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트레이트 (2/17)

한천마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면서 뜬구름 같은 소문을 믿거나, 그에 대해 매우 잘 알면서도 아는 바를 결단코 누설하지 않거나. 덕분에 한천마는 도시 괴담처럼 풍문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벼운 이름이기도 했고, 보는 눈이 없는 자리에서도 함부로 모함하기 두려울 정도로 무거운 이름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한천마는 SS 그룹의 숨겨진 후계자였다. 신산에서 SS 그룹이 갖는 의미는 여느 도시에 둥지를 튼 기업체가 갖는 의미와 사뭇 달랐다. SS 그룹은 신산의, 과장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심장이자 팔다리였다.

SS 그룹의 모태는 1950년대, ‘신산 산업’에서부터 비롯됐다. 신산 산업은 전력부터 시작하여 가스와 담수에 이르기까지 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를 공급했다. 공장을 건설하고 생산 시설을 굴리는, 1세대 플랜트 산업체였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신산 산업도 몸체를 불려 갔다. 세기말에는 기계 장비의 하드웨어를 제작하면서 엔지니어링 연구 사업에 발을 뻗었고, 신세대 소프트웨어를 취급했다. 고부가 가치 산업의 선두 주자로 자연스럽게 튀어 나간 것이었다.

그쯤 되니 신산시의 대다수 전문 인력이 신산 산업에 소속될 수준이었다. 두 집 건너 한 명꼴로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 딸이 신산 산업에 일터를 두고 있었다. 일개 기업체가 도시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건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달갑지 못한 일이었다.

사업 재편에 한창이던 철강 회사와 기업 집안끼리의 혼담이 오가면서, 또한 지명을 딴 기업체 이름을 정부에서 규제하기 시작하면서 ‘SS 그룹’이라는 기업 집단이 만들어졌다. 플랜트 산업과 제철 기업이 한데 묶인 것이다. 이후 20년간 SS 그룹은 승승장구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룹 총수인 한무상 회장이 난데없이 졸도한 뒤 의식 불명에 빠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해외에서도 ‘특이 현상’이라고 조명하는 대한민국 기업가의 특징이 있다면, 기업 가문의 대표는 부득불 우성 알파를 선호한단 점이었다. 신산 기업의 초대 회장도 우성 알파였고, 한무상 회장도 우성 알파였다. 그러나 당시 스물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회장의 친아들, 한권우의 경우 알파이긴 하나 그 형질이 열성이었다.

그때 한천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무상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자 한권우의 배다른 형이라며, 총회 자리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한천마는 주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표 이사로 직접 선임됐다. SS 그룹에 자산을 건 주주들은 쓰러진 한 회장의 직계라는 햇병아리 열성 알파보다, 이채가 서린 눈동자로 저들 발 앞에 돈길을 깔아 줄 극우성 알파를 선호했다.

하루아침에 굴러온 돌이 SS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다고 일부 임원은 반발했다. 그러나 그들도 알았다. 한천마는 단순한 돌이 아니라는 걸. 그는 광물이었다. 그는 쇠붙이였고, 보석이었고, 수은이었다. 날카로운 칼이 될 수도, 그룹 전체를 치장하는 액세서리가 될 수도, 사람을 중독시켜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SS 그룹 대표 이사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한천마는 유명 인사였다. 서울에서는 50년 전에 끝났다는 범죄와의 전쟁이 아직도 빗발치는 신산의 그림자 면을 싹싹 쓸어, 제 발밑에 정리를 해 놓았다. 거대한 카지노를 운영하며 조직원을 굴리는 그는 범죄 조직 보스였고, 일부 비리 경찰들의 친구였으며, 신산시를 제 뜰처럼 사용하는 오실의 주인이었다.

범죄자가 어떻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겠느냐며 일부 주주들이 목소리를 키웠으나 그에겐 실질적인 전과 기록이 없었다. ‘카더라’는 소문만이 수백 수천일 뿐, 그의 피부 위에는 그 흔한 흉터는커녕 조그마한 문신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한천마를 두려워했다. 당장 그의 옆에는 네 갈래로 찢긴 입술을 얼기설기 꿰맨 실을 매달고 다니는 강명경이 있었고, 온몸을 문신으로 뒤덮은 부하들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에서 한천마만이 깨끗했다. 말끔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더럽고 흉악스러운 면을 반증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로서의 실력은 극우성 알파라는 성향이 증명했다. 대다수 우성 알파들은 어느 분야에서건 괴물 같은 면이 있었다. 외모적으로도 빼어났고 기질적으로도 우수했다. 한국에 몇 없는 극우성 알파인 한천마의 기질이야, 말해 입 아픈 문제였다.

‘대표 이사’라는 직함을 달자마자 한천마는 기나긴 전성기를 누리던 플랜트 사업의 규모를 가차 없이 줄였다. 곁다리로 얹어 놓은 사업체 두엇을 경매에 올리는 만행을 두고 쯧쯧 혀를 차는 임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저유가 시대와 경기 침체가 닥쳐왔다.

어리바리하며 하나둘씩 적자를 보기 시작한 동류 사업체들과 달리 SS 그룹은 귀신같이 상승세를 탔다. 라이벌 기업들이 희망퇴직이며 구조 조정으로 인력을 줄이고 몸집을 부랴부랴 줄이는 동안 SS 그룹은 자동차와 제철 사업에 무게를 실었다. SS 건설이라는 이름의 작은 건설사를 만들어 일을 더 벌리기까지 했다. 배다른 동생인 한권우를 건설사 사장 자리에 앉히고, 기존 사업체에서 굴러떨어져 오리알 신세가 된 임원들을 집어넣자, 대표 이사로서의 기질이며 자격을 운운하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한천마는 괴물의 DNA가 심겨 있는 남자였다. 그 괴물은 의지를 실현으로 옮길 수 있는 천재성과 나중 일을 내다보는 눈을 타고났으며, 한순간도 자신의 한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메가는 물론이며 알파들까지 현혹하여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자리매김했다.

…여기까지가, 후비진 뒷골목을 이리 떼굴 저리 떽떼굴 굴러다니며 살아온 스물두 살의 청년, 기설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골 아픈 이야기다.

기설에게는 상식이 없다. 그는 ‘낫다’와 ‘낳다’를 구분할 줄 모른다. ‘아니에요’를 ‘아니예요’라고 적으며, 아는 말 중 제일 어려운 단어는 ‘슭곰발’인데 그 단어의 정확한 뜻이 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에게 ‘슭곰과 발을 합친 합성어’라고 알려 준다면 ‘합성어가 뭐냐’고 묻고는 그 일조차 며칠 내로 까먹을 것이다.

기설의 세계는 그렇게 굴러갔다. 메주를 팥으로 쑤는 줄 아는 이 남자의 세계는 똑바로 걷지 않는다. 누군가의 발에 차이고 주먹에 맞아 가며 전자 오락기 속 핀볼처럼 굴러다닌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그의 상태는 기스가 잔뜩 난 중고품이었다.

속이 텅 빈 중고 핀볼로서 기설은 한천마라는 남자 뒤에 복잡하고 구체적이고 어려운 표현을 붙이지 못했다. 기설이 아는 한천마는 그저….

‘되게 아름답고 무섭고 이상한 형님.’

그뿐이다.

오늘, 기설 앞에서 되게 아름답고 무섭고 이상한 천마 형님께서는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기설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언뜻 다정해서 온기마저 풍겼다. 기설은 지난밤 그에게 짓밟힌 성기가 아직도 저릿저릿한데, 한천마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양말을 걸어 두고 푹 잔 아이처럼 개운한 낯이었다.

키는 198cm, 직업은 SS 그룹 대표 이사, 미스테리한 등장 설화를 지닌 한천마는 산타 할아버지께서 요술을 부려 가져다준 선물이 마음에 든다. 링 위에서 상대 선수를 때려 죽인 멍청한 또라이는 반짝이 포장지와 붉은 리본 대신 칼라가 빳빳한 정장 세트를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꾸며 놓으니 기깔 나네.”

흡족한 미소를 띠며 천마가 말했다. 칭찬받아서 좋은지 기설이 입술 끝을 씰룩거리더니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기깔 난다’는 천마의 평가처럼 기설에게선 어제의 어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에 치이기까지 했건만 남은 생채기라고는 성기에 남은 약간의 얼얼함과 왼쪽 콧대에 조그맣게 생긴 보라색 멍울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볼만했다. 품에 딱 맞는 흰 셔츠가 탄탄한 흉곽과 근육으로 다져진 잘록한 허리를 포장했으며, 어깨가 떡 벌어지고 등판이 너른 덕에 재킷의 라인이 보기 좋았다. 기다란 다리를 감싼 바지와 검은 구두에선 금욕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모든 것이 기설의 몸에 딱 맞았다. 동시에, 딱 그만큼 어색했다.

장례식에도 가 본 적이 없던 기설이었다. 평생에 정장을 입는다는 게 처음이란 의미였다. 곧게 선 채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경호 요원이나 카리스마 있는 모델 같지만, 천마를 올려다보며 헤실헤실 미소 지으니 동네 바보가 따로 없었다.

“저, 이거… 입고 뭘 하면 됩니까?”

우유부단한 말투는 또 어떤가. 천마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기설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저 말투며 행동거지를 고쳐 줄까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길어 봐야 한 달쯤 갖고 놀다 버릴 섹스 토이에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으므로.

“주먹은 쓸 줄 알잖아. 그렇지?”

다만 그렇게 물었다.

기설은 입 안의 혀를 잠시 달싹거렸다. 무어라 대답하기에 퍽 모호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주먹이야 쓸 줄 알았다. 너무 잘 쓰는 바람에 덩치 커다랗고 신체 건강한 복싱 선수를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기설의 주먹은 오로지 링 위에서만 쓰여 온 도구였다. 그 밖의 공간에서 사람을 향해 주먹을 갈겨 본 일이라고는, 작년 겨울 삼거리 포장마차에서 알바할 적에 여자 친구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취객을 제압했던 적뿐이었다.

기설의 천성이 그랬다. 운동선수치고 그는 매우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타고나길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누구 앞에서 그다지 나쁜 놈도 되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조차 착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착한 어른이 되는 거.’

한때는 그게 기설의 목표였었다. 그에겐 반면교사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열 살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자라, 뒷골목을 전전하며 나쁜 어른만 만나고 나쁜 버릇만 익혀 온 기설이었다. 그는 나쁜 길로 빠지지 않으려고 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렇게 연마한 주먹을 이제는, 기설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무섭고 가장 나쁘고 가장 센, 한천마를 위해 쓰게 생겼다.

아주 역설적인 일이었다. 열심히 달아났는데 도착하고 보니 360도를 돌아, 한천마의 곁에 서게 되다니….

“아가.”

천마의 손이 기설의 짧은 앞머리를 툭, 건드렸다. 덩그러니 선 채 생각을 굴리던 기설이 퍼뜩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예!”

그러곤 큰 소리로 대답했다.

“쓸 줄 압니다, 주먹. 쓸 줄 알아요.”

“그래. 그럼 내 뒤에 꼭 붙어 다니자.”

언뜻 청유형으로 들리지만 그들 사이 계약을 생각해 보면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기설은 어리바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에 꼭 붙어 다니라는 말의 의미는, 머릿수 채우는 일이라도 하라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됐다.

이어 한천마가 긴 복도를 걸었다. 지난밤,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제가 엎어져 있던 거실과 연결된 복도였다. 기설은 2층으로 통하는 우아한 계단과 순백색의 벽에 걸린 동양화 작품들을 구경하며 천마를 쫓았다. 그에게 들은 말대로 ‘뒤에 꼭 붙으려’ 다가선 것이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끼어들어 기설의 가슴팍을 밀쳤다.

팍 소리가 나도록 세게 얻어맞고는, 기설은 상체를 휘청거리며 뒤로 밀렸다. 당황한 얼굴을 추켜들자 어젯밤부터 내내 기설을 깔보던 시커먼 사내가 더더욱 떨떠름해진 눈길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천마도 대단히 큰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몹시 키가 컸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천마는 큰 몸으로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긴다는 것이고, 그는 누가 봐도 떡대 깡패 새끼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강 실장.”

반면 그를 지칭하는 표현은 꽤 점잖았다. 한천마의 호명 한 번에, 강 실장은 기설을 밀어 내던 손을 거두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그와 기설 사이에 맴돌았다. 기설은 눈치를 살피며 천마의 뒤를 재차 쫓았다. 이번엔 너무 바짝 붙지 않고, 두어 발짝의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강 실장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천마와 그 뒤를 쫓는 기설을 묵묵히 노려봤다. 그는 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천마의 집 안까지 하룻밤 만에 굴러들어 와 달갑지 않은 손님인지 노예인지가 된 것도,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인 것도, 지하 1층 버튼을 누르는 강 실장의 손을 빤히 구경하는 것도, 모든 게 모자라게만 보였다.

한천마는 기이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남자라, 한번 그에게 충성한 사람들은 쉽사리 그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았다. 지금은 실장이라는 명함을 달게 된 강명경도 그런 사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잠자리 상대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그들 중 누구도 한천마의 침대에 두 번 이상 눕지 못했다.

‘열한 번이라….’

흉터투성이 입술을 꽉 다문 채 강 실장은 천마와 기설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고 섰다. 한천마의 가장 오래된 측근이자 부하로서 그가 지닌 별명이 ‘집사’였다. 자잘한 심부름부터 사적인 뒤처리까지 빠짐없이 챙기기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강 실장의 눈으로 볼 때 기설도, 언젠가 자신이 치우게 될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는 그렇게 예지했으며 또 그러길 바랐다.

땡.

경쾌한 소리를 내며 승강기 문이 열렸다. 주차장에서 진작 대기 중이던 리무진이 천마를 반겼다.

기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마냥 신기했다. 기절한 채 잡혀 온 이후 그는 밤새도록 같은 건물 내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5층이 최고층인 줄 알았던 건물에는 숨겨진 통로가 미로처럼 존재했고, 숨겨진 6층에는 7층으로 향하는 우아한 계단이 있었다. 아마도 6, 7층이 한천마의 집인 것 같았다. 건물이 통째로 한천마의 기지인 셈이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기설은 다소 긴장했다. 그는 시커먼 건물로 옮겨 가면 깡패들이 일렬로 서서 ‘안녕하십니까’ 인사한다거나, 누굴 죽이고 부둣가에 흘려보낸다거나, 협박 상대를 산 채로 시멘트 통에 담근다거나 하는, 누아르 필름 속 풍경을 상상했다.

그러나 한천마는 누구의 눈을 뽑지도 않았고 손가락을 자르지도, 사람을 팔아 치우지도, 심지어는 총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회사 대표 이사실로 출근해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한 대표의 비서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 실장은 물론이고 기설에게도 따듯한 커피를 내려 주었다.

오전 내내 한천마는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복잡한 사업 관련 보고를 받고, 전화를 몇 통 돌렸다. 오후에는 업무적인 미팅을 가졌다. 한성 그룹의 상무 이사가 도착했다고 비서가 알려 줄 무렵, 기설은 대표실 바깥에 놓인 대기용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다.

진남색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복도를 지나왔다. 눈썹이 곧고 눈매가 잘빠졌는데, 얇은 입술에서 고집스러운 성격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 ‘한성’이라면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기업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기설은 생각했다.

‘그런 데서까지 회의를 하자고 찾아오는구나. 형님 완전 사업가시네….’

한성 그룹의 상무 이사 강일해가 대표실로 들어서자 복도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대표실 밖으로, 천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설은 귀가 밝은 편이라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를 제법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래 봐야 기설에겐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처럼 한 번 듣고 흘려보내는 말들에 불과했지만, 대표실 안을 맴도는 대화며 두 남자의 음성이 무척 도란도란하니 사이좋게 들려왔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 중입니다. 국회 갤러리도 미리 빌려 뒀고요. 8월 중으로 전시회 열 거고, 검사장 쪽 여당 의원님들 다 모일 겁니다. 한 대표님께서 설계만 맡아 주세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강일해가 말했다.

‘미술관 건물이라도 짓는가 보다.’

기설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쪽 관할까지 건들지만 않으시면 그만인데, 말이 안 통하니 별수 없지. 나야 쇠뿔 하나 뽑는 게 목표고, 강 이사는 동생 콧대나 뭉개 주면 그만인 거 아냐.”

한천마의 대답은 심드렁하니 튀어나왔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댄 채,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쇠뿔’이란 돈을 발라 꼬드기고 침을 발라 회유해도 쉽사리 소신을 꺾지 않는 여당 의원을 지칭하는 속어였다. 기업가와 정치계는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고, 한천마와 몇몇 쇠뿔 의원도 마찬가지로 실타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 도시 신산 안에서, 법은 한천마를 공격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를 재판소에 올려놓을 수 없고 함부로 그의 면전에 영장을 내밀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일부 의원님들께서 SS 그룹의 뒤를 봐주는 일부 검사와 경찰들을 들쑤시는 정황이 포착됐다. 덕분에 천마는 꽤나 곤란하고 귀찮게 됐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던가? 불운을 말하는 옛말들은 한천마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그가 약을 짓고자 하면 필요한 개똥이 손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개똥의 이름은 ‘강일해’. 그는 제 동생이 검사장 집안의 우성 알파와 정략결혼하게 되었다며, 서로를 위해 손을 잡지 않겠냐고 먼저 도움을 구해 왔다.

한성 그룹의 상무 이사 강일해는 우성 알파인 누나의 기에 눌리고 유명 화가인 동생의 명성에 치이는 한심한 남자였다. 열성 알파인 그에게서 풍기는 체향은 페로몬이 아니라 열등감의 지린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저와 손잡을 남자가 더럽고 추잡한 사람임은 한천마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일해의 손에 똥이 묻어 있다면, 한천마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므로.

재기 불가능한 수준의 돈세탁 혐의를 덮어씌워 정적을 몰아내는 게 한천마의 목표였고, 같은 방식으로 의원들과 친밀한 검사장의 명성을 뒤집어엎어 놓는 게 강일해의 바람이었다.

강일해가 유명 화가인 동생의 작품을 미끼로 던져 의원들을 한데 모아 준다면, 그리고 그 의원들이 어찌 됐건 고가의 작품을 구입하기만 한다면, 돈이 오가는 순간 한천마는 어떤 구설이건 그들 아가리에 꿰어 박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여론을 선동한 정치적인 장난질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서로 좋은 거래 합시다. 계획대로, 약속대로 해. 판만 잘 올려, 나머지 일은 다 이쪽에 맡기시고.”

천마는 강일해를 훑어보며 대놓고 웃었다. 기업가에는 이렇게, 놀랍도록 찌질하고 한심한 자식들이 많았다. 질투할 게 따로 있지, 탄탄대로에 올라탄 동생의 인생을 망쳐 보겠다고 신산까지 쫓아온 강일해였다. 한천마 입장에서는 몹시 우스운 졸개였다.

“그건 그렇고, 사업 얘기도 슬슬 나눠야지?”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며 한천마가 말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는 사업 얘기가 아닌가?’

기설이 어리둥절하니 아직도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비서는 계약서 파일을 챙겨 들고 잰걸음으로 대표실로 향했다. 너른 창을 통해 기설은 천마의 어깨너머로 허리 숙인 비서의 정수리와,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 천마의 입술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전언을 듣고는 비서는 다시금 자신의 데스크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따듯한 차를 한 잔 내렸다. 찻잔은 곧장 기설의 무릎 앞에 건네졌다.

“어, 고맙습니다.”

기설은 쭈뼛거리며 잔을 받고는 호로록 두 모금에 차를 털어 넣었다. 마침 갈증이 나고 좀이 쑤시던 차였다.

그러고 나니 방광을 비우고 싶어졌다. 화장실이 어디 있나 찾기 위해, 기설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비서가 전과 다를 바 없이 상냥한 태도로 그를 만류했다.

“허락받고 움직이시라는 대표님 말씀입니다.”

기설은 ‘아’ 하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딜 가려는 건 아니고, 그냥 화장실을 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비서가 말했다.

“기설 씨가 먹는 것, 마시는 것, 싸는 것도 전부 직접 허락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적인 감정은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

부끄러운 쪽은 기설이었다. 귓불에 작은 불씨가 튀는 느낌이었다. 싸는 것도 허락을 받으라니, 저 진지한 분위기의 회의 도중 그런 귓속말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럴 줄을 알았더라면 커피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진 않았을 거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들은 말을 전해 줄 뿐인 비서에게 무어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설은 얌전히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20분쯤을 기다렸다. 일을 마치고 한천마가 대표실 밖으로 나오면, 화장실에 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성의 상무 이사가 대표실을 떠나고 비서가 두어 번 더 서류철을 건네주기 위해 대표실을 오가는 동안에도 한천마는 모습을 보여 주질 않았다. 기설은 슬슬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중에는, 앉아 있어서 더 방광이 눌리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붙어서 뒷짐을 지고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자리를 비웠던 강 실장이 돌아왔다. 오른손에는 통신사 마크가 그려진 쇼핑백을 들었고 왼손으로는 과일 상자를 품에 안은 너절한 사내의 팔뚝을 쥔 채였다. 안경알에 김이 서리도록 습한 숨을 헐떡헐떡 내쉬는 사내는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강 실장은 벽에 붙어 선 기설을 힐끔 살피더니, 그 사내를 데리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몇 분간 대표실 밖으로 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먹거리며 말을 시작한 남자의 언성은 무척 높았고 분에 차 있었다. ‘억울하다’는 외침과 ‘도와 달라’는 호소가 불분명한 문장들 속에 섞여 나왔다.

힐긋 시선을 돌렸다가 기설은 놀랐다. 너른 창을 통해 보이는 대표실 내부에서 천마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강 실장이 사 온 새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두들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찾아온 남자가 건넨 과일 상자는 진작 엎어진 상태였다. 과일 대신 빽빽하게 상자를 채웠던 현금 뭉치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내가 돈 받고 일 쳐 주는 용병인 줄 아나 본데.”

툭, 툭툭, 손에 쥔 휴대폰을 두들기며 천마가 말했다. 탐탁지 않다 못해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네.”

그렇게 한천마는 우는 사내를 내쳤다. 창을 통해 보이는 사내의 뒷모습이 눈물에 젖은 듯 무거워 보였다. 바닥을 설설 기며 가져온 돈뭉치를 주워 담는 중년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기설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 돈이면… 내 빚이랑 이자를 갚고도 남을 텐데.’

강 실장의 팔에 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중년의 모습이 퍽 처량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람이 경찰이 아닌 한천마를 찾아올 사유가 뭘까 기설은 잠시 궁금해했고,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오줌 마렵다.’

그때쯤 천마가 복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저 멀끔하니 깨끗한 게, 아침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상태였다. 새하얀 셔츠 칼라의 위쪽 단추를 하나 풀면서, 천마는 기설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의 뒤로 따라붙어 멈추어 선 채 기설은 갈등했다. 화장실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대뜸 오줌이 마렵다느니 방광 좀 비우고 싶다느니 허락을 구한다는 게 아주 이상하고 부끄러운 일로 생각됐다. 기설이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별수 없이, 기설은 입을 다문 채 그를 따라 승강기에 올랐다.

큼직큼직한 창문들이 크리스털처럼 반짝거리는 높다란 빌딩 밖으로, 천마를 쫓아 기설과 강 실장이 걸어 나갔다. 대기 중인 차는 어느새 리무진에서 서버밴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자, 천마가 하품하며 뒷좌석에 올랐다.

그가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며 기설을 바라봤다. 아주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기설이 말했다.

“저, 형…님. 저… 화장실 좀 잠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무조건 허락을 구하라고 한 건 한천마 쪽이었다. 그러니 이건 아주 이상한 질문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기설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리고 한천마는, 그런 기설을 무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안 돼.”

가뿐하게 대답하며 웃어 보인 것이었다.

“타라, 얼른.”

기설은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두 무릎이 바짝 붙고 발목이 배배 꼬이는 생리적인 반응이 먼저였다. 하루 반나절쯤 화장실을 못 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배뇨감을 참기가 고역이었다. 못 싼다고 생각하니 더 마려운, 청개구리 심보도 압박감을 한몫 거드는 것 같았다.

기설은 허리를 곧게 펴고 자리에 앉아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그때 툭, 딱딱한 것이 기설의 팔뚝에 닿았다. 딴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기설은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팔뚝 위로 접어 올린 한천마가 보였다. 굵고 커다란 손안에, 500mL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목마르지?”

페트병의 뚜껑을 친히 열어 주며 천마가 물었다.

“…….”

상냥하게 반짝이는 천마의 눈을, 기설은 아주 당황한 채 마주 보았다. 기설은 감정을 숨기는 데엔 젬병이었다. 곤혹스럽고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그의 낯 밖으로 줄줄 새어 나갔다.

그런 얼굴이 천마를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을, 그만이 몰랐다.

“저, 목이 안 마릅니다.”

기설이 뻣뻣하게 대답했고,

“마셔.”

천마가 생수병을 쓱 내밀었다. 마지못해, 기설이 두 손으로 병을 받았다. 그러곤 반 모금을 꿀꺽 삼켰다.

“전부.”

천마가 재차 명령했다.

‘…일부러 이러는 거구나.’

병 입구를 입술에 대고, 기설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오늘따라 500mL 생수의 양이 더욱 많고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배가 부른 느낌이 들 때까지 기설은 인내하며 물을 삼켰다.

바닥이 드러나도록 생수를 비우는 동안, 천마는 그의 목울대를 구경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털어 낸 기설은 제 입가에 흘러내린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닦아 냈다. 낯빛이 전보다 붉어지고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기울어진 채였다.

이제 어디로 향하는 것이건 목적지에 화장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량이 부드럽게 정차했다가 움직일 때마다,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기설은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했다. 몸 안의 물주머니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마침내 서버밴이 정차했다. 기설은 천마가 이동하는 차종과 복장을 바꾼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렸다. 목적지는 건물 올리기가 한참인 거대한 공사 현장이었다. 두툼하고 묵직한 밴이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천마에게선 오전과 달리 활동적인 인상이 풍겨, 현장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곧 관리자가 후다닥 달려 나와 한천마 대표를 반겼다. 인부들이 쓰는 것과 같은 안전모를 썼지만 그뿐, 얼굴에는 주근깨 하나 없고 바짓단에는 흙 알갱이조차 묻히지 않은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임원이었다.

“아, 대표님!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 기설은 천마를 관찰하길 포기했다. 눈앞이 핑핑 돌고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모든 집중력이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쏠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가는 오줌을 줄줄 지려 버릴 것 같았다. 공사장 곳곳에 보이는 물병만 봐도 오줌이 마려웠고, 이제는 변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밴 옆에 붙어 선 채 기설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천마는 그런 기설을 구태여 제 옆으로 손짓해 불러 놓았다. 기설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 옆으로 다가가, 섰다.

일순 건설 현장의 임원들은 내심 긴장했다. 그들 눈에 비친 기설은 마치, 강 실장의 뒤를 잇는 경호 대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훤칠한 키에 어깨는 떡 벌어진 남자는 콧대와 입가에 생채기를 달고 있는 데다 무척 매몰찬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이 금방이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것처럼 구겨진 채였고 관자놀이 위로는 사내다운 핏대가 두드러져 보였다.

“편하게 좀 둘러보고 싶네.”

한천마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러자 임원이 허리 숙여 인사를 전하고는, 진행 중인 건설 과정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뒤로 빠졌다.

덕분에 천마는 느긋하게 공사 현장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기둥 골조와 바닥의 철강 판을 지나 푸른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기반은 모두 다져 놓았고 시멘트를 부을 준비에 한창인 현장이 드러났다.

컴컴하고 적막한 현장 한가운데로 오후의 따가운 볕이 스미고 있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새하얗게 반사되어 보였다.

“저도… 막일은 해 봤습니다.”

저릿한 사타구니를 생각에서 지워 보려, 기설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벽면의 철골 구조를 휘 둘러보던 천마가 웃음 지었다.

“오, 그래?”

“예. 이렇게 큰 건물은 못 지어 봤지만요. 제가 벽돌 올린 건물이 신산에 다섯 채는 됩니다.”

“오.”

천마가 가벼운 감탄사를 뱉었다. 공사판에서 일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음을 천마는 알았다. 다섯 번씩 일꾼으로 쓰이고 벽돌을 좀 올려 봤다 하면 일머리는 있다는 의미였다. 사고 치고 호구 잡히고, 온종일 오줌 마려운 개가 되어 쩔쩔매기에 순 멍청한 줄 알았더니, 시키는 일은 또 잘하나 보다 싶었다.

천마는 건성으로 칭찬했다.

“대단하네, 기설이.”

제가 지은 건물이 몇 채이건 그런 걸 듣기 좋은 얘기처럼 말하는 기설이 우스웠다. 벽돌 올린 건물이 신산에 다섯 채라…, 한천마는 제 소유의 건물이 몇 채인가를 떠올려 보았다가 그저 웃었다.

남의 배를 갈라 황금을 뽑아 먹는 베짱이의 눈에는 성실한 개미가 귀여웠다.

“이리 와.”

한천마가 휘휘 손짓하며 앞서 걷자 기설이 말 잘 듣는 개처럼 터벅터벅 다가왔다.

이내 기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천마가 그를 불러들인 천막 텐트 속에는 플라스틱 의자 두어 개가 겹쳐져 있고 아직 뜯지 않은 시멘트 포대가 쌓여 있을 뿐, 달리 둘러볼 어떤 것도 없었다. 이렇게 깊숙한 공간에서 무얼 살피고자 하신 거냐고 묻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기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천마는 반지르르하니 고급 정장으로 포장된 기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오른손이 기설의 바지 중앙에 철썩 들러붙었다.

“헉….”

그대로 콱, 손에 잡히는 성기를 움켜쥐자 단단한 기설의 몸이 움찔거리며 삽시간에 수축했다. 후욱… 더운 숨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갔다.

“아, 어, 형님….”

“응?”

손안에 잡힌 살덩이는 가엾게도 반쯤 단단해져 있었다. 흥분해서 발기한 건 아닐 테고, 오줌이 요도 끝까지 꽉 찬 듯했다. 힘주어 더욱 세게 움켜쥐자, 기설의 양 무릎이 서로 바싹 들러붙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기설이 헐떡거렸다. 얼굴 위로 단번에 땀방울이 샘솟았다.

“저, 저, 여기서, 여기서는….”

“여기서는, 뭘?”

천마는 기설의 바지 벨트를 콱 쥐고는 위로 당겼다. 기설이 ‘큭’ 신음하며 두 손으로 가랑이를 가리려 들었다. 바지와 속옷이 들러붙어 죄인 엉덩이와 성기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고통스러운 듯 시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좁은 천막 안에서 메아리쳤다.

“열중쉬어.”

천마가 속삭였다. 군인 같은 명령에 놀리는 듯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기설은 뺨이 구겨지도록 오만상을 찌푸린 채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쥐었다. 구부러졌던 허리를 애써 펴고,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섰다.

그리고 쑥, 벨트가 풀리는 동시에 바지와 속옷이 발목 아래로 떨어졌다. 훤하니 성기가 드러나자 기설의 얼굴은 더는 붉어질 수 없을 만치 순수한 빨강으로 뒤덮였다. 꺼덕거리며 올라붙은 성기가 와이셔츠 깃에 닿을 지경이었다.

“으음.”

침음하며, 천마가 검지 끝으로 기설의 성기를 툭, 툭 건드렸다. 귀두를 통통 두들길 때마다 기설은 ‘허억’, ‘허윽’ 밭은 신음성을 냈다. 진분홍빛으로 물든 귀두 끝에서 찔끔, 물방울이 새어 나와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곧게 허리를 세운 기설 앞에 바짝 붙어 서며, 천마는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기설은 시선을 어찌 둬야 할지 몰라 천마의 오른쪽, 왼쪽 눈을 번갈아 살펴 댔다. 흔들거리던 눈동자는 제 성기를 콱 움켜쥐는 압박감에 꽉 감겼다. 입술이 벌어지고 헐떡이는 숨이 터져 나왔다.

“허, 윽…, 아, 악….”

기설의 표정을 빤히 관찰하며 천마는 그의 성기를 주무르고, 당기고,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괴롭혔다. 그때마다 기설의 허리가 좌로, 우로 뒤틀리고 고개는 점점 밑으로 수그러들었다. 턱 아래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마침내 기다랗고 잘생긴 성기가 절로 꺼덕거리는 순간에, 천마는 그를 골려 주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사정하기 직전에 멈추어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내려다봤다. 주인의 얼굴처럼 반듯하니 잘생긴 성기는 안쓰러울 정도로 달아오른 채였고, 귀두 끝의 아주 조그만 구멍 밖으로 묽은 프리컴을 울컥울컥 흘리고 있었다.

“어디 갖다 박겠다고 물을 흘려?”

천마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는 손가락을 튕겨, 기설의 성기를 퉁, 퉁 때렸다. 찌릿찌릿한 자극에 기설이 죽는 신음을 내질렀다.

“흐…읍, 흐윽! 형, 형님. 제발, 악….”

그 꼴이 재밌어 천마는 하하 웃었다. 기설을 싫어하거나 미워해서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보기 싫거나 하는 양이 미웠더라면 다신 제 눈앞에 띄지 않게 없애 버렸을 것이었다. 기설이 좋고 귀여워서 괴롭히는 것이었다. 보여 주는 표정이며 쩔쩔매는 반응이 무진 재미있었다.

피식 실소하며 천마가 손을 홱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에 철썩 맞은 기설의 성기가 아래로 홱 내려갔다가, 도로 꺼덕거리며 배에 닿게 곧추섰다. 셔츠 깃에 프리컴이 질척하게 묻었다.

“…….”

기설은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자극과 성감을 못 이겨 허공에 대고 허리를 튕기듯 흔들 뿐이었다. 두 눈동자에 점차 설움이 찼다.

“쉬이…, 그래.”

마침내 천마는 어린 개를 놀리길 그만두었다. 불처럼 달아오른 질척한 살덩이를 아주 부드럽게 한 손에 쥐고는, 다정하게 쓸어 주기 시작했다.

“아…, 헉, 허억….”

눈에 띄게 비틀거리며 기설이 어깨를 웅크렸다. 그의 잇새로 전과 달리 야릇한 신음성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 으…, 흐응, 읏….”

뒷짐을 꽉 쥔 채 쩔쩔매는 기설의 성기를 매만지며, 천마는 남는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뒤통수를 쥐고는 제 어깨에 고개를 묻게끔 당겨 주자, 기설이 그의 품 안으로 허물어지듯 들어왔다.

“기다려.”

엄지 끝마디로 요도를 문지르며, 천마가 명령했다.

“하으, 읍….”

“쉬이…, 기다려.”

“네, 네….”

쓱, 쓱 살 비비는 색정적인 소리와 헐떡거리는 기설의 밭은 호흡만이 밀폐된 공간을 울렸다. 애원하는 듯 기설이 천마의 목에 제 뺨을 내리누르고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천마는 기설을 돌려세웠다.

“학….”

그의 둔부를 제 앞섶에 바짝 붙이며 천마가 말했다.

“싸도 돼.”

올라붙은 기설의 엉덩이에 발기한 제 물건을 맞댄 채, 천마는 손안의 성기를 흔들었다. 쓱싹쓱싹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지르는 자극에 기설은 신음성을 내지르며 정액 두어 방울을 울컥울컥 싸다가, 잠시간 아무것도 하질 못하고 멈추었다. 고통스러운 듯 숨을 참았다가 터뜨리는 순간에 물이 쪼르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흐으, 으, 윽….”

참아 보려는 양 이마를 찡그려도 그뿐, 한번 터져 나온 물은 그치질 않고 줄줄 흘렀다. 끊어 내 보려 찔끔찔끔 멈추는가 싶다가도, 소 젖을 쥐어짜 내기라도 하는 양 천마가 쥐고 흔들면 다시금 정액이, 그리고 물이 번갈아 새어 나왔다.

“허억, 헉….”

마침내 시멘트 바닥이 땀과 물과 체액으로 흥건해지고, 온몸의 진이 빠진 기설이 천마의 상체에 등허리를 완전히 기대어 왔다. 배뇨를 마친 뒤에도 기설은 한참을 더 헐떡거리며 해방감의 여운에 눈을 붉혔다. 달아오른 성기가 시무룩해진 꼴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말랑해진 기설의 남성을 제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천마는 작게 웃었다. 그러곤 누덕누덕해진 손수건을 홱 던져 버리고, 지저분해진 제 손은 기설의 가슴팍에 문질러 닦았다.

기설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천마가 붙잡아 주질 않자, 그는 바짓단에 발목이 걸려 시멘트 바닥 위로 털썩 자빠졌다.

허물어진 다리를 달달 떠는 기설의 앞에서, 천마는 제 정장 바지의 무릎 부근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곧이어 편안하게 쪼그려 앉았다. 진 빠진 기설의 낯짝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기설은 느꼈다. 한천마는 타고난 지배자임을. 그는 타인의 인간성 따위는 손쉽게 발가벗기고, 남의 자존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기설은 쉬운 장난감이었다. 기설조차 그 사실을 알았다. 저처럼 멍청하고 경험 적은 남자를 다루기는 종이비행기 접듯이 손쉬울 것임을.

그 생각을 하니 어째선지 시무룩해져, 기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 좌절한 자세로 엎어진 기설의 턱 밑으로 천마의 손이 들어왔다. 그대로 그는 기설의 턱을 잡고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리고 놀란 얼굴을 보여 주었다.

“기설이, 안 우네?”

기설의 두 뺨은 색이 붉었다. 빨간 나비가 코에 앉아 날개를 펴면 그런 얼룩이 남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피부를 종이처럼 쥐고 구기기라도 한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채였다. 그러나 눈물만큼은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천마의 질문에 당황한 듯, 기설이 눈을 끔벅거렸다.

“…제가 울어야 합니까?”

그리고 되물었다. 반쯤 쉰 채 새어 나온 목소리였다.

천마의 미소가 보다 짙어졌다.

“기설아. 내가 왜, 고작 빠구리 몇 판 뜨자고 너한테 이러는지 아니?”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건네 놓고, 천마는 제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물고 품을 재차 뒤적이기에, 기설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흙이 묻어 더러워진 바지를 얼른 올려 입고, 대충이나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천마의 옆으로 다가갔다. 천마의 손에서 성냥갑을 건네받고,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서였다.

눈치 빠른 기설의 행동에 천마가 웃었다. 성냥개비가 만들어 낸 작은 불 앞에서 픽 웃는 그의 얼굴은 매정한 조각상 같았다.

한천마는 아름다웠고 멋진 남자였다. 같은 남자인 데다 베타인 기설의 눈에도 매력적인 사람이니, 그가 원한다면 길을 지나는 어느 오메가라도 손짓 한 번, 미소 한 조각으로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을 터였다.

기설은 어째서 이런 남자가 구태여 저를 잡아 두고, 똥개처럼 훈련을 시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을 괴롭히면서 즐기는 변태라면 또 모를까….

“…네가 안 울어서야, 기설아.”

한천마가 꺼내 든 이유는 뜻밖이었다.

“나는 질질 짜는 소리 듣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남자든지 여자든지. 베타든지 오메가든지.”

홀린 듯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기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구나’ 단순한 대꾸를 반복했다.

“떡을 치자면 오메가가 좋은데 백날 천 날 울고불고 매달리니 지겨워서 말이야. 각인을 했네 어쨌네 죽는소리하는 것도 듣기 싫고, 그렇다고 베타를 잡아다 자자니까 내 좆이 너무 커서 힘들다나 뭐라나.”

‘그렇구나….’

“빠구리 좀 치자는데 지랄 지랄을, 씨발 질질 짜는 소리를 침대에서까지 듣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렇…구나.’

“자, 그럼 기설아.”

“그렇구…, 아, 네, 네?”

“네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극우성 알파의 색정적인 고민을 별세계 소식 듣듯 청취하던 기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눈을 깜빡거리고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머리가 나쁜 편이래도 이 질문의 답은 분명히 알았다.

“절대로 안 울겠습니다.”

기설이 대답하자,

“그래.”

천마가 그의 머리를 탈탈 털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사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너는 내가 키우는 개인 거야. 밥도 물도 주는 대로 먹고 마셔. 똥 싸는 것도, 오줌 싸는 것도 허락받고 다녀.”

상냥한 음성이 담은 살벌한 명령을 들으면서, 기설은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업보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몸으로 때워서 돈 갚기가 어째 너무 쉽다고 생각했었다. 월 오백이라는 이자를 갚기 위한 조건이 정확히 무엇인지, 진작에 확답을 받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늦게 찾아왔다. 어제는 펠라티오를 했고 오늘은 고문 같은 괴롭힘을 받았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기설의 심장이 가슴 안에서 벌렁거렸다.

‘인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내일부터는 물을 좀 적게 마셔야겠다고, 기설은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정도라면 버틸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공사판 바닥에 오줌을 싼 일은 부끄럽지만… 어차피 시멘트니까 물이 만든 얼룩 따위는 금방 마를 거였다.

담배 한 대를 마저 피워 낸 뒤, 천마는 푸른 천막을 걷으며 밖으로 나섰다. 강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으로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기설은 바깥 눈치를 조금 살피다가, 시멘트 바닥 한편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웠다. 조금 전, 기설의 성기를 닦아 주고는 천마가 내버린 손수건에는 흙먼지와 불쾌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세탁하고 깨끗하게 다려 놓으면 다시 쓸 만할 거라 생각됐다. 하얀 손수건 구석에 수놓은 금색 새 무늬도 아주 예뻐 보였다.

구겨진 손수건을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기설은 바깥 눈치를 조금 살폈다. 제 쪽에 집중하는 시선이 조금도 없음을 알고 그는 조심스럽게 천막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는 바지 밑단이 조금 젖었을 뿐, 별다른 얼룩이 묻어 있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여민 다음, 기설은 다소 어기적거리며 천마와 강 실장의 뒤를 쫓았다.

천마는 가타부타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의 뒤로 온 신경을 집중하던 관리자들이 제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고개 숙여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넸다. 기설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겁게 느끼면서 졸래졸래 걸었다.

밴에 올라 뒷좌석 문을 열어 둔 채, 천마는 저를 따라오는 기설을 구경했다. 두고 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는지 불편한 걸음으로 따라붙는 꼴이, 꼭 주인을 놓친 강아지 같았다.

“참, 아가 선물.”

기설이 올라타고 밴의 문이 닫히자마자, 천마는 벗어 뒀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납작한 물건을 꺼냈다.

“휴대폰도 없어서야 무서워서 어디 다니겠어?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 위험한 도시를 평정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 그 위험한 도시에서 깡으로 살고 주먹으로 벌어먹고 살아온 기설 역시, 그 말에 어울리는 청자는 아니었다.

납작하기가 종이 수준인 최신형 휴대폰은 천마의 커다란 손에 들어 있으니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기설은 놀란 채 천마의 얼굴과 비싸 보이는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어 시간 전에, 대표실 바닥에 엎어진 채 울던 중년 앞에서 천마가 만지작거리며 갖고 놀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기설이 쭈뼛거리며 휴대폰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엄지 끝으로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리자, 화면 위로 밝은 불이 들어왔다. 주소록에는 ‘천마 형님’, 단 한 사람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그 외의 이름이 저장될 일은 없을 터였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감동받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탓에, 기설은 퍽 조용해졌다. 괜스레 화면을 좌로, 우로 넘겨 보며 낯선 휴대폰을 깨작깨작 건드릴 따름이었다.

천마가 그런 기설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잠깐이나마 딴생각에 잠겨 놀던 오른손이 두둑한 허벅다리 위에 덮이듯 내려앉았다.

“아가, 이제 이천만 원어치 일하러 가야지?”

우회적인 표현에 기설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구부러진 중지와 검지 아래서 알파의 성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

그리고 기설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조각상 보듯 감상하려던 순간에, 한천마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 새끼, 이게 뭐야?”

거친 말투로 소리 지르는 그의 앞에서, 기설은 낯설 만큼 부드러운 샤워 코롱 향기를 풍기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덩그러니 선 자체는 대단히 유혹적이진 않았으나, 단단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며 진분홍빛 젖꼭지, 흉곽 밑으로 역삼각형을 그리며 급격히 좁아지는 골반의 윤곽만으로도 충분히 알파를 꼴리게 했다.

문제는 기설의 왼쪽 골반 아래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선이 삐뚤삐뚤한 데다 색이 번진 그 문신은 네임펜으로 그리다 만 낙서처럼 퀄리티가 엉망이었고 완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모양은, 기설의 육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고양이 머리였다.

“어, 이거 문신이에요.”

기설은 제 성기와 골반의 사이 어드메, 애매한 위치의 애매한 문신을 손으로 문질렀다.

“무슨 문신이 그 모양이야?”

황당하다는 듯, 천마가 재차 웃음을 흘렸다. 진중하게 무게를 잡아 보려던 분위기는 산통이 깨진 지 오래였다. 천마는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 목욕 가운 앞섶을 벌리고 있고,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전직 복서는 뒷구멍을 벌릴 준비를 마쳤는데, 이 상황에서도 웃길 수가 있다니 기설은 과연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큭큭 울리는 천마의 웃음에 기설은 수줍기라도 한 듯 고개 숙였다. 그러곤 손끝으로 제 문신 위를 어루만졌다. 눈도 코도 입고 없이, 짝귀로 그려진 고양이 얼굴 윤곽은 불쌍할 정도로 찌그러진 모양새였다.

‘경이….’

간밤 놓쳐 버린 늙은 고양이가 다시금 떠올랐다. 기설이 그 고양이를 집에 들였을 적에 추정 나이가 여덟 살, 지금은 열 살이었다. 평생을 길고양이로 살아온 경이었다. 환기 좀 하자고 창문을 열어 두면 저 혼자 빌라 밖으로 나가 쥐를 잡아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기설이 하룻밤 자리를 비웠더라도, 놀란 마음이 진정된 후에는 알아서 집에 돌아갔을 거였다.

‘돌아갔…겠지? 집에서 잘 기다리고 있겠지?’

늙은 회색 고양이 생각에 정신이 멍해진 기설을,

“아가.”

천마가 일깨웠다.

“아, 네!”

기설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한나절 사이에 ‘아가’라는 호칭에 ‘네’라고 대답하게 된 처지였다.

“어, 그, 이거는…. 너무 아파서 문신하던 도중에 그만둬서 미완성이에요. 기계가 생각보다 너무 뾰족하고 너무 아프더라고요.”

“너 아픈 거 잘 참잖아.”

“제가 선인장 공포증이 있거든요.”

“뭐?”

“선인장 공포증이요.”

줄줄이 이어지던 대화는 거기에서 뚝 끊겼다. 기설의 배와 옆구리에 군데군데 남은 자상이 다섯 군데였다. 기습을 받아 칼빵을 다섯 번 지졌으니, 날카로운 것을 무서워할 만도 했다.

천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선인장이 아니라 ‘선단’ 공포증이겠지.”

그러자 기설이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저 그거 있거든요. 어…, 그래도… 형님한테 맞는 건 괜찮아요.”

“그래? 왜?”

“형님 거시기가… 뾰족하지는 않으니까요.”

“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천마는 제 옆자리를 퉁퉁 두들겼다. 기설은 벌거벗은 채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래도 후장 섹스라는 게 뭔지 알긴 알아서, 씻으라는 명령을 받고 샤워실에 들어갔을 때 열심히 뒤를 헹궜다. 여느 오메가들처럼 달콤한 냄새가 난다든가 뒷구멍이 말랑말랑하다든가 그런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제 뒤에 박는 일이 순 역겹지만은 않았으면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천마가 제 옆으로 다가온 기설의 덜 마른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 주고, 반듯한 이마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춰 준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문신이 이게 뭐야. 멀쩡한 몸에 낙서를 해 놓다니….”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짐짓 속상한 듯 들리기까지 했다. 어리둥절하니 그의 팔에 안긴 채 기설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고양이 싫어하세요?”

“아니. 좋아하는 편이지.”

이내 천마는 검지 끝으로 기설의 턱 아래를 살살 긁었다. 가까이 다가온 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기설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천마의 표정을 살폈다. 속눈썹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아름다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마리 키울까 생각 중이야.”

그러고는 기설의 몸을 슬며시 뒤로 밀었다. 탄탄한 등허리가 침대 매트리스에 깊게 파묻힌 순간 기설은 편안했고, 딱 그만큼 당황했다.

‘어라….’

이건 기설이 겪어 보지 못한 자리였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입장이었고, 당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왜 이렇게…. 다정하게 하지?’

그래서 기설은 곤혹스러웠다. 계약서를 쓸 때부터 몸을 씻고 옷을 벗는 순간까지, 솔직히 강간을 당할 거라 생각했다. 마구잡이로 제 머리채를 쥐고 구멍 안에 성기를 처박을 거라 예상했었다. 강간은 폭력이다. 기설은 폭력을 잘 견디는 편이었다. 폭력은 기설이 여태껏 버텨 온 세계의 성질 그 자체였으므로.

그러나 다정한 섹스라면 말이 달랐다. 여자와 자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침대에서 기설을 아래에 깔아 본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기설의 뒤를 넘본 곽창이는 뇌혈관이 터져 시체가 됐으니, 지나간 사건이야 없던 일로 쳐도 좋았다.

아무튼 기설은 게이도 아니었고 오메가도 아니었다. 그러니 제 머리칼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일 따위는, 허벅다리를 좌우로 넓게 벌린 채 커다란 사내를 올려다보는 순간 같은 건, 기설로서는 도저히 소화해 낼 수 없는 자극이었다.

“기설아.”

낮은 음성이 자못 다정하게 기설에게로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에 기설은 그가 어젯밤 제 목구멍에 좆 기둥을 욱여넣었다는 것도, 공사판에서 물을 질질 싸도록 괴롭혔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저 멍하니 풀어진 얼굴로 천마를 올려다보고, 긴장한 몸을 어색하게 뒤척거릴 따름이었다.

“뭘 그렇게 긴장했어, 응?”

“어, 아…, 아닙니다.”

그러나 다정은 거기까지였다. 한천마의 손가락이 대뜸 뒤를 쑤시고 들어온 순간, 기설은 ‘악’ 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벌어졌던 다리가 도로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천마는 기설의 왼쪽 허벅다리를 억지로 붙들더니 시트 위로 쩍 벌어지도록 내리눌렀다.

“되게 뻑뻑하네.”

그러고는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두 개째 손가락이 체액을 만들어 낼 줄도, 타인을 받아들일 줄도 모르는 베타의 뒷구멍을 비집었다. 기설은 마른기침을 뱉었다. 그때마다 팽팽하게 벌어진 붉은 구멍이 천마의 기다란 손가락을 꽉 조였다.

“어, 윽, 읏….”

낯선 이물감에 기설의 목덜미가 시뻘게졌다. 시트를 움켜쥔 팔뚝 위로 핏대가 돋고, 들숨 날숨으로 흉곽이 커다랗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천마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기설의 엉덩이를 구경했다. 체액도 나오질 않고 그저 싫다고 싫다고 손가락을 밀어 낼 뿐인 구멍이, 신기할 정도로 깨끗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잘생긴 상남자 얼굴을 달고서 뒷구멍은 핑크색이라니 그 동떨어진 특징이 천마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제 샤워 가운 앞섶을 마저 풀어 헤치고, 천마는 기설의 다리 사이에 몸을 완전히 붙였다. 기설이 콜록거리며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걱정 마.”

기설의 불그스름해진 무릎을 움켜쥐고 좌우로 넓게 벌리며, 천마가 웃었다.

“윤활제는 내가 안에 싸 줄 테니까. 빨아 봐서 알지?”

이내 기설의 숨이 일시 멈췄다. ‘켁’ 하는 짐짓 우스운 소리를 내며 기설은 시트 위에서 몸을 크게 튕겼다. 다리가 양방향으로 길게 뻗고 가슴 안에서 심장이 요란하게 달음박질을 쳤다. 좁디좁은 뒷구멍으로 알파의 성기가 무턱대고 쑤셔 박혀 들어왔다.

“형… 님, 아, 악… 너무, 아, 아파요! 아파요…!”

배 속에서 찌르르 쥐가 오르고 밑이 빠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기설은 두 팔로 시트를 디디며 뒤로, 뒤로 물러서려 버둥거렸다.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달아나려는 기설의 양 허벅지에 천마의 두 손이 달라붙었다. 그대로 좌우로 콱 눌러 다리를 벌리고는, 좁아터진 엉덩이 골 사이로 제 커다란 양물을 무리하게 비집어 넣었다.

“크윽….”

구멍 안이 지나치게 조이는 탓에 천마마저 신음성을 흘렸다. 꽉 앙다문 뒷구멍의 근육이 그의 성기를 세게 조이다 못해 빨고 깨무는 듯했다. 지나치게 큰 자극에 천마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크게 내질렀다.

“아!”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허리를 위로 바짝 쳐올렸다. 턱, 살 맞는 소리와 함께 기설이 비명을 ‘악’ 내질렀다.

“어흑, 흑, 어…, 윽….”

성기에 내장이 다 꿰뚫린 느낌에 기설이 발끝을 힘껏 구겼다. 좆이 아니라 주먹이라도 제 뒤에 박은 것 같았다. 한천마가 턱, 턱 연거푸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기설은 뱃가죽이 뚫리는 듯한 열감을 느꼈다. 심장을 토해 낼 것만 같았다.

“하아, 으음….”

뻑뻑하게 양물을 조이는 감각을 즐기며 천마는 두 눈을 감았다. 흥분한 알파의 이마 위로 구불구불한 핏줄이 섰다. 베타의 엉덩이 살을 콱 움켜쥐고는 양쪽으로 벌리고서, 천마는 성기 기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게 기설의 피부 밑으로 들어갔다.

“컥…!”

동시에 밭은기침이 터져 나오며 뜨거운 내벽이 천마의 성기를 꽉 조였다. 두 남자의 전신이 누가 어떻다 할 것 없이 단숨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통과 성감으로 두 눈을 꽉 감은 채, 기설은 가랑이를 벌리고서 꺽꺽거렸고 천마는 베타의 가슴팍을 아주 세게 깨물었다.

“으, 윽…, 크윽!”

흥분한 알파가 짐승처럼 젖꼭지에 이를 박자, 기설이 허리를 좌로 우로 틀어 댔다. 그러고는 제 동작에 제가 당황한 듯 야릇한 숨소리를 냈다.

“학, 읏….”

서툴기 짝이 없는 베타의 탄탄한 가슴을 입술로 쪽 빨면서, 천마는 조금 전 기설이 그랬듯이 제 허리를 좌로 우로 틀어 주었다. 그러자 좁고 뻑뻑한 뒷구멍을 채운 알파의 성기가 기설의 속 이곳저곳을 찔러 댔다.

“허… 억, 윽, 읏!”

기설의 목덜미에 울퉁불퉁한 핏대가 솟고 잇새로 신음성이 흘러나갔다. 매끈한 가슴 근육이 절로 꿈틀거리며 천마를 즐겁게 했다.

“하…, 옳지, 옳지….”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빼내기를 반복하며, 천마는 고개 숙여 접합부를 살폈다. 어느새 알파의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프리컴이 뒷구멍을 흠뻑 적신 채였다. 구멍 밖으로 삐져나와 흐르다 못해 천마의 음모가 흠뻑 젖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기설의 뒤는 도무지 부드러워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하아…, 아가. 그만 좀 씹어 대. 끊어지겠다….”

단단하게 발기한 제 좆 기둥의 아래를 쓱쓱 쓸며, 천마가 엄살을 부렸다. 그대로 성기를 반만 구멍 안에 박아 넣은 채 짤짤 흔들자, 기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아…, 아, 아!”

쿡, 쿡, 뱃가죽에 닿을 만치 성기를 올려붙인 채 천마는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기설이 발작하듯 반응하는 부분을 찾아 연거푸 추삽질을 이어 나가자, 이물을 뱉어 내려 안달이던 내벽 근육이 우물우물 천마의 성기를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천마는 이를 악물고 더운 콧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

두 눈을 감고서 그는 음미하듯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기설의 엉덩이 밑에 제 고환이 닿을 지경으로 성기를 깊이 쑤셔 박았다. 그러자 기설이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악…!”

오메가였더라면 기분 좋게 신음하며 허리를 흔들었겠지만 기설은 달랐다. 그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거니와 후장 섹스와는 인연 없는 삶을 살아온 평범한 남자였다. 뒤를 쑤시고 들어온 성기가 주는 이물감에 숨이 막혔고, 쩍 벌어진 허벅다리를 짝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는 손길에는 고통보다 큰 수치심을 느꼈다.

“윽…, 끅, 헉….”

온몸에 열이 오르다 못해 불이 붙는 듯했다.

“흐으으….”

목 긁는 소리를 내며 기설은 흠칫흠칫 경련했다. 그때마다 그는 제 뒷구멍이 의지와 관련 없이 오므라들며 천마의 성기를 조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형…님, 형님, 악….”

이를 악물며 기설은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애원을 삼키려 애썼다. 그러나 고통에는 굳셀지언정 수치심에는 면역이 없는 탓에,

“…빼, 빼 주세요, 헉…, 헉….”

시트를 긁어 쥔 주먹에 터지도록 힘을 싣고서 나약한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빼 줘?”

천마의 음성은 반면 색다른 흥분에 차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 기이한 포만감에 시달리며, 기설은 고개를 바삐 끄덕거렸다.

“네, 네, 제발….”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기설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볼기에서 철퍽대는 젖은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천마가 기설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허리를 치받은 것이었다.

“악…!”

뒤이어 철퍽철퍽 야릇한 소리가 침실을 채웠다.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설의 몸이 상하로 덜렁거렸다. 배 속을 쑤신 알파의 양물이 제 뱃가죽을 뚫을 것처럼 박혀 들 때마다 기설은 헐떡거리며 허리를 비틀어 댔다.

“악, 아, 아…, 아, 아!”

잇새로 원치 않는 신음이 터져 나갔다. 기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려 애썼다. 그 순간에는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가 싫었다. 목이 메도록 신음하는 소리, 약하게 흔들리는 가슴의 근육,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며 축축하게 젖은 제 입술이 싫었다. 남자의 성기를 받으며 반응하는 제 몸이 아주 낯설고 이상해서, 너무 싫었다.

“끅, 으읏….”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설은 기어코 반항했다. 한천마가 지닌 무서운 카리스마, 거금이 걸린 계약서, 갈 곳 없는 자신의 신세를 전부 잊어버리고는 본능적으로 도리질을 치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아, 아아….”

그러나 뒤로, 뒤로 기어 도망치려는 기설의 반항은 천마의 팔 하나에 쉽사리 제압당했다. 애초에 기설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천마가 왼팔을 접어 팔뚝으로 기설의 목을 내리찍듯 짓누르면 기설은 숨조차 바로 쉬지 못했고, 반쯤 빼냈던 성기를 거칠게 처박으면 기설은 가슴을 들썩대며 경련했다.

“아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면 급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갑자기 왜 그래. 응?”

채근하는 묻는 말엔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목울대가 짓눌린 채 기설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끅, 너…무….”

“너무?”

“너무 커, 커요…. 이, 이상해요. 제가… 너무 이상해져서, 무서워서….”

“…….”

그에 천마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기설의 고백은 하필이면 순진한 척하길 좋아하는 오메가들이 상대를 유혹하고자 흔히 읊는 대사였다. 알파인 천마로서는 귀에 고름이 차도록 자주 들어 온 말인데, 장정의 베타가 자존심이 상한 듯 내뱉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그가 체중을 실어 제압하던 팔을 거두자, 기설은 잘게 쿨럭거리며 숨을 정돈했다. 거칠게 헐떡거리는 가슴팍이 분주히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잠시간 짓눌렀을 뿐인데, 기설의 목엔 굵은 핏대가 두드러졌고 살갗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기설이 바삐 사과했다.

“화내지 마세요, 잘못했습니다….”

그에 천마는 소리 내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나기는커녕 그는 베타와의 섹스에 매우 심취했다. 좋다 못해 즐거워서, 피부 밖으로 쏟아지듯 빠져나가는 페로몬과 체향조차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사실을 저와 몸 섞는 이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하, 기설아….”

예민하게 꽉꽉 조이며 제 좆을 빨아당기는 베타의 구멍이, 그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구태여 말로써 제 기분을 알려 주기보다, 천마는 멈췄던 행위를 재차 잇기를 선택했다.

“하아….”

철퍽철퍽 살 맞는 소리가 다시금 침실을 채웠다.

“아, 으, 읏!”

두 남자의 피부가 서로 간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광포하게 달리는 심장 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기설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진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성을 참을지언정, 이상하다는 이유로 반항하는 바보짓은 삼갔다.

헐떡거리며 발정 난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며 천마는 기설을 관찰했다. 수치심을 못 견뎌 꽉 감긴 눈이며 앙다문 입술, 성기를 쑤셔 박을 때마다 가쁜 숨으로 부풀어 오르는 흉곽의 근육, 가장 안쪽에서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의 빛깔에 이르기까지… 어색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베타의 경직된 태도는 도리어 그의 욕정에 기름을 부었다.

“하아. 으으음….”

그대로 천마는 잘게 몸을 떨었다. 그가 사정하는 순간 기설이 불에 덴 개처럼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짧은 순간 배가 부르는 듯한 착각이 이는가 싶더니, 뒷구멍 밖으로 울컥울컥 많은 양의 정액이 새어 나갔다. 알파가 싼 정액을 제가 뒷구멍으로 뱉어 내는 감각은 베타인 기설이 견디기엔 지나치게 버거웠다.

“흐으, 흐으….”

반쯤 늘어진 성기를 매단 채 기설이 슬금슬금 뒤로 몸을 비켰다. 낯선 자극에 몸이 달달 떨리고 피부의 땀구멍에서조차 찌릿찌릿한 자극이 느껴졌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기설은 도망치고픈 충동에 다시금 휩싸였다. 한 번 제 안에 쌌으니 이것으로 그만두지는 않을까, 잠깐이라도 쉴 수 있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살금살금 달아나려는 기설의 허리를 천마의 두 손이 붙들어 쥐었다. 무어라 외칠 새도 없이 기설은 침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야 했다. 철퍼덕 등을 보이며 엎어지자마자, 묵직한 체중이 기설의 전신을 짓눌렀다. 가엾게 부어오른 구멍 안으로 재차 발기한 성기가 밀려들었다.

“아, 아!”

시트를 벅벅 긁으며 기설은 두 발을 탁탁 굴렸다. 기설의 몸 위에 푸시업을 하듯 올라탄 채, 천마는 제 체액을 윤활제 삼아 두 번째 추삽질을 시작했다.

“하아…, 하아, 으음….”

“아, …아, 아! 윽, 허억!”

납작 엎드린 자세 그대로 기설의 머리통이 앞뒤로 연거푸 흔들거렸다. 정액이 섞여 끈적해진 접합부에선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박수 치듯이 철썩철썩 울리기 시작했다. 굵은 성기가 기설의 배 속을 난잡하게 휘젓는 듯했다.

기설의 상체는 연신 안으로 굽기만 했다. 자비 없이 속을 쑤시는 감각에 꺽꺽거리면서도, 그는 뒤로 느끼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요령 없기는.’

서툴게, 그저 좆을 받으며 견디려고만 하는 기설을 관찰하며 한천마는 피식 웃었다. 오메가였더라면 허리를 구부리는 게 아니라 위로 활짝 젖혔을 터였다. 저 느끼는 곳을 찾아 찔러 달라고 엉덩이를 살랑대기 바빴을 거였다.

“아가.”

아둔한 기설을 조롱하듯이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달콤해졌다. 천마의 두 팔이 기설의 배 아래로 파고들어 가, 그의 상체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두 무릎이 꿇리고 뒤로는 성기를 받는 자세로 기설의 허리가 휘었다.

“아, 아!”

쿡, 느끼는 구석을 찾아 성기를 쑤셔 박았다가 천마는 뜻밖의 반항을 마주했다. 시무룩하던 성기가 벌떡 서고 온몸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큰 자극을 받은 순간, 기설이 허둥지둥 팔을 뒤로 뻗어 천마를 밀어 낸 것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시트에 처박으며 기설은 버둥거리며 제 허리를 감싼 사내의 팔을 풀어내려 애썼다.

“아, 윽, 윽….”

순간 천마의 두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요령이 없어 느낄 줄 모르는가 싶었건만 아니었다. 너무 느끼는 게 두려워 일부러 기피한 것이었다.

이미 발기한 알파의 성기가 더욱 크게 부푸는 듯했다. 성기 끝에서 흘러나오는 프리컴은 거의 물처럼 줄줄 샐 지경이었다. 광분에 가까운 흥분에 차올라, 천마는 기설의 양 팔뚝을 힘껏 잡아 쥐었다. 그러고는 반항할 수 없게 뒤로 힘껏 당겼다.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허리가 뒤로 젖혀진 순간, 기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그대로 천마의 하반신이 기설의 몸에 거세게 부딪쳤다. 단숨에 뿌리까지 박아 넣자, 상체가 뒤로 젖혀진 채 기설이 신음했다. 숨소리가 할딱할딱 달아오르고 발기한 성기 끝에서 말간 정액이 후드득후드득 뿜어져 나왔다.

“아, 크읏, 으으읏….”

잡힌 팔뚝의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기설은 거대한 성감에 파묻혀 사정했다. 바르르 경련하는 온몸에서 더운 김이 폴폴 오르는 듯했다.

지친 기설이 사정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에 천마가 추삽질을 연이었다. 턱, 턱 살 맞는 소리가 울리고, 거센 감각이 기설의 뇌리를 점령했다. 처음 느끼는 감각을 기설은 거칠게 거부했다. 연신 도리질하며 정신없이 허리를 비틀고, 엉덩이의 방향을 틀어 보려 애썼다.

그때마다 천마는 허리를 뒤로 빼내었다가, 다시금 거세게 제 물건을 깊이 박아 붙였다. 기설의 엉덩이에 그의 고환이 맞닿는 소리가 철썩 울렸다. 기설은 ‘악’ 소리를 내며 목을 뒤로 젖혔다. 한차례 사정한 탓에 불투명한 액체를 흘리는 그의 성기는 다시금 크게 부풀었고, 열감으로 인해 붉은 빛깔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프리컴이 물방울처럼 맺혀 귀두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어… 흑, 아, 아… 아, 아윽….”

잡힌 팔을 빼내려 기설은 미약하게 버둥거렸다. 천마가 그런 기설을 툭 놓아주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신음하며 기설은 시트 위에 나자빠졌다.

이내 알파의 손이 덥석, 기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기설의 얼굴이 베개에 처박혔다. 푹신한 베개가 단단하게 눌릴 지경으로 깊이, 콧대와 입술이 파묻혔다. ‘흡’ 소리 내며 잘게 꿈틀거리는 기설의 목을, 한천마의 두 손이 에워 감쌌다. 그러고는 한껏 졸라 왔다.

“컥…!”

동시에 기설의 배 안에 불이 났다. 잔뜩 성난 듯 달아오른 성기가 기설의 속을 마구잡이로 쑤시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아, 아!”

천마가 낮은 신음성을 크게 터뜨렸다. 섹스를 한다기보다 속을 때린다는 표현에 가까운 행위를 하며 그는 십분 만족하고 있었다. 포악하기 짝이 없는 알파의 마운팅에 기설은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설의 엉덩이는 위로, 위로 들렸다. 열 발가락이 절로 꽉 굽었다.

“커, 흐, 흐읍…, 흡.”

숨을 쉬기 위해 벌어진 입술 밖으로 침이 흘렀다. 정신없이 성감에 둘러싸인 기설의 정신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두 손이 마구 시트를 긁고 이불 위를 두드리다가, 이내 주먹으로 꽉 말렸다.

“허윽, 읏….”

목젖이 눌리도록 세게 목이 졸린 순간 기설의 눈앞이 점멸했다. 극단적인 쾌감은 빨간색이었다. 눈앞에서 번개가 팟, 팟 튀는가 싶더니 온몸이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기설은 고개를 처박은 채 사정했다. 정액이 오줌처럼 주루룩, 몇 초간 그치지 않고 터지듯 흘러나왔다.

“읏, 흐으…, 크윽.”

등 뒤로 천마의 더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기설은 움찔움찔 뒷구멍을 수축시켰다. 아랫배에 힘이 콱 들어갔고, 내벽 근육은 알파의 성기를 쥐어짜 낼 기세로 감쌌다.

“하아, 아아….”

한천마가 만족스럽게 신음했다. 그가 목을 놓아주자마자 기설은 ‘히이익’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허옇게 번져 흐려졌던 시야가 느릿느릿 돌아왔다. 배 밑은 제가 싸지른 정액으로 질척했고, 뒷구멍을 채운 체액은 허벅다리를 다 적시도록 타고 흘렀다.

연거푸 사정을 마친 성기를 빼낸 뒤, 한천마는 기설의 구멍을 구경했다. 연분홍색으로 부어오른 살점이 둥글게 벌어졌다가, 빠끔거리며 천천히 줄어들었다. 기설의 잇새로 ‘하아’, ‘하아’ 얕은 숨이 샐 때마다 구멍이 움찔거리는 게 육안으로 모두 보였다.

천마의 두 손으로 기설의 골반을 세게 움켜쥐고는, 저를 마주 보게끔 그의 몸을 홱 뒤집었다.

“하…, 씨발. 기설아. 너 베타 맞아?”

검은 눈동자에 미친 사람처럼 빛이 서린 채, 천마가 추궁했다. 성난 듯 들려오는 질문에 기설은 얼떨떨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삐 숨을 고르며 그는 긴장한 채 대답했다.

“하아, 하아…, 네, 네…, 맞아요.”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하면 죽어. 네가 오메가가 아니라고? 그냥 베타라고?”

기설이 만에 하나 오메가였더라면 이 순간, 이리도 당황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가 오메가여서 알파의 체향을 맡을 줄만 알았더라면, 알파의 페로몬을 피부로 느끼고 알파의 기분을 본능적으로 살필 줄만 알았더라면, 작금의 짐짓 엄격한 추궁이 그저 ‘이렇게 꼴리는데 어떻게 베타냐’는 감탄 어린 칭찬에서 기인했음을 알아챘을 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설은 베타였다. 그것도 보통 베타가 아닌, 빌어먹고 살래도 눈치가 없는 베타였다.

“저 진짜 베…타 맞아요, 베타 맞습니다….”

그래서 기설은 몹시 진지했다. 그는 진지하게 억울했다. 짙은 눈썹이 팔자를 그리고 무뚝뚝한 눈매는 서럽게 구겨진 채,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할 따름이었다.

“거짓말 안 해요. 진짜 베타인데….”

그리고 그 태도가 한천마를 기쁘게 했다.

“그럼 이건 뭐야?”

서럽고 진지한 기설을 놀리기를, 천마가 참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탱탱하게 부어오른 기설의 젖꼭지를 집게 손으로 콱 꼬집었다. 조금 전,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 자신이 세게 깨물어 부어올랐을 뿐 기설의 가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무어라도 잘못됐다는 양 세게 비틀어 쥐자, 기설이 새된 신음을 흘렸다.

“아주 퉁퉁 불었네. 새끼 쳐서 젖 물리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조그만 유두를 못살게 콱 당기자, 기설이 허리를 들썩거리며 천마의 손에 끌려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가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럼. 베타가 씨발 좆 받으면서 그렇게 좋아하니?”

“아, 안 좋아했어요….”

“안 좋아했어?”

“안…, 안 좋아했…습니다.”

머리 꼭대기까지 달아오른 기설의 반응에 천마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설이 재밌고 귀여웠다. 단순하고 멍청하고,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부어오른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건장한 놈이 어린 오메가처럼 수줍게 구는 꼴에 중심부에 피가 바짝 몰렸다.

홱, 기설의 어깨를 눌러 눕혀 놓고, 천마가 그의 허리를 재차 잡아 쥐었다. 두 무릎을 시트 위에 꿇은 자세로 기설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자, 가랑이가 벌어진 베타의 등허리가 천마의 무릎을 타고 들린 모양새가 됐다.

“어, 어어….”

그새 꾹 다물린 기설의 뒤로, 천마는 세 번째 삽입을 감행했다.

“아, 아!”

“안 좋아? 응? 이래도 안 좋아?”

그가 허리를 가볍게 쳐올리자 묵직한 사내의 몸이 서로 부딪치며 털퍽털퍽 소리가 났다. 곧게 선 성기가 찌걱거리며 박혀 오는 감각에 기설이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아윽, 읏, 흐… 읏!”

천마는 쭉 뻗은 기설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맞잡아 쥐고, 끌어당겼다.

“응? 기설아.”

기설의 몸이 밑으로 당겨져 내려오며 접합부가 바짝 맞붙었다.

“아, 아….”

“좋아, 안 좋아?”

“흑, 아…, 앗!”

연신 하반신을 쳐올리며 천마는 더운 숨을 헐떡였다. 두 남자의 신음이 질척하게 엉겨서, 종국에는 묘하게 울리는 침음이 둘 중 누구의 소리인지 서로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치덕치덕 땀에 전 살을 맞댄 채 기설은 대답할 새도 없이 마구잡이로 흔들거렸다. 몸통이 꼬챙이에 꿰인 기분이었다.

“아, 아응, 응!”

큰 자극에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제발, 그만 멈추었으면 바라면서 기설은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아윽, 헉, 좋아…요, 좋아요!”

간절한 마음에 미친놈처럼 소리 질렀다.

“악, 제… 발, 제발 그만…, 제발… 응, 으응! 좋아요…!”

많은 일이 그렇듯이 침대에서의 외침도, 기설의 뜻대로 일을 풀어 주진 못했다. 베타의 고백은 알파의 흥분을 더욱 돋웠다.

“응, 좋아?”

시커멓게 동공이 벌어진 천마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기설은 그 안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재밌는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 내킬 때까지 가지고 놀고, 두 손 밖으로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집요한 아이. 장난감에 제가 질릴 때까지, 혹은 장난감이 아주 망가질 때까지….

기설은 둘 중 무엇이 먼저일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그중 무얼 원하는지, 혹은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형님, 저. 화장실….”

추운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며 기설이 애원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화장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읊조린 말을 끝으로, 기설은 잡혔던 팔을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천마에게서 벗어나, 그는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듯이 두어 걸음 달아나다 엎어졌다. 히익, 히익… 바람 새는 소리가 잇새로 터져 나갔다. 속을 채운 성기가 빠져나간 뒤인데도 뒷구멍이 홀로 수축하며 여분의 성감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속이 찌르르 울리는 순간, 허벅다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뜨뜻미지근한 정액이 느껴졌다.

“흐….”

주르륵 물이 새는 소리가 침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시트가 다 젖도록 물을 싸면서, 기설의 허벅다리 근육이 경련했다. 쪼르르 물을 싸면서도 기설은 제 몸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째서 배뇨감을 쾌감으로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흐으, 흐으….”

할딱할딱 더운 숨을 뱉으며 허공만 쳐다보는 기설의 목덜미에, 천마가 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고는 베타의 살 내음을 아주 깊이 들이켰다. 오메가가 아니냐는 질문을 농담처럼 건네기는 하였지만, 내심으로는 살짝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렇게나 잘 느끼고 잘 싸는 게, 뒤로 알파를 받으면서 성기를 콱콱 조이는 게….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있지.’

멋진 장난감을 얻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천마는 기설의 뺨에 제 볼을 맞대고 문질렀다. 커다란 개가 마운팅을 하듯이 온몸으로 기설을 뒤덮은 채 볼을 비비자, 기설은 베개에 고개를 처박은 채 가만히 숨죽였다.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흘렀지만, 베갯잇에 아닌 척 닦아 냈다.

그리고 기설은 인정해야 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굴러가건 간에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음을. 이렇게, 곧 죽을 것처럼 성감에 파묻히는 일이, 알파나 오메가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던 동성 간의 섹스가 제 일이 되었다는 걸.

그런데 그게, 그래도 그 상대가 한천마라서… 그래서 좀 좋았다고 하면 미친 걸까. 기설은 둔한 고민으로 골몰했다.

***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억지로 들어 올렸을 때, 기설을 반긴 것은 텅 빈 침대의 허전한 풍경이었다. 잠에서 덜 깨어 둔한 머리로 기설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가, 갈퀴로 속을 헤집어 놓는 듯한 복통에 배를 움켜쥐었다.

“윽….”

느릿느릿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나신에, 말라붙은 시트가 달라붙어 있었다. 정액과 체액이 풀처럼 굳어 허벅다리에 철썩 붙은 줄도 모르고서 기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시트 자락을 밟고 카펫 위에 나자빠졌다.

“악!”

씨발…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욕설을 꿀꺽 삼키며, 기설은 저릿저릿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피부에 들러붙은 시트를 떼어 내자 엉겨 붙은 정액이 딱딱하게 바스러졌다. 짙은 체취가 코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왔다.

카펫 위에 덩그러니 주저앉은 채 기설은 정신을 차려 보려 노력했다. 킹사이즈 침대, 집주인의 키를 고려하여 건설된 높다란 천장과, 모던한 디자인으로 열을 이루며 매달려 있는 조명들, 한편에 세워진 마른 잎의 나무 화분과 붉은 소파에 이르기까지… 한천마의 침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설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침실 안은 물론이며 집 안 어디에서도 사람 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푹… 잤나 보다.’

꼭 따라붙어 다니라던 천마의 명령을 떠올리면서 기설은 머쓱해졌다. 그가 저에게 시킨 일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하루 만에 그 명령을 어기고 늦잠까지 자 버렸다. 그래도 꾸중을 들을 것 같진 않았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잤으니까…, 기설을 깨우지 않은 건 천마의 선택이었을 터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설은 침실과 연결된 욕실의 문을 열었다.

‘써도 되겠지?’

잠시간 고민하다가, 기설은 얼른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을 허락받으랬지 씻는 것도 일일이 허락받으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몸을 씻는 동안에는 온통 경악의 연속이었다. 힐끔 내려다본 가슴의 한쪽 젖꼭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깜짝 놀라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거울을 통해 살펴본 육신에는 울혈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밤새 두들겨 맞은 기억은 없는데, 꼭 한바탕 주먹으로 처맞기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온몸에 맴도는 피로감도 꼭 그만큼 묵직했다. 팔다리가 저리고 허리마저 아픈 것이, 큰 경기를 뛴 다음 날처럼 느껴졌다.

‘이천만 원….’

처음 계약 조건을 들었을 땐 ‘완전 거저’라고 기뻐했던 확신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기설 본인이 생각할 적에도, 좀 더 바보인 쪽은 기설이고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인물은 한천마였다. 그와의 섹스는 과연 중노동이었다. 만일 체구 작은 여자였다면, 아니 남자라 해도 말라빠진 오메가였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밤이었다.

‘그래서 나로 선택한 건가, 맷집 좋고 튼튼한 베타라서.’

찬물로 전신을 헹궈 낸 뒤 기설은 수건 한 장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몸의 물기를 닦다가 주륵, 엉덩이 골 사이로 미지근한 정액이 흘러나온 탓에 한 번 더 샤워기로 아래를 헹궈 내야 했다.

그렇게 꼼꼼한 샤워를 마친 뒤에는 어젯밤 벗어 놓았던 정장 바지와 셔츠를 꿰입었다. 땀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더럽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됐다.

기설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그러나 아래층의 넓은 거실에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엌에도, 사람의 모습이라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 누군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 역시 들질 않았다.

잠자리를 마친 베타가 멍청한 몰골로 기절해 버렸으니, 바쁜 대표 이사님인 한천마는 제 일을 하러 나섰을 것이었다.

그리고 기설은 깨달았다. 앞으로, 이렇게 잠깐이나마 저 홀로 자유로운 시간은 흔치 않을 것임을.

‘경이…. 경이 찾으러 가야겠다.’

어젯밤에는 까무룩 기절을 해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묻지 못했지만, 아무튼 ‘고양이를 좋아하고’, ‘한 마리 키울까 생각 중’이라던 천마였다. 기설은 그 대화문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마침 고양이를 키우실 거라면… 우리 경이를 데려와도 내치진 않으시겠지?’

다짐이 서자마자 그는 허둥지둥 움직였다. 급한 마음에 무턱대고 복도를 걷다가, 그는 우뚝 멈췄다.

뭐라고 쪽지라도 남길까 하고 주위를 살폈지만, 펜도 종이도 보이지 않았다. 온 집 안을 싹싹 훑듯이 돌아다녔지만 문이 열리는 곳이라고는 복도 구석에 붙어 선 두 개의 방과 아래층 계단 옆에 놓인 작고 단단한 문, 세 군데뿐이었다. 하나는 세탁실이었고 하나는 베란다로 통했고, 마지막 방은 아예 비어 있었다. 벽지도 발리지 않은 시멘트 회벽이 갓 시공한 듯 얼룩덜룩했고, 한가운데에 철제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상한 방이었다.

“…….”

기괴한 방 하나를 확인하고 나니 쪽지 따위를 쓰겠다고 무얼 뒤지거나 꺼낼 용기가 더는 나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다가 기설은 휴대폰을 떠올렸다. 거기에 천마의 번호가 있으니, 문자를 한 통 남기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양이를 찾으러 간다고 하면 그도 저를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기설은 다시 침실로 돌아와 정장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보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충전기를 찾아 방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그 흔한 휴대폰 충전기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이상했다.

“…….”

잠시간 머뭇거린 끝에 기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충전기를 찾는 대신, 그는 두 사람분의 체액으로 더러워진 이불과 시트를 뭉쳐 안아 들었다. 사내들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것을 세탁실로 가져가, 통 안에 쑤셔 넣었다. 세제를 퍼붓고, 빨래를 돌린 다음 세탁기의 완료 예정 시간을 읽었다.

‘49분.’

숫자가 48로 줄어들자마자 기설은 승강기를 향해 걸어 나갔다. 48분 안에 돌아와서, 다 된 이불 빨래를 널 생각이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러자니 마음이 분주해졌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지켜보는 심판도 없건만, 기설은 바삐 건물 1층 후문을 통과했다.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덕길 위에 자리한 백색 건물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도 지하철 출입구도 없었다. 별수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20여 분을 달려 기설이 살던 빌라촌에 도착했다. 후비진 골목 안까지는 못 들어간다며 버티는 기사에게, 곧 돌아올 테니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하차했다. 철제 계단을 뛰어오르는 기설을, 택시 기사가 불안한 눈치로 지켜보았다.

기설이 살던 작은 방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모습 그대로였다. 장판 위에는 검은 사내들이 찍은 커다란 구두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물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며 널브러져 있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기설은 조그만 거실을 둘러본 다음, 곧장 낮은 자리에 매트리스 하나만 덜렁 놓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엉망진창이 된 침대 위에, 경이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아주 작은 볕이 드는 창가 자리에 앉은, 그의 회색 고양이가 있었다.

“경아!”

기설이 허둥지둥 다가가 무릎 꿇고 앉자, 늙은 고양이가 ‘애옥’ 하고 목쉰 소리를 냈다. 애옥, 애옥, 애오옹…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경은 기설의 눈에 아주 어린 아이 같았다. 새끼처럼 엉엉 우는 것만 같아서, 기설은 두 손으로 경을 안아 들고는 제 가슴에 기대어 붙였다.

“미안해, 경아. 오빠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지. 미안해….”

조심조심, 엄지로 쓸어 만져 주자 경이 기설의 품 안 깊숙이 머리를 파묻었다. 설움 가득한 고양이의 소극적인 애교에 기설은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하루 못 봐줬다고 털 떡 진 거 좀 봐.”

경을 안아 들고 기설은 거실로 나섰다. 밥그릇 안의 사료 몇 알이 건드린 흔적도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곤 긴긴 한숨을 뱉어야 했다.

“나 없다고 밥도 안 먹으면 어떡해.”

적당한 이동장을 찾아 헤매다가, 기설은 급한 대로 하나뿐인 배낭 안에 경을 넣었다. 굶주렸기 때문인지 놀랐기 때문인지, 경은 기운 없는 모습으로 반항 없이 가방 안에 들어갔다. 나이를 많이 먹도록 길에서 버틴 고양이라 원래도 건강하지 않던 경이었다. 기설이 빗겨 주고 닦아 주어서 그렇지, 혼자 두면 제 몸을 핥는 것조차 귀찮아할 때가 많았다.

경을 넣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서, 기설은 조립식 신발장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그러자 먼지 쌓인 구석에 숨겨 둔 납작한 종이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든 지폐 뭉치를 확인한 다음, 기설은 마지막으로 너저분한 빌라 방을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뒷골목의 빌라 2층에서 기설은 오래 살았다. 1층에 고깃집이 들어서서 바퀴벌레가 들끓던 시절도 있었고, 옆집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고 가서 소년 가장이 되어 버린 중학생과 몇 달간 저녁을 함께 먹은 시절도 있었다. 그때마다 기설은 생활이라는 게 자신과는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었다. 살아는 가지만, 그다지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몸에 숨이 붙어 있고 매일매일을 참 열심히 살아가기는 하는데, 그런 나날들을 모으면 삶이라는 단어가 될까 하면 갸우뚱하게 됐다.

기설은 그다지, 살아온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이고 엉덩이 붙이며 지낸 빌라 집을 떠나기가 조금도 서운하질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오냐고 투덜대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하며, 기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높다란 건물 앞에서 택시비 3만 7천 원을 지불할 무렵, 미터기 아래의 전자시계가 오후 2시를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로비와 직결된 엘리베이터는 많았지만, 죄 최고층 버튼이 ‘5’인 것이었다. 기설이 빠져나온 그 ‘집’, 6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후문에서 이어지는 특별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빙빙 돌아 맞는 자리를 찾은 뒤에야, 기설은 해당 승강기를 이용하려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위로 인터폰으로 추정되는 화면과 아주 작은 카메라, 그리고 벨 버튼이 보였다.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기설은 사각형의 벨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인터폰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기설 방향의 화면에는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별다른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땡’ 소리를 내며 승강기 문이 열렸을 뿐이었다.

어딘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기설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설이 6층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승강기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계기판의 숫자가 1이었다가 순식간에 6이 됐다.

승강기 문이 매끄럽게 열린 순간,

“어….”

기설은 당황한 채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기설이 외출할 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거실에, 검은 사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깊이 숙인 상태였고, 그 가운데엔 한천마가, 그리고 양 뺨을 시뻘겋게 붉힌 강 실장이 있었다.

기설을 직시하는 천마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의 테두리를 타고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천마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기설을 턱짓했다. 그러자 강 실장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기설에게 다가왔다. 기설은 내심 당황했다. 그의 아랫입술과 콧방울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안색이었다.

그리고 단숨에, 강 실장의 손바닥이 기설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소리가 나도록 머리가 돌아간 채 기설은 크게 휘청거렸다. 얼굴 반쪽이 찢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기설아.”

천마가 목소리를 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기설이 틀어졌던 고개를 바로 들었다.

“너, 어디 나사 한 군데 빠졌어?”

질문에 대답할 틈도 없이,

짝.

두 번째로 손이 날아들어 기설의 뺨을 후려쳤다. 기설은 일순 두 팔을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가드를 올릴 뻔했다. 대신에 기설은 품 안의 배낭이 흔들리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맞은 쪽 뺨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감이 느껴졌다. 기설은 신음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먹는 거, 싸는 거 허락받으라는 상황에, 뛰쳐나가는 걸 네 멋대로 해?”

짝.

세 번째 따귀가 날아들었다.

“안 모자란다며. 응? 대가리 안 모자란다며.”

짝.

네 대째 같은 쪽 뺨을 얻어맞고 기설은 눈을 콱 감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이까짓 따귀, 열 대라도 묵묵히 참았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달랐다. 고양이를 데리러 잠깐 나가는 정도는 봐줄 거라고, 한천마라는 형님이 저를 순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방심한 탓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도망치는 게 취미라도 되니?”

짜악.

다섯 번째 따귀는 보다 억셌다. 기설의 몸이 크게 휘청 움직였다. 그 순간, 배낭 안에서 경이 소리를 냈다. 애옹… 놀라 우는 소리에 약한 하악질이 섞여 나왔다.

알싸한 뺨의 통증에 기설은 빠르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천마의 눈이 그제야 기설의 배에 붙은 배낭으로 향했다. 두 팔이 그 가방을, 아기 포대라도 된다는 양 꽉 끌어안아 가리고 있었다.

“아… 하하.”

갑작스럽게, 천마가 웃었다.

“어디로 튀려고 짐을 챙겨 온 건가 했더니….”

미소 짓는 순간 한천마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기설은 넋을 놓은 채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방심한 순간, 강 실장의 손바닥이 다시 기설의 뺨을 쳤다. ‘짝’ 소리와 함께 기설의 턱이 홱 돌아갔다. 무방비했던 탓에 기설은 가방을 껴안은 채 나자빠졌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얼떨떨한 입을 벌리자, 천마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다음 순간 강 실장의 귀가 한천마의 왼손에 덥석 잡혔다. 흑곰처럼 거대한 사내의 몸이 천마의 한 손에 쉽게 제압당했다. 홱, 숙인 강 실장의 얼굴 위로 큼직한 주먹이 직각으로 내리 찍혔다. 한 방에 핏방울이 튀고 신음성이 터져 흘렀다.

“눈치 좀 챙기자.”

잡아챈 귀를 놓아주며, 한천마가 말했다. 허공에 대고 털어 내는 주먹에서 붉은 피가 떨어졌다. 천마가 흘린 것은 아니었다. 강 실장의 콧잔등에서 찢어져 흐른 피였다.

“네, 대표님….”

강 실장이 신음하듯 대답했다. 완전히 얼이 빠진 목소리였다.

“불쌍한 아가를 왜 때리고 그래. 응? 고양이 가져오려고 다녀왔다잖아. 명경아, 네 생각엔 그게 맞을 일이니?”

천마의 목소리가 부쩍 상냥하게 들렸다. 유치원 교사처럼 조곤조곤 말하면서 그는 바닥에 나자빠진 기설과 시선을 맞추었다. 기설은 강 실장만큼이나 얼이 빠져서, 어버버하며 입술을 의미 없이 달싹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설을 때리게끔 종용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 한천마였으므로.

“꺼내 봐.”

한 발짝, 기설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천마가 말했다.

“가방에 든 거, 꺼내 보라고.”

‘아’ 하고 기설은 휘청거리는 몸을 곧게 일으켰다. 그리고 배낭 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게, 형님… 낯설어서, 고양이가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기설은 사방을 살폈다. 낯선 사내들이 잔뜩 있어 늙은 고양이가 놀랄까 봐 걱정스럽긴 했지만, 밀폐된 집 안이니 경이 탈출을 하는 일은 없을 성싶었다. 기설은 떨리는 손으로 배낭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경아…, 쉬이….”

아주 작게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배낭 밖으로 꺼내어 안자, 경이 약하게 하악질을 하다가 기설의 팔뚝 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늙고 병든 고양이였다. 제힘으로 그루밍도 제대로 못 하는지라 꼴이 꼬질꼬질했다.

천마는 늙은 고양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맞은 쪽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른 채 기설이 보물처럼 끌어안은 그 고양이는, 천마가 살면서 봐 온 중에 제일로 못생긴 고양이였다.

“그게 다니?”

천마가 물었다.

“네?”

“챙겨온 건 그게 다냐고.”

그러자 기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요. 이거….”

기설의 왼손이 우물쭈물 제 뒷주머니에 들어갔다. 엉거주춤 꺼내어 건네 보인 것은 먼지 묻은 흰 봉투였다. 천마는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는, 입구를 벌려 대리석 바닥에 내용물을 전부 털어 냈다. 오천 원권 여러 장이 섞인 녹색 지폐 낱장이 쏟아졌다. 일부 구겨지고,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기도 하고, 몇 장은 심지어 구권 만 원이었다. 언뜻 50만 원쯤 되는 금액으로 보였다.

“나머지는 차근차근 갚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기설이 말했다. 입 안 살을 씹기라도 했는지 발음은 어눌했고 닫힌 입술 사이에는 붉은 핏기가 어렸다.

그제야, 천마가 허탈한 탄성을 내뱉었다.

‘네가 지금 나한테 피해 보상금을 줘야 하는데, 네 수중에 돈이 없다. 그치? 당장 얼마 정도 있니.’

‘…오십 만원 정도 있습니다.’

‘그럼 2억 2천 9백 오십만 원이 모자라네.’

그래 그런 대화를, 했던 것도 같았다. 아니, 했었다. 등신 같은 호구 새끼를 마침 잘 만난 김에, 약점을 잡아다가 따먹겠다고 적당히 차용증에 쓸 금액을 맞추느라 꺼낸 소리였다. 제 코 묻은 오십 만원, 그까짓 돈을 진짜로 찾아다가 가져다 바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골 때리는 물건이네, 이거.”

천마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하는 소리임을 알고, 기설이 귀를 붉혔다.

“휴대폰은 왜 꺼 놔서, 걱정을 시키고 그래.”

몹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천마가 물었다. 품 안의 경을 어루만지며, 기설이 머뭇거림 끝에 말했다.

“충전기가… 안 보여서요.”

그러면서 제 휴대폰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그러자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기설의 손에서 납작한 휴대폰을 받아다가 거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소파 바로 옆에 떡하니 놓인 무드 등 밑에 휴대폰을 끼워 넣자, 액정 가득 환하게 충전 중 알림 창이 떠올랐다.

“…….”

무선 충전기를 UFO 쳐다보듯 하는 기설을 보며 천마는 더욱 크게 웃었다. 큭큭거리며 웃는 천마를 따라, 기설도 아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맞은 쪽 뺨이 땡땡하게 부어올라 불균형한 미소가 될 뿐이었지만, 그래도 애를 써 웃어 보였다.

천마의 오해와 달리 기설에게는 도망을 치고 싶다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고작 며칠간 붙어 다닌 것이 전부라지만, 기설은 한천마가 싫지 않았다. 한천마의 세계는 기설의 그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타는 듯한 시선을 받았던 지난밤, 기설은 살아 있다고 느꼈다. 자신이 무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성욕의 대상이 된 순간 꺼진 줄 알았던 몸의 신호등에 불이 켜졌다.

기설은 그 불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눈앞은 점멸하고 몸의 대화만이 남은 순간에 외롭지 않던 감정을 다시 한번, 제대로 읽어 내리고 싶었다.

썰렁한 웃음기가 남은 집 안에, 다 돌아간 세탁기가 내는 알람 노랫소리가 뜬금없이 퍼졌다.

***

지난달에, 강명경은 시체를 한 구 치웠다. 그가 존경하며 따르는 극우성 알파, 한천마 대표에게 러트가 온 날의 일이었다.

알파의 경우 ‘러트’, 오메가의 경우 ‘히트 사이클’. 그건 인간의 발정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극우성 알파의 러트는 일반적인 알파의 러트와는 사뭇 달랐다. 러트가 닥쳐오면 내재된 폭력성이 배가 됨은 물론이고 성욕에 정복당해 기억이 끊길 때도 있었고,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한천마의 러트도 그렇게 고약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계약까지 해 러트 파트너를 구했다. 그는 도도한 성격의 우성 오메가로, 한천마가 아무리 극우성이라 해도 저는 각인당하지 않고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노라고 아주 확신했다. 그리고 이튿날에, 그는 한천마의 무게에 깔려 질식해서 죽었다. 계약서에 경고처럼 딸린 조항을 어긴 죗값을 치른 것이었다.

‘을이 갑에게 일방 각인할 경우 갑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또한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에게 각인, 노팅 등의 정신적 행위를 강요할 수 없다.’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을 때 한천마는 제 피부 밑에 들러붙은 채 사망한 오메가를 발견했고, 몹시 분노했다. 우성 오메가라면 잘 버텨 줄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조차도 한천마의 페로몬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고 각인해 버린 것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들의 ‘각인’이란 베타들이 말하는 짝사랑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을 그 자신이 아니게 만들고, 상대에게 맹목적으로 의존 혹은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랑’과 비슷하긴 하였으나, 각인은 본능이 시키는 육체적 반응일 뿐이었다. 또한 알파나 오메가가 한번 누군가에게 각인하면 풀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데다가, 일방적인 각인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극우성 알파인 한천마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각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천마를 상대로 각인한 오메가는 그가 태어난 이래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게 한천마의 기질적 문제였다.

끔찍했던 러트의 밤에, 우성 오메가는 일방적으로 각인을 해 버리고는 미친놈처럼 헐떡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억지로 천마의 품 안에 엉겨 붙으며, 성행위가 끝난 뒤에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천마의 성기가 이대로 짐승처럼 제 안에서 부풀기를, 저에게 노팅하고 제 안에 씨를 뿌려 주기를, 제 평생의 짝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또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트가 와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한천마는 위험한 존재였다. 본능만이 남은 짐승이 되어서도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집착하며 스스로를 조종하려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속박, 집착, 구속과 같은 것들을. 그래서 때렸던가? 목을 졸랐던가? 아니면, 단순히 온 힘으로 깔아뭉갰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오메가를 죽여 버렸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 한천마는 분노했다.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조종하면서도 그 자신의 본능과 발작은 통제하지 못했고 그 점을 매우 증오했다. 화마처럼 치미는 혐오감을 못 이겨, 그는 죽은 오메가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침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서는, 2층 높이의 난간 아래로 그 시체를 힘껏 집어 던졌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시체는 강명경이 조용히 처리했다. 죽은 오메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지 않게 명경이 집 안을 청소하는 동안, 천마는 짐승 새끼처럼 나신인 채 난간을 움켜쥐고 서 있기만 했다.

명경은 오메가의 죽음이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죽은 게 호상이라면 호상이었다. 천마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가 목숨을 부지했었더라면, 더욱 끔찍하게 보복성 살인을 당했을 터였다.

그 뒤로 한천마는 조금 변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는 평소와 같이 카리스마가 넘치고, 속을 알 수 없게 미스터리하고, 늘 그렇듯 바위 같다가도 우유 같은 남자였지만 강명경만큼은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이전에도 일방적으로 한천마에게 각인하고는 매달리는 오메가가 흔했었다. 천마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의 수를 합하자면 지난해에만 열 손가락을 넘었다. 그러니 지난달에 그의 침실에서 죽은 오메가도, 별달리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그저 종이 한 장만큼의 분노를 더 쌓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미세한 무게는 한천마로 하여금 어떠한 기준점을 넘게 한 듯했다. 이따금 한천마를 우러러볼 때면, 명경에게로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전이되는 듯했다. 끔찍한 혐오, 증오, 분노, 권태가 한데 뒤엉킨 채 완벽한 남자의 눈동자 안에서 어른거렸다.

그리고 기설이 등장했다.

명경은 햇병아리 같은 베타 꼬맹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천마의 문제는 대다수 섹스에서 비롯하며 또 대다수 섹스로 해소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섹스는 우성 알파인 명경이 도와줄 수도, 간섭할 수도 없는 한천마 개인의 사생활이었다.

그래서 명경은 걱정스러웠다. 생애 처음, 난데없이 남성 베타를 섹스 파트너 삼은 한천마의 충동이 걱정스러웠다. 그런 천마에게 기설이라는 남자가 어떤 영향을 끼칠까도 걱정스러웠다. 기설을 다루는 천마의 태도나 눈빛 그 모든 게, 명경의 예상 밖에 존재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정말로… 키우실 겁니까?”

2층 복도 중앙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명경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지난날 얻어맞은 얼굴의 멍울은 흐려진 지 오래였다. 찢어졌던 콧잔등에 붙은 작은 밴드 하나만이 그날의 소란을 상징할 따름이었다.

“키워야지.”

콧김을 가볍게 내쉬며 천마는 제 머리칼의 물기를 흡수해 젖은 수건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나신에 가운 한 벌을 대충 걸친 그의 몸에서 짙은 향기가 풍겼다. 갓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상태였다.

그는 받은 보고서를 훑어 내리다가, 시선을 돌려 1층 구석의 작은 방문을 바라봤다. 명경의 시선도 그를 따라 닫혀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다른 누구의 방도 아닌, 기설이 키우는 고양이 ‘경’의 방이었다.

명경은 열과 성을 다해 한천마를 위했으며 그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천마는 근래 들어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천마는 고양이를 데려온 기설의 선택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가볍게 뒷조사를 해 볼 때 기설에겐 얽힌 인간이 없었다.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었다. 그래서 곤란하던 차였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저를 아는 부모 자식, 애인, 하다못해 지인이라도 엮여 있어야 한자리에 남는 법인데, 기설에게는 그럴 만한 관계가 한 가지조차 없는 것이었다. 땅에서 치솟았다가 하늘로 꺼져 버리기 딱 좋은 처지였다.

그런데 고양이라니. 다 늙어 빠져서는, 길거리에 버렸다간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긴 늙은 고양이를, 제가 낳은 새끼라도 된다는 양 껴안고 이 집 안에 데려온 꼴이 웃겼다. 제 ‘여동생’이라며, 키우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며 이름을 소개하던 모습은 황당할 정도로 순진했다.

‘고양이 좋아하시잖아요. 한 마리 키울까 생각 중이시라고… 그러셨잖아요.’

절절한 목소리로 매달리던 기설을 회상하며 천마는 헛웃음을 흘렸다. 침대에서 이야기했던 ‘고양이’가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네발짐승이 아닌, 그 자신임을 모르는 기설이 웃겼다.

천마는 기꺼이 낯선 고양이를 위해 방을 내어 주었다. 그 방이 곧 기설의 발목을 묶어 놓는 족쇄임을 알고서 놓은 덫이었다. 천마의 속내를 모르는 기설이야 왕의 은혜에 감복한 노비처럼 굽신거렸다. 가져온 오십만 원도 받지 않을 테니 고양이에게 간식이나 사 주라고 했더니, 기쁜 듯 펄쩍거리는 꼴이 또 얼마나 웃긴지 몰랐다.

작게 실소하며 천마는 손에 쥔 보고서를 명경에게 내밀었다. 가져다 버리라는 식으로 건넨 보고서를 작성한 이가 다름 아닌 강명경이었다. 보통의 회사원이었더라면 감정이 상할 법한 일이었으나 명경은 보통의 회사원이 아니었고, 천마 또한 보통의 상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더 궁금하신 점은 없습니까? 필요하다면 깊이 조사해 보겠습니다.”

다만 명경은 그렇게 말했다. 오른쪽 하단이 조금 구겨졌을 뿐, 건넬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종이 뭉치 위에는 기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충실한 부하를 향해 천마는 고개를 내젓고는 말았다.

“형질 검사 결과상 베타가 확실하고, 은하 고아원 출신이고. 더 알 게 뭐가 있겠어?”

그러고는 손을 건성으로 흔들며 ‘물러가라’는 신호를 줬다. 그를 향해 묵례한 뒤, 명경은 기설이라는 남자의 인적 사항이 쓰인 서류를 들고 사라졌다.

2층 복도에 홀로 남아, 천마는 난간 위에 두 팔을 걸쳤다.

‘은하 고아원이라….’

기설이 천애 고아라는 것쯤이야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출신 고아원이 은하 고아원이라는 건, 천마에게 있어 조금은 유의미한 정보였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 천마는 옛 시절을 생각했다.

신산시의 그림자인 비닐하우스 화투 도박장, 카지노 랜드, 마약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한천마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천마는 카지노를 드나드는 중독자들을 되도록 아주 오래 살려 놓았다. 도박 랜드 안에서 아사한 시체가 나왔다간 재수가 없을 테니, 하루 한 번 도시락을 뿌리며 회원들을 관리했었다. 달에 한 번은 카지노 안에 뷔페 식당을 열어 모두의 배를 채워 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속성은 그다지 변하질 않았다. 인간은 천마에게 있어 가장 다루기 쉬운 동물이었다. 도박에 뇌가 절은 인간은 더더욱 짐승 같은 데가 있었다.

배가 부르면 경각심이 줄어든다. 먹고살 만하다, 아직은 재기할 기회가 있다 착각하는 것이다. 한천마가 베푼 식사로 배를 채운 중년의 남자들은 자신의 퇴직금을 몽땅 카지노에 쏟아붓고는 했다. 이혼한 지 오래인 아내나 취직한 자식들이 이따금 보내 주는 생활비, 집으로 돌아오라며 입금한 용돈 따위를 손에 쥐고 카지노로 달려왔다.

기설이 자랐다는 은하 고아원은 부모를 잃고 도박 랜드 근처를 헤매는 어린애를 주워다가 집어넣는 용도였다. 카지노에 빠져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비관 자살하는 부모의 수는 놀랍도록 많았고, 모텔방이며 뒷골목을 헤매 다니는 고아들이 있으면 장사를 망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부모에 이어 애새끼까지 도박 랜드에서 아사하면 그건 좀, 찝찝한 일이니까.

그러니 원장에게 최소한의 운영비를 지불하고 그 애들을 열다섯 살까지 길러다가, 어디 방출하든지 내보내든지 나중 일은 알아서 하라며 시설을 내준 거였다. 그게 한천마라는 악어가 흘린 눈물이었다. 나사 빠진 인간들을 뼈도 안 남게 씹어 먹고는, 더부룩하니 소화가 안 되어 트림하듯 흘린 눈물. 기설은 그 눈물을 먹고 자랐다.

태어났다기보다는 발생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리는 목숨들이 있었다. 습기 찬 곳에 피는 이끼처럼, 장마 후에 스미는 곰팡이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삶이 있었다. 지금 보니 기설의 태생도 그러했고, 한천마 자신의 삶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설은 한천마와 매우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기설이라는 베타는 몹시 심플했다. 단순하고, 깔끔했다. 욕심도 없었고, 그다지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누리고 싶어 하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냥’ 사는 사람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순간에 충실하며 때로 충동적인, 평범한 베타였다. 유별나게 잘생긴 껍데기만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천마는 기설이 편했다. 멀쩡하게 산다는 게 뭔지 모르는 아둔한 스물한 살 청년은, 어느덧 한천마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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