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기설은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끝났어. 진짜 끝장이 나 버렸다고….’
폭발하듯 울려 퍼지는 환호성에 둘러싸인 순간, 기설의 머리는 둔하게 움직였다. 그가 벙찐 채 추측하기로, 귓속의 달팽이관인지 달팽이 막인지… 하여간에 ‘달팽이 어쩌고’, 그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이름을 부르짖는 말들이며 욕설 섞인 외침들, 손바닥이 찢어져라 쳐 대는 박수 소리가 온통 피부 밖만 맴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펄펄 끓는 듯 뜨겁고 따가웠다. 그 밖의 무엇 하나 기설은 똑바로 느낄 수 없었다. 더운 공간을 가득 채운 소음조차 온통, 두꺼운 벽 너머 벌레 기는 소리처럼 희미했다.
동공이 시커멓게 확장된 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매시트포테이토처럼 뭉개진 귀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목을 적시고 쇄골 위에 고였다. 깊게 팬 빗장뼈 안으로 피 웅덩이가 생겼다. 검지를 담그면 찰박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기설은 거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코 속을 채웠던 핏방울이 스프레이로 분사한 양 허공으로 뿌려졌다. 각막을 태워 버릴 것처럼 밝은 빛 아래서 그는 콧김을 두어 번 거칠게 뿜어내다가,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흥분으로 흐려졌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다. 가장 먼저, 링 위에 쓰러진 반라의 남자가 보였다. 팔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은 선수는 전신으로 대자를 그리고 있었다. 미동 없이 쓰러져 있는 그의 어깨를 심판이 하얀 손으로 두들겨 댔다. 경기장 한편에 전리품으로 놓인 챔피언 벨트가 기설의 눈동자 안에서 번쩍거렸다.
뒤이어 링 바깥의 관중석이 보였다. 저를 향해 소리치느라 온통 바쁜, 흥분하고 성난 관중을 보며 기설은 웃음 지었다. 입 안의 깊고 검은 동굴들을 내보인 그들이 아기 새 같아서였다. 벌레를 먹여 달라고 부리를 깍깍 벌려 대는 아기 새….
그러나 허튼 생각에 잠겨 웃기도 잠시였다. 울룩불룩 성난 표정을 덮어쓴 남자들이 기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자使者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고 두뇌보다는 팔다리가 빠른 기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커먼 사내들을 피해 우선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저를 향해 소리치고, 팔을 뻗고, 미적지근해진 맥주와 침 섞인 물을 마구잡이로 뿌려 대는 인파를 허둥지둥 헤쳐 나갔다. 굵은 땀과 핏방울을 빵 부스러기처럼 흘리면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와아, 와아… 소리치는 인파 너머에서 검은 남자들은 구태여 그를 쫓지 않았다.
적의로 물든 눈동자를 기설을 향해 고정한 채, 휴대폰을 입에 댄 입술이 벙긋벙긋,
‘잡아.’
두 번 달싹였다.
“허억….”
겁에 질린 한숨을 남겨 놓고 기설은 더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탈의실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새 따윈 없었다. 복싱 트렁크만 달랑 걸친 채 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비상구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가, 문득 몸의 방향을 꺾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발소리가 있듯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발소리 또한 들려오고 있어서였다.
궁지에 몰린 기설이 궁여지책으로 붙든 것은 비상구의 사각 창문이었다. 먼지 쌓인 틀 위에는 담배꽁초가 우글우글 꽂힌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위로 밀어젖히고, 오른쪽 팔과 어깨, 그리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느끼며 그는 두 발로 안쪽 벽을 박차고, 왼쪽 어깨를 있는 힘껏 바깥으로 빼냈다. 다 큰 남자가 통과하기에 정사각형의 창문은 지나치게 작았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팔뚝이 창틀에 눌리며 꽉 끼는 게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기설은 유연했고 또 절박했다. 그는 폐를 채운 숨을 전부 빼낼 것처럼 길게 내쉬며, 전신을 앞으로 힘껏 젖혔다. 마침내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깨가 창틀을 통과했다. 비교적 늘씬한 하체를 빼내기는 훨씬 더 쉬웠다. 2층 창문 밖을 통과한 기설은 즉시 주차장 화단 위로 떨어졌다.
“헉, 헉….”
3미터 남짓한 높이에서 낙하한 충격으로 기설의 몸은 한 바퀴 크게 나뒹굴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그는 찌릿찌릿한 사타구니를 왼손으로 한 번 움켜쥐었다. 헐렁한 트렁크 밑으로 딴딴하게 중심부를 막아 주는 방어구가 잡혔다.
왼쪽 어깨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빠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창틀에 쓸린 팔뚝 살갗이 하얗게 벗겨진 채였다. 이내 핏방울이 맺히더니 하얀 자국이 빨간 생채기로 변했다.
“후.”
입술을 둥글게 말고서 뱉어 내는 한숨에선 아드레날린이 풍기는 듯했다.
뒤이어 갖은 충격이 기설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경기장의 하얀 조명이 아직도 눈앞에 번쩍거리는 듯했고, 심장은 계단을 내달리듯 쿵쿵 뛰었으며, 팔다리는 낙하의 충격을 잊지 못한 채였다.
그래도 기설은 일어나야 했다. 그가 막 빠져나온 2층 창문 밖으로 시커먼 남자가 얼굴을 내미는 게 보였다. 푸석푸석 마른 나뭇가지가 뭉개진 화단을 내려다보며,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그는 잔뜩 뿔나 보였다.
“저, 또라이 새끼가….”
짧은 욕설을 끝으로 그가 창틀 안으로 도로 목을 넣었다. 건물 외벽에 난 작은 창문을 통과할 엄두는 차마 못 내는 눈치였다. 검은 사내들이 저들끼리 외쳐 대는 말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왔다.
“저 씨발 것!”
“잡아 죽여 버려.”
기설은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몇 발짝은 네발로 기다시피 하다가, 이내 상체를 일으키고 내달렸다. 입은 옷이라고는 복싱 트렁크뿐이고 가진 것이라곤 담력뿐이어서, 그는 자신의 낡아 빠진 차 문을 열기 위해 운전석 차창 모서리를 깨부숴야 했다.
유리 가루가 쏟아진 운전석에 앉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글러브박스에 넣어 둔 다용도 잭나이프였다. 칼날, 톱날, 병따개 따위가 한데 접혀 있는 가운데 기설은 손톱을 다듬는 용도의 납작하고 작은 파일을 펼쳤다. 그는 그것을 열쇠 구멍 안에 쑤셔 박고는, 각도를 아래에서 위로, 좌에서 우로 비틀며 돌렸다. 그러자 낡은 차량의 시동이 걸렸다.
그 행동엔 일말의 지체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는 그런 짓들에 익숙했다. 익숙하다 못해 잘하기까지 했다. 뒷골목에서 나고 자라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도둑질뿐인 기설이었다. 범죄 도시 뒷골목에 기생하는 인생은 문자 그대로 야매였다. 그나마 덜 쓰레기처럼 살아 보겠다고 뛰어든 게 링 위였다.
그제야, 기설은 제 두 손에 끼워져 있던 글러브를 잃어버렸단 걸 깨달았다. 잠시 동안 아쉬워하다가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접한 삶으로부터 도망치겠다고 올라선 링 위였는데, 오늘은 링 밖으로 재차 도망쳐 나온 신세였다.
털털거리는 차를 몰아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뒤에야 기설은 귓바퀴를 채운 피를 닦았다. 고개를 거칠게 털어 내자 덜 닦인 코피 한 방울이 뚝, 기설의 남색 트렁크에 떨어졌다. 또다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경기를 마칠 때면 늘 이래 왔다. 심장을 익혀 버릴 것처럼 뜨끈하던 피는 삽시간에 식어 버리고, 닭살 돋는 추위가 대뜸 닥쳐오는 식이었다. 그 떨림이 오늘따라 격했다.
쓸쓸한 추위를 견디지 못해, 기설은 조수석으로 팔을 뻗었다. 시트 위에 덩그러니 놓인 땀내 나는 후드 재킷을 집어 들고, 어영부영 소매에 팔을 끼워 넣었다.
‘이게 다, 돈 때문에….’
그 순간에는 신호등의 색이 직관적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눈물에 젖어 뿌옇게 보이는 시야로도 청색 동그라미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핸들을 꺾고 액셀 밟아 가며 집으로 향할 적에 기설의 머리 안에는 ‘이천만 원’ 네 글자가 떠다녔다. 2년 만에 대뜸 그를 찾아온 코치가 건넨 통장에 찍힌, 숫자 2에 붙은 0이 일곱 개였다. 어차피 선수로서 재기는 불능이고 호시절도 다 가지 않았냐며 코치는 승부 조작을 권해 왔다.
조건은 간단했다. 복귀전에서 4라운드까지 질질 끌며 베팅금이 올라가길 유도하다가 패배하라는 것. 그렇게만 하면 통장 비밀번호와 그 안에 든 이천만 원이 기설의 것이었다.
‘흥’ 소리 나게 기설은 콧김을 내쉬었다. 못 본 새 낯빛이 한층 붉어진 코치에게서 풍기던 담배 쩐 내가 아직도 콧구멍 안에 맴도는 듯했다.
‘은퇴 자금을 모을 좋은 기회야.’
코치의 말에 기설은 쉽게 감화됐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옳은 소리였다.
말이 좋아 복서지, 기설은 어중이떠중이 아마추어 선수 중 하나였다. 그가 소속된 실업 팀 ‘금강’은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 소속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매 분기마다 열리는 불법 베팅 토너먼트에 선수를 내보내는 깡패 집단에 가까웠다. 이곳 신산시의 대다수 실업 팀이 그와 같이 굴러갔다.
복귀전을 훌륭하게 치르고 경기 다섯 판을 연승한대도 기설은 이천만 원을 모으진 못할 터였다.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선수 생활의 낭떠러지에 놓인 기설이었다. 전에 비해 녹슨 컨디션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수익 정산이었다. 선수로서 기설이 받을 수 있는 돈은 제 목에 걸린 베팅금의 2할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실업팀과 나누고 매니저에게도 얼마의 몫을 떼 줘야 했다.
피차 좆같은 입장에서도 어찌어찌 일확천금을 버는 선수들도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짜고 치는 승부 조작 경기에 우승마로 낙점된 케이스가 그랬다.
‘‘우승마’? 지랄하네.’
기설은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게 다, 그 새끼. 그 씨발 새끼 때문에….’
핸들을 움켜쥔 손등 위로 두드러진 퍼런 핏줄이 Y자를 그렸다. 두 눈을 홉뜬 채 기설은 액셀을 밟았다. 눈시울 적시며 질질 짤 여유 따윈 없었다. 더운 숨을 식식거리며 기설은, 제가 패배해야만 했던 상대 선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뻔뻔한 얼굴에 비릿한 웃음을 띤 채 링 위에 오르던, 그 새끼…. 그 씨발 새끼의 이름조차 기설은 오늘 알았다.
‘아니… 아니야, 이건 다 나 때문이야.’
미친 사람처럼 웃기를 한참, 오만상을 찡그리기도 잠시, 기설은 제 왼뺨을 힘껏 쳤다. 맞은 뺨에서 얼얼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단 채 그는 낡아 빠진 빌라 앞 갓길에 아무렇게나 차를 댔다. 좁은 도로는 기설의 깡통 차 한 대로도 꽉 막히기 충분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낡은 빌라의 옆구리에 걸린 철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짐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과 방 하나로 이뤄진 조그만 집에, 그가 챙겨야 할 짐은 하나뿐이었다.
“경아!”
힘껏 소리치며, 기설은 여닫는 면이 그물망 모양으로 짜인 낡은 가방을 먼저 들었다. 더운 공기로 가득 찬 거실에는 바닥을 향해 고개 숙인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 내며 미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설은 너저분한 소파 밑과 구겨진 침대 시트,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밥그릇을 훑어보았다. 밥그릇 안에는 진갈색 사료 알갱이들이 한 움큼 남아 있었다.
“경아. 경아? 이리 와, 빨리.”
가방 입구를 벌려 놓고 기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리저리 땅바닥을 훑은 뒤에는 벌떡 일어나 높은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제야 먼지 쌓인 책장 위, 박스 안에 앉은 고양이가 시야에 들어찼다.
“이리 와!”
기설이 팔을 뻗자 놀란 고양이가 화들짝 몸을 피했다. 집 안을 종횡무진하며 잽싸게 달아나는 늙은 고양이, ‘경’을 잡기 위해 기설은 헐떡거렸다. 파란만장한 하루는 벌써 충분히 길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고양이마저 그의 속을 썩일 필요는 없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기설은 숨이 막혔다.
“아, 경아. 경아, 제발!”
소리친다고 될 일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기설은 버럭 화를 내고야 말았다. 어영부영 억눌러 온 성질을 애먼 고양이에게 터뜨린 대가는 가혹했다. 잡아다가 동물 병원에라도 데려가는 줄 알았는지, 놀란 고양이가 더욱 멀리,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을 잡겠다고 두 팔을 책상 밑으로, 침대 위로, 다시 커튼으로 허우적거리면서 기설은 울기 직전이었다.
“씨발, 씨발…. 빨리 이리 와, 경아. 지금 나가야 돼!”
시커멓게 밀려드는 불안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설은 제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절망한 사람처럼 바닥에 엎드린 채,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찍었다. 손목까지 얼얼해지도록 바닥을 학대하고 나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들자, 땀방울이 늘씬한 턱을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짙고 반듯한 눈썹 끝이 시무룩하니 아래로 향했다.
“욕해서 미안해….”
젖은 목소리를 내며 기설은 꼬리를 잔뜩 부풀린 경을 찾아냈다. 진회색 털이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친 채 늙은 고양이는 식탁 의자 아래에 숨어 있었다. 힘없는 발은 쭉 뻗고 성난 숨은 학학거리며, 기설을 노려보는 경의 눈이 녹색으로 번뜩거렸다.
“너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미안해, 경아…. 성질부려서 미안.”
중얼중얼 애원하며, 기설은 고양이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병원 가려는 거 아니야. 제발 이리 나와, 제발 한 번만 오빠 좀 봐주라…. 진짜 빨리 가야 돼. 제발…, 응? 이리 와 주라.”
바닥에 납작하니 엎드린 채 부탁하는 기설을, 경은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이내 성난 고양이의 부푼 꼬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경은 쉰 목소리로 ‘애옥’ 하고 특유의 울음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기설이 손을 뻗자 경이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벌건 생채기가 남은 그의 손등에 털이 북슬북슬한 정수리를 문질렀다. 제 주먹보다 작은 머리를 가진 늙은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기설은 오늘 들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이내 그는 연약한 고양이의 머리를 두어 번 긁어 준 다음,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텅’ 소리를 울리며 빌라 문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놀란 기설이 고개를 들자마자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기설은 두 팔을 올려 날아드는 공격을 막으려 했고, 그 바람에 경을 놓치고야 말았다. 기설의 유일한 가족이자 챙겨야 할 짐이었던 고양이가 짤막하고 묘한 울음소리를 크게 냈다. 말라빠진 털 짐승이 달아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 씹… 성가신 새끼! 멋대로 굴어도 분수가 있지, 미친놈이 도망을 쳐?”
퍽, 퍽, 연이은 발길질과 욕설에 두들겨 맞으면서 기설은 허둥지둥했다. 그를 둘러싸 차고 밟아 누르는 구두는 두 쌍이었다. 고개를 뻗자 활짝 열린 철문 너머 계단을 지키는 남자가 한 명 더 보였다. 그의 정강이 옆으로, 스치듯 빠르게 달아나는 고양이 때문에 기설은 넋이 나가 버렸다.
“경아…, 경아!”
턱을 세게 차이고 허리를 짓밟히던 것도 잠시, 기설은 제 가슴팍으로 날아든 종아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대로 몸을 힘껏 비틀자 다리를 붙들린 장정이 ‘어어’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두 발로 누런 장판 바닥을 딛고, 기설은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딱딱한 머리에 코를 들이받힌 사내가 요란하게 뒤로 자빠졌다.
“이, 이런 씨발….”
기설은 즉시 몸을 틀어, 재킷 주머니를 급히 뒤적이는 다른 사내를 덮쳤다. 그를 넘어뜨리고 콧잔등에 잽을 날리기까지 순식간이었다. 힘을 실어 서너 대를 갈겨 놓자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뭉개진 코를 움켜쥐는 남자를 내버려 둔 채 기설은 헐레벌떡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를 잡겠다고 팔 뻗는 문지기를 그는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있는 힘껏 그의 품 안으로 직행했다. 어깨로 힘껏 가슴팍을 받아 버리자, 상체가 뒤로 홱 젖혀진 남자가 삐걱거리는 철제 난간을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휘청대며 중심을 잡는 사이 기설은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 내려갔다. 빌라 앞, 굽이지고 너저분한 골목길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늙은 고양이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조폭들이 타고 온 시커먼 차량들이 기설의 차를 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경아!”
좁은 도로 위에 선 채 기설은 회색 고양이의 실루엣을 정처 없이 쫓았다. 그때 밝은 빛이 끼쳐 오더니, 그대로 기설을 강타했다.
일순 기설의 몸이 붕 떴다가, 차도 위로 떨어졌다. 맥없이 다섯 바퀴를 구른 뒤에야 기설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음을 깨달았다.
놀란 심장이 잠깐 멈춘 듯하다가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기설을 쳐 버린 차는 골목길을 채운 여느 차와 다를 바 없이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운전석에서 내리는 키 큰 남자는 여느 조폭들과 같지 않았다. 쓰러진 기설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온몸은 찰흙 덩어리를 덕지덕지 뭉친 것처럼 근육질이었고 입술 위에는 X자 모양 자상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웃는 아이도 울게 할 외모였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그가 저를 한 번 더 쳐 버릴까 봐 기설은 목을 부들부들 떨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화끈화끈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검은 차는 천천히 후진했다. 갓길 구석으로 차를 붙여 길을 터 준 것이었다.
이내 훤히 트인 회색 차도 위로 라디에이터 그릴이 은색으로 번쩍거리는, 몹시 우아한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차체를 본 순간 기설은 넋이 나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고 심장의 피가 아래로 쫙 쏟아지는 듯했다. 제가 쳐 놓은 난장에 화난 이가 그저 날건달, 깡패 새끼들이라면 이 도시를 떠나 2년쯤 엎드려 살면 그만이었다. 여차하면 칼에 맞거나 퍽치기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받은 돈을 돌려주고 싹싹 빌면 어찌어찌 수습될 일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검은 차량과 정장 입은 사내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리무진이 등장한다면 말이 달랐다. 생각이 둔한 기설조차도 그 정도는 알았다. 적어도 이 도시, 신산에서 이러한 대우를 받는 남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뒷골목의 열 살 아이라도 그에 대해 알 것이었다. 그와의 약속을 어겨서도, 그의 돈을 떼먹어서도 안 된다는 걸.
‘설마….’
기설은 숨 쉬는 법도 잊고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리무진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괴물 눈동자처럼 번뜩이며 기설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몇 초간 뜸을 들이는 듯하다 리무진의 문이 벌컥 열렸다. 기설이 바닥 위에서 움찔거렸다. 다시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구둣발이 차도로 뻗어 나왔다. 조금 전 기설을 차로 친 남자가 그 앞으로 다가가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큰 덩치가 무색해지도록 부쩍 공손한 태도였다. 뒷좌석 문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뿜어져 나온 연기로 미루어 볼 때,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듯했다.
소란하던 골목길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연기를 뱉는 사내의 숨소리가 크게 울릴 지경이었다.
이내 그가 차 밖으로 일어나 나왔다.
기설은 그 사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괴물처럼 커다래 보이던 검은 남자들이 작아 보일 정도로, 무서울 만큼 키가 크고 온몸이 떡 벌어진 사내였다. 이마 위로 걷어 넘긴 시커먼 머리칼은 몇 가닥이 관자놀이로 흘러 있었고 두꺼운 몸을 감싼 하얀 셔츠는 몹시도 깨끗한 백색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
낮의 더운 햇볕을 게걸스럽게 흡수한 아스팔트 바닥은 늦은 밤에도 뜨끈했다. 그런데도 기설은 차가운 식은땀을 흘렸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사내가 제게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설의 체온은 떨어졌고 등줄기는 서늘해졌다.
다리가 무척 길어 보폭이 넓은 사내는 삽시간에 기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새파랗게 어린애잖아?”
담배 필터를 깨문 잇새로 나온 목소리는 납작하다고 느껴질 만치 낮았다. ‘새파랗게 어린애’가 저를 지칭하는 말임을 받아들이기까지 기설에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는 기설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그의 낡은 가방, 속이 텅 빈 고양이 이동장을 발로 툭 찼다.
“뭘 챙기러 온 거니.”
그가 말했다. 말끝을 내렸다 뿐이지 분명한 질문이었다. 코 밖으로 담배 연기를 뻑뻑 뱉어 내는데도 사내에겐 경박한 느낌일랑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기설은 그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처럼 아름다운 여자 또한 본 적이 없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바둑알처럼 또렷하게 박힌 두 눈도, 너무 높고 단단해 보여 무서운 느낌마저 드는 콧대도, 담배를 태우느라 슬그머니 비틀린 입술도, 공들여 깎아 낸 듯 선이 반듯한 턱 끝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은 벌어진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름다운 사내가 실소했다. 절 보며 넋을 놓는 이가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기설은 바닥을 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뜩 까진 손바닥에서 따끔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대로 뒤돌아 달아나려는 기설의 머리를, 퇴로를 가로막은 검은 남자가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맞고도 기설은 쓰러지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조금 비틀거릴 따름이었다.
도리어 코피를 흘리는 건 기설을 때린 남자 쪽이었다. 기설은 조금 전, 제가 넘어뜨리고 잽을 네 대나 갈긴 남자를 알아보았다.
“저, 그…, 그게.”
기설이 주춤거리는 사이, 검은 차량이 두 대 더 밀려들었다. 좁은 차도가 빼곡하니 가득 찼다. 사방에서 비쳐 드는 헤드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그는 눈을 굴렸다. 주변 건물의 창가로 주민들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하나같이 커튼을 치고 불을 끄느라 바빴다.
“그게… 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무어라 말을 꾸리는 척 입을 벙긋거리다가, 기설은 검은 차 두 대 사이로 불똥처럼 뛰어들었다. 그대로 달아나려는 기설의 몸뚱이를, 닫혀 있던 차 문이 벌컥 열리며 가로막았다. 문짝에 부딪힌 기설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차에서 막 내린 남자가 그를 제압하려는 듯 발길질을 갈겼다.
“컥, 헉, 콜록….”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폭력을 피해 기설은 엉금엉금 뒤로 물러섰다. 그런 기설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사냥개처럼 에워싸며 압박했다.
벽을 이룬 검은 남자들을 피해 뒤를 돌아보면,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사내가 보였다. 하얀 셔츠로 감싼 팔뚝이 굵다란 윤곽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가 풀어놓은 사냥개들을 구경하는 검은 눈알이 즐거운 듯 보였다.
“…….”
기설은 다시 정면 돌파를 노리는 척 시늉하다가, 뒤를 향해 냅다 달렸다. 졸개들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장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뚫고 나갈 작정이었다.
“…억!”
그 순간 담뱃불이 기설의 눈앞에서 뻘겋게 날리고, 묵직한 주먹이 배 중앙으로 꽂혀 들어왔다. 기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두 발이 잠깐 허공에 떴다가, 이내 옹송그린 전신이 통째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번에 기설은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 큰 고통에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서는 바닥 위를 한 바퀴 굴렀다.
“컥, …컥! 커헉….”
배 중앙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토 나오게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기설은 알 수 있었다. 장기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고, 울컥 솟구친 위액이 입 안을 맴돌았다.
“윽, 끄윽….”
콘크리트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서 기설이 신음했다. 기침과 함께 삐져나온 침방울이 아랫입술에 매달렸다가 일자를 그리며 떨어졌다. 단숨에 뿜어져 나온 식은땀으로 전신이 흠뻑 젖었다. 몸을 붙인 바닥 위에 진회색의 물 자국이 남았다.
몸을 둥글게 만 채 기설은 잘게 떨었다. 기다란 팔다리를 구기며 콩벌레처럼 웅크린 사냥감을 내려다보며, 사내가 물었다.
“얘. 이름이 뭐라고?”
“기설이랍니다.”
대답은 그의 좌측에서 들려왔다.
“무슨 이름이 그 모양이야?”
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웃음 짓는 여유는 오롯이 사내만의 몫이었다. 기설은 그의 발 앞에 구겨진 채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기설아?”
부드러운 음성이 기설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기설이. 아가야, 일어날 수 있겠어?”
다정한 말씨에 기설은 혼미해졌다. 독 안에 든 쥐라는 걸,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 그의 멱살을 낚아채야 할 사내의 음성은 몹시도 따듯했다.
“네, 네….”
기설은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목 가죽 위로 핏대가 불거져 있었다. 놀란 나머지 맥박이 벌렁벌렁 뛰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네가 왜 맞았는지는 이해하니?”
사내가 물었다. 지나치게 쉬운 질문이었다.
“네….”
기설이 맥없이 대답했다. 이해 못 할 리가 없었다. 당장에 칼을 맞거나 골프채로 턱이 갈려 산에 묻힌대도 할 말이 없었다. 돈을 받아 놓고는 제 몫을 해내지 못했으니 말이었다.
아니, ‘해내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 링 위에서 기설이 맡은 역할은 4라운드 내내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참패를 당하는 악당 졸개였다. 졸개 주제에, 그는 영웅이 되어야 할 상대 선수를 한 방에 때려눕혔다. 경기는 1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져, 져야 하… 하는데 이, 이겨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가 물었다. 그 바람에 기설은 몹시 멍해졌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또 뭘 잘못했지?’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그러잖아도 멍청한 편인데 더욱 덜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설의 얼굴을,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빤히 담았다. 사람 손을 안 탄 살쾡이 새끼처럼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던 기설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 물정 모르게 어린 티가 난다 싶더니만,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은 꼭 백치 같았다. 얼떨떨한 기색을 못 감추고 끔벅거리는 갈색 눈동자 안에 까만 동공이 커다란 것이, 인제 보니 살쾡이 새끼가 아니라 강아지였다.
“오.”
사내가 소리 내어 감탄했다.
“얘 좀 봐, 제 손으로 사람을 죽여 놓고도 모르네.”
그의 목소리는 발랄했고 얼굴은 완연한 미소가 걸려 즐거워 보였다. 반면 건네 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잘못된 장면에 잘못된 대사가 삽입된 영화 같았다.
“…….”
기설은 터진 입술을 느리게 벌렸다. 여름밤의 길바닥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그가 내지른 소리로 인해 갈라졌다.
“주…, 죽, 죽었어요?”
아연실색하며 기설이 소리 질렀다. 그 반응에 사내가 웃었다.
“그래, 어떡할래?”
“네? 뭐, 뭘…, 어, 제가, 제가 뭘 어떡해야…. 어떡해야 합니까…? 도, 돈은 다 돌려, 돌려드리겠습니다.”
“돈? 그게 얼마더라. 오천? 그 돈을 돌려받아서 내가 뭘 하지?”
“…네?”
“그 판에 얽힌 지폐가 몇 장인데, 네 코딱지 돌려받으면 뭘 하느냐고.”
기설은 얼이 빠졌다. 코치가 제게 건네줬던 통장에 찍혀 있던 금액은 분명 이천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알고 보니, 기설로부터 감사 인사를 듣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던 코치는 선수 몫의 돈을 삼천만 원이나 빼먹은 도둑 새끼였다. 믿었던 코치가 저를 배신한 것과, 신뢰를 무너뜨리도록 큰돈을 ‘코딱지’라고 표현하는 남자에게 잘못 걸린 것. 둘 중 무엇이 더 나쁜지 기설은 분간할 수 없었다.
당황한 탓에 멍해진 기설 앞에, 사내가 몸을 숙였다. 그가 반쯤 쪼그리고 앉자 커다란 어깨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기설을 이불처럼 덮었다. 저를 향해 가까이 고개 숙이는 남자를 피해, 기설은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긴장한 탓에 넘어진 채로도 발이 저렸다.
겁먹은 기설을 채근하는 대신, 사내는 발치에 떨어진 제 담배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 기설의 배에 주먹을 갈기느라 떨어뜨렸던 담배는 거의 다 타들어 가 짧은 꽁초가 된 상태였다. 굵은 손가락 사이에 집히자 꽁초가 유독 작아 보였다. 필터를 입술 새에 물고, 사내는 남은 연기 한 모금을 짧게 빨았다. 싸한 연기가 그의 콧구멍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기설은 그 모습이 하얀 용 같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니?”
갈색으로 변한 담배꽁초를 뱉으며 사내가 물었다.
“바로 집으로 온 걸 보니 아무 계획 없이 일을 저지른 모양인데…. 왜 그랬어?”
“과, 곽창이라고는 말씀 안 하셨잖습니까.”
사내의 반들거리는 구두코를 바라보며, 기설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응?”
사내가 목 울리는 소리로 반문했다. 기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경기, 상대가… 곽창이라고는 말씀 못 들었습니다. 저는, 모르고 링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실수한 겁니다.”
“서로 아는 사이였나 보지?”
이번에 기설은 절박하고 빠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더더욱 깊이 떨구었다. 아스팔트 바닥 위를 긁으며 주먹으로 말리는 손을, 사내가 내려다보았다.
“기설아. 우리 일을 왜 망쳤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너를 어떡할지 방법을 구해 보지 않겠니.”
언뜻 다정하게 들리는 그 말이 협박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낭떠러지에 발뒤꿈치를 댄 기분으로 기설은 입고 있던 후드 점퍼의 지퍼를 주섬주섬 내렸다. 그러고는 제 가슴께와 복부를 보였다.
곧바로 드러난 알몸에는 직직 그은 모양새의 흉터가 대여섯 줄 새겨져 있었다. 갈비뼈와 복부, 옆구리까지 가리지 않고 새겨진 일자형 자국들은 소위 말하는 칼빵의 흔적이었다. 칼을 직각으로 쑤셔 박으면 그렇게 길이가 짧은 자상이 남았다.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정말 질 생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4라운드 되자마자 맞기만 하고 바로 뻗을 생각이었는데.”
사내의 눈이 느릿하게 기설의 상체를 훑었다. 헬스나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균형 잡힌 몸은 아니었다. 흥분과 긴장을 못 감추고 오르락내리락 가파르게 움직이는 가슴은 열기로 붉어진 채였고, 복부에는 잔근육이 야트막한 둔덕을 만들어 놓았다. 판판한 배 중앙에는 작은 배꼽이 옴폭 들어가 있었다. 반쯤 흘러내린 복싱 트렁크 위로 두툼한 흉통에 비해 잘록한 골반이 두드러졌다.
“과, 곽창이… 곽창이 그, 그 새끼가… 그 새끼가 저, 절 이렇게… 칼로 찌르… 찔러서. 제… 제가 선수 생활 쉬게 된 것도 다 그놈 때문입니다.”
기설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마음처럼 문장을 반듯하게 구사하질 못하는 이유가 상대의 카리스마에 짓눌린 탓인지, 그의 시선이 제 몸 깊숙이 후벼 파듯 들어오기 때문인지 불분명했다.
한편으론 안달이 났다. 기설은 사내가 부리는 졸개 말 중 하나였다. 일개 졸개가 칼빵을 맞아 원한을 품은 정도로는, 큰돈이 걸린 판을 엎어 놓을 이유로 부족할 게 분명했다.
이마 위를 시뻘겋게 붉히며 기설은 애써 입술을 열었다. 제 입으로 내뱉기 싫은 남은 원한을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할 때였다. 그의 관자놀이 위로 두드러진 핏줄이 꿈틀, 짓밟힌 지렁이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저를… 그 새끼가, 그게, 억… 억지로 그… 그래서….”
제 입으로 미처 말을 마치지 못하고서 기설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는 비웃음이건 혀를 차는 소리건 욕설이건 주먹이건, 여러 형태의 폭력이 닥쳐올 것을 예상했다.
“…….”
그러나 사방은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떨리는 시선을 힐긋 올리자,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거대한 사내가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기설의 가슴께에 머무르고 있었다. 숲의 나무처럼 빡빡한 속눈썹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그의 눈알에서 타는 듯한 욕망이 느껴졌다.
짐승 같은 두 눈에 기이한 식욕이 득실거렸다. 느릿느릿 기설의 가슴과 유두, 배와 골반을 지나 사타구니를 훑어 내리는 눈길에는 깜빡임 한번 없었다. 기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가 제 육신을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그렇지 않은지 재 보고 있다는 걸.
그 순간 기설은 난생처음으로 분홍색 수치심을 느꼈다. 사내가 제 가슴을 탐미하듯 훑어보는 게 부끄러웠다. 나신을 내놓는 게 당연한 복서이자 남자로서 느끼기에, 성적 수치심은 너무나 낯선 감정이었다. 허둥지둥하며 기설은 후드 재킷 지퍼를 끌어 올려 제 피부를 가렸다.
기설의 반응에도 사내는 꿈쩍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쉽다는 듯 제 입술 새를 혀로 축였다. 빨간 혀끝에서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젖은 입 안에서 울려 나오는 ‘쩝’ 소리에 기설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억지로 뭘. 빠구리라도 쳤다는 거야?”
사내가 추궁하듯 물었다. 기설은 아스팔트 바닥만을 노려보았다.
“…네.”
다시 떠올리기도 버거운, 2년 전의 기억이었다. 아니다, 정확히는 기억이랄 것도 없었다. 당시 기설은 기습을 당했고 즉시 의식을 잃었다. 추잡한 뒷골목에서 벌어진 사건의 기록은 기설의 머릿속엔 남아 있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번쩍 눈을 뜬 발작의 순간에 느꼈던 모멸감과 증오만이 생생할 따름이었다.
이를 꽉 악문 기설의 턱에 가로줄이 움푹 파였다. 그 자국을, 사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로 종족이 다른 존재처럼 거대한 사내 옆으로,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즉각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사내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자리 좀 옮길까.”
연이어 무어라 귓속말을 하고 물러나더니, 그는 리무진으로 돌아갔다.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지체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고, 사내는 차에 올랐다.
벙찐 채 바닥에 엎어진 기설에게로, 콧대가 으깨진 남자가 직진해 다가왔다. 콱 말아 쥔 주먹이 기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기설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눈앞에서 번뜩 스파크가 튀었다.
***
미지근한 물이 기설의 몸 위로 떨어졌다. 반나절간 여름 볕에 데워진 채 호스 속에 고여 있던 물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가느다랗던 물줄기는 어느 순간 살이 에이도록 차가운 온도로 콸콸 쏟아져 나왔다. 냉수가 속옷 안까지 흠뻑 적시는 감각에 기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인해 몸의 근육은 물론 성기까지 수축하는 듯했다.
“허억….”
놀라 고개를 퍼뜩 들며 기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 하나 없는 시커먼 벽이 기설을 에워싸고 있었다. 바퀴에 개흙이 묻은 트럭 한 대가 숨은 듯이 주차된, 차고 안이었다. 세차용 호스의 수압이 강하게 기설의 어깨부터 사타구니, 발까지 싹싹 훑었다.
기설은 허둥지둥하며 손으로 물길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 기설을 놀리려는 듯, 거센 물길이 방향을 틀었다. 얼굴을 때리듯 끼얹어 대는 냉수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머리꼭지부터 흠뻑 젖은 채 기설은 콜록콜록 기침했다.
“야, 곽창이 그놈아가 왜 그랬는지 알긴 알겠다.”
호스를 쥔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좆 달린 새끼도 너처럼 수줍게 굴면 꼴리게 마련이거든.”
그와 세트로 맞추기라도 한 듯, 나란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쯧’ 소리 나게 혀를 찼다.
“넌 씨발 지 따먹은 놈 죽인 새끼한테 그럴 마음이 드냐?”
말소리를 끝으로 호스 물이 그쳤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채 기설은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분노가 서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들은 저들끼리 두어 마디를 더 킬킬거렸다.
“왜, 나도 죽이게?”
이내 젖은 돌바닥 위로 새 옷가지가 던져졌다.
“입어.”
기설은 흠뻑 젖은 저지와 속에서 물이 찰방거리는 트렁크를 벗어 내리고 받은 옷가지를 살폈다. 하얀 셔츠는 옆구리 실밥이 일자로 뜯겨 있었고, 청바지는 기설의 허벅지엔 너무 딱 들러붙었다. 구깃구깃한 셔츠 깃에서 모르는 이의 체취가 나는 듯도 했다. 기설은 이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얌전히 옷을 챙겨 입고 선 기설의 낯을, 사내들이 아니꼬운 듯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차고 안쪽 문을 향해 턱짓했다. 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마자 기설은 시커먼 그림자를 코앞에서 맞닥뜨렸다. 검은 사내의 입술 위에 새겨진 흉터를 너무 빤히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X자형 흉터가 새겨진 날 저 입술이 어떤 모양으로 찢어졌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아픈 느낌이었다.
이내 그가 기설의 팔뚝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거센 손길에 기설은 내심 놀랐다. 한물간 복서라고는 하나 그도 훤칠한 편이었고 어딜 가서건 피지컬이 떨어진단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외형만 보고는 알파로 착각하고 접근하는 오메가도 많았다. 저는 무향 무취의 베타라고 사실대로 말해 주어도, 거짓말로 거절한다 생각하고 마음 상해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떡대는, 그런 기설을 유치원생 끌고 가듯 쉽게 다뤘다.
기설은 반은 자의로, 반은 타의에 이끌려 승강기에 탔다. 차고와 이어진 좁고 습한 복도에서 올라탄 승강기는 뜻밖에 번지르르한 데다 넓었다. 방향제 냄새를 맡으며 기설은 버튼을 확인했다. 떡대의 검지가 꼭대기인 5층 버튼을 꾹 눌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승강기 문이 열렸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설은 당황했다. 광활하게 느껴질 만치 너른 방은 벽 한 면이 통째로 유리창이었고, 바깥으로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기절한 채 끌려온 입장으로 기설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했다. 5층 풍경이 이리도 높은 것을 보면, 건물이 꽤 고지대에 자리한 듯했다.
밤의 신산을 밝히는 불빛이 별처럼 내려다보이고, 바닥에는 페르시안 무늬 카펫이 깔렸으며, 중앙 소파 자리에는 손목의 시곗줄을 풀어 내리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가 몹시도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달고 팔다리를 모델처럼 쭉 뻗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재벌 기업가 회장님의 방이라고 착각했을 거였다. 조금 전 보았던 구질구질한 차고와 같은 건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수준이었다.
등 뒤를 세게 떠미는 손길에 못 이겨 기설은 주춤거리며 승강기에서 내렸다. 멀찍이 앉은 사내가 그런 기설을 위아래로 훑었다. 유리면이 반질거리는 테이블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마저 돈 냄새를 풍기듯 반짝거렸다.
그가 손짓하자 기설의 두 무릎이 즉시 꿇렸다. 검은 사내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동시에 무릎 뒤를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신수가 훤하네.”
금줄을 풀어낸 시계를 재떨이 옆에 내려놓으며, 사내가 말했다. 기설은 그 말에 내심 실소했다. 신수가 훤하다니. 그럴 리 없다는 걸 기설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곧 죽을 운명을 받아들이느라 불알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그에게 남은 문제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느냐는 딜레마뿐이었다.
“이리 와.”
이어 다정한 목소리가 기설을 불렀다. 그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기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기설이 한 발짝 다리를 뻗는 순간 굵은 발이 기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잔뜩 긴장해 얼어붙은 기설은 ‘쿵’ 소리가 나도록 카펫 위에 나자빠졌다.
“윽.”
당황하고 놀란 채 기설은 저를 넘어뜨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흉터가 어긋나도록 입술을 비튼 채, 그는 기설을 깔보고 있었다.
‘뭐야?’
기설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는 큰 손으로 기설의 어깨를 세게 내리눌렀다. 체중을 실은 힘을 못 이겨 애써 일으켰던 무릎이 ‘쿵’ 소리를 내며 도로 꿇렸다.
힘으로는 어느 경기에서건 밀려 본 경험이 없는 기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기설은 링 밖으로 뛰쳐나온 선수였다. 경기장 밖의 세상에는 그런 기설을 지켜 줄 규칙도 심판도 없었다.
‘…아니.’
심판이라면 있기야 했다. 기설은 무릎 꿇은 채 시선을 들어 방의 주인을 살폈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게 잘생긴 얼굴로, 사내는 무표정했다. 높다란 콧대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직선으로 뻗어 뺨을 가로지른 모습이 꼭 석고상 같았다. 그가 기설의 심판이었다.
천천히, 기설은 무릎 꿇은 채 두 손을 바닥에 댔다. 그대로 카펫 위를 네발로 기기 시작했다. 실수를 저지른 개처럼, 걸음마를 못 뗀 아기처럼 엉금엉금 움직이며 발치로 다가가자 사내가 웃었다.
“너 펠라는 할 줄 아니.”
그리고 물었다.
“네?”
난데없는 질문에 기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가 팔을 내려 기설의, 꽉 죄인 셔츠의 맨 위쪽 단추를 뜯었다.
“펠라티오 말이야. 응? 좆 빨 줄은 아느냐고.”
질문이기는 한데, 궁금해서 물어보는 소리 같진 않았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두 무릎을 벌린 것만 봐도 그랬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커다란 사내의 덩치는 훨씬 더 커 보였다.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정장 바지의 주름조차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
즐거운 것 같기도, 화난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미소를 올려다보다 기설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의 좆 따위는 빨아 본 적 없었고 빨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누가 제 것을 빨아 달라고 들이민다면, 기설은 그것을 물어뜯고 상대의 코뼈를 뭉개 줄 남자였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각, 이 방 안에서, 이 사내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거절할 수도 없었고 반항할 수도 없었다. 긴장한 탓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침이라도 삼켜 보려 했으나 건조한 공기만이 목구멍 안으로 떨떠름하게 넘어갈 뿐이었다.
기설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빳빳하게 경직된 목을 뻗어 사내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을 깊이 숙이며 어색하게 볼을 문지르자, 남자의 짙은 체취가 묵직한 향수 냄새에 섞여 코 안을 파고들었다. 정장 바지의 천 아래에서 두둑한 살덩이가 움직거리는 듯도 했다.
“하하.”
사내가 웃었다. 기설은 그의 가랑이에 파묻은 고개를 떼어 내지 못하고 연신 좌우로 비비기만 했다. 얼굴을 들어 저를 비웃는 이를 마주하느니 차라리 남의 좆 냄새를 맡는 게 나은 일 같았다.
치욕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뒷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수치심이고 자존심이고 그런 건 숨이 붙어 있는 인간에게나 유의미한 문제였다.
그래서 기설은 최선을 다했다. 좆을 빨아 본 적은 없지만 빨려 본 적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떻게 해야 남자가 달아오르는지 그 방법까지 모르진 않는 것이었다. 점차 윤곽을 드러내는 단단한 살덩이에 볼을 기대어 붙이고, 천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기다랗고 굵은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성기는 무서울 정도로 크고 굵었다. 기설은 그 윤곽 위를 입술로 앙 무는 시늉을 했다. 남자의 진회색 바지 위에 기설의 침이 만든 물 자국이 생겼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기설이 시선을 올렸다. 힐끔 반응을 살피려 했을 뿐인데,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너. 내가 누구인진 알고서 이러는 거야?”
검은 눈동자 안에 불씨가 심겨 있었다. 타오르는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기설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 ‘보스’요….”
떨떠름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자,
“보스?”
사내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하얀 치열이 두드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보스는 무슨 보스야.”
하하, 하하하… 또렷한 웃음소리가 끊기듯이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금이 저리도록 큰 두려움을 안겨 주던 사내인데, 즐거운 듯 웃으니 기설마저 그 감정에 매료되었다. 바보처럼 기설은 그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혀, 형님이요…?”
“형님? 하하.”
손을 들어 하관을 가리며 사내가 큭큭거렸다. 검지 마디를 코끝에 댄 채 그는 즐거운 듯 웃다가, 잘빠진 턱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웠다. 그가 빈손을 허공에 대자, 다가온 부하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그의 검지에 가져다 댔다. 사내가 할 일이라곤 담배를 가져다 입에 무는 것뿐이었다. 연초 끝에 성냥불을 가져다 대는 것도 부하의 몫이었다.
불빛이 환하게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구태여 성냥을 고집하는 모습은 까탈스러운 애연가처럼 보였다. 시커먼 눈동자와 짙은 피부 속에서 흰자위가 일시 하얗게 번들거렸다.
그는 볼이 패도록 담배를 빨았다. 니코틴을 흡입하고 연기를 뿜어내느라 만들어 낸 2초의 침묵이 기설에겐 무섭고도 무거웠다.
사내가 말했다.
“그래, 형님이라…. 듣기 좋네. 그럼 천마 형님이라고 불러 볼래?”
여상스러운 목소리에 기설은 총 맞은 사람처럼 숨을 참았다. 멍청하니 웃던 얼굴이 대번에 굳고 갈비뼈가 죄는 느낌마저 들었다.
‘천마.’
사내가 검은 남자들을 부하처럼 누리며 리무진에서 내린 순간, 기설은 ‘설마’ 했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도, ‘설마, 아니겠지’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진짜였다. 기설을 개처럼 무릎 꿇리고 그 침을 허벅다리에 묻힌 남자가 진짜, 한천마였다.
대개 ‘천마’라는 호칭은 무협 소설의 단골 소재였다. 마도魔道의 절대 강자를 지칭하는 말로, 악당 대장의 십중팔구는 천마라는 호칭을 달았다. 이곳, 대한민국 신산시에서 한천마라는 남자의 이름이 지닌 의미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처… 천마 형…님.”
기설의 잇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한천마는 대번에 짧아져 버린 담배를 집게 손에 쥐더니, 기설의 귓불에 대고 담뱃재를 툭 튕겼다. 뜨거운 불씨에 기설은 눈을 움찔거리며 이를 꽉 악물었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 보겠다고 사내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대던 발악조차 이어 갈 수가 없게 됐다. 천천히 절망으로 물드는 기설의 눈동자를 구경하며 천마는 연초를 태웠다.
기설은 생각했다.
‘좆 됐다.’
차라리 분풀이로 얻어맞고 수배 전단에 얼굴이 걸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치며 기업 사회 문제에 대해 무지한 기설조차 ‘한천마’의 이름 세 글자는 알았다. 한천마는 이 도시 신산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앞으로는 신산의 상징 SS 그룹의 대표 이사였고, 뒤로는 거대한 카지노와 도박장의 관리자였다.
우스갯소리처럼 도는 말이 있었다. 신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는 한천마가 진압하거나, 한천마가 저지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이 순간 기설은 베타인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알파나 오메가였더라면 그를 마주한 순간에 알파의 향기를 맡았을 터였다. 소문으로 듣기로 한천마는 극히 드물다는 극우성 알파여서, 페로몬의 향기가 지문 수준이라고 했다. 그 체향에 현혹되어서 목숨 걸고 충성하는 부하들로 조직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기설이 그 향을 맡을 수 있는 코를 가졌더라면,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더라면, 보스니 형님이니 하는 시답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지도 살아 보겠다고 그의 가랑이에 입을 비비는 짓거리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한천마의 돈을 떼먹으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이 도시의 규칙이고 법도이므로.
“…….”
이제 기설은 살기를 포기했다. 좆같던 인생, 마무리도 좆같구나 생각했다. 깊은 절망이 그의 의식을 흐려 놓았다. 낯짝 위로 연거푸 밀려드는 매캐한 담배 냄새에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천마는,
‘오. 갑자기 고장 났네.’
무지하게 즐거웠다.
이렇게나 기분 좋고, 재밌고, 흥겨운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지루하던 중에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기업 세계에 발을 뻗기 이전에, 한천마는 소위 말하는 뒤쪽 세계 사람이었다. 크고 작게 문제를 일으키는 깡패 조직들을 정돈하고자 천마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줬다. 억지로 와해시키고 밟아 눌러 죽이는 대신에 해야 할 일을 주고, 그로 하여금 재미와 돈을 얻게 만든 것이었다. 1년에 네 번 깔아 주는 복싱 경기도 그런 식으로 벌여 놓은 일거리 중 하나였다.
매해 여름 경기는 개중에서도 신경 쓸 가치가 있는 편이었다. 봄이나 가을 시즌에 비해 베팅금이 서너 배씩 높기 때문이었다. 해당 분기마다 한천마는 판을 꼼꼼히 살폈다. 스포츠 도박은 손님들에겐 볼거리와 즐거움을 주고 부하들에겐 용돈벌이할 기회를 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부업이었다.
그런데 금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실업 팀에서 일을 아주 개떡으로 부쳐 놨다. 2년 전에 딱 한 번, 챔피언을 이겨 놓고는 그다음 주 타이틀 매치전에 등장조차 하지 않아 실격 처리된 선수가 있었다. 그놈의 복귀전을 곽창이와 붙여 판을 짜자는 게 금강에서 내놓은 설계였다. 그런데 그 개미 새끼가 판을 망쳐 놨다. 망쳐 놓다 못해 아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앞으로 두 해는 더 짭짤한 돈을 벌어다 줄 선수, 곽창의 관자놀이에 훅 한 방을 때려 갈겨 눕혀 버렸다.
곽창은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외상성 경막하 출혈이 원흉이었다. 마지막으로 한천마가 보고를 받았을 때, 휴대폰으로 보내온 사진 속 곽창은 관자놀이가 짜부라져 있었다. 머리에 주먹이 아니라 총을 갈긴 것 같았다. 황금알 낳는 거위였는데, 배도 아니고 대가리를 따 버린 셈이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관리하던 애들이 곧장 따라붙었으니, 곧 잡혀 올 겁니다.’
제 관할도 아닌 일에 깊이 허리 숙여 사죄하는 강 실장을 쳐다보며, 한천마는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따라붙다니? 도망이라도 쳤단 말로 들리는데.’
잘잘못을 따지는 말로 오해하며 강 실장은 허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렸답니다.’
듣던 중 재밌는 소식이었다. 훅 한 방으로 챔피언을 즉사시키고는, 관리자로 붙여 둔 부하들 수십을 따돌린 복서라니. 매우 구미가 당겼다.
‘차 대기시켜. 애새끼 얼굴 좀 봐야겠네.’
어떤 간 큰 새끼가 한천마를 상대로 뒷거래 양다리를 걸친 건지, 그놈 얼굴을 꼭 보고 싶었다. 뒷구멍으로 얼마를 받아 처먹었길래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까불어 댄 건지 궁금했다. 그 개미 새끼를 직접 잡아다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배를 터뜨리고 다리를 똑똑 부러뜨린 다음, 그래도 살아 있거든 다음 분기 판에 올릴 생각이었다. 챔피언을 죽인 선수의 공개 처형을 보겠다고, 성난 관중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땡그랑땡그랑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 개미 새끼라는 놈이 야망 있고 얍삽한 쌍놈의 새끼가 아니라, 그저 빡대가리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보통 멍청한 빡대가리가 아니었다. 저한테 돈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한천마의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되게 멍청한 빡대가리였다. 게다가 아주 맛있게 생겼다.
‘이걸 어떻게 구워 먹을까.’
세 개비째 줄담배를 피우며 한천마는 기설을 구경했다. 제 가랑이 사이에 무릎 꿇고 앉은 놈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인데 아랫배가 지끈거리고 성욕이 끓었다. 시무룩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는 무쌍꺼풀 눈은 가로로 길고 큰 편이었고, 콧대는 곧고 턱까지 잘빠진 모양새였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헝클어진 짧은 머리칼이며 어수룩한 말투에는 귀염성이 있었다.
볼수록 재밌고 즐거웠다. 한천마가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설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처졌다.
‘하, 이것 봐라.’
이불에 쉬 갈긴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꼴을 보자니 주먹 하나로 사람을 쳐 죽인 새끼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퉁퉁 부은 손목과 시퍼렇다 못해 검은색으로 물든 주먹 위 멍울만이 지나간 사건을 증명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게, 알파도 오메가도 아니고 베타라….’
젖꼭지는 안 어울리게 진분홍색에 허리는 잘록한 것이, 처음 본 순간 그 골반을 비틀어지게 쥐고픈 충동을 느꼈었다. 골목길 위에 뒤집어엎어 놓고 뒷구멍에 성기를 욱여넣으면, 잘생긴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궁금했다. 어수룩한 얼굴에 멍청해 보이는 표정, 착해 보이는 눈동자와 대책 없는 성격까지, 하는 양이 꽤 귀여웠다.
한천마는 기설이 마음에 들었다. 즐거워서 웃음을 감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거듭 ‘하하’ 소리 내어 웃어 대는 통에 긴장한 부하들이 연신 어깨를 움찔거렸다. 무뚝뚝한 얼굴로 평정을 유지하는 건 ‘강명경’이라는 이름보다 입술의 흉터로 인식되는 수하, 강 실장뿐이었다.
못마땅한 눈길로 기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강 실장은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한천마에 대해 잘 아는 만큼 강 실장은 기설의 운명을 벌써 알아챈 눈치였다.
‘대표님의 새 장난감.’
굳이 분류하자면, 섹스 토이다.
한천마의 알파 성향은 그야말로 지독했다. 그는 발정 난 짐승 같은 섹스를 즐겼고, 섹스 없이는 살지 못하는 남자였다. 오죽하면 파트너 삼아 침대에 들인 오메가의 수가 살아온 밤의 수만큼 많았다. 덩치가 2미터에 육박하는 극우성 알파를 침대에서 받아 내기란 우성 오메가에게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로몬과 체향에 홀려 천마의 품으로 파고들다가도, 겁에 질리거나 상처 입은 채 도망치기 일쑤였다. 심지어 지난달에는 사고가 있었다. 그 바람에 송장 하나를 치워야 했다.
“…그래.”
무언가 결정한 듯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거뜬히 받아들일 튼튼한 섹스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렇게 하자, 기설아.”
‘기설아’ 하는 이름이 벌써부터 제 동생 부르는 양 혓바닥에 척척 붙었다.
“네, 네. 말씀하세요.”
기설은 퍽 순종적인 자세로, 풀어진 두 무릎을 똑바로 꿇었다. 다리 위에 놓인 주먹에서는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 오늘 날린 네 몫의 돈이 오천만 원이니까….”
천마가 말했고,
“아닙니다.”
기설이 반작용하듯 대답했다.
“아니라고?”
“네, 아니에요. 저는… 저는 이천만 원밖에 못 받았어요. 삼천은 중간에 떼먹힌 거니까, 그러니까, 오천만 원이 아닙니다….”
자기변호를 해 보겠다며 주절거린 기설의 말에, 천마는 새는 듯한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듣는 이의 바람대로 뱉은 말을 고쳐 주었다.
“그래, 그럼. 곽창이가 너 따먹고 죽은 목숨값이 이천만 원이다. 그치?”
기설은 두 눈을 멍하니 끔벅거렸다. 그의 머리는 아주 느리게 돌아가서, 무려 오천만 원으로 올려 쳐진 제 ‘몸값’을 구태여 이천이라고 정정을 해 버렸음을 늦게 깨달았다.
“…….”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는 애써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계산하자면 그 목숨값이 이천만 원이기는 했다. 해묵은 원한으로 눈이 돌아 기설은 주먹을 휘둘렀고, 보복을 위해 이천만 원을 날려 먹었으므로.
“그… 그게 그렇게, 되나요…. 네, 네. 맞습니다.”
“그래. 기설아. 네가 분탕질을 쳐서 내가 날린 돈이 꽤 되는데, 그중 수습이 안 되는 금액이 2억 3천이야.”
“…….”
한천마에겐 사소한 손실이었다. 신산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돈이 손금처럼 그의 손아귀 안에서 이리 갈리고 저리 갈리는 판국이니 그 돈은 아주 사소했다. 그러나 이천만 원을 벌겠다고 승부 조작에까지 응한 기설에게는 달랐다. 그에게 2억 3천만 원은 눈앞에 컴컴하게 내려앉은 좌절의 이름이었다.
“자, 그럼 기설아, 네가 곽창이 모가지 열한 개 하고도 반을 가져와야 내게 끼친 피해를 보상할 수가 있을 텐데.”
“…….”
“그 새끼는 벌써 골로 갔다, 그치?”
“…….”
“그럼 어떡해야 좋을까?”
질문에 기설은 쉽사리 대답하질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멍청했다. 지능 미달이라거나 IQ가 낮다거나 하는 뇌 기능의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배운 것이 너무 없을 뿐이었다. 중등 의무 교육을 마치는 내내 기설의 머리 안에 남은 지식이라곤 성교육 시간에 배운 바나나에 콘돔 씌우는 방법뿐이었다.
“으음….”
그래서 기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를 내며 침음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저는… 그렇게 큰돈이 없는데, 시간을 좀 주시면, 아니…, 그게, 시간을 좀 많이 주시면, 제가, 천천히… 어떻게든 갚게 해 주시면….”
기설의 반듯한 이마 위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그로서는, 당장에 눈앞의 사내가 저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생각됐다. 한편으로는 ‘두당 이천’이라며 저를 열두 명의 남자들 앞에 던져 놓을까 봐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게 빠구리를 친 값은 아닌데, 그게 아닌데….’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이야기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한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틀렸다고 지적하기가 참 애매하고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기설에게 천마는 밧줄을 내려 주었다.
“그래, 기설아. 네가 지금 나한테 피해 보상금을 줘야 하는데, 네 수중에 돈이 없다. 그치? 당장 얼마 정도 있니.”
“…오십 만원 정도 있습니다.”
“그럼 2억 2천 9백 오십만 원이 모자라네.”
“네….”
“형님이 빌려줄까?”
하얗게 표백되어 버린 머리로 기설은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골몰했다.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데, 그 돈이 자그마치 2억 3천이라는데, 빌려서라도 메꾸는 게 맞는 일 같았다.
“네. 그래 주시면….”
기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줄인 줄 알고 제 목을 매달 올가미를 움켜쥔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천마가 어디론가 손짓했다. 뒷짐을 진 채 한편에 서 있던 강 실장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는 방 한편에 벽장처럼 놓인 금고로 다가가더니, 두어 번 잠금장치를 좌우로 흔들고는 철문을 열어젖혔다. 속에 든 금색 지폐 뭉치를 턱, 턱 집어다가 종이 가방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벽돌 모양으로 묶어 놓은 5만 원권 네 뭉치와 고무줄이 감긴 봉투 두 장, 그리고 1만 원권 묶음 다섯 개를 집어넣으면 2억 2천 9백만 원이었다. 오십만 원은 평소 취급하지도 않은 탓에 지폐 낱장을 새로 세어 얹어야 했다. 그러자 직사각형 크라프트지 종이 가방이 가득 찼다.
돈 냄새 풍기는 종이 가방이 넋 빠진 사람처럼 앉은 기설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금색 지폐 위로 하얀 계약서 낱장이 연이어 내려앉았다. 품 안에 들어온 지폐 뭉치를 내려다보며 기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억 2천 9백 오십만 원의 부피는 생각보다 적었다. 갈색 쇼핑백 안에서, 피로 해소제 두 박스 정도의 크기를 차지할 따름이었다. 흰 종이로 묶어 놓은 신사임당은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얼이 빠져 버린 기설의 오른손을, 천마의 크고 다정한 손이 잡았다. 그러고는 똑딱이 볼펜 하나를 꼬옥 쥐여 주었다.
“자, 여기 주민 등록 번호, 여기 아래에 이름. 그 밑에 날짜 적고 서명해.”
기설은 무어에 홀린 사람처럼, 제 품 안에 떨어진 차용 증서를 내려다봤다. 한천마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고, 맨 아래에 거래 상대의 서명을 기다리는 빈칸이 놓여 있었다.
기설은 시키는 대로 볼펜을 움직였다. 주민 등록 번호 열세 자리를 적고, 제 이름 ‘기설’을 기입했다.
“오늘이 며칠이죠?”
“29일.”
“아,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서명란 위에 제 이름 두 글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그러자 강 실장이 낚아채듯 차용증을 앗아 갔다. 그러고는 이미 서로의 사인이 남은 서류 위에, 가장 중요한 금액 부분을 적어 넣었다.
229,5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