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럭키 펀치 5권-ding-ding-ding. (12/17)

사업판에서 장례식장은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산 사람 간에 얼굴도장을 찍고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장소에 속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례식은 결혼식보다 기쁜 행사였다. 접객실에 죽치고 앉아 담소를 나누다 보면 못 가진 명함에도 연줄이 닿고, 안 될 거래도 성사시키기 마련이었다. 빈소에서 즐겁지 못한 이는 오직 상을 당한 일가족뿐이었다.

한무상의 장례식은 경우가 남달랐다. 가로 28cm, 세로 32cm의 영정 사진 속 한무상이 젊은 시절 미소 짓던 그인 것처럼, 장례식장 곳곳에서 모순된 분위기가 풍겼다.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이는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은 어디인지도 모를 해외로 떠나 연락도 닿지 않았고, 며느리 역시 늦깎이 유학길에 올라 부고 소식을 듣고도 귀국하지 않았다. 상주가 되어야 할 친자는 한천마뿐인데, 어째선지 그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가발이 죄 흐트러진 부회장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늙고 지친 얼굴의 부회장을 두고 오가는 뒷담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들으라는 양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한 회장이 죽었으니, 저 노인네도 언제 내팽개쳐질지 모르지 않냐는 둥 수다를 떠는 남자들이 있었다.

망령되게 입 놀리는 이들 뒤로, 붉은 테 안경을 낀 중년 인사가 낮게 을렀다. 한 회장의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사망 원인은 ‘병사’였으나, 초두에 ‘외인사’로 기록된 것을 한차례 고쳤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데 담당의가 부회장의 외조카라 했다.

늦게나마 썩은 줄을 놓고 새 줄타기를 시작한 부회장에게로, 세 남자가 바삐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아,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검은돈으로 상, 하의를 지어 입은 인사들이 눈치 싸움을 하는, 긴긴 시간 내내 한천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회장의 말로는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애통하셔서 그렇다’지만 그 말을 믿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누구보다 한무상의 죽음을 고대한 이가 한천마 대표임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어서는 정치 싸움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 한천마’와 통성명 한번 나누어 보기 위하여 서너 시간씩 죽치고 앉아 접객실을 채우는 이들만 한 트럭이었다.

발인할 시간이 다다랐을 무렵, 바깥쪽 복도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던 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열 맞추는 소리였다. 파도타기하듯 순서대로 기립한 검은 사내들의 중앙에 한천마가 있었다.

오늘 행사의 주인공이 왔음을 알고, 빈소에서 절을 하던 이들과 접객실에서 투정하던 이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한천마는 허리 숙여 건네는 인사를 죄 무시하며 걸었다. 그에게선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검은 정장으로 전신을 포장한 채로도 특유의 기세를 조금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풍채며 아름답기로 소문난 얼굴, 풍성하고 검은 머리칼에 이르기까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굵은 팔뚝에 삼베 완장을 차기는 하였으나 그뿐, 그는 조금도 상을 당한 아들 같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입술로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오래도록 살며 별의별 꼴 다 보았다고 자부하는 늙은이마저 그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천마의 두 손에 자리한 장갑을 지적할 타이밍 역시 전부 놓쳤다. 시커멓고 윤기 흐르는 가죽으로 두 손을 꽁꽁 감춘 채, 그는 손님들과 악수했다.

직급과 연의 깊이, 지내 온 세월을 따져 가며 줄지어 선 늙은 임원 사이에서, 유별난 쪽은 언제나 젊은 치들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알아도 겁이 없거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를 들어 비서를 보낸 건방진 CEO들이 있었다. 그런 치들은 고용하는 비서마저 으레 젊고 싱싱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노팅 확률을 연구한다는 혁신 기업, AOM의 조문이 딱 그랬다. 어리다 못해 머리에 피조차 마르지 않은 비서만 달랑 둘 보내서는, 구글 검색 첫 페이지로 찾아낸 듯한 위로의 인사를 건네는 식이었다.

“우리 대표님께서 워낙 바쁘신지라…. 위로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한천마의 낯에 스민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외관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는 몹시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기분이 나쁠수록 크게 웃음 짓는 습관은 그의 성격을 더욱 더럽고 못되게 진화시켰다.

누가 됐건 먼저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무어로든 뭉개어 납작하게 만들어 온 한천마였다. 그 앞에서, 어느 집단 소속의 어떤 직급을 단 이이건 자칭은 ‘우리’가 아니라 ‘저희’여야 했다.

“안타깝게 됐군.”

천마가 말했다.

“천 대표가 직접 와서 내 사주 한번 봐 주길 기대했는데.”

한마디 말로 천마는 상대 회사의 명함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형질 연구를 통해 확률과 통계를 내는 회사 시스템을, 고작 점집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만이 뱉을 수 있는 농담이었다.

덤덤하니 건넨 농담에 주변인의 입꼬리가 일제히 씰룩거렸다. AOM은 한창 주가를 올리며 대기업 반열에 발을 뻗는 신생 기업이었다. 잘빠진 신생 기업은 언제나 꼰대들의 눈엣가시였다.

“…….”

이내, 두 비서 가운데 젊은 여자의 미간에 홈이 파였다. 천마는 그들을 대충 살폈다. 힐긋 보아도 그녀는 알파였고, 옆에 선 남자는 우성 오메가였다. 제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 알파가 자신의 충성심을 과하게 드러냈다.

“예. 우리 대표님께서 하필 육아 휴직 중이신지라… 아시다시피 임산부나 신생아에게 장례식장이 좋지는 못하니까요. 그 친지에게도 그렇고요.”

얼굴이 희게 질린 남성 오메가가 경악하며 그녀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어린 알파는 끓는 치기를 못 감추어, 끝까지 말을 마치고야 말았다.

“무속 신앙에 따른 사유마저 이해해 주신다니,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상주로부터 소금을 맞다 못해, 소금물이 되어 버리더라도 찍소리 못 할 사고였다. 그녀보다는 물정이 밝은 듯, 남자 비서가 허리를 깊이 굽혀 사과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한천마는 기둥처럼 곧게 선 채 두 남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선에도 힘이 있다면 두 사람의 얼굴에 큰 구멍이 뚫렸을 터였다.

“하하….”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천마의 입에서 빠져나온 실소였다. 실소는 이내 박장대소로 변했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한천마는 저를 향해 허리 숙인 오메가의 뒤통수를 붙잡고 더욱 아래로 짓눌렀다. 그러고는 그의 등에 굵은 팔뚝을 기대었다.

천마는 한참 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친지 중 임산부가 있어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다’니, 그로서는 웃을 수밖에 방도가 없었다. 바로 며칠 전, 기설을 속이고자 자신이 내뱉은 거짓 핑계가 꼭 그렇지 않았던가. 임산부에게 장례식장은 좋지 못한 곳이라고, 형이 다녀올 테니 빌딩 안에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그랬더랬다.

그러니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제가 던진 부메랑을 되받은 격이었다.

“그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린 오메가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천마가 말했다.

“천 대표에게 전해. 순산을 기원한다고.”

천마가 손을 떼어 내자마자, 남성 오메가가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그러고는 엉금엉금 뒤로 기었다. 천마가 내쉰 긴 한숨 때문이었다.

예민한 오메가를 비롯해 근방을 둘러싼 이들 모두가 서너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숨결과 함께 페로몬이 닿는 거리, 2미터를 반지름 삼아 원이 생겼다. 제 피부에 닿는 타인이 없으니 한천마의 숨통도 그제야 뚫리는 듯했다.

한무상의 관은 이동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한천마는 아버지가 든 관을 내팽개친 채 돌아섰다. 그대로 장례식장을 떠나 버리려던 불한당의 구둣발이 대뜸 멈췄다. 검정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때문이었다.

성큼성큼 긴 다리를 뻗으며 천마는 상주 휴게실로 걸어갔다. 커다랗고 검은 가방을 든 실장, 강명경만이 그 뒤를 따랐다.

휴게실의 노란 조명 빛에 얼굴을 비추며, 한천마는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

침묵하며 애태우는 그에게, 휴대폰 너머의 남자가 말했다.

- 형?

그 즉시, 천마는 소파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로서는 영겁과도 같이 느껴지는 긴긴 시간, 꼬박 사흘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지난 사흘 동안 천마는 신산시와, 그와 인접한 도시 곳곳을 수색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저 버티기만 하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공복과 수면 부족을 제치고 그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요인은 펄펄 날 듯이 나아진 몸 상태였다.

그는 무척 건강했다. 손가락이 절단되고 허벅다리에 자상을 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게 컨디션이 좋았다. 의사조차 그의 회복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정신 또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본연의 빛깔을 되찾았다. 뇌를 꺼내어 맑은 물에 씻은 후 다시 집어넣기라도 한 듯했다. 모든 게 기설이 곁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 몸에 억제제를 쑤셔 넣을 필요가 없어져서, 기설이 달아나 버려서, 한천마는 좋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에 심기가 비틀렸다.

- 형. 안 들려요?

귓전을 두드리는 목소리에 천마는 이를 악물었다. 찾아 헤매던 육성을 듣는 순간에야 비로소, 새끼손가락과 허벅다리 근육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형’ 하고 저를 찾는 목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기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아가.”

마른 입술을 어렵게 열어, 천마가 말했다. 시커멓게 그늘진 얼굴로 내뱉은 목소리는 무척 쾌활했다.

“새 억제제 만들어 놨으니까, 허튼짓 그만하고 집에 와라. 오늘 복용하고 나왔는데 꽤 괜찮아. 내 몸에 해로울 게 조금도 없어.”

- 진짜요?

“그래, 형은 너한테 거짓말 안 해.”

- 그 말도 거짓말이잖아요.

“하하….”

차디찬 두 손을 감싼, 가죽 장갑이 순식간에 땀범벅이 됐다. 배신감인지 분노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손을 떨며, 천마는 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말했다.

“설아. 경이가 며칠째 밥을 안 먹는다. 집에서 너만 기다려, 애가 오늘내일해.”

- 형이 주면 잘 먹잖아요…. 경이도 다 알아요, 형이 내 보호자인 거.

“내가, 씨발! 내가 왜 네 보호자야?”

솟구치는 울분을 못 참고 천마가 소리쳤다. 그러다가도 얼굴을 일그러뜨린 분노가 애원으로 변했다.

“형 힘들다, 설아…. 집에 와. 보고 싶다.”

- …….

“나 이제 고아 됐잖아. 너 때문이잖아…. 응?”

- …….

휴대폰 너머의 기설은 한참 침묵했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 동전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단단한 소리, 코를 훌쩍거리는 젖은 신음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작은 훌쩍임이 천마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 …그래서 내가 미워졌어요?

추운 곳에 있는 듯, 코를 훌쩍이며 기설이 물었다. 사흘 만에 연락해서는 처음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천마는 또 마음이 아팠다.

“아니. 안 미워. 오히려 고맙지.”

급한 마음에 천마는 횡설수설, 기설을 유혹할 만한 말을 우후죽순 쏟아 냈다.

“아가. 형이랑 만나서 이야기 좀 하면 안 되겠니? 우리… 우리 같이, 합의점을 좀 찾아보자. 그러면 되잖아.”

- 안 돼요…. 형이 또 거짓말하면… 나는 안 속을 자신이 없어요. 형이 아픈 건 싫어요. 이지가 힘든 것도 싫고요.

기설의 숨소리가 후욱, 다시 후욱, 일정한 박자를 두고 들려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천마는 제 배를 감싸 안은 기설의 모습을 상상했다. ‘라마즈 호흡’을 ‘라마 호흡’으로 잘못 알고는, 들숨 날숨을 훅훅 학학 내쉬며 긴장을 떨쳐 내는 어린 임산부가 그의 머리 안에 자리했다.

- 내가 다 감당할게요. 이지 낳을 때까지… 나 찾지 마세요.

“너는 애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니?”

천마의 이마를 짚은 손이 주먹으로 변했다. 빳빳한 주먹에 부딪히게끔 제 머리를 흔들면서, 왼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천마가 말했다.

“그래, 설아…. 그럼 우리 한 가지만 약속할까?”

- 네.

“어디서든 밥 굶지 말고, 추운 곳에서 자지 말고, 잘 차려입고 다녀. 너 돈 봉투 가져갔더라. 안에 든 수표, 삼천만 원…. 확인했지? 그거 다 네 거니까, 형이 너 쓰라고 찾아 준 거니까, 전부 널 위해서 써. 나중에 검사할 거야.”

- …….

천마의 머리 안에서, 기설이 머뭇거리며 자세를 고쳤다.

문득 천마는 기설의 귓전에 욕설을 퍼붓고픈 충동을 느꼈다. …덜떨어진 새끼! …그렇게 소리치며 기설의 어깨를 아주 세게 붙들고 싶었다. …천만 원권 수표 세 장을 칠백에 팔아? 네가 팔아먹은 세 장 추적하느라 들인 품이 얼만지나 알아? 돈을 줘도 못 써먹는 주제에 무슨 도망을 친다는 거야? …그렇게 힐난하며 목줄을 잡아채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이 준 차도 깨끗하게 잘 타고 다니고. 응, 이지 태어나면 물려주면 되겠네.”

그래, 등신 새끼야. 너 3억 2천짜리 차를 폐차장에 처박았더라. 부품은 다 어디 팔아먹었니? 빌어먹을 좀도둑 새끼!

“괜히 옷이나 시계, 무턱대고 팔아먹거나 그러지 말고. 알겠지?”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이 애새끼야, 몸에 두른 소품이라도 잘 챙겨. 거지꼴을 하고서 어디서, 어떻게 애를 낳겠단 거야? 빌어 처먹으려 해도 사기를 못 칠 새끼 같으니. 너처럼 멍청한 놈이 나 없이 어떻게 살겠다는 거야? 너처럼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없이….

“너 없이 나는 어떻게 살지?”

멍하니 흘린 넋두리가 있었다.

- …….

기설의 침묵은 아주 길었다.

- 제가, 형…. 제가…. 이지…, 우리 이지 예쁘게 잘 만들게요. 손가락도 발가락도 열 개씩… 정말 잘 만들게요.

“…….”

끝내 기설이 고집을 꺾지 않아도, 천마는 실망하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꺾어 놓을 수 없는 상대임을 진작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마는 기설을 좋아했다. 그 애정은 기설이 제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순간에도 변색하지 않았다.

- 그런데요…. 형. 저한테 위치 추적기 같은 거 심으신 건 아니죠?

침묵 끝에, 기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딴에는 분위기를 풀어 보겠다고 꾸려 낸 농담 같았다. 제가 뱉는 엉뚱한 질문들을 형님께서 좋아한단 것을 알고, 웃어 달라고 애교를 부린 것이었다.

기설이 원하는 대로 천마는 웃음소리를 냈다. 바싹 마른 얼굴에 미간 사이가 일그러진 채로, 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음모론 좀 믿지 마. 그거 태교에 아주 나빠.”

- 네….

다시 침묵이 다가왔다. 몇 초간 숨소리를 들려준 끝에, 기설은 수화기 멀리 고개를 떼어 내며 작게 말했다.

- 형, 잘 지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낯선 공중전화 번호가 찍힌 통화 기록 화면을 바라보며, 한천마가 중얼거렸다.

“위치 잡혔니.”

그의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시커먼 가방 속 노트북을 펼쳐 보이며 강명경이 대답했다.

“예. 아직 신산시 안입니다.”

천마는 제 팔뚝에 고정된 완장을 거칠게 뜯어냈다. 두 줄 그인 완장이 버려진 자리에, 한무상의 관을 옮겨 줄 아들은 없었다.

***

통화 신호를 추적하여 찾아낸 동네는 술집과 편의점, 빌라와 텅 빈 사무소로 둘러싸여 점심 내내 적막했다. 공사장 인부 하나가 주저앉아 담배를 태우는, 공터 안으로 검은 차량 세 대가 들어섰다. 서버밴 밖으로 시커먼 사내 서넛이 쏟아지듯 나왔다.

사내들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갓길에 놓인 공중전화 박스였다. 사람은 물론 쪽지나 물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진 것이 없나 수색했지만, 유의미하게 얻을 것은 없었다. 이내 검은 구둣발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근방의 가게 CCTV를 전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사십 분 뒤, 사내들은 ‘편의금고’ 네 글자가 박인 간판 앞에 모여들었다. 가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전당포였다.

무리에서 가장 어린 남자가 허리를 깊이 숙이자, 전당포의 외부 창구와 시선의 높이가 얼추 맞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그는 퉁퉁, 단단하게 쳐져 있는 가림막을 소리 나게 두들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구의 가림막이 걷혔다. 유리 벽 너머에 앉아있는 사장은 머리를 빡빡 민, 마른 몸매의 여자였다. 졸린 눈을 손수건으로 문지르며 그녀는 안경을 찾아다 썼다. 구깃구깃한 민소매 티셔츠의 가슴팍에 매미 모양 브로치가 붙어 있었다.

물끄러미, 사장은 검은 남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사내 중 하나가 가게 문을 열라고 손짓해도 모르쇠 하는 얼굴에 ‘경찰을 부를까’ 하는 고민이 스몄다. 그러나 갈등은 짧았다. 시커먼 사내들 어깨 너머로, 한천마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구 밖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당포의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전당포 내부는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누구네의 집 안에서 가장 벌이가 될 만한 물건들이 한가득, 벽면 진열장을 채웠다. 너른 진열장 사이로 한천마가 걸어 들어갔다. 여타 사내들은 전당포 밖에 남았다.

우두커니, 저승사자처럼 줄지어 선 이들을 향해 명경이 눈짓했다.

“사람 쫓는다고 광고하냐? 흩어져.”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검은 남자들이 걸음을 옮겼다. 이내 ‘편의금고’ 간판 아래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게 안을 구경했다. 결혼 예물이며 명품 가방, 골프채, 금붙이는 예사요 한정판 피규어, 절판된 소설의 1쇄본, ‘1/4’ 표시와 사인이 박인 판화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매물이었다. 볕 드는 자리에 놓인 화분마저 값나가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사이, 명경은 카운터 앞에 섰다. 여자 사장은 익숙하다는 듯 서랍 자리에 앉아, 두툼한 장부를 꺼내 놓았다. 훔친 물건을 돈으로 바꿔 가는 도둑들이 있어, 경찰이나 조폭이 다녀가는 일이 예사였다.

그러나 오늘, 한천마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물건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를 대신해 명경이 입을 열었다.

“임신한 남자가 하나 다녀갔을 텐데. 스물두 살에, 얼굴이 하얗고 날씬하게 생긴….”

“음….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회색 코트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에, 명품 시계나 벨트, 운동화를 맡겼을 거다.”

“여기 오는 손님 다 그래요.”

오가는 말을 듣는 천마의 미간에 구김이 졌다. 곰처럼 크고 인상이 험한 강명경이었다. 그의 입장에서야 기설이라는 남자가 임산부에 얼굴 희고 날씬한 놈이지, 남들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터였다.

답답한 심문을 끊어 놓으며, 천마가 입을 열었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말투가 귀여운….”

…어린애, 라고 기설에 대해 설명하려다, 그는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크게 소리 내어 ‘쯧’ 혀를 차기도 했다.

탐탁잖은 기색을 못 감추며 천마는 묘사를 고쳤다.

“눈썹이 짙고, 눈빛이 부리부리한 운동선수인데, 키는 이 정도.”

시커먼 장갑으로 감싼 손날이 사장의 정수리보다 한참 위, 허공을 갈랐다.

“아, 그….”

“비실비실한 오메가 하나 뒤에 달고, 야반도주 나온 기둥서방 같은 알파.”

“아아!”

그제야 감을 잡은 듯, 사장이 눈을 빛냈다. 알죠, 잘 알죠… 중얼거리며 장부를 펼치는 손길이 재빨랐다.

그녀는 최근에 쓰인 이름 하나를 찾아내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한천마는 실소했다. 바짝 밀어 깎은 손톱 위에 놓인 세 글자, ‘이창건’ 때문이었다. 나가 뒈진 지 오래인 놈의 이름을 가져다 쓰자는 건, 문진주와 기설, 둘 중 누구의 아이디어였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분이 맡긴 물건이, 어디 보자…. 잠시만요.”

그렇게 사장이 가져다 놓은 매물은 시계였다. 검은 가죽 스트랩이 새것처럼 반질반질하고 초침에서는 은빛 윤기가 흐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기설의 손목에 채워져 있어야 할 시계였다.

자신이 선물한 물건이 전당포에 맡겨진 것을 확인한 순간 천마는 분노를 느꼈다. 전용 벨벳 케이스 안에, 보증서와 함께 모셔 놓은 꼴에 더욱 속이 뒤집혔다. 기설이 순 작정을 하고서 시계를 포장하여 갖다 판 건가 싶어서였다.

천마의 분통이 터지기 전에, 사장은 두 손에 면장갑을 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시계만을 따로 꺼내었다.

“케이스랑 보증서는 다른 손님이 담보로 맡긴 거고요, 창건 씨는 이 시계만요.”

‘그래, 우리 설이가 그랬을 리 없지.’

단숨에 울분이 식은 천마 앞에서 사장은 무척 적극적이었다. 요구하기도 전에 CCTV 영상 목록을 뒤적이기까지 했다. 신산시 내에서는 경찰보다 무서운 게 한천마였다. 경찰보다 도움이 되는 존재 또한 한천마였다. 돈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누구이건, 구태여 그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이내 가게 안, 컴퓨터 모니터에 CCTV 영상이 비쳤다. 전당포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기설이 보였다.

“…….”

천마는 한숨을 삼켰다. 제 발로 그를 떠나더니, 깡 좋게 안부 전화까지 걸어 온 기설이었다. 그러니, 호호 깔깔 웃지는 않을지언정 안색만큼은 밝을 줄로 알았건만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기설은 매우 우울해 보였다.

그는 두 진열장 사이에 선 채 한참 머뭇거리다가,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그러고는 은빛 시계를 두 손에 소중히 든 채 사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 시계가 진품임을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얼마의 대화 끝에 사장이 종이를 내밀었다. 기설이 그 위에 엉거주춤 서명했다. 기설은 시계를 건넸고, 사장은 돈 봉투를 주었다. 돈을 받고도 표정이 나쁜 것을 보니, 기설은 충분한 값을 받진 못한 듯했다. 제 시계가 명품이라는 것만 알 뿐이지, 보증서도 챙기지 못했고 케이스조차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설은 무진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돌아섰다. 가게 밖으로 나서기 전에, 그는 진열장의 한편을 물끄러미 살폈다. 한 손을 번쩍 들고 앉은, 고양이 조각상을 쳐다보는 기설은 잠시간 정지 화면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이내 그는 무엇을 요구하거나 구매하지 못하고 걸어 나갔다.

그로부터 몇 초 지나지 않아, 기설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동행인과 함께였다. 볼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씩씩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문진주였다.

문진주는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울인 채 무어라 화를 냈다. 얼마의 대화 끝에 그는 모자란 돈 대신, 전당포에서 판매용으로 걸어 둔 물건을 챙겼다. 노트북과 휴대폰 공기계, 최신형 즉석카메라였다.

이후 기설과 문진주는 바깥으로 나섰다. 유리창 너머에 두 남자의 하반신만 얼핏 보였다.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기설은 길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방향과 시간으로 짐작해 볼 때 공중전화 박스로 향한 듯했다.

문진주는 가게 앞에서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차량 번호의 앞 두 자리가 흐리게 찍혀 있었다. ‘신산, 가, 1’이었다.

“택시 회사에 연락 돌리겠습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명경이 돌아섰다. 그를 향해 한천마가 말했다.

“하지 마라. 소용없어.”

“네?”

제 귀를 의심하며 명경은 천마를 돌아보았다. 두 눈빛이 시커멓게 가라앉은 채, 천마는 모니터 속 기설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경이 보기에는 잘 지낸 듯, 멀쩡해 보이는 기설의 모습도 천마에겐 달랐다. 알파의 눈에 비친, 제 새끼를 밴 기설의 얼굴은 며칠 사이 무척 상한 듯했다. 길게 뻗은 목덜미도 평소보다 마른 것 같고, 흰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수척한 듯하고, 아끼던 시계를 내놓는 두 손조차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너, 돈 훔친 새끼만 잡아 봤지. 일부러 돈을 버리고 도망가는 놈 잡아 본 적 있냐.”

한숨 섞인 목소리로 천마가 물었다. 명경은 떨떠름하니 대답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흘릴 빵가루도 없는 애들을 어떻게 찾게?”

그러자 명경의 입이 딱 다물렸다. 한천마 앞에 ‘모르겠습니다’ 하는 답을 내놓을 순 없건만, 그밖엔 꾸려 낼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 천마는 제 턱을 매만졌다. 며칠 새 가죽 장갑이 주는 감각에 익숙해진 채였다. 몇 초간 그는 생각에 잠겼다.

문진주는 태생이 호구이고 잔정 많은 성격이다. 기설을 위해, 문진주는 최상의 환경을 꾸려 내려 노력할 것이다. 저와 같이 호구 짓을 하는 데다 저보다 어리숙한 기설을 돌다리 아래에서 재울 리가 없다.

그런데도 돈을 버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돈으로 구할 거처가 그리 급하지 않단 뜻이 된다. 일부러 기설이 아둔하게 거래하도록 내버려 두고, 흔적을 남긴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을 한천마가 찾아내고는, 착각하길 바랐을 터였다. 급한 마음에 궁색하게나마 가진 것을 죄 팔아 버리고 도망갔다고, 그리 녹록지 못한 상황이라고….

“남구에 뿌린 놈들 다 철수시켜.”

천마가 말했다.

“북서로 전부 옮겨. 모텔, 상가, 빌라는 수색할 필요 없어. 호텔, 오피스텔, 아파트 위주로 훑으라고 해.”

문진주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긴 하지만 순발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눈치가 없고 담이 좁다랗다. 그런 놈이 단기간 내에 도피처를 찾아냈을 리 없었다.

그가 기설을 데리고 어딘가에, 이미 거처를 정해 몸을 숨겼다면, 그곳은 진작에 준비가 되어 있던 장소일 확률이 높았다. 친지 때문에 떠안은 빚을 갚는 세월이 얼마던가. 도망쳐 숨을 생각이야 한 번쯤은 해 보았겠지.

‘그런데 왜 실행시키지 못했을까?’

가능성은 다양했다. 그래 봐야 신산시 밖으로는 빠져나갈 사정이 못 되기 때문일 수도, 장소를 구한 경로가 카지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도망쳐 봐야 결국엔 붙잡힐 걸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혹은 셋 다이거나.

“근래 세낸 장소만 뒤지지 말고, 오래전에 거래된 집도 전부 다 찾아. 카지노에서 역할 놀이 하던 놈들 명단 전부 가져와. 남은 빚 없고 가족 없고, 아직 실종 처리 안 된 새끼 명의로 된 집은 없는지, 싹 다 뒤져.”

그렇게만 한다면 수색에는 나흘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길어 봐야 나흘이었다. 운이 좋으면 이틀 내로, 기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구역별로 최소 인원만 보내고.”

남들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고 부패 경찰부터 길거리 불량배,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인력을 죄 끌어다 썼더라면, 기설은 진작 천마에게로 돌아왔을 터였다. 애지중지 사지 멀쩡히 거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차량 트렁크에 실리건 드럼통이나 캐리어에 담가도 상관없었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문제는 한천마가 제 손금을 파내어 찾아내고자 하는 기설이, 링 위에서 탈주한 애송이가 아니란 데에 있었다. 한천마는 기설의 빚쟁이가 아니었다. 기설 또한 한천마에게 어린 개미가 아니었다.

천마는 최대한 소리 죽여 조용히, 다른 치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제 보석을 되찾아야 했다. 제 살갗을 찢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제 새끼를 품은 기설은 흠집 하나 없이 성해야만 했다. 말짱하니 예쁜 모습으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천마는 그런 종류의 수색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수색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전당포 앞, 좁은 폭의 도로 위에 천마는 한숨을 흘렸다. 용건을 마치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를 태울 리무진이 도착했다. 가게 창구와 입구를 기다란 차체로 가로막으며, 장덕배가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그러고는 휴가 이후 처음 뵙는 최고 상사를 향해 꾸벅 허리 숙였다.

천마의 시선이 잠시간 덕배의 낯에 꽂혔다. 호박처럼 부푼 코 위의 깁스가 여전히 두툼한 모습이었다. 콧잔등에 들었던 피멍이 아래로 흘러내려, 이제는 콧방울까지 적갈색이었다. 흰자위의 실핏줄 또한 벌겋게 터져 불그죽죽했다.

“…….”

덕배는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긴장으로 어깨가 단단해졌다.

그와 달리, 천마는 그저 심드렁했다. 기설에게 개차반으로 얻어맞던 장덕배의 모습이야, 지난날 병원 CCTV 녹화 영상을 삭제할 적에 이미 보아 알았다.

“너는 집으로 가라.”

한천마가 던지듯 말을 뱉었다. 심장이 철렁해 얼굴을 든 것은 덕배였지만, 천마의 시선을 받는 이는 강명경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간 덕배와 눈을 맞추다, 명경은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명령에도 군소리 없이 복종하며 그는 길 위에 남았다. 그를 대신하여 장덕배가 리무진 뒷자리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차량 뒷좌석에 몸을 앉히자마자 천마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저를 태운 차량이 도로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감각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는 제 눈꺼풀 안에 새겨진 남자를 바라봤다. 천마의 옆자리를 채우며 창문 밖의 도시 풍경을 구경하는 이는 기설이었다. 검은 정장에 빳빳한 셔츠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도, 그는 어딘지 야해 보였다.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 맨살이라곤 새하얀 목덜미와 뭉개진 귓불만 내놓았을 뿐인데, 한천마 앞에선 그 작은 살점마저 색정적이었다.

형님께서 저를 관찰하는 것을 알고, 기설이 눈동자를 천천히 굴렸다. 갓 되찾은, 소중한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던 두 손도 서서히 천마에게 다가왔다.

상실한 것을 감추느라 착용한 가죽 장갑 위에, 기설의 지문이 찍혔다.

“진짜 깡패 같아요, 형. 왜 이런 장갑을 끼고 다니세요?”

기설이 물었다.

“…….”

천마는 그저 멍했다. 멍하니 기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칼은 새카만데 눈동자는 갈색으로 반짝이는, 기설은 어린애였다. 정차된 차량 뒷좌석에서 얌전히 형님을 기다리던, 기설은 착한 개였다. 딱 그만큼 천진난만하고 순순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기설은 눈 아래의 몇 없는 살이 밀려 올라갈 만치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 소리 없이 생글생글, 웃음 짓는 눈동자가 투명했다. 갈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천마의 모습이 인쇄된 듯 진하게 비쳤다. 이내, 천마도 기설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설아. 형이… 너한테 뭘 많이 잘못했대. 그런데 그래 놓고 잊어버렸대. 내가 저질러 놓은 짓이 있는데, 그걸 내가 몰랐다는데….”

힘 빠진 천마의 등허리가 뒷좌석 시트에 깊이 묻혔다. 그는 후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움에 몸서리치기에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나 값비싸고 편안했다. 체온을 재 보려는 듯 이마를 쓰다듬는 기설의 손길도 그저 다정하기만 했다.

지친 알파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기설이 말했다.

“어차피 나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형.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괜찮다는 말을 하니.”

“그럼 알려 주세요. 다 듣고, 전부 알게 된 다음에도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릴 테니까.”

네가 그렇게 말할까 봐, 아니, 그렇게 행동할 것이 너무 뻔해서 더 화가 나는 것이라고, 천마는 솟구치는 말을 삼켰다. 그의 입술 위를 가로막은 기설의 손가락 때문이었다. 약지 끝마디가 꾹, 천마의 인중 위를 눌렀다.

“…….”

세상 사람들은 한천마더러 사람도 아닌 놈이라 했다. 어찌 된 게 그를 비난하는 말이 그랬고 칭송하는 말도 그러했다. 그더러 사람도 아닌, 악마이고 천재이고 불한당이고 조각 작품이라 했다. 그런 천마에게 기설은 흔적을 남겼다. 철로 빚은 남자의 입술 위에 제 손 끝마디 자국을 남겼다. 뻔뻔스럽고 두껍던 낯짝을 어린 아기 피부처럼 유약해지게 바꿔 놓았다.

이내 기설의 손가락이 느리게 멀어졌다. 천마는 입술 위에 작은 쥐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설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만큼은 제 것이 아니게 된 듯했다.

그의 육신에 기설이 닿지 않은 부분은 없었다.

“다 괜찮아요, 형.”

기설이 말했다.

“모두 다 괜찮아질 겁니다.”

아는 것 하나 없는 놈이 용감하게 내뱉는 소리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 근거 없이 선언이었다. 그 당당한 태도가 무척 기설다웠다. 그래서 천마는 실소했다. 이제야 웃음이 났다. 목 근육의 힘이 쭉 빠지고 정신이 멍해져서는, 안도감에 웃음이 났다.

“설아.”

천마가 입을 열었고,

똑똑.

작은 소음이 그를 깨웠다.

한천마의 것이었던 편안한 허탈감은 단숨에 사라졌다. 두 눈을 번쩍 뜬 순간 그의 옆자리에 기설은 없었다. 하얀 개가 채우던 자리는 텅 빈 채였다. 입술 위에 올랐던 간지러운 감각 역시 꿈결처럼 사라졌다.

리무진 문밖으로, 대표님께서 하차하길 기다리는 일행이 줄을 이뤘다. 그들 중 누구 하나 반가운 얼굴이 없었다.

“…….”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천마는 제 입매를 매만졌다. 자신이 미소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허무해졌다.

10년도, 아니 1년도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한 달도, 일주일도 채 넘지 않았다. 고작해야 사흘째였다. 제 손금이라 여기며 맨발로 누벼 온 도시의 어딘가로 기설이 숨어 버린 지, 고작 사흘째였다. 사흘 만에 한천마는 아주 등신이 됐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지난날 그가 벌인 이상 행동은 억제제의 부작용이 아니었다. 허벅다리의 꿰매어진 살점이며 가락을 잃은 손아귀 반절이 지금도 지끈거리는데, 그는 지난날의 자해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스스로가 망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마는 자신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줄도 모르고 아픈 줄도 모르고 뒤틀린 줄도 모르고서, 무지 속에서 그는 오래도록 버텼다. 해묵은 이상을 알아채고 그 자신을 고치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평생을 무감각하게 남들 머리 위에 군림하다가, 오늘은 다른 누구와 어깨를 맞대고자 감정의 소용돌이에 내려앉았다.

그러니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허튼 생각에 사로잡혀 등신이 되는 것이다. 그를 제외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이제야 여상스러운 인간이 된 것이었다.

***

덕배의 농담에 따르면, 강 실장만큼 귀가를 적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금주 내내 강명경은 한무상의 죽음과 관련하여 몇 가지 뒤처리를 하느라 내내 외박했다.

그의 집은 SS 건설사가 도맡아 세워 놓은 신축 아파트의 11층에 자리했다. 그가 매매한 것은 아니고 한천마가 필기도구 하나 던져 주듯 손쉽게 선물한 집이었다. 절단된 귀에 남은, 보기 흉한 살점을 제거하느라 병원에 다녀온 날 그랬더랬다.

파우더 룸과 발코니까지 구비된 아파트 안에, 명경은 냉장고 하나와 중고 소파만 덜렁 놓았다. 챙겨 둔 짐이 거의 없고 키우는 화분조차 없는 탓에 그의 집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집’이라고 부르자니 보기에도 민망하고 심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단 하나, 너른 장소를 꾸미는 장식이라고는 낱장 그림이 전부였다. 크레파스를 덕지덕지 발라 어린아이가 그려 낸 그림이 한 장, 그조차도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오돌토돌한 외곽선이 노랗게 닳은 모습으로 냉장고 문짝에 붙어 있었다.

명경은 휑한 공간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대표님께서 저를 집으로 보낸 별도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러나 쓰일 일 없는 안방 화장실부터 먼지 쌓인 발코니, 창문 닫힌 여분의 방 어디에서도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내지 못했다.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채 명경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왔던 것처럼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검은 구두에 발을 쑤셔 넣으며 잠시간 부엌을 응시하기도 했다. 냉장고 문짝에 붙은 그림, 그 안의 부녀를 향해 눈인사를 남긴 것이었다.

그리고 명경은 아파트 1층 로비로 내려가 우편함 앞에 섰다. 몇 장의 명세서 사이에, 발신인이 생략된 백색 봉투 한 장이 함께였다.

조심스럽게 살펴본 봉투 앞면엔 ‘한천마 대표님께’ 일곱 글자가 쓰여 있었다. 눈을 좁히며 명경은 봉투 입구를 벌려 보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넘지 않을 선을 넘으며, 속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것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바오밥나무 같은 명경에게도 순정은 있었다. 흠모하는 오메가의 손글씨쯤이야 알아볼 정도였다.

문진주 사장이 우편물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강명경의 집 우편함에 집어넣을 것까지 벌써 추측해 낸 한천마였다. 그를 상대로 함부로 납치범 행세라도 했다가는, 문진주의 명도 올해를 넘기기 힘들 터였다.

염려하는 명경의 손바닥 위로 툭, 흰 봉투가 뱉어 낸 사진이 한 장 빠져나왔다.

***

“네 오빠는 사람도 아냐. 짐승 새끼도 제 밥 주는 사람은 알아보는데. 안 그러니.”

애앵.

“걔는 너 안 보고 싶다는데? 벌써 다 잊었나 본데?”

액. 액.

“지네 오빠라고 편들기는….”

애오옥.

회색 고양이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꽁꽁 눌린 스프링처럼 짧고 뚱뚱하던 허리가 단숨에 가늘고 길쭉하게 늘어났다. 구루루룩… 구루루룩… 목구멍 안으로 구슬 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경은 소파 팔걸이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천마의 커다란 발에 제 허리를 붙였다.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이며 옆구리를 비비적거리는 몸짓이 유연했다.

“이게 고양이야, 비둘기야?”

천마가 엄지발가락으로 경의 뱃살을 쿡쿡 찔렀다. 소파에 가로로 드러누운 채였다.

기설의 고양이, 경은 꾀죄죄한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비루한 데가 있었다. 애지중지하며 저 예쁘다고 이리 오라 불러 대는 가사 도우미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발로 제 궁둥이를 툭 밀어 내고 들러붙지 말라며 까탈을 부리는 천마에겐 기어오르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리 가라, 무겁다.”

애옥.

“돼지야. 네가 설이보다 더 무겁다.”

애오옥….

천마는 경을 예뻐하지 않았고 귀엽게 여기지도 않았다. 다른 한편으론 미워하지 않았고 괴롭히지도 않았다. 경이 가구 위에서 눈을 굴리면 굴리는 대로, 저에게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리면 부리는 대로, 그저 내버려 두었다.

경은 천마의 배 위에 올라가길 좋아했다. 이리저리 발을 웅크리며 자세를 잡기도 자연스러웠다. 펑퍼짐하니 옆으로 퍼진 고양이를 흘겨보며, 천마는 손안의 사진을 고쳐 쥐었다. 정사각형 사진 안에 담긴 기설은 과연 고양이보다 가벼웠다.

사진 속 기설은 행복한 남자였다. 기다랗게 펼친 의자 위에 누워, 그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화질이 썩 좋지 못해 모니터 속 이미지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기설의 등 뒤로 비스듬히 내려온 블라인드 커튼과, 슬랫 사이로 비쳐 든 역광 탓에 더욱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힌트는 충분했다. 볼우물이 파인 기설의 뺨이며 그의 배와 연결된 장비로 미루어 짐작할 때, 사진 속 모니터에는 태아가 찍혀 있을 터였다. 이지가 아니고서야 기설을 그토록 기쁘게 할 순 없었다.

사진 하단에는 유성 볼펜으로 날짜와 시간이 쓰여 있었다. 한천마 입장에서는 ‘싸고 토낀 아버지’의 기일, 사흘 전 오전에 찍힌 사진이었다.

“후….”

토끼처럼 발 빠른 문진주였다. 반면, 한천마는 초식 동물의 퇴로를 빤히 들여다보는 호랑이였다.

문진주는 한천마가 짐작한 것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편의금고’ 전당포에서 노트북과 즉석카메라를 가져간 문진주였다. 한천마는 그 이유를 뻔히 알아차렸다. 요즈음 즉석카메라라는 물건은 즉석 인쇄기나 진배없었다. 인터넷이며 블루투스를 이용하면, 당장 눈앞의 풍경 외에도 원하는 이미지를 얼마든지 인화할 수 있었다.

백업 드라이브에 든 사진을 찾아내기 위해 노트북까지 구한, 문진주의 노력에 천마는 높은 점수를 줬다. 그가 애써 출력해 낸 사진은 천마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무엇보다 기설이 예쁘게 찍혀 보기 좋았다.

그러니 사진 뒷면에 쓰인 멘트도, 덜 분노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난주 근황 사진 전달 드립니다.

금주 근황 사진은, 전달에 앞서 매물 교환 요청합니다.

* 절에서 먹었다는 설탕 뿌린 꽈배기빵, 4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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