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싱 카트가 매끄러운 복도를 소리 없이 가로질렀다. 피로감에 절어 버린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걷던 간호사의 두 발이 병실 앞에서 멈췄다.
병원 내에서 가장 넓고 가장 비싼 특실 안에는 스물두 살의 젊은 환자가 잠들어 있었다. 복부에 자상을 입고 실려 온 그 환자의 병증은 신산대 병원을 거쳐 간 여느 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타 지역에 비해 내장 자상 수술 횟수가 압도적으로 높은 신산시였다. 개중에서도 신산대 병원은 특히 내장 자상 및 골절 전문 병원이래도 좋을 만큼 수술 성공률이 높았다. 업계 교수들이며 질투 많은 의사들에게서 ‘순대 공장’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오늘날, 열흘째 입원 중인 환자는 그 경우가 여느 순대… 아니, 조폭들관 달랐다. 병원에서 일하며 해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잘생긴 얼굴에 준수한 몸매,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환자에 대한 미담이 벌써 병원 내에 파다했다. 특히나 응급실 나이트를 서다 특실 담당으로 긴급 호출된 베타 간호사에게 그 환자는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과 진배없었다.
지난날의 응급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간호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에겐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베타로 태어난 게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응급실 구석 자리에서 발정 난 알파와 오메가 환자가 침실 커튼을 쳐 놓고 섹스를 하는 줄, 그 페로몬 냄새가 사방 천지에 진동하는 줄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었다. 그 바람에 수간호사에게 혼쭐이 나고 며칠 내내 밤낮없이 근무며 불필요한 숙제를 떠안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다가, 특실 환자의 보호자가 베타 간호사를 원한다는 이유로 일터를 옮기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물론 이곳에서도 싫은 소리 몇 마디씩은 들어야만 했다. ‘베타가 다 저 환자처럼 생겼으면 결혼 시장에서 인기였을 거’라거나, ‘같은 베타여도 환자랑 간호사가 어쩜 그렇게 다르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응급실 나이트 업무에 시달려 온 간호사에겐 그런 말조차 달콤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기설.’
병실 문 옆에 걸린 이름 두 글자를 확인한 간호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조용히 병실 문을 밀어 열고 그는 침대에 누운 환자 가까이에 드레싱 카트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이상을 알아차렸다. 달아 둔 지 반나절이 지났으니 전부 동났어야 정상인 링거 팩 중 하나가, 유독 묵직하고 뚱뚱한 것이었다.
당황한 간호사는 얼른 기설의 안색을 확인했다. 제대로 주입되지 않은 링거액은 하필이면 진통제였고, 기설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식식거리고 있었다. 찌푸린 인상이며 거친 숨결, 혈색 도는 안색을 보자니 다행히 쇼크가 온 것은 아니고 끙끙 앓으며 잠든 상태였다.
‘이게 왜… 잠겨 있지?’
기설만큼이나 미간을 찌푸리며 간호사는 안전 주입 장치를 살폈다. 링거 튜브의 단면적을 조절하는 용도의 주입 장치는 끝까지 꽉 밀어 닫힌 상태였다. 이래서야 환자의 몸에 주삿바늘만 꽂았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주입되는 모르핀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였다.
모르핀이 서서히 들어가게끔 천천히 튜브를 열어 주면서 그는 나머지 튜브를 확인했다. 다른 튜브의 장치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약물을 내보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모르핀만을 차단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
간호사가 ‘누군가’의 얼굴을 추측할 때 즈음, 그의 손에서 튜브가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간호사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높이 들었다. 평균 남성 키인 그로서는 고개를 젖히다시피 들어야만 시선을 마주칠 수 있는 거대한 보호자가,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모르고…!”
당황한 기색을 못 감추며 간호사가 묵례했다. 그러나 기척을 도대체 어떻게 감춘 건지 알 수 없게 짙은 존재감을 지닌 보호자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크고 기다란 손으로 모르핀 주입 장치를 도로 틀어막을 따름이었다.
간호사가 소리 내어 말했다.
“환자분이 많이 아파하시는데요.”
그러고는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특실에서는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절대로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 됐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의 메아리가 간호사의 입술을 바늘처럼 찌르고 있었다.
“…….”
“…….”
침묵으로 인해 병실 안의 공기마저 무거워졌다. 두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간호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천마가 뿜어내는 기운은 여느 알파가 주는 페로몬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보다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기질이 그의 눈알 안에서 넘실대는 듯했다.
베타인 간호사가 분위기를 느낄 정도라면 아마도 지금쯤, 특실 내부에는 그의 페로몬이 들끓고 있을 터였다. 잠든 환자의 몸에서도 꼭 그만큼 짙은 체향이 뱄을 것이다. 그게 기설에게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둔한 베타 간호사가 필요한 이유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움츠러든, 죄 없는 의료인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은 다름 아닌 강명경이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콧잔등을 아주 살짝 찡그리며, 그는 얼어붙은 간호사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수고하셨습니다.”
간호사는 그의 말에 담긴 은근한 강요를 알아차렸다. 눈치껏 빨리 꺼지라는 인사가 그보다 더 반가울 순 없었다. 냉큼 드레싱 카트를 끌고 퇴장한 간호사가 문을 꼭 닫고, 기설의 거친 숨소리가 재차 병실을 채울 때까지도 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따라 명경은 침대 위의 기설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이마와 목이 번들번들해 보일 정도로 땀에 전 채 기설은 수술 후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숨소리는 쌕쌕 성난 뱀 소리처럼 빠져나왔고 손톱 색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통증으로 인해 쇼크가 올 것이었다.
“대표님.”
명경이 뒷짐 진 채 입을 열었다. 상황을 환기해 보려 낸 목소리에, 천마가 왼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가 있어.”
명경은 그의 말에 담긴 직접적인 강요를 못 이겨 물러섰다. 충직한 부하가 사라진 병실 안에는 다시 두 남자만이 남았다. 의료용 모르핀은커녕 곽 사장이 만들어 내던 지독한 마약에도 취하지 않는 극우성 알파 한천마와, 누구보다 약의 힘이 절실한 베타 기설만이 남았다.
잠시간 꺼지는 듯하던 기설의 숨소리가 재차 거칠어졌다. 식은땀을 어찌나 뻘뻘 흘렸는지, 목덜미를 받친 베갯잇이 거의 회색으로 보이도록 젖어 있었다. 감긴 눈꺼풀 위로 이리저리 진동하는 눈동자의 윤곽이 비쳤다.
그래도 한천마는 모르핀 링거의 주입 장치를 열어 주지 않았다. 고통에 젖어 시근덕거리는 기설의 숨소리를 그는 그저 듣기만 했다.
큰 수술을 거치고 의식을 차린 뒤에도 기설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약 냄새, 피 냄새, 특유의 중환자 냄새를 풍기는 그의 온몸은 무겁기만 했다. 특히나 눈꺼풀의 무게는 코끼리만큼 나가는 것 같았다. 팔뚝에 영양제를 매단 채 기설은 오후 8시쯤 되면 수마에 잠겼고, 낮에도 비몽사몽간에 수술 부위를 확인하는 의사를 만나고 멍하니 미음을 마셨다. 이따금은 간호사가 제 혈압을 재는데도 두 눈을 게슴츠레 끔벅거리다 잠들고는 했다. 모르핀이 주는 영향이 컸다.
마약성 진통제의 힘에 기대어 고통 없이, 깊은 잠에 빠진 기설을 지켜보기를, 천마는 이틀도 채 견디지 못했다. 그는 기설의 팔뚝에 꽂힌 링거 주입 장치를 막아 놓는 방식으로 기설의 단잠을 방해했다.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묻는 명경에게는 이렇게 답했다.
‘아가가 잠만 자니까 심심해.’
…심심하다고. 그게 깊은 내장 자상만 다섯에 얕은 상흔을 둘 얻고, 갈비뼈마저 한 대 부러진 기설에게 상처가 주는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이유였다.
기설은 자신이 아픈 이유를 다른 데에서 찾았다. 그는 제 팔에 달린 어느 링거액이 하루 얼마나 주입되고 있는지 관찰해 낼 정도로 사리 분별력이 좋지 못했다. 대신에 두 눈을 힘겹게 뜨고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형님, 저 가위눌렸나 봐요. 저기, 귀신 있어요….’
이틀 전에는 그런 말을 하면서 병실 창밖이며 구석 자리를 손가락질해 댔다.
‘씨…. 죽일 만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어제는 온종일 누구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일을 두고 자기변호를 하기 바빴다.
“형님, 우리 경이….”
그리고 오늘은, 정신이 좀 돌아오는지 제 고양이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경이 밥 줬어요?”
저를 올려다보는 멍한 눈동자를, 천마는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힘겨운 통증이 차오른 대신 이성이 돌아온 기설의 눈빛은 순순했다. 간밤, 귀신인지 유령인지 그 자신의 죄책감인지 모를 것에 대고 욕지거리를 지껄이던 사나운 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에 한참을 헉헉거리며 끙끙 앓는 환자만이 남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천마는 후자를 더 좋아했다. 지켜보기 나은 쪽도 차라리 후자의 기설이었다. 당사자인 기설의 입장에서야 마약성 진통제의 약 기운에 취해 잠꼬대를 해 대는 게 차라리 편안할 테지만, 천마에겐 기설의 고통보다 제 기분이 먼저였다.
미간을 찡그린 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기설은 아프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뱉지 않았다. 자신이 아픈 이유야 칼에 맞았기 때문인 줄로 아는 눈치였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으니 고통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저 얌전한 게 분명했다. 제가 지켜 낸 형님께서 저를 편안하게 해 주는 대신 아프게끔 방조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다만 기설은,
“경이.”
횡설수설하며 고양이를 걱정했다.
“경이 밥 줘야 하는데요…. 오늘 며칠이에요? 경이는 제가 주는 밥만 먹는데…. 쫄쫄 굶고 있으면 어떡하죠….”
안절부절못하는 기설을 내려다보며 천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 주인이 주는 것이 아니면 밥도 먹지 않는다니, 그렇게 충심 깊은 고양이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알아서 잘 먹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서 천마는 쉽게 대답했다. ‘아마도’를 전제로 한 말에 기설은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천마의 빌딩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경은 맛난 것만 먹었고 포근한 방에서 안락하게 지내 왔다. 특히나 이틀에 한 번 출근하는 헬퍼 아주머니가 경을 알뜰살뜰 챙겨 주었다.
2년 전 황씨 성을 가진 헬퍼가 이창건의 유혹에 넘어가 퇴직한 이후, 전문 업체에서는 그 자리를 메꿀 실력 있는 헬퍼를 여럿 보내왔다. 그러나 개중 누구도 천마의 눈에 차지 않고 해고를 당해 문제였다. 짧으면 사흘, 길면 두 달 간격으로 천마는 헬퍼를 갈아 치웠다. 그들이 조리해 두는 반찬이며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이유에서였다.
천마가 까탈스러운 입맛을 가진 남자라는 게 기설에겐 여러모로 축복이었다. 기설의 혓바닥이 말하기로는 한천마가 젓가락도 대지 않는 반찬이며 국, 요리들이 모두…
‘와…, 존나 맛있어요.’
…존나 맛있었으므로.
‘아줌마. 혹시 식당 했었어요? 이거 가게 내서 팔아도 되겠다.’
기설은 모르겠지만 그의 호들갑과 요란한 먹성 덕분에 오늘 한천마를 위해 일하는 헬퍼는 해고 위기에서 벌써 여러 차례 구원받았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헬퍼는 기설의 고양이를 알뜰살뜰 돌봐 주었다. 동네 마트에서 판매하는 통조림 음식을 먹이는 대신 싱싱한 연어와 닭가슴살, 기름기 없이 삶은 소고기며 염분을 뺀 북엇국을 요리해서 고양이 밥그릇에 담아 주고는 했다. 경의 방으로 밥그릇을 가져가는 길에 기설은 그 요리들을 몇 점씩 집어 먹곤 했는데, 제가 먹기에도 아주 맛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천마의 말마따나, 기설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그의 고양이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았다.
“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설이 대답했다. 그리고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응석 부리기 좋아하는 늙은 고양이 생각에서 벗어나고 나니, 제 몸을 짓누르는 통증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근덕거리는 기설을 쳐다볼 적에 천마의 손에는 주입 장치가 들려 있었다. 모르핀 주입을 차단시킨 튜브를 여는 버튼 위에 엄지손가락이 얹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 간, 기설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헐떡였고 천마는 제 손바닥 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설아.”
어느 순간부터 기설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파서 듣는 귀마저 얼얼해진 모양이었다.
“아가?”
호칭을 바꾸어 가며 천마는 기설을 달랬다. 기설의 눈이 빠르게 두어 번 깜빡거렸다.
“네….”
그렇게 의미 없이, 천마는 기설의 정신을 환기하고 기설은 통증에 시달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지독하고 이상한 기류가 두 남자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불분명한 시간 끝에, 먼저 몸을 움직인 건 한천마였다. 그는 쥐고 있던 주입 장치를 허공에 놓고는 기설의 환자복 바지 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취향대로 깔끔하게 제모된 사타구니는 여전히 매끈했다. 털 오라기 하나 없이 말끔해진 피부 위로 손날이 스치는 감각에 기설은 눈살을 움츠렸다.
“저, 더러워요.”
기설이 말했다. 순 틀린 소리였다. 식은땀에 젖긴 하였으나 그뿐, 잠든 사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물수건 여러 장으로 꼼꼼히 닦아 내린 기설의 몸뚱어리는 알뜰살뜰한 보살핌으로 인해 병원의 중환자 가운데 가장 깨끗했다.
“안 더러워.”
천마가 쉽게 대꾸했다.
그 말에 기설은 우물쭈물했다. 의식을 차린 이후, 한동안 오줌 줄을 달고 지내 온 기설이었다. 입원 기간 동안 섹스는커녕 그 비슷한 행위조차 한 적 없었다. 그래서 기설의 반항은 소극적이었다. 혹시 형님께서 슬슬 섹스를 원하시나 생각됐다. 제 몫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그는 쓸모없는 자책을 했다. 이 상태로 그 큰 좆을 받았다가 수술 부위가 터지지는 않을까, 애먼 걱정도 했다.
생각에 잠긴 사이, 천마의 손아귀에 기설은 성기를 잡혔다.
“하아….”
거칠고 뜨끈한 손바닥이 제 것을 쓰는 감각에 기설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새 불룩 솟은 제 바지 중심을 쳐다보았다가, 입가에 미소를 단 천마의 얼굴을 살피길 연거푸 했다.
그러나 생각을 굴리고 눈동자를 움직인 것만으로도 기설은 지쳐 버렸다. 헉헉거리며 진땀을 흘리고, 늑골에서 밀려드는 통증에 눈을 콱 감았다.
“여기에 집중해.”
구김이 진 기설의 이맛살을 내려다보며, 천마가 말했다.
“아픈 곳 말고… 여기에만 집중해.”
그대로, 그는 기설의 바지를 걷어 내리고 중심부를 쓸어 주기 시작했다. 색정적인 자극에 기설의 관자놀이 위로 실지렁이 같은 핏대가 불거졌다. 구겨진 환자복 상의 밑으로 드러난 아랫배에도 핏대가 섰다. 온몸의 핏줄이 푸르고 붉은빛으로 구불거리며 중심부로 기어가는 듯했다.
‘쯧’, 천마가 가볍게 혀를 찼다. 여자이건 남자이건 가릴 것 없이 오메가와 밤을 보내 온 한천마였지만, 경험이 많을지언정 그는 늘 받는 입장이었다. 누구를 위해 딸을 쳐 주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받는 이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시각적, 감각적인 자극에 기설의 성기는 쉽게 발기했으나 그뿐, 다소 맥없었다.
“헉, 윽…. 형님, 그만….”
성감이 아닌 고통에 취해 헐떡거리는 목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좋진 못했다.
‘왠지 자존심 상하는데?’
천마는 입술을 슬며시 비틀고서 기설의 성기를 살폈다. 베타치고 큼지막한 성기는 제 주인의 얼굴만큼 잘생긴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꼴이 좀 가여웠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살갗이 건조한 탓에 쓸어 주는 손길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듯했다.
혀끝으로 제 볼 안을 훑어 낸 다음, 천마는 기설의 귀두에 대고 침을 퉤 뱉었다. 간밤 꽂혀 있던 오줌 줄이 남긴 흔적으로 평소보다 부어 있는 요도 구멍이 마치 새빨간 점처럼 보였고, 그 위를 투명한 침이 축축하게 적셨다.
그대로, 두툼한 손이 뜨거운 살덩이를 고쳐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엄지 끝마디가 귀두 중앙의 빨간 구멍 위를 누르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질척질척, 젖은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매서운 기세로 제 요도를 자극하는 손길에 기설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헛발질했다.
“헉, 아, 허억…, 윽….”
그가 이를 악물자 흘러나오던 신음이 뚝 끊겼다. 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는 스물두 살 베타의 얼굴이, 천마의 눈엔 매 맞길 무서워하는 어린애 같아 보였다.
평소 같았더라면 기설이 못 견디고 소리 지를 때까지 그의 뒷구멍에 제 좆을 처박았을 테지만, 오늘 천마는 상냥했다. 환자의 입 안 상처가 재차 벌어지지 않게끔, 천마는 왼손을 길게 뻗어 기설의 잘빠진 턱을 덥석 붙들었다. 그대로 다섯 손가락에 힘을 싣자 기설의 입술이 붕어처럼 벌어지고 몇 없는 볼살이 옴폭하게 눌렸다.
“흐으, 으….”
그대로 오른손 엄지를 쓱쓱 움직이자, 기설의 입 밖으로 재차 신음성이 샜다. 흑, 응… 앓는 신음성을 따라 발딱 선 성기도 울컥울컥 프리컴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마는 재차 그 위에 침을 뱉었다. 더운 살덩이가 갖은 체액으로 뒤덮여, 축축하고 끈적해졌다. 성기를 콱 쥐었다가 풀어 줄 때마다 맑은 액체가 천마의 손날에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절박하게 헐떡이는 소리 들으며, 천마는 엄지 끝마디로 기설의 요도 구멍을 꾹꾹 짓뭉개고, 세게 문질러 자극하길 반복했다. 작고 예민한 부위로 거듭 치미는 자극에 기설의 목덜미에 핏대가 올랐다.
“학, 학…. 으, 흐응….”
기설의 두 발이 침대 시트를 긁고, 꼬집어 댔다. 벌어져 있던 양 무릎은 뭐 마려운 아이처럼 중앙을 향해 오므라들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맥이 빠진 채 아픈 신음을 흘렸다. 수술 부위의 통증이 연거푸 성감과 부딪치며 엎치락뒤치락 크기를 바꿔 왔다. 기설의 숨결이 고통으로 일시 멈추고 발기했던 성기가 말랑해지자, 천마가 소리 내어 혀를 찼다.
거칠고 뜨거운 손길에 재차 속도가 붙었다. 쓱쓱 살 문지르는 소리, 헐떡거리는 더운 숨소리, 우는 듯한 신음성이 마구잡이로 섞였다.
“흑, 읏…, 읏…!”
두어 번 거세게, 기설은 허리 아래를 들썩들썩 쳐올렸다. 천마의 손아귀 안에서 그의 성기가 용솟음치듯 움직거렸다.
이내 기설이 두 발을 툭 뻗었다.
“…….”
그러고는 조용히 사정했다. 허벅다리 근육이 잘게 떨렸고 주륵주륵 터져 나온 정액이 천마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정한 양도 많았고 정액의 색도 새하얗게 불투명했다.
그 모양새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천마가 중얼거렸다.
“이게 내 손으로 딸을 치네.”
“…헉, …허윽….”
천마가 잡았던 턱을 놓아준 뒤에도 기설은 입이 벌어진 채 입술을 덜덜 떨었다. 마침내 거친 손아귀에서 벗어난 성기가 반쯤 선 채 꺼덕꺼덕 움직였다. 괘씸하다는 듯 천마는 기설의 귀두 끝을 중지로 툭, 툭 세게 건드렸다.
“학…, 악…!”
찌릿한 감각에 신음하면서 기설은 정액 두어 방울을 연거푸 뱉어 냈다. 이내 묵직한 살덩이가 모로 툭 누웠다.
“허억, 헉…, 죄송합니다….”
더는 붉어질 수 없을 만치 열이 오른 얼굴로, 기설은 헐떡대며 천마를 살폈다. 성감에 젖은 두 눈동자 위로 병실 전등의 빛이 반질반질 비쳤다.
죄 없이 사과하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천마는 기설의 젖은 이마를 깨끗한 왼손으로 닦아 주었다.
“형…님.”
낮게 쉰 목소리로 기설이 속삭였다.
“이제 화… 풀리셨어요?”
그 말에 천마가 실소했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그냥, 왠지….”
“넌 화나면 남의 딸을 쳐 주고 그래?”
“아, 아뇨, 아니요….”
“나한테 되게 많이 화났었나 봐?”
“…….”
질문 하나를 건넸다가 기설은 세 방을 돌려받았다. 딸을 쳐 주는 것을 넘어서 천마의 성기를 몇 번씩 핥고, 빨고, 뒤로 받아 온 입장에서 기설로선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말로써 그를 짓뭉갠 걸로도 모자라 천마는 갓 사정한 기설의 성기를 움켜쥐고 쓰다듬기까지 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밀려드는 자극에 기설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만…, 그만…. 이제 따가워요, 아파요.”
그 말에 천마는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아마도 기설이 하고픈 표현은 ‘쓰라리다’일 것이었다. 따갑다는 말로도 대충 그 뜻을 알아듣고, 천마는 가엾게 시무룩해진 베타의 성기를 손끝으로 가볍게 퉁겼다. 그의 검지가 날린 딱밤이 작은 소리를 내며 탁 부딪치자, 기설은 ‘흐으윽’ 죽는 소리를 냈다.
작은 심술 끝에 천마는 협탁 위의 티슈를 두어 장 뽑아, 기설의 성기를 닦아 주었다. 다정하게 닿는 손길에도 흠칫흠칫 눈가를 움츠리며 긴장하는 기설의 얼굴이 꽤나 귀여웠다. 실소하며 천마는 제 손바닥에 묻은 정액을 마저 닦아 냈다.
“…형님.”
그리고, 기설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진짜 화 안 나셨어요?”
‘허’ 하고 천마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실컷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같은 질문을 연거푸 뱉는 기설의 되바라진 성깔이 한천마를 웃게 했다.
“그래. 진짜 화 안 났다니까.”
내려간 환자복 바지를 도로 입혀 주려 팔 뻗으며, 천마가 말했다. 그러자 기설이 질문했다.
“그럼 저 이제… 안 아프게 약 놔 주시면 안 돼요?”
우뚝, 천마의 손이 멈췄다. 웃음 짓던 입매도 호를 그린 채 굳었다. 그대로 그는 기설을 내려다봤다. 사람 같지 않은 비범한 얼굴에 딱딱한 표정이 얹어지자, 그는 눈동자를 굴릴 줄 아는 석상 같았다.
“…….”
이제 기설이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불보를 쥔 손은 진작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치 살피는 얼굴은 미안할 정도로 불쌍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와 마주한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동자를 한참 바라본 끝에 천마가 말했다.
“그래.”
그리고 고개 숙여, 그는 말끔해진 기설의 성기 위에 입술을 붙였다. 그러고는 선홍빛 귀두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췄다.
“어….”
기설이 혼미한 듯 눈동자를 바삐 굴렸고,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야.”
한천마는 튜브를 꽉 조여 놓은 주입 장치를 서서히 풀어 주었다. 그러자 이불을 구겨 쥐던 손이 느슨해졌다. 희게 질린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기설은 제 바지를 올려 주는 천마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저도… 형님한테 화 안 났어요.”
엄지와 검지 사이로 파고드는 기설의 손가락을, 천마는 말없이 내려다봤다. 이번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건 천마였다. 그가 입술에 묻은 프리컴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것을 핥아 맛보는 사이, 기설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사정 후의 탈력감과 모르핀이 주는 멍한 느낌에 취해 기설은 삽시간에 잠들었다.
천마는 기설에게 잡힌 제 한 손을 위로 들었다가, 내렸다가, 살살 흔들었다. 그래도 동아줄 부여잡듯 힘 실은 기설의 손은 천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위로, 아래로, 무거운 팔이 덜렁덜렁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일 따름이었다.
제 손과 기설의 손을 가만히 시트 위에 내려놓고, 천마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소리 없이 일으켰다. 그러고는 잠든 기설의 얼굴 위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기설의 입술이 그의 귀에 닿기 직전으로 가까워지고, 코 밖으로 삐져나온 숨결이 귀의 피부를 간질일 정도로 가까이, 고개 숙인 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커먼 두 눈동자 안에는 기설의 말마따나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천마의 대답처럼 기설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색, 색… 기설이 숨을 쉬고 있는지, 천마는 밤새도록 귀 기울였다.
***
차라리 약 기운에 절어 있던 때가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쯧 혀를 차며, 천마는 불쾌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저는 이제 다 나았다며, 퇴원을 하겠노라 주장하는 기설을 향한 걱정은 그렇게나 노골적이었다.
‘명경아. 그 살쾡이가 밥은 잘 먹지?’
사달의 발단은 그러나 천마 본인이 뱉은 말에 있었다. 쉽게 건넨 질문에 명경이 곤혹스러운 침음을 흘린 것 또한 문제였다.
‘아주머니 말로는 사료를 먹지 않아서 캔을 따 주고 요리도 해 주었다는데…, 침대 밑에서 하악질만 해 대지 나오지도 않고 거의 먹질 않는답니다.’
천마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제 수하를 혼내야 좋을지 칭찬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바람에 기설이 냅다 뒈지게 생겼단 점이었다. 제 고양이가 벌써 열흘째 밥을 가린다는 말에, 그는 일어설 수 있다면서 몇 시간 동안 제자리에서 끙끙대며 고집을 부렸고 집으로 돌아가서 고양이 밥만 주고 다시 입원하겠다는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반나절쯤 지난 지금은,
“저 다 나았어요, 형님. 이제 별로 아프지도 않습니다!”
완전 퇴원을 하겠다고 끈덕지게 고집을 부려 댔다. 한 시간 내내 느릿느릿 움직인 끝에 겨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주제에 강짜 하나는 터무니없이 잘 부렸다.
“기설아, 지랄 마.”
천마가 탐탁잖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내장 자상이라는 게 그리 쉽게 낫는 것이 아니었다. 기설의 경우 다섯 군데가 찢어져서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도 없었고 갈비뼈가 아물기까지 4주간 허리를 굽히는 운동을 금지당한 상태였다. 한천마를 위해 일하는 어지간한 조직원이래도 지금 퇴원을 하겠다는 허세는 부리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기설은 집에 가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너 다 안 나았어, 기설아. 진통제를 달고 있으니 아파도 못 느끼는 거야.”
맷집이 좋은 줄도 알았고 멍청한 줄도 진작 알아보았었다. 맷집 좋은 놈이 멍청하기까지 하면 이 사달이 나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저 아픈 줄도 모를 정도로 무식하게 고집을 부릴 수가 있다는 게, 천마로선 놀라울 따름이었다.
“경이 보고 싶어요, 형님….”
그 맷집 좋고 멍청한 새끼가 시무룩하니 주장하는 꼴이 귀여워 보이는 제 눈깔도, 분명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하하….”
약지 끝으로 오른쪽 눈썹 결을 쓸길 두어 차례, 천마는 한숨 쉬었다. 억지로 병원 침대에 뉘어 둔다 해서 회복이 빨라진단 보장은 없었다. 기설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프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듣고 말지 ‘경이’, ‘경이’ 못생긴 고양이를 그리워하는 놈을 가둬 놓는 게 더 나쁜 일로 생각됐다.
“그래, 집에 가자.”
혀를 차며 천마가 말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설은 기쁜 듯 이가 보이도록 웃음 짓다가, 이내 귀를 붉혔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집이 꼭 내 집 같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조립식 목발을 집어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철제 목발을 나무젓가락 쪼개듯이 다루는 기설의 손을 천마는 탁 소리가 나게 쳐 놓았다. 손등이 시뻘게지도록 한 대 얻어맞고는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기설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장정 소리를 족히 듣는 기설도 천마의 품 안에서는 제 나이대의, 젊다면 젊고 어리다면 어린 청년처럼 보일 뿐이었다. 굵은 두 팔에 덥석 들린 채 기설은 휠체어 앞까지 옮겨졌다. 천마는 그를 휠체어에 앉히고, 직접 끌어 주며 병원 밖으로 나섰다. 죄지은 듯 입을 다문 채 안색이 나쁜 이는 말실수를 한 명경뿐이었다.
정문 앞에 정차된 리무진 안으로 옮겨지자마자 기설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경이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다며, 호들갑을 떨던 얼굴이 삽시간에 차분해지고 숨결은 새액 새액 소리를 내며 코와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목덜미 위로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오 분쯤 지났을 뿐인데, 진통제의 효과가 벌써 사라지고 있었다.
기설이 잠든 차량 내부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숨통이 죄는 듯한 침묵 속에 장 기사가 운전을 빨리했다. 얼른 빌딩으로 돌아가야 대표님의 기분이 나아지실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과속 방지 턱을 넘으며 차체가 얕게 덜컹거리고 기설의 잇새로 작은 신음이 빠져나온 순간, 기사의 배려는 실수가 됐다.
“덕배야. 도착하자마자 차 키 반납해라.”
심드렁하니 시선을 차창 밖에 내던진 채 천마가 말했다. 백미러에 비친 그의 태도와 내뱉은 말이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져 있어, 장덕배는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베타를 끼고 다니시는 대표님의 변화가 신기하긴 했지만, 그 베타가 잠결에 흘린 신음 소리에 제 직장이 날아갈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냥 해 본 소리시겠지… 여태껏 그와 비슷한 농담 한마디 들어 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핸들을 꽉 쥔 채 열심히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천마는 제가 뱉은 말을 정정하는 법이 없었고, 리무진이 조용히 정차하자마자 뒷좌석 문을 직접 열더니 두 팔 뻗어 늘어진 기설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이며 저 멀리, 빌딩 로비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감히 그 뒤를 쫓아가 사죄하지도, 그렇다고 들은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어 장덕배의 낯빛이 푸르뎅뎅하게 질려 갔다.
운전수의 내적 갈등 따위에는 아랑곳 않고, 천마는 성큼성큼 걸었다.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비서가 눈치 빠르게 자신의 카드 키를 찍어 승강기 호출 버튼을 눌렀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선 채 그는 필요한 보고만을 간략히 마쳤고, 대표님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잠든 베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2초 이상의 시선조차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기사 하나 새로 뽑자. 입 닥치고, 신호등 색만 보고 똑바로 운전하는 놈으로. 이왕이면 베타로 구해.”
“예, 알겠습니다.”
“덕배한테는 따로 연락 주겠다고 해 놔.”
문이 열리고, 천마와 그의 품에 안긴 기설, 그리고 소리 없이 따라붙은 명경만이 승강기에 올랐다. 비서는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 대표님을 향해 깊이 허리 숙였다.
“쉬십시오.”
6층에 도착하자마자 명경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계단을 통해 7층 침실로 걸어 오르며, 천마가 내뱉은 한마디가 명경에겐 천 근 같았다.
“살쾡이 잡아 와.”
“…예.”
그리하여 명경은 경의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손과 팔과 턱을 긁히고, 물리고, 맞아 가며 그는 늙은 고양이를 힘겹게 붙잡았다.
“이 빌어먹을 살쾡이 새끼가….”
잇새로 갖은 욕설을 흘리면서도 그는 경을 붙들어 쥔 두 손에 도통 힘을 주질 못했다. 고양이라는 짐승이 유연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기다란 회색 털 안으로 잡히는 몸뚱이가 어째선지 딱딱하질 않고, 털 덮인 달팽이처럼 흐물텅흐물텅 미끄러지는 게 잘못 만졌다가 터질까 봐 염려됐다.
결국 명경은 늙은 고양이가 제게 하악질을 하건 말건, 송곳니를 팔뚝 살에 이를 박아 넣건 말건 간에 분주히 움직였다. 두 손으로 조심조심, 곧 쏟아질 냄비 다루듯 고양이를 집어 들고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놓칠까 싶어 급한 마음에 이마로 퉁, 퉁, 받아 노크하고 문을 열자, 침대에 누여진 기설과 제 손목의 시곗줄을 푸는 천마가 보였다.
“…….”
몇 분 사이 긁힌 자국 수십 개를 매단 수하를 쳐다보기도 잠시, 천마는 잠든 기설을 향해 턱짓했다. 명경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회색 고양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고양이가 후다닥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더니, 기설을 알아보고 꼬리를 높이 추켜세웠다.
명경이 생각하기로 고양이라는 짐승은 ‘야옹’ 하고 울어야 하는데, 경은 ‘애옥’, ‘구루루룩’, ‘애오옥’ 하고 울었다. 무슨 놈의 똥 고양이가 영어라도 할 줄 아는지 몇 마디는 ‘애오옭’ 하고 발음을 굴리기까지 했다. 반가운 마음에 골골거리며 제 주인에게로 다가가다가도, 그에게서 풍기는 낯선 냄새를 맡곤 경계하는 소리를 내면 그런 울음이 나왔다.
그러나 소독약 냄새에 망설이기도 잠시, 경은 기설의 머리맡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제 북슬북슬하고 작은 머리통을 기설의 목덜미에 콕 박았다. 그대로 경은 수십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고양이가 시근덕거리는 소리를 천마는 처음 들어 보았다. 서럽고 슬픈 것도 같았고 저 외로웠다고 응석 부리는 것도 같은 소리며 행동이 아주 신기했다. 명경조차 그 광경을 진귀한 무어 보듯 구경할 지경이었다.
“…먹이 좀 가져와 봐.”
침대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천마가 말했다. 명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밖으로 나가, 경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설이 함께 묵는 방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이 여전히 ‘경의 방’ 혹은 ‘고양이 방’이라고 불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작은 서랍장과 캣 타워, 구비된 이부자리를 비롯해 직사각형 공간의 어느 곳에건 기설의 짐은 거의 없고 고양이 장난감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서랍장을 열자마자 간식 봉투를 찾아 꺼내 들고, 명경은 재차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전보다 여유 있는 태도로 그가 노크하고 문을 열자, 천마는 명경이 가져온 기다란 막대형 츄르를 받아 들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능숙하게 봉투의 마개를 찢어 내고 액체형 간식을 고양이 주둥이에 들이밀었다. 기설이 너른 어깨를 웅크리고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채 제 고양이에게 츄르를 먹이는 걸, 못해도 스무 번은 봤기 때문에 익숙했다.
기설이 옆에 있으니 그의 회색 고양이는 신기할 정도로 빨리 금식을 멈췄다. 허겁지겁 츄르를 받아먹고, 재차 기설의 목덜미에 고개를 콕 처박는 식이었다. 이제 명경은 천마가 뱉을 명령을 예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얼른 걸음을 움직여 부엌으로 향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고양이 밥그릇을 들고 올라왔다. 죽처럼 푹 퍼진 사료를 가득 담은 그릇에서 사람이 맡기엔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갈색 반죽 같은 사료를 내보이기 머쓱해, 명경이 어색하게 말했다.
“며칠 굶었으니 바로 사료를 먹으면 토를 하지 않겠습니까. 물에 삶았습니다.”
“그래.”
그러나 고양이는 명경이 내려놓은 밥그릇을 쳐다만 볼 뿐, 그 사료 알을 먹어 삼키진 않았다. 기설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싫은 듯했고, 기설이 아닌 다른 남자가 건네는 사료를 믿지도 못하는 듯했다. 천마가 두 개째 막대형 츄르를 뜯어 내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쫄쫄 굶은 속을 아주 조금 채웠을 뿐인데 고집을 부릴 힘이 돌아왔는지, 경은 짐짓 심술궂어 보일 만큼 수염을 세운 채 잠든 주인의 목덜미에 몸을 붙였다.
황당한 마음에 실소하며, 천마는 기설과 경을 번갈아 구경했다. 체감상으로는 제 침대에 늙고 작은 고양이와 멍청하고 큰 개가 도합 두 마리 있는 듯했다. 둘 모두 무척 충성스러웠고 인내할 줄을 알았다. 제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미련한 수준의 충성이었다.
***
잠에서 깨자마자 기설은 꽤나 주접을 떨어 댔다. 그 바람에 천마는 다소 허탈했다. 근래 기설이 순순하고, 착하고, 귀엽게 구는 것이 지나간 시간 동안 저에게 익숙해지고 훈련받아 그런 줄 알았건만 죄 착각이었다. 기설은 본래가 순순하고 착하고 제법 귀여운 남자였다. 적어도 제 고양이, 경의 앞에서는 그랬다.
제 고양이도 저도 천마의 침대에 누워 쿨쿨 자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기설은 좋다고 실없는 웃음을 보였다. 그는 고양이의 배를 채워 주고 턱 밑을 긁어 준 다음, 제 바지를 골반에 걸치도록 내려 새로 새긴 문신을 보여 주었다.
“이거 너야, 경아.”
혼잣말처럼 건넨 자랑에 고양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기설은 의연했다.
“잘 그렸지?”
익숙한 듯 혼잣말을 하고,
“오빠한테 와.”
회색 고양이를 목도리처럼 목에 감다시피 누인 채 털 짐승과 코를 맞대고 시선을 맞추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나 신기했지 보면 볼수록 저를 허탈하게 하는 기설의 민낯을 옆에 두고, 천마는 벽걸이형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녁 9시 공중파 채널에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 소식을 전하길 한창이었다.
“SS 건설사의 전기 공사 업체가 산업 안전 보건 관리비를 부풀려 공사비와 노무비를 편취한 건을 두고, 검찰청은 허위 영수증을 발급한 업체와 감독 의무가 있는 공기업 직원들의 뇌물 혐의를 수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