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
회색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발바닥이 계단을 딛는 소리가 톳톳톳… 아주 작게 들렸다. 그러나 발소리는 금세 그쳤다. 집에 들어와 기척을 낸 이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경은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왔을 때처럼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 그래’ 하는 음성이 들렸다. 실망한 경의 응석을 받아 주는 기설의 목소리였다. 이내 기설이 침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난간 아래를 살폈다.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선 남자는 강명경이었다.
“실장님.”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기설이 계단을 내려왔다.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명경을 향해 기설은 군소리를 늘어놓았다.
“전에 병원 데려갈 때 경이, 실장님한테 잡혔다면서요? 그래서 저래요. 자기 병원 데려가지 말라고….”
고양이를 대신해 변명할 적에 그의 손에는 회색 털이 묻은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저를 데리러 오거든 언제든 외출할 수 있게, 변화한 몸에 맞춘 바지와 감색 스웨터, 배를 가릴 외투를 차려입은 상태였다.
명경은 굳은 얼굴로 천마의 전언을 건넸다.
“내일부터 소설小雪이라 날이 춥다. 대표님이야 바쁘다지만,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 오늘은 집에만 있으라고 하시더군. 식사 챙겨 먹어라.”
덤덤하니 전달된 외출 금지령에 기설은 기가 죽었다. 그가 두 팔을 떨구듯 내리자 머플러가 바닥에 끌렸다.
“오늘도요?”
천마와 러트 시기를 함께 보낸 뒤로 사흘이 흘렀다. 사흘 동안, 천마는 기설을 빌딩 안에 떨궈 놓았다. 어제는 장례식장에 들러야 한다며 ‘임산부는 그런 곳에 가는 게 아니다’ 했었다. 엊그제는 공사장에 들를 것이라며 ‘시멘트 흙먼지를 마시면 이지에게 나쁘다’고 기설을 설득했다. 오늘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먼저 외출해 버린 한천마였다.
열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기설은 백수는 못 될 사람이었다. 외출도 못 해, 운동도 못 해, 하다못해 맡은 바 심부름 하나 없이 따듯한 집에만 있는 나날이 그는 너무 싫었다. 산책로를 달리고 싶었고 줄넘기를 뛰고 싶었고 집 안 쓰레기통을 비우는 청소라도 돕고 싶었다. 그마저도 ‘대표님이 아시면 저 죽는다’고 헬퍼가 애걸복걸을 하니 손댈 수가 없었다.
기설은 속으로 끙 앓았다. 좀이 쑤셔 견디기 힘들다며 제 사정을 토로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웠다. 저보다도 명경의 표정이 더욱이, 근심 많은 사람처럼 무거워 보여서였다.
심란한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가, 기설이 말했다.
“얼굴 펴세요. 집에 얌전히 붙어 있을게요. 형도 러트 잘 넘겨서 이제 괜찮고, 저도 건강하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천마가 종종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업도 잘 풀려 가는 듯했다. 잠자리에 누울 때면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아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는 날들이었다. 그러니 명경의 얼굴이 저토록 심각할 필요가 없어야 했다.
“…….”
기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명경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기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승강기를 통해 사라졌다.
어리둥절하니 눈을 끔벅이며 기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명경의 시선이 닿았던 제 배 위를 습관처럼 어루만졌다.
…액, 애옹.
불청객이 사라지길 기다렸던 고양이가 다시금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반질반질한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 만지며, 기설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전 애플리케이션을 열고, ‘소설小雪’의 뜻이 무언지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이십사절기의 하나…, 첫눈이 내리는 날.’
새로 익힌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아직 식지 않은 1인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의자에는 종이 가방이 놓인 채였다. 속에 든 것은 갈색 서류 봉투였다.
별다른 고민 없이 기설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천마가 돌아오거든 편히 살필 수 있게, 식탁 위에 펼쳐 둘 생각이었다.
종잇장을 쥔 기설의 고개가 문득, 거실에 난 큰 창을 향했다. 첫눈이 내리기는커녕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내다보였다.
***
테이블 위에서 떨어진 서류 봉투가 붉은 카펫에 달라붙었다. 한천마는 봉투를 밟아 누르며, 겉면에 인쇄된 ‘신산대 병원’ 다섯 글자를 확인했다. 봉투 속을 채웠던 서류 더미는 왼손에 쥔 채였다.
환자의 이름은 ‘한무상’. 서류는 온통 그의 의식 회복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한숨을 내쉬며 천마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는 한무상의 병실을 찾았지만, 정작 제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어차피 의식 없는 한무상에겐 볼일이 없었다. 용건은 입구와 병실을 잇는 게스트 룸에서 마치면 그만이었다.
이곳에서 천마는 많은 방문객을 상대해 왔다. 그룹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임원이며 주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한무상과의 면회를 핑계로 한천마를 만나러 왔다. 개중에는 방문 너머에 회장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기합을 얻어 헛소리를 내놓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천마는 상한 심기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어떤 말을 듣건 그는 특유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유로운 태도로 상대의 갈비뼈를 후벼 파는 대답을 내놓곤 했다. 옛 SS 그룹을 그리워하며 여전히 한무상을 떠받드는 도태된 치들일랑 차라리 한천마가 아닌, 벽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게 덜 비참해 보일 터였다.
그러나 오늘의 천마는 여느 때와 달랐다. 그는 웃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굳은 채 무심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쳐다볼 뿐이었다. 서류 안에 쓰인 한무상의 회복 가능성은 지난 검사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치였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천마가 말했다.
“이제 와 깨어난들 멀쩡한 모습도 아닐 텐데. 대가리 빙빙 돈 늙은이한테 회사를 맡기자는 건 아닐 테고.”
한 치의 예의도 없이 뱉은 말이 그보다 서른 살은 더 먹은 노인에게 떨어졌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장년의 낯이 붉어졌다. 박씨 성을 가진 그는 한무상의 처남이자 SS 그룹의 부회장이었다. 동시에, 직급만 겨우 지켜 냈을 뿐 직책을 잃어버린 허수아비이자 한천마와 아무런 혈연이 없는 관계였다.
그러니 부회장의 입장에서 천마는 철천지원수였다.
“회장님께서 깨어나시면, 분명 아드님을 찾으실 겁니다.”
그가 말하는 아들이란 한천마가 아니었다. 한천마는 한무상의 의식이 멀쩡하던 때엔 일면식조차 없는 사이였으므로.
그가 말하는 한무상의 아들은 한권우였다. 생득적으로 타고난 부귀와 탄탄대로를 누렸지만, 천마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타국으로 내쳐진, 덜떨어진 열성 알파.
그 거적 조각 같은 놈을 한무상이 찾건 말건, 한천마가 알 바는 아니었다. 지난 4년간 판도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한무상이 깨어나고 한권우가 대뜸 극우성 알파로 변신한다 해도, 한천마에게선 10원 한 푼 앗아 갈 수 없었다.
‘호전 가능성.’
그런데 의사가 갈겨 놓은 진단 몇 줄에 기대어, 이제 와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놓으라며 이 난장을 피우다니, 노인네가 노망이 난 게 아닌가 싶었다.
“회장님께서, 당신한테 그룹을 맡기실 리 없습니다.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권우, 그 아이를 돌려놓으세요. 우리 집안은 이 그룹에 뼈를 묻었는데, 당신 출신은….”
“하하!”
대뜸 한천마가 폭소했다. 서른 넘은 남자를 ‘아이’라고 지칭할 때부터 참아 온 웃음이 ‘출신’, 두 글자에 폭발했다. 쉰 소리가 날 때까지 크게 웃으며 천마는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부회장의 안색이 분노로 질렸고, 명경의 눈썹은 움찔 굳었다.
“언제까지 하늘이 당신을 도울 것 같습니까!”
노인이 외쳤다. 그와 동시에 한천마의 웃음이 뚝 끊겼다.
두 눈을 부릅뜬 천마의 얼굴은 모든 근육이 경직되어 보였다. 관자놀이와 턱과 뺨의 뼈대가 두드러진 모양새가 꼭, 불에 바싹 타 버려 오그라 붙은 가면 같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한천마가 말했다.
“언제부터 하늘이 날 도왔다고 그딴 소리를 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가 장대 같고 덩치가 큰 천마였다. 땅바닥에 들러붙다시피 한 작은 노인에게 그의 존재는 더욱이 압도적이었다.
성큼 다리를 움직여, 천마는 한 발짝 만에 노인의 코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한무상의 이름이 쓰인 종이 더미가 노인네의 머리통 위로 떨어졌다. 놀란 부회장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황하며 올려다볼 적에, 노인의 눈앞에 선 한천마는 언제고 선 하나는 잘 지키던 얄미운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남의 상처를 함부로 찢고 벌어진 살갗 안에서 동전을 찾는 깡패였다.
천마의 오른손이 위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명경의 주먹이 노인의 뺨에 내리꽂혔다.
“어, 어억!”
노인은 볼품없이 소파에서 나가떨어졌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명경은 노인의 뺨을 연이어 때렸다.
저를 대신해 늙은이를 두들겨 패는 명경을, 천마는 빤히 바라봤다. 강명경은 충실하고 눈치 빠른 수하였다. 괜히 집사라는 별명을 얻은 게 아니었다. 제아무리 허수아비라고는 하나 부회장은 부회장이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한천마가 주먹을 휘둘러선 안 될 상대란 의미였다. 분노한 천마를 막아 내는 대신에, 명경은 제가 일을 저지르길 택했다.
둔탁한 타격음이 퍽퍽 울렸다. 천마는 이마를 찡그리며 뒤로 돌아섰다. 다시금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해라. 나 정신 들었으니까.”
한숨 쉬며 말하자, 명경이 우뚝 멈추었다. 손날에 묻은 코피를 털어 내며 그는 흐트러진 재킷을 정돈했다. 바닥의 노인은 진작 기절한 상태였다.
입을 꽉 다문 채 명경이 한천마를 살폈다. 천마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제 손바닥에 기댄 채 이를 갈았다.
“하하, 씨…발.”
머리꼭지가 돌도록 분노하고, 제어를 잃어버린 한천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로몬은 한 줌조차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은 액체 형태임이 정설이었다. 흥분한 순간 미세한 액체가 몸 밖으로 분출되며, 그것이 후각을 자극하여 향기로 느껴진다고 말이었다. 페로몬의 생성 자체를 막는 방법은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억제제는 물론이며 천마가 제 몸에 쏘아 넣은 약물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에, 억제제는 그것이 외부로 분출되지 못하게 탈출구를 틀어막는 역할을 했다.
무엇이건 참으면 독이 되게 마련이었다.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알파를 욕되게 하고 오메가를 쓰러지게 만들던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천마의 피부밑에 고이고 곪고 썩어서, 숙주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독이 됐다.
“하….”
천마는 긴 숨을 내쉬었다. 반듯한 이마 위로 굵은 핏대가 울룩불룩 두드러졌다. 흰자위의 터진 실핏줄은 붉디붉었다.
두 눈을 내리깔며, 명경이 말했다.
“진 교수 작업장에 경찰이 다녀갔답니다.”
천마가 실소했다.
“알아.”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다고, 진 교수에게 직접 전해 들은 것이 어제였다.
“…아무래도 검찰이 다시 기웃거리는 눈칩니다. 약은, 더는 안 됩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명경의 걱정 어린 음성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천마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머릿속을 채운 열기가 눈알까지 달걀처럼 익혀 버리는 듯 뜨거웠다. 얇은 눈꺼풀 피부 위로, 좌우로 혼란하게 움직거리는 검은자위의 윤곽이 얼핏 비쳤다.
긴긴 침묵 끝에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뱉어 낸 말은 불법 약물이며 진 교수, 검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덕배 불러라.”
“…대표님.”
“불러서, 24시간 이 병실만 지키고 있으라고 해. 아무도 못 드나들게 하고, 회장님 깨어나시거든 재깍 보고하라고.”
“…….”
대답 없는 명경을 향해 천마가 두 눈을 떠 보였다. 피로감에 젖은 눈동자는 더욱 검고 칙칙했다. 삽시간에 흘러내린 땀에 젖은 목 줄기로 백열전등 빛이 번들거렸다. 그 아래서 굵은 핏줄이 솟구치는 맥박을 따라 두드러졌다.
명경은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내 천마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건네준 손수건에, 명경은 제 주먹에 묻은 남의 피를 닦았다.
***
오후 11시 45분, 높다란 빌딩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다.
기설은 패딩 점퍼의 지퍼를 찍 끌어 올렸다. 차도 앞까지 나아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를 때, 왼손에 쥔 휴대폰은 아직 따끈따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운 저편에서 다가오는 불빛이 보였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리무진의 라디에이터 그릴에 반사된 은빛이 기설의 턱을 밝혔다. 우아하고 기다란 차량이 그의 발 앞에 정차했다.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기설은 통화로 전해 들은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했다. 명경의 말이 맞았다. 리무진 뒷좌석에서, 한천마는 정말로 잠든 채였다.
“형이 밖에서 자는 건 처음 봐요.”
기설이 중얼거렸다. 운전석 문을 조심스레 닫으며 명경이 차체를 빙 둘러 다가왔다. 뒷좌석의 문을 열어 잠든 이를 깨우는 대신, 기설은 명경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설의 손이 두꺼운 패딩 점퍼 안으로 들어갔다. 속주머니를 뒤적여 무어를 꺼내어, 그는 명경의 흉곽 위를 둔하게 쳤다.
명경은 두 눈을 내리깔았다. 찬바람에 붉어진 기설의 주먹이 그의 가슴 중앙에 닿아 있었다. 주먹 안에는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서류 뭉치가 함께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빳빳하던 종잇장이 반나절 만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명경이 일부러 식탁 자리에 버려 둔 힌트를, 수색견은 충실히 살펴본 눈치였다.
“대표님부터 안으로 옮기지.”
구깃구깃한 서류를 돌려받아 조수석 창문 안에 던져 넣으며, 명경이 말했다.
기설은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도록 뜨거운 콧김을 내쉬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허리 숙여 차량 내부의 천마를 살폈다.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 놓은 천마는 깊이 잠든 듯 보였다. 굵은 허벅다리 옆에 갈색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형.”
기설은 제 두 손바닥을 맞대어 싹싹 문질렀다. 찬 기운을 조금이나마 덜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마의 뺨과 귀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일어나요, 집에 가서 자야죠.”
그러자 천마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명경이 몇 번이고 불러도 깨지 못하던 그가, 깜빡 잠든 줄도 몰랐다는 듯 고개를 일으켰다. 비몽사몽간에 놀란 듯한 형님이 낯설고도 귀여워, 기설이 웃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두 팔을 뻗으며, 기설은 천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요. 경이가 형 기다려요.”
“그래….”
반쯤 잠긴 목소리로 천마가 말했다. 그를 부축하려던 의도와 달리, 기설은 그의 두 팔에 상체를 와락 붙들린 채 차에서 함께 내렸다. 기설을 옆구리를 껴안아 반쯤 들다시피 하며 천마는 인도를 가로지르며 걸었다. 졸음 가득한 알파의 두 팔에 붙들려 기설은 ‘어어’ 소리 냈다. 두 발로 바닥을 디딜 새도 없이 그는 천마와 함께 빌딩 안으로 사라졌다.
빠르게 퇴장하는 두 남자를 바라볼 뿐, 명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무진을 주차장으로 옮기지도 않고서, 그는 다만 기다렸다. 차량 뒷좌석에 기설이 남겨 두고 간 짐이 있어서였다.
뻔히 놓인 종이 가방을 봐 놓고도 두고 갔으니, 되찾으러 돌아오겠거니 생각하며 명경은 십 분쯤 제자리에서 버텼다. 찬 바람이 발목 안에 스미기 시작했다.
칼바람이 차도 위를 쌩쌩 가로질렀다. 명경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자세를 고쳤다.
기설은 그로부터 이십 분이 더 지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과 같은 패딩 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내의가 잠옷으로 바뀐 상태였고 뒷머리는 새 둥지처럼 뒤집힌 모습이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패딩 점퍼 지퍼를 만지작거리며 기설이 말했다.
“형 좀 재우고 다시 온다는 게, 같이 잠들어 버려서….”
찍, 지퍼를 끌어 올리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부은 듯 통통해 보였다. 임산부의 손발은 열흘 중 아흐레는 부어 있기 마련이었다. 두 사람분의 잠을 자야 하는 것도 당연했다. 명경은 그러한 생리를 아주 잘 알았다.
그렇기에, 기설에게 부담이 될 이야기를 건네기가 힘겨웠다.
“안 괜찮은 거죠?”
입술 위에 엑스 자를 그려 놓은 명경을 향해, 기설이 말했다.
“…형이요. 지금, 안 괜찮은 거 맞죠?”
명경은 목구멍 안에서 빗발치는 문장과 단어들을 솎아 냈다. 어떻게 해야 전하고자 하는 바를 덜 나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침묵 끝에 그는 긍정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밖엔 할 수 있는 답이 없었다.
힐끔, 명경은 조수석 위에 흩어진 서류를 돌아보았다. 한천마의 이름 석 자가 환자명으로 쓰인 진단서였다.
기설의 말이 맞았다. 한천마는 괜찮지 않았다. 그의 무엇도 괜찮지 못했다.
“…네 옆에 있는 그 알파는 내가 알던 대표님이 아니다.”
명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러트 시기가 끝난 뒤에도 하루 두세 번씩, 천마는 억제제를 제 몸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 끔찍한 약물에 중독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넘어야 할 고비는 자신의 러트가 아닌, 기설의 산달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기설의 몸과 그에 자리한 태아에게 있었다. 오메가가 아닌 베타 사내의 몸은 모체로서 역할을 100% 해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기설에게는 외부 페로몬을 여과하는 기능이 없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에 자극받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체내에 자리한 태아는 달랐다.
베타 사내의 몸 안에 든 아이는 외부 페로몬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태어나지도 않은 알파, 혹은 오메가에게는 지나친 자극이었다. 하필 그 아이의 형질이 극우성 알파여서 더욱 문제였다. ‘이지’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제 아버지, 한천마의 페로몬에 노출될 때마다 문제를 일으켰다.
모든 태아는 모체로부터 힘을 얻는다. 배가 고프면 엄마의 영양분을 흡수해 배를 채우고, 몸이 아프면 엄마의 고혈을 빨아들여 회복한다. 간단한 원리였다. 이지가 아프면 기설이 닳는다.
평소 강명경이 모시던 극우성 알파, 한천마라면 가장 손해가 적고 간단한 길을 갔을 터였다. 언뜻 복잡한 듯 보여도 작금의 사태는 1점짜리 문제였다. 뻔히 놓인 정답이 있었다. 그러나 천마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설과 떨어져 지내면 그만인데, 아주 쉬운 길을 그는 못 본 척했다.
약물을 증오하고 약쟁이를 혐오하던 한천마였다. 오늘날 그는 전신의 드러나지 않는 구석 자리마다 주삿바늘을 쑤셔 댔다. 몇 달 사이 그는 나약해졌고 아둔해졌다. 그런 것은 명경이 알던 한천마가 아니었다.
“…….”
명경이 긴긴 말을 마칠 때까지 기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재차 찬 바람이 불어올 무렵에 그의 콧잔등은 벌겋게 식어 있었다.
차가워진 얼굴을 뻣뻣하게 굳힌 채 기설이 질문했다.
“형이, 언제부터 그 약을…. 언제부터 쓴 겁니까? 혹시 저번에 그, 오메가 때문인가요?”
눈썹을 찡그리며 기설은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 길, 바로 이 자리에서 환자복을 입은 오메가가 나뒹군 일이 있었다. 그날 기설은 끔찍한 가진통을 겪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다. 종아리 근육이 비틀리도록 심한 쥐가 오르고 아랫배가 몹시도 아팠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오메가가 뿌린 페로몬이 제 병증의 원인인 모양이었다. 당시 기설도 ‘오늘따라 유별나다’ 느끼긴 하였으니, 한천마라면 이상의 원흉을 알아챘을 터였다.
“…….”
그러나 명경은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돌처럼 멈춘 채 침묵하는 얼굴을 보니 기설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뭔데요. 네? 그럼 언젭니까?”
힘을 담아 기설이 외쳤다.
“아니면 제가, 제가 섬에 갔을 때…. 그때부터예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비가 오던 오후, 작고 따듯한 절간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처음 잠을 청할 땐 그저 피곤하기만 했었는데, 중도에 깨서 천마와 함께할 때엔 몸살이 났었다. 구토도 했고, 반쯤 앓아누웠다.
기설은 잠결에 들은 대화를 떠올렸다. 어떤 교수를 찾아가, 무얼 받아 오라는 천마의 명령이 있었다. 그땐 모든 게 꿈인 줄로 알았는데, 되짚어 보니 명경이 돌아온 뒤에 제 몸도 씻은 듯 괜찮아졌다. 그가 받아 왔다는 게 억제제였을까 생각됐다.
“…….”
그러나 이번에도, 명경은 답을 내놓지 않았다. 기설의 이마가 종잇장처럼 찡그려졌다. 울컥 화가 솟고 분개해서, 마음 같아선 그 입술을 가른 엑스 자 흉터를 다시 찢어 버리고 싶었다.
“백화점에서 네 운동화를 산 날.”
기설이 발작하기 직전에서야, 명경이 말했다.
“네 몸에 오메가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향수 냄새에 섞여서 희미했지만, 대표님이 알아채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어.”
“…….”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시더군.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기설은 속에서 치미는 화를 어찌할 바 몰랐다. 눈썹을 구긴 채 명경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내가….”
입을 열어 무어라 외치고자 하였으나 주어에서 그쳤다. 치미는 욕설을 꿀꺽 삼키며 기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들은 말을 소화해 내려 애썼다. 임신 사실을 안 직후부터 천마가 그 자신의 몸에 약물을 주입했음을, 그 사실을 저만이 이제까지 몰랐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모든 게 좋고 평화롭다고 착각해 왔음을….
‘내가, 날….’
성화가 기설의 가슴 안에서 이리저리 튀었다.
‘나를 바보 취급하고….’
저에게 좀 더 일찍 알려 주지 않은 명경이 미웠다. 애당초 저를 속여 온 한천마가 미웠다.
머리 꼭대기에서 펄펄 끓는 분노를 느끼며, 기설은 차량 뒷좌석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갈색 종이 가방을 챙겨 들고, 구깃구깃해진 서류 뭉치를 버렸다.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 빌딩 안으로 걸어갔다. 코끝이 시큰하고 머릿속이 얼떨떨했다.
승강기에 오를 적에 기설의 눈시울은 발개져 있었다. 한천마의 이름이 박힌, 지난 사흘간의 진료 결과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기설이 이해하기 힘든 영어 단어와 수치들이 대체로 붉은 글씨로, 비정상, 혹은 위험이라고 적혀 있던 종잇장이 마치 독촉장 같았다.
너른 어깨를 구기며 기설은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별수 없이 웃음이 났다. 갈색 종이 가방에서 풍기는 짭조름한 감자튀김 냄새가 승강기를 가득 채우매, 그는 화를 내면서 웃었다.
흉곽 안에서 폭주하는 감정들은 그러나 침실까지 함께하질 못했다. 너른 침대 한편에 기다란 팔다리를 뻗은 채 잠든 천마를 바라볼 때, 기설에게는 그와 함께 눕고 싶다는 열망만이 존재했다.
무탈하게, 무난하게 보낸 하루의 끝이 너무 벅찼다. 천마의 옆자리에 피로해진 몸을 눕히고, 피부에 스민 추위를 쫓아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설은 그렇게 했다. 겉면이 차가워진 패딩 점퍼를 벗어 버리고, 천마의 옆자리에 누워 그와 한 이불을 덮었다. 그것만으로도 몸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길 두어 번, 기설은 생각이 마비된 채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무의식이 그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스트레스를 외면하고 잠을 청하기도 아주 잠시였다. 기설은 금세 정신을 차렸고, 어슴푸레한 새벽의 빛깔을 확인했다.
배가 ‘징’ 울리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처음 태동을 느낀 줄도 몰랐다. 다만 제 다섯 손가락의 마디, 사이사이를 메운 뜨끈한 감각에 집중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손깍지를 낀 큼직한 손이 보였다. 익숙한 손을 바라보길 한참, 기설은 자신이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잡힌 손을 풀어내면서 고개를 들자 저를 끌어안다시피 품은 남자의 턱이 보였다. 천마였다.
머리칼이 부스스하니 뒤집어진 채 기설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뜨문뜨문 깨달았다. 첫째로, 저도 모르는 새 또 가위에 눌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끙끙거리는 기설을 달래어 주겠다고 천마가 허벅다리를 내어 주고, 손도 잡아 준 것이었다. 둘째로, 그의 다정한 연인은 참 지독한 사람이었다. 천마는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일생을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봐 왔다고 자부하는 기설이었다. 그런데도 한천마는 매일같이 신기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버티면서 잠든 이의 모습을, 기설은 그를 통해 처음 보았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기설이 조심스럽게 천마의 목덜미를 만졌다. 기설은 천마가 저에게 해 주었듯이 그의 꿈결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다. 자리에 편히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물가물 잠든 순간에도 천마는 손쉽게 조종당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둔한 동작으로 기설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깼나?’
어리둥절하니 기설이 침묵했다. 그러나 천마의 몸짓에선 아무런 의식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저를 안아 주는 베타를 반사적으로 붙드는 게 전부였다.
잠시간 눈을 깜빡거리다, 기설은 천마의 흐트러진 머리칼에 얼굴을 기댔다. 천마는 기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기설은 그의 머리를 품은 듯한 자세였다.
“형….”
요즈음의 한천마가 좋다고, 기설은 생각했다. 새벽 사냥을 즐기는 매처럼 번쩍번쩍 눈을 뜨던 천마가, 요즈음은 자주 잠결을 헤매었다. 잘 다듬어진 칼처럼 차갑던 남자가, 다른 일정을 몇 시간씩 미루며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다. 베타의 전신을 전화번호부 살피듯 훑어 내리던 알파가, 솜털 한 올의 결까지 느끼려는 듯 기설의 팔뚝 위를 손금으로 거닐기도 했다.
그런 한천마가 기설은 좋았다.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기설은 자신이 그런 한천마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싫었다.
요즈음의 한천마에 대하여, 기설은 아무것도 몰랐다. 피가 탁해지고 몸이 상하여 기상이 느려진 것임을 몰랐다. 정신이 둔해지고 감정을 조절할 줄 모르게 되어 제 옆에만 머무르는 줄을 몰랐다. 자신이 아픈 만큼 기설이 괜찮아졌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밤마다 제 꿈결을 들여다보는 줄도, 기설은 몰랐다. 모르고서 즐거웠다. 기뻤다. 이런 게 행복이란 건가 보다 생각했다.
잠든 알파의 등을 토닥거리며, 기설이 말했다.
“난 이런 대접은 받아 본 적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 귀로도 돌아오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마침내 아주 천천히, 천마가 이부자리에 편히 눕혀졌다. 기설은 곤히 잠든 이의 인중 위에 제 새끼손가락을 살짝 대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 위에 제가 자국을 남겼다고, 멋대로 즐거운 착각을 했다.
그대로 그는 두 눈을 꽉 감았다. 눈가에 주름이 지고 눈알이 저릿할 정도로 세게 눈을 감고, 가만히 소망했다.
“앞으로도 쭉, 모르고 싶어요. 생각 없이 지내고 싶어요.”
새로이 들은 말은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모르는 척 두 눈을 감고, 그저 머물고 싶은 대로 천마의 옆에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등신 새끼처럼, 나사 빠진 쪼다처럼, 어디 한 군데 덜떨어진 멍청이처럼, 여태껏 살아온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형도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마요.”
한천마가 못된 악당이어도, 기설은 괜찮았다. 그가 사기꾼이어도, 폭력배여도, 심지어는 살인마라 할지라도 기설은 모르는 척 그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되레 그것이 저에게 어울리는 삶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보고 싶은 점만 보고 싫은 것은 외면하면서, 아픔은 지워 버리고 기쁨만 남기면서, 광신도처럼 한천마의 옆에 남고 싶었다.
‘그래, 나는 몰라.’
천마의 옆자리에 모로 누워 기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난 그런 복잡한 일 이해 못 해.’
제 주먹에 입술을 붙인 채 그는 잠든 알파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지가 첫 태동으로 하여금 안겨 준 새벽, 귀중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설은 그 시간을 천마의 옆얼굴을 구경하는 데에 쓰기로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 고민도 품지 않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새벽의 잡음이 기설의 귓가에 맴돌았다. 창문 밖을 어른거리는 검은 귀신이 시야의 귀퉁이에 자리했다. 천연덕스럽게 천마의 옆에 들러붙은 제 육신을 저주하는 자괴감도 밀려들었다. 해가 뜰 때까지 기설은 그것들과 함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괜찮았다. 닥쳐온 문제를 상대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을 알았으므로. 그저, 모르는 척 외면하면 그뿐이었다.
그러고 있자면 아침이 왔다. 아침이 오면 천마가 잠에서 깨었다.
“설아.”
눈썹을 찌푸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형 얼굴 뚫어지겠다….”
눈도 뜨지 않고서 읊는 말에 기설은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형.”
그러고는 즐거운 아이처럼 속닥거렸다.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해요? 저녁에 밥 같이 먹을 수 있어요?”
“으음….”
잠기운을 쫓으려는 듯 마른세수를 하며, 천마가 침음했다. 기설은 그의 어깨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 붙였다. 그의 손을 끌어다가 제 배 위에 대기도 했다.
알파의 손바닥이 습관적으로 베타의 배를 어루만졌다.
“들렀다 올 곳이 있긴 한데, 왜. 먹고 싶은 거 있니.”
“어….”
두 눈을 내리깔고 기설은 복부에 생긴 둔덕을 살폈다. 잠에서 깰 정도로 크게 울리던 태동은 이제 없었다. 이지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는 기설의 배 안에 웅크린 채 그저 잠잠했다.
“…메뉴는 생각해 보고, 문자로 알려 드려도 돼요?”
“전화해.”
“네. 그럴게요.”
천마가 기설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댔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크게 기지개를 켜며 터벅터벅 욕실로 걸어갔다. 피로해 보이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설은 제 배 위를 어루만졌다.
‘이지야. 아빠 발차기 한 번만 더 보여 주지…. 지금은 하기 싫어?’
섭섭한 아침을 열며, 기설은 쓴 침을 꿀꺽 삼켰다.
***
아이들 여럿이 창문 앞에 붙어 섰다. 따개비처럼 한데 모여, 코흘리개들은 낯선 손님들을 관찰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떡하니 주차된 차는 좌우로 늘린 슬라임처럼 기다래서 웃겼다. 그 앞을 지키는 무서운 아저씨는 곰처럼 크고 시커멨다. 심란해 보이는 곰의 입술 흉터를, 남자아이들이 구경하기 바빴다.
반면에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중앙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건물 안으로 막 걸어들어온 미남자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진짜 크다….”
몇몇 아이들이 어른을 함부로 평가했다. 제 뒤통수로 따라붙는 목소리에 한천마가 실소했다.
구둣발로 중앙 현관을 가로지르면서, 그는 건물 구석구석을 관람하듯 살폈다.
벽면을 연두색으로 칠한 복도는 그의 커다란 체격 탓에 너비는 더욱 좁게, 천장은 더욱 낮게 느껴졌다.
낡은 건물을 받치고 선 사각 기둥에는 아이들의 낙서가 덕지덕지 남아 있었는데, 유행이 지난 눈사람 캐릭터부터 도깨비, 변신 로봇에 이르기까지 장르가 다양했다.
서로 다른 사이즈의 신발을 마구잡이로 욱여넣은 신발장에서는 흙냄새가 풍겼다. 낮은 위치에는 작은 찍찍이 운동화가, 그나마 높은 위치에는 큰 샌들이며 실내화가 들어 있었다. 단풍잎을 그릇 삼아 흙 알갱이와 도토리를 모아 둔 칸도 여럿 있었다.
복도 벽면은 온통 그림으로 채워진 채였다. 천마는 줄지어 전시된 그림들을 한 장 두 장 훑어보았다. 물감과 크레파스가 서로 섞이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덧칠된 그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어린 화가들이 그려 낸 어른이 오직 한 사람뿐이란 점이었다. 머리칼은 뽀글뽀글 스프링 같고 복장은 앞치마인 여자가 하나,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갈매기가 그려진 채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대표님.”
인사말에 천마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높게 틀어 묶은 중년 여성이 보였다. 남색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아 내는 선생을 향해, 천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못 본 새 많이 늙었네.”
불쑥 찾아온 손님이 내놓은 매정한 평가에, 은하 고아원의 원장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대표님께선 그대로시네요.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한천마에게는 그다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인사는 그것으로 족했다. 원장은 부랴부랴 앞서 걸었다. 겉모습만 아름답지 실상은 위험한 어른으로부터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떼어 내고자, 그녀는 천마를 원장실로 안내했다.
원장실이라고 해 봐야 건물 안에서 가장 작은 방의 문짝에 ‘원장실’ 문패를 붙인 곳에 불과했다. 문패 아래에는 ‘지나쌤 방’이라는 손글씨와 글라스데코 용액으로 그려 넣은 하트가 나란했다. ‘지나’는 혀가 짧은 아이들이 원장, ‘지은하’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지은하는 은하 고아원에 상주하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녀의 사무실인 원장실은 모든 것이 작고, 좁고, 낮은 시설 안에 유일한 어른의 공간이었다. 노란 파일이 다닥다닥 꽂힌 책장과 사각형의 테이블, 윤기를 잃은 화이트보드와 믹스커피 박스를 휘휘 둘러본 다음, 천마는 소파에 몸을 앉혔다.
지은하가 그 앞에 머그잔 하나를 내려 주었다. 진득한 유자 향을 맡자마자, 천마는 모락모락 김 오르는 잔을 옆으로 밀어 거절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 먹는 임산부가 그의 집에 있고 무엇이든 함께 먹길 좋아하는 탓에, 유자차 냄새라면 신물이 났다.
오죽하면 음식을 볼 때 영양소와 효능부터 떠오를 지경이었다.
‘유자에는 엽산이 많이 들어 있는데, 그게 아기가 기형으로 안 태어나게 도와준대요.’
기설의 목소리는 메아리를 지녔다. 그러니 없는 자리에서도 천마의 귓가에 맴맴 돌며 그의 정신을 사납게 헤쳐 놓는 것이었다.
“…….”
반면, 지은하는 무거운 침묵 속에 긴장한 채 눈을 굴렸다.
이 자리에 고아원을 짓게 하고, 원장 자리에 지은하를 앉혀 둔 이가 다름 아닌 한천마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실질적인 시설 운영에 관하여 그는 무엇 하나 간섭한 바 없었다. 처음 한두 해 동안은 제 손으로 직접 부모 잃은 아이들을 주워다가 맡기곤 했었더랬다. 월말마다 후원금의 사용 내역을 정리하여 보내면, 들여다보는 시늉도 보였었다. 그런데 어떤 해를 기점으로 관리자 일을 죄 강명경 실장에게 떠넘겼다.
강 실장 역시 무관심하긴 매한가지였다. 지은하가 느끼기로는 오히려 한천마보다 그가 더 나빴다. 명경은 고아원의 존재 자체를 등한시하는 듯 보였다. 별도의 용건이 없고서야 은하 고아원에 방문조차 하지 않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시설 운동장 밖으로 사람을 불러내는 등, 코흘리개 고아들과 마주하기를 유별나게 싫어했다.
그런 명경이 대뜸 찾아와서는, 고아원을 떠난 소년의 이름을 말하고 그의 인적 사항을 받아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천마까지 고아원에 쳐들어와, 동일한 이름을 내놓곤 그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기설’이요?”
어리둥절하니 지은하는 눈을 좁혔다. 이곳에서 가장 키 큰 남자아이가 되었던 날 기설은 고아원을 뛰쳐나갔고, 그 뒤론 얼굴 한번 보여 주질 않았다. 그래도 한때 선생님이라 불렸던 도리가 있어 지은하는 기설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기설’은 아픈 손가락의 이름이었다.
“걔가 여기서 나간 지 벌써 5년은 더 됐는데…. 얼마 전에 강 실장님 통해서 서류 몇 장, 복사본을 보내 드렸었어요. 못 받으셨나요?”
“받았지. 그런데 거기에 사진이 없잖아.”
지은하의 시선이 천마의 다리로 향했다. 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는 위쪽 발을 느릿하게 흔들고 있었다.
마른침으로 목을 축이며, 지은하가 되물었다.
“사진이요?”
“그래, 사진. 사진 한 장 없을 수가 있나? 엄연히 여기 원생이었는데.”
“애들 사진이야 다 있죠. 아마 기설이도…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원장은 너른 책장으로 향했다.
운영 자금을 대는 한천마에게 ‘은하 고아원’은 세금 세탁소의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은하에게는 직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청춘을 보냈고 뭇 아이들에게 그들 청춘을 찾아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흔적들은 샛노란 파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설의 흔적 역시 그곳에 섞여 있었다.
“…어.”
확신 어린 손길로 여러 파일을 솎아 내던 지은하의 손이 우뚝 멈췄다. 주름진 손에 당혹감이 실렸다. 품 안의 파일을 이리저리 살피는 원장을 향해, 천마가 눈썹을 올렸다.
“문제 있나?”
“아, 아뇨. 사진이 없어져서요.”
빛바랜 노란 파일이 커피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한 장 두 장 서류를 넘기며 원장이 ‘기설’의 페이지를 찾아냈다. 앞선 서류에는 제각기 다른 아이들의 독사진이 이름과 함께 제 위치에 기재되어 있었다. 여의치 않을 경우 단체 사진에서 잘라 내어 인쇄한 이미지로 남기도 했다. 그런데 기설의 서류에만 사진이 없었다.
“여기 있어야 하거든요.”
공란에는 ‘(사진)’이라 인쇄된 글자만이 남아 있었다. 지은하는 봉숭아 물이 든 손가락으로 그 위를 더듬거렸다. 종이 위에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물풀로 붙였던 사진이 억지로 뜯겨 떨어진 듯했다.
곤혹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지은하가 말했다.
“가끔 잘생긴 애들 사진은 여자애들이 훔쳐 가기도 하는데, 그 사진은 그럴 만한 게 아니거든요.”
천마로서는 듣던 중 이상한 소리였다. 오늘, 그는 기설의 잘생긴 어린 시절 사진을 훔치러 온, 바로 그 여자애였다. 기설의 유년기 사진을 반드시 갖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기설이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곧 태어날 아이와 생김새를 비교하고도 싶었다.
“…….”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천마를 향해, 지은하가 고개 숙였다.
“오래전 기록이라 따로 열람할 일도 없고 해서…. 죄송합니다. 언제 없어졌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럼, 그 외엔?”
“네?”
“사진 외에 다른 물건은 없느냐고. 여기서 지내면서 남긴 게 있을 것 아냐?”
추궁하듯 천마가 물었다. 맡겨 둔 물건 내놓으라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지은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시나’ 하고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곳은 어른 하나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작은 고아원이지, 아이들의 흔적들을 보관하는 변태 박물관이 아니었다. 이제 와 한천마가 찾을 줄을 알았더라면 기설이 좋아하던 장난감이며 친구와 주먹다짐한 날 빠져 버린 유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수집해 두었겠지만, 이제 와 복기하기엔 너무 늦은 과거였다.
홀로 무얼 생각하는 듯하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설 좀 둘러보지. 그 애가 묵던 방이 어디야?”
떨떠름함 반, 미심쩍음 반으로 침묵하며 지은하는 남자아이들이 묵는 방으로 천마를 안내했다. 방 안팎에서 사내아이들이 와르르 뒤엉켜 떠들길 한창이었다. 아이들을 복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지은하의 몫이었다. 몇몇 녀석들은 말을 듣질 않고 천마의 얼굴을 쉼 없이 구경해서, 직접 등을 밀어야 했다.
그제야 한구석에 이불을 몰아넣은 사각형의 공간이 드러났다. 꿉꿉하고 작은 방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마가 구둣발을 뻗었다. 그는 뚜벅뚜벅 방 안으로 들어가, 낡은 장판의 구석 자리에 섰다. 그러곤 허리를 숙였다.
굵은 손가락이 너덜너덜한 장판 끝을 쥐고 뜯어내듯 벗겼다. 그러자 회색 시멘트 바닥과 장판 사이에 숨어 있던 장난감 카드 서너 장이 보였다. 괴물이 그려진 카드에는 각각 전투력과 별점이 인쇄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곰팡이가 스민 상태였다.
누군가의 타임캡슐을 찾아내고도 천마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구석 자리에 중요한 것을 숨기는 습관이 있는 베타를 진작 알았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천마는 카드를 모조리 긁어모았다. 그러고 보니 이질적인 은색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언뜻 은박 색종이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껌 종이에서 떼어 낸 은박지를 덕지덕지 붙인 빳빳한 종이였다. 크기가 딱, 노란 서류철에서 보았던 원생의 사진 사이즈였다.
천마의 엄지손톱 끝이 은박지를 밀어 내어 벗겼다. 발견이 안겨 준 기쁨은 그러나 잠시였다. 천마는 ‘꽝! 다음 기회에’ 글자를 확인한 도박꾼처럼 심드렁해졌다. 그의 손금이 지나간 자리에 작은 눈이 드러난 탓이었다. 한 줄 더, 은박지를 벗겨 내자 이번엔 뚱뚱한 볼이 보였다. 조금 더 벗겨 내자 넙데데한 코와 짙은 피부색이 도드라졌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사진 속 아이는 천마가 아는 기설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손에 쥔 사진을 툭툭 털며 천마가 혀를 찼다. 그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아이는 반절만 봐도 못된 악동이어서, 기설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마저도 억지로 앉혀 두고 찍은 듯 고개를 돌린 채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원장에게 천마는 사진을 던지듯이 넘겼다. 손톱 밑에 낀 은색 가루를 긁어내는 그를 향해 원장이 감탄하듯 말했다.
“이걸 어떻게 찾으셨어요?”
그러고는 덜 뜯어낸 은박지를 마저 벗겨 내고, 오래된 사진 위에 입바람을 후후 불었다. 천마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녀의 태도를 지켜보았다. 지저분한 가루를 묻힌 사진이 단숨에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제가 건넨 사진을 다시금 빼앗아 쥐고, 천마는 사진 속 아이를 재차 살폈다.
그제야 아이의 귀가 드러나 보였다. 고개를 돌린 아이의 볼 옆에 붙어 있는 그것은, 그러나 귀라고 부르기 민망한 생김새였다. 아무 살점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보단 모양이 예쁠 터였다. 아이의 귀는 살갗이 벗겨지고 물집이 잡혀 불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
다시 살핀 사진 속 소년은 눈이 작지 않았다. 많이 울어 댄 탓에 눈두덩이가 퉁퉁 부었을 뿐이었다. 뚱뚱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부르트도록 얻어맞았을 뿐이었다. 피부색 또한 짙지 않았다. 찬 바람을 호되게 쐰 탓에 동상을 입어서, 상처 위가 검게 변색됐을 뿐이었다. 아이는 못생기지 않았다. 눈도 코도 턱도 뭉개져 둔한 생김새였지만 그것은 맞아서 아픈 것이지 그 아이의 못남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제 모습이 몹시 싫었던 모양이었다.
제 이름 두 글자 옆에서 억지로 떼어 내고, 누구도 찾아볼 수 없게끔 꽁꽁 숨겨 두고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만큼, 기설은 제 유년기를 싫어했다.
***
“‘퇴근’할 때 안에 ‘에’ 자예요, 밖에 ‘애’ 자예요?”
“대체 뭔 소리야, 그게?”
핸들을 고쳐 쥐며 문진주가 눈을 좁게 떴다. 교통이 정체된 탓에 1.5km 남짓 남은 거리를 10분에 걸쳐 이동하던 중이었다. 도로 앞에서 사고라도 났다 보다 생각하던 차, 뒷좌석에서 휴대폰이 쑥 내밀어졌다.
문진주는 익숙하다는 듯 기설의 휴대폰을 받았다. 직사각형 화면 안에는 기나긴 문자 메시지가 발송 직전의 상태로 놓여 있었다.
형 이지가 삼겹살 먹고싶다는데
저 형한테 할 예기도 있고요...
대게 중요한 예기예요.
오늘 몇시쯤 태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