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럭키 펀치 (4/17)

은하 고아원의 원장에겐 그만의 철칙이 둘 있었다.

첫째, 여자아이의 이름은 남자아이처럼 짓고, 남자아이의 이름은 여자아이처럼 짓는다. 그러면 여느 고아가 아닌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고아’가 됨으로써 시설에 방문하는 어른들의 기억에 남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졌다.

둘째, 아이들에게 성씨는 붙여 주지 않는다. 원장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시설에 흘러들어 온 애들의 부모라는 족속은 그 성씨를 물려줄 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하 고아원은 신산의 그림자라 불리는 구역에 위치했다.

사채업자들의 사무실과 방석집, 지하층에 위치한 클럽과 거대한 카지노 랜드, 밀입국자가 차린 식당들을 연결하는 우중충한 거리에 멀쩡히 빛을 내는 고등일랑 없었다. ‘장기 사고팝니다’ 따위의 문구가 쓰인 전단이 붙은 뒷골목, 그 끝에 은하 고아원이 있었다. 날짐승도 제 새끼를 버리진 않을 그 거리가 고아원 아이들에겐 학교였고 놀이터였다.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부모를 지닌 아이들은 두 글자 이름을 지녔다. 남자아이인 기설은 ‘설이’, 여자아이인 민준은 ‘준이’라고 불리는 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원장의 두 가지 철칙은 기설에겐 통하지 않았다. 어린 날 그는 위탁 가정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도 제 가족이 되어 줄 어른은 만나지 못했다. 영유아기를 지난 고아의 입양률은 으레 낮다지만, 기설처럼 잘생긴 아이가 선택받지 못하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어른들은 그 원흉이 기설에게 있다고 말했다. 구구단도 잘 외질 못하고 받아쓰기 점수도 바닥인 데다 애교도 없고 숫기도 없는 게 문제랬다.

그보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기설이 성인 남성을 죽도록 싫어한단 점이었다. 남아를 입양하길 바라는 부부는 남성 커플이 절대다수였다. 한 해에도 수차례씩 기설에게 관심을 갖는 부부가 은하 고아원을 방문했지만, 입양은 단 한 번도 성사되질 못했다. 기설이 ‘아빠’를 받아들이질 못해 이래저래 말썽을 부린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이 ‘기’, 이름은 ‘설’로 등록된 ‘기설’, 그저 기설로서 살았다.

반면 여자아이인 민준은 경우가 달랐다. 위탁 가정 두 곳에서 기설과 함께 지내던 민준은 열세 살이 되는 해에 좋은 부부를 만나 입양 갔다. 고씨 성을 갖게 된 날 소녀는 고민준이 되었다.

‘설아, 누나 갈게.’

그렇게 인사하는 누나에게 기설은 평소 민준이 좋아하던 토끼 인형을 챙겨 줬다. 시설 안에서 다툼의 대상이 되곤 하던 토끼 인형은 여러 명의 손길을 거친 탓에 꼬질꼬질했다. 민준은 이제 새 장난감을 많이 갖게 될 것이었다. 낡아 빠진 토끼 인형은 필요도, 가치도 없었다.

그래도 민준은 인형을 받아 들었다. 주황색 원피스를 입은 토끼 인형을 품에 꼭 안고서 소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잘 살아야 해, 설아. 다른 애들이랑 그만 싸우고…. 어른들한테 소리도 그만 지르고. 알았지?’

‘응. 누나도 잘 살아. 빠이빠이.’

기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했다.

양부모의 손을 잡고 떠나는 민준을, 어린 기설은 잠시간 쳐다봤다. 그러고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민준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은하 고아원에 남은 기설의 시계는 뚱땅뚱땅 흘러갔다.

열여덟 살이 된 기설이 길바닥의 지리를 익히며 심부름꾼 일을 하던 시절에, 민준은 신산 대학교 졸업반 휴학생이었다. 동네 편의점에서 우연히 마주했을 때 민준은 기설을 알아보고 무척 반가워했지만, 기설은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뭐야, 너 나 기억 못 해? 난 네가 나한테 준 인형,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스물두 살의 민준은 어리숙한 기설 앞에서 어른 행세를 했다. 그녀는 기설에게 있어 친구이자 누나이자 임시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집 없는 기설이 심부름센터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것을 알고, 민준은 자신의 자취방에 그를 데려가서는 두어 달간 살게 해 주었다.

민준은 기설의 배 위에 엎드려 눕기를 좋아했고, 기설의 장점을 말해 주기를 좋아했으며, 기설의 배 위에 엎드려 누운 채 기설을 칭찬하는 밤을 좋아했다. 그들은 가족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모호한 긴장감과 왠지 모를 들뜬 분위기, 지난날의 추억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떤 관계로도 발전하지 못했다. 기설은 은근한 추파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었고, 민준은 번지르르한 껍데기만 보고 남자를 고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기설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실업 팀에 들어가 복서가 되고, 민준은 복학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안녕’ 하고 인사했다. 사귀자고 말한 적도 없었으니 실연한 것도 아닌 셈이었다.

기설은 민준에게 뭉근한 아쉬움만 남긴 반면, 민준은 기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민준에게선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유리컵에 맥주를 부드럽게 따르는 법이라거나 손 마사지를 해 주는 방법, 의식적으로 욕설을 줄이게끔 노력하라던 잔소리도 유용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설에게 장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인내심이 많고, 잘생겼고, 성정이 착한 것이 기설의 매력이라고 했다. 배려심이 깊고 순박하니까 잘 맞는 여자를 만난다면 좋은 남편이 될 거라고 했다. 나쁜 길로는 새지 말고 되도록 담배도 피우지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 살고 돈을 많이 모으거든 대학교에 다녀 보라고도 했다.

어릴 때부터 기설은 칭찬받길 좋아해 왔다. 언제 어디에서건 그는 천덕꾸러기였다. 열 살 시절에는 고아원의 군식구였고, 중학교 시절엔 쌈박질을 해 대어 강제 전학을 다녔고 고등학교는 한 학기도 채 다니지 못해 자퇴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는 누구, 혹은 어디에 기생하며 살았다. 그런 기설에게 있어 칭찬, 보상, 칭송이란 매우 희소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무거운 하루를 보내고 지친 밤이면 그는 민준이 해 준 칭찬을 떠올리곤 했다. 남들이 아프거나 놀라서, 서럽거나 힘에 부쳐서 가족의 품을 찾을 때 기설은 단 두 달 함께 지냈을 뿐인 누나가 제게 해 주었던 좋은 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 말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넌 참 착하고 좋은 남자야.’

기설은 참 착하고 좋은 남자였다.

‘남들 하는 소리에 기죽지 마. 넌 너대로 열심히 잘 살았으니까.’

기설은 남들 하는 소리에 기죽지 않는다. 그는 그대로 열심히 잘 살아왔다.

‘설이 널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죽어도 싼 새끼일걸.’

그를 화나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죽어도 싼 새끼였다. 그래서 죽었다.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인 경의 방에는 정사각형 창문이 하나 있었다. 창에 달린 커튼은 희고 얇아서, 단단히 쳐 놓아도 낮이면 햇빛이 스몄고 밤이면 창밖을 어슬렁거리는 그림자가 비쳤다. 오늘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창문 밖 남자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선 채 기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어도 싼 새끼….”

6층 높이 창밖에 선, 귀신인지 환영인지 모를 검은 것을 바라보며 기설은 중얼거렸다. 너는 죽어도 싼 새끼다.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그런 나를 화나게 했으니까. 너는 죽어도 싼 새끼이고, 나는 죽어도 싼 새끼를 죽였을 뿐이다.

저 시커먼 게 머릿속이 팝콘처럼 부풀다 터져 죽은 곽창이이건, 다른 누구의 그림자건 간에….

“…….”

흐려진 기억과 불분명한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설은 고개를 털어 냈다. 누운 자세를 고치며 그는 희고 깨끗한 천장을 올려다보고, 오늘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내일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신은 혼미하기만 했다. 작금의 현실도 꿈결 같기는 매한가지였다.

스물두 살의 성인 남자인 기설을 ‘아가’라고 부르는 한천마, 그와 맺은 섹스 계약서, 입술 위에 두 줄의 흉터를 지닌 강명경 실장, 그리고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간 귀의 반달 모양새….

‘그러고 보니… 강 실장님 입술 흉터가 준이 누나한테 준 토끼 인형이랑 닮았네. 엑스 자 모양인 게… 꼭 미피 같잖아.’

허튼 생각에 잠겨 기설은 피식거렸다. 들어 줄 이 없는 농담을 떠올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괜찮은 척 웃는 표정을 짓고, 민준이 지금까지도 그 인형을 간직하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심장은 연신 쿵쾅거렸다.

천마가 가감 없이 내보인 폭력성과 온종일 맛본 모멸감, 창문을 두드리는 검은 환영에 겁을 먹었느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오늘 밤 기설이 천마의 침실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제 고양이의 방에 틀어박힌 원인은 두려움과 같이 나약한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것, 같아서였다.

‘좋은 것 같다.’

기설은 제 감정 뒤에 모호한 수식어를 달았다.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짐작했다.

한천마는 기설이 살면서 만나 본 중 가장 완벽한 남자였다. 그는 모두가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선망하는 SS 그룹의 대표 이사였으며, 이 도시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사내들의 머리 꼭대기에 선 극우성 알파였다. 그러나 기설이 한천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천마가 저를 위해 나서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저를 위해 나서 주었다. 즉각 화를 내 주었고 도와주었고 위해 주었다. 그리고 예뻐해 주었다. 그건 기설이 받아 본 적 없는 방식의 칭찬이었다. 폭력적인 만큼 자극적이었고 자극적인 만큼 중독적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두 눈만 끔벅이는 기설의 옆구리로, 회색 고양이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꼬리를 곧게 세운 경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양이가 독립적인 짐승이란 말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편견일 거라고, 기설은 생각했다.

그의 고양이, 경은 몹시 의존적인 짐승이었다. 경은 기설을 좋아했고, 기설이 주는 밥을 좋아했고, 기설과 함께 자는 밤을 좋아했다. 그런 점에서 경은 언제고 아기 같았다.

제 옆구리를 파고드는 경을 쳐다보며 기설은 입고 있던 상의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펑퍼짐한 회색 후드 자락이 동굴의 입구처럼 열리자, 경은 기설의 옷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내 기설의 배 위가 불룩해졌다. 옷자락 밖으로 빠져나온 경의 꼬리가 좌우로 느리게 흔들렸다. 탄탄하고 뜨끈한 배 위에 똬리를 튼, 경의 털이 주는 간지러운 감각에 기설은 설핏 웃었다.

백치처럼 웃다가도 그는 금세 무표정해졌다.

‘강 실장님… 귀는 괜찮을까.’

손을 들어 기설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남들 주먹에 얻어맞아 터지고,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아서 곪고, 링 위 혹은 길바닥에 쓸리고, 이래저래 시달려 온 그의 귀는 귓바퀴 면이 납작했다. 기설은 제 귀를 세게 꼬집어도 보고, 당겨도 보았다. 잘려 나간다면 얼마나 아플까 추측해 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기설의 품 안에서,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 경이 ‘먁’, ‘냑’ 하고 짤막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자자.”

두 눈을 감고 기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늘은 자자.”

그러면 어떻게든 내일이 온다, 그게 기설의 생계였다. 그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밤이 되고 눈을 붙이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오면 모레도 오고, 모레의 다음 날을 뭐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모레의 내일’도 오기 마련이었다.

기설은 그런 내일을 기다렸다. 크게 특별할 것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그런 삶을 기다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날이 시작될 것이라고 쉽게 짐작했다.

***

기설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몸에 딱 맞는 정장 바지와 백색 셔츠, 가죽 벨트와 검정 넥타이, 각 잡힌 재킷을 순서대로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 제법 괜찮아 보였다. 백열전등 아래에서 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짐짓 이지적이었고, 뚜렷한 이목구비에선 자신만만한 인상이 풍겼다. 어떤 옷을 입건 그는 그 분야의 홍보 모델 같았다. 번듯한 껍데기가 주는 인상만큼이나 알맹이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우….”

기설의 입술이 슬며시 비틀렸다. 냉소적인 보디가드처럼 굳어 있던 얼굴에 뚱한 표정이 걸리자 그는 대번에 스물두 살의 어리숙한 청년이 됐다.

세면대에 받아 둔 물을 손에 적셔, 기설은 삐죽삐죽한 머리칼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몇 차례 심호흡했다. 복잡한 감정과 찝찝하게 남은 잠기운을 털어 내고자 내뱉는 한숨이 ‘후욱’, ‘후욱’ 무거웠다.

기설이 마음의 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문밖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저벅저벅 걷는 인기척과 익숙한 목소리에 기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는 언뜻, 천마가 저를 찾는 소리 같았다.

깊이 귀 기울일 새도 없이 기설은 후다닥 욕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네, 형님! 저 일어났…어요.”

썰렁하단 느낌이 들 정도로 넓은 거실에 발을 디디며 기설이 말했다. 그러나 저를 부르는 줄 알았던 목소리의 주인, 한천마는 기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다란 복도 끝에 멀찍이, 승강기 문을 향해 서 있었다.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걸치듯 찔러 넣었고, 귀 옆에 댄 오른손에는 휴대폰이 들린 채였다.

“…….”

기설은 요란하게 뛰쳐나온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두 뺨에 불이 붙는 듯했고 기분은 무진 뻘쭘했다. 천마는 그런 기설을 흘긋 훑어보더니, 승강기 호출 버튼을 툭 눌렀다.

“…그래서.”

천마가 말했다. 기설을 향해 걸어온 말은 아니었다. 커다란 손안에서 유독 작아 보이는 휴대폰을 기울이며 하는 소리였다. 그가 통화에 마저 집중할 수 있게, 기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묵묵히 다가가 천마의 옆에 섰다. 어찌나 조용히 움직였는지, 휴대폰 너머에서 이어져 나오는 말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 예, 서류에 부사장님 서명 받고, 곧장 공항으로 모셨습니다. 사람 하나 붙여 뒀으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연락 올 겁니다. 한성 강 상무 쪽은 이제 신경 쓰실 일 없을 듯합니다. 물류 팀에서 건설 공사 자재 조달 계획서 올려 보냈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보류해 두었습니다.

물론 들리는 말이라고 해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갔던 그 공사장 이야기 중인가 보다’, ‘보류한다는 건 부정적인 말 아닌가…, 왜 보류한다는 거지?’, ‘뭐 천마 형님에게 다 뜻이 있으시겠거니’ …기설로서는 불분명한 생각들을 굴릴 따름이었다.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길 몇 초쯤 하다, 기설은 습관적으로 제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뱃가죽 안쪽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느닷없는 통증에도 기설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가 오려나….’

나이 든 노인들이 으레 그러듯 머릿속으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옆구리와 복부 군데군데에서 징징 울리는 아픔은 날씨가 궂은 날마다 기설을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지난날 곽창이란 남자는 기설에게 유의미한 기억을 남기지 못했으나, 그가 박아 넣은 칼은 기설의 살점에 흉터와 자잘한 부작용을 남겼다.

장마철이면, 기설은 제 흉터를 잘못 기워 잠근 지퍼처럼 생각했다. 얼기설기 꿰맨 가죽이 좌우로 꿈틀꿈틀 어긋나는 듯한 불쾌감이 고장 난 지퍼와 닮아 있었다. 간지럽다고 웃기에는 아프고,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기엔 간지러운 애매한 통증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기설이 고개를 들었을 때,

“…….”

번들거리는 승강기 문에 비친 천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휴대폰 너머에서 무어라 ‘대표님…?’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천마의 뚜렷한 눈길은 기설에게 꽂힌 채였다. 저도 몰래 주춤거리며 기설은 엉거주춤 웅크렸던 허리를 곧게 폈다.

그 순간 승강기가 도착했다.

“…어. …아.”

어서 타시라는 양 열린 문을 향해 손짓하며 기설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텔에서 접대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스물두 살 청년의 뻣뻣한 몸짓에 천마가 피식 실소했다.

두 남자가 나란히 승강기에 올랐다. 천마는 더는 전화를 하지 않았고, 기설은 그런 형님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폈다. 옅은 미소가 걸린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디 아프니.”

톡, 천마의 손끝이 기설의 삐죽삐죽한 머리칼을 건드렸다. 미처 정돈하지 못한 앞머리를 만져 주는 다정한 형님을, 기설이 홀린 듯 멍하니 올려다봤다. 어제는 사람의 귀를 뜯어 놓고,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사람처럼 자상했다.

그 간극이 기설에게 꿈꾸는 듯한 기분을 안겨 줬다. 눈동자를 위로 들어 그의 손이 만든 그림자를 올려다볼 뿐, 기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다 깬 개를 쓰다듬듯이 움직이는 손바닥이 넓었고, 손가락은 기다랬다.

“기설아?”

천마가 재차 물었다.

“표정이 나쁜데?”

그제야 기설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굳어 있던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면서 그는 고개를 슬며시 뒤로 피했다.

“속이 조금 안 좋아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속이 왜 안 좋아. 체했어?”

천마의 손이 기설의 아랫배에 와 닿았다. 좌로, 우로, 더듬거리며 매만지는 손바닥의 온도가 셔츠 옷감을 통과해 뜨끈하게 전해졌다. 손길을 피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슴없는 접촉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디 또 한 번 피해 보라고 일부러 기설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복근에 힘을 주며, 기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 그런 게 아니라… 가끔 날이 흐리면 다쳤던 데가 종종 쑤십니다. 저녁에 비가 올 건가 봅니다.”

그가 어벌쩡 말을 마칠 무렵, 천마의 손은 기설의 바지허리 안으로 반쯤 파고든 상태였다. 기설은 그의 손을 쳐 내거나 피하지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반기지도 못하는 채 어정쩡한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커다란 손날이 금방이라도 기설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성기를 덥석 움켜쥐고 둔부를 세게 칠 것만 같았다.

긴장한 기설의 복부가 단단하게 응축되는 것을 느끼며 천마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긴장한 건지 기대하는 건지 모를 기설의 얼굴을 지나, 떡 벌어진 어깨와 보는 맛도 만지는 맛도 좋은 가슴을 훑고, 늘씬하게 뻗은 허리에 닿았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깔끔하게 입혀 놓았을 뿐인데 기설은 작품이 됐다. 조각상 삼아 어디에 세워 두어도 좋겠다 싶게 잘빠진 작품이었다. 곽창이 남긴 흉터만 없었더라면 훨씬 더 완벽했을 거였다.

“저, 형… 형님.”

뭉근한 기류를 빨리 걷어 내고픈 사람처럼, 기설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우산은 챙기셨어요?”

황당한 질문에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러고는 손길을 거뒀다. 이렇다 할 표정이나 별다른 말 없이, 천마는 멈춰 있던 승강기가 움직이게끔 B3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기설도 복부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속옷 안이 한껏 더워졌지만, 육안으로 두드러질 정도로 발기하진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설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하다니….’

우산은 챙기셨냐니, 어영부영 내뱉은 질문이 후회로 남았다. 어디 한천마에게 우산 챙겨 줄 부하 하나 없겠는가. 제 등가죽이라도 벗어다가 덮어쓰시라고 내밀 덩치가 한 트럭이라는 걸, 누구보다 기설이 잘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에 내려가자마자 소위 ‘덩치’들이 허리 숙여 천마를 반겼다. 줄지어 선 사내들의 검은 양복이며 행렬엔 구김 한 점 없었다. 각 잡힌 대열에서 풍기는 긴장감이 기설로 하여금 어제의 소란을 상기시켰다.

멀찍이 제 주인을 기다리는 리무진과 뒷좌석 문을 열고 대기 중인 강명경이 보였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선 그의 머리에는 한쪽 귀 대신 크고 두툼한 거즈가 붙어 있었다.

명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애당초 기설을 눈엣가시 취급하던 명경이었다. 기설은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경멸을 담는 눈짓을 못 느낄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두 발을 멈추어 세웠다. 함부로 달라붙었다간 이전에 그랬듯이, 명경이 제 어깨를 뒤로 밀쳐 천마로부터 떨구어 놓을 거라 생각됐다.

반면 그의 귀를 잘라 놓은 주범인 천마는 여상스럽게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명경에게서 허리 숙인 인사를 받으며 그는 리무진의 뒷좌석에 올랐다.

기설은 잠시간 두 남자를 지켜봤다. 기설뿐만 아니라 주차장에 선 모든 사내들이 두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작 한천마와 강명경은 부하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태도였다. 천마가 까딱까딱 검지를 움직이자, 명경은 상체를 깊이 숙이며 그에게 남은 귀 한쪽을 내밀어 보였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는, 멀찍이 선 기설에겐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최대한… 거슬리지 말아야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그는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남창 신세에서 벗어나 한천마 아래에서 어떤 일이건 맡고픈 게 기설의 바람이었다. 그러자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무슨 일을 하건 빽이 없으면 말단에서부터, 막내 노릇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사회의 생리였다. 남창 딱지를 떼고 이 무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자면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런들 명경처럼 ‘실장’이라는 직함을 달거나 오른팔인지 왼발인지 하는 멋진 호칭은 못 얻겠지만, ‘한때 성인용 장난감이었던 심부름꾼’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기설은 쭈뼛쭈뼛 뒤로, 뒤로 물러났다. 종국에는 열의 맨 뒤에 선 꼴이 됐다. 그런 기설을, 주차되어 있던 검은 차량에 오르려던 사내가 의아한 눈길로 돌아봤다. 그나마 일면식이 있는 남자를 알아보고, 기설은 얼른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저도 같이 이동했으면 하는데요.”

뻔뻔하다 싶을 만치 태연하게 말하는 기설을 향해, 남자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기설은 상대의 낯을 뚫어져라 마주 봤다. 어디서 한 번 만난 사람 같긴 한데, 얼굴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코 위에는 갓 꿰맨 실밥이 삐죽삐죽 뻗친 상처가 자리했고, 두 눈은 앞이 보이기는 할까 싶게 퉁퉁 부은 상태였다. 진물을 빼느라 찢은 상처에서는 소독약이 지나간 흔적이 거품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저를 향해 엉거주춤 선 채 무어라 대답하질 못하는 이의 정체를 기설은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그는 사나흘 전 카지노 팀에서 명경의 직속으로 부서를 옮겨 온 신입 중 하나였다. 그와 ‘안녕하십니까’ 하는 어색한 인사를 나눴던 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목을 뻗어, 기설은 그와 붙어 다니던 다른 사내들을 찾으려 했다. 저를 창놈이라 소개했던 남자들과 같은 차에 타야 한다면, 그건 철면피인 기설에게도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낯선 얼굴들이 기설의 시선을 피해 고개 숙일 뿐, 그를 놀리던 사내들은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친구들이랑 싸웠나…?’

기설이 둔한 질문을 꺼내려는 순간, 클랙슨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천마가 탄 리무진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기설이 놀라 고개를 들고 살피자, 다시금 클랙슨이 두 번 더 울렸다.

기설은 ‘밥’ 소리를 들은 개처럼 빠르게, 검은 리무진을 향해 뛰어갔다. 후다닥 다가오는 기설을 마주 보며 강명경이 뒷좌석의 문을 활짝 연 채 쥐고 있었다. 기설은 그를 향해 어영부영 묵례한 다음, 리무진 안으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형님. 무슨 문제라도….”

기설이 입을 열었고,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천마가 제 옆자리 시트를 팡팡 두들겼다. 리무진의 뒷좌석은 2미터에 달하는 대표 이사를 여유롭게 품을 만치 넓었고, 그는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직 복서 하나가 앉을 자리를 남겨 놓은 채였다.

기설은 다소 허둥지둥하며 차에 올랐다. 형님께서 저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다거나,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궁금증을 담은 얼굴로 기설이 천마를 바라본 순간, 등 뒤로 차의 문짝이 부드럽게 닫혔다.

당황한 건 오직 기설뿐이었다. 명경은 물론이며 리무진의 기사마저 한천마가 원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기설을 제외한 모든 사내들이 관계도의 정리를 마쳤다. 어제의 소란은 강렬했던 만큼이나 노골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제 기설은 그저 그런 남창이 아니었다. 신세가 어떠하건 간에 그 앞에는 ‘한천마가 아끼고 귀여워하는’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제대로 쓰이지 않는 몸뚱어리는 잘라 버리는 게 낫다.’

같은 방식을 오래도록 고수해 온 한천마였다. 계약을 어기면 새끼손가락을 자르고, 기밀을 누설하면 입을 찢고, 사기를 치면 혀를 뽑았다. 대상의 충성도는 참작 사유가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제 곁을 지켜 온 강명경이라도 매한가지였다. 애초에 그의 입술을 찢어 놓은 자가 한천마라는 소문이 허다한 판국이었다. 어제, 천마는 명경의 귀를 자름으로써 그 소문에 힘을 실었다. 다름 아닌 기설이 원인이었다. 그를 헐뜯는 부하들의 대화 소리를 듣고도 통제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벌인 본보기 처벌이었다.

명경은 셔츠를 적신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제가 받은 처벌을 물려줄 부하를 색출했다. 그들 중 두 발이 멀쩡히 붙어 있어 출근한 이는 신입 한 사람뿐이었다.

제 신세며 입지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서 기설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를 태운 리무진이 주차장 밖으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기설아.”

덥석, 천마의 큼지막한 손이 기설의 왼쪽 무릎을 움켜쥐었다. 창문 밖의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설의 어깨가 화들짝 움직였다.

“네, 네?”

기설의 검은 눈동자 안에 천마의 미소가 담겼다.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걸리는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닌, 다른 희귀한 종족 같았다. 빽빽한 속눈썹 그림자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수풀을 자아냈고 호를 그리는 입술은 몹시 자비로워 보여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형님이 곽창이한테 복수해 줄까?”

그 미소를 감상하느라, 기설은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어리숙하게 되묻는 소리에 천마는 천사처럼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놈 시체를 도로 파내다가 사지를 찢어 놔 줄까?”

“…….”

“아니면, 부모도 못 알아보게 면상을 갈아 놔 줘? 응? 기설아.”

“…아, 어어….”

얼떨떨한 얼굴로 기설은 두 눈동자를 분주히 움직였다. 농담을 하는 건가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가, 대답을 독촉하는 듯 제 무릎을 두 번 두드리는 손길에 어깨를 움츠리며 표정을 지웠다.

당황한 기설이 허공에 대고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벌써 죽은 사람인데, 왜…. 그런 짓을 왜 합니까? 그랬다가 귀신 되면 어떡해요.”

“하하하. 귀신?”

기설의 말이 재밌다는 양 천마는 호탕하게 웃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것을 믿느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바람에 기설은 아연실색했다.

‘진짠데. 진짜 있는데….’

간밤 창문 밖을 어른거리던 검은 그림자를 떠올리며 기설은 눈썹을 웅크렸다. 반듯한 이마가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미간 사이에 홈이 파이자 기설의 눈매는 차갑고 진지해 보였다. 그래 봐야 천마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자면 귀엽고 어리숙해 보일 뿐이라 해도,

“귀신 진짜 있어요, 형님….”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말에 불과하다 해도,

“진짠데.”

기설은 몹시도 진지했다.

“…진짜로 진짠데…, 진짜예요. 그러니까 제사도 지내고 무당이 있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귀신도, 외계인도, 다 진짜 있어요. 미국에서는 UFO가 초원에 있는 젖소를 잡아간댔어요. TV에서 그러던데요.”

귀신과 외계인이 존재하는 증거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가 값비싼 차체 내부를 울렸다. 리무진 안에, 기설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는 귀는 한 쌍만은 아니었다.

‘저게 미쳤나!’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기절초풍한, 운전대를 쥔 기사에게도 귀는 있었다.

‘저저저, 또라이 새끼…!’

붉은 신호등에 맞추어 차를 멈춘 채 그는 두 눈에 힘을 줬다.

일명 ‘장 기사’, 운전대만 17년째 쥐고 있는 장덕배였다. 그는 운전병 시절 선임의 골프채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장, 사모를 모셨고 잠깐이나마 회장님 차도 몰아 본 잔뼈 굵은 운전수였다. 그가 한천마를 처음 모시게 된 날에, 한천마는 간단한 호구 조사를 마치고는 ‘덕배야’로 호칭을 정해 버렸다.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장덕배는 저보다 예닐곱 살은 어려 보이는 한천마에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느냐는 질문 한번 꺼내지 못했다. 한천마는 그만큼의 무게감과 카리스마를 가진 고용주였다. 장덕배는 내심 그를 무서워했고, 존경했으며, 어느 정도는 선망하기까지 했다.

‘우리 대표님께 도대체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백미러를 살필 적에 장 기사는, 도무지 극우성 알파의 잠자리 상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베타를 향해 눈총을 쏴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운전수의 시야에 들어온 뒷좌석 풍경은 그의 상상과는 아주 달랐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눈치 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기설의 모습이야, 생각한 것 그대로였다. 유별난 것은 그보다는 오히려 한천마였다.

좌석 등받이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천마는 기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음모론자들이나 내세울 법한 합성 사진이며 근거 없는 논리를 정설처럼 늘어놓으며 외계인의 존재를 설명하는 기설을 향해 ‘오’ 하는 감탄사로 추임새까지 얹어 주었다. 시선은 기설의 입술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채였다.

“그것참 흥미로운 사실이네.”

이렇다 할 어조 없이 천마가 대답했다. 건성으로 내뱉은 소리에 기설은 바삐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그랬습니다. 미국에서 외계인을 납치해서 연구했대요. 외계인이 찍힌 사진도 있고요.”

“하긴… 외계인도 우유는 마시고 싶겠지. 안 그러냐, 덕배야?”

천마의 고개가 대뜸 방향을 틀었다. 백미러를 통해 두 남자의 모습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장 기사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청색으로 변한 신호에 맞추어 차를 움직이며, 그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어…, 넵. 그렇습니다. 외계인도 그, 어, 칼슘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칼슘 같은 소리 하네. 눈깔 굴리지 말고 똑바로 운전해.”

천마가 휘 발길질하자, ‘퍽’ 소리를 내며 운전석 등받이가 크게 흔들렸다. 당황한 기사가 무어라 사과하기도 전에 차량 격벽의 창문이 매섭게 닫혔다. 시커먼 블라인드 유리를 쳐다보며 장덕배는 진땀을 흘렸다.

느닷없이 오간 거친 언사에 당황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기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인의 시선에 무감각한 그로서는 어째서 다정한 천마 형님께서 대뜸 운전수를 혼낸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 날 놀린 거였구나….’

다만 뒤늦게 귀를 붉히며 고개를 푹 떨궜다. 유령이니 외계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늘어놓은 스스로가 뒤늦게 창피했다. 남들이 듣기에 그런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낭설이란 것쯤은 기설도 알았다. 다만 천마가 흥미롭다며 들어 주기에, 그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했을 뿐이었다. 한천마 앞에서는 낮이건 밤이건 아래에 깔리는 사람일 뿐인 기설로서는 그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흥분했다. 되도록 천마를 웃음 짓게 만들고 싶었고, 그 앞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꾸려 보고 싶었다.

‘멍청한 놈, 새대가리, 똘추 새끼….’

제 뒤로 흔히 따라붙던 욕설을 떠올리며 기설은 의기소침했다. 한천마도 언젠가 그런 욕설을 뱉으며 기설을 내칠지도 몰랐다. 벌써 놀림당하는 것을 보면 뻔한 일이었다.

착각에 빠진 순간에도 기설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더 모자라고 어리석고 한심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기설에게는 그 나름의, 삶의 모토가 있었다.

‘아가리 닥치고 있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데 천마 형님 앞에서는 도저히 그게 되질 않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입었으니 제 껍데기가 보기에 멍청하거나 새대가리 같거나 똘추스럽지 않단 걸 알고 있는데도, 기어코 입을 열어 그럴싸한 껍데기가 주는 이득을 걷어차고야 말았다.

그런 기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한천마는 내심 실소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기설의 귀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으깬 감자처럼 생겨서는….”

엄지와 검지로 기설의 귓불을 꼬집으며, 천마가 말했다.

“…금방 빨개진단 말이야.”

으깬 감자. 바닥을 구르고 때론 주먹에 맞아 터져 가며 뭉개진 기설의 귀 모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주물주물, 위아래로 손끝을 움직여 가며 귀를 만지는 손길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어르고 달래는 듯 다정한 손길에 기설의 기분은 속절없이 풀리고야 말았다. 이상했다. 아무도 기설을 어르듯이 달래듯이 만져 주지 않았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가 그런다는 게 이상했다. 그리고 그런 천마의 손길을 좋아하게 된 기설 자신도 이상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느릿느릿 시선을 굴리며 기설이 질문했다. 삽시간에 순순해진 기색을 훤히 들여다보며, 천마는 가볍게 되물었다.

“뭘. 감자라고 해서 기분 상했어?”

“아뇨, 그거 말고요. 왜… 복수해 준다고, 아까 전에 그러셨잖아요.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좋아했잖아.”

천마가 대답했다. 늘 그렇듯 쉬운 답이었다.

“…….”

기설의 반응도 한결같긴 마찬가지였다. 당황해 입을 다물고, 뒤늦게 무얼 깨닫는 식이었다.

“너, 내가 명경이 귀 잘라 주니까 좋아했잖아. 너 대신 복수해 줘서, 아주 눈빛이 반짝반짝….”

웃는 낯으로 속닥거리는 천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콧등 위에는 맑은 윤기가, 눈동자 안에는 이채가 서렸다. 검은 눈동자 안에 비친 제 얼굴을 기설은 가만히 쳐다봤다.

“그래, 딱 그렇게.”

점차 뚜렷해지는 천마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기설은 그와 제 코끝이 맞닿기 전까지 서로의 거리가 좁아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제 허벅다리 위를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길, 먹처럼 검은 눈동자 위에 별처럼 작은 빛이 하얗게 번져 보이는 것, 그의 코에서 빠져나온 날숨이 제 인중을 미세하게 간질이는 감각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느낄 뿐이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이는 기설이었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천마는 웃으며 지켜봤다. 그러고는 기설의 허벅다리를 꽉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다 왔네. 내리자.”

천마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리무진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대표님께서 하차하기를 기다리던 부하들을 향해, 그리고 인사로 저를 맞이하는 협력 업체 사장을 향해 천마는 주저 없이 걸어 나갔다.

기설은 그의 뒷모습을 몇 초간 바라만 보다가, 자다 깬 사람처럼 느릿느릿 뒤따랐다. 으깬 감자처럼 뭉개진 그의 귀는 붉어지다 못해 보라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조차도 깨닫지 못한 마음을 천마에게 읽혔다는 것과 자신이 그의 입맞춤을 기대했다는 것 중, 무엇이 주는 부끄러움이 더 짙은지 기설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에게 특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자각도, 그 호의에 대해 어떠한 보답을 어디까지 하겠노라는 기준선도, 기설은 정해 두지 않았다.

코앞으로 닥쳐오는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에 대한 고민 따윈 없이 그는 순순히 천마의 그림자에 제 그림자를 붙였다.

***

사고라는 것에는 늘 ‘갑자기’란 전제가 따른다. 기설의 22년 인생사는 찾아 주는 이 없는 작은 무덤 같았고, 사고는 무성히 자란 잡초와 같았다. 사고를 빼놓고는 삶에 특별한 일이라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기설은 사고에 익숙했다. 갑자기 어떠한 불행이나 고통이 닥쳐와도 무덤덤한 편이었다.

제 뱃가죽을 뚫고 칼이 박히는 찰나의 순간에도 기설은,

‘아, 씨발… 전에도 이런 적 있는데.’

속으로 그렇게 뇌까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난날과 오늘의 사고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지난날의 사고는 기설을 타깃으로 삼아 기설을 향해 직진해 다가왔다면, 오늘의 사고는 타인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기설이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시뻘건 빛으로 점멸하는 시야가 깜빡깜빡한 와중에 기설은 의아했다. 그의 둔한 머리로는 사고의 본질적인 원흉을 찾아내기가 불가능했다. 문제는 기설이라는 남자 그 자체에 있었다. 그가 알파에게 의존하는 순순한 오메가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고, 그런 기설을 애완동물 혹은 장난감 정도의 역할로 세워 둔 천마의 실수가 문제였다.

개로 빗대더라도 기설은 발라당 배를 보이며 꼬리를 흔들고 이따금 머리를 문질러 가며 애교를 부리는, 순하고 어여쁜 종자는 결코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작고 귀엽고 북슬북슬하게 개량된 순종보다는, 여러 종자가 마구잡이로 섞인 늑대개에 가까웠다. 기설이라는 개는 투견이었다. 그와 같은 개 두 마리를 좁은 철창에 집어넣고 매질을 강행한다면, 상대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터였다.

그런 기설을 천마는 얕잡아 봤다. 그는 기설에게 투견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경비를 서는 것도 탐문을 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잘빠진 얼굴로 제 뒤에 서서 이따금 기분이 좋아지게 손을 핥아 주는 것. 그게 천마가 생각한 기설의 역할이었다. 기설은 그러한 역할을 맡아 중요한 거래 현장에 한천마와 함께했다.

천마의 실수는 아주 사소한 무지에서 비롯됐다. 제 등 뒤에 뒷짐을 지고 선 기설이 주위를 둘러보며 매일같이 경비를 서고 있음을 그는 몰랐다. 오가는 얼굴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홀로 탐문하고 있음을 그는 몰랐다. 천마가 그럴싸한 직함을 단 사장 혹은 대표들과 담배를 태우고 위스키를 마시며 거래 조건을 견주는 동안 기설은 그들 곁에 선 비서 혹은 부하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그 누구도 몰랐다.

친근한 대화가 사이좋게 오가는 방 안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한옥 건물 내부에서는 독특한 분위기가 풍겼고 군데군데 섞인 오메가들의 은은한 체취가 알파들의 신경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강명경과 나란히 선 대여섯 명의 부하들은 방심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방심하고 있음을 몰랐다.

그들 가운데에서 기설의 눈빛만이 또렷했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우 습관적으로 상대방을 관찰했다. ‘곽 사장’이라 불린 사내가 제 턱 아래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쓰읍’ 소리를 내는 것을, 그 옆으로 다가온 그의 비서가 겸연쩍은 듯 사과하며 중요한 서류의 낱장이 누락되었음을 실토하는 것을, 천마가 혀를 ‘쯧’ 차더니 다녀오라며 손짓하는 것을, 기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우리 실장이 서류 사본을 빠뜨렸다고….”

곽 사장이 무안한 기색으로 사과했다. 그 말에 괜찮다고 대꾸하는 대신 천마는 소파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설은 어렴풋이, 형님께서 곧 담배를 찾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강명경이 한 발 천마에게 다가갔다. 그는 제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필터 부분을 천마의 입 앞에 대 주었다. 성냥을 태워 불을 붙여 주기까지 속전속결이었다.

그 바람에 기설은 살짝 들떴다. 형님의 기분을 저도 읽었다는 데에 그는 몹시 심취했다. 실장 명함을 단 측근에 견줄 만큼 눈치를 키웠다는 게, 홀로 생각할 적엔 대단하고 대견스러운 일 같았다.

그리고 1분 전 자리를 비웠던 비서가 돌아왔다.

‘어?’

그가 파일을 쥐고 한 발짝,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순간 기설은 생각보다 행동을 더 빨리했다. 단숨에 천마가 앉은 소파 자리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었다. 기설의 손이 단숨에 곽 사장 측 비서의 손목을 붙잡아 쥐었다.

“나갈 때와 왜….”

기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미처 잇지 못한 말은 ‘…다른 사람이 온 거냐’는 물음이었다.

그게 기설의 잘못이었다. 제 것도 아닌 타인의 사고에 끼어든 게 잘못이고, 그 타인이 하필이면 한천마라는 게 잘못이었다.

‘…….’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칼에 찔린 이들은 소리를 악 지르는데, 실제는 미디어와 달랐다. 기설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숨조차 들이쉬거나 내뱉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제 복부에 맞닿은 파일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기설이 얼어붙은 만큼이나 기설에게 팔을 잡힌 사내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검은 서류 파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곧바로 속에 감췄던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는 사내가 쥐고 있었고 칼날은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어른 손바닥처럼 기다란 것이 죄 기설의 몸 안에 박혀 있었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갈비뼈를 뚫고 폐부까지 긁은 채였다.

“…힉.”

목울대에 뼈대, 핏대, 열 기운이 죄 오른 채 기설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가 칼을 맞았다, 한천마의 목에 박혀야 하던 칼을 대신 맞았다.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반면 기설은, 눈앞이 시뻘겋게 점멸되는 고통에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질 못했다.

그리고 기설은 주먹을 휘둘렀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기설을 싸우게 만들었다. 누가 끼어들 새도 없이 휘두른 주먹이 비서로 분장한 사내의 얼굴에 힘껏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기설의 몸에 꽂혔던 칼이 쑥 빠지더니, 재차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기설이 전직 복서라면 비서로 분장한 이는 암살자였다. 기설의 주먹이 빠른 만큼 그의 칼도 빨랐다.

“…컥, …헉….”

내장이 만 갈래 천 갈래 찢기는 듯한 통증에 기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희번덕거리는 눈깔을 굴리며 그는 미친놈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금 칼을 뽑았을 때, 기설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왼쪽 눈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끄으… 윽.”

목구멍을 긁으며 기어오른 신음을 뱉으며 기설이 고개 숙였다. 수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낯선 남자는 얼굴이 반쯤 터진 채 쓰러졌고, 기설의 셔츠엔 빨간 자국 여러 개가 남았다. 어리둥절한 채 기설은 제 배를 내려다봤다.

‘언제 이렇게 많이 찔렸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붉은 자국이 삽시간에 크게 번져 하나가 됐다. 바지와 속옷 안을 적실 정도로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와 기설의 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기설은 더듬더듬 제 갈비뼈를 만지다가, 옆구리에 박힌 칼날에 손끝을 베였다.

‘이건 또 언…제….’

그리고 기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맥없이 나자빠지는 순간 기설은 일시 혼절했다. 재빨리 눈을 홉떴을 땐 난장판이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서로를 치고, 찌르고, 갈겨 놓으며 사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혼란한 와중에도 기설은 천마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소란한 무리 그 어디에도 한천마는 보이지 않았다. 군중 속에서도 모습을 감추기가 더 어려울 사람인데, 혼자서만 컬러를 입힌 사람처럼 뚜렷한 남자인데, 알파라는 것을 베타인 기설조차 단번에 알아챌 수준인데, 천마가 보이지 않았다.

“형님….”

울 것 같은 기분이 된 채 기설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형님은 어디 계시지?’

호두알 같은 턱뼈가 오돌토돌 도드라진 채 끅끅거리며 기설은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기설을 누군가 붙들어 말리고 있었다. 기설을 뒤에서 끌어안고, 두 팔을 둘러 그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상처를 뭉개듯 누르는 힘이 기설을 아프게 했다. 꺽꺽 신음을 뱉으며 기설은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다.

“기설아.”

그리고 몇 박자 늦게, 기설은 천마를 발견했다. 그는 멀리 있지 않았다. 기설을 뒤에서 받쳐 안고, 기설의 배를 두 손으로 짓누르는 이가 다름 아닌 한천마였다. 뺨 위에 핏방울이 튀고 눈은 삼백안이 된 채였다.

천마를 발견하고도 기설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막상 가까이에서 저를 받쳐 안고 있는 것을 찾고 나니 진이 빠졌다. 잊고 있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기설을 집어삼켰다.

아팠다. 아직 몸에 칼이 박혀 있어서 더 아픈 것 같았다. 기설은 제 몸에 박혀 있던 칼 손잡이를 찾으려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기괴한 일이 생겼다. 머리로는 분명 배를 만지려는데, 기설의 팔은 허공에서 까딱까딱 허우적거릴 뿐 주인의 말을 듣질 않았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낮은 목소리가 속닥거리며 기설의 귓가를 맴돌았다.

기설은 ‘히이익’ 소리 길게 내며 눈을 떴다. 저도 모르는 새 점멸했던 시야가 환해지자, 피범벅이 된 사내들이 가방과 짐, 서류철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기설은 시간이 몇 초, 혹은 몇 분이나 흘렀는지 느끼지 못했다. 통증에 푹 빠진 채 의식을 잃었다가 발작하듯 깨어나길 반복할 뿐이었다.

재차 눈을 깜빡, 감았다가 뜨자 부쩍 가까워진 천장이 보였다. 축 늘어진 기설의 팔과 발이 허공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기설을 안아 들고 옮기고 있었다. 기설은 새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야가 시커멓게 꺼지려는 순간마다,

‘하나!’

번쩍거리는 불빛이 기설의 정신을 억지로 붙들어 놓았다.

‘둘!’

링 위에서 다시 일어서려 기설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심판의 카운트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 마저 싸워야 했다. 제 볼 안쪽 살이 터지도록 주먹에 맞고 그보다 세게 상대를 갈겨 놓아야 했다.

기설의 발이 뒷좌석 차창을 세게 걷어찼다. 허둥지둥 휘두르는 손이 허공을 헤집었다.

환시를 보며 발작하는 기설을 제압하는 것은 온전히 천마의 몫이었다.

알파의 잇새로 욕설이 구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분노를 못 이겨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그는 차량 뒷좌석 깊숙이 기설을 욱여넣어 눕히길 반복했다. 어깨를 잡아 눌러놓아도 기설은 거듭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가만있어, 새끼야!”

천마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는 순전한 성화를 가감 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설은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형님의 희귀한 표정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두 눈에 한천마의 성난 화마 같은 표정이 비치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기설의 눈동자엔 빛이 없었고 정신은 링 위에서의 꿈을 꾸고 있었다.

기설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좌로, 우로, 바삐 구르는 검은자위는 마치 눈꺼풀 안에서 튕기는 구슬 같았다.

차량 천장의 사방을 한참 살핀 뒤에야 기설은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금 고통을 느끼며 ‘악’ 소리를 내질렀다. 허리를 비틀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는 제 상처를 짓누르는 손을 떼어 내려 애썼다.

“악, 헉…, 허억…!”

그가 버둥거릴 때마다 복부를 짓눌러 틀어막은 옷깃 위로 피가 번졌다. 한천마의 정장 재킷은 피에 젖어 더는 검어질 수 없을 만큼 짙은 색이었다. 넉넉한 옷을 다 적셔 놓고도 그치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피의 양은 너무 많았고 그 위를 압박하는 천마의 손아귀는 아주 강해서, 빨래를 쥐어 짜내듯 옷감에서 빠져나온 피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며 손가락 사이를 적셨다.

“아, 아…, 놔주…, 놔주세요, 아파요, 아파요…!”

기설은 악악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이 땀으로 덮인 채 그는 제 배 안에 불쏘시개를 쑤셔 박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목덜미 뒤가 섬찟했고 어깨엔 담이 걸렸다.

바르작거리는 기설을 달래기 위해 천마조차도 갖은 힘을 다 써야만 했다.

“이, 씨…발 기설아. 가만있어.”

“윽…, 으윽, 놔, 놔주세요….”

“피 막아야 된다고, 이 씨발, 나 봐. 똑바로 봐, 이 새끼야!”

새된 신음을 흘리며 기설이 고개를 쳐들었다. 차창 밖의 하늘이 빠르게 흘러가는 게 텔레비전 화면처럼 느껴졌다. 그를 실은 차가 신호를 무시하며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기설은 기침을 콜록 내뱉고는 제 기침이 자아낸 통증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진이 빠져 버린 듯 축 늘어졌다. 고통으로 목울대가 움직거렸다.

“형…님.”

작은 소리로 기설이 중얼거렸다. 천마는 제 두 눈을 바라보는 기설의 눈동자에서 순전한 고통을 읽었다. 언제고 어리숙한 표정만 띨 줄 알던 얼굴이, 통증을 못 이기고 경련하고 있었다.

“기…설아. 아가야. 피곤하지? 응? 잠깐 잘까?”

한천마가 오만상을 찡그린 채 웃었다. 이마 위로 울룩불룩 핏대가 솟고 온 얼굴이 붉어진 채 겨우 꺼낸 상냥한 목소리에, 기설은 눈빛이 흐려진 채 대답했다.

“네…, 네.”

“그럼 기절이라도 좀 해 봐.”

그 말에 기설은 ‘네’ 하는 순순한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그저 아팠다.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

멍하니 깨어 있는 기설의 뺨이 움찔, 또 움찔 경련했다. 통증으로 온몸의 피가 솟구치고 근육이 경련하는 통에 왼쪽 흰자위의 실핏줄이 죄 터졌다. 꺽꺽거리며 기절할 것처럼 눈동자가 까뒤집히다가도, 기설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천마를 마주 봤다.

지독한 개를 향해 천마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야, 이 병신 새끼야. 주제도 모르고, 또라이 같은 새끼…. 오냐오냐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응? 아가, 누가 너한테 대신 칼 맞으래?”

쏟아지는 욕설과 비난을 들으면서도 기설은 그저 혼미했다. 그는 제 몸을 다루는 법을 잊어버렸고, 한천마는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을 잊었다.

“왜 그랬어? 기설아, 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기설은 깨달았다. 한천마가 요구한 역할에 주어진 틀, 강명경이 뒤로 밀치며 벌려 놓던 그와의 적정 거리, 그 경계선을 저는 팔짝 뛰어넘어 버렸다는 걸.

“너 그 씨발, 선인장 공포증, 그거 있잖아. 날카로운 거 무서워하잖아.”

한천마에겐 방패 역할을 해야 할 졸개가 이미 있었다. 무기의 역할도 매한가지였다. 그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빚을 졌거나, 하다못해 돈을 받기 위해서 기꺼이 움직이는 부하들이 이 도시에 숱했다. 만에 하나 그들 모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해도 한천마가 직접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기설이 모든 역할을 독식하며 난투극의 피투성이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단 의미였다.

그러니 기설은 순전히 한천마를 위해서, 오롯이 제 감정에 의해서, 무상으로 희생해선 안 됐다. 한천마의 세계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빡대가리 새끼가…. 괜히 계산만 꼬고 있어.”

그는 그런 것을 셈하는 방법을 모른다.

“응?”

기설의 입 밖으로 작은 기침이 기포처럼, 실소처럼 작게 터졌다. 차창을 걷어차며 발작하던 두 다리도 이내 멈췄다. 그리고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아픔에 이를 세게 악물다 볼 안 살을 씹은 탓에 기설의 입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랫니까지 피로 물들어 분홍빛이었다. 이보다도 혀끝이 오히려 희게 질려 있었다.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은 기설의 복부를, 한천마는 힘껏 짓눌렀다. 시뻘겋게 물들어 주름 선 한 줄 한 줄 뚜렷해진 제 두 손을, 한천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내려다봤다.

“나더러 이 빚을 어떻게 갚으라고….”

넋두리가 힐난하듯 새어 나갔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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