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챔피언 (9/17)

컨테이너 벽으로 만들어진 도박장 안은 온통 구린내로 채워져 있었다. 며칠은 기본이고 심한 경우 몇 달씩 씻지를 않은 사내들이 일고여덟 명씩 무리 지어 뭉친 탓이었다. 몇몇은 판돈이 오가는 테이블을 구경했고 몇몇은 나자빠져 울었고, 다른 몇몇은 마른 입술을 쩍 벌린 채 허공만 바라봤다.

개중에는 식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붉은 천을 덮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들은 대마 수지를 넣어 구운 고기파이를 먹었다. 열에 그을린 고기를 맨손으로 떠먹는 행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뜨거운 트레이의 온도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더 많이 흡입하기 위해 경쟁할 따름이었다.

인간쓰레기들이 만들어 낸 난장판. 그 가운데에 장덕배가 있었다. 그는 구멍투성이 소파에 앉아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엉덩이 살이 자꾸만 따끔따끔한 것을 보니, 소파의 가죽 시트 아래에 시궁창 쥐라도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방금 쥐 새끼가 내 엉덩이를 깨문 거 같은데.”

뭉개진 발음으로 그가 말했다. 잇새에는 가는 담배 한 개비가 물려 있었다.

라이터를 찾아 제 가슴팍을 두들기다가, 덕배는 테이블 위에 쌓인 옷가지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몸체에 ‘꽃마차’ 세 글자가 흰 글씨로 적힌 싸구려 라이터가 금세 나왔다. 쯧쯧 혀를 차며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필터 속에 든 캡슐을 짓씹었다. 그러자 화한 향이 입 안으로 퍼졌다.

옛날에는 각양각색의 담배를 너도나도 만들어 팔았더랬다. 개중에는 유명한 오메가 연예인의 페로몬 향기를 흉내 낸 담배도 있었다. 그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덕배는 한 종류의 담배만을 피웠다. 오메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다시피 하던 80년대, 당대 최고의 발라드 가수였던 장예환의 페로몬 맛이라며 대성을 누린, 일명 ‘장예환 담배’였다.

‘장예환 담배’는 90년대에 오메가 보호법이 생겨나면서 가수의 이름을 빼고 히트곡의 제목인 마멀레이드로 개명했고, 2012년에 국민건강증진법이 개정되면서 식품명 또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또 한 번 개명을 거쳤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담배를 장예환 담배라고 불렀다. 편의점에 가서 ‘장예환 하나’를 주문하면 초짜 알바생이라도 맞는 담배를 찾아 건네줄 정도였다.

덕배는 오래된 발라드 가사를 흥얼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입 안을 감도는 알싸한 맛이 수면 부족의 몽롱한 정신을 대번에 깨워 주었다.

“나느은… 그대으으, 다알콤한 연히이인.”

박자도 음정도 엉망진창인 노래를 제멋대로 부르면서 그는 새하얀 돈 봉투를 살폈다. 검지와 중지로 슬쩍 입구를 벌리자 속에 든 샛노란 지폐가 빽빽했다. 짙은 미소를 지으며 덕배는 비음으로 발라드곡의 코러스를 흉내 냈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내들의 손에도 두툼한 봉투가 들려 있긴 매한가지였다. 갈색 서류 봉투 속에는 지폐 뭉치를 대신하여, 그만큼 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장덕배가 직접 가져다준, 한천마의 약점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사진을 살피며 사내들은 신난 얼굴이었다. 간신히 찾아온 복수의 기회에 아득바득 이를 갈기도 더러 했다. 빠득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들 잇새에 사람을 잡아 죽일 칼이 물렸단 걸 알 수 있었다.

“이놈이란 말이지, 한 대표 새끼를 품은 게.”

사진 속에 찍힌 남자를 손가락으로 퉁 튕기며,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말했다.

“여태까지랑은 스타일이 좀 다르지 않어? 얼굴이 빤질빤질하니….”

“아, 평생 스테이크만 먹으면 안 질리겠냐? 맛이 달라서 더 홀렸는가 보지. 아주 죽고 못 산다 그러드만….”

다닥다닥 붙어 선 채 이죽거리며, 그들은 남자의 얼굴이며 몸매 따위를 평가했다. 75점에서 92점, 20만 원에서 250만 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값을 매기기도 서슴지 않았다.

담배와 술, 약에 찌든 사내들을 향해 중년의 남자가 윽박질렀다.

“어이! 품평이나 하자고 모인 줄 알아? 어차피 좍좍 찢어다가 돌려줄 상판, 어떻게 생겼든지 알 게 뭐야?”

얼굴 반절이 얼룩덜룩한 반점으로 뒤덮인 그는 타고난 피부색이 붉은 편이었다. 화를 버럭 내어 달아오른 볼이 검붉게 보일 지경이었다.

탁, 소리가 나게끔 사진 한 장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남자는 그 위에 과도를 박았다. ‘팽’ 소리를 내며 얇은 칼날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럼, 이 옆에 붙어 있는 놈은 누구야?”

성질을 못 이겨 부글부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덕배는 그의 안색을 힐끔 살피고는, 테이블 위에 박힌 사진을 내려다봤다. 사진 속에는 병원 앞 큰길가에 선 두 남자가 들어 있었다.

덕배는 잠시간 입맛을 다시며 말을 골라냈다.

***

문진주, 서른다섯 살, 우성 오메가이자 도박 랜드와 카지노의 바지 사장, 솔로.

그의 첫사랑은 문진주를 이렇게 표현했다.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를 섞어 만든 시집 같다’고. 당시 문진주는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달랐다. 그건 ‘고급스러운 척을 해 봤자 팔리지도 않는 비인기 서적’이란 험담이었다.

진짜 속뜻이야 ‘비싼 척 그만하고 나랑 자자’였겠지만, 뒷걸음치다 뭐 잡는다고 그의 비유는 제법 그럴싸했다. 문진주의 인생사는 딱 그만큼 아이러니했다.

그는 좋은 형질을 타고났지만 가정 환경은 형편없었다. 똘똘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편이었지만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게 가난했다. 알파 남성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174cm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졌지만, 근방에는 조루 약쟁이와 늙다리 사기꾼들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삶은 녹록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뼈가 삭도록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억 단위를 호가하는 빚이 있었다. 그중 문진주가 쓴 돈은 달랑 칠백 원이었다. 나머지는 갓 스무 살이 된 조카를 아이스크림 하나로 꼬드겨 보증인으로 만든 외삼촌이 전부 탕진했다.

운이라고는 개죽을 쑤려 해도 없는, 퍽퍽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던가. 오메가인 제 팔자에도 없는, 임신을 한 남자의 보모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신께서도 모르셨을 터였다. 그것도 언감생심이라 꿈에서도 바란 적 없는 극우성 알파, 한천마의 씨를 품은 베타를 말이다.

두툼한 항공 점퍼에 검은 바지, 브랜드 로고가 박힌 운동화를 신은 기설은 무척 멋있었다. 그러잖아도 명품인 남자에게 비싼 포장지를 씌우고 전용 반사판까지 대 준 듯한 모양새였다. 상하좌우 어디를 봐도 기설은 매력적인 남자였다. 임산부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태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문진주의 인지 능력을 더욱 떨어뜨려 놓는 것은 기설을 대하는 한천마의 태도였다. 몇 달 사이에 누군가 기존의 한천마를 훔쳐 가 놓고는 쌍둥이로 바꿔치기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진주는 타고난 기억력이 좋았다. 그는 기설의 성기를 쓰다듬었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반신을 내놓은 기설을 소파 팔걸이에 엎어 놓고는 짐승처럼 섹스하던 천마의 모습 또한 마지못해 기억했다. 몇 년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천마는 우람하게 발기한 물건 대신 부드러운 스카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기설의 목에 둘러 주더니 작은 리본을 묶고, 끝자락을 상의 안에 꼼꼼히 집어넣어 숨겨 주었다.

“큰일이네. 애가 아주 반쪽이 됐어.”

걱정스러운 듯 눈썹 끝을 내리며 천마가 말했다. 그 앞에 선 기설은 경호원 뺨치게 건장했다.

“너무 말라서 어떡하지. 이러다 예뻐지면 안 되는데.”

그렇게 속삭이면서, 천마는 기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품이 넉넉한 항공 점퍼 탓에 기설의 어깨는 평소보다 더 떡 벌어져 보였다.

“다녀와서 먹고 싶은 건?”

“으음…. 어…. 고민해 보고 정해도 돼요?”

“그래. 진료 끝나면 형한테 전화해.”

“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들으면서, 짝 없는 오메가인 문진주는 그저 황망했다. 그는 기설과 함께 산부인과 앞 대기실에 앉을 때마다 쏟아지던 시선을 떠올렸다.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노골적인 눈짓이 있었다. 자주 내원하다 보니 안면이 익은 다른 임산부로부터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하는 칭찬까지 들어 보았다. 기설을 알파이자 남편으로, 문진주를 오메가이자 임산부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말랐다고? 예쁘다고? 저 몸이랑 얼굴이…?’

몇 번이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넨 뒤에야 천마는 기설을 놓아주었다. 그제야 문진주는 맡은 일을 시행할 수 있었다.

기설과 함께 병원으로 향하면서 문진주는 생수로 마른 목을 축였다. 휴대폰을 꺼내 이미 읽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등 그는 다소 산만했다.

평소와 달리 운전기사는 병원의 정문이 아닌, 지하 주차장까지 차를 댈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고는 인적 없는 주차장 한복판에 대뜸 정차했다. 문진주가 먼저 하차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기설 또한 그를 따라 내려섰다.

그리고 대뜸, 문진주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갑자기 다가온 기사가 내민 손수건으로 안면을 가로막힌 것이었다. 곧바로 숨을 참으려 노력했지만 독한 약물은 콧구멍 안으로 이미 스민 뒤였다. 문진주의 두 다리가 인형처럼 힘없이 허물어졌다. 기사의 두 손이 그의 몸을 뒤에서 받쳐 들었다.

당황한 기설은 그들을 향해 다가서려 했다. 그러나 한 발짝 다리를 뻗자마자, 등 뒤로 뭉툭한 무엇이 와 닿는 감각을 느꼈다.

“움직이지 마.”

시큼한 소금 냄새를 풍기며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낯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 서넛이 삽시간에 다가와 기설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나같이 안색은 시커멓고 한철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었다.

기설은 긴장으로 어깨를 굳혔다. 눈알만을 움직여 그는 제 옆구리에 붙은 물건을 확인했다. 시커멓고 둥글게 생긴, 전기 충격기였다.

“아, 씨발. 칼인 줄 알았잖아.”

기설이 소리쳤다. 안도와 짜증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괴한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기설의 팔꿈치가 그의 눈알을 강타했다.

‘악’ 소리를 내지르며 괴한이 뒷걸음질 쳤다.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쥔 채 그는 고통스러운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기설은 그런 사내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갈겼다. 망설임도 자비도 없이 내지른 주먹은 장정을 나동그라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내의 두개골에서 주먹이 아니라 돌덩이로 내리찍은 듯한 소리가 났다.

기설은 그의 손을 거칠게 걷어찼다. 헐렁해진 손아귀에서 전기 충격기가 튕겨 나가듯 빠져 나왔다. 시커먼 도구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 위로 미끄러졌다.

“누구야? 당신.”

기설은 저를 협박하려 한 괴한의 얼굴을 살폈다. 너저분하게 수염이 난 사내는 대답 대신 우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긴 하였으나, 기설은 그와 제가 일면식도 없는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기설의 시선은 곧장 괴한의 동료에게로 향했다. 당황한 듯 머뭇거리는 사내들의 면면을, 그는 진지하게 훑어보았다. 혹시 제 손에 죽은 곽창이를 위해 달려온, 그의 친구들은 아닐까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복서에게는 일대일 경기가 기본이었다. 선수들의 세계는 링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같은 규칙대로 굴러갔다. 곽창이는 링 위에서 기설에게 패배했다. 그를 대신해 보복을 해 주겠답시고, 링 밖에서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은 없었다.

“뭐… 뭐 해!”

개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시간 없어! 빨리 제압하고 끌고 가자!”

질색하는 얼굴로 그는 제 옆에 선 이의 팔뚝을 퍽 쳤다. 그러자 얼어붙은 채 기설을 쳐다보던 남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저에게로 달려오는 세 남자를 쳐다보면서 기설은 의아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데에 왜 기합이 필요한가 싶어서였다.

머리가 둔한 물음표를 띄울 때, 몸은 재빨리 움직였다. 기설은 가장 소극적으로 달려오는 남자에게로 돌진했다. 무릎을 굽히면서 상체를 확 숙인 다음,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반동을 이용해 주먹을 날렸다. 턱을 세게 강타당한 남자는 혀를 깨물며 나자빠졌다.

“어윽…!”

머리 전체가 강하게 흔들리면 아무리 튼튼한 선수라도 일순 뻗어 버리게 되어 있었다. 기설의 어퍼컷은 늘 효과적이었다. 직격으로 먹히기만 하면 백이면 백, 심판이 카운트를 마칠 때까지 상대 선수는 일어나지 못했다.

곧장 몸을 틀며, 기설이 두 팔을 올렸다. 팔뚝을 가드 삼아 구차하게 기습하는 남자의 주먹질을 막아 낸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기설의 양 볼에 딴딴하니 팬 선이 생겼다.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솟고 두 눈은 희번덕거렸다.

남자의 코를 향해 기설은 잽을 갈겼다. ‘뻑’ 소리를 내며 사내가 크게 휘청거렸고, 재빠른 주먹은 두 번, 세 번, 네 번째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다섯 번째 뻗은 주먹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콧대를 얻어터진 남자는 이미 쓰러진 뒤였다. 그는 좀비처럼 신음하며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콧잔등엔 가로로 찢어진 선이 생겼고, 순식간에 터져 나온 피가 하관을 더럽혔다.

두 발로 서 있는 상대는 이제 하나뿐이었다. 부끄럽게도 그는 제 친구들이 얻어맞는 동안 기설에게서 도망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발 뒤에 의식을 잃은 문진주가 보였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작은 남자에게선 더 이상 품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설은 팽 소리가 나도록 세게 콧김을 내쉬었다. 얼굴을 맞은 적 없으니 코피가 날 리도 만무했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기설은 상황을 파악했다. 제 발치에 널브러진 사내들이, 저보다는 천마 형님과 관련된 이들이라는 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천마 형님을 목표로, 기설 자신을 미끼로 쓰려는 모양이었다. 굳이 병원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급습을 한 것을 보면 그랬다.

‘형은 산부인과까지 같이 온 적이 없으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기설은 하얗게 질린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무어라 변명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듯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이번에 기설은 주먹을 쓰지 않았다. 대신에 발을 뻗어, 남자의 무릎을 정면으로 걷어찼다. 그러자 닳아빠진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순간적으로 뒤로 꺾였다.

“악!”

기설은 불필요한 폭력은 쓰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그저, 사내의 뒤에 널브러진 문진주를 챙겨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설이 발을 뻗으려는 순간, ‘파직’ 소리를 내며 그의 등허리에서 빛이 번쩍 튀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기설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 점퍼가 움푹 눌리도록, 옆구리에 대고 쑤시듯이 맞붙은 전기 충격기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쥔 남자의 얼굴에 걸린 비열한 미소도, 혈관이 터지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알도 보였다.

“…….”

킬킬거리며 웃던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굳더니, 종국에는 무표정해졌다. 기설 역시 얼굴 근육을 돌처럼 굳힌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전기 충격이 오르기는커녕, 기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 아니, 씨발 이게, 이게 왜….”

당황한 사내가 중얼중얼 욕설했다. 그는 기설의 옆구리에서 전기 충격기를 떼어 내더니, 재차 팔을 뻗으며 기설의 살을 지지려 들었다. 그러나 둔해 빠진 중년 남자의 몸부림은 스물두 살의 복서에겐 너무 느렸다. 기설은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쥐었고, 그대로 오른쪽 다리를 올려 차며 남자의 안면을 무릎으로 가격했다.

남자는 단숨에 두 팔을 늘어뜨렸다. 기설이 머리를 놓아주자마자 그대로 더러운 바닥에 엎어졌다.

기설은 그의 손에 들린 전기 충격기를 빼앗아 챙겼다. 가장 높은 전압으로 맞추어진 도구는 뜨끈뜨끈했다. 고약한 물건을 내려다보며 기설이 이를 갈았다.

“애 떨어질 뻔했잖아.”

손에 쥔 것으로 기설은 쓰러진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단순히 복수하고픈 충동에 벌인 일이었다. 아무튼 저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고장 난 물건이겠거니 생각해 보인 행동이었다.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려던 기설의 의도와는 달리, 남자는 전기 충격기가 몸에 닿자마자 크게 경련했다. 손가락 끝까지 쭉 뻗은 채 그는 그르릉대는 신음을 냈다. 침 거품이 그의 잇새로 부글거리며 흘러나왔다. 두 눈은 까뒤집혔고, 즉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지나치게 센 위력에 기설은 크게 당황했다. 허둥지둥하며 그는 기절한 사내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전기 충격기의 버튼을 여러 차례 눌러 꺼 버렸다.

‘어…, 뭐지?’

기설은 제 상체를 감싼 항공 점퍼를 살폈다. 형님께서 골라 주고 친히 입혀 주기까지 한 점퍼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전기를 쐬었던 옆구리의 천이 희미하게 해졌을 뿐이었다. 조그맣게 뚫린 겉감의 구멍 안으로 새카만 안감이 드러나 보였다. 이마를 찡그리며 기설은 검은 안감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문득 그의 고개가 홱 들렸다. 낯선 인기척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보인 행동이었다.

“동생. 우리 서로 힘 빼지 마십시다.”

아니나 다를까, 안색이 시뻘건 중년의 남자 하나가 눈앞에 서 있었다. 무릎뼈가 부러진 채 쓰러진 사내가 ‘팀장님’ 하며 그를 불렀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기설을 그다지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식칼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기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서너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저를 향해 뻗은 칼날에 시선은 고정되어 버렸고 두 발은 땅에 붙은 듯했다.

“우린 한 대표 새끼 밴 놈, 그저 조용히 데려가기만 하면 그만이거든? 따지자면 우리도 한때는, 씨발, 한 대표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고.”

“…….”

팀장이라는 남자가 구시렁구시렁 뱉은 말이 기설의 한 귀로 들어갔다가, 한 귀로 빠져 나왔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기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문득, ‘팀장’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고는 픽 웃음 지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시뻘건 낯짝 위에 스민 것은 비릿한 조소였다.

“그러게 왜 초를 쳐, 치길.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쫄보 새끼가….”

보란 듯, 그는 식칼을 쥔 팔을 이리저리 뻗으며 기설을 찌르는 척 시늉했다. 과장된 동작과 몇 마디 협박만으로도 기설은 복부에서 밀려드는 통증을 느꼈다. 뱃가죽을 뚫고 파고들던 날카로운 감각을 몸이 기억했다. 불쏘시개를 집어넣은 듯 펄펄 끓던 고통과 속옷까지 흠뻑 적시도록 쏟아지던 피의 온도, 손발에 저릿하게 쥐가 오르고 눈앞은 희다가도 붉게 점멸하던 것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다 생생했다.

땀을 흘리며 얼어붙은 기설을 향해 팀장은 한참 킬킬거리다가, 침을 퉤 뱉었다. 그가 뱉은 침방울이 기설의 운동화 앞코에 묻었다.

제 옆의 부하에게 눈짓하며, 팀장이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 끌고 가.”

기설이 움찔하는 순간, 사내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코에서는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신음하면서도 그들은 재빨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문진주를 들쳐 메기도 속전속결이었다. 기절한 오메가가 부랴부랴 봉고차에 실렸고, 부상을 입은 사내들 역시 작은 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뒤이어 팀장까지 식칼을 휘휘 흔들며 봉고차의 조수석에 올랐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괴한들은 그대로 주차장을 떠났다.

“…….”

주차장 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 기설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날개뼈를 적신 식은땀은 순식간에 휘발됐고, 황망한 감정이 그 빈 자리를 채웠다.

‘…뭐야?’

남은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를 뜯어 봐도 임산부로는 보이질 않는, 건장한 베타뿐이었다.

부지불식중에 마무리된 납치 현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넓고 허전한 주차장 한가운데에서 기설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멍을 때리기도 그러나 잠시였다. 기설의 시야에 남색 세단이 들어왔다. 문진주와 함께 타고 왔던 익숙한 벤틀리였다. 기설이 차 앞으로 빠르게 다가서자, 닫혀 있던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젊은 운전사였다.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기설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여태껏 사태를 지켜만 보던 사내의 셔츠 깃이 턱 위까지 올라붙고 발뒤꿈치가 살짝 들렸다. 내던져 죽이기라도 하려는 양 거센 손길에 기사가 당황한 신음성을 냈다.

“자, 잠시만요! 우선 차에 타시죠.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달려드는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애써 뱉은 말은 거의 애원이었다. 그래도 기설의 사나운 눈총은 가라앉지 않았다.

“됐고. 차 키 내놔.”

다만 윽박지르듯 말했다.

“…네?”

“차 키 내놓으라고!”

“아니, 저…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오해를 하신 거예요. 대화로 충분히 해결될 일입니다!”

기설의 해결법은 그러나 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해결법은 차라리, 젊은 기사의 콧등에 대고 거칠게 박치기를 갈기는 편에 가까웠다. 강한 타격음과 함께 단단한 머리가 콧대에 처박히자, 기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오만상을 찡그린 채 끅끅거리며, 그는 허둥지둥 말했다.

“자, 잠깐…. 흐억….”

“어딨어? 열쇠.”

“…여, 열쇠, 차에 꽂혀 있습니다….”

기설은 그의 멱살을 팽개쳤다. 그러고는 벤틀리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려 있는 덕에 곧바로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차체를 매끄럽게 후진시킨 다음, 통로를 향해 전진하기까지 지체 따윈 없었다.

힐긋 백미러를 살피자 허둥지둥 저를 쫓아 달려오는 기사가 보였다. 표정은 절박했고 입술로는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설은 그를 무시했다.

지상으로 차를 빼낸 뒤, 그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주차장과 이어진 이차선 도로는 일방향이었다. 고개를 쭉 뻗고 살피자 저 멀리, 붉은 신호등에 걸려 대기 중인 백색 봉고차가 보였다. 차체 뒤편에 ‘울시 페인트’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회갈색 때가 낀 테두리가 구질구질한, 낡은 필름 시트지로 붙인 글씨였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신호가 청색으로 바뀌고 봉고차가 출발했다. 기설은 안절부절못하며 핸들을 잡았다. 봉고차와 벤틀리 사이에 낀 차량이 많은 탓에, 신호가 다시 바뀔 때까지 제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신호등이 주홍빛으로 변했다. 기설의 바로 앞 차량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를 갈며 기설은 클랙슨을 아주 길게 눌렀다. 출발하라는 윽박을 담아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꼼짝도 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놀란 차주들이 거북이처럼 멈춰 선 사이, 기설은 옆 차선을 타고 빠르게 질주했다.

사거리를 가로질러 돌파하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걸린 신호등은 붉은빛이었다. 기설은 거친 운전 솜씨로 별 탈 없이 본래의 차선으로 돌아왔다. 저 멀리, 우회전하는 봉고차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벤틀리의 속도는 서서히 느려졌다. 차량 다섯 대 정도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기설이었다. 저치들에게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봤자 좋을 게 하등 없었다. 마음 같아선 냅다 들이받고만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됐다. 괴한들 사이에 문진주 사장이 실려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기설을 대신해서, 오해를 받아 납치당한 문진주였다. 기설은 이 일에 자신의 책임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진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새침한 듯 또 까칠한 듯 굴긴 했지만, 기설은 그를 ‘착한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근래 문진주는 기설이 산부인과에 내원하는 날마다 함께했다. 매번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출발했으나, 귀가할 때엔 달랐다. 그는 초음파 화면에 잡혔던 태아의 모습이나 건강 상태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배가 당기진 않냐, 먹고 싶은 건 없냐, 태몽은 꿨냐… 기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우후죽순 쏟아 내다가도 ‘아차’ 하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고는 했다.

‘어차피 대표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텐데, 뭐….’

그렇게 혼잣말로 질문 세례를 그만두는가 싶다가도, 그는 금세 눈을 반짝였다.

‘근데 태명은? 태명은 지었어요? 아니 왜, 부모들 보면 아기 배 속에 있을 때 부르는 이름 따로 있잖아요. 내 태명은 ‘복이’였는데.’

그 질문에 기설은 ‘없습니다’하고 짧게 대꾸했다. 아기에게 태명을 지어 주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스물두 살의 베타를 향해 문진주는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다음 주까지 지어다가 꼭 저에게 알려 달라며 재차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가 말한 ‘다음 주’가 바로 오늘이었다.

이런 날 문진주가 사고라도 당한다면, 그건 기설에게도 나쁜 일이었다. 기껏 지어낸 태명도 못 알려 주었는데, 저 때문에 봉변을 당하게 둘 순 없었다.

어느덧 봉고차는 신산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설을 실은 벤틀리 역시 톨게이트의 하이패스 통로를 지났다. 그때, 낯선 노랫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설은 놀라 핸들을 세게 잡았다. 소리의 근원지는 아주 가까웠다. 운전대 바로 옆에 곱게 자리한,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차량 내부를 살필 겨를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운전사가 두고 내린 모양이었다.

기설은 타인에게 걸려 온 전화를 선뜻 받았다.

SS 한천마 대표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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