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설은 그런 일을 자주 해 봤다. 어딘가에 풀썩 주저앉거나 벌러덩 드러누워서는, 뻑뻑한 눈을 꽉 감아 버림으로써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사건을 외면하는 일. 천장의 곰팡이도 제 몸의 곪은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도 발톱이 깨진 엄지발가락에 남은 붉은 흉터 줄도, 쳐다보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모르는 척 방치하는 일. 기설은 그런 일을 잘했다.
더러운 뒷골목을 누빌 적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살아온 기설이었다. 숨어 들어온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붉은 줄을 가리는 것쯤은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나….”
그의 엄지 끝마디가 백색 시약 선 위에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절반 정도 드러난 시약 선이 벌써 한 줄이었다.
“…….”
손톱으로 남은 절반 면을 쪼개듯 짓누른 채 기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 손가락 아래에 숨은, 두 번째 붉은 줄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남자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이 오늘 전후로 절단될 게 분명했다.
기설은 그런 불안을 싫어한다. 자신에게 불의가 닥쳐오더라도 그것과 싸우지 않고, 차라리 잊고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기설도 알았다. 제 배 속에 발생한 문제는 외면하고 잊고 지낸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잊히지 않음을. 언젠가는 바깥으로 그 존재감이 드러날 테고, 그때가 오면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늦어 버릴 것임을. 그러니 어떻게든, 저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걸.
“후우….”
두 눈을 질끈 감고 기설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다란 두 다리가 화장실 바닥 위로 길게 뻗었다. 그의 손안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뿌드득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
수술 후 정기 검진일이었다. 늑골은 잘 붙었는지, 수술 부위는 잘 아물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들른 병원이었다. 기설의 손에는 천마 형님께서 ‘밥까지 사 먹어’라며 쥐여 준 카드가 들려 있었고, 대기인 좌석에는 새로 부임한 리무진 기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기존의 운전수, 장덕배에 비해 젊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말수가 아주 적고 기설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기설은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종합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대단히 어색하고 심심했다. 지난번 장 기사의 경우 기설이 혼자 차에 있을 때면 격벽 창문을 내리고 박하사탕을 던져 준다거나 심심하면 들으라는 양 라디오 소리를 키워 놓곤 했기에 더욱 그랬다. 오지랖이 넓은 탓에 천마 형님에게 자주 혼이 났지만 말이었다.
그에 비하면 새로운 기사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시던 대표님의 명령으로, 아무런 직급이나 역할도 갖고 있지 않은 기설의 일일 보호자가 된 것이 못내 귀찮은 눈치였다. 기설이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검사실로 들어가건 말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휴대폰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덕분에, 기설은 충격적인 검사 결과를 저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수 있었다.
“임신입니다.”
사각테 안경을 쓴 의사가 말했다. 진단을 받자마자 기설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혹시 진료실에 저 외의 다른 환자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진료실 안에 환자는 기설뿐이었고, 다소 심각한 얼굴로 제 턱을 어루만지며 의사는 모니터에 띄운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4주에서 6주 정도 된 것 같네요. 환자분 몸 상태가 워낙 특이해서…, 어디 보자. 두 달 전에 큰 수술을 한 번 하셨고…, 게다가.”
“저 베타인데요.”
“네, 게다가 베타이시고요.”
기설의 말을 따라 읊으며 의사는 주름진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벗었다. 그녀가 작은 손수건을 꺼내 안경알에 묻은 먼지를 닦아 내는 동안, 기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의사가 ‘큼큼’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기설의 침묵을 놀란 바람에 어쩔 줄 모르는 이의 그것으로 착각한 듯했다.
“혹시 그런 뉴스 들어 보셨어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너무 오래 쬐는 등 충격을 받으면 베타도 임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요. 그런데 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제가 보기에 기설 씨 상태는… 후천적인 기형이라고 할까요.”
‘후천적인 기형’. 그렇게 소견을 밝히는 의사의 목소리는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차갑지도 않았다. 덤덤한 얼굴로 차트 하단에 기재된 형질 검사 결과, ‘베타’ 두 글자를 재차 살필 뿐이었다.
이내 의사는 테이블 위의 모니터 화면을 기설에게로 돌려 보여 주었다. 기설은 화면 양쪽을 나란히 채운 시커먼 사진을 멍하니 쳐다봤다. 하얀 부스러기와 얼룩들이 찍힌 검은 사진은 우주 사진 같기도 했고 바싹 태워 먹은 프라이팬 바닥을 근접 촬영한 것 같기도 했다.
“오른쪽이 정상적인 오메가 임신부의 초음파, 왼쪽이 기설 씨 초음파 상탭니다.”
의사가 설명했다.
‘이게 내 배라고?’
기설은 눈을 좁게 뜨고서 재차 사진을 살폈다. 의사가 연이어 무어라 설명하긴 했지만, 그 말들은 의학적인 지식이라곤 일절 없는 기설의 귀에 들어왔다가, 퉁겨 나갈 뿐 깊이 남진 못했다.
“딱 보면 태아 크기도 너무 작고, 뭣보다 아기집 구조가 휘어 있는 거 보이시지요? 출산을 하시려면 제왕 절개밖에 방법이 없고, 중절을 하셔도 수술에 들어가야 됩니다.”
“…중절이요?”
기설이 물었다. 중절의 의미를 몰라서 되물은 소리였다.
그에 의사는 작게 침음하고는 눈앞의 환자를 바라봤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남자였고 무엇보다 베타였다. 알파나 오메가 사회에서는 외모를 놓고 상대방의 형질이나 성향을 분간하거나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지만, 베타의 세계에선 그 판가름에 꽤 신빙성이 있었다. 기설처럼 잘생기고 키 큰 남성은 보호자로나 이따금 볼 뿐이지, 임신부로서 마주 앉는 경우가 거의 없는 식이었다.
한눈에 봐도 기설의 임신은 사고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의사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이곳 신산시에는 극우성 알파가 SS 그룹의 대표 이사 한천마, 한 사람뿐이란 점이었다. 이 젊은 남자의 육신에 후천적 기형이 생길 정도로 페로몬을 퍼붓고, 0.3%에도 못 미치는 확률로 착상을 시킨 알파가 한천마라면, 그때는 문제가 생기지 싶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천마의 페로몬에 일방 각인한 오메가들이 자주 내원했었다. 개중 몇몇은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몇몇은 입원 치료까지 거들어야 했다. 극우성 알파와 어떻게 엮이게 되었느냐고 질문할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엇비슷했다. 그와 러트 시기를 함께 보낼 섹스 파트너 계약을 맺었고, 일방 각인한 것을 알자마자 버려졌단 말이었다.
그런 한천마와의 ‘사고’로 인해 임신을 했다면, 어찌 됐건 결론은 중절 수술이지 싶었다. 제 발로 걸어와 아이를 떼거나, 한천마와 그의 조직원들 손에 잡혀 피를 보거나….
“기설 씨, 아직 많이 어리시죠. 스물두 살이잖아요?”
의사로서의 양심이 있어, 그녀는 후자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막고 싶었다. 그러잖아도 복부에 이상할 정도로 많은 자상 흉터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가 깊은 상처를 입고 피 쏟으며 응급실에 실려 오는 날을 상상하자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장에 태아에게 책임 의식, 뭐 그런 걸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환자분 배 속 태아 상태는 현재로서는 9그램짜리 조직에 불과해요.”
“아니, 저기… 근데요. 그럼 저기… 제 배 안에서 아기가 살아 있고 자라고 있다. 뭐 그런 소린가요?”
“…….”
기설의 질문에 의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글렀구나.’
조용히 중절 수술을 하고 빨리 회복하도록 돕고자 했던 마음이 곧장 꺾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설은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화분에 심은 토마토 씨앗이 첫 싹을 틔우는 장면을 본 초등학생 같았다.
“제 배 안에 지금 있다고요? 그럼, 그, 열 달…? 아니다. 아홉 달 기다리면 커져서 꺼낸다는 거죠? 원래 임신이 그런 건가….”
횡설수설하며 기설은 제 배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의 복부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납작하고 날씬했다. 기설은 아랫배에 힘을 주어 복근을 두드러지게 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배 속에 있는 태아라는 것이 눌려서 숨 막힐까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기설은 침묵했다. 의사도 그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
무얼 생각하는 듯,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한참 고민하던 끝에 기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손가락은 생겼어요?”
들뜬 산모가 건넬 법한 질문이었다. 의사는 차트를 덮었다.
“진료 예약을 잡아 드릴게요. 가시는 길에 간호사한테 주의 사항 쓰인 책자 받아 가시고요. 음주, 흡연, 지나친 운동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기설은 멍한 상태로 진료를 마쳤다. 조금 전 뚜벅뚜벅 들어섰던 복도 위를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비교적 느릿느릿했다. 진료실 문 옆에 붙은 작은 팻말도 그제야 확인했다.
산부인과1, 전문의 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