 닮아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기설을 눈물짓게 했다.
입을 꾹 다물고, 기설은 두 눈을 치켜떴다. 얼굴 하관은 천마의 어깨에 파묻은 채였다. 눈매가 단숨에 불그스름해지고, 눈구석으로 눈물방울이 비죽 샜다. 느릿느릿 흘러내린 눈물이 콧대를 타고 움직였다.
숨소리를 죽이며 그는 울지 않는 척을 했다. 그래도 천마는 기설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어깨에 작고 옅은 눈물 자국이 남자마자, 그는 그것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기민하게 자세를 바꿨다. 제 품 안에 처박히다시피 한 기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아 살피고, 엄지손가락을 와이퍼 삼아 눈물 줄을 지워 냈다. 그러고는 벌어진 베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연한 분홍빛을 띤 기설의 입술 살이 부드럽게 뭉개졌다. 벌어진 잇새로 드러난 조그마한 아랫니는 희고, 움찔거리며 물러서는 혀끝은 빨갰다. 천마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 모든 것을 빨고 맛보았다. 아랫입술을 빨 때는 젖는 소리가 났고, 더운 입천장을 혀끝으로 훑어 내리자 떨리는 신음이 흘렀다. 볼 안쪽, 여린 살을 건드렸을 때 기설은 흠칫 몸을 떨었다.
기설의 태도는 전보다 소극적이었다. 체온이 오르고 숨결이 달아지고, 제 입 안을 침범해 온 알파의 입술을 마주 빨고 작게 핥으면서도, 그는 긴장한 듯 허리를 딱딱하게 세웠다. 헐떡헐떡 기계적인 숨을 쉬었다.
맞붙였던 입술을 떼어 내며 천마는 기설을 다시 살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한 평가를 고쳐 놓았다. 기설은 소극적이라기보단, 방어적이었다.
“괜찮아.”
천마가 말했다.
“몸에 힘 빼. 이지 숨 막히겠다.”
그가 큰 손으로 등허리를 어루만져 주자, 기설의 자세가 서서히 느슨해졌다. 목덜미를 단단하게 받쳐 주는 손길과 부드러운 속삭임이 기설을 안심시켰다. 나쁜 일이 발생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편안하게 방심한 채 안주하여도 괜찮다고, 누구도 무엇도 너와 네 배 속 아기를 어찌하진 못한다는 속삭임은 참 달콤했다.
기설은 금세 편해졌다. 의지보다는 심신이 박약해진 탓이었다. 배 속에 여린 생명을 품고서 본 세상이 어찌나 각박하고 험하던지, 하루하루 예민하고 날 선 사람이 되는 듯했다. 길을 걸으면 누군가 저에게 부딪치진 않을까, 임산부임을 알아보고 성가신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시비를 걸어 오거든 즉각 때려눕힐 수 있게, 주먹을 움켜쥐고 사는 날들이었다.
그 모든 것에 기설은 지쳐 버렸다. 시달림의 끝에 그는 나약해졌다. 저 때문에 억제제를 맞는 형님을 생각해서 강해져야만 하는데, 솔직히 말해 더는 홀로서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괜찮아, 설아. 여긴 아무도 못 들어와. 너랑 이지 둘뿐이야.”
그런 기설을 품어 주겠노라 선언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천마의 요새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희생은 괜한 짓처럼 생각됐다. 고생도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저 천마를 믿고, 숨을 편하게 쉬며 살고 싶었다.
“설아.”
“…….”
“이지, 너 혼자 낳지 않아도 돼. 복잡한 건 형이 다 해 줄게. 너는 따듯하고 배부르게 잘 지내기만 해. 여기에선 그래도 돼.”
SS 그룹의 대표 이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한천마는 사기꾼이 되었을 터였다. 물건이 아닌 거짓 사상을 팔고 돈이 아닌 감정을 조종하는,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 교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가 애착을 갖고 손에 쥐고자 하는 이가 고작해야 스물두 살 된 베타 하나라는 건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갖은 애를 쓰고 품을 들여 가며 하는 짓이라는 게, 이미 발가벗겨 목줄까지 채워 놓은 놈의 마음을 달래 주는 것뿐이니 말이었다.
“형.”
가증스럽게 다정한 천마의 팔에 안겨, 기설은 흐물흐물해졌다.
천마는 기설을 침대 위에 도로 눕혔다. 길게 늘어진 목줄을 침대 가장자리로 치워 둔 채 그는 기설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양 기설의 몸을 탐했다.
천마로서는 난생처음 가져 보는, 쾌감보다 인내가 더한 관계였다. 무진 애를 써 힘을 빼 가며 애무하고, 한 달 내내 제대로 쓰인 적 없을 성기를 쓰다듬어 주고, 헐떡거리는 신음성에 불안이 묻어날 때마다 입을 맞추어야 했다. 쫄쫄 굶어 바닥나 버린 인내심을 긁어모으자니 뱃속에 생채기가 나는 듯했다. 그래도 천마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마침내 녹진녹진해진 기설이 몸을 옆으로 틀며 엉덩이를 내주는 순간엔, 허락의 의미를 담아 흥분한 눈동자를 보일 때엔, 천마는 좋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달팽이처럼 웅크린 기설의 등 뒤로 그는 제 몸을 퍼즐처럼 맞추었다. 예민하고 작고 좁아터진 뒷구멍에, 흉측할 만치 커다랗게 발기한 채 프리컴을 질질 흘리는 성기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꾹, 꾹, 한두 차례에 끊어 가며 귀두를 비집어 넣고 성기 반절을 삽입했다.
“혀, 형…. 아!”
“하아, …하….”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천마는 신음했다. 부글거리는 성욕과 아랫배가 단단해지도록 들끓는 쾌감에 시야가 희게 번졌다. 한 달 사이 알파를 받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기설의 뒷구멍은 그를 연신 밀어 내려 움찔거렸다. 굶주린 천마에게는 그것마저 너무한 자극이었다.
“아, 흣, 씨발.”
억지로 기둥뿌리까지 처박고픈 충동을 짓씹으며 천마는 덜 삽입된 살덩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자위하기 시작했다.
“으, 읏, 혀엉…!”
속을 찌르는 얕은 감각에도 기설은 부들부들 허벅다리를 떨었다. 마구잡이로 처박히며 성감에 짓눌리는 쾌감을, 뒷구멍의 근육은 잊었더라도 머리는 기억했다. 뒤를 찌르며 침범해 온 반쪽짜리 살덩이에 온몸의 신경이 쏠렸다.
흥분을 못 참아 기설은 발기했다. 성기 끝에서 흘러나오는 프리컴의 양은 오히려 지난날보다 많았다.
“설아, 너… 되게 그립더라.”
“아, 흐으….”
턱, 턱, 아랫배에 손날 맞는 소리가 나도록, 천마는 제 것을 세게 흔들어 댔다. 그때마다 알파의 귀두를 집어삼킨 기설의 뒷구멍이 빠끔거렸다가 수축하면서 빨간 속살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이 짓거리도, 씨발….”
“아!”
“무지 하고 싶었는데.”
“…으, 윽. 으응….”
천마는 기설의 어깨에 제 이마를 작게 찧었다. 위로, 아래로 잘게 흔들며 빼내었던 성기를 재차 기둥 반절까지 쑤셔 넣고, 기설이 내는 신음성에 집중했다. 덥고 좁은 내벽을 뭉근하게 문지르길 한참, 기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목 긁는 소리와 함께 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아…!”
배가 무거워 고정된 기설을 대신하여 천마는 아주 얕게, 그리고 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런 것, 말고. …헉, 너…한테 좆 비비고, 물고, 빨고, …이런 빠구리보다도….”
제 성기 밑기둥을 콱 움켜쥐며 그는 사정하고픈 욕구를 억지로 참았다.
“…정말 보고 싶었어, 설아.”
문득 기설의 신음이 멎었다. 짙은 정액 냄새가 그로부터 훅 끼쳐 왔다. 천마도 애써 조였던 제 살덩이를 놓고, 참았던 열망을 분출했다.
“…흐, 으….”
기설에게는 제법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제 뒷구멍에 대고 남이 토정한 것을, 꼭 제가 사정하기라도 한 양 신음하며 느끼는 발칙한 버릇이었다. 뽀얀 엉덩이를 세게 갈겨 주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천마는 베타의 뒷구멍을 구경했다. 얕게 박았던 탓에 제가 싼 정액이 울컥울컥, 구멍 밖으로 모두 흘러나왔다.
기설이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베갯잇에 볼을 비비며 내쉬는 날숨소리가 더웠다.
그리고…
“…….”
그게 전부였다. 기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보기 좋은 얼굴은 시트에 감추었다. 울긋불긋해진 몸은 돌아누운 채 미동 없었다.
“설아.”
축축해진 접합부에서 몸을 떼어 내며, 천마는 상체를 일으켰다.
“기설아.”
툭툭, 그는 검지와 중지를 까딱거리며 기설의 팔뚝 위를 오르는 시늉 했다. 높다란 어깨에 다다라 손바닥을 펴고 부드럽게 주무르기도 했다.
반항 어린 태도를 보인 것치고, 힘 빠진 기설의 고개는 천마의 손길에 쉽게 조종됐다. 천마가 그의 뺨을 감싸 쥐고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뚱한 얼굴을 보여 주는 식이었다. 기설의 얼마 없는 볼살이 굵은 엄지 끝마디에 살짝 눌렸다. 눈 아래의 불긋해진 살결도 위로 밀려 통통해졌다.
열 오른 이마에 검은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마르고 수척해진 기설은 전보다 더 예민한 인상을 풍겼다. 배 속 새끼를 지키느라 깎인 탓에, 두 눈동자의 빛도 한결 차갑게 불탔다.
천마가 말했다.
“아가.”
한 마디 두 마디…
“널 너무 안고 싶었어. 네 눈빛, 살냄새, 피부, 목소리.”
속삭임이 이어질 때마다 기설의 기세가 차차 꺾였다. 구겨졌던 눈썹의 각도가 순해지고, 맹렬한 눈빛에 물기가 어렸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랬어요. 나도 그랬어요.”
기설이 앵무새처럼 조잘거렸다.
“나도… 형, 보고 싶었어요.”
묵직하게 토라진 듯 보이던 것은 죄 착시였다. 사실 기설은 울음을 참으려던 것뿐이었다. 울먹울먹 두 눈이 축축해지고, 입술 끝이 아래로 축 내려간 채 그는 말을 더듬었다.
“혀, 형…, 손.”
“…….”
“손잡아 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청해 온 말에 천마는 즉각 응했다. 더운 땀을 쥔 기설의 손바닥에 제 딱딱한 손바닥을 맞대고,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쯤 되니 목줄을 찬 개가 둘 중 어느 쪽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 쉬며, 천마가 한탄했다.
“나 좀 그만 꼬셔.”
진담을 농담으로 착각한 듯 기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제 입술에 맞대었다. 기설의 눈길이 의아한 듯 손가락 등에 닿는 순간, 천마의 두 눈도 느리게 커졌다.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깜빡했다.
“손가락, 왜… 왜 이래요?”
기설의 표정이 단숨에 돌변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마의 텅 빈 왼손 소지를 바라보면서, 그는 성난 듯 숨소리마저 식식거렸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고 벌어진 입술이 추운 바람처럼 달달 떨렸다.
“누, 가 이랬어요? 누가… 어, 떤 새끼가….”
분노로 몸을 떨며 기설이 눈을 홉떴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한천마의 육신을 해쳐 놓은 작자를 때려눕힐 기세였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천마는 기설의 주먹에 맞아 죽고 싶지 않았다.
“아, 이거. 문틈에 껴서 떨어졌어.”
그래서 변명했다.
“빨리 닫으려다가 그런 거야. 내가 성질이 좀 급하잖아.”
웃으며 건넨 말에 기설은 눈썹을 꽉 웅크렸다. 화가 나고 짜증 나고, 걱정이 되어 속상하다 못해 억울하기까지 한데, 형님께서 아무렇잖게 반응하니 저도 풀이 죽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들으며, 기설은 당장 떠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럼 다시… 다시 붙이면 되잖아요.”
“다신 돌아보고 싶지 않더라고.”
이번에도 천마의 대답은 가뿐했다. 눈썹을 찡그리고 눈시울을 적신 채 기설은 침묵했다. 다만 본디 가장 가느다랗고 어여쁜 새끼손가락이 있던 자리에 조용히 제 입술을 문질렀다.
묵묵히 건네 온 접촉에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어 가며, 이렇게나 다정하게 걱정을 해 오면 천마조차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이미 아문 지 오래인 상처를 놓고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가 않아. 그래서 그랬어.”
그러자 기설이 ‘흥’ 소리를 냈다. 그가 콧방귀를 뀐 것을 알고 천마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나 허접하게 귀여운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보았다.
“나 매일 이지한테 말했다고요. 꼭 형님을 본받으라고. 눈도, 코도, 입술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똑같이 만들어져 나오라고.”
삐죽삐죽 솟는 성질대로 구시렁거리며, 기설은 잡았던 천마의 손을 놓아 버렸다. 휙 팽개치듯 놓다 못해, 저를 재차 붙잡으려 하자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치기까지 했다.
“형 때문에 우리 이지도 손가락 아홉 개면 어떡할 거예요?”
기설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고는 다시금 모로 드러누웠다. 베갯잇에 그의 얼굴이 완전히 파묻혔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토라진 것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꽁해진 기설의 귓불이 서서히 붉은색을 띠었다. 목덜미로 가느다란 핏줄이 서고, 재차 울음이 치솟는지 성대마저 꿀렁거렸다.
“설아. 유전자라는 게….”
예상치 못한 반응에 천마는 순 당황했다.
“…그게, 부모랑 그런 식으로 닮는 게 아니야. 잘 생각해 보자, 응? 이지는 원래 나한테 있던 손가락 그대로 열 개를 닮아서 나올 거야.”
“형한테는 이제 없잖아요.”
젖은 목소리로, 기설이 말했다.
“형 손이 얼마나 예쁜데. 왜 그랬어요? 그걸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기설은 몇 차례 다리를 뒤척거렸다. 슬픈 탓에 가슴이 답답해져, 누운 자세마저 불편해진 듯했다.
천마가 그의 허리 아래를 조심스럽게 받쳤다. 기설의 팔이 자연스럽게 천마의 등허리에 걸렸다. 바로 눕혀 주고자, 다시금 둥개둥개 달래 주기 위해 그를 자리에서 일으킨 순간, 기설의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렀다.
“…….”
콧김 소리보다 작은, 아주 미세한 음성을 흘리고 기설은 침묵했다. 그에 천마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방금 뭐야.”
천마가 물었다.
“뭐냐고.”
상황이 단숨에 역전됐다. 이제 추궁은 천마의 몫이고, 변명만이 기설에게 주어졌다. 알파의 맹렬한 시선을 피해 가며 그는 눈을 두어 번 끔벅거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말했다.
“옆구리가 좀 저려서요.”
“건드리지도 않은 옆구리가 왜 저려?”
“팔 올리면 좀… 모르겠어요. 가끔 좀 그래요.”
천마는 얼어붙은 채 몇 초간, 성화와 한숨과 욕설을 삼켜 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기설을 전과 같이 눕혔다. 베개의 위치까지 조절해 완전히 같은 자세를 취하게 하고, 기설의 골반과 옆구리, 갈비뼈의 윤곽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이곳으로 기설을 데려와 발가벗기고, 그의 몸을 닦아 준 이가 다름 아닌 한천마였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시금 확인하여도 유별나게 느껴지는 이상은 없었다.
“어떻게 아파. 찔리는 느낌이 들어? 아니면, 쥐가 나? 언제부터 그랬니.”
“…이틀… 아니.”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기설이 속삭였다.
“…보름 정도 된 거 같은데….”
“하!”
참다못해 천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미친놈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그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기도실’의 문은 2중으로, 덜컹덜컹 아주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엉거주춤하니 웅크린 자세 그대로, 기설은 러그 위로 스며 들어온 형광등 불빛만을 바라봤다.
문밖에서 언뜻 명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 외에도 익숙하고 낮은 음성들이 바삐 오갔다. 천마의 묵직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개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의사를….”
무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거칠게 욕설했다. 길바닥을 나뒹굴며 살아온 기설조차 생전 들어 본 적 없던 경박하고 추접스러운 욕이 대뜸 들려왔다. 뒤이어 무어, 물건을 부수는 듯한 소음도 들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기설은 부른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한참 뒤 돌아온 천마는 천사처럼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설아.”
다정한 얼굴로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그는 기설이 누운 침대 옆자리, 러그 깔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기설의 손을 가져가 제 입술에 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의사를 여기로 불러와야 할 것 같아….”
“아…, 네.”
“…네가 움직이기 힘드니까. 이해하지? 검증된 의사 하나가 들러서, 네 갈비뼈만 잠깐 확인하고 갈 거야. 다른 검사는 안 해. 네가 건강한지, 이지는 괜찮은지. 그것만 볼 거야.”
“네.”
기설의 대답은 고분고분했다. 오히려, 그는 형님께서 왜 저한테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며 다독이듯 달래는 태도가 내심 좋기에 얌전히 응할 따름이었다.
“그래, 그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에도 천마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재차 질문했다.
“…아니면, 병원으로 갈래? 직접 가서 검사받고 싶니?”
“아뇨. 밖에 추워요, 형.”
기설의 대답은 손쉬웠다. 푹신한 침대, 포근한 이불의 감촉, 훈기가 감도는 공간을 구태여 떠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안심되기도 했다. 날로 매서워지는 한파를 어찌 보내야 좋을지 걱정스럽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기설은 천마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폈다. 천마는 그 시선에 가려움을 느끼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기설을 향해 깊이 허리 숙이며, 어서 말하라는 듯 귀 기울였다.
“응, 설아.”
“저….”
“뭐가 필요해. 뭐 갖다줄까?”
그는 더럽혀지지 않은, 새하얀 이불을 끌어다가 기설의 목 위까지 꼼꼼히 덮었다. 그러고는 가슴 위를 느리게 토닥토닥 두들겼다.
착한 아이처럼 얌전히 누워, 기설이 소곤거렸다.
“유자차 먹고 싶어요.”
그에 천마의 미소가 활짝 번졌다. 기설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긴 뒤, 그는 허리를 일으켰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그를 따라 기설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지치고 피로한 몸 위로 달콤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
원형 테이블에 덩그러니 자리한, 머그잔 위로 작은 김이 올랐다. 너른 방 안 가득 번지는 유자 향기가 달콤했다. 그러나 잔의 표면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고이도록, 선뜻 그것을 집어 드는 이가 없었다.
어둠 안에서 천마의 얼굴은 석상처럼 차가웠다. 1인용 소파 자리에 앉아 그가 허리 숙이자, 선이 굵은 콧대 옆으로 그림자가 흘렀다.
의사가 그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천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검지 하나를 들어 제 입술 가운데 댈 뿐이었다.
왕진 가방을 내려놓는 것도 잊고 의사는 한천마를 구경했다. 부드러운 조명등 아래에 선 그의 얼굴은 몹시 수려했다. 광대는 사포로 다듬고 턱은 칼로 쳐 낸 듯한데, 속눈썹의 그림자가 길게 뻗은 것이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멍하니 얼어 버린 의사를 내버려 둔 채 천마는 침대에 누운 환자를 살폈다. 잠든 이를 깨우지 않고자 눈두덩이 위에 따듯한 안대를 놓아 주고, 목 위까지 덮어 놓은 이불을 옆구리가 드러나도록 절반만 접어 내린 것이었다.
의사도 그제야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그는 왕진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힐끔힐끔 잠든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하관만 보아도 몹시 잘생기고 튼튼한 남자였다. 목에는 희한하게 생긴 굵은 목걸이를 찼고, 몸에는 부드러운 가운을 두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배가 적잖이 불러 있단 점이었다.
“…임신 중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천마의 목소리는 무척 낮고 짜증스러웠다. 단순히 기분 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몹시 분개해서는 화기로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의사는 두 번째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로서야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치료가 시급한 골절 환자가 있다는 설명만 듣고, 뼈를 맞추러 온 길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몹시 무섭게 생긴 흉터투성이 남자에게 붙잡혀서는, ‘오늘 보고 들은 것을 어디에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적기도 했다. 그리고 눈이 가려진 채 이곳까지 끌려 들어온 길이었다.
주어진 힌트를 조합하며 작금의 상황을 훑어보니 결론은 하나였다. 불신론자 한천마에게도 후계자가 필요해, 오메가를 하나 구해다가 자식을 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주 튼튼하고 건강하고,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줄 남자 오메가 말이었다.
의사는 잠든 환자의 가운을 모로 살짝 걷어 냈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겉으로 볼 때는 크게 이상이 없지만, 올라오는 길에 들은 설명으로는 팔을 들 때 통증을 느끼더랬다. 게다가 보란 듯, 갈비뼈 부근에 칼에 찔린 흉터 줄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환자분, 예전에도 갈비뼈 부러진 적 있죠?”
손쉬운 판단을 마치고, 의사가 말했다.
“짚어 주신 위치가 딱 6번, 7번 갈비뼈인데… 전에 다치셨던 부위라면 덧났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건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두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표정 없이 기설의 부른 배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임신한 배 위에 새겨진 자상 흉터가 유독 끔찍하게 느껴졌다. 저, 빌어먹을 자국들을 후일 반드시 지워 버리고야 말 것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말이 옳았다. 기설을 앓게 만든 통증 부위는 이전에 부러졌던 위치와 완전히 동일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를 위해서 제 몸을 방패로 썼던 날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에도 생채기가 났었더랬다. 상처의 위치가 조금만 높았더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당시, 기설의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그가 젊고 신체 건강한 남자여서 천만다행이라 말했었다. 천마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참 다행이라고….
“임신 중에 갈비뼈가 골절되는 건 사실 흔한 일입니다. 뼈가 많이들 약해지거든요. 어디 부딪쳐서 부러질 수도 있고, 심한 경우 태동 때문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애 때문이라고?”
천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퉁퉁, 퉁퉁… 제 존재를 과시하듯 기설의 뱃가죽을 걷어차던 태동을 그의 손바닥이 기억했다. 일순 천마는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혹여 아기가 저를 닮아 성질이 괴팍하고 남을 죽이길 잘해서, 기설을 죽이려고 괴롭히는가… 하는, 너저분한 망상이 소름처럼 돋았다.
무간지옥으로 돌변한 분위기에 당황하며, 의사가 급히 말을 고쳤다.
“아…, 아닐 겁니다. 그런 경우 보통 뒤쪽 갈비뼈를 다쳐서요.”
심각한 한 대표를 안심시키고자, 그는 빠르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냈다.
“겉으로 볼 때 크게 문제 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연 치유를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래서. 약은?”
“어… 임신 중에 진통제는 드릴 수 없습니다. 태아를 생각하셔서, 이 정도는 참으셔야 합니다.”
“제대로 된 검사는.”
“태아에게 위험해서 엑스레이 촬영은 어렵습니다. 어차피 약간 실금이 간 정도일 거고….”
“…치료는?”
“이게 깁스를 할 수도 없는 부위인지라….”
의사가 사무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판단할 때 산모는 무척 건강한 남자였다. 앓는 소리야 몇 마디 하겠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산모가 크게 다친다 하더라도, 한천마가 그 정도 리스크에 신경이나 쓸까 싶었다. 어찌 되건 배 속 아기만 잘 태어나면 그만일 터였다.
천마가 심란한 듯 이마를 찡그렸다. 그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의사는 부쩍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파 봤자 죽도록 힘든 수준도 아니고요. 뭐 괜찮을 겁니다.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해서라면 응당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태아에게는 지장이 가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방 안 가득 침묵이 감돌았다. 넓은 공간이 천마를 향해 빨려 들어가며 수축하는 듯했다.
두 눈을 끔벅이며 선 의사를 향해, 천마가 입을 열었다.
“야.”
“네, 대표…님. 예?”
습관적으로 주억주억, 네네 대답하려던 의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잘 차려입고 온 백색 셔츠 깃이 단숨에 구겨지고, 반듯하게 바닥을 딛던 발끝이 허공으로 붕 떴다. 한천마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어 번쩍 들어 올린 것이었다.
흉악하게 금이 간 얼굴로, 천마가 말했다.
“이 씨발 돌팔이 새끼야. 네 갈비뼈도 일곱 개 부러뜨려 줘? 자연적으로 나을 때까지 잘 참을 수 있나 한번 볼까?”
그 순간 의사는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제 멱살을 잡아챈 채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어 대는 이 남자가 한천마일 리 없었다. 그는 차라리 한천마인 척 연기하는, 경박하고 더러운 깡패 같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눈썹을 가려 놓아 가뜩이나 어려 보이는데, 행동거지에도 치기가 묻어나니 단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이었다.
“이, 일곱 개가 아니라 위치가 7번인 것뿐… 어억!”
담배라도 문 것처럼 입술을 비틀며, 천마는 의사의 옆구리를 한 대 갈겼다. 남는 손으로는 그의 입을 덥석 쥐고 틀어막기까지 했다. 축축한 타액이 손바닥을 적셔 불쾌했지만, 비명 때문에 잠든 기설이 깨는 것보다야 나았다.
아가리를 틀어막힌 채 허공에 붕 들린, 의사에게 천마는 귓속말했다.
“일곱 개든 7번이든 상관없잖아. 당장 아파도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며?”
주먹에 한 대 얻어맞고 협박을 들을 뿐인데, 의사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세게 얻어맞고 숨이 죄이는 통에, 천마의 말마따나 제 갈비뼈는 물론이고 하관의 뼈까지 모두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반면 귓바퀴를 파고드는 음성은 낮고 부드러워, 끔찍하게 듣기 좋았다.
“의사 선생님. 사람은요, 팔다리를 다 떼 놔도 시간만 지나면 괜찮아져요. 누가 그걸 몰라서 이 야심하고 귀중한 시간에 선생님을 불렀겠어요?”
말을 마칠 무렵 천마는 더는 기도실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의식을 잃고 늘어진 의사를 한 손으로 든 채 통로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높이 2미터 30센티의 거대한 문이 느릿느릿 닫혔다. 그러자 육안으로는 그것이 문인지 벽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기도실로 이어지는 통로 역시 작고 보잘것없는 방처럼 변신했다. 방의 중앙에 철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채였다.
매우 의심스럽고 수상쩍은 탓에 오히려 누구도 시간 들여 바라보지 않는 방 밖으로, 천마는 기절한 남자를 집어 던졌다.
“죄송합니다.”
그를 대신하여 명경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천마는 오른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깨어나거든 돌려보내고, 다른 의사 찾아와. 공감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산부인과 의사가 필요해. …기설이 담당 주치의, 그 사람이면 되겠네.”
놀란 듯, 명경의 눈썹이 작게 움직거렸다. 그러고는 무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질문했다.
“…그냥 돌려보냅니까?”
천마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냥 보내. 괜히 죽여서 부정 타게 하지 말고.”
구겼던 표정을 고치며, 그는 회색 고양이를 찾았다. 기도실 통로 앞에는 액, 액, 울어 댄 끝에 목이 쉬어 버린 고양이, 경이 있었다. 경은 낯선 의사의 존재가 탐탁잖은 듯했다. 바닥에 대고 꼬리를 탁탁 치는 녀석의 정수리를 천마는 무심하게 긁어 주었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경은 터덜터덜 움직이는 알파의 뒤꽁무니에 붙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식탁 위에는 오렌지 무늬 홈이 파인 1.5L 유리병과 전기 포트가 놓여 있었다.
새 머그잔을 들고 천마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부엌 가득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말 안 듣는 회색 고양이는 유리병에 대고, 더러운 똥을 모래에 파묻기라도 하는 양 시늉했다.
털 날리는 고양이를 한편으로 밀어 치우면서, 천마가 말했다.
“심부름 다녀온 거, 여기 두고 가고.”
고집쟁이 고양이가 아닌, 명경을 향해 뱉은 명령이었다.
명경은 막 챙겨 들었던 의사를 도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러고는 제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의 손에 단단한 케이스가 하나, 꾸깃꾸깃한 종이와 함께 잡혔다. 심부름대로 받아 온 검은 케이스는 천마의 몫이었다. 진 교수의 코피가 튄 계약서는 남들은 볼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명경은 검은 케이스만을 식탁 구석에 놓았다. 바보 같은 고양이는 그것에 대고 한 번 더, 똥 파묻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천마가 실소했다.
극우성 알파의 억제제는 무향 무취였다. 그러고 보면, 경의 동작은 그저 불만의 표시 같았다. 기설을 데려오자마자 꽁꽁 숨겨 버리더니, 싫은 손님까지 불러 놓은 일에 대한 투정이었다.
“그래, 오빠 보러 가자.”
경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기며 천마가 소곤거렸다. 달콤한 유자청을 듬뿍 넣어, 식지 않은 유자차를 새로 만들 차례였다.
***
배꼽 밑에서부터 복부가 땡땡하게 당기는 감각이 서서히 크게 번졌다. 부른 배 위에 젤리를 떠 올린 듯 차갑고 촉촉하고 미끄덩거리는 촉감이 낯선 듯 익숙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기설은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뺨에 들러붙은 베개와 몸을 눕힌 매트리스가 주는 푹신한 감각에 안도했다.
‘맞아…. 형이 나 데려왔지.’
유자차를 타 오겠다던 대화를 기억해 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둔한 혓바닥은 아직도 잠결을 헤매는 탓에,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저, 깜빡 잠들었어요….”
‘잠’이라는 게 지금만큼 매력적인 순간도 없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기설의 어깨를 쓰담쓰담 어루만지고, 눈두덩이를 가려 놓은 안대는 따끈따끈했으며, 사방에서 꿀과 유자 향기가 풍기는 데다 보드라운 동물이 그의 코끝에 제 머리를 비벼 대고 있었다.
“응…, 경아.”
갑갑한 코앞을 더듬거리자 목과 하관을 껴안듯이 덮으며 자리한, 코알라 같은 고양이가 만져졌다. 기설의 손이 닿자 경의 움직임은 더욱 강해졌다. 보호자의 콧대가 뭉개지도록 그의 안면에 제 이마를 문지르는 것이었다. 집착적인 한편, 애정 어린 소유권 주장이었다.
눈을 가린 안대를 치우고서 기설은 더욱 크게 감동했다. 침대 옆, 낮은 의자에 앉은 익숙한 인영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그를 담당하던 산부인과 의사, 오하늘이었다. 약품 냄새를 풍기는 낯선 인간이 동석하는데도 경이 달아나거나 숨질 않고, 대신에 오빠를 지키겠다고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니 감격스러웠다.
복잡한 감정에 취해 기설은 제 고양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난날 천마가 해 준 말마따나 경은 무척 건강해 보였다. 선별된 식단과 충분한 항산화제를 섭취하며 호의호식한 몸뚱이에선 윤기가 줄줄 흘렀다. 체중은 여전하다 못해 오히려 더 통통해진 듯했다.
기설의 빈자리는 경의 작은 턱에서 느껴졌다. 식사 후에 턱을 닦아 주고 간간이 연고를 묻혀 주고 이따금 세수를 시켜 주던 오빠가 사라지니, 털로 덮인 아래턱에 쪼그마한 여드름이 돋은 것이었다.
“이게 뭐야. 지지야, 지지….”
손님의 존재도 잊고, 기설은 경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그러자 경이 씩, 씩, 성난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기설을 대하는 경의 태도를 보면, 개에 비해 고양이가 무심하다는 건 죄 낭설이었다. 기설의 늙은 고양이는 그더러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느냐고 화내기도 하고, 보고 싶었다며 서러워할 줄도 아는 동물이었다.
경을 제 품 안에 끌어안고 토닥거리면서, 기설은 축축해진 눈시울을 문질러 닦아 냈다. 그러고는 의사를 향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오 선생님.”
그러자 ‘오 선생’이라 불린 의사가 미소 지었다. 제가 담당하는 환자 중 가장 잘생기고 가장 순순한 기설에게, 그녀는 친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사 다 끝났어요. 하도 곤히 주무시길래 못 깨웠네요. 이제 닦기만 하면 되니까, 조금만 더 누워 계세요.”
그제야 기설은 제 잠을 깨운 차가운 감촉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는 하반신을 이불로, 가슴께는 수건으로 가려 놓고, 불룩한 배만 보인 상태였다. 전원 꺼진 초음파 검사 기계가 떡하니 침대 옆에 존재했다. 반대쪽에는,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를 채운 기설의 보호자, 한천마가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천마는 평안해 보였다. 그는 기설의 오른손을 붙잡아 제 허벅다리 위에 올리고, 손등을 도닥여 주기도 했다.
형님에게서 풍기는 평온한 분위기에 기설은 가슴 깊이 안도했다. 의사를 불러 검사해도, 저나 이지에겐 별다른 문제가 없는가 보다 생각됐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아프진 않아요?”
환자의 배 위를 수건으로 닦아 내며, 의사가 물었다.
“어… 딱히. 그냥 괜찮았는데요.”
골골거리다 못해 부릉부릉 소리 내는 고양이를 달래며, 기설이 대답했다.
“등에 막, 담이 걸리거나 쥐가 나진 않고요?”
“가끔 그렇죠. 이지 때문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렇구나.”
오 선생은 ‘으음’ 하고 오묘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기설이 아닌 한천마를 바라봤다. 잠시간 그들 사이에 말 없는 시선이 오고 갔다. 곤히 잠들었던 기설은 듣지 못한, 긴긴 대화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기설의 낯에 의아한 기색이 스미자마자, 입을 연 쪽은 의사였다. 그녀는 다행스러운 소식만을 기설에게 전달했다. 갈비뼈가 크게 잘못되진 않았기에 당장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었다.
“보름만 더 참으실 수 있죠? 오른쪽은 어깨도, 팔도 되도록 쓰지 마시고요.”
“보름 지나면 나아져요?”
“그때부턴 아기 위치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갈 거예요. 그럼 갈비뼈도 덜 눌릴 거고요.”
“아, 네.”
기설의 손이 자연히 천마에게서 떨어졌다. 축축한 감각이 모호하게 남아 있는 배 위를 쓰다듬으며, 혹여 놀랐을지도 모를 배 속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기설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의사는 백색 태블릿PC를 꺼내 보였다. 널찍한 화면 속에는 조금 전 초음파로 촬영해 낸 작은 태아, 이지가 있었다.
회색 사진을 들여다보는 두 아버지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지금 자기 손가락 빨고 있는 거예요? 아기처럼?”
기설은 한 달 만에 마주한 이지의 변화에 몹시도 기뻐했다. 완연한 미소에서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풍겼다.
반면 천마의 시선은 검고 희고 밋밋한 사진이 아닌 기설의 낯에 머물렀다. 물끄러미 어린 베타를 바라보며, 그는 고민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표정은 잠시였다.
“형, 이거 보여요?”
기설이 홱 고개 돌려 웃는 낯을 보여 주자마자, 천마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의 거짓 웃음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컴컴하던 두 눈동자에 단숨에 빛이 들었다.
“그래, 우리 아기 예쁘다. 그치?”
그가 가볍게 호응하자, 기설의 설렘은 더욱 부풀었다. 몇 마디 말을 주절주절 두서없이 늘어놓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떨리는지 그의 마음이 온통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지, 속눈썹도 벌써 자란 거 같아요. 이제 얼굴에서 형이 많이 보여요. 이 정도면, 다른 애들에 비해 빨리 자란 거죠? 형 닮았으면, 형만큼 똑똑하게 태어나는 거죠?”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동참하는 이는 천마가 아닌 의사, 오 선생이었다. 그녀는 ‘네, 네’ 기계적인 맞장구를 치며 몇 마디 더, 산모에게 필요한 경고를 남겼다.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는 주의 사항을 들으면서도 기설은 그저 신났다. 갖은 고민과 문제들은 뚱뚱한 고양이와 작은 아기가 주는 감동으로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러나 기설의 착각과 달리, 초음파 기계로 비추어 들여다본 것은 비단 이지의 그림자뿐만은 아니었다. 엑스레이 촬영을 할 수 없는 대신에, 의사는 초음파로나마 기설의 갈비뼈 상태를 살폈다. 그 밖에도 초음파로 들여다볼 수 있는 부위는 전부 다, 최대한 꼼꼼하게 검사했다.
그 끝에 천마의 속은 거멓게 타 버렸다. 아픈 몸을 떠안고도 아픈 줄 모르고, 즐거운 이는 오직 기설뿐이었다.
***
천마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기설은 기도실에 쉽게 적응했다.
보온병을 가득 채운 유자차로 온종일 목을 축이고, 아침부터 점심, 저녁까지 형님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였다. 삼시 세끼를 충분한 영양소로 꼬박꼬박 채우며 스트레스 없는 한나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뺨의 혈색이 좋아졌다. 특히나, 건강하게 이지를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이 기설을 꿈꾸게 했다.
주위를 채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미소 짓고,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저를 응원하매 기설은 단순한 법칙 하나를 망각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질수록 제가 사랑하는 극우성 알파, 한천마가 내려앉는다는 사실이었다.
기설이 천마를 걱정하지 않거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민한 애정과 기민한 눈짓으로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한천마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억제제를 팔뚝에 쑤셔 넣으면서도 한천마는 괜찮은 듯 보였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가 괜찮다고 자부했다. 기설의 곁에 머무르며 이리저리 곤두박질치는 감정 변화를 느끼는 편이, 기설 없이 홀로 괜찮은 알파인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걸, 이젠 알았다.
늦은 저녁에는 종일 쏟아지던 빗방울이 마침내 흰 눈으로 변신했다. 천마는 최소한의 일을 마치기 위해 아주 짧게 외출해야 했다. 근래 SS 그룹 대표 이사의 업무 태만은 바닥을 찔렀다. 오늘 그가 한 일이라고는, 비서가 미리 솎아 내어 정리한 서류철을 빠르게 훑어 내리고 필요한 공란에 서명을 갈기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도 시간이 아까워, 그는 몹시 급히 귀가했다. 일머리 좋은 비서는 미리 주문해 둔 작은 트리를 두 손으로 내밀며 대표님을 배웅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을, 천마는 선뜻 받아 챙겼다. 그러면서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시침이 10을 지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유효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속히 집으로 돌아와 기도실에 들어섰을 때, 천마를 반긴 것은 최대 길이로 늘어난 채 바닥을 구불구불 기는 가죽 목줄이었다. 옆구리에 들린 작은 트리를 내려놓으며, 천마는 기다란 줄을 따라 걸었다.
발길이 향한 곳은 김 풍기는 욕실이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새하얀 인영이 보였다.
똑똑.
건성으로 노크하며, 천마는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훈기 가득한 욕실은 더울 만큼 따듯했다. 너른 어깨를 드러낸 채 기설은 욕조 속에 누워 있었다.
“형.”
비스듬한 욕조 턱에 뒷머리를 기대며 기설이 눈을 끔벅였다. 젖은 기설의 얼굴 옆에 그의 고양이, 경이 자리했다. 물에 빠진 보호자의 모습이 불만스러워 꼬리를 흔들면서도 경은 꿋꿋이 그의 곁을 지켰다.
기설의 시야 가득, 못마땅한 얼굴의 회색 고양이와 알파가 함께 보였다. 그 바람에 절로 웃음이 났다. 선한 눈매가 반달이 됐다.
“다녀오셨어요.”
인사에 대답할 새도 없이 천마는 정장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욕조 안에 팔을 넣어 수온을 확인했다. 구태여 옷을 적실 필요가 크진 않았다. 욕실에는 목욕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의 모래시계와 수온계가 이미 구비되어 있었다. 물의 온도는 36.5도였고, 모래시계는 3분여의 모래알을 남겨 둔 상태였다.
긴 한숨을 내쉬며 천마가 말했다.
“그래, 다녀왔어.”
남은 입욕 시간 3분을 기다리며, 그는 기설과 함께했다. 기설의 맨발은 욕조 속을 첨벙거렸고 천마의 구둣발은 매끄러운 바닥 위에 뻗었다. 따듯한 물에 침입한 찬 손을 기설이 가만두질 않으니 별수 없었다. 알몸인 채 물에 잠긴 임산부와, 그에게 손을 잡히는 바람에 바닥에 자리한 알파는 나란히 3분을 버텼다.
두 남자의 시선이 자연히, 맞은편 벽면의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기설이 틀어 놓은 방송은 늘 그렇듯 다큐멘터리 채널이었다. 푸른 화면 속에서 거대한 고래가 제 꼬리만 한 새끼를 끼고 헤엄치고 있었다.
“재밌니.”
심드렁한 얼굴로 천마가 묻자,
“네.”
기설이 대꾸했다.
단단한 손에 묻혀 온 한기가 가실 때까지 형님을 놓아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턱 밑에서 일렁이는 따듯한 물에 잠겨, 오른손으로 천마의 왼손을 쥐고 있자니 기설은 온몸이 편안했다. 여유로운 궁금증마저 고개를 들었다.
‘내 배 속 양수도 이렇게 따듯할까?’
엉뚱한 호기심이었다. 그리 생각하자니, 기설은 몇 달 내내 편안하게 유영하는 이지가 부러웠다. 막 손가락 빠는 법을 익힌 이지와 달리, 기설에게는 지켜야 할 규칙들이 많았다. 임신한 몸으로 그는 너무 더운물에 닿아서도, 긴 입욕을 즐겨서도 안 됐다.
중력을 덜어 낸 편안한 감각을 멍하니 느끼다가 문득, 생각난 이야기가 있었다. 기설이 말했다.
“고래를 보고 있으면 죽고 싶어져요.”
“뭐?”
느닷없는 소리에 천마의 몸이 굳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도깨비처럼 장목하고, 웃음 짓던 입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뜸 총구를 마주한대도 지금만큼 놀랄 순 없을 터였다.
심상찮은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기설이었다. 말의 물꼬를 잘못 틔었음을 알고, 그는 뒤늦게 첨언했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면 고래가 되고 싶거든요.”
“아… 아.”
천마의 입 밖으로 떨떠름한, 신음도 대답도 아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대신하여 기설이 ‘하’ 하고 한숨 쉬었다. 맞잡은 손을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대고는 쓸어내리기도 했다.
“형이 너무 놀라서 나도 놀랐어요.”
“나만 놀랐겠니. 이지도 간 떨어졌을걸.”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주거니 받거니, 대화에는 쉼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천마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욕조 자리에서 벗어나 그는 수납장을 뒤졌다. 커다란 수건을 찾아 제 두 팔에 걸치기 위해서였다. 준비를 마친 그가 가볍게 턱짓하자, 때마침 타이머가 작동을 멈췄다.
기설은 느릿느릿, 무척 신중한 태도로 욕조에서 일어났다. 혹여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질까 걱정하기로는 천마도 매한가지였다. 팔을 뻗어 기설을 받쳐 줄 준비를 하면서도, 그는 달아오른 베타의 가슴이며 물 흘리는 성기, 둥그스름한 배에 욕정을 느꼈다.
“…….”
이성은 어른인데 몸은 짐승이라, 천마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묵직해지는 아랫배를 느끼면서 그는 기설의 전신을 수건으로 감쌌다. 성급하게 움직인 탓에 수건 밑단을 욕조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물 자국이 삼각형 모양으로 남았다.
그대로 천마가 기설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젖은 밑단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차례차례 욕조 바닥과 기도실의 소파 자리, 그리고 침대 위에 얼룩을 남겼다.
“그럼 나는.”
폭신한 수건으로 기설의 머리칼을 감싸고 문질러 주며, 천마가 물었다.
“나는 뭐로 태어날까. 뭐로 태어나야 너랑 같이 다니지?”
그에 기설이 짧게 고민했다.
“형은… 바다 해요.”
대답 소리는 머리통을 흔드는 진동으로 인해 부들부들 흘러나왔다. 저도 제 목소리가 웃긴다는 듯, 기설은 아이처럼 히히거렸다.
물기를 털어 내던 손을 멈추고, 천마가 말했다.
“아가. 너는 고래인데, 나는 바다나 하라고? 네가 첨벙거리는 동안 나는 속이나 뒤집히라는 거야?”
투덜투덜 투정하면서 그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볕에 말린 새 가운이 보송보송했다. 그것으로 기설의 몸을 둘둘 감싸고, 머리통도 새 수건으로 말아 주자 기설은 하얗게 커다래졌다. 천마의 눈에 비친 그는 흰 토끼 같았다.
왼팔로 시트를 디디며 기설이 뒤로, 뒤로 물러났다. 느릿느릿 움직거린 끝에 그가 자리한 곳은 푹신한 쿠션이 깔린 침대 헤드 앞이었다. 구태여 오른편 자리를 비워 주는 이유를 알기에, 천마는 선뜻 그곳에 몸을 앉혔다. 그러고는 임신한 베타의 어깨에 투정하듯 꿍, 제 이마를 찧었다.
앵.
경이 울었다. 다 큰 인간이 왜 제 흉내를 내느냐고, 혼란스러우매 내는 울음소리였다.
경에게 그리하듯이 기설은 천마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제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대단하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꼬질꼬질한 고양이처럼 구는 것이 기설을 기쁘게 했다.
“바다는 싫어요?”
아이 달래듯 보드라운 목소리로 묻자,
“어. 싫어.”
천마가 즉답했다.
“왜요. 왜 싫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뭘 또 하래.”
그러자 기설이 웃었다. 그저 푸근하게 지어 보이던 여느 웃음과는 사뭇, 다른 빛깔의 미소였다. 수줍은 듯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참아 보려 노력해도 삐져나오고야 마는 미소였다.
그 얼굴이 몹시 귀여워, 천마는 터질 듯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기설을 붙들어 엎고 싶고 박고 싶고 쥐어 짜내고 싶었다. 주먹으로 욕정을 움켜쥐는 대신, 그는 두 손을 펼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기설의 뺨을 감쌌다.
기설의 입술에 천마의 입술이 내리눌렸다. 새삼스럽다는 감상이 일 정도로 마음 쓰인 키스였다. 그대로 기설의 두 뺨, 잘빠진 턱,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알파의 손이 우뚝 멈췄다.
툭, 툭. 새하얗게 뻗은 기설의 목을 위로 아래로 매만질 때마다 목걸이가 손끝에 걸렸다.
“…적응할 게 따로 있지. 넌, 어떻게 풀어 달라는 말 한 번을 안 해?”
기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목걸이 둘레를 넉넉하게 조절해 주며 천마가 말했다. 순전히 괜한 핀잔이었다. 그는 막상 기설이 ‘이것 당장 풀어 달라’,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반항하면, 목줄이 아니라 밧줄이라도 가져와 묶어 놓을 못된 심보의 소유자였다.
순전히 기설의 속내를 알아보려 뱉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형이 묶어 둔 거니까, 내가 나쁜 게 아니잖아요.”
아주 가끔, 만 번 중 한 번 즈음, 천마는 기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그가 의아한 듯 한쪽 눈을 찌푸리자, 기설이 머뭇머뭇 고개 숙였다.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이 네 잎 클로버라도 찾는 듯, 가운의 매듭 올만 연신 뒤적거렸다.
형님을 마주 보지 않으려 애쓰며 기설이 속삭였다.
“이러면… 형이랑 같이 있어도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니까. 내가 욕심내서… 내가 못된 놈이라서 그런 거, 아닌 게 되잖아요.”
“설아.”
“그래서 좀 좋아요.”
말끝에 조그마한 불덩이가 붙었다.
“형이랑 같이 있는 거, 좋아요.”
홧홧하니 작게 타오르는 고백이었다.
그가 저를 웃음 짓게 만드니, 천마도 기설을 웃게 하고팠다. 그러자니 가져온 선물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혀 주면 기설도, 기설이 죽도록 신경 쓰는 배 속 아기도 기뻐할 성싶었다.
천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내려 두었던 트리의 나무줄기를 어여쁜 모양으로 매만지고, 축 늘어진 전구 줄을 제대로 휘감고, 케이블과 콘센트를 연결하고 등을 켰다. 그대로 작은 트리를 안아 들자 별처럼 노란 불빛이 천마의 턱과 아랫입술, 두 눈을 비추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와’ 하는 탄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새액 새액… 깊은 숨소리가 났다. 잠깐 사이에 곤히 잠들어 버린 기설에게서, 낮보다 짙은 살 내음이 났다.
기설의 곁으로 다가가, 트리를 두 팔에 끌어안은 채 천마는 러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잠든 베타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체취를 들이마시며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가슴팍에 귀를 붙인 채 올려다본 기설의 얼굴은 군데군데 불긋했다. 눈 주변도, 콧방울 옆 살의 빛깔도, 두 뺨도 전등을 켠 것처럼 붉었다.
얼렁뚱땅 만들어 낸 크리스마스트리는 결국 침대 옆에 장식되지 못했다. 번쩍거리는 꼬마전구를 바라보는 대신 천마는 기설을 구경했다. 기설은 완벽했다. 그처럼 천진난만한 이를 천마는 만나 본 적 없었다. 새 생명을 품은 상태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렇기에 기설은 더욱 완벽한 존재였다.
말없이, 천마는 기설의 목에 가로줄로 자리한 방해물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닥에 내팽개쳐 둔 채 그는 가습기를 돌리고, 방의 온도와 산소 포화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리고 재차 기설의 옆자리로 돌아와, 조금 전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잠든 이의 체취, 심장 박동, 얼굴을 훑어 내렸다.
이번에, 천마는 치미는 충동을 참아 내지 못했다. 그는 기설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단숨에 풀어 버렸다. 후면에 걸린 자물쇠가 앞으로 오도록 돌리고는, 가볍게 뜯어내어 벗겨 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평소보다 훨씬 더 변덕스럽고, 이상하고, 괴팍하다는 걸 알았다. 이상 충동을 이성으로 이겨 내려는 욕심은 그러나 버린 지 오래였다. 기설이 걱정하는 일과 같이, 그는 억제제에 중독되어 가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주는 불안정한 감각과 비이성적인 애정에 중독되고 심취하여, 한 차례 기설을 놓쳐 놓고도 다시 그를 믿는 것이다.
중얼중얼, 낮은 목소리로 천마가 혼잣말했다.
“설이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한천마는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보내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용도에 대해 알려 주는 부모가 없었다. 때문에 반짝반짝 빛을 내는 전나무가 순전히 장식품에 불과함을 몰랐고, 그것이 소원을 비는 물건이나 장소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천마는 소원을 빌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면 애새끼를 데려가고, 설이는 남겨 주세요.”
들어주는 이도 없고 받아 주는 이도 없는 이기적인 소원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무얼 하는 날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홀로 세상에 나 어느 무협지의 독고 지존처럼 도시를 누벼 온 천마에게도 출신은 있었다. 그에게도 부모로부터 닮은 점이 분명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오늘에서야 그는 저와 저를 낳아 준 남자 간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한천마는 이항아의 멍청한 순정을 빼다 박았다.
***
새해, 문진주의 첫 출장은 대표 이사의 호출로 시작됐다. 사실상 볼 업무는 조금도 없고, 기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놀면 그만인 외출이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기도실에 도착해 눈가리개를 벗자마자 떠올린 생각이 그러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천마가 더는 베타에겐 욕정하지 않고 그놈이 품은 아기만을 원하더랬다. 도주극까지 벌인 베타를 잡아 와서는 고문실에 처박아 놓았다, 쇠줄로 묶고 의자에 앉혀 둔 채 방치 중이다, 자식을 낳기 전엔 풀어 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런 방이 고문실이면 내 방은 뭐, 똥간인가?’
기설을 둘러싼 공간은 지나치게 포근해서 어느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필히 SF와 로맨스를 결합한 장르일 거라고, 문진주는 생각했다. 벙커의 자체 시스템은 찬 공기를 끌고 온 외부인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방 안의 온도가 보란 듯 올라가고 더욱 많은 산소가 작은 알림음과 함께 퍼져 나왔다.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그렇게 인사하는 기설의 손가락엔 맥박을 재는 집게형 기기가 달렸다. 발치에는 태아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검사 기계와 동화책, 검정고시 기출문제집이 쌓여 있었다. 팔 옆에는 링거 대까지 하나 보였다. 여차하면 당장 주사할 수 있게, 투명한 링거액이 주렁주렁 걸린 채였다.
“어, 어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문진주는 인위적인 녹음 지대 옆, 보라색 소파에 몸을 앉혔다. 높다란 벽 곳곳을 잇는 고양이 터널까지 구경한 뒤에야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간 입 안에서 근질거리던, 하고픈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 개중 무얼 먼저 말해야 좋을지 몰라 문진주는 입을 벙긋거렸다.
그에게는 기설이 큰 복덩이고 은인이었다. 마음 같아선 백번 절을 올려 감사를 표하고팠다. 기설 덕분에, 한천마는 문진주의 죄를 모두 눈감아 주었다. 카지노의 돈을 횡령하고도 살아남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전부, 그가 ‘설이 친구’인 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년을 맞이하며 문진주는 새로운 고용 계약서에 서명했다. 여태까지 일한 몫의 돈을 한꺼번에 입금받기도 했다. 4주간 기설을 돌봐 준 몫의 사례금이 그 네 배였다. 그처럼 큰돈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을까 무서울 정도였다.
천마는 아쉬운 소리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흔한 경고나 핀잔도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문진주는 제가 맡은 역할이 무언지 알았다.
“덕배 씨도 설이 씨 되게 보고 싶대. 자긴 너무 험상궂게 생겨서 태교에 나쁘다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문을 열자 수다가 줄줄이 이어졌다. 다 큰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 아기 신발과 뜨개 모자를 구경하기가 무척 즐거웠다. 기설의 몸에 마이크로 위치 추적 칩을 심었다는 천마의 말이 진짜일까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 드릴까요?”
재미있는 볼거리라도 있는 양, 기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계를 힐끔 살피더니 너른 방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문진주도 움직였다. 서재 공간 너머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승강기였다.
많아 봐야 서너 명쯤 탈 수 있을 듯한 사각 공간에 기설이 발을 올렸다. 문진주도 머뭇거리며 그의 옆에 올라탔다. 승강기는 기설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매끄럽게 움직였다.
“잠시만. 이거 어디로 연결된 거야?”
퍼뜩 문진주가 물었다.
“이거요? 옥상 정원으로도 갈 수 있고, 지하로도 갈 수 있고… 형한테도 갈 수 있어요.”
빤지르르한 뺨을 빛내며 기설이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당장 드러난 공간은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었다. 빳빳한 박스와 검은 캐비닛이 줄지어 선 공간은 비밀 창고였다. 여기에 무어, 재미있는 자료라도 있나 생각하며 문진주는 캐비닛을 훑어보았다.
기설은 벽 끝으로 가 작은 패드에 손바닥을 댔다.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벽이 열렸다.
대뜸 드러난 새로운 공간을, 문진주는 잠시간 알아보지 못했다. 몇십 번씩 불려 다닌 장소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대표 이사 한천마의 사무실 내부, 개별 화장실과 이어진 복도란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차게 질렸다.
기설에게는 다정한 형님이자 이지 아빠인 한천마는, 문진주에게 있어선 갑작스럽게 마주하기에 퍽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청심환과 초콜릿, 가벼운 스트레칭, 40분간의 마인드 컨트롤을 죄 생략하고 대뜸 한천마 앞에 떨어지는 일은 그에겐 악몽이었다. 그로부터 큰돈을 받아 낸 직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설은 예쁜 형님을 볼 생각에 신난 기색이었다. 대표실을 향해 고개를 삐죽 내밀며,
“형.”
천마를 찾아 듣기 좋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표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기설에겐 불행이었고 문진주에겐 다행이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비서가 앉은 데스크 자리가 보일 따름이었다. 언제고 평온한 표정과 조곤조곤한 말씨로 한천마의 명령을 전달해 주던 비서는 젊은 남자 하나와 실랑이 중이었다.
정장을 빼입고 선 그의 태도는 무척 점잖았다. 소란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서에게선 미묘하게 곤혹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멀뚱멀뚱, 그 모습을 남 일 보듯 구경하는 문진주와 달리 기설은 적극적인 행동파였다. 그는 대표실을 직진으로 가로질렀다.
대뜸 문을 밀어 열며, 기설이 물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품이 큰 맨투맨 상의에 헐렁한 조거 팬츠, 푹신한 슬리퍼를 신은 기설에게선 아무런 격식도 예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선은 제게 좀 더 익숙한 이, 비서에게 꽂힌 채였다.
마법이라도 부리는 양, 들어간 적 없던 이가 방 안에서 튀어나와도 비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설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그녀가 말했다.
“대표님께선 방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손님이 한 분 오셨지만, 곧 돌아가실 겁니다.”
‘손님’더러 들으라는 양 덧붙인 말에 가시가 있었다. 그러니 더 버티지 말고 재게 돌아가 달라는 의미였다.
“길이 꼬였네.”
기설이 작게 혼잣말했다. 그의 등 뒤에서, 문진주가 비서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했다.
낯선 손님의 시선은 기설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제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오묘한 눈짓을 날것으로 느끼자마자 기설의 고개가 휙 움직였다.
“뭘 쳐다봅니까.”
“…예?”
“뭘 빤히 쳐다보느냐고요.”
“아,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게 아니면, 뭡니까.”
한 발, 기설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기설이 끼어들자 데스크 자리와 손님은 완전히 갈라졌다.
“누구신데, 약속도 없이 함부로 대표님을 찾아와서는…. 뭐, 어디 구경났습니까?”
기설은 무표정했고 비서는 태연했다. 핀잔 듣는 사내 또한 미소를 유지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이는 문진주뿐이었다.
한때 복서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기설이 성질을 부리는 모습은 본 적 없는 문진주였다. 오피스텔 방을 공유하며 지내는 동안에도 기설은 순순하고 착한 동생이었다. 그러나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이, 한천마와 관련된 일에 있어 기설은 고삐 풀린 개였다. 이곳은 기설의 영역이었고, 그는 제 것은 악착같이 지킬 줄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바삐 사과했다.
“이거… 제가 오해하게 해 드렸군요. 인사차 들른 길에, 선물만 전해 드리고 가려던 참입니다.”
남자는 눈치를 재빨리 굴렸다. 요즈음 한 대표는 3월까지 모든 일정을 최소화한 상태였다. 어느 기업의 임원이 아니라 대통령이 방문한다 해도 코빼기도 안 비칠 기세였다. 성형 수술을 받았다더라 하는 헛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쑥하게 꾸미고서 선물과 함께 들이닥친 그는 불청객이었다. 반면, 아무런 격식 없이 편안한 차림새인 기설은 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천마로부터 언제나 환영받는 이가 틀림없었다.
한 대표에게 있어 기설이 중요 인물임을 깨닫자마자, 손님은 명함을 돌렸다. 기설은 빳빳한 태도로 그것을 받아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문진주는 달랐다. 침착하려 애쓰며 훑어내린 명함에는 한성 그룹 네 글자가 찍혀 있었다. 직급은 상무 이사였다.
문진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한성 그룹 회장의 친아들, 강일해를 약물 중독자로 포장하여 언론에 내던진 이가 한천마라는 건 변방의 바지 사장도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강일해의 직급이 상무 이사였다. 한데 새로이 사업을 해 보자며, 새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존심이고 가족애고 간에 돈이 먼저인 건지, 그게 아니라면 복수를 하고자 칼날을 가는 중인 건지… 도통 판가름 되지 않는 접근이었다. 여태 곁눈질로 지켜봐 온 사업 판에는 이렇게, 속 시커먼 작자들이 숱했다.
‘하긴, 뭐….’
그래도 문진주는 한천마를 걱정하지 않았다. 가장 시커멓고 못된 놈이 결국 한천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통로 벽면에 기대 놓은 큰 액자가 하나 있었다. 테두리엔 박스를 씌우고 전면은 흰 천으로 곱게 포장해 놓은 작품이었다. 저렇게 큰 선물을 가져왔으니, 선약이 없어도 받아 주겠거니 배짱을 부린 듯했다.
그리고 ‘땡’ 소리가 울렸다. 3인분의 시선이 승강기로 쏠렸다.
은색 문이 좌우로 열리자마자 한천마가 모습을 보였다. 그림자 대신 명경을 뒤에 달고, 손에 쥔 휴대폰을 노려보던 차였다. 짜증스러운 듯 일그러졌던 표정은 순식간에 변화했다. 기설을 발견하자마자 환히 밝아진 것이었다.
기껏 기도실을 찾아갔더니 있어야 할 놈이 없어, 온 집 안을 뒤지고 로비까지 들렀다 온 참이었다.
“길이 엉켰네?”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천마가 발을 뻗었다. 시커먼 셔츠를 걸친 그는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위압적인 분위기도 비대해졌다. 타인의 존재를 죄 공기 취급하며 그는 기설에게로 가, 애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즉시, 상무 이사가 표정을 고쳤다. 그러고는 바삐 말했다.
“용무가 바쁘신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져온 선물은 예의를 봐서라도 받아 주세요.”
애초에 그의 목표는 신산 건설과의 협업이었다. 새로이 올릴 건물의 로비에 걸면 어떻겠냐 하는, 감언과 작품을 준비해 온 참이었다. 한데 당장 한천마를 유혹하는 것은 빌딩도, 그림으로의 금전 세탁도 아닌 듯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쥔 채 그는 말을 솎아 냈다.
“…강 작가님 그림이 또, 태교에 좋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산모의 마음은 편안해진다고요.”
그에 기설의 시선이 멀뚱멀뚱 그림 액자로 향했다. 포장으로 가려 놓은 그림이 그제야 궁금해졌다.
기설의 반응을 힐끔 살피고, 천마는 몇 마디 예의상의 인사말을 성의 없이 뱉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다음엔 약속된 날에 보지.”
다음에 약속된 날 따윈 없었다. 엉덩이에 대고 발길질만 안 했다 뿐이지 축객이었다. 그래도 젊은 이사는 씩씩하게 돌아갔다. 한천마에게 작은 줄 하나를 건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럼… 대표님,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문진주도 자연스레 물러섰다. 언제 인사하고 내빼야 좋을지 몰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 타이밍을 잡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놀랐다. 힐긋 소품 살피듯 저를 내려다보는 한천마에게선 지난날과 같은, 위협적인 페로몬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휘휘 흔들며 기설에게 인사한 뒤, 문진주는 승강기 앞으로 달려갔다. 천마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서 기설이 그를 구경했다. 얼핏, 닫히려는 승강기 문을 잡아 주는 손이 보였다. 강명경이었다. 문진주는 그와 함께 사라졌다.
방해꾼이 전부 가신 뒤에야 기설이 천마를 바라봐 주었다. 단둘이 남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마는 기설의 손을 잡고 대표실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납작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투명하던 유리 벽이 색을 바꿨다.
남들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야 비로소, 약속된 용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한천마가 말했다.
“우리 설이, 이제 쉬할까?”
대답 소리는 그보다 몇 박자 늦게,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네….”
천마가 두 팔을 뻗자 기설이 그의 품 안에 쏙 들어갔다. 큰 품과 길쭉한 팔, 단단한 손이 기설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뻣뻣하기가 목석 같던 기설도 어느새 형님에게 안겨 옮겨지는 데 익숙해졌다. 천마의 큰 손이 제 옆구리와 엉덩이를 감싸 안아 들면, 기설은 냉큼 그의 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의 힘을 풀었다. 저보다 큰 어른에게 안겨 다니면 훨씬 편하고 기분이 좋다는 걸, 다 자란 후에야 익힌 것이었다.
덕분에 천마는 웃음을 감출 줄을 몰랐다. 2인분의 베타를 안아 들고 그는 대표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기설을 제 직무용 책상에 걸터앉혔다.
예상과 다른 종착지에 기설은 못내 당황했다. 벙긋 입을 열어도 꺼낼 말은 없었다. 기설의 입술 위로 천마는 제 입술을 뭉갰다. 열 오른 입맞춤이었다. 기설이 멈칫거리며 입을 꽉 다물자, 천마는 넓고 뜨거운 혀를 뱀처럼 움직였다. 다물린 입술을 밑에서 위로 핥아 올리고, 잇새를 연거푸 두들기기도 했다. 아랫입술이 뭉개지고 윗입술이 삐죽 나오도록 핥아 대기에, 기설은 요거트 뚜껑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실소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실없이, 슬며시 웃는 기설이 천마는 예뻤다. 여름보다 겨울, 어제보다 오늘 더욱 잘 알게 된 기설인데, 그에겐 알면 알수록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한천마는 일평생 기설을 궁금해할 터였다. 얇은 미소 한 줄에 안달이 나는 것을 보면 그랬다.
방향을 바꾸어, 천마는 기설의 짙은 머리칼에 뽀뽀했다. 그대로 뭉개진 귓불을 살짝 깨물고, 단단한 어깨와 가슴에 코를 문지르고, 둥근 복부를 타고 느릿느릿 하향했다. 입술이 지나는 길마다 쪽, 쪽… 작은 소리가 남았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마침내 사타구니에 도착해, 그는 잘빠진 정장 바지를 더럽히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태도에 미처 놀라기도 전에, 기설의 바지와 드로어즈가 한 번에 벗겨졌다. 확 걷어 내린 드로어즈 밴드가 종아리에 팽팽하게 걸렸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살짝 튀어 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기설을 올려다보는 천마의 얼굴은 천박한 듯 예뻤다. 속눈썹은 더욱 길어 보이고 하관에서 풍기던 사내다운 느낌이 반절 줄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새하얀 윗니가 드러나자 입술은 더욱 붉어 보였다.
그 얼굴에 홀리어 기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아름다운 알파를 바라보기만 했다.
천마는 베타의 성기 끝에 코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대놓고 킁킁 냄새 맡았다. 시원스러운 입매가 야시시하게 벌어졌다.
“꼼꼼히 잘 씻고 왔나 봐. 난 더러운 게 더 꼴리는데.”
얼굴은 천사 같은데 목소리는 바닥을 긁는 듯하고, 뱉는 말은 음탕했다. 그런 천마를, 기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눈도 못 마주치며, 벌겋게 달아오를 따름이었다.
쭈뼛쭈뼛 맥을 못 추리며 기설이 중얼거렸다.
“저질….”
그에 천마가 하하 웃었다. 굵은 검지로 톡, 톡 기설의 성기 끝을 두들기며 그가 말했다.
“쉬하고 싶어서 온 게 맞아? 근데 이건 왜 세워. 물 싸기 힘들게.”
“…….”
“저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란 듯 입을 ‘아’ 벌린 천마가 덥석, 기설의 성기로 제 입을 틀어막은 탓이었다. 붉은 살덩이 끝이 천마의 입천장에 거칠게 눌렸다.
큰 자극이 와락 닥쳐오매 기설의 눈앞에선 빨간빛이 튀었다. 코 밖으로 얕은 신음이 샜다.
“흐, 흐읏….”
더운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살갗에 귀두 끝, 여린 살이 연신 비벼졌다. 날 선 감촉에 기설은 온몸에 소름이 올랐다. 뺨의 솜털이 쭈뼛 서고 발가락 끝이 절로 구부러졌다. 오금이 저리고 아랫배가 세게 당겼다.
“헉, 윽, 형… 형, 나, 나 배….”
절로 힘 들어간 배를 부여잡으며 기설이 허둥지둥 말하자, 천마가 태도를 바꿨다. 이성이 점멸하도록 강한 자극은 금세 뭉근하고 달콤해졌다. 넓은 혓바닥이 부드럽게 기설의 성기를 감쌌다.
입 안 가득 베타의 성기를 담고서, 천마가 뭉개진 음성을 냈다.
“이러헤?”
“학…, 으, 읏. …응.”
입 안의 살덩이가 단단하게 부풀수록, 천마의 혓바닥 아래엔 더운 침이 고였다. 아랫입술을 타고 새어 나간 침방울이 기설의 성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헐떡거리던 숨을 가라앉히는, 기설의 검은 눈썹이 흥분으로 일그러졌다. 갈색 눈동자엔 물기가 어렸다. 그러고선 제 것을 문 알파를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예쁜 놈이 아주 어여쁜 이 본다는 양 저를 내려다보매, 천마의 가슴 안에 불이 번졌다.
두 눈을 치켜뜬 채 천마는 기설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았다. 혀뿌리를 지나 목구멍 깊숙이 들어차도록 굵은 성기를 쑤셔 넣다시피 삼키고, 거칠게 빨았다. 볼이 패도록 강하게 살덩이를 빨자, 기설의 잇새로 큰 신음이 터졌다. 그의 두 손이 허둥지둥 천마의 머리칼에 닿았다. 알파의 귀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잡고 급하게 뒤로 밀어 내면서, 기설은 두 눈을 바로 뜨지조차 못했다.
“아…, 아, 아….”
잔뜩 발기한 채 제 목구멍에 대고 껄떡이는 성기를 맛보며 천마는 침을 흘렸다. 빳빳하니 턱이 당기고 목구멍은 헐 것 같았다. 그대로 두어 번 더 세게 빨아 주자 기설의 다리가 허공에서 동동 구르듯 움직였다.
“헉, 허윽….”
흥분을 못 이기고 삐져나온 눈물이 콧대에 바짝 붙어 흘러내렸다.
그제야 천마가 입 안의 성기를 뱉어 냈다. 알파의 타액과 제가 싸 댄 프리컴으로 인해 기설의 성기는 윤이 흐르도록 축축했다. 아플 만큼 세게 발기해서는, 천마가 놓아주자마자 배에 바짝 붙으며 서기까지 했다.
“좋아?”
“하…아, 하….”
저릿저릿하게 남은 감각의 여운에, 기설의 허벅다리가 잘게 떨렸다. 오르락내리락 가슴을 들썩이며 기설은 도리질을 쳤다. 죽도록 흥분한 주제에 거짓말이었다.
핏기 올라 붉어진 입술을 오므리며, 천마는 베타의 귀두 끝을 살짝 빨았다. 벌겋게 발기한 성기를 진달래꽃 꿀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자 밋밋하고 씁쓰레한 맛이 났다. 기설이 오만상을 구기며 연거푸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만. 형, 안 돼요….”
“왜?”
“…싸, 쌀 거 같아요. 제발….”
그에 천마가 실소했다. 아무래도 기설은 형님께서 왜 제 것을 빨아 주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상냥하게 말로써 알려 주는 대신 천마는 혀끝을 뾰족하게 말았다. 그대로 프리컴을 흘려 대는 귀두 끝, 작은 구멍에 제 혀끝을 찌르듯이 맞붙였다. 위아래로 굴리고, 쑤시고, 핥으며 자극하자 기설이 낑낑 울었다.
“형, 흐…읏, 윽…!”
거친 추삽질이나 세게 빨아 대는 펠라티오보다도, 야트막하고 간질간질한 자극에 약한 기설이었다. 손바닥의 손금을 살살 긁어 주거나 집게손가락으로 귓불을 문질러 줄 때 그러듯이, 요도를 깔짝깔짝 핥아 주자 표정부터 무너져 내렸다. 벌어진 잇새로 거친 숨소리에 엉겨 신음이 흘렀다.
“흑, 흐응, 응….”
얼마 못 가 울컥, 굵은 성기 끝에서 허연 액체가 뱉어져 나왔다. 더운 살덩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쓸어 대면서, 천마는 제 입을 쩍 벌렸다. 허억, 허억… 가쁜 숨소리를 따라 질척한 정액이 두어 차례에 끊어 가며 빠져나왔다. 반절은 천마의 붉은 혀와 아랫니에, 남은 반절은 턱에 튀어 흘러내렸다.
“흐으, 으….”
기설이 두 뺨을 바르르 떨었다.
“흑!”
힘이 바짝 들어갔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졌다. 순식간에 오른 혈기로 인해 그의 뺨이며 목, 손등까지 가릴 것 없이 온통 분홍이었다.
“…형….”
가쁜 숨을 정돈하기도 전에 기설은 천마의 양 뺨을 어루만졌다. 저를 바라보게끔 힘주어 당기면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기설의 키스를 받은 것은 천마의 손바닥이었다.
‘텁’ 소리 나게 애인의 입을 틀어막아 놓고, 천마는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정액 묻은 제 입술을 훔쳤다. 입 안에 고인 것은 꿀꺽 삼켜 없앴다. 그 바람에 기설의 낯은 더욱 짙은 분홍이 됐다.
이어 꿈지럭꿈지럭 기설이 두 발을 움직였다. 종아리에 팽팽하게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을 마저 벗어 던진 것이었다. 그러고는 두 팔을 책상 자리에 딛고, 떨리는 무릎을 양쪽으로 벌렸다. 무얼 기대하고 또 긴장하는 듯 눈빛이 뭉근했다.
그러나 기설의 예상과 달리, 형님께서 제 것을 꺼내어 그의 뒤에 들이미는 일은 없었다. 따끔거리는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며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녹진녹진해진 기설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일으켜 세웠다.
극진하리만치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그는 기설을 화장실로 데려갔다. 변기를 마주 보고 선 뒤에도 기설은 형님께서 삽입 섹스는커녕 제 욕정을 해소하는 일조차 생략했단 사실을 믿지 못했다.
“형….”
눈치를 살피며 몇 차례 숨을 돌린 뒤에야, 기설이 물었다.
“형은… 안 싸도 돼요? 나 엉덩이도 깨끗하게 씻고 왔는데요.”
“왜. 역시 빨리는 거보단 박히는 게 더 좋은 거 같애?”
그러고는 고양이 궁둥이 두들기듯 툭툭 기설의 볼기를 가볍게 쳤다. 말씨며 행동은 짓궂어도 그뿐, 내심 기설을 걱정하는 천마였다. 그에 기설은 맥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안 아파요, 형. 진짜 괜찮은데….”
조금도 괜찮지 않다는 걸,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느니 하는 말은 천마의 목구멍 밑에서만 머물렀다. 허리를 깊이 숙여 자세를 고치며, 그는 기설의 어깨에 제 턱을 괴었다.
“자. 쉬하자, 아가.”
그러고는 한결 부드러워진 베타의 성기를 쥐고, 맑은 변기 물에 겨냥했다. 엄지 끝마디로 살살 문질러 주며 ‘쉬’ 속삭이자, 기설이 아주 작게 부르르 떨었다.
천마가 재차 속삭였다.
“쉬이….”
이내 물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갓 사정한 직후, 말랑해진 성기에서 빠져나오는 물은 가늘고 약했다. 기설의 호흡도 학학 들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배뇨하는 순간은 여전히 부끄럽고 조금은 수치스러웠지만, 일을 마친 뒤에는 몹시 후련하고 기분이 좋았다.
천마는 기설을 대신해 변기 물을 내리고 그의 성기를 닦아 주기까지 했다. 하다못해 ‘참 잘했어요’ 하는 칭찬까지 분홍색 살덩이에 남겼다.
이마를 익힌 채 오도카니 서 있기도 잠시, 기설은 새 수건을 찾았다. 깨끗한 물에 적셔 형님의 입을 닦아 주기 위해서였다.
“형…. 입술 터졌나 봐요.”
왼편 입가에 밴 작은 핏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낼 적에, 기설의 눈동자에 형광등 불빛의 사각 형태가 고스란히 비쳤다. 녹진녹진하니 풀린 눈망울이며 홀로 벙긋벙긋 움직이는 입술까지 온통, 천마의 입가에 난 아주 작은 상처에 집중한 채였다.
그제야 고개 숙여, 천마는 어린 애인에게 키스했다. 막 볼일을 마친 놈에게 들이박는 입맞춤마저 달콤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저질이 맞았다.
그리고 그들은 바보 같은 짓을 벌였다. 넓고 쾌적한 공간을 죄 버려 놓고 화장실 한구석에 붙어 선 채, 서로를 끌어안고 몇 분이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었다.
터질 듯 뛰는 심장을 가라앉힌 뒤에야 기설이 먼저 움직였다. 형님의 손을 잡고, 그는 너른 대표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표실 소파는 몹시 푹신했다. 한쪽 자리를 채우고 앉은 대표 이사가 제 무릎을 두들기면, 지친 기설이 그를 베개 삼아 눕기에 제격이었다. 단단한 품 안에 상체를 기대며 기설은 작년 여름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미처 지난해와 작금의 상황을 비교하기도 전에, 천마가 사람을 부렸다. 승강기 옆 통로에 덩그러니 두었던 작품을 가져오라 시킨 것이었다.
미리 알고 대기라도 한 양, 흰 장갑을 낀 사내 둘이 그림을 옮겼다. 불투명한 유리 벽면에 기대어 세운 추상화는 온통 밝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유치하지 않았다. 캔버스 전체에 분홍색 신기루 같은 것이 넘실거리고, 사방으로 잎맥이 기어 다녔다. 천마는 작품을 아주 짧게 감상하고, 기설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흔한 전시회 한번 가 본 적 없는 기설이었다. 예술 세계를 알기는커녕 그는 피카소와 모네조차 분간 못 할 문외한이었다.
현대 작품의 진가는 그에 담긴 개념에 있다던가. 그런 말은 배운 놈들이 그들 울타리 안에서 읊어 대는 소리에 불과했다. 피로감은 높고 돈만 많은 한천마가 보기에 그림은 그저, 저 보기에 좋으면 수작이었다.
“뭘 그린 건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예쁘네요.”
기설이 말했다. 천마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수작’에서 ‘명작’으로 고쳐 놓았다.
“어디에 걸어 둘까.”
천마가 물었다.
도대체 무얼 그린 그림일까, 저 얼룩은 꽃봉오리인가 솜사탕인가, 그것도 아니면 태양이나 구름인가… 추상화의 본질과는 먼 고민을 하던 끝에, 기설이 말했다.
“동화 같은 집에요.”
그러고는 웃음 지었다. 제가 보기엔 그림이 동화책에 실릴 삽화 같기에, 동화 같은 집에 걸면 제격이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천마의 품 안에 등을 깊이 묻으며, 기설은 동화책에서 자주 보던 집을 묘사했다.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집이라는 것은 희한하게도 한천마가 거짓으로 꾸려 냈던 유년기 집과 흡사했다. 서로 간에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묘사하다 보니, 어휘력도 상상력도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졸려?”
기설의 관자놀이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 주며, 천마가 물었다. 가물가물한 두 눈을 감출 줄 모르면서도 기설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 손가락을 뻗어, 천마는 기설의 손을 깍지 끼며 마주 잡았다.
“자다가 배 아프면, 내 손 세게 쥐어.”
“네.”
“아주 많이 아프면, 아주 세게 쥐고.”
“네….”
그대로 천마는 기설의 정수리에 입술을 맞췄다. 문득 바라본 기설의 뒤통수에는 일자형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 언젠가 밤의 골목길에서, 돌에 맞아 생겼다던 자국이었다. 실선 흉터를 따라 그 부위에만 머리칼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작은 땜빵이었다.
천마는 그 위에도 입맞춤을 남겼다.
***
깊은 밤, 기설이 천마의 손을 움켜쥐었다. 중지 끝이 희게 질리고 손바닥 가득 쥐가 오르도록 강한 악수였다. 동아줄 붙들듯이 형님의 손을 쥐고서 기설은 끙끙 앓았다.
“배가 아파요….”
기설이 신음했다.
“형….”
이르게 찾아온 진통이었다. 한 달, 두 달… 손가락을 구부리며 셈해 본 시간이 미처 6을 넘질 못했다. 지금 태어나 버리면, 이지는 칠삭둥이조차 되지 못했다.
잠시간 기설은 공포를 느꼈지만, 금세 진정했다. 덜컥 겁먹은 저를 달래는 천마의 태도가 마치 올 것이 왔다는 양 침착하고, 태연하고, 자연스러워서였다.
“설아. 진정하고, 시계 보자. 몇 분 간격으로 아픈지 외워야 해. 할 수 있지?”
땀에 젖은 기설의 손바닥을 가로질러, 천마는 은색 시곗줄을 채워 주었다. 기스 하나 없이 저에게로 돌아온 시계를 꼭 쥐고 기설은 초침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한천마가 불신 지옥 속에 산다는 걸, 기설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믿음이 갔다. 그가 아는 천마는 아주 미세한 가능성을 둔 악재에도 대비책을 세워 둘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마에게는 기설과, 기설의 배에 든 작은 아기를 위한 계획이 있었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그는 준비된 짐 가방을 어깨에 멨다. 기설을 두 팔에 안아 들었으며, 경을 위한 전자동 급식기의 전원을 켜고 집을 나섰다.
조수석에 기설을 태우고, 차를 모는 내내 천마는 침착했다. 느릿느릿 안전하게 전방을 살피면서도 그는 연거푸 손가락을 꼽아 대는 기설을 막았다. 당장 이지가 태어나면 얼마나 이른둥이인지, 달수를 계산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에 차창 밖을 구경하길 권했다.
“설아, 밖에 눈 온다.”
가쁜 숨을 헉헉거리며 기설이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 새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2월을 코앞에 두고 세상은 온통 하얬다. 어째선지 올겨울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새벽녘이 어슴푸레한 시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기설은 제 이름으로 예약된 특실로 옮겨졌다. 병실의 첫인상은 ‘꼭 집 같다’였다. 큰 창에 달린 커튼의 빛깔도, 협탁 옆에 놓인 화분의 생김새도 집에 있는 것과 같았다. 특히나 더블베드 침대에 등이 닿는 감촉이 매일 눕던 제 침대의 매트리스와 완전히 똑같았다.
설마 형이 이런 것까지 준비를 해 뒀을까… 기설은 잠시 의심했고, 이내 확신했다. 천마가 챙겨 온 가방 안에 든 제 여벌 옷과 속옷, 영양제와 작은 간식, 읽을 책과 가지고 놀 게임기를 본 순간이었다.
“형…. 형은 뭐로 갈아입게요?”
진통이 한풀 가시매 안도하며, 기설이 물었다. 그 앞에서 천마는 멀뚱멀뚱 아무 말도 하질 않고 서 있다가, 뒤늦게 탄식했다.
“아….”
어째선지, 기설은 진남색 잠옷 파자마에 검정 구두를 구겨 신은 천마가 귀엽고 또 가여웠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오 선생이 모습을 비추었다. 집에서 막 나온 사복 차림에 의사 가운만 덜렁 걸치고서, 그녀는 웃는 낯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기설의 상태를 덤덤하게 확인했다.
기실, 천마에게 새 진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기설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는 진작 알았다. 크리스마스이브 날부터 그랬었다.
초음파 검사 결과는 기설을 모자란 부모로, 이지를 이기적인 자식으로 만들었다. 태반 유착 조짐이 보였고, 조산의 위험은 매우 높았으며, 두 사람 모두 병 없이 무사하긴 힘들다고 말이었다.
당시 의사가 내놓은 유예 기간이 보름이었다. 아파도 보름만 더 버티어 이지가 조금 더 자라고 나면, 그때는 미숙아 수술을 준비해 두고 제왕 절개를 하잔 말이었다. 그런데 보름 동안 앓기는커녕 기설은 사흘 만에 안정됐다. 진통이나 발열은커녕 그는 재채기 한 번도 하질 않았다. 갈비뼈도 전부 아물어, 뚱뚱한 경을 안고 다니기까지 했다.
결국 기설은 보름하고도 새 보름을 더 버텼다.
이지의 건강과 생존율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그 아이는 최대한 오래도록 기설의 몸 안에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자라나고 완성되어 세상에 나야만 했다.
한데 기설의 상황은 그와 반대였다. 이지가 버티면 버틸수록, 기설은 하루 단위로 부식되어 갔다. 정확히는 기설의 배에 든 아기집이라는 것이 순차적으로 망가졌다.
기설의 배에 들린 기적을 의사는 기형이라 말했다. 애당초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기관이 이 정도 기능까지 해낸 게 기적이라고 말이었다. 기설의 ‘기형’은 이제 거의 쓸모를 다했다. 그, 자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기관은 이미 태반이 달라붙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기설의 몸과 이지의 생존율을 저울질하는 일을, 천마는 침묵하며 도맡았다. 제 뼈와 살을 어디까지 깎아 아기에게 내어 줄까 하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견주는 계산일랑 기설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처럼 불행한 고민도, 비현실적인 현실감도 기설의 몫이 되어선 안 됐다. 천마는 그 꼴만은 볼 수 없었다. 셈에 약한 기설은 10대 0을 택할 터였다. 제 몸에 염증이 죄 퍼지고 장기가 싹 뭉개지고 뼈에 금이 가 0만 남도록, 이지에게 다 퍼 줄 터였다. 그 꼴만큼은, 정말이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천마가 택한 10대 0은 갑과 을이 반대였다.
의사와 논의인지 말다툼인지를 하며 밀어붙인 계획이 있었다. 진통이 오면 곧바로 내원하여 제왕 절개 수술을 받을 것이니, 기설을 위한 수술실과 의사, 그리고 미숙아를 위한 응급 수술을 덧붙여 준비해 두라는 말이었다.
늘 그렇듯 천마는 제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일부분은 실제로 그랬다. 천마가 모난 사실을 숨겨 준 덕에 기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평온했다. 컨디션이 좋고 고민이 없으니 이만큼 버텨 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한천마가 옳았다. 이지를 위해 더 이상, 기설은 아무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기설 씨. 많이 힘드시겠지만… 일주일만 더 참아 보실 생각 있으세요?”
그러나 의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천마와의 약속을 깨뜨렸다. 대신에 원칙주의자로서의 삶을 택했다. 저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뜬, 나찰 같은 남자가 신산시의 주인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원칙을 지켰다. 수술실에 언제 들어갈지 정하는 건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몫이란 신념이었다.
마른침을 넘기며 오 선생이 말했다.
“이대로 일주일이 더 지나면… 기설 씨 상태가 많이 나빠질 거예요. 지금도 태반 유착이 심각한데, 그땐 자궁을 제거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제왕 절개 수술을 하면서 자궁 제거술을 병행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
“하지만 이런 말도 있어요. 태아한테는 엄마 아빠 배 속에서의 일주일이, 밖에서의 1년이라고요. 일주일 일찍 태어나면 1년을 더 고생해야 한단 뜻이에요. 이지, 솔직히 위험한 미숙아예요. 한 주만 더, 칠삭둥이가 될 수 있게… 조금만 더 품고 계실 마음이 혹시 있나요?”
“네.”
기설이 즉답했고,
“설아!”
천마가 소리쳤다.
“그래도 돼요. 저는 괜찮습니다.”
선택권이 주어지자 기설은 망설이지 않았다.
천마의 기분은 지옥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기설이 어떤 길을 택할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또 이해하기에, 꼭 그만큼 천마는 고통스러웠다. 머리 뚜껑이 열리고 분노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당장 품어야 하는 것이 절망인지 희망인지조차 분간되질 않았다.
“…….”
꽉 쥔 주먹이 온통 얼얼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손바닥 살갗은 남의 것처럼 둔했다. 우두커니 침묵하며, 천마는 말을 삼켰다.
식은땀으로 목을 적신 기설에게 차마,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래서 천마는 노력했다. 소리를 지르며 무력을 쓰지 않고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기설을 억지로 끌고 가 수술대에 올리지 않기 위해 그는 무진 노력했다. 온 힘을 끌어 쓰며 두 발을 땅에 붙였다. 그리고 침묵했다.
야속하게도 기설은 그에게 뒤통수만 보여 주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리고서 외면할 뿐, 천마를 바라보지조차 않았다. 차가운 동작 안에 복잡한 감정이 실렸다. 형님이라면 제 선택에 반대하며 화를 낼 것을 알기에, 그가 설득하기 시작하면 저 역시 흔들릴 것 같기에, 이지를 품고 굳게 버티고자 애써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소리 없는 실랑이를 느끼며, 오 선생이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알파와 억지로 웃어 보이는 베타를 향해,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항생제부터 달아 드릴 거고요. 지금 잡히는 자궁 수축부터 멈추게끔, 수축 억제제. 그리고 스테로이드 놔 드릴게요. 스테로이드는 나중에 아기 태어나거든 호흡하기 쉬우라고, 미리 아빠가 맞아 주는 거예요.”
“네.”
뒤이어 여러 조언과 안내가 이어졌다. 몇 시간 간격으로 어느 주사를 맞고, 며칠 뒤에는 어떤 검사를 하고, 한 주 뒤에는 어떻게 수술을 할까에 대한 이야기는 길고 길었다. 혹여 중도에라도 마음이 변한다면 곧바로 수술일을 당기겠노라 친절한 첨언도 함께였다.
그러나 실상, 그 모든 과정에서 기설에게 주어진 일은 하나였다. 밀려드는 통증도 약물이 주는 아픔도 그저 참고 견디는 것뿐이었다.
긴긴 대화 끝에 의사는 병실을 떠났다. 그제야 기설이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오래도록 저만을 내려다보며 기다린 알파를 바라봐 준 것이었다.
사색이 된 채 얼어붙은 천마를 향해, 기설이 웃었다.
“찌찌뽕.”
그러고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꺼냈다.
“형이랑 나랑, 억제제 맞는 거, 이제 똑같다. 그죠….”
그게 무어 재밌는 일이라도 된다는 양 기설은 작위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두 눈동자가 좌우로 바삐 일렁거리고, 대칭으로 올라간 입꼬리는 파르르 떨렸다. 애원이 담긴 표정이었다. 화내지 말아 달라고, 묵묵히 제 선택을 응원해 주고, 계속해서 곁에 있어 달라고, 기설은 그렇게 빌고 있었다.
눈알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천마를 덮쳤다. 그는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리고 더운 숨을 서서히 삭였다.
끓어오르는 듯 낮고 쉰 목소리는 한참 뜸을 들인 뒤에야 흘러나왔다.
“…난 그 놀이, 뭔지 몰라.”
무뚝뚝한 목소리로 억지로 뱉은 말에도 기설은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열심히, 놀이의 규칙을 설명했다.
“내가 먼저 찌찌뽕이라고 말했으니까, 형은 얼음이 된 거예요. ‘땡’이라고 말하면 돼요. 그러면 다 풀려요.”
“…….”
“형.”
천마의 뺨 옆에 옴폭한 홈이 파였다. 관자놀이 위에서 맥박이 퉁, 퉁 거칠게 뛰었다. 분을 삭이기 위해 그는 분명 노력하고 있었다. 불안을 삼키기 위해 최대한 힘을 주고 있었다. 소란을 부리지 않고자 죽도록 쪽을 쓰던 차였다.
“형. ‘땡’이라고 말해요.”
그래도 기설은 더한 것을 바랐다. 석상처럼 얼어붙은 채 그저 버티는 것이 전부인 천마에게 손 뻗으며, 그의 파자마 소매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말 좀 해 줘요, 형….”
그런 기설이 천마를 화나게 했다. 잠깐의 갈등을 못 참고, 당장 화해를 하자며 저를 한계까지 밀어 넣는 기설이 그는 미웠다. 한 주 내내 통증을 떠안고 죽기 살기로 버텨야 하는 주제에, 약물에 절여지고도 진통제는 꿈도 못 꿀 몸을 하고선, 아무런 불안도 걱정도 없이 혼자 괜찮은 기설은 악당 같았다.
저 혼자 괜찮고, 강하고, 굳건해서는….
“그럼 나는.”
천마가 중얼거렸다.
“…나는, 설아.”
놀란 듯 기설이 눈을 크게 떴다. 천마는 제 옷깃을 쥔 기설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 속이 문드러진 만큼, 분통이 쩍쩍 갈라지는 만큼 세게 쥐었다가, 서서히 놓았다. 그리고 속사포로 말했다.
“형이 간호사 불러올게. 주사 언제 놔 줄 거냐고, 확인하고… 일주일 동안 뭘 해야 되는지 계획표라도 짜야겠다. 너 입을 여벌 옷이 더 필요하겠네. 내 옷도 많이 필요하겠고…. 잠시만 기다려, 설아. 형이 금방 갔다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천마는 병실을 떠났다. 기설은 구태여 그를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았다. 변명하듯 저를 버려두고 나서는 이를 향해,
“네. 다녀오세요….”
신기루 같은 인사를 남긴 게 전부였다.
복도로 걸어 나가 병실 문을 닫자마자 천마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바로 오 선생을 찾아냈다.
그녀는 멀리 떠나지 않고 데스크 자리에 서 있었다. 손안의 차트를 살피는 듯하더니, 천마가 다가서자 즉각 고개를 들어 보였다. 한천마가 저를 찾을 것을 알고, 이미 각오와 긴장을 마치고서 뻣뻣한 태도였다.
“약속 못 지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구구절절 풀어낼 말은 많았다. 그러나 차마 변명을 마칠 수가 없었다. 일순 오 선생은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걸까 의심했다. 신념에 따라, 원칙을 지켰음에 느끼던 자부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한천마의 얼굴이 그녀를 후회하게 했다.
“오메가로….”
천마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가 건넨 질문은 그 자신이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발현할 확률이 꽤, 높았는데. 못 되었다고 했어. 어릴 적에는 형질이, 변할 수도 있었다고.”
흐지부지 말을 마치는 천마를 올려다보며, 오 선생이 마른침을 여럿 삼켰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발현 가능성은 없습니다.”
잔뜩 화난 채 쫓아와서는, 이런 질문을 꺼내는 극우성 알파가 한천마였다. 의사가 보기에는 그가 한심할지도 몰랐다. 어린 베타는 출산을 앞두고 고군분투하는데, 극우성 알파는 의사를 붙잡고 애인의 발현 확률이나 묻는 꼴이라니, 누가 봐도 한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실, 천마가 발현 확률을 물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베타냐 오메가냐 하는 기설의 형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기설이 품을 수 있는 두 번째 아기는, 또 한 번의 기회는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짧은 일생을 거칠게 살아오면서, 온전한 제 것이라고는 가져 보질 못한 기설이었다. 그런 기설에게서 구태여, 앞으로 갖게 될 무어까지 빼앗을 필요는 없었다. 한데 내일은 그에게 기회가 없다고 하고, 오늘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너를 더 내놓으라 말했다.
입을 꽉 다물고, 천마가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거꾸로 걸어 그는 기설에게로 돌아갔다. 내내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기설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기뻐했다.
“형.”
웃는 낯으로 이리 오라며 저를 부르고, 침대가 넓으니 같이 눕자며 저를 앉히고, 갑자기 병원에 와 피곤할 텐데 한숨 돌리고 눈 붙이라며 저를 달래는, 어린 베타를 끌어안고 천마는 거짓말했다.
“설아, 애쓰지 않아도 돼. 형 화 안 났어.”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이지라는 이름을 지닌 작은 아기는 결단코 한천마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걸.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이지의 평생에 걸쳐, 이지의 신변에 관한 선택은 오직 기설만이 내릴 수 있다는 걸.
배 속에 움튼 채 열심히 완성되어 가는, 작은 존재 하나. 그것만큼은 온전히 기설의 몫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기설의 기울어진 세상이 조금은 평평해질 터였다.
***
링거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기설은 일주일을 버텼다. 땀 냄새를 풍기고 이틀 간격으로 오줌줄을 차고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해맑았다. 기쁜 일은 단 하나도 없건만 모든 게 좋다고만 말했다.
기설은 문진주가 사다 준 젤리를 맛있어했다. 명경이 골라 준 동화책이 재밌다며 외울 때까지 읽어 내렸다. 낮에는 장덕배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밤에는 푹신한 침대에서 잠드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형님께서 온종일 곁에 붙어 있으니, 저는 힘든 게 없다며 웃었다.
“생각보다 견딜 만한데요? 운동 열심히 해서 그런가. 이 정도쯤은 껌이죠.”
두 다리가 퉁퉁 부어, 보기 좋던 발목의 윤곽이 흐려진 채 뱉는 말이었다. 일일이 대꾸하며 언쟁하는 대신, 천마는 기설의 두 발을 군말 없이 주물렀다.
“그래, 다 네 멋대로 해.”
그러고는 근래 기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 주었다.
“이지 만드는 동안은 네가 조물주니까. 내가 모셔야지, 뭐 어쩌겠어.”
농담처럼 투정하며 천마는 가짜 미소를 지었다. 화나고 분하고, 표출할 데 없는 감정이 응어리진 그의 손바닥을, 기설은 엄지발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그런 기설의 이마엔 늘 진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보는 이를 걱정시킬 만큼 아팠고, 속을 태울 만큼 태연했고, 미워 죽을 만큼 예뻤다.
정해진 순서대로 차례차례, 검사와 치료를 거쳐 수술일이 다가왔다. 상황은 짐작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긴긴 검사와 수많은 확률 계산이 이리저리 오간 끝에, 의료진은 제왕 절개 수술과 함께 기설이 지닌 기형 자궁도 적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기설의 몸이 조물주로서의 기능을 다한 것이었다.
그래도 기설은 괜찮다고만 했다.
“저 베타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뱉은 말이 그랬다. 애당초 저는 베타이고 사내인데, 아기집이 없어진들 그게 무어 대수냐는 말이었다.
그는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게 씩씩했다. 별다른 투정 없이 금식을 마쳤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으며, 바퀴 달린 침대에 거뜬히 누웠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고 물속에 갇힌 것처럼 갑갑한 이는 오직 천마뿐인 듯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기설은 희망적이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오히려 천마를 달랬다.
“형. 나 튼튼한 거 알잖아요. 이지 잘 꺼내고, 배 잘 닫으면 되죠. 뭐가 걱정입니까.”
마지막까지 농담하는 기설을, 천마는 잘 다녀오라는 말로 배웅했다. 웃는 얼굴로 손을 잡아 주고 인사를 남기면서도, 그는 기설을 사지로 내모는 듯한 참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든 게 지나치게 순탄했다. 그래서 오히려 끔찍했다.
기설을 수술실로 들여보낸 뒤 천마는 복도에 우두커니 남았다. 그의 곁을 함께 지키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명경을 비롯한 부하 여럿이 병원을 찾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개중 누구도 병실은 물론이며 수술실 앞까지 접근하지 못했다.
한천마는 그만큼 날 서고 매정한 남자였다. 수년간 제 뒤를 따르며 인생도, 인상도, 귀 한 짝까지 내어 준 명경조차, 가장 약해지고 예민해진 순간 한천마와 함께할 순 없었다.
그게 천마가 사는 세계였다. 기설이라는 베타를 만나 그를 불쑥 제 철옹성에 들이기 전까지, 천마는 그러한 삶이 좋은 줄만 알았다. 외로움도 몰랐고 괴로움도 몰랐다. 행복하진 않았지만 불행한 줄도 몰랐다.
상념에 사로잡히기 직전, 간호사의 발소리가 천마의 정신을 깨웠다. 수술실로 통하는 복도를 되돌아온 간호사는 기설의 보호자를 찾았다. 일이 좀 생겼으니 따라와 달란 말이었다.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천마는 바삐 그를 쫓았다. 그리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들었다.
“환자분께서 갑자기… 마취를 거부하셔서요.”
수술 준비실로 저를 데려가는 간호사를 따르면서도, 천마는 그가 환자의 이름을 착각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 활발하게 일주일을 버티고 웃는 얼굴로 수술실에 들어간 기설이, 수술을 거부하고 난동을 부리는 환자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질 않았다.
그러나 의심을 품고 들어선 대기실, 좁다란 침대 위에서 기설은 온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울고 있었다.
“죄송한데요, 저… 며칠 더 있다가 수술하면 안 될까요?”
가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그가 우물쭈물 말했다. 산소 마스크를 챙겨 든 간호사도 마취 준비를 마친 의사도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틀만, 아니… 하루만 더요. 내일 다시 날짜 잡으면 안 돼요?”
나약한 민낯을 덩그러니 드러낸 기설에게, 천마가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리고 링거 주사가 꽂힌 흰 팔뚝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형님께서 불려 온 것을 보고, 기설은 더욱 크게 울먹였다. 눈물이 꽉 찬 눈동자가 연신 일렁거렸다. 면목 없이 꾹 다물린 입술 밑에 호두 같은 뼈가 도드라졌다.
기설은 더는 씩씩한 척 연기하질 못했다. 그렇기에 천마도 거짓으로 웃지 않았다.
“설아.”
그가 깊이 고개 숙이자, 기설이 중얼중얼 빠른 말을 속삭였다.
“형, 나 무서워요….”
그런 말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의사가 제 배를 가르는 것도 무섭고, 그러다 작은 이지를 찌를까 봐 무섭고, 이러다 일어나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무섭다며 기설은 울었다.
그는 늘 최선을 다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가장 후회 없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확신과 불안은 별개였다. 오늘, 수술대에 누워 기설은 불안했다. 그의 선택 조건에는 자신의 안위가 없어서였다. 결국 기설도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순해 빠진 기설에게도 최소한의 이기심은 있었다. 삶의 가장 두려운 순간에, 그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저를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선별 끝에 지목된 의사조차 그 역할을 해내진 못했다. 결국 기설을 유목으로 자라게 하고 그의 몸에 씨앗을 박아 넣은 한천마만이, 그에게 있어 뿌리를 댈 땅이고 보호자였다.
천마의 손길이 닿자 강한 척, 저보다도 아기를 위하는 척, 단단한 척 연기하던 기설이 단숨에 무너졌다. 그는 임신한 채 스물세 살이 된 애송이였고, 이제야 행복이라는 걸 익혀 가는 어린애였으며, 한천마의 겁 많은 아가였다.
분주한 간호사가 내는 한숨 소리, 마취과 의사의 표정 변화, 낯선 기기에서 울리는 전자음 하나에도 기설은 움찔움찔 이마를 찡그렸다. 조그마한 자극들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기설을 쑤시고 건드렸다. 피부 밖의 것들을 살피느라 바쁜 기설을 대신해, 천마는 오직 기설에게만 집중했다. 좁은 침대 옆,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설아, 나 봐.”
그리고 말했다.
“여기 보고, 숨 깊이 쉬자.”
들숨, 날숨을 서서히 마시고 내쉰 끝에 기설은 가까스로 진정한 듯 보였다. 가까이서 시선을 맞댄 덕에 눈동자의 떨림이 멎었다. 단단한 미소를 보여 주었더니 수없이 깜빡이던 속눈썹도 자리를 되찾았다.
“…….”
찡그렸던 눈살이 서서히 펴졌다.
무표정해진 기설의 얼굴 위로 간호사가 마스크를 가져다 댔다. 의사는 정맥 주사 라인 앞에서 혈압계와 모니터를 살폈다. 그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함께 모니터를 살피던 오 선생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기설 씨, 진정하셔야 수술 들어갈 수 있어요.”
천마가 듣기에 그만큼 어색한 말도 없었다. 그가 볼 때 기설은 충분히 안정된 상태였다. 두 눈은 반쯤 감겼고 태도도 얌전해서, 잠들 준비를 완전히 마친 듯 보였다.
침대 위로 손을 움직여, 천마는 링거 줄을 피해 기설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러고는 친숙한 살결의 낯설도록 차가운 감촉에 놀랐다. 기설이 이상했다.
고개를 돌려 살피자 쭉 뻗은 다리 끝, 발가락이 보였다. 평소 잠든 때에도 바짝 세워져 있던 건강한 발이, 의식적으로 힘주어 쭉 뻗은 듯 평평하게 뉘어져 있었다. 다시 보니 잠든 척 멍하니 풀린 눈도 정상이 아니었다. 눈시울이 금방이라도 문드러질 것처럼 붉었다.
기설은 소리 없이 반항하고 있었다. 완전히 뻗은 척을 하면서 억지로 숨을 참았다. 애써 호흡을 죽이고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 기절한 척 버티는 것이었다.
“설아.”
생애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기설은 바보였다. 제 호흡기를 덮은 마스크는 산소만을 뿜어낼 뿐, 마취제는 링거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줄도 모르고서 그는 홀로 애썼다. 기절하지 않으려, 잠들지 않으려 아둔하게 버텼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취제가 든 주사를 정맥 링거 라인에 가져다 댄 것이었다. 우선 마취를 시키고, 수술실로 옮기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그를 향해 천마가 손을 뻗었다. 조금 더 기다려 달란 수신호였다. 아둔하고 무지하게 겁에 질린 기설을, 그대로 기절하게 둘 순 없었다.
그는 황급히 기설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아가.”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사포로 말했다.
“잠들어도 돼, 설아. 그래도 괜찮아. 형이 깨워 줄게.”
기설의 무의식 깊은 곳에 닿도록, 긴밀하고 작은 귓속말이었다.
“잠깐 자고, 얼른 일어나는 거야. 나는 아직은 바다 되기 싫어. 너도 고래가 될 준비는 안 됐잖아. 안 그래?”
그러자 기설이 설핏 웃었다. 억지로 틀어막았던 숨통이 서서히 열리는 것이, 벌어진 잇새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팍을 통해 보였다. 기설이 깊이 호흡하자, 의사가 정맥 주사에 마취제를 더했다.
가물가물하던 기설의 눈꺼풀이 한차례 잘게 떨리는가 싶더니, 힘을 잃고 굳게 감겼다.
“환자분 이제 수술실로 들어갑니다.”
간호사가 안내했다. 천천히 기설의 손을 놓으며, 천마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피부 밖의 그 무엇도 똑바로 느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술 중’ 불빛이 들어온 복도에 홀로 서 있는 식이었다. 머릿속이 난장판이었다. 기억으로 채운 수많은 책장이 죄 박살 나 버린 듯했다.
마음 편히 기절조차 못 하고 버티는 기설을 보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기설은 몇 번인가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추곤 했었다. 무엇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양, 현실에서 붕 떠나 버릴 때가 있었다. 뾰족한 주사기를 겨냥하고 정체를 밝히라며 협박하던 날에 침대 위에서 그랬었고, 재난처럼 들이닥친 어느 오메가를 쥐어패고 끌고 나간 날에도 리무진 뒷좌석에서 그랬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도 그랬다. 천마를 대신해 칼에 찔린 날, 그날도 기설은 기절하질 못하고 멍하니 버텼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얼굴에 눈물 줄을 그으면서도 미련하고 무식하게 깨어 있었다.
오늘, 수술을 앞두고서 기설의 상태를 본 뒤에야 천마는 그 태도에 붙일 이름을 알았다. 그건 어린아이들이 으레 하는, ‘죽은 척’ 놀이였다.
‘아뇨, 잠깐 기절한 건데요. 뭐….’
왜 그랬느냐고 캐물어도 그뿐이었다.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기설은 그렇게 대꾸했었다. 그때는 그도 진실, 그렇다고 믿는 듯했었다.
언제부터 그래 온 걸까? 천마는 늦은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두려워졌다. 혹여 기설이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잡혀 길바닥을 끌려다닐 때부터 죽은 척을 해 왔을까 봐, 그는 두려웠다. 뒷골목에서 기습을 당했던 날, 무기력하게 겁탈당하던 순간까지 죽은 척을 하며 그저 버텼을까 봐, 그게 무서웠다.
내내 그렇게 믿어 온 것일까 봐. 저는 기절을 했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덕분에 괜찮다고…. 그 가정이 천마를 몸서리치게 했다.
이제 한천마는 기설을 떠올릴 때 웃지 않는다. 마냥 설레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다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과 분노를 느꼈다. 그에게는 사랑조차 분노였다. 어제의 기설을 생각하면 흉곽에 돌이 차는 것 같고, 오늘의 그를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열이 올랐다.
분노의 화살표는 죄 없는 아이에게 향했다. 기설의 인내를 빨아먹고 고통을 비료 삼아 맺어진 열매를, 천마는 도무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마스크 위로 다 비치도록 기쁜 표정을 못 감추며 달려온 간호사가 새 생명의 무사 탄생을 알려도, 천마는 무표정했다. 작은 아이를 미숙아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무신경했다.
그를 채운 감각과 생각은 죄 기설에게 치우쳐 있었다.
“설이는?”
무서울 만치 차가운 얼굴로 묻는 소리였다. 간호사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직 수술 중입니다.”
“상태가 어떻지?”
그에 간호사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의사가 일러 준 사실 그대로를 전달했다.
“수술 내내 출혈이 심했지만, 지금은 오 교수님께서 잡아내셨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실 거고, 수술도 사십 분 내로 마무리될 겁니다.”
확신 어린 답을 받은 뒤에야 천마는 복도 자리의 소파를 발견했다. 허벅다리는 물론이고 성기가 아리도록 쥐 오른 몸을 그는 그제야 앉혔다. 멍하니 내려다본 손목에는 은색 줄의 시계가 꽉 죄인 채였다. 시침이 어느새 한 칸을 훌쩍 건너 있었다.
풀썩 주저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알파를 향해, 간호사가 물었다.
“저, 아기 보러 다녀오지 않으시려고요? …몸무게가 740g밖에 안 돼요. 공주님이시고요.”
공주.
그 말에 천마가 픽 실소했다. 딸이 공주이려면 아버지가 임금이라야 하는데, 저는 조폭 출신이고 기설은 성씨조차 없었다. 세상에 그런 출신의 공주가 어디 있겠는가.
힐긋 고개 돌리자 복도 멀찍이, 자리를 지키고 선 명경이 보였다. 그가 언제부터 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천마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손짓하여 제 옆으로 불러다 놓곤, 다른 누구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을 부탁할 따름이었다.
“명경아.”
“예.”
“네가 보고 와라….”
이리저리 눈치 살피던 간호사가 먼저 움직였다. 명경은 가타부타 질문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아, 천마는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분침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그의 눈도 째깍 소리를 내며 깜빡거렸다.
***
기설의 팔뚝에 드디어 진통제 주사가 꽂혔다. 그것만으로도 천마는 한시름 마음을 쓸어내렸다. 한 주간 빌어먹을 진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두 시간짜리 수술을 받고 나온 지금이 차라리 덜 아파 보일 정도였다. 푹 꺼진 배를 보고 있자니 홀가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화사하고 따스하게 꾸며 낸 병실 한가운데 선 채, 천마는 잠든 기설을 지켜봤다. 잔뜩 부은 탓에 통통하던 팔다리가 본래의 단단한 골격으로 돌아왔다. 홑몸이 되고 나니 그제야 기설이라는 남자가 드러났다. 수척하고, 창백하고, 잔뜩 지친 그는 패배하고 돌아온 선수처럼 약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 선생이 찾아왔다. 덤덤한 얼굴로 그녀는 수술 경과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러나 천마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행히 수술은 탈 없이 마쳤다, 기설 씨의 상태도 무척 좋은 편이다, 워낙 건강하고 젊으니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에는 아무런 신빙성이 없었다. 깨어난 기설을 직접 보고, 그의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될 성싶었다.
곤히 잠든 기설의 꿈나라를 지켜 주고 싶어도 그럴 순 없었다. 마취제가 폐로 흘러가지 않게끔, 억지로 그를 흔들어 깨울 시간이었다. 그에 앞서, 오 선생은 아기의 거처에 대해 말했다.
“미숙사 치료실에서 신생아실로 옮기게 되면, 그때는 병실로 올려다 드릴까요?”
그에 천마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대꾸했다.
“아니.”
조그마한 자식이 세상에 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넣어졌건만, 의무적으로라도 얼굴 한번 확인하질 않은 한천마였다.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커녕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다정한 알파는 되었을지 몰라도 그는 매정한 아버지였다.
빠듯하게 칠삭둥이 명함을 쥐고 태어난 아기였다. 양수 속을 헤엄쳐야 할 시기인데 세상에 꺼내 놓았으니, 살갗이 시뻘겋고 반투명할 게 뻔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만큼 필시 못나 보일 터였다.
그 아이에게 한씨 성을 주고 이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천마는 제 자식을 마주 보기 싫었다. 아버지의 배를 찢고 세상에 난 핏덩어리, 형질 검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치 분명한 극우성 알파, 세상을 편하게 살라고 ‘이지’라는 이름까지 붙인 그 애가 꼭 저를 닮았을 것 같았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일은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피하고 싶었다.
당장, 그에게는 속이 곪아 앓아누운 기설이 먼저였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져 아픈 배를 부여잡고 기침하고, 몽롱한 눈으로 더 자고 싶다며 끙끙거리는가 싶더니, 기설은 잠시간 멀거니 제 배를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쓰러졌다.
“더… 잘래요.”
끙끙거리며 기설이 말했다.
“…5분 있다가 깨워 주세요….”
퉁퉁해진 눈으로 잠투정을 부리는 놈의 뒤통수가 까치집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천마가 웃었다.
이번에, 기설은 약물이 아닌 피로감에 의해 잠들었다. 복잡한 얼굴의 명경이 말없이 들렀다가 사라지고, 간호사가 아주 여러 번 찾아와 기설의 상태를 살폈다. 내내 천마는 기설의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어쩌다 이런 게 굴러들어 왔을까.’
한층 날렵해진 코와 부르튼 입술, 검고 짙은 속눈썹과 파리한 눈매를 지켜보며 천마는 시트 위를 툭, 툭 두들겼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평생에 기설은 둘도 없을 남자란 것이었다. 그처럼, 미안하고 고맙고, 야속한 한편 지독하게 예쁜 놈이 또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기설과 끔찍하게 엮이고 지독하게 묶이며 지나온 길은, 제 두 발로 걸어오긴 하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리한 건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나절은 더 지나서야 기설이 의식을 차렸다.
“…형, 나….”
잇새로 쇳소리를 내는 기설에게, 천마는 물잔에 꽂은 빨대를 물렸다. 꼴깍꼴깍 뜨끈한 물을 들이켜면서 기설은 이마를 찌푸렸다. 입 안이 온통 텁텁하고, 목구멍은 까슬까슬했다. 밍밍한 물 몇 모금으로는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가 낮게 구시렁거렸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
천마가 크게 헛웃음을 쳤다. 일어나거든 당연히 아기부터 찾을 줄 알았지, 차가운 아메리카노 운운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누운 자리에서 기설은 헛발질을 했다. 침대 난간을 향해 한 번 발을 굴러 놓곤, 두 눈을 끔벅끔벅 느리게 움직였다.
“나 마비 왔나 봐요. 발이 안 움직여요.”
그러고는 헛소리였다.
천마는 군말 없이 기설의 발을 만져 주었다. 발가락 사이 사이를 눌러 가며 주무르고, 단단한 발바닥의 부드럽게 팬 부분을 엄지로 지압했다. 그제야 감각이 느껴지는지, 기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어느덧 발 주무르는 시종이 다 된 형님을 올려다봤다.
겨우 제 빛깔을 되찾은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아, 붕어 흉내를 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가까이 허리를 숙인 뒤에야, 천마는 기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아기는?”
듣기 미안할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에, 묘한 기대감이 섞였다.
“우리 이지는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천마는 생각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기설을 안아 들고, 휠체어에 앉혀 주면서도 그는 못내 불안했다. 기설과 함께하는데도 제 자식을 보는 일이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도리어, 못생긴 핏덩어리를 보거든 기설도 실망감을 느낄 것이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최대한 느릿느릿, 조용한 복도를 지나 휠체어를 끌었다. 너무 느리다, 일어나서 제가 걷는 게 낫겠다, 형님의 마음도 모르고서 재촉하는 기설의 뺨엔 아주 간만에 혈색이 돌았다.
신생아 집중 치료실 앞에 도착해, 그는 웃는 낯으로 손끝이 빨개지도록 손을 씻고, 소독하고, 닦았다. 잔잔한 조명등 하나만이 켜진 치료실은 무척 고요했다. 열의 끝, 가장 어두운 자리에 커다란 인큐베이터가 놓였다. 그 속에 든 작은 생명이 불긋불긋했다.
그리고 천마의 생각이 옳았다. 이지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다. 피부가 얇아 핏줄이 잘 비쳤고, 덜 자란 몸에 비해 머리와 복부는 커다랬고, 주먹만 한 몸뚱이에 인공호흡기며 전선인지 튜브인지 모를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꼴이 꼭 외계 실험체 같았다. 객관적으로 보아 조금도 예쁘지 않은 외형이었다.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고민이 될 정도로 연약한 살덩어리였다.
인큐베이터 속 작은 존재를 기설은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잇새로 하나, 둘… 무얼 셈하는 소리가 나왔다.
“손가락… 열 개 다 만들었구나.”
이어 기설은 인큐베이터 옆구리에 난 구멍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용기 내어 기껏 한다는 일이, 아기의 고사리 잎처럼 작은 손끝에 제 딱딱한 손끝을 맞대는 것이었다.
“예쁘다.”
그저 침묵하고 선 천마를 등지고 앉아, 기설이 속삭였다.
“형…. 우리 이지… 진짜 예뻐요. 나… 이렇게 예쁜 아기 처음 봐요.”
천마가 기설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큐베이터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그제야 제 자식을 똑바로 바라봤다.
기설의 말이 맞았다. 이지에게는 손가락 열 개가 전부 다 있었다. 꼭 감은 눈이 두 개, 콧구멍도 잘 뚫렸고, 입술도 말짱했다. 작은 몸뚱이에 필요한 게 다 붙어 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안으로 연한 잇몸까지 비쳤다.
결국 기설이 옳았다. 이지는 아주 예뻤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동그란 가슴도, 오르락내리락 얄팍하게 움직이는 배도, 꿈을 꾸는지 허공에 대고 꿈틀꿈틀 움직대는 아주 작은 발도 몹시 예뻤다. 나비 날개처럼 얇은 눈꺼풀 밑에는 속눈썹이 촘촘하게 돋았고, 손끝에는 놀랍도록 보드라운 손톱이 동그랗게 박혀 있었다.
“형 닮았어요.”
기설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러네.”
천마의 대답은 느릿느릿했다.
언제고 기설은 순수하게 행동했고,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내놓았다. 지상 위의 모든 이와 모든 것을 불신하는 천마에게조차, 기설이 내놓은 결과만큼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기설은 한천마에게 진실을 안겨 주었다. 고난 많은 인생에 난생처음 얻은, 그와 저의 피를 섞은 아기는 기어코 진실이었다.
“날 닮았는데… 그래도 예쁘네.”
무심결에 흘린 혼잣말에 기설이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울렁거리는 감정을 못 감추며 그는 형님을 타박했다.
“형을 닮았으니까 예쁜 거죠.”
천마를 채운 증오인지 걱정인지 모를 그 무어, 작은 핏덩이를 향하기엔 지나치게 얼룩진 감정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기설의 배를 찢고 나온, 기설의 양분을 흡수하며 자란 그 존재를 천마는 미워했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이유로, 기설이 만들어 내고 기설이 낳은 아이이기에 이지는 몹시 예뻤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신기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래도 한천마는 울지 않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죄 기설이 했다. 천마는 그저 민둥민둥 산처럼 자리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끝내 천마는 천마였다. 짐짓 무감각해 보이는 껍데기를 덮어쓰고서 눈을 끔벅거리는 게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740g. 타인의 성을 제 것으로 쟁취해 낸 알파와, 뿌리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은 베타를 한데 뭉친 무게였다.
기어코, 그들은 제법 봐 줄 만한 가족이 됐다.
***
검은 정장 재킷에 침 얼룩이 졌다. 넓은 가슴팍 한가운데 매달린, 작고 동그란 존재가 줄줄 흘린 침이었다. 아기를 멘 사내가 삐뚤어진 베이비 캐리어 어깨끈을 능숙하게 고쳤다. 바지 주머니에서 멸균 케이스를 꺼내 열고, 공갈 젖꼭지를 찾아 여린 입술에 물려 주기까지 했다.
아름답고 커다란 남자가 아름답고 조그마한 아기를 받쳐 든 모습을, 수십여 명의 임원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이 뒤엉킨 표정이었다.
느닷없이 긴긴 휴가를 선언하며 잠적했던 대표 이사, 한천마였다. 불필요한 만남은 죄 거절로 일관하고, 꼭 필요한 회의조차 전화로 대신했다. 그를 두고 전신 성형을 받았다느니 사고를 당해 수술 중이라느니 불치병에 걸렸다느니 오만 가지 소문이 떠돌았더랬다. 하다못해 마약에 중독되어 피골이 상접했다더라 하는 목격담까지 돌았다.
그러나 오늘, 반년 만에 복귀하여 회의장의 상석에 앉은 한천마는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아름다운 얼굴과 건강한 신체를 자랑했다. 다만 상체 중앙에 남색 베이비 캐리어를 메고, 어린 아기를 당당하게 내놓았을 뿐이었다.
수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아기는 태연했다. 회의장의 삭막한 분위기며 마이크를 통해 오가는 브리핑을 들으면서도 울음을 터뜨리긴커녕 한차례 칭얼거림조차 없었다.
의심 많은 몇몇 치들은 한천마가 남의 자식을 납치했거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해 로봇 인형을 만들어 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들 신빙성 없는 주장이었다. 앞에서, 옆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보고 또 보아도 그 아이는 한천마의 자식이 맞았다. 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친자식이 아니고서야, 그토록 아름다운 인간이 세상에 둘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애애….
공갈 젖꼭지를 물 듯 말 듯, 입술을 방긋거리며 아기가 소리 냈다. 대표 이사 자리의 마이크를 통해 그 음성이 회의장 전체에 번졌다. 덕분에, 대표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에… 로 시작된 브리핑이 뚝 끊겼다. 너른 공간 내부에 잠시간 침묵이 진동했다.
천마가 재차 손을 휘 흔들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임원이 재차 발표를 이어 나갔다. 대본에 충실하면서도, 그는 당장 자신이 트로트 가사를 읊는대도 문제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리를 채운 수많은 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 그의 말에 집중하는 이가 없었다. 하나같이 천사 같은 아이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천마의 너른 품에 안긴 탓에 더더욱 작아 보이는 그 아이는 머리칼도 속눈썹도 숱이 무성한 데다 색이 짙었다. 눈동자는 아주 커서 고양이 같고, 쌍꺼풀이 희미한 것이 강아지 같았다. 아직 어려 콧잔등이 있는 둥 없는 둥 뭉개져야 할 때인데, 어찌 된 게 코끝마저 봉긋 솟아 예뻤다. 빠끔빠끔 움직이는 입술은 꽃잎처럼 분홍색이었다.
한천마와 다른 점을 구태여 꼽자면, 피부와 눈의 색이 달랐다. 천마를 뒤덮은 피부는 무척 짙고 매끄러운 데에 반해, 어린 아기의 뺨은 첫눈을 뭉쳐 빚은 양 새하얗고 보송보송했다. 천마의 눈알은 검은자위가 시커멓게 짙어서는 홍채와 동공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인데, 아기의 눈동자는 탁한 것이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아 맑디맑은 갈색이었다. 그 점만큼은 낳아 준 아빠를 닮은 것이었다.
긴긴 브리핑이 가까스로 끝을 향해 다가갈 무렵,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늙어 뱀 같은 임원들도 젊어 범 같은 작자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품 안에서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고자, 천마는 가볍게 들썩이며 베이비 캐리어의 밑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고루한 회의의 종말을 선언했다.
어영부영 일정을 마치자마자 가장 먼저 자리를 턴 이는 당연히 한천마였다. 그러면서 그는 소리 내어 혀를 ‘쯧’ 찼다. 긴긴 회의 내내 브리핑이며 오간 의견이며, 하나 같이 죄 형편없었노라 대놓고 타박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남겨진 이들은 몹시 억울했다. 범 얼굴에 뱀 눈깔을 단 한천마의 존재만으로도 긴장이 되고 살이 다 떨리는데, 그의 품에 천사 같은 아기까지 안겨 있으니 누구라도 제 의견을 똑바로 내놓을 수 없는 법이었다.
늙은 임원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한 대표는 대체 묫자리를 어디로 산 거야?”
그 땅에 묻힌 조상신이건 터주이건 간에 그 무어, 신적인 존재가 달라붙어 보은하는 게 아니고서야, 자식까지 완벽하게 볼 건 무어냐며 한탄하는 소리가 길었다.
한천마로 말할 것 같으면 조상신을 두긴커녕 제 아버지조차 불에 태워, 양동이만도 못한 스뎅 그릇에 담아 버린 무뢰배였다. 그 사실을 아는 부회장만이 떨떠름하니 미소 지었다.
***
똑똑.
희고 큰 주먹이 차창을 두들겼다.
“선생님? 차 문 열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러자 진회색 세단에 곧장 시동이 걸렸다. 명령에 불복하며 금방이라도 달아날 기세였다.
그에, 운전석 차창 앞에 선 남자가 긴 한숨 내쉬었다. 그는 제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왼 손바닥으로 펼친 손수건은 차창에 대는 용도였다. 오른손에 쥔 검은 도끼는 그 위, 차창 모서리를 치는 데에 쓰였다.
세 번의 타격에 차창 끄트머리가 완전히 박살 나 구겨졌다. 안에서부터 ‘악’ 비명이 연이어 터져도, 도구를 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망가진 차창을 안으로 밀어 뜯어 버렸다.
그제야 덕지덕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핸들을 움켜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즉시 차창 안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차량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운전자는 멱살을 잡혀 주차장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녹색 페인트 발린 바닥은 차갑고 냉정했다. 곧 닥쳐올 심문을 예상하며 운전자는 몸을 떨었다. 그러나 어디서 온 누구냐는 질문 따위는 없었다. 바닥에 나자빠진 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검은 사내는 세단의 시동을 끄고 조수석을 뒤적였다. 그리고 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졌다. 사진첩에 들어서자마자 7시간 전부터 쉼 없이 찍어 낸 사진들이 와글와글했다. 버튼을 눌러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피사체는 줄줄이 동일했다. 신산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아름다운 남자, 한천마였다.
카메라를 빼앗긴 파파라치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상대가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짓을 벌였다.
“으…, 으아아!”
불필요한 기합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든 것이었다.
데면데면하게 선 채 카메라 속 사진을 구경할 뿐, 기설은 아무 대처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뜸 닥쳐온 발길질에 파파라치가 재차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복부 전체에 불이 붙은 듯한 열감을 느끼며, 수염투성이 남자가 바닥을 재차 굴렀다. 배를 감싸 안고서 그는 사람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차창 유리를 부순 사내에 이어 곰처럼 커다랗고 흉터 많은 깡패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경을 향해 눈짓으로 인사한 뒤, 기설은 파파라치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두 손으로 들고, 부르짖는 이의 얼굴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가 크게 울렸다.
놀란 파파라치의 비명이 뚝 그쳤다.
“…왜, 왜….”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한 파파라치가 무어라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소란을 알아챈 경비원이 주차장을 찾아들었다. 그들은 바닥에 나자빠진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고, 두 남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실장님, 팀장님. 오셨습니까.”
실장, 강명경은 덤덤하니 인사를 받는 데 반해, 기설은 팀장이라는 직급에 아직 두드러기가 돋는 듯했다. 그러니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하고 무른 소리를 흘려 대는 것이었다. 그는 한천마의 개인 경호팀장이기는 하였으나, 개인 경호원이 단 한 명뿐이기에 사실상 직급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유리 가루 묻은 손을 털어 내며, 기설은 주위를 휘휘 살폈다. 명경이 등장하였으니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낼 이가 누구인지, 알고서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마침 승강기의 은색 문이 좌우로 갈렸다. 문틈 새로, 뻔뻔하단 인상이 들 만큼 잘빠진 한천마의 전신이 드러났다. 기설이 그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그 역시 기설을 알아봤다. 두 남자는 이가 보이게 웃으며 후다닥 서로에게 다가섰다.
“형!”
기설의 밝은 인사는 천마에게, 눈길은 그의 커다란 흉부에 매달린 이지에게 향했다. 싱글벙글하며 두 아버지가 내려다보매, 작은 아기의 얼굴에도 미소가 스몄다.
이지의 조그마한 이마에 입술을 맞대며, 기설이 물었다.
“우리 이지 얌전히 잘 있었어요? 회의하다가 운 거 아니에요? 이지 못생긴 사람 보면 울잖아요…. 그러게 내가 데리고 다닌다니까요.”
“애 데리고 무슨 놈의 쇼핑을 한다고…. 뭐 좀 샀어? 병원은. 의사가 뭐래.”
“괜찮다지 뭘 뭐래요. 검진 그만 와도 된댔어요. 아, 나 진짜 예쁜 옷 많이 샀어요.”
조잘조잘 수다를 늘어놓던 끝에, 기설은 쪼르르 진남색 벤틀리로 향했다. 그러고는 제 차 트렁크에 쑤셔 넣은 짐 가방을 가득 껴안았다. 쇼핑한 물건을 자랑하느라 뒤뚱 걸음으로 다가오는 이를 향해, 천마가 혀를 내둘렀다.
“설아. 이지 꼬까옷 좀 그만 사. 어차피 사이즈도 금방 안 맞을걸.”
“이거 다 형 옷인데요?”
“그래? 잘했네, 정말 잘 샀어.”
기설은 눈이 가늘어지도록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천마의 팔뚝 아래, 옆구리로 민첩하게 안겨 들었다. 두 남자가 함께 리무진에 올랐다.
늘씬한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파파라치는 넋 놓은 채 지켜봤다. 뒤늦게, 그는 허둥지둥 품 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작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무어라도 찍어 보려는 수작이었다.
큼큼.
문득 들으라는 듯, 헛기침 소리가 그의 정수리로 내려앉았다.
“…….”
휴대폰 액정 가득, 짐짓 흉악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찼다. 그의 입술 위에 그인 엑스 자 표시가 파파라치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
방싯방싯 웃는 이지와 눈 맞추기도 잠시, 기설은 리무진 한 자리에서 울리는 ‘앵’ 소리에 집중했다. 사각형으로 수상쩍게 덮인 담요를 걷어 내자 고양이 이동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속에 든 것은 당연히 고양이였다.
“경이는 왜 데리고 나왔어요?”
당황하여 기설이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쉬, 쉬… 하며 천마는 제 품 안의 이지를 달랬다. 정작 이지는 칭얼거리는 법 없건만, 나서서 아빠 노릇이었다.
천마가 이지를 안아 들고 어를 때마다 기설은 고양이, 경을 똑같이 안아 주곤 했다. 늙은 짐승을 아기처럼 품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하다면 이상했지만, 이지가 태어난 이래 경이 난생처음 질투를 시작하니 별수 없었다.
액, 액.
기설은 불만스럽게 우는 경을 케이지에서 꺼내 주었다. 담요로 돌돌 말아 품에 안고, 턱 아래를 부드럽게 매만지자 불안한 듯 커졌던 경도 동공의 크기를 줄였다. 털이 반질반질한 그의 늙은 고양이는 어제보다 오늘 더 어린아이였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리무진의 뒷좌석에 기설은 등을 깊이 기댔다. 그러고는 옆으로 스르르 넘어가, 천마의 어깨에 제 머리를 붙었다. 요즈음은 이처럼, 긴긴 대화 없이 편안한 침묵 안에 기대어 있는 때가 많았다.
핸들을 쥔 덕배는 곧바로 집으로 향할 것이란 기설의 예상을 부쉈다. 차창 밖으로 얼핏 주택가가 내다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듯 바깥을 살피면서도 기설은 구태여 질문하진 않았다. 형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식당이나 찾아다가 데려가 주겠거니 생각해서였다.
“형, 나는 고기요. 고기 먹고 싶어요.”
천마의 어깨에 턱을 괴고, 기설이 말했다. 엄지 끝으로 이지의 이마를 문지르며 천마가 웃었다.
“그래, 집에 가서 먹자.”
“…어? 그럼 지금은 어디 가는데요?”
잠깐의 드라이브 끝에 리무진이 정차했다.
근래 들어 기설은 게을러졌다. 어딜 가건 늦장을 부리게 마련이었다. 반면 천마는 전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바빴다. 미적미적 차창 밖을 살피는 기설을 두고, 그는 이지를 안아 든 채 하차했다. 기설은 경을 케이지에 집어넣고, 한참을 더 미적거리며 망설인 끝에 그를 따라 내려섰다.
곧바로 시선이 닿은 곳은 커다란 대문이었다. 기설은 무의식적으로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형님께서 저를 데리고, 무어 대단한 지인이라도 만나러 온 것일까 싶어 재킷 칼라를 정리한 것이었다.
“누구 만나러 온 거예요? 우리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불퉁한 기색을 못 감추며 기설이 물었다. 그러자 대답보다도 먼저 천마의 손이 다가왔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허둥지둥 움직이는 기설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가락 사이 마디마다 제 손가락을 비집어 넣어 깍지 껴 쥐기도 했다.
이럴 때면 천마는 제 손가락이 남들보다 하나 부족하단 사실을 잊고는 했다. 기설의 다섯 손가락을 꽉 메꾸기에는 그의 네 손가락으로도 충분했다.
“우리 집에 온 거 맞아.”
단순하고 명료한 말이었다. 그에, 기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시야가 환해지고, 눈길 안에 주택의 풍경이 반듯하게 들어왔다. 커다란 대문을 지닌,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펼쳐진 집은 낯설면서 친숙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자주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고아원의 방구석, 구겨진 장판 위에 앉아 내내 그리고, 노래하던 상상 속 다정한 집이 있었다. 정원에는 잔디와 나무들이 푸르르고, 높다란 2층 방의 창문 너머로는 베이지색 커튼이 얼핏 보이고, 현관문의 빛깔조차 따듯한 풍족한 집이었다.
긴긴 면접이나 시험, 임시 보호 기간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듯이 어느 날, 덜컥. 기설은 제가 서술했던 동화 속 집에 도착했다. 동시에, 그곳은 한천마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던, 박탈당한 유년기이기도 했다.
“집에 가자, 설아.”
솜털 한 올마저 자신들을 빼닮은 아기를 품에 안고서, 늙은 고양이가 스무 살까지 지낼 집을 향해 두 남자가 걸어갔다. 일생 가장 유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럭키 펀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