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0/20)

5.

사랑을 자각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신념은 자존심이라는 핑계로 꺾일 생각이 없었고, 시작을 모르는 내게 사랑이란 그저 세상 밖의 사치일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려 다짐하기보다는 세상이 내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 자리 잡힌 괴로움이 수년간 나를 가두었다. 사랑의 형태를 잊은 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원하고 갈망할 수 없다며 스스로 부정했다. 굳센 신념의 균열을, 내 세상의 규칙이 무너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지로 그를 괴롭게 했던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를 울게 하고, 밀어내고, 모른 척 돌아섰던 그 모든 날들에서 윤승원이 받았을 고통을 떠올렸다.

어린 날, 버림의 순간 받았던 고통의 양을 알면서도 나를 파괴한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그에게 같은 고통을 심어 주었다. 조금 더 먼저 알았다면 지금보다 일찍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 지금보다 나은 유년을 보냈다면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를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긴 했을까.

새벽의 바람이 서늘하게 머리를 날렸다. 발코니 손잡이에 기대어 놓던 팔을 내려놓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들어 털어 냈다. 연한 담뱃재가 보랏빛 허공에 휘돌았다. 저 멀리 낯익은 전광판이 보였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유일하게 빛을 내며 주위를 밝혔다.

전광판 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봤다. 곧잘 웃을 거 같은 입매가 굳게 다물린 채 제법 새침한 낯을 하고 있었다. 베이지색 티셔츠에 모자를 올려놓은 모습이 짓궂어 보이기도 했다. 도톰한 입술이 오므라져 멀리서 보아도 동그란 태였다.

슬리퍼 끝으로 바닥을 규칙적으로 때렸다.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어린 애인의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저렇게 무른 낯을 하고는 지독한 나를 견뎌 낸 강단이 대단했다. 저런 얼굴로 내 허리를 끌어안던 수많은 날들을 생각했다. 나는 방금의 죄책감도 잊고 불쑥 웃음이 나와 미소를 지었다.

누굴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많은 걸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나를 위협하던 감정에 잡아먹힌 이후로, 나는 그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 삶의 일부로 들여놓은 심장 같은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내 안에 들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그의 입술이 불쑥 들어오던 첫 번째 키스가 오갔던 밤, 나는 밤새 침대 주위를 돌아다니며 서성거렸다는 것이었다. 사랑에 발을 들인 줄도 모른 채, 불면증을 탓하며 설치던 내가 우스웠다.

집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씻었다. 가벼운 샤워를 마치고 나와 조도가 낮은 조명이 비추는 거실을 지났다. 어쩐지 조금 피곤한 얼굴을 쓸어 만지며 침실 문을 열었다.

낮고 노란 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예쁜 얼굴이 그림자에 반쯤 가려 잠들어 있었다. 침대 한 자리를 차지한 채 새우처럼 몸을 만 승원이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었다. 침대맡에 앉아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구경하다 팔을 밀어 넣어 동그란 머리를 받쳤다.

“……대표님.”

꿈틀거리던 눈이 뜨이고 붙어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깊게 잠겨 있음에도 청량한, 약간의 미성이 섞인 음성이 나를 잔잔히 불렀다. 내 얼굴을 들여다본 그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몸이 내게 맞붙었다.

“잠이 안 와요.”

“지금까지 잘 자 놓고.”

“계속 꿈만 꿨어요.”

“무슨 꿈.”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제 생각하는 거 같은, 그런 꿈…….”

그 순진한 말을 듣고 난 반쯤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냥 전부 다……. 저에 대한 모든 생각들.”

“좋은 겁니까.”

“꿈에선 전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서 그런 건 모르겠어요.”

잠에 조금 취한 듯한 나른한 목소리가 잠겼다 깨기를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그가 느리게 내게 말했다.

“제 생각하셨어요?”

내가 웃었다.

“숨 쉬는 내내 합니다.”

“…….”

“지금도 하고 있고.”

“…….”

“난 매 1분 1초를 윤승원 씨 생각만 하면서 사는데, 윤승원 씨는 내 꿈을 이제야 꿨습니까.”

내가 뻔뻔스레 묻자 올망졸망한 입술이 동그랗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말이라도 덧붙이려는 듯 그가 ‘그게 아니라…….’ 하고 말의 끝을 늘렸다.

“앞으로도 제 생각 더 많이 해 주세요.”

“이거보다 더하면 과부하입니다.”

“저도 대표님 꿈 더 꾸고 싶어요.”

“윤승원 씨가 내 생각을 평소에 많이 하면 되지.”

“저도 항상 해요.”

“그러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만졌다. 제 눈을 만지는 줄 알았는지 기다란 속눈썹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 검은 눈동자가 맑게 날 바라봤다.

“지금은 무슨 생각합니까. 지금 날 보고는 무슨 생각해요.”

“…….”

“많이 한다며.”

“…….”

재잘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이 없었다. 두 입술을 말아 안쪽으로 꽉 물어 버린 그가 내 옷을 갉작였다. 노랗게 그을린 조명 아래서도 붉은 기운이 감도는 두 볼이 사랑스러웠다. 미디어 어디에도 비추지 않았던 색다른 윤승원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만족감이 가슴 깊이 스몄다. 당장이라도 가슴 안쪽에 손을 넣고 주무르고 싶었다. 다리 사이를 꽉 잡고 목을 젖히는 그의 낯을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나는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소리가 작았다.

“……스.”

“뭐?”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임에도 조그마하고 낮았다. 물론 반쯤 눈치를 챈 후였다.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이마를 쓸어 넘기며 그곳에 입을 맞췄다.

“이거……요.”

“그러니까 뭔데.”

“……키스.”

“창피합니까. 그거 하나 말하는 게.”

“…….”

“우리 사이에.”

“……으, 흐읍.”

무언가 말하려는 듯 그가 입술을 뻐끔거리는 사이 아랫입술로 돌진했다. 입술을 머금고 들어 올리니 동그란 턱이 저항 없이 위로 따라왔다. 웅얼거리던 말과는 다르게 정말 갈증이라도 느낀 것인지 분홍빛 혀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혀로 감싸 굴리면 달콤한 내음이 목구멍까지 찔렀고, 다시 놓아 입술을 머금으면 부드러운 살결이 이 사이를 갈랐다. 그의 목과 가슴을 문지르며 눅눅하고 진한 키스를 이어 나갔다. 옅은 신음이 빗발치듯 이어졌다. 수 분 이상 놔주지 않고 붙잡았다. 전부 닳을 때까지, 그러나 앞으로 맛볼 여분은 조금 남겨 둔다는 기분으로 그를 핥고 삼켰다.

그가 원하던 것을 마친 후에도 그는 숨만 색색 내쉬었다. 그를 안쪽 깊이 안고 등을 쓸며 당겼다. 힘껏 들어오는 몸집에 전보다 살이 붙어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한 존재를 끌어안고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내 등을 함께 안은 채 여전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침대 위에서조차 놓고 싶지 않았다. 절대 풀리지 않는 수갑이 있다면 그의 팔목에 걸어 채우고 싶었다. 그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발찌나 목걸이라도 달아 줄을 잡고 싶었다. 내 옆에 끼워 평생을 손에 쥐고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까.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생각보다 더 추악하고, 볼품없고, 추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는 나를 어디까지 사랑하고 있을까. 내 존재를 포함한 나의 모든 이성과 감정, 그것들을 모두 감싸 안고도 나란 것에게 안겨 있는 다정함이 좋았다.

“사랑해.”

안겨 있던 품 안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흘린 듯이 뱉은 말을 그에게 그대로 남긴 채 무심하게 바라봤다. 진심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다시 해 줘요.”

나는 재차 말했다.

“사랑해, 윤승원.”

맑게 미소 짓는 그와 입술을 붙였다. 뜨거운 숨결을 서로에게 전달하며 파고들었다. 내 옆에 있는 한, 평생 질리지 않을 따스한 체온을 끌어안고 끝없이 속삭였다. 불러도 아쉬울 사랑이란 단어를.

[러브 인 도어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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